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말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맺어진 정전停戰 협정은 1950년부터 3년간의 6.25 전쟁을 일시적으로 중단시켜 휴전 상태에 접어들게 했으며, 올해는 그 정전 협정이 체결된 지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고려대학교 박물관은 '한국전쟁 아카이브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을 기념하고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이번 전시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서용선은 6.25전쟁을 포함하여 오랜 기간 동안 한국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작품을 발표해 온 미술 작가입니다. 그의 작품은 서술적이고 상징적인 동시에 강력한 표현주의적 조형언어를 구사하며, 6.25에 대한 개인적, 역사적 '기억'들을 탁월하게 '재현'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회화, 드로잉, 입체 등 다양한 매체를 사용한 작품들을 선보이며, 작품의 인문적 성찰을 반영하여 역사적 해석이 필요한 부분들에는 관련 도큐멘트도 전시하였습니다. 더불어 전쟁과 작가에 대한 영상작업, 미국에서 구입한 한국 전쟁 영화 포스터와 잡지의 원본 등 관련 이미지들을 함께 제시하여 총체적인 접근을 시도하였습니다.
전시를 통해 현대사의 아픈 기억을 외면하지 않고 보다 적극적인 방식으로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또한 전쟁에 대한 이해의 폭을 정치·경제·군사 분야를 넘어 예술·인문으로 까지 넓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전시를 위하여 소중한 사진 자료를 제공하여 주신 관련 기관과 관계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성공적인 전시 개최를 위하여 묵묵히 애쓰고 도와주신 모든 분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2013년 6월
고려대학교 박물관장 조명철
Foreword
The Korean War Armistice Agreement signed on July 27, 1953 at Panmunjom provisionally erased-fire of the Korean War since 1950 for three years. This year marks the 60th anniversary of the Armistice Agreement that ended the combat phase of the Korean War.
Korea University Museum presents the special exhibition to commemorate the signification of the 60th anniversary of the Korean War armistice; as part of 'the Korean War Archive Project'.
Suh Yongsun is an artist has taken a keen interest in Korean history, including the Korean War and exhibited art works for long periods of time. His unique style of artworks defined as descriptive, symbolic and expressionistic, and yet excellently represented as personal and historical remembrance of the Korean War.
In this special exhibition, various art mediums such as painting, drawing, and installation are used. To reflect the humanistic introspection related documents are exhibited along with the artworks if the interpretation of history was needed. In addition, we exhibit media works about the war and the artist, along with the Korean War movie posters and journals from the US.
Through the exhibition, we will have a chance to confront and overcome the psychological wounds of the war rather than disregarding the painful memories of modern history in Korea. It will broaden and deepen the understanding of the Korean War beyond the politics, military, economy to arts, himanities.
Lastly, I would like to express my sincere gratitude to all the people who previded the photography data. I appreciate everyone who assisted and prepared for the exhibition.
June, 2013
Cho, Myung Chul
Director
Korea University Museum
※ 출처: 조명철, 「인사말」, 『한국전쟁 정전60주년 특별전_기억·재현 서용선과 6.25』, 고려대학교 박물관, 2013, pp. 4-5
서문 | 기억·재현, 서용선과 6.25
정영목(서울대 교수)
들어가며
1950년 6월 25일 시작된 6.25전쟁은 3년 후인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맺어진 정전停戰 협정에 의해 휴전되었고, 올해는 그 정전 협정이 체결된 지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1953년 7월 27일이 무슨 날인지 모르고 있다. 특히 우리 조국을 이끌어 나갈 청소년들은 더욱 그러하다. 정전停戰은 종전終戰이 아닌, 즉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닌 미룬 상태'라는 상황의 의미를 대부분의 국민들이 그다지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컬하다. 어쩌면 그 '의미'를 제대로 살필 여유 없이, 전쟁에 대한 두려움, 아니면 '설마 전쟁이 또 일어날까?' 식의 안일함, 이 양극의 논리가 마치 흑백처럼 너무나 확고히 한국인들의 사고 체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아이러니컬한 것은 아닐까?
북한은 올해 3월초 3차 핵실험에 대한 유엔의 제재 움직임과 '키 리졸브', '독수리연습' 등 한·미 연합훈련에 반발해 정전협정을 백지화하고 북·미 간 군부전화 차단을 포함한 판문점대표부 활동을 전면 중지하겠다고 밝혔다. 남한의 대북 정책은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평화' 혹은 '대립'적 이데올로기의 역사를 반복하고 있다. 이미 한국전쟁을 겪었고 또한 이라크전쟁과 본의 아니게 연루된 우리로서는 북핵을 둘러싼 세계 강대국들의 다음 행보가 심히 걱정되는 현시점에 와있다. 이러한 시점에서의 평화란, 단순히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단어가 아닌 우리의 생사와 직접 관련된 진지한 화두話頭일 수밖에 없다.
본 전시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 출발부터 많은 고민이 있었다. 우선 전시 명칭을 정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었다. 전시의 주제를 떠나, 1950년 6월 25일부터 3년간 한국에서 일어났던 이 전쟁의 '명칭'조차 아직까지 논란이 있기 때문이다. 이 전쟁을 우리는 보통 6.25, 혹은 한국전쟁이라 부른다. 후자의 경우 제3자의 입장(외국)에서는 한국에서 일어난 전쟁이기 때문에 '한국전쟁Korean War'이라 명명하지만, 전자의 경우 우리가 주체인 자국自國 내에서의 전쟁이므로 6,25사변, 6.25전쟁 등, 6.25라는 명칭을 선호한다. 6.25가 북한의 남침을 겨냥한 'civil war'의 개념이라면, 후자의 표현은 6월 25일의 전면적인 남침이 아니더라도 사실상의 전쟁 상태는 1948년도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므로 굳이 '6.25'라는 특정사건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내포하고 있다.
한편,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것 또한 그들의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성향을 대변하므로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은 미국에 대항해 공식 적인 전쟁을 선포하고 '중국인민지원군(Chinese People's Volunteer Army, 中國人民志願軍)'을 파견해 이 전쟁의 또 다른 주체자의 입장이 되었다. 그렇더라도 용어상 중국은 '항미원조抗美援助' 를 위한 지원이었으므로 전쟁의 주체는 북한 당국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미국은 북한에 대항해 공식적인 선전포고 없이 '경찰행동police action'으로 전쟁에 참가해 유엔군과 남한을 대표하여 모든 전권戰權을 행사했으므로 'civil war'의 개념을 넘어서 남한의 한국군이 전쟁의 주체 역할을 하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명칭을 둘러싼 논란들이 전쟁을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달라지는 것에 주목하여 우리는 고민 끝에 '한국전쟁' 과 '6.25', 두 단어 모두를 병기倂記하기로 결정했다. 용어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러한 단순한 명칭조차 깊이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이 혼란스런 '상황' 그 자체가 '정전 60주년'의 현 상황이자 현실이니, 전시도 이 역사적 상황과 지금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러한 측면에서 서용선은 이 '혼란'과 '애매모호'한 현 상황과 환란患亂을 드러내기에 가장 적합한 작가라고 볼 수 있다. 6.25전쟁을 포 함하여 서용선은 오랜 기간 한국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작품을 발표해왔다. 작가의 독자적인 작품 행보와, 서술적이고 상징적이면서도 강력한 표현주의적 조형언어를 구사한 그의 작품은 6.25에 대한 개인적, 역사적 '기억'들을 탁월하게 '재현'해냈다.
서용선의 작품 세계를 통한 본 전시의 목적은 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을 기념하여 과거 전쟁을 겪고 현재 정전을 지속해 오는 우리의 역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제시하는 데 있다. 또한 오늘날의 미술전시는 시공간을 통한 이미지의 정치학이자 수사학이다. 때문에 전시는 말없이 대중을 선동하고 우리의 뇌리에 시詩와 같은 이미지로 긴 여운을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본 전시는 무엇을 주장하거나 평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단지 전시를 관람하고 접하는 대중에게 전쟁에 관한, 나아가 우리의 현대사에 대한 그들의
'시선'과 '관점'을 다시 생각하게끔, 화두를 펴처럼 던져 주고 싶은 것이 기획의 목적이기도 하다. 6.25, 전쟁, 정전, 그리고 현 상황과 우리의 역사에 대하여 생각해 볼 '여지'와 '여유'를 던져주는 것, 그러나 피해갈 수 없는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이고, 미래인 이 전쟁의 업보業報를 서용선의 작품을 통해 화두로 삼아 볼 것을 기획자로서 권장한다.
기획 의도를 반영한 다각적이면서도 복합적인 전시가 되도록 노력하였다. 작가 서용선의 작품의 장르 역시 회화만이 아닌 드로잉, 입체 등 폭이 넓을 뿐만 아니라, 작품의 인문학적 성찰을 반영하기 위하여 역사적 해석이 필요한 부분들에는 관련 도큐먼트도 함께 전시하였다. 아울러 시각문화의 차원에서 전쟁과 작가에 대한 영상작업, 미국에서 구입한 원본의 한국전쟁 영화 포스터, 잡지 등 다양한 관련 이미지들을 수합하여 전시의 풍부함을 꾀하고자 하였다.
1. 정전 60주년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인류 역사에 기록된 전쟁의 사망자 순위를 보면 한국전쟁은 대륙급 세계대전들을 제외하면 최상위권에 랭크되어 있다. 즉 세계대전이 아닌 전쟁으로서는 인류역사상 최악의 인명피해를 냈다고 볼 수 있다. 한반도라는 극히 좁은 지역에서만 싸웠다는 점, 그리고 3년이라는 긴 전쟁기간을 고려하면 아마 단위면적 x 단위시간 당 사망자 숫자가 매우 높을 것이다. 물질적인 파괴 또한 공식적인 통계로만도 북한 주거시설의 70퍼센트, 한국 주거시설의 50퍼센트가 파괴되었다. 즉 전국의 건물 반 이상이 파괴된 것이다. 정전 직후, 남한 재정의 약 40퍼센트를 미국에 의존하는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하고, 북한도 100년이 지나도 복구하기 힘들 것이라는 외국인들의 평가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현재는 그런 전쟁이 멈춘 지 60년이 되었다.
아직까지도 6.25에 관한 여러 가지 논란과 관점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논의들 속에서 한 가지의 공통된 의견은, 6.25는 우리에게 몹시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다. 'critical'이라는 용어로 이 문제를 바라보자. '치명적인, 중요한, 위협적인, 비평적인'이라는 뜻을 가진 이 용어는 우리가 6.25를 어떻게 보고 다루어야 할지에 대한 시선을 제기해 준다. '치명적인' 역사, 현재까지도 세계적으로 매우 '중요한' 동시에 '위협적인' 사항인 이 전쟁과 그 역사 속의 잔상들, 그리고 미래에도 지속될 것들을, 이제는 '비평적 인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할 때이다.
그렇다면 6.25전쟁에 뒤이어 분단 체제의 고착을 가져 온 정전협정은 과연 어떻게 체결되었으며 우리에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1950년 10월 19일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1951년 여름 이후부터 전쟁은 38선 근처에서 교착 상태에 빠지며 지루한 공방전이 이어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은 유엔주재 소련대표를 통해 6.25전쟁의 정전을 제의하였고, 남측 유엔군 사령관은 북한의 김일성과 펑더화이彭德懷 중국군 사령관에게 정전회담을 제안하고, 이를 북한 측이 수락함으로써 7월 8일 개성에서 예비회담을, 7월 10일부터는 본회담을 개시하면서 본격적인 회담이 진행되었다. 양측은 본 회담 개시 17일 만에 의사일정을 합의했고, 10월 27일부터는 군사분계선 설정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토의에 들어갔다. 그러나 군사분계선 확정문제는 쉽게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난항을 거듭하다, 결국 11월 27일 현재의 양측 군대가 대치하고 있는 접촉선을 기준으로 군사분계선을 설정한다는 내용에 합의했다. 이 군사분계선은 30일 이내에 정전이 성립되지 않으면서 효력을 잃었지만, 이후 어느 정도 수정을 거치면서 최종적인 군사분계선의 기준으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군사분계선 못지않은 난제가 바로 포로송환 문제였다. 일반적인 전쟁이라면 국제법에 따라 포로송환이 이루어지면 그만이지만, 6.25전쟁은 같은 민족의 이념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포로들도 자신들의 이념에 따라 갈라져 있었고,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도 많았기에 이 문제로 정전협상은 난항을 겪게 되었다. 그러다가 1953년, 미국에서는6.25 전쟁을 끝내겠다고 공약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취임하고, 소련에서도 정전에 미온적이던 스탈린이 사망하면서 정전협상 재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중국에서도 저우언라이周恩來 수상이 이해 3월 30일 북경 라디오 방송을 통해 부상포로 우선 송환 및 포로송환을 위한 중립국감시위원회 구성을 제안하고, 5월 7일 북한과 중국이 제시한 포로송환원칙에 대해 5월 25일 유엔군이 수락하면서 정전회담은 재개되고, 포로송환 합의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이런 포로송환 협상을 거부하고 유엔군 측 대표단에서 한국 대표를 소환하고, 반공포로를 전격적으로 석방한다. 이 일로 한때 미국과 갈등도 있었지만, 결국 정전 이후의 안전보장을 위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다. 반공포로 석방 이후에도 정전협상은 계속 진행되어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본회의장인 판문점에서 제159차 정전협정이 이루어지고, 유엔군 측과 북한, 중공군 측이 서명하면서 6.25전쟁은 정전상태로 들어갔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최덕신 육군 소장을 배석만 시킨 채 협정문에 사인하지 않았다. 이후 총성은 멎었지만 전쟁은 종전이 아닌 정전 상태로 들어갔다. 일반적으로 정전협정 후에는 완전한 평화정착을 위한 평화협정이 이어지기 마련이나 한반도에서는 평화협정에 대한 이야기는 있었지만, 북한은 대한민국 대표가 정전협정문에 사인하지 않았으므로 평화협정 협상 대상에 대한민국을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우리와 유엔군은 대한민국도 당연히 평화협정에 참여해야 한다는 입장이므로 협상조차 이뤄지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후 60년간 전면전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북한의 무장공비 침투, DMZ에서의 산발적인 교전, NLL 해상 도발 등 남북 간의 국지전 및 중장거리 미사일과 핵의 위협은 여전하며, 최전선의 긴장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대한민국은 정전협정일을 특별히 기념하고 있지 않지만. 미국은 6.25전쟁에서 전사한 3만 7천명의 미군을 추모하기 위해 지난 2009년 정전협정일을 '한국전 참전용사 정전일'로 제정하였다. 오바마 대통령 역시, 2009년 취임 이후 해마다 “한국전 정전기념일 포고문"을 발표하여 한국전쟁의 의미를 되새기고, 올해 7월 27일에도 미국 전역에는 성조기가 조기로 일제히 게양될 예정이다. 미국 내에서 그동안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라 불릴 정도로 푸대접을 받던 이 전쟁이 최근 한국보다 미국에서 더 관심을 가지고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이는 정전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미국에게 북한은 과거 적국이었고 현재도 핵 위협국가로 대립적 관계를 지속해 가고 있지만, 우리에게 북한은 한 민족이자 오랜 시간 한 나라였기에 '포로 송환' 당시의 '국가 선택'에서조차도 갈등이 있어 왔다. 이러한 갈등은 현재에도 이어지는데 비단 분단의 아픔을 직접적으로 겪고 있는 이산가족의 문제만은 아니다. 대한민국 청년들이 군대에서는 북한을 '주적'이라고 배움과 동시에 월드컵이나 올림픽에 북한 선수가 나오면 타국에 비해 민족적 동질감을 가지고 오히려 북한을 응원하게 되는 마음의 괴리로도 이어진다. 즉 우리에게 북한이라는 존재는 역사적으로 모순의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기에, '우리 편/남의 편Our Side/Their Side'을 가를 때조차도 북한을 완벽한 남의 편으로 볼 수 없다면, 미국의 입장에서 남한은 'Our Side'라는 이미지를 구축해야만 하는 곳이고, 북한은 그저 완벽한 '타자他者'이자 '적enemy'으로서의 'Their Side'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이분법적인 사고 체계가 얼마나 많은 것을 외면하게 하고 또 얼마나 중요한 것들을 간과하게 만드는지 오랜 역사 속에서 이미 배우지 않았던가. 정전 60주년인 현재, 60년 전의 정전협정조차 참여하지 못했던 남한에게 정전이 시사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또한 우리 편이면서 남의 나라인 미국에서 더 기념되는 정전협정일과 그들이 재평가하는 한국전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지, 생각해 보지 않았다면 다시 생각해 봐야 할 시점이 바로 지금이다.
정전은 종전終戰이 아니다. 정전은 현재 이 시간에도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두려움과 공포의 상징인 물리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일차원적인 개념에서 벗어나 현재의 상황을 좀더 비평적으로 살펴볼 것을 권장한다. 세계 강대국들 사이에서 흔들리고 국내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정처 없이 오락가락하는 대한민국의 시국이 바로 '정전'의 현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은 혹시 아닐까. 우리는 이 부분을 화두話頭의 핵심으로 올리고 싶었다. 주장하기보다는, 가리키는 모습으로. 저것은 무엇이다, 라고 함부로 정의하기 전에 저것이 무엇일까? 라고 질문하는 방식으로 6.25에 대한 우리의 현재를 짚어보자.
2. 6.25전쟁의 指紋, 또는 地文
터에 새겨진 무늬라는 뜻의 지문地紋이라는 단어가 있다. 인간은 자연의 무늬 위에 삶의 기록을 덧대므로 문양의 '문紋' 자를 글 '문文' 자로 바꾼 게 '地文'이다. 땅은 엄청나게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어떤 것은 자연이 그 생성과 변화를 기록하였고, 더러는 인간이 삶을 통해 사건과 변천을 기록한 역사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내용도 마치 인간의 손금과 지문指紋처럼 모두 다르다.
필자는 전시나 저서의 새 프로젝트를 구상할 때마다, 그와 관련된 장소를 보지 않고서는 어떤 이미지도 그릴 수 없다. '장소'를 섭렵하는 일이 우선인 필자에게 그 장소를 처음 대하는 순간은 항상 벅차다. 그 장소는 미완의 전시 공간일 수도 있고, 작가의 작업실일 수도, 작가가 영감과 소재를 얻은 장소일 수도 있으며, 그렇기에 곧 '역사History'가 중첩된 곳이기도 하다. 어떤 곳은 이제껏 쌓인 내밀한 기록을 한꺼번에 풀어 보이기도 하지만. 어떤 곳은 좀체 그 비밀을 들려주지 않는다. 요행히 장소가 가지고 있던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경우, 그 이야기의 결에 우리의 시선을 덧대어 그려야만, 아이디어의 설계는 비로소 시작된다.
'역사'가 원하는 내용을 경청하고 그것을 시각화하는 일, 이것이 전시 기획 준비 중 세 차례의 답사를 거치게 된 이유다. 이를 통해 전시에 지문指紋을 남긴다면, 그리고 우리의 땅과 역사의 새로운 지문地文이 된다면 이 전시는 절반의 성공은 달성한 셈이다.
작가 서용선의 작업실을 방문하고, 태백의 '구와우'에 설치한 작가의 대형 조각 작품을 접한 후, 전시의 보다 구체적인 아이디어들이 잡혀가기 시작했다. 작품이란 결과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 제작 과정 역시 보이지 않는 숨결처럼 묻어나는 것이기에 경기도 양평의 작업실과 더 나아가 태백은 작가의 정체성Identity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던 '장소성'의 공간이자, 터의 '지문'이 묻어있는 생동감의 현장이었다.
그 날 함께 방문한 '태백 중학교'는 매우 인상 깊은 장소 중의 하나였다. 단군이나 이순신 장군 대신에 학교 운동장에는 6.25 전쟁 당시 참전한 학도병의 동상 무리들과 거대한 기념탑, 탱크 조형물, 그리고 기념관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조형물들이 충격적이었던 것은 협소한 지형의 자그마한 학교와 비교하여 그 규모가 너무 컸으며, 보다 극적인 효과를 위한 시각적인 연출이 지나칠 정도로 과장되어 유치하게 보였다.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싸웠던 그 땅의 어린 학도병들을 기리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이 시각개월 조형물들이 갖는 거친 폭력성과 그것의 은유적 상징이, 태백 중학교 학생들과 지역주민들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해 보니, 이것이 현재 우리가 재생산하고 부추기는 전쟁 이데올로기의 이미지이자 곧 '오늘날의 전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교육' 장소에서 '성장기'의 학생들이 매일 보게 되는 이 조형물들은 과연 이들에게 어떤 의미가 되고 어떤 심상心想으로 남을 것인가? 이처럼 전쟁의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반복하여 재생산하고 잊지 말라고 부추기는 직설적인 이 장소가 또 다른 의미의 전쟁의 현장은 아닐까?
더욱 가관인 것은 학교 내의 기념관 입구 정면에 우스꽝스러울 정도의 하얀 수염의 나이 든 남성이 우리를 손가락질하며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하였는가"라고 외치는 그림을 걸어 놓았다. 1910년대 미국의 모병 포스터 '엉클 샘Uncle Sam'을 흉내낸 그림으로 여기저기에 걸려 있는 미국 찬양조의 현수막보다 이 그림이 더욱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이것이 상징할 그릇된 민족주의적, 국수주의적, 나아가 배타적이기까지 한 이데올로기의 어리석음이 위험할 정도로 순진해 보였기 때문이다.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에 위치한 노근리의 답사에서도 이러한 순진함은 여실히 드러났다. 6.25전쟁 중 미군이 저지른 노근리 대학살 사건이 일어났던 쌍굴다리에 비극적 으로 남아 있는 총탄의 잔상은 우리를 슬프게 하고 안타깝게 하는 현장이다. 미국의 사과 절차가 아직도 충분치 않음을 생각하면 이 역시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의 단편임이 자명하다. 그러나 바로 그 앞에 자리한 노근리 평화공원과 노근리 평화기념관은 그 비극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던가? 역사에 대한 진지하고 비평적인 고민보다, 그 비극과 관련한 '오브제Object' 들이 '박물화博物化', '박제화博製化'된 채 '관광화觀光化'되어가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이렇듯 전쟁과 학살도 낭만적인 시선으로 재포장하여 상품화商品化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속성인 것처럼 느껴져 안타까웠다. '기념비적monumental'이어야 할 장소와 그 운영의 재단이 이 사건을 재조명하고 관련 논의를 재점검하기보다는 지역의 발전과 연계한 '행사'에 치중하며, 평화를 역설하는 순진한 모습 역시 우리가 다시 생각해야 할 '태도'와 '시선'의 문제이다.
'관광상품Souvenir'식의 분단현장을 직접 목격하기에 적합한 장소로 강원도 양구군의 펀치볼과 제4땅굴은 더욱 인상적이었다. '펀치볼punchbowl' 처럼 움푹 파인 것 같은 독특한 지형이 내려다보이며, 북한 쪽 비무장지대의 전경을 관람할 수 있게 꾸며진 을지전망대는 군의 통제가 엄격했다. 때문에 남북한의 대치상황을 실시간으로 느낄 수 있다는 매력이 답사(일반적으로 '안보관광' 이라 함)의 포인트다. 관람객을 위하여 을지전망대의 안내 및 설명을 맡은 군인은 위협적인 적의 침입에 항시 대기하고 있다는 말과 함께 우리 국방력의 튼튼함을 강조했다. 그의 설명은 "6.25 전생과 우리의 주적을 잊지 말고 맞서 싸우자"는 결론으로 끝난다. 동시에 가끔 북한 군인들이 빨래하고 목욕하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다고 말하는 우리 쪽 군인들에게조차 이 장소가 북한을 타자로서 '관람하게' 해 주는 '구경거리'의 장소가 되었음을 피부로 느끼게 되니 더욱 낯설었다. 제4땅굴의 경우는 어떠한가? 기념관과 땅굴 관람 열차를 보유한 그 곳의, 북한과의 전쟁에 대한 '두려움 주입'식의 '구경거리'를 집어넣은 이미지 전략은 몇 십 년이 지나도 결코 변하지 않은 전쟁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보여 주고 있었다.
세 차례의 답사를 통해 필자는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부추겨지는 이데올로기의 현장이 우리 사회의 곳곳에 산재해 있음을 목격했다. 참사와 분단의 과거보다 오히려 사회 곳곳에 산재한 실시간의 현장들이 곧 우리의 전쟁터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의 지문들은 곳곳에 각인되어 우리의 일상과 심리에 관여한다.
