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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육명심Yook Myong-Shim

1933-09-10

#사진

책임연구원 | 이경민

Yook Myong-Shim

작가소개

육명심(1932~)은 1966년 제1회 《동아국제사진살롱》에 입선하면서 사진계에 입문했고, 중앙사우회(CFC) 등 사진단체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이때부터 1970년대까지의 초기 작업을 ‘인상’이라고 불렀으며 후일 ‘영상사진’이라고 명명했다. 이 <영상사진> 시리즈는 1960년대 한국 사진계의 주류를 형성했던 리얼리즘이 패권적이고 천편일률적이라고 생각하여, 그 대안으로 프레임의 낯설게 하기 효과와 사진만의 영상언어를 감각적으로 보여준 모더니즘적 시각의 작업이다.

그는 또한 대학 은사이자 연세대학교 영문과 교수인 시인 박두진을 시작으로 <예술가의 초상> 연작을 시작했다. 이 작업은 1972년 서라벌예술대학에 부임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1980년대 초까지 이어졌다. <예술가의 초상> 연작은 문학을 중심으로 무용, 미술, 영화 등 여러 분야의 예술가들을 망라해, 일상을 살아가는 인간으로서의 그들의 모습과 개성을 사진 속에 담아낸 초상 작업이다. 

  이어서 그는 1970~80년대 근대화·산업화가 진전되는 과정에서 사회적으로 전통과 민족에 대한 관심이 일자 이에 대한 반응으로서, ‘우리 것 3부작(Korean Trilogy)’이라 불리는 <백민>, <장승>, <검은 모살뜸> 연작을 시작했다. 이를 통해 사라져가는 한국적인 정체성과 미감을 추구하고자 했다. 1970년대 말부터 시작한 <백민>은 무당, 촌로들, 농부,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 승려, 청학동의 아이들, 전통 조상(彫像) 등 산업화, 도시화와 함께 사라져가는 한국 전통의 ‘토박이’의 초상을 담았으며, <장승>은 이 ‘토박이’들이 만들어 놓은 자기 초상이자, 한국적인 정신세계와 미감이 담긴 대상으로서의 장승의 모습을 담았다. <검은 모살뜸>은 뜨거운 한여름, 제주도의 검은 모래사장에서 이루어지는 모래찜질을 다루며, 인고 속에 자식을 기르고 지켜온 한국의 어머니들이 이 모래찜질을 통해 무덤 속에 들어가 재생 혹은 부활한다는 모티브로, 삶과 죽음이 하나가 되는 상태와 그 속에 내포된 강렬한 생명력을 드러낸다.

  그가 표현하는 한국적, 전통적 정신성은 <라마불교> 연작을 통해 확장되었다. <라마불교> 시리즈는 1997년부터 라마불교를 종교적 문화적 기반으로 하고 있는 티베트를 비롯한 라다크, 부탄 등지를 촬영한 것이다. 이곳들은 그가 추구해 온 ‘생명의 문화’의 가장 원형적인 모습을 발견한 곳이자, 그가 ‘꿈꾸던’ 서방정토이자 아버지의 땅이었다. 불교와 노장사상에 심취해온 육명심은 이곳에서 정신적이고 비세속적이며, 가장 원형적이며 종교적인 세계를 발견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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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약력

1932. 9. 10       충남 대전 출생
1960               연세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1969               제4회 동아국제사진살롱 은상
1976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미술사학과 (석사) 졸업
1975 - 1980     신구대학 사진과 조교수
1981 - 1999     서울예술전문대학(서울예술대학) 사진과 창설 교수
1984 - 1986     한국사진작가협회 17대 이사
1999               서울예술대학 정년퇴임 기념전시  《하늘 아래 첫 땅: Tibet》,덕원미술관, 서울
2007               《현대사진의 풍경》,서울시립미술관, 서울
2016               《한국현대미술작가 시리즈: 육명심》,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과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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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명심과 더불어 한국사진사를 걷다

- 1960~70년대 사진 활동을 중심으로 -

 

이경민 (사진아카이브연구소 대표)

 

한국 사진제도의 형성 과정과 육명심의 사진 활동

생전에 ‘사진계의 살아 있는 역사’‘한국사진사의 산 증인’이라고 불린 임응식(1912-2000)과 마찬가지로 육명심은 사진가로서뿐 아니라 사진사가평론가교육자로서 우리나라 사진제도의 기틀을 다지고 한국사진 발전을 위해 노력해왔다따라서 이 글은 사진가로서의 육명심을 살피는 데 그치지 않고 그가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전개한 1960년대~1970년대를 중심으로 그의 사진 활동이 한국사진사에서특히 사진제도사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그는 또한 일찍이 서양사진과 일본사진의 흐름과 경향을 주시하면서한국적 상황에 맞춰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는 점에서 한국사진의 특수성을 넘어 세계사진의 보편성을 어떻게 성취하려고 했는지 고찰해보고자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술사진의 역사는 사진의 예술제도로의 편입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사진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사진이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예술제도 안에 있어야 한다는 당위론적 이유 때문에사진가들은 사진이 국가에 의해서 공인을 받는 것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았다그리고 모더니즘 시기에는 매체의 자율성과 순수성을 강조하면서 독자적인 사진제도 형성을 위해 노력해왔다한국에서의 사진제도는 1910년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1945년 해방 이후 본격화되었다사진제도의 형성을 위해서는 먼저 전제조건으로 사진가와 사진작품이 사진계 안에 존재해야 한다여기서 사진계는 사진단체에 의해 구성되며따라서 사진제도 형성의 초기 단계에서 수많은 사진단체가 설립되었다우리나라에서 사진계는 ‘사단(寫壇)’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며많은 사진가들이 사단 형성을 위해 다양한 사진단체를 조직해왔다

  사단 형성을 위해 전국적인 사진조직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강조했던 이는 사진평론가 구왕삼(1909-1977)이었다. 1947년 조선문화단체총연맹 경북도연맹 산하의 사진동맹 맹원으로 활동하면서 1953년 대구광화회를 창립하기도 했던 구왕삼은 “작가가 없는 사단단체가 없는 사단은 사단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민족문화수립을 위하여 전국사진문화단체지도연맹의 결성을 제창”했다그는 이를 통해 “사단을 유기적인 생명체처럼 조직화하여 해방 이후 산적한 사진운동을 전개시켜 사진문화의 르네상스를 이룩하자”고 역설했다.【주석1】 구왕삼의 주장이 바로 이루어지지는 못했지만, 1961년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의 산하단체인 한국사진협회가 창립되면서 전국 단위의 사진단체가 출범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진단체의 조직과 더불어 사진제도를 구성하는 요소로는 사진사(寫眞史)의 기술전람회(공모전제도의 실시제도 공간(사진 갤러리 및 미술관)의 설치제도교육(사진학과 설치)의 시행 그리고 사진 담론의 생산 등을 들 수 있는데육명심이 사진 활동을 시작한 1960년대는 이러한 사진제도의 제반 요소들이 그 모습을 갖춰지던 시기였다따라서 그의 행보를 따라 1960~70년대 한국사진사의 전개 과정을 함께 살펴보기로 한다.

