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평안남도 맹산군에서 출생한 김창열은 물방울을 소재로 한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왔다.
1948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하여 수학하였으며 6.25전쟁 후인 1957년에는 당시 젊은 작가들과 함께 <현대미술가협회>를 창립했으며 이후 박서보와 함께 한국 앵포르멜 미술 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61년 제2회 파리 비엔날레 출품을 계기로 활동의 무대를 해외로 돌린 김창열은 1960년대 중반 뉴욕으로 이주해 뉴욕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서 판화를 전공한다.
뉴욕 시절 김창열은 생계를 위한 일거리 중 하나로 스프레이 기법으로 넥타이에 문양을 그리는 일을 하였다.
김창열은 당시 작업에 착안하여 스프레이 기법을 활용한 응고된 물방울의 형태를 만들어낸다.
1969년 김창열은 백남준의 도움으로 파리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가하는데, 이를 계기로 그는 파리로 생활의 터전을 옮겨 본격적인 물방울 세계를 구상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972년 파리 살롱 드 메에 물방울을 소재로 한 “밤의 행사(Event of Night)”를 출품하였고, 이듬해인 1973년에는 놀 인터내셔널에서 첫 파리 개인전을 개최하여, 물방울을 소재로 한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국내외에 소개하였다.
비평가 알랭 보스케(Alain Bosquet)는 김창열의 물방울을 빗대어 ‘물방울들이 일종의 자기 변형으로 끌고 가고 그 물방울들이 보기 드문 최면의 힘을 갖고 있다’고 평하였다.
이후 김창열은 국내뿐 아니라 미국, 이탈리아, 스위스 독일, 일본 등 세계 각지에서 2016년 기준으로 80회 이상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대표적인 전시로는 1993년 국립현대미술관, 2004년 프랑스 국립 쥬드폼 미술관, 2005년 중국 국가박물관, 2009년 부산시립미술관 등이 있다.
그는 물방울의 다각적인 조형적 구현을 위해 캔버스뿐 아니라 신문지, 한지, 나무, 모래 그리고 오브제로서의 물방울 등 다양한 재료 실험을 시도하였다.
특히 1980년대 말부터 캔버스에 한자를 끌어들임으로써 물방울 작업에 동양적 향수와 정체성을 공고히 드러내는 ‘회귀’와 ‘제사’ 시리즈를 발전시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
1929 |
평안남도 맹산 출생 |
|
1948-1950 |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수학 |
|
1956-1961 |
<현대미술가협회> 활동 |
|
1961 |
제 2회 파리비엔날레, 파리 |
|
1969 |
아방가르드 페스티벌, 뉴욕 |
|
1966–1968 |
뉴욕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서 판화 전공 |
|
1972-1976 |
살롱 드 메, 파리 |
|
1973 |
놀 인터내셔널, 파리 |
|
제 12회 상파울로비엔날레, 상파울로 |
|
|
1976 |
개인전, 갤러리 현대, 서울 |
|
1993 |
개인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
|
1996 |
프랑스 문화훈장 수상 |
|
2004 |
개인전, 쥬드폼 미술관, 파리 |
|
2005 |
개인전, 중국국가박물관, 베이징 |
|
2009 |
개인전, 부산시립미술관, 부산 |
|
2012 |
개인전, 국립대만미술관, 타이중 |
|
은관문화훈장 수상 |
|
|
2017 |
대한민국예술원상 수상 |
1955~2016년 일간지 기사를 통해 본 김창열 작품의 해석과 수용
김 정 화
들어가며
이 글은 김창열 디지털자료집구축사업의 한 부분으로 수집한 1955년~2016년간의 일간지에 게재된 김창열 관련 기사를 분석하여 60여년간 부단하게 지속된 김창열의 작품세계가 대중에게 어떻게 해석, 전달, 수용되었는가를 밝혀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김창열 디지털 자료집 구축을 위한 연구는 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 진행하는 원로작가 디지털 아카이빙 사업의 일환으로 2017년에 진행되었다. 작가의 생애사는 물론, 작품과 전시이력, 전시에서 발생되는 각종 자료, 작가에 대한 참고 문헌, 영상자료 등 모든 자료를 수집하여 디지털 정보화하여 일정한 포맷으로 정리, e북 출판을 비롯한 다양한 형식의 디지털 출판과 무한 활용이 가능한 정보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작가의 디지털아카이빙 사업이다.
김창열은 1929년생으로 2017년 현재 구순을 바라보며 아직도 활동하고 있는 작가이다. 그의 60년이 넘는 화업의 역사를 모두 찾아서 정리를 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가능한 모든 전시도록을 수집하여 작품과 내용들을 연도별로 정리하여 큰 틀을 만든 후, 여기에서부터 출발하여 점차 연구의 깊이를 더해 가는 방법을 채택하였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자료를 수집, 정리하였다.
|
작품 |
총합 1,149점 |
|
|
1950~1960년대 |
45점 |
|
|
1970년대 |
200점 |
|
|
1980년대 |
252점 |
|
|
1990년대 |
377점 |
|
|
2000년대 |
227점 |
|
|
2010년대 |
48점 |
|
|
전시회기록 |
개인전 96회 |
그룹전 176회 |
|
전시관련 자료 |
전시도록 83점 |
|
|
기타자료 414점 (브로슈어, 리플릿, 사진, 초대장, 사진 등) |
||
|
문헌자료 |
16점(전시도록 제외), 기사(신문, 잡지) 2,492점 |
|
|
작가일생 관련 자료 |
75점(사진, 서한 등) |
|
이 자료들을 연대별로 정리하여, 각 사항들 사이에 관련이 있는 연관관계를 밝혀내는 작업을 하였다. 즉, 몇 년도 어느 전시에 출품된 작품이 다른 전시에도 나온 적이 있다면 이 자료집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해당 전시의 도록과 그 당시에 촬영된 작가의 사진을 찾아보는 것이 계속 연이어서 가능하기 위해 관련성이 있는 정보를 연결시키도록 하는 방식이다.
물론 이번 연구는 김창열의 전작도록을 만드는 것이 목표가 아니므로 작가가 일생동안 생산한 모든 작품을 담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대표적인 작품과 전시 등, 그의 활동을 소상하게 담아냄으로써 미래의 연구자들이 이를 바탕으로 더욱 심화되고 확장된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 글은, 모두에 밝힌 것처럼 이렇게 수집, 정리된 자료 중에서 특히 일간지의 신문기사에 중심을 두고, 김창열과 그의 작업이 60년간 어떻게 해석되고 전달되었으며, 일반 대중에게 어떻게 수용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미술전문인이 아닌 일반 대중은 대부분 일간지를 통해 미술계의 소식을 접하게 된다는 점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일간지에 게재되는 미술기사는 대부분의 경우 미술전문가가 쓰는 것이 아니라 각 신문사의 미술담당 기자가 작성한다. 미술기자들은 또한 미술을 전공한 전문가나 평론가가 아닌 경우가 허다하다. 더구나 담당 분야가 자주 변경되는 직업의 특성상 미술계를 깊게 파악할 시간이 없이 기사를 써내야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일간지에 게재되는 미술기사들은 대부분 화랑이 제공하는 보도자료에 의존하여 기사를 작성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런 사실들 때문에 일간지 미술기사의 전문성이나 신뢰성을 문제 삼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일간지들은 한 작가와 그의 작품에 대해 장장 60여 년간 보도하고 있다. 그 시절동안 기사들은 김창열과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갖고 작성되었으며, 이 관점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떤 변화를 보이고 있는가를 분석해 내는 것은 바로 대중들에게 작가의 작품세계를 어떻게 해석되어 전달되고 있었으며, 대중들은 이 작가의 작품을 어떻게 수용하고 있었는가를 분석해낼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일간지 기사 수집과정
김창열 디지털자료집 구축팀이 활자매체에서 수집한 관련기사의 통계는 다음과 같다.
