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로작가디지털아카이브의 이미지는 저작권법에 따라 복제뿐만 아니라 전송, 배포 등 어떠한 방식으로든 무단 이용할 수 없으며, 영리적인 목적으로 사용할 경우 원작자에게 별도의 동의를 받아야함을 알려드립니다.
연구자 노트
연구팀: 서용선 연구팀
거창양민학살居昌良民虐殺事件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2월 경상남도 거창군居昌郡 신원면神院面 일대에서 일어난 대규모 민간인 학살사건이다. 전쟁 중 북한 인민군이 한때 거창군을 점령하여 신원면을 통치했었고, 국군의 북진으로 인한 후방 지역의 공비共匪 토벌討伐을 목적으로 국군 11사단이 창설되었다. 11사단의 기본지침인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에 따라 예하 9연대 3대대 병력이 신원 지역으로 진격했으며, 719명 이상의 신원면 주민들을 공비나 부역자附逆者로 간주하여 사살했다.그해 3월 29일 국회에서 거창군 출신 국회의원의 보고로 이 사건이 폭로되었고 국회는 합동조사단合同調査團을 파견하여 정확한 진상眞相을 파악하려 하였으나, 군부에서는 국군을 공비로 위장시켜 현장으로 가는 조사단 일행에게 위협 총격을 가함으로써 조사를 저지시켰다. 이후 진상조사를 통해 학살 및 사건 은폐 관련 전모가 밝혀져, 사건 관련자들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주요 지휘관들은 곧 형의 집행정지로 석방되어 군 및 경찰에 복권되기도 하였다. 지속적인 유족들의 청원으로 의회의 법률제정을 통해 명예회복名譽回復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고 위령사업慰靈事業이 진행되고 있다.1951년 2월 5일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 병력이 거창군居昌郡 신원면神院面 도착1951년 2월 8일 함양군咸陽郡과 산청군山淸郡지역으로 이동하여 불을 지르며 민간인 집단 총살1951년 2월 9일 거창군 신원면 지역으로 돌아와 청연골에서 방화를 하고 주민들을 논으로 끌어내어 무차별 사살1951년 2월 10일 과정리瓜亭里·중유리中楡里·대현리大峴里·와룡리臥龍里 주민들을 탄량골에 몰아넣어 집단 학살하고, 주민 천여 명을 신원초등학교에 강제로 수용1951년 2월 11일 신원초등학교에 있던 주민들 중 경찰 및 지방 유지를 골라낸 뒤, 남은 주민들을 인근 박산골에 몰아놓고 집중사격으로 학살하고 시체들을 소각1951년 3월 29일 제54차 국회 본회의에서 거창지역 국회의원 신중목愼重穆이 거창양민학살 사건을 폭로1951년 3월 30일 국회가 내무부 등과 합동으로 진상조사단을 구성1951년 4월 7일 신성모申性模 국방장관과 경남지구계엄민사부 민사부장 김종원金宗元 대령은 국군을 공비로 위장시켜 신원을 향하던 국회조사단 일행에 총격1951년 7월 27일 대구에서 중앙고등군법회의 개시1951년 12월 16일 선고공판에서 오익경吳益慶 대령 무기징역, 한동석韓東錫 소령 징역 10년, 이종대李鐘大 소위 무죄, 김종원 대령 징역 3년 선고되나, 이들은 곧 특별사면으로 석방1960년 5월 11일 사건 당시 신원면장 박영보朴榮輔 타살됨1961년 5월 18일 군사정부는 유족회 간부들을 반국가 단체 혐의와 면장 피습 혐의로 구속1962년 7월 14일 반국가 단체 조직혐의로 구속된 유족회 간부들은 무죄 석방되고 면장 타살 혐의자들은 집행유예로 석방1965년 4월 5일 박산 합동묘역 위령비 원상회복 및 거창 양민학살 희생자 명예 회복과 배상을 호소1982년 6월 1일 유족회는 전두환 정권의 청와대 민원실에 거창 양민학살 희생자를 국가 차원에서 명예회복 및 배상을 요구하는 진정서 제출1988년 1월 24일 유족회는 노태우 정권의 민주화합 추진위원회에 거창양민 학살 희생자 명예회복 및 배상을 요구하는 진정서 제출1988년 2월 15일 유족회는 거창양민학살희생자 위령추진위원회慰靈推進委員會를 발족하여 궐기대회를 갖고 박산 합동묘역까지 가두행진, 땅 밑에 처박힌 위령비 27년만에 재건립1988년 11월 7일-9일 거창양민학살희생자 위령추진위원회가 정부에 보상과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시위1989년 8월 29일 37년 만에 처음으로 박산묘역에서 합동위령제合同慰靈祭 지냄1995년 12월 18일 국회에서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 통과1996년 4월 6일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의 