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장소의 장소 Ⅲ: 장소를 품다 - 부강》전시주최
전시기간
2018-10-12 ~ 2018-11-02전시유형
단체전전시장소
세종 부강리 고택, 세종 / 스페이스몸 미술관, 청주《장소의 장소 Ⅲ: 장소를 품다 - 부강》
전시일자: 2018.10.12-11.02
장소: 세종 부강리 고택, 세종 / 스페이스몸 미술관, 청주
출품작가: 서용선, 손부남, 채우승, 정승운, 정보영
부강을 품은 '몸, '몸'으로 어루만진 다섯 작가
권영진, 미술사
여러 해 장소와 지역에 대한 관심을 발전시켜 온 청주 스페이스몸 미술관이 올해 주목한 장소는 세종시 부강면 용포동촌길 43-19에 위치한 옛 가옥이다. 이 집의 안채 대청 상량문에 고종 3년, 1866년에 지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 후기 문신이자 헌종의 계비인 효정왕후의 조카 홍순형(1858~미상)이 살았다고 한다. 조선 후기 건축이 잘 보존되어 1984년 대한민국 국가민속문화재 제138호로 지정되었는데, 이 집에서 마지막 살던 사람의 이름을 따서 '청원 유계화 가옥'으로 불렸다.
본래 충북 청원군 부용면(芙蓉面)이었던 이 지역은 2012년 7월 1일 세종특별자치시가 출범하면서 세종시 부강면(芙江面)이 되었고, 집의 이름도 그에 따라 '청원 유계화 가옥'에서 '세종 유계화 가옥'으로 바뀌었다. 2005년 유계화(柳桂和 1926~2005) 씨가 세상을 떠난 후 10년간 비어 있던 것을 2015년 청주 사는 사업가 백원기 씨가 매입하여 2016년부터 '세종 부강리 고택'으로 불렸다. 그러다가 2018년 6월 세종시 관광문화재과는 다시 이 집의 명칭을 변경하여 건립 시 이 집에 살았으며 예조판서를 지낸 홍순형의 이름을 따라 '세종 홍판서댁'으로 부르기로 했다고 공시했다.
완만한 경사지에 남향으로 자리하여 ㄷ자형 안채와 ㄷ자형 사랑채가 맞물려 ㅁ자형 평면을 이룬 이 집은 조선 후기 이래 지난 150여 년 한국 사회의 변천과 이곳에 살던 사람들의 삶의 유전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어릴 적 근처에서 가장 크고 좋았던 이 집에 대한 기억에 이끌려 종국에 매입한 백원기 씨는 집을 보수하고 관리인을 두어 지역 사람들이 돌잔치도 열고 결혼식도 올릴 수 있는 전통 한옥 스튜디오로 운영하기로 했다. 부강 사람들 몇몇을 모아 삼버들협동조합을 설립하여 지역 문화시설로 운영하기 위한 체제도 갖췄다. 이런 부강리 고택을 인근에 위치한 청주 스페이스몸 미술관이 지난 십여 년간 이어온 '장소의 장소' 연속 기획전의 2018년 전시를 위한 장소로 선택했다.
2000년 청주시 흥덕구 고속터미널 근처의 건물 지하에서 카페 겸 전시공간으로 개관한 '스페이스몸'은 2005년 미술관으로 등록하면서 이름 뒤에 '미술관'을 붙여 '스페이스몸 미술관'이 되었다. 1990년대 이후 문화 예술의 주요 담론으로 부상한 '몸'의 화두를 일깨우는 이 전시장은 '장소'에 관련된 단어 세 개가 연이어 붙은 명칭으로 태생부터 지역과 장소에 대한 관심을 떠안고 있다. 현재 활동하는 주요 작가들의 다양한 창작을 소개하는 외에 옹기, 청화백자, 동자석 등 전통 공예품의 조형적 요소와 이를 현대적 미감으로 해석한 작가들의 작품을 매칭하는 기획전을 2000년대 중반 이후 십여 차례 개최해왔다. 그중에서 해주 항아리, 회령 항아리, 제주 동자석 등 한반도 내 특정 지역의 의미를 뚜렷하게 되새길 수 있는 장소와 그곳에서 생산된 민속 공예품, 그리고 그 조형적 요소를 전시의 주요 요소로 삼는 여러 기획전이 개최되었다. 그런 청주의 스페이스몸이 한반도 내 특정 장소를 품는 '장소의 장소' 연속 기획전의 올해의 장소로 부강리 고택을 선택했고, ㅁ자형 마당에 우물을 품은 유서 깊은 부강리 고택에 서용선, 손부남, 정보영, 정승운, 채우승, 다섯 작가를 초대했다.
