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로는 전후 한국미술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60년미술가협회’를 결성하여 한국 현대미술을 주도하며 독창적인 추상회화를 구축해온 작가이다. 서울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였고,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주도한 화단의 보수적 흐름에 반대하며 열린 60년미술가협회전에 참여하여 덕수궁 북쪽 담벽에 작품을 내걸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나타난 앵포르멜 미술은 6.25전쟁을 겪은 작가들의 상황과 잘 맞아떨어지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실존주의 철학에 심취했던 윤명로는 문명 이전의 인간의 모습을 찾고자 하는 고뇌를 어두운 색채와 두텁고 거친 마티에르로 표현한 작품 <벽>, <원죄>, <문신> 연작을 선보였다.
1970년대에는 사회의 혼란과 부조리를 경험하며 사회질서와 규범을 <자>에 빗댄 작품을 제작하던 그는 판화 제작 과정에서 안료가 화학반응을 일으키며 물리적인 균열을 일으키는 현상을 포착하고 그 효과를 캔버스 작품에도 적용시킨 <균열> 연작을 제작했다. 1980년대에 발표한 작품에서는 공간감과 움직임이 두드러지는데, 화면 위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붓의 자취를 연을 날릴 때 실을 감고 푸는 얼레에 비유하며 <얼레짓>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전통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태도는 자연의 생명력과 그에 대한 경외심을 큰 화면에 강렬한 붓질로 담아낸 <익명의 땅>(1990년대), 아크릴 물감과 고운 철가루로 우리의 산수를 담아낸 <겸재예찬>(2000년대)으로 이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산화되어 색채가 변화하는 <겸재예찬> 이후에도 <조망>, <숨결>, <바람부는 날>, <겨울에서 봄으로>, <고원에서>, <정신의 흔적>을 통해 자연의 고유한 특성과 기운을 담은 작품을 꾸준히 그려내고 있다.
1936 전라북도 정읍 생
1960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60년 미술가협회 창립전≫, 덕수궁벽,서울
1963 ≪제3회 파리비엔날레≫,파리,프랑스
≪5일 판화가전≫, 국립박물관, 서울
1966 ≪제5회 도쿄국제판화비엔날레≫,도쿄국립미술관, 도쿄, 일본
1969 ≪제1회 국제목판화 트리엔날레≫, 까르피, 이탈리아
1971 ≪제3회 까뉴뉴국제회화제≫,오뜨 드 까뉴,프랑스
1981 ≪한국현대작가드로잉전≫, 아트코아 갤러리,로스엔젤레스,미국
≪’81 드로잉전≫, 국립현대미술관,서울
1990 ≪한국현대회화전≫,호암갤러리,서울
1995 ≪호랑이의 꼬리≫,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현대작가 특별전,베니스,이탈리아
2000 ≪한국현대미술의 시원≫,국립현대미술관,서울
2002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명예교수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2003 ≪추상미술의 이해≫, 성곡미술관,서울
≪드로잉:새로운 지평≫,국립현대미술관,서울
2005 ≪타이완 국제판화 초대전≫, 국립국부기념관, 타이완, 타이페이
2007 ≪한국현대판화잔상≫, 노보시브리스크주립미술관, 러시아
2008 ≪부산비엔날레≫, 부산
≪한국추상화1958-2008≫,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한국현대미술전≫, 영국, 런던
2009 ≪신호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10 중국미술관, 북경
2013 ≪정신의 흔적≫, 국립현대미술관
윤명로의 회화론: 〈벽(壁)〉에서 <겸재 예찬>까지
심상용(미술사학 박사/서울대학교)
예술경영지원센터에 의해 기획되고 수행되는 원로작가 아카이브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한국 현대미술 장의 원로 화가 윤명로의 회화 세계가 밟아 온 역사적 과정을 정리하고, 그 정리된 자료를 근거로 그 세계의 사적 의미를 밝히는 것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그렇기에 이글의 구성은 크게 다음의 두 경로로 구성될 터이다.
첫째, 지나친 해석적 시도나 이론적 해명을 자제하면서, 윤명로의 회화가 변화해온 과정과 각 변화의 단계별 특성을 주요 작품의 해석과 함께 밝히는 것이다. 윤명로의 회화가 겪어온 과정과 그 각 단계는 윤명로가 실존적 삶 앞에서 취했던 태도의 반영이며, 그 변화의 역동성은 그의 회화론의 중추적인 측면이다. 이에 대해 구체적인 작품들, 재료, 기법 등의 해설을 통해 기술하고자 했다.
둘째, 한국 현대 미술사에서 윤명로의 회화가 차지하는 의미를 밝히는 것이다. 이는 그의 회화가 한국 현대미술 장에서 불충분하게 논의되어 온 측면이 있고, 더 나아가 부정확하게 평가되어 온 측면마저 없지 않음을 고려할 때 더욱 중요한 과업 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각 시대를 연대기적으로 정리하고, 각 시대의 차이와 특성을 맥락화하고 그것을 토대로 전체를 아우르는 큰 윤곽에 대해 이론적 체계를 세우는데 있어, 각각의 작품(원화)들에 대한 실사적인 접근에 최대한 충실하고자 했으며, 이 방법론적 원칙은 불가피하게 해석을 가해야 할 때조차 지키고자 했다.
I. 하나의 연대기: 《벽》전에서 <겸재예찬>으로의 여정
1. 1959년의 <원죄>에서 1970년대 <균열> 연작까지
윤명로는 1960년 <1960년미술가협회>전을 통해 화단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4.19 혁명이 일어난 해이기도 했던 1960년에 열린 이 전시는 참여 작가들의 작품들이 덕수궁 담 벽에 내걸렸던 가히 전위적인 사건이었다. 전시는 국전(國展)을 위시한 해방 이후의 미술 제도와 관습에 대한 전면적인 항의의 제스쳐였다.
