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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성능경Sung Neung-Kyung

1944-07-29

#퍼포먼스 #사진 #설치

책임연구원 | 조수진

Sung Neung-Kyung

작가소개

성능경(1944~)은 비전통적 미술 창작의 수단인 신문, 사진, 행위 등을 이용한 작품으로 1960~70년대 실험미술의 흐름을 주도한 한국의 대표적인 개념미술가이다. 그는 1973년 전위미술 단체 ST의 회원으로 미술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해, 정부의 대중매체 검열이나 언론의 편집 권력에 도전하는 신문 관련 설치와 행위를 1980년대 말까지 선보였다. 그는 또 1970년대에 사진을 순수 미술의 영역에서 처음으로 다룬 작가 중 한 명으로서, 초창기의 동어반복 개념을 다룬 사진들에 이어, 신문 자체를 촬영하거나 본인의 개인사를 소재로 삼은 다양한 사진 설치 작품을 꾸준히 발표했다. 성능경은 나아가 1970년대 중반부터 ST 동료들과 함께 당시 이벤트(Event)로 불리던 한국의 퍼포먼스 아트를 소개한 선구적 존재로도 잘 알려져 있다. 자기 지시적 특징을 지닌 초창기 이벤트에서부터 복잡다단한 삶의 본성을 고유의 양식으로 예술화한 1990년대 이후 작품에 이르기까지, 그의 퍼포먼스 예술세계는 다채롭기 그지없을 뿐 아니라 매우 독자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성능경은 이처럼 50여 년의 세월 동안 한결같이 창작 활동에 매진하면서, 한국 미술사의 핵심 개념어인 전위, 실험, 모더니즘, 예술지상주의, 현실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필수 불가결한 작품을 남겼다. 그리고 나이가 팔순을 넘어선 지금까지도 여전히 기성 미술을 망친 예술을 창조해 나가며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적 아방가르드로서 현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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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약력

1944           충청남도 예산 출생

1967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1968           12회 현대작가초대전에 출품하며 공식 등단

1973           ST 그룹(Space and Time 조형학회회원으로 참여

1981~2010  계원예술고등학교 미술과 강사

1985           개인전 성능경전》 개최

1988           퍼포먼스 개인전 성능경의 행위예술》 개최

1989~1992  한국미술협회 이사

2001           개인전 예술은 착란의 그림자-성능경》 개최

2019          원로작가 디지털 아카이빙 자료수집·연구지원 사업 작가 선정

2022         성능경 퍼포먼스 아트 개인전-VIVA 예술로(路)》(은암미술관, 서울) 개최

                아르코 예술기록원의 한국 근·현대 예술사 구술채록사업 대상 작가 선정

2023         개인전 《아무것도 아닌 듯… 성능경의 예술 행각》(백아트, 서울) 개최 

                개인전 《개념의 덩어리: 성능경의 예술행각》(자하미술관, 서울) 개최

                개인전 《성능경의 망친 예술 행각》(갤러리 현대, 서울) 개최

                국립현대미술관 · 구겐하임(The Guggenheim Museum) 공동기획 단체 전시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Only the Young: Experimental Art in Korea, 1960s–1970s)》 참여

                제19회 월간미술대상 작가상 부문 최초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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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적 아방가르드, 성능경의 개념미술

 

 