2018년 청주의 '몸'이 품은 장소는 150여 년 삶의 유전을 간직한 부강리 고택인데, 다섯 작가는 그간 '몸'의 이러한 부름에 즐겨 응하거나, 이미 역사적 장소와 삶의 현장을 각별히 기억하고, 오랜 삶의 흔적을 작업의 주요 요소로 삼으며, '몸'의 안팎을 그림 속 주요 장소로 그려온 작가들이다. ㅁ자형 마당에 범상치 않은 향나무와 우물이 있는 이 부강리 고택을 다섯 작가들은 올해의 작업 주제 혹은 작업 장소로 제공받아 지난 봄부터 일정 기간 이곳에 머무르거나, 방문하여 고택 안팎의 삶의 흔적을 살피고 그곳에 살다간 사람들을 되새긴 작품을 제작했다.
고택이 있는 세종시 부강면은 지리적으로 내륙에 위치했으나 전북 장수군 신무산 북동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진안, 무주, 금산, 영동, 옥천, 대전을 거쳐 군산만으로 굽이쳐 이르는 금강 변에 위치하여 바다로 나가는 뱃길이 닿는 곳이다. 예로부터 교통과 물류의 중심지였던 부강면은 부용(芙蓉) 꽃처럼 아름답고 부유하게 번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서해로 나가는 포구에는 대개 일본인 거주지가 번성했기에, 이곳에도 많은 일본인이 살았을 것이다. 2017년 영화화되어 깊은 인상을 남겼던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박열(朴烈 1902~1974)의 일본인 아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1903~1926)가 이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해방 이후 고속도로가 건설되고 뱃길보다 육로로 교통과 물류가 옮겨가면서 부용면의 부유하고 융성했던 흔적은 잊혀졌던 것 같다. 그러다 2012년 세종시가 새롭게 출범하면서 다시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이런 부용면 혹은 부강리에는 부유한 저택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게 융성했던 마을이 한국 근현대 사회의 변천 속에 일부 흔적만 남고 쇠락했으며, 그 중 유계화 가옥은 여러 사연을 간직한 지역의 대표적인 고택인 셈이다.
세종시 부강면의 역사적 변천과 가옥의 건축적 구조도 흥미롭지만, 올해 초대된 다섯 작가들은 이곳에서 마지막 살았던 유계화(柳桂和 1926~2005)라는 인물에 더욱 강한 인상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지역보다 집, 집보다 사람인 셈인데, 집이 있어 사람이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고 집을 중심으로 사람의 삶이 이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마당에 우물이 있어 남자가 살기 어려운 집이라는 속설이 있는 이 집의 ㅁ자형 마당에 둘러앉아 작가들은 차도 마시고 집 안팎을 거닐면서 지역과 집, 유계화의 삶에 대해서 생각했다. 이 집을 매입한 백원기 씨가 집을 공개하자, 방문객들이 남긴 방명록의 기록에 유계화에 대한 기억이 전하여 이 집에 살던 마지막 인물에 대한 회상을 풍성하게 했다. 유계화의 할아버지가 매입하여 결혼하지 않은 손녀에게 물려주었고 독신의 여인이 어머니, 외할머니와 함께 살다가 생애를 마친 이 집에 대한 여러 기억과 일화가 방명록의 기록으로 회고되었다. 이웃과 친척, 세 들어 살던 사람들이 유계화와 함께 한 이 집에 대한 기억을 방명록에 펼쳐 놓으면서 이화여전 의과대를 다니다 낙향하여 평생 독신으로 지낸 유계화에 대한 기억을 다채롭게 했고, 이는 150년 된 이 집의 존재와 집 안팎의 삶의 흔적을 더욱 새롭게 되새기게 했다.