김창열 관련 언론매체별 기사 통계 (*2017년 연구팀 조사현황)
|
일간신문 |
국내 2414 |
|
일반 잡지류 |
국내 27 |
|
미술전문 출판물 |
국내 33(미술잡지) |
1950년대 부터의 기사를 찾기 위해 가장 먼저 신문사에서 제공하는 기사 아카이브의 검색작업으로 시작하였다. 김창열 작가의 이름 표기법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김창열, 김창렬, 한자로 金昌烈을 반복해서 진행해야했다. 이는 외국 문헌을 검색할 때도 마찬가지여서 김창열 작가가 본인의 이름을 영자로 쓰는 방식을 따라 Tschang-yeul Kim, Tschang Yeul Kim, Tschangyeul Kim을 반복해서 확인 작업을 해야했다. 우선 과거기사 아카이브 서비스를 하고 있는 조선, 동아일보의 아카이브 검색을 하였고, 여기서 찾은 기사는 pdf 파일로 확보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는 www.kinds.or.kr 이라는 온라인 기사서비스를 사용하여 경향, 국민, 내일, 문화, 서울, 세계, 한겨레, 한국일보를 대상으로 작가이름으로 검색하는 작업을 반복함으로써 기사를 보완하였다. 이 서비스에서는 1990년 이후의 기사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이어서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기사 검색으로 그 이전에 경향, 매일경제, 한겨레에 게재된 관련기사를 찾아냈다. 그러나 이 경우 화면상으로 텍스트를 읽을 수는 있으나 원본 데이터를 제공하지 않는 포털 서비스의 한계로 텍스트 화면을 캡쳐하여 jpg 파일로 관련기사를 확보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이 기사들은 해상도가 낮아서 현재 자료상으로는 읽기가 불편한 것이 한계이나, 미래에 이 기사에 관심이 있는 연구자는 네이버 서비스로 돌아가 원문읽기를 할 수 있다는 단서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성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일단 한 단계의 큰 데이터를 모은 후, 중앙도서관에서 마이크로 필름을 일일이 검색하며 옛 잡지 등을 확인, 작가와 관련된 문헌 자료들을 조사하였다. 이 자료들은 도서관에서 인쇄 서비스를 받은 후, 이를 스캔해서 pdf 파일로 보관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과 더불어 우리 연구팀에게 크게 도움이 되었던 자료는 작가의 작업실 구석에 박혀 있던 것을 작가의 가족이 찾아서 연구팀에 제공해준 스크랩북이다. 작가 가족이 그의 젊은 시절에 신문에 나온 기사들을 꼼꼼히 오려서 스크랩에 붙여 놓았던 것인데, 자료의 실물을 본다는 즐거움과 함께 앞의 조사과정에서 온라인 데이터로 찾아냈던 기사들과 일치한 경우, 신문원본을 통해 해상도가 훨씬 좋은 스캔 데이터로 교체할 수 있었고, 앞의 과정에서도 찾아지지 않았던 많은 자료들을 보완할 수 있었다. 다만 몇몇 스크랩된 신문기사들은 전체 신문 면에서 기사만을 잘라내어 보관했던 이유로 인해 기사가 어느 신문의 몇 월 몇 일자인지 정확히 확인할 수가 없는 어려움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 외에 예술 전문 잡지 들은 아르코 예술자료관에서의 조사를 통해 찾을 수 있었다. 다만, 월간미술과 같은 미술잡지들은 자료실에서 목차나 인덱스 서비스를 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발행된 잡지를 일일이 찾아보는 수고를 했어야만 했다.
이런 방식으로 보완을 해가며 수집한 기사들은 pdf 파일로 보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며, 앞서 말한 것과 같이 화면 캡쳐를 통해서만 수집이 가능한 경우는 부득이하게 jpg 파일로 수집이 되었다. 최종적으로 모든 기사는 연도별로 일자순에 따른 일련번호를 부여하여 엑셀파일로 총합하였다.
2. 일간지 기사 총람
김창열이라는 이름을 찾을 수 있었던 최초의 기사는 1955년 국전 입상자 명단을 발표한 기사이다. 서양화부분 입선자를 빼곡하게 게재한 이름들 사이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후 연구가 진행된 2017년에 이르기까지 그가 미국과 프랑스에 체류하던 1967, 1968, 1970년만을 제외하고는 매년 그의 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
연도 |
기사수 |
연도 |
기사수 |
연도 |
기사수 |
연도 |
기사수 |
|
1955 |
1 |
1956 |
1 |
1957 |
2 |
1958 |
8 |
|
1959 |
1 |
1960 |
2 |
1961 |
7 |
1962 |
5 |
|
1963 |
10 |
1964 |
3 |
1965 |
4 |
1966 |
1 |
|
1967 |
0 |
1968 |
0 |
1969 |
1 |
1970 |
0 |
|
1971 |
4 |
1972 |
2 |
1973 |
5 |
1974 |
2 |
|
1975 |
5 |
1976 |
29 |
1977 |
7 |
1978 |
5 |
|
1979 |
16 |
1980 |
4 |
1981 |
6 |
1982 |
5 |
|
1983 |
16 |
1984 |
8 |
1985 |
1 |
1986 |
10 |
|
1987 |
16 |
1988 |
11 |
1989 |
7 |
1990 |
19 |
|
1991 |
19 |
1992 |
29 |
1993 |
60 |
1994 |
32 |
|
1995 |
68 |
1996 |
69 |
1997 |
63 |
1998 |
64 |
|
1999 |
52 |
2000 |
72 |
2001 |
47 |
2002 |
116 |
|
2003 |
87 |
2004 |
91 |
2005 |
92 |
2006 |
114 |
|
2007 |
115 |
2008 |
133 |
2009 |
76 |
2010 |
130 |
|
2011 |
107 |
2012 |
100 |
2013 |
125 |
2014 |
128 |
|
2015 |
81 |
2016 |
105 |
2017 |
15 |
|
|
총 기사수 2414 건 (연구종료 시점인 2017년 8월에 기사수집을 중단했음)
신문기사를 전수 분석하려면 이 기사들을 모두 읽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이 자명한 사실을 일부러 문장으로 쓰는 이유는 2400개가 넘는 기사를 모두 읽는 과정과 소요되는 시간이, 기사를 수집하는 것과 더불어 이 연구의 가장 어려운 점이었다는 밝혀두고자 함이다. 추후에 각 문헌별로 키워드 태그를 첨가하여 개념별 검색이 가능하도록 한다든지, 찾아갈 수 있는 기능을 보완한다면 디지털 자료를 활용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김창열 관련 신문기사는 내용에 따라 크게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 작가 자신의 기고
○ 작가 작품 및 개인전에 대한 소개/비평 (개인전 관련 인터뷰포함)
○ 그룹전 관련 기사(국제전, 아트페어, 비엔날레 포함)
○ 작가의 전반적인 삶에 대한 기사(인터뷰포함)
○ 미술계 동향에 관한 기사에 포함(미술동향 인터뷰 포함)
○ 다른 작가의 기사에 연관관계로 등장
○ 미술작품 가격에 관한 기사(화랑의 판매, 경매 등)
연구진이 수집한 1950년대 초기의 신문 기사들은 옛 신문을 화면에서 캡처하여 사진으로 담아온 것이거나, 혹은 사진 데이터베이스를 확보한 것이다. 이러한 자료는 대부분 해상도가 너무 낮아서 읽어내는데 큰 어려움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0~60년대의 신문을 읽으며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시인으로서 김창열의 면모를 만난 것이었다. 물론 청년 김창열이 현대미술가협회 창립에 참석한 회원으로서 미술계의 아방가르드를 대표하여 혁신을 주창하는 글도 기고하고 미술의 나아갈 바에 대한 대표 논객으로 대담에도 참석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찾아볼 수 있었다. 1963년에 게재된 10건의 기사에서는 그의 첫 개인전의 소식과 함께 그에 대한 평을 찾아볼 수 있었고, 이후에도 1976년 29건, 1979년 16건, 1983년 16건 등 두드러지게 많은 해는 모두 한국에서의 개인전을 중심으로 기사가 작성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이 열린 1993년에 조사된 60건의 기사는 국립미술관에서 열리는 대형 개인전을 언론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으나 조사결과 그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지속적으로 많은 기사에서 김창열이 언급되거나 다루어진 것은 일간지에 미술지면이 더 많아졌다는 사실에 기인할 수도 있겠으나 아트 페어, 비엔날레 등 전시가 다양화된 점도 이유로 들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미술품 전문 경매회사가 생기고, 미술시장이 활성화되면서 미술품 가격에 대한 관심이 일간지 기사로 반영되었다는 점이 기사숫자가 갑자기 늘어난 이유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미술계의 어떤 전시나 행사이든 참가 작가를 열거할 때 ‘물방울 작가 김창열’, 혹은 ‘물방울로 유명한 김창열’, ‘물방울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김창열’이라는 표현으로 김창열은 거의 매번 거론되었다. 몇몇 기사에서 얘기하듯 ‘물방울 작가’라는 ‘고유명사’가 탄생하여 자리잡게 된 것이다.
김창열 관련 신문기사의 수는 2002년에 가장 큰 폭으로 증가하여 이후 계속하여 일 년에 100건 이상을 찾게 된다. 2002년에 갤러리 현대의 개인전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파리의 국립 죄드폼 갤러리에서 한국인으로는 이우환 이후 두 번째로 초대되는 2004년 전시가 결정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당시의 개인전과 어우러져 보도가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막상 2004년 죄드폼 전시가 개막되고 나서는 이에 대한 보도나 논평이 2건 정도 밖에 없었다는 점 또한 흥미로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3년에 파리에서 물방울 그림을 처음으로 발표하고, 1976년에 서울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 이후 2016년 개인전에 이르기까지 김창열에 대한 신문기사는 2~3년간의 간격으로 지속적으로 개최된 그의 개인전과 연관되어 등장하고 있다. 물방울 그림이 무엇보다 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에 대한 환호와 같은 반가움에서 시작한 기사들은 “왜 물방울을 그릴까, 의미는 무엇일까, 어떻게 그릴까”라는 관점에서 시작해서 지속적으로 “왜 계속 물방울만을 그릴까. 몇 십년간 계속 그리는 물방울은 어떤 의미인가, 물방울에 어떤 변화가 있는가” 라는 질문으로 그의 그림과 함께 계속 되었다. 1973년 첫 기사에서 다루어진 이 질문은 2016년 개인전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며 ‘물방울 작가’의 물방울에 대한 의미를 정의, 또는 재정의하며 점차 우주의 존재와 같은 신화로 자리잡는 과정을 찾아볼 수 있었다.