성능경(1944~)은 비전통적 미술 창작의 수단인 신문, 사진, 행위 등을 이용한 작품으로 실험미술의 흐름을 주도한 한국의 대표적인 개념미술가이다. 그는 1973년 전위미술 단체 ‘ST’의 회원으로 미술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해, 정부의 대중 매체 검열이나 언론의 편집 권력에 도전하는 신문 관련 설치와 행위를 1980년대 말까지 선보였다. 그는 또 1970년대에 사진을 순수 미술의 영역에서 처음으로 다룬 작가 중 한 명으로서, 초창기의 동어반복 개념을 다룬 사진들에 이어, 신문 자체를 촬영하거나 본인의 개인사를 소재로 삼은 다양한 사진 설치작품을 꾸준히 발표했다. 성능경은 나아가 1970년대 중반부터 ST 동료들과 함께 당시 이벤트로 불리던 한국의 퍼포먼스 아트를 소개한 선구적 존재로도 잘 알려져 있다. 자기 지시적 특징을 지닌 초창기 이벤트에서부터 복잡다단한 삶의 본성을 고유의 양식으로 예술화한 1990년대 이후 작품에 이르기까지, 그의 퍼포먼스 예술세계는 다채롭기 그지없을 뿐 아니라 매우 독자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성능경은 이처럼 50여 년의 세월 동안 한결같이 창작 활동에 매진하면서, 한국 미술사의 핵심 개념어인 전위, 실험, 모더니즘, 예술지상주의, 현실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필수 불가결한 작품을 남겼다. 애초에 그가 추구한 개념미술은 한국 모더니즘의 내부에 위치하는 외부, 반모더니즘이었다. 또 그 자체로 신문, 사진, 행위의 잡종이면서 현실주의를 지향했던 그의 작품은 모더니즘의 순수성과 매체 특수성을 위반하면서, 동시에 민중미술의 전형적 형식에도 포함되지 않는 것이었다. 나아가 그가 1980년대부터 생산한 사진 설치나 1980년대 후반 이후 창조에 전념한 퍼포먼스는 본성상 시장성이 부족하거나, 미술 제도의 외부에 자리할 수밖에 없는 주변적 미술이었다. 이처럼 성능경은 늘 주류와 스스로 거리를 두고 일평생 비주류의 태도를 형식화했던, 한국의 역사적 아방가르드로서의 개념미술가였다.

성능경 개념미술의 이 같은 비주류적 성격은 그의 예술세계의 본질이자, 1970년대 이후 한국 미술사를 새롭게 해석하게 할 가능성이 된다. 성능경을 모더니즘의 내부에 둘 때, 한국의 모더니즘으로서의 개념미술, 즉 탈장르적 특징을 지닌 실험미술은 보다 풍부하고 다양한 논의 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 또 성능경을 현실주의 미술의 범주 내부로 이동시킬 때,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순수지향성은 민중미술의 그것과 만나 한국 미술사에서의 순수주의의 지평을 확장할 수 있다. 한국의 역사적 아방가르드, 성능경의 개념미술은 이처럼 비주류의 대안적 관점으로 모더니즘과 현실주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중심과 주변 등의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 한국 미술사를 재고할 수 있게 한다.

 

신문사진행위의 융합: 성능경 개념미술의 방법

 

1974621, ST 소속 작가로 활동하던 성능경은 3ST에서 신문: 1974.6.1 이후를 발표했다. 전시 기간인 일주일 동안 작가는 매일 4장의 하얀 패널에 자택에서 가져온 동아일보를 붙인 뒤, 신문의 모든 기사를 오려내는 작업을 계속했다. 행위가 끝난 후 그가 기사 부스러기를 패널 앞에 설치된 반투명 청색 아크릴 통 속에 넣자, 사진과 광고, 앙상한 행간만 남아 있는 신문이 관람자에게 제시되었다. 손에 면도날을 쥐고 전시장 벽면의 신문을 마주하고 있는 작가의 사진으로 남은 이 작품은, 오늘날 성능경 개념미술의 대표작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런데 사실 신문: 1974.6.1 이후1967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한 작가가 급속하게 변화하는 당대 한국 미술계의 동향 속에서 우여곡절을 겪으며 절치부심한 끝에 탄생한, 스스로 본인만의 것임을 내세울 수 있었던 첫 작품이었다.

성능경은 대학 재학 시절인 1964년 학과 동기들인 김휘부, 이경석과 함께 ㄱ ㅇ ㅅ 3인전을 개최하며 첫 전시 이력을 시작한 뒤, 1966년 홍익대학교 졸업전시회에서 100호 크기의 추상회화 Image 661Image 662를 발표했다. 당시 미술수첩(美術手帖)등의 일본 미술 잡지에 자주 소개된 오스트리아 미술가 훈데르트 바서(Friedensreich Hundertwasser)의 영향을 받은 이 서정적 추상 작품들은 그즈음 홍익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이일의 눈에 들었다. 이로 인해 그는 스승의 추천으로 196812회 현대작가초대미술전에 같은 스타일의 추상회화를 출품했으나 곧 해외 작가 작업을 모방했다는 자괴감에 심히 부끄러움을 느꼈다. 설상가상으로 이 시기 한국 미술계는 앵포르멜 추상 양식에의 추종을 버리고 옵아트와 팝, 키네틱, 해프닝 등 문명 친화적이며 일상에 밀착된 새로운 전위미술 사조를 재빠르게 수용하는 중이었다. 성능경은 이 경험을 통해 자신의 예술 행보가 한철 지난 유행의 뒤늦은 추종이었음을 깨달았으나, 향후 계획을 세우지 못한 채 1970년 군대에 입대했다.