3. 서용선과 6.25
"역사적 기억 없이는 어떤 아름다움도 존재할 수 없다."- Adorno
역사는 완성되는 게 아니다. 늘 변화하고 생성되며 오랜 기억 위에 욕망이 덧대어지는 생물체이다. 아도르노가 "역사적 기억 없이는 어떤 아름다움도 존재할 수 없다."라고 주장하듯, 서용선 역시 이 주장처럼 미술로 우리의 역사를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켜 그것을 우리에게 증명하고 '제시提示'해 주는 가장 적절한 작가일 것이다.
그는 역사의 기억과 참상을 그려내고 그 이야기를 전하는 탁월한 이야기꾼일 뿐만이 아니라 잊힌, 낙후된, 외면된, 그리고 그렇게 되어가는 것들을 기억하고 재현하여 보여주는 예술가이다. 20년 넘게 작가를 보아온 필자는, 이야기꾼 서용선의 작품 세계를 '원색原色의 인문학' 또는 '원색原色의 한국사'라 칭하고 싶다. 그는 많은 역사적 기억들과 신화적 상징들을 그려 오며 침잠되었던, 소외되었던 한국사의 이야기들을 들춰내고 재생한 작가이다. 이런 끈질김을 지닌 서용선의 작품 세계는 또 하나의 시선으로 바라본 한국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번 '한국전쟁 정전 60주년 기념 전시'를 통해, 그가 가진 6.25 전쟁과 관련한 기억과 재현을 통해, 화가의 시선으로 바라본 '우리의 이야기Our Story'를, 새로운 지평의 인문학적 역사라 칭하고 싶다.
서용선은 1980년대부터 회화의 서술적 역할에 대한 조형적 탐구를 꾸준히 계속해왔다. 여기서 말하는 회화의 '서술적 역할'이란 우리의 사고를 담는 언어와 글 그리고 시각언어라 할 조형적 이미지 간의 상호작용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림과 언어의 상호작용에서 서용선은 특히 정치, 사회적 현상에 주목했다. 그는 근본적으로 이 시대 미술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물음과 그 물음의 조형적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으로서 회화의 서술성에 천착한다. 기존의 미술사적 장르로 분류하자면, 서용선의 전시작품들은 '역사화history painting'에 속한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역사화는 단순한 역사의 '기록화'와 다르다. 기록화가 사실Fact에 충실하여 사건을 기록하고 기념하여 기억하려는 것이 주목적이라면, 역사화는 역사History라는 단어에 더 중점을 둔 것이다. 역사History라는 단어는 본디 '이야기 Istoria'라는 그리스어에서 비롯된 것으로 사실의 충실한 재현보다는, 사실의 '이야기'를 재해석, 재평가한 시대의 사관史觀에 근거한 재생산의 산물이다. 서용선의 6.25 작품들은 바로 여기에 속한다.
서양미술사의 근간을 형성하는 대부분의 작품들이 종교와 신화의 이야기를 포함한 역사화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다만, 20세기에 들어와 이야기와 결별을 선언한 추상미술의 득세와 함께 역사화가 쇠락의 길을 걸은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러한 측면으로 말미암아 서용선의 역사화는 더욱 돋보인다. 특히,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서용선 만큼 집요하고 끈질기게 그리고 무게와 깊이 있게 역사화에 몰두한 화가는 없을 것이다.
'형상성의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서용선의 회화는 그의 독특한 표현주의적 스타일과 함께 한국 현대회화의 현장에서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1970년대 서구의 실험적인 미술들을 피상적으로 소화하면서, 형상성의 부활을 통한 회화의 재현적인 방법이 여전히 중요한 표현 수단임을 깨달았다. 회화가 소통의 차원에서 눈앞에 펼쳐지는 현전의 세계와 관계함으로써 그 본연의 역할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이 생긴 것이다. 이 신념은 곧 형상성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하는 '정체성'의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서용선은 같은 세대의 다른 작가들과 달리 회화의 인문학적 태도를 시공간의 확대된 영역에서 깊이 있게 추구한다. 예를 들어, 어떤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을 다시 들춰내어 표현함으로써 그것 자체가 현실과 단절될 수 없는 또 다른 지금의 현실임을 강조하는 것에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나선다. 이러한 접근은 곧 작가 자신의 '주체적' 정체성을 반영한 것으로 결국, 그것이 회화로 성립되는 과정에서 모든 인문학적, 사회적, 정치적 태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또한 그것을 진지하게 작품으로 실천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것이 문헌이나 개인의 구술에 의한 과거의 기록이든 혹은 역사가 될 이 시대의 현장이든, 서용선은 이야기로 형성된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시각적인 이미지로 들추어내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서용선이 재현한 6.25의 기억은 과연 어떤 것인가?
전생이 영웅의 탄생과 죽음을 낳는 신화와 역사의 주요한 소재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고대 그리스의 트로이 전쟁이 그랬고, 알렉산더 대제의 전투도 그랬다. 신사의 도를 중요시하는 과거 서양인의 전투는 때론 낭만적이거나, 벨라스케스의 <브레다의 항복Surrender of Breda>처럼 승자와 패자의 아량과 겸손이 있었다. 그러나 현대전은 다르다. 진정한 승자와 패자를 가를 수 없는 대규모의 살상과 파괴가 기계적으로 자행되는 현대의 전쟁은 그야말로 소모적인 인류의 재앙이다.
아마도, 이러한 양상의 대표적인 전쟁이 한국전쟁일 것이다. 미국의 초토화 전략과 중공의 인해전술 등 이 작은 나라에서 무려 3년을 끈 이 전쟁을 당사자 국가들 누구도 기억하기를 꺼린다. 그런데 서용선은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도 아니면서 동란動亂의 상흔들을 자꾸 들추어낸다. 북쪽 서울의 관문인 미아동 근처에 살았던 작가는 부모님에게서 들은 전쟁의 잔상들이 나이가 들수록 더욱 또렷해진단다. 말을 못했거나 안 해서 그렇지 냉전의 논리를 떠나서라도 어느 세대건 전쟁의 후유증은 정전 후 60년이 된 지금에도 사회 곳곳, 속속들이 틀어박혀 갈등과 반목의 아픔으로 우리를 움츠리게 만든다.
소설가 박완서는 6.25전쟁을 회상하며 늦은 등단의 이유를 밝힌 바 있다. 그는 전쟁 당시 만났던 '나쁜 사람'을 언급하며 "소설 속에서 저 '악인'을 그려내겠다" 는 일종의 '복수심'으로 당시 힘든 상황을 버텨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전쟁이 지나가고 가정을 꾸리며 편하게 살면서 소설을 쓰겠다는 불같던 욕망도 점점희미해지고 생활에 젖어갔단다. 그러다가 전쟁의 비참한 현실을 같이 겪던 박수근 화백이 유명을 달리하면서 그 사람과 함께 했던 시기를 '증언' 하고픈 욕구가 일어났고, 그것이 그를 40세에 문단에 등단하게 했다고 말한다. 박완서의 증언은 6.25전쟁과 한국의 예술가들에 대한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이다. '표현'을 중시하는 예술가들에게 6.25 전쟁이란, 외치고 부딪히고 절절히 써내려가고 그려내며 '이야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그런 사건인 것이다. 박완서가 직접 겪었던 경험을 토대로 전쟁을 이야기했다면 서용선은 그 잔상이 남은 시대와 이 땅에 사는 사람으로서 끊임없이 역사를 살핀 경우라 하겠다. 그래서인지 서용선의 전쟁그림은 다소 인간적이며, 치유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의 전쟁그림은 직접적인 전투 장면보다 그 여파로 발생하는 여러 종류의 희생과 고통을 다룬다. 지게에 포탄을 지고 나르는 부역인들의 심리적, 육체적 고통과 노근리 학살에 의해 무고하게 죽어가는 희생자들의 희생은 '전투'보다도 전쟁의 참상을 더욱 감성적으로 드러내는 기재일 것이다.
그의 작가적 성찰을 담아내는 시각적 형식은 다분히 표현주의적이다. 상상력과 사실, 구체성과 함축, 표현과 묘사 사이에서 표현주의적 형식이 그의 작가적 성찰을 담아내는 그릇으로서 얼마나 효과적인지에 대한 가치판단은 제3자의 몫이다. 그의 작품에서 먼저 보아야 할 것은 그가 제시한 역사적 이야기들의 시각적 표현이 한 집단이나 사회의 희망, 가치, 공포, 갈등, 열망 등을 어떻게 반영하는가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번 전시를 통해 서용선의 6.25에 대한 기억이, 정전 60주년을 맞이한 현재 우리 사회에 얽힌 이념, 욕망, 고뇌, 혼란 등을 어떻게 재현하는가를 볼 수 있다.
서용선의 작품이 강한 어조로 인간의 부정적 실존을 표현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느 구체적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고발하거나 파헤쳐 진리의 모습을 만인 앞에 드러내 보이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인간의 실존에 포함되어 있는 구체적 리얼리티의 본질적 형상을 상징화해 어느 한 시대의 보편적 형상으로 승화시켜 보자는 것일 것이다. 이것이 작가의 궁극적인 의도이기에, 작가의 리얼리티는 서술적인 형상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제의식을 정확하게 예견할 수 없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현존 상황의 직시를 회피하거나 삶의 구체적 리얼리티를 외면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실존의 상황과 삶의 구체적인 리얼리티 속에 내재된 본질적인 형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작가가 의도적으로 애매모호하게 변형했기 때문일 것이다.
답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 주장하기보다 막연하게 지향하는 애매모호한 방향성이야말로 인간 삶의 본질적 형상에 가깝다는 것, 이는 서용선의 작품 세계와 필자가 이번 전시에 담고자 했던 한국전쟁과 정전을 향한 '시선'과 '태도'에의 주안점이 교차하는 부분이다.
서용선의 지성知性적 스타일은 표현주의적 왜곡distortion과 겹칠하거나 덧칠하여 대비시킨 강렬하고 과감한 감성적 색감, 또는 화면을 꽉 메운 예상 밖의 확대된 군상과 지극히 의도적인 어설픈 붓질 등 작가 특유의 조형언어로 주제를 돋보이게 해준다. 특히 선택의 폭이 넓지 않은 삼원색-빨강, 노랑, 파랑-의 강렬하고 과감한 색감을 평면적으로 터치한 뒤 초록과 보라 정도의 배합으로 처리되는 화면은 색조 자체만으로 주제나 내용에 앞서 자율에 의한 심리적, 상징적 효과를 발휘한다. 원색의 평면 배경에 겹칠하거나 덧칠한 굵은 선의 붓질은 우연적이고, 직관적이고, 감성적인 느낌을 주지만 실제로는 지극히 의도적이고 구조적인 색감의 결합력을 염두에 둔 것이다. 때문에 색상에 의해 각 형태들은 서로의 독립성과 상호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어떠한 확신성이 느껴진다.
그는 색채 뿐만 아니라 왜곡된 공간의 구성을 선호한다. 개개인의 삶과 전쟁. 그리고 역사라는 거대 담론의 실존적 명제를 포함한 현실 공간을 작가의 입장에서 화면에 옮기기란 상당히 막연하며 어려운 과제일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회화의 평면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의도적으로 공간감을 왜곡시켜, 이 왜곡의 애매모호한 태도가 오히려 개인적인 상상력의 여지를 극대화시킨다. 또한 왜곡을 통하여 그가 포착한 삶의 단면에 누구나 느끼고 접근할 수 있는 객관적 상황, 즉 어느 상황의 분위기를 함축적으로 제시해준다. 때문에 작가는 명료한 제목을 사용하면서도 그 상황을 사실적이고 구체적이기보다는 어느 정도 비논리적이고 얼버무리거나 애매모호하게 변형시킨다. 그리고 이것이 작품의 상징적 효과를 높인다. 작가는 왜곡이라는 조형언어를 통하여 자신의 작품을 보는 사람들의 감성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한편, 그로 인한 반응의 폭을 넓힘으로써 적어도 왜곡된 양식 속에 함축되어 있는 자신의 주제의식이 인간의 부정적 실존이라는 이 시대의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길이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인간과 전쟁, 6.25와 한국의 역사에 대한 서용선의 반응은 결국 '자유에의 의지'로 귀결되는 것 같다. 어떤 형태로든 자유를 억압하고 구속하는 것들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겠다는 것이 그의 작가적 태도이다. 그것이 전쟁, 폭력, 경계 등 물리적으로 신체의 자유를 억압하는 직접적인 행위이든, 이념과 역사, 정치와 경제 등 인간의 정신적, 사회적 자유를 제한하는 간접적인 가상의 실체이든 간에 그에게는 모두 사유와 치유의 대상이 된다. 때문에 완전한 자유에의 의지에서 발현한 '유희 본능'으로서의 미술이야말로 지금의 시대가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이자, 우리의 훼손된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작가는 주장한다. "국가나 민족보다 인간을 사랑한 실러Schiller에게서 나는 자유의 본질을 본다."는 작가의 믿음은 단호하다.(서용선: 『이념과 현장들』, 9쪽) 그는 실러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실러를 통해 자신의 믿음을 확인하고 있을 뿐이다. 실러의 견해처럼, 근대 이후의 사회는 인간의 총체성과 통일성을 앗아가면서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 국가는 인간을 조작 가능한 객체 정도로 격하시켰다.(앞의 책, 『독일문학사』 중의 실러의 "인간의 미적 교육론(1975)"에서 인용한 구문) 바로 이러한 분리된 우리의 자아를 총체성의 조화로 회복시켜야 하며, 보다 높은 차원의 예술로 되살리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는 실러의 주장은 곧 서용선의 주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정전 60주년을 맞이한 현 한국 사회에서 이데올로기나 대립에의 갈등을 넘어 우리가 돌아봐야 할 진정한 '평화'를 향한 상징적인 메시지이기도 하다.
나가며
<소리치는 사람>이라는 서용선의 작품이 있다. 오랫동안 태백의 언덕에 있던 그 작품은 지금도 머언 저 너머를 보고 있다. 그가 과연 무엇을 외치는지는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를 '보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가 들리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은가. 서용선의 이 전시도 그와 마찬가지다. '역설'과 '증명'의 태도보다 이 전시를 통해 이 땅에 지문을 남기고, 관람자들에게는 '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을 바라보며 역사를 읽지만 말고 느끼라고 말하고 싶다. 소리치는 사람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하더라도 각자에게 나름의 무언가 보인다면, 들린다면, 느낀다면 이 전시로 우리는 서로가 통했다고 말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프랑스의 두 지성 데리다J. Derrida와 주프루아A. Jouffroy가 2004년에 작성한 전시도록(국립현대미술관, <평화선언 2004, 세계 100인 미술가>展)의 '선언문' 중 다음 구절들을 다시 한 번 상기하고자 한다.
"문화적 일방주의나 정치, 군사적 일방주의는 모두 마찬가지로 인류에게 타락과 부패의 영향을 가져온다.", "(모든 문화가 동등하게 취급되면) 자유는 더 이상 정의와 분리되지 않고 자유라는 알리바이가 더 이상 정의의 폐지를 위한 보증인 노릇을 하지 않게 될 (세계 사회)" 평화를 주장하는 지성인의 역할에 좌우익의 구분, 진보/보수의 편향성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세상의 이치는 그렇지 못하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가진 자들의 일방적인 평화만 있을 뿐,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그들의 탐욕은 지금도 새로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진정한 의미의 '평화'와 '자유'에 대해 비평적인 시선을 던지고 있는 두 지성의 발언은 정전 60주년을 맞은 현시대의 대한민국에게 시사하고 있는 바가 매우 유효하다.
※ 출처: 정영목, 「서문 | 기억·재현, 서용선과 6.25」, 『한국전쟁 정전60주년 특별전_기억·재현 서용선과 6.25』, 고려대학교 박물관, 2013, pp. 6-17
Preface | Memory·Representation Suh Yongsun and the Korean War
Chung, Young Mok (Professor, Seoul National University)
Foreword
The Korean War started in June 25th, 1950 and three years after in July 27th, 1953 an armistice truce was called to stop the war in Panmunjom. Today is the 60th anniversary since the armistice truce agreed. However, many people are not aware of the day, July 27th of 1953, especially the young people who are supposedly lead our future. It is very ironic most people don't give much thought into the meaning of an armistice that is not an end of a war, but a state of holding off the war for a period of time. Could it be the bipolar logic of either the fear of a war or the idleness of 'will the war really happen again? dominates the thought system of Korean people.
This March, North Korea has announced to rescind the armistice truce agreement due to the UN's nuclear test ban and the ROK-US military combined training exercise such as the 'Key Resolve' and the 'Foal Eagle', and also suspend all the Panmunjom representative action including military call connection between North Korea and the U.S.. At every change of the South Korean government, its policy toward North Korea repeats the history of either 'peaceful or conflicted' ideology. Because we have been through the Korean War once and also unwillingly related to the Iraq War, we are seriously concerned about the next step of world powers around the North Korean nuclear. Peace at this time is not just an abstract and ideal word, but a serious topic that directly relates to our life and death.
In this circumstance, the exhibition had many difficulties from its beginning. First of all, there was a difficulty in deciding the title for the exhibition, because till this day, there has been a controversy over the title of this war occurred on June 25th, 1950 for three years in Korea. The war is generally called either the 6.25 or the Korean War. For the latter, the war was occurred in Korea in the eyes of the foreign people, so called the Korean War. For the former, it is a war occurred in our land for Koreans, so prefers the titles like the 6.25 Incident, the 6.25 War, and just the 6.25. The former stands for a 'civil war' started with the North Korean invasion, the latter involves an argument that the actual war began from 1948, so the '6.25' incident, or the North Korean invasion, doesn't stand for as much.
On the other hand, the North Koreans call it a 'National Liberation War' which shows their ideology and political orientation. China became another subject of this war by declaring a war against the U.S. and sending 'Chinese People's Volunteer Army'. Even so, Chinese calls it a 'war against the U.S. support', thus, the subject of the war still is North Korea, As a 'police action' without a declaration of war, the U.S. fought in the war and practiced the entire war power on behalf of the UN army and South Korea. So it is true that the South Korean army did not properly serve the role of a subject in this war.
Focusing on the fact that the controversy over different titles of the war, we decided to use the both titles: "the Korean War' and 'the 6.25'. Apart from the term being right or wrong, this confused 'state' which made us to deeply 'question' a simple thing like a title is the current situation and the reality of the '60th anniversary of the armistice truce', we wanted to show in the exhibition, we wanted to show this historical situation and the reality as it is. In this aspect, Suh Yongsun is the most suitable artist to show the current 'confusing' and 'equivocal' situation. Suh Yongsun has been showcasing works that shows his interest in the Korean history including the Korean War for a long time. His own achievement and his artworks that speak narrative and symbolic yet powerful and expressive visual language outstandingly 'represent' personal and historical 'memories' about the 6.25.
The goal of the exhibition through Suh Yongsun's art is to ask a question of how we will look at our history that experienced a war in the past and still is in the state of an armistice. An art exhibition these days is a politic and rhetoric of image through time and space. So the exhibition often stirs up the public and leaves lingering imagery like poems in our minds. However, our exhibition is not to argue or judge something. The objective of the exhibition is to throw a topic to make the public who view the exhibition to think about the war, and furthermore their 'perspective' on our modern history. Through Suh Yongsun's artworks, I as a commissioner of this exhibition suggest to provide a 'chance' to think about the 6.25, the war, the armistice and the current situation and our history, and to talk about the karma of this war, the undeniable past, present, and future. I tried to make a multilateral and complex exhibition reflecting the intention behind it. The genre of artworks from the artist Suh Yongsun range not only from paintings but also to drawings and sculptures, and to reflect the humanistic introspection we displayed relating documents for the parts that need historical background. For the level of visual culture, we tried to ample the exhibition by collecting various images like the original Korean War poster brought from the U.S., and magazines.
1. The 60th anniversary of the Armistice
It is not a proud history, but the Korean War, excluding the continental world wars, ranks in top for human death toll in many wars in human history. In other words, it could be seen as a war caused the highest human casualty in history for a war that is not a scale of World Wars. Considering the fact that the war only went on the extremely narrow region, the Korean peninsula, and three vear of a relatively long period of the fight, the human death toll per unit area × per unit time probably is very high. An official record shows that for physical destruction, 70% of the North Korean residential facility and 50% of the South Korean residential facility, which is nearly a half of the building on the Korean peninsula, were destroyed. Right after the truce, South Korea degenerated into the world's poorest country for depending approximately 40% of its finance to the U.S., and North Korea was told by foreigners that it would take more than 100 years to recover from the damage. The war that caused it all has been put on hold for 60 years now.
To this day, many dispute and perspectives on the 6.25 still exist. Despite of all, there is one common voice that the 6.25 is very important issue to us. Let's take a look at the issue with a word 'critical'. The word 'critical' means 'fatal', 'extremely important', 'threatening', 'criticizing' and through these meanings it provides how we should perceive and act on the 6.25. A 'fatal' history, an 'extremely important' and 'threatening' war till this day to the whole world, and the afterimage of the history, and the things that will be sustained in the future, it is time to look at all these with a 'criticizing' eye.
Then, how did the armistice agreed which brought the fixated division followed by the Korean War and what kind of meaning does it hold to us? In October 19th, 1950 Chinese Communist Army took part in the war. From the end of the summer in 1951, the war was deadlocked near the '38sun', and continued with the tiresome battles. In this situation, the Soviet suggested an armistice through the Soviet representative in the UN. Then the UN army commander offered Kim Il Sung of North Korea and PengDehuai, the Chinese Communist Army commander, to have an armistice talk. When the North Korea accepted the offer, a preliminary talk was held on July 8th and followed by a main talk from July 10th. Both parties agreed upon the agenda 17 days after the main talk began, and from October 27th they started to discuss about setting a military demarcation line(MDL). However, it was difficult to reach an agreement. After frustrating negotiation, on November 27th they finally agreed on setting MDL by the contact line where both armies were confronting each other. This MDL lost its validity, because the truce did not conclude within 30 days. But after a few revisions it was fixed as the final MDL.
Another problem as difficult as setting the MDL was a repatriation of war prisoners. In case of general wars, a repatriation of war prisoners would follow an international law. Whereas in wars like the 6.25 War where different ideologies of people in one country are acutely opposing, the prisoners were divided upon their belief in different ideology, so some of them refused to be repatriated. Then in 1953, Eisenhower who pledged to end the 6.25 War in his presidential campaign became a president in the U.S. and in the Soviet's Stalin who showed an uncommitted attitude towards the truce died, so the atmosphere for an armistice truce was back on again. On March 30th in China, through the Beijing radio the minister Zhou Enlai proposed to appoint a Neutral Nations Supervisory Commission (NNSC) for a repatriation of wounded prisoners. Then in May 25th, following the repatriation rule proposed by North Korea and China on May 5th, the UN Army accepted and the armistice talk was back on.
However, the South Korean government refused to follow the repatriation agreement, recalled the Korean representative from the UN Army delegation, and suddenly released anticommunist prisoners. This caused discord with the U.S. for some time, and in the end the 'ROK-U.S. Mutual Defense Agreement' was made to assure the security after the truce. The armistice negotiation continued after the anticommunist prisoner release. On 10 o'clock in the morning of July 27th, 1953 the 159th armistice agreement was held at Panmunjom, and the UN army, North Korea, and China signed to ceasefire the 6.25 War. However, the South Korean government had a major general Choi Dukshin seated in but not signed the agreement. It stopped the gunfire, but the war has entered a state of truce, not an end of a war. Generally, a peace treaty for stabilization follows the truce, but in the Korean peninsula it did nothappen, because North Korea argues that South Korea should be excluded from the list of subjects in a peace treaty for not signing the armistice agreement, and South Korea and the UN army insist that South Korea should definitely be a part of a peace treaty.
For past 60 years, no full-scale war has occurred, but the local war between the North and the South Korea such as infiltrations of armed guerilla, multiple belligerences in DMZ, a seaborne provocation over NLL (Northern Limit Line), and the threatening of the medium long-range ballistic missile and a nuclearbomb still exist to this day.
South Korea does not commemorate the day of the armistice agreement, but the U.S. after 2009 set the day of the armistice agreement 'the Korean War Veteran armistice day' to commemorate 37,000 the U.S. soldiers who died in the war. Every year after his inauguration in 2009, the president Obama announces the Korean War Armistice Commemoration Declaration' to reflect the meaning of the Korean War. On July 27th this year all around the U.S. the American flag will be raised at half-mast. The U.S. 'seems to care' more than in Korea about the war that has been poorly treated and called 'a forgotten war'. It makes us wonder, what is the meaning of the armistice?