 

1. 공모전 제도와 초기 작품 활동국전과 민전을 중심으로

 

육명심, <백수>, 1969

 

  육명심이 사진을 시작한 것은 1964년 결혼 당시 아내 이명희가 결혼선물로 받은 카메라를 접하면서라고 한다그의 아내는 장인 이동훈(1903-1984)에게서 사진을 배웠는데이동훈은 일찍이 신의주에서 아마추어사진가로 예술사진작품들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목우회의 창립 멤버로서 대전 중심으로 구상화가로 활동했던 인물이다자연스럽게 아내에게서 사진술과 현상 방법 등을 배워 취미로 사진 활동을 하던 육명심은 1966년 동아일보사에서 주최한 《제1회 동아국제사진살롱》에 <출연전>이라는 작품이 입선되먼서 본격적으로 사진계에 입문하게 되었다특히 배재고등학교 영어교사로 재직 중인 1966년 서순삼을 중심으로 모인 사진단체인 CFC(Central Focus Club, 후에 중앙사우회로 개칭)에 입회하면서 본격적인 사진가의 길을 걸었다그는 CFC에서 개최한 회원전에 1966년부터 1971년까지 매년 출품하면서 단체 활동을 했으며당시 대표적인 공모전인 《동아사진콘테스트》 와 《동아국제사진살롱》 등에 출품하면서 사진 창작에 힘을 쏟았다당시 그에게 사진가로서 첫 번째 영예를 안겨준 작품들로는 1969 《제4회 동아국제사진살롱》에서 은상을 받은 <백수(白鬚)> 1974년《제12회 동아사진콘테스트》에서 특선의 영예를 안겨준 <사별>을 들 수 있다..

  한국사진사에서 1960~70년대는 ‘공모전의 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국내외에서 주최한 수많은 사진공모전에 사진가들의 출품이 러시를 이뤘다민전(民展)으로 치러진 동아일보사 주최의 《동아사진콘테스트》는 일본의 민전인 《이과전(二科展)》을 본 딴 공모전으로사진계의 숙원인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의 사진부문 설치가 지연되자 당시 동아일보 사진기자였던 이명동의 노력으로 1963년 창설되었다그해 11월에는 《동아사진콘테스트》에서 입상한 사진가를 회원으로 한 ‘사진동우회’가 창립되었으며동아일보사의 지원 아래 전국 규모 단체로 그 세를 확장해 갔다육명심도 1974년 특선에 오르자 사진동우회 회원이 되어 이 단체를 중심으로 사진 활동을 이어갔다.

  동아일보사에서는 《동아사진콘테스트》의 성공적 개최로 자신감을 얻자 사진예술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이 높아지는 상황에 맞춰 1966 《동아국제사진살롱》을 창설사진동우회와 공동으로 개최하였다육명심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여러 차례 이 공모전에 출품하여 다수의 입상과 입선 작품을 남겼다《동아사진콘테스트》는 1977 15회를 마지막으로 일단락되었고(1991년 부활), 1978 《동아공예대전》과 함께 종합미술대전인 《동아미술제》로 흡수 통합되었으며 ‘회화·조각전’과 ‘사진·공예·서예전’으로 나뉘어 격년으로 개최되었다.

  육명심이 작품 발표의 장으로 삼았던 또 하나의 공모전은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이었다관전(官展)으로서 당대 최고의 공모전이었던 국전에 사진부문이 신설된 것은 1964년의 일이다. 1950년대 ‘사진이 예술이냐 아니냐’를 둘러싸고 사진계와 미술계 사이에 치열하게 전개된 사진예술논쟁을 거쳐 《제13회 국전》이 개최될 때 비로소 입성하게 된 것이다이로써 사진은 국가에 의한 공인된 예술로서 그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던 것이다심사위원 자격 문제로 사진계 내부에서 끊임없이 마찰이 일기도 했으나 국전 사진부는 가장 권위 있는 공모전이자 사진가들의 등용문이었으며육명심 또한 《제16회 국전》(1967) 《제17회 국전》(1968)에 각각 <노경> 출품해 입선에 올랐다그러나 국전에 사진부가 신설된 지 7년 만에 영리성을 이유로 사진은 건축과 함께 국전에서 퇴출되기에 이른다카메라의 셔터만 누르면 이미지가 자동 생성되는 사진의 메커니즘을 빗대 ‘똑딱이 예술이냐’며 사진의 예술불가론를 주장하며 국전의 사진부 신설을 반대했던 미술계가 이번에는 순수예술성 여부로 사진을 다시 국전에서 제외시킨 것이다이는 사진의 예술제도로의 편입과정이 얼마나 힘든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결국 국전의 사진부문은 건축부문과 함께 1971 《대한민국 건축 및 사진전람회》라는 이름 하에 별도 개최되었다그러나 이 전시는 가을에 열리는 국전에 비해 시기적으로나 제도적으로 차별적 요소가 많았다그 결과 “건축 및 사진부문의 특수성을 실리고 획기적인 발전을 위해” 개최했다는 문공부의 취지가 무색하게 국전에 포함되었을 때와 내용적으로 큰 차이가 없어 독립전에 대한 기대는 크게 미치지 못했다이처럼 국전에서 사진부문이 제외되고독립전의 형태로 거듭나는 상황 속에서 이 공모전은 1973년까지 모두 세 차례에 걸쳐서 개최되었으며육명심은 1971년에 열린 《제1회 대한민국 건축 및 사진전람회》에서 <부활>로 입선에 올랐다.

