집필자 : 성수영 / 한국경제신문 기자 등록일: 2025-12-17
경주는 거대한 박물관 같은 도시다. 이토록 많은 유물들이 현대에도 끊임없이 새롭게 발굴되는 도시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국립경주박물관이 국내에서 가장 방문객이 많은 박물관 중 하나인 이유다. 그래서인지 경주의 이미지는 ‘미술관’보다는 ‘박물관’에 가깝다. 동시대 미술의 현장으로서 존재감은 희미했다는 뜻이다. 지난 10~11월 경주를 대표하는 두 미술관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기념 전시는 이런 통념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재)예술경영지원센터가 주최한 우양미술관의 《백남준 : 휴머니티 인 더 서키츠(Humanity in the Circuits)》와 솔거미술관의 《신라한향:신라에서 펼쳐지는 한국의 향기》이 그 중심이다. 전자가 한국 출신 현대미술 ‘슈퍼스타’를 내세워 보편성을 획득했다면, 후자는 지역 색채가 짙은 작품으로 경주라는 도시의 특수성과 맥락을 강조한 전시다.
I. 우양미술관, 백남준과 아모아코 보아포

사진 1. 우양미술관 《Nam June Paik : Humanity in the Circuits》 전시전경
백남준은 한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현대미술가로 꼽힌다. 그러나 명성에 비해 대중적 이해도는 낮다. 고화질 디스플레이에 익숙한 현대인의 눈에 그의 낡은 브라운관 TV는 자칫 고물처럼 보이기 십상인 탓이다.
백남준이라는 작가의 핵심적인 매력이 조형미보다 ‘예지력’에 있다는 사실을 알면 이런 오해는 풀린다. 백남준 스스로 말했듯 그는 ‘미래에서 온 무당’과 다름없는 존재였다. 오늘날 인터넷과 동일한 ‘전자초고속도로’의 개념, 누구나 화면을 조작해 자신을 표현한다는 발상 등을 일찌감치 떠올려 작품으로 만든 게 백남준이다. 그가 상상한 미래에 사는 우리에게 그 원형(原形)인 작품들은 투박해 보일 수밖에 없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비행기 스케치’가 실제 항공기보다 조악해 보일 수는 있어도, 그 가치는 비교할 수 없이 높은 것과 같은 이치다.
우양미술관은 이번 전시에서 백남준의 조각과 판화 등 12점을 선보였다. 이곳은 1991년 개관한 국내 최초의 사립 현대미술관인 경주 아트선재미술관의 후신이다. 최근 리모델링을 마치고 재개관했다.

사진 2. 백남준, <고대 기마인상>, 1991, Mixed media, 340×192×107cm
서두를 장식한 건 <고대 기마인상>이다. 교과서 표지로 익숙한 신라 유물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를 모티프로 했다. TV 로봇이 말을 탄 형상은 1500년 전 서라벌과 전 세계가 실시간으로 연결되는 현대의 조우를 상징한다. APEC의 의제인 ‘연결·혁신·번영’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셈이다.
이처럼 전시에는 백남준이 기술을 통해 어떻게 ‘연결’과 ‘화합’을 모색했는지 증명하는 작품들이 여럿 나왔다. 1986년 위성 중계 프로젝트를 기록한 <바이바이 키플링>이 대표적이다. 백남준은 “동양은 동양이고 서양은 서양일 뿐, 둘은 결코 만날 수 없다”고 했던 영국 소설가 러디어드 키플링의 이분법적 세계관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뉴욕, 서울, 도쿄를 위성으로 실시간 연결한 화면 속에서 키스 해링의 드로잉과 한국의 전통 북춤이 교차한다. 기술을 매개로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선 동서양의 화합을 40년 전에 이미 구현해 낸 셈이다.
기술 속에 동양적 정신을 이식하려는 시도는 <어질인(仁)>과 <마음심(心)>에서 더욱 구체화된다. 두 작품 모두 11대의 모니터를 활용했다. <어질인(仁)>은 모니터 주변에 한자 초서체를 연상시키는 붓질을 더해 공동체의 조화라는 유교적 덕목을 시각화했다. <마음심(心)>은 검은 배경 위 형형색색의 기호와 유동적으로 배열된 모니터를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내면의 흐름과 무의식을 표현했다. 차가운 전자 회로에 인간의 윤리와 정신성을 불어넣으려는 ‘백남준식 인본주의’다.
백남준의 개인적 기억과 역사를 다룬 <금강산 여행기념>도 눈길을 끈다. 1935년 가족과 함께 금강산을 방문했던 유년의 기억을 모티프로 한 작품이다. 제단(祭壇) 형식의 구조물 속에 1935년 당시 부친 백낙승과 찍은 사진, 군복 천, TV 모니터를 결합했다. 분단으로 인해 다시는 갈 수 없는 금강산을 전자적 이미지를 통해 재구성하며, 역사적 단절을 넘어보려는 작가의 의지가 읽힌다.