그런데 성능경이 군 생활 중이던 1970년에서 1973년 사이, 그와 동년배의 미술인들은 1950년대 말부터 등장했던 과거의 전위를 대체할 미술계의 신예로 무섭게 부상 중이었다. 1967한국청년작가연립전을 주도했던 청년작가들이 평론가들과 연합해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를 결성하고, 성능경과 동기였던 이건용이 미학자 김복영과 함께 ST를 조직하며, 재일 작가이자 평론가인 이우환의 미술 이론이 한국으로 유입되는 일 등이 모두 이 기간에 이뤄졌다. 공교롭게도 성능경은 당시 현장에 존재하지 않아 모든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배제되었고, 제대 후 ST에 가입했을 때는 동료 작가들과 비교해 동시대 세계미술 동향과 이론에 관한 지식이 상당히 부족한 상황이 되었다.

특히 그가 소속되어 활동했던 미술 단체 ST는 그즈음 평면을 상대해서 입체 혹은 입체미술로 불리던, 기존 회화와 조각의 범주를 벗어난 전위미술을 선도적으로 탐색하고 있었다. ST에 합류한 성능경은 이건용으로부터 이우환의 평론 만남의 현상학 서설-새로운 예술론의 준비를 위하여를 읽어보라는 충고를 들은 뒤, 입체미술의 창조에 대해 나름 고민한 끝에 2ST상태성(1973)을 출품했다. 상태성4×8인치의 스테인리스판을 흰색 돌덩이 두 개를 맞물려 휘게 한 뒤 벽에 세워 놓은 작품으로, 작가의 회고에 따르면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 숨고 싶은, 당시 크게 유행하던 입체미술 부류의 대 실패작"이었다. 그는 전시를 통해 자신이 "일본풍의 입체 작품을 만들어봤자 그것은 공장 제품으로 치면 선발 메이커를 따라잡을 수 없는 후발 메이커"이며, "입체미술로는 작가로서 이류작가, 삼류작가밖엔 될 수 없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만의 작업을 해야겠다는 의지를 즉시 실행으로 옮겼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다음 해인 1974년 발표한 신문: 1974.6.1 이후였다.

입체미술의 대안을 찾기 시작한 성능경은 ST 작가들이 연구모임에서 학습했던 조셉 코수스(Joseph Kosuth)철학 이후의 미술과 나카하라 유스케(中原佑介)개념미술과 예술의 개념, 그리고 한스 하케(Hans Haacke)의 글과 작품 등을 접하며 '개념미술'에 관한 기초적 정보를 습득했다. 그에게 개념미술은 일차적으로 '그리거나 만들지 않는 미술', '비물질적인 정보로서의 미술', 그리고 '미술관 밖의 미술'로 이해되었으며, 이에 따라 입체미술의 주된 재료인 돌, 유리, 철판 등이 아닌, 정보가 담겨있는 신문을 본인 작업의 매체로 도입했다. 미술사학자 김미경은 저서 한국의 실험미술(2003)에서 성능경의 신문: 1974.6.1 이후가 신문을 이용한 당대 해외 작가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이탈리아의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 작가 루치아노 파브로(Luciano Fabro)의 신문지(1967), 일본 교토시미술관(京都美術館)컨텍스트전(Context exhibition)(1972.8.4.~8.9)에 출품된 가네자키 히로시(金崎博)의 신문지(1972) 작업을 예로 들었다. 그러나 신문 자체에 대한 성능경의 관심은 사실 오래된 것이었다. 그는 아침이면 아버지가 신문을 소리 내어 통독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으며, 본인이 신문을 스크랩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고, 신문: 1974.6.1 이후발표 2개월 전부터 이미 자택에서 신문을 읽고 오려내 두 개의 통에 나눠 담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의 삶과 신문, 그리고 개념미술은 이렇듯 처음부터 서로 밀접히 연계된 존재였다.