그가 1960년대를 전후했던 시기 윤명로의 회화는 당시 유행했던 앵포르멜적 경향을 띤 것으로, 물감의 두터운 마티에르를 지닌 일련의 형상이 화폭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1961년의 <원죄> 연작에서 64년의 <문신>연작에 이르는 초기의 작품들의 특성은 윤명로에게 국전 수상이라는 때 이른 성공을 가져다주었던 작품 <벽>(1959)으로 잘 대변될 수 있다. <벽>은 사르트르의 소설 『벽』에 등장하는 인물들로부터 영감을 취한 것으로, 소설에는 검푸른 어둠 속에서 자신도 인간일 뿐이라는 한계와 직면하는 주인공 파블로와 아일랜드인 톰, 그리고 겁에 질려 사색이 된 어린 후안이 등장한다. 파블로는 두려움에 무릎 꿇는 톰과 후안을 혐오하면서도, 자신도 어느새 자신을 지지해 왔던 신념과 멀어져 갈 뿐임을 절망적으로 인식한다. 게다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둘러댄 묘지에서 정말 두목이 체포되는 것처럼, 인생은 설명할 수 없는 역설들로 가득 차 있기도 하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삶은 어두움에 휩싸인 절망의 에토스와 시대의 격랑 앞에서 나약할 뿐인 인간의 의지를 거듭 확인하는 부조리의 끝없는 연속이다. 그리고 그것은 해방과 동란 이후의 지난한 세월을 감내해야 했던 윤명로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기도 했다. 자신의 자화상이기도 했던 것이고, 더 나아가 시대의 진실이기도 했던 것이다. <벽 B>(1959)은【주석1】 세 명의 실루엣을 불투명하고 녹 푸른 톤의 뒤로 어렴풋하게 숨기고 있는데,【주석2】 이는 암울했던 시대의 초상이자 그런 시대에 삶을 영위해야 했던 화가 윤명로의 심정이자 정신, 곧 자화상이기도 했다. 제3회 파리 비엔날레 출품작이기도 했던 <회화M-10>(1963)【주석3】의 뉘앙스도 이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한층 더 두터워진 안료의 층 위로 마치 한국의 전통적인 도기를 연상시키는 문양이 상처처럼 각인되어 있다. 인상을 풍기면서 물감의 층으로 된 거친 마티에르로 대변되는 물성에 충실하기 위해 최대한 배제되어 있는 색으로 인해, 분위기는 매우 가라앉아 있다. 이러한 명백하게 앵포르멜적 경향성 안에서 역설적이게도 어렴풋하게나마 인지가 가능한 사람의 형상이 등장하는데, 이는 이미 이때부터 서구의 양식적 강령을 어떻게든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시작되었다는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시기의 형상은 “형상 너머의 무언가를 담아내려는 의도”에 의해 설명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회화를 “인간의 실존을 기록하는” 보고서로서 인식하는 윤명로의 태도를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다.【주석4】 조형성이나 스타일의 측면에선 현저하게 다르지만, 1970년대의 <균열> 연작에서도 이러한 실존주의적 사유의 결에는 큰 변화가 없는 이유이다. 회화의 표면을 가득 채웠던 앵포르멜의 호흡은 현저하게 완화되었고, 형상이 사라진 빈자리는 갈라지고 터진 균열의 틈새들을 만든 질료들의 중립적인 물리적 현상으로 대체되었다. 현상적으로만 보자면 균열은 화포 위에 상이한 성격의 안료 층이 얹혀 지면서 그것들 간의 화학적 반응으로 인해 발생한 물리적 현상이다. 그럼에도 재료의 실험이나 기법이 이 연작의 궁극적인 의미라고 할 수는 없다.
표면적으로, 그러니까 양식적인 관점으로만 보자면, <균열> 연작은 예컨대 정형민이 그렇게 읽었던 것처럼 유입된 모더니즘 미학에서 출발한 그가 결국 “어떠한 내러티브도 배제하려는” 시도를 통해, 한층 더 자신의 출발점을 강화해나가는 지표로 해석될 여지가 없지 않다.【주석5】 그렇더라도, 그것이 <균열> 연작이 의미하는 바 전체일 수는 없다. 해석적 진전을 위해서는 사야를 더 넓혀야 할 필요가 있다. 이미 1970년대 초반 즈음의 <자>를 테마로 했던 연작에서 드러났듯, 윤명로에게 물질, 표현, 조형성은 물질, 표현, 조형성 자체로서가 아니라, 그것을 창발시키는 인식의 대응체들인 것이다. 사례로서 <자A-1>(1972)【주석6】을 들어보자. 질서의 상징인 자의 일부분은 흔적만을 남긴 채 마치 ‘얼음처럼’ 녹아 없어진다. 이 의미는 윤명로 자신에 의하면 “인간과 인간의 약속이 상실되고 (삶의) 질서가 붕괴되어가는” 부조리한 실존적 상황에 가 닿아있다. 자는 존재하고 또 존재해야 하지만, 점점 더 그것이 작동하지 않는 세태다. 그런 세계는 부조리한 세계이고, 그 안에서 사람들은 가야할 길을 잃은 채 방황한다. 윤명로에게 자는 “균형 잡힌 조화의 상태” 또는 “통일되면서도 다양한 인간”을 상징하기도 하다.【주석7】 윤명로의 <자> 연작에는 녹아내린 그것에 대한 반성적 사유를 통해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현대 사회의 도덕이 바로 서는 것에 대한 기대가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부조리한 시대와 그런 ‘시대를 앓는 존재’에 대한 상념을 배제된 채, <균열> 연작을 이제까지 대체로 그랬던 것처럼 재료의 실험에 방점을 찍는 유물론적 환원주의로만 독해해선 곤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표현 방법이나 기술 차원에서 균열을 생성하는 물질의 작용 에만 주의를 고착시키는 것에 의해 정당성을 획득하는 해석이다. 실존적 삶의 부조리하고 모순된 상황을 직시하고자 했기에, 윤명로는 자신의 회화가 형식주의적 이마올로기(imaology), 곧 이미지로 된 이데올로기로서 규정되고 기능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의 회화가 형식적 이상주의를 추구하는 탈-실존, 탈-역사적인 것으로 남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이 연작의 대표적인 사례로 <균열79-810>(1979)에서도 분명하게 확인되듯, 나름의 일정한 패턴을 지닌 무수한 고른 균열이 화면 전체를 덮고 있다. 균열은 질료들이 건조되는 속도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물리, 화학작용에 의한 것이지만, 정확히 하자면 균열 자체는 물질이 아니라 불질의 부재, 곧 비물질의 상태다. 균열은 결코 질료가 아니다. 균열은 오히려 질료가 명백하게 부재하는 부재로서 인장력으로 당겨지거나 밀어낸 물질과 물질 사이의 비물질적 공백이다. 그것은 물질의 속성들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공백이며 부조리며, 물질을 파괴하는 의미에서만 물질적이라는 의미에서 반(反)물질적이기도 하다. 그것은 안과 밖의 경계가 해체되는 순간이자, 표면의 긴장이 파국을 맞이하는 상황이다. 그것이 아니고선 존재할 수 없는 그 질료의 고유한 속성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되, 그것에 의해 포괄되지도 설명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물질 안에서 자행되는 일탈이요 전복인 것이다.
