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용은 평면회화가 주를 이루던 1960-70년대 한국 현대 미술계에서 한국 실험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대표적인 작가이다. 1942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출생한 그는 배재고등학교를 거쳐 홍익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70년 이론가 김복영과 함께 창작과 조형 예술에 관한 이론을 연구하는 ‘Space and Time’ 조형미술학회를 창립했다. 1979년 제15회 《상파울루 국제비엔날레》에 출품작가로 선정되었으며, 같은 해에 《LIS 리스본국제전》에서 대상을 수상하였다. 이건용은 평면회화를 넘어, 설치, 퍼포먼스, 오브제 등을 예술 작업에 도입하였고, 그 실험 정신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이건용은 1960년 후반부터 한국 미술계에 신체를 이용한 퍼포먼스 작업을 선보임으로써 탈회화적이고 실험적인 예술 현상을 이끌었다. 특히나 1975년에 선보인 <장소의 논리>와 1979년 《상파울루 국제비엔날레》에서 진행된 <달팽이 걸음>과 같은 작업들은 자신의 신체를 통해 지각하는 세계를 작품 속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작가의 신체와 공간의 유동적인 관계를 드러낸다. 신체의 움직임을 통해 변화하는 공간, 그리고 이 변화하는 상황에 대한 지각은 절대적인 하나의 가치나 논리적 절대성이 아닌, 상대적인 지각의 인식과 그 인식의 중요성으로 나타난다. 이건용 작가의 작업에서 신체성의 문제는 당시의 서구 후기 구조주의와 현상학, 그리고 동양의 노장사상이 결합된 작가 특유의 독창성으로 나타난다. 이후 <신체 드로잉>에 이르러 이건용의 작업은 작가 자신의 신체를 통한 드로잉이라는 자연발생적이면서도 동시에 인공적인 상태에 도달한다. 작가는 일반적으로 시각을 활용하여 작업하는 기존의 평면회화 작업방식에서 탈피하여, 신체를 활용한 퍼포먼스와 그에 대한 결과물로서의 회화라는 탈형식주의 예술의 면모를 보인다. 이처럼 이건용의 작업은 한국 현대미술에서 실험적으로 나타나는 탈회화적 현상을 반영할 뿐 아니라, 신체성에 대한 탐구, 나아가 신체를 통한 지각과 표현이라는 영역을 탐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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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 |
4. 25 황해도 사리원산에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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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 |
배재고등학교 졸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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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전공 졸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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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 |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에서 수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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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
ST조형미술학회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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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 |
《제 8회 파리비엔날레》 출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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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 |
《제 8회 까뉴국제회화제》 출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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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
《제 15회 상파울로비엔날레》 출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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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리스본국제전》 대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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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 - 2007 |
군산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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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 |
계명대학교 미술교육대학원 석사 졸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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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 1992 |
한국미술협회 이사 및 서양화 분과위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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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
제 4문화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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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
《'99 한국현대미술기획 개인전》 초대 작가 선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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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국제비엔날레 전시자문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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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2001 |
서울국제행위예술제 자문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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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2004 |
한국실험예술제 자문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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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
군산대학교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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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
제 8회 이인성미술상 수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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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
한국을 대표하는 생존작가 선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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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2014-2020 2020 |
한민족문화대상 수상 전북도립미술관 운영자문위원장 아트시 뱅가드 선정 |
도추로서의 예술가 이건용
정수경
이건용은 1970년대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원로작가이다. 1970년대에 <신체항>(1971), <신체드로잉>(1976), <장소의 논리>(1975), <달팽이걸음>(1979) 등의 대표작을 남겼으며 《Space and Time(이하 ST)》을 이끌었던 그는 김구림, 이승택 등과 더불어 1970년대 한국미술 초기 아방가르드를 대변하는 실험예술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한국미술사 연구에서 1970년대가 김환기, 이우환, 박서보 등의 단색화로 대변되는 추상화 진영과 《AG》, 《ST》으로 대변되는 실험미술 진영으로 다소 이분법적으로 정리되면서, 이건용이 평생 지속해온 회화 작업은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다. 이건용의 실험적인 행위예술작품들 중 <신체드로잉>, <달팽이걸음> 등은 대부분의 경우 그 행위의 결과물로 드로잉이나 회화 작품을 남기며,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이건용은 독립적인 드로잉, 회화 작업을 많이 남겼다. 그럼에도 이건용에 대한 인식은 “실험예술작가”라는 측면에 치우쳐있다. 이러한 인식은 틀리지 않았으나 충분치도 않다.
“실험예술작가”라는 꼬리표, 그리고 1981년 국립군산대학교 교수 임용에 따른 군산으로의 이주는 실험미술의 열기가 가라앉은 1980년대 이후 이건용의 활동을 일정하게 가린 경향이 있다. 그러나 1995년 윤진섭의 저서 『한국의 입체, 설치, 퍼포먼스1967-1995』를 필두로 이건용의 이름이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고, 2007년 이인성미술상 수상자로 선정되면서 환갑을 넘긴 원로작가의 작품세계를 회고하고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개인전 《달팽이걸음》은 그러한 움직임의 정점을 이룬다. 이때 이건용에 대한 심층인터뷰가 이루어졌고, 이후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는 이건용의 작품과 자료를 기증받아 《이건용 스페셜 컬렉션》을 아카이빙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일들을 계기로 이건용의 회화 작품들도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갤러리 현대는 2016년 이건용의 개인전 《이벤트-로지컬》을 열고 그의 1970년대 평면 작업들에 주목하였으며, 국내외적으로 그의 작품들을 알리는 메신저 역할을 톡톡히 해내었다. 덕분에 이건용은 현재 1970년대 못지않은 왕성한 활동을 국제적으로 펼치며 제 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목이 곧장 그의 평면(회화와 드로잉) 작업에 대한 충분한 재평가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특히 실험적인 행위예술이 회화작품을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이건용의 독특한 작품 유형은 1970년대 한국 현대미술에 대한 이분법적 논리로 설명되지 않기에, 아직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은 여분으로 남아있다. 어쩌면 ‘수반’한다는 표현 자체도 문제일 수 있다. 그것이 행위와 결과물 간의 관계에 대한 일정한 위계를 내포하는 어휘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건용 평생의 예술세계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실험적인 행위예술과 회화를 양분하지도,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않는 관점에서 그의 작업에 다가가야 한다. 그러나 단색화와 실험적 행위예술로 양분된 당대 미술계에서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작업을 했다는 점 자체가 놀라운 일이라 할 때, 그러한 작업을 지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실험적인 행위예술과 회화가 끈끈하게 들러붙어 있는 전형적인 유형인 <신체드로잉> 연작에서 얻을 수 있는 실마리는 ‘신체’라는 키워드이다. 도대체 신체는 어떤 과정을 거쳐 그의 회화에 그렇게 찰싹 달라붙게 되었을까? 그의 삶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I. 이건용의 삶과 몸
이건용은 1942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개신교 목사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일 년에 한두 번뿐인 소풍을 세브란스의 간호사였던 어머니가 만류할 정도였던 타고난 약한 몸은 역설적인 방식으로 몸에 주목하게 했을 것이다. 대신 책을 좋아했던 아버지가 구축한 수천의 책들로 둘러싸인 서재가 그의 놀이터였을 터. 어머니의 깊은 염려는 도리어 그를 시시때때로 밖으로 뛰쳐나가게 만들었던 듯싶고, 그는 집과 학교의 ‘울타리 너머 밖에서도’ 세상을 만나고 배우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음을 일찌감치 깨우쳤던 것 같다. 동네 길거리에서 만난 이름 없는 유학자에게 뜬금없이 “장자(莊子) 제물론에 나오는 도추(道樞)가 뭐예요?”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를 따라가 밤늦도록 노장사상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던 경험과 기억【주석1】은 이후 그의 예술의 가장 밑바닥 토양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또한 어린 시절 외국 서적의 컬러 삽화를 통해 접했던 서양화에 대한 놀라움과 관심은 그로 하여금 화가의 꿈을 꾸게 하였고, 초등학교 미술부를 거쳐 서울예고로의 진학을 열망하게 하였다. 하지만 맏아들이 의사가 되기를 바랐던 어머니의 반대로 이건용은 배재고등학교로 진학했는데, 이것이 그의 예술세계를 향한 중요한 행보가 될 줄은 그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당시 배재고등학교는 명문기독사학으로 상당한 수준의 철학 수업을 운영했는데, 1학년 철학 수업에서 이건용은 현상학과 분석철학에 입문하게 되고 논리학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다 2학기 수업에서 비트겐슈타인을 접하게 된 그는 자기 방에 비트겐슈타인의 초상을 그려 걸어놓을 정도로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에 심취한다. 이 시기는 그가 건강상의 이유로 휴학을 했던 때였는데, 이 한갓진 나날들에 이건용은 당대의 형이상학과 관념론적 철학을 언어에 대한 새로운 생각과 논리로 치유하려 했던 비트겐슈타인에 심취한 동시에 소싯적 길거리에서 접했던 노장사상을 곱씹으며 생각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적 소양이 그가 1963년 홍익대학교 회화과에 서양화 전공으로 입학한 후 금세 작가 성향이나 예술관으로 발현된 것은 아니다. 대학교 3학년 때 이후 예술적 동지가 된 김복영을 만나지만, 그러한 만남이 《ST》로 열매 맺게 되는 것 역시 수년의 세월이 지난 다음의 일이었다. 김복영, 김문자, 여운, 박원준, 신성희, 한정문과 함께 《Space and Time조형학회》를 창설한 것이 1969년이었고, 그 첫 전시는 1971년이었다.
