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만린(崔滿麟, Choi Man Lin, 1935~2020)은 서양조각을 넘어서 한국 추상조각을 탐구한 한국의 대표적 조각가이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미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69년부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교수로 약 35년 간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97년부터 2년간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역임했다. 1991년 김세중조각상, 1994년, 1997년 대한민국 환경문화상, 2001년 옥조근정훈장을, 2014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주요 전시경력으로는1949년-1960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참여했고, 1965년-1966년 제4-5회 파리비엔날레, 1969년 제10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등 국제 전시회에 참가했다. 또한 1973년 신세계 화랑에서 제1회 개인전을 열었고, 2001년 서울 삼성미술관에서 제7회 개인전이자 첫 회고전을 개최했다. 2011년 모란미술관에서는 드로잉 작품만을 모아 전시회를 열었고, 2014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제15회 개인전이자 그간 해온 작업을 총정리하는 두 번째 회고전을 개최했다.
최만린의 작품세계는 1958-60년에 제작된 <이브> 시리즈에서 보여지는 인간과 생명에 대한 고찰로 시작된다. 한국조각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이후, 1960년대에 제작된 <일월日月>, <천지天地>, <아雅> 시리즈에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조형언어를 탐색하였고, 이는 한국 추상 조각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이브>시리즈와 더불어 대표 시리즈인 <태胎> 시리즈는 1975-1987년에 제작되는데, <태胎>는 생명이라는 주제가 우주의 원리나 자연의 이치와 같이 총체적이고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벗어나 훨씬 더 직접적이고 인간적인 차원으로 구체화된 결과를 조형화시킨 작업이다. 1987년 이후 <태胎>와 <맥脈>, <점點>을 통해 전개되던 생명의 근원적 형태에 대한 관심은 이 모든 의미를 내포하면서도 동시에 개념적인 차원을 초월하고자 하는 의지로 귀결되었고 이 중에는 <점點> 시리즈로 현재까지 이어지게 된다. <점> 연작은 작가의 의지를 가장 환원적인 방식으로 표현한 결과이며, 불필요한 설명을 삭제하고 부차적인 것을 버리고자 하는 작가의 집념이 집약된 작업이다. 최만린의 작품세계는 동양적 세계관에 기반하여 한국적 조형성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어떤 대상에 집착하기보다는 그것의 의미를 먼저 사색하는 가운데 우리의 조형적 시원에 이르고자 하였다. 이는 내면과 삶의 깊이로부터 자연스럽게 응축된 생명력을 형상화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최만린의 조형작업은 어떠한 형태를 만드는 차원을 넘어서 본질을 투영하고 우리의 조형적 시원을 사랑하는 차원으로 해석될 수 있다.
1935 서울 출생
1949 <얼굴>이라는 작품으로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입선
1957 국전에 <모자상> 출품하여 특선
1962 서울대학교 미술학 석사 졸업
1965 파리비엔날레 참가
1969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교수임용
1991 김세중 조각상 수상
1992 서울대학교 미술대 학장 역임
1997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역임
대한민국 환경문화상 수상
2001 옥조근정훈장 수상
《최만린 회고전》, 삼성미술관, 서울
2014 《한국현대미술작가 : 최만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은관문화훈장 수상
2020 별세
조각가 최만린(崔滿麟)의 삶과 예술
- 한국 형상의 시원을 향한 정열의 조각가 -
장준석(미술평론가, 한국미술비평연구소장)
한국의 초기 현대조각사를 회고할 때면 불가불 간과할 수 없는 것이 1950년의 6.25전쟁일 것이다. 이 전쟁은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과 충격을 줬으며 한민족을 이념적으로 나눈, 한국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서 그 아픔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한국의 초기 현대 조각은 한국전쟁 이후 피폐해진 한국인의 삶만큼이나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그 당시는 조각이라는 영역이 회화에 비해 매우 열악한 시기였다. 최만린은 이처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오로지 조각칼 하나로 한국 조각을 변모시킨 한국 현대 조각이 낳은 큰 예술가이다. 한국전쟁 이후 불모지였던 한국 현대 조각이 국제적인 수준으로 성장하는 데는 최만린과 같은 조각가의 피나는 노력과 땀과 열정이 커다란 힘이 되었다. 평생을 조각에 바친 그의 삶은 오늘의 한국 현대 조각의 발전상과 그 궤를 함께하고 있으며 오늘의 한국 현대 조각이 존재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Ⅰ. 최만린의 삶과 예술 역정
1. 예술가로서의 삶
최만린은 1935년 서울에서 아버지 최춘빈(崔春彬)과 어머니 지명순(池明淳) 사이의 2대독자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곳은 쾌적한 자연 환경과 더불어 살기 좋은 곳일 뿐만 아니라 예술가가 배출되기에 손색없는 자연 환경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중학교 재학 당시부터 탄탄한 조형력을 보이기 시작하였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꾸준한 변화 속에서 작업하고 있다. 그는 외교관을 꿈꾸었으므로 정치에 관심이 많았으며 공부를 잘하는 총명한 학생이었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부모형제를 잃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체험하는 등 전쟁의 참혹함과 사람들의 비인간적인 모습에 큰 상처를 받고 자신의 진로를 바꾸게 되었다. 평소 조각에 관심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중학교 은사님의 권유도 있었기에 전쟁의 상흔을 털어버릴 겸해서 서울대학교 미술과에 입학하여 조각을 본격적으로 공부하였다.
이후 최만린은 조각가로서 한국 조각계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성장하였다. 이는 단지 그가 많은 활동을 하여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의 조각은 한국 미술과 조각이 낙후성을 면치 못할 때 활력소가 되었고, 한국의 현대 조각과 미술의 나아갈 방향을 심사숙고하도록 하는 하나의 교본이 될 수 있었다. 초기 몇 년간의 습작을 제외하고는 한평생을 현대성과 한국성이 내재된 실험성이 공존하는 작품을 창작하면서 한국 미술계와 조각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오늘의 한국 조각이 질적인 수준에서 보아 세계적 작품들과 견주어 손색이 없는 것은 최만린과 같은, 열정과 애정을 지닌 조각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만린은 84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열정적인 창작의 자세로 창의력과 실험성이 농후한 수준 높은 작품들을 한국적인 정서와 융화시키고 있다.