육명심, <작업>, 1975

 

그러나 이 공모전이 3회까지 열리는 동안 많은 문제점이 노출되었으며그 결과 1974년에 국전 운영방식이 개편되어 사진과 건축이 다시 국전에 편입되었다개편된 운영방식에 따라 전시부문은 제1부 구상2부 비구상3부 서예4부 공예·건축·사진 등 4개의 부문으로 나누어졌으며2부와 제4부는 봄철에1부와 제3부는 가을철에 치러지게 되었다육명심은 이렇게 개편되어 새로 열린 《제23회 봄 국전》(1974)과 《제24회 봄 국전》(1975)에 각각 <줄말>【주석2】과 <작업>을 출품하여 입선에 선정되었다얼룩말의 엉덩이 부분을 클로즈업해서 촬영한 <줄말>과 굴착기로 땅을 파고 있는 건설노동자의 모습을 로우 앵글로 잡은 <작업>에서 그가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해온 뉴 비전(New Vision) 계열의 시각을 읽어낼 수 있다

  지금까지 1960~70년대 대표적인 사진공모전인 국전과 민전의 창설 과정과 운영방식의 변화 과정 등을 일별해보았다당시 대표적인 발표의 장이었던 이들 공모전을 중심으로 많은 사진가들이 활동했으며앞서 살펴본 것처럼 육명심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그러나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그는 공모전과 결별하고 개별 주제의 시리즈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그것은 공모전이 요구하는 걸작주의와 심사위원의 성향에 따라 당락이 결정되는 심사제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나름의 대안이었으며이는 아마추어리즘을 벗고 작가주의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2. 사진사 기술과 사진사가로서의 활동

  우리나라 사진제도의 형성과 관련해서 육명심의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는 ‘한국 사진사’의 기술이었다그가 사진계에 입문했던 1960년대 중후반 ‘한국 사진사’에 대한 학문적 성과는 미천한 수준이었다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이명동은 “사진술이 언제 어떻게 우리나라에 전하여졌는가 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 우리나라의 사진가들은 선뜻 자신을 가지고 정확한 답변을 하지 못하는 큰 수치를 지니고 있다”면서 ‘시급한 사진사의 정리’를 요청할 정도였다.【주석3

 이때까지도 제대로 된 한국사진사가 정리 또는 정립되어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그러나 그보다 이른 1960년을 전후하여 한국사진사를 정리하고자 하는 노력이 여러 사진가들에 의해 시도되고 있었다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사진문화』(1956년 창간) 1958 11월호에 이 잡지의 발행인이었던 조명원이 발표한 「한국사단 이면 천일야화」라는 글이 가장 이른 시기에 쓰인 한국사진사 관련 텍스트이다물론 이 글은 조명원 자신이 참여했던 사진단체와 개인적 사진 활동을 소개하는 데 그치고 있어 본격적인 사진사 연구라고 볼 수는 없지만글 제목처럼 그동안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진계의 야사(野史)가 담겨있어 사료적 가치가 적지 않다

  사진사에 대한 논의는 1960년대로 들어서면서 본격화되는데원로사진가이자 교육자였던 박필호(1903-1981)를 필두로 많은 사진가들이 한국사진사에 관한 기록들을 남기기 시작했다먼저 박필호는 1960년 『교재』에 「사진발달사」를 기고했으며그 뒤를 이어 대구지역 사진가인 최계복(1909-2002) 1962년 『예총』 창간 준비호에 「한국사단의 약사(略史)」를 발표하였다임응식은 『사안』8호에 「한국사단 20년사」라는 글을 기고했으며이 글을 보완 정리하여 1966년 발행된 『한국사진연감』에 「사단 40년사」라는 제목으로 재수록하였다사진평론가 구왕삼도 1966년 창간된 『사진예술』의 9월호와 10월·11월 합병호에 「해방 사단 20년 측면사」라는 글을 연재하기도 했다이 사진사 관련 텍스트들은 에세이 수준에 머물고 있고정확한 출처 없이 각자의 경험과 기억에 의존하여 기술하다보니 많은 부분에서 오류가 발견되거나 과장된 부분도 적지 않다하지만그 내용을 떠나 사진제도의 꽃인 사진사를 사진계 내부에서 자율적으로 구성하려는 의지를 엿볼 수 있으며, 1960년대에 이르러 비로소 한국사진사에 대한 역사적 구성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육명심·최인진의 『한국현대미술사(사진), 1978.

 

  당시 한국의 사진가들은 서양사진사나 일본사진사 관련 서적들을 다양한 경로를 통해 구해 볼 수 있었다육명심도 1967년부터 미국의 사진사가인 버몬트 뉴홀(Beaumont Newhall)의 『사진의 역사』와 일본의 사진평론가 다나카 마사오(田中雅夫)의 『사진120년사』와 같은 책들을 보면서 사진사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대학과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영문학사와 문학사를 공부한 그로서는 사진사를 공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또한 그는 사진계에 입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인 1969년에 사진잡지 『포토그라피』지에 『아이젠슈테트의 눈(The Eyes of Eisenstaedt)』이라는 책을 번역·연재했으며‘흘러간 사진작가’와 ‘세계사진작가 순례’라는 연재명으로 해외 사진가들에 대한 글도 싣기 시작했다그는 또한 1975년 사진잡지 『영상』이 창간될 때에도 발행인 이달희를 도와 잡지 편집과 구성에 도움을 주었으며창간호(1975년 봄호)에는 자신의 ‘인상’ 시리즈 4점과 함께 「어빙 펜의 인물사진피카소」라는 글을 실었다이처럼 육명심은 사진잡지를 중심으로 사진이론가로서의 경력을 쌓아갔다

 결국 그는 이러한 경력을 바탕으로 1978년 사진사가인 최인진(1941-2016)과 함께 『한국현대미술사(사진)(국립현대미술관 편저집필에 참여하기에 이른다이 책을 발간한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1974년부터 연차사업으로 《한국현대미술대전》을 개최하면서 동시에 한국미술사 정리 작업을 병행해왔는데이 책도 그 일환으로 기획된 것이었다사진술의 도입기부터 1940년대까지 사진사가(寫眞史家)인 최인진이, 1950년대부터 1977년까지 육명심이 담당해 집필한 이 책은 한국사진협회의 지원 하에 기술된 첫 번째 통사(通史)였다물론 이 책이 발행되기 이전에 인천지역 사진가 이종화(c.1915~1974)가 펴낸 『인천사진문화사』(1968)와 대구의 사진가 강상규(1936~)가 출간한 『한국사진사』(1976)가 단행본 형태로 발간되었다그러나 인천의 사진문화를 소개한 전자는 지역 사진사에 한정되었다는 한계를그리고 서울과 대구를 중심으로 사단의 흐름을 연대기 순으로 정리한 후자는 정확한 출처와 인용 표시 없이 기술되었다는 점에서 고증의 한계를 보여 주었다

  이런 점에서 『한국현대미술사(사진)』은 시대적인 한계를 노정하고 있지만 필자들의 역사적인 관점과 문화사적인 맥락에 기초한 최초의 학술적인 사진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그리고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사진을 현대미술의 한 장르로 수용하고분야사로서 사진사를 기술케 했다는 점에서 이 책이 가지는 의의는 크다 하겠다즉 이는 1964년 《제13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사진 부문이 처음 설치된 것과 마찬가지로 사진이 예술제도 안에 편입되었음을그리고 국가에 의해 사진이 예술로 인정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다이처럼 사진제도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 사진사의 기술’을 육명심은 최인진과 함께 완성시켰던 것이다


3. 사진의 제도교육과 사진교육자로서의 삶

 

