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기
김순기는 1946년에 한국의 충청남도 부여에서 태어났다. 1966년에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여 대학원을 졸업한 이후 1972년에 프랑스로 떠나 지금까지 약 50여 년 가까이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다. 김순기의 작품은 대체로 시간과 공간, 그리고 언어에 대한 작가의 철학적 사색을 바탕으로 퍼포먼스, 설치, 오브제, 드로잉, 영상, 사진 등 거의 모든 매체를 사용하여 이루어져 왔다. 특히 70년대부터 비디오 장치를 사용한 영상-퍼포먼스 작업을 시작함으로써 비디오아트 역사의 중요한 작품들을 제작하였으며 90년대에 이르러서는 인터넷, 인공위성, 데이터 스트리밍과 같은 당시의 첨단 테크놀러지를 사용한 작품
김순기의 작업은 1970년대부터 약 5개의 시기로 나눌 수 있으며 각각 다음과 같은 대표적 프로젝트들로 요약하여 설명할 수 있다.
(1) 1970-1980 : 조형상황 I, II, III
(2) 1981-1990 : Vide + O, I-Hua(일화) 등
(3) 1991-2000 : O Time / Station O Time
(4) 2001-2010 : Stock Exchange, Stock Garden
(5) 2011-2019 : Interviews & Publication / MMCA Exhibition
김순기는 70년대부터 존 케이지, 백남준 등과 예술적, 인간적 교류를 이어왔으며 쉬포르에쉬르파스, 플룩서스 등의 예술적 그룹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 그의 작업들은 모두 작가 자신의 철학적 논제들로부터 출발한 것으로 팔대산인, 시타오 등의 중국 남송, 청대의 동양 화론에서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에 이르는 폭넓은 사유의 범위를 아우르고 있으며 90년대 이후에는 자끄 데리다, 장-뤽 낭시, 장-피에르 코메티 등의 세계적인 철학자들과 토론, 서신교환, 인터뷰 등을 통해 세계와 언어에 대한 심화된 주제들을 발전시켰다. 일반적으로 김순기의 작품세계는 한국의 현대미술사에서 매우 독보적인 것으로, 개념미술이나 미디어아트라는 용어들만으로 정의될 수 없는 매우 분류하기 어려운 유형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그는 기존의 예술이라는 전통적 구분에 얽매이지 않고 본격적으로 삶과 철학 그리고 창작을 하나의 연속성으로 다룬 아주 흔치 않은 예술가이며 한국의 현대미술에 있어 이와 같은 사례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중요성을 가늠하기 어려운 작가라고 하겠다.
1946년 충남 부여 생
1966-1970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서울
1970-1971 서울대학교 대학원 회화과 수학, 서울
1971년 이후 프랑스 파리 거주
1971-1972 니스 국립장식미술학교(École Nationale d’Art Décoratif de Nice) 회화과 졸업, 니스
1975 김순기 미술제, 미국문화원, 서울
1977 김순기, 견지갤러리, 서울
1978 4’ 33’’ and O’,O’’,O’’’, 존케이지 작품 해설, Centre Culturel de St. Baume, 생 봄
1977-1978 엑상프로방스 대학교(Université d’Aix-en-Provence), 기호학, DEA(Diploma d’Études Approfondies), 엑상프로방스
1983 Bonjour Paik Nam June II, 백남준과 퍼포먼스, 한일관, 파리
1988 Soun-Gui Kim, Galeire Donguy, 파리
1996 Station O Time, 멀티미디어 인터랙티브 설치,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천안
1999 주식거래 I(Stock Exchange), La Maison du Livre d’Artiste
Contemporain, Domart en Ponthieu
2000 주식거래 II(Stock Exchange II), 아트선재센터, 서울
2001 Stock Exchange III, La Maison de l’Art et de la Commnication de Sallaumine, 살로민, 프랑스
P.A.P., Galerie Lara Vincy, 파리
2005 Points de vue, Galerie de/di/bY, 파리
2006 Soun Gui Kim/Films, The Film Gallery, 파리
2008 주식+꽃밭(Stock + Garden), 175 갤러리, 서울
김순기, 2008 Platform Seoul, 예맥 갤러리, 서울
2009 Vide&o, 아르코 미술관, 서울
2013 Beating the market : Soun-Gui Kim in dialogue with Cage, Derrida, and Nancy, Slought Foundation, 필라델피아
Video by Soun-Gui Kim, Microscope Gallery, 뉴욕
2014 달, 어디에, 시장을 넘어서, 침묵, 아트선재센터, 서울
2017 일화 One Stroke of Painting, 아라리오 뮤지움, 서울
2018 김순기 : 0 TIME,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
2019 게으른 구름 – 김순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유진상(계원예술대학교 교수/ 책임연구원)
들어가는 말
김순기에 대한 비평문은 먼저 작가가 전 생애에 걸쳐 살아온 모습을 조망하고 그 한 가운데를 일관되게 관통해온 주제의식과 창작가로서의 관점을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 1972년에 프랑스로 유학하여 현재까지 체재하면서 작가로서, 교수로서, 사상가로서 김순기의 활동은 한국 출신 작가로서는 매우 예외적인 형식과 내용으로 이루어져 왔다. 특히 동북아시아의 전통적인 화론 및 미학적 이론들과 서구의 동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적 사상들의 통합을 추구해온 그의 작품세계는 단지 예술작품의 창작 뿐 아니라 그것의 배후에 구축되어 있는 강력한 개념적, 철학적, 정신적 구조에 상당히 주목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러한 비평적 연구는 기본적으로 검증된 구체적인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작가연보에서 시작하여 다양하고 중요한 사건들의 상호지시적 의의를 추적하고 재해석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과정에 있어 작가의 특성, 즉 작품군(Body of Works)의 양적(量的) 규모를 평가하는 것보다 매우 적은 작품군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작가의 태도와 관념을 반영하는 질적(質的) 특질의 평가가 더 중요하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김순기 작가는 평생을 쉬지 않고 작업에 정진했음에도 불구하고 1) 작품의 수가 많지 않으며, 2) 동일한 작품의 계열을 전 생애에 걸쳐 반복적으로 발전시켜왔고, 3) 주요 작품들 가운데 상당수가 드로잉과 노트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주지해야 한다.
1. 김순기의 초기 생애
김순기는 7월 5일 충청남도 부여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 성장과정에 대해서 특기할 것은 작가의 가족들로부터 받은 영향이다. 친할아버지와 외할머니께서 고전을 읽으시고 붓글씨를 즐겨 썼고 이러한 가풍은 작가에게 특별한 영향을 미쳤다. 미술을 하게 된 계기는 대전사범부속초등학교를 다녔을 때 처음으로 피아노를 쳤는데 음악 선생님이 틀릴 때마다 자꾸 손을 때리는 것이 싫어 미술반으로 옮겼다고 한다. 정해진 틀에 맞추어 배우는 것에 대한 반발이 작가로 살아가게 된 하나의 동인이 되었던 셈이다. 해방 이후 작가의 외삼촌이 사진과 영화를 하셨는데, 작가는 이를 지켜보며 신기하고 즐거웠다고 회상한다. 이 외삼촌 역시 가족으로서 작가에게 단순히 창작뿐 아니라 매체에 대한 관심에 깊은 영향을 준 인물 중 한 명이다. 작가의 어머니 또한 평생에 걸쳐 서예를 하셨으며 작가의 평생에 걸친 예술적 동무가 되어 주었다. 작가를 음과 양으로 뒷받침해 준 어머니의 조력은 김순기의 생애를 설명하는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어떤 선생님이 그에게 예술가가 되어 파리에 간다면 전 세계의 많은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순기는 이 말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 장차 프랑스에서 예술가로 살아갈 것이라는 예감을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내면적으로 갖고 있었다는 함축적인 단서가 될 수 있다. 고등학교 시기부터 교유하였으며 나중에 서울대학교에 같이 입학한 이애주(승무 인간문화재, 전 서울대 교수)와는 전통 춤과 무속신앙, 종교 등에 대한 관심을 공유하였으며 이것이 작가의 초기 작업에도 영향을 미쳤다. 동양사상과 국악은 그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당시에는 구식 문화라고 여겨졌으며, 특히 국악은 가난한 집이나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 배우는 것이라고 하여 드러내 놓고 관심을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때 그는 방과 후마다 국악원에 다녔으며, 이후 3년간 김중섭에게 단소를 배웠다. 단소는 선생님이 만들어주셨는데 ‘오죽(검은 대나무)’으로 만든 것이었다. 김순기의 성장과정에서 가족과 선생님들의 영향이 매우 컸다고 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양사상, 전통예술, 국악 등에 대해 스스로 관심을 갖고 전문가를 찾아다니며 사사를 받았다는 점은 그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예술적 성향을 일찍부터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매우 이른 시기에 어떤 예술을 추구할 것인지에 대한 주도적인 관점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2. 도불 이전 시기의 작품 경향
1966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입학한 김순기는 많은 스승들로부터 본격적인 영향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평생에 걸친 전성우의 영향을 특기해야 할 것이다. 전성우는 일제 강점기에 한국 전통미술을 수집하여 지켜낸 간송 전형필의 자제로서 미국에서 현대미술작가로서 활동한 바 있으며, 귀국 후에는 간송미술관을 운영하면서 후학을 양성한 동양미술에 대한 깊은 조예를 지닌 전문가였다. 간송미술관에는 그가 수집한 많은 책자와 자료들이 있었으며 김순기에게 있어 전성우의 화실을 왕래하면서 이러한 문헌들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은 동양예술에 대해 배울 수 있는 매우 특별한 기회가 되었다. 이를 통해 그는 불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되었으며, 특히 불교의 제의적 회화인 ‘만달라’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또한 그는 당시에 프랑스에서 유학을 마치고 서울대학교 교수로 부임한 임영방을 통해 프랑스 미학과 철학을 접하였다. 당시에 매우 접하거나 이해하기 힘들었던 현대미술 이론에 관해 막 현지로부터 유학을 하고 돌아온 전문가를 통해 설명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작가가 당시로서는 매우 전위적이고 다양한 이론들을 이해하고 정리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미술 이외에도 그는 동양의 많은 지적, 문화적 전통들에 대해 정통하였다. 한국 선불교의 대가인 석정(石鼎)스님에게서 직접 선불교의 전통적 붓글씨, 달마 그림, 전각에 대해 배웠다. 특히 황학정에 왕래하면서 국궁(國弓)을 배웠고, 이때부터 시작한 활쏘기는 프랑스에서도 계속하였다. 이는 처음에는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수련의 과정이었는데 이후 자연스럽게 예술적 창작이면서 동시에 삶의 한 부분이 되었다. 활쏘기 작업은 1975년에서 1985년 사이에 제작한 영상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김순기는 서울대학교에서 학부와 대학원을 마친 후 국비장학생으로 바로 프랑스로 유학하였다. 그러므로 도불 이전의 작품 경향은 대학에 재학 중인 시기의 작업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당시 그의 작품들 가운데 특기할 것은 대학원에 재학 중 ‘제4회 서울대학교 대학원 회화과전’에 출품했던 <소리 I, II>라는 설치 작품이다. 이 작품은 미술대학 건물 바깥의 야외에서 전시하는 설치작업이었는데,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을 뿐 아니라 작품의 내적 요소들 외에도 환경적 요인(소음 , 바람, 사람들 등등)이 작품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작업을 계기로 그는 일반적인 회화가 아닌 폭넓은 요소들을 고려하는 개념적 창작방식을 다루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위한 예술적 조사 및 연구의 장을 열기 시작했다. 또한 프랑스에서 전개한 도불 초기의 작업들 역시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3. 프랑스에서의 창작 시기 구분
김순기 작가의 창작시기별 구분은 크게 명확한 기준을 적용하기 어렵다. 그의 창작 생애는 비교적 일관되며 태도와 사상에 있어 커다란 전체를 이루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 년을 단위로 하여 그의 창작 생애를 구분하는 것은 작가의 창작 전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체로 프랑스에서 시작된 작업들로부터 창작시기를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여기서는 그 구분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1970-1980 : 조형상황 I, II, III
1981-1990 : Vide + O, I-Hua(일화) 등
1991-2000 : O Time / Station O Time
2001-2010 : Stock Exchange, Stock Garden
2011-2019 : Interviews & Publication / MMCA Exhibition
위에서 볼 수 있듯이 김순기의 창작시기 구분에는 각 시기별 대표 프로젝트 및 작품이 예시되어 있다. 따라서 작가의 창작시기 구분을 하는 것은 이 예시적 작품들에 대한 설명이 따라야 한다. 여기서는 예시된 각 시기별 대표 프로젝트와 그 시기의 주요 이슈들에 대해 해설하고자 한다.