영월의 단종애사를 30년 넘게 그림의 주제로 다룬 서용선은 부강의 유계화를 두 점의 목조 인물상으로 만들었다. 높이 180cm에 이르는 아카시아 목재를 전기톱으로 깎은 인물상이 스페이스몸 미술관 2관에 설치되었는데, 얼굴이 길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없으나 주민등록증의 작은 증명사진이 전하여 유계화 노년의 강인한 외모가 목조 인물상의 토대가 되었다. 목조 인물상 앞에는 유계화를 회고하는 방명록의 문구를 옮겨적은 검은 기와 15장을 3열 5행으로 배열했다. 이것보다 조금 작은 목조 인물상 하나는 부강리 고택의 사랑채 끝방에 설치되었다. 사랑방 중앙에 역시 강인한 외모의 목조 인물상을 두고 앞뒤로 문을 열어, 이 집의 주인 유계화가 당당하게 손님을 맞는 모습을 연출했다. 그밖에 집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으며 평생 독신으로 지낸 유계화의 삶을 그린 드로잉 다섯 점이 스페이스몸 미술관 전시장과 부강리 고택의 안채 벽에 걸렸다. 부강을 품은 '몸'의 안과 밖에서 두 점의 목조 인물상으로 현신한 유계화는 부강리 고택에 여전히 그가 확고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표정이 없는 담담한 인물상이지만, 그것을 깎고 새긴 선이 굵고 강하여 유계화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여실하게 느낄 수 있도다. 작가는 인물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재현하기보다 그것을 형상화하는 조형적 특성으로 인물의 성격과 기질을 드러냈고, 기와에 옮겨 적은 회고의 글귀로 그 인물의 둘러싼 사람들의 기억을 되뇌는 한편 그러한 회고로 유계화의 생전 모습과 삶에 대한 반추를 확장시켰다.
충북 진천에서 작업하는 손부남은 낡은 폐자재와 버려진 오브제로 설치 작품을 즐겨 만든다. 모던한 작업실 천장에 철거된 절의 대들보를 옮겨 놓거나 폐교의 체육관 마룻바닥을 옮겨 깔기도 했다. 공들여 가꾼 정원에 철거된 절의 목재를 통째로 옮겨와 아담한 별채를 짓기도 했다. 원래의 자리에서 버려진 것이 손부남의 빼어난 안목과 손길로 되살아나는 것인데, 부강리 고택 뒤뜰에는 전라도 땅에 있던 낡은 나락창고를 옮겨 놓았다. 고택의 뒤뜰 장독대가 있던 자리에 옮겨진 나락창고는 빛바랜 세월의 흔적까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원래 그 자리에 있던 것처럼 감쪽같다. ㅁ자형 부강리 고택을 벗어나지 않았던 유계화의 모습을 손부남 특유의 선묘로 새긴 금속 부조상이 정방형 나락 창고 안에 놓였다. 금속 부조상은 빛바랜 나락창고와 비슷한 세월을 보낸 듯 녹슬었고 나락창고는 유계화가 평생을 보낸 자형 가옥 혹은 스스로를 유폐한 감옥의 형상을 닮았다. 그러나 금속판에 새긴 유계화는 정원에 꽃을 가꾸고 개와 고양이를 키우며 책과 신문을 구독하던 자족적인 신여성의 모습이다. 스페이스몸 미술관 2관 전시장에는 역시 감옥을 연상시키는 녹슨 새장 위에 날개 달린 말을 타고 날아가는 여성 인물의 금속 부조상을 두었다. 새장의 문은 열려있다. 부강리 고택에 은거하던 유계화는 감옥 문을 열고 훨훨 날아간 것으로 보인다. 특정 장소에 깃든 세월의 흔적과 사람의 유한한 삶에 대한 감회는 26년의 세월을 두고 같은 장소에서 찍은 손부남의 두 장의 사진 연작으로 이어졌다. 스페이스몸 전시장 3관의 벽에는 1992년 백두산 천지에서 찍은 작가의 사진과 같은 장소에서 2018년에 찍은 사진이 나란히 걸렸다. 작가는 청년기 자신의 모습과 노년의 초입으로 접어드는 현재의 모습을 대비하는 방법으로 작가로서 본인의 생을 반추하고 고택에서 생애를 보낸 유계화의 삶에 화답했다.
