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올해의 작가 2009: 서용선》전시주최
국립현대미술관전시기간
2009-07-03 ~ 2009-09-20전시유형
개인전전시장소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올해의 작가 2009: 서용선》
전시일자: 2009.07.03-09.20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제1전시실, 중앙홀, 과천
주최: 국립현대미술관
미디어 후원: 네이버
출품작가: 서용선
큐레이터: 김경운
서용선 작품세계의 사려 깊은 매력
여기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삶을 만끽하고 있다기보다는 견뎌내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들은 종종 눈동자가 없는 눈을 하고 있어서 표정을 읽어내기 어려울 때도 있지만, 겉보기에 언뜻 하나같이 무표정해 보이는 얼굴 뒤로, 각자의 내면에 품고 있는 불덩어리들을 저마다의 아우라 속에서 가지각색의 색채를 통해 뿜어내고 있다. 바로 서용선의 그림 속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2009년도 올해의 작가로 선정된 화가 서용선은 인물, 풍경, 역사, 전쟁, 신화 등 다양한 범위에 이르는 주제들을 다루지만 특히 도시의 인간 군상을 그려내는 연작들과 역사 속의 사건들을 시각화하는 역사화 연작들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80년대 초반 일련의 소나무 회화 연작들로 알려지기 시작한 작가는 80년대 중반부터 역사화와 도시인 연작들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이 작품들은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개인들의 실존적 고통과, 팽창하는 도시의 공간적 압박감 속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불안한 내면을 반추하고 있다. 작가는 탄탄하게 구조화된 평면과 강렬한 색채의 표현을 통해 인간 실존의 문제를 특유의 조형언어로 승화시킨다.
필자는 본고를 통해 작가의 작품세계가 독자성을 지닐 수 있도록 하여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아울러 그의 그림을 볼 때 느껴지는 감흥 혹은 감동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도 연계하여 해명해보려 한다. 본고가 ‘작가 서용선이 보여주는 작품세계의 사려 깊은 매력’을 드러내는 ‘사려 깊은’ 글줄이 되었으면 하지만, 의도대로 될는지는 이제 읽는 이의 판단에 맡겨야겠다.
스스로 의식하든 않았든, 그의 작품들 중에서도 서용선 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것이 단종과 얽혀있는 역사 속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는 작품들임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역사화’들은 당시의 인간들에게 새로이 부각되었던 역사적 사명의 기치를 강조한 다비드 류의 전형적인 역사화나 작금의 현실 속에서 자행되는 폭력적 사건들을 고발하는 레온 골럽 류의 동시대적인 역사화와도 다르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수많은 정통 역사화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고 상상해보자. 이 모임 속에서 서용선의 역사화 연작들은 홀바인의 그림 <대사들> 속에 갑작스레 등장하는 해골과도 같이, 참으로 뜬금없는 모습으로 두드러져 보일 것이다.
쏜살같이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바로 지금의 현실은 이내 과거 속으로 흩어져버리면서 부재해버리고 만다. 이렇게 곧바로 부재의 상태로 넘어가는 현실을 기억으로 대체하는 것이 역사라고 할 수 있다면, 이 역사 역시 상징적 질서의 일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종 재위 시절의 현실들은 공식적인 상징적 질서 속에 자리하지 못했다. 단종대의 역사적 사실들은 한동안 실록이라는 이름 대신 노산군 일지라는 이름을 단 기록으로 존재하였다. 국왕이 승하하면 왕의 업적은 행장에 기록되고 왕의 능은 능지와 산릉도를 갖추게 되지만 단종의 경우 당대에 왕실에서 행장이 작성되지 못하고 제대로 된 능도 조성되지 못했다. 그런데 서용선의 그림들은 공식적인 역사의 상징적 질서로부터 추방되었던 실재로서, 그리하여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 속에서 하나의 외상적 기억으로 오래 묵혀져왔던 역사의 외상으로서 단종을 둘러싼 사건들을 들춰낸다.