To the U.S. North Korea was an enemy state and as a nuclear threatening country still is in a opposing relationship. However, to us North Korea was a same country once for a very long time and still shares a same ethnicity, so at the time of the 'repatriation of war prisoners', there was a conflict in 'choosing a country'. This kind of conflict continue to exist to this day, not just to the separated families who directly experiencing the pain of the division. Young men in South Korea learn in the army to view North Korea as a 'major enemy'. At the same time they tend to feel a sense of kinship to the North Korean athletes in the Olympics or the World Cup games and find themselves wanting to root for them which cause emotional disjunction. In other words, because North Korea to us historically has the ironical feelings we cannot view North Korea as an absolutely 'their side' in deciding who's on our side and their side. So to the U.S., South Korea is where they have to build an image of 'our side', whereas North Korea is 'their side', the entirely 'other' and an 'enemy'.
Did we not learn already in a long history that how this kind of dichotomous think system makes us to ignore so many things and overlook the important things? What does the armistice imply to South Korea who was not even able to be involved in the armistice agreement 60 years ago? How should we look at the reevaluated version of the Korean War and the armistice agreement day in the U.S. who are on our side, but still a different country? This is a time to think these questions if we have not.
An armistice is not an end of a war. The armistice still continues at this very moment. We suggest more critically observingthe current state, beyond a single dimensional concept of the physical war, a symbol of fear and threat, has not ended yet. Does the current situation of South Korea which swings between world powers and goes back and forth every time a government changes shows the current status of the 'armistice'? We wanted to bring this up as a focus of the topic. Rather than to argue but to teach, rather than to recklessly give a definition but to have questions, let's examine our present status on the 6.25.
2. Jimoon(지문指紋:fingerprint), or jimoon(지문地文: text) of the Korean War
There is a word 'jimoon(地紋)' in Korean meaning a pattern incised on a land. Because humans leave their record of life over a pattern of a nature, the word text(jimoon(地文) in Korean) was created by changing the letter 'moon(紋:pattern) to 'moon(文:writing)'. A land contains a tremendous history. For some of that history, a nature records its creation and changes, and for other humans record its events and transitions through life. Therefore the content of the history is all different like human's palm print or fingerprint (jimoon指紋:fingerprint).
Every time I plan for new exhibition or publication projects, I cannot come up with any imagery without seeing a related location. Searching for a 'place' is a first step for me, so the moment that I face a place for a first time always is thrilling. The place could be an unfinished exhibition space, a studio of an artist, or a site where an artist got inspirations and materials, thus a place of layered 'history'. Some places show at once their innermost records that piled up until now, but some other places hardly tell their secrets. When getting a chance to listen to a story of the places by a fluke, one should place the attention to the story to finally begin a mapping out process for an idea. Listening to content that a 'history' wants then visualizing it is the reason that we had three visits during the exhibition preparation. If we leave a jimoon(指紋:fingerprint) on the exhibition, and the becomes a new jimoon(地文:text) of our land and history through this process, I could say that the exhibition is half succeeded.
After visiting the artist Suh Yong Sun's studio and his large-scale sculptural work installed in 'Goowawoo' in Taebaek, more concrete ideas for the exhibition began to form. A work does not exist only as an end result. Because the process of making also spread like a breath, the artist's studio in Yangpyeong and the installationsite in Taebaek were spaces of 'site' and lively scenes of the land's fingerprints.
'Taebaek Middle school' is one of the impressive places we visited that day. Instead of 'Dangun' or the naval commander 'Lee Sun Shin', there are a group of statues of student soldiers in the Korean War, a giant monument, an old tank, and a memorial hall on their schoolyard. These sculptures were shocking because their sizes are way too large to the relatively small school building in a confined land setting and their visual display is much to exaggerated and immature for such dramatic effect. I fully understand the intention to honor the young student soldiers of the region who fought for their country. However, the harsh violence and metaphorical symbol that these 'visual installations' have on the students and the villagers, I couldn't help it wonder that this is the image of a war ideology that we reproduce and encourage, and a war of current days. What kind of meaning and imagery does it leave on the minds of students in a 'period of growth' at the very place of 'education'? Is this place a site of different meaning of a war for constantly repeating and reproducing the ideology of a war, and reminding not to forget?
In front of the memorial hall in the school, a painting of an old man with a ridiculous looking white beard pointing at us and saying 'what have you done for your country?' adds more to the scene. It is a imitative painting of a recruiting poster 'Uncle Sam' in 1910s the U. S., and the reason that is more shocking than the banners admirative of the U.S. is that this would symbolizes a false nationalistic and exclusivistic ideology in a dangerously naive manner.
At the visit to Nogeunri in Hwangganmeon, Youngdonggun, Chungcheon-bukdo, this kind of naiveness was clearly visible. Arch shaped 'SSanggul Bridge' where a massacre occurred during the Korean War by the U.S. Army in Nogeunri is sad and regretful scene of a tragedy. Since there were not enough apologetic steps taken by the U.S., it is obvious that this site also is a scrap of the unfinished war. However, how does Nogeunri Peace Park and Nogeunri Peace Museum located right in front of the bridge view this tragedy? Rather than a serious and critical contemplation about the history, it seemed more as the collection of the 'objects' that relates to the tragedy are 'museumized' and 'taxidermied' and turned into 'tourism'. It was sad to see the true nature of capitalism that makes even wars and massacres repacked and commercialized in a romantic sense. The place where that it should be monumental and the foundation that manages the institutions rather than reinterpret the accident and reevaluate the relating discussion but focus on 'events' linked to a development of the region. The naive look of this institution emphasizing peace is another problem of the 'attitude' and 'perspective' that we have to think again.
The 'Punchbowl' in Yanggugun, Gangwondo and the 4th underground tunnel are perfect places to witness the divided scene displayed in a 'souvenir' manner. 'Eulji Observatory' where one can look down to a distinctive terrain of a sunken hole like a 'punchbowl', and the view of the north of demilitarized zone was under severe military control. For that reason, it is fascinating to feel the tension of the confrontation between North and South Korea in real-time (it is generally called a 'National security tourism'). The soldier who took us on the guide tour of 'Eulji Observatory' explained that they are always ready for an invasion of the threatening enemy with an emphasis on the secure preparation of our national security. He ends his tour with the conclusion that is "not to forget the Korean War and fight against our major enemy". It was strange to see it has become a place of a 'spectacle' where one could spectate North Korea from the explanation of our soldier that one can occasionally see the North Korean soldiers do their laundry and bath. How about the 4th underground tunnel? The image strategy used in the place that has underground tunnel train for a tour and the memorial hall which puts a 'fear-injected' spectacles shows our 'attitude' toward the war that has not been changed for decades.
Through three times of the visit I witnessed the scenes of continuously reproduced and encouraged ideology are scattered all over our society. And I realized rather than the tragic past of division, the real-time scenes that are scattered all over our society are our battlefields. The fingerprint of the unfinished war is imprinted all over are involved in our daily life and psychology.
3. Suh Youngsun and the 6.25
"No beauty can exist without historical memories." - Adorno
History is not a subject of completion. It is a living organism that changes and forms, and adds desire over a long memory. As Adorno says "no beauty can exist without historical memories", Suh Yongsun is the most suitable artist who tries to use art to sublimate our history into a beauty(?) and proves and proposes it to us.
He not only is an excellent storyteller who draws the memory and horror of the history and passes the story, but also an artist who remembers the forgotten, backward, ignored things and represents them. I've known the artist for over 20 years, and I would like to call his art world as 'primary color's humanity' or 'the Korean history of primary color'. He is an artist who reveals and revives the neglected stories in the Korean history by painting many historical memories and mythical symbols. This persistent art world of Suh Yongsun could become a Korean history viewed in another perspective. Through 'the Korean War Armistice 60th anniversary commemorating exhibition', and his memories and representations of the 6.25 War, I would like to call 'our story' a new terrain of humanistic history.
Since 1980s Suh Yongsun has studied sculptural research on the narrative role of painting. The 'narrative role' of painting keeps in mind languages and texts that delivers our thoughts, interaction between sculptural images which are visual languages. In the interaction between paintings and languages, Suh Yongsun focused especially on political and social phenomena. He excavates on the narrativeness of paintings as a question on the social function of the art of our time and a process of finding the answer to that question. To categorize his works in art historical genres, it belongs to the 'history painting'. The history paintings that I would like to discuss here are different from the simple form of record/documentary paintings. The main purpose of record/documentary painting is to record events based on facts to commemorate and remember, whereas history painting puts more emphasis on the word 'history'. The word 'history' originates from the Greek word istoria which means a story. It shows that history rather than a faithful representation of facts, but is a product of reproduction based on a reinterpreted and reevaluated the 'story' of facts. Suh Yongsun's 6.25 artworks belong here.
It is a well-known fact most artworks that form the base of the western art history are history paintings depicting stories of religion and myths. It is also true that history paintings went to a downfall when the abstract art which declared a separation to a story rose in the twentieth century. Due to this tendency, Suh Yongsun's history paintings more stand out. Especially in Korean modern art history it is hard to find an artist who persistently gives oneself to history paintings with such weight and depth like Suh Yongsun.
In the aspect of 'restoration of form', Suh Yongsun's paintings with his distinctive expressive style take up an important part in the scene of Korean modern painting. He superficially took 1970s' western experimental art, and realized painting's representation method through revival of forms is still the most important way of expression. He started to believe that paintings would regain its true part by relating with the presence in a level of communication. This belief encounters the 'identity' problem of what and how to express through
forms.
At this point, Suh Yongsun, unlike other artists of his generation, deeply seeks a humanistic attitude of paintings in an expanded field of time and space. For example, he seeks his identity from expressing a certain event of a detailed history and emphasizing that it is a reality of another time that cannot be cut off from a reality. This kind of approach reflects the artist's 'independent' identity. Thus, in the process of making it into a painting he understands all the importance of humanistic, social, political attitude, and he earnestly practices this with his artworks. And that is the reason he likes stories. Whether it is a literature, a record of a past from an individual's oral history, or a scene thatwill soon to be a history, Suh Yongsun wants to find out specific historical events formed with stories into a visual image. Then what is Suh Yongsun's memory of the 6.25 in his representation?
It is a well-known fact that war is a major material for creating births and deaths of heroes like in the Trojan War of ancient Greece, and the battle of Alexander the Great. The battles of the Westerner in the past whoconsider the code of a gentleman importantly were often romanticized, and like in Velazquez's there were generosity and modesty to it. However, a modern warfare is different. A mechanically committed mass-destruction with no clear winner and losers truly a self-devouring disaster on human kind.
A representative case of this kind of a war is probably the Korean War. All the countries involved in the Korean War avoids to remember the war lasted three years in this small country with the U.S.'s scorching earth operation and Chinese Communist's human-wave sweep strategy. Suh Yongsun is not a generation who live through the war, but he repeatedly exposes the scar of the war. The artist lived near 'Miari' the gateway of the Northern city of old Seoul, and says that the afterimage of the war told by his parents keep getting clearer in his mind every year. Apart from the logic of the Cold War, in any generation the trauma of the war is stuck in all over the society to make us retracted in a torment of conflict and hostility.
A writer, Park Wansuh recalls the 6.25 War and gave a reason for the late start of her literary career. She mentioned 'the bad people' she met during the war and explained that some sort of revengeful mind 'to depict the evil character in a novel someday' made her through the tough times. But as time goes by she raised a family and was living comfortably, the flame of desire to write a novel faded out. Then when the artist Park Soogeun who lived through the harsh reality of the war together passed away, the urge to 'testify' the time with him started to spark up in her again which made her literary career started in the age of 40.
Park Wansuh's testimony is an episode that directly shows the relationship of the 6.25 War and the Korean artists. For the artists who put great emphasis on 'expression', the 6.25 War is an event that they just can't resist to shout, crash, and write, and paint to 'tell a story'. She based on her experience of the war to tell a story of the war, whereas Suh Yongsun constantly watch over the history as an individual who lives in the time and on the land of the war's afterimage. For that reason, Suh Yongsun's war paintings are quite humane and have a healing quality to them. His war paintings deal with many kinds of sacrifice and pain caused by battles rather than a direct battle scenes. Physical and mental pain of the laborers who carry cannonballs in their carriers and the sacrifice of the victims died innocently in the Nogeunri massacre are the materials that show the tragedy of the war more emotionally than 'battles'.
The visual format that carries his artistic introspection is quite expressive. It is the third person's job to judge how effective the expressive format between imagination and fact, concreteness and implication, expression and description is as a vessel to serve his artistic introspection. The first thing one should see in his works is how his visual expression of the historical stories reflect a group or society's hope, value, fear, conflict, desire. And through this exhibition, we can see how Suh Yongsun's memory about the Korean War represents the ideal, desire, agony, chaos of our society that faces the 60th anniversary of the armistice truce.
Suh Yongsun's work expresses human's negative existence in a strong tone, but it is not to reveal the irony and absurdity of a certain concrete reality or dig up a truth in front of the public. It is rather an attempt to sublimate by symbolizing an already involved concrete reality's intrinsic form in human's existence into a universal form of a certain time. Because this is the ultimate intention of the artist, despite of its narrative format his reality could have not precisely predicted a sense of subject. It is because this is not based on an attitude of neglecting a detailed reality of life or avoiding to face a current status of existence, but in the process of pursuing an intrinsic form inherent in a detailed reality of life and a current status of existence he vaguely modified for a purpose.
That it is not to answer, rather than to argue but to indecisively support a vague directivity is close to intrinsic form of human life, is where the emphasis of a 'perspective' and an 'attitude' toward the Korean War and the Armistice truce that I wanted to show in this exhibition and in Suh Yongsun's art world cross.
Suh Yongsun's intellectual style makes a subject stand out in his unique formative language such as expressive distortion and painting over to contrast the intense and daring colors, or unexpected enlarged group of people that fills the canvas and his exceedingly intentional awkward brush strokes. Especially a screen that has a touch of the intense and daring colors scheme in a small choice of primary colors-red, yellow, blue-then executed with the mix of green and purple has a psychological and symbolic effect just with the color itself before a subject and content. Bold lines of brush strokes on a flat screen of primary colors seem coincidental, intuitional, and emotional, but actually it keeps the intentional and structural color's power of combination in mind, For that reason, each shape maintains independence and interactive tension while some kind of confidence exists.
He prefers not only colors but also composition of a distorted space. For the artist, it is probably a very vague and difficult task to move a real space including existential thesis of the massive discourse of history, a war, and an individual's life on to a screen. This strategy emphasizes the flatness of a screen and purposely distorts a sense of space; the ambiguity of the distortion rather maximizes a scope of personal imagination. Also through this distortion, he implicationally adds an atmosphere of certain situation on a slice of life he captured, an objective situation that anyone could access and feel. So, the artist uses a clear title, yet he changes the situation somewhat illogical and evasive or ambiguous rather than realistic and concrete. And this elevates the symbolic effect of the artworks. Through a formative language-distortion-the artist continuously stimulate the viewer's emotion, while he wishes, by broadening the reaction, his consciousness implied in the distorted style is a way to achieve the universality of our time called the negative existence of human.
In the end, Suh Yongsun's reaction to human and a war, the 6.25 and the Korean History is concluded with a 'will to freedom'. His artistic attitude is that he will going to sit out on the things that oppress and restrain freedom in any form. Whether or not it is a direct action that physically oppresses a freedom of body such as wars, violence, boundaries, or an indirect virtual substance that limits psychological and social freedom such as ideology and history, politics and economics, it all becomes a subject of reason and healing to him. So the artist argues that art as a 'play instinct' revealed from an absolute will to freedom is the ultimate goal our age should pursue, and the only method to restore the damaged humanity. The quote from his book, "from Schiller who loved human more than a state and its people, I see the essence of freedom" shows his firm belief. (Suh Yong Sun: 『Ideology and Scenes』 page 9) He is not influenced by Schiller, but only confirms his belief through Schiller. Like Schiller's view, a society after the modern times takes away human's totality and unity. Humans are more isolated from one's self and the state relegated human into a controllable objects. (cited quotes from Schiller's "On The Aesthetic Education of Man in a Series of Letters" in 『History of the German Cultures』, 1975) Schiller argues that restoring our separated conscious with the harmony of totality, and reviving it with the higher level of art is our task coincides with Suh Yongsun's argument as well. And it is a symbolic message to the true 'peace' that we have to over ideology and conflict in the current Korean society with the 60th anniversary of the armistice truce.
Conclusion
There is a Suh Yongsun's work called on a hill of Taeback looking far away and beyond. We do not know what the man is shouting, but if the people who 'see' could 'feel' like hearing something, wouldn't that be enough? Suh Yongsun's exhibition is the same. Rather than an attitude of
'paradox' and 'verification', I would like to leave fingerprints on this land through this exhibition and tell the viewers not just to read the history but to feel it. Whether or not knowing exactly what the shouting man wants to say, but one could see, hear, feel something, I could say that through this exhibition we had some sort of connection.
Lastly, I would like to remind the following quotes from the declaration in the catalogue written in 2004 by the two French intellects, J.Derrida and A.Joffroy. "Cultural unilateralism or political and military unilateralism brings humanity an effect of decadence and corruption.", "(if all cultures are treated equally) freedom is no longer separated from justice, and an alibi called freedom has no need to play a guarantor for abolition of justice (World Society)"
There should not be a distinction of left and right, liberal and conservative biases in the role of peace advocating intellects. However, the world doesn't always follow that logic. There's one-sided peace of the people who don't appreciate variety, and even at this very moment their greed prepares for a new war. The comments of these two intellects that cast a critical perspective on the true meaning of peace and 'freedom' imply a valid sight to the South Korea's current time facing the 60th anniversary of the armistice truce.
※ 출처: Chung, Young Mok, 「Preface | Memory·Representation Suh Yongsun and the Korean War」, 『한국전쟁 정전60주년 특별전_기억·재현 서용선과 6.25』, 고려대학교 박물관, 2013, pp. 18-31
논고 | 1. 피카소와 한국전쟁
정영목(서울대 교수)
한국전쟁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피카소의 두 작품, <한국에서의 학살>과 <전쟁과 평화>에 관한 좀 더 객관적이면서도 구체적인 다각도의 해석을 위하여, 아울러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포함한 피카소와 한국전쟁의 상응관계에 대한 좀 더 폭넓은 시각을 위한 필자의 미술사적인 견해를 밝히고, 더 나아가서는 '미술과 정치'의 함수관계에 대한 궁극적인 문제의식을 본 논문에서 제기하고자 한다.
1. <한국에서의 학살>
1952년 부산 피난 시절, 미술이론가이자 추상화가인 김병기金秉騏는 광복동의 어느 한 다방에서 일련의 문인, 미술인들과 함께 "피카소와의 訣別" 이라는 선언문을 낭독했다.
“Picasso氏여!... 당신이 발표하신 <조선의 학살>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물론 당신의 비설명적인 표현은 지나친 내용의 해석을 허용하지 않을런지도 모르나 총을 겨누는 로봇병사들의 한구룹과 총을 맞는 벌거숭이 부녀자들의 다른 한구룹이 무엇을 도한 누구를 의미하고 있는지는 넉넉히 짐작할 수 있읍니다. 멀리서 떠러져서 보면 <조선의 학살>은 그런식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콤뮤니스트의 공식으로는 그렇게 보는 것이 타당할 수도 있읍니다. 그러나 1945년부터 몇해를 두고 보아왔으며 특히 이번 動亂의 激浪속에서 지칠대로 보아온 한국에서의 虐殺은 당신의 <조선의 학살>과는 정반대의 虐殺에서 시작했다고 하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여기서 우리들의 정치적인 位置가 당신가 다르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위의 글은 비단 김병기라는 한 지성적인 미술인의 개인적인 발언이라기보다는 "訣別"까지 선언하게 된 6.25전 쟁과 피카소와의-국내에서의-정치/사회적, 나아가 그에 따른 미학적 관점의 이데올로기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최초의 글일 것이다.
1951년 1월 18일 완성된 <한국에서의 학살>은 형식적인 측면에서 입체주의적이거나 초현실주의적인 그 이전의 피카소 작품과는 달리 재현representation의 정도가 높은 단순한 구조로 형성되어있다. 이렇게 재현성이 높아진 피카소의 형식변화는 그의 미학적 태도의 변화에 그 근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1945년 미국의 사업가이자 아마추어 화가인 섹클러Jerome Seckler와의 인터뷰에서 피카소는 다음과 같은 미학적 태도의 변화를 피력했다.
“어떤 사람들은 (요즈음)의 나의 작품이 초현실주의의 시기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제껏 리얼리티에서 벗어나본 적이 없으므로 초현실주의자는 아니다. 나는 항상 리얼리티의 근원에 있어왔다 (문학적으로 표현하면 어떤 "실재의 실체"). 만약에 누가 전쟁을 표현하고 싶을 때에 활과 화살을 그리면 아마 더욱 고상하고 문학적이라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더욱 미학적이기 때문에. 그러나 내가 전쟁을 표현하고 싶을 때에 나는 기관총을 사용할 것이다. 변화와 혁명의 이 시기에 회화도 혁신적인 태도를 요구하므로 그전처럼 그리지는 않을 것이다."
리얼리티를 벗어난 상징적 표현을 자제하겠다는 피카소의 위와 같은 입장은 향후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미술과 정치의 이데올로기적인 관점을 파악하는 중요한 단서이다. 특히, 1944년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한 후의 피카소와 극단적인 반공산주의 노선으로 '세계의 공산화Red Peril'를 예방하려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한 지식인과의 인터뷰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다. 셀클러의 질문은 피카소가 그의 작품에 의식적으로 어떠한 정치적인 함축성을 연루빛시키지 않느냐는 방향으로 유도해 가지만, 작품의 형식과 주제의 변화에 관한 피카소의 아이디에는 어떠한 사회적, 정치적 의무가 없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마지막에 가서 피카소는 미술과 정치 사이의 궁극적인 연관성에 동의하지만, 자신이 그것을 시도하지는 않는다고 대답한다.
"내가 화학자이면서 공산주의자이거나 파시스트여서, 나의 그러한 혼합 속에서 어떠한 빨간 액체를 획득했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공산주의자의 프로파간다를 표현한 것인가? 내가 낫과 망치를 그리면 사람들은 그것이 공산주의를 나타낸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르나, 나에게 있어 그것은 낫과 망치일 뿐이다. 나는 어떠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생할 뿐이지 그것의 의미를 위하여 재생하지는 않는다…. 나는 공산주의자이며, 나의 그림은 공산주의자의 그림이다. 그러나 내가 구두수선공이면서 왕권주의자건 공산주의이건 혹은 그 밖의 무엇이건, 내가 나의 정치적 성향을 보여주기 위하여 특별한 방법으로 나의 구두를 못질할 하등의 필요도 없다."
이러한 입장과 태도에서 <한국에서의 학살>에 등장하는 현대식 무기로 무장하였거나 칼을 든 학살자로서의 병사들이 피카소가 미국군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마치 <게르니카>의 황소가 파시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듯 전쟁 그 자체의 '어둠'과 '잔혹함'을 나타내는 그 이상의 의미도 그 이하의 의미도 아니다. 결국 문제는 정치적이거나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그것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제3자의 태도에 있을 것이다.
1951년 5월 살롱전Salon de Mai에 <한국에서의 학살>이 처음 전시되었을 때 양 이데올로기의 진영이나 일반인들의 관심은 냉담했다. 제2의 <게르니카>에 해당하는 이 작품이 우선 미학적으로 <게르니카>를 능가하지 못했다는 평가였고, 프랑스 공산당은 공산당대로 학살의 주체가 선명하지 않다는 데에 불만을 품었고, 미국을 위시한 자유진영은 한국전쟁에 관한 공산주의자들의 프로파간다로서 피카소가 미국을 이 전쟁의 원흉으로 몰고 간다고 비난했다.