가) 1970년대 주요 작업 및 전시
김순기는 1971년 프랑스 정부 초대 국비장학생으로 도불하여 현재까지 체류 중이다. 그는 도불 초기에 니스 ‘Centre Artistique de Rencontre International, Villa Arson’에서 <조형상황 I(Situation plastique I: 소리작업)>을 설치하여 주목받게 된다. 이 작품은 다시 1972년 프랑스 남부 마리나에서 <조형상황 II (Situation plastique II)>로 설치, 발표되었다. 또한 같은 해 10월 니스에서 <조형상황II (Situation Plastique II )>를 다시 설치, 전시하였다. 1973년 보르도 시가 주최한 아방가르드 예술 축제 ‘Manifestation, Festival Octobre a Bordeaux’에 참여하여 <조형상황(Situation plastique) III>을 발표하였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조형상황 (Situation Plastique) I.II.III>이다. 이 작품은 1971년부터 73년까지 세 번에 걸쳐 설치미술과 퍼포먼스의 형태로 만들어졌다. 즉,
조형상황 1 (1971) 소리 1, 2
조형상황 2 (1972) 마리나, 카뉴 슈르메르, 니스, 모나코 등 다양한 장소에서 설치
조형상황 3 (1973) 보르도의 10월
이렇게 세 번에 걸쳐 이루어진 것이다. 조형상황은 현장의 상황에 맞게 제작된 장소 특정적 설치(퍼포먼스, 바람의 움직임, 사운드, 비디오 등) 작업이었으나, 이후부터 2010년대까지 여러 곳에서 기록 영상의 상영, 설치의 형태로 소개되었다. 대학원에서 시작된 실험적 설치/퍼포먼스 작업의 핵심은 자연적 환경과 그것에 대응하는 사유의 시각적 형태를 드러내는 것이다. 바닷가에서 풍선과 천을 이용하면서 바닷물과 바람을 재료로 삼아 회화적 프로세스를 보여주는 등의 작업은 당시 프랑스에서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던 ‘쉬포르 에 쉬르파스’(Support et surface)나 중국 남송 혹은 청대의 급진적 문인화론을 떠올릴만한 것이었다. 즉 김순기의 작업은 그가 한국에서 전공한 회화의 전통을 뛰어넘어 서구의 다다이즘이나 플룩서스의 실험적 정신과 동양의 고유한 철학적 세계관을 통합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재학 중이던 니스대학교에서 그는 석도(石濤)의 화론을 학위 주제로 택해 노장사상을 비롯한 동양철학과 미학 연구에 많은 열성을 쏟았다. 니스 국립장식미술학교(École Nationale d’Art Décoratif de Nice) 회화과를 졸업(DNBA)한 이후 그는 바로 니스 국립장식미술학교(École Nationale d’Art Décoratif de Nice)와 마르세이유 고등미술학교(École Supérieure des Beaux-Arts de Marseille) 교수직을 파격적으로 제안받았다. 이는 프랑스에서도 극히 드문 일로, 당시의 프랑스 전문가들이 김순기의 예술적 입장과 중요성을 매우 빨리 파악했다는 사실로 이해할 수 있다.
도불 당시부터 비디오 장치에 의한 영상제작에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었으나 실제로 장비에 접근할 수 없었던 김순기는 1974년에 처음으로 비디오 장비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당시 비디오는 예술가들에게는 사용이 거의 불가능한 장비였고 사용료가 아주 비쌀 뿐 아니라 테크니션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당시 지역 문화기관의 적극적 지원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그는 비디오 장비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가지고 모나코 해변에서 조형상황 II 설치-이벤트 작업을 했다. 이는 첫 비디오 작업으로 사람들이 공날리기와 연날리기 등을 하는 모습을 비디오 카메라를 통해 볼 수 있도록 해변에 설치하는 작업이었다. 이후 김순기의 많은 영상작업들은 퍼포먼스를 영상으로 기록하는 형태가 중심이 된다. 비디오는 퍼포먼스와 완전히 통합된 재료로 사용되었으며 퍼포먼스 역시 비디오로 기록될 것을 전제로 하여 구상되었다. 비디오 장치가 지닌 대표적 특성은 1) 즉각적 기록가능성, 2) 이동 및 편집의 용이성, 3) 개인 작업으로서의 최적성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성들은 평생 동안 혼자서 작업을 해온 김순기의 삶과 창작의 형태에 매우 적절하게 들어맞는 것이다.
1975년 김순기는 서울에서 열리는 ‘김순기 미술제’를 위해 일시 귀국하였다. 프랑스에서의 설치 작업(조형상황 1,2,3)과 새로운 시도들을 한국에 와서 소개한 전시로, 기존의 전람회 방식에서 벗어나 토론과 대화를 프로그램으로 구성한 예술 포럼에 가까운 형태였다. 이 전시는 당시 한국이 미술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많은 예술가들과 전문가들이 김순기가 보여주는 전적으로 새로운 미술의 형식과 이론적 담론에 충격을 받았으며 향후 한국의 미술창작현장에서 이에 영향을 받은 작업들이 이어지게 되었다. ‘미술제’라는 전시제목이 붙은 이유는 완결된 작품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창조행위에 대한 ‘반성과 탐구의 현장’이라는 의미였다. 그는 여기서 “반복적이고 나태하며 습관에 안주하려는 소시민성, 또 그 위에 발 딛고 있는 형식적 문화행위를 모두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이러한 예술 이벤트에 대해 생소했기 때문에 ‘김순기 미술제’ 때 정보부에서 불순한 인물로 오인하고 작품 일부를 가지고 가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예컨대, 마르세이유에서의 전시 ‘6일간의 회화’에서 처음 소개된 <오늘(Aujourdhui)> 작업은 ‘김순기 미술제’에서 시작하여 국내외에서 반복적으로 소개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공간사 주최의 ‘Space 75 페스티벌’에서 다른 작가들과의 공동 기획, 연출작이었던 <시간-공간(Temps–Espace)> 공연은 여러 실험적 시도들이 결합된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 페스티벌은 이후 2000년대 아트선재에서 재 연출되어 상연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1970년대 중반에 김순기가 한국의 미술계에 미친 영향은 매우 깊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77년에 김순기는 엑상프로방스 대학교(Université d’Aix Marseille)에서 기호학으로 DEA (Diplôme d’Études Approfondies) 학위를 취득한다. 프로방스 시기라고 부를 수 있을 이 시기에 그는 엑상-프로방스 대학에서 비트겐슈타인의 대가인 질-가스통 그랑제 (Gilles-Gaston Granger) 교수의 세미나를 오랫동안 들었다. 동시에 동양철학, 특히 장자에 대한 공부를 하였다. 또한 혼자서 책을 찾아보며 그의 논문 주제였던 석도의 화론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엑상-프로방스 근처의 수도원 생트 봄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플럭서스 운동의 중심인물인 존 케이지를 만나게 되었다. 존 케이지에게 헌정된 페스티발에서 그와 장시간 대화할 수 있었던 김순기는 이 조우를 통해 커다란 전환을 맞게 되었다. 이후 생트 봄 문화센터(Centre Culturel de la St. Baume)에서 존 케이지의 <4’ 33’’>와
나) 1980년대 주요 작업 및 전시
1980년대는 김순기의 작품세계가 본격적으로 확장된 시기이다. 이 시기에 그의 대표적인 비디오 작품들이 제작되었으며 ‘비디오’에 대한 철학적 질문들이 작업으로 집약되어 표현되었다. 즉 ‘비디오’라는 매체를 시간과 존재의 관계항을 드러내는 탁월한 매체로서 정의한 것이다. 1981년에 김순기는 와 두 작품을 제작하였다. 전자는 장소와 공간적 이동에 대한 작품이고, 후자는 시간의 부재와 다중성을 다루고 있다. ‘시간-공간’을 중요한 관계항으로 간주하고 이것을 시각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 그의 태도는 이후 모든 작품들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 1982년에 그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연구지원금을 받게 되었는데 이를 가지고 지도를 펴놓은 뒤 돌을 아무 곳에나 떨어뜨려서 떨어진 지점들을 연결해 세계일주를 하였다. 미국에는 3개월 동안 머물렀는데, 이 시기의 인터뷰 영상 작업을 뉴욕 백남준 아뜰리에에서 제작하였다. 백남준과의 토론과 서신교환은 프랑스 문화부로부터 비디오아트 연구를 위한 장학금을 받는 것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타이페이에서는 당대의 대표적 동양화가인 장대천(Chang Tai Tien)과 인터뷰를 하게 된다.
1983년 파리의 한일관이라는 한식당에서 정월 대보름 잔치를 하며 백남준과 공동 퍼포먼스를 가졌다. 각각 TV의 조정화면과 오방색을 하나씩 캔버스에 그린 뒤 그 위에 전통적 시간의 뜻을 되새기는 행위와 대화를 적어 마주 교환하였다. 그리고 이 퍼포먼스로부터 <봉주르 백남준 II>가 탄생하였다. 나중에 이를 계기로 김순기는 프랑스 미학잡지 ‘Revue d'Esthétique nº5’에 <비디오와 시간: 백남준에 관한 노트>를 발표했다. 이 글은 백남준의 비디오관이나 시간 개념을 동양철학과 한국인의 시간관에 입각해 이해하고, 백남준의 초기작품을 분석한 글이다. 이후에도 작가는 CIRCA(국제현대미술연구소)에서 본격적으로 비디오에 관한 이론적 연구를 발전시켰으며 이 연구는 10년 뒤 르 프레누아의 SNAC( 국립현대미술스튜디오)에서의 합성이미지 연구로 이어진다.