자크 라캉의 개념들을 비유적으로 사용해서 작가의 그림들을 묘사한데서 좀더 나아가, 그 사회적 함의에 대해서도 잠시 짚어보자. 앞서 공식적인 역사의 상징적 질서라 불렀던 바를 알뛰세 식으로 말하자면 바로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종을 정사(正史) 속의 자리로부터 한동안 몰아내었던 역사 속 승자의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오래 이어져왔는가를 생각해보면 매우 놀랍다. 알뛰세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라 일컬었던 매스미디어에서 생산한 텔레비전 드라마들이 이러한 승자의 이데올로기를 얼마나 충실히 재생산해왔던가. 하지만 서용선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가 만들어낸 드라마들이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승자의 시각에 개인적인 제동을 건다.
물론 단종을 둘러싸고 벌어진 사건들, 특히 사육신과 생육신에 얽힌 이야기들은 후대에 결국 충(忠)이라는 유교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려는 교훈에 귀결되는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에 가려져있던 이야기들의 재평가와 그 사적의 정비를 통해 숙종, 영·정조 등은 통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러한 군주 중심의 봉건 이데올로기는 오늘날 그 시의성이 많이 약해진 비교적 낡은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서용선의 그림들은 시대착오적인 관념체계를 생명력 없이 반복하여 되뇌는 선전화들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작가가 다루는 내용들이 지난날의 군사정권시절 활발하게 제작되었던 민족기록화들처럼 고전주의 양식으로 그려졌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이 그림들은 이데올로기를 설득하고 주입시키려는 목적에서 그려진, 미학적 성취도에서는 다소 부족한 느낌을 주는 실용화(實用畵)로 보일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서용선은 작품에 표현주의 양식을 도입한다. 이는 프란시스 베이컨이 벨라스케스의 교황 초상을 변형시킨 것을 연상하게 만들기도 한다. 역사적 사실은 그 속에 휩싸인 개개의 실존들이 겪어내는 저마다의 고뇌들로 변환된다.
하여 서용선은 “저는 역사의 객관적인 사실을 내 나름의 주관적인 해석을 통해 즉흥적이고 표현적으로 그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라 말한다. 역사적인 사실의 주관적 해석이라는 측면에도 내포돼있는 개별적인 ‘개인’의 수사학은 표현주의적 붓질이라는 지표적 기호에 의해 드러나는 작가 신체에 대한 지시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이는 주로 리얼리즘 전통의 흐름 / 계보에 자리하고 있으며 흔히 이념이나 교리에 종속되는 목적성 강한 역사화들과 구분되는 또 하나의 지점이기도 하다.
구상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현대적인 회화를 창조하는 방법으로 자신이 보여준 하나의 해결책을 베이컨은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해서 제시한 바 있다. “닮도록 하여라. 단 우발적이고 닮지 않는 방법을 통해.” 즉 들뢰즈에 의하면 화가의 손이 화폭을 누비며 남기는 우발적인 표시와 터치들은 어떤 유형의 행위이자 선택으로 작용하면서 지속적으로 쌓인다. 바로 이것들이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대상과 닮기만 한 단순한 구상으로부터 구원하여 보다 고차원적으로 재창조된 형상이 되도록 바꾸어놓는 것이다. “우선 보이는 대로 선을 그어 놔요… 자기가 선 하나를 이렇게 잘못 그어도 절대로 이건 잘못 그어지는 게 아니에요. 왜냐면 이게 기준이 되는 거예요… 나중에라도 이 선이 다른 선과 만나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되어 있어요.”라는 서용선의 진술 역시 지표적인 선묘를 쌓아나가 만들어내는 형상에 관해 베이컨의 것과 일맥상통하는 논리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표현주의적 붓질은 회화가 자신의 본질을 추구하는 것으로 현대화의 방향을 잡았던 속에서 평면이라는 회화의 존재조건과 그 물질성을 드러내는데 기여한다. 우리는 거친 붓질을 통해 회화가 지니는 물질로서의 성격을 드러내고자 했던 대표적인 작품들로 코브라 그룹의 회화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카렐 아펠과 같은 코브라 그룹의 작가들이 제작한 작품들은 회화의 물질적 성격을 매우 강조하고 화면을 대면한 작가가 남긴 흔적의 폭력성이 극대화되어있는 특징을 보여준다. 반면 서용선의 그림은 코브라 그룹만큼 극단적으로 물질적 성격을 강조하지는 않으며, 거친 붓질 역시 폭력적인 감정의 폭발이라는 목적보다는 작품의 주제의식을 위해 방법적으로 구사하는 중용의 태도를 취한다. 서용선의 붓놀림은 코브라 그룹과 같이 대책 없는 무정부주의와 허무주의의 분출이라기보다는, 영화 <와호장룡> 속에서 한 인물이 체현하듯, 검법에 숙달한 자가 서예에서도 은연중에 뿜어내는 강한 내공과도 같은 것에 가까우리라.
