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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림 작가의 생애김구림 컬렉션
김구림 작가의 대표작 : 작가의 세계속으로 초대
1936년 상주에서 출생한 작가 김구림(본명 김종배)은 1958년 첫 번째 개인전을 통해 미술계에 등단하였다. 1950년대 말에는 주로 페인팅 작업을 시도했지만, 1960년부터는 오늘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음과 양 >시리즈를 발표하였다. 이 시기에는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는 행위 외에 불에 그을리고, 오브제를 덧붙이는 등 탈 평면의 새로운 시도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초기 캔버스 작업에서는 평면과 오브제, 오브제와 조각의 경계를 넘나드는 창작을 시도했다.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행위예술, 대지예술, 라이트아트, 실험영화 등을 통해 본격적인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을 시작한다. 특히나 1969년에는 한국

국가정책정보협의회 공동전시, [복지사회를 향한 100년의 여정]
국현대미술사에서 6,70년대 실험미술을 이끈 대표적 작가 중 한 사람은 김구림이다. 그는 대학에서의 제도적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다양한 실험적 작업을 통해 한국 전위예술사에서 독보적 위상을 가지고 있다. 그의 작업은 회화는 물론, 입체와 행위, 영화와 연극, 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을 전 방위적으로 넘나드는 한국 전위예술의 아이콘이다. 그의 작품들에는 ‘한국 최초’라는 수식어가 여럿 붙어 다닌다. 최초의 일렉트릭 아티스트, 대지예술가, 실험영화 감독 등등... 그의 작업은 서구 전위예술의 추종보다는 이를 변용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한국예술계에 전위작업에 대한 이해가 일천하던 50년대 말부터 전위예술의 첨병으로서 독자적인 길을 개척한 선구자이다.
그의 작업은 대략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95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가장 왕성한 실험기인 제 1기, 1973년 일본 체류 경험을 포함하여 1984년 미국으로 활동무대를 옮기기까지의 제 2기, 그리고 2000년 귀국 후 현재까지의 제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물론 그의 활동의 시기 구분은 3기로 나누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그 스펙트럼이 넓다. 그의 실험정신의 점철은 동년배 작가들이 특정 양식을 평생 동안 유지하는 행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그의 창작과정은 자신이 이룩해 놓은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해체와 재구축의 연속이었다. 또한 그의 실험성은 단순한 형식실험이나 관념적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실과 예술의 영역이 괴리되지 않는 전위적 성격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서구의 새로운 경향들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누구보다도 빨리 체득하고 있지만, 그것에 의존하기보다는 그 경향들을 한국적 정신세계와 접맥, 변용시킨 점에서도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1983년부터 최근까지 그가 지속적으로 작품의 명제로 삼고 있는 ‘음양(陰陽)’의 개념은 한국현대미술의 정체성과 미래적 위상에 많은 시사점을 제시하고 있다. 최근 해외 미술관들[주석1]에서 보이고 있는 그에 대한 관심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는 1936년생으로 일제 식민시대에 교육을 받고 해방 후 신설된 한국의 학제 하에서 대학교육을 받게 된 첫 세대라 할 수 있지만, 동년배의 작가들과는 달리 기존의 제도교육을 거부하고 독학으로 현대미술을 개척해 왔다. 실제 그는 경주의 한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인상파풍의 그림을 주조로 한 당시 대학 커리큐럼에 만족하지 못하고 바로 자퇴하였다. 그의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과 자유분방한 창작의욕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잡지 등을 통해 서구의 다양한 예술정보를 접하며 더욱 강력하게 고취되어 갔다. 미술뿐만 아니라 영화와 연극, 음악 등 다양한 예술의 신사조들이 그의 창작의욕을 자극하였다. 경북 상주에서 태어난 그는 청년시절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초기 ‘앙그리(Angry)’라는 그룹을 결성(1964)하여 대구에서 젊은 작가들이 창작과 발표를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였다. 하지만 제도권의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당시의 대구 화단이 그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는 대대로 한약방을 운영해온 부잣집 외동아들로 자란 탓에 고집이 세고 자기주장이 강하며 마음먹은 대로 모든 일을 처리해야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어려서부터 다양한 고급문화를 습득한 탓에 젊은 시절 오토바이, 스포츠카, 승마, 스키 등 당시로선 일반인이 접할 수 없는 스포츠를 즐기며, 고급 오디오 장비를 소유한 오디오 광으로 매우 섬세하고 예민한 음악적 감수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또한 동년배 작가들과는 달리 초기 대구 시절엔 섬유회사에 다니며 창작활동을 병행하였는데, 그의 직장생활을 겸한 창작활동은 1960년대 말 상경 시기 까지 이어진다. 그는 작품 이외에 기업에서의 경영능력을 인정받아 기획실장을 지내는 등 역량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일반적인 미술계의 제도를 통한 성장과는 다른 배경을 가진 작가이기에 늘 독자적으로 미술계와 부딪치며 상황을 헤쳐 나가야 했다. 이러한 연유로 그의 창작활동은 많은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늘 실험성을 견지하며 앞서 나갔기 때문에 늘 고독한 주자였다.

김구림 작품 중 일부 모음

경향신문 논설위원 당시 소설가 김은국 작가와 대화하는 모습

김구 서재 모습
그의 수상으로는 2017년 은관문화훈장 수훈, 2014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수상. 2006 이인성 미술상 수상, 1983 대한민국 무용제 무대미술상의 실적이 있고
저서로는 『판화 콜렉숀.』 (서문당) 『서양판화가 100인과 판화감상』. (미진사) , 동화집『 별 하나 나 하나』. (동화출판사.)가 있다.
주요 소장처로는 국립현대미술관, 테이트 모던 (영국), 테이트 라이브러리 스페셜 콜렉션. 구겐하임미술관 (미국), 리움미술관, 홋카이도근대미술관 (일본), 오사카예술센터 (일본), 후쿠오카 아시아미술관 (일본), 라이트콘 (프랑스), 이스라엘미술관 (예루살렘), 뉴욕시티은행 (미국), 한국 영상자료원, 서울대미술관, 대구 문화예술회관, 서울시립미술관, 토탈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아라리오미술관, 경기도미술관, 한국문예진흥원, 수원대학교미술관, 경주아사달조각공원, 일현미술관 외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