1985년에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존 케이지 페스티벌’에서 설치 작업을 처음으로 소개하였다. ‘Vide’(비어있음)+‘O’란 ‘비디오’(Video)라는 단어를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언어 유희’(language game)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O’는 불어의 ‘물’(eau)와 같은 발음의 철자이기도 하고, 한자의 ‘나’(吾)와 같은 발음이기도 하며, 숫자의 ‘0’을 가리키기도 하는 중의적 기호이다. 즉 ‘비디오’는 텅 비어있음과 ‘물’의 합성어로 이후에 비디오 모니터를 얼음으로 만들어 녹게 하는 같은 이름의 조각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나를 비움’이라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하며, ‘텅 비어 0이 된다.’라는 뜻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들은 이후 김순기의 작업에서 영상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며, 그의 예술세계가 ‘노장사상’을 중심으로 ‘무위’(無爲)의 세계관을 드러내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형식을 제공한다.
김순기는 1986년 파리 근교의 시골 비엘-메종(Viels-mailson)에 집을 마련하여 이주하였다. 이 집은 작업 스튜디오이자 평생의 거처로서 작가의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작가는 여기서 많은 프랑스의 학자 및 예술가들과 교류하면서 친분을 쌓게 된다. 플룩서스 출신의 많은 예술가들과 더불어 최근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로는 장-뤽 낭시(J.-L. Nancy), 자끄 데리다(J. Derrida), 장-피에르 코메티(J.-P. Cometti), 다니엘 샤를르(D. Charels), 마끄-프로멍 모리스(M.-F. Maurice), 장-마리 라바테(J.-M. Rabate) 등이 있고 음악 쪽으로는 지금은 작고하신 노이하우스(M. Neuhaus), 그리고 실험영화 쪽으로는 알랭 모로(Alain Moreau), 파트릭 보카노프스키(P. Bokanowski) 등과 오랜 친분과 교류를 갖고 있다. 이러한 교류와 협업을 통해 1986년에는 마르세이유 ‘비에이으 샤리테’(Vieille Chairté)에서 개최된 비디오 & 멀티 미디어 전시 <김순기와 친구들>(Kim Soun-gui et Ses Invités)을 비롯한 시 쓰기 작업, 서예 드로잉 작업, 일화 (1973부터 시작) 등 다양한 작업을 소개하였다. 이 전시는 당시 그의 작업의 변모 과정과 새로운 '열린 예술'의 미학적 스펙트럼 그리고 국제적 네트워크를 보여준다. 이 시기부터 미디어를 활용한 설치 작업과 별개로 70년대부터 수행해 온 동양사상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 쓰기, 시 창작, 드로잉, 캘리그라피 등이 80년대까지 이어지면서 전시를 통해서 간헐적으로 소개되었다.
이 시기의 기억할만한 사건으로는 1987년에는 ‘Japan 87 International Video Television Festival’에서 음향상을 수상, 그리고 1988년에 파리의 동기(Dongui)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이 있다. 바스티유의 이 갤러리는 당시 파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김순기의 전시 경력에서 중요한 계기를 이룬다. 또한 (1986) 상영 외에 사운드 설치작업인
다) 1990년대 주요 작업 및 전시
1990년대는 김순기의 작업이 국제적인 무대로 넓어지는 시기였으며, 한국에서의 전시 및 작품소개 역시 활발하게 이루어진 시기이기도 했다. 1990년대 초반에는 80년대부터 계속해 온 비디오의 ‘제로-시간’(O-Time)을 주제로 계속 작업이 이어졌다. 1991년 니스 미술관에서의 개인전서도<0 Time, Sound Composition>과
1995년에 국립현대미술관 초청 전시에서 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상 작업 <무제(무명)> 을 발표하였다. 이 작품은 이후 다수의 전시에서 반복 초청되었으며 김순기의 작업에 있어 정치적, 역사적, 사회적 주제들이 중요하게 부각되는 전환을 보여주었다. 김순기의 작업은 정치, 경제, 자본의 체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철저히 ‘언어적 유희’와 ‘무위’를 지향함으로써 그것에 저항한다는 입장을 견지하였으나 이제 작업 안에서 현실적 이슈를 다룸으로써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발언한다는 태도가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다. 또한 당대의 급진적인 기술적 변화에도 민감하게 대응하였는데, 1997년에는 천안에 위치한 생산기술연구원의 커미션 작업인을 제작하였다. 당시로서는 인터넷과 위성의 데이터와 약 74개의 실시간 영상들이 무작위로 연동되어 스트리밍 되는 생성형 데이터기술 기반의 작품으로, 당시로서는 기술적으로 매우 앞선 작업이었다. 이 작업을 위해 그는 영국의 위성 데이터 처리 전문가와 협업을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같은 해에 <85' 한국미술-질량감>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아를르) 등의 전시에 참여하였으며, 1997년에는 (Rennes II 대학) 전시 참가 및 책 가 출간되었으며, 한국 현대미술전 <시간의 시학> (호암미술관), 리옹 비디오 영화 축제(Festival vidéo et cinéma de Lyon), (오스트리아) 등의 전시에 참여하였다.
1999년에는 프랑스에서 최초로 <주식거래 (Stock Exchange) I>작업을 발표하였다. 이 작품은 동시대 자본주의의 핵심적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는 주식시장을 비판적으로 다룬 작품으로서 실시간으로 연계되는 주식시장의 동향을 표시하는 스트리밍 기술을 활용하였으며, 작품과 연계하여 책 가 ‘La Maison du Lac’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작업은 90년대 김순기의 작품 경향의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이후 <주식거래 II (2000년 아트선재)>, <주식거래 III (2001, 프랑스 살루민)>, <주식거래 IV(2016 국립현대미술관 버전)>로 버전을 달리하며 전시가 되었으며, 이 작업은 추후 2008년에 한예종 ‘갤러리 175’에서 <주식 꽃밭>이라는 제목으로도 전시되었다.
라) 2000년대 주요 작업 및 전시
2000년부터는 아트선재에서 기획한 개인전 <주식 거래>부터 시작하여 새로운 연작들이 ‘플랫폼’과 같은 실험적 페스티벌과 국내 비엔날레 등에 초청되었다. <주식거래 II (Stock Exchange II)> (아트선재센터), <디자인 혹은 예술>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 등이 이어졌으며, 아트선재에서의 개인전 <주식거래 II(Stock Exchange II)>와 연계하여 전시 이미지 그리고 자신의 글과 여러 비평가들의 텍스트를 수록한 책 <봉주르(Bonjour)>(홍디자인)가 출간되었다. 2001년에는 <주식거래 III, Stock Exchange III>가 ‘La Maison de l’Art et de la Communication de Sallaumine‘에서 열렸으며 전이 파리의 Galerie Lara Vincy에서 열렸다. 다시 말해 1995년부터 시작된 동시대의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문제들에 대한 비판적 발언들이 작업에 나타나 본격적으로 2000년대의 작업들로 이어졌다. 주된 이슈는 일제 강점기의 위안부 문제와 주식투기 및 다양한 금융상품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경제에 대한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비판적 시각을 증명하듯 2008년에는 리만 브라더스 사태와 미국의 금융 모기지 부실로 인한 경제위기가 전 세계를 뒤덮었다.
김순기는 약 25년 간 재직했던 마르세이유 대학에서 이직해 2001년부터 2011년까지는 디종 국립고등미술학교(École Nationale Supérieure d’Art de Dijon) 교수로 재직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당대의 석학들과 지속적인 대담과 토론을 이어나갔는데, ‘멈_춤’이라는 주제로 열린 ‘제 4회 광주비엔날레에서 그는 장-뤽 낭시, 자끄 데리다와의 대담을 담은 영상작품을 선보였다. 또한 같은 해에 파리 카르티에 파운데이션에서 열린 전시에 참가하였다. 책 (La Main Courante)을 출간된 것도 이 때였다. 김순기는 2004년 (샌디에고 미술관) 전시와 2005년 (Galerie de/di/dY 파리), (켐퍼 현대미술관, 켄사스시티 / 후드 미술관, 데포두 대학, 인디애나 / 다트마우스 대학, 뉴햄프셔 / 하노바 필레 아트센터, 하노바) 등에 참여하였으며, 2006년에는 (The Film Gallery 파리), (Lara Vincy 갤러리, 파리), (퐁피두센터, 파리) 에 참여하는 등 왕성한 국제적 전시활동을 벌였다.
또한 한국에서도 2007년 <백남준 1주기 추모전 : 부퍼탈의 추억> (국립현대미술관), (Werner Krüger 기획, 오룸갤러리, 서울) 등의 전시와, 2008년 <주식+꽃밭 (Stock + Garden)> (175 갤러리 서울), <2008 플랫폼 서울(Platform Seoul)> (아트선재 서울) 등의 전시가 이어졌으며, 책 (SAMUSO & KNUA)을 출간하였다. 2009년
마) 2010년대 주요작업 및 전시
김순기는 2011년 디종 국립고등미술학교 교수직에서 은퇴한 이후 1986년 이후 살아온 파리 근교 작업실(Les Herbin)을 거점으로 작업과 집필 활동을 이어나갔다. (파리 3대학과 7대학 주관, 코베르 갤러리)와 2013년에 열린 (Slought Foundation, 필라델피아), 그리고 뉴욕), 2014년에 열린 <달, 어디에, 시장을 넘어서, 침묵> (아트선재센터), <인피니트 챌린지> (국립현대미술관), , (La Friche la Belle de Mai, 마르세유), <아시아 필름 비디오 아트 포럼> (국립현대미술관), 2016년의 <백제의 후예> (부여문화원) 등이 이 시기의 주요 전시들이다.
2015년에는 Jacques Derrida, Jean-Luc Nancy와 함께 책 (Slought Foundation avec l’Art Sonje Center et l’Institut français de Corée du Sud)을 출간하였다 이 책의 편집은 Jean-Michel Rabaté et Aaron Levy이 맡았다. 또한 시화집 <보이니? Entends-tu?>(오뉴월)를 출간했다.