이렇듯, 균열은 실로 많은 것들을 상징하거나 지시하고 호출해낸다. 환원주의적 균열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가장 형식주의적으로 실현될 때조차, 암시와 함축을 동반하는 복잡한 서사들과 결부된다. 어떤 서술로도 그것을 다 제한하거나 규정할 수 없다. 그것은 텍스트인 동시에 텍스트로부터의 탈피고, 의미인 동시에 의미로부터의 해방이다. 그것을 읽는 유일한 방식은 그 규칙적이거나 불규칙한 균열의 틈들 사이에서, 최대한 많은 의미의 질료들이 숙성되기를 기다리면서 응시의 긴장감을 내려놓지 않는 것이다. 윤명로의 <균열>은 바로 이러한 반질료성, 물질의 부조리한 틈새, 것들, 에 의해 결정되고, 오로지 그것들에 의해서만 성격이 규정된다.
2. 1980년대 <얼레짓> 연작에서 1990년대 <익명의 땅> 연작까지
1980년대와 90년대는 윤명로의 회화에서 빠르고 격한 변화의 시기였고, 그의 회화의 종점이 어디인가를 예측하게 하는 급진적인 변화가 표면화되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동양적인 사군자 가운데서도 특히 대나무의 잎을 연상케 하는 붓질에서 1960년대의 앵포르멜적 격정이 포개어지기도 하고, 비록 실제적인 중경은 아니더라도, 산줄기를 연상케 하는 현상들이 거대한 규모의 회화로 실험되기도 하면서 변화의 열망과 그 실험으로 뜨거웠던 시대였다.
물질 자체와 물성의 실험에 집중했던 1970년대의 <균열> 연작은 1980년대로 들어서면서 큰 변화에 직면해야 했다. 그 변화는 단지 회화 표면에서 야기된 시각적인 것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얼레짓> 연작이 시작되었을 때, 그것은 이윽고 그의 회화가 도달해야 할 마지막 여정을 향해 접어든 치열한 과정을 알리는 것과도 같은 측면이 있다. 그것은 매우 큰 도전이고 변화였다. 무엇보다 서구의 앵포르멜이라는 서구로부터 유입된 양식적 패러다임에 대한, 비로소 표면화되기 시작한 적극적 문제제기라는 점에서 그렇다.
. '얼레짓'의 '얼레'는 실을 감고 푸는 한국의 전통적인 기구의 이름이고, '짓'은 몸짓의 준말로 작가에 의하면 자신의 내적 심정에 깊은 영향을 주는- 감거나 풀고자 하는- 신체의 행위를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그의 <얼레짓> 연작은 자신을 열어 보이려는 행위, 말하자면 자신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행위의 반복이자 기록이이다. 이때 그러한 표현을 가능케 하는 계기로서 신체적 행위의 비중이 매우 중요하게 부각된다.
<얼레짓> 연작에서 화면을 가득 매운 것은 “사군자의 대나무 잎을 연상시키는 브러시 스트록의 강한 필선”이다. 반복적인 붓질과 그 산물인 필선들은 분명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동양적 정신’의 현현이었고, 이전에서 이전의 회화들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보였다.【주석8】
이런 맥락에서 윤명로의 균열은 질료로서의 질료라는 미니멀리즘의 화두와는 상당하게 거리를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형태는 벌써 소멸되었고, 이제는 그것의 표면을 물리적으로 형성했던 질료 또는 질료성 마저 부유하는, 다만 흩어지고 모이며, 단절되고, 교차할 뿐인 가뿐하고 단속적인 터치들이 이전의 무거운 규범들을 대체한다. 경량화된 중립적 개념으로서 행위를 넘어서는 주체적 수행으로서의 제스쳐인 몸짓과 그 흔적들만 완연하고 충만하다. 이는 이전의 행위를 이끌던, 그리고 질료적 격렬함을 추동했던 미학적 사변과는 그 태도와 미적 특질에 있어 상이한 것이다. 여기서는 발산과 분산이, 부유와 흩어짐이 화두다. 앵포르멜의 무거운 무색무취로는 더 는 이 분산과 부유라는 해방 지향의 회화론을 설명할 수 없다. 앵포르멜에서 미니멀리즘으로 이어지는 고준한 형식주의는 이 동작들의 반복을 이끄는 유희적인 쾌와 반쯤 투명한 축적에 결코 동의를 표하지 않을 것이다.
얼레짓은 마치 이전 단계였던 ‘균열’의 이면에서 벌어지는 뜨거운, 내적으로 소용돌이치는 기운의 회화적 예증 같은 것이었다. 진행 중인 균열의 이면에서. 하지만 아직은 여전히 견고해 내면과 외부 세계를 격리시키는 기제로 작용하는 표면의 이면을 채우고 있는 것들, 재료에 대한 잠정적인 관심의 이면에 억눌려 있었던 것들, 예컨대 자유의 갈망이거나 해방의 의지 같은 조절될 수 없고 더는 지연될 수 없는 내면의 균열 연작의 관심사였다. 윤명로의 터치들에서 보이는 ‘동양적인 준법’과의 유사성을 굳이 논하지 않더라도, 수행적 거침없음이나 그 완급이 있는 격앙 등에서 제스추얼리즘이나 머테리얼리즘을 넘어서는 유희의 미학을 목격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접근이 아닐 터이다.
