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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윤신김윤신

1935-12-12

#조각 #회화 #판화

책임연구원 | 김이순

김윤신

작가소개

김윤신(1935년생)은 한국현대조각사에서 1세대의 여성작가다. 해방 이후에 한국에 미술대학이 설립되면서 비로소 조각을 전공하는 여성들이 등장하는데, 김윤신은 김정숙(1917-1991), 윤영자(1924-2016)에 이어 1955년에 홍익대학에 입학하여 윤효중(1917-1967), 김경승(1915-1992)에게 수학했고,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1964년에는 한국 조각가로서는 처음으로 파리로 건너갔으며 에콜 데 보자르에서 석판화를 전공하면서 실험적인 입체작품을 제작했다. 1969년에 귀국해서 초기에는 다양한 기법의 평면 작업을 전개하다가 1970년대 중반부터 나무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조각가로 활동을 재개했다. 1984년에는 오롯이 창작에 전념하기 위해서 질 좋은 나무가 풍부한 아르헨티나로 이주했다. 이주 초기에는 목조각에 전념했으나 1980년대 말엽부터 낮에는 조각에 몰두했고 저녁 시간이나 몸을 쉬는 시간에는 회화 작품을 하게 되었으며, 1990년대에 들어서는 회화 작품을 조각과 같은 비중으로 병행했다. 마침내 회화와 조각이 결합된 ‘회화-조각’이라는 김윤신의 독자적 영역을 창안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40년 동안 아르헨티나에서 창작에 전념하다가 2024년 2월에 영구 귀국했다. 그간 국내외에서 개인전을 열기는 했지만, 2023년에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관 초대전《김윤신: 더하고 나누며, 하나》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국내에서 주목받기 시작했고, 마침내 2024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 참여작가로 선정될 정도로 한국미술계에서 김윤신의 위상이 높아졌으며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부상했다. 그는 미술대학에 입학한 후 하루도 쉬지 않고 작업을 했으며 파리에서 귀국해서 활동하던 1970년대에는 ‘한국여류조각가회’와 ‘한국청년미술작가회’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으나 1984년에 아르헨티나로 떠난 이후 실질적으로는 우리 미술계의 관심 밖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던 그가 지난 1~2년 동안에 40년간의 아르헨티나에서의 치열한 활동의 결과물을 집중적으로 선보였고 단박에 한국미술계의 정상에 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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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약력

1935년 함경남도 원산시 출생

유년시절 해방 직후에 남하했으며 서울에서 625전쟁을 겪음

1955년 홍익대학교 조소과 입학

홍익대학교 재학 중, 7회 국전에서 <아침>(1958)으로 조각부 특선 수상

1959년 홍익대학교 조소과 졸업

1965년 프랑스 에콜 데 보자르 유학, 조각과 석판화를 배우고 1969년에 귀국

1970년 구상회 회원으로서 제5회 구상전부터 작품 출품

프랑스에서 귀국 후 아르헨티나로 이주하기 전까지 홍익대, 성신여대 등 출강. 상명여대 조소과 전임교수로 재직하며 후진양성

1973년 제12회 상파울루비엔날레에 <평화를 사랑하는 자유인들의 영원한 수호신> 출품

한국여류조각가회(1974), 한국미술청년작가회(1974) 창립 및 발족에 주도적 역할을 하며 전시 참여

1984년부터 아르헨티나에 정착 활동에 전념

아르헨티나에서 목조각에 전념하며, 멕시코에서 오닉스(1988-1991), 브라질에서 준보석(2000-2002)으로 조각을 했으며 동시에 회화 작업을 지속함. 멕시코 국립현대미술관,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립 현대미술관 등에서 전시하며,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됨.

2008년 김윤신미술관 개관, 중남미 지역에서 한인이 설립한 최초의 미술관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 시 주관의 박물관의 밤행사에 매년 참여

2018년 주아르헨티나 한국문화원 내에 김윤신미술관 개관

김윤신: 더하고 나누며, 하나(2023.2.28-5.7,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에서 기획전을 열며, 한국 미술계에서 주목받음.

2024베니스비엔날레 제60회 국제미술전 본전시 Stranieri Ovunque - Foreigners Everywhere(2024.4.20.~11.24)에 초대

2024세계를 무대로 한국 문화예술의 위상을 높인 공훈으로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수여하는 시각예술분야 보관문화훈장을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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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신, 경계를 넘어 통합을 추구하다 



                                                                김이순(책임연구원)


I. 들어가며


김윤신(金允信, b.1935)은 한국미술계에서 그와 견줄만한 작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독보적이다. 1955년 미술대학에 입학하여 조각을 전공한 이후 지금까지 70년 동안 자신을 내세우거나 드러내기보다는 오직 창작에만 몰두해 왔다. 흔히 한국의 1세대 여성 조각가라고 불리지만, 그에게는 여성이라든가 조각가라든가 하는 한정어가 불필요하다. 여성은 물론 남성 조각가들도 사용한 적이 없는 전기톱이나 그라인더로 단단한 나무와 돌을 절단하여 조각을 제작했는가 하면, 파리 에콜 데 보자르에서 석판화 전공을 계기로 회화와 조각을 넘나들면 작업을 해왔고 최근에는 ‘회화-조각’이라는 그만의 독자적인 장르를 개척했기 때문이다. 김윤신은 평생 장르나 재료, 기법 등에서 기성의 규범이나 경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했다. 