이후에도 <달은, 차고, 이지러진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30년 특별전), 백남준 10주기 추모전 <백남준 ∞ 플럭서스> (서울시립미술관)에 참여했으며, 2017년 아라리오 뮤지움 인 스페이스에서의 개인전 <일화 One Stroke of Painting>와 서울 아라리오 갤러리에서의 개인전 <0- Time>가 최근에 열렸다. 2019년 8월 30일부터 2020년 1월 27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4. 김순기 작가의 작품세계에 대한 평가
김순기의 작품세계의 특질은 작가의 작업에서 핵심적인 영역으로 간주될 수 있는 동양미학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다시 말해 시타오(石濤)와 같은 중국 고대 문인화가의 작품관에서 엿보이는 정신적, 비물질적 태도, 즉 무용(無用), 무아(無我), 무위(無爲)와 같은 관념들이 작가의 창작적 태도에 커다란 주제가 되고 있다. 이와 같은 입장은 작가가 지난 30여 년의 시간을 프랑스의 시골에서 혼자 생활하면서 극도의 고립과 느린 시간 속에서 작업해온 선택과 무관하지 않다. 사유와 행동의 일치라고 하는 매우 엄격한 기준을 스스로에게 적용함으로써 자신이 다른 어떤 외적 요구와 조건들로부터도 독립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한 작가의 삶이야말로 그의 작업을 비평적으로 접근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입각점이다. 바로 이러한 독립성으로 인해 김순기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 즉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함몰된 인류의 삶과 인간 개개인의 독자성이 소멸되는 비-인간적, 비-자연적 기술-관료주의 시스템에 대한 비판을 가장 날카롭게 수행해 올 수 있었다. 이 지점에서 작가는 세계가 끊임없이 강요하는 기술적 환경의 변화와 그로 인한 인간-세계 관계의 붕괴, 문화-예술의 전락과 자본주의화, 인간의 도구화 및 비-인간적, 반-자연적 기술관료정치의 횡행과 같은 세계의 현 상황에 대해 기술 그 자체를 역설적으로 무용화, 유희화 함으로써 그 내부로부터 이율배반적 속성을 드러내는 급진적이고 비평적인 작업을 고수해 올 수 있었다.
1970년대 초부터 설치, 퍼포먼스, 사진, 사운드, 비디오 작업을 통해 기존의 예술 언어를 해체하고 비-전통적인 매체언어를 적극적으로 작업에서 다루어 온 작가는 1980년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비디오를 이용한 멀티미디어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작업과정에서 가장 커다란 난관은 비디오 매체를 활용하는데 필요한 장비의 접근성이 매우 희박하다는 점이었다. 가격과 기술장벽이 큰 이 장비들을 작가 개인이 좀 더 원활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 1980년대에 들어서였다. 애초에 김순기 작가에게 있어 비디오와 컴퓨터와 같은 기술적 장비들을 높은 수준의 기술적 결과물을 만들어내는데 사용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다. 이러한 장비들은 거꾸로 기술적 장치를 앞서 언급했듯이 무용, 무아, 무위의 과정 속에서 시적(詩的)으로, 다른 말로는 ‘언어유희’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것이다. 비-인간적 수준으로 발달되어 가는 기술적 장치들은 그의 작업 속에서 가장 비-기술생산적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다. 이와 같은 기술적 장치의 활용은 1990년대에 들어 인터넷과 정보통신기술의 비약적 발전에 의해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으며, 이 시기에도 김순기의 작업은 개인이 대응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속속 등장하는 기술적 장치들을 자신의 작업에 차용하였다. 그 대표적인 작업이 1997년에 한국산업기술원에 설치한 ‘O Time’과 같은 작업이다. 인터넷으로 위성 데이터를 수신하여 실시간으로 시각화하는 이 설치작품은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미디어아트 작품이었다.
5. 김순기 작가의 작품세계에 대한 향후 전망
2000년 이후 김순기 작가의 작품세계는 글쓰기와 지적 대화의 폭이 확대되었다. 장-뤽 낭시, 작크 데리다, 장-피에르 코메티 등의 철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세계와 시대성, 인간과 자연, 문화와 예술에 대한 토론들이 기록되고 출판되었다. 노이하우스와 같은 거장들과 사운드 아트를, 파트릭 보카노프스키와는 실험영화를 협업하면서 작업의 확장과 이론적 심화를 함께 도모해 왔다. 약 40년 간의 대학 교편생활을 마치고 보다 자유로운 입장에서 창작과 연구에 정진하게 된 것이다.
김순기는 2019년 8월의 국립현대미술관의 대규모 회고전 및 개인전을 맞아 현재 새로운 전기에 돌입하고 있다. 이 연구는 올해의 연구기간 종료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작가의 창조적 생산을 추적하고 기록하는 과제를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 작가가 보여주는 창작의지와 열정을 감안할 때 이 연구는 김순기 작가의 창작여정에 있어 아직 중간 단계를 다루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1. 1970년대
<소리(Sori)>,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야외 공간, 1970
서울대 대학원 재학 당시 처음 시도한 설치 작업. 김순기는 본래 회화 작업부터 출발했지만, 공간을 구성하는 여러 물리적 상황과 맥락들이 가변적으로 반영되고 수용되는 '설치’미술의 특징에 매료되어 설치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그 첫 작품인 <소리>는 이후 프랑스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조형 상황(Situation Plastique)> 시리즈의 일종의 프로토 타입으로 볼 수 있으며 염색한 천들을 바람이 나부끼는 야외 공간에 걸어두는 방식의 설치 작업이었다. 소음, 바람, 대류, 지나가는 새, 행인들의 움직임 등 작가가 통제할 수 없는 환경적 요인 및 대기 상황이 작품에 우발적인 상황 맥락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제목이 <소리>가 되었다. <소리>는 그가 사각형 캔버스 안을 벗어 무위, 우연 등의 요소와 조우해 시공간 자체를 캔버스 삼게 된 초유의 작업이자 사건이었다. 날씨와 대기 환경과 같은 천인적 단서들을 작품을 구성하는 유희적 조건이자 주요 변수로 활용하는 그의 작업 태도는 이후 테크놀로지 기반 작업에서도 쭉 일관되게 이어진다.
<조형상황 I.II.III (Situation Plastique I.II.III)> 1971-1974
조형상황 1 (1971) 한국에서 처음 시작했던 야외 설치 작업 “소리”에서 연결된 작업
조형상황 2 (1972-1974) 마리나, 카뉴 슈르메르, 니스, 모나코 등 다양한 장소에서 설치
조형상황 3 (1973) 보르도의 10월
<조형상황>은 김순기의 초기 작업인 동시에 이후 전개되는 마니페스타씨옹 혹은 일시적 프로젝트형 작업의 특징을 예고하는 일생의 작업으로 간주될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이는 사전에 작품이 실행되는 장소의 환경(기후, 풍속, 유속, 기압, 수심 등)을 답사하고 과학적으로 측정하며 다양한 분야의 학자, 작가들과의 공동 리서치를 수반해 진행되는 대규모 야외 설치 작업의 형식을 띤다. 그러면서도 실제로 작품이 이뤄진 방식은 매우 캐주얼해 마치 일종의 놀이 풍경처럼 보인다.
프랑스 정착 초기, 니스 국립장식미술학교(École Nationale d’Art Décoratif de Nice)에서의 작업과 동료들과의 협업을 통해 선보였던 작업이 프랑스로 오기 직전 서울에서 했던 <소리> 등의 설치 작업처럼 한국적 소재와 색채를 공간에 매다는 방식을 프랑스의 자연환경에 맞게 조율한 것이었다면, <조형상황>은 남부 프랑스의 다양한 지역을 작품의 무대로 활용하면서 도구나 신체적 움직임을 매개로 하는 연 날리기, 열기구 띄우기 등으로 작품의 궤적을 좀 더 크고 넓게 확장해 나간다. <소리>에서 여러 가지 천을 공중에 매달며 캔버스에서 탈피했던 그는 <조형상황>에서 본격적으로 공중, 하늘이라는 공간을 우연이라는 요소와 결합해 자신의 일시적이며 순간적으로 유일한 캔버스로 자유롭게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형상황>이 그의 작품 세계에서 주목할 포인트가 되는 지점 중 또 하나는 작품에 비디오를 활용하기 시작한 계기라는 점이다. 모나코 왕국의 소개로 연결된 모나코 대학의 Signe 그룹과의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비디오 장비를 해변에 가져가 <조형상황>의 작업을 촬영했고 그 자리에서 모니터를 통해 살펴보기도 했다.
시간과 공간의 변화에 따라 작가 스스로가 부여한 <조형상황 Ⅰ,Ⅱ,Ⅲ> 의 작업은 당시 현장의 상황과 주어진 여건에 맞게 제작된 상황적 설치(퍼포먼스, 바람의 움직임, 사운드, 비디오 등) 작업이었으나, 퍼포먼스 이후 최근까지 여러 전시들에서는 기록 사진과 16mm 필름을 이어붙인 영상을 설치하는 형태로 주로 소개되었고, 때때로 작업의 스케치와 사진 등이 결합된 방식, 혹은 퍼포먼스와 결합된 방식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일기
1971년경 니스 대학교에서 대여한 카메라장비(super 8)로 찍은 영상으로, 1971년에서 1973년 사이 프랑스에서 시도했던 다양한 일상의 퍼포먼스 장면을 담고 있다. 이후 김순기 미술제(1975년, 미국문화원)를 통해 소개되었다. 한 곳에서 파낸 흙을 다른 곳으로 채워넣는 행위라든가 도끼로 나무를 패기, 바다에서 뜬 물을 다른 물에 쏟기(물+물(일기)), 실뜨기 행위(줄놀이(일기)) 등이 담겨있다. 단순한 행위들이 시공간 안에서 반복되는 가운데 행위의 흔적과 물리적 이동이 오히려 지워지고 덮어지는 결과를 낳는다.
<아스프로망의 일기 (Journal d’Aspremont)>, 1973
초기작업 중 하나로 야외의 나무 앞에서 돌을 조금씩 쌓아올리는 반복적 행위를 통해 시간의 흐름을 기록해 나가는 퍼포먼스이다. 자연 속에서 일상의 행위에 기반을 둔 이러한 퍼포먼스는 기록적 행위이면서 동시에 비 기록적인 속성을 지닌다. 한편, 돌을 쌓아올리는 행위는 치성을 드리는 수행과도 연결된다. 돌과 흙과 같은 자연의 재료를 옮기고, 서로 더하고, 지워버리는 일련의 과정은 이후의 작업에서도 일관되게 발견되는 특징이다.
<물방울 (Goutte d’eau)>, 1975
1975년 김순기 미술제에 설치되었던 <물방울> 역시 시간과 공간을 김순기 작가 특유의 시적인 시선으로 포착해낸 작품이다. 수도꼭지에서 뚝뚝 떨어지는 먹물이 바닥에 흐르거나 튀어 만드는 얼룩 그림을 포착하는 설치는 공간에 깔려 있는 시간의 흐름을 가시화하는 장치로 볼 수 있다. 작가에 따르면 지속적으로 떨어지는 물방울들은 그 하나하나가 어떤 작은 단위의 시간과 공간을 응축시키거나 고정시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떨어지는 물방울들은 그 밑에 매일 다르게 놓이는 물체 위에 누적되어 흘러 연속적이자 불연속적인 시간성을 창출하게 되고 그 결과 끊임없이 변형되는 공간과 조형적 상황을 이루게 된다. 물리적 조건에 따라 기체, 액체, 고체로 상변이하는 물의 형태 변화와 흐름에 관한 그의 과학적 분석, 유희적 실험은 이후 다양한 비디오, 설치 작업으로 지속적으로 연결된다.