무엇보다 바닥과 벽에 신문지를 설치해 둔 루치아노 파브로나 가네자키 히로시의 작품과 성능경의 작품은 신문: 1974.6.1 이후의 경우 결과보다 과정에 의미를 두며 작가의 행위를 창작의 필수 조건으로 요구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지니고 있었다. 행위성은 또한 3ST에 참여한 동료들의 작품과 성능경의 그것을 차별 짓는 결정적 요인이기도 했다. 작가와 이건용, 김용민, 최효주, 남상균, 송정기, 여운, 최원근, 황현욱, 김홍주 등이 함께한 이 전시에서 천, 담배꽁초, 인형, 종이, 머리카락 같은 일상 사물을 이용한 다양한 입체 및 평면 작품이 소개되었으나, 전시 중 실시간으로 작품을 완성해 간 사례는 성능경의 것이 유일했다. 결과적으로 신문: 1974.6.1 이후는 전시 기간 내내 신문을 패널에 붙이고 기사를 오려 내어 아크릴 통에 담는 행위 자체가 예술이 된, 퍼포먼스 기반 설치였던 셈인데, 이로 인해 이 작품은 ST의 이벤트 실험이 본격화되는 1975년 이전에 이미 등장한 단체 최초의 이벤트로 여겨지기도 한다.

성능경의 개념미술 탐구는 신문: 1974.6.1 이후발표 다음 해인 19754ST2회 대구 현대미술제에서 소개된 새로운 양상의 작품들을 통해 계속되었다. 이들 전시에서 액자, 사진첩, 여기, 등의 사진 작품이 최초로 등장한 것인데, 이는 신문, 행위와 함께 사진이 성능경 개념미술의 또 다른 한 축을 형성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작가는 1976년에도 2회 서울 현대미술제5ST에서 사과, 끽연, 등의 사진을 연달아 발표하고, 동료 ST 작가들의 이벤트를 촬영해 주는 등 사진 작업을 활발히 해나갔다. 흥미로운 것은 작가가 사진에 관심을 두게 된 원인이 신문: 1974.6.1 이후의 작업 과정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성능경은 신문기사를 오려내고 난 뒤 남아 있는 보도사진, 기사의 내용이나 캡션이 사라져 더는 언어를 통한 의미 전달이 불가능해진, 그래서 그것이 속해 있던 맥락에서 분리되어 예술적 텍스트로서의 기회를 부여받게 된 사진에 주목했다. 작가는 이미 잡지 등에서 사진의 비물질적 본성으로 형식주의 모더니즘의 권위에 도전했던 해외 개념미술 작품들을 접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가 1974년 일본제 니콘 F2 카메라를 구매해 주요 사진기술을 독학으로 습득하게 된 직접적 계기는 분명 신문: 1974.6.1 이후를 통해 만났던, 해명되지 않는 기사 사진들의 순수미술로서의 가능성이었다.

성능경, 이건용, 김용민, 장석원, 윤진섭 등에 의해 1975년부터 창조되기 시작한 ST의 이벤트에서, 사진은 작가 행위라는 사건의 기록 수단으로서 활발히 사용되었다. 또 성능경, 이건용, 김용민, 최원근 등의 ST 작가는 사진을 개념적 성격의 단독 작품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중 사진 작업을 단체 활동의 종료 이후까지 지속한 이는 성능경이 유일했다. 주목할 점은 이 시기 발표된 성능경의 사진 작품 다수가 작가 행위의 결과물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여기(1975)에서 자택 앞 막다른 골목에 설치한 거울을 마주한 채 여러 자세를 취하는 본인의 신체를 촬영한 뒤, 다음 해 사과 먹는 과정을 아홉 번 촬영해 17장 인화한 사과(1976), 팔을 쭉 뻗어 검지에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고 점차 입으로 가져가면서 초점을 수정하며 촬영한 검지(1976), 담배를 피우면서 담뱃재에 카메라 초점을 맞추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촬영한 끽연(1976) 등을 연달아 발표했다. 성능경 스스로 "작업 자체가 이미 행위였다"라고 증언한 바 있는 이들 사진 작품은, 한국 순수미술계에서 최초로 생산된 이른바 '수행된 사진(performed photography)' 다시 말해 '그 자체로 퍼포먼스인 사진(photography is in itself a performance)'의 사례들이었다. 신문: 1974.6.1 이후에서 신문과 행위의 요소가 융합되어 있었다면, 다음 해 등장한 사진 작품들에서는 이처럼 사진과 행위의 요소가 서로 결합한 것이다.