  사진사의 기술과 함께 중요한 사진제도는 제도교육의 실시이다우리나라에서 사진교육이 시작된 것은 1910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 사진과가 개설되면서부터이다경성사진학강습원을 비롯한 수많은 사진학원들이 일제강점기 내내 개설되었으며주로 직업교육 차원에서 단기 과정으로 운영되었다해방 이후 사진교육에 있어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는데한국전쟁이 진행 중인 1953년 피난지 부산에 임시 교사(校舍)를 열었던 서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공히 미술대학 내에 사진 강좌를 개설했던 것이다서울대학교 미술학부에 신설된 사진 강좌는 임응식이이화여자대학교 동양화과에 개설된 교양강좌(예술사진)는 정해창이 강의를 맡아 사진교육의 선구가 되었다이를 계기로 환도 이후 미술대학이 설치되어 있던 대학교를 중심으로 사진 강좌가 점차 개설되기 시작했으며, 1954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미술학부에 사진전공 과정이 설치되기도 했다

  1964년에는 사진계의 바람인 대학에 사진과가 설치되기에 이르는데서라벌예술대학 초급대학과정에 우리나라 최초로 2년제의 사진과(초대 과장 김종양)가 신설되어 전문적인 사진교육이 이루어졌다이처럼 대학에 사진 강좌가 개설되었다는 것은 직업교육 차원에 머물렀던 사진교육이 제도교육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더욱이 1964년 대학에 사진과가 설치되었다는 것은 사진이 비로소 학문의 대상이 되었음을 의미하며제도교육 하에서 미술인과 마찬가지로 전문 사진인 양성이 가능해졌음을 알려준다

  1972년 육명심은 제3대 사진과장이었던 박필호의 추천으로 서라벌예술대학에 출강하게 된다그가 초빙된 이유는 이 해에 2년제 초급대학과정 외에 4년제 학부의 사진학과가 추가로 설치되면서 사진이론을 담당할 강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박필호가 그를 사진이론 강사로 추천한 배경에는 앞서 언급했듯이 육명심이 1969년부터 『포토그라피』지에 외서를 번역하여 연재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서양사진가를 대상으로 한 작가론을 직접 써서 2년간 연재했던 이력도 한몫 했다그는 대학에서 주로 ‘세계사진사’와 ‘작가론’ 등의 이론 과목을 맡았으며사진잡지에 연재했던 작가론을 기초로 강의노트를 작성했다이 강의노트는 수정 보완되어 1987년 『세계사진가론(1900~1960)(열화당)으로 출간되어 오랫동안 사진학과 교재로 사용되었다

  한편 1972년 하반기에 서라벌예술대학이 중앙문화학원으로 인수되면서 4년제 학부의 사진학과는 중앙대학교 서라벌예술대학 사진학과로 바뀌었으며이때 초대 학과장으로 임응식이 부임했다. 1973 12월에는 중앙대학교 서라벌예술대학이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으로 통합되면서기존의 사진학과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사진학과로 편입되기에 이른다. 1972년부터 1974년까지 전임대우 임명장을 받고 서라벌예술대학에 출강했던 육명심은 이 과정에서 새로 부임해 온 사진학과 과장 임응식과 갈등을 빚다가 1975년 신구전문학교 사진인쇄과(1974년 신설)로 옮기게 되었다. 1981년에는 서울예술전문대학 사진학과 창설에 참여하며 조교수로 부임하였다이처럼 그는 1999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20여 년간 사진교육자의 길을 걸으면서 한국사진교육사에 있어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한편 그는 대학 재직 중에서 중앙대학교 사진학과 내 사진서클인 둘레회와 신구전문학교 사진인쇄과 내 사진서클인 신사회를 지도하면서 그가 추구하던 영상사진 운동을 전개했으며이 과정에서 김동희황헌만 황헌만(1948년생)은 서라벌예술대학 사진과를 졸업했으며『중앙일보』 출판사진부 기자와 서울문화사 사진부장을 역임했다. 2006년 현재 사진 작업실 ‘M2’를 운영하며사진 서적 출간에 전념하고 있다.

  한편 그는 대학 재직 중에서 중앙대학교 사진학과 내 사진서클인 둘레회와 신구전문학교 사진인쇄과 내 사진서클인 신사회를 지도하면서 그가 추구하던 영상사진 운동을 전개했으며이 과정에서 김동희황헌만최재영김광수이갑철 등의 제자들을 배출했다또한 재학 중인 사진과 학생들의 개인전을 독려하기도 했는데, 1975년 권부문(73학번중앙대 사진과)의 개인전 Photo Poems》과 1977년 최광호(76학번신구대 사진과)의 개인전 《심상일기》를 개최하도록 이끌었다특히 권부문의 개인전은 중앙대 사진학과내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는데육명심은 권부문에 이어서 1977년 이영수서영호 등의 개인전을 견인했다향후에 사진사적인 평가 작업이 뒤따라야 되겠지만그는 이들의 작업을 기성세대들이 20년 가까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온 생활주의 사진을 극복한 영상사진 1세대라고 지칭하며우리나라 현대사진의 시작을 이 세대들로부터 설정하고 있다이는 1988년 해외 유학파들을 중심으로 기획된 《사진새 시좌》전을 ‘한국 현대사진의 기점’으로 보려고 하는 견해에 대한 육명심의 비판적 입장이기도 하다.

 

4. 사진 담론과 사진적 실천생활주의 사진을 넘어 영상사진으로

  육명심은 1990년대 후반부터 평생 촬영해온 사진들을 사진집으로 엮어내기 시작했는데작업의 특성상 시기별·시리즈별로 정리되어 있다.【주석4 사진집 발간 순서는 촬영시기와 시리즈의 작업 순서와는 무관하게 출간되었는데가장 늦게 정리된 사진집은 2012년에 출간한 『육명심 영상사진: 1966~1978』이었다이 책을 통해 정리된 ‘영상사진’ 연작은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특별회고전인 《한국현대미술작가시리즈-사진육명심》전의 ‘초기사진’ 섹션에 공개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그가 영상사진에 이렇게 공을 들이고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육명심은 자신의 초기사진들을 처음에는 ‘인상’ 시리즈로 부르다가 후에 ‘영상사진’으로 고쳐 불렀다그가 처음에 ‘인상’이라고 명명한 것은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되었다입문 초기에 사진단체 중심으로 활동하던 그는 1969년 《CFC 회원전》에 참가한 적이 있는데이때 출품된 회원들의 사진들이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마치 한 사람이 촬영한 것처럼 너무 흡사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이를 계기로 그는 “사진을 찍을 때 자신의 느낌이나 촬영 대상에서 받은 인상을 그대로 표현하겠다”는 의지에서 어떤 사진을 찍든 제목을 ‘인상’이라고 붙이기 시작했다고 한다.【주석5

