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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진동하는 생존

집필자 : 데프네 아야스(Defne Ayas) / 퍼포마 선임 큐레이터, 네델란드 반 아베 미술관 디렉터 등록일: 2025-12-22



생태 여성주의 시인이자 고고학자인 허수경의 글은, 우리가 이미 지나왔다고 믿는 시대의 잔해처럼 오늘날까지도 우리를 계속해서 사로잡는다. 그녀의 작품 <빙하기의 역>에서, 시간은 더이상 흐르지 않고 굳어버린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과거와 미래가 함께 머물며, 눈보라 속에서 '믿을 수 없는 악수'를 나눈다. 이는 공통적인 시간의 맥락을 공유하지 않은 존재들 사이에서도 어쩔 수 없이 관계가 맺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빙하 같은 동시성 속에서 전소정 작가의 <구미호하기>가 모습을 드러낸다. 허수경의 선형성 거부는 단순히 주제를 언급하는 차원을 넘어, 전소정이 소리, 신화 만들기, 디아스포라 그리고 생존을 사유하는 방법론적 틀을 제공한다. 

그렇다면 전소정에게 ‘예술적’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매체도 아니고, 매체들의 집합체도 아니다. 오히려 진동의 방식 즉, 퍼포먼스가 스스로를 끊임없이 재구성하며 생기를 유지하는 재생적 장이 되는 존재-미학적 생태이다. 음향 작업은 단순한 배경음이 아니다. 이는 민족과 풍토에 대한 기억 그리고 반항과 불복종으로 가득하며, 변혁의 잠재력으로 충만한 반항적 존재이다. <구미호하기>는 이러한 요소들을 비선형적 오페라 형식으로 축적하여, 역사가 발전하지 않는 상황에서 서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요구를 거한다. 


사진 1. 전소정, <구미호하기>, 2025. Photo  by Masao Katagami. Image courtesy of Asia Society 

그의 탐구 중심에는 동아시아 설화에 등장하는 꼬리가 아홉 개인 여우, 구미호가 있다. 구미호는 오랫동안 현혹하는 존재이자 위협, 혹은 과한 여성성으로 규정되어 왔다. 작가는 여우를 민속적인 대상이 아니라, 지리적-존재론적 매개로 접근한다. 구미호는 생명과 비생명, 인간과 비인간, 개인과 국가가 불안정하게 만나는 버려진 지대를 살아가는 모델이 된다. 주류 담론에의해 다루기 힘들고 기만적인 존재로 규정되어 온 여우는 오히려 적응력과 유동성, 그리고 세상의 요구에 따라 형태를 바꿀 권리라는 인내의 원리를 드러낸다. 이러한 다중적 정체성은 식민 지배, 반복된 강제 이주, 그리고 소련 및 탈소련 통치의 억압 속에서 살아남은 한민족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경험을 반영한다. 

근동지역 문명과 실크로드 이동 경로에 대한 전소정의 관심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소련 극동지역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한다. 이는 제국주의 말기 인종 청소를 상징하는 전형적 순간이다. 그러나 국가의 말살 시도에도 불구하고 고려인의 문화 양식은 끈질기게 지속되었다. 1932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설립된 이후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이전한 고려극장은 이러한 생존의 살아있는 기록보관소이며, 공연을 통한 안식처이자 기억이 굳어지는 대신 재조합될 수 있는 시공간으로 남아 있다. 작가는 이곳에서 제국이 가하는 소멸의 논리를 거부하는 문화적 끈기를 지닌 공동체를 만난다. 

이 비유는 명확해진다. 마치 구미호처럼, 고려인들은 분열된 이념과 풍토, 불안정한 지정학적 환경 속에서도 스스로를 재창조하는 윤리를 실천해 왔다. 전소정은 김 림마, 변 예카테리나, 유게이 앙겔리나 등 여러 세대에 걸친 고려극장 예술가들과 협업하여 모계 중심의 전승 흐름을 전면에 드러낸다. 그들의 존재는 선조의 역사와 상상 속의 미래, 실제 경험과 꾸며낸 이야기들을 이어주는 연결 조직이 된다.



사진 2. 전소정, <구미호하기>, 2025. Photo  by Masao Katagami. Image courtesy of Asia Society 

공연 속에서 이러한 역사들은 ‘사운드 고고학자’라는 인물을 통해 드러난다. 그는 퇴적물이 아니라 주파수를 발굴하며, 사라진 목소리와 풍토, 시간성을 다시 조립한다. 그들은 일종의 음향적 실크로드를 형성하는 다양한 음악가들-소리꾼, 소프라노, 생황, 북한 가야금, 테레민, 첼로, 타악기, 돔브라, 지휘자 등-과 함께 등장한다. 판소리는 작품이 한국적 서사에 기반하도록 하지만, 다양한 악기들은 그 장을 유라시아적 감각으로 확장하여 민족 유산이 영토적으로 확장하려는 동력을 약화시킨다. 이 앙상블은 단순히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형태를 바꾸며 재구성한다. 기차와 바람, 국경, 기록되지 않은 이주로 이루어진 진동하는 지형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작품 전반에는 깊은 연민이 흐른다. 고려극장의 여성들과 생존을 위한 근원적 양식으로서의 젠더 유동성에 대한 헌신이 담겨 있다. 작가는 전환 과정에 개입하는 매개체로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현재와 사유하는 대화로 기록들을 이끌어낸다. 각각의 변신은 여우의 술수처럼 유연하고 기묘하며, 가늠하기 어렵다. 이미지가 다시 조립된다. 공식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은 역사들이 마치, 아카이브 자체가 기억해낸 듯 모습을 드러낸다. 이러한 흐름 사이로 새로운 가능성이 흘러나와, 이주가 어김없이 만들어내는 공백 속에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신화, 이동, 그리고 미래가 겹겹이 쌓인 구성은 전소정의 더 큰 주제와 맞닿아 있다. 즉, 실크로드는 인지적 사고의 도구이자, 파편화된 지형 속에서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정치적 은유이다. 