  한국미술계에서 김윤신을 주목한 것은 최근이다. 지난 40여 년간 아르헨티나에서 창작활동을 했기 때문인지 그에 관해서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그의 작품전이 국내에서 꾸준히 열렸지만, 전시에 관한 단편적인 기사만 일간신문에 실렸을 뿐이다. 마침내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기획전 《김윤신: 더하고 나누며, 하나》(2023.2.28.-5.7)를 통해 그의 작품세계를 조망할 수 있었고 미술계는 물론 일반들도 그를 주목하게 되었다. 2024년에는 베니스비엔날레 본 전시에 초청되는 등 지난 1~2년 사이에 한국을 넘어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했다. 본 아카이빙 연구에서는 이러한 김윤신의 대학 입학 이후 현재까지 70년간의 창작 여정을 따라가며 작품뿐만 아니라 작품 외 자료들을 찾아 정리하였다. 

  김윤신이 제작한 작품의 수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970년 이전의 현존 작품은 판화와 드로잉 외에는 거의 없다. 그는 대학에 입학한 후 4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학교 실기실에서 소조 기법으로 인물상을 제작했고 파리 유학 시절에는 석판화를 전공하면서 다양한 재료로 실험적인 입체 작품을 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 작품 중에 몇 점만을 흑백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다. 파리 유학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평면과 입체 작업을 병행했고 목조각을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의 작품 역시 아르헨티나로 이주하면서 대부분 흩어졌고 일부만이 현존한다. 다행히 아르헨티나 시기의 작품들은 대부분 현존하며 개인소장이거나 소장처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에도 사진 이미지가 남아 있어서 그의 창작의 여정을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다. 

  이번 아카이빙 연구에서 정리한 작품 수는 총 1,700점 정도인데, 평면 작품이 1,200점 정도이고 조각 작품이 500여 점이다. 평면 작품은 석판화, 천을 이용한 콜라주 작품, 판화기법을 응용한 작품, 유화와 아크릴화가 있다. 입체 작품은 목조가 다수를 차지하며 오닉스와 준보석류로 제작한 작품들도 적잖으며 화강암의 공공조형물도 포함되어 있다. 아쉽게도 초기의 소조기법의 석고나 시멘트 작품과 철 용접기법 작품은 국전도록과 작가가 소장하고 있는 흑백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회화(평면)가 조각보다 월등히 많다. 파리 에콜 데 보자르에서 석판화를 전공한 이래로 평면작업을 다양한 방식으로 지속했기 때문인데, 특히 아르헨티나에서 오로지 작업에만 몰두하던 시기에 낮에는 조각 작품을 제작했고, 저녁 시간이나 쉴 때 혹은 여행 중에도 늘 그림을 그렸다. 김윤신 작품세계에서 조각과 회화의 경중을 따질 수 없다. 이 두 영역은 분리 불가능하며 김윤신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탄생한 소산물이다. 본고에서는 조각과 회화를 아우르면서 그의 미술 세계를 조망하고자 하는데, 김윤신의 삶과 예술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우선 그의 생애를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II. 김윤신의 삶과 ‘지금, 이 순간’의 예술


김윤신에게는 삶이 예술이고 예술이 삶이다. 아흔의 나이에도 그는 식사 시간 외에는 작업을 한다. 흔히 미술가들은 나이가 들면 조수를 두고 육체적으로 버거운 작업을 할 때는 물리적 도움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김윤신은 수많은 작품을 제작하면서 타인의 손을 빌리지 않는다. 여느 작가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김윤신은 나무든 캔버스든 재료와 맞대면하면서 바로 그 순간의 생각과 느낌으로 작업을 하기 때문이다. 찰나의 한순간은 모든 것을 좌우할 수 있으며 그 안에 자신의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다고 여긴다. ‘지금, 이 순간’을 작품 명제로 내세운 것은 2020년이지만, 그는 평생 순간을 중시하는 삶과 창작의 태도를 유지했는데, 이는 유년 시절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935년 강원도 원산에서 태어난 김윤신은 어머니 등에 업혀 원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안변으로 이사한 이래로 1947년 늦가을에 오빠를 만나기 위해 월남하기 이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는 1남 5녀 중에 다섯째 딸이었고 바로 위로는 오빠가 있었다. 오빠 김국주는 의성김씨 집안의 대를 이을 외아들로, 김윤신의 집안에서는 누구보다도 중요한 존재였으나 징용을 피해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군 활동을 했다. 김윤신은 어린 나이에 유기 공출, 송진 채취 등 일제 수탈의 광경과 매일 정화수를 떠놓고 오빠의 무사함을 기원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목격했다. 

  1945년 여름 방학에 중국 목단강 지역에서 한의사를 하던 아버지한테 다니러 갔다가 광복을 맞았고 홀로 안변 집으로 돌아왔다. 두만강을 건너 귀향하면서 무고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이 광경을 목격했다. 독립군으로 활동하던 오빠가 서울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그를 만나러 38선을 넘어 남하하는 동안에도 순간순간 생사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또 6·25전쟁을 겪으면서 서울에서 목격한 산더미 같은 시체, 핏빛으로 물든 한강 등은 너무 끔찍하고 참혹했다. 어린 시절에 순간순간 죽음을 맞닥뜨려야 했던 김윤신은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절감하고, 평생 한순간도 헛되이 보내지 않고 살아왔으며, 어떠한 일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롯이 창작에만 전념했다. 그의 예술작품은 순간순간을 쌓아서 올린 거대한 탑인 셈이다.