3. 청년작가 시절의 김창열 : 1955년~ 1972년
김창열의 이름을 찾을 수 있는 최초의 기사는 1955년 국전 서양화부분 입선자 명단을 발표한 신문기사이다. 이어 1957년 1957년 제1회 현대미술가협회전이 열리고, 이 전시의 참여작가로 김창열을 만난 수 있다. 이 전시에 대해 5월11일 조선일보 이경성이 기고한 “美를 克服하는 힘-현대미술가협회전 평”에서 “김창열의 <해바라기>에서 청명한 金屬性을 들을 수 있었다“라고 적고 있으나, 이 작품은 현재 알려지지 않았다.
이 시기의 김창열은 몇 차례 신문에 기고를 통해 새로운 미학을 꿈꾸는 청년 작가의 고뇌를 표현하고 있다.
1958년 1월 11일자 한국일보 <봄의 畵想>칼럼에 [현대미협회원]이라고 본인의 타이틀을 달고 발표한 시 ‘密語’는 “떡메같은 걸로 나를 부숴주십시오/아니면 잠시라도 좋으니 바위처럼 우뚝 서있어주십시오/스사로 부딛혀서라도 이제는 유리처럼 얼어붙은 내 갈피를 산산히 부숴야겠습니다” 라고 절규하고 있다.
1960년 1월 24일 한국일보 <신춘화상> 칼럼에 “맹물의 변” 이라는 제목의 글에서는 남들로부터 ‘맹물’이라고 여겨지지만 본인의 속에 있는 ‘점액물질’과 같은 정의할 수 없는 저항적인 심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들 하는 모양이다. 바꾸어 말하면 예술가적 기질이 전무하다거나 또는 맹물같다는 얘기다. (중략) 강가에서 자라노라 여름이면 물싸움을 즐겼다. 얼굴에 억수같은 물살이 퍼부어지면 콱 숨이 막히고 눈알이 쓰리다. 요고비만 넘기면 이기는거다. 명예나 무엇을 바라서도 아닌 저항. 그 자체를 건 장난이다. 그때 나는 매운 독종으로 불렸었다. - 맹물이면 어쩌고 독성이면 어쩌랴. 요는 지금의 나속에 남은 이 점액질물의 성능이 보다 또렷하고 현명한 노력의 방향으로 에네르기가 유도될수 있느냐 없느냐에 문제는 있다. 여기서 내 그림 내 생애는 휘르메 되어져야 옳다.”
이 점액질 이미지는 1962년 1월 1일 대한일보에 게재된 <추상화가가 본 1962년>에 다시 등장한다. “진득진득한 점액질물이 사방에서 겹겹이 나를 둘러 감고 있습니다. 명료하게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뜻대로 몸을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혁명을 일으켜볼 생각으로 있는 힘을 다해보기도 합니다만 나의 사유 나의 계획은 번번이 무의미한 동작으로 굳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간혹 희한한 변화가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마법사의 그것과 흡사합니다. 그렇게 집요하게 달라붙어 있던 이 점액질물이 말끔히 걷히는 것 같은 일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사정기분과도 흡사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현상이 어떤 여건 하에서 생성되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만 좌우지간 부단히 몸을 움직이고 있을 때 일어나는 현상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1962년에는 스포츠 맨처럼 전신을 움직여볼 작정입니다.“ 무언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혁명과 같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심정의 상태를 점액질에 비유한 이 글은 매우 흥미롭다. 후에 김창열이 물방울을 고유한 소재로 찾아가는 초기과정에 딱딱한 구체가 점액질로 흘러내리는 양상으로 표현하는 시기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김창열은 현대미협이 주장하는 새로운 미학을 대변하는 젊은 작가로서의 활동도 찾아볼 수 있다. 1960년 <현 단계의 30대의 과제>에서 미술계를 대표하여 투명한 미술행정을 담당한 투명한 공익기구를 요구하는 글을 기고하였으며, 1961년 3월 26일 조선일보에 게재된 <전진하는 현대미술의 자세 –한국 모던 아트를 척결하는 대담>에서 40대 중견 김병기에 마주해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로서, 혹은 1961년말 <질적비약 꾀한 현대미술: 제5회 현대미전을 결산하는 좌담회>에서 김중업, 방근택, 김영주, 김병기와 함께 30대 김창열은 아방가르드 미술의 대표로서 현대미술에 대한 생각을 얘기하고 있다. 1962년 6월 29일 대한일보의 <신작로> 라는 연재 인터뷰에서는 문화정책에 대한 질문에 “다른 것은 몰라도 미술정책은 정부가 필요치 않은 ‘악세사리’를 하나 달고 다니는 정도가 아닐까요? 개인의 복지와 국가의 복지를 조정하는 것이 정책이라며 현대미술관 하나쯤 벌써 건립됐어야 하지 않나요?”라고 대답한다. 글쓴이는 김창열에 대해 “자그마한 체구는 날카로운 비판을 할 때도 얼굴을 붉히지 않는다. 한국현대미술의 일선에 서서 고집과 몰이해와 싸우고 있는 서른네 살의 젊은 화가”라고 쓰고 있다.
1957년에 처음 개최된 현대미술가협회전, 현대미협과 60년미협의 연립전, 세계문화자유전시, 악튜엘회전 등 미술단체의 전시 소개 기사 및 상파울루 미술제나 파리 비엔날레 참가소식에서 김창열의 활동을 찾아볼 수 있다.
1963년에 가진 첫 개인전에 대해 조선일보 9월 10일자에서는 “전시된 작품은 N0.1~1963을 비롯한 42점이다. 모두가 추상일색으로 장식된 화랑에는 전위작가답게 작품의 이름도 재래의 자연명이나 고유명사를 일체 쓰지 않고 로마머리문자나 또는 연도의 숫자를 기호식으로 붙이고 있어 그 특징적인 것에 주목을 끌게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고, 9월 12일자 경향신문에는 “그가 결코 문제를 던지지 못한 작품들을 가지고 오히려 아늑히 개인전을 꾸민 것이다”라고 비판하는 평문을 게재하였다. “한복판을 물결처럼 널찍이 가로지르는 그의 대부분 화면, 그리고 위아래의 변화없이 확대되는 평평한 공간. 그들은 무척 정성들인 흔적과 함께 이미 비모험으로 정착해있다. 그중의 몇점은 썩 훌륭하다. 대개 흰 빛깔로 가로지르는 띠는 착잡한 얘기를 던져준다. 그러나 화랑엔 그밖에 몇몇 다른 스타일, 가령 흑 혹은 적의 단색구성이라든지 기호같은 터치를 춤추게 하는 작품들에 이르면 아직도 작자를 싸고도는 불안전의 환각을 보는듯한 기분이다. 건강해 보이지않는 그림들이다. 그에게 그리고 그를 포함한 젊은 영토에서 제2단계의 추진을 기다리고 싶다.”
4. 물방울 작품의 등장기 : 1973년 ~ 1979년
이후 4년간의 뉴욕생활을 거쳐 파리에 정착한 김창열에 대한 소식은 그의 첫 파리 개인전과 함께 그야말로 벼락처럼 신문에서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1973년 5월29일부터 7월31일까지 파리에서 처음으로 물방울을 선보인 개인전 소식을 9월6일자 조선일보에 신용석 특파원의 기사로 도판과 전시장 앞에서의 작가 사진과 함께 크게 보도한 것이다. <특이한 주제 – 살바도르 달리-평론가 보스케도 찬사 “보기 드문 예술적 모험”> 이라는 큰 글자의 제목 하에 기자는 물방울이 그려진 화폭에 대한 긴 묘사와 함께 “65~69년 재미기간동안 고형의 구를 주제로 했던 작품들과 그 후 파리 체류까지 계속된 점액질주제의 작품들은 오늘날의 ‘물방울’ 주제의 작품들과 물리적인 연관-계속성이 나타나지만, 물방울을 주제로 한 작품들에 와서 작가 자신의 내면세계의 모습이 갑작스럽게 구체적으로 열려 보이기 시작한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이런 작품들에 대해 살바도르 달리가 찬사를 보내고 있고 평론가 알랑 보스케가 콩바지에 “물질의 재정의, 예술적 모험과 함께 하는 독창적 철학... 현대회화가 모르는 몇 방울의 물방울의 정신성이 제기하는 새로운 문제,... 단순히 이상한 경험을 넘어서는 단호한 도전으로 이어지는 겸허한 折詩, ... 보기 드문 최면력”이라고 쓰고 있다“고 전한다.
처음으로 한국에서 물방울 작품의 개인전을 개최했던 1976년은 예년에 비해 월등히 많은 29건의 기사를 찾아볼 수 있었다. 서울 전시개최 소식은 우선 4월4일의 한국일보 <파리화단의 세 한국인_타향살이 10년전>나 중앙일보의 주섭일 특파원이 쓴 <한국서 첫 선보일 물방울전>과 같이 프랑스에서 특파원들이 보내온 기사가 크게 실렸다. 귀국전 개최 후에 이에 대한 대부분의 기사들은 물방울이 무슨 의미이냐, 물방울을 그리게 된 이유가 무엇이냐 라는 질문에 대한 작가의 답을 주로 인용하고 있다
“사람들이 왜 물방울을 그리느냐고 묻습니다. 뭐라 한 마디로 대답할 수는 없죠. 많은 시간이 흐르면서 투명한 물체가 화면의 주제가 되고, 바로 그것이 물방울이었던 것은 나 자신도 그려본 뒤에야 안 것인데.” “보석과 같으면서도 그 견고성과 가치성은 정 반대이다.”, “물방울은 영롱하고 아름답기가 흡사 보석을 생각게 합니다. 그러면서도 부서지기 쉽고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점에선 너무도 대조적이죠. 이런 의미에서 단순한 물방울 이상의 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물방울을 그리게 된 까닭입니다.”, “물방울이란 외관으로 볼 때는 보석과 같으면서도 그 견고성과 가치성은 보석과는 전현 다릅니다. 그러나 그 순수하고 정결한 감동의 지향성은 무한한 것입니다.”(1976.5.14. 중앙일보), “물방울의 표현방식도 점의 표현의 연장이라 할 수 있죠. 물방울이란 궁극적으로는 투명한 물체이지만, 그 물방울이 주는 감동은 단순한 점과는 다른 질감을 줍니다.” “물방울이 보석처럼 영롱하지만 사실은 존재성이 희박하고 물체로서 가장 허약하다는 점이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털면 금방 없어지는 물방울, 그것이 주는 이미지를 좋아했죠. 카뮈스타일의 허무가 아니라 충만하면서도 공허한 동양철학의 추구였습니다” 등, 유사한 답변으로 인용한 기사들이 주를 이룬다.