사진 3~4. 백남준, <나의 파우스트-경제학>, 1992, MIxed media, 311×192×107cm(좌) / 백남준, <나의 파우스트-영혼성>, 1992, Mixed media, 311×192×107cm(우)
이번 전시에 나온 특별한 작품으로는 백남준의 대표 연작 <나의 파우스트> 중 ‘경제학’과 ‘영혼성’을 꼽을 수 있다. 괴테의 희곡 「파우스트」에서 영감을 받아 현대 문명에 대한 백남준의 생각을 분야별로 표현한 작품이다. 고딕 성당 같은 구조물과 지폐, 동전 등으로 구성된 경제학은 자본이 신과 같은 절대적 가치가 됐다는 사실을 표현한 것이다. 화려한 구조물과 여러 스크린을 통해 종교적 상징을 보여주는 영혼성은 현대 사회에서도 인간의 정신과 영혼이 지속될 수 있는지 묻는 작품이다. 이 작품들은 1992년 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된 후 줄곧 수장고에 보관돼 있다가 대대적인 수리·복원을 거쳐 30여 년 만에 세상의 빛을 봤다.

사진 5. 백남준, <전자초고속도로-1929 포드>, 1993, Mixed media, 366×160×213cm
전시장에는 인터넷 시대를 예견한 <전자초고속도로-1929 포드>도 놓였다. 1929년식 포드 자동차 위에 나무로 만든 전통 가마를 배치하고 ‘전자초고속도로’라는 글씨를 붙였다. 이지우 우양미술관 학예연구사는 “백남준은 세계가 예술로 하나 될 수 있다고 봤다”며 “전통과 현대, 동서양,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며 하나 되는 백남준 특유의 시각언어가 드러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우양미술관에서는 가나 출신 작가 아모아코 보아포의 아시아 첫 미술관 개인전 <나는 여기 와본 적이 있어(I have been here before)>가 함께 열렸다. 전시는 붓 대신 손가락으로 안료를 펴 바르는 보아포 고유의 ‘핑거 페인팅’ 기법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보아포는 의도적으로 비틀린 신체와 강렬한 보색 대비를 통해 흑인 디아스포라의 정체성과 ‘신체 정치(Body Politics)’를 탐구한다. 백남준 전시가 기술을 통한 연대를 모색했다면, 보아포는 물리적 거리를 넘어 정서적 연대를 추구하며 APEC의 의미를 현대미술의 언어로 확장했다.
Ⅱ. 솔거미술관 《신라한향 : 신라에서 펼쳐지는 한국의 향기》

사진 6. 솔거미술관 《신라한향: 신라에서 펼쳐지는 한국의 향기》
우양미술관이 백남준을 통해 경주를 세계적 보편성과 연결했다면, 솔거미술관의 기획전 《신라한향(新羅韓香)》은 경주의 지역성을 깊이 파고들어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데 주력했다. 내년 4월 26일까지 이어지는 이 전시는 ‘신라에서 펼쳐지는 한국의 향기’를 주제로 수묵화, 불교미술, 한지 회화, 유리공예 등 서로 다른 매체를 다루는 4인의 작가(박대성, 송천, 김민, 박선민)를 소개했다.