III.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의 작품세계


김윤신은 ‘합이합일 분이분일’이라는 철학적 개념을 목조각 작품의 제목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말의 의미에 대해 작가는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합(合)’과 ‘분(分)’은 동양철학의 원천이며 세상이 존재하는 근본이다. 나는 1970년대 말부터 그런 철학적 개념을 추구하고 있고, 그래서 나의 작품에 ‘합이합일 분이분일’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것은 두 개체가 ‘합이(合二)’되어 ‘하나(合一)’로 만나며 그 합이 다시 둘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인간의 존재에서처럼 계속적으로 무한대적으로 합과 분이 반복된다. 전기톱을 사용하여 분(分)에 의하여 창조된 선과 면은 합(合)이요 동시에 분(分)이다. 나의 정신, 나의 존재, 그리고 나의 영혼은 비로소 하나가 된다.” 


  ‘합이합일 분이분일’은 조각 작품의 제목이지만, 그의 조각 작품뿐 아니라 예술 전반에 녹아있는 철학이다. 둘이 모여 하나로 수렴되고 그 하나는 다시 나뉨으로써 무한히 확장된다는 개념은 김윤신의 삶의 철학이자 기독교 정신이기도 한데, 예술작품에서 조각은 물론 회화 작품, 그리고 최근의 ‘회화-조각’을 통해 구현되고 있다. 본고에서는 시기별로 나누어 이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1. 1955~60년대: 조각가의 길에서 판화를 만나다

 

  김윤신은 1955년 미술대학에 입학해서 1959년 졸업 때까지 찰흙으로 모델링하여 인체 형상을 제작했다. 사실적인 인체상도 제작했지만 《국전》 출품작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다양한 양식 변화를 시도했는데, 대체로 날씬한 인체의 구상조각이었고 재료는 석고나 시멘트였다. 소조기법으로 철저하게 기본기를 익힌 후에 자신의 조형 언어를 찾아 나간 것이다. 대학 재학 시절에 동경미술학교 목조과를 졸업한 윤효중(1917~1967)이나 일찍이 미국에서 철 용접조각을 배워온 김정숙(1917~1991)에게서 조각을 배웠지만 소조기법에서 벗어나 철조나 목조 작품을 본격적으로 제작한 것은 대학 졸업 이후다. 1963년 《도불전》을 열면서 인체, 고양이, 새 등을 추상화하거나 비대상적인 추상작품을 제작했다. 

  그가 파리로 떠난 것은 1964년 12월이다. 1965년 초에 파리 에콜 데 보자르 조각과에 입학하여 조각 공부를 시작했으나 지도교수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전과(轉科)를 해야 했고 판화과로 옮겨 석판화를 전공하게 된다. 파리에서 판화를 전공한 것은 일종의 ‘사고(accident)’였다. 그러나 김윤신에게 뜻밖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는 파리에서 석판화를 전공하면서도 꾸준히 조각 작품을 제작했으며, 평생 입체와 평면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작가가 되었다. 김윤신이 파리에서 제작한 조각 작품은 사진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는데, 대부분 앵포르멜 양식의 부조 작품이다. 달걀 포장재, 유리병, 한국에서 공수된 박으로 된 바가지 같은 비미술적 재료를 부숴서 펼쳐놓고 석고물을 과감하게 부어서 고착시킨 작품들이다. 불규칙한 형태가 주조를 이루고 있어 앵포르멜 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불규칙한 양식의 부조 작품들은 일반 앵포르멜 미술이 내포한 실존주의나 불안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작가가 파리에서 느낀 자유로움의 메타포였다. 

  파리 시기에 김윤신은 앵포르멜적인 작품을 제작하면서도 선 긋기 드로잉을 반복하면서 선적인 추상미술을 탐구해 나갔다. 석판화 <예감> 연작에서 보이는 수많은 선으로 이루어진 작품을 통해 당시 그가 추구하던 경향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후에도 선은 김윤신의 조각과 회화 모두에 중요한 조형 요소가 된다. 1969년 4월에 귀국하였고 《김윤신 대리석 판화전》(1969.7.25.~7.29)이라는 타이틀로 신문회관 화랑에서 귀국전을 열었다. 당시 일간신문에서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열리는 이색전(異色展)”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2. 1970~1980년대 중반: ‘찍기’와 ‘쌓기’로 절대자와의 합일을 추구하다


김윤신은 귀국 후에 석판화를 지속하지 않았다. 국내에서 석판화를 찍을 수 있는 프레스기를 찾기 어려웠기 때문인데, 대신 판화기법을 응용한 ‘찍기’로 평면작업을 지속했다. 일상적 오브제에 판화 잉크를 묻혀 도장을 찍듯이 종이나 캔버스에 찍어 표현하거나 롤러로 천에 잉크를 문지른 후에 잘라서 콜라주하는 방법 등,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캔버스에 찍은 판화’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1972년 <성좌의 신화> 연작에서처럼 스폰지에 물감을 묻혀 찍는 식으로 색면을 표현했는가 하면, 붓 뚜껑의 단면을 찍어 원형 패턴을 만들기도 했다. 심지어 건축용 먹줄을 튀겨서 캔버스에 선이 찍는 등의 이색적인 방식으로 추상화를 제작하였다. 이 시기에 같은 내용을 회화와 조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72년 유화 작품에서는 <십자가>라는 작품으로, 1973년 시멘트 조각에서 <지향적 염원>(1973)이라는 제목으로 십자가를 통해 자신의 신앙 고백적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한편, 평면과 입체를 한 작품에 결합하기도 했다. 1973년 상파울루비엔날레 출품작 <평화를 사랑하는 자유인들을 위한 수호신>은 크고 작은 상자를 십자가 형태로 쌓아 올린 구조물인데, 나무로 상자를 만들고 한지로 감싼 후에 인쇄용 잉크와 인주로 둥근 이미지를 찍거나 부적 같은 형상을 그려 넣었다. 평면과 입체의 통합, 그리고 기독교적인 요소와 무속적 요소가 결합된 이 작품은 김윤신이 평생 추구하는 ‘합이합일 분이분일’의 철학이 담긴 초기 작품의 한 사례라고 하겠다. 