<구미호하기>는 고고학, 기술, 식민주의, 페미니즘의 사변적 글쓰기를 넘나들며, “아시아성”을 범주가 아닌 방법론으로 제안한다. 그것은 가소성과 이동성을 바탕으로, 세계적 질서의 압박 속에서도 스스로를 재구성할 수 있는 역량을 뜻한다. 작가는 김혜순의 시집 <여자짐승아시아하기>를 지목하며 말한다:

우리가 제일 모르는 것, 우리가 아시아인이라는 것

우리가 제일 모르는 것, 우리가 짐승이라는 것

우리가 제일 모르는 것, 우리가 끝끝내 여자라는 것. 

이 구절들은 국가, 인종, 혹은 성별과 같은 분류로는 규정할 수 없는 존재 양상을 드러낸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따라 이주한 한민족도 유사한 논리를 따랐다. 그들은 뿌리째 뽑혔지만 다시 뿌리를 내리고, 거의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으면서 많은 것을 요구하는 환경에 스스로를 맞추어 나갔다.


사진 3. 전소정, <구미호하기>, 2025. Photo  by Masao Katagami. Image courtesy of Asia Society 

전소정의 프로젝트는 최근 한국에서의 산불과 정치적 불안 속에 구체화 되었는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는 현실 자체가 비선형적이고 불확실하며 파편화된 것처럼 느껴진다. 신화는 현실을 피하는 수단이 아니라, 현재를 소화해 내기 위한 대안적 구조이다. 오랫동안 현혹하는 존재로 여겨진 구미호는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는 함정 같은 환경에서 살아남은 존재로 다시 등장한다. 작가가 말하듯, 분열되고 흩어지는 것 또한 생존의 방식이다. 불안정성은 존재를 생성하는 조건이다. 

퍼포마(Performa)와의 협력이 이러한 변화를 가속화했다. 퍼포먼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알려진 퍼포마는 전소정에게 비디오, 음악, 스토리텔링 등 다감각적 작업을 담을 수 있는 틀을 제공했다. 이러한 과정의 변화가 주는 강렬함은 작가의 작품 세계를 재편했고, 그의 예술적 여정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구미호하기>는 유라시아의 겹겹이 쌓인 시간, 빙하기 퇴적층, 소련 철도, 유목민의 이동 경로, 여성들의 사변적 글쓰기, 사람과 씨앗의 이동 속으로 우리를 이끈다. 구미호는 상징이 아니라 목격자로 또, 얽히고설킨 관계에 주어진 의무의 촘촘한 연결망 속에서 능동적으로 작용하는 존재로 이 지역을 누빈다. 작가는 소리, 신화, 아카이브와 퍼포먼스를 통해 형태를 바꾸는 것이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정치적 실천이며, 세계를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가는 방식임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카자흐스탄과 뉴욕 아시아 소사이어티에서 직관, 집단 노동, 초국적 연대를 통해 만들어졌으며, 최소한의 물적 자원으로 최대의 상상력을 발휘해 완성되었다. 뉴욕 공연은 세상이 자본에 의해서가 아니라 소멸을 거부하는 공동체의 끈질긴 창의성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장이 되었다. 

전소정은 여러 시대가 중첩되고, 있을 법하지 않은 만남과 빙하기 같은 긴 시간 속에서도 서로를 지지하는 악수를 나누는 시공간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격동하는 현시대에 구미호는 우리의 지리-존재론적 조건에 중요한 교훈을 제시한다. 즉, 변화란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재창조하는 것이다. 


사진 4~5. <구미호하기>, 2025. Photo  by Masao Katagami. Image courtesy of Asia Society 



#전소정 #구미호하기

데프네 아야스

소속 | 퍼포마 선임 큐레이터, 네델란드 반 아베 미술관 디렉터

다프네 아야스(Defne Ayas, 1976년생)는 예술가들과의 연대를 구축하고 문화 플랫폼을 재구상하는데 전념하는 큐레이터이다. 그는 예술가들이 현실과 정치, 그리고 표현의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을지를 탐구한다. 아야스는 로테르담의 현대미술관 멜리(Melly, 구 Witte de With)를 비롯해 전 세계 예술 기관과 플랫폼을 이끌어 나가며, 공동 설립과 자문을 해왔다. 현재 그는 퍼포마의 전문 큐레이터(Curator-at-Large, 2005년 창립 큐레이터 출신)로 활동하고 있으며, 2025년 가을에는 네덜란드 에이트호벤의 반 아베 미술관(Van Abbemuseum)의 디렉터가 되었다. 그는 제56회 베니스 비엔날레 터키관에서 사르키스(Sarkis)의 ‘Respiro’를 전시했으며, 제13회 광주 비엔날레–Minds Rising, Spirit Tuning, 제6회 모스크바 비엔날레–Acting in a Center in the City in the Heart of the Island of Eurasia 등 주요 비엔날레의 공동 큐레이터로 활동하였다. 또한, 세상을 떠난 니리 멜코니안(Neery Melkonian)과 함께 ‘Blind Dates’의 창립 큐레이터이기도 하다. 이 프로젝트는 한때 오스만 제국(1299–1922)의 다채로운 지형을 형성했던 민족, 장소, 문화의 흔적을 탐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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