앞서 논했듯, <얼레짓>이 균열의 이면에서 추동되는 잠재하는 내적 기운의 표상이라면, 이후의 <익명의 땅, Anonimous Land> 연작>은 이제 막 앵포르멜의 형식주의적 권위가 와해되고, 그 경계부의 ‘균열’이 파열로 진전되는 어떤 결정적인 찰나의 광경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전적으로 재료에 대한 잠정적인 관심의 이면에 억눌려 있었던 것들의 토해내는듯한 그것, 격하게 사방으로 흩어졌다가는 모이고, 서로를 향하다 외부로 치닷는 벡터의 교차, 예컨대 오광수가 “정감의 폭발적인 분출”, 화면이 온통 걷잡을 수 없는 격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는 것“을 보았던 그것은 형식주의라는 길고 지루했던 규범 최종적으로 파하는 기념식과도 같아 보였다. 이렇듯, 균열에서 내재된 욕구에 주목하는 <얼레짓> 의 시대를 거치고, 앵포르멜의 파열에 대한 회화적 마니페스토인 <익명의 땅>을 거쳐온 과정은 부단히 억압을 직시하고, 균열을 초래하고, 파국을 선언하는 과정이었다.
여기에 등장하는 산수화적 이미지는 구체적인 산이나 풍경이 아닌 형상 너머에 있는 인간의 시지각 문제를 점검해 보는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바라보는 것과 알고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을 관계 짓는 인간의 미학적 행위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은 최근의 <겸재예찬>연작을 예고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3. 2000년대 <겸재예찬> 연작에서 2009년 이후 <바람부는 날(Windy Day)>과 <호흡(Breathing)>까지
2005년 가나아트에서의 개인전에서 <겸재예찬>이 발표되었을 때, 그것은 서양화가 윤명로는 그가 그토록 희구했던, 내적 지향의 한 궁극의 지점에 비로소 도달했음을 알리는 것으로서, 그것은 다름 아닌 전통회화의 유산을 계승하는 것이었다. 겸재는 실존했던 한 인물인 동시에 하나의 정신형이요 세계였다. 물론 그것이 실존 인물인 겸재와 그가 도달한 회화적 경지에 대한, 그리고 그 세계를 품었던 조선조의 미학적 에토스에 경의를 표한 것임은 물론이다. 정형민이 다음과 같이 읽었던 것처럼 말이다.
“공간에 대한 새로운 역사의식, 재료에 대한 작가의 실험정신은 전통회화와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들은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것 같다. 필선은 전통적인 붓놀림이 아닌데도 동양화에서 느낄 수 있는 기운이 감도는 것은 웬일일까. 이는 작가가 인위적인 작업과정보다는 자신의 숨결 (또는 자연)에 붓을 맡기는 “무위”의 미학을 터득한데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그는 내 그림이 어디에서 오는지 모를 때가 많다고 말한다. … 완성된 작품에는 작가도 예상하지 못했던 세계가 펼쳐진다는 의미 일 것이다. … 그의 그림을 볼 때마다 자꾸만 우리의 전통을 되돌아보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주석9】
하지만 그것은 그가 오랫동안, 유입된 미학의 과도한 두터움 속에서, 몸에 맞지 않는 의복, 운율을 만들어내지 못한 시구로부터 끝없이 묻고 또 물어왔던 해방에 대한 존재적인 동시에 현존적인 질문이기도 했던 것이다. 윤명로의 <겸재예찬>에서 안평대군이 꿈에서 보았다던 유토피아를 시각화시킨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연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감상들 가운데 하나의 가능태라 하더라도, 그것의 의미를 과거 한 때 흥했던 미학을 다시 불러들이는 역사적 연속성 안으로만 가두어두는 것은 적지 않은 것을 잃는 감상법일 수 있다. 윤명로가 겸재의 <인왕제색도>를 향후의 나아갈 바를 위한 이정표로 삼았을 때, 그것은 그것의 역사적 유산으로서의 의미 보다는 그것에 내재하는 미학적 태도 때문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옳다. 새삼스러운 반복이겠지만, <인왕제색도>를 배태했던 겸재의 정신과 태도는 관념주의로 일색하던 당대의 조류에 사실 자체가 지니는 미학적 가능성을 앞세워 도전했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관념적 산수와 의도화된 형식으로부터 해방을 선언하고자 했던 그 저항의 정신이야말로 겸재의 실경미학의 회화적 지평인 것이었다. 윤명로가 해석적으로 수용하고자 했던 것이 바 그 실경 정신이요 진경의 태도였던 것이다. 결국 윤명로는 진경산수를 지렛대삼아 그가 ‘익명의 땅’으로 이름 붙일 수밖에 없었던, 바로 그 땅, 그의 실존을 허용하고 또 구성했던 바로 그 자신의 땅으로 비로소 돌아온 것이다. 여기서 원초와 균열에서 익명의 땅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긴 퍼즐의 실마리가 풀린다.
실존주의적 불안에는 늘 근원과의 단절이라는 의미가 내재해 있다. 목전에서 전개되는 알량한 실존이 존재하는 유무형의 모든 것들에서 유일한 진리요 진실이 되는 그 때가 실존 자체가 영혼의 깊은 데까지 파고 들어온 불안과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 되었던 순간이다. <익명의 땅>을 거쳐 <겸재예찬>에 도달하는 윤명로의 회화적 여정은 결국 망각했던 자신의 근원의 한 조각을 찾는 것이었다. 이 밝히듯, 잃어버렸던 근원의 한 조각을 찾았던 것이다. 그 땅, 바로 그 대지에 다시 발을 붙이는 행위는 분명 엄습해오는 불안에서 벗어나는 하나의 해방구가 되어주었다. 이렇듯, 윤명로의 회화는 벽에서 균열로, 다시 익명의 땅으로 이어지는 무거운 실존의 순례를 마친 다음에야 비로소 그가 나고 자랐던 대지로의 귀환일 수 있었던 것이다.