II. 회화와 몸 _ 세계와의 만남으로서의 신체드로잉
《ST》 창립 직후 《한국미술협회》전에 출품하고 이후 1973년 파리비엔날레까지 가져갔던 작품이 <신체항>(1971)이라는 점은 이후로 이건용의 작가 정체성을 실험예술가로 규정하는 시발점이 된다. 이 작품에서 회화전공자의 흔적을 발견할 길이란 없기 때문이다. 거대한 나무의 아래 둥치 부분을 그 뿌리가 사방으로 뻗친 입방체의 지층과 함께 떠내어 전시장으로 옮겨놓은 <신체항>에는 그가 그토록 애호하는 비트겐슈타인과 노장 사상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있다. 하나의 사물이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가? 떠내어지기 전 들판에서라면 자연 나무였을 테지만, 작가의 선택에 의해 떠내어져 전시장으로 옮겨지면 그것은 한편으로는 신체의 은유가 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도추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행여 파리비엔날레에서처럼 흙에 섞인 밀짚으로 인해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밀의 싹이라도 푸릇하게 돋아나게 되면, 그것은 또 다른 의미로 발화하게 된다. 의미는 그렇게 차이 나게 변화하며 거듭 맺어지는 것이다. 이런 것이라면, <신체항>은 그 강렬한 물성에도 불구하고 개념미술의 성격을 띤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개념미술의 성격을 띤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작업을 하는 동안에도 이건용을 사로잡고 있었던 고민은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자신이 오랫동안 해온 작업의 정체성, 그 의미에 관한 것이었다.【주석2】 당시는 서양미술 메카였던 뉴욕에서 회화의 죽음이 선언되고, 미니멀리즘의 현상학적 체험과 개념미술이 양 극단을 형성하면서 네오-아방가르드가 급진적으로 전개되던 시기였고, 그러한 격변의 흐름은 한국 미술계에도 흘러들어 한국 미술계도 개념미술과 아방가르드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점은 당시에 《AG》가 결성되고 이건용이 그 일원으로 영입된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신체항>으로 주목받았던 파리비엔날레에서 돌아온 직후 이건용이 선보인 작품이 회화인 <포> 연작(1974-75)이라는 점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이러한 다소 반동적인 작업 방향은 실험예술로의 큰 걸음을 빠르게 내딛는 듯했던 그에게 ‘회화란 무엇인가’가 돌아와 속히 해결해야만할 급한 숙제, 풀지 않고는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도록 발목을 잡는 어떤 것이었음을 짐작하게하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회화의 본질에 대해 고민했던 것이 이건용만은 아니었으며, 따라서 <포> 연작은 70년대 초 한국 미술계의 집단적 고민을 담고 있는 작품으로 보아야 한다. 이건용은 천을 늘어지게 한 다음, 늘어진 부분에 스프레이를 뿌려 먼지가 앉은 것 같은 효과를 내었다. 그러고 나서 천의 정중앙에 천의 굴곡에 따라 굽어진 선이 아니라 수평/수직으로 교차하는 직선을 그은 후, 천을 벽면과 일치되게 고정시켜 걸어 놓았다. 이렇게 벽면에 전시된 천은 마치 늘어진 듯 보이지만 사실 이는 눈속임이다. <포>를 대면하고 선 관람객들은 이를 늘어져 있는 천으로 생각하다가 곧 십자로 오가는 직선들을 통해 착시에서 깨어나는 경험을 한다. 이를 통해 작가는 회화가 평면 위에 그려진 환영(illusion)이라는 사태를 확인시킨다. 이는 같은 시기 같은 고민을 했던 동료 작가 이승조의 <핵> 연작과 작품의 양상은 다르지만, 동일한 결론이다.
그러나 이 결론은 이건용을 만족시키지 못했음에 틀림없다. 그가 그 답을 (그 유형의 작업을) 더 밀고 나가지도, 그렇다고 회화를 아예 포기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회화의 조건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질문과 탐색을 한다. 종국에 회화가 환영이라면, 그 시작은, 그 창조적 처음은 무엇일까? ‘선’이다. 여기서 그는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선’은 어떻게 얻어지는가? 르네상스 이탈리아 회화의 위대한 변론자 알베르티는 『회화론』(1436)에서 지극히 당연한 관념론적 대답을 한다. 점이 이어지면 선이 된다고. 이건용도 바로 그 답을 인용한다. 그리곤 곧장 기각한다. 그 당연한 관념적 답이 놓친 생성의 동력, ‘신체’를 회화/그리기(drawing)의 궁극적 근원(arch-origin)으로 제시하면서.【주석3】
그리고 바로 이 맥락에서 그는 실험예술과 회화의 화해, 혹은 합일의 지점을 마련한다. 그 감탄스러운 결과물, 이건용 스스로도 매료되었음에 분명한, 그렇기에 그토록 오랜 세월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결과물이 <신체드로잉>(1976)이다.
신체드로잉은 ‘신체’를 회화/그리기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그간 회화의 다른 이름으로 당연시되어온 ‘시각미술’이라는 개념 또한 기각한다. 이는 그가 <포>에서 얻은 ‘남’의 답에 대해 만족할 수 없었던 지점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회화는 환영”이라는 답은 무엇보다도 회화를 시각에 속한 것으로 규정하고 제한한다. 그러나 회화적 환영의 생성 동력이 신체의 움직임이 분명하다할 때, ‘시각미술’이라는 개념은 ‘보고 그린다’는, 회화/그리기의 부분적 측면을 전면에 내세워 신체라는 근원적 생성 동력을 감추고 가리는 은폐술이 된다. 그는 이 은폐술의 핵심이 ‘보고 그린다’는 데 있음을 직감했던 것 같다. <신체드로잉>을 통해 그는 “왜 화면을 마주 바라보고 그려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지기 때문이다. 이건용은 회화의 근원적 생성 동력이 신체라는 것을 각성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음에 분명하다.【주석4】 이 시각 중심의 개념이 드리운 고정관념의 ‘포’를 찢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깨달은 회화의 궁극적 생성 동력을 드러내기 위한 전략으로 이건용은 ‘보지 않고 그리기’를 택한다.
이건용이 이 문제에 매우 깊이 천착했음은 그가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신체드로잉>이라는 동일한 제목 밑으로 서로 다른 다수의 그리기 유형들을 만들어낸 점에서도 짐작해볼 수 있다. 이는 그의 <신체드로잉> 작품 제목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신체드로잉>의 제목은 <신체드로잉-제작년도-유형번호>로 표기되는데, 1976년에 완결된 <신체드로잉>의 주요 유형들은 대략 7개 정도로 구분된다. 이러한 유형을 구분하는 요소는 일정하게 제한된 조건에서 화면과의 관계를 맺으며 신체가 만들어내는 움직임의 양상이다. 화면 뒤에서, 옆에서, 혹은 화면을 등지는 등으로 신체의 움직임을 제한하여 그 조건과 차이를 실험하면서 이건용은 다양한 유형의 <신체드로잉> 방법을 창안했다.
<신체드로잉 76-1>에서 이건용은 자신의의 신체 기장과 같은 길이의 베니어판(1976년 첫 번째 작품 기준 170x90cm)을 자기 앞에 세우고, 판 뒤에서 매직을 든 팔만 넘겨 상하로 선을 그어나간다. 판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선을 다 그어나가면 그어진 선들의 길이만큼 판을 톱으로 베어낸다. 그렇게 되면 다음번에는 처음보다 팔이 조금 더 넘어가므로, 신체가 허용하는 만큼 더 긴 선을 그을 수 있다. 같은 방식으로 반복적으로 선을 긋고 판을 베어나가다보면, 하나의 큰 판은 다섯 개의 조각으로 분리된다. 이렇게 베니어판을 잘라가는 작업은 신체를 회화 생성의 ‘근원적’ 생성력으로는 여기지만 ‘항상적’ 생성력으로 여기지는 않는 이건용의 작업관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신체는 분명 회화의 생성‘항’이지만, 이 ‘항’이라는 개념이 ‘항수’를 뜻하지는 않음은 <신체항>(1971)에서 이미 드러났었다. 그는 회화의 생성축으로서의 ‘신체항’이 다양한 제한 조건들에 의해 ‘항수’가 아닌 ‘변수’의 성격을 띠게 됨을, 작업 절차와 그 결과 모두에서 선명한 로직, ‘이벤트-로직’으로 구축하고 싶었던 것 같다.【주석5】 베니어판을 잘라내어 그림판과 몸이 만드는 관계가 변화하면서 달라지는 궤적을 보여주는 <신체드로잉 76-1>은 그러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충분히 선명하고도 드라마틱한 제작 방식이다. 이것이 <신체드로잉>의 첫 번째 유형이라는 점은 ‘신체’에 대한 주목과 더불어 ‘차이’, ‘유동성’, 혹은 ‘비결정성’에 대한 생각이 초반부터 그의 작업을 지배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실상 이 개념은 메를로-퐁티의 현상학과 노장사상의 영향 하에 1971년 작 <신체항>에서 이미 개념적으로 정초된 것이 회화에 도입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유동적 항으로서의 신체는 하나의 선으로 수렴하는 듯하면서도 차이 나는 자유로운 선들의 궤적을 남긴다. 이러한 선들의 궤적은 서로 다른 <신체드로잉> 유형들을 관통하는 공통의 특징을 이룬다.
<신체드로잉 76-2>에서 이건용은 베니어판을 자신의 뒤에 세우고 화면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팔을 뒤로 뻗어 판에 물감으로 선을 그린다. 그러면 판에는 그의 몸통을 제외한 부분에 선이 그어진다. 이 유형의 특별함은 작가의 그리기 행위가 이중으로 드러나면서 작가의 현존이 강하게 암시된다는 점에 있다. 작가의 신체항은 일차적으로는 그 팔이 뻗어 닿은 궤적에 따라 드로잉을 남긴다. 이 점은 <신체드로잉 76-1>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그림판을 막아선 작가의 신체 때문에 그림판에는 작가의 형상이 여백의 형식으로 남게 된다. 이로 인해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작가의 현존, 즉 작가가 거기 있었음을 뚜렷이 지각하게 되며, 그 결과로 작가 신체의 움직임과 그 움직임이 남긴 드로잉을 훨씬 유기적인 것으로 경험하게 된다. 그의 작업의 주춧돌이 되는 유형이 <신체드로잉 76-1>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신체드로잉 76-2>를 선호하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보는 이들은 작품에서 작가의 흔적을 찾기 마련인데, <신체드로잉 76-2>는 이러한 관람자들의 기본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 또한 <신체드로잉 76-2>는 다른 유형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직접적이고 선명한 작가 현존의 흔적을 통해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근본 물음에 대한 이건용의 답을 보다 친절하고도 분명하게 보여주는 유형이다. 수많은 인터뷰와 지면을 통해 이건용은 그에게 회화란, 세계와의 만남을 추구하고 그 만남에 대한 의지를 신체 행위로 발현하는 가운데 얻어진 궤적이 펜이나 물감의 선으로 구현된 결과물이라는 견해를 피력하곤 했다. 그렇기에 그에게 회화는 그리기의 주체와도, 그 주체의 신체와도, 또 그 신체의 행위와도 뗄 수 없는 관계항들의 산물이라 할 텐데, 이 때 결과물로서의 선의 궤적에 선행하는 관계항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유형이 <신체드로잉 76-2>인 것이다. <신체드로잉 76-2>는 그의 회화 관념을 한 마디 말의 거듬 없이도 고스란히 전달한다는 점에서 큰 매력을 지닌다.