<게르니카>보다 미학적인 열세에 있다는 비평은 그만큼 상징적인 함축성이 결여되었고, 단순한 구조의 조형적, 지성적 측면이 부족하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앞에서 밝힌 피카소 자신의 변화된 미학적, 형식적 태도를 생각하면 오히려 역설적인 평가를 가능하게 한다. 또한 전쟁의 진실을 표현하는 데에 더 이상 상징과 미학으로 포장된 은둔의 자세를 버리겠다는 피카소가 "또 다른 게르니카는 그리지 않겠다" 고 선언하는 그 진의의 연장선상에서 <한국에서의 학살>을 조명해야 할 것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Art for Art's Sake' 전통의 순수 지향적이며, 그래서 '미술은 미술이고 정치는 정치'인 미술과 정치의 연관성을 부정하거나 모른 체하는 모더니즘의 시각이 대세였던 1940-50년대를 생각하면 <한국에서의 학살>에 관한 당시의 냉담한 미학적 반응을 이해할만하다. 그들은 우선 <한국에서의 학살>이 바로 그 시대의 동서 냉전체제의 정치적 산물이라는, 즉 정치적 관점으로부터의 부담이 싫었거나, 또한 설사 그렇다하더라도 현대의 역사화history painting로서 <게르니카>처럼 좀 더 미술의 순수한 조형적, 미학적 측면을 그 그림에서 기대했었을 것이다.
한편, <한국에서의 학살>을 신통치 않게 바라본 프랑스 공산당의 반응은 어떠한가. 당원의 한 사람으로서 그들의 프로파간다에 일조해야 할 피카소가 그의 그림에 그들이 공박해야할 대상인 미국을 정확히 지칭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들은 못마땅했고, 정치적 입장에서 본 그들의 리얼리티가 작품에 드러나지 않았음으로 역시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1944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한 피카소는 이데올로기에 관한 그의 정치적인 소신을 실질적인 행동으로 옮겨왔었다. 특히 유럽 공산당들이 주도하는 평화운동에 프랑스 공산당의 대표자격으로서 참석하기도 했으며, 그들의 프로파간다적인 포스터에 자신이 그린 비둘기를 보냈으며, 1949년 스탈린의 건강을 기원하는 드로잉, 을 그리기도 했다. 때문에 실제로 피카소로 인한 프랑스 공산당의 정치적인 이미지가 미국이 주목할 정도의 프로파간다로서의 효과를 획득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피카소는 자신의 이러한 정치적 활동-주로 평화를 위한-을 당시의 그의 작품에 직설적으로 반영하지 않았고, 또한 자신의 작품이 프로파간다적 성격을 띠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아마도 그것은 피카소가 미술과 정치의 연관성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작품에 관한 한 대상-자신의 정치적 활동마저도 포함한-에 대한 철저한 순수함과 투명함을 거의 기질처럼 가지고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새로운 <게르니카>”로 불러지는 <한국에서의 학살> 이후 미국 미술계 내에서의 피카소에 대한 명성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그 이전과 비교하여 평가 절하되기 시작했다. '비정치적인' 작가로서 20세기 미술의 새로운 형식에의 길을 열어 논 그의 천재성은 지나간 일이고, 유럽에서 벌린 그의 평화운동은 적어도 미국 내에서 만큼은 그를 비도덕적이며 공리공론적인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한 예로 당시 미국의 하원의원이었던 돈데로Dondero는 그의 국회연설에서까지 "현대미술은 공산주의에 수갑을 채워야 한다"며 "현대미술이 서구의 가치와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공산주의의 책략이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으며, 그러한 자신의 주장을 미국 내의 여러 미술기관에 설득시키려한 점만 보아도 피카소에 대한 미국 내의 평가를 짐작할만하다.
당시 미국 미술계의 저명한 인사로서 <아트뉴스Art News>의 발행인이었던 헤스Thomas Hess와 MOMA의 초대관장을 역임했던 바Alfred Barr사이에 오고갔던 편지는 피카소와 그의 <한국에서의 학살>에 관한 미국 내의 더욱 구체적인 평가의 예이다. 1951년 8월 바에게 보낸 헤스의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트 뉴스>는 최근의 피카소 작품들에 관한 그림 이야기를 실었습니다. 그 중에는 일련의 나체 여인들과 아이들에게 총을 겨눈 군인들이 있는 그림도 있습니다. 나는 그 그림이 한국전쟁 중 미국 군인이 북한 주민들에게 행한 잔학행위를 묘사한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당신은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혹은 이것은 고야의 처럼 단순히 전쟁의 잔혹함을 다룬 것입니까? 프랭크푸르터Alfred Frankfurter는 이 그림이 특별히 공산주의자들의 프로파간다를 목적으로 그려진 것이라는 소문을 어디선가 들었다며, 그 소문이 나에게까지 왔습니다.
우리는 명예를 걸고 이 이야기를 기사회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우리가 그것의 의미를 정확히 안다 하더라도 여러 정치적 문제에 휩싸일까봐 마음 내키지 않습니다. 작가는 정말 실제의 정치적인 목적을 행사한 것일까요. 아니면 단순히 작가로서 지금의 세계상황을 시사한 것일까요?"
위의 편지에 관한 바의 답장은 간단하다.
“올해의 봄에 전시된 이 그림은 일반적으로 反미국적인 프로파간다의 성격을 지녔다고 사료됩니다. 피카소가 그러한 사실을 부정한다 할지라도, 마치 <게르니카>가 정치적인 그림이라는 사실을 부인했던 것처럼..."
1936년 MOMA에서 "입체주의와 추상미술"이라는 대대적이며 선구적인 전시를 기획했던 바의 입장에서 곤혹스럽게도 현재의 피카소는 '정치적'인 작가였다. 이 미술과 정치의 관계를 껄끄럽게 보았던 바와 헤스 같은 유미주의적 모더니스트들의 눈에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의 내용이 어떠한 정치, 도덕적인 영향을 미국에 끼쳤든 간에 그것은 "좋지 않은" 작품이었다.
<한국에서의 학살> 이후 피카소에 대한 미국의 여론은 대단히 회의적이었다. 그 회의의 직접적인 원인은 크게 두 요소로부터 출발한다. 첫 번째의 요인은, 이 작품이 해석의 입장에서 재현 여부의 감지도가 높아 주제에 포함된 선과 악의 대립이 확연히 드러남으로 해서 정치적 쟁점에 휘말렸다는 점, 두 번째의 요인은 이 사실과 연관하여 작품의 재현 여부가 당시의 유미주의적 모더니즘의 미학적 관점에 부합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명확한 것은 이러한 두 사항에 모두 해석의 입장에서 작가와는 상관없이 '정치'가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한국에서의 학살>에 관한 해석 여부에 '정치'가 개입되지 않았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곧 제기될 수 있다. 즉 '학살'의 주체가 미국이냐 아니냐하는 '진실'에 관한 문제로-결국, 피카소나 미국 측의 해석-둘 중의 하나가 거짓인 셈이다. 피카소는 미국 측의 해석을 부인하고, 그러한 피카소를 미국 측의 해석은 다음과 같이 교묘히 비껴간다. 1951년 5월 6일 <뉴욕 타임즈 매거진>은 "피카소의 두 얼굴: 정치가와 화가"라는 제목 하에 그 잡지의 편집장인 배리Joseph Barry와 피카소간의 인터뷰를 토대로 화가의 정치적 입장에 관한 상당히 긴 기사를 실었다. 또한 그 기사의 첫 페이지의 절반에 해당하는 지면에 <피카소: 적색시대Picasso: The Red Period>라는 잡지를 위한 어느 작가의 삽화도 실려 있다. 담배를 물고 붓을 든 피카소가 구소련의 국기를 상징하는 낫과 망치를 그려서 들고 있는 모습과, 그의 젊은 시절의 "청색시대 Blue Period”를 상기시키는 "적색시대"라는 제목이 구소련/공산주의를 대변하는 화가로서의 피카소 이미지이다. 반면에 기사의 소제목은 피카소의 정치성에 관한 약간의 여운을 다음과 같이 남긴다-"작가로서의 그의 위상은 그 어느 누구의 도전을 불허하지만 그의 정치적인 믿음은 수수께끼로 남는다." 미국 언론의 한 예에 불과하지만 피카소의 '진실'은 어딘가 미심쩍고 더 두고 보아야 할 수수께끼이거나 아니면 거짓이다.
한편, 피카소 자신이 생각하는 '진실'은 무엇인가? 그는 <한국에서의 학살>에 등장하는 학살의 주체가 미국도 아니요 구소련이나 북한도 아닌 전쟁 그 자체라는 견해를 여러 경로를 통하여 밝혔다. 이러한 작가의 견해는 '해석'이 아니다. 때문에 그의 진실'을 '진실 아니면 거짓' 이라는 이분법의 상태로 파악할 수는 없다. 그의 '진실'에 경우의 다름이 있다면, 적어도 그것은 평화를 깨는 전쟁 그 자체를 미워하는, 보편적 진실을 추구한 예술가적인 '순수함'이지 한국전쟁을 직접 겪은 정치적 '체험'의 진실은 아니다.
작가로서 피카소는 그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해석'을 당하는 입장에 놓이기가 쉽다. 여기에서 작품에 관한 작가의 사상이나 의도가 관람자의 '해석'과 꼭 일치하여야만 그곳에 '진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데올로기의 양 진영에서 모두 홀대받은 <한국에서의 학살>을 이제는 그 스스로의 자리에 내려놓아야 할 시기이다. 피카소의 이 작품은 적어도 6.25전쟁이라는 우리의 역사적 모순의 진실을 담은 그림 그 자체로 평가받을 시기가 되었다. '학살'의 주체가 누구이든 간에 이 땅에 전쟁의 경종을 상기시켜주는 역할만으로도 이 작품의 가치는 충분하다.
2. <전쟁>과 <평화>
앞서 "피카소와의 訣別"을 선언한 김병기의 글에는 다음과 같이 피카소의 <전쟁과 평화>에 관한 비평도 들어있다.
“日前 Time誌에 소개된 『전쟁과 평화』 역시 그러한(공산주의적) 공식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읍니다... 전쟁의 砲煙을 의미하는 배경이며 검은 運柩車 우에 骸骨보재기를 질머진 피묻은 단도를 쥐고 있는 惡漢! 번쩍이는 단도의 黑白赤의 三色은 이 地獄圖를 구성한 主色의 집중이며 惡漢의 徒黨들의 내려찌른 창과 도끼의 운동은 비들기의 방패를 든 左端의 청년을 향하여 자꾸만 싸훔을 재촉하는 것입니다. 유린당한 書籍! 이 書籍들은 문화를 상징하는 것입니까. 이 惡漢은 資本主義를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러면 태연히 서있는 청년은, 그리고 비둘기는?... 당신의 평화는 대체 어떠한 평화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1951년 10월에 그린 두개의 드로잉 가운데 하나인, <전쟁>과 <평화>에서 전쟁을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피카소의 미학적 태도 역시 <한국에서의 학살>과 다를 바 없었다. 두 드로잉은 모두 현대전을 암시하는 랭크를 직설적으로 괴물처럼 묘사했으므로 추상을 지지하던 당시의 미학적 경향과 거리가 멀다. 그러나 <전쟁과 평화>에 등장하는 평화의 사도는 '활과 화살'을 그린 것과 같은 효과의 고전주의적 미학적 태도로 다시 돌아갔다. 칼과 방패를 들고 크와 맞서 싸우는 클래식의 전사는 다분히 '고상하고 문학적'이다. 앞으로 논의할 1952년의 <전쟁>의 전주곡과도 같은 이 드로잉은 <한국에서의 학살>에서 보여준 직설법이 실패하자, 다시 고전적 상징을 들고 나오는 피카소의 변화한 미학적 태도를 말해준다. 그러나 1952년의 <전쟁>에서 피카소는 그의 새로운 조형적 무기로 '탱크' 대신 '세균'을 들고 나온다.
<한국에서의 학살>과는 다르게, 피카소는 '평화의 신전' 작업을 위해 1952년 4월 28일부터 9월 14일까지 총 280여장의 습작 드로잉을 제작했다. 또한, <게르니카>와는 달리 이 습작들은 대부분 최종 작업에 적용될 각 부분별의 모티브였지, 작품 전체의 구성을 보여주는 습작은 없었다. 전쟁과 평화라는 인류의 보편적, 극단적 상황을 염두에 둔 이 한 쌍의 작품 <전쟁>과 <평화>는 선과 악의 도덕적 메시지가 뚜렷하고, 상징과 이미지의 관계가 애매하지 않으므로 누구나 쉽게 판독할 수 있는 그림이다. 다만, 미국의 세균전 논란으로 휴전협정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한국전쟁의 막바지 시기였던 1952년, 피카소는 그러한 논란을 사실로서 입증이나 하는 듯 그의 <전쟁>에 세균의 이미지를 등장시키면서 <게르니카> 이후 다시 한 번 국제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1) <전쟁>
피카소의 <전쟁>에서 전쟁을 상징하는 악마의 주역은 오른 손으로 피 묻은 칼을 내려 꽂으며, 왼 손으로는 세균 혹은 세균에 감염된 곤충을 바가지로 뿌리고 있다. 그에 맞서 싸우는 젊은 평화의 전사는 오른 손에 펜대 같은 창을 들고, 프랑스와 질로Francoise Gilot를 닮은 실루엣 위에 비둘기가 그려진 평화의 방패를 들고 있다. 여기서 논란을 있게 한 시비의 꼬투리는 세균과 비둘기이다. 한국전쟁 중 미국이 세균전을 감행하고 있다는 북한과 중국 그리고 소련의 공식적인 비난과 함께 전쟁의 도덕성에 먹칠을 당하고 있는 미국에게 피카소의 세균은 불 위에 휘발유를 끼얹은 셈이었다. 중공군의 참전과 함께 압록강을 경계로 미국이 원자폭탄을 2차 세계대전 이후 다시 사용해 한국전쟁이 세계대전의 양상으로 확산될 것을 두려워하던 당시의 국제여론의 향방에 세균전의 논란은 미국에게 치명적인 악재로 떠올랐다. 미국은 피카소가 하지도 않은 세균전을 전쟁의 악마와 결합시켜 전쟁의 원흉을 미국으로 몰고 간다고 피카소를 맹비난했다. 한 예로, 1953년 5월 로마에서의 피카소 회고전에 처음으로 공개된 <전쟁>을 보고, 「타임」지는 작품에 나타난 "evil lobster-sized germs"를 공산주의자들의 술책쯤으로 비하했고, 「뉴욕 타임즈 매거진」은 <전쟁>을 "공산주의자가 반미국적 정치선전의 도구로서 세균전을 들먹였다"고 비평했다."
초현실주의를 겪은 피카소의 작품에 형태상으로 세균의 이미지가 등장했다고 해서 그리 대수로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습작 드로잉과 미국의 세균전에 관한 당시의 논란을 미루어볼 때 피카소가 미국을 겨냥하여 세균을 그린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만약 소련이 세균전을 해 그 논란이 있어도 피카소는 <전쟁>에 세균을 그렸을 것이다. 킨Kirsten Keen과 유틀리Gertje Utley 등의 미국 미술사학자들이 주장하듯, 피카소가 공산주의자여서 있지도 않은 세균전을 퍼뜨리는 공산주의자들의 거짓 정치선전에 피카소가 동조하거나 놀아났다고 필자는 보지 않는다.
피카소가 주목한 것은 전쟁과 새로운 무기로 떠오른 세균과의 관계이지, 피카소가 어느 한 국가를 이념적으로 싫어해 그 속마음을 이미지로 지목할 만큼 아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킨과 유틀리는 오히려 냉전의 정치적 논리에 미술사를 접목시켜 세균전의 진실을 전혀 파악하지 않은 채 피카소를 폄하했다.
피카소는 <전쟁>을 위한 첫 습작 드로잉에서부터 미국의 세균전을 생각한 것 같다. 드로잉의 왼편은 춤을 추고 있는 아이들의 평화와 그것을 지키기 위해 칼을 들고 싸우는 평화의 사도가 있고, 오른편에는 피카소가 좋아하는 올빼미의 모습과 날개가 달린 독수리의 형상을 반반씩 섞은 전쟁의 악마가 바가지로 '죽음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 킨과 유틀리는 이 '죽음의 씨앗'이 세균을, 전쟁의 악마인 독수리 형상이 미국의 상징인 흰머리 독수리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았다.
피카소가 '죽음의 씨앗'을 처음 생각한 것은 1952년 3월 31일 밤이었다. 그날 프랑스 공산당 신문인 「뤼마니떼 L'Humanite」는 그리스 정부에 의하여 간첩죄로 그 전날 사형을 당한 벨로야니스Nikos Beloyannis의 소식을 크게 다루었다. 그의 처형을 미군이 집행한 것처럼 묘사한 것은 미국이 이 사건에 개입하여 그리스 정부를 조정했음을 암시한다. 그리스 공산당 간부이자 레지스탕스 전사였던 벨로야니스를 피카소는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했다. 그가 투옥된 후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를 통한 구명운동에 마티스와 함께 서명도 했고 그의 초상화, <카네이션을 든 남자>를 그려 엠네스티에 기증하기도 했다. 그날 밤 피카소는 슬픔과 침묵으로 한 동안을 보내더니 르와Claude Roy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적어 보여 주었다.
“5월 어느 저녁 랜턴 빛은 마드리드의 밤을 비추고, 탐욕스런 이방인에 의해 총살당한 고야 그림 속의 고귀한 민중의 얼굴은, 그리스 정부가 그리스의 맨살 어깨 위에 한 주먹 뿌린 공포의 씨앗과도 같은 씨앗을 품고 있다. 거대한 흰 비둘기가 그의 죽음의 분노를 땅에 흩뿌린다."
그리스 정부를 사주한 장본인이 미국이니 겉으로 드러내놓지는 않았지만 미국 혹은 전쟁을 향한 피카소의 분노, 즉 고야의 그림과 벨로야니스의 처형 그리고 세균전이 그의 뇌리에 시간차의 연상으로 오버랩 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피카소는 첫 드로잉 이후에도 '죽음의 씨앗' 혹은 세균전을 암시하는 이미지의 드로잉을 여러 장 그렸다. 그러나 완성된 작품의 구도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8월 30일의 드로잉에서 피카소는 '죽음의 씨앗'을 뿌리는 독수리를 없애고 대신 인간에 가까운 형상이 말이 끄는 영구마차 위에 서있는 모습으로 바꿨고, 그것이 최종 작품에 반영되었다. 이때의 상황을 짐작할만한 피카소의 언급이 있다.
"나는 <전쟁>의 주제를 먼저 시작했다. 나의 관심을 끈 것은 마을의 길을 지나가는 초라하고 삐걱거리는 영구마차의 덜컹거리는 행렬이었다. 나는 오른쪽부터 시작했고 이 이미지 둘레로 나머지를 구성했다."
영구마차의 이미지는 <전쟁>에 관한 피카소의 마지막 아이디어를 풀어나가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과거의 이미지들을 과감하게 버리는 계기를 만들어 준 셈이다. 또한,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죽음의 씨앗'을 뿌리는 독수리의 형상이 미국의 세균전을 직설적으로 빗댄 것으로 오해할 소지의 부담감을 피카소는 갖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에 나타나는 세균 또는 곤충들의 모습은 피카소의 습작 드로잉에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킨은 피카소가 영감을 받았을 모티프로 1952년 4월 1일자 「뤼마니떼」에 실린 이 혹은 벼룩의 사진을 들었다. 유틀리는 같은 모티프로 4월 4일 발행된 「르가르Regards」의 세균에 감염된 곤충들의 사진을 제시했다. 사실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겠지만 피카소가 「르가르」에 실린 벨로야니스의 사진을 토대로 그의 초상화를 그린 것을 상기하면, 또한 「르가르」의 사진에 나타난 곤충들이 <전쟁>에 등장하는 곤충들과 더욱 유사하니 유틀리의 주장이 좀 더 설득력을 갖는다. 유틀리에 의하면 피카소는 여러 경로를 통하여 미국의 세균전에 관한 공산 측의 정보를 비교적 자세히 알고 있었고, 세균전을 "인류의 정의와 세계 평화의 가장 위험한 적"이라는 선동적인 발언도 했다.
1952년 4월 16일자 「인민일보」에 실린 중국 측의 만평이나 1952년 2월 강원도 철원에 투하된 페스트에 감염된 벼룩의 마이크로 필름 사진 등 중국과 북한은 미국의 세균전을 입증하기 위한 많은 시각 자료를 서방세계에 퍼뜨렸다. 이러한 프로파갠다의 효과에 미국도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1952년 4월호의 「라이프」 잡지는 '더블 이슈double issue'로 잡지 전체를 '피카소 특집' 기사로 꾸미면서, 유독 중국과 북한이 퍼트린 세균전의 증거 이미지들을 '거짓 프로파갠다'의 샘플로 같은 이슈에 포함시켰다. 이러한 자료들을 몰랐다 하더라도 피카소는 분명 세균과 관련된 이미지를 그의 <전쟁>에 포함시켰을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로 미국의 관점에서 비둘기가 그려진 방패를 들고 있는 피카소의 전사는 공산주의의 평화를 신봉하는 전사다. 전쟁 기간 동안 평화를 대변하는 공산주의의 엠블렘emblem 역할을 톡톡히 한 이 비둘기를 미국이 예쁘게 볼 리가 없다. 가령, 피카소의 '평화의 비둘기'는 휴전협정 막바지 판문점에도 등장했다. 20) 북한이 협정조인 사무실로 지은 새 막사 입구에 윤곽선으로 처리된 푸른색과 하얀색의 거대한 비둘기를 장식했다. 미국의 항의로 철거되었지만 피카소의 '평화의 비둘기' 는 그것을 읽거나 사용되는 시각 이미지의 역할에 따라 다양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나, 세계의 어느 곳에서도 그 이미지 하나만으로도 평화와 피카소의 존재를 부각시키기에 충분했다. 피카소의 비둘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한 곳은 유럽이었지만 공산당과 관련한 집회나 단체는 평화를 상징하거나 선전하는 시각적 도상으로 전 세계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한국전쟁을 반대했던 도쿄의 일본 공산당 본부 건물 위에도, 1952년 여름 세균전의 실상을 조사한 국제과학위원회가 진상 보고서를 중국과학위원회에 제출하는 북경의 회의실 벽에도 피카소의 비둘기는 여지없이 등장했다. 심지어 한국전쟁 중 1951년 북한군과 중공군에 붙잡힌 영국군 장교 파라-호커리Anthony Farrar-Hockley는 그가 감금된 포로수용소의 꽃밭을 돌멩이를 사용하여 "피카소의 평화의 비둘기 모양으로 장식하고 '평화'라는 표지판을 세우도록" 강요받았다.
2) <평화>
피카소의 <평화>는 그가 1946년 앙티브Antibes에서 제작한 <생의 환희>의 후속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 <생의 환희>가 좀 더 지중해적, 고전적 도상들을 많이 품고 있다면, <평화>에는 페가수스Pegasus 이외에 딱히 꼬집어 말할만한 아르카디아arcadia의 느낌이나 신화적 도상들을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작가의 의도가 <생의 환희>에서는 흩날리는 머리카락과 거대한 젖가슴의 질로를 중심으로 한 개인적인 행복의 평화였다면, <평화>에서는 작가와 질로 사이의 두 아이인 클로드Claude와 팔로마Paloma로 대변되는 어린이의 세계와 그들의 미래에 초점을 맞춘 보다 인류애적이며 이상적인 평화를 꿈꾸었기 때문이다.
<평화>를 구성하는 도상들의 원천 중 과거의 작품들과 다른 하나는 분명히 클로드나 팔로마의 놀이, 표정, 관심 등에 대한 주의 깊은 관찰에서 비롯되었다. '새장에 갇힌 물고기'와 '어항에 들어있는 새들'의 아이디어는 1952년 9월 9일의 습작 드로잉에 이미 나타나 있다. 또한 그 둘의 균형을 잡기위해 곡예를 부리는 어린 아이의 머리 위에 지혜를 상징하는 올빼미가 앉아 있다든지, 달팽이 위에 피리 부는 소년이 앉아 있다든지 하는 모든 것들이 유아적 유희의 창조본능을 자극하는 동화 속의 이야기임을 보여준다. 즉, 올빼미와 관련한 그리스의 아테나Athena 여신, 목양신Pan을 연상시키는 피리 부는 소년, 페가수스를 몰고 밭을 경작하는 아이, 디오니소스Dionysos적인 여인네들의 춤 등 전형적인 아르카디아 느낌의 평화를 보다 원시적이고 순진무구한 유아적 평화의 세계로 전치시켰다.