<오늘 (Aujourd’hui)>, 1975
<오늘 (Aujourd‘hui)>은 1975년 마르세이유에서 열렸던 전시 <6일간의 회화> 에서 소개된 이후 같은 해 한국에서 김순기 작가가 직접 기획한 전시 ‘김순기 미술제’(미국문화원)를 비롯, 1998년 ‘한국 현대미술전, 시간의 시학’(호암미술관) 등에서 반복적으로 소개되었던 대표작업이다. 이 작업은 1975년에 개념을 작성한 <달력>시리즈로부터 출발했는데 새로운 시공간에서 작업이 설치될 때마다 새로운 <오늘(Aujourd’hui)>이 되는 것이 그 특징이다. 또한 <오늘 (Aujourd’hui)>은 전시를 방문한 관객의 참여를 통해 완성되는 일종의 생성형 작업이자 퍼포먼스를 근간으로 이루어지는 설치작업이기도 하다. 우선 작가는 주어진 전시 기간과 전시장의 벽 크기를 감안하여 달력을 만들어 벽에 설치한다. 그리고 전시시작일로부터 끝나는 날까지 관객들이 그 날, 즉 오늘의 날짜를 직접 달력에 기재한다. 방문한 날짜에 ‘오늘’이라 쓰고 그 전날에는 ’어제’, 그 후일에는 ‘내일’이라 쓴다. 어떤 필체로 써도 좋고, 어떤 색으로 어떤 언어로 써도 상관없다. 한 날짜에 여러 방문객이 기재할수록 좋다고 작가는 말한다. 이 작품은 시간에 관한 김순기 작가의 철학을 가장 잘 대변해주는 작업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루하루 새로 명명된 ‘오늘’이라는 시간은 어제도 되고, 내일도 되는 유동적인 시간적 개념이 되며 ‘오늘’은 단어 그 자체로 그저 ‘빈 말’일 수도 있고, 시간이 관통하는 틀이 될 수도 있음을 작업을 통해 한꺼번에 은유해 낸다.
<김순기 미술제>, 미국문화원, 1975
1975년, 미국문화원에서 9월 16일부터 23일까지 약 일주일간 개최되었던 <김순기 미술제>는 일견 전시회로 여겨질 수 있으나 오늘날의 용어를 소급 적용해보면 일종의 다원예술 페스티벌의 형식을 갖춘 전시프로그램으로 간주될 수 있다. 또한 <김순기 미술제>는 작가가 기획과 참여를 적극적이고 종합적으로 이끌어 간 제도비평적 퍼포먼스로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김순기는 한국을 떠난 이후 <조형상황 Ⅰ,Ⅱ,Ⅲ>을 비롯, 프랑스에서 수 년 간 새롭게 시도했던 다양한 작업들과 변화상을 국내에 소개하고자 하는 의도와 함께 기존의 전람회가 갖는 형식주의와 고답성을 벗어나는 방법론으로서 토론과 대화, 렉쳐 등을 주요 프로그램으로 하는 ‘미술제’의 방식을 채택한다. 이는 완성형 작업을 배치해내는 기존의 전시 방식과는 사뭇 다르게 진행과 참여를 통해 참여자 및 관람객들에게 예술적 창조행위의 본질과 조건들을 되묻게 하며 작가가 펼쳐놓은 상황에 대한 토론을 촉발시키고자 하는 일종의 장(場)과 같았다. 김순기는 “내가 소개하고자 하는 것은 일반적인 전람회는 아니다. 조형적 대상들을 단정한 문화공간 속에 배치해놓고 주어진 틀에 관람객을 초대하는 미술전람회의 천편일률적인 행사에 대한 반성과 그것에 대해 던지는 나름의 질문이 바로 이 미술제이다.” 라고 그 의도를 기술한 바 있다. 전시에 소개된 작품 <달력>과 <물방울> 이 품고 있는 의미처럼 작가는 미술제라는 전시 행사 자체가 매일 변화하는 시공간적 상황이자 포괄적 작업으로 기능하기를 바란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기에 <김순기 미술제>에서 다루어진 주요한 주제는 당시 그가 가장 몰두해있었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종합적 탐구, 분석, 조립, 분해 및 발전가능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시간과 공간 (Temps-Espace)>
1975; 공간사 주최 Space 75 초청작, 2008; 아트선재에서 제재작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 개인전에서 신작
1975년 공간사 주최로 개최되었던 ‘Space 75’ 페스티벌에서 김순기 작가는 다른 작가들과 공동으로 기획·연출한 <시-공간 (Temps-Espace)>를 선보였다. 퍼포먼스는 7명의 참가자가 7개의 다른 물질을 가지고 11분 15초 동안 각기 다르게 시간 및 공간의 축대를 이루어가는 작품이었다. 무대 위에서 이뤄지는 퍼포머들의 일상적인 제스처가 우연적으로 만나면서 빛과 소리가 함께 종합적인 조화를 이루어냈다.
이는 김순기 작가가 당시 실험하고자했던 시간, 공간, 사운드, 움직임과 같은 요소가 무대예술 안에서 종합된 사례로 공동작업이자 일회적 작업으로서 파편적인 기록들로만 남아 있었으나 이후 2008년 <플랫폼 서울>의 예술감독이었던 김선정 큐레이터의 초청으로 재 제작되었다. 이 작업은 2008년 11월 아트선재 센터 내 극장에서 실연되었으며, 새로운 제작진과 참여 아티스트들의 협업을 통해 완성되었다.
이 공연은 관객들에게 공연 중에 휴대전화를 끌 필요가 없으며 통화 또한 가능하다는 안내로 시작했고, 무대에서만 퍼포먼스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대 밖 관객석 등에서 발생하는 소리와 이미지들도 함께 어우러져 완성되었다. 공연이 진행되는 시간 동안 존 케이지의 얼굴이 전방의 화면 속에 등장했으며, 간간이 울리는 피아노 건반과 승려의 독경, 프랑스어 구절의 낭독이 이어졌다. 이 작품은 과거 존 케이지로 대표되는 플럭서스(Fluxus)가 주도해 온 소리와 침묵, 노이즈와 음악의 경계에 대한 실험적 유산을 확인할 수 있는 공연이었으며 한편으로는 김순기의 관념을 외연화 시키는 확장적 시도들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개인전 <김순기: 게으른 구름>에서 작가는 또 한 번, 동명의 타이틀로 새로운 작업을 기획하였다. 김순기는 <시간과 공간 2019>라는 제목의 신작을 통해 대규모 협업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는 로봇과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영매인 무당이 공동 퍼포머로 등장한다. 역설적이게도, 작가가 이름붙인 로복, 심심바보 ‘영희’는 시종일관 시를 음미하고 고요하게 독서하며 로봇으로서는 무용한 존재를 보여준다. 공공 퍼포먼스에서는 무당의 소리와 전시마당 위아래를 움직이는 애드벌룬에서 나오는 소리, 자전거 바퀴를 돌려 생성되는 소리 등이 함께 어우러졌다.
<0’0’’0’’’>, 1977, 생트 봄 콘서트
작가는 1977년 프랑스의 엑상 프로방스 인근의 생트 봄에서 열렸던 존 케이지의 세미나와 페스티벌에서 우연한 계기로 존 케이지와 조우하게 된다. 작가의 회고에 따르면 존 케이지는 김순기에게 자신의 작품 몇 곡을 공연해달라고 요청했다. 특히 <0’0’’0’’’>을 해달라고 청했다. 프로그램 상 세미나의 마지막 날에 존 케이지가 직접 공연하도록 예정되어 있던 곡이었다. 김순기는 어떻게 실연해야 할지 모르니 좀 가르쳐 달라고 말했고, 이에 존 케이지는 작가에게 음악을, 청중을, 그리고 시간을 잊어버릴 수 있냐고 물었다. 김순기는 그것이 자신이 음악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재주라고 답했고, 연주에 집중하였다. 생트 봄에서의 존 케이지와 교류하게 된 사건은 이후 둘 사이의 예술적 교류는 물론 공동작업으로까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아가 존 케이지의 적극적인 소개를 통해 김순기는 백남준과의 연결고리를 갖게 되고 후에 그가 프랑스를 떠나 미국을 방문하는 촉매로 작용하였다.
<과녁 회화 연작>
활쏘기와 과녁과 연결되는 일련의 회화 작업들은 제작 방식에서의 미묘한 차이에 따라 <과녁 그림>, <말따기 과녁>, <색따기 과녁>, <말지우기 과녁> 등으로 다양한 변주를 이루고 있다. 과녁 회화는 주로 흰색과 노랑, 빨강, 파랑, 검정의 오방색이 사용되며 정교한 계획과 설계에 따라 10년에 걸쳐 완성한 장기 회화 작업 및 작가의 활쏘기 과정을 비디오로 기록하여 만든 영상작업 <일화>도 이 <과녁 회화 연작>과 연계된다.
잘 알려진 것처럼 작가는 대학시절부터 취미로 활쏘기를 배웠고, 프랑스로 이주한 이후에도 생트 빅투아르 산 중턱에서 몸과 마음의 수련을 위한 활쏘기를 지속했다. <말지우기 과녁>(1980-1983)은 작가가 중국 화가 석도에 관한 연구 등을 포함해 노트에 써온 글들을 찢어 붙인 과녁이다. 일종의 말장난, 무위, 우연을 통해 글을 쓰고 지우거나, 지우거나 쓴 것과 같다. 김순기는 마음과 몸을 다스리기 위해 국궁을 연마했는데 활쏘기를 위해 과녁을 직접 그려서 사용하던 것에 익숙했던 자신의 그러한 행위가 ‘예술의 공간’을 이루고 있는 것임을 우연히 자각하게 되었다. 1970년대 초반 공간 조형의 실험을 거듭하던 그가 활쏘기 행위를 통해 자신의 중심 주제이자 관심사인 우연과 무위의 중요성과 가능성을 다시 한 번 다시금 깨닫게 된 것이다. 김순기의 그림 그리기와 활쏘기 행위는 궁극적으로 시공간을 초월하여 작가가 전적으로 주체가 되어 이루는 ‘그림 그리기’라는 적극적인 행위가 되었으며, 작가의 사유와 행위 안에서 하나의 연결고리가 되어 순환한다.