그 밖에도 그림판을 측면으로 대하여 하트 형상을 빚어내는 <신체드로잉 76-3>, 부목으로 가한 신체 행위의 제한을 점진적으로 풀어줌으로써 선의 궤적을 변화시켜 부채꼴 형상을 만들어내는 <신체드로잉 76-4>, 넓게 벌린 양 다리 사이에 그림판을 놓고 선을 긋는 <신체 드로잉 76-5>, 그림판을 마주 보고 서지만 몸이 판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섬으로써 ‘보지 않고 그리기’라는 조건은 변하지 않는, 양팔을 동시에 사용하는 <신체 드로잉 76-6>, 그림판을 바닥에 놓고 무릎을 꿇은 채 자신의 몸을 컴퍼스처럼 움직여 반원의 궤적을 만들어내는 <신체 드로잉 76-7> 등, 다양한 유형화의 실험을 통해 이건용은 그리기 행위의 능동성과 수동성이 묘하게 중첩되는 자리에 회화를 위치시킨다.
회화/그리기가 무엇보다도 세계와의 만남이기에, 그것이 평생 거듭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다만 1970년대 후반의 <신체드로잉>이 그 구상과 형식논리의 유형화 및 완성에 치중되었다면【주석6】 1980년대부터 90년대까지의 <신체드로잉> 연작들에서는 그 형식논리 속에 비가역적으로 틈입해오는 구체적이고 특정한 시간상을 기록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때로 그것은 대구지하철참사와 같은 시대가 공유하는 사건이기도 하고, 때로는 작가의 나이 드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처럼 개인적 시간성이기도 하다. 구체적인 ‘사건’들의 ‘일어남’로부터 무심할 수 있는 관계항이란 것이 가능키나 하겠는가. 그러니 자연스럽고 당연한 변모이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서면 구체적인 사건들이 재현적 양상으로 <신체드로잉>에 개입하는 일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그것들은 1970년대에는 없었다가 1980~90년대에 도입된 다채로운 색채라는 흔적으로 남은 듯하다. 혹자는 이를 해석과잉이라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1970년대의 무채색 신체드로잉이 행위의 결과답게 역동적이면서도 매우 관념적이고 논리적인 인상을 주는데 비해, 2000년대의 신체드로잉은 다채로운 색상으로 인해 물적이고 감각적인 인상을 강렬하게 풍기며, 그 결과 피와 살을 지닌 무엇인가가 색채로 추상된 듯한 느낌을 떨칠 수 없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체와 추상을 돌고 돌아 이건용이 회귀한 자리는 ‘이벤트-로직’으로 대변되는 바, 그의 예술철학인 듯하다. ‘이벤트-로직’은 1975년 작 <장소의 논리>에서 일찌감치 선명하게 드러나, 지금껏 지속되고 있다.
III. 이벤트-로직 _ 도추로서의 예술
2017년 테이트모던은 이건용의 <장소의 논리>를 새로운 소장품으로 받아들였다. 테이트모던이 이건용의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 이 작품을 고른 것은 이 작품이 지닌 특별한 의의를 잘 간파한 탁월한 선택이라 평가할 수 있다. <신체드로잉> 연작이 회화의 정체성과 그 매체 형식에 관한 이건용의 물음과 답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라면, <장소의 논리>는 1971년 작 <신체항>에서 싹을 틔웠던 통찰, 즉 동일한 오브제(기표)가 장소와 그 장소에서 우연히 일어나는 일들로 인해 다양한 의미(기의)로 발화할 수 있다는 예술기호학적 통찰을 보다 명시적으로 보여준 대표작이기 때문이다. <신체드로잉>과 <장소의 논리>를 통해 이건용은 마침내 자신의 작업의 조형 논리와 의미 발화 논리를 모두 갖추게 된다.
<장소의 논리>에서 이건용은 흙바닥에 백묵으로 원을 그린 후 백묵을 던져버린다. 그리고 원 밖에서 원 안의 한 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기"라고 외치고, 원 안으로 들어가 같은 지점을 가리키며 "여기"라고 외친다. 곧이어 원을 빠져나가서 원을 등진 채 어깨 위로 손가락을 넘겨 동일한 원 안의 지점을 가리키며 "거기"라고 외친다. 이후 그는 돌아서서 다시 원을 향해 "저기"라고 하고, 원에 들어가서 "여기"라고 하고, 원에서 나와서 "거기"라고 하는 행위를 한 번 더 반복한다. 그런 뒤, 백묵으로 그린 원의 궤적을 밟아 한 바퀴 반 정도를 돌면서 "어디, 어디, 어디"를 외친다. 이후 작가가 관객 사이로 사라지면 퍼포먼스는 끝이다.
이 퍼포먼스에는 ‘장소성’의 문제와 발화의 ‘논리’에 대한 이건용의 생각이 더할 나위 없이 명시적으로 표명되어 있다. 먼저 드러나는 것은 장소성이다. 이건용의 신체가 지닌 한계와 맞물린 궤적의 원은 임의의 장소이다. 그러나 그가 퍼포먼스의 마지막에 “어디, 어디, 어디”를 외치는 데에서 알 수 있듯, 그 임의의 장소는 어디든 될 수 있는 잠재적 특정성을 지니며, 장소성의 형식 논리를 제시한다. 임의적이되 특정적일 수 있음. 이 형식 논리는 <장소의 논리> 퍼포먼스가 장소를 바꿔가며 수행됨에 따라 그 잠재성을 실현하는, 다름 아닌 ‘이벤트-로직’이다.
‘이벤트-로직’은 1971년 작 <신체항>에서 싹이 트고 1975년 작 <장소의 논리>에서 완결되어 이후로도 이건용의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수행과 발화의 논리이다. 어쩌면 단순히 ‘행사의 논리’로 해석되고 말 수도 있을 ‘이벤트-로직’은 그것이 모순형용임이라고 느껴질 때 비로소 제 의미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벤트-로직’의 모순형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벤트’ 개념을 다소 특수한, 현대미술과 예술철학의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맥락에서 ‘이벤트’는 ‘해프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미국의 팝 아티스트 클래스 올덴버그(Claes Oldenberg)는 1950년대 중반부터 일회적이고 우연성에 기댄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그 우발성을 강조하기 위해 ‘해프닝’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건용의 ‘이벤트-로직’의 한 축을 이루는 ‘이벤트’는 우연성, 즉흥성, 임의성 등을 뜻하는 것으로서의 ‘이벤트’이다. 그렇게 이해하게 되면, ‘이벤트-로직’은 모순형용으로 보이게 된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술철학의 맥락에서 보자면, 이 ‘해프닝’으로서의 ‘이벤트’는 마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일어남’(Ereignis)이라고 불렀던 것과 매우 유사하다. 이 개념이 영어로는 이벤트나 해프닝으로 번역됨은 물론이다. 하이데거는 이 ‘일어남’이라는 것을 ‘존재’ 자체의 다른 표명으로 여겼는데, 이는 곧 ‘이벤트’가 생성의 계기를 이룸을 뜻한다. 예술작품은 작가가 수행하는 즉흥적이고 우연한 임의의 행위에 의해 존재를 개시하며 생성되는 것이다. <장소의 논리>가 그러하듯이.
그렇다면 ‘로직’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로직’은 통상 ‘논리’로 번역되며 ‘필연적’, ‘인과적’이라는 연상을 상식적으로 수반한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의 논리학에 힘입은 이건용의 ‘로직’은 “언어가 관계 속에서 파생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논리로서, 논리의 성격을 잃지 않으면서도 논리 속에 상대성, 관계성을 도입한다.【주석7】 이는 이미 <신체항>에서 오브제의 의미의 변용을 통해 피력되었던 논리지만, <장소의 논리>에서 사용된 ‘저기’, ‘여기’, ‘거기’라는 전환사(Shifter)는 이러한 관계성의 형식 논리를 극단적으로 추상하여 보여준다.【주석8】 이건용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동일한 지점이 이건용이 점하는 위치에 따라 ‘저기’, ‘여기’, ‘거기’로 전환되는 상황은 퍼포먼스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언어로 대변되는 기표와 그 기표에 따라붙는 기의가 대상에 들러붙어 고정된 것이 아님을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게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건용이 <장소의 논리>에서 사용한 이 전환사들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가 무척 애호한 ‘도추’ 개념과 맞물려 있다. 도추(道樞)의 ‘추’(樞)는 문을 문지방과 연결시켜 문을 여닫을 수 있게 하는 돌쩌귀를 뜻한다. 이 돌쩌귀의 암수를 어떻게 맞추느냐에 따라 문은 안으로 열릴 수도, 밖으로 열릴 수도 있다. 그렇다면 도추는 도(道)의 문이 한 쪽으로만 열리게 고정되어 있지 않음을 뜻하는 은유라 할 것이다. 이른바, ‘진리의 비결정성’이다. 이건용은 자신의 신체를 움직여 ‘이벤트’로서의 장소를 생성하고, 그렇게 생성된 장소와 신체를 통해 변화하는 관계를 맺음으로써 다양하게 결정되는 열린 ‘로직’의 작품을 만들어내고자 하였고, 이를 ‘이벤트-로직’이라는 논리로서 거듭 제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로직을 이런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의 ‘이벤트-로직’은 더 이상 모순형용이 아니다.
1979년 작 <달팽이걸음>은 ‘이벤트-로직’이 다의성을 넘어 ‘대리보충’(supplement) 혹은 역설의 수준까지 한 걸음 더 나아간 드로잉 퍼포먼스이다. 이건용은 전시장 한쪽 귀퉁이에 맨발로 쪼그리고 앉아 오른손에 백묵을 쥐고 좌우로 팔을 흔들며 자신의 몸 앞쪽 바닥에 선을 긋는다. 동시에 쪼그려 앉은 상태에서 발바닥을 밀어 조금씩, 달팽이처럼 아주 느리게 앞으로 나아간다. 그에 상응하여 백묵의 드로잉은 그 궤적을 천천히 늘려가지만, 동시에 앞으로 나아가는 작가의 양발의 움직임에 의해 그 궤적은 부분적으로 지워진다. 앞에서 손이 그리면, 그를 따라가는 발은 지우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히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백묵의 드로잉이 발에 의해 뭉개지면서 발바닥이 지나간 자리는 나름의 회화적 방식으로 작가의 신체의 흔적을 남긴다. 역설적으로 강렬해진 이중의 흔적이다. 작가의 신체는 작품 조형을 생성시키면서 소멸시키는,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생성과 소멸을 동시에 실행함으로써 작품을 생겨나게 하는, 이벤트-로직의 ‘신체항’으로 작용한 것이다.【주석9】
태극의 음과 양이 서로 꼬리를 물고 돌며 하나를 이루듯이,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생성과 소멸이 나뉜 둘이 아니라는 것이 그가 지닌 생성철학의 세계관이었음을 <달팽이걸음>은 잘 보여준다. 동시에 이는 그가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차연(différance) 개념을 염두에 두고 작품 의미가 보는 이에 따라 차이 나게 결정되어도 좋다고 말한 속내의 사유이기도 하다.