반면에, <평화>의 오른 편에 위치한 도상들은 매우 현실적이다. 오렌지와 포도의 지중해 과일 아래 아기에게 젖을 물린 여인은 책을 읽고 있으며, 그 옆의 소년은 솥을 걸고 열심히 불을 지펴 음식을 장만하려 한다. 그 앞의 남자는 왼 팔로 턱을 고인 채 무언가 골똘히 쓰거나 그리는 것 같다. 결실을 기다리는 농작물이 파괴되고 전쟁의 말발굽 아래 책이 짓밟히고 불타는 <전쟁>의 도상학적 요소들은 <평화>의 같은 요소들과 극명하게 대치되어 있다. <전쟁>과 <평화>가 하나의 쌍으로 존재하듯. 전쟁과 평화 모두 다 같은 현실로서 인간의 삶과 문명을 결정짓는 갈림길의 순간임을 피카소는 의도적으로 강조했다. 좀더 상징적이기는 하지만 피카소가 르와Claude Roy에게 말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이러한 의도를 반영한다.
"이 세계에 평화가 온다면 내가 그린 전쟁은 과거의 사건일 것이다.....단, 흐른 피는 아름다운 그림이나 멋진 드로잉 이전의 존재로 남아있을 것이고, 훗날 사람들이 그림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 그림을 긁어 한 방울의 피가 형성된다면 이 작품은 정말로 살아 숨 쉬는 그림임을 보여주는 것일 게다."
킨은 <전쟁>이 공산주의자들의 반미국적 태도를 반영한 것과 같이 <평화>도 그들의 유토피아적 평화를 그린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킨은 피카소를 포함한 당시 프랑스 지식인들의 반미국적 경향을 주목했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지식인들의 이념적 성향은 좌파 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거기에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작가란 무엇을 하든 "연루dans le coup"되어 있고, "(자기의) 시대를 껴안아야" 한다는 주장의 "앙가주망(사회정치 참여)의 시대ère de I'engagement”는 지식인들의 참여를 우파보다는 좌파 쪽으로 기울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사르트르 자신이 1952년부터 1956년 사이에 프랑스 공산당과 동반자처럼 가까웠으며, 1944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한 이후의 피카소의 많은 정치, 사회적 참여 활동도 이러한 맥락에서 읽혀져야 할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프랑스 공산당은 프랑스 지식인들의 정당임을 표방할 정도로 그 기세가 당당했으며, 특히 문화에 대한 그들의 또는 프랑스의 자존심이 미국에 의하여 영향을 받거나 훼손당하는 것을 지극히 경계했다. 한 예로, 이러한 반미국적 정서의 선전에 앞장선 코니오Georges Cogniot는 헐리우드Hollywood의 영화가 프랑스인을 싸구려 연예인 정도의 예술가로 취급한다며, 헐리우드 식의 대중문화가 2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히 유럽 사회에 파고드는 것을 미국의 문화제국주의적 침탈로 간주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킨은 <평화>에서 아기에게 젖을 물리면서도 책을 읽는 여인과 무언가를 열심히 쓰거나 그리는 남자의 도상은 유럽의 전통적인 지성과 문화를 상징하며, 전쟁과 함께 그것을 파괴하는 미제국주의자들로부터 보호해야할 그러한 공산주의자들의 평화를 피카소가 표현했다는 주장이다. 킨의 관점에 어느 정도의 설득력은 있으나, 전시의 상황에서 평화란 전쟁을 중단하는 것이 평화다. 그런 평화에 공산주의자의 평화 혹은 자유주의자의 평화가 따로 존재한다고 필자는 생각하지 않는다. 설사, 그런 식의 평화가 존재한들 전쟁을 하지 않는 조건이라면 그 어떤 평화라도 무방하다. 피카소의 <평화>도 이러할 것이다. 굳이 지식과 관념을 들이대지 않더라도 보편적 정서로서 인류의 누구에게나 읽힐 수 있는 그런 평화를 피카소는 그렸다.
<전쟁>과 <평화>에 대한 피카소의 추억과 미련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두 작품을 완성하고 전시한 후에도 드로잉치고는 꽤 큰 사이즈로 온전하게 전체의 구성이 드러나는 습작의 <전쟁>과 평화>를 그렸다. 이 두 드로잉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으로 한국전쟁이 끝난 그 해 12월에 제작되었다. 그래서인지 두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긍정적이다. <전쟁>에 등장하는 평화의 전사는 유화와 비교하여 신체의 사이즈가 커졌고, 그
숫자도 늘어났다. 유화와 비교하여 <평화>는 더욱 축제적이다. 태양이 있던 자리엔 승리를 자축하듯 '평화의 비둘기'가 밝고 힘차게 날고 있고, 화면 전체에 꿈틀거리는 선묘線描의 기세가 역동적이며 발랄하다. 세월이 한참 지난 1959년에 그린 드로잉, <전쟁과 평화>에도 한국전쟁 중 그가 가졌던 전쟁과 평화의 잔상들이 아직 남아있다. 특히, 양 손에 칼을 들고 입에서 불을 내뿜는 전쟁의 괴물은 마치 이나 벼룩을 변형시킨 형태 같아 세균전에 대한 피카소의 울분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음을 증명해준다.
1990년 11월 외신外信을 인용한 한국의 신문들은 미국연방수사국(FBI)이 1944년부터 무려 25년 동안이나 피카소를 위험한 공산주의자이자 러시아첩자(Espionage--R(for Russia))로까지 분류해 주요한 사찰대상으로 지목指目해왔었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기사를 실었다. 무려 187쪽에 달하는 FBI의 피카소 파일은 냉전시대의 미국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얼마나 민감한 반응을 보였는가 하는 사실의 증거이자, 그것의 인권유린과 도덕성에 관한 문제를 새롭게 제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1953년 7월 휴전 후 남한에서의 '매카시즘McCarthyism' 역시 미국의 통제와 검열 선상에 놓여 있었다. 때문에 남한에서의 피카소 역시 그 광기(일종의 Red Complex)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었다. 1960년대 초반 서울에 "피가소"라는 상표의 크레용이 생산, 유통되었으나, 그 생산업자는 상표의 이름을 "피닉스"로 바꾸어야 했고, 유신정권 이후 반공의 기치아래 언론, 출판, 표현의 자유를 극도로 탄압하던 시절, 일본에서 발행된 미술도서, 「피카소」 조차도 검열의 대상이 되어 책에 실린 <한국에서의 학살>이 지워지는 수난도 겪었다.
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 레지스탕스 시절, 피카소의 절친한 친구였던 도미니끄 데상티Dominique Desanti 여사는 피카소가 자신을 사찰하는 FBI의 어처구니없는 일이 매우 "초현실적"이며,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되지 않았다면, 아마도 최악의 부르주아가 되었을 것”이라고 술회했단다. 그녀의 진술에 의하면 피카소는 공산주의자였지만 결코 "당-노선(party-line)”의 공산주의자는 아니였으며, 이러한 이념의 선택은 그가 젊은 시절 스페인에서 물려받은 무정부주의적 전통을 생각하면 매우 자연스러운 결과였다고 술회하며, 피카소는 "사회에 관심이 많았지만 정치적인 인물은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데상티 여사의 증언이 아니라도 예술과 정치의 이러한 모순된 함수관계는 특히 냉전체제 내에서 더욱 심했지만, 피카소는 두 번의 미국행 비자를 거부당하고 일생동안 미국을 방문해보지 못한 유일한 유럽의 유명한 예술가였다.
Picasso and the Korean War
Young Mok Chung
(Professor, Seoul National University, Art History)
During the critical time of the Korean War (1950-53), Picasso's Massacre in Korea and the Peace and War received international attention due to political engagement. At the peak of the Cold War, both capitalists and communists used Picasso's two paintings as political propaganda for their own interests.
When Massacre in Korea was exhibited in the May Salon of 1951 it was perceived in French Communist Party and the USA as a subversive painting. The issues of political engagement, social realism and comprehensibility in France and the USA were controversially raised about it's deliberate sense of 'propaganda'. Modernist, then and since, however, attacked the painting as an 'aesthetic failure' with their artistic and political reasons which was insisted on the slogan of 'Art for Art's Sake'.
After the , Picasso painted and during the critical time of the Korean War. In the early 1950s, however, anti-American feelings ran high in Europe, fanned by the Communists' accusation that American forces used bacteriological weapons in the Korean War. Picasso accused the Americans of using bacteriological weapons and denounced them as "the most dangerous enemy of world peace and human justice." The was indeed to create a powerful and comprehensible condemnation not only of war but also of bacteriological warfare. The treatment of this theme was politically explosive at the time, and there could be no doubt that Picasso's condemnation targeted America.
Here was a dilemma existing always in our society between ideological and artistic values. For this reason, this paper will question the complex web of cultural and ideological factors both in Picasso's two paintings during the Korean War.
※ 출처: 정영목, 「논고 | 1. 피카소와 한국전쟁」, 『한국전쟁 정전60주년 특별전_기억·재현 서용선과 6.25』, 고려대학교 박물관, 2013, pp. 196-212
논고 | 2. 전장을 삐라로 뒤덮어라, 6.25전쟁과 이미지전쟁
최태만(국민대학교)
I. 서론
이 글의 목적은 한국전쟁 시기에 전쟁 당사자들이 생산해낸 시각이미지를 통해 전쟁미술의 진상을 밝히는데 있다. '국제적 내전'이자 이데올로기 전쟁이기도 했던 한국전쟁은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이미지 전쟁의 현장이기도 했다. 한국전쟁의 직접적인 당사국인 한국의 위치에서 볼 때 이 전쟁은 국가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한 총력전이자 열전熱戰이었으므로 무력충돌은 물론 모든 심리전 수단을 동원하였다. 따라서 시각이미지는 살상무기 못지않게 중요한 수단이었다. 한국전쟁을 서로 대립된 이데올로기가 시각이미지를 통해 충돌하는 이미지 전쟁의 격전장이었다고 표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남북한이 생존의 차원에서 집요하고 전면적으로 동원한 시각이미지는 대부분 시각적 폭력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미지를 통한 타자에 대한 부정과 공격이 폭력적 양상을 띨 때 그것은 진실과 먼 선동이 되고 이미지 폭력은 언어폭력 이상으로 잔혹한 영상으로 각인되어 전쟁에 대한 기억을 왜곡된 방향으로 이끌어간다. 여기에서 이미지 폭력이 이데올로기를 선행하는 전도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글에서 다룰 연구대상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전쟁 직전 남한과 북한의 지배권력은 서로의 적을 어떻게 주조鑄造해내었으며, 그것을 위해 활용한 구체적인 시각이미지는 무엇인가를 밝히고자 한다. 이를 위해 남한에서의 반공이데올로기와 그것이 낳은 괴뢰론이 활용한 시작이미지를 분석할 것이다. 둘째, 전쟁기에 한국군과 미군이 주로 생산해낸 시각이미지와 북한군과 그 동맹군이 생산해낸 시각이미지 사이에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가를 규명하기 위해 전단을 주요 분석대상으로 삼을 것이다.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규모 심리전이 펼쳐진 현장이기도 했다. 이른바 '종이폭탄'이라 불리는 전단을 활용한 심리전은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의 압도적 우위 속에서 전개되었으나 남북한은 물론 중국인민지원군과 소련이 동시에 펼친 심리전이 한국전쟁을 시각이미지 전쟁의 장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은 이 글의 주요 목적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과 독일, 일본이 전개했던 심리전에 동원된 전단의 시각이미지에 대한 선행연구를 참고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펼쳐진 심리전에 대한 자료정리와 분석, 연구는 이미 미국과 일본 등에서 이루어진 바 있다. 그러나 그 범위가 방대할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생산된 자료의 경우 주로 심리전에 대한 연구에 집중돼 있으므로 본 논문에서는 일본에서 발행된 『비록秘錄·모락·선전·삐라-태평양전쟁의 "종이폭탄"』, 『전장에 흩날린 삐라-전단으로 다시 읽는 태평양전쟁』과 『선전모략 삐라로 읽는 일중·태평양전쟁-하늘에 흩날리는 종이폭탄 '전단' 도록』을 주로 참고하였다.
한국전쟁 중 남북한은 물론 미군 등에 의해 살포된 전단에 대한 연구는 주로 군사학軍史學, 심리전연구 분야에서 시도되었으나 최근 방선주, 정용욱, 이윤규 등에 의해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된 바 있다. 이 또한 전단의 이미지에 대한 도상학적 분석보다 이데올로기 분석에 집중하고 있으므로 전단을 미술사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그 도상의 근원과 연관관계를 추적한 것에서 이 글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II. 전쟁 이전, 시각이미지를 통한 적의 주조鑄造
1. 소련의 괴뢰 또는 가짜 김일성
한국전생이 발발하기 직전 한국군 측에서 38경비대, 보안대, 조선인민군 등 주로 전선에 배치된 북한군을 향해 귀순을 선동할 목적으로 제작된 전단(도 1)은 당시 한국군이 사용한 이미지전쟁의 한 단면을 드러낸다. 삼팔선을 경계로 젊고 잘 생겼으며 늠름한 한국군이 총을 거머쥔 채 대기라고 쓴 상자 위에 앉아 북쪽을 주시하고 있는데 삼팔선 바로 너머에는 상처투성이에 헐벗고 굶주린 인민군이 거의 혼수상태가 된 채 주저앉아 있다. 북한군은 이미 전의를 상실하여 총을 서해 앞바다에 내던진 상태이다. 그러나 인민군 뒤로는 머리에 뿔이 달리고 배는 불룩 튀어나왔으며, 손이라기보다 짐승의 앞발에 가까운 것을 치켜든 도깨비 형상의 군관이 옆구리에 일본도를 차고 북쪽을 향해 환호하고 있다. 그가 '쓰따린 만세, 김일성 만세, 공화국 만세, 인민군 만세'라고 허위보고 하고 있는 곳에는 두 얼굴을 한 스탈린의 머리가 불쑥 올라와 있으며 그 역시 머리에 안테나와 같은 뿔을 달고 있다. 두 얼굴을 가진 스탈린은 음흉한 시선으로 이 허위보고를 경청하고 있으나 그의 반대편에 있는 얼굴은 전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 이 전단의 메시지는 명백하다. 적귀赤鬼는 공산당이거나 인민군을 착취하는 고위군관 또는 김일성을 지시하며, 그의 수괴는 스탈린이다. 이들의 음흉한 흉계의 피해자는 기진맥진한 인민군 당신이므로 삼팔선을 넘을 수도 없고 만약 넘어선다 하더라도 이미 대기 중인 한국군에 의해 궤멸한다. 그러니 당신은 더 이상 희생당하지 말고 귀순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사실 6•26전쟁 전만 하더라도 한국군과 북한군의 전력 차이는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에서는 공산도배를 위해 충성할 경우 돌아오는 것은 패망뿐이란 허장성세의 선전선동을 통해 북한군의 귀순과 투항을 설득, 종용하고 있는 것이다. 남북한이 다 같이 서로에 대해 괴뢰라 지칭하며 정체성을 부정하는 선동선전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우스꽝스럽고 비현실적인 희화戱畵에 불과하더라도 뿔 달린 도깨비, 괴물. 마귀의 이미지를 동원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반공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대표적인 것으로 '가짜 김일성'을 들 수 있다. 남한에서 북한쪽을 향해 뿌린 '가짜 김일성'의 정체를 폭로하는 전단에는 거울을 보고 있는 김일성의 얼굴이 사라져버린 그림 뒷면에 "김일성이라고 자칭하는 자는 여러 가지로 한국사람을 속여 왔고 그중에도 제일 고약한 것은 이 자가 한국의 위대한 한 영웅인 김일성으로 (거짓) 행사한 것이다. ...이자는 권세욕과 무능으로 말미암아 한국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이자는 모든 진정한 한국사람의 적이다." 라는 선전문구를 적어놓았다. 이 전단은 전형적인 흑색선전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선동문구에 적힌 내용은 김일성이 북한에서 정권을 잡은 이후부터 한국전쟁 기간은 물론 반공이데올로기가 공고하던 시기까지 변함없는 진실로 공식화되었다. 그래서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유포된 각종 선전매체에 김일성은 비정상적이고 기괴하며, 포악하고 야만적인 괴수이며 악마이자 소련의 꼭두각시로 인식되도록 과장된 이미지를 덧씌웠던 것이다. 북한 주민들 중에서도 들어보지도 못한 숱한 공산주의 활동을 한 젊은 김일성에 대해 가짜라고 생각했으며, 진짜 김일성은 그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미소 냉전이 한층 분명해지자 대부분의 남한 사람들은 그들 조국의 절반을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기 위해 소련이 지명한 가짜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이승만정권이 만들어낸 가짜 김일성론은 타도해야 할 적에 대한 원초적 적개심을 드러낸다. 이를테면 전쟁 직전 38경비대를 대상으로 한국군 측에서 뿌린 전단에는 '양대구리(양머리)를 내걸고 개고기파는 김일성놈에게 총부리를 돌려라' 란 선동문구와 함께 '만약 김일성이 진정으로 평화적 통일을 원한다면 왜 아직 국제연합의 결정을 시행하지 않고 공산독재를 강행하고 있는가, 그는 입으로는 '평화', '통일', 독립'을 내세우지만 부모처자 형제를 모조리 죽이고 마지막에는 조국을 소련에 팔아먹을 것이니 만약 당신이 조국을 사랑한다면 총부리를 매국역적 김일성에게 돌리고 의거를 일으켜라' 라고 선동하고 있다. 아울러 이 전단에는 38경비대 소속 북한군이 이 삐라를 들고 국방군 전방 50미터 앞에서 '이승만 박사 만세'를 외치자 한국군이 귀순여부를 확인 후 후방에 있는 부대로 데려가서 환영하고 있는 장면을 찍은 사진을 함께 실었다. 여기에서 이승만은 조국과 민족을 구원할 선인 반면 김일성은 조국을 팔아먹고 인민을 도탄에 빠뜨릴 악으로 규정된다. 즉 한국전쟁 이전 한국군이 북한 쪽에 뿌린 전단의 내용은 대한민국의 민족적, 정통성을 옹호, 과시하고 김일성은 소련의 괴뢰라는 점을 선전하며, 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소련의 약탈, 착취, 공산학정을 비난하였다. 전쟁 중에는 김일성을 괴뢰수상 외에도 공산두목, 반역자 등으로 규정하였다.
남한과 북한이 동시에 가장 많이 활용하였던 이미지가 남한의 이승만 정권은 친일반동, 미국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앞잡이이자 역적이며, 북한의 김일성은 적귀, 소련의 괴뢰, 인간백정의 괴수魁首, 역적이다. 다 같이 상대방을 역적으로 몰고 있는 데는 이들의 의식세계 속에 봉건적인 의식이 여전히 잔재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분법적 가치를 폭력적인 언어와 이미지로 설득하려는 선동적 태도는 남북분단을 정치적으로 파악하기보다 선악의 대결이란 도덕적 문제로 몰고 감으로써 실제를 왜곡하는 결과를 낳는다.
북한 꼭두각시론은 신탁통치 파동을 거친 뒤 미국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한반도 내의 정치세력을 분류하면서 등장했다. '조숙한 냉전의 용사' 주한미군사령관 하지John R. Hadge에 의해 처음 주장되었던 북한 꼭두각시론은 중국에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중국 적대정책을 수립한 미국 국무부 장관 단 러스크가 "중화인민공화국은 슬라브족의 만주국(괴뢰국)”이라 선언했던 것을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이 꼭두각시론은 냉전적 세계관과 인간관의 반영물이자 동시에 미국의 북한과 중국에 대한 정치, 경제적 이해관계와 정책적 태도를 집약한 것이고, 미국 지도자들의 인식을 투영한 것이었다. 반공이데올로기와 김일성 괴뢰론으로 무장한 이승만은 남한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는 공산주의자를 분리, 감시, 처벌하기 위해 국민보도연맹이란 관변단체를 조직하고 좌익에 대한 대대적인 예비검속과 체포, 구속, 전향에 착수했다. 남한의 모든 사람을 반공이데올로기의 감시망 속에 가두고, 전쟁이 일어나자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사람들을 집단학살하는 비극의 서막이 올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2. 미제 앞잡이 리승만
상대방에 대한 적대감은 북한에서 유포한 전단에서도 유사한 유형으로 나타나고 있다. 전쟁 전부터 전쟁기간 동안 북한이 빈번하게 활용한 전략적 심리전의 이미지 중에는 이승만 정권은 미제국주의의 주구이며, 전쟁은 자본주의 상인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추악한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 많다. 그것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것으로 해방과 전쟁에 이르는 시간을 도식적으로 단순화한 전단을 들 수 있다. '1945년 8월 15일' 한민족이 일치단결하여 일본 군을 한반도에서 쫓아내는데 불끈 쥔 주먹으로 상징된 항일저항 앞에서 일본군은 반신불구가 된 채 맨발로 도망치고 있다. 그러나 '오늘' 시가를 입에 문 채 거만을 떨며 한반도로 들어서고 있는 미군의 보호를 받으며 달러 표시로 상징되는 자본주의의 깃발을 든 일본이 다시 한반도에 발을 닫으려 한다. 그런데 거대한 체구의 미군 앞에는 이승만이 비굴한 미소를 머금은 채 이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다. 만화의 풍자적 방법을 활용한 이 전단은 이승만을 미군과 일본, 더 나아가 자본주의의 하수인으로 묘사함으로써 이 전단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남한정권의 정당성을 부정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8.15때 민중의 힘으로 몰아냈던 일본이 미군을 앞세워 전쟁에서 이익을 챙기려는 장사치이자 미군의 하수인으로 등장하고 있는 이 전단에서 이승만은 미제국주의와 전쟁상인 일본을 끌어들여 한반도를 도탄에 빠트리려는 매국노로 묘사된다. 그러므로 이 전단의 궁극적 메시지는 총칼로서 침략자와 그들의 주구인 이승만을 몰아내어야 한다는 데 있다. 이 논리를 따르자면 미 제국주의와 그들의 주구 이승만을 몰아내는 전쟁이야말로 정의로운 민족해방전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전단은 8.15해방이 마치 한민족의 단결된 힘으로 일제를 한반도에서 몰아낸 승리의 역사인 것처럼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더욱이 이 전단에는 김일성보다 먼저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빠져있다는 점에서 소련의 북한점령을 은폐하고 있다. 남한의 정치지도자를 왜곡 부정하기 위해 북한이 제작한 미제의 이미지는 사실 북한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와 그것을 드러내는 도상은 이미 중국에서도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III. 심리전과 이미지전쟁
1. 심리전의 의미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전쟁 당사국이나 군대는 국가의 목적 및 군인의 임무 수행을 위하여 적군에 대하여 계획된 선전과 정보수단을 총동원하는데 이를 심리전psychological warfare이라 한다. 심리전의 원래 개념은 전쟁에서 사상자를 최소한으로 줄이고자 하는 인본주의적 의도가 있었으며 이러한 인본주의를 대전제로 작전의 효율성을 증대시키고자 전승에 기여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심리전이란 적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한 기만, 투항을 유도하는 전술적 책동 등 전투현장에서 동원되는 수단과 방법, 매체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심리전의 궁극적인 목표가 적에 대한 승리이므로 적을 대상으로 한 선전과 선동은 물론 첩보, 파괴, 회유, 힘의 과시를 통한 불안감 조성. 우호적이거나 적대적인 주민의 활용, 우방에 대한 지원의 요청 등을 포괄한다.
심리전은 그 목적에 따라 전략심리전, 전술심리전, 선무宣撫심리전으로 나뉜다. 전략심리전은 국가목표를 달성하는데 대단히 중요하고 비중이 큰 임무를 위한 것으로서 장기적인 목표 아래 대상국의 모든 영토 및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실시하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 등과 협조되고 국가수준의 기관에서 계획하고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전술심리전은 전투상황 혹은 국부적인 특수상황 하에서 단기적이며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효과를 노리고 수행하는 것으로서 전략심리전 범위 내에서 계획되고 운용되는 것을 지칭한다. 선무宣撫심리전은 이질적인 집단이나 개인의 심리전 주체에 대한 반발 또는 저항을 무마시키려는 것이다. 즉 군의 점령지역이나 해방지역에 있어서 효과적인 군사작전을 수행하고 피점령지역 주민과의 협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실시되는 심리전이다.