2. 조각과 예술의 역정
최만린은 1954년에 서울대학교 미술학부에 입학하였으나 당시의 전후 1세대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의 후유증 때문에 조각을 공부함에 있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한국의 조각가들의 인원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1901년에 태어나 39세의 나이로 타계한 김복진을 비롯하여 문석오, 김두일, 윤승욱, 김종영, 김경승, 윤효중, 조규봉 등 대부분이 일본 동경미술학교에서 조각을 공부한 사람들이었다. 이외에도 이국전, 문신 등이 일본 무사시노나 일본미술학교에서 조각을 공부하였다. 그들이 당시 조각을 공부하고 활동을 했던 한국 조각가들의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윤승욱은 서울대에서 조각을 가르치다가 전쟁 통에 납북 당했고, 최만린은 김종영이 서울대에서 후학들을 지도할 당시에 김세중이나 최종태 등과 더불어 창설된 지 고작 5년밖에 되지 않은 순수 국내 교육기관인 서울대에서 조각을 배우게 되었다.
서울대에서 조각 공부를 할 때는 전쟁이 끝난 직후였기 때문인지 교육 환경이 그다지 좋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한국 및 세계현대미술사에 기록될만한 최만린과 같은 훌륭한 조각가가 배출된 데는 중학교 시절의 은사 박승구(朴勝龜)의 가르침이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김복진에게서 조각을 배우고 동경미술학교에서 조각을 전공한 박승구는 최만린이 다니던 경기중학교 미술반 선생이었다. 박승구는 미술시간에 흙으로 인체를 만드는 과정에서 최만린의 재능을 알아보고 조각을 해볼 것을 적극적으로 권했다. 최만린은 마치 그 재능을 말해주듯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중학생 신분으로 입선을 하였다. 그는 작업 과정에서 스승 박승구가 자신에게 했던, 조각에서 흙은 ‘흙이 아니라 살이다.’라는 말을 통해 자그마한 흙 한 점에 생명이 있다는 가르침을 가슴 속 깊이 새기게 되었다. 조각이 곧 생명의 탄생이라는 깊은 의미를 깨달은 그는 조각 앞에서 더욱 숙연해지고 정직해질 수밖에 없었으므로 자신을 속이지 않는 진지한 자세로 창작에 임했다. 이처럼 진지한 자세는 조각가로서의 그의 평생의 좌표가 되었다.
1. 1970년대 이전
최만린(崔滿麟1935~ )은 한국 현대 조각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한생을 조각과 함께 해왔다. 공식적으로 화단에 이름을 올린 것은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입선을 하면서부터이다. 이때 그는 겨우 열다섯 살의 중학생에 불과하여 국내의 가장 권위 있는 국전(國展)에서의 최연소 입상자였던 것이다. 그는 1957년 제6회 국전에서 작품 <어머니와 아들>이 특선을 차지하는 등 본격적으로 조각가의 길을 걸은 이후부터 2016년인 지금까지 무려 70여 성상 동안 오직 조각칼 하나로 한국의 조각을 이끌어왔다.
최만린이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기에 겪은 한국전쟁은 생각하기조차 싫은 충격이자 아픔이었으며 그가 한 평생 예술가로서 살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의 이런 삶에는 전쟁의 상흔과 정치적 혼탁 그리고 암울한 시대에 대한 고뇌 등이 숨겨져 있었다. 여기에 서구문물의 동점(東漸)으로 갈수록 상실되어 가는 우리의 정체성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염원이 더해지면서 조각가로서의 운명과도 같은 삶을 영위하게 되었으며 평생을 자신이 좋아하는 조각을 하며 살아왔다.
최만린은 중학생이었던 1949년도에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입선을 하며 공식적으로 화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본격적인 조각가로서의 삶은 모색기라 할 수 있는 1957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대략 10여 년 동안 인체를 주로 다루었는데 인체의 다양한 형상들을 조형화시키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이브>라는 제목으로 조형화된 작품들은 1960년 이후 더욱 함축적이며 투박한 조형성을 확보하게 되었고, 1965년 무렵부터는 인체 형태가 사라지면서 추상적인 이미지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1965년에는 <천天>, <지地>를 소재로 한 비형상적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이때부터는 이브가 지니는 인체적 형태를 벗어나 원형적·추상적인 작품을 창작하였다. 이듬해인 1966년과 1967년도에는 <천(天)>, <지(地)>에서 파생된 듯한 <현玄>과 <황黃>을 제작하였는데 수직과 수평을 기조로 한 기하학적 형태를 연상시켰다. 1968년부터는 <심心>, <상像>, <태胎>, <음陰>, <양陽>, <기氣>, <생生>, <얼굴>, <원圓>, <향香>, <정情> 등을 1970년 무렵까지 제작하였다. 이 무렵 그의 작품들에서는 인체의 형태들이 더욱 완벽하게 소멸되었고, 보다 동양적인 사유를 지닌 테마로 자신의 뿌리 및 삶의 조화의 모색에 대한 관심이 드러났다. 이러한 새로운 작품들이 출현하게 된 기간은 대략 5년 정도인 1965년부터 1970년 사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무렵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 시기라고 할 수 있으며, 작품에 시멘트, 테라코타, 청동, 석고 등 여러 재료들이 사용되었는데, 작품들의 핵심은 자신의 삶과 정신의 근원인 한국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데 있었다.