“예술은 예상할 수 없는 범위와 예상할 수 없는 관계를 촉진시키고 위치시켜주면서, 바로 자기가 위치하고 있고 자기가 생각하고 있고 자기가 공들여 쌓아 견고하게 세워놓은 그 성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하는 다이너마이트야.”【주석10】
그렇게 자신의 몸과 세계와 타인들에게 작품의 ‘이벤트-로직’의 한 자락씩을 거리낌 없이 내어주면서, 이건용은 자신이 속했던 시대의 틀을 깨고 생각의 전환을 요청하는 도추의 다이너마이트를 던지는 우리 시대 우리 미술의 한 중요 이벤트(Ereignis)가 되었다.
1. 1960-70년대
1960-70년대, 이건용 작가의 초기 작품은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근원적인 물음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작가는 ‘신체’와 ‘관계’라는 두 키워드를 통해 스스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나간다. 세계와 만나는 가장 직접적이고 본질적인 조건으로서의 ‘신체’, 세계 및 여러 사물과 관련을 맺는 방식으로서의 ‘관계’를 탐구함으로써, 기존의 회화적 관습에 의문을 제기하고 미술에서 보여주는 세계 지각의 방법론을 확장해 나간다. <신체항>(1971)에서는 자신의 몸과 마찬가지로 나무 또한 신체로 보고, 매개로서의 신체가 세계를 만나는 조건을 제시한다. <관계항>(1972)에서는 전시장에 놓인 돌과 나무상자,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관람객 사이의 관계 맺기를 통해 사물이 작품으로 다시 태어나는 지점을 탐구한다. 그리고 <포>(1974-75) 연작에서는 회화가 평면 위에 그려진 환영이라는 기본적인 명제를 다시 확인하면서, 관람객에게 현상적인 경험을 제공한다. <건빵 먹기>(1975)를 비롯한 다수의 퍼포먼스는 그가 ‘이벤트-로지컬’이라 명명했듯이, 사건의 본질을 이미 간파한 매우 계획적이고 논리적인 방식으로 행위를 전개하여, 개개의 행위들이 장소, 오브제와 서로 관계 맺음으로써 하나의 사건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드러낸다. 특히 <장소의 논리>(1975)에서는 신체가 움직이면서 장소를 부단히 바꾸어 나가는 지점들을 확인하면서 세계의 구조, 세계를 지각하는 방법을 논리적으로 탐색하기에 이른다. 이 시기의 가장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신체 드로잉>(1976) 연작은 <신체항>에서처럼 작가의 신체를 세계와 만나는 매체로 활용하는 동시에, 그리는 행위 자체를 사건화하고 신체에 가한 제약으로 인한 논리적 귀결로서의 행위를 반복한다는 점에서 ‘이벤트-로지컬’의 기본 개념을 따른다. 더 나아가 <달팽이 걸음>(1979)에서는 특정한 신체적 조건 하에서 그리는 행위와 지우는 행위가 동시에 일어나는 역설적인 상황을 보여주는데, <신체 드로잉>과 달리 화면의 경계를 한정하지 않고 전시 공간 자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작가의 신체가 만나는 장소(전시장), 타자(관람객) 사이의 거리감을 더욱 좁혀나간다.
<신체항>(1971)은 이건용의 최초 설치 작업인데, 땅에 뿌리를 내린 나무를 입방체의 지층과 함께 떠내어 전시장에 그대로 옮겨 놓은 모습을 하고 있다. 작가는 자연에서 가져온 이 거대한 생목을 그 자체로 '신체항'이라 명명한다. 이때의 ‘항(項, term)’은 식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소를 나타내는 수학 용어로서, 이 작품에서는 신체가 세계를 만날 수 있는 각각의 경우, 즉 조건을 제시한 것이다. 자신의 몸과 마찬가지로 나무 또한 그 물리적 관계를 통해 세계를 비언어적으로 만나는, 하나의 매개로서의 신체가 된다. 이때 관람객은 전시장이라는 인위적인 장소에서 인간이 최소한으로 개입하여 그곳으로 옮겨진 자연 그대로의 나무를 만나게 되는데, 이러한 만남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당혹감을 느끼게 하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70년대 당시에는 '전람회의 장소'라고 하면 무언가 만든 것, 회화나 조각 같은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곳이라는 통념이 강했다. 그런데 지층과 생목이 전시장이라는 공간에 놓임으로 인해, 그곳에서 관람객의 신체는 생소한 신체와 만나게 된다. 즉 <신체항>을 통해 관람객들은 전시장이라는 특수한 문화와 장소 안에서, 예상치 못했던 것 혹은 만나지 않아야 할 것을 갑자기 만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역시 설치 작품인 <관계항>(1972)은 한 면에 둥근 구멍이 뚫린 나무 상자 두 개의 안과 밖에 일곱 개의 돌들을 위치시키는 작업이다. 사물과 전시 공간,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관람객들이 관계 맺기를 시작하며, 이러한 관계의 시작으로 의외의 사물은 작품이 되고, 관람객은 이렇게 태어난 작품을 감상하며 사유의 세계로 인도된다. 평면 작업인 <포>(1974-75) 연작은 이건용 작가 역시 스스로 자문했듯이, 회화의 본질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였던 70년대 초 한국 현대미술의 상황을 반영한 작품이다. 작가는 천을 늘어지게 한 다음, 늘어진 부분에 스프레이로 먼지가 앉은 것 같은 효과를 낸다. 그리고 천의 정중앙에 천의 굴곡에 따라 굽어진 선이 아니라 수평/수직으로 교차하는 직선을 그은 후, 천을 벽면과 일치되게 고정시켜 걸어 놓는다. 이렇게 벽면에 전시된 천은 마치 '트롱프뢰유'처럼, 늘어진 형상이라는 착각을 일으키지만 사실 이는 눈속임이다. <포>를 대면하고 선 관람객들은 이를 늘어져 있는 천으로 생각하다가 곧 십자로 오가는 선들을 통해 착각에서 깨어나는 경험을 한다. 이는 지각자의 현상적인 체험이며, 이를 통해 작가는 회화가 평면 위에 그려진 환영이라는 기본적인 명제를 확인시킨다.
1975년부터 선보인 다수의 ‘이벤트-로지컬’에서 이건용 작가는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행위가 아닌 매우 계획적이고 논리적인 방식으로 행위를 전개한다. 대표적으로 <건빵 먹기>(1975)에서 작가는 의자에 앉아서 책상에 놓인 건빵을 집어 먹는다. 이후 옆에 있는 사람이 작가의 팔목에 각목을 대고 붕대로 감으면 작가가 다시 건빵을 집어 먹는데, 처음보다 먹는 것이 부자연스러워진다. 다시 옆에 있는 사람이 작가의 팔꿈치 부근에 각목을 대고 붕대로 감는다. 이제 작가는 팔을 제대로 구부릴 수 없기 때문에 건빵을 입에 넣기가 어려워진다. 그는 얼굴 위에서 건빵을 떨어뜨려 입으로 받아먹는데, 이때 대부분의 건빵은 얼굴을 맞고 튕겨나간다. 또 다시 옆에 있는 사람이 작가의 어깨 부근에 각목을 대고 붕대로 감는다. 작가는 의자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여서 건빵을 줍고, 얼굴 위에서 건빵을 떨어뜨려 입으로 받아먹는다. 이때도 대부분의 건빵은 얼굴을 맞고 튕겨나간다. 이렇듯 처음에 아무런 제한이 없는 상황에서의 건빵 먹기와 손목, 팔꿈치, 어깨를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의 건빵 먹기는 그 과정과 결과가 모두 동일하지 않다. 이건용은 움직임의 제한이라는 사소한 외부적 요소가 ‘먹는다’는 행위에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신체의 조건과 일상적 행위 사이의 관계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이벤트-로지컬’ 중 <장소의 논리>(1975)는 신체와 관계에 대한 이건용의 고찰을 가장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이 퍼포먼스에서 작가는 운동장의 흙바닥에 백묵으로 원을 긋고 백묵을 던져버린다. 그리고 원의 내부를 향해 "저기"라고 외치고, 원 안으로 들어가서 원의 내부를 가리키며 "여기"라고 말한다. 곧이어 원을 빠져나가서 뒤에 있는 원을 향해 "거기"라고 말한다. 이후 작가는 돌아서서 다시 원을 향해 "저기"라고 하고, 원에 들어가서 "여기"라고 하고, 원에서 나와서 "거기"라고 한다. 계속해서 원을 밟고 한 바퀴 반 정도 돌면서 "어디, 어디, 어디"를 외친다. 이후 작가는 관객 사이로 사라지고, 작가가 손짓하면 어떤 사람이 "이건용의 이벤트가 끝났습니다."라고 말한다. 이 퍼포먼스에서 작가가 임의적으로 그린 원형의 선으로 인해 어떤 특정한 장소가 생겨났고, 그 특정한 장소는 작가 신체의 위치에 따라 서로 다르게 호명된다. 이를 통해 이건용은 장소와 신체의 관계성을 드러내고, 마지막으로 원을 따라 걸으며 외치는 "어디"라는 말을 통해 장소와 신체 모두가 상대적임을 부각한다.
<신체 드로잉>(1976) 연작은 1960-70년대 이건용 작가의 초기 작업 중에서 가장 핵심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이 작업에서 <신체항>의 개념을 다시금 해석하여 세계를 지각하는 매개항으로서 신체를 제시한다. 나아가 그는 ‘그리기’라는 행위에 대한 물음을 통해, 정신의 지시를 따르는 보조자로서가 아니라 스스로 행동을 수행하는 주체자로서의 권위를 신체에 부여한다. <건빵 먹기>에서는 움직임을 제한함으로써 신체 조건과 ‘먹는다’는 일상적 행위 사이의 관계를 보여줬다면, <신체 드로잉>에서는 미술가로서 ‘그리는’ 행위의 본질에 대해 묻는다. 반복적인 행위들의 나열이 곧 하나의 논리적인 사건을 이룬다는 점에서 <신체 드로잉>은 그의 ‘이벤트-로지컬’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업으로 볼 수 있다.