정보영은 2000년 스페이스몸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며 이곳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정보영의 그림에는 스페이스몸 미술관 건물 안팎이 자주 등장한다. 스페이스몸 미술관 2, 3관은 정보영 회화의 '몸'인 셈인데, 전시장의 빈 공간과 햇빛이 길게 드리운 창가 모퉁이, 그리고 사다리나 유리구(球), 의자 등의 기물은 빛과 그림자를 탐구하는 정보영이 그의 회화에 즐겨 사용하는 소재다 바로크식 빛과 어둠은 열린 창 밖의 밝은 야외 공간과 건물로 둘러싸인 어두운 실내 공간, 혹은 불 밝힌 실내공간과 어두운 밤의 전시장 건물을 대비하는 방법으로 제시된다. 정보영의 그림에 등장하는 공간이 딱히 스페이스몸 미술관일 필요는 없겠으나, 모던한 빈 공간에 드리운 빛과 어둠, 창문 안으로 길게 밀려든 햇빛 등을 관찰하기 위해 정보영은 스페이스몸 미술관을 즐겨 찾아 오래 머물렀을 것이다. 빈 전시장에서 오래도록 관찰하여 면밀하게 화폭에 옮긴 빛의 흔적은 그의 회화 위에서 빛과 그림자, 밝음과 어둠의 대비로 포착되었다. 이번에 전시의 주제가 되었던 부강 유계화 가옥은 햇빛이 잘 드는 남향집으로 고택에 머무는 동안 밝은 빛의 변이가 인상적이기도 했지만, 모던한 직선의 미술관 건물과 달리 기와의 곡선이 곡선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점에서 색달랐다. 오래된 댓돌 위에 깃든 따사로운 햇빛, 부엌 안쪽 바닥에 길게 드리운 사선의 그림자, 창호지 문 안으로 쏟아지는 부드러운 오후의 햇빛, 빛과 그림자의 경계에 밝힌 촛불 등 유계화 가옥을 그린 유화 7점과 스페이스몸 미술관의 건물을 그린 유화 7점이 부강과 몸 전시장에 걸렸다. 3관 전면 벽에는 두 개의 스포트라이트가 한 곳을 비춘 대형 회화 한 점이 있다. 한 곳을 비춘 두 개의 스포트라이트는 부강과 청주 두 곳의 빛을 우의적으로 표현하고, 두 개의 빛이 한 곳을 비춤으로 부강을 품은 몸, 혹은 '몸'의 전시장에 오버랩된 부강리 고택과 작가의 빛 탐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하늘과 지형이 맞닿아 이루는 선, '공제선'으로 특정 장소의 보편적 개념을 추출하는 정승운은 부강리 고택의 처마 밑에 두 개의 공제선을 걸었다. 그리고 청주 스페미스몸 미술관 2관의 전시장 코너에 또 하나의 공제선을 걸었다. '공제선'의 이름으로 무명실을 걸어 자연 일반을 제유하고 그 실에 정성스레 아교와 밑칠을 하고 채색을 덧입혀 2차원 평면이 아닌 2차원 선 위에 회화를 압축한다.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리는 무명실은 부강과 청주를 뜻하는 공제선이 되고 가장 아래로 늘어진 부분에 가장 많은 채색을 가하여 2차원 선의 회화가 물리적인 선의 차원을 넘어 그 지역과 장소의 의미와 연동하도록 정교하게 채색한다. 아교와 제소칠 위에 파란 유채 물감을 정성스럽게 바른 부강과 청주의 공제선은 그 자체로 '청산(靑山)', 땅 위의 푸른 산을 지칭하며, 정승운의 고향인 강진의 월출산에서 시작하여 부강리 고택과 그것을 품은 청주의 '몸'으로 이어지며 자연과 세상을 대변하는 존재로 확장된다. 언어적 정의, 수학적 공식, 논리적 도식 등으로 대상을 추상화하고, 그것을 다시 엄격한 규칙의 조형적 실천으로 가시화하는 정승운의 작업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을 관념화하고, 보이지 않는 관념을 보이도록 하는데 목표를 둔다. 정승운의 작업에서 사유와 논리는 기하학적 형태와 관념적 색채, 현상학적 상황으로 재현실화 된다. 회화의 본능적 필치와 우연한 감성에 몸을 내맡기지 않고 개념적 정의로 추론된 논리를 일정한 법칙에 따라 우리 눈앞에 구체화시켜 주는 정승운의 파란 공제선은 부강과 청주를 이으며 청산이 청산인 근거를 우리의 눈과 머리에 예리하게 각인시켜 준다.