2. 1970~80년대
최만린의 작업 세계에서 제2기라고 할 수 있는 1970년 이후로 새롭게 선보이는 <일월日月>, <천지天地>를 제작하면서부터 인체의 이미지는 완전하게 소멸되어 더욱 완벽한 추상성이 흐르는 작품시리즈가 형성되었다. 우주 자연과 하늘과 땅의 근원을 기조로 도출된 일련의 작품들에는 더 구체적인 우주 생성적 개념을 지닌 화두가 등장하면서 이전보다 더욱 군더더기가 없어진 형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형상과 개념들은 1974년 이후 새로운 습작기를 거쳐 <아雅>, <태胎>가 탄생하는 데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아雅>, <태胎>를 중심으로 전개된 1974년 이후의 작품들은 일월, 천지에서 보여준 우주, 자연의 생성 원리를 바탕으로 자연과 인간의 생명성을 화두 삼아 자연의 순리 속에서 생명의 본연을 확인하는 데 의미를 두었다. 이처럼 <아雅>, <태胎>를 중심으로 전개된 생명의 본연과 순환의 근원은 1970년 말까지 지속되었으며, 1980년에 들어와 점진적으로 <아雅>는 소멸하고 <태胎>의 작품들은 더욱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아雅>가 소멸되는 시점인 1980년과 81년 사이에 제작된 <흙>과 <무無>. 그리고 <점點>의 작품들은 비록 소수의 작품들이기는 하나, 이후 1984년부터 <맥脈>과 <태胎>의 작품들이 본격적으로 전개됨과 동시에 <맥脈>과
이처럼 1980년대 중반 무렵부터 <맥脈>과 <태胎>의 작품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본격적으로 제작되면서 그의 작품들은 완숙미를 더하게 되었다. 그리고 <태胎>와 <점點>,
흥미로운 점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 사이에 제작된 일부 O시리즈 작품 가운데 1980년대의 <점點> 시리즈가 변형된 것으로 보이는, 원형의 바닥에 기둥이 솟아 있는 일련의 작품들이다. 이것은 마치 깔때기를 거꾸로 세워 놓은 듯한 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이후 제작되는 O시리즈의 유형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이처럼 90년대 O시리즈의 작품에는 <점點>뿐만 아니라 <태胎>, <맥脈> 등에서 비롯된 형태의 성향들이 있다. 1980년대 O시리즈 주요 작품 가운데 일부에 이런 유형의 작품이 있어 더욱 주목된다. 이런 부류의 작품들은 약 5년 정도 지속되다가 더 단순하면서도 부드럽고 완만한 곡선이 주류를 이루는 현재의 O의 작품 형태로 변화하게 되었다.
3. 1990년대
큰 흐름에서 볼 때 최만린의 작품은 위와 같은 양상으로 변모를 거듭하며 오늘의 작품에 이르게 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1980년대의 몇 가지 유형의 작품들 가운데는 원형의 바닥에 기둥이 솟아있는, 마치 깔때기 형태 같은 조각들이 있다. 이 작품들은 90년대 초기에 들어오면서 더욱 예리하게 솟구치는 형태로 변모하였다. 90년대 초중반에는 O시리즈 중에서 몇 작품이 하늘로 솟구쳐오르는 모습으로 제작되었고, 이 이미지들의 연장선상에서 제작된 듯한, 소수이기는 하지만 환경 조형물 형태의 <맥脈> 작품도 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이 무렵의 맥脈>은 그의 환경조각의 대표 작품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는 작품으로서 완숙미와 정제미 그리고 강렬함을 내재하고 있으며, 현재 독립기념관, 삼성동 한국종합무역센터, 엑스포 과학 공원 등 우리나라의 번영과 자존의 상징인, 내로라할만한 곳에는 <맥脈> 작품이 설치되어 있어 주목된다.
<점點>, <태胎>, <맥脈>, O, <칠곡七曲> 등 다양한 작품 형태가 전개되었던 1980년대를 넘어 90년대 중후반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확실히 O시리즈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특히 1990년대 초 중반을 O와 더불어 수놓았던 <맥脈> 그리고 <태胎>의 작품은 중후반부터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O시리즈가 형성되는데 이는 모든 우주 자연의 원형과도 같은 의미를 지녔다. 마치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우로보로스(Uroboros)처럼 말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 혹은 오만가지의 군더더기를 벗겨낸 순수 그자체로서의 완전한 결정체가 바로 O인 것이다. 작품을 통한 작가의 예술 철학적인 의도는 깊고도 심오하여 동양의 윤회설 등이 오히려 무색할 정도이다.
이 O시리즈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되는데, 첫째, 직립하여 하늘로 솟구치는 형상, 둘째, 무언가 생성·발아하는 듯한 모습에서 남근의 형태로 변이되는 형상, 셋째, 완전하게 군더더기를 떨쳐낸, 지금까지의 작품의 결정체라 할 만한 형태이다. 이 중에서 특히 세 번째로 언급한 유형에 해당하는 O시리즈 작품에는 생성과 환원이라는 근원적 조형미가 흐른다. 이 근원적 조형미는 조각가 최만린의 오랜 세월에 걸친 작가적 열정과 애정을 포함한 평생의 작업이 함축되어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하다. 그가 조각한 O의 존재는 마치 고대 중국의 신화에 나오는 반고(盤古)의 알과 같은 차원의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아직 세상이 혼돈의 상태일 때 이 혼돈 속에 검은 한 덩어리의 알이 있었고 반고(盤古)라는 인간이 그 알 속에서 일만 팔천 년 동안 잠들어 있다가 깨어나면서 세상의 근원이 되었다는 신화처럼, 최만린의 O시리즈는 마치 혼돈의 검은 알의 덩어리처럼 진리의 시원의 형상과도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4. 2000년대 이후 <환環>
최만린은 평생을 시원과 연계된 형상의 뿌리 혹은 존재와 우리의 정체성을 조형적으로 찾고자 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우리의 환경과 정신과 삶이 관련된,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비롯된 근원적인 우리의 형상의 뿌리 혹은 시원이 무엇인지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던 듯하다. 이처럼 조각가 최만린이 한평생 조각칼 하나를 들고 추구해 온 기나긴 조형의 세계는 결국 우리의 정체성이 깃든 하나의 이미지로 조금씩 드러나게 되었고, 이것은 곧 희미하게나마 감지된 우리의 시원적 형태로서의 조형성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시작과 끝을 상징하는 유일무이한 소실과 생성의 접점에서 불타오르는 것처럼 찬연한 우리 시원의 절대적 형상을 사색하며 스스로가 여기에 근접하고자 하는 꿈을 가졌고, 조각가로서 한평생 이 꿈을 만드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만든 이 조그마한 순수한 결정체와도 같은 <환環>의 모습은 그가 마음으로 본 한국 형상의 시원과 같은 것이며 자연스러움과 같다. 이것은 진리의 본연에 대한 잔영이기도 하지만 투영된 그림자의 접점과도 같은 소박함을 함축한 O의 형태로 된 <환環>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최만린의 <환環>은 발아되었고 마치 끝이 없는 알파와 오메가 같은 동그란 원형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최만린은 이 원형을 찾아 무지개를 따라가는 소년처럼 혹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황량한 사막을 홀로 걷는 상인처럼 담담하게 걷고 또 걸었다. 그래서 그가 남긴 이 <환環>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미(無味)한 형상이자 신기루와 같은 무형의 잔영이라고 생각된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말하는 예술에서의 절대적 진리의 잔영처럼 말이다.