세계와의 만남에서 신체가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하다고 보는 이건용은 ‘왜 화면을 마주보면서 그려야만 하는가?’하고 전통적인 드로잉 방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래서 화면 뒤에서, 옆에서, 혹은 화면을 등지는 등 신체의 움직임을 제한시킨 후 이러한 조건 속에서 남겨지는 신체의 흔적을 그림 속에 담아낸다. 신체 조건을 제한하는 방식은 <신체 드로잉 76-1>에서 <신체 드로잉 76-7>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르게 나타난다. <신체 드로잉 76-1>에서는 작가의 신체 기장과 비슷한 길이의 베니어판을 자신의 앞에 세우고, 판 뒤에서 팔만 넘겨 매직으로 선을 그어나간다. 판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선을 다 그어나가면 그어진 선들의 기장만큼 판을 톱으로 베어낸다. 그렇게 되면 다음번에는 처음보다 조금 더 팔이 넘어가다보니 더 긴 선을 그을 수 있다. 같은 방식으로 반복적으로 선을 긋고 판을 베어나가다보면, 하나의 큰 판은 다섯 개의 조각으로 분리된다. 이렇듯 <신체 드로잉>은 여타의 이벤트와는 달리 이벤트 중 일어난 신체의 궤적이 화면에 남겨져 행위에서만 끝나지 않고 평면 작업으로도 이어진다는 점에서 드로잉이나 회화의 특성도 지닌다. 하지만 작품의 제작 과정에서의 작가의 신체 행위가 작품의 중요한 일부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드로잉이나 회화와는 구분되는 특수성을 지닌다. <신체 드로잉 76-2>에서는 베니어판을 자신의 뒤에 세우고 화면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팔을 뒤로 뻗어 판에 물감으로 선을 그린다. 그러면 판에는 작가의 신체를 제외한 부분에만 선이 그어진다. 행위한 장소에 흔적으로 남은 작가의 신체는 <신체항>의 한 그루 나무처럼 작가의 존재를 반영함과 동시에 작가의 신체를 자각하게 해주며, 양측을 연결하는 매개항으로 남는다. 작가는 행위를 통해 세계를 경험하고, 그 행위와 결과를 지켜보는 관람객들은 작가의 신체와 세계와의 만남을 목격한다. 행위와 드로잉을 결합한 독특한 방식으로 다의적 매개항으로서의 신체를 상징하는 <신체 드로잉>에서, <신체 드로잉 76-2>는 이러한 맥락을 가장 잘 드러낸다. 작가의 신체가 선의 궤적에 의해 암시적으로 드러나고, 여백으로 남은 작가의 신체는 하나의 항으로, 그리고 신체를 둘러싼 선의 움직임은 세계를 자각하고자 하는 의지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신체 드로잉 76-3>에서는 정면으로 세워져 있는 종이 앞에 작가가 측면으로 서서 그 자세로 팔을 위아래로 움직여 연필로 선을 긋고, 뒤돌아서서 반대쪽을 보고 측면으로 서서 같은 방식으로 선을 그어, 마침내 윗부분이 약간 움푹 들어간 원의 형상, 곧 하트 형상을 남긴다. <신체 드로잉 76-4>에서는 부목이라는 추가적인 재료를 사용하여 신체를 제한한다. 작가는 종이를 탁자 위에 올려두고 오른팔의 손목과 팔꿈치에 각목을 대고 붕대를 감아 팔의 움직임을 제한한 뒤 단계별로 묶음을 풀어나가면서 연필로 선을 그어나간다. 이 과정에서 처음에는 선을 그려나가는 반경이나 선의 길이가 매우 제한되지만, 점차 부목을 풀어가면서 팔의 움직임이 원활해지면 선의 표현도 자유로워진다. 결과적으로 삼단으로 구분된 부채꼴 모양의 선이 남겨진다. 이렇듯 <신체 드로잉 76-4>에서는, 다른 작업들에서 신체 구조상 스스로 제약을 부과하여 선의 움직임에도 제한이 생긴 것과 달리, 부목이라는 외적인 조건 때문에 신체에 인위적인 제약이 가해진다. <신체 드로잉 76-5>에서는 두 다리를 양 옆으로 넓게 벌리고 그 사이에 종이를 놓고 연필로 위에서 아래로 선을 그어나간다. 작가는 “직선을 그을 거야”라고 외치지만, 선을 긋는 몸의 중심이 가운데이기 때문에 화면 중앙에서 점차 다리에 가까이 갈수록 선은 더욱 휘어진다. <신체 드로잉>에서 화면은 대상을 표상하는 공간이라기보다 행위의 장소로 작용하는데, <신체 드로잉 76-5> 작업에서 이러한 점이 가장 잘 드러난다. 여기서 화면은 재현의 공간이 아닌 행위자의 리듬, 에너지, 움직임을 응축적으로 담아내는 장소가 된다. <신체 드로잉 76-6>에서는 작가가 종이를 마주보고 서되 신체가 판에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선다. 그리고 양손을 위로 뻗어 두 손이 머리 위에서 만나도록 연필로 선을 긋고, 다시 바깥쪽으로 원을 그으며 내려와서 배 부근에서 다시 만나게 하여 판에 커다란 원을 형상화한다. 비록 여기서 신체가 화면을 마주하지만, 신체가 판에 거의 밀착되어 고정되어 있는 한, 움직임의 범위에 제약이 생겨 제한된 범위에서만 드로잉이 가능하다. <신체 드로잉 76-7>에서 작가는 종이를 눕혀 놓은 상태로 오른쪽 무릎을 꿇고 앉는다. 그 자세에서 몸을 축으로 하여 팔을 뻗고, 어깨를 고정시킨 상태에서 팔만을 움직여 연필로 화면 위쪽에 반원의 선을 좌우로 계속 그린다.
이와 같이 일곱 가지 <신체 드로잉>의 일련의 방식들에서는 모두 제한적인 조건이 가해진 신체의 움직임이 백묵, 매직, 물감 등의 재료를 통해 베니어판, 종이와 같은 화면 위에 닿아 만남으로써 드로잉을 생성한다. 이건용에게 드로잉이란 “그려지는 재료와 평면이 신체와 직접적으로 만나는 조건(항)”으로서, 그어진 선 하나하나가 작업의 성격, 작가의 의도, 방법, 표현 형식 등을 직간접적으로 제시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이건용은 <신체 드로잉>을 통해 그리는 행위의 결과로서 남겨진 어떤 상이 아닌, 그리는 행위 자체의 본질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방법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이건용은 우선 그리는 자의 시선 앞에 화면이 놓이고 눈(지각)과 손(행위)이 동시적으로 작용하는 회화 작업상의 관습적 인식관계를 포기하고, 신체 자체가 곧 지각자요 표현자라는 새로운 관계를 수립한다. <신체항>에서도 나타났듯이, 이건용에게는 인간이든 나무든 신체가 곧 세계를 지각하는 동시에 표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는 신체가 단순히 생물학적인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관통하여 지각하는 본질임을 <신체 드로잉>을 통해 드러낸다. 그리하여 그의 <신체 드로잉>은 머리의 지시에 따라 손이 수동적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신체와 평면이 만나는 조건 자체가 그리는 행위로 나타난다. 그는 화면 뒤에서, 옆에서, 혹 마주 보더라도 화면을 보지 않고 그림으로써 신체의 지각을 극대화시킨다. 화면에 은유적으로 남은 신체의 움직임은 세계와의 만남의 장을 열어주며, 이때 작가의 신체는 세계와의 만남에서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달팽이 걸음>(1979)은 <신체 드로잉>에서 한발 더 나아간 드로잉 이벤트이다. 작가는 공간의 한쪽 귀퉁이에 맨발로 쪼그려 앉고, 오른손에 백묵을 쥐고 좌우로 팔을 흔들며 자신의 몸 앞 바닥에 선을 긋는다. 동시에 쪼그려 앉은 상태에서 발바닥을 이용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백묵이 부러지면 새로운 백묵을 사용한다. 자신의 몸 앞에 그었던 선 위로 양 발이 지나가면서 지워진 자국을 남긴다. 그리고 정해진 거리에 도달하면 일어선다. <달팽이 걸음>은 쪼그려 앉아 신체에 제약을 가한다는 점에서 <신체 드로잉>과 유사한 방법을 취하지만, 작가의 신체가 드로잉을 생산하는 동시에 제거하는 이중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화면의 한계를 설정하지 않은 채 무한의 공간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달팽이 걸음>에 나타난 신체의 궤적은 작가의 인식작용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체 행위나 작용에 의한, 보다 원초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때 신체 행위는 반복적으로 좌우로 선을 긋는 '0'과 '1'의 끊임없는 디지털적 행위와 맨발로 조금씩 지워나가는 아날로그적 행위가 대비되는데, 이로써 남겨진 궤적은 디지털 문명 속에서 달팽이처럼 느리면서도 꾸준한 걸음을 걸어간 작가가 일구어온 삶과 작품세계를 연상하게 만들기도 한다.
회화 부문에서 이건용 작가는 <신체 드로잉> 작업 이전에 자유로운 선의 흐름을 활용한 크로키나 감각적인 채색이 드러나는 초상화, 기하학적 형태로 화면을 분할하여 채색하는 추상화 작업을 주로 하였다. 그리고 <신체 드로잉> 작업을 시작한 이후에는 콘테, 연필, 색연필, 붓 등 다양한 재료를 활용하여 선 드로잉을 실험한다. 이 작업들에서 작가는 의식적이고 규칙적인 그리기 행위를 반복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타난 결과는 재료 자체의 특성으로 인해 번지고 뭉개지거나, 중력으로 인해 흘러내리기도 하며, 오른손잡이라는 작가의 신체적 특성으로 인해 의도대로 잘 그려지지 않는 등 우연적인 요소가 개입하여 불규칙하게 나타난다. 입체 부문에서는 주로 전시장 공간을 활용하는데, 분필을 사용하여 바닥에 한정된 공간을 구성하고 나뭇가지와 돌, 로프 등의 오브제를 활용한다. 이들은 임시적인 공간 안에서 각자 다른 위치를 차지하고 상이한 맥락에 속하면서도, 서로 묶이고, 쌓이고, 걸치는 등 다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공간 안에서의 오브제들 사이의 관계는 관람객에게까지도 확장되어 이들 또한 그 장소 속으로 불러들인다. 퍼포먼스 부문에서는 ‘이벤트-로지컬’, 즉 작가 스스로 사건의 본질을 이미 간파한 논리에 따라 예측 가능한 행위만을 드러내는 작업들을 꾸준히 선보였다. 여전히 회화의 위상이 높았던 1970년대에 이건용의 실험정신이 깃든 이러한 이벤트들은 한국 현대미술의 지평을 넓혔다고 평가된다.