인간 존재의 고뇌를 형상화하면서 프란시스 베이컨은 표현주의적인 붓질과 함께 기괴하면서도 거의 엽기적일 정도로 뒤틀리고 왜곡된 형태변형을 구사하였다. 들뢰즈는 베이컨이 보이지 않는 힘을 포착하여 그려내기 위해 형태의 기형적 변형을 구사하였다고 파악한다.8 이와 대조적으로 서용선은 오히려 천진난만해 보이기까지 할 정도로 매우 투박하게 형태를 묘사한다. 이런 양식적인 특징 속에서 색채가 가지는 표현의 잠재력이 확장된다. 따라서 작가는 “… 그 안에 잠재된 풍부한 생각이 사람들에게 읽히지 않을 뿐이죠. 나는 인물의 표정이 무표정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그림의 형식이 그런 쪽으로 보이기 쉽다는 것까지는 인정은 하죠. 하지만 선과 색을 더 길게 보면 그 그림의 생각들이 경직된 형태만 가지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겁니다. 겉으로 보이는 경직된 부분이 대표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그 안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어요. 언젠가 그런 부분을 사람들이 읽을 수 있으리라고 믿고 있습니다.”라 하여, 피상적으로 경직되어 보이는 형태의 제한조건 속에서 선과 색이 보여주는 표현의 가능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색채가 가지는 잠재력을 강조하는 것은 선배 혹은 스승으로서 앞선 세대 작가들이 구현하였던 모더니즘 양식을 극복하려는 오이디푸스적 충동에서 비롯되는 측면도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색채의 문제는 70년대 후반 우리의 추상미술을 경험하면서, 더 나아가 동양미술 전반을 생각하면서 느낀 점이 많았습니다. 그 당시 백색 모노크롬 회화를 조선백자와 연결시킨 평론도 읽은 듯한데, 조선미술이 전반적으로 색채의 사용이 억제되어온 듯합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그러한 감각이 현대한국의 사회에도 은연 중 깊이 깔려 있다고 봅니다. 물론 전문적인 현대화가의 의식에도 조선식의 색채감각이 더 이상 진전을 보이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우리의 색채문화를 새로이 일으켜야 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기존의 색채관념의 파괴가 필요했습니다.”라는 작가의 언급에서 그러한 심리를 읽어낼 수 있다. 또한 규격화된 현대도시공간이 구현하는 모더니즘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심리는 “과도한 색채와 붓놀림이 억압된 현대 도시문화에 대응하려는 심리적 발산이라는 점에서, 표현주의 회화는 밀집된 현대도시건축 공간과 관계를 가질 것이다.”11라는 말에도 드러난다. 그리고 현대화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역사화를 집요하게 탐구하는 반복강박에도 예술적 아버지를 뛰어넘으려는 오이디푸스적 충동이 저변에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1970년대에 추상미술에 몰두하고 있던 그의 스승들이 민족기록화 작업에도 참여했던 것을 염두에 두면서 “서울이 급격히 현대도시화하기 시작한 70년대에 모더니즘의 논리적 결과인 한국적 미니멀 회화가 출현하고, 국가수호적 기록화가 그려지고, 유신 헌법이 통과된 것은 묘한 인연이다.”라고 진술하는 서용선의 말도 그러한 점을 시사한다. 스스로의 예술적 노선으로 모더니즘 추상을 추구하던 작가들이 민족기록화를 통해 국가의 통제 아래서 시대착오적인 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은 그들에게 일종의 정신적 외상으로 남지 않았을까? 그러한 역사화에서 미학적인 성취도를 획득하려는 난제에 도전한 것은 혹여 예술적 스승들이 입었는지도 모르는 정신적 외상에 대한 치유와 구원의 길을 구하고자 한 바는 아니었을까?