그동안 최만린은 이처럼 진리의 실체를 투영한 여운(餘韻)의 형태라 할 수 있는 <환環>은 우리 민족의 조형적 시원을 찾고자 하는 마음에 의한 기나긴 여정이라 생각된다. 그는 이 <환環>의 형상을 확실하게 자신의 손에 넣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면서도 길거리의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부와 같은 마음으로【주석1】 우리의 정서가 담긴 <환環>의 형상성을 한평생 마음에 담아왔다. 이처럼 그는 아무나 할 수 없는 구도자와 같은 길을 담담하게 걸으며 조각가로서의 삶을 살아왔다. <환環>을 통하여 진리의 원형을 비춰보고자 하는 담담하고도 긴 여정은 마치 탑돌이를 하는 구도자의 모습과 같으며, 우리의 삶에서 비롯된 조형적 원형을 찾고자 하는 절박한 심정을 담고 있음이 분명하다. 우리 민족의 상형의 시원을 찾고자 하는 진심어린 한 조각가의 열정은 진리의 실체를 자신만의 상상력을 통하여 형상화한 <환環>이라는 존재로 탄생하게 되었으며, 이는 그가 꿈꾸어 온 진리의 투영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해맑은 햇살이 비치는 하늘이 환(環)의 본연이라면, 이 시원을 찾아 활짝 열린 맑은 하늘을 보며 하늘을 나는 꿈을 꾸는 한 소년의 무한한 상상력이 최만린의 <환環>이 아닐까 싶다. 우리의 시원이 되는 형상을 마음에 담은 채 그 꿈을 먹고 사는 한국 현대 조각의 거장이 바로 조각가 최만린인 것이다.
Ⅲ. 한국적 조형의 추구
1. 한국성과 조형적 시원
조각가 최만린이 추구해 온 진실한 예술가로서의 삶과 조형의 참모습은 한국인으로서의 자존과 조각가로서의 열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한국인의 삶과 의식, 정서 그리고 환경에서 비롯된 가장 진실한 조형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늘 자문하여 왔던 최만린은 한국인의 조형성을 밝히는 데 조각가로서의 한평생을 다해 왔다. 이처럼 그가 걸어온 조각가로서의 길은 우리 민족의 정신과 삶 그리고 역사와 환경 및 사회사적 실체로부터 비롯된 우리 형상의 시원에 근접하고자 하는 열정이었다. 청년 시절인 1950년대~1960년대에 인간의 근원적인 존재를 모색하고자 전개한 <이브>의 연작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를 스스로 깨닫게 되면서 그가 갖게 된 첫 의문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담긴 조형적 시원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와 나 그리고 민족의 뿌리에 대한 궁금증은 자신을 속이지 않는 더욱 진솔한 조형성을 필요로 하였다. 한국의 자연으로부터 비롯된 믿음과 사랑으로 뿌리를 땅 속 깊은 곳까지 내릴 수 있는 한국의 조형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된 것이다. 그 후 최만린은 줄곧 ‘우리의 시원에 대한 조형성 탐구’라는 자세를 견지하게 되었다.
이처럼 한국의 정체성과 맞물린 조형성에 관심이 많았던 최만린이 가난한 한국의 젊은 조각가로서 미국의 록펠러 재단의 장학금을 받아 공부하던 당시에 태평양을 단신으로 건너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처음 느꼈던 것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미술창작 활동과 경제력에서 비롯된 창의적 규모였다. 그는 여기서 처음으로 자신의 초라함을 느꼈다고 한다.【주석2】 연약하기만한 우리의 미술을 돌아보면서 애정과 애틋함을 마음에 품을 수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던 한국의 조형 및 한민족의 정서가 깃든 형상과 미적 시원에 관심과 애정을 지니게 되었다. 이후 그의 마음에서는 오히려 서구미술에 대한 경외심이 사라졌으며, 우리 민족의 시원이 될 만한 원형에 조금이라도 다가가고자 하는 열정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의 정체성이 담긴 조형적인 의문점을 해소하고자 그는 수많은 습작과 드로잉을 전개하게 되었고, 전통의 먹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는 1970~1980년대에 우리의 조형적 시원과 정체성에 관심을 가진 후 <천지天地>, <일월日月>, <현玄>, <황黃> 등의 작업들을 펼치게 되었다. 이 무렵 그의 작품들에서는 인체의 형태가 완전하게 소멸되고, 한국의 조형성과 정서가 담겨 있는 듯한 시원의 형상으로서의 <환環>을 펼칠 수 있는 추상적인 형상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며, 더욱 본질을 추구하는 조형성이 두드러진 작품들이 창작되었다. 특히 이 무렵 그의 작품에는 우리의 조형적 시원과 관련하여 좀 더 구체적인 개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아雅>, <점點>, <상象>, <생生>, <무無>, <원圓>, <기氣>, <정情>, <음陰>, <양陽>, <태胎>, <맥脈> 등이 등장하며 제2기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시기는 더욱 고차원적인 시각으로 조형적 정체성을 모색하는 때로서, 한편으로는 살과 뼈를 혹은 뼈와 뼈를 연계해 나가는 생명의 근원을 형상화하며 절제를 통해 한국미의 본질과 한국 조각의 원형을 본격적으로 모색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그가 우리의 조형의 시원에 많은 관심을 지니게 된 것은 자신의 마음의 고향이기도 한 한국의 조형미의 뿌리를 모색하고자 하는 열정과 의지 때문이었다.