  1970년대 초반에 김윤신은 기독교에 깊이 심취해있고 성 삼위일체를 의미하는 삼각형의 형상이 반복적으로 표현되었으며 ‘예술은 내적 영혼의 반향’이라는 종교적 인식이 반영된 작품들을 다수 제작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목조각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회화 작품을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이때 형성된 예술관은 평생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직후에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염색된 마대 천을 콜라주 기법으로 <기원>(1984)을 제작했다. 빨강, 녹색, 청색, 황토색의 마대 천을 기하학적인 형태로 잘라 붙인 색면 추상으로, 앞서 살펴본 1975년 작품 <지향적 염원>과 조형적, 내용적 측면에서 상통하는 바가 있다. 

  아르헨티나로 떠나기 전의 평면 작품에서 기독교적 요소가 두드러졌던 것에 비해, 목조각에서는 전통의 샤먼적 요소가 두드러졌다. 김윤신은 앞서 언급한 <평화를 사랑하는 자유인들을 위한 수호신> 이래로 1970년대에 ‘쌓기’의 방식으로 목조각을 제작했다. 나무토막을 물리적으로 쌓아 올리거나 쌓아 올린 형상으로 <기원 쌓기> 연작을 제작했다. 다양한 수직 기둥형 작품을 제작들은 장승, 솟대, 탑, 목조 건축의 기둥 등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기원 쌓기> 연작의 직접적인 배경은 개인적인 것이다. 삼대독자 장남이었던 아들의 무사함을 위해 매일 새벽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다 놓고 기도하던 어머니의 모습, 그 옆에서 자갈을 주워다 쌓아 올리며 기도하던 기억에서 비롯된 것으로, 수직형의 작품들은 인간의 염원이 하늘에 닿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한편, 같은 시기에 김윤신은 생명에 대한 애착을 드러내는 작품도 제작했다. <생명의 근원>으로도 불리는 <이단일좌(二段一座)>(1976)는 직립의 나무 기둥에 크고 작은 덩어리들이 붙어있는 형상인데, 작가가 중요하게 여긴 생명을 조형화한 것이다. 생명성의 강조는 나무의 겉껍질을 벗기지 않고 그대로 작품에 사용하는 데서도 드러난다.  

  1978년경부터는 껍질이 붙어있는 상태에서 중간중간을 뭉텅뭉텅 자른 원목의 둥치를 세워놓았다. 나무를 일일이 깎고 다듬어서 형상을 만드는 일반적인 목조각 방식과는 달리, 껍질을 그대로 둔 채 나무의 중간중간을 파내고 껍질과 속살의 색 대비를 통해 공간을 만든 점이 특징적이다. 이처럼 원목이 지닌 고유한 형태를 수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존재에 작가의 정신(혼)을 불어넣음으로써 재료와 작가의 에너지가 하나로 합일된 작품이 탄생하게 된다. 바로 이 시기에 ‘합이합일’이라는 제목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김윤신은 이후 평생 사용하게 되는 ‘합이합일 분이분일’이라는 철학적 개념을 구체화해 갔다.


3. 1980년대 후반~2000년: ‘절단’의 기법으로 생명을 표현하다


   나무에 대한 애착이 있던 김윤신은 1983년 12월 아르헨티나에 여행 갔다가 멈춰서 40년간 작업하다가 2024년 2월에 귀국했다. 아르헨티나 정착 초기에는 앞서 언급한 대로 기성의 컬러 마대 천을 잘라서 콜라주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지만, 나무에 매료되어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만큼 목조각에 전념했다. 멕시코와 브라질에 잠시 머물면서 석조각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는데, 모두 단단한 재료였기 때문에 ‘절단’이라는 독자적 방식으로 조각 작품에 제작에 전념했다.

  아르헨티나 정착 초기에는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원목을 수직으로 세워 여러 각도에서 파내거나 유기적인 덩어리들이 연결된 형상의 작품을 제작했다. 수직 기둥형 작품들로 부에노스아이레스 현대미술관(올라바리아 식물원 야외전시장, 1985.9.20.~10.20)에서 아르헨티나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의 독특한 조각 방법은 높은 평가를 받았고, 아르헨티나의 유명 건축가 마리오 가로네(Mario Garone, 1928~1991)는 아르헨티나의 단단하고 질 좋은 통나무들을 한 트럭 실어다 주었다. 이 나무들은 너무 단단해서 일반 톱이나 끌, 자귀로는 조각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기톱을 사용했다. 전기톱으로 ‘절단’의 기법으로 조각할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김윤신의 조각에 조형적인 변화가 발생했다.