겸재의 땅에 섰을 때, 그에게 자신의 대지를 찾은 사람에게만 비로소 주어지는 특권인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고 그리워하는 마음의 결이 준비되었다. 자신이 나고 살아온 대지로의 귀환이 그런 차이를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리라. 겸재예찬에 이르렀을 때, 윤명로는 붓 끝에 주어졌던 힘은 내려놓았을 때 주어지는 다른 힘의 존재를 알기 시작했고, <바람부는 날>과 <호흡>에 이르렀을 때 그것은 드디어 날아갈 듯 가벼운 것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세상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실존은 여전히 부조리하고, 두려움은 삶의 터져있는 곳곳으로 쇄도해 들어온다. 비참한 사건들이 이어지고, 혐오스러운 일들이 일상을 뒤덮는다. 실존의 광장은 여전히 거짓과 가식, 위선과 탐욕으로 붐빈다. 그 끝은 동굴 같은 어두움에 휩싸여 있다. 그렇건만 그것이 절망의 에토스에 머물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바람부는 날>에 이르러 윤명로의 실존감각은 확연하게 달라졌다. 이제 그토록 아린 실존의 감각은 상실의 심연으로 끌어내리는 하방(下方)의 굴레가 아니라, 불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느낄 수 없었을 뿐인 바람을 느끼는 존재론적 촉수가 된다. 바람은 질량의 그 고유한 부재를 등에 업고 떠올라 어느덧 ‘기원에 대한 그리움’과 ‘본향을 향한 동’을 향해 불기 시작한다.
II. 윤명로 회화, 그 정신의 궤적과 현현
1. 재료 및 기법
윤명로의 재료에 대한 남다른 관심은 일찍 시작되어 1963년 파리 비엔날레에 출품했던 <회화 M10>에서 잘 나타난다. 중국의 청동기와 신라 토기의 선형 장식을 현대적으로 응용해 표현하기 위해, 즉 고대 한국 토기의 짙고 거친 느낌을 촉각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유화와 거친 석고의 혼합매체 함께 사용하고 그 위에 손가락으로 은빛 소용돌이 형상을 그렸다.
윤명로에게 재료는 단순한 물료, 곧 관념과 사변의 세계에 맞서는 새로운 사실로서가 아니라, 그 자신이 ‘원초’로 표현하곤 하는 어떤 지향성을 지시하는 지표였다. 앞서 언급했던 대로 1970년대 말의 <균열> 연작에서 그러한 태도가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그때 그에게 질료는 무질서하고 무너져가는 시대상에 대한 물리적 대구, 또는 재현으로서의 물(物) 자체였던 것이다. 가장 물질적이었던 <균열> 연작조차 그것은 단지 유성과 수성 간의 질료적 충돌을 대하는 질료주의자의 탐닉 이상이다. 그것이 실험이라면, 그것은 질료의 실험이 아니라 질료의 한계를 실험하는 실험이고, 마티에르로의 입성이 아니라, 탈출의 모색으로 정의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윤명로는 부단히 새로운 질료를 찾고, 새로운 기법을 실험했다. <겸재 예찬> 연작에선 통상의 안료 대신 쇳가루가 많이 사용되었지만, 그 이후로도 다양한 재료와 더블은 조형성의 실험은 2019년 현재까지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예를 들어 <겸재예찬> 연작의 시각적 깊이를 더했던 가루 대신, 보는 위치에 따라 색이 변화하는 홍체(iridescence)가 새롭게 사용되기도 했는데, 이 재로로 인해 획득된 시각적 효과로 인해 그의 화면은 종종 정지된 화폭이 아니라 어떤 절제된 영상이 투영 중인 스크린처럼 보이기도 한다. 안료가 빛에 반응함에 따라 화면이 수시로 형상성을 띠거나 비형상적인 환영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감상자는 그림 앞을 지날 때. 그 시점의 움직임은 그때그때 화폭의 움직임과 연동한다. 이로 인해 화면의 시각적 스팩트럼은 더욱 뉘앙스가 넘치는 것이 되어, 때론 창 밖의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눈부신 햇살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눈부신 빛을 올려다보는 듯하기도 하다. 윤명로는 어떤 형상성을 띤 이미지를 일체 그린 적이 없고 또 그것을 의지적으로 거부해 오기도 했지만. 화면 앞에 선 감상자들의 시점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색과 함께 다양한 형상성으로 띤 것으로 다가온다. 이것은 회화를 정지된 숭고한 평면이라는 모더니즘의 경직된 도식을 넘어, ‘실존적 역동성’이라 해야 마땅할 어떤 힘이 내재적으로 준동하는 공간으로 인식해 왔던 그의 화화론에 비추어볼 때, 자연스런 전개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단순한 재료실험이나 기법연구의 차원을 넘어 윤명로의 회화론을 관류하는 중심적인 문제인 것이다.
2. 추상성, 하지만 역동적이고 운동하는
윤명로의 회화와 특히 2010년대 일시적인 붐을 이루었던 ‘단색화’로 명명된 경향 사이의 상관적 맥락에 대한 논의는 무엇보다 윤명로 회화의 진실을 이해하는데 유익하다. 윤명로의 회화세계는 앞서 언급했듯 긴박한 호흡으로 시대와 마주하며 변화를 거듭해 왔지만, 그럼에도 시종일관하는 것은 그의 회화가 추상적 형식을 그 기반으로 해 왔다는 사실이고, 그런 측면에서 그의 행보가 특히 오늘날 ‘단색화’로 범주화 되고 있는 1970년대의 추상 경향과 어떤 측면에서 긴밀하게 교차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윤명로의 세계 전체를 아우를 때, 그것의 특성은 그것의 앞뒤 잘라내고 1960년대나 70년대 일련의 추상화 흐름, 특히 단색화 풍의 일환으로 일반화하고 귀속시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요약하자면 윤명로의 세계는, 지금까지 정리된 미학적 결로 볼 때 단색화나 단색조 계열로 범주화될 수 없다.【주석10】 이 글에서 그 윤곽을 그리고자 시도해 온 그 궤적, 시대와의 대면과 호흡, 그에 부응하는 부단한 변화를 이끄는 역동성의 맥락을 간과한 채, 장르적 특성이나 이즘 같은 정태적 접근을 시도하는 한 윤명로의 세계와 제대로 만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윤명로의 세계는 하나의 형식이나 유파, 경향에 유폐되기를 거부한다. 이는 화가로서 윤명로의 태도, 시대를 포용하고 호흡하면서 몽상가나 사변가 관념론자로 남기를 거부했던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 윤명로의 세계는 변화의 시대를 살고, 반응하고, 표현해온 산물이다.