'몸'이 품은 장소 연작전에 여러 차례 참여했던 채우승은 이번 부강리 고택전에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자락> 두 점을 전시했다. 오래 전에 제작하여 이미 다른 곳에서도 전시했던 것으로 보이는 그의 좁은 옷자락은 부강리 고택의 안채 기둥과 스페이스몸 미술관 3관 중앙을 버티는 사각기둥을 타고 흐르는 모습으로 설치되었다. 유계화 할머니의 육신이 고택의 좁은 나무기둥을 타고 사라져 버린 듯, 2000년 이래의 채우승의 창작이 스페이스몸 미술관 3관 전시장 지붕을 오롯이 떠받치는 주춧돌 위의 사각기둥을 타고 스미듯, 채우승은 그의 전형적인 조각적 제스처로 두 장소에 개입했다. 주로 벽에 부조 형식으로 부착하여 벽의 이쪽과 저쪽, 저 너머로 사라져 버린 것과 이쪽에 남은 것, 그 사이를 불온하게 환기시키던 채우승의 옷자락 중 유독 좁은 나무 기둥을 타고 흐를 수 있는 슬림한 자락이 있었던 것 같다. 부강과 청주에서 좁은 나무 기둥을 타고 수직으로 얇게 베이듯 사라져 버린 것이 고택에 살던 사람의 혼백이 되었던, '몸'의 부름을 받고 여러 방법으로 창작에 임했던 작가의 삶과 세월이 되었던, 우리는 좁은 기둥과 그 기둥에 남은 흰 옷자락 말미를 발견하고 기둥 뒤로 무엇이 사라져 버린 것인지 의아해하며, 한동안 좁은 기둥 앞에서 발길을 멈추고 의심스런 눈길로 기둥과 좁고 긴 옷자락을 더듬게 된다. 그의 자락 연작은 고정된 실체이지만, 진행되는 움직임의 과정, 벽의 이쪽과 저쪽, 또는 한 순간의 삼차원과 사차원, 사라진 것과 남은 것을 오가는 유동적인 이행의 통로에 존재한다. 사라져버린 성스러움과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관능성이 현실의 육신이 사라지고 남은 빈 공간, 벽 혹은 기둥 뒤 저 켠의 세계를 환기하는 방식으로 제시된다. 합성수지로 떠낸 채우승의 자락 연작은 백색의 조각적 실체를 확고하게 드러내지만, 작가가 그것으로 지시하는 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의 허상,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빈 껍질, 증발해 버린 고귀한 존재의 빈 흔적이다.
2018년 스페이스몸 미술관이 품은 부강리 고택은 부강의 시대적 변천을 되새기고 그곳에 살던 유계화에 대한 회고를 일깨웠을 뿐만 아니라 전시에 초대된 다섯 작가들이 그 위에 그들의 삶을 겹쳐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다. 20년 가까이 청주에 위치하여 여러 장소를 품어 여러 작가들을 매개해 온 '몸'의 기획전은 특정한 장소와 공예품을 제시하여 작가들이 작업하고 창작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요청에 응하여 새로운 장소를 발견하고 창작에 임했던 작가들 자신이 그간의 삶과 특히 그들의 '몸' 자체를 반추하는 무대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섯 작가들은 '몸'의 과제를 자신의 '몸'으로 풀어내는 작업으로 몸'의 부름에 응했다. 올해 '몸'이 품은 '부강리 고택'은 단순히 집이 아니라 오래 묵은 사람의 흔적과, 삶의 체취를 환기했고, 특히 그 집에서 마지막 살다간 주인 유계화에 대한 회고와 상념이 주를 이루었으며, 다섯 작가들은 자신의 삶과 몸의 흔적을 거기에 겹쳐 되새기는 방식으로 이번 전시를 꾸몄다. 2018년 <장소를 품다 - 부강>전은 장소에 깃들고, 흔적을 들추고, 전하는 말을 조형화하는 방법으로 그 집과 그 사람, 그리고 그 집을 찾은 작가들의 20~30년 화업과 창작을 반추하며 '몸'으로 화답한 결과물이다.
※ 출처: 권영진, 「부강을 품은 '몸', '몸'으로 어루만진 다섯 작가」, 『장소의 장소 Ⅲ: 장소를 품다 - 부강』,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18, n.p.
유계화 가옥, 이 집에 살던 마지막 사람의 이름을 쫓아서
박소영, 충청리뷰 기자
우리들의 집은 '이름'이 따로 없다. 매매가와 동·호수, 영어와 한국어가 혼합된 정체불명의 단어들만이 집 앞에 놓여 있다. 누가 살았는지, 어떠한 기억을 품고 지냈는지 우리는 알 필요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살면서 우리는 몇 번의 이사를 경험하게 되고, 만약 내가 죽은 후에도 그 집이 남아있다면 또 다른 주인들이 바쁘게 이삿짐을 풀고 싸기를 반복할 것이다.
이 집에 공식적인 이름이 붙은 것은 1984년, 대한민국 국가민속문화재 제138호 '청원 유계화 가옥'으로 지정됐다. 이후 2012년 7월 세종특별자치시가 신설됨에 따라 2014년 '세종 유계화 가옥'으로 문화재 명칭이 변경됐다. 그러다가 올해 여름 이 집을 처음 소유했던 홍판서의 이름을 따서 '세종 홍판서댁'으로 가옥명이 다시 바뀌었다.