  전기톱은 무겁고 속도가 빠르고 강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고도의 집중이 요구된다. 김윤신은 전기톱으로 한 번의 절단을 통해 한 면을 만들고 그 면과의 관계 속에서 또 다른 절단을 하면서 공간을 창출하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이런 점에서 절단은 나무의 생명을 끊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즉 나무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는 방법이다. 이때 고도의 집중력과 함께 작가의 직관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작가는 몇 시간이고 작업에 몰두하여 그야말로 ‘혼신’을 다해 단단한 나무를 절단하면서 하나의 작품을 완성한다. 그의 작품들은 말 그대로 재료와 작가가 합일을 이룬 상태로부터 탄생한 것이다. 

  김윤신의 모든 작품은 형태가 저마다 다른데, 이는 작가가 특정한 형상을 염두에 두고 나무를 조각한 것이 아니라 작가가 대면한 원목 자체의 형태와 성질을 출발점으로 삼아 제작하고 작품을 제작하는 순간의 느낌과 생각이 작품에 영향을 미친 결과이다. 매 순간은 늘 새로운 순간이기 때문에 작품의 형상이 모두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중에는 십자가 형상도 있고 그가 아르헨티나에서 목격하고 경험한 대상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조형화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높이 220cm의 삼나무로 제작된 <두 개의 오벨리스크>(1993)는 ‘오벨리스크’라는 제목 때문에 고대 이집트 문화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에 세워진 오벨리스크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그렇다고 김윤신 작품의 우뚝 서 있는 형상을 꼭 이 오벨리스크와 관련지을 필요는 없다. 그는 이미 1970년대부터 제작한 수직 지향적 형상을 제작해왔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신이 거주하는 자연과 문화에서 영감을 받으면서도 이러한 요소를 작품에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자신의 내면에 축적된 정서 및 감정과 결합해서 현재 마주하고 있는 재료에 투영하는 것이 김윤신의 작업방식이었다. 

  2002년의 작품 <합이합일 분이분일>(원제목: <두 개의 바벨탑>)은 삼각형과 지그재그 패턴이 계단식으로 조각된 수직형 작품이다. 한 쌍으로 구성된 점, 거칠고 과감하게 나무 둥치를 파낸 조형적 특징 등에서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의 형상을 연상시키며, 이는 1974년에 제작한 <바벨탑 쌓기>와 동일한 맥락에 있다. 지그재그 패턴이 고부조로 돌출되게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김윤신이 소장하고 있는 아르헨티나의 목공예품 중 이구아나의 등줄기 표현과 상통한다. 또 표면에는 성 삼위일체의 상징인 정삼각형을 반복적으로 새겨 넣었다. 김윤신은 이처럼 특정한 문화나 소재가 아니라 자신이 섭렵한 다양한 요소를 하나의 작품에 녹여냄으로써 일반 통념이나 기존의 상징성을 초월하여 절대자와의 소통을 갈망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염원을 조형화했다.

  이 시기에 김윤신은 석조각도 제작했다. 석조각이라면 대리석이나 화강암 덩어리를 정으로 쪼아서 형상을 만드는 방식을 떠올릴 터인데, 당시 김윤신은 전혀 다른 방법으로 석조각을 제작했다. 1989년부터 1992년까지 매년 3개월씩 멕시코 뿌에블라 데칼리(Puebla Tecali)라는 오닉스(onix) 산지로 유명한 곳에 들어서 오닉스 조각 작품을 제작했다. 오닉스는 매우 단단하기 때문에 정으로 쪼아서 어떠한 형상을 만들 수 없고 그라인더로 절단하는 기법 외의 작품 제작 방법을 찾기 어렵다. 그라인더 톱날이 돌아가는 동안 위에서 물이 떨어져 열기를 방식으로 절단된 돌을 가지고 모래와 물로 연마하여 아름다운 색을 내기도 했고 때로는 돌의 거친 표면을 질감과 색을 살려서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또 다시 김윤신은 지인의 소개로 브라질에서 준보석 작업을 하게 된다. 2001년 말에서 2002년 초까지 오닉스보다도 더 단단한 준보석류로 조각 작품을 제작하였는데, 준보석 조각 과정은 오닉스 작품과 유사하지만, 오닉스보다 20% 정도 더 강하기 때문에 더욱 지난한 과정이 요구되었다. 그라인더에 물이 아닌 특수 기름을 부어 기계를 돌려 돌을 절단하는 방식이었다. 

  오닉스나 준보석류는 나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기 때문에 인내심이 필요하며, 직선으로 자르는 ‘절단’이라는 방법 외에는 조각 방법을 찾기 어려운 재료들이다. 게다가 원석의 상태에서는 돌의 색이나 무늬를 전혀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절단을 진행하면서 원석 고유의 특질과 아름다움을 끄집어내야 한다. 따라서 당시 석조각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강한 인내심과 직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제작한 김윤신의 석조각은 목조의 묵직함과는 다른, 환상적인 분위기와 풍부한 질감을 갖고 있다. 원석이 지닌 자연스러운 질감을 최대한 살려서 재료 자체의 내재적 아름다움을 드러냈는데, 오광수의 표현대로, “마치 돌 속에 감추어진 오묘한 우주의 조화”를 실감하게 한다. 한 예로, <합이합일 분이분일>(No. 719)은 반원형의 덩어리를 부채처럼 펼친 형태로 재단하여 기본 형태를 만드는 것 외에는 인위적 행위를 더하지 않았다. 매끈한 절단면에서 드러나는 원석의 보라색은 표면을 감싸고 있던 갈색과 흰색의 불규칙한 색 패턴과 조화를 이룬다. 이렇듯 김윤신은 오닉스와 준보석에 감추어진 신비한 무늬와 오렌지색, 청색, 붉은색, 보라색의 다채로움을 고스란히 살린, 회화성이 짙은 석조각을 제작했다.

