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고원석 / 라인문화재단 디렉터 등록일: 2025-09-19
2024-2025년 국내 주요 미술관 전시 분석과 미술계의 시대 대응에 관한 원고 요청에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 시기가 미술 현장의 스펙터클을 압도하는 정치×사회적 혼란기였다는 것이다. 물론 현실이 예술보다 더 극적이고 예측 불가하다는 점은 근현대를 관통해온 한국사회의 특징이다. 초현실에 가까울 정도의 리얼리즘을 기반으로 하는 K-콘텐츠가 세계적인 열광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그런 특수성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이 시기 한국 사회는 유독 더 혼란스러웠다. 물론 그 중심엔 의료대란이나 계엄선포, 대통령 탄핵과 구속, 갑작스러운 대선까지 이어지는 정치적 혼란이 있을 것이다. 그 외에 ‘초고령 사회’로의 진입과 세계 최하위인 출산율, 지방소멸의 위기까지 사회적으로도 뜨거운 이슈들이 차고 넘쳤다. 예술계 또한 한국 문학의 노벨상 수상이나 한국 대중문화의 글로벌 팬덤이 더 가시화되는 등의 빅뉴스들도 많았다.
이러한 환경에서 미술은, 그리고 전시는 어떻게 존재했을까? 물론 미술관 전시는 이러한 사건들이 벌어지기 최소 1, 2년 전에 구상하고 준비한 것이기에 이러한 현실 사건들과는 어느 정도 시차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벌어진 여러 혼란이나 사건이 갑자기 튀어나왔다고 할 수만도 없을 터이다. 그러므로 이 시기 한국 미술관의 전시들을 ‘혼란의 전조가 깔리던 시기에 준비되어 본격적인 혼란의 시기에 펼쳐진 전시들’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배경 맥락을 감안하여 국내 주요 미술관들의 전시에 공통적으로 등장한 키워드 몇 개를 살펴보려고 한다.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설치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2024
#생태적 전환과 행성적 상상력
이 시기 국내 미술관 전시들 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키워드는 ‘생태적 전환과 행성적 상상력’이다. 환경과 생태에 대한 윤리적이고 책임 있는 태도는 국제미술계의 보편적 인식이었지만 한국 미술계는 이러한 담론을 선도적으로 끌고 가지 못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단순히 환경보호의식을 환기하는 수준을 넘어 인간과 환경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설정하는 생태적 전환과 그러한 상상력을 행성적인 차원으로 확장시키려는 시도가 눈에 먼저 들어온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는 조경의 차원을 넘어 한국의 토착 환경을 생태적 실천으로 확장 시킨 작가의 면모를 조명하는 전시였다. 최근 개막한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의 《다시, 지구: 다른 감각으로 응답하기》는 지구를 기존의 인간중심적 감각이 아닌 방식으로 인식하고 새로운 관계 맺기를 제안하는 사례다. 경기도미술관의 《우리가, 바다》는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아 사회적 재난의 문제를 해양 생태계와 연결시켰으며, 전북도립미술관의 《버릴 것 없는 전시》는 폐기물 문제를, 전시 제목 자체가 파리 협정에서 제시된 지구 평균기온 상승의 마지노선을 의미하는 구하우스 미술관의 《기후 위기의 경계 1.5℃》와 아트선재센터의 《언두 플래닛: 기억 (비)물질 흐름》은 기후 변화와 생태계의 문제를 다뤘다. 청주시립미술관 분관 대청호미술관에서 연례적으로 개최되는 대청호 환경미술제의 2025년 전시인 《자연스럽지 않다면》도 점진적 환경파괴와 재난 상황을 염두에 둔 사회적 경각심을 전면에 내세웠다. 서울시립미술관이 2025년 전시 의제로 채택한 '행성' 또한 인간중심주의를 탈피하고 비인간 존재들의 행위성, 주체성을 인정하는 행성적 사유를 기관 차원에서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접속하는 몸: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 설치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2024 (좌) / 《김인순 컬렉션: 일어서는 삶》 설치 전경, 서울시립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2024 (우)
#여성과 몸
국내외를 막론하고 최근 미술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주제 중 하나인 '여성과 몸'은 2024~5년 한국 미술계에서 그 어느 때 보다 많이 주목했던 주제 중 하나다. 특히 남성 중심의 역사기술에서 소외되었던 여성의 서사를 복원하고, 더 나아가 '정상성'의 범주에서 벗어난 다양한 몸의 경험을 포용하면서 돌봄, 연대, 상호의존성과 같은 가치로 확장시키는 흐름이 눈에 띈다. 국립현대미술관 기획전 《접속하는 몸: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은 국가와 세대를 넘어 아시아 여성 작가들이 공유하는 신체적, 사회적 경험을 ‘몸’과 '접속'이라는 키워드로 연결하며 국가를 초월한 여성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같은 미술관에서 열린 《기울인 몸들: 서로의 취약함이 만날 때》는 몸에 대한 사유를 더욱 확장시켜 장애, 질병, 노화 등 몸과 관련된 '취약함'을 결핍이 아닌 상호의존적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 재해석했다. 그 외에도 서울시립미술관 상설전으로 개최된 《김인순 컬렉션: 일어서는 삶》, 부산현대미술관의 《힐마 아프 클린트: 적절한 소환》, 성곡미술관의 《로즈마리 트로켈: 드로잉, 오브제, 비디오》, 호암미술관의 《루이즈 부르주아: 덧없고 영원한》, 리움미술관의 《이불: 1998년 이후》 등은 신체와 정체성에 대한 탐구를 평생의 화두로 삼아온 세계적인 여성 거장들의 작업을 조명하는 전시들이다. 이러한 전시들은 몸이 단순한 생물학적 실체를 넘어 사회적 억압이 각인되는 동시에 저항과 해방이 시작되는 가장 정치적인 장소임을 보여준다.