처음 집을 소유했던 이가 결국 마지막까지 살던 이의 이름을 밀어버렸다. 이 집은 이제 '홍판서댁'으로 간판이 바뀌었다. 세종시는 1866년(고종 3년) 건립된 부강리 고택은 조선후기 문신이자 헌종의 계비인 효정왕비의 조카 홍순형(1858~미상)이 거주한 사실이 있어 '홍판서(예조판서)의 집'으로 불리기도 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집에서 1926년에 태어나 마지막까지 생애를 보냈던 여인 '유계화'의 이름을 기억하고자 한다. 10월 12일부터 11월 2일까지 스페이스몸 미술관 제2전시장과 이 '세종 홍판서댁' 두 군데에서 유계화 관련 전시회가 열린다.
유계화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을 만났다. 사람은 누구나 사람에 대해 '비밀'을 가지고 있다. 여러 사람 속에 살아있는 기억의 조합들로 '유계화'라는 인물을 감히 소개한다. 부디 진실에 조금이라도 닿기를 기도하며.
외할머니-어머니-유계화 3대가 살던 집
유계화 가옥은 유계화 씨의 할아버지였던 유창순 씨가 매입하면서 유씨 일가 소유가 됐다. 유창순 씨는 내수의 천석꾼이었다고 한다. 둘째 아들이었던 유동기 씨와 아내 김순례 씨 사이에서 유계화가 1926년에 태어난다.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 집에선 김순례 씨와 김순례 씨의 친정어머니 그리고 유계화 씨 이렇게 3명의 여인이 오랫동안 살았다.
그들은 물려받은 인근 땅에서 세경을 받아 생활을 이어갔다. 외할머니,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유계화 씨는 세경 외에도 집에 세를 놓아 생활비에 보탰다. 어머니 김순례 씨는 남자처럼 목소리가 크고 괄괄했는데, 그래서인지 이웃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수확한 농산물이 있어도 타작할 사람을 못 구해 동지섣달이 돼야 겨우 구했다고 한다.
15살 차이가 나는 청주시 장평동에 살고 있는 사촌 여동생인 유인숙(75)씨는 이 가족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다.
“여자 셋이 살다보니 동네에선 과부댁으로 불렸다. 언니(유계화)는 남한테 빚지는 걸 정말 싫어했다. 친척들과도 거리를 두고 지냈다. 어느 날 가족행사가 끝난 후 우리 남편이 집까지 모셔다 준다고 하니까 한사코 거절하더라. 다른 사촌동생이 놀러 와도 시간이 지나면 '언제 갈꺼니'라고 묻던 언니였다. 어릴 적에 내가 청주여고를 다녔는데 그때 나는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셔서 방학 때는 이 집에 많이 놀러갔었다. 이후 서울로 시집 가 자주 찾아가지 못했다가 2000년대 청주로 이사 오면서 시간 날 때마다 가서 언니를 만났다."
이어 그는 "언니는 고집이 세고 말수가 적었다. 항상 고양이를 자식처럼 키웠다. 여성잡지와 신문을 2개 이상 구독했다. 강아지 복실이를 키웠고, 고양이 이름은 '옛네'였다. 옛네 외에도 고양이를 여러 마리 키웠다. 한때 마당에 거위도 키웠다. 나이 들어 한국보건과학대 평생교육원 강좌을 듣기도 했다. 언니는 난소암으로 1년 여를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죽은 후에야 언니가 대구 분향소에 묻혔다는 걸 알고 두 번 가봤다. 언니가 죽은 후 고양이들에게 밥을 주러 왔지만 그 집의 새주인이었던 (**인쇄오류, 내용누락**)
활자와 고양이를 좋아했던 독신여성
시집 한 번 안 간 여인. 평생을 '아가씨'로 살았던 독신여성. 고양이를 늘 키우고, 손에서 늘 책을 놓지 않았던 여인. 하지만 집 안에 우물이 있어서 남자가 살기 어려운 집이라고 동네사람들은 늘 얘기했다. 이 동네에서 유계화 씨는 특별한 인물이었다. 동네에서 가장 좋은 집에 살았고, 학벌도 높았다. 유계화 씨는 부강초등학교 20회 졸업생이다. 이화여전 의과대에 입학했지만 졸업을 하지 못하고 고향집에 내려왔다. 가만히 있어도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사람. 그 앞에는 늘 비운의 여인, 외로운 여인 등등 수식어가 붙었다.