  그런데 그가 사진작품에 ‘인상’이란 제목을 붙이기 시작한 시기를 1969년도의 일이라고 회고했지만그 제목이 공식적으로 사용된 것은 1975년도로 확인된다. 1975년 창간된 『계간 영상』에 4점의 <인상>연작을 실은 것을 시작으로그해 개최된 《제2 FAPA 국제사진문화교류전》에 출품한 사진과 『1975년도 한국사진연감』에 수록된 사진에 각각  <인상(印象)>이란 제목을 사용했다여기서 ‘인상’이라는 제목이 쓰이기 시작한 이 시기가 그가 공모전 중심의 사진 활동을 지양하고자 노력했던 시기와 겹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즉 그는 ‘인상’이라는 작품명을 통해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시각을 보여주고자 했던 작가주의적 인식을 대외적으로 선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인상’ 시리즈에 대한 이론적 개념화와 논리적 정당성을 갖춰 나가기 시작한 것은 서양사진사를 개인적으로 공부하면서부터였다서양사진사에서 특히 라즐로 모홀리 나기(Laszlo Moholy-Nagy)의 ‘뉴 비전(New vision)’과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Henri Cartier-Bresson)의 ‘결정적 순간’은 그가 사진 매체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모홀리 나기와 브레송은 서양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계열의 사진가였다모홀리 나기는 사진 매체에 대한 형식적 실험을 통해 사진만의 고유한 언어와 예술세계를 구축했으며브레송은 사진 프레임의 ‘낯설게 하기’ 효과를 통해 단순한 현실의 재현이 아닌 ‘사진적 현실’을 새롭게 구축해낸 인물이었다이들의 사진 방법론은 그에게 ‘현실의 세계’를 주목했던 당시 한국사진계의 시각적 관행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결국 그는 카메라 아이(camera-eye)에 대한 자각과 내면세계의 표출이라는 말로 모더니즘적 실천을 수행했으며그것을 ‘인상’이란 제목으로 표현했던 것이다그런데 여기서 ‘우리나라에서 모더니즘 사진의 시대가 존재했는가존재했다면그 시기는 언제인가?’라는 질문을 놓고 그의 ‘인상’ 시리즈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의 문제가 대두한다육명심 자신은 그러한 실천을 1960년대 후반에 이미 시도했으며따라서 그 실천의 선구로 자신을 자리매김하고자 한다그러나 모더니즘 사진 시대의 존재 여부는 어느 한 개인의 사진적 실험만으로는 불충분하며그 가치에 대한 당대 사진가들의 집단의식과 시대정신이 함께 했을 때 의의를 지닐 수 있다따라서 이 문제는 그를 포함한 동시대 사진가들의 지형을 폭넓게 살핀 후 모더니즘적 경향성을 띠는 사진가들의 사진들을 대상으로 그 기조에 대해 논의한 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한편 육명심의 사진집 『육명심 영상사진: 1966~1978』의 책 제목을 보면 1966년부터 1978년까지 ‘인상’ 시리즈 작업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1966년은 그가 배재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해온 시기이며, 1978년은 ‘인상사진’ 연작을 마무리하고 ‘백민사진’ 연작으로 넘어가는 시기였다그런데1978년은 그가 최인진과 함께 『한국현대미술사(사진)』을 집필·발간했던 해이기도 했다이 책에 대해서는 앞에서 사진제도와 관련해서 언급했는데여기서는 영상사진과 관련해서 기술한 부분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그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인 ‘Ⅸ. 70년대 사진의 경향’을 기술하면서 1970년대 들어 가장 두드러진 현상의 하나로 ‘영상사진’의 등장을 언급했다왕상혁노희완김복만김종수김석주김중만한정식 등기성작가들뿐만 아니라 육명심 본인을 포함하여 자신이 중앙대학교(서라벌예술대학)와 신구전문학교 사진과에서 지도한 학생들 중 영상사진에 호응하는 새로운 세대의 사진가들이 새로운 사진 물결을 형성했다는 것이다즉 그는 영상사진이라는 용어를 통해 카메라의 광학적 특성에 바탕을 둔 카메라 아이(camera eye)의 무한한 시각적 가능성을 개발하면서 사진가의 내면적 심상을 표출한 영상세대의 출현을 부각했다그리고 이 영상세대의 등장은 1950년대 이래로 한국사진계를 지배해온 ‘생활주의 사진’의 극복이었음을 주장했다사실 이러한 언급은 임응식을 의식한 말이기도 했다

1952년 창립된 한국사진작가협회를 중심으로 활동해온 임응식은 1955년경부터 ‘생활주의 사진’을 주창하기 시작했다‘생활주의 사진’은 당시 일본에서 유행했던 도몬 켄(土門券주도의 ‘리얼리즘 사진’을 한국적으로 차용하여 순화시킨 용어였다임응식의 ‘생활주의 사진’론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현실의 리얼리티에 주목하기 시작한 사진가들에게 호응을 받았으며기존의 예술사진(속칭 살롱사진)과의 결별을 요구했다나아가 사진의 본질은 사실성과 기록성에 있다며 리얼리즘 사진을 사진의 강령으로 삼았으며, 1970년대까지 주류 사진 실천이자 지도이념이 되었다또한 1963년 창설된 《동아사진콘테스트》와 1964년 신설된 《국전》 사진부의 심사위원을 임응식이 도맡으면서 그의 ‘생활주의 사진’은 1950년대~70년대까지 한국 사진계의 지배 담론이 되었다특히 1972년 중앙대학교 사진학과의 초대 학과장으로 부임하면서 그는 사진계의 문화권력이 되었던 것이다따라서 육명심은 이러한 지배담론과 문화권력의 상징인 ‘생활주의 사진’과 임응식에 대항하기 위해서‘인상’ 사진에서 촉발된 영상사진을 운동 차원으로 전개시키고자 했던 것이다이를 위해 그는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연속이다”는 사학자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의 역사관을 견지했다.    

 

와타나배 츠토무의 『写真表現と技法』, 1966.

 

  1980년 육명심이 일본의 사진가이자 사진평론가인 와타나베 츠토무() 『사진의 표현과 기법』【주석6 (사진과평론사)을 번역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그는 「옮긴이의 말」에서 이 책을 “영상언어의 문법을 펼치기 위한 사진의 표현과 기법이 합당하게 논구”된 책으로 소개했다실제로 와타나베는1960년 『아사히카메라』 9월호에 기고한 「새로운 사진표현의 경향」이라는 글에서 ‘영상’이란 용어로 신인 사진가들(토마츠 쇼메이(東松照明), 나라하라 잇코(奈良原一高), 이마이 히사에(今井寿恵), 호소에 에이코(細江英公)의 작품 경향을 분석한 적이 있다여기서 그가 사용한 ‘영상’은 “언어로는 전달 불가능한 의미 내용을 담은 심볼 기호”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고그러한 영상을 추구하는 사진가의 시도들을 “다른 표현수단으로는 불가능한 독득(獨得)한 영역을 발견하려는 노력”으로 평가했다.【주석7