2. 드로잉과 한국조형
최만린은 근원적인 한국의 조형에 더 다가서고자 수많은 드로잉을 해왔으며, 근거가 될 수 있는 상형의 시원들을 전개시키는 과정에서 한지에 먹 등을 사용하기도 하는 등 압축된 우리 조형의 근원을 탐구하였다. 그는 작업 노트에서 자신의 수많은 드로잉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나의 명시가 탄생하기까지는 수많은 단상의 메모들과 습작이 있어야 하듯이 조형성을 대하는 나의 생각과 그 마음들이 드로잉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 나에게 있어 드로잉은 나의 50년사의 살아있는 상념의 흔적이자 또 다른 조각이다.”【주석3】
최만린의 드로잉이 자신의 조각과 균등하면서도 상호보완적인 작용을 해옴에 따라 <아雅>, <점點>, <무無>, <원圓>, <정情>, <태胎>와 <맥脈> 등의 조각 작품들이 연거푸 탄생되었다. 이는 한국 조형의 시원의 형상으로서의 <환環>의 효과를 상승시켰으며 한국적 조형미의 시원을 투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이런 면은 필자가 보기에 최만린만의 독특한 조형성과 지적 감각에서 기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더 나아가 이는 어디까지나 우리의 조형을 제대로 인지하기 위한 그만의 독특한 예술적·조형적 관점으로서 최만린의 예술세계에서 중요한 부분이라 여겨진다.
그동안 최만린은 이처럼 예술로 극복하기 쉽지 않은, 현대 문명이 빚은 서구 미술의 일련의 현상에 대해 사색하면서, 평소 생각해오던 우리의 정체성을 토대로 한 예술을 독특한 관점에서 인지하고 우리의 조형성을 찾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표현하고자 하는 작품들과 겸허한 마음으로 마주하여 그것들을 하나의 귀한 생명 다루듯 하며, 우리의 시원이 될 만한 형상을 찾아 우리 조형의 참 모습에 한 발 더 다가서고자 노력하였다. 그의 이러한 모습은 한국인의 정서와 부합되는 것으로서 뛰어난 창의력과 깊은 사색에서 기인한 것이다. 또한 그의 조각과 드로잉은은 한국 미술의 정신과 한국의 정서적 토양에서 비롯된 것일 뿐만 아니라, 이 토양에서 드러난 우리의 형상을 조형적으로 일원화시키는 작업이다.
3. 한국성의 추구와 미론
최만린은 한평생 이브시리즈로부터 <천지天地>, <일월日月>, <아雅>, <태胎>, <점點>, <맥脈> 등 다양한 형태의 조각들을 전개시키면서 그 이미지와 관련된 여러 관점들을 결국 <환環>이라는 실체 속에 집약시키는 형식을 통하여 O의 형태의 기호적 상징체계를 이루었다. 그 동안 드로잉 혹은 모필을 사용하여 습작을 했고, 마치 붓을 거머쥐듯 용접봉을 사용하여 한국화의 준법을 가하는 것처럼 3차원의 공간 속에 철을 녹이기도 했으며, 새로운 점, 선, 면을 창출하기도 하였다. 3차원의 공간에 마치 자성(自成)하듯 형성된 이 <환環>은 다른 어떠한 작품보다도 신비롭고 찬연하다. 마치 먹을 찍어 형태를 이룬 수묵의 신비함처럼 <환環>은 음영이 투영된 듯한 현묘(玄妙)함으로 가득하다. 동양의 신비로움 및 한국의 자연의 고요함에 의한 부드러움처럼 <환環>에는 신비로움과 빛 그리고 형상과 무형상이 공존하는 공(空)의 형상성이 있다.
그래서 그의 <환環>의 작품을 감상하려면 시각적 감각은 말할 것도 없고 촉각적인 감각이나 심지어는 후각적인 감각까지도 동원해야만 한다는 것이 신비롭다. 보는 이는 진리의 실체, 다시 말해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투영한 듯한 환상의, 부드러운 곡면이나 빛색의 감흥 등을 몸에 흡수하며 실감할 수 있다. 이 작품들은 한국의 자연과 환경에서 보고 느낄 수 있는 부드럽고 찬연하며 맑고 투명한 빛을 한 점 한 점 붙이듯이 한 조형적 생명이다.
이와 같은 그의 조형적 행위는 어떤 사물이나 대상이 이해되고 해석되며 새롭게 창조되는 것으로서, 관조(觀照)와 상징(象徵)으로 이루어진 조형과 내면에서 표출되는 감성이라는 이중 구조의 현상에서 즉자적(卽自的)으로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최만린의 조각은 물질이나 대상의 근원적인 형(形)과 태(態)에서 그 본성을 해체하면서까지 현묘(玄妙)함에 이르고자 하였다. 이것은 물질이 지니고 있는 원래의 성질이나 가치의 변화를 의미하는데, 물질 자체의 변화일 수도 있고 시각의 변화나 인식의 변화일수도 있지만, 그가 다루고자 한 것은 현묘(玄妙)로 이루어진 광(曠), 충(沖), 공(空)과 허(虛)를 의미하는 무극(無極)의 환(環)이라 여겨진다.