  김윤신은 작업 자체를 ‘기도’로 여긴다. 초기에는 수직 기둥형의 형태로 절대자와 소통하려는 염원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면, 이 시기에는 전기톱이나 그라인더로 작업하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기도로서 그는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염원을 담아 작업했다. 그 결과, 작가가 ‘영(靈)’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작가의 정신과 물질(나무, 돌)의 통합에 의해 탄생한 작품은 그야말로 ‘합이합일 분이분일’이라는 명제에 부합하게 된다.

4, 2000년~2010년대: ‘채색’, ‘긁기’로 생명과 영혼을 노래하다


   김윤신이 아르헨티나에 도착하여 주로 ‘절단’의 기법으로 조각 작품을 제작했다. 팔로산토, 알카로보, 게보라초 등의 나무뿐 아니라 오닉스와 준보석 같인 단단한 재료로 조각 작품을 제작하는데 몰두하다가 1997년에 회화 작품을 다시 시작했다. 석판화를 전공한 이후 아르헨티나로 이주하기 전까지 꾸준히 평면작업을 진행했지만 잠시 놓았던 붓을 다시 들었으며, 2000년부터 2020년대 초반까지 무려 800여 점의 유화 및 아크릴릭화를 제작했다. 김윤신의 평면 작품이 입체 작품보다 월등히 많은 것은 단단한 재료로 인한 작업의 난이도 때문이기도 하며, 작가가 낮에는 조각 작품을 제작하고 저녁 시간이나 쉴 때, 그리고 여행할 때조차도 늘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회화 작품의 크기는 다양하며 붓으로 그리거나 때로는 캔버스 표면의 물감을 바르고 마르기 전에 팔레트 나이프나 일상적 오브제로 긁어 패턴을 만들기도 했으며 이미 1970년대에 시작한 오브제 찍기를 다시 시작했다. 전체적으로 크고 작은 점, 직선이나 곡선, 삼각형, 사각형, 원형, 지그재그 패턴, 바둑판 패턴, 혹은 나뭇잎, 꽃과 같은 식물의 형상이나 부채가 연상되는 유기적 형태가 있는 추상 작품이다. 예를 들어, <환희>(2002)는 삼각형이나 원 같은 기하학적 형태와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사선, 혹은 불꽃무늬가 자유롭게 화면에서 유동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생기가 넘친다. 이러한 조형적 특징은 오브제를 찍어서 표현한 1970년대 초반 작품의 연장선상에서 파악될 수 있지만, 그즈음 목조각에 반복적으로 그어진 사선들과도 무관하지 않다. 또 다른 작품 <환희>(2006)는 빨강, 노랑, 파랑, 청색, 녹색, 검정, 흰색 등 오방색 중심의 색을 주조로 하여 구체적 형태가 없는 반원형이나 직사각형의 색면으로 구성되었는데, 물감층을 나이프로 긁어서 선을 표현한 것이 특징적이다. 그는 물감을 바르는 작업과 함께 긁어내는 작업으로 잔잔한 선들을 수없이 표현했는데, 그 결과 화면이 진동하는 듯한 활기가 느껴진다. 

  김윤신의 회화 역시 기독교적 상징성이 있으며 기본적으로 작가의 내면세계를 조형화한 것인데, <또 하나의 세계>(2000), <환희>(2000-2003), <원초적 생명력>(2000, 2003-2006), <내 영혼의 노래>(2006-2018), <내 영혼의 쉼>(2014), <이루어지다>(2017-2018), <진동>(2018-2019), <기억의 조각>(2019-2020), <지금, 이 순간>(2020-2022) 등의 연작으로 발표했다. 이 연작들은 각각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연작이 완전히 끝내고 새로운 연작을 시작하는 방식이 아니라 작품 제작 당시 작가 자신의 직관과 내면의 울림에 따라 그림을 완성한 후에, 작품의 분위기에 따라 작품 제목을 붙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같은 해에 여러 연작이 제작되기도 했다. 특히 <내 영혼의 노래>는 12년간 지속했고 작품의 수도 압도적으로 많으며 다른 연작과 제작 시기가 겹치기도 한다. 

   이 시기에 목조각에도 채색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2001년 작품 <합이합일 분이분일>은 작품의 표면에 색이 들어가 있다. 남미 마푸체족이 몸에 그림을 그렸듯이 김윤신도 목조각 표면에 채색하기 시작했다. 지그재그 패턴이나 색상은 마푸체족의 문화에서 온 것이지만, 여기에 작가가 성 삼위일체의 상징으로 여기는 정삼각형을 새겨 넣음으로써 원주민의 문화와 기독교 문화를 한 작품에 결합하고자 한 것으로, 서로 다른 문화의 합일을 보여준다. 이후 적극적으로 목조각에 채색을 도입했다. 


5. 2019년 이후: ‘결합(assemblage)’을 통한 합일과 ‘회화-조각’


  팬데믹은 김윤신의 목조각 방식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코로나19의 발발로 인해 아르헨티나에서 70세 이상의 노년층은 밖으로 나다니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상황이 발생하여 조각에 필요한 목재를 구할 수 없게 되자 김윤신은 주변에 있던 나뭇조각을 재활용했다. 잡다한 목재를 모아서 작품을 제작하다 보니 나무의 결이나 종류가 너무 다양하여 이를 통합할 필요를 느꼈고 표면에 채색했다. 이전에도 조각의 표면에 채색한 적이 있지만, 이 경우에는 부분 채색이 아니라 작품 전체를 색으로 칠한 후 마치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듯이 그 위에 다양한 모티프를 그렸다. 작가는 이를 두고 ‘회화-조각’이라고 칭하고 있다. 