2. 1980-90년대
<무제>(1982-87) 시리즈는 이미 1970년대에 아이디어를 생각했으나 적당한 나무의 조건과 작업 여건을 만나지 못하다가 1980년대에 실현한 작품이다. <무제 83-1>, <무제 83-2>에서는 곁가지를 정교하게 깎고 다듬어 원가지와 접속시키고, <무제 83-9>에서는 아카시아 나무의 굵은 나뭇가지들로 프레임을 만든 후 가는 나뭇가지들이 이를 지탱하도록 한다. <무제 83-11>에서는 각목으로 만든 프레임에 은행나무 가지를 잘라 비스듬히 부착한다. 이처럼 <무제> 시리즈는 생목(生木)을 이용한 입체 작품들로, 전기톱과 대패로 숙련되게 절단하거나 깎고 밀어내는 등 극도로 절제된 작가의 작업이 개입된 관계론적 구조물이 플로어와 같은 장소에 놓인다. 작가 자신의 말에 의하면 이는 "자연과 의논"하여 만들어낸 작품들인데, 작가는 객체로서의 사물(주로 나무)이 스스로 그러하던 상태를 최대한 존중하면서도, 주체로서 극히 절제된 태도로 지니고 그 상태에 개입하고자 사물과 의논한다. 이러한 "의논"의 결과로 나온 사물/작품은 객체로서 본디 갖고 있던 상태와 매우 절제된 주체의 개입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관계를 보여준다.
<무제> 시리즈에 등장하는 '상태와 장소의 관계', '사물과 사물의 사이', '원상태' 등의 개념들은 모두 '3차원적 공간의 일루전을 배제하고, 작품이 '놓여야 할 장소에서 고립되는 것'을 거부하는 뜻으로 사용된다. 이로써 이건용은 또한 ‘만든 부분과 만들지 않은 부분간의 의존적인 상태’, '장소와 사물에서 즉각적으로 성립되는 지각과 인간의 통시적인 문화적 경험 사이의 긴장 관계'를 보여주고자 시도한다. 그러므로 80년대 초중반의 <무제> 시리즈는 자연 상태의 나무를 지층 채로 떠내어 전시장에 옮겨와 세계와 만나는 하나의 신체로서 ‘나무’를 보여준 <신체항>(1971), 백묵으로 바닥에 원을 그리고 돌을 그 안에 가두거나 나뭇가지를 끈으로 연결해서 삼라만상 내에 존재할 사물들의 네트워크를 다룬 <관계항-72>, <관계항>(1972) 등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이들 70년대 입체 작업의 후작으로서 이들을 변주하는 성격을 띤다.
1980년대 전반에 걸쳐 이건용은 70년대 말의 작업들을 재해석하고 심화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그러나 80년대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그가 진행한 설치 작업들은 주로 자신의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위상을 구성하는 일상적 물건들로 이루어져 있다. 80년대 후반은 이건용에게 있어 자신의 생애 전반에 걸친 창작을 일관된 관점에서 반추하면서 자신의 작업과 그것을 둘러싼 역사, 문화 등의 맥락들이 어떤 관계에 놓여있는지를 궁구하는 시기로 나타난다. 여기서 그는 모든 예술이 소통의 기능을 지니며 그러한 기능이 끝나면 예술도 소멸한다는 입장을 보인다.
1980년대의 회화에서는 70년대의 신체드로잉이 변주되어 나타난다. 이때 화면의 상중하를 층위로 구획지어 수직선을 병렬하거나(76-1), 화면 가운데에 인체의 실루엣을 여백으로 남겨두고 방사하는 선들을 그리거나(76-2), 좌우 팔을 돌려 하트 형상을 그리는(76-3) 등의 제작 방식은 동일하다. 그러나 다채로운 색의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여, 퍼포먼스의 결과로서 매직 또는 연필 선만이 남았던 70년대의 신체드로잉과 달리 '회화'로서의 매력을 한층 살린다. 그리하여 80년대에는 ‘회화 양식’으로서의 '드로잉' 자체에 보다 큰 의미를 부여하는 신체드로잉 작품들이 눈에 띈다. 1985년의 <신체 드로잉 85-0-2>와 같은 종류의 드로잉이 이에 해당하는데, 여기서 작가는 검은색 화면 오른쪽에 신체드로잉 76-2의 방식으로 드로잉 하되 흰색/파란색 계열의 물감을 사용하고, 화면 중앙에 여백으로 남은 작가의 실루엣의 윤곽을 정리한 후 검게 채색한다. 그리고 신체 형상 가운데에 자신의 신체드로잉 76-2 퍼포먼스 사진 네 컷을 세로로 이어 붙인다. 이제 화면 왼쪽에 신체드로잉 76-3의 방식으로 드로잉 하되 여러 물감을 사용하여 하트 형상을 남긴다. 이건용이 1976년 이후 줄곧 보여 왔던 신체 드로잉의 연장선상에 놓여, 여전히 그의 행위는 인간의 신체가 중심축이 된 반경으로서의 그것에 머물며 반복되는 행위로서의 긋기와 신체성의 개념을 확인한다. 그러나 여러 가지 색채가 등장함으로써, 이제는 단순히 일회적 이벤트로서의 그리기에만 머물지 않고, 행위 이후에 그 흔적으로 남게 된 선의 궤적에도 적지 않은 관심을 둔다. 즉 80년대의 신체드로잉은 행위 자체의 개념 설명에 그치지 않고 ‘드로잉으로서의 행위’와 ‘회화로서의 드로잉’을 일체화시키려는 관심의 반영인 것이다. 그리하여 종전의 심각하고 건조한 화면 대신 밝고 생동한 여울이 화면에 만들어진다. 화면에 남은 선의 궤적들에는 행위의 중요성이 여전히 잠재되어 있으면서도, 행위의 결과를 기술하여 보여주는 행위의 알리바이에 그치지 않는다. 이제 드로잉은 행위의 이벤트성에 묶여 있거나 관념의 틀 속에 갇혀있지 않고 그로부터 부단히 벗어남으로써 폭넓은 인식이 가능한 표현의 장이 된다. 이 장에서 행위는 관념으로만 남지 않고 부단히 표현으로 수렴되어 나간다. 80년대의 신체드로잉에서 나타난 그리는 것의 회복, 즉 손의 복권은 이건용의 회화가 (아직 이벤트성으로서의 관념이 혼재되어있기는 하지만) 하나의 언어로서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처럼 1980년대에는 신체드로잉에 색채를 도입하여 회화로서의 면모를 부각했다면, 1990년대의 <인간항> 연작에서는 70년대의 개념적 드로잉에 단편적 이미지들을 병치하거나 중복하기에 이른다. <인간항(중년 부인)>(1990)에서는 신체드로잉 76-2의 결과 화면에 남겨진 인체 실루엣이 다채로운 색채를 입는 것에서 나아가 한 인물의 형상으로 변환된다. 그러다 점차 신체드로잉에서 벗어나 민족문화의 원형을 소재로 한 인물이나 무속적인 이미지로부터 다양한 현실의 이야기들을 화면에 담는다. <인간항(단기원년)-30>(1991)에는 가야의 문양이 그물주머니의 형태로 변형되어 숫자와 함께 등장하고, <인간항(신도시)-4>(1991)에서는 얽히고설킨 미로 같은 구조물의 내부가 보인다. <인간항(거북이 서식처)-9>(1991)에서는 거북이가 원형질을 연상시키는 추상 형태들로 변형되어 자유롭게 배열되고, <인간항(중동여인)-20>(1991)에서는 이국적인 미지의 여인이 등장한다. <인간항>을 통해 이건용은, 80년대에서보다 더 적극적으로, 미술을 하나의 언어로서 ‘소통’을 위해 사용하고자 삶의 문화를 실현하고 생성하는 실험을 행한다. 이러한 문화회고 시스템을 거치면서 작가는 정제되고 개념적인 70년대의 작업에 비해 많은 표현의 자유를 얻게 된다. 70년대의 <신체드로잉>에서 신체를 매개로 세계에 접근하고 이를 증명하고자 했다면, 80년대의 <신체드로잉>을 거치면서 관념은 점차 폭넓은 인식과 소통을 위해 표현으로 수렴되며, 이제 90년대의 <인간항>에서는 신체를 탈중심화하고 세계의 인식을 둘러싸고 있는 문화적 조건들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이건용은 스스로 사물로서의 신체를 문화발전론으로 해소시키려는 의지를 밝힌다. 이는 그의 미술이 곧 잃어버린 삶의 지표를 찾고자 하는 문화적 행위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제 이건용에게 ‘회화’란 현실의 허구나 일루전이 아니라 문화를 실현하고 산출하는 행위이며, 그의 회화 작품은 삶의 현실 속에서 조우되는 다차원적 상황들을 문화회고적 시스템으로 번역한 결과이다. 그리하여 작가는 <인간항>을 통해 이 시점의 현실을 채우고 있는 다층적인 문화 내용을 한 화면에 집적시키고, 이것들을 우리의 문화의식 안에서 근친상간적으로 교합시킴으로써 오늘의 상황을 읽고자 한다. 이러한 그의 제작 태도는 회화의 부활을 통해 소통의 문제를 해결하고, 삶과 문화의 실현 및 생성을 기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로써 그는 확신을 갖고 삼차원의 공간으로부터 이차원의 공간으로 복귀하고자 하는 튼튼한 명분을 붙잡은 것이다.
이렇듯 이제 이건용의 미술은 하나의 문화적 행위로서 기능한다. 1960-70년대의 작품이 사물, 장소, 구조, 논리, 신체의 패러다임 아래 있었다면, 1980-90년대의 작품은 개인과 세계와의 관계를 넘어 예술과 삶, 예술과 역사와의 상관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70년대의 작품들, 대표적으로 신체드로잉이 작가 자신의 신체로서 세계와 만나는 조건을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증명해 보였다면, 1980년대 이후에 들어서 작가는 보다 직접적인 소통을 추구하며 삶의 형식으로서의 ‘문화’에 대한 본질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회화뿐만 아니라 설치와 퍼포먼스에서도 이러한 시도가 나타나는데, 우선 설치 작품인 <물로부터>(1988), <예술의 소멸>(1989) 등은 논리만이 강조되었던 70년대의 작품들에 비해 삶과 역사의 총체성 안에서 실현된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로부터>는 회색 도시 속 ‘화랑’이라는 밀폐된 공간 안에, 물이 담긴 페트병 여러 개에 줄을 묶어 천장에 매달고 각각의 병 안에서 금붕어가 살아 헤엄치게 한다. 그리고 페트병 위에는 푸릇푸릇한 식물을 늘어뜨려 놓는다. <예술의 소멸>은 작가가 오래 전에 발표한 바 있는 기존의 입체 작품들을 설치하고, 주방이나 세면장의 도구들을 벽에 일렬로 걸고, 20년 묵은 아버지 서재의 신문을 쌓아놓고, 화초와 물통, 거울 등 일상생활의 용품들을 동원한 작품이다. 이 작품들은 특정한 공간이 강요하는 논리에 의해 폐쇄되지 않으며, 문화적 상황 안에서 대립되는 어떠한 것이라도 삶과 역사의 총체성 안에서 자유롭게 재문맥화될 수 있다는 작가의 인식을 보여준다.