또한 극사실주의적인 물방울을 어떻게 그렸을까 라는 호기심을 누구나 갖게 될 것이기에 많은 기사가 그린 방법을 이어 전달하고자 하는데 “김씨의 작업은 독자적인 것이다. 그래서 외국평론가들마저 고개를 갸웃거렸는지 모른다. 우선 화면에 물방울이 들어갈 얇은 구멍을 판 뒤 스프레이를 이용, 투명한 물감을 뿌린다. 음양은 깊게 파내는 작업에 의해 자연스레 이뤄진다. 수없이 뿌려진 물방울에 붓으로 흰점을 톡톡 찍어간다. 그러면 생생한 물방울처럼 영롱해진다”(한국일보, 날자 미확인)와 같이 비교적 자세하게 그리는 방법을 전하고 있다.
3년이 지나 1979년에 현대화랑에서 다시 개인전을 갖게 되자. 모든 기사들은 김창열의 작품이 외견상으로는 똑같은 물방울을 그렸는데, 과연 변화가 있는 것일까라는 질문이 중심 맥을 이룬다.
“이번에는 좀더 심화된 환희의 세계에 초점을 두어봤습니다. 투명한 물방울속에서 좀더 충만된 일련의 상태를 표현했다고나 할까요. 온갖 인간 외적인 것을 배제하고 내 자신을 투영, 어떤 순수성에 접근해봤다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지난번까지는 빳빳한 기름종이에 크고 작은 물방울을 만들어 콤프레서로 뿌렸지만 이번에는 순전히 붓으로만 그렸습니다. 물론 그전 물방울과 지금의 물방울은 많은 차이가 있는데 특히 섬세한 부분의 표출이나 그 투명도가 한결 맑아진 것 같습니다.”(1979.6.8. 신아일보 )
“물방울 자체의 근본적 변화는 없습니다. 가만 개념적인 것에서 벗어나 어떻게 회화적으로 조형하느냐 하는 문제에 많이 기울어져 있습니다. 스프레이를 쓰던 기계적인 작업방식이 붓의 작업으로 바뀌어진 것도 바로 회화성을 높이기 위한 변화였다고 덧붙인다. 전에도 간혹 붓을 사용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화포와 밀착도가 스프레이 보다 훨씬 강하다는 느낌이 듭니다.”(1979.6.6. 중앙일보)
5. ‘물방울 작가’ 라는 ‘고유명사’의 탄생과 정립 : 1980년 ~ 1999년
이후 몇 년간 김창열이 유럽 전역과 뉴욕, 토론토 등지에서 개인전을 열며 활발한 활동을 하는 동안 김창열의 활동이 소개되는 기사는 없고, ‘해외에서의 한국미술’을 논하는 기사나 혹은 한국미술 단체전에 포함되어 신문기사에 등장한다. 1983년 현대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을 기해 다시 많은 기사를 찾게 되는데, 물방울을 처음 발표한 후 10년이 지나도록 계속되는 물방울이 변화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관점에 집중되어, 조형적인 변화와 기법적인 변화에 대한 해석이 주로 다루어진다.
“이번 작품들은 종래의 개념에다 회화로서의 조형성을 강조해 보았어요. 물방울과 자국의 형태를 대칭적으로 구성해보기도 하고, 물방울이 지니는 형체나 광선의 빛깔에도 변화를 시도해 보았어요.” “지난 10년 동안 꽤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 76년의 개인전 때만해도 스프레이나 콤프레서 등 소도구를 이용한 [손+기계]라는 개념이 짙었지만 79년부터는 완전히 기계를 떼어내고 손만으로 그리고 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물방울이 지니는 형체나 광선의 굴절에 따른 투명성을 최대한 살리면서 화면을 분할, 2원성을 주입시킨 것들을 모아봤습니다.” 김창열과의 인터뷰를 통한 인용에 이어 ‘같은 물방울이라도 76년과 79년에 국내에서 발표한 작품들과 다른 점은 물방울의 배치가 극히 조형적이라는 점이다. 흔적과 물방울들의 대비효과를 강하게 살리고 있고, 개념으로서의 물방울이 아니라 회화로서의 생명력을 지닌 물방울을 표현하려고 노력했음을 보여준다.’(1983년 9월 7일 조선일보), 혹은 ‘물방울이라는 단순한 개념에서 떠나 투명도와 광선의 발광효과를 높일 수 있는 물방울흔적을 개입, 조형성을 위주로 한 물방울의 융화를 시도했다는 게 그의 설명. 그래서 그는 이번 개인전에서 물방울이 녹아 스며든 비정형의 형태와 영롱하게 맺혀 있는 극사실의 물방울을 공존시켜 시간성과 공간성을 압축한 물방울10년을 결산하고 싶다고 한다’(게재 신문 미확인)고 기자는 해석하여 전한다.
1984년~1986년 사이 국내의 화랑이 처음 해외 아트페어에 참석하거나, 한불수교100주년기념전(1986년), 대형 판화전이 개최되는 소식 등에서 김창열 이름을 찾아 볼 수 있다가, 1987년 개인전을 기해 <후기 물방울시대>라는 개념으로 그의 작품세계를 정리한 기사를 접하게 된다. ‘출품작들은 물론 물방울이 중심이지만 보던 작품들과는 시각적으로 다르다. <후기 물방울시대>라고 이름붙일 만한 다양한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물방울들이 중성적인 차가움을 지닌, 철저하고 개념화된 이미지로 그려져 왔다면 이번의 물방울들은 짙은 그림자를 동반하거나 문자나 서예의 획, 아니면 또다른 회화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재료에 있어서도 캔버스가 아닌 종이에 꼴라주 등의 기법을 썼다.(조선일보 1987년 9월 12일) 1985년경부터 김창열은 영롱한 물방울이 아니라 이미지가 바닥으로 스며들면서 바탕에 일정한 얼룩도 만들기도 하고, 화면 아래쪽에 매달리는 형상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등 큰 변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가장 극명한 것이 <해체>시리즈라고 명명한 새로운 풍의 작품으로 한 화면에 물방울로 구성된 부분과 강력한 붓 터치가 드러나는 추상회화가 함께 대비되어 존재하는 시리즈이다. 이러한 작품에 대한 상세한 해석보다는 평론가 이일의 말을 빌어 “물방울과 또 다른 양태를 대비시켜 우리의 시각과 의식에 새롭고도 선명한 체험의 공간을 제공해준다”는 해석을 전달하고 있다. 한편 다른 기사에서는 “달마대사는 9년간 면벽한 끝에 득도했다는데 나는 15년간이나 물방울과 대면했지만 아직도 득도를 못하고 있습니다”고 하는 김창열의 말을 인용하며, 달마대사, 득도와 같은 개념으로 시사하듯, ’이번에 전시된 그림을 보면 여러 가지 재미있는 변화가 눈에 띈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어딘지 풍기는 동양적인 분위기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한문활자 바탕위에 물방울을 그려 넣은 것은 동양적인 요소가 등장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게재신문 미확인) 이렇게 동양성을 강조하는 관점은 3년후, 1990년 개인전을 보도한 인터뷰 기사에서도 재차 강조된다. ’그에게 물방울이란 존재하지만 곧 사라지고 말, 무상과 무의미를 뜻하는 물체이다. 그런 의미에서 물방울은 동양의 정신을 담고 있다고 그는 믿는다. 삼베 캔버스와 신문지에 물방울을 그리던 그가 화면에 천자문, 노자 도덕경 등 한자를 쓰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86년무렵부터. 처음엔 한자체가 목판 인쇄체였고 한자 배열도 가지런했으나 최근의 작품에서는 한자체도 신문지에 붓글씨 연습하듯 흐트러졌고 글자는 서로 겹쳐 자형을 알아보기 힘들정도가 됐다.‘는 기자의 설명과 함께 “한자세대라 그런지 한자에 대한 향수같은 것이 마음 깊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뜻글자인 한자를 바탕에 무수히 깔았을 때 그 ‘울림’이 무척 민감하게 다가오지요. 그 위에 ‘곧 사라지고 말’ 물방울들을 올려놓고 보면 그로 인한 긴장과 질서, 조화가 신선하게 느껴집니다.”라는 작가의 말을 인용한다. 그러나 1990년 개인전에 대한 기사는 이 기사 외에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주목을 받지 못한 상황이다. 