《그림이라는 별세계 – 이건희컬렉션과 함께》 설치 전경,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2025
#역사의 현재적 소환
이 시기 한국 미술계의 또 다른 두드러진 특징은 '역사의 현재적 소환'이다. 화제를 불러왔던 이건희 컬렉션의 기증 이후 미술관 소장품과 자료들은 미술사적 연구의 차원을 넘어 시의적 컨텐츠인 동시에 역사 재해석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과거 ‘신소장품전’과 같은 류의 패턴적 연례전으로 개최되던 소장품전은 이제 다양한 각도와 맥락으로 소장품을 재조명하는 기획전들로 변모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가변하는 소장품》은 소장품이 이미 기술된 역사의 일부가 아니라 시대와 해석의 관점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실체라는 동시대적 흐름을 기반으로 진행된 전시다. 부산현대미술관의 ‘소장품 섬’ 프로젝트 또한 미술관의 대표적 소장품을 상징적 면모로 활용하는 노력의 일환이다. 2021년 이후 전국적으로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이건희 컬렉션 순회전은 현재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의 《그림이라는 별세계 - 이건희컬렉션과 한국근현대작가》전시를 통해 한국 근현대미술의 정전(canon)을 일별할 수 있는 기회로 여전히 존재했다.
경남도립미술관의 《도립미술관 20년: 어제의 대화를 이어갑니다》나 대구미술관의 《대구포럼IV 1980년대 대구미술 형상의 소환》, 광주시립미술관의 《공명-기억과 연결된 현재》이나 전남도립미술관의 《오지호와 인상주의, 빛의 악동에서 색채로》과 같은 전시들은 기관 스스로의 역사를 기록하거나 미술관이 딛고 서 있는 지역의 미술사를 심도 있게 파고들며 거대 서사에 가려졌던 미시사를 복원하는 역할을 지향했다.


《니콜라스 파티 (Nicolas Party): DUST》 설치 전경, 호암미술관 Ⓒ호암미술관 2024 (좌) / 2024 해외교류전 《와엘 샤키(Wael Shawky)》, 대구미술관 Ⓒ대구미술관 2024 (우)
#늘어가는 동시대 글로벌 거장전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최근 ‘늘어가는 동시대 글로벌 거장전’들이다. 이 시기 한국의 여러 미술관을 거쳐간 동시대 거장들은 뮤지엄 산의 우고 론디노네, 서울시립미술관의 노만 포스터, 솔올 미술관의 아그네스 마틴, 송은의 나탈리 뒤버그, 아트선재센터의 호추니엔, 호암미술관의 니콜라스 파티와 루이즈 부르주아, 대구미술관의 와엘 샤키와 션 스컬리, 리움미술관의 피에르 위그, 푸투라 서울의 앤소니 맥콜, 부산현대미술관의 힐마 아프 클린트,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의 마크 브래드포드, 그리고 무려 56만여명이 다녀갔다는 국립현대미술관의 론 뮤익 등이 있다. DDP의 까르띠에 컬렉션, 송은의 피노 컬렉션 전시 등도 개인전은 아니지만 비슷한 성격의 전시들이다.
이들은 진입장벽이 비교적 높은 현대미술계에 새로운 대중성과 접근용이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최근 국제성이 강화되고 눈높이가 부쩍 높아진 국내 미술관람객의 관람수요를 반영하고 있다. 특히 주목할만한 부분은 과거의 해외 거장전이 다소 일방적인 방식으로 서구 미술사를 소개하고 전수하는 성격이 강했다면, 이들 전시는 미술관의 동시대적 정체성이나 한국적 시각에서의 담론을 염두에 둔 선택의 측면이 더 강하다는 점이다. 반면 상대적으로 위축되는 국내 작가 조명의 입지나 거대자본 투입으로 인한 승자독식의 구조 심화 등은 염려가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소속 | 라인문화재단 디렉터
고원석은 예술경영학을 전공했고 대안공간 풀, 공간화랑, 아르코미술관, 베이징 아트미아재단,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등에서 전시나 프로그램을 기획했고,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실장과 서울시립미술관 전시교육과장 등으로 일했다. 동시대의 다양한 문화지형도에서 미술관이 수행할 수 있는 미래적 역할과 사회적 기여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 현재 라인문화재단 디렉터로 근무하며 서울시내에서 새로운 미술관 건립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