색채의 해방이라는 목표는 서용선뿐 아니라 베이컨 역시 그 해결을 추구하였던 회화적 과제였다. 하지만 현대의 많은 작가들이 공유하는 이러한 공통점 외에 또 커다란 차이점 역시 발견된다. 삼면화의 형식을 즐겨 활용하였던 베이컨의 그림은, 그 형식에도 이미 드러나 있듯이, 격리와 단절이 열거되는 형태로 그려진다. 이는 삼면화의 형식적인 틀을 갖추고 있는 종류의 작품들뿐 아니라 현대인의 소외와 고독을 다루는 베이컨의 그림들이 전반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경향으로 파악된다. 반면 서용선의 그림에서 각각의 요소들은 평면적으로 분절되어있으되, 상호관계 속에서 재조합되어 전체를 이룬다는 형식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이러한 특징은 서용선의 작품들과 종종 비교되곤 하는 서구 신표현주의 작가들의 회화들과도 뚜렷이 구분되는 점이다.
여러 평자들이 모더니즘에 반하는 형상성과 서술적인 내용의 회복, 그리고 거친 표현과 강렬한 원색의 구사 등의 양식적인 특징을 바탕으로 서용선의 작품에서 신표현주의의 영향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작가 자신도 양식적으로 영향 받은 것에 관해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투박하고 거친 형태나 선연한 색채 등의 특성은 민화를 위시하여 불화나 벽화 등 한국의 풍토에서 긴 역사를 거쳐 형성되어온 예술적 전통의 한 축에 분명하게 자리하여 온 것들이며, 인류의 예술에서 크게 보편화된 표현태도이기도 하다. 또한 개별적인 작품들과 구체적으로 비교해보면, 동시대에 표현주의 양식을 도입한 작가들의 세계와 구분되는 서용선의 독자적인 세계가 더욱 선명히 떠오르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우리 시대의 역사화가로 잠시 언급했던 레온 골럽의 그림과 비교해보자. 표현주의적인 양식을 도입하여 역사적인 내용을 다룬다는 점, 그리고 역사의 주변부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민초들의 삶을 시각적인 재현의 장으로 끌어들여 가시의 영역으로 호명하였다는 점 외에, 서용선과 골럽은 ‘심문’이라는 주제를 곧잘 다룬다는 점에서도 매우 구체적인 공통점이 있다. 허나 골럽의 <심문>은 지금 이 순간, 세계 어디에선가 자행되고 있을지 모르는 폭력의 냉혹한 현실에 대한 고발의 시선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시대로부터는 어느 정도의 시간적인 거리를 두고 있는 사건들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는 서용선의 <심문>과는 구별된다. 또한 그림의 소재와 그것을 담아내는 형식의 측면에서도 상당한 차이점을 볼 수 있다. 레온 골럽의 그림에서 우리는 배경이 거의 사라지고 인간에만 초점을 맞춘 특징을 보게 된다. 그렇지만 서용선의 작품에서는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환경이 길항관계 속에서 긴장을 빚고 상호작용한다. 때로는 건물이나 공간이 인간을 파고들기도 하며, 이런 요소들이 서로 겹치는 관계 속에서 뒤섞이기도 한다. 격자형으로 표상되는 현대적 건물이나 도시의 인프라 구조들을 재현하는 것은 고현학(考現學)적인 관심의 발현으로 보인다.16 다시 말하면 현대를 대상으로 하는 고고학의 유적을 그려내는 듯하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어떤 그림들에서는 현재와 과거의 인물들이, 과거와 현재의 유적과 건축 환경 속에서 뒤섞이어 나타나기도 한다.