유계화 가옥 바로 뒷집에 살았던 전순희(66)씨는 "고양이를 자식처럼 키웠다. 옷 한번 번듯하게 입지 않고 속옷도 기어입을 정도로 검소하게 살았다. 세련된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남에게 싫은 소리도 하지 않았고, 남에게 들으라고 큰 소리를 친 적도 없다. 배운 사람답지 않게 때로는 답답할 정도로 세상 물정을 몰랐다. 하지만 이웃이 상을 당하면 부조도 하고 해야 할 도리는 다 하셨다. 한봉순 어르신이 친구였는데 지난해 돌아가셨다. 가끔 동네 친구들과 마실 다니기도 했다. 오랫동안 가까이 지냈지만 가까워지기가 어려웠다"라고 말했다. 전순희 씨는 40년 전 이 동네에 시집을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이름 '계화(桂花)'는 계수나무 '계', 꽃 '화'자를 쓴다. 그래서일까. 그는 꽃을 많이 키웠다. 뒤뜰엔 감나무가 있었고, 집 대문 앞에 꽃을 가득 심었다. 백합과 분홍빛깔을 딴 작은 꽃들이 가득했다. 이 집에 세를 들어 살았던 열 살의 소녀 김인덕은 이제 환갑을 앞 둔 나이가 됐다. 하지만 소녀의 기억은 여전히 이 집에 산다.
서울에 사는 김인덕 씨(60)는 지난해 유계화 가옥을 방문하고 방명록에 자신의 사연과 연락처를 적어놓았다. 방명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50년 전 건넌방에 살았습니다. 어머니가 막내를 건넌방에서 낳고 그 부엌에서 어머니 첫국밥을 10 살이었던 제가 끓였습니다. 유계화 아주머니 그립습니다. 25년 전 왔을 때 반갑게 맞이해주시고 곱디고왔던 모습 눈에 선합니다. - 2017년 11월 김인덕.'
아버지가 '대한프라스틱' 주식회사(현재 한화공장)에 취직을 하면서 서울에 살던 김 씨 가족은 부강에 오게 됐다. 김인덕 씨는 초등학교 3학년 2학기부터 5학년 2학기까지 2년을 꼬박 부강에서 살았다.
“외할머니가 청양에 살고 계셨는데 미처 부강에 오지 못하셨다. 어머니가 막내를 낳고 둘째였던 내가 미역국을 처음 끓이게 됐다. 사랑채 마당에서 솥을 걸어놓고 어머니가 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 때 유계화 아주머니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황해하면서도 여러 가지 챙겨주셨다. 어머니가 막내를 낳고 대청마루 옆 건넌방을 산실로 썼다. 유계화 아주머니가 방을 내주었고 동네 아주머니들이 와서 산바라지를 했다. 그 때 외할머니는 바빠서 끝내 못 오셨다."
25년 전 그는 문득 이곳을 다시 찾았다. "남편이 부동산업을 하는데, 부강에 갈 일이 있다고 했다. 그럼 나도 가겠다고 따라나섰다. 유계화 아주머니를 당시 만났는데 너무 반가워하셨다. 뭘 사들고 갈까 한참 고민하다가 오렌지 주스를 사다 드렸는데, '나는 이런 거 잘 못 먹는데'라고 하셨던 말씀도 기억난다. 어머니, 아버지 안부 및 주소까지 물어보셨다. 이후 연락을 따로 하신 것 같지는 않다."
김인덕 씨는 지난해 수녀인 첫째 언니가 열흘 휴가를 얻게 돼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 부강을 다시 찾았다. 그 때 지금의 방명록 글을 남긴 것이다. 부모님과 14살이었던 언니와 10살이었던 인덕 씨, 그리고 4살이었던 남동생과 갓 태어난 막내가 부강에서 보낸 2년은 절대 잊을 수 없는 시간이다.
친구가 됐던 서울의 젊은 부부
서울에서 온 젊은 부부와 아이들은 유계화 씨의 삶에 큰 위안이 됐다. "당시 유계화 아주머니는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침묵하고 계셨다가 조금씩 어머니에게 마음 문을 열었다. 당시 내 어머니가 30대 후반이셨는데, 아주머니와 나이가 비슷하거나 한두 살 많으셔서 이야기가 잘 통했다. 또 아버지는 독서를 즐겨하셨고, 집에 서울에서 가져온 책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오랜만에 대화하고 싶은 친구를 만나지 않았을까 싶다"라고 했다.
"학교 다닐 때 우리집을 기웃거리는 아이들이 많았다. 다른 집은 다 초가집이었으니까. 앞마당에서 공기놀이도 했지만 쉽게 안채로 들어오지는 못했다. 아주머니가 원치 않으셨다. 그 집에 살면서 외부인이 들어온 적은 없었다. 집수리를 간간히 봐주시던 아저씨만 일이 있으면 오셨다."