무극(無極)의 환(環)은 대원일(大圓一) 같은 상징성을 지닌다. 이는 삼라만상을 모두 흡수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비어있는 공간으로서 무(無)의 본체이자 자연의 근원인 태점(太點)과도 같은 것이다. 이 태점(太點)은 곧 형(形)의 시원이자 무형(無形)의 시원으로서 최만린이 궁구(窮究)하고자 하는 환(環)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이처럼 환의 실체적 변화의 극점은 마치 돈오(頓悟)와 점수(漸修)가 만나는 접전지역처럼 지극히 환원적(全卽一)·확산적(一卽全)이다. 최만린은 삼라만상의 집결지이자 발산지인 구심체가 환(環), 다시 말해 대원일(大圓一) 같은 의미를 가진 O의 형태에서 실현 가능함을 직감하였던 것 같다.
그는 이따금 모필(毛筆)을 사용하여 종이에 점(點,環) 하나를 찍어 O나 비어있음을 표현하였다. 한편으로는 먹물이 아닌 철을 재료로 하였는데, 철을 녹여 가며 3차원의 공간에서 환(環)의 변형과도 같은 차원의 선과 형을 추구해나갔으며, 이후 여러 작품들을 이와 같은 개념에서 창작해 나갔다. 이는 마치 점이나 붓의 흔적 같은 이미지가 3차원의 공간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것과 같은 차원이다. 따라서 그의 조형 작업은 형태를 만드는 차원을 넘어선, 본질을 갈구하며 표현하는 차원으로 해석될 수 있다. 조형을 통하여 우리의 정서를 가감 없이 발산시킬 수 있으며, 이 발산은 한국인의 정서에 부합한 것이다.
Ⅳ. 나오는 말
<환環>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한국인의 참 조형이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사색과 창작을 통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우리의 참 조형인 <환環>이 드디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그러기에 조각가 최만린이 한평생을 걸고 창작해 온 <환環>에는 한국인의 정서와 기질이 없을 수가 없다. 이는 그가 독백처럼 내뱉은, “내가 미켈란젤로의 가슴에 대고 미의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으로서 내가 내 가슴에 대고 미의 소리를 들어야 해요.”【주석4】 라는 말에서 알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구수한 큰 맛’처럼 자연스러우며 자유로울 수밖에 없다. 마치 <환環>조형의 시작을 알리는 점 같은, 태초의 흔적에서 비롯된 조형적 힘은 순수 그 자체에 있다. 이 순수함은 비어있는 것과 같으며, 최만린 자신에게서 비롯된 진리에로의 참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심장의 울림처럼 드러나는 자연의 흔적들은 직관으로 꾸밈없이 표현된 것이기에 다분히 근원적이라 할 수 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 생성의 첫 단계이자 소멸의 마지막 단계 같은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 최만린의 작품들인 것이다. 그는 어떤 대상이나 사물에 집착하기보다는 그것의 의미를 먼저 사색하는 가운데 우리의 조형적 시원에 이르고자 하였다. 이는 마치 수행자가 본질을 깨우치기 위해 고행하듯 내면과 삶의 깊이로부터 나와 자연스럽게 함축된 생명력을 형상화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최만린은 자신의 삶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자연이나 사물에 겸허하게 마음을 열어 그들을 인정하고 서로 소통하며 하나가 되어 함께 호흡하고자 하였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아끼고 주목하면서 점 하나를 찍듯이 3차원의 공간에 똑 같은 시원의 형상을 지향해 나갔으며, 이후 여러 작품들을 이와 같은 선상에서 진행하였다. 따라서 그의 조형 작업은 어떠한 형태를 만드는 차원을 넘어선, 본질을 투영하고 우리의 조형적 시원을 사랑하는 차원으로 해석될 수 있다
A. 인간과 생명에 대한 고찰 (1958-1965)
<이브시리즈는>: 전쟁의 폐허의 초토 속에서 나온 것으로 해체된 우리의 상태를 쌓아 올린 것이자 작가 자신의 기념비적 작업이며, 생의 파편에서 주워 올린 생존의 모뉴먼트와도 같은 작업이다.
<이브>는 거친 표면과 팔다리가 잘린 듯한 형상을 하고 있으며, 이러한 고통스런 형상은 한국전쟁 후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인간 본질에 대한 고뇌에 함께 정신적 황폐함도 표현한 것이다. 또한, 작가의 작품은 실존주의의 맥으로 주로 해석된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전쟁이라는 경험 속에서 발견한 생명의 의지, 폐허를 딛고 일어서는 힘에 대한 작가의 의지로도 보인다. 그의 데뷔작이라 할 수 있는 <이브>가 인체를 추상화한다는 점은 이후 전개되는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그의 작업은 지속적으로 자연과 생명, 생명성이라는 부분에 관심을 두고, 예술의 본질적인 부분을 진지하게 고민해 간다.
B. 조형성의 탐구와 모색(1965-1977)
한국조각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이후, 자신만의 독자적인 조형언어를 탐색하던 시기이다.
<천지현황>
작가는 <천지현황> 시리즈를 통해 한자의 서체에서 발견한 조형적 가능성의 탐색한다. 또한 이를 동양 사상과 자연관을 결합하여 그만의 근원에 모태를 둔 조형체계를 발전시킨다. <천지현황>은 테라코타, 시멘트, 석고 등 다소 거친 질감의 재료 등을 사용하여 2차원의 글자를 3차원의 조각작품으로 변환한다. 최만린이 자신의 독자적인 조형언어를 만들기 위해 서예에서 영향을 받은 것은 주목할 만한 지점이다. 서예는 기회가 의미를 포괄하며, 형태와 기호가 중첩되는 상징체계이기 때문이다. 즉, 서예는 형태이면서도 기호와 의미를 통합하고, 그 자체로 새로운 의미와 형태를 창조시킨다. 이 지점이 그의 추구하고자 하는 생명성과 결부된다.