미국의 신표현주의 작가 레온 골럽이 그림에서 배경이 거의 사라지고 인간에만 초점을 맞춘 특징을 보여준다면, 유럽의 대표적인 신표현주의 작가 안젤름 키퍼의 작품은 반대로 대개 인간이 부재하고 공간만이 남은 듯한 인상을 준다.
물론 서용선의 작품은 인간을 그려내는데 관한 관심을 끈질기게 견지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와 관련된 주제를 표현주의적으로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이미 키퍼의 작품과는 커다란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각각 나름대로 작품과 관객의 거리감을 이끌어내는 방법을 구사한다는 또 다른 측면에서 상통한다.
키퍼의 회화는 몰입과 소격의 변증법으로 관객과의 긴장을 이루어낸다. 즉 거대한 공간의 환영 속으로 관람자를 끌어들이면서도 동시에 인간이 부재하는 공간을 공허와 폐허 같이 묘사하고, 그 정서적 효과를 통해 반성적이고 성찰적인 거리를 획득하는 것이다. 서용선의 그림은 인간과 공간의 관계묘사, 그리고 회화가 담고 있는 이야기와 색채의 표현강화를 통해서 얻어내는 강한 서술성을 통해 관람객을 끌어들인다. 그러면서도 시선의 교차가 없는, 즉 응시의 관계 속에 얽혀있지 않은 인물들의 고립된 모습들, 그리고 평면성을 강조하는 회화공간의 종합적이면서도 주관적인 재구축을 통해 관객을 끊임없이 밀어내며, 그로 인해 성찰적인 거리를 획득하도록 만든다. 이와 관련하여 작가는 “그려진 화면은 또다시 하나의 대상으로 있기 때문에 그 대상의 평면성을 강조하여 이것이 그려진 사건임을 동시에 확인함으로써 사건의 내용에 맹목적으로 동조하기보다는 보는 사람의 객관적 위치를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그려진 내용의 서술성에 자신의 생각을 일치시키면서도 평면의 긴장감이 우리의 눈에 마지막까지 어떤 거리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한편 키퍼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장 게오르그 바젤리츠의 그림은 공간보다는 주로 인물이나 대상, 혹은 그것들의 부분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키퍼의 작품과 대비되는 특징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안젤름 키퍼의 작품 또한 결국 시각적인 표상에 집중된 관심을 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궁극적으로 환유적인 모티브나 세계 속의 특정한 대상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둘의 작품세계는 일맥상통한다. 반면 서용선은 이러한 대상과 인물들이 이들을 둘러싼 환경과 맺는 관계, 그리고 그 상호작용에 관심을 갖는다는 점에서 이들과 구별된다.