심리전은 또한 대상에 따라 교전 중인 적군에게 직접적으로 수행하는 대적심리전Counter Enemy Psychological Operation, 자국의 국민들이 적군의 심리전에 오염되지 않도록 홍보, 정훈, 교육활동을 강화하고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국민의 의식을 통합하는 대내심리전Internal Psychological Operation, 그리고 우방국의 협력을 강화하고 중립국에 대해서는 우호를 증진시키며 적국이나 대립관계에 있는 대상과의 관계를 호전시키려는 대외심리전External Psychological Operation으로 나뉜다. 따라서 대내심리전에서는 공보활동이, 대외심리전에서는 외교활동이 중요함을 알 수 있다.
2.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심리전
한국전쟁 중 심리전에 가장 많이, 그리고 적극적으로 사용된 것이 선동적인 짤막한 구호와 이를 시각적으로 설명하는 그림이나 사진을 수록한 이른바 '삐라'이다. 국어사전에는 삐라에 대해 '(1) 흥행물의 선전광고를 위하여 사람 눈에 잘 띄는 곳에 붙이는 종이. 또는 돌라주는 종이·광고지 (2) 선동적인 글귀를 적어서 붙이거나 돌라주는 종이'로 규정하고 있지만 사실 삐라란 적당한 용어는 아니다. 이 용어의 어원은 영어의 빌bill을 잘못 발음한 일본말 '삐루びら'로부터 파생한 것이라고 한다. 어쨌든 전단은 영어의 리플릿leaflet, 독어의 플루그블라트flugblatt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오늘날 전단은 무작위로 살포되는 무료광고지로 이해되고 있으나, 그 역사는 16-17세기부터 공공문서, 달력, 지도, 초상화, 성화聖畵, 판화작품 등을 낱장으로 인쇄하여 무료로 배포한 것이 아니라 판매를 하면서 시작되었다. 즉 전단은 시장경제의 원칙이 확산되기 시작한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중요한 문화현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물론 전단의 역사는 유럽에서 종이가 발명되고 종교적 내용을 담은 그림인쇄가 시작된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전쟁과 변란, 혁명 등의 격변기일수록 정보에 민감할 수밖에 없으므로 전단은 이데올로기 전달의 유용한 수단이 된다. 프랑스혁명, 러시아혁명시기에 전단이 대량으로 인쇄, 배포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럴 경우 전단은 선전전의 중요한 무기가 된다. 선전propaganda에 대해 '의미 있는 상징symbols의 조작을 통해서 대중의 태도를 관리하는 것'이라고 정의한 것을 고려할 때 전쟁과 같은 적변기일수록 전단의 역할은 증대된다. 적군의 장병이나 적국 국민의 전의를 저하시키거나 투항을 재촉하기 위해, 또는 아군의 전의를 고양시키기 위해 대량으로 제작, 살포하는 전단은 따라서 심리전에서 매우 유용하고 경제적으로도 효율적인 선전도구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뿌리는 측에서 신속하게 자기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매체라고 할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나라와 나라가 서로 보유한 모든 전력을 동원한 국가 총력전이었던 만큼 적군과 아군 모두를 대상으로 한 선전전의 중요성에 따라 전단을 유효한 '병기'로 활용하였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 중 위력을 발휘한 신병기인 비행기를 이용해 넓은 지역을 포괄하여 대량의 전단을 살포하는 심리전이 가능해졌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6개월 동안 영국이 비행기와 기구로 투하한 전단은 1,830만장에 이르렀다고 한다. 전단이 전쟁 중 심리전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이 크다는 점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신문에 게재된 만화를 통해서도 확인 가능하다. 즉 연합군에서 대량 살포한 전단의 폭격을 받아 휘청거리고 있는 독일 병사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그린 만화는 전단을 종이폭탄이라 부르는 이유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전쟁이 이데올로기 전쟁이자 이미지 전생이란 사실을 전쟁을 전후하여 뿌려진 엄청난 양의 전단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중 미군을 중심으로 수행된 심리전이 제2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한국전쟁 시기의 심리전에 동원된 전단의 시각이미지에 대한 도상분석을 위해 제2차 세계대전에는 어떤 도상이 동원되었는지에 대한 사전 연구의 중요성은 크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뿌려진 전단의 내용을 주요 유형별로 분류해 보면 대표적으로 개인의 신상에 대한 경고, 정치지도자의 풍자, 전술적 차원에서 적군의 전의 상실을 유도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개인의 신상에 대한 정서적 접근이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예컨대 이미 심리전, 선전전의 경험을 가지고 있던 독일군이 미군과 영국군을 대상으로 뿌린 전단에는 앞면에 금발의 매력적인 미녀와 그녀를 애무하는 남자의 모습을 클로즈업시키고 '신사는 금발미녀를 좋아한다'는 문구를 적어 넣은 다음 뒷면에 전쟁에서 불구가 된 군인의 모습과 함께 '그러나 금발미녀는 상이용사를 좋아하지 않는다'라는 문구를 적어 넣음으로써 국가, 애국, 충성, 정의 등의 전쟁의 대의명분이나 이데올로기 문제보다 전쟁에 의해 개인이 당할 불이익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전투를 치루는 병사들의 전투의지와 사기저하를 획책하는 고도의 심리전 차원에서 이런 종류의 전단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태평양전쟁을 치르던 일본군도 미군을 대상으로 비슷한 선전전을 펼쳤다. <기억하세요?>란 질문과 함께 젊은 여성의 입술을 크게 강조한 엽서형의 전단 뒷면에는 마치 이 여성이 애인에게 보내는 개인적이고 내밀한 연서처럼 위장된 문구를 담고 있다. 앞의 독일군이 유포한 전단처럼 이 엽서형 전단에서도 전쟁에 대해 아무 것도 표상하지 않았으나 감각적인 시각이미지와 인간의 생리적 욕구를 자극하는 은밀한 편지내용을 교묘하게 결합하여 이 전단을 습득한 미군들로 하여금 성적 환상에 사로잡히게 함은 물론 전쟁의 이유나 명분에 대해 회의하게 만들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일본군은 연합군을 이간시키려는 목적으로 포르노그래피에 가까운 이미지를 사용하기도 했다. 오스트레일리아 군을 상대로 뿌린 전단은 맬번Melbourne에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병사의 집에서 미군은 이 병사의 부인과 놀아나고, 오스트레일리아 병사 자신은 원주민을 겁탈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전단은 백인을 쾌락지향의 성적 동물로 규정하는 인종차별적 시각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그 이면에는 여성을 수동적인 존재이자 정복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긴 일본 군부의 성차별주의도 잠복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여러 나라에서 참전군인의 성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전단을 제작하여 살포한 경우는 있으나 이 전단처럼 성행위 장면을 노골적으로 묘사한 예는 드물었다.
일본군은 특히 뉴기니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고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군을 향해 그들이 전쟁터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동안 정작 미군은 오스트레일리아 본토에서 부인을 겁탈한다는 중상모략 전단을 퍼뜨려 참전한 오스트레일리아 병사들을 불안하게 만드는가 하면 미군을 불신하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이것은 전력의 우위를 과시한 미군의 전단이 위협적이고 공격적이며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에 주력했던 반면 일본군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파고드는 심리전을 구사했음을 보여준다.
둘째, 정치지도자에 대한 비판, 풍자, 모락의 유형으로 일본군이 영연방에 속한 오스트레일리아 군을 대상으로 뿌린 전단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을 요괴로 묘사한 것을 들 수 있다. 서구의 괴기만화에 나올법한 복장을 한 싸늘한 안색의 루즈벨트가 뉴기니에서 전사한 오스트레일리아 병사의 시신 위를 엄습하고 있는데 싸늘하게 식은 이 병사의 복부에는 성조기가 꽂혀 있다. 전단의 그림이나 선동문구는 미군이 악마집단이며, 이 군대를 이끌고 있는 루즈벨트야말로 오스트레일리아 외부에서 오스트레일리아 군인들을 잡아먹다 필요하면 본토까지 집어삼키는 마귀라는 흑색선전에 집중하고 있다. 결국 일본군의 심리전 목적은 미군과 오스트레일리아 군을 이간시켜 결속을 와해시키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일본군은 서구인들에게 익숙한 요괴의 이미지를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전단 속에 등장하는 루즈벨트의 도상은 이승만이나 김일성을 요괴로 표현한 한국전쟁 전후의 전단에 나타나는 도상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정치나 종교지도자를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표현하거나 비인간적이며 잔악한 살인마, 괴수, 요괴, 심지어 악마로 묘사하는 사례는 미술사에서도 발견된다. 보슈Hieronymus Bosch, 브뤼겔Peter Breugel, 아르침볼도Juiseppe Archimboldo 등의 작품에 등장하는 기괴한 인물들을 포함하여 1830년 7월혁명을 통해 옹립된 루이 필립Louis Philippe 왕을 서양배의 형상에 빗대 풍자한 것으로 샤를 필립퐁Charles Philippon이 풍자신문 《라 카뤼카튀르La Caricature》에 게재했던 <배梨 모양의 루이 필립>이나 도미에Honore Daumier의 석판화 <과거-현재-미래>는 고전적 예에 속한다. 프랑스어 '배poire'는 속어로 '바보', '얼간이'를 뜻했기 때문에 대중적 상상력을 자극하여 그 풍자화를 본 사람들은 서양배 모양의 얼굴을 한 루이 필립을 바보로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 패전한 후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시대의 그로츠Georg Grosz, 딕스Otto Dix, 슐리히터Rudolf Schlichter 등은 독일 사회의 모순과 피폐상을 가장 신랄하게 공격한 화가들이었다. 이들 중 그로츠는 그의 친구 중 한 사람이 그에 대해 "회화에 의해 멀미를 일으킨 회화의 볼세비키"라고 부를 정도로 급진적이고 공격적이었다. 특히 그가 그린 <사회의 네 기둥>은 군국주의 정치가, 언론인, 성직자, 군인이 독일사회를 비참한 공포상태로 몰아가고 있는 중심세력임을 폭로하고 있다. 이 네 부류의 인간들은 공동의 이익을 위해 연대하고 있으며, 머리에 똥이 가득 찬 정치인이나 전쟁을 구상하고 있는 군인을 통해 이미 정체를 드러내고 있던 나치의 폭력성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하트필드John Heartfield 역시 포토몽타주를 통해 히틀러를 우둔하지만 탐욕스러운 침팬지로 표현하는가 하면 괴링Goering을 도끼를 휘두르는 살인마로 묘사한 <제3제국의 처형집행인, 괴링> 등에서 신랄하고 통렬한 정치풍자를 했다. 그로츠의 회화에 비해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는 대중매체를 통해 보급될 때 대중에게 큰 미치는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나치정권이 펼친 프로파간다 미술에 대응하는 또 다른 선동미술이었던 것이다.
그로츠와 하트필드의 작품은 분명 전단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구사한 풍자적 공격의 정신에 바탕을 둔 표현기법이나 도상은 전단의 그것과 상당 부분 겹쳐진다. 전쟁기에 선전전의 일환으로 뿌려진 전단의 경우 사실의 왜곡, 호도, 과장된 비방과 중상모략을 특징으로 한 것이 많지만 상대방의 정치적, 도덕적 정당성을 공격하기 위해 가장 빈번하고 상투적으로 동원되는 시각이미지가 공격해야 할 적의 정치지도자를 실제와 다른 종류의 인간으로 취급하는 진부한 도상들이다.
셋째, 전술적 차원에서 적으로 하여금 전의를 잃게 만들려는 의도로 제작한 전단을 들 수 있다. 태평양전생 중 미군과 오스트레일리아 연합군이 일본군 사병을 대상으로 뿌린 전단 <장교들은 본국으로 돌아가고 사병들만 남겨졌다>는 하와이 호놀룰루에 주둔하던 미해군에서 제작한 것이다.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었던 뉴기니 서단의 비아크Biak가 1944년 7월 2일 함락되고 연합군이 상륙하자 서부 뉴기니의 방위를 통괄하던 일본 육군 제2군 사령부의 사관과 장교들은 사병들을 내버려둔 채 비행기를 이용해 본국으로 철수하였다. 이 전단의 뒷면에는 무사도武士道를 군인정신이라고 강조해온 지휘관들이 정작 전황이
불리해지자 사병들의 생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일본으로 철수했음을 강조하는 문구가 담겨있다. 이 전단에서 미군은 비행기에 탑승하는 장교들을 향해 불만어린 시선을 던지고 있는 사병들의 모습을 그려놓은 앞면과 그것을 설명하고 있는 뒷면의 문구를 통해 일본군 사병들의 사기를 저하시킴은 물론 내부에서의 불만을 고조시키려는 심리전의 일환으로 제작, 남겨진 일본군 사병들을 향해 대량 살포하였다.
앞의 전단이 사병과 장교 사이의 이간을 통해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전술적 목적에 중점을 둔 것이라고 한다면 <전쟁에 따라오는 것은 질병이다>는 전쟁의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를 설득함으로써 일반 국민들로 하여금 전쟁을 지휘하고 있는 군부세력에게 전쟁의 중지를 요구하도록 유도하려는 목적을 딴 것이다. 일본도를 치켜들고 당당하지 앞장서서 걷고 있는 일본군 지휘관(이 희화화된 인물은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임이 분명하다)의 뒤를 따르는 것은 전쟁의 참상을 상징하는 괴물이다. 괴물의 흉측한 몸 아래 뱀, 곤충, 벌레 등이 사람들을 잡아먹거나 질식시키고 있는 이 그림이 폭격, 포격, 참호전과 같은 현대전쟁의 양상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전쟁으로 피폐해진 일본국민들의 참혹한 삶을 우화적으로 표현하고 있음에는 분명하다. 이를 증명하듯 전단 의 뒷면에 '(연합군의) 폭격에 따라 수도, 전선 등이 파괴되고 식료품은 고갈돼 일본인들은 쇠약해져 질병이 창궐하고 있지만 약을 구하 기도 힘들고 회복은 더더욱 어려운 지경에 빠졌다. 폭격이 더해질수록 온 나라는 불결해질 것이며, 병을 막기란 더 어려울 것이므로 이 쓸모없는 고뇌苦惱에 종지부를 찍고 전쟁을 시작한 군벌에게 정전을 요구하라'는 선전선동문구를 적어놓아 당장 전쟁이 야기한 현실적 고통을 적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회적으로는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군부에게 전쟁책임까지 물어야함을 은연중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전개된 심리전에 동원된 전단의 시각이미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시사점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활용된 전단의 내용과 형식이 한국전쟁에서도 적용되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세계대전이든, 한국전쟁이든 20세기 전쟁에 동원된 시각이미지의 유사성이 높다는 사실이다. 전쟁이란 특수한 상황에서 펼쳐지는 심리전은 아군의 전세를 유리하게 유도하는데 목적이 있으므로 그 내용은 대동소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일반적이고 넓게 살포된 신분보장증명서로부터 적을 유인하여 투항시키려는 의도의 전술적 책동 등의 대적심리전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대내심리전, 대외심리전 모두에 걸쳐 한국전쟁 기간 뿌려진 전단이 제2차 세계대전 중 활용된 전단의 연장에서 제작, 유포되었다는 사실은 이 전쟁을 이끌었던 주체들의 심리전에 대한 의식과 방법이 제2차 세계대전에 고착되어 있었음을 반증한다. 다시 말해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획득한 심리전과 선전전의 정보와 경험을 더욱 집요하고 정교하게 실천하는 장이었던 것이다. 단지 그 대상이 파시즘과 군국주의로부터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로 바뀌었으며, 한국전쟁은 자본주의대 공산주의가 서로 용어만 바꿔 상대방을 공격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한국전쟁이 이데올로기 전쟁의 성격을 띠면서 실제 전투에서의 물리적 충돌 못지않게 다양한 심리전이 구사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결국 심리전의 확산은 한반도는 물론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국가들을 심리전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은 원인이자 이유였다.
3. 심리전의 양상, 거울영상효과
한국전쟁 기간 미군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과 한국군이 뿌린 전단의 내용은 심리전, 선전전의 양상을 압축하고 있다. 투항을 권고, 강변하는 작은 크기의 쪽지로부터 신문형식으로 제작한 전투소식, 여러 것으로 그려진 만화, 팸플릿, 포스터에 이르기까지 내용에 따라 다양한 규격을 활용했던 것이다. 한국전생 중 미군은 주로 B-29와 같은 비행기를 동원해 공중살포하거나 대포를 이용한 반면 북한군은 가방에 넣은 전단을 사람이 직접 목적지 가까이 접근하여 뿌리거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갖다놓는가 하면 벽에 부착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특히 미군이 제공권을 장악한 이후부터 전단을 이용한 심리전은 미군의 압도적 우세 속에 전개되었다.
그런데 한국전쟁 중 유엔군과 북한군의 적에 대한 인식과 선전, 심리전 수행 양상은 서로 거울영상효과mirror image effect를 재생산했다는 특징이 있다. 양측이 전단, 팜플렛, 포스터 등의 선전도구를 통해 지속적이고 집요하게 다루었던 '소련의 꼭두각시 북한', 대 '미제의 주구 이승만 괴뢰', '소련의 괴뢰’ 대 미제 침략의 앞잡이 일제'라는 서로 유사한 이미지의 선전이 전형적인 예인 바 이것을 통해 적대적인 이념을 같은 언어로 반복했음을 알 수 있다. 이승만과 김일성을 각자 어떻게 주조해내었는지는 앞에서도 살펴본 바 있거니와 폭력이 실천되는 전쟁에서 그것이 다시 어떻게 강화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양자가 모두 거울영상효과에 의존한 선전전을 펼쳤음을 확인하기란 어렵지 않다.
전쟁 발발 직전 남한은 김일성을 스탈린에게 아첨하는 꼭두각시이자 인민군을 죽음으로 내모는 적괴로 묘사한 조야한 전단을 배포했지만, 전쟁 중에는 김일성이 소련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논리를 더 정교한 방식으로 선전한 <당신들은 속아 넘어가고 있소>를 살포했다. 마르크스Karl Marx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했던 것에 착안한 이 전단은 공산주의가 종교를 부정함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의 우상을 모신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김일성의 뒷모습을 통해 공산주의가 신흥 사이비종교란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양 손에 나이프와 포크를 든 식인귀 교주는 스탈린이며 가부좌를 한 자세나 머리 뒤의 두광頭光 등에서 불교도상을 차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제단에 바쳐진 제물은 북한과 인민이며 이들을 시식하려는 스탈린 앞의 김일성은 무지몽매한 열성신도이거나 추종자에 불과하다. 이 음침하고 사교적邪敎的인 제사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배경을 핏빛의 붉은색으로 칠해 전단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심리적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도록 의도한 것도 특징적이다. 이 전단에 표현된 이미지는 김일성을 뿔 달린 도깨비이거나 야만적인 권력자로 표현한 것에 비해 훨씬 강한 시각적 충격을 줄뿐만 아니라 김일성 뒤에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란 '절대적 세력'이 버티고 있음을 설득하기에 유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직접적, 선동적, 자극적 내용은 주민들은 궁핍에 시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권력자는 주지육림에 빠져있다는 내용의 전단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화면의 오른쪽에는 한 그릇의 죽을 놓고 여섯 명에 이르는 온 가족이 한숨을 쉬고 있는데 이 감질 나는 양식을 차지한 것은 제일 어린 자식이며 부모의 시름에도 불구하고 딸들은 아이의 음식을 향해 군침을 삼키고 있다. 배경도 어두운 색조로 처리하여 곤궁의 고통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화면 왼편에는 잘 차려입은 남자가 여성들의 접대를 받으며 환락에 빠져 있는데 그의 손에 양주잔이 들려 있고 상 위에는 양주병과 풍성한 음식이 놓여있다. 전쟁이 가져온 피폐함에도 불구하고 환락만 추구하는 파렴치하고 비양심적인 이 남자는 서구 자본주의의 주구 곧 '이승만 역도'이며, 양주와 양담배는 이들이 젖어있는 퇴폐적 자본주의를 상징한다. 따라서 이 전단에서 이승만 무리는 전쟁을 통해 한 몫 잡으려는 반역자임을 드러낸다. 이 전단의 뒷면에 적힌 선동 문구를 보면 이승만 정권이 토지개혁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서도 무거운 세금을 거둬들여 자기들만 호의호식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이미 1946년 3월에 '무상몰수-무상분배'의 원칙에 따른 토지개혁을 한 북한의 체제 우월성을 드러내려는 의도도 잠복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전단은 남한의 주민들로 하여금 토지를 분배받은 북한주민들은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려는 전략적 심리전의 의도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북한이 뿌린 이 전단을 남한에서 선동문구만 '공산당 관리'로 바꿔 뿌렸다는 점이다. 전단의 뒷면에는 '공산당정권이 땅을 분배하여 모두가 다 잘 살게 한다고 큰소리쳤지만 정작 북한인민군에게 무기, 식량, 약품을 공급하기 위해 공출한 것은 공산당 관리들만 위한 것'임을 강조하는 글로 채워져 있다. 남북한이 다 같이 동일한 시각이미지와 동일하지만 공격대상만 바꾼 선동문구를 통해 서로를 비방한 전단은 의외로 많다. 결국 남한이든 북한이든 문구만 바꾸면 상대방을 비난할 수 있는 같은 전단을 살포하였던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시각화한 예는 이미 러시아혁명기에 뿌려진 전단에서 익숙하게 사용했던 것이기도 하다. 즉 백군파에서는 볼셰비키가 노동자, 농민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실제로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붉은 군대에 불과하다는 내용을 담은 만화를 통해 노동자, 농민들의 동요를 차단하려고 한 반면, 볼셰비키 측에서는 적군파야말로 노동자, 농민들의 공리를 위한 대안이란 내용을 담은 전단을 살포했던 것이다. 이런 점은 미군이 생산한 심리전 문건을 인수받아 존스홉킨스대학의 작전연구소(Operations Research Office, ORO)에서 조사, 분석한 자료에서도 지적하고 있다. 북한은 선전전을 수행하는 기구와 목표물에 접근하는 방법에 있어서 소련의 실제를 그대로 답습했던 것이다.
IV. 미군과 한국군의 심리전
1. 미 극동군사령부의 심리전
6.25전쟁에서 전단은 심리전의 가장 대표적인 형태였다. 북한군이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한 후 미국 대통령 트루먼Harry Truman이 미공군과 해군에게 즉각 행동을 취하란 명령을 내린지 몇 시간 뒤인 1950년 6월 28일 하루 동안 도쿄에 있던 미 극동군사령부(FEC)는 급히 제작한 전단을 B-29를 이용해 한국으로 수송, 북한군과 맞서 싸우고 있는 한국군과 민간인을 향해 최선을 다해 방어할 것을 독려하는 내용으로 1,200만장에 이르는 전단을 살포하였다. 미군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이미 전시정보국Office of War Information을 운영하며 심리전을 수행했으므로 초기 전단은 이 기구의 실전경험을 참고했다. 태평양전쟁 당시 미군이 뿌린 전단은 주로 장교들에 의해 제작된 것이었다. 전시정보국 미술과Art Department 소속의 전문적인 일본어 교육을 받은 한 장교가 선전문안을 작성하면 그림솜씨가 있는 다른 장교는 그 내용을 도해한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또한 미공군의 주력 전폭기 B-29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본토를 폭격할 때 전투능력을 발휘한 기종일 뿐만 아니라 일본 전역에 미군의 심리전 전단을 산포한 경력이 있었으므로 미 극동군사령부는 한국전 발발과 함께 다시 B-29를 동원했던 것이다. 이때 심리전을 담당했던 부서는 미 육군 극동사령부 심리전과Psychological Warfare Branch였다. 한국전쟁 동안 미군을 제외한 국제연합군은 거의 심리전을 펼치지 않았고,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심리전을 전담하가다피 했던 미군은 확성기와 라디오 방송을 통한 선전도 펼쳤으나 확성기를 통한 심리전은 전술적 심리전에 한정적으로 활용했다. 왜냐하면 라디오 방송의 경우 심리전의 주요 대상인 북한군, 중국군과 북한 주민들이 라디오 수신기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중요한 전략 심리전 수단으로 취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에 전단처럼 대량살포가 용이하고 시각적 효과를 거두기 쉬운 선전도구를 적극 활용했다. 이런 사실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육군부 장관이었던 페이스Frank Pace가 "적을 종이로 파묻어 버릴 것"을 명령하였다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최초의 전단을 살포한 뒤 극동사령부의 심리전과는 7월 1,330만장, 8월 약 1,200만장, 9월에 《낙하산뉴스》란 이름을 붙인 신문형 전단 800,000매를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던 지역으로 날아가기를 기대하며 살포했다.