작가는 비록 문화권들 사이, 개인들 사이에 상이한 삶의 조건들이 존재할지라도, 인간들은 세계를 감각하고 판단하며 반응하는 생리적으로 동일한 장치를 구비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래서 그는 언어와 마찬가지로 예술 또한 사람들 사이의 수통 수단이 되며, 언어와 예술을 통한 소통이야말로 삶의 전제조건이라고 강조한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당대의 삶을 떠난 예술’을 의미 없는 것으로 보는 ‘예술의 소멸론’에 근거를 확실히 둔다. ‘예술의 소멸론’은 예술이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소통되고 사용되지만, 삶의 의미와 내용이 달라짐에 따라 예술 또한 달라지고 폐기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일상속의 물건이나 언어처럼 사용과 소멸의 관계에 놓여, 예술도 그 시점의 사람들이 현장에서 함께 공감하고 동참함으로써 의미를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사고와 개념으로서만 남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삶의 의미를 향유하는 사람들 속에서 그들의 소통을 위하여 존립한다. 그러한 점에서 <물로부터>, <예술의 소멸>과 같은 작품들은 “예술은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더불어 소멸하고 일상사 속에서 경이롭게 살아난다.”는 작가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 비누, 물, 화초, 물통, 거울 등은 변환과 전이의 가능성으로 가득한 일상 언어들이며, 이들 각자의 고유한 의미란 없고 모두 어떻게 사용되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렇기에 이들은 맥락 속에서, 상호 연관 속에서 파악될 수 있는 텍스트로 나아간다.
삶과 역사의 총체성에 대한 인식은 우리 문화에 대한 원형을 탐구함으로써 좀 더 확산된다. 두 개의 대형 드로잉과 독들이 동원된 설치물에서 행해진 퍼포먼스인 <독 속의 문화>(1989)는 이건용이 장소와 신체를 앞세웠던 70년대의 자기증명적 논리를 극복하고, 예술의 소통과 그것의 문화적 의미를 묻는 삶으로 나아가는 특징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 이건용은 자신의 외고조모로부터 물려 내려온 ‘독’ 속에 들어가 우리 민족 고유의 문화를 손상시킨 근대화/서양화를 씻어내는 의미로 자신의 몸을 비누거품으로 씻고 독 테두리에도 비누거품을 묻힌다. 그리고 독 안에 소리를 질러 역대 모계의 조상들을 불러내며, 근대화 과정, 6·25 전쟁 때 피난 가는 이야기, 까마귀 등 우리 민족의 여러 이야기를 한다. 150년 동안 자신의 가계에서 사용해오던 독은 한국의 ‘어머니의 문화’를 상징하며, 이 안에 들어가 외조모들과의 소통을 시도하는 일련의 행위는 우리의 단절된 문화와 역사의 문제를 제기한다.
<누가 독을 매달았는가?>(1990) 또한 <독 속의 문화>와 맥을 같이 하는 작품인데, 일본 동경 사가초 갤러리에서 7개의 큰 독과 자배기를 가지고 행한 퍼포먼스이다. 작가는 6.25때 제주도에서 보았던 까마귀를 동경에서의 첫 아침에 보았던 까마귀를 통해 연상한다. 그리고 까마귀의 소리를 내면서 서양의 모던 프로젝트가 동양의 문화적 아이덴티티를 어떻게 와해시켰는지에 대해 주장한다. 그 후 자배기의 물속에 머리를 적셔서 비누거품을 내어 독의 입구에 묻히는 한편, 비누거품이 가득한 자배기를 천정에 연결된 로프에 당겨서 3m 50cm 높이까지 끌어올리고 한순간에 로프를 끊어버린다. 자배기가 떨어져 폭음을 내면서 비누거품과 함께 산산조각 나는 장면은 역사적으로 불행한 관계를 맺었던 일본인 관객들에게 충격적인 감동을 주었다. 이러한 일련의 작품들을 작가는 한국인의 역사와 문화를 소생시키기 위한 ‘삶의 회고 시스템’이라고 명명하였다. <누가 독을 매달았는가?>는 한국인의 문화적 아이덴티티, <독 속의 문화>는 한국의 모성 문화를 통한 삶의 회고 시스템을 보여준다.
80-90년대에는 위에 언급한 대표 작품들 외의 작품들에서도 삶의 현실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문제의식이 드러난다. 회화 부문에서는 <걸프전쟁>(1991)을 통해 경제적 이해관계와 국제정치의 역학 속에서 석유의 이권을 에워싸고 벌어진 전쟁과 그로 인해 상실되는 인간성의 문제를 보여준다. <구조조정>(1998)에서는 IMF의 구제 금융을 받게 되었던 90년대 말 우리나라의 어두운 현실을 은유적으로 그리기도 한다. 또한 80년대 말부터 패션잡지 등에서 눈에 띄는 대중적 이미지들에 주목하게 된 이후, 다양한 잡지 이미지를 오려 한 화면 안에서 재조합하거나 그 위에 드로잉 하는 콜라주 작업을 90년대 전반에 걸쳐 꾸준히 선보인다. 퍼포먼스 부문에서는 (1990)을 통해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2km 길이의 DMZ를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분단된 채 역사적 아픔을 갖고 살아가는 한국 사람들의 상황을 다룬 역사적 삶의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1993)에서는 1970년대 당시 열악했던 한국 현대미술 상황에 자신의 사제를 전부 털어 희생적으로 기여한 명동화랑의 김문호 씨에 대한 추모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3. 2000년대
1980-90년대를 거치면서 이건용은 문화 회고시스템을 통해 자신의 예술을 삶과 문화와 관련시키며 그 영역을 확장시켰다. 그러던 그는 1990년대 후반부터 좀 더 일상적인 문제들을 예술로 받아들이는데, 이는 이건용이 예술을 창작자의 입장보다는 수용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로 한 데서 기인한다. 그는 예술작품의 생산자인 예술가 자신도 일상 안에서 살아가지만, 작품의 수용자인 감상자는 그보다 더 일상에 관여하며 살아간다는 점을 깨닫는다. 그래서 예술을 통한 소통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 소통의 시발점이 일상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 심도 있게 생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건용은 2000년대에 들어 이전의 문화적 차원의 삶에서부터 보다 일상적인 삶에 가까이 들어오게 된다. <문화의 힘>(1996), <위험지대를 넘어서>(1996) 등의 퍼포먼스는 초기의 이벤트-로지컬과 달리 문화적 차원에서 행위한다는 점에서 80-90년대 퍼포먼스의 연장선상에 있는 동시에, 서서히 일상의 상황 속에 녹아 작용하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2000년대 이후 작업을 특징짓는 분기점이 된다.
<문화의 힘>(1996)에서 이건용은 대학 캠퍼스 마당에서 권투글러브를 끼고 대형 판넬의 캔버스 천에 마치 권투를 하듯이 두들겨 힘 있는 물감의 흔적을 남긴다. 또는 대나무들에 물감을 묻혀 두들기는 방법으로 소리를 내거나 화면에 흔적을 남긴다. 작가는 대학 캠퍼스라는 일상의 물리적인 공간 안에서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관객과 대화한다. 이렇듯 그는 문화의 구체적인 힘을 일상의 차원에서 관찰자들과 더불어 확인하고, 문화의 힘을 외치며 오토바이를 타고 현장을 떠난다. <위험지대를 넘어서>(1996)는 건축 현장의 쓰레기장에 폐기된 안전모를 이용한 퍼포먼스이다. 작가는 버려진 안전모에 쓰인 어떤 노동자의 구체적인 이름을 부르고 관객과의 대화를 통해 행위한다. 이는 <문화의 힘>과 마찬가지로 문화 회고시스템으로서의 예술이 일상의 생활 속에서 실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며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퍼포먼스이다. <거인의 걸음>(1998)에서는 부산시립미술관의 뒤뜰에 설치된 장애인 전용 통로를 이동하는데, 지그재그로 오르내리는 길의 중간 지점에서 음료 회사의 플라스틱 의자를 이용하여 마치 거인처럼 이동한다. 이를 통해 작가는 일상의 공간을 예술의 방법으로 관람객에게 인식시켜준다.
일상적 삶 안에서 예술로서 소통하고자 하는 이건용은 80-90년대를 거치면서 얻은 회화적 표현의 자유를 발전시켜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평면 작업에 주력하게 된다. 그는 패션잡지와 같은 대중적이고도 소비적인 이미지들을 차용하여 콜라주하기도 하고, 캔버스 위에 물감을 사용하여 신체드로잉을 행하며 완연히 회화로 복귀한다. <패션도록 드로잉>(1996)은 일상의 현장에서 얻을 수 있는 패션도록이나 기타 인쇄 매체 이미지들을 이어붙인 후 각각의 이미지 위에 아크릴 물감으로 드로잉한 작품이다. 패션도록에는 주로 모델이 등장하기 때문에 인물이 포함된 이미지가 다수인데, 이러한 이미지들 위에 드로잉이 더해지면 전혀 다른 두 화면이 내용적 혹은 의미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 일상 속에서 쉽게 접하고 얻을 수 있는 패션도록을 활용하여 드로잉하는 것은 작가의 의도에 의해서 일상이 차용되고 패러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97년의 평면 작업인 <구조조정> 시리즈를 보면 구상과 추상 또는 서로 무관한 단편적 이미지들이 한 화면에 병치되고 있다. 이건용은 패션잡지 등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일상적인 이미지들과 당시의 정치·사회적 문제들을 상징하는 추상적인 혹은 단편적인 이미지들을 병치시킴으로써, 80-90년대에 행했던 회화성의 회복을 보다 해체적 입장에서 실천한다. 작가는 한국 사회에 급작스럽고 커다란 변화를 몰고 온 IMF 구제금융 요청사태를 전후하여, 점점 고조되는 회사부도 및 구조조정의 징후를 각종 매체에서 읽어낸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람들에게 획일적인 삶의 방향을 부과하는 억압적 충고들을 평면과 입체 형식 모두에서 풀어 보여준다.