사실 작업의 양상으로는 1989년부터 발표한 <회귀> 시리즈는, 앞서 나온 한자 배경의 작품을 더욱 발전시켜 물방울과 한자가 이제는 동등한 중요성의 비율을 갖고 등장하며, 글자가 더욱 오브제로서의 성격을 띠게 되는 큰 변화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이러한 회화적인 변화가 더 이상 기사에서 주요 관심사항으로 등장하지 않는 점을 주목할 수 있겠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개최되었던 한국현대미술제와 올림픽기념 판화집 전시 기사들에 김창열이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많은 기사들 이후 몇 년간은 한국화랑미술제와 해외 아트페어, 에콜드서울전과 같은 매년 열리는 행사나 현대미술25인전, 원로작가전, 현대미술5인전, 한글사랑한국미술전, 현대미술의 기호와 상형전, 현대미술소통전, 판화전 등과 같은 화랑들의 기획전 등의 소식으로 김창열을 만날 수 있었다. 1992년에 뉴욕 소더비에서 사상 최초로 한국 근·현대미술품 7점을 포함한 한국미술품단독경매가 열리는 소식이 크게 보도되고 있는 가운데 이 중에 김창열 작품이 1점 포함되었고, 현대 작품 중 김창열 의 1973년작 물방울그림만 내정가의 중간선인 1만1천달러에 낙찰됐다는 소식이 여러 신문에 보도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여러 해에 걸쳐 관찰할 수 있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1993년 김창열의 국립현대미술관의 개인전에 대해서는 매우 간략한 소개 정도로 다루어졌다. ‘초기의 스프레이 작업에서부터 최근의 <회귀> 연작에 이르기까지 1백여점의 출품작을 통해 <물방울>로 알려진 재불 작가 김씨의 작품 변천과정을 회고하는 자리’(조선일보 1993년 11월 18일), 혹은 ‘프랑스 등 유럽 각지와 미국 일본 등지에서 50여회의 개인전과 국제전을 가진 바 있는 김씨의 이번 국내전시회는 8번째다. 50년대 그림과 함께 모두 1백여점이 전시된다. 73년 <물방울> 작품 첫 전시 후 20년 동안 한 주제만을 깊이 천착해온 그의 작품 속에는 강렬한 동양적 정서와 다양한 조형성이 담겨 있다.’(세계일보 1993년 11월 27일)는 간단한 내용이 국립현대미술관 개인전에 대한 기사의 전부였만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국립현대미술관 개인전은 오히려 공개적인 비판을 야기하는 기회가 되었다. 미술평론가 이영욱의 <‘물방울’의 다양한 변주-철학 치장한 물신주의> 라는 평문을 전문 게재한 기사(게재신문명 미확인)는 ‘물방울작가’, ‘물방울만 그리는 작가’ 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이 당시에 함께 존재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하겠다. 평론가는 “물론 그간 그의 작품들은 일정한 도식(화면에 맺힌 물방울) 한계 안에서는 나름의 변화를 보여 왔다. 바탕만 하더라도 삼베, 한지, 신문지를 쓰는가 하면 최근에는 한자체의 글씨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물방울도 단일한 것, 수없이 모여 있는 것, 막 흘러내리려는 것, 스며들기 직전의 것 등 다양한 변주가 있었다. 심지어 이번 전시에는 모래로 쌓아올린 제단에 유리로 만든 물방울(물로 채운)을 좋은 설치작품까지 제시됐다.(중략) 하지만 물방울은 물방울 아닌가? 시각적으로 한정된 형상에 확인하기 힘든 고도의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며, 철학의 오용이자 남용이다. 어떤 형상이든 의미획득은 수용자들이 물방울을 보고 연상할 수 있는 것들과 그 물방울이 화폭에 구현된 모습의 상관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결코 물방울 자체가 무슨 한도 끝도 없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실제로 이번 전시에서 그야말로 수천을 넘는 물방울의 반복을 접하면서 내가 느낀 것은 기술과 관념의 폭력적 결합으로 이루어진 사업적으로 ‘관리된 물방울 물신주의’였다. 무엇이 한 작가로 하여금 이렇게까지 자신을 억제하고 고통스럽고 지루한 작업을 지속할 수 있게 했는지! 혼돈 속에서도 남아 있는 분명한 의무는 지난 날의 오류를 명확히 알고, 그것을 되풀이하지 않는 현명함을 견지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라고 강력한 비판을 가감없이 제기하였다. 그로부터 4년 후 1997년에 개인전에 대한 기사에서는 “화단에는 ‘물방울 25년’의 단조로움에 식상했다는 사람도 없지 않다”(문화일보 1997년 8월 28일)고 하기도 하고, “김창열은 그간의 작업으로 ‘물방울작가’란 고유명사를 얻었고, 명성과 부도 얻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물방울을 그린다.”(한국일보 1997월 8월 29일)고 시작하는 기사도 이러한 비판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1997년부터 김창열의 작품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등장한다. 작가가 도인의 경지에 이르러 ‘無’로 충만한 ‘물방울의 세계’를 구현하고 있다는 표현이 그것이다. 작가의 인터뷰에서 작가의 말로 인용한 “(물방울을 계속 그리는 것은) 모든 것을 물방울에 융해시키고 투명하게 ‘無’로 되돌려 보내기위한 행위다. 분노도 불안도 공포도, 그 모든 것을 ‘虛’로 돌릴 때 우리들은 평안과 평화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어떤 작가들은 ‘에고’를 넓히기 위해 작업하고 있으나 나는 오히려 ‘에고’의 소멸을 지향하며 그 표현방법을 물방울에서 찾고 있다” 라는 말이 대표적인 작품세계를 정의하게 된 것이다.(동아일보 1997년 8월 25일, 세계일보 1997년 9월 2일 등)
그러나 앞서 잠시 언급하였듯이 3~4년 간격으로 꾸준히 열리던 개인전에 관한 기사들 외에 화랑이나 미술관의 기획전, 화랑미술제나 한국판화미술제와 같은 대규모 전시회, 외국 아트페어나 경매, 혹은 미술품 소장가 소개 등, 미술계 전반을 알리는 다양한 종류의 기사에 김창열은 빠짐없이 거의 매번 언급되어 연간 100회가 넘는 기사 수를 기록해 왔다. 수백 명의 작가가 참가하는 미술제에 몇 명의 대표적인 작가이름을 열거할 때에 거의 언제나 선두에 포함되어 이러한 유명한 대가도 함께 참가하는 행사라는 일종의 신뢰감을 담보해주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1998년 4월 23일자 동아일보에 프랑스 예술저작권 회사 사무총장의 내한을 알리는 기사에서 “53년 작가들이 설립한 회사로 현재 프랑스 작가 5천여 명을 비롯해 2만8천여 명이 가입해 있다. ’물방울 작가‘ 김창열씨도 회원이며 이 회사의 연간 저작권 관리 대행료 수입은 7천만 프랑(약 1백65억여원)”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유형이라 할 것이다. 또는 2009년 5월 26일 한겨례 신문에 아르코 미술관이 없어질 판인데, 이곳은 박서보, 김창열, 윤석남, 이반 등 내노라는 작가들이 이곳에서 전시를 열어 꿈을 키웠다라고 쓰고 있는 기사도 이러한 유형에 속하지만 실상은 김창열이 이 미술관에서 전시를 하면서 꿈을 키웠던 사실은 확인할 수가 없다.
또 한 가지 환기해야할 사실은 기사들에서 김창열을 지칭할 때에는 많은 경우 ‘물방울화가 김창열’, ‘물방울작가로 유명한 김창열’, ‘물방울화가로 일컬어지는 김창열’, ‘물방울로 잘 알려진 김창열’, ‘물방울 작가라는 닉네임으로 널리 알려진 화가’와 같은 수사로 표현한다는 사실이다. 1999년 1월 21일 세계일보에서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시각 이미지로서의 문자와 미술의 의미>전을 소개하면서 “물방울 작가로 유명한 김창열 씨는 80년대 이후 천자문에서 따온 한자를 바탕으로 상형문자인 한자의 조형성을 통해 시간의 의미를 가미시켰다”고 소개하는 것이나, 2002년 3월 18일 서울신문에서 박서보의 개인전을 다루면서 “그는 1956년 당시 국전이 일본의 해묵은 미술양식을 답습하고 있다며 ‘반국전 선언’을 발표했고 ‘물방울 작가’ 김창열과 함께 현대미술의 기원을 연 앵포르멜 운동을 주도했다”라고 쓰는 것과 같이 물방울과는 무관한 사실을 언급하면서도 김창열 앞에 반드시 ‘물방울 작가’ 라는 표현을 삽입하는 표현이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아마 언론에서 미술작가를 지칭할 때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과 더불어 익숙한 관용구로 자리 잡은 유일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김환기, 이중섭, 박서보, 이우환 등, 가장 많이 거론되는 작가들 중, 그 어느 누구도 이같이 작품의 소재를 써서 관용구화한 경우로 비교할 대상을 찾아볼 수 없지 않은가. 1990년대에 이르러 대중들에게 김창열은 그냥 김창열이 아니라 ‘물방울작가 김창열’이라는 브랜드로서의 고유명사로 확실히 고착된 것이라 할 것이다.