  김윤신의 경우, 팬데믹 이전에도 조각의 표면 전체에 채색한 적이 있다. 2019년 작품 <합이합일 분이분일 2019-No.21>은 집에서 키운 뽕나무가 너무 커지자 베어서 작품으로 제작한 것이다. 김윤신이 폐목을 결합하여 목조각을 만들고 그 표면에 그림을 그릴 때는 사방에 각각 다른 그림을 그린다. 이는 새로운 개념의 채색조각으로 볼 수 있다. 폐목들을 결합할 때 사방에서 다른 형상으로 보이도록 결합하고 그 각각의 면에 서로 다른 그림을 그려 넣었기 때문에, 하나의 입체 작품에서 4점의 회화 작품을 함께 감상하게 되는 셈이다.

  한 작품에서 네 면을 각각 다르게 보이도록 표현하는 방식은 목조각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전기톱으로 나무를 절단할 때 주로 수평이나 수직이 아닌 사선으로 절단하고, 자르는 면의 각도를 다양하게 조절하여 사방에서 본 모양이 달라 보이도록 치밀하게 계산한 결과 그의 목조각은 매우 구조적이고 역동적인 느낌을 주는데, 네 면에 다른 그림을 그리는 것도 같은 효과를 낸다. 환조 작품이라 하더라도 정면이 존재하고, 정면에서 작품을 감상하더라도 뒷면의 형상을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김윤신의 ‘회화-조각’은 ‘정면’이 존재하지 않으며, 작품을 감상할 때 마주 보고 있는 면 외의 다른 면을 예측하기 어렵다. 

  조각과 판화를 전공한 김윤신은 입체와 평면을 꾸준히 오가면서 작업을 했고 마침내 입체 작품의 네 면에 각각의 그림을 그려 넣음으로써 이른바 ‘회화-조각’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안했다. 회화나 조각 그 어느 쪽에 방점을 두지 않고 두 장르를 통합한 ‘회화-조각’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장르는 또 다른 ‘합이합일 분이분일’의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회화-조각’은 경쾌하고 활기가 넘친다. 조각의 표면에는 다양한 색 조합과 다양한 패턴들이 가득하다. 그는 팬데믹으로 인해 외출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순수했던 안변에서의 어린 시절을 상상했다고 한다. 친구가 거의 없는 그에게 나무와 풀벌레 등 온갖 것이 친구였고, 밤하늘의 쏟아지는 듯한 별자리는 그의 상상을 자극하곤 했다. 그는 이 어린 시절의 기억을 그림 속에 자유롭게 그려 넣어 관람자의 상상을 자극한다. 여기에 더하여 색채가 주목되는데, 파스텔톤의 화사한 색조와 과감한 색 대비는 독자적이다. 그가 즐겨 사용하는 하늘색과 핑크, 녹색과 붉은색이나 오렌지색의 절묘한 조합은 동양의 전통보다는 아르헨티나의 전통에 더 가깝다. 예를 들어,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남동쪽으로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라 보카(La Boca) 카미니또(Caminito)라는 명소는 아르헨티나의 예술을 가장 생생하게 접할 수 있는 장소이다. 화려하고 선명한 색상의 건물들과 벽화, 조각, 야외 박물관, 토산품을 파는 기념품 상점 등이 즐비하며 아르헨티나의 역사와 예술을 가장 생생하게 접할 수 있는 지역으로, 김윤신 역시 손님이 오면 자주 관광을 가곤 하는 매우 익숙한 공간이다. 이 시기에는 폐목들을 결합하는 방법뿐 아니라 장르 간의 결합을 시도했고, 내용적으로도 유년에 경험하고 상상하던 것과 종교적 상징성을 지닌 기호들, 자연에서 온 잎사귀와 꽃, 점과 선, 동물에서 온 패턴이나 원주민의 공예품에서 볼 수 있는 패턴, 그리고 아르헨티나의 문화 예술 등을 자유롭게 연결하여 독자적 분위기의 작품을 제작했다.

  이렇듯 김윤신의 작품에는 한국적인 것이, 때로는 아르헨티나적인 것이 묻어나지만 그는 굳이 특정 지역에 자신을 한정하지 않는다. 예술은 우주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가 어린 시절에 경험한 무속적 요소, 기독교 신앙의 성경적인 요소, 그리고 아르헨티나에 머물면서 접한 남미의 문화는 서로 다른 각각의 정체성을 갖고 있지만, 김윤신은 이 모든 요소를 자신의 삶 일부로 포용하면서 작품 속에 녹여냈다. 따라서 그의 작품을 굳이 어느 특정 문화권의 맥락에서 바라볼 필요는 없다. 자신이 몸담은 장소의 자연과 문화에서 체득한 요소들을 총체적으로 받아들여서 완전히 새로운 미술을 구현했기 때문이다.