평면 작업인 <구조조정(실업자 98-B)>(1998)에서는 노동자에게 간접적으로 부가되는 폭력적 언사들을 상장 양식 위에 인쇄하여 언어적 진술로서 제시한다. 이는 마치 실업자들에게 전하는 조언처럼 보이지만, 작가는 국가 경영에 총체적인 책임이 있음에도 마치 실업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듯한 당시의 언사를 그들에 대한 간접적인 폭언으로 간주하여 제시하고 있다. 결국 한 사회가 규정하는 어떤 진실은 그 사회의 권력구조, 특히 힘을 가진 자들에 의해 왜곡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실업자에게 발언한 조언은 그들에게 폭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실업자가 된 이유가 말 그대로 본인의 실수나 게으름 때문에, 혹은 염치가 없고 능력이 없기 때문일 수는 없다는 그의 생각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당시 개개인의 삶의 위기는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또는 능력을 갖추었어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과된 상황이라는 점에서, 실업자를 위한 그러한 조언들은 칭찬과 격려의 의미를 부여하는 상장 테두리 안에 포장되지만 실은 권위자들의 무책임한 폭언에 불과한 것이다.
입체 작업인
2000년대 이후의 평면 작업에서는 이건용이 1976년 이후 꾸준히 선보인 신체드로잉이 다량으로 제작된다. 시각이 최대한 억제된 상황 속에서 발생하는 이미지라는 점은 여전히 같지만, 80-90년대에 다채로운 색채를 도입하여 발전시켰던 회화적 면모가 더욱 부각된다. <신체드로잉 76-3-08-01(여성을 위하여)>(2008)에서는 한 여성이 전화를 하며 바쁘게 지나가는 지하철 층계 앞의 사진을 찍어 높이 2m가 넘는 캔버스에 전사하여 프린트 한 후, 그 위에 파란색 계열의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여 76-3의 방식으로 드로잉한다. 이를 통해 이건용은 신체드로잉의 형식 속에서 여성의 사회적 진출과 관련하여 21세기 이후의 새로운 시대상을 반영한다. <신체드로잉 76-2-01-01(미래의 관문)>(2008)에서는 대구 지하철 참사가 일어났던 공간의 사진을 찍어 캔버스에 프린트 한 위에 76-2의 방식으로 드로잉하는 과정에서 공간을 새롭게 재구성한다. 이렇듯 2009년까지는 80-90년대의 연장선상에서, 즉 여전히 삶과의 연관 속에서 신체드로잉 76-1, 76-2, 76-3의 방식을 변형하고 심화시키는 작업을 행한다.
2010년부터는 76-1의 방식에 보다 집중하여 작업하면서 회화성 자체를 심도 있게 탐구한다. 원래 76-1의 방식이 작가의 키만 한 170cm 높이의 나무 합판에서 드로잉을 시작하는 작업이었다면, 이때부터는 캔버스의 크기를 가로·세로 1m 이내로 확연히 줄인다.
주로 합판에 매직을 사용했던 70년대의 엄격하고 절제된 드로잉과 달리, 캔버스 위에 붓과 물감을 사용하는 이와 같은 드로잉에서 신체의 움직임은 더욱 유연해지고 매 순간 다르게 섞이는 색상은 회화적 표현의 가능성을 확장시킨다. 또한 작가의 격렬한 신체 움직임에 따라 물감이 아래로 뚝뚝 흘러내리거나 예상치 못한 붓 터치가 남겨지고, 물감이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서로 섞이면서 의도하지 않았던 화면이 나타난다. 70년대의 신체드로잉이 철저하게 논리를 토대로 함으로써 제한적인 조건에 의한 필연성을 기록하는 작업이었다면, 2000년대의 신체드로잉은 배제되었던 우연성의 개입으로 인해 회화적 재료가 갖는 표현의 가능성이 확장된다. 또한 80-90년대의 신체드로잉이 회화성을 회복하는 가운데 신체의 현전을 암시하는 동시에 삶의 내용들과 관련된 이미지로 제시되었다면, 2000년대 이후, 특히 2010년 이후의 작업에서는 그의 신체드로잉 시리즈에서 도출된 이미지들이 각각 하나의 기호로 자리 잡으며 평면 안에서 보다 총체적으로 조직된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의도치 않았거나 간과했거나, 혹은 예상치 못했던 의미 깊은 예술적 성과들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이외에도 이건용은 2000년대에 들어 자신의 삶과 일상을 예술과 긴밀히 접목시키는 작업을 다수 선보인다. 평면 작업인 <내가 씹던 껌>(2006)에서는 작가가 실제로 입안에서 씹던 껌을 재료로 활용하여 화면을 구성한다. 설치 작업인
참고문헌
학위논문
이중희, 「이건용과 한국 현대미술 연구」, 군산대학교 대학원 미술학과(서양화 전공)
석사학위논문, 2005
조혜리, 「1970년대 한국의 이벤트(Event) 연구–이건용과 성능경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17
홍의숙, 「이건용의 1970년대 ‘이벤트’ 작업의 특성 연구」, 홍익대학교 대학원 예술학과
석사학위논문, 2016
전시도록
이건용의 《인간항》- 삶과 문화에 대한 회고적 시스템, 예맥화랑, 1991
이건용 논리 삶 일상(한국현대미술기획초대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99.9.17-9.28
이건용 미술 35년 展, 한국소리문화의전당, 2002
BODYSCAPE 이건용, ASAN GALLERY, 2008.9.2-9.20
이건용 展(제8회 이인성미술상 수상작가 초대전), 대구문화예술회관, 2008.11.4-11.16
이건용 초대전, GALLERY CASA DI LAGO, 2010.10.21-11.18
《달팽이 걸음_이건용》展, 국립현대미술관, 2014.06.24-12.14
이건용 이벤트-로지컬, 갤러리현대, 2016.8.30-10.16
이건용 展, LEEAHN GALLERY, 2017.5.18-7.29
서적
이건용, 『이건용(아르비방33)』, 시공사, 1995
■ 작품
정보출처
작가의 전시도록(개인전, 단체전)
작가의 작품도록(monograph)
작가의 작품 소장기관의 소장품 도록 및 웹사이트
작품 실사결과
작품 기록자료(작품을 촬영한 사진 및 제목, 규격, 재료 등에 대한 기록)
■ 연구팀 추가항목
작품의 옆면 또는 도록에 작품에 대한 번호가 기록되어 있어서 ‘Artist ref’라는 항목을 추가했다.
■ 작품 일련번호
작품의 일련번호는 ‘작가명’-‘작품연도’-‘작품구분’-‘일련번호’ 순으로 입력했다.
작품의 일련번호 중 ‘작품연도’의 경우 출처별로 가장 많이 기록된 작품 연도로 통일했으나 ‘생산연도’ 항목의 경우 출처에 기록된 작품 연도를 기록했다.
작품의 제작기간이 명시된 작품의 경우 시작연도가 아닌 끝 연도를 중심으로 일련번호 중 ‘작품연도’를 입력했다. 예를 들어, 작품 제작 기간이 1973년부터 1983년까지로 참고 자료에 기록된 경우 1983년으로 일련번호의 ‘작품연도’를 입력했다.
참고자료에 작품의 제작연대만 기록된 경우 해당 연대에 ‘s’를 붙여서 일련번호의 ‘작품연도’를 입력했다. 예를 들어, 참고 자료에 작품의 제작연도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고 1970년대에 제작된 작품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면 ‘1970s’으로 일련번호의 ‘작품연도’를 입력했다.
작품에 대한 모든 정보는 실사결과, 소장기관의 기록, 도록, 기타 참고자료에 근거하여 기록했다. 중요도 ‘1’ 또는 ‘2’로 지정된 정보만 연구팀의 기준으로 용어를 통일했다. 그 기준은 1.5에서 설명했다.
■ 연관관계
작품과 관련된 전시이력과 참고문헌들을 연관관계 항목에 해당 일련번호를 입력했다.
연관관계 항목 중 전시이력의 경우 전시도록을 참고하여 연관관계를 기록했다.
연관관계 항목 중 참고문헌의 경우 작품이 포함된 도서들을 중심으로 연관관계를 기록했다.
■ 자료의 중요도
중요도 ‘1’은 디지털자료집을 위해 선정된 300점으로 작품별로 대표되는 제목, 연도, 규격, 재료 및 기법, 연관관계 소장이력 등을 기록했다.
중요도 ‘2’는 디지털자료집을 위해 선정된 300점 이외의 작품들로, 작품별로 대표되는 제목, 연도, 규격, 재료 및 기법, 연관관계 소장이력 등을 기록했다.
소장기관의 기록, 도록 순으로 대표 제목을 정했다. 동일한 작품의 제목이 도록별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고, 작품 소장기관의 기록이 없는 경우 복수의 제목을 대표 제목으로 정했다.
‘물방울’의 영문제목은 ‘Water drops’로 통일했다. 단, 외국 전시도록에 ‘Water drop’로 기록되어 있는 경우 그와 같이 표시했다.
‘회귀‘의 영문제목은 ’Recurrence’로 통일했다.
작품 실사, 소장기관의 기록, 도록 순으로 대표 규격을 정했다.
소장기관의 기록, 최근 도록 순으로 대표 재료 및 기법을 정했다.
‘oil’의 영문표기법은 ‘오일‘로 통일(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소장작품 목록에 근거)
‘먹’의 영문표기법은 ‘Chinese ink‘로 통일(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소장작품 목록에 근거)
‘한지’의 영문표기법은 ‘Korean paper’로 통일(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소장작품 목록에 근거)
‘마포’의 영문표기법은 ‘hemp cloth‘, ‘linen’은 ‘린넨‘으로 통일
소장기관의 기록, 최근 도록 순으로 대표 소장이력을 정했다.
■ 작품 외 자료
자료의 구분은 국립현대미술관 또는 자료의 소장기관의 구분 기준에 따랐다.
■ 참고문헌
자료 소장기관에서 도서로 분류된 자료, 신문 및 잡지 기사, 웹사이트 자료를 참고문헌으로 분류했다.
자료 실사 또는 해당 자료의 소장기관에 등록된 자료의 정보를 참고해서 기록했다.
참고문헌 중 도서 및 웹사이트 자료의 연번은 연도순이 아니고, 연구원이 자료의 정보를 기록한 순서대로 연번을 ‘1’부터 입력했다.
참고문헌 중 기사의 경우 연도별로 연번을 ‘1’부터 입력했다.
자료를 실사한 결과를 정보로 입력한 경우 ‘출처’ 항목에 실사라고 명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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