2. 1980년대
<봉주르 백남준 II>, 1984
1984년 음력 정월 대보름, 김순기와 백남준은 한일관에서 공동 퍼포먼스를 가졌다. <봉주르 백남준 II>은 1982년 뉴욕에서의 만남 이후 파리에서의 재회한 두 사람의 공동 퍼포먼스를 기록한 것이자, 이를 바탕으로 구성한 비디오 설치 작업을 이른다. (1982년 김순기가 뉴욕의 백남준 스튜디오를 방문해 대화한 것을 기록한 작업은 <봉주르 백남준 I>로 명명) 당시 김순기는 한식당인 한일관을 빌려 정월 대보름 잔치를 하면서, 한국인의 전통적 시간의 뜻을 되새기는 행위와 대화를 교환하였다. 두 사람은 색동천을 바닥에 깔고 병풍을 둘렀다. TV의 화면 조정 스크린 패턴을 만다라로 그려오고 화폭에 색동을 붙여서 그 위에 붓글씨를 써내려갔다. 당시의 퍼포먼스는 비디오로 촬영 후 편집되어(약 8분), 이후 전시에서 영상과 함께 색동위의 붓글씨를 병치하는 방식으로 설치되었다.
<준비된 피아노 (Piano Preparé)>, 1985, 2 채널 비디오, 5’ 56’’
1984년부터 제작되어 1985년에 선보인 영상으로, 작업을 통해 소리와 침묵을 담아낸다. 프로방스 남부에 있던 작업실의 야외 공간에 일년 간 피아노를 설치하고 이따금씩 연주하였다. 그리고 눈이 내리던 달 피아노에 불을 질러 사라지는 광경을 시적으로 촬영하였다. 전시에는 더블 채널로 나누어 상영하였다.
<바카레 연못(Etang de Vaccares)>, 1985,싱글채널 비디오, 6’ 19’’
김순기의 작업 중 널리 알려진 영상은 아니지만, 80년대를 가로지르는 중요한 영상이다. 작가는 지도를 펼쳐놓고, 그 위로 돌멩이를 아무렇게나(랜덤으로) 떨어트려 지도에 표시된 위치를 찾아간다. 그 곳에서 동이 틀 무렵부터 영상촬영을 시작했다고 회고한다 작가의 팔에 녹음장비를 부착하여 작가 자신의 숨결에 따라 카메라의 거리와 렌즈 조정등을 동시에 진행하였다. 즉 숨쉬기의 행위와 카메라 워크의 싱크를 맞추는 방식은 작가의 신체와 테크놀러지 장비인 비디오 장치를 연결시키는 시도이다. 지도, 우연성, 물, 카메라, 숨쉬기라는 서로 무관해 보이는 것들끼리의 랜덤한 연결성은 김순기의 초기 작업에서부터 일관되게 드러난 장치이기도 하다.
<표준시력검사표 (Regardez-voir)>, 1985
1998년 토탈미술관의 그룹전 <긋기>와 2000년 아트선재에서의 개인전 <주식거래>를 통해 국내에 소개된 김순기의 <표준시력검사표>는 우리가 흔히 보아오던 표준시력검사표 위에 숫자대신 한자와 한글 알파벳을 배열하여 변형한 작업 시리즈로, 검사표 상의 작은 글자들은 판독이 불가능한 상형문자다. 읽을 수 있는 알파벳 배열에 비해 한글과 한자의 생경한 배열과 조합들은 읽을 수 없고 결과적으로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 작품은 지각과 이해, 감상의 연결고리를 의도적으로 해체·지연시키는 단순한 장치를 통해 시각성와 의미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나아가 눈과 마음을 청소하고 감상을 시작하라는 의도로 해석되기도 했다.
<존 케이지 - 빈 말 & 미라주 베르발(Empty Words & Mirage Verbal)>, 1986, 2 TV, 37 min. & 22 min.
<존 케이지 - 빈 말 & 미라주 베르발>은 존 케이지의 공연을 김순기가 직접 촬영한 작업이다. 영상은 존 케이지가 1986년 마르세유 비에이유 샤리떼(Vieilles Charité)에서 열렸던 페스티벌 ‘비디오와 멀티미디어 / 김순기와 친구들” (Festival-Video & multimedia / Kim Soun Gui & Her Guests)’ (1986)에서 공연했을 때의 모습을 보여준다. 김순기는 1986년 본인기 기획한 이 행사를 통해 여러 나라에서 온 다양한 세대의 작가들을 초청하여 음악, 강연회, 전시, 퍼포먼스, 시 낭독을 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동양철학에 밝았던 존 케이지는 주역(周易)을 이용해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의 글에서 단어와 문장들을 선택했고, 그 임의적인 법칙에 의해 선택된 단어들을 노래한 것이 바로 <빈 말>이다. 반면 <미라쥬 베르발>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편지에서 선택한 단어들과 문장들로 만들어진 노래이다. 김순기는 두 대의 TV에 <빈 말>과 <미라쥬 베르발>(말의 신기루로도 번역되기도 함)을 설치하여 존 케이지의 공연을 이중창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김순기와 존 케이지는 유사한 접근으로 소리와 소음, 음악과 언어 사이에 놓인 전통적 경계와 위계의 무의미성을 묻고, 텍스트의 불가해성과 우연성을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하였다.
<은하수 (Voie-Voix Lacteé)>, 6min, 60min(duration variable), 1988
'Voie-Voix Lactee'(1988)는 작가가 한국에서 프랑스를 가는 18시간 비행장면을 짧게 압축시킨 영상으로 2018년 아라리오 갤러리에서는 60분으로 선보인 바 있다. 과거 서울에서 프랑스를 가려면 중간 경유지에서 3~4시간을 기다려야 했고, 작가는 그곳을 A와 B의 사이 공간으로 여겼다. 작가에 따르면,"스페이스 비트윈(Space Between·사이 공간)이 A와 B가 만나는 지점인데 그것을 '제로 타임'이라고 여겼다. 김순기에게'제로 타임'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포함한다. 즉 작가가 상정한 제로타임은 A와 B, 둘 다 가능하게 해주는 시공간이다. 일종의 경계인으로써 경험한 시간과 공간의 가로지름이 은하수를 비롯한 다양한 작업을 통해 이야기되고 있다.
<아이스 비디오 콘서트: 비데 & 오(Ice Video Concert: Vide & O)> Kunsthaus, Hamburg, installation on 1 TV, 25 min, 1989
1974년부터 비디오를 주요 매체로 사용하기 시작한 김순기는 1987년
‘비디오는 빈 그릇’이라는 생각은 이 작업의 핵심이다. 비디오는 비어있기 때문에 아주 짧은 순간이나 긴 세월 모두 ‘지금-여기의 찰나’로 담을 수 있다는 것이다. 김순기에게 비디오는 인간의 한계를 지시하는 테크놀로지나 언어로서의 도구가 아니다. 비디오는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던 것처럼 언어의 ‘삶의 모습들’, 다시 말해 열려있는 언어놀이로서 ‘한계도 없고, 우유부단한 그릇’에 가까운 개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작품에 나타난 작가의 언어유희 혹은 ‘언어장난(jeu de langage)’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작품의 제목인 ‘Vide & O’는 영어로는 비디오, 불어로 발음하면 ‘비드-에-오’ (빈 물)가 된다. 불어로 ‘비드(vide)’는 비어있음을 뜻하고, ‘0’는 빵점, 즉 비어있는 것이자, 발음상으로 ‘물(eau)’과 동일하다. 이에 더해 작가는 제목을 ‘非 對 0’로 해석하며 선불교적인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정신을 더한다. ‘비드 에 오’는 포르투갈어로 ‘나는 비었다’라는 뜻을 나타내는 문장이기도 하다.
<세계지도 연작>
2018년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개최된 개인전 ‘0 Time’을 통해 국내에 처음으로 선보인 시리즈, 공간과 시간을 담은 작가의 세계관을 지도라는 매체를 통해 압축적으로 표현해 낸 작업이다. 그가 작가로 생활하며 방문했던 세계의 여러 도시들에 대한 기억과 각 도시들에서 구한 지도들을 작가만의 방식으로 재조합해냈다.
<통로(Passage)>, 1987
마치 퀼트작업처럼 지도들끼리 패치워크된 <통로 (Passage)>는 세계지도위에 드로잉과 텍스트를 담은 다층의 레이어가 덧대어 있다. 김순기가 제작한 그의 세계지도인 <통로>는 가로 3.5m, 세로 4.5m에 달하며 실제 작업 스튜디오의 1,2층을 잇는 벽에 붙어 있었고, 이는 오르락내리락하는 삶의 공간에서의 이동 통로와 닮아있다.
<세계지도(carte du monde) 연작>, 1989-1990
<세계지도(Carte du monde)>는 13개의 군도처럼 배치되어, 하나의 집합을 이루면서도 동시에 분절되어 있는 형태를 띤다. 13개의 파편으로 구성된 세계지도는 그 안에서 무질서한 연결과 자의적인 컷 아웃이 중첩되어 있고, 풀과 같은 접착제 대신 아크릴 물감으로 접착되어 있다. 또한 지도 안에 작가만의 통로가 새겨져 있다.
주변에 빈 통조림 깡통들이 배치되어 있고, 지도 위에 전구가 빛나는 지도 작업인
3. 1990년대
<나비꿈>, 1993, 후쿠이 비엔날레 출품
비디오 설치 작품으로 해인사 자운 스님의 다비식을 찍은 비디오 기록을 3채널로 편집한 것이 내용이며 이미지의 압축과 해체, 중첩과 분리가 정교하고 힘있게 통합된 작품이다. 당시 한국측 커미셔너였던 성완경의 회고에 따르면, 후쿠이 현립미술관이 소장한 백남준의 <에이헤이지에서 만들다>(Made in Eiheiji)가 김순기의 <나비꿈>과 나란히 놓여 전시되었는데, 두 작품의 주제도 비슷하고 둘 다 매우 강렬하게 동양적 명상으로 이끌었던 3채널 작업으로 (백남준은 수직으로 세워 배열) 흥미로운 대조를 보여 주목을 받았다.
1997년 한국생산기술연구원의 의뢰로 제작된
장 피에르 코메티의 말처럼, 김순기의
한편 시계탑은 건물 밖 정원에 설치되어 있다. 연못 한가운데 설치되어 물 위에 떠 있는 셈이다. 온도에 따라 어떤 때는 시계탑 위에서 물이 흐르고, 어떤 때는 시계탑 밑만 물에 잠기기도 한다. 한겨울에는 물이 없을 것이다. 시계탑의 음향은 탑 안쪽에서 밑의 다리 사이로, 물 표면 방향으로 나오게 되어 있다. 물이 주파선을 따라 음향 효과를 내보기 위해서다. 시계탑은 매시간 약 1분간 ‘종’을 치는 프로그램이 있으며(9-19시), 그 사이에는 ‘우주 공간’ 프로그램이 24시간 작동된다. 별들, 해, 달과 우주인 여행들로 구성되어 있다. 한 계절의 기후 조건에 따라 프로그램이 조금씩 변경되고, 박자, 리듬도 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시계탑은 마치 물 위에 정지된 ‘우주 시계 정거장’이라 할 수 있다. 시계탑은 환경을 반사해 줄 수 있도록 되어 있어 물이 흐를 때는 서로서로 반사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주위에 있는 크고 작은 나무와 지나다니는 사람들 모습을 비추어 준다. 몇 그루의 큰 나무가 모니터를 향해 심어지고, 이는 햇살을 막아주며 그늘을 지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계절이 바뀌면 환경도 바뀔 테고, 자연의 색깔도 바뀔 테니 시계탑은 비디오 프로그램으로 보나 그의 환경 반사 조건으로 보나 항상 변하고 움직인다. 비디오 벽과 시계탑은 서로의 프로그램이 짜이는 순간 이 조건에 의해서도 서로 결정에 영향을 주며 영향을 발휘하기도 한다.