그 때도 강아지의 이름은 '복실이'였으며 검둥이 개, 고양이를 키웠다고. "어느 날 검은 개가 쥐약을 먹고 죽었다. 약을 먹은 개를 살리려고 뜨물도 먹여보고 애를 썼지만 결국 죽었다. 집안일을 봐주시던 아저씨가 개를 데려갔다. 죽은 개를 보고 아주머니는 고개를 뒤로 하고 '어차피 한번 가는 건데 할 수 없지'라고 말한 게 지금도 생생하다."
김인덕 씨의 기억 속에 유계화 씨는 시대를 앞서 간 '신여성'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우리 가족이 떠나던 날 아주머니가 집 밖으로 나오셔서 우리들을 꼭 안아주셨다. 눈물을 훔치셨던 모습이 마음에 아리게 남아있다. 참으로 좋으신 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신만의 가치관을 가지고 자신만의 삶을 사신 분이셨다. 늘 신문과 책을 보고 동물들을 사랑하고, 꽃을 가꾸는 모습은 늘 기억하고 싶다. 몸은 마르시고 모습은 약간 김수환 추기경을 닮았다."
그에 대해 비련의 여주인공이라는 말은 요즘말로 '라벨링'일지 모른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좋아한다. 또 남의 이야기하기를 더 좋아한다. 부강의 한 고택에서 자기 삶을 온전히 살았던 여인이 살고 죽었다.
2018년 8월 2일 문화재 지정 명칭을 변경하는 사항에 대하여 예고됐다. 변경사유는 다음과 같다. △안채의 대청마루에 상량문에 1866(고종 3년)에 지었다는 기록이 나왔음 △1898년(광무 2년)~1904년(광무 8년) 「충청남도 문의군양안」 작성 시기 때 가옥 소유자인 홍순형(洪淳馨) 성명 기록되었음 △홍순형(1858~미상)은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여문(汝聞), 본관은 남양, 헌종비 효정왕후의 조카임 △1874년(고종11) 문과급제후, 동부승지, 여주목사, 1884년 이후 이조참판·성균관 대사성·사헌부 대사헌·예조참판·평조판서·한성판윤·예조판서 등을 역임했으며 구전으로 '홍판서댁'으로 전해져 왔다는 것이다. 이제 이 집은 세종 홍판서댁이다.
<위키피디아 내용 참조>
세종 홍판서댁
안채 대청에 적힌 상량문에 의하면 고종 3년(1866)에 지은 집이다. 논밭이 완만한 경사지에 남향으로 자리하였다. 한단 높은 'ㄷ'자형 안채와 한단 낮게 지어진 'ㄷ'자형 사랑채가 맞물려 'ㅁ'자 평면을 이루고 있다. 안마당은 정사각형인 듯 반듯한 폐쇄성이 강한 평면이다.
문을 들어서면 앞면에 사랑채가 안채를 향하지 않고 문쪽으로 향하여 자리잡고 있다. 가운데는 몸채이고 안채쪽으로 꺾어진 좌우 1칸씩은 날개에 해당한다. 몸채는 대청과 아래·윗방으로 되어있고 앞에는 툇마루를 놓았다. 양 옆 날개부분은 곳간과 방·함실이다.
안채 역시 몸채와 날개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몸채인 넓은 대청과 안방이 남향하여 위치한다. 안방과 대청을 모두 남향하여 배치한 것은 경기도·황해도·충청도 등 중부지방에서 형성하는 평면구성이다. 안채의 오른쪽 날개부분은 길다란 부엌이 배치되었고 그 옆의 샛문간은 사랑채와 연결이 된다.
왼쪽 날개부분은 상방과 부엌 그리고 사랑채 곳간과 연결이 되는 중문간이 있다. 안마당에는 우물, 뒷동산에는 장독대가 있으며, 뒤뜰에는 향나무·감나무·대추나무 등이 알맞은 자리에 자리잡았다. 고전적인 기법으로 만들어진 이 집은 현존 상태도 비교적 양호한 편이며, 그 일대에서는 드문 자형 평면을 지니고 있어 지정·보존하고 있다.
1984년 1월 14일 대한민국의 국가민속문화재 제138호 청원 유계화 가옥로 지정됐다가, 2012년 7월 세종특별자치시가 신설됨에 따라 2014년 12월 12일 세종 유계화 가옥으로 문화재 명칭이 변경되었다.
※ 출처: 박소영, 「유계화 가옥, 이 집에 살던 마지막 사람의 이름을 쫓아서」, 『장소의 장소 Ⅲ: 장소를 품다 - 부강』,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18, 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