6. 물방울에 대한 지속적인 (재)정의와 ‘신화’화 : 2000년 ~ 2016년
2000년 칠순을 넘긴 김창열의 개인전을 다루는 기사들에서 눈에 띄는 것은 물방울을 우주의 순환의 상징, 동양철학의 응집으로 해석하는 관점이다. 작품의 변화를 묘사하거나 새로움을 해석하려고 하는 관점은 중요성을 상실하고 반면에 ‘물방울 하나에 우주의 질서와 삶의 찰나성을 담아온’ 작가라는 이미지로 그의 작품세계를 총괄적으로 표현한다. 1997년에 이미 여러 차례 인용되었던 “모든 것을 물방울 속에 용해시키고 투명하게 무로 되돌려 보내기 위한 행위다. 분노도 불안도 공포도 모두 허로 돌릴 떼 우리는 평안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혹자는 에고의 신장을 바라지만 나는 에고의 소멸을 지향한다.”라는 말을 계속 인용하며 “농부가 밭을 갈 듯이, 스님이 염불을 외듯이, 어린애가 물장난하듯이 그냥 습관처럼 무심히 그리고 있다”는 노화가의 무상의 경지를 전하고 있다.
이즈음 일종의 김창열에 대한 ‘거짓 신화만들기’라고도 할 수 있는 엉뚱한 기사도 등장한다. 그가 파리에서 처음으로 전시한 곳이 목공소였고 우연히 지나가던 기자가 ‘동양의 한 작가가 별난 그림으로 별난 전시를 한다’고 기사를 내보냈고, 이 기사를 보고 찾아온 시인이자 미술평론가인 알랭 보스케가 르몽드지에 글을 쓰면서 그는 파리 화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는 등의 내용이다. 또한 ‘회귀’라는 제목을 붙인 작품은 원래 ‘마고자-선단기’로 제목을 달려고 했다고 한다.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여신의 얘기가 깃든 중국 신화인데 아무래도 외국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까봐 ‘회귀’라 정했다고 한다(매일경제 2000년 6월 23일) 이렇게 작가에 대한 과도한 과장을 마다하지 않은 몇몇 기사를 제외하면 2000년 이후의 기사들은 노작가만이 보여줄 수 있는 철학적 경지를 우주의 신비에 비유하여 전달하는데 주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004년에 프랑스의 국립 죄드폼갤러리에서 초대전이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며 열린 2002년의 전시를 다루는 기사들에서는 김창열의 초기 엥포르멜 시기부터 물방울을 최초로 선보인 1972년 파리 살롱드메 전시, 그리고 그 후의 화업을 상당히 상세하고 정확하게 설명하며 오늘날 삼라만상을 담은 우주의 경지에 달하게 된 과정을 전달한다. 화가의 화업을 미술사적으로 정리하고자 하는 시도로 보이는 이러한 관점이 등장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작가는 인터뷰에서 “왜 물방울이었느냐”는 질문에 대해 “왜 물방울이었느냐... 저 말이죠,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서 왜 딱정벌레로 변했느냐는 질문과 비슷하다고 봅니다. 그는 딱정벌레가 가장 하찮은 동물이기 때문에 그랬대요. 나에게도 물방울이 가장 하찮으면서, 기쁨을 줬습니다.” (서울신문, 2002년 8월 27일) 라는 선문답으로 대답한다. 너무 변하지 않고 물방울만 그린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재주가 없어서인지 물방울 하나만 붙들고 씨름하는 것도 벅찬 일이다. 끝까지 물방울 하나만 파고들어 영혼을 건드리고 싶다.” (동아일보 2002년 8월 28일) 고 답한다. ‘새로운 도전에 대한 작가정신이 실종됐다“ ’지나치게 대중의 기호에 안주한다‘ 등 비판의 목소리를 제기하는 질문에도 ”소재의 선택이 문제가 아니라 소재를 통해 어떻게 하며 인간의 마음을 건드릴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고 단언할뿐 아니라 (국민일보 2004년 9월 30일) 더 나아가, “물방울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직 무궁무진하다”고 잘라 말한다. 그러나 무궁무진의 실체에 대해 얘기하는 대신 “세상에 훌륭한 예술가는 많았지만 영혼을 그린 화가는 많지 않았다. 소재가 문제가 아니라 소재를 어떻게 이용해 인간을 건드리는가가 문제”라고 결의에 찬 답을 내놓는다. 이렇게 해탈한 듯한 선문답은 계속되어 “예쁜 여자에 반하듯, 햇빛에 반짝이는 물방울에 반해 그렸고”, 왜 물방울만 그리냐는 질문에는 “35년을 한 마누라와 살고 있잖아요” 라고 답하게 된다. (문화일보 2004년 10월 24일)
김창열은 2004년 파리 국립 죄드폼 미술관 전시에 이어 2005년에는 중국국가박물관에서 대형 회고전을 열었으며, 국내에서도 2005년 박영덕화랑, 2006년 표갤러리, 2007년 갤러리현대, 2009년 부산시립미술관 회고전, 2010년 갤러리현대, 2013년 갤러리현대, 2014년 광주시립미술관 회고전 등 쉼 없이 신작을 발표하며 전시를 계속하였다.
2013년 84세의 작가는 화업50년을 맞아 작가생활 50년을 되돌아보는 대규모 전시를 열었다. 이 당시 가졌던 기자간담회에서도 “물방울만 그리기 지겹지 않은가?” “어시스턴트는 몇 명이나 있나?” “물방울의 의미는 어떻게 바뀌고 있나?” 라는 질문이 쏟아지고, 최근 작품은 어떻게 달라졌냐는 질문에 그는 짧게, 그러나 또렷하게 “반복입니다.”라고 대답했다.(한국일보 2013년 8월 25일) “그냥 보면 똑같은 물방울일 것이다. 하지만 모두 다르다. 우리 인간이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며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애쓰는 게 예술이다. 물방울을 그리지만 늘 물방울 이상의 것을 그리려고 했다”고 답했음을 신문은 전하고 있다.(헤럴드경제 2013년 8월 21일) 작가의 이러한 단호함은 곧 작가의 철학과 미학으로 해석되어 ‘스스로의 생명철학을 절제된 색채와 주제로 표현한 물방울은 공간의 비움과 채움, 생성과 소멸을 이야기 한다’고 작품을 해석하고 있다. 작가는 곧 소멸한 물방울이 한 순간 더없이 찬란하게 빛나는 그 모습에서 인간 존재의 숙명을 읽고 있는 것이며, 결국 인간의 삶과 상처의 원형이 진화해온 형태가 곧 물방울인 셈이다라고 물방울에 대해 (재)정의한다. 따라서 대중들에게 물방울 그림이 그 어떤 그림보다 친숙하게 다가오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이 기자간담회에서 어떤 화가로 역사에 기록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너절하지 않은 화가로”라고 답했다 한다. “너절한 게 뭐냐”는 물음에 “있으나 마나 한 것”이라고 했다. (조선일보 2013년 8월 22일) “화가들은 착각을 합니다. 그리고 또 그리면 영혼에 닿을 수 있을 것이라는...”, 그래서 한 평생 그림만 그렸노라 담담하게 회고하는 노화가에게 왜 한 평생 물방울만 그렸냐는 우문은 더 이상 의미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맺으며
이 글은 1950년대에서 2016년에 이르는 60여년간 발간된 일간지에서 김창열 이름이 들어간 기사 전량의 내용을 분석함으로써 김창열의 작품이 어떻게 해석되고 대중에게 전달되었는지를 찾아내고자 한 연구의 결과이다. 원로작가 디지털자료집 구축사업의 한 부분으로서 수집한 신문기사는 총 2400여건을 넘는다.
1950년 중반부터 미술의 개혁을 주장하는 아방가르드 움직임의 일원으로 등장한 작가 김창열이 1970년대 초 프랑스에서 물방울 그림을 발표하여 일약 유명작가로 귀국, 처음으로 물방울 그림을 선보인 1976년부터 2016년 제주도에 미술관이 개관되기까지 그에 대한 기사는 일관되게 ‘물방울’에 대한 질문과 그 의미에 대한 해석에 집중하고 있다.
왜 물방울인가, 어떻게 물방울을 그리게 되었는가에 대해 작가는 초기에는 “파리 근교 마구간에서 살던 가난한 시절 캔버스를 재활용하기 위해 물감을 떼어내려고 물을 뿌렸다가 그 물방울에 매료되었다”고도 답을 하다가 “어느 날 아침 대야에 물을 받아 세수하다가 물이 옆에 뒤집어놨던 캔버스에 튀었다. 문득 캔버스 뒷면에 뿌려진 크고 작은 물방울이 아침 햇빛 아래 눈부시게 반짝이는 모습에서” (문화일보 2013년 9월 13일) 탄생하게 되었노라는 대답까지 비슷한 그러나 다양한 답을 내놓았다. 어쩌면 회화의 내적인 요소에 대한 분석보다는 보는 이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큼 사실적으로 묘사된 물방울이 신기해서 그 대상을 그림으로 그리게 된 인간적인 이유에 더 관심을 갖는 일반적인 심리 때문에 기자들은 이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물방울의 의미에 대한 질문도 50여 년 동안 집요하게 계속된다. 초기에 작가는 “물방울은 영롱하고 아름답기가 흡사 보석을 생각케 합니다. 그러면서도 부서지기 쉽고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점에선 너무도 대조적이죠. 이런 의미에서 단순한 물방울 이상의 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물방울을 그리게 된 까닭입니다.”라고 물방울의 물질적인 속성을 얘기하다가 점차 “방울이란 존재하지만 곧 사라지고 말, 무상과 무의미를 뜻하는 물체이다. 그런 의미에서 물방울은 동양의 정신을 상징하는 정신적이고 철학적 의미로 관점이 전이한다. 50년이 넘도록 물방울을 그리는 것은 “모든 것을 물방울에 융해시키고 투명하게 ‘無’로 되돌려 보내기위한 행위다. 분노도 불안도 공포도, 그 모든 것을 ‘虛’로 돌릴 때 우리들은 평안과 평화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어떤 작가들은 ‘에고’를 넓히기 위해 작업하고 있으나 나는 오히려 ‘에고’의 소멸을 지향하며 그 표현방법을 물방울에서 찾고 있다”라고 노년에 이른 작가는 말이다.