이제껏 다루어온 것처럼, 윤명로의 세계는 특정한 어떤 시기 보다는 각각의 시기들이 서로 이어지면서 만들어내는 전체 궤적을 통해 파악되어야 한다. 그의 회화는 끊임없이 변해 왔다. 개략 10년 주기로 윤명로의 세계가 지속적으로 변화를 시도했다. 궁극적으로 그가 지향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가 추구했던 회화의 궁극적인 방향은 무엇이었나? 그 궤적은 “서구의 모더니즘에서 오리엔탈리즘으로의 전환”으로, “서양의 실존주의 철학에서 동양의 생명 우주관”으로의 점진적인 선회나 급격한 돌파의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중국미술관장 판 디안(范迪安)이 이점을 잘 간파했다.
“그-윤명로-의 필적은 고대 동양문화에 대한 예찬이기도 하고 고정적 양식을 깨는 반항이기도 한데 이것은 바로 윤명로가 예술을 바로 보는 길이다.”【주석11】
윤명로는 서양과 동양의 교차점을 통과하고, 한국과 세계의 단속지점들을 지나야 했다. 이 변화, 이 운동, 멈출 줄 모르고 시종 치열했으며 80의 나이를 넘긴 현재도 여전히 치열한 그것으로 그렇게 해 왔다. 그리고 결국 무겁고 두터운 실존의 벽을 부수고, 파란한 균열의 시기와 익명의 땅을 거치고, 아마도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겸재의 나라를 거쳐, 이윽고 가벼운 바람의 세계에 와 닿았다. 그의 회화가 걸어온 여정은 시적 함축 보다는 파노라마적 서사 구조에 가깝다. 끊임없이 시도하고, 버리고, 떠나고, 되돌아오고, 다시 포용하는 그 역동적 운동이 불변하는 원리로서 그의 여정을 지켜왔다.
그 가장 높은 곳에 윤명로가 나고 살아온 땅, 그리고 우리 모두의 대지이자 무의식의 원형으로서 인왕산이 있다. 그 이름을 화폭에 그리기 까지 그의 한 평생이 소요되었다. 지금도 그는 대지가 허용한 안도감을 호흡하면서, 대지의 어느 경계에도 매이지 않는 바람의 더 높은 단계의 해방을 그리워하고 있다. 이제 근력은 예전 같지 않고 붓질은 더뎌졌지만 크게 문제 문제될 것은 없다. 그의 최근작들은 더 가볍고 바람처럼 더 섬세하다. 그의 회화는 아직 여정 중이고, 우리는 그 앞에서 아직은 다음을 기다리는 관람자일 수 있다.
윤명로 작가 연대기적 흐름 요약
1. 1960년대 <원죄>, <석기시대>,
윤명로는 1960년 <1960년 미술가협회>전을 통해 화단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4.19 혁명이 일어난 해이기도 했던 해에 열린 이 전시는 참여작가들의 작품들이 덕수궁 담벽에 내건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국전을 위히샇 해방 후 제도와 관습에 대한 전면적인 항의의 제스처였다.
1961년의 <원죄> 연작에서 64년의 <문신>연작에 이르는 초기의 작품들의 특성은 윤명로에게 국전 수상이라는 때 이른 성공을 가져다 준 작품 <벽>(1959)으로 잘 함축될 듯 하다. <벽>은 사르트르의 소설에서 영감을 취한 것으로, 소설 <벽>에는 검푸른 어둠 속에서 자신도 인간일 뿐이라는 한계와 직면하는 주인공 파블로와 아일랜드인 톰, 그리고 겁에 질려 사색이 된 어린 후안이 등장한다. 파블로는 두려움에 무릎 꿇는 톰과 후안을 혐오하면서도, 자신도 어느새 자신을 지지하던 신념과 멀어져갈 뿐임을 절망적으로 인식한다. 게다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둘러댄 묘지에서 정말 두목이 체포되는 역설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인가.
이 어두움에 감싸인 절망의 에토스는 시대의 격랑 앞에서 나약할 뿐인 자신의 신념과 의지를 거듭 확인할 수밖에 없었던 윤명로 자신의 자화상이기도 했던 것이고, 더 나아가 시대의 진실이기도 했던 것이다. <벽>은 세 명의 실루엣을 불투명하고 녹푸른 톤의 뒤로 어렴풋하게 숨기면서 암울했던 시대를 대변했던 것이다.【주석1】 그리고 그것은 바로 윤명로의 심정이었고 정신이었다.
2. 1970년대 중반~80년대 초 <균열> 연작
1970년대의 <균열> 연작의 갈라지고 터진 균열의 틈새들은 질료들의 물리적 특성에 기인한다. 문자적 의미로만 보자면 균열은 화포 위에 상이한 성격의 안료의 층들이 얹혀 지면서 그것들 간의 화학적 상호반응으로 인해 발생되는 물리적 현상이다. 그럼에도 재료의 실험이나 기법이 이 연작의 궁극적인 의미라고 할 수는 없다. <균열>연작의 기초가 되면서, 그 이전에 잠시 시도했던 자를 테마로 한 일련의 연작에서도 이미 그것을 가늠하는 인식은 “인간과 인간의 약속이 상실되고 (삶의) 질서가 붕괴되어가는 것” 이었다. 하지만, 균열 연작은 많은 경우 부조리한 시대와 그런 ‘시대를 앓는 존재’가 해석에서 배제된 채, 재료의 실험에 방점이 있는 유물론적 환원주의로 이해되곤 했다. 균열을 생성하는 물질과 방법 요인에만 주의를 고정함으로써 가능했던 해석이다.
물론 균열은 질료들이 건조되는 속도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물리, 화학작용에 의해 시각화되지만, 균열 자체가 물질인 것은 결코 아니다. 균열은 결코 질료가 아니다. 균열은 오히려 질료가 명백하게 부재하는 상태요, 물질과 물질 사이의 비물질적 공백이다. 그것은 물질의 속성들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공백이며 부조리며, 물질을 파괴하는 의미에서만 물질적이라는 의미에서 반(反)물질적이기도 하다. 그것은 안과 밖의 경계가 해체되는 순간이자, 표면의 긴장이 파국을 맞이하는 상황이다. 그것이 아니고선 존재할 수 없는 그 질료의 고유한 속성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되, 그것에 의해 포괄되지도 설명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물질 안에서 자행되는 일탈이요 전복인 것이다.