음향과 영상은 서로 관계가 없는 관계를 이루고 있다. 만나기도 하고, 안 만나기도 하고 혹은 여러 가지 형식으로 동시에 가기도 한다. 하나도 되고, 둘도 되고, 여러 가지도 되는 셈이다. 음향은 직접 녹음한 소리, 몇 년 전에 작곡한 생테즈 합성 작품(8’43’’), 존 케이지가 작곡했던 ‘빈 말’과 ‘준비된 피아노’ 혹은 컴퓨터 음향 합성으로 작업한 장 클로드 릿세의 소리 등 여러 가지 소스를 이용하여 작곡하였다. 이들은 서로 섞이기도 나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하루하루 프로그램이 짜여질 때마다 모두 함께 다시 작곡될 것이다.
<주식거래 (Stock Exchange)>, 1999
1990년대와 2000년대를 잇는 김순기의 대표 작업 <주식거래 (Stock Exchange)>는 1997년부터 작업이 시작돼 1999년 프랑스 Domard en Ponthieu 에 있는 Maison de LAC에서 전시의 형태로 선보여졌다. 이후 2000년 서울의 아트선재센터에 초청되었고 2001년에 프랑스 살로민(Sallomin)시에 있는 Maison de l’Art에서의 설치된 이후 2006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 영구 소장되었다.
이 작품은 1991년부터 1992년까지 작가가 아시아 지역을 무전여행하며 체감했던 세계정세의 변동으로부터 구상이 시작되었다. 한국을 떠난 지 20년 만에 작가는 한국, 일본, 중국, 인도 등 아시아 등지를 여행하며 새로운 변화상을 감지하게 된다. 아시아는 70년대에 머물러 있던 작가의 기억과는 놀랍도록 달라졌다. 속도 중심의 물질사회, 디지털 사회로 이동하는 한편 전통 문화가 침체되고 단절되었으며 그것을 이국적인 모습으로 재현해 관광산업화하는 모습이 보였다. 동시에 외국 문화를 숭배하면서 민족주의가 발전하거나(한국) 극단적인 빈곤함(인도, 중국), 삶에 대한 목마름을 한꺼번에 볼 수 있었다.
작가가 방랑여행을 통해 느낀 동양 사회의 급격한 변화는 새로운 작업의 자극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김순기는 프랑스에 돌아와 수 년 동안 기술적인 문제를 골몰하고 자금을 준비하며 작업의 주요개념들을 추출하였다. 21세기의 세계 현대 사회의 삶을 지휘하는 것처럼 보이는 가장 중요한 조건들로서 그는 세계의 금융시장과 물질사회, 우주기상조건, 뉴 테크놀러지의 발전과 디지털적 미래사회에 주목하였다. 이 세 요인들이야말로 예술뿐만 아니라 문화, 전통, 과학, 사회, 정치, 도덕, 문학, 철학, 미학 외 모든 대자연 즉 우주의 과거와 미래를 다 함께 지휘하며 변화를 견인하는 것으로 전망하였다.
1995년 김순기는 한국 과학기술원에서 뉴 테크놀러지를 이용해 최첨단 조각물을 해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청탁받은 조건에 맞도록 우선 인터랙티브한 멀티미디어 작업을 2년 동안 진행해 1997년
1997년 새로운 전시 프로젝트를 청탁받은 것을 계기로 1999년에 완성한 작업을
2000년 아트선재센터 전시에서는 1980년대 이후 갑자기 발전된 버블 경제 사회 모습을 풍자하는 판잣집을 만들었다. TV 모니터들로 축대를 이루고, 판자집을 올려 짓고, 판자집에 들어가 주식거래의 데이터 정보를 관람하도록 설치했다. 2001년에는 프랑스 살로민에 있는 La Maison de l’Art와 de la Communication Center에서
2006년에는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살로민에서 했던
4. 2000년대
‘물질의 벌어진 틈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기 위해서’, ‘시간을 그 혼돈 속으로 열기 위하여’, 김순기는 모니터 안쪽의 디지털 수 체계의 해체, 곧 25분의 1초의 이미지를 다시 그 절반의 시간으로 쪼개는 한계까지도 실험한다. 때로 그는 컴퓨터 작업의 오류로 쓰레기통으로 버려진 ‘시간- 물질’의 쪼가리를 다시 쓰레기통에서 건져 올려 그 우연적인(Aléa) 것까지도 작업의 재료로 이용한다. 우연이라는 것은 김순기의 작업에서 핵심적으로 중요한 개념이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새로운 경험 속으로 우리가 미끄러지도록 허용하면서, 우리를 세계의 경험의 주체로서 새롭게 세워낸다. ‘시-공간이란 이 세계가 자기 자신에게로 당겨지는 힘이다. 세계란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경험의 주체다’라는 장 뤽 낭시의 말처럼 말이다.
<낭시와의 대화(Conversation with Nancy)>, 47 min, 2002
김순기의 동양 철학을 기반으로 한 ‘침묵’과 ‘혼돈’에 대한 탐구는 장-뤽 낭시(Jean-Luc Nancy, 1940-), 그리고 자끄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와의 대화와 같은 인터뷰 작업에서 심화된다. <낭시와의 대화(Conversation with Nancy)>(2002)에서 김순기와 낭시는 오늘날의 예술에서의 내용의 부재에 관해 논하며 동서양 철학의 차이와 접점을 심도 깊게 다룬다.
<낭시와의 대화>에서 일부 발췌
김순기: 과연 오늘날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디에 있습니까? 현시와 소멸(la disparition et la présentation)이라는 흐름 속에 있는 것입니까?
장-뤽 낭시: (...) 오늘날 예술이 사라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현대 예술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은 오브제만이 아닙니다. 예술 자체가 사라지고 있기도 하지요. 우리는 헤겔 이후에 ‘예술은 끝났는가’ 하는 고민을 여러 번 했습니다. (...) 저는 이것이 미를 정의하는 문제 뒤에 형식에 대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의미가 표현될 수 있는 형식 말입니다. 여기서 형식이란 보편적 의미로 시각적, 청각적, 행위적 형식을 일컫는 것으로 해둡시다. 세계 속의 인간은 항상 무언가를 감각하며 삽니다. 최후에 느끼게 될 감각은 누구도 잘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감각한다는 것은 우리가 서로 소통한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리고 현재 우리는 소통이 활발한 세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 하지만 그럼에도 반대로 우리는 감각이, 다시 말해 감각의 교섭이 어떤 형식을 빌려 구현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없습니다. 예전처럼 종교적인 형식을 취하는 것도 아니고 정치적인 형식으로 이루어지지도 않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오늘날 이러한 교섭이 단 한 가지의 형식을 취한다는 인상을 받고는 하지요. 바로 경제라는 형식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예술은 경제와는 상반되는 것이 되었습니다. 경제와 완벽한 대척점에 놓이게 된 것이죠. 그러나 동시에 경제 발전, 기술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 여기에서 예술의 문제는 어떻게 형식을 만들어 낼 것인가 하는 겁니다. 작품의 중심이 되는 오브제도 없고 예술의 위계도 사라진 상태에서 정신 없이 감각의 교류가 일어나고 있는 이 상황에서 말입니다.
<데리다와의 대화(Conversation with Derrida)>, 45 min, 2002
<데리다와의 대화>에서는 세계화에 저항하는 '침묵의 예술'에 대한 관심과 동양 정신성의 관점에서 해체주의의 근간을 고민하는 철학적 사유가 드러난다.
김순기는 2002년 ‘멈_춤’이라는 주제로 열린 제 4회 광주비엔날레에서 장-뤽 낭시, 자끄 데리다와의 대담을 담은 영상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작가는 파리 근교 리조랑지(Ris Orangis)에 있는 데리다의 자택을 찾아갔다. 두 사람은 데리다의 서재에서 ‘세계화 시대의 미술의 존재’란 무엇인지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한편, 낭시와의 대화는 광주비엔날레 오픈 첫날 실시간 화상 회의로 이루어졌다. 작가는 낭시에게 ‘미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들은 세계화 시대에 예술이 직면한 위기를 인식하고, 저항의 방법을 모색한다. 인터뷰어로 분한 김순기는 단순히 대담자의 의견을 수동적으로 듣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인터뷰이와의 사유의 차이점을 분명히 드러내며 상호간의 관점을 교환하고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철학자와의 인터뷰라는 대화의 형식을 예술 작업의 매체로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세계화된 미술 시장이라는 환경에 대해 논하는 것이다.
<데리다와의 대화>에서 일부 발췌
김순기: 세계화 시대에 예술은 시장을 넘어서는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데리다: 우선 질문에서 사용하신 ‘시장 너머(par-dessus le marché)’라고 하는 불어 표현을 보죠. 이 표현은 관용적인 것으로 번역이 어렵습니다. 제기하신 예술과 예술의 해석이 보편화되고 있다는 문제가 이와 관련이 있죠. 예술은 세계화된, 확장된 시장의 혜택을 볼 수도 있고, 아니면 고통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일상적으로 ‘시장 너머에’라는 표현은 불어에서 ‘게다가’, ‘한술 더 떠서’, ‘무엇 무엇이 있고’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이 표현이 예술에 적용되면, 예술이 시장의 법칙에 복속이 되어 있으면서도 그것을 벗어나 있다는 생각이 떠오르게 됩니다. 물론 시장을 완전히 벗어나서 예술 작품이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시장에 속해 있으면서도 어떻게 예술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혹은 어떻게 예술이 시장법칙을 우회하거나, 아예 그것을 벗어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선생님 표현대로, 우리는 세계화라고 흔히 말하는데 이 개념에 대해 주의를 해야 한다고 봅니다. 쉽게 세계화, 글로벌화라고 할 때, 외형적으로 국경이 점점 사라지고 상품과 사고들이 어디에나 쉽게 유통되는 세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몇몇 사람들에 의해 조작되고 있는 이 개념에 대해 주의해야 합니다. 세계화로 인해 전 세계 인구가 즉각적으로 모든 상품, 사고, 일거리, 예술 작품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이런 면에서 세계화는 하나의 슬로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지구촌에서 의사전달의 속도가 빨라지고, 세계가 더욱 서로에게 개방되어간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적, 수사학적으로 사용된 세계화라는 개념에 대해 비판을 금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아트선재센터는 미국 필라델피아에 소재한 슬라우트 파운데이션(Slought Foundation) 및 주한 프랑스문화원과 공동으로 김순기의 DVD와 책자를 담은 『Art, or Listen to the Silence』를 출간하였다. 3개국어로 이루어진 DVD와 책자에는 김순기와 자끄 데리다 및 장-뤽 낭시와의 대화 그리고 존 케이지의 콘서트 영상이 수록되어 있다.)