   와타나베의 ‘영상’에 대한 언급들이 육명심의 영상사진론과 많이 닮아있음을 알 수 있는데그는 “대상 그 자체의 충실한 재현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카메라의 독특한 이미지를 강조하는 영상사진을 추구했다”【주석8 고 영상사진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한 적이 있다이런 점에서 그는 1960년대 일본의 영상사진을 1970년대 한국 상황에 맞게 차용했던 것으로 보인다또한 그는 일본의 영상사진이 전후(戰後일본 사진계를 지배해온 리얼리즘 사진에 대한 반발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1960년대 일본의 영상사진 세대를 더욱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물론 그가 주도했던 영상사진운동은 1950년대 리얼리즘 사진을 극복하고 1960년대 영상의 시대를 맞은 일본과 달리, 1950~60년대 생활주의 사진을 대체하고 1970년대 새로운 사진 물결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하지만 영상사진에 대한 그의 실천과 논의들은 그동안 한국전쟁 이후 한국사진의 흐름을 임응식의 ‘생활주의 사진’으로부터 1956년 창립된 ‘신선회’를 거쳐 1963년 조직된 사진동우회로 이어지는 리얼리즘 사진의 계보로서 설명해온 기존의 사진사적 평가를 제고할 수 있는 시야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나가면서

  지금까지 사진가 육명심을 텍스트 삼아 1960~70년대 한국 사진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았다특히 공모전 제도사진단체의 조직사진사 기술(記述), 사진 교육사진담론 등 사진제도와 관련된 그의 활동을 한국 사진사의 맥락 속에서 살펴봄으로써사진가 육명심에 대한 단선적인 이해를 넘어 입체적인 조망을 모색하고자 했다이러한 접근은 육명심의 사진 작업이 어떤 과정과 맥락 속에서 나타났는지그리고 그것이 한국사진사에서 어떤 위치와 의미를 지니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한다물론 육명심의 사진 작업과 이론적 모색이 던진 질문은 아직 미완의 사진사적 과제로 남아 있지만, 1960~70년대 한국사진계에서 사진 매체의 현대성을 인식한 첫 번째 세대였다는 점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사진 작업과 관련해서는 영상사진을 중심으로 살폈는데아직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한 측면도 고려되었지만 사진가로서의 그의 시각의 원형을 만날 수 있는 초기 작업이기 때문이다물론 그의 영상사진은 후속 작업인 <예술가의 초상>, <백민>, <장승>, <검은 모살뜸등과 내용상 단절되어 보인다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공()이나 노장사상에서 말하는 ‘마음의 여백’ 같은 것이 영상사진의 밑바탕에 깔려 있으며이는 거의 모든 사진에서 공통분모로 나타난다”【주석9】는 작가의 말을 통해그의 사진 전작을 관통하는 시각 의식의 기원을 영상사진에서 발견할 수 있다따라서 영상사진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 대상에 대한 작가의 인상내면세계세계관사상적·종교적 편력 등이 그의 독특한 사진 형식을 통해 어떻게 표출되었는가를 살필 수 있는 매뉴얼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러한 매뉴얼을 기초로 향후 육명심의 후속 작업들에 대한 연구가 뒤따를 필요가 있다작가의 작품만을 대상으로 하는 내재적 비평을 넘어 그것이 놓인 시대적문화사적 맥락을 고려한 연구가 요구되며이를 통해 1980~90년대 한국사진사의 지형과 사진 담론을 풍부하게 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시론에 불과한 이 글이 하나의 시작점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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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사진: 공모전 및 회원전 사진 

  육명심은 1966년 개최된 《동아국제사진살롱》에 입선하면서 사진계에 입문했다. 그가 사진을 시작한 1960년대는 주로 공모전과 소속 사진단체 회원전을 중심으로 사진 활동이 이루어졌다. 특히 1963년부터 개최되기 시작한 《동아사진콘테스트》와 1964년 사진 부문을 설치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라는 양대 공모전과 함께, 국제 공모전인 《동아국제사진살롱》이 대표적인 공모전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작가로서의 입문과 인정은 바로 이들 공모전을 통해 이루어졌다. 육명심 역시 제17회, 제23회, 제24회 국전에서 입선했으며, 《제12회 동아사진콘테스트》(1974)에서는 <노경>이라는 작품으로 특선에 올랐다.  

여기에서는 공모전에서 입상 및 입선한 작품들과 회원전에 출품한 사진 그리고 사진잡지 및 전시도록 등에 수록된 육명심의 초기 작품들을 모았다. 당시 육명심의 초기 사진 중에는 공모전 사진의 전형성에서 벗어나 ‘영상사진’으로 발전해나가게 되는 그 자신만의 시각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다수 존재한다. 



영상사진 시리즈

  육명심은 사진계에 입문한 시기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그가 스스로 ‘인상 시리즈’라고 이름붙인 작업을 이어나갔다. 육명심은 1960년대 한국 사진의 주류를 이루었던 ‘생활주의 사진’을 천편일률적이고 패권적이라고 인식했으며, 당시 소위 살롱사진(고답적인 예술사진)과 생활주의 사진으로 양분되어 있던 한국 사진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인식을 기반으로 작가는 ‘인상 시리즈’를 통해 한국 사진계가 당면한 문제점을 극복하고 자신의 길을 모색하는 시기를 보냈다. 육명심은 2012년 ‘인상 시리즈’를 사진집으로 정리하면서 자신의 이러한 철학과 고집을 강조하기 위해 ‘인상 시리즈’를 ‘영상사진’이라고 재명명했다. 

라즐로 모호이-나기(Laszlo Moholy-Nagy)의 ‘신시각(New vision)’과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Henri Cartier-Bresson)의 ‘결정적 순간’이라는 개념은 육명심의 형식적, 개념적 좌표가 되었다. 그는 이들을 통해 ‘카메라 아이(camera eye)’의 잠재성을 자각하고 카메라가 포착하는 내면의 심상과 시각적 지평을 탐구했다. 

‘영상사진’의 가장 큰 특징은 그것이 갖는 공간성에 있다. 공간은 텅 비어 있거나, 산발적으로 흩뿌려져 있어 대상은 불명확하고 위태롭게 존재한다. 그리고 그 공간 안에서 대상은 충실하게 재현되기 보다는 작가의 순간적 인상이자 내면의 심상으로서 드러난다. ‘영상사진’은 시기적으로 당시 한국사진의 한계를 극복하고, 독창적이고 파격적인 시각으로 주관적인 동시에 모더니즘적인 사진 이미지를 생산하는 한국 사진의 현대성을 보여준 실험이었다.