그 후에도 미군은 《낙하산뉴스》를 포함하여 북한군을 대상으로 한 <안전보장증명서> 등 유치하고 조잡하게 제작한 전단을 비행기로 뿌렸으나 대부분 한국군과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전쟁 개시 후 6개월 동안 미군이 뿌린 전단은 1억 2천 2백만 장에 이르렀다. 휴전이 성립할 때까지 미군이 뿌린 전단의 총량은 약 25억 장을 넘은 수량이었으며, 당시 유엔군이 살포한 정상적인 전단의 규격이 약 17x12cm였음을 고려할 때 이 정도의 분량이라면 한반도 면적 전체를 20번 덮을 수 있었으며, 지구의 적도 둘레를 기준으로 한다면 10번을 더 돌 수 있는 것이었다.
전쟁 초기부터 미 극동군 심리전과는 (1) 항상 미국의 입장이 아니라 유엔의 입장에서 말할 것, (2) 이 전쟁을 내전civil war이 아니라 침략aggression으로 다룰 것, (3) 공산주의를 이념적이고 이론적인 용어로 공격하지 말고,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가시적 효과의 측면에서 공격할 것 (4) 간단하고 구체적인 주제에 집중해서 한국과 직접 연결된 주제를 간결하게 표현할 것의 네 가지 원칙을 견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초기 미군의 즉흥적이고 방만한 심리전은 북한군의 기습 남침과 적극적인 공세에 밀려 체계적이면서 계획적인 대응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쟁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으나 1950년 10월 말경 중공군의 대공세에 밀려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국제연합군은 남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1951년에는 다시 서울을 내주어야만 했다. 1951년 상반기 전황의 유동적인 이러한 가변성은 미군의 심리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1951년 1월 미8군사령부에도 심리전부Psychological Warfare Division가 설치돼 이 조직 산하의 '제1확성기·전단중대'가 활동을 개시하면서 미군의 심리전은 새로운 양상으로 접어들었다. 1951년 8월에는 미 본토로부터 '제1방송·전단부대 1st Radio Broadcasting and Leaflet Group'가 도쿄에 도착해 본격적인 심리전 작전을 개시하면서 미 극동군사령부의 심리전과도 심리전부Psychological Warfare Section로 개편되면서 심리전 작전의 계획을 세우고 선전전 수행을 관리했다. 실제 특히 중국군의 개입은 미군의 심리전 전술을 바꾸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장 중국군을 대상으로 한 전단이 필요했지만 대부분 북한군에게 뿌릴 전단의 언어만 바꿔 투하했다. 그러나 미군은 중국이 참전의 명분으로 내세운 '항미원조抗美援朝'의 이념과 상관없이 중국군은 공산정권에 의해 죽음의 장으로 내몰렸으니 투항하여 생명을 지키라는 내용을 강조했다. 그중 시각적 충격과 공포를 조성하기 위해 빈번하게 사용한 이미지가 인해전술의 무모함을 환기시키기 위해 대량 살상된 중국군의 시신을 노출하는 것이었다. 특이하게도 중국군에게 전장에서 담배말이용 종이가 부족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담배를 말 수 있는 얇은 종이에 투항을 권고하는 내용을 담아 살포한 전단도 있으며, 많은 중국군들이 한때 국부군 소속이었으나 중화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중국군에 편입된 점을 이용해 쑨원孫文의 삼민주의를 내세운 전단도 뿌렸다.
미군은 이러한 전단을 통해 적군이나 아군에게 인지적. 정서적, 행동적 변화를 일으키고자 했다. 인지적 변화는 전단을 통해 북한의 실체를 자각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며, 정서적 변화는 공포, 증오, 향수, 동정 등 인간의 원초적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다. 행동적 변화는 투항, 상관살해, 사기고취 등 직접적 효과를 노리는 것을 의미한다.
극동사령부의 심리전부가 한국에서의 심리전을 전담하면서 전단은 주로 전선을 중심으로 살포하였으며, 한국어로 작성된 전단은 주로 후방에 투하했다. 1951년 7월 이후 미군은 북한군, 북한주민, 중국군을 대상으로 매달 5,000만장 이상의 전단을 뿌렸다. 1952년 초에도 매주 500만장 이상의 전단을 후방에 살포했으며, 1,500만장-1,900만장의 삐라를 전선에 보낼 정도로 그 양은 증가되었다. 그 결과 페이스 육군장관이 장담했던 것처럼 미군은 전쟁 개시로부터 휴전 때까지 25억장에 이르는 전단을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지역은 물론 남북한 전역에 살포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B-29와 같은 폭격기를 이용한 전단살포의 효과에 대해서는 미국에서조차 회의적이었다. 즉, 목표지에 정확하게 살포하기 위해 저공비행을 해야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속도를 늦출 경우 오히려 위험할 수 있으므로 비행사들은 목표지에 근접했다 싶으면 투하지점과 상관없이 전단주머니를 던졌던 것이다.
전투가 휴전선을 중심으로 고착되었던 1953년 3월 20일 미 합동참모본부의 지시에 따라 극동군사령부의 합동심리위원회의 승인을 받은 유엔군 최고 작전 책임자인 클라크W. Clark는 '귀순조종사 현상금' 심리전의 계획을 수립, 시행하였다. '뮬라작전Operation Moolah'이라 불린 이 작전은 남한에서 전투 가능한 미그MIG기를 몰고 귀순하는 조종사에게 현상금 5만달러를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1950년 11월경부터 소련제 미그 15기가 출현했고, 이 새로운 전투기의 성능은 미군이 운용하던 F-86 세이버Saber보다 우수한 성능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미군은 1953년 5월 중순 50만장에 이르는 조종사의 귀순을 설득하는 전단을 신의주와 의주 등지에 있던 북한공군기지를 향해 공중 살포했다. 뮬라작전을 통해 뿌려진 전단을 보고 미그기를 몰고 귀순한 조종사는 없었으나 심리전 효과는 컸다. 북한공군이 조종사의 귀순을 막기 위해 미그기의 출격을 엄격하게 통제했기 때문에 반대급부로 북한공군의 전투력 저하란 효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2. 심리전 작전내용과 운용주체
1950년 9월부터 1951년 11월 27일까지 미군이 살포한 전단 219종 가운데 그 내용을 작전별, 주제별로 분류하면 <표1>과 같다.
<표1> 미군의 대적 심리전 작전에 사용한 이미지의 주제의식 분류
(순서대로, 작전명 / 주제의식·메시지 / 한국인용 삐라 구성비 / 중국인용 삐라 구성비 순)
불도저Bulldozer / '유엔군은 강대하다', '당신들은 결국 패배할 것이다', 'UN군이 장비. 물자의 측면에서 우세하다' / 16.9(3) / 11.3(3)
구사일생Skinsaver / '목숨을 건질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마라'
외통수Checkmate / '당신은 전술적으로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있다.'
향수Home and Mother / 향수. '고향의 식구들을 생각하라' / 20(1) / 13.7(2)
이아고lago / '당신의 상관, 우군, 전쟁목적, 공산주의자를 믿지 마라', '당신은 이용당하고 있다' / 11.8(4) / 7.9(5)
데스데모나Desdemona / 'UN군의 전쟁목적은 정당하다' (폭격예고에서 보듯이) 'UN군은 당신이 다치기를 원치 않는다'
나이팅게일Nightingale / '당신은 포로로서 환대받을 것이다' / 19.4(2) / 27.7(1)
길잡이Signpost / '다가올 겨울, 참호 파기, 피로 등 당신이 감수해야 할 고통을 생각하라'
깃발Flag / '진정한 애국자로 행동하라'
전복Sand-in Gears / '전복활동. 선동. 방해 . 파괴하라'
출전 : W. Kendall etc.. 'FEC Psychological Wartare Operation: Leaflets'. ORO-T-21 (FEC). 1952. 3. 31. pp.92-94
비고 : 백분율이 표시되지 않은 주제는 모두 5% 미만이다. ( )의 숫자는 비중 순위를 나타낸다.
총 10개의 작전명을 가진 이 대적심리전에서 전투에서 적을 심리적으로 제압하기 위해 무력의 우위를 분명히 제시함으로써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범주에 속하는 것이 불도저, 구사일생, 외통수 작전이라고 한다면 그것보다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 향수작전이다. 미군이 구사한 심리전 작전 중에서 북한군이나 중국군 모두에게 가장 많이, 지속적으로 펼친 것은 '나이팅게일 작전'이며 도표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군을 상대로 한 전단 중 27.7%를 차지하고 있다. 즉 개인의 신변에 대한 불안을 자극함으로써 항복을 유도하고자 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가족의 안위에 대한 두려움,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향수작전으로 주로 북한군에게 이 작전을 구사했다. 정치적 선전선동, 자기진영에 대한 불만과 이반離叛의 고취를 목적으로 한 '이아고 작전' 의 경우 개인신상 문제를 건드린 것보다 비율은 낮지만 그 내용은 개인문제를 다룬 것 못지않게 직접적이고 단호한 점이 특징이다.
이러한 심리전 작전에 따라 살포된 전단의 내용을 개별적으로 분석하면 북한군에게는 전쟁초기처럼 김일성을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이데올로기공격보다 개인의 감정을 자극하여 전투의지를 상실하게 만드는 내용이 많다. 이를테면 추석, 설과 같은 명절이 다가왔는데 고향의 부모를 생각하라, 두고 온 아내와 자식은 네가 살아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귀순한 북한군은 따뜻한 옷과 음식을 지급받으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부상당한 북한군을 잘 치료하고 있다는 등 개인의 신변문제를 건드린 경우도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북한군이 전장에서 싸우고 있는 동안 중국군이 북한을 지배하며 재산을 몰수하고 부녀자를 능욕한다는 흑색선전으로부터 중국군은 좋은 무기는 자기들만 차지하고 쓸모없는 무기만 북한군에게 넘겨주고 있다. 북한 병기는 중국군보다 훨씬 성능이 떨어진다. 러시아를 위해 싸우지 말라. 네 뒤에서 중국과 소련이 당신을 죽음의 수렁으로 내몰고 있다는 등 북한군과 중국군, 북한과 소련을 이간시키려는 목적의 전단도 다수를 차지한다. 북한지역의 주민에게는 한국군과 유엔군이 승리하고 있으니 북한군에게 양식을 내주지 말라, 북한군이 전쟁을 끌면 끌수록 물가는 폭등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실제 전쟁 전에 오백원이던 세숫비누가 전쟁으로 천원, 고무신은 이천원에서 사천원으로 올랐다는 등 구제적인 지수를 들며 전쟁도발자이자 물가상승의 원인을 제공한 공산당을 타도하자고 설득하고 있다. 또한 전투지역에는 공습경보 전단을 대령살포하여 주민과 북한군, 중국군과의 접촉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도 했다.
동시에 미군은 사정에 따라 한국군에 의뢰하여 긴급하게 제작한 전단을 살포하기도 했다.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선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북한군과 중국군이 피난민 속에 섞여 남진하여 포격할 수 없게 되자 미군은 국방부 정훈국에 있던 구상에게 '길에서 물러나라 중공군과 떨어져라'는 요지를 담은 전단을 제작해줄 것을 의뢰했다. 중국군을 대상으로 한 전단 중에는 '역사적으로 중국은 북방오랑캐의 침략을 물리쳐 왔다. 소련은 중국을 다시 지배하려는 북방 오랑캐와도 같다'는 내용을 담은 것은 물론 11월 12일 쑨원孫文의 생일을 맞아 그의 초상을 활용하여 '공산주의의 노예가 되지 말고 위대한 중산 선생이 표방한 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 정신에 따라 올바른 길을 선택하라'는 내용의 전단도 포함돼 있다.
전단제작은 주로 미 극동군사령부로 파견돼 작전부(S-3)에 소속되었던 '제1라디오방송·전단부대'의 전단과Leaflets Division가 전담했다. 전단과에 소속된 삽화가 중에는 전일근무제로 고용된 한국인, 중국인 4명과 시간제로 근무한 일본인 4명이 있었다. 극동군사령부에서 전단에 들어갈 삽화를 그린 김규택金奎澤은 아마 이 시기쯤 채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1906년 경남에서 부유한 한방의韓方醫의 아들로 태어난 김규택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휘문고보로 진학하여 고희동으로부터 그림을 배웠다. 가업을 이어 한의사가 되기를 바라던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고 도쿄의 가와바다川端미술학교로 유학한 그는 당시 일본에서 오카모토 이페이岡本一平, 아소 유타카麻生豊 등의 만화가 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만화가 한창 유행하던 때라 그 영향을 받아 그림보다 만화에 전념하였다. 귀국 후 《개벽》, 《별건곤別乾坤》 등에서 삽화를, 조선일보에서 시사만화를 그렸다. 당시 조선일보에는 정현웅이 학예부에 근무하고 있었다.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김규택은 매일신보로 자리를 옮겼다. 해방 후 조선일보사에 복귀한 그는 한국전쟁 중 정현웅의 소집에 따라 조선미술동맹에 나가 맥아더와 이승만을 빨래처럼 묘사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이것이 문제가 돼 그는 서울 수복 후 부역자로 낙인찍히기도 했으나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고 1.4후퇴 때 부산으로 내려갔다. 부산에서 마땅한 일자리를 찾던 김규택은 도쿄에 있는 미 극동군사령부 심리전과에서 만화를 그릴 사람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하여 발탁된 후 도쿄로 갔던 것이다. 현대 국내외에 남아있거나 기록으로 전해지는 많은 전단은 그에 의해 제작된 것이며 비교적 스타일이 뚜렷하기 때문에 그의 그림을 판별하기란 어렵지 않다.
1951년부터 투입된 제1라디오·방송전단부대는 북한군뿐만 아니라 중국군에 대한 심리전도 강화했다. 이에 따라 미군은 한글로 된 전단뿐만 아니라 중국군을 상대로 중국어로 제작된 항복을 회유하는 전단도 살포하였으며, 남북한의 주민들에게 중국군이 해방군이 아니라 북한을 지배하는 또 하나의 침략세력임을 알리는 전단을 제작하여 뿌렸다.
특히 전투가 교착상태에 빠졌던 1951년부터 휴전협정이 이뤄진 1953년 7월까지 미군과 북한군 사이에서 치열한 심리전이 전개되었다.
3. 전단의 도상분석
1) 죽음의 도상, 메멘토모리
전쟁이란 특수한 상황에서 적의 전의를 상실하게 만드는 효과적인 선전선동 수단은 죽음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것이다. 불도저, 구사일생, 외통수작전은 대체로 '항복하여 목숨을 보전하라' 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한국전쟁 초기에 국방부 정훈국의 대북전단이 펼친 심리전은 주로 투항권고, 전복활동, 협력요구 등에 목표를 둔 것인데 이를 위한 물리적 여건은 갖추지 않은 채 명령조의 직선적인 구호만 내세움으로써 결과적으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전후 한국군 내에서의 자체평가를 보더라도 조야한 인쇄와 단선적인 선전문구를 적은 전단이 비단 군사적 목표에서 뿐만 아니라 민간인이나 군인에게 미친 심리적 실효성은 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전쟁이란 급박한 위기상황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부각시키는 것이야말로 심리전을 효과적으로 치를 수 있는 방법이다. 그래서 전단 중에는 죽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거나 혹은 주검 그 자체를 노출한 경우가 많다. 중공군을 대상으로 뿌린 전단에서 해골이 그득한 죽음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는 중공군 뒤로 거대한 죽음의 이미지가 피리를 불고 있는데 그 앞에는 대포 등의 중무기로 무장한 미군이 이미 항복한 중국군을 보호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 전단들의 그림을 그린 작가는 서양미술에서 익숙한 죽음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있다. 실제로 서구의 판화와 회화에서 피리를 불거나 작은 북과 같은 악기를 연주하며 춤을 추는 죽음의 도상은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는 바 그 주제는 '죽음은 항상 네 옆에 있으니 그것을 기억하라' 즉, 메멘토모리memento-mori이다. 따라서 이 전단을 그린 미술가는 서구미술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거나 혹은 그것을 제공한 미군의 심리전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이러한 도상을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사람이 손으로 그린 해골보다 더 무시무시한 것은 역시 사진을 활용한 전단이었으며, 특히 지원군의 이름 아래 참전한 중국군을 향해 죽음의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를 대량 살포했다. 이러한 전단은 사진은 진실을 말한다는 통념을 통해 죽음의 두려움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중국이 평화회담을 정지시켜서 중공군 사병들을 죽음의 수렁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전단을 안고 죽어있는 해골은 의미 없는 전쟁의 소모품에 불과하다는 비관주의에 빠지도록 고안된 것이다. 특히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은 전투 중에 전사한 중공군 병사를 촬영한 사진을 전단에 그대로 노출하여 중공군들로 하여금 죽음에 대한 극단적인 공포에 사로잡히도록 만드는 심리전을 구사하기도 하였다. 이 전단에는 "터키군의 공격으로 고지에 중공군 시체가 쌓여있는 광경. 1951년 2월 21일" 이라고 구체적인 시간을 적시하여 사실성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전쟁 동안 유엔군과 한국군은 선전전에 동원하는 내용의 간결하고 정확한 표현과 전달을 위해 화가보다 시사만화가를 선전선동 용 전단의 제작자로 적극 활용했으며 그들 중에서도 앞에서 언급한 김규택을 비롯하여 김성환, 김용환, 박일주 등의 역할은 단연 돋보이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 일본의 미극동 군사령부에서 일하고 있던 김규택의 그림은 설득, 회유에 뛰어난 것이기도 하다. 예컨대 <동무! 나는 공산두목 김일성을 위해서 개죽음을 했네. 자네도 내 꼴 되려나?>란 그림은 이미 백골이 된 인민군이 사실적으로 재현된 김일성의 초상화를 들고 추위에 떨고 있으면서도 귀순을 망설이고 있는 북한군 경계병을 회유하려는 목적으로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전단에서 사용하는 전형적인 직설법과 뵉클린Arnold Becklin과 같은 상징주의 화가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상징적 도상을 결합하여 시각적 호소력을 높인 것이 특징이다. 클린의 자화상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죽음을 유혹하고 있는 해골은 인간의 유한성을 상징하며 16세기 그리엔Hans Baldung Grien의 작품에서 이 죽음의 도상은 젊은 여성과 입맞춤을 하는 형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앞에서 살펴본 전형적인 죽음의 도상들, 예컨대 작은 북을 치며 춤추고 있는 해골, 망토를 뒤집어 쓴 채 죽음의 행렬을 재촉하는 피리를 불고 있는 유령 등은 모래시계를 든 해골과 함께 서구 미술에서 죽음의 알레고리, 즉 '죽음의 무도dance macabre'를 표현할 때 빈번하게 사용해온 도상이기도 하다. 특히 추수할 때 사용하던 긴 장대에 매달린 낫을 휘두르고 있는 해골은 그리스 신화에서 우라노스와 가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시간의 신이자 농경의 신인 크로노스Chronos를 원형으로 한 것이다. 크로노스의 도상이 늙은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 기독교 미술에서 크로노스의 지물持物인 낫을 휘두르고 있는 해골은 죽음의 상징, 혹은 악마 자체였던 것이다. 다만 서구 미술사에서 삶의 허망함vanitas을 상징하는 해골은 종교적이고 교훈적인 차원에서 도입되던 소재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중 미군은 적에게 극단적인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서구 미술사 속에 나타나는 죽음의 도상을 활용하였던 것이다.
개인의 신상문제를 정치적인 것과 관련시킨 전단도 있다. 휴전회담의 지연은 불필요한 죽음만 가져온다는 내용을 담은 전단이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한국전쟁 초기는 전면전의 양상을 띠었으나 1951년부터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전쟁은 소모전의 특성을 띠기 시작했다. 중국군의 개입과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전선에서는 5차례에 걸친 중국군의 공세가 있었으나 유엔군, 특히 미군의 막강한 군사장비, 공군력, 병참에 의해 제5차 공세는 실패로 끝났다. 이 시기를 이용해 미군이 1951년 5월 31일 소련 측에 전쟁 이전의 원상을 회복하는 조건의 휴전교섭을 제안하자 소련은 이 사실을 중국에 통보했다. 중국이 이 제안을 받아들인 후인 1951년 6월 23일 국제연합주재 소련대사 말리크Jacop Malik가 미국의 휴전협상안을 수락하여 7월 10일부터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물론 이승만은 휴전에 반대했다. 그러나 휴전회담은 2년이나 지속되었다.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가운데 중국군 대표단 특유의 지연전술, 특히 "회담하면서 때리고, 때리면서 회담한다"는 탄탄따따 따따탄탄談談打他 打打談談의 지연전술로 나오자 1952년 여름에 북한의 주요 지역에 대한 북폭을 강화했으나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휴전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져 지지부진해지자 미군 측에서 그 책임을 북한과 중국군에게 전가하는 전단을 만들어 배포했다. 남한 측은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중인 양측대표들을 촬영한 사진과 그 아래에 전사한 북한군 병사들의 시신을 병치시켜 북한 측에서 휴전을 지연시켜 애꿎은 북한군과 중국군만 희생되고 있다는 심리전을 폈던 것이다. 이 전단은 리지웨이가 격렬한 전투 후 들판에 널브러진 종국군의 시체를 촬영한 사진을 그대로 사용한 전단과 같은 목적으로 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이아고작전1, 정치적, 이념적 설득
적군의 지도자가 민중의 고혈을 짜는 이미지는 이아고 작전에 따라 김규택이 그린 〈농민의 고혈을 짜는 공산당>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전단은 출처를 분명히 밝히지 않았다는 점에서 회색심리전에 동원된 선전물에 해당하지만 인민군 모자의 붉은 별과 구렁이의 몸에 소비에트의 낫과 망치를 선명한 붉은색으로 인쇄한 것에서 남한에서 제작한 선전물임을 분명하게 지시하고 있다. 가난한 농민의 몸을 칭칭 감고 있는 구렁이의 도상 역시 당시 남한에서 즐겨 사용하던 뿔 달린 도깨비의 형상을 한 김일성처럼 공산당을 인간이 아닌 '괴물'로 인식하도록 회유하고 있다. 몸통은 구렁이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머리를 하고 있고 가슴 부위에서 팔과 같은 것이 나와 농민을 옥죄는 비현실적이고 만화적인 표현방법을 활용하고 있으나 이 이미지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끼치게 만드는 충실한 묘사는 '공산당을 사람잡아먹는 악마'란 최면에 빠지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아고 작전의 핵심은 '당신은 이용당하고 있다'는 심리전이다. 이를 전략적 심리전의 차원에서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김규택이 그린 <북한 철도는 중공군이 지배하고 있다>를 들 수 있다. 마치 말고삐를 낚아채듯 북한의 철도를 밧줄로 묶어 조종하고 있는 오성기를 든 중국군은 북한이 경제적으로 중국에 종속되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를 지닌 것이다. 이것은 중국의 개입이 사회주의 형제국가를 지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경제적 약탈을 위한 것이며, 거만하고 무자비한 중국군은 의용군이 아니라 침략자임을 강조함으로써 북한군과 중국군을 이간시키려는 목적과 함께 북한군으로 하여금 전쟁의 목적에 의심을 품게 만들려는 전략적 차원에서 고안된 심리전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 극동군사령부는 북한이 중국의 지배를 받는 꼭두각시라는 논리보다 북한이든 중국이든 다 같이 소련의 조종을 받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심리전을 더 적극적으로 폈다. 미 극동군사령부 심리작전부에서 제작하여 살포한 <북한군 병사는 각자 다음 질문에 대답해 보라>를 보면 소련군모를 쓴 스탈린이 웃통을 벗은 채 비질을 하고 있는데 중국군과 북한군은 마치 쓰레기처럼 전선으로 내몰리고 있다. 스탈린의 모습이 마치 거대한 석상처럼 과장된 규모로 그러진 반면 북한군과 중국군은 소모품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스탈린은 무자비하고 탐욕적인 지배자에 다름 아니다. 이 전단은 북한군과 중공군을 전쟁터로 몰아넣고 있는 것은 소련이며 한국전쟁은 따라서 내전이 아니라 소련의 사주를 받아 중공군과 북한군이 벌이는 대리전생임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미 극동군사령부가 한국전쟁을 소련과의 대결, 곧 냉전의 연장선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특히 이 전단의 뒷면에 한글로 쓴 선동문구에서 소련을 제국주의라고 규정하고 있음을 주목해 볼 때 미군 측에서도 북한군의 '미제국주의'란 상투적인 표현에 맞대응하여 소련을 제국주의로 몰아갔음을 알 수 있다. 조국통일을 내세운 북한이든 항미원조를 명분으로 한국전쟁에 개입한 중국인민지원군이든 다 같이 소련의 조종을 받고 있는 만큼 그들의 이념과 상관없이 전쟁은 북한군만 죽음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다는 선전전은 따라서 미군 측에서 널리 활용한 논리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소련을 전쟁을 조종하는 배후세력으로서가 아니라 중국과 협잡하여 북한지역의 분할지배 야욕을 지닌 침략자로 묘사한 전단은 소련의 정체를 폭로할 목적으로 제작, 살포된 것이다. 김규택이 그린 이 전단에서 스탈린과 마오쩌뚱이 마치 어린이들의 '땅 따먹기 놀이'처럼 북한 지역에 금을 긋고 서로 땅을 나눠가지는 모습을 크게 부각시켜 놓은 것이 특징이다. 전쟁의 이권을 나눠가지는 정치지도자를 풍자한 작품은 프랑스대혁명 직후 등장한 나폴레옹과 그의 숙적인 영국이 식탁 위에 지구를 올려놓고 조각내 나눠먹는 길레이James Gillray의 정치풍자 판화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 판화에 깃든 풍자정신에 비하면 김규택이 그린 전단 속의 두 인물은 더욱 탐욕적이다. 마오쩌뚱과 얼굴을 맞댄 스탈린은 냉혹하고 잔인한 표정을 하고 있는 반면 마오쩌뚱은 다소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마치 그에게 아첨하듯 무릎을 끓고 맞장구치고 있다. 스탈린은 북한지역의 분할이란 이 밀약에 끼어들려는 김일성을 밀쳐내고 있어서 이 전단을 통해 한국전쟁이 인민해방, 조국통일을 위한 것이란 북한의 명분과 상관없이 스탈린과 마오쩌뚱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빚어진 결과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마치 북한이 이승만, 미국, 일본을 한 통속으로 묘사했던 것처럼 미 극동 군사령부 역시 김일성, 마오쩌둥, 스탈린을 한 통속으로 묶고 있는 것이다. 다만 북한의 전단이 이승만을 미국과 일본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주구로 표현한 반면 김일성은 다른 두 공산주의 지도자들로부터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분명하게 제시함으로써 한국전쟁의 결과는 소련과 중국에 의한 새로운 식민통치란 비극을 낳을 것이란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전단은 전투를 치르고 있는 북한군을 그들의 지도자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전술적 목적을 담은 것이기도 하지만 대내심리전에 활용한 목적으로도 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남한지역의 주민들로 하여금 북한체제와 전쟁의 부당성, 전쟁이 종결된 후 북한 땅은 소련과 중국에 의해 지배된다는 논리를 편으로써 남한 주민들로 하여금 북한의 선전전에 휘말리지 않도록 차단하는 효과까지 노리고 있는 것이다.