서용선의 그림 속에서 공간은 여러 단면으로 이루어진 층위의 구조를 이룰 뿐만 아니라, 때로는 보도가 꼿꼿이 일어서고, 벽이 평평하게 드러누우면서 서로 교차되고 결합된다. 다시 말해서 수평의 평면이 수직으로 표현되거나 수직의 평면이 수평으로 그려지는 등, 현실의 공간이 아니라 머리 속에서 재구성되는 사유의 공간 속에서 여러 다른 단면들이 씨줄과 날줄처럼 밀도 있게 교직되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서용선의 회화들로 하여금 텍스트에 대한 유비적 모델로 보아도 손색이 없도록 하여주는데, 롤랑 바르트에 의하면 텍스트는 애초에 어원적으로 짜여진 직물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화면은 단순히 외부현실을 투사해주는 투명한 거울이 아니라, 작품과 현실이 ‘화학적인’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는 매개이자 화면을 조직화하는 게슈탈트의 장으로서 존재한다. 서용선은 일상적으로 경험된 지각적 자료들과 회화적 장치, 수법, 재료 속에는 생생한 문화적 상황 즉 우리의 ‘삶의 결’이 그물처럼 얽혀 들어와 있음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대중교통수단, 신호등과 같은 교통신호체계, 각종 사인물, 광고 등은 도시에서 인간의 행위와 동선을 통제하고 호출하면서 끊임없이 오가고 점멸하는 기호체계들이다. 현대도시의 모습을 그려내면서 이러한 기호와 신호체계를 즐겨 가로지르는 것 역시 서용선 작품의 텍스트적 성격을 강화해준다. “서사적 기능을 오히려 보는 관객에게 유보”시키면서 “작가는 최소한의 인식소만을 형상에 남겼”고, 이들 “작은 힌트로 관객은 역사의 상황을 재구성하고, 작품이 지니는 조형성 속에 감정의 운동”을 이끌어내게 되며, 결국 작가는 “이런 결과를 서술적인 형태로 설명하지 않고, 관객이 그 형상을 제대로 해석해내기를 유도”한다. 다양한 초점을 형성하는 인물들을 통해 공식적인 역사에서 추방되었던 이야기를 다성적으로 풀어내는 서사적 복합성 또한 시각 텍스트로서의 이런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시각 텍스트로서 서용선의 그림은 다양한 해석 작용을 촉발하고, 그 의미의 폭을 크게 넓혀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끊임없이 확장하게 된다.
지금까지 주제와 표현방법론 등에 있어서 서용선의 조형언어를 형성하고 차별화시켜주는 특성들에 관해 살펴보았다. 이와 동시에 회화와 조각이라는 매우 전통적인 매체에 역량을 집중시키고 있는 작업에서 과연 동시대성이 어떻게 우러나오는가도 설명해보려 했다. 사실, 작가가 구사하고 있는 시각언어에서 드러나는 동시대적 성격들은 많은 부분 이미 매우 보편화된 것들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상당히 보편화된 시각언어를 구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 작품들이 보여주는 세계의 독특함을 그다지 크게 손상시키지는 않는다. 이는 그가 주제에서나 표현양식에 있어서나 풍토와 역사 등 자신을 둘러싼 공간적, 시간적 환경과의 밀착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그 밀착된 관계를 집요하게 궁구해나간 논리에 의해 이러한 시각언어를 구사한 결과로 작품을 만들어내기 때문인 것이다.
깊이를 결여한 피상적인 유희가 난무하고 각광받는 현대미술의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주제에 관한 인문학적 연구와 성찰을 바탕으로 진중한 연마와 탐구를 통해 작품세계를 만들어나가는 서용선의 작가적 자세는 오늘날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으로서 많은 미술인들에게 하나의 귀감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시류에 휩쓸리기 보다는 작가의 진정성에 대한 고민을 견지하고 있는 서용선은 이번 전시를 통해서, 고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유장하게 흘러온 인간의 역사 속에서 자신의 시선에 각별한 의미와 계기로 포착된 대목들을 펼쳐놓는다. 장대한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인간의 역사는 인간 존재의 의미에 관해 깊이 있고 진지한 성찰을 하게 만든다.
※ 출처: 김경운, 「서용선 작품세계의 사려 깊은 매력」, 『올해에 작가 2009: 서용선』, 국립현대미술관, 2009, pp. 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