예술가의 초상 시리즈 

  작가 육명심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된 것은 바로 ‘예술가의 초상’ 시리즈일 것이다. 육명심은 1967년 연세대학교 영문과 교수인 시인 박두진의 시집 『하얀 날개』(향린사, 1967)를 위해 예술가의 초상을 처음으로 찍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이 작업은 육명심이 1972년 서라벌예술대학에 부임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1980년대 초까지 이어졌다. 그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문인, 화가, 조각가, 서예가 등에 이르는 많은 예술가와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들의 초상을 촬영했다.  

  육명심은 그가 만난 예술가들을 ‘예술가’라는 개념의 아우라와 사회적 인식에 가두기보다는 보통사람, 일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 사람 냄새 나는 사람, "밥 먹고 잠자고 똥 싸고"【주석1】하는 생생한 사람으로 포착하고자 했다. 그 결과 예술가들은 그들의 공간 안에서 그들의 삶과 세계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육명심은 이 사진들을 예술가들의 거실을 지나 안방 깊숙이 들어가서 건져 올린 것들이라고" 했다.【주석2】

  육명심의 ‘예술가의 초상’ 시리즈가 갖는 독창성은 바로 이러한 접근을 통해 만들어졌다. 그의 사진 속 예술가들은 보편적인 일상을 살아가는 동시에 예술가라는 직업과 정체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그들의 내면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백민 시리즈

  ‘백민’은 ‘장승’, ‘검은 모살뜸’으로 이어지는 육명심의 이른바 ‘우리 것 3부작’의 첫 번째 작업으로 1978년 무렵에 시작하여 198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아무 벼슬이 없는 백성’을 뜻하는 ‘백민(白民)’ 시리즈는 한국의 "우리네 토박이들을 전국적으로 돌아다니며 찍은 사진"【주석3】 이다.

  육명심은 ‘백민’을 일컬어 "오늘날 예로부터 이어온 우리의 고유한 얼굴들이 사라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얼굴을 찾아 이 나라 시골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주석4】 고 말한다. 다시 말해, 그는 1970년대 산업화, 근대화의 과정 속에서 사라져가고 있던 한국의 토박이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자 했다. 그가 택한 토박이는 무당, 촌로들, 농부,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 승려, 청학동의 아이들, 조상(彫像) 등 전통 사회에 기반한 대상들이다. 말 그대로 "우리 시대 마지막 토박이들"【주석5】 이다. 그들의 얼굴은 신기, 순박함, 강인한 인내와 같은 성격을 보여준다. 그리고 ‘피억압자로서의 민중’이라는, 저항 담론으로서의 정치성이 내포된 ‘민중’ 대신 옛 말인 ‘백민’이라는 제목을 사용함으로써, 현재에 남아 있는 과거의 존재로서의 토박이의 의미가 강조된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에는 정권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민족주의의 강조와 함께 이른바 ‘한국적인 것’과 전통이 발명되는 시기였다. 동시에 지식계에서는 저항 담론으로서의 전통 담론이 민중론으로 발전한다. 산업화, 도시화가 이루어지며 과거의 것들이 파괴되어 사라지는 동시에, 전사회적으로 ‘한국적인 것’, 전통이 발명되는 근대화의 계기 속에서, 그 사라져가는 전통적인 것들을 붙잡아 사진으로 남기고자 하는, 혹은 한국적인 것을 포착하려는 사진가들이 나타났다. 육명심은 그러한 사진가들 중 하나이며, ‘백민’을 비롯한 육명심의 ‘우리 것 3부작’은 그러한 흐름 속에 위치하는 작품이다. 



장승 시리즈

  한국 토박이의 얼굴을 찾는 ‘백민’의 작업은 ‘우리 것 3부작’의 두 번째 작업인 ‘장승’으로 이어진다. ‘장승’은 1982년부터 1988년까지 전국의 장승을 촬영한 사진이다. ‘장승’은 ‘백민’의 토박이를 대신하는 피사체이자, "백민이 만든 자기들의 얼굴이었다."【주석6】 장승은 민간신앙에서 사찰이나 마을 어귀에 세워져 액을 막아주는 지킴이의 역할을 해왔다. 돌이나 나무를 깎아 만들어 세우는 장승은 자연 속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풍화되어 간다. 육명심은 이러한 장승이 풍화되어 자연과 동화되고 낡으면서 ‘곰삭은’ 맛을 낸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동양화의 미감과도 연결시킨다.    

  2008년 출판된 사진집 『장승』에서는 사진과 함께 “개가 장승 무서운 줄 알면 오줌 눌까”, “먹기는 아귀같이 먹고 일은 장승같이 한다”와 같은 장승에 관한 속담들과, “꿈에 이가 빠지면 반가운 일이 생긴다”, “오래된 고목이 쓰러지면 그 마을에 흉사가 생긴다.”와 같이 민간에서 전해오는, 길흉화복에 관련된 각종 징후에 대한 속설과 금기의 말들을 사진과 함께 싣고 있다. 이 말들은 장승이 가진 민간신앙으로서의 의미와 공명한다. 그는 무속이나 민간신앙적인 것을, 근대화에 밀려 ‘미신’이라는 미명하에 사라졌지만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 속에 남아 있는 한국인의 정신세계의 한 원형으로 파악했다. 

즉 육명심의 사진 속 장승은 바로 ‘백민’, 토박이의 얼굴이면서,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의 원형을 내포한 사물이자, 한국의 땅과 자연 속에 뿌리박은 존재로서의 토속적 미감을 형상화한 대상으로 나타난다.  



검은 모살뜸 시리즈 

  ‘검은 모살뜸’은 제주도 사투리로 검은 모래사장에서 하는 찜질을 말한다. 이 ‘검은 모살뜸’은 1년 중 8월, 가장 뜨거운 여름날의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이루어진다. 육명심의 ‘우리 것 3부작’의 마지막 작업인 이 <검은 모살뜸> 연작은 제주도 해변의 검은 모래에서 찜질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찍은 것으로, 1983년, 1984년, 1994년 그리고 2008년 등 모두 네 번의 여름철에 걸쳐 작업한 것이다.  

  육명심의 사진에서, ‘검은 모살뜸’을 하는 이들은 주로 노인, 그중에서도 노년의 여성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육명심에게 이들 노년의 여성들은 인고 속에 자식들을 기르고 지켜온 한국의 어머니의 표상이기도 하다. 그들은 마치 무덤과도 같은 검은 모래더미 속에 들어가 죽은 이처럼 몸을 파묻는다. 그리고 그 뜨거운 검은 모래 속에서 고된 노동과 삶의 고단함에서 얻은 심신의 고통을 치유하고 재생 혹은 부활하는 과정을 거친다. ‘검은 모살뜸’은 이러한 삶과 죽음이 하나가 되는 상태, 그리고 그 속에 내포된 강한 생명력을 강렬하게 보여주고 있다.