3) 이아고작전2, 지휘관과 사병의 이간
전쟁의 효과적인 수행과 전쟁의 목적인 승리를 위해 전투에 투입된 병사들에게 지휘관이 믿고 따를만한 존재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한 문제이다. 미군과 한국군은 이런 점에 주목하여 북한군과 중공군을 향해 지휘관과 사병을 이간, 격리시키는 전술을 구사했다. 미군의 이아고작전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당신의 상관, 우군, 전쟁목적, 공산주의자를 믿지 마라', '당신은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소련, 중국과 같은 최고 권력기관으로서의 국가가 아니라 당장 전투현장에서 사병들을 지휘하고 있는 장교와 사병 사이를 이간하고, 사병들이 상관으로부터 부당한 취급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시병들의 투항과 귀순을 유도하는 유형의 전단으로 미국동군사령부 심리작전부 제1라디오 전단부가 1951년 12월 4일 제작하여 배포한 <살길을 막는 악마의 손>을 들 수 있다. 이 두 전단은 같은 이미지를 사용하되 각각북한군과 중공군 병사를 대상으로 2개 국어로 표기한 것이다. 미군이 살포한 안전보장증을 읽으려는 병사의 눈을 가리고 있는 지휘관의 손은 정보를 차단하여 병사들로 하여금 전쟁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으므로 이들을 믿지 말고 전단의 내용을 믿으라고 설득하고 있는 것이다. 병사들로 하여금 지휘관에 대해 의심하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장교와의 사이를 이간하여 전투의지를 상실케 하려는 전단은 태평양전쟁 중 미군이 일본군 사병들을 대상으로 뿌린 전단에서도 구사된 바 있다. 다만 일본군에게 뿌린 전단에서 사령관을 비롯한 고급장교들이 부하들을 버리고 자신들만 살길을 찾아 본국으로 귀환했다는 구체적인 사실을 적시하여 일본군 사병들의 항복을 유도한 반면 이 전단에서는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기보다 전술적 설득과 회유를 구사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4) 나이팅게일작전, 신분보장의 약속
나이팅게일 작전의 유형으로 가장 많이 활용된 것이 투항을 권유, 설득하는 이른바 안전보장증명서safe conduct certificate 혹은 safe conduct pass이다. 북한군과 중국군의 귀순을 유도하기 위해 살포한 전단 중에서 개인의 안전보장, 후사, 면책 등을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이 많으나 만약 그런 전단을 소지하고 있다 발각될 경우 배신자로 처단될 수도 있으므로 적군의 눈에 잘 띌 뿐만 아니라 물질에 대한 원초적인 관심을 자극하고, 소지하고 있더라도 투항이나 귀순의도를 은폐할 수 있도록 앞면에는 북한이 1947년에 발행한 100원권 지폐도안을 위조하고 뒷면에는 역시 지폐분위기를 딴 안전보장증명서를 인쇄해 유포한 전단이 대표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액수를 알 수 있는 면에는 실제 북한 지폐의 도안대로 가운데 산의 풍경을 감싸고 있는 식물도안이 있으나 그 뒷면에는 안전보장증명서가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지폐이지만 실제로는 투항시 안전을 보장한다는 내용을 담은 이런 유형의 위조지폐 전단 역시 미군과 북한군이 동시에 발행해 뿌리기도 했다. 클라크Mark W. Clark 유엔군 총사령관 명의로 주로 북한 공산군에게 뿌린 유엔안전보장증명서는 한글, 영문, 중문으로 작성하였으며, 영문에는 "여러분이 언제든지 적대행위를 그만두려고 결심했을 때 어느 유엔장병에게나 이것을 보이기만 하면 된다. 나는 모든 유엔장병에게 여러분이 이것을 가지고 유엔 측으로 넘어오면 잘 대우하라고 엄격히 지시했다"는 문구를 담고 있다. 이 지폐형 전단은 리지웨이의 후임으로 클라크 장군이
1952년 4월 17일 유엔군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므로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졌던 1952년 중순 이후 제작, 살포된 것이다. 리지웨이 사령관 역시 1951년 12월 3일 동일한 북한의 100원권 지폐를 위조하여 북한군을 향해 뿌렸다. 벤플리트 유엔군 사령관도 중국군을 향해 '당신의 개인적 안전을 보장한다'는 내용을 중국어로 기록한 지폐형 전단을 뿌렸으나 지폐를 흉내냈을 뿐 전단 속에 액수를 적어 넣지는 않았다. 한국전쟁 중 유엔군에서 살포한 안전보장증명서의 효과는 컸다. 그것을 북한군 병사들이 안전보장증명서를 흔들며 한국군에 투항하는 장면을 촬영한 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지폐형 전단은 이미 태평양전쟁 당시 미군이 일본군을 대상으로 구사했던 심리전 전단에서 사용된 것이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를 즈음 미군은 일본인들을 상대로 앞면에 실제 10엔 액수의 일본지폐를 위조하고 그 뒷면에 '(일본)군벌이 중국과의 전쟁을 시작했던 1930년(소화 5년)에 10엔으로 품질이 좋은 쌀 두말 다섯 되나 여름에 입을 수 있는 의복용 옷감 8명분, 4묶음의 숯을 구입할 수 있었는데 중일전쟁 발발 후인 1937년에는 품질이 나쁜 쌀 두말 다섯 되, 5인분의 옷감, 숯 2묶음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세계 최강대국과 맞서서 3년간이나 절망적인 전쟁을 치루고 있는 지금 현재에는 암시장에서 겨우 품질 좋은 쌀 한 되 두 홉, 만약 구입할 수 있다면 숯 약간, 목면은 구할 수도 없다'는 문구를 적어 놓아 태평양전쟁이 무모할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로 하여금 절망적인 물자부족에 시달리게 만들고 있음을 적시하였던 것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군부는 미군이 뿌린 전단을 소지하는 일본군이나 민간인을 사형에 처할 정도로 엄격하게 통제하였으나 전황에 대한 정보가 차단된 상태에서 불안해하던 일본인들에게 이와 같은 전단은 일본이 처해있는 위기에 대해 인식하는데 큰 역할을 했을 것임에 분명하다. 실제 태평양전생 동안 일본의 물가지수가 급격하게 상승하였으므로 이 전단을 습득한 일본인들이 느꼈던 절망감은 컸으며 미군은 그런 심리를 파고드는 심리전을 구사했던 것이다. 북한 군부 역시 북한군들이 미군에서 살포한 전단을 소지하는 것을 강력하게 통제하였으나 금전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인 소유욕을 차단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미군이 지속적으로 지폐형 신분보장증명서를 제작해 유포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한국군과 유엔군 측에서 뿌린 전단 가운데 개인 신상의 이익과 관련된 것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항복, 귀순을 권유하는 전단이 거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이런 전단은 비단 유엔군과 한국군에서뿐만 아니라 북한군에서도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이미 한국전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국방군에 소속된 장교들이 사병들을 이끌고 월북하는 사태가 있었으며, 북한은 그들을 체제선전용으로 활용한 바 있고, 전쟁 중에도 미군 포로 등을 동원해 반전과 평화를 호소하는 심리전을 펼쳤던 것이다.
5) 향수의 자극
개인의 신상문제와 관련하여 고향에 두고 온 부모처자에 대한 그리움이나 그들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등의 감정을 자극하는 전형적인 예로 추석이나 설과 같은 명절에 자식이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어머니를 부각시킨 전단을 들 수 있다. 이런 유형의 전단은 유엔군이 북한군이나 중공군을 향해 뿌린 전단에서는 물론 북한군이 한국군에게 뿌린 전단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북한군은 크리스마스가 임박했을 때 미군을 겨냥하여 고향에서 애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내용으로 홀로 잠 못 들고 뒤척이는 여성의 이미지를 활용하여 미군의 전투력 저하와 염전厭戰의식을 노리기도 했다. 한국군 측에서 북한군을 향해 뿌린 전단 중에서 〈아내와 애인은 그대가 돌아오기를 고대하고 있다>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성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손에는 꽃다발을 들고 다소곳하게 앉아있는 사진을 통해 북한군으로 하여금 사진 속의 여성과 두고 온 가족이나 연인을 동일시하도록 연출한 심리전 전단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이 전단은 실제 인물을 촬영한 사진을 활용함으로써 만화보다 시각적 설득력을 높이고자 고려한 흔적이 두드러진다. 배경도 붉은 색으로 처리함으로써 시각적 호소력을 고조시키려고 한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전생 중에 여성은 전투요원으로 동원되기도 하지만 전투를 남성의 영역으로 보는 보수적인 관점에 따라 대부분 비전투요원으로 동원된다. 그러나 전쟁을 치르고 있는 지도자나 전쟁의 명분을 내세운 이데올로기들은 이 전단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광범위하게 여성을 동원한다. 이 전단에서 젊고 얌전한 여성은 비단 적뿐만 아니라 아군의 남성에게도 미소를 짓는 수동적인 '기다리는 여성'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종류의 전단에 나타나는 여성은 남성이 소유할 수 있고, 남성에 의해 지배되는 존재로 대상화된다. 즉 전투와 상관없는 평범한 여성을 사회적 존재가 아닌 성적 대상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전단 속의 여성은 종종 성적 착취의 대상으로 규정되기도 한다. <여러분의 아내와 누이들을 오랑캐의 마수에서 구원하라>는 그 솜씨와 형식으로 보아 김규택의 도판으로 추정되는데 내용은 중국군이 선량한 여성을 겁탈한다는 것이다. 전쟁 중 군인들에 의해 자행된 강간은 비단 한국전쟁에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적군이 비무장한 가족 중에서 특히 여성을 노린다는 흑색선전을 담은 전단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여러 나라가 즐겨 사용한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남북한 역시 동일한 내용의 전단을 상대방 전선에 살포함으로써 전투중인 군인들로 하여금 고향에 두고 온 처자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심리적 위축을 유도함으로써 전의를 상실하게 만드는 심리전에 이러한 도상을 빈번하거 활용했던 것이다. 이 전단은 전투에 투입된 한국군의 중국군에 대한 증오심을 불러일으킴은 물론 북한군에게도 중공군은 의용군으로 참전한 것이 아니라 가족을 겁탈할 수 있는 오랑캐임을 주지시키려는 목적을 지닌 것으로 미군이 펼친 심리전 중 향수작전에 부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전단에서 주목하여야 할 것은 내용의 진위가 아니라 그 이미지 이면에 깔려있는 여성에 대한 시각이다. 이런 전단에서 여성은 하염없이 기다리는 수동적인 존재이거나 정복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에 대한 남성의 편견을 반영한다. 특히 이 전단은 적에게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아군 남성의 성적 환상이나 욕망을 자극할 수 있음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6) 공동체적 동질성의 강조
일본 도쿄의 유엔군 사령부에서 인쇄한 전단 중에서 단군으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북한인민군 병사를 끌어안고 있는 도상은 한국전쟁의 원인이나 책임보다 북한군도 같은 민족이란 의식을 깔고 있다. 이런 점은 전단의 아래 부분에 적어놓은 '한시조-한 피-한민족!'이란 글귀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 전단은 남북한은 다 같이 한 조상 아래 태어난 후손이자 단일민족이란 민족감정을 자극하고 있다. 그러나 한 시조인 단군의 품에 안긴 것은 한국군이 아니라 북한군뿐이다. 따라서 이 전단이 한국전쟁은 동족상잔임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지라도 단군 뒤에 태극기를 그려놓아 남한이 한민족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즉 단군 앞에 자신들의 과오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은 한국이 아니라 북한인 것이다. 이 전단은 한국군 측에서 조야하게 인쇄한 전단에 비해 인쇄상태가 선명할 뿐만 아니라 사실성에 바탕을 둔 차분한 묘사가 눈에 띄므로 전쟁 당시 유엔군 심리전과에서 일하고 있던 김규택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도상 역시 직접적이고 이념의 편향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다른 전단과는 달리 세련되고 무엇보다 정서적 호소력이 큰 점이 돋보인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전단에 등장하는 단군의 모습이 한국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기보다 제우스처럼 서양의 고전조각에서 볼 수 있는 신상神像을 연상시킨다는 점이다. 너그러운 표정과 관용의 자세로 젊고 옹색한 북한군을 포용하고 있는 단군의 자세는 참회하는 죄인들에게 은총을 베푸는 신적 존재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이든 북한이든 다 같이 민족과 동포를 내세우며 상대방을 민족의 반역자로 규정, 매도했다. 남북한 모두에게 전쟁은 민족의 생멸을 건 것으로 선전하였으므로 이 전단에서 보는 것처럼 민족이란 혈연주의를 내세울 경우 설득력은 증폭된다. 특히 민족의 조상인 단군을 내세운 것은 전통적인 충효관념보다 이데올로기의 우월성을 내세운 북한에 비해 정서적으로 훨씬 강렬한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을 암시하기라도 하듯 단군 주변에 모여든 모든 북한군들은 무장을 해제하고 두 손을 모아 기원하는가 하면 조상의 사랑을 갈망하는 눈초리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전단이 내뿜는 이데올로기는 명백하다. 한민족의 시조 앞에 회개하는 북한군을 동포애로 구원할 것이니 어서 총을 버리고 와서 용서를 구하라가 그것이다.
7) 대민선전
전쟁 초기에 유엔군이 남한의 주민들을 대상으로 뿌린 전단 중에는 전황을 알리는 내용보다 군사작전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산으로 피난하라, 큰길에서 물러서라는 식의 위협적인 경고를 담은 것이 많았으나 북한군과 중국군으로부터 주민을 격리시키기 위한 용도의 전단 비중이 점차 증가하였다. 대내심리전용으로 제작된 어떤 전단은 북한군이 인민해방은 커녕 주민들을 집에서 쫓아내고 그들의 양식을 징발하는 장면과 패주하는 북한군들이 숨을 곳과 먹을 것을 구해 찾아오는 장면을 차례로 보여주고 어제의 도적이 오늘 찾아와 양식을 찾더라도 절대 내놓지 말라는 대응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만약 북한군들에게 호의를 베풀 경우 그나마 살던 집조차 북한군에 의해 다시 징발당할 수 있다는 경고를 담은 이 전단은 북한군과 주민들을 격리시키려는 목적으로 제작한 것이다. 위의 전단이 패주하던 북한군들이 지나치던 지역의 주민이나 유격대에 들어간 북한군이 출몰하는 지역에 살포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주민단속의 목적으로 사실적이면서 구체적인 이미지를 활용했음은 분명하다. 특히 유엔군은 북한주민과 북한군을 분리시키기 위해 많은 양의 대민선전용 전단을 살포했다. 그 중에는 '반공유격대에 협조하라', '황해도 농민들이여 쌀을 감추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북한지역 주민들에게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내용도 있지만, '원쑤의 공산도배 등쌀에 아들은 전쟁에 잡혀가고, 며느리는 일터에 끌려가니 그나마 집안 살림은 누가 하나 이제와선 모든 것이 망판이다'란 전단의 선전 문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북한군에 의해 한 가정이 해체되는 불행을 겪고 있다는 것도 있다. 다른 전단에는 북한군이 비단 농민을 수탈한다는 내용뿐만 아니라 한국의 전통을 파괴하고 미풍양속인 경로사상을 업신여겨 나이가 많은 노인에게 안하무인이고 함부로 부려먹으려 하니 조심하란 내용까지 담고 있다. 이러한 전단은 주민들의 심층무의식에 잠재된 유교적 덕목을 자극하여 주민과 북한군을 분리시키려는 의도를 지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단이 이렇게 구체적이고 직접적이며 감정에 호소하는 구호와 단순, 조잡한 그림으로 채워진 것은 당시 남북한 주민 모두에게 문맹률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농경문화이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한국군이든 북한군이든 중국군이든 대체로 학력수준이 낮고 문맹이 많았기 때문 한국군에서도 중학교 다닌 정도의 학력이면 곧장 지휘관이 될 수 있는 정도였는데 이러한 사정은 북한군도 마찬가지였으므로 군대를 상대로 한 심리전에서도 직관적인 선전전이 주종을 이루었던 것이다.
결론
제2차 세계대전은 전투 못지않게 심리전의 중요성이 확인된 전쟁이었다. 특히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과 미군은 각각 전투에서 자신들의 우위와 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전단을 살포했다.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도쿄에 있던 미극동군사령부는 즉각 북한의 남침을 알리고 유엔군 전력의 압도적 우위를 강조한 전단을 제작해 한반도 전역에 뿌렸으며, 심리전을 수행할 전담부서를 두고 조직적으로 관리했다. 1951년 2월 20일 주한미제8군(Eighth U.S Army in Korea, EUSAK)의 보고서에 따르면 유엔군이 살포한 전단의 효과에 대해 최소한 각 심리전 작전(psychological Warfere operations, POWS)당 1,100달러에서 2,200달러에 이르는 비용으로 6,000명에서 12,000명에 이르는 북한군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과 동일한 가치를 얻었으며, 이것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북한군 한 명을 살상하는 비용의 70분의 1에 불과하며, 결국 1,200명의 유엔군을 살릴 수 있는 확실한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1950년 10월 말경까지 사로잡힌 122,558명의 북한군 포로 중에서 유엔군이 B-29를 동원해 북한군 주둔지역에 살포한 91,000,000의 전단이 거둔 전술적 효과를 분석한 것이다.
전단은 적의 부도덕성을 폭로하여 적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려는 목적으로부터 전투에 참가한 병사들의 전쟁에 대한 염증을 자극하여 귀순을 유도하거나 신변보장과 물질적 보상에 이르기까지 심리전에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회유와 공포감 조성, 적에 대한 중상모략, 평화공세를 담은 종이폭탄이었다.
그렇다면 한국전쟁 중 미군이 한반도에 집중적으로 살포한 전단이미지를 통해 무엇을 확인할 수 있는가. 심리전 작전도 전쟁에서의 승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인 만큼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사실의 정확한 전달보다 과장, 왜곡의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전투에서 승리해야 하는 전쟁의 속성 때문에 심리전은 이데올로기 전쟁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즉 한국전쟁은 냉전이데올로기 유포의 첨병인 맥아더가 짜놓은 미군정청(GHQ)의 반공이데올로기를 실천하는 장소였으며, 그를 이어 전쟁을 수행한 지휘관들도 이 전략을 계승했다. 한반도에 투하된 엄청난 물량의 포탄 못지않게 한반도 하늘에 흩날린 전단을 정렬하면 지구를 몇 바퀴 돌 수 있는 양에 이른다는 사실은 6.25 전쟁이 이미지전쟁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Handbills Scattered on the Battlefield: The Korean War as an Image War
Choi Tae Man
Kookmin University
This article intends to elucidate the process and practice of the propaganda art during the Korean War through the imageries produced by the Republic of Korea,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and the United States. The Korean War, the most fierce and tragic fratricidal struggle for Korean people, and one of the most historic conflicts between democracy and communism during the Cold War period following the Second World War, was a confrontation between ideologies as well as a battle between the two nations. In other words, the Korean War was an "International Civil War" reflecting political agendas of North Korea and South Korea formed under the influence of the bipolar ideologies. Therefore, the effect of psychological manipulation played a great role in this war
Since the confrontation between the two opposite ideologies of democracy and communism evolved in the divided Korea after the liberation of the country from the Japanese colonial reign, propaganda images were created in order to encourage North and South Koreans to perceive each other as their great enemies. Starting with the "puppet regime" theory emerged during the ideological confrontation and conflict, this article's main discussion focused on the images for handbills that were distributed by each camp for the purpose of psychological manipulation of the people. The images created during the dominance of the UN and the US armies over the North Korean army mostly followed the conventional yet clearly purposive prototypes used by the US, Germany and Japan during the Second World War. This attests the significance of psychological warfare during the Second World War as well as the fact that the US army again employed this "paper bomb" strategy during the Korean War. This is also the case of North Korea that inherited the method of psychological warfare from the Soviet Union and China. Whereas the propaganda arts produced by the US and Korean armies is marked by its strategy to focus on personal affairs and issues, those produced by the North Korea stressed on manifesting their political direction as along-termaim. Nevertheless, many elements over lapped between North and South Korean handbills except for some specific phrases and peculiar images. These handbills slandering their enemies eventually reflected each other's positioning and purpose sasin "mirror image effect."
In this psychological conflict during the Korean War, these specific images were taken as a tool for persuading, conciliating and coercing the North and South Korean citizens. Furthermore, these images persisted even after the war to confirm each party's political stance eventually contributing to reinforce and solidify the divided condition of the Korean Peninsula. In fact, these "paper bomb" handbills were the most powerful weapon that seriously influenced both the North and South Korean people. Especially, the violent images used in handbills have become a visual symbol typifying the relationship between North and South Korea as the status of Korea's dispersed people or divided land represents the condition of the separated country. The internalization of these images has become an obstacle for illustrating the true aspects of the propaganda art during the Korean War.
In summary, this thesis investigates the nature and substance of the Korean War through the images produced during this period. Thus, in dealing with the effect of psychological warfare, this thesis examines the subject of handbills by drawing on both and an ideological perspective. Furthermore, the iconological comparison and analysis on this subject aims at a systematic understanding of the contents and formats of the handbills during the Korean War. Handbills are critical materials in establishing a methodology of interpreting the types and significances of propaganda art that emerges during a social and political upheaval like a war. This is why these subjects should be studied in the context of visual art as well, albeit the political intents imbued in the slanderous and violent images.
※ 출처: 최태만, 「논고 | 2. 전장을 삐라로 뒤덮어라, 6.25전쟁과 이미지전쟁」, 『한국전쟁 정전60주년 특별전_기억·재현 서용선과 6.25』, 고려대학교 박물관, 2013, pp. 214-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