성능경의 이 작품들은 작가 신체가 작업의 주체이자 대상이 된 점, 특정 맥락에서의 행위의 과정을 기록한 사진이라는 점, 미학적이며 위계적인 구성 대신 사진을 연속으로 나열하는 설치 방식을 도입한 점 등에서 1970년대에 세계 각지에서 출현한 여러 개념사진과 유사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어 1969년부터 뛰기, 밟기, 잡기 등의 신체 동작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기록하며 퍼포먼스의 요소들을 지닌 개념미술을 선보인 비토 아콘치(Vito Acconci, 1940~2017)스텝 작업(Step Piece)(1971)에서 매일 아침 발판을 1분에 30보씩 오르내리는 모습을 촬영해 사진으로 남겼다. 또 데니스 오펜하임(Dennis Oppenheim, 1938~2011)평행 응력(Parallel Stress)(1970)의 촬영을 위해 몸을 두 개의 벽 사이에 평행으로 걸친 채 10분 동안 버티거나 버려진 웅덩이에 V자 모양으로 몸을 꺾고 누워있기도 했다.

그런데 성능경 예술세계에서 이런 개념적 성격의 '수행된 사진'이 출범한 1976년은, 그의 본격적인 이벤트인 수축과 팽창, 위치, 신문 읽기, 돈 세기등이 처음으로 등장한 해이기도 하다. 이중 작가가 3인의 이벤트전시와 5ST에서 각각 발표했던 수축과 팽창(1976) 위치(1976), 행위의 기록인 사진과 사진 촬영을 위해 연출된 행위가 분리될 수 없는 성격의 작품이었다. 성능경은 수축과 팽창에서는 바닥에 서거나 누운 채 팔다리를 활짝 펼쳤다 접었다 하기를 반복했으며, 위치에서는 신체의 여러 부위를 사용해 열 가지 방법으로 잡지 공간(19756월호)을 쥐었다. 이처럼 작가의 특정 자세가 바로 작품의 내용이나 주제가 된 이벤트들에서, 그 행위의 기록물로서 사진이 지닌 중요성은 여타의 다른 이벤트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수축과 팽창위치의 기록물은 사전 촬영되어 전시 홍보물에 실리기도 했는데, 위치의 경우 해당 이벤트를 수행하는 작가의 뒷배경으로 기록 사진이 벽에 걸려 있었다. 또 성능경 초창기 퍼포먼스의 대표작 중 하나인 신문 읽기(1976)는 작가가 직접 신문기사를 소리 내어 읽은 뒤 면도날로 기사를 오려 나간, 신문: 1974.6.1 이후에서 행위만 추출한 이벤트였다. 그런데 작가는 신문 읽기이벤트를 4인의 이벤트에서 처음 발표한 후, 같은 해 기록 사진을 다시 4회 앙데팡당전시에 출품했다. 이밖에도 본래 원작의 부속 자료였던 신문: 1974.6.1 이후기록 사진은 발표 당시와 달리 현재는 예술 작품으로서 소장 혹은 전시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수축과 팽창이나 위치같은 다른 이벤트에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된다. 그렇기에 성능경의 1970년대 이벤트와 사진 작품들은 '퍼포먼스에서의 사진적인 것(the photographic in performance)''사진에서의 수행적인 것(the performative in photography)'을 각각 대표하면서, 서로 분리 불가능한 둘 사