이렇듯, 균열은 실로 많은 것들을 상징하거나 지시하고 호출해낸다. 환원주의적 균열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가장 형식주의적으로 실현될 때조차, 암시와 함축을 동반하는 복잡한 서사들과 결부된다. 어떤 서술로도 그것을 다 제한하거나 규정할 수 없다. 그것은 텍스트인 동시에 텍스트로부터의 탈피고, 의미인 동시에 의미로부터의 해방이다. 그것을 읽는 유일한 방식은 그 규칙적이거나 불규칙한 균열의 틈들 사이에서, 최대한 많은 의미의 질료들이 숙성되기를 기다리면서 응시의 긴장감을 내려놓지 않는 것이다. 윤명로의 <균열>은 바로 이러한 반질료성, 물질의 부조리한 틈새, 것들, 에 의해 결정되고, 오로지 그것들에 의해서만 성격이 규정된다.
3. 1980년대 <얼레짓> 연작
1980년대의 <얼레짓> 연작에 도달했을 때, 서구의 형식적 패러다임으로부터의 벗어남이라는 지향성이 보다 뚜렷하게 나타났다. 얼레짓은 마치 이전 단계였던 ‘균열’의 이면에서 벌어지는 뜨거운, 내적으로 소용돌이치는 기운의 회화적 예증 같은 것이었다. 진행 중인 균열의 이면에서. 하지만 아직은 여전히 견고해 내면과 외부세계를 격리시키는 기제로 작용하는 표면의 이면을 채우고 있는 것들, 재료에 대한 잠정적인 관심의 이면에 억눌려 있었던 것들, 예컨대 자유의 갈망이거나 해방의 의지 같은 조절될 수 없고 더는 지연될 수 없는 내면의 균열 연작의 관심사였다. 이런 맥락에서 윤명로의 균열은 질료로서의 질료라는 미니멀리즘의 화두와는 상당하게 거리를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형태는 벌써 소멸되었고, 이제는 그것의 표면을 물리적으로 형성했던 질료 또는 질료성 마저 부유하는, 다만 흩어지고 모이며, 단절되고, 교차할 뿐인 가뿐하고 단속적인 터치들이 이전의 무거운 규범들을 대체한다. 경량화된 중립적 개념으로서 행위를 넘어서는 주체적 수행으로서의 제스처인 몸짓과 그 흔적들만 완연하고 충만하다. 이는 이전의 행위를 이끌던, 그리고 질료적 격렬함을 추동했던 미학적 사변과는 그 태도와 미적 특질에 있어 상이한 것이다.
여기서는 발산과 분산이, 부유와 흩어짐이 화두다. 앵포르멜의 무거운 무색무취로는 더 는 이 분산과 부유라는 해방 지향의 회화론을 설명할 수 없다. 앵포르멜에서 미니멀리즘으로 이어지는 고준한 형식주의는 이 동작들의 반복을 이끄는 유희적인 쾌와 반쯤 투명한 축적에 결코 동의를 표하지 않을 것이다.
4. 1990년대 <익명의 땅> 연작
윤명로의 터치들에서 보이는 ‘동양적인 준법’과의 유사성을 굳이 논하지 않더라도, 수행적 거침없음이나 그 완급이 있는 격앙 등에서 제츠추얼리즘이나 머테리얼리즘을 넘어서는 유희의 미학을 목격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접근이 아닐 터이다. 앞서 논했듯, <얼레짓>이 균열의 이면에서 추동되는 잠재하는 내적 기운의 표상이라면, 이후의 <익명의 땅, Anonimous Land> 연작>은 이제 막 앵포르멜의 형식주의적 권위가 와해되고, 그 경계부의 ‘균열’이 파열로 진전되는 어떤 결정적인 찰나의 광경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전적으로 재료에 대한 잠정적인 관심의 이면에 억눌려 있었던 것들의 토해내 듯한 그것, 격하게 사방으로 흩어졌다가는 모이고, 서로를 향하다 외부로 치다는 벡터의 교차, 예컨대 오광수가 “정감의 폭발적인 분출”, 화면이 온통 걷잡을 수 없는 격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는 것“을 보았던 그것은 형식주의라는 길고 지루했던 규범 최종적으로 파하는 기념식과도 같아 보였다. 이렇듯, 균열에서 내재된 욕구에 주목하는 <얼레짓> 의 시대를 거치고, 앵포르멜의 파열에 대한 회화적 마니페스토인 <익명의 땅>을 거치온 과정은 부단히 억압을 직시하고, 균열을 초래하고, 파국을 선언하는 과정이었다.
5. 2000년대 <겸재예찬> 연작
2000년 가나아트에서의 개인전에 <겸재예찬>이 등장했을 때, 윤명로는 그가 그토록 희구했던, 내적 지향의 한 궁극의 지점에 도달했음이 거의 분명해졌다. 겸재는 실존했던 한 인물인 동시에 하나의 정신형이요 세계였다. 물론 그것이 실존 인물인 겸재와 그가 도달한 회화적 경지에 대한, 그리고 그 세계를 품었던 조선조의 미학적 에토스에 경의를 표한 것임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오랫동안, 유입된 미학의 과도한 두터움 속에서, 몸에 맞지 않는 의복, 운율을 만들어내지 못한 시구로부터 끝없이 묻고 또 물어왔던 해방에 대한 존재적인 동시에 현존적인 질문이기도 했던 것이다.