IV. 나오며: 삶과 예술의 ‘합이합일 분이분일’


  1977년 즈음에 ‘합이합일’이라는 제목을 처음 사용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김윤신은 ‘합이합일 분이분일’이라는 제목을 지속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우주 만물은 음과 양의 상호 작용으로 이루어진다는 철학적 함의를 담은 이 명제는, 통나무를 잘라 나눔(分)으로써 선과 면을 만들고, 이를 다시 공간과 합(合)하여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한다는 창작과정에서 시작된 개념이지만, 수없이 점을 찍고 선을 긋는 회화 작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점과 선, 그리고 다양한 색면은 구체적인 형상 없이 화면에서 자유롭게 유동하고 있는데, 이는 작가의 내면에 내재한 원초적 에너지 내지는 생명력(그는 이를 ‘영(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이 파동을 이루며 밖으로 표출된 형상이라고 볼 수 있다.

  ‘합이합일, 분이분일’이라는 개념은 그의 작품세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삶과 예술은 두 영역이지만 김윤신에게는 삶(종교)과 예술이 평생 분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합이합일’은 그의 삶 자체를 압축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김윤신에게 예술적 창작 의지는 단순히 한 개인의 자아 성취 욕구나 타인과의 경쟁 관계에서 비롯되는 성취욕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김윤신의 창작 의지는 “절대자로부터 축복받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염원”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의 창작 의지가 세속적 명예나 인정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면, 지구의 반대편에 위치한 아르헨티나에서 40년간 쉼 없이 창작에 몰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오랜 시간을 건너 우리 앞에 놓인 그의 작품을 마주하노라면, “매일 매 순간 절대자와 대화를 나누듯이 기도 속에서 나의 조형언어는 시간과 유한성을 초월한, 작품 자체에뿐만 아니라 주위의 자연과 전체로 결합하는 총제적 합(合)과 분(分)인 ‘합이합일, 분이분일’이란 연작으로 이어졌다.”는 그의 고백이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지금 우리가 그에게 열광하고 주목하는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삶이 예술이 되고 예술이 다시 삶이 되는, 둘이면서 하나이고자 하는 그의 초월의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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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신 평면작업의 시기별 조형 언어 연구

: 판화에서 회화로의 전환과 그 미학적 연속성

 

김윤애(연구원)

 

이 글은 한국 현대 조각계를 대표하는 김윤신(b.1935) 작가의 평면작업을 시기별로 분석함으로써,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전개된 조형 언어의 변화와 미학적 연속성을 고찰하고자 한다. 디지털 아카이빙을 통해 정리된 약 1,170여 점의 평면작업은 회화 81%, 판화 13%, 드로잉 6%로 구성되며, 이는 조각 외 매체에서도 작가의 독자적인 시각 예술 세계가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김윤신은 조각가로 널리 알려졌지만, 60여 년간 지속된 평면작업은 그에 못지않은 예술적 깊이를 지닌다. 이 글에서는 그의 평면작업 중 회화와 판화를 중심으로 시기별 작품 양상과 표현 변화를 살펴보며, 1960년대 석판화 제작 경험이 회화작업에 어떤 방식으로 전이되었는지를 추적한다. 조각, 판화, 회화의 매체 간 상호 영향뿐 아니라, 긁기, 찍기, 반복되는 선 등 조형 요소를 중심으로 실험과 연속성을 밝히고, 김윤신의 평면작업을 독립된 예술 체계로 조명한다.

김윤신의 평면작업은 현대조각을 대표하는 작가로서의 위상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명이 덜 되었으나, 그의 회화와 판화 작업은 지금까지 간과되어 온 평면 매체의 실험성과 예술적 깊이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된다. 그는 평면 매체를 통해 반복과 흔적, 물성의 층위를 드러내며, 조각적 감각을 2차원 평면에 재해석하는 독특한 예술세계를 구축하였다. 본문에서는 그의 평면작업이 단일 매체의 발전사라기보다는, 한국 현대미술 속 매체 간 확장의 역사를 보여주는 주요 사례임을 강조한다.





김윤신 시기별 작품분석 (입체): 찰나(刹那)와 만나는 세계

 

한세현(연구원)

 

김윤신은 한국전쟁 이후 대학에서 조각을 배웠던 현대조각 1세대이다. 대학교에서 근대기 일본에서 수학한 교수들에게 배우고, 미국에서 새롭게 들어온 최신 철조 용접 조각을 접할 수 있었다. 1960년대 조각가로서는 처음으로 프랑스 파리국립고등미술학교에서 조각을 전공하다가, 판화과에서 공부하여 입체와 평면을 다룰 수 있는 예술가로 성장하였다. 1970년대에는 여러 대학에서 학생을 지도하며, 한국여류조각가회창립을 주도하였다.

1970년대 후반 민간에서 전통적으로 소망을 기원하는 방식인 돌탑쌓기 방식에서 착안한 <기원쌓기>를 시작으로, ‘합이합일(合二合一)’, ‘분이분일(分二分一이라는 철학적 개념을 기반으로 작품을 구현하기 시작했다. 1984년 아르헨티나 여행에서 한국에서 보지 못한 다양한 목재가 있다는 환경 때문에 흥미를 느껴 이곳에 오랫동안 정착하게 되었다.

이후 목조각에 전념하며,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활발한 전시를 열었고, 1988년 멕시코로 넘어가 준보석과 오닉스로 석조각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서 남미 인디언(Mapuce)의 치장방식에 영감을 얻어, 점차 조각에 채색을 적극적으로 시도하였다. 2020년경에는 회화와 조각이라는 장르의 구분을 뛰어넘어 회화-조각이라는 독특한 장르를 개척하면서 김윤신 고유의 조각 세계를 구축했다.

이 글에서는 그동안 작가가 제공하고 연구팀이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가가 구상하고자 했던 예술세계가 조각으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시기별로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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