<일월>, <천지>
1970년대 최만린의 작업은<일월>, <천지>, 와 같은 작업을 통해 동양 사상이 확장된 그만의 작업을 선보인다. <일월>, <천지>는 매끈한 표면의 청동조각으로 문자의 형성으로부터 벗어나 추상의 완성된 형태의 조각을 보여준다. <일월>은 장승의 형태에서 영향을 받았고, 이 시기에 그는 한국 생활 속에 뿌리내린 토속 사상이나 민간 신앙과 의식에 관심을 가졌다. <일월>에는 원을 암시하는 형상이 드러나고, <천지>에는 운동성의 상승기운이 보이며, 음과 양의 조화를 상징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 >
<아 >(용접작업)시리즈는 1970년대 중반 뉴욕 프랫인스티튜트에서 1년간 수학하던 시기에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탐색하면서 시작하였다. 독자적이면서도 자생적인 조각에 대한 의지 표출하였다. 철을 녹여 한 점 한 점 쌓아 올린 아 시리즈는 원형상, 위로 상승하는 수직선 등이 얼기 설기 엮여있다. 작가가 미국 유학시절 실험적으로 제작한 동판용접 작업으로서 기존의 작업과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주물작업과 같이 중간 단계를 거치는 청동 작업에 의해 제작과정이 훨씬 더 강렬하고 직접적으로 암시된다는 것이 특징이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후반에 이르는 10여 년은 작품 외관상의 변화가 두드러지는 일종의 조형성의 탐구와 모색의 기간이다. 이 시기는 작가가 자신의 근원과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있었고, 자연의 이치와 우주의 원리라는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을 조각작품으로서 표현하려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서구에서 온 조각적 전통이 아닌 한국 현실에 맞는 한국 조각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드러난다.
C. 생명의 근원에 대한 탐구(1975-1987)
<태>시리즈
<태>시리즈: 1970년대 후반부터 제작된 <태> 는 <이브> 시리즈와 함께 최만린의 대표작업 시리즈이다. <태>는 생명이라는 주제가 우주의 원리나 자연의 이치와 같이 총체적이고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벗어나 훨씬 더 직접적이고 인간적인 차원으로 구체화된 결과를 조형화 시킨 작업이다. <태> 작업은 생성과 성장, 소멸이라는 생명의 순환과 연관되어 있으며, 살아 숨쉬는 듯한 유기적인 형태는 원초적인 생명의 근원과 에너지를 상징한다. 시작과 끝이 엇갈리면서도 맞물린 <태>시리즈는 무한한 운동감을 상징하며, 생명성을 강하게 내포한다.
<태>는 보편적이고 형이상학적으로 보일지라도 작가의 주제의식이 매우 구체적으로 드러난 작업이다. 작가는 생명성이 직관적인 체험에서 기원한다고 하였으며, 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준 작업이다. 작가는 한국 문화와 예술에서 장구나 북의 소리, 무속신앙에서 보이는 굿의 형태, 무당의 춤 등에서 원초적인 움직임과 강한 에너지를 느꼈고, 이런 예측 불가능한 뒤틀림과 즉흥에서 최만린은 매우 직관적인 방식으로 강한 생명성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이는 형태가 의미를 담는 매개체가 된다는 역할을 넘어, 의미 자체를 이루는 차원에 도달하기 위한 그의 지속적인 노력의 결과이다.
<맥>시리즈
<맥>시리즈: 1980년대 일시적으로 제작되었으며, 생명 에너지의 형상화라는 점에서 <태>의 연장선상에 위치한다. <맥>은 생명을 지속시키는 에너지, 즉 기를 확장하는 강한 힘을 구현한 작업이다. <맥>은 <태>의 유기적 형태와는 달리 기하학적 형태에 더 가까우며, 생명이라는 주제의 표현이 한층 더 추상화된 작업이다. 작가는 용접 작업 이후, 흙으로 소조 작업을 해야 하는 청동 조각에서 생명에 대한 필연성을 발견했다. 흙이란 모든 생명이 잉태되고 되돌아가는 물질이자 생명의 시작과 끝을 포용하는 재료라는 부분에서였다. 흙을 만지며 그 속에서 생명의 근원적 형태를 찾아가는 작업 과정을 통해 작가는 순수하면서도 근원적인 세계에 대한 고찰을 하였다.
D. 비움을 통한 열린 세계로 (1987-2020)
<이브>에서 시작하여 <태>와 <맥>, <점>을 통해 전개되던 생명의 근원적 형태에 대한 관심은 이 모든 의미를 내포하면서도 동시에 개념적인 차원을 초월하고자 하는 의지로 귀결된다.
<점> 시리즈
<점> 시리즈: 1987년부터 1989까지 짧은 기간 동안에 제작된 작업이다. 삼차원의 공간을 채우는 조형 작업에서 점은 모든 것의 시작을 상징한다. 작가는 1960년대 후반 화선지에 붓으로 점을 찍으면서 얻었던 깨달음, 즉 점과 선, 면의 구분 없는 차원의 경험과도 같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새로운 시작을 준비한다는 의미의 <점> 시리즈는 화강석과 브론즈라는 두 가지 이질적인 재료를 합하여 사용한다. 새로운 시도로서 <점> 시리즈를 제작한 것은 작품에 변화를 주고자 하는 작가의 끊임없는 노력을 알 수 있으며, 작가의 오랜 예술 창작 활동의 귀결점이라 볼 수 있다.
시리즈
E. Drawing
1955-1957년 drawing :작가는 1956년부터 1971년사이에 구상형태의 작업(모자상, 좌상, 이름없는 수인 등)을 12점 (대부분 56-61년 사이 제작)제작한다. 이 구상형태의 조각 작업 시기와 비슷하게, 1955년 부터 최만린 초기작업의 대표작인 이브가 나오는 1958년 전까지 작가는 수많은 형태의 인물들을 다양한 관점과 기법으로 드로잉하게 된다. 1955년 3점, 1956년 23점, 1957년 82점을 남기는데 특히 1957년 드로잉에서는 인체표현을 넘어선 인간에 대한 깊은 관찰과 추상화과정들을 볼 수 있다.