“사람들이 왜 물방울을 그리느냐고 묻습니다. 뭐라 한 마디로 대답할 수는 없죠. 많은 시간이 흐르면서 투명한 물체가 화면의 주제가 되고, 바로 그것이 물방울이었던 것은 나 자신도 그려본 뒤에야 안 것인데.” (한국일보 1976년-날자 미확인)
“물방울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럼에도 왜 집착해서 그리느냐고 물으면 그건 제가 못났기 때문이지요.”(국민일보 2016년 9월 25일)
위의 두 작가의 말, 처음 물방울을 보인 1976년과 50년이 흘러 2016년 미술관 개관당시 인터뷰에서의 말이 아마도 작가의 가장 솔직한 대답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5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김창열에 대한 신문기사는 주로 작가가 개인전을 여는 시점에 게재되었으므로 신문기사는 그 때 그 때의 작가의 생각을 전하고, 또는 비판과 일반인의 여론을 반영하며 작성되었다. 이 글은 50년간의 기사를 관통하여 흐름을 찾음으로써 작가의 작품세계가 어떤 변화를 보이고 있는지, 일반인에게 이는 어떻게 전달되고 있는지를 그 흐름을 찾아낸 것이다. 이러한 연구는 디지털자료집을 구축하기 위해 작가의 작품과 전시기록, 신문기사, 문헌자료 등을 집대성하는 기본 작업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모든 자료가 다 축적된 디지털자료집을 더욱 깊게 활용한다면 이 연구도 더 깊게, 더 넓게 확장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개인 혼자의 힘으로는 하나하나 찾아가며 하기 어려운 작업들이 디지털 정보로 집대성된 자료집을 바탕으로 얼마든지 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디지털자료집을 통해 가능해질 많은 연구를 기대하며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 1954 ~ 1965년 초기 앵포르멜 시절
청년기의 김창열은 기존의 가치관과 미적인 관념에 대한 변혁을 주장하는 ‘현대미술가협회’의 활동적인 멤버로서 작가 활동을 시작하였다. 한국의 엥포르멜 운동으로 지칭되는, 이들이 꿈꾸던 새로운 예술을 구현하려 했던 혁신적인 의식은 김창열이 갓 스무 살에 겪었던 6.25 전쟁의 끔찍한 기억과 버무려져 어두운 화면과 거친 마티에르를 주조로 하는 작품으로 표현되었다. 후에 작가가 계속해서 회술하고 있는 “머리 속에 너무나도 선명하게 각인된 탱크에 의해 으깨진 인간의 머리통, 폭탄에 튕겨 광장 전선주에 거꾸로 매달린 여인의 사체 등 전쟁의 참혹함에 대한 기억과 아픔”,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사라져 버린 친구들의 넋을 달래고자하는 깊은 심적 아픔을 그려낸 <제사> 시리즈가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 화면은 살점을 긁어내는듯한 다분히 표현주의적인 특징을 띠고 있다.
□ 1965 ~ 1969 뉴욕 시기
런던과 파리를 짧게 방문한 후 1965년부터 4년간 뉴욕에 체류하는 동안 김창열의 작품은 큰 변화를 보인다. 인간의 감정적인 고뇌나 슬픔의 절규와 같은 거침이 사라지고, 사람의 손길이 사라진 매끈한 무기질의 둥근 알이나 구, 핵과 같은 형상을 중심으로 한 <구성> 시리즈가 그것이다. 과거의 표현주의적인 효과가 사라지고, 이 원형의 형태들은 치밀하게 계산된 기하학적인 배열을 통해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 1970 ~ 1971 파리 정착기
1969년에 파리로 거주를 옮긴 후 미국시절에 보이던 고형의 구를 주제로 했던 작품들은 점차 점액질처럼 흘러내리는 모습으로 변하게 된다. 뉴욕에서 자신의 모습인양 그리던 얼음 덩어리 같은 형태의 구체들이 이런 저런 판의 압력을 받으면서 틈을 비집고 흘러나오며 액체인지 고체인지 모호한 모습으로 그려진 <현상> 시리즈가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 1972 ~ 1980 70년대의 물방울 – 물방울의 영롱함
김창열의 물방울 그림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가 하는 질문에 작가는 어느 날 그림 위에 물방울이 맺힌 것을 우연히 보고 그 속에서 회화의 모든 답을 찾았다는 대답을 하곤 했다. 형태적으로는 앞 시기의 <현상>시리즈에서 보여준 흘러내리던 액체가 하나의 투명한 결정체로 응집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1972년 살롱드메에 출품한, 검은 바탕의 화폭 한 가운데에 커다란 물방울 하나를 그려 넣은 <밤에 일어난 일>이 최초의 물방울 그림이다. 1973년 파리에서 물방울 그림만으로 열었던 최초의 개인전은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시인이자 미술평론가인 알렝 보스케가 “인간이 그의 작품 속에서 만나는 것은 인간 그 자체는 아니라 물방울과 같은 인간이다. 바로 이점에서 그 작품은 물방울을 다시 생각하게 해주며 동시에 인간을 다시 성찰하게 한다. 사색적 추상 속에 물방울의 구체화된 형태 – 바로 이것을 작가가 우리에게 제시했다”는 평을 신문에 게재하였다. 곧 이어 유럽 전역에서 개인전을 하게 되었고, 1976년 처음으로 서울에서 물방울 그림으로 개인전을 개최한다. 이 시기에는 화폭의 바탕 헝겊을 하나의 물체로 간주해 그대로 살리고 그 위에 크고 작은 물방울을 배열한다. 물방울은 진주알처럼 그 자체만으로도 완전한 형태로, 거의 아무런 색채가 없는 바탕에 하나씩 혹은 그룹지어서 그려졌다. 자연스럽고 금방 굴러내릴 듯 영롱한 물방울을 만들기 위해 아에로그래피 라고 불리는 일종의 스프레이를 사용한다. 이것은 붓을 사용하는 것보다 작가의 의식을 개입시키지 않고, 형태가 왜곡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효과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첫 귀국전 당시 작가는 “물방울은 영롱하고 아름답기가 흡사 보석을 생각게 합니다. 그러면서도 부서지기 쉽고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점에선 너무도 대조적이죠. 이런 의미에서 단순한 물방울 이상의 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물방울을 그리게 된 까닭입니다.”라고 설명한다.
□ 1980 ~ 1988 80년대의 물방울 – 회화적 이미지로서의 물방울
70년대 말~80년대 초에 이르러 작가는 이전에 콤프레서로 뿌려 기계적으로 물방울을 그리던 작업 방식을 붓으로 직접 그리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물방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으나, 개념적인 것에서 벗어나 어떻게 더 회화적으로 조형성을 모색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80년대 초기의 이러한 변화의 의도에 대해 작가는 83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종래의 개념에다 회화로서의 조형성을 강조해 보았다. 물방울과 자국의 형태를 대칭적으로 구성해보기도 하고, 물방울이 지니는 형체나 광선의 빛깔에도 변화를 시도해본 것이다”라고 얘기한다. 평론가 오광수는 80년대의 김창열의 작품에 대해 “이미지의 여러 양상으로의 변화가 시도된다. 영롱한 결정체보다 화면 속에서의 다양한 삶의 표정을 시사한다고 할까. 이미지가 바닥으로 스며들면서 바탕에 일정한 얼룩도 만들며 길게 흘러내리다가 화면 아래쪽에 매달리는 형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태어나고 소멸하는 여러 모양을 중복시키기도 한다. 그 자체가 구성적인 요인이 되기도 한다”고 설명한다. 변화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작품으로 1986년~1989년 사이에 발표한 <해체> 시리즈를 들 수 있다. 한 화면에 물방울로 구성된 부분과 강력한 붓 터치가 드러나는 추상 회화가 함께 대비되어 존재하는 시리즈이다. “오브제로서의 작품은 더욱 물질성을 강하게 띠게 되며, 이미지는 더욱 분석적인 성격을 띤다. 화면을 분할하는 구성을 특징으로 하는 이 시리즈를 해체라고 명명한 것에 대해 작가는 한자를 그 구조의 다섯 가지 기본 요소, 즉 수평, 수직, 두 방향의 대각선과 점으로 해체하는 생각에서 그 근원을 찾았다고 생각했다”고 김창열 모노그래피의 저자 코헨은 설명한다.