<달들(Lunes)> c-print, black and white, 12 photos, no frame, 83x60cm, 2003
작가가 직접 제작한 핀홀 카메라를 이용하여 실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보는 ‘바보 사진 시리즈’ 중 <달들(Lunes)>은 작가가 손수 만든 핀홀 카메라로 촬영한 열두 점의 달 사진으로 이루어져있다. 일부러 엉성하게 제작한 카메라로 약 30분 동안 노출을 하여 담아낸 이미지는 빛과 어둠으로 환원되었다.
김순기 작가에게 있어 사진, 특히 핀홀 카메라를 이용해 촬영한 사진들은 무시간, 무규칙, 무결정의 상태를 실험하는 유희적 매체이자, 보기와 -보지않기의 행위 혹은 이전-이후의 시간성을 연결하는 개념적 작업이다. 김순기는 디지털 카메라의 기술적 완벽함과 대비되는 카메라 옵스쿠라의 어리석음을 찬양한다. 이미지를 완벽하게 재현하기 위해 복잡하게 조작하는 대신, 우연을 따라 주어진 사건들을 덤덤히 받아들이며 자유롭게 노니는 풍경을 잡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작가는 만물의 생성에 대해 사유한다. “만물이 생성하기 전에는 혼돈이었기에 만물생성이 가능했던 것과 같이 내(我)가 없기에 내(我)가 가능하지 않은가?” 대상을 포착하기보다 혼돈과 우연 속에 놓아버림으로써 김순기의 바보사진들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한다.
<주식+꽃밭 (Stock garden)>, 2008
2000년 아트선재미술관에서 전시한 작품 <주식거래 (Stock Exchange)>를 기반으로, 그것을 2008년 갤러리175에서 개념적으로 확장·변형한 것이 <주식+꽃밭> 전시이자 작업이다. 전시에서는 세계의 대표적인 주가 지수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영상물이 소나무를 거쳐 벽에 비치는데 이는 <주식거래> 시리즈 설치 영상의 2008년도 버전으로서 다시 한 번 설치됐다. 영상으로 만든 날아다는 벌들, 작게 만든 실제 꽃밭에 비춘 ‘벌과 꽃밭’도 함께 작품을 구성한다. 기존의 작업이 당대의 금융 질서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면 2008년의 작업은 환경오염 등의 이슈를 반영한다.
주식과 꽃밭이라는 생경한 조합은 이상적 자연 모습과 우주의 기상 조건 외 금융 시장을 뒤흔들고 있는 주식 거래를 병치하는 방식에서 탄생한다. 작가에 따르면, 자연과 주식은 만날 수 없는 관계이지만 둘 모두 빛과 순간과 같은 통제할 수 없는 우연에 의해 지배되는 역설적인 관계이다. 작품을 통해 꽃밭의 삶과 죽음은 디지털적 주식 데이터 인포(Data Info)와 만날 수 없는 관계를 맺으며 만나는데 이렇듯 우연과 역설은 자연과 금융조건을 관통하는 공동의 조건이 된다.
5. 2010년대
<우물의 침묵>, 2010
<우물의 침묵>은 ‘미디어시티 서울 2010’에서 선보인 작품으로 당시 전시 장소였던 서울역사박물관의 박물관 뒷마당에 있던 우물을 중심으로 음향을 설치한 작품이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한 박물관 뒤쪽 우물에 작업을 설치한 작가는 이 사운드 아트 작업을 통해 침묵을 고찰하고 ‘텅 빈 마음으로 삶의 잡음을 들어볼 기회’를 가지기를 원한다고 밝혔다.
이 작품은 <침묵의 소리를 듣다>라는 프로젝트의 일환이자 작가의 프랑스 작업실 정원에 설치한 <니슈 에 샴> 작업의 변형이었다. 김순기는 침묵에 대해 존 케이지와 유사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그는 존 케이지의 ‘의도적인’ 침묵에 대한 개념을 장자(莊子)의 “귀로 듣지 말고 빈 마음으로 들어라”라고 하는 경구와 연결시켜 동양적인 것으로 넓혀나간다. 김순기는 이 작품을 통해 침묵에 비어있음을 들여 ‘무(無)’를 살필 순간을 조성한 것이다.
<애-주-애-주 (AIE-JOU-AIE-JOU)>, 2 min. 30 sec, 2013
<애-주-애-주>는 작가의 친구이자 승무 인간문화재인 이애주의 모습을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이용해 무작위로 편집한 디지털 영상과 합성한 작업이다. 김순기에게 이미지는 재현과 다른 것이며, ‘의미도 없고, 목적도 없이, 그저 갖고 노는 것’이다. <애-주-애-주>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우연성’은 김순기의 작업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새로운 시간과 공간의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작가는 특히 비디오를 편집하는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편집은 순간들을 가지고 새로운 세계를 여는 연금술과 같다고 여긴다. 이미지를 24분의 1 혹은 29분의 1의 시간까지 쪼개려는 시도는 인간의 눈 깜박이는 속도에 따른 ‘시간 포착 가능성의 한계’를 실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이미지는 ‘본다는 것’은 실은 ‘보지 않는 것’이라는 작가의 생각을 담고 있다.
* 작품의 설명 텍스트는 주로 김순기 작가가 주요 작업에 대해서 직접 기술한 저서 ‘봉주르’(2000, 홍디자인)와 작가 모노그라피와 도록, 전시 리플렛, 보도 자료, 작가 비평문, 작가 인터뷰 및 홍익대 예술학과 대학원 논문(한송이,<김순기의 멀티미디어에 대한 연구> 2019)도 참조하였다. 미발표작이나 1회성으로 소개된 작업보다는 반복적으로 소개, 확장되어 온 설치 프로젝트와 주요 개인전 및 공공기획전을 통해 알려진 작업을 우선순위에 둔다. 따라서 단순한 작업설명 방식보다는 개별 작업들에 대하여 각각 최초의 발상과 새로운 전시환경에서의 변화하는 맥락이나 기술적 차이점들을 중심으로 서술되는 방식을 지향한다. 본 작업설명서는 1차 데이터로, 향후 작업기술의 객관성과 내용 자체의 풍부한 함의를 동시에 전달할 수 있도록 수정, 보완해 나갈 계획이다.
일러두기
l 전시 개념의 규정
- 갤러리와 미술관, 문화원, 비엔날레, 영화제와 같은 제도공간 및 미술 프로그램 안에서의 공식적 전시 기록에 따른다.
- 현장에서의 장소특정적 설치, 퍼포먼스, 대담, 일상적 실천 등 공식적 예술 행위 바깥에 있었던 다양한 수행들에 있어서 작가 자신이 그것들을 매우 자명하게 전시로 규정하고 있으며, 그 특수성에 대하여 연구원들도 대체로 동의하는 바가 있어 전시 이력에 포함하기도 하였다.
l 작품 개념의 규정
-본 연구를 통해 새로 발굴된 드로잉 및 기록물 일부 또한 본격적인 작업으로 간주하여 기록한다. 즉, 일반적으로 전시나 창작을 위한 보조적 기록물로 여겨지는 작업의 드로잉과 설계 계획도, 서신, 시 쓰기, 붓글씨 등도 하나의 독립적인 양태의 개념미술 혹은 미학적 가치가 뚜렷한 창작물로 인정하여 기록한다.
l 작품 제목의 기술
-작가가 붙인 제목을 우선으로 한다.
-작품 혹은 프로젝트의 원 제목이 프랑스어로 되어 있고 별도의 표기가 없을 경우 프랑스어로만 기술한다.
- 작품 혹은 프로젝트의 제목이 국문, 영문 번역이 있을 경우 병기한다.
- 동일한 작품이 시간이 흐르면서 작가의 의도에 의하여 혹은 여러 오류로 다른 제목 값을 갖는 경우, 객관적으로 정보가 동일하게 기록된 인쇄물을 준거로 하여 정하고, 그 기준이 사라졌거나 모호할 경우 작가 측(혹은 공식 홈페이지 등)의 확인과 기록을 대조하여 표기하도록 한다.
l 작품의 유형 표기
- 작품은 시대순으로 배열한다.
- 작가는 홈페이지 등을 통해 전체 작업의 매체 혹은 장르를 비디오, 멀티미디어, 사진, 설치, 퍼포먼스, 시-그림, 조각, 사운드로 분류하고 있으며, 최대한 원래의 의도를 존중하여 적용한다.
- 그러나 상당수의 작업에서 퍼포먼스, 영상기록, 사운드, 텍스트 등이 동시에 발현되는 특징으로 말미암아, 작품 유형의 단순 분류가 어려운 점이 있다. 따라서 작품의 유형 구분을 드로잉, 페인팅, 사진, 설치, 퍼포먼스와 같은 분류와 함께 *영상 설치, *사운드 설치, *퍼포먼스 페인팅 등과 같이 여러 매체를 동시에 표기하는 방식을 택한다.
l 작품의 세부 정보 기술
- 김순기 작가의 경우 단일 프로젝트가 70년대부터 가장 최근까지 반복 설치, 상영되는 긴 흐름 속에서 파악이 가능한데, 그 과정에서 현장 설치와 미술관 내부의 설치 상의 차이가 존재하고, 여러 곳에 초청되어 설치되면서 작품의 크기와 매체, 적용된 기술, 협업 내용 등이 지속적으로 변화해왔다. 이 경우 한 프로젝트를 한번만 기록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각각을 독자적 작품으로 간주하여 그에 맞는 세부 사항을 기술하고자 하였다.
- 동일한 영상과 사운드 설치 작업이라도 출품 맥락에 따라 편집과 상영 길이가 달라지는 특징으로 말미암아, 고정된 데이터를 추출함에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작업을 구성하는 표준적 정보는 작가와의 토론과 공식적 기록 안에 남아 있는 정보를 통해 정하며, 그러한 특수성을 별도로 기록하고자 하였다.
l 작품의 이미지(스틸 컷과 영상본) 선정
- 전시 이미지와 각 프로젝트의 대표적 작업 이미지는 작가가 개방한 디지털 라이브러리로부터 추출되었고, 하나하나의 이미지는 작가와 연구팀이 함께 확인하여 선정하고, 구성, 경우에 따라 디지털 보정하였다.
- 사진 기록을 이어 만든 영상 작업과 처음부터 비디오 작업으로 진행된 경우 모두 관람객들이 작업의 핵심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일정한 내용과 분량으로 재 편집된 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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