1971-1973년drawing
1971년 5점, 1972년 1점, 1973년 24점의 드로잉이 기록되어 있으며 조각 시리즈 <일월>의 모티브가 되었던 한국의 토속 형태 장승에서 영향을 받은 듯한 드로잉 작업이 보인다.또한 전 시기의 문자의 영향에서 벗어나 추상성으로 이행되는 성향이 드로잉 안에서 보여진다
. 1974년 1점, 1975년 12점, 1977년 16점,1979년 2점이 제작되었으며, 이 시기에 유학시기를 겪으며 느꼈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통해 재료와 기법에서 개념의 전환을 시도하게 된다. 그의 인터뷰에 따르면 “나는 그것을 뒤집었죠. 말하자면 우리가 캔버스에 유화물감을 가지고 이렇게 그리는 것도 있지만, 화선지위에 먹물을, 먹을 갈아서 붓으로 먹을 찍어서 화선지위에 이렇게 점 하나 찍어나가는 것 하고 같은 상념에서 반기계적인 일을 시작을 했어요. 뭐냐하면 용접봉을 불이라는 그걸 불대라고 그럽니다. 토오취,그래서 불대를 잡고, 불을 지펴서, 용접봉에 대면 그게 녹아 떨어집니다. 그거를 한 점, 한 점, 공간에 붓질을 하듯이, 그걸 붙여나갔어요…” 라고 서술되듯이, 조각에서는 용접봉을 통해서, 드로잉에서는 화선지위의 먹물을 통해 그의 이 시도들은 실현되어 갔다.
1983년에는 10점의 드로잉이 1986년에는 3점이 1987년에는 1점이 제작되는데, 이 시기 작가의 예술적 관심사인 생명 에너지의 형상화가 드로잉 안에서 근원적 형태들로 구현되어 있다.
1987-1989년 Drawing
1989년에는 21점의 드로잉이 제작된다. 이 시기에 작가는 한국성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조형언어로 연구하던 중, 점과 선, 면이 하나가 되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과정에 도달하게 된다. 이 시기의 드로잉안에서도 작가의 끊임없는 연구성과 그 결과가 조형언어로 표현되게 된다.
1990년- 2020
1989년부터 2015년까지 O시리즈가 진행되는 근 25년의 기간동안은 경계를 지우고 비움을 갈망하는 작가의 노력이 드로잉안에서 한지에 먹을 주재료로 집약적으로 보여진다. 1990년에는 6점,1995년에는 13점, 1996년에는 6점, 2003년에는 5점, 2004년에는 3점, 2007년에는 2점의 드로잉이 제작되었다. 부차적인 것을 제거하고자 하는 노력과 그 결과 보이는 자연, 생명 근원에 대한 조형언어가 드로잉안에서 돋보인다.
작가 최만린의 총 작업수는 1,244점이며, 조각작품 553점, 드로잉 작업 691점이다. 조각 작품에는 환경조각 45점이 포함되어있으며, 드로잉 작업에는 종이에 작업한 3점의 유화작업도 포함되어 있다.
드로잉: 드로잉 작업은 조각작품의 전 단계인 스케치나 설계도가 아닌 각각 독립된 독자적인 작업이다. 그러기에 ‘작품 외 자료’가 아닌 ‘작업’에 포함시켰다.
제목: 작품 제목은 체계적인 방식이 적용되고 있다. 제목의 구성 방식은 다음과 같다. <시리즈 제목 – 제작 년도 – 작품제작 순서>이다.
최만린이 조각사에서 이른 시기인 1970년 <일월> 작업부터 예를 들면, <일월 70-1>(1970-입체-2)와 같이 체계적인 제목 방식이 적용되었다.
작품 시리즈로는 일월, 천지, 아. 태 점. 맥. 0 시리즈 등이 있다. 단, 초기 구상형태의 작업 및 천지현황 시리즈에는 각 작품이 개별 작품제목을 가지고 있다.
작품제작: 작품제작 단계는 주로 흙, 석고 작업을 거쳐 브론즈 캐스팅을 하는데, 최종 재료를 사용하여 첫 번째 에디션을 캐스팅한 날을 완성일로 한다. 에디션이 있는 조각작품은 총209점이며, 트로피로 제작된 작품(예: <0-03-7>(2003-입체-6))등을 포함하여 일부(예:<0-96-7>(1996-입체-10), <0-06-2>(2006-입체-2)등)을 제외하고 각2-3개의 에디션을 제작하였다. 에디션 표기는 ‘0,1,2’ 등 숫자로 되어있으며, 에디션 0번은 작가소장이다.
작품소장: 최만린의 각 작업은 미술관을 포함하여 다수의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데, 개인소장의 경우 1차 판매 이후 소장내역 추적의 어려움과 개인정보 유출 우려로 인하여 구체적인 소장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개인소장’으로 표기하였다.
작품 촬영: 최만린의 대부분의 작업 및 야외 조각 작품의 경우, 재촬영 하였다. 하지만, 작품이 소실/폐기되어 촬영이 불가한 경우, 최만린이 직접 정리한 개인 기록카드의 사진 이미지로 대체하였고, 공공미술의 경우 원장소를 직접 방문하여 현재의 모습을 추가적으로 기록하였다. (예: 야외조각 태(胎) 86-7 의 경우, 한국전력공사본사의 이전으로 작품이 행방불명 되었다. 이경우, 원래의 이미지와 현재의 상태를 동시에 기록하였다.)
작품 외 자료: 작품 외 자료에는 작품과는 별도인 공공기관, 재단, 협회 등의 의뢰 받아 제작된 조각 19점을 포함하였다. 또한 영상과 연보에 관련된 가족 사진 등이 포함되어있다. ‘작품 외 자료’의 경우 생산시기 식별이 불가능한 자료가 많아, 일련번호 대신 숫자만을 사용하고 있으며, 연관자료 표시에 ‘작품 외 자료 70’ 등으로 표기하였다.
최만린의 모든 작품은 현재로서 디지털화 가능한 최상의 데이터 자료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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