□ 1989 ~ 2000 90년대의 물방울 - <회귀>, 내면적 상징 요소로서의 물방울
1989년부터 발표한 회귀 시리즈는 작가의 삶의 새로운 양상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한자를 빼곡히 써놓은 배경에 물방울을 배치하는 작품으로 이 시리즈는 80년대 초반에 간혹 발표했던 한자를 배경으로 하는 물방울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물방울과 한자가 이제는 동등한 중요성의 비율을 갖고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글자가 더욱 오브제로서의 성격을 띠게 되는데 이는 작가가 가지고 있는 단어와 이미지에 대한 개념성이 더욱 두드러지게 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작가가 삶에서의 보다 더 내면적인 생각에 집중하게 되면서 회화의 본질에 대한 고찰을 다시 하게 되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그 방법으로 어려서 천자문을 처음 배우면서 계속해서 글자를 반복해서 쓰던 그 기억을 되살려 직접 글씨를 쓰는 과정이 작품에도 등장한 것이다. 즉, 삶의 본질이 어린 시절의 첫 글자를 배우며 쓰기를 반복하던 시절의 생각으로 회귀한 것이 작품에 반영된 것이라 할 것이다. 이후 줄곧 이어지고 있는 회귀 시리즈에서는 물의 성질이 갖는 동양적 순환원리와 우주 삼라만상이 결합되어 투명한 ‘무’의 세계로 보는 이들을 이끌어간다. 물방울들은 이내 사라져 버릴 속성으로 인해 오히려 순간에 더욱 빛나며, 화폭속의 물방울들은 자연의 모든 삼라만상이 무한한 우주로 돌아가는 것처럼 세상만물을 상징하는 천자문에 스며들고 있다. 이 시기 칠순을 바라보는 작가는 “물방울을 그리는 것은 곧 지우는 행위이다. 불안이나 아픔같은 것을 잊어버리기 위해 물방울을 그린다. 모든 것을 물방울 속에 용해시키고 투명하게 ‘무’로 돌려보내기 위한 행위이다. 분노도 불안도 공포도 모두 ‘허’로 돌릴 때 우리는 평안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어떤 작가들은 ‘에고’를 넓히기 위해 작업하고 있으나 나는 오히려 ‘에고’의 소멸을 지향하며 그 표현방법을 물방울에서 찾고 있다”고 소회를 밝히고 있다.
□ 2000 년대의 물방울 – 삶 속에 베어든 물방울
2004년 프랑스 국립 죄드폼 미술관 개인전, 2005년 중국국가박물관 개인전을 비롯해 쉼 없이 작품을 발표한 작가는 팔순의 노익장만이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면모의 작품을 선보인다. 외관으로는 어두운 바탕색 화면의 깊이를 추구하는가 하면 연노랑색이 가볍게 깔려 화사함을 더해주는 색채의 다양한 변주가 그것이다. 그동안 밑칠이 되지 않은 거친 생마포에 그려진 물방울이 주류를 이뤘다면 이때부터 노랑, 하늘색, 붉은색 등을 두껍게 칠한 바탕 위에 물방울을 올려놓은 듯한 모습이다. 종래에 주를 이루던 갈색의 어두운 톤에서 탈피, 색에 대해 새로운 열망, 혹은 삶의 향연을 보는 것 같다. 기법적으로는 한자가 새겨진 화면에 물감을 흩뿌린 자국을 작품에서 찾을 수 있다. 물방울이 터진 자국처럼 일종의 드리핑 기법을 도입한 것이다. 물감은 서로 엉켜 있으며 때로는 물감이 캔버스 피부를 살짝 침투해 들어간, 마치 선염 기법을 응용한듯한 모습이다. 40년 넘는 세월 동안 한 가지 소재에만 매달릴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한 가지 소재에 이토록 오래 매달리는 것은 그 속에서 동양적 순환 원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완벽한 겸허와 무한한 가능성이 동시에 교차하는 것이다. 나는 이 원형의 액체를 캔버스에 재현시키며 우주적 공과 허의 세계로 파고든다. 너무 흔해서 무심코 지나치는 물방울이지만 거기에는 삼라만상의 이치가 투영돼 있다”고 답한다. 뿐만 아니라 “아직 물방울로 그릴게 많다. 소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소재로 어떻게 감동을 주느냐가 중요하다. 일생을 했어도 아직 할 것이 많다”고 일갈한다. 2010년의 개인전 도록 서문에서 김복기가 이제 우리의 삶이 된 물방울에 대해 얘기한다. “김창열이 그린 물방울 하나하나는 작은 우주의 이미지를 띠고 있다. 물방울 저마다는 우리를 기억의 저장고로부터 아련한 추억을 불러내는 따뜻한 정감을 품고 있다. 물방울은 우리를 또 다른 시공간과의 만남, 그 시간의 여백으로 끝임 없이 밀어 넣는다. 어린 시절의 티 없이 맑은 마음 같은 개인의 소사에서부터 희로애락의 눈물 등 한국 역사의 저변을 유유히 흐르는 집단적 기억에 이르기까지... 화가 김창열은 이 모든 사상의 단자를 저 투명한 물방울 속에 한꺼번에 녹인다.”
■ 작품
정보출처
작가의 전시도록(개인전, 단체전)
작가의 작품도록(monograph)
작가의 작품 소장기관의 소장품 도록 및 웹사이트
작품 실사결과
작품 기록자료(작품을 촬영한 사진 및 제목, 규격, 재료 등에 대한 기록)
■ 연구팀 추가항목
작품의 옆면 또는 도록에 작품에 대한 번호가 기록되어 있어서 ‘Artist ref’라는 항목을 추가했다.
■ 작품 일련번호
작품의 일련번호는 ‘작가명’-‘작품연도’-‘작품구분’-‘일련번호’ 순으로 입력했다.
작품의 일련번호 중 ‘작품연도’의 경우 출처별로 가장 많이 기록된 작품 연도로 통일했으나 ‘생산연도’ 항목의 경우 출처에 기록된 작품 연도를 기록했다.
작품의 제작기간이 명시된 작품의 경우 시작연도가 아닌 끝 연도를 중심으로 일련번호 중 ‘작품연도’를 입력했다. 예를 들어, 작품 제작 기간이 1973년부터 1983년까지로 참고 자료에 기록된 경우 1983년으로 일련번호의 ‘작품연도’를 입력했다.
참고자료에 작품의 제작연대만 기록된 경우 해당 연대에 ‘s’를 붙여서 일련번호의 ‘작품연도’를 입력했다. 예를 들어, 참고 자료에 작품의 제작연도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고 1970년대에 제작된 작품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면 ‘1970s’으로 일련번호의 ‘작품연도’를 입력했다.
작품에 대한 모든 정보는 실사결과, 소장기관의 기록, 도록, 기타 참고자료에 근거하여 기록했다. 중요도 ‘1’ 또는 ‘2’로 지정된 정보만 연구팀의 기준으로 용어를 통일했다. 그 기준은 1.5에서 설명했다.
■ 연관관계
작품과 관련된 전시이력과 참고문헌들을 연관관계 항목에 해당 일련번호를 입력했다.
연관관계 항목 중 전시이력의 경우 전시도록을 참고하여 연관관계를 기록했다.
연관관계 항목 중 참고문헌의 경우 작품이 포함된 도서들을 중심으로 연관관계를 기록했다.
■ 자료의 중요도
중요도 ‘1’은 디지털자료집을 위해 선정된 300점으로 작품별로 대표되는 제목, 연도, 규격, 재료 및 기법, 연관관계 소장이력 등을 기록했다.
중요도 ‘2’는 디지털자료집을 위해 선정된 300점 이외의 작품들로, 작품별로 대표되는 제목, 연도, 규격, 재료 및 기법, 연관관계 소장이력 등을 기록했다.
소장기관의 기록, 도록 순으로 대표 제목을 정했다. 동일한 작품의 제목이 도록별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고, 작품 소장기관의 기록이 없는 경우 복수의 제목을 대표 제목으로 정했다.
‘물방울’의 영문제목은 ‘Water drops’로 통일했다. 단, 외국 전시도록에 ‘Water drop’로 기록되어 있는 경우 그와 같이 표시했다.
‘회귀‘의 영문제목은 ’Recurrence’로 통일했다.
작품 실사, 소장기관의 기록, 도록 순으로 대표 규격을 정했다.
소장기관의 기록, 최근 도록 순으로 대표 재료 및 기법을 정했다.
‘oil’의 영문표기법은 ‘오일‘로 통일(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소장작품 목록에 근거)
‘먹’의 영문표기법은 ‘Chinese ink‘로 통일(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소장작품 목록에 근거)
‘한지’의 영문표기법은 ‘Korean paper’로 통일(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소장작품 목록에 근거)
‘마포’의 영문표기법은 ‘hemp cloth‘, ‘linen’은 ‘린넨‘으로 통일
소장기관의 기록, 최근 도록 순으로 대표 소장이력을 정했다.
■ 작품 외 자료
자료의 구분은 국립현대미술관 또는 자료의 소장기관의 구분 기준에 따랐다.
■ 참고문헌
자료 소장기관에서 도서로 분류된 자료, 신문 및 잡지 기사, 웹사이트 자료를 참고문헌으로 분류했다.
자료 실사 또는 해당 자료의 소장기관에 등록된 자료의 정보를 참고해서 기록했다.
참고문헌 중 도서 및 웹사이트 자료의 연번은 연도순이 아니고, 연구원이 자료의 정보를 기록한 순서대로 연번을 ‘1’부터 입력했다.
참고문헌 중 기사의 경우 연도별로 연번을 ‘1’부터 입력했다.
자료를 실사한 결과를 정보로 입력한 경우 ‘출처’ 항목에 실사라고 명시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