윤명로의 <겸재예찬에서 안평대군이 꿈에서 보았다던 유토피아를 시각화시킨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연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감상들 가운데 하나의 가능태라 하더라도, 그것의 의미를 과거 한 때 흥했던 미학을 다시 불러들이는 역사적 연속성 안으로만 가두어두는 것은 적지 않은 것을 잃는 감상법일 수 있다. 윤명로가 겸재의 <인왕제색도>를 향후의 나아갈 바를 위한 이정표로 삼았을 때, 그것은 그것의 역사적 유산으로서의 의미 보다는 그것에 내재하는 미학적 태도 때문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옳다. 새삼스런 반복이겠지만, <인왕제색도>를 배태했던 겸재의 정신과 태도는 관념주의로 일색하던 당대의 조류에 사실 자체가 지니는 미학적 가능성을 앞세워 도전했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관념적 산수와 의고화된 형식으로부터 해방을 선언하고자 했던 그 저항의 정신이야말로 겸재의 실경미학의 회화적 지평인 것이었다. 윤명로가 해석적으로 수용하고자 했던 것이 바 그 실경 정신이요 진경의 태도였던 것이다. 결국 윤명로는 진경산수를 지렛대삼아 그가 ‘익명의 땅’ 으로 이름붙일 수밖에 없었던, 바로 그 땅, 그의 실존을 허용하고 또 구성했던 바로 그 자신의 땅으로 비로소 돌아온 것이다. 여기서 원초와 균열에서 익명의 땅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긴 퍼즐의 실마리가 풀린다.
6. 2009년 이후 <바람부는 날. Windy Day>과 <호흡,Breathing>
실존주의적 불안에는 늘 근원과의 단절이라는 의미가 내재해 있다. 목전에서 전개되는 알량한 실존이 존재하는 유무형의 모든 것들에서 유일한 진리요 진실이 되는 그 때가 실존 자체가 영혼의 깊은 데까지 파고 들어온 불안과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 되었던 순간이다. <익명의 땅>을 거쳐 <겸재예찬>에 도달하는 윤명로의 회화적 여정은 결국 망각했던 자신의 근원의 한 조각을 찾는 것이었다. 이 밝히듯, 잃어버렸던 근원의 한 조각을 찾았던 것이다. 그 땅, 바로 그 대지에 다시 발을 붙이는 행위는 분명 엄습해오는 불안에서 벗어나는 하나의 해방구가 되어주었다. 이렇듯, 윤명로의 회화는 벽에서 균열로, 다시 익명의 땅으로 이어지는 무거운 실존의 순례를 마친 다음에야 비로소 그가 나고 자랐던 대지로의 귀환일 수 있었던 것이다.
겸재의 땅에 섰을 때, 그에게 자신의 당을 찾은 사람에게만 비로소 주어지는 특권인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고 그리워하는 마음의 결이 준비되었다. 자신이 나고 살아온 대지로의 귀환이 그런 차이를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리라. 겸재예찬에 이르렀을 때, 윤명로는 붓 끝에 주어졌던 힘은 내려놓았을 때 주어지는 다른 힘의 존재를 알기 시작했고, <바람부는 날>과 <호흡>에 이르렀을 때 그것은 드디어 날아갈 듯 가벼운 것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세상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실존은 여전히 부조리하고, 두려움은 삶의 터져있는 곳곳으로 쇄도해 들어온다. 비참한 사건들이 이어지고, 혐오스러운 일들이 일상을 뒤덮는다. 실존의 광장은 여전히 거짓과 가식, 위선과 탐욕으로 붐빈다. 그 끝은 동굴 같은 어두움에 휩싸여 있다. 그렇건만 그것이 절망의 에토스에 머물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바람부는 날>에 이르러 윤명로의 실존감각은 홖연하게 달라졌다. 이제 그토록 아린 실존의 감각은 상실의 심연으로 끌어내리는 하방(下方)의 굴레가 아니라, 불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느낄 수 없었을 뿐인 바람을 느끼는 존재론적 촉수가 된다. 바람은 질량의 그 고유한 부재를 등에 업고 떠올라 어느덧 ‘기원에 대한 그리움’과 ‘본향을 향한 동경’을 향해 불기 시작한다.
종합
추상 관련 논쟁
이미 겸재예찬에서 논쟁은 크게 의미없는 것이 되었다. 윤명로의 회화를 추상으로 단정짓거나 단정짓지 않거나 모두 충분한 근거도, 의미도 없다. 분명 대상으로서의 북한산을 인식하고 재현적 태도를 취했다는 점에서는 추상일 수 없고, 그 대상이 형태도, 모습도, 질량도, 그리고 향취조차도 없어도 무방한 것이라는 점에서는 추상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감각적 경험에 기반하면서 그리는 것과 구체적인 대상을 그리는 것 사이에는 유의미한 유사성이 존재한다. 비지각적 대상과 대상의 부재는 전혀 다른 의미다. <겸재예찬> 이후 윤명로의 회화는 전적으로 추상적이지 않다. 벽을 그리던 1964년이나 인왕산에서 영감을 취하고 바람을 그리는 2000년대나 그의 세계에는 늘, 비록 다양한 성격이긴 하더라도 형상이 개입해 왔다.
의미
윤명로의 작업을 ‘서구모더니즘에서 오리엔탈리즘으로’의 방향전환, 서구의 실존주의와 동양의 생명 윤리의 조형적 융합체, 고대 동양문화의 예찬 등을 읽었던 본 판디안의 지적은 비록 ‘오리엔탈리즘’ 같은 용어는, 그것에 반영된 역사적 난맥으로 인해 다른 용어나 기술방식이 더 적절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타당하다.
윤명로는 서양과 동양의 교차점을 통과하고, 한국과 세계의 단속지점들을 지나야 했다. 그리고 무겁고 두터운 물리의 시기를 거쳐 가벼운 바람의 세계에 와 닿았다. 그의 세계가 걸어온 길은 시적 함축 보다는 파노라마적 서사구조에 가깝다. 그 여정은 역동적이었다. 끊임없이 시도하고, 버리고 포용하는 그것이 불변하는 원리처럼 그의 세계를 지지해 왔다. 그 분수령에 윤명로가 나고 살아온 땅, 그리고 우리 모두의 대지이자 무의식의 원형으로서 인왕산이 있다. 그 이름을 부를 때까지 거의 한 평생이 소요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대지가 그에게 허용한 안도감 속에서 호흡하면서, 대지의 어느 경계에도 매이지 않는 바람의 더 높은 단계의 해방을 그리워하고 있다. 들이 세계는 너무 가볍고 코끝이 징하게 신선하고, 그리고 섬세하다. 그의 회화는 아직 여정 중이고, 우리는 그 앞에서 여전히 다음을 기다리는 관람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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