시행령 공포, 이후 합동위령제 및 추모식, 거창사건 관련 자료집 발간 등 위령사업 진행 및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의 개정 운동 추진Geochang MassacreDuring the Korean War there was a large-scale civilian massacre occurred in Geochang, in Fabruary 1951. To suppress the People's army-once occupied Geochanggun ruling Shinwonmyun, the 11th Division and the 9th regiment of the South Korean Army were formed. The residents of the area was considered as communist sympathizer civilians, they were slaughtered by the soldiers.Geochang Massacre was exposed at the National Assembly. Against South Korean Army cover up, the people related to this incident were prosecuted as a result of investigation.※ 출처: 『한국전쟁 정전60주년 특별전_기억·재현 서용선과 6.25』, 고려대학교 박물관, 2013, p. 64작가에게 죽음은 일상적인 것이었다. 미아리 공동묘지 근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작가에게 삶과 죽음은 분리된 것이라기보다 공존하는 삶의 일부였다. 그러나 그가 정치와 그 파국인 전쟁과 학살을 탐구하면서 죽음은 화가로서 중요한 연구 대상이 되었다. <낙화>와 <청령포>는 단종과 관련된 작가의 역사화의 출발점이 되는 작업이다. 작가는 개인적인 사건으로 강원도 영월을 방문하게 되었고, 그곳이 단종의 폐위와 죽음에 깊게 연관된 장소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단종이 세조로부터 사약을 받고 시신이 유기된 장소가 청령포였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며, 작가는 강물 위로 시신이 떠 있는 듯한 환상을 느끼고, 삶과 죽음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작가는 단종과 계유정난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탐구하게 된다. <젊은 죽음들>은 1996년 강릉 지역 무장 공비 침투사건에 대한 반응으로써 그려진 작업이며, <바다에 누워>는 작가가 시애틀의 레돈도에 머물며 작업을 할 때, 침대에 누우면 수평으로 보이는 바다 수평선을 보면서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시선이 바다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자신의 시선과 신체가 무한한 바다 공간으로 확장되는 의식을 객관화한 그림이다. 그러나 이 그림은 작가의 의도와 별개로 단절된 신체, 두상이 살아서 바다에 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머리가 물 위에 떠다니는 그림은 작가의 2013년 작, <거창 사건>에서도 보여진다. 한국전쟁 당시 거창군에서 일어난 양민 학살사건을 다룬 이 그림에서는 목이 없는 신체 3구와 강물에 흘러가는 3개의 두상이 그려져 있다. 작가는 전쟁의 희생자들을 그릴 때, 유기된 시체의 형상을 종종 그린다. 죽음은 어떤 비장한 이야기를 담아내지만, 한편 죽음은 생의 한가운데서 우리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죽음을 일깨워주었던 청령포에서의 기억과 수평선으로 신체가 분리되어 확장되는 레돈도에서의 경험은 죽음을 자각하는 작가의 태도를 드러낸다. 작가는 단종의 무덤인 장릉이 점차 관광상품의 하나로 개발되는 모습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은 묘한 존재이다. 죽음이 어느 순간엔가 놀이와 축제의 대상으로 변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죽음은 맞이하여야 할 운명이고 잊어야 할 고통인 것이다.”※ 출처: 《서용선: 내 이름은 빨강》 2부 리플릿, 아트선재센터,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