라마불교 시리즈 

  ‘라마불교’ 시리즈는 라마불교를 종교적, 문화적 기반으로 하고 있는 티베트를 비롯한 라다크, 부탄 등지에서 1997년 이후 10여 년간 촬영한 작품이다. 육명심에게 이 지역들은 그가 추구해 온 ‘생명의 문화’의 가장 원형적인 모습을 발견한 곳이자, 그가 ‘꿈꾸던’ 서방정토이자 아버지의 땅이었다. 스님인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결핍의 경험, 신비적이고 정신적인 것에 대한 개인적 취향과 탐색이 그곳에서 무엇인가를 만난 듯 그는 "마치 고향에 온 듯한 기분이 든다."【주석7】 고 했다. 그가 티베트의 도시화, 서구화의 움직임에 실망하며 티베트를 더 이상 찾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처럼, 그에게 이 지역은 다분히 개인적, 심리적 사진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육명심은 스스로 여러 곳에서 밝히고 있듯이 불교사상과 노장사상 등 동양의 사상에 크게 매료되었고, 그것에 심취해 있었다. 그런 그에게 이들 지역은 가장 정신적이고, 덜 물질적이며, 가장 원형적이며 종교적인 세계로 비춰졌다. 그럼에도 라마불교 시리즈에서 우리는 특정한 종교성 혹은 종교적 상징성을 확인할 수 없다. 아마도 육명심이 보기에 이 지역의 모든 것, 인간과 동물, 풍경과 사물이, 모든 삶이 그대로 종교적이었으므로 그는 아무 것도 특별하게 포착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나라에서는 하늘이 곧 사원의 천정이다. 그리고 국토의 전역이 그대로 사원의 마룻바닥이다. 이렇듯 티베트는 마치 거대한 하나의 자연사원이라고나 할까. 그러니 일단 티베트에 입국하면 어디를 가나 우리는 사원의 경내를 돌아다니고 있는 셈이다."【주석8】




연구자 제안 아카이브 시리즈

예술가 아카이브 - 시인의 마을 - 인간문화재


  ‘예술가 아카이브’와 ‘시인의 마을’, ‘인간문화재’는 육명심의 사진 아카이브 중 연구자들이 새로 선별, 구축한 카테고리이다. 이를 위해 우선 ‘작품’의 기준을 작가가 자신의 의도를 가지고 발표한 사진으로 규정하였고, 새로 구축한 카테고리들은 대부분 작가가 작품으로 발표하지 않은 사진들 중에서 미학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기록적 가치가 높다고 판단한 사진들로 구성하였다. 

연구팀은 육명심의 전작을 전수 조사하는 과정에서 오래된 필름 더미와 잡지, 작가의 소장용 프린트 등에서 발견한 이 사진들이 육명심의 작품세계를 더욱 풍부하고 의미 있게 해 줄 자료라고 판단하였다. 또한 이 사진들은 육명심의 사진작품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사진의 기록적 가치를 재고하게 할 뿐 아니라 다양한 연구의 기초 자료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이런 이유로 구축된 3 개의 아카이브 시리즈는 각각 다음과 같은 분류 기준과 과정을 거쳤다. 

먼저 육명심의 ‘예술가의 초상’ 시리즈는 방대한 양을 포함한다. 연구팀은 작품집, 전시, 잡지 등에 발표된 예술가 명단을 만들었고, 이후 필름 파일들을 전수 조사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새로운 예술가들을 추가하여 예술가들의 명단을 완성했다. 이렇게 완성된 명단에서 ‘예술가의 초상’ 시리즈에 속하는 작품을 제외하고 ‘예술가 아카이브’를 구성했다. 40여명의 예술가들 중 10여명은 ‘예술가의 초상’ 시리즈에 발표된 예술가들의 새로운 사진들이고, 나머지는 미발표된 예술가들의 사진이다. 시인들은 ‘예술가 아카이브’에 포함시키지 않았는데, 대신 ‘시인의 마을’ 시리즈로 분류했다. 

‘시인의 마을’ 시리즈는 총 170여점의 시인들의 사진으로 이루어졌다. 육명심은 1977년부터 시전문지 『현대시학』에 시인들의 사진을 연재했다. 그는 시인 개인의 사진 이외에도 전국 각지를 다니면서 지역에서 활동하는 지역 시인들을 화면에 담았다. 총 17개 지역의 시인들의 사진은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한편 기념사진의 형식을 띠고 있는데, 이 사진들에는 ‘예술가의 초상’에서 작가가 추구했던 인간으로서의 예술가의 모습이 드러나는 동시에 당시 활동한 지역의 시인들에 대한 정보가 중요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또한 『현대시학』이 현대시학 10주년을 기념하며 실은 현대시학 건물과 편집실의 광경도 흥미로운 자료로서 포함되었다. ‘시인의 마을’에는 『현대시학』에 발표된 사진 이외에 『응시』에 발표된 시인의 사진 16점과 필름에서 새로 발견된 시인들의 사진 30여점도 포함되었다. 

그리고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들을 촬영한 사진들만을 모아 ‘인간문화재’로 분류했다. 육명심은 1970년대 후반 문예진흥원의 의뢰로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들을 촬영했다. 이 촬영은 중요무형문화재의 관리 과정에서의 필요로 의뢰된 것이었다. ‘인간문화재’로 분류한 사진들의 대부분은 작가가 작품으로 간주하지 않아 발표하지 않은 채 프린트로 소장하고 있던 사진들이며, 여기에 연구자들이 작가의 필름에서 찾아낸 사진들을 일부 추가했다. 이 시리즈는 종묘제례악, 판소리, 정가, 가곡, 가야금 산조, 거문고 산조, 경기민요, 서도소리, 범패, 배뱅이굿, 처용무, 밀양백중놀이, 목조각, 나전칠기 등의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들을 포괄하고 있다. 이렇게 구축된 ‘예술가 아카이브’와 ‘시인의 마을’, ‘인간문화재’를 통해 육명심의 사진 아카이브는 미래의 시각문화유산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 1) 한국사진문화연구소, 『한국사진사 구술프로젝트: 육명심』, 한국사진문화연구소, 2011, p.123. **

** 2) 박명욱, 구원에서 구도로 이어지는 길, 『육명심』, 열화당, 국립현대미술관, 2015, p.36~37. **

** 3) 육명심, 「미친놈이 도깨비를 잡는다」, 『장승』, 에디션뿔, 2011, n.p. **

** 4) 같은 책. **

** 5) 육명심, 『육명심 이것은 사진이다』, 글씨미디어, 2012, p.132 **

** 6) 육명심, 「미친놈이 도깨비를 잡는다」, 『장승』, 에디션뿔, 2011, n.p. **

** 7) 한국사진문화연구소, 『한국사진사 구술프로젝트: 육명심』, 한국사진문화연구소, 2011, p.152. **

** 8) 육명심,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Where Heaven and Earth Meet): 육명심 사진집』, 분홍개구리, 2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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