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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세계 : 방혜자방혜자 작가의
대표작을 소개합니다.
EP.1
방혜자 작가(1937년생)는 1961년 프랑스로 건너간 이래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적인 정서를 토대로 서구의 기법과 사조들을 체득하고 자신만의 실험정신과 조형언어로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 왔다. 특히 빛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우주와 생명, 인간의 내면에 대한 탐구를 작품으로 구현한 화가로 평가받는다
1961년 서울대 미술대학을 졸업한 방혜자 작가는 서울 국립도서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작품 판매 수익금으로 여비를 마련해 프랑스 파리로 향했다. 유학시절 다양한 미술 사조를 경험하면서도 자신의 미술에 대한 성찰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63년 프랑스의 미술사가이자 평론가인 피에르 쿠르티옹과 교유하기 시작했고 그의 도움 등으로 1967년 파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방혜자 저서 중 일부 모음

경향신문 논설위원 당시 소설가 김은국 작가와 대화하는 모습

방혜 서재 모습
1968년 한국에 잠시 귀국했으나 1976년까지 체류하게 되었다. 이 시기 그는 전통 한지를 재발견하게 되었고 1971년부터 한지 콜라주 실험을 시도했다. 이와 함께 우주와 인간의 문제를 탐구하면서 이를 자신의 창작에 적극 구현하고자 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76년 〈우주의 노래〉를 제작했고 같은 해 프랑스로 다시 이주했다.
프랑스로 돌아간 방혜자는 ‘우주, 생명 그리고 빛’이라는 문제의식에 더욱 깊이 천착해나갔다. 1980년대 후반 ‘우주 시리즈’를, 1990년대 중반 ‘생명 시리즈’를 그리기 시작했다. 1996년 프랑스 남부 루씨용 지역의 황토를 발견하고 그것을 안료로 사용했다. 흙을 통해 자연의 빛과 원초적 생명력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체득하는 과정이었다. 또한 한지와 무직천의 특성을 적극 활용했다.
방혜자 작가는 2000년 경기도 광주시의 영은미술관 경안창작스튜디오에 입주했다. 이후 매년 한 차례 영은미술관을 찾아 머물며 창작을 해오고 있다. 하지만 2020년엔 코로나19로 인해 한국을 찾지 못했다.
방혜자 작가의 미술은 ‘빛-우주-생명’으로 요약된다. 그는 빛, 우주, 생명을 통해 인간의 내면은 물론 자연과 예술의 본질을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성찰해왔다. 그는 지금까지 이러한 창작 태도를 변함없이 유지해왔다. 방혜자 작가는 이를 위해 재료와 기법 등의 측면에서 끊임없이 실험하고 도전했다. 캔버스에 다양한 요소들을 융합하는 콜라주 기법를 도입하고, 종이를 구기고 펴서 무수한 굴곡을 만들고 이를 통해 예상치 못한 생동감을 부여하며, 한지의 앞뒷면에 반복 채색하는 배채를 통해 깊은 공간감을 만들어 내는 방식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재료와 기법의 혼용과 실험을 통해 빛과 우주의 본질에 접근하고자 했다.
방혜자 작가는 파리 길상사(송광사의 파리 분원)와 서울의 개화사, 보각사에 방혜자 스타일의 불화를 제작해 설치했다. 우주와 생명을 아우르는 심원한 분위기의 작품을 불화로 제작함으로써 현대 불교회화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기도 했다. 2018년 방혜자 작가의 작품 4점이 프랑스 샤르트르대성당 참사회의실의 새로운 유리화(스테인드글라스)로 선정되었다. 방혜자 작가의 ‘빛의 미술’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하나의 사례로 평가할 만하다. 작품은 2021년 설치될 예정이다.
방혜자 작가는 창작 뿐 아니라 280여 차례에 걸쳐 전시를 가졌다. 한국과 프랑스는 물론 독일의 잉겔하임 위베르린겐, 스위스의 제네바 오베르니에 뇌샤텔, 스웨덴의 스톡홀름, 캐나다의 몬트리올, 미국의 뉴욕, 벨기에의 브뤼셀 리에쥬, 중국 상하이, 일본 도쿄 등지에서 전시를 통해 세계인과 만났다.
2000년 코로나19의 어려움 속에서도 80대의 노화가 방혜자는 프랑스 파리와 아죽스 작업실을 오가며 창작에만 매진했다. 한눈 팔지 않고 성찰과 창작의 외길을 걸어온 화업 60여 년. 그가 창작한 작품은 2020년 현재 1,300여 점에 달한다.
사망 사건에 관한 옥사(獄事)는 군현(郡縣에)서 항상 일어나는 것이고 지방관리들이 항상 만나는 일인데도, 실상을 조사하는 것이 항상 엉성하고 죄를 판결하는 것이 항상 잘못되었다. 정조대에는 관찰사와 수령 등이 항상 이것 때문에 좌천당했으므로 차츰 조심하였다. 그런데 근년에 와서는 다시 제대로 다스리지 않아서 억울한 옥사가 많아졌다. 내가 목민관에 관한 내용을 수집하고 나서, 사망 사건에 대해서는 ‘이는 마땅히 전문적으로 다루는 것이 있어야겠다.’ 하고, 이 책을 편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