사진 7. 박대성, <코리아판타지>, 2023, 종이에 먹, 500×1,500cm
전시의 무게중심은 소산 박대성이 잡았다. 그가 내놓은 신작 <코리아 판타지>는 가로 15m, 세로 5m에 달하는 대작이다. 7장의 종이를 이어 붙인 거대한 화면에는 한반도의 지리적·문화적 상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백두산 천지와 금강산, 한라산 백록담 같은 자연 경관 사이에 반구대 암각화, 고구려 고분벽화, 훈민정음 등 역사적 아이콘을 병치했다. 사실적인 풍경 묘사보다는 선조들이 꿈꿨던 이상향인 ‘금수강산’의 개념을 시각적으로 재구성한 작업이다.
맞은편에 걸린 5m 높이의 <반가사유상>은 작가의 상상력이 개입된 결과물이다. 모델이 된 경북대박물관 소장 ‘봉화 북지리 석조반가상’은 현재 하반신만 남은 상태다. 박대성은 유실된 상반신을 수묵으로 복원해 냈다. 깨진 돌덩이에서 온전한 미소를 읽어내려 한 작가의 시도는 과거의 유물에 현대의 숨을 불어넣는다는 전시의 기획 의도와 맞닿아 있다.
유리공예가 박선민은 신라의 국제성을 상징하는 소재인 ‘유리’에 주목했다. 신라 고분에서는 실크로드를 통해 유입된 로만글라스가 다수 출토된다. 박선민의 설치작 <시간의 연결성>은 폐유리병을 재가공해 만든 250개의 유리병을 탑처럼 쌓아 올린 작품이다. 작가는 각기 다른 모양과 빛깔을 지닌 유리병에 빛을 투과시키고, 맞은편에 은경(거울)을 배치했다. 관람객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유리탑을 동시에 응시하게 된다. 이는 과거(신라의 유리)와 현재(폐유리병), 그리고 관람객을 빛과 반영으로 연결하려는 시도다.


사진 8~9. 박선민, <시간의 연결성>, 2025, 재생 유리기물 250점, 조명용 아크릴 좌대, 230×170×170cm(좌) / 송천스님 전시전경(우)
불화장(佛畵匠) 송천 스님은 종교 간의 경계를 넘는 도상을 선보였다. <관음과 마리아-진리는 우리 곁을 떠난 적이 없다>는 제목 그대로 불교의 관음보살과 가톨릭의 성모 마리아를 나란히 배치한 작품이다. 종교적 외피는 다르지만, 대중을 위로하는 ‘모성’이라는 본질은 같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함께 전시된 <만파식적>과 <바이올린> 역시 동서양 악기의 형태적 대조를 통해 이질적인 문화 간의 소통과 화해를 시각화했다.

사진 10. 김민, 왼쪽부터 <석가여래 상주설법탑>, <적연명>, <다보여래 상주증명탑>
김민은 전통 재료를 현대적 조형 언어로 풀어냈다. <적연명(寂然明)>은 전기석(투어말린)을 갈아 만든 검은 바탕 위에 금박과 은박으로 석굴암 본존불, 다보탑, 석가탑을 그린 작품이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스스로 빛을 내는 듯 한 금·은의 색채 대비는 종교적 염원을 형상화한다. 특히 전시장 바닥에 물을 담은 그릇(물확)을 설치해 그림이 물에 비치도록 연출했는데, 이는 실재와 허상, 현상과 본질의 관계를 묻는 장치다. 전시는 이 같은 작품들을 통해 ‘신라’라는 오래된 텍스트가 얼마든지 현대적이고 새로운 맥락으로 변주될 수 있다는 점, 경주가 유물과 동시대 예술이 함께 숨 쉬는 현장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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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 한국경제신문 기자
한국경제신문 문화부 기자. 사회부와 경제부를 거쳐 전시와 미술 시장, 문화유산을 취재하고 있다. 칼럼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을 연재하며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 세계를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글을 쓴다. 감상이나 평가보다는 작품의 맥락과 전시 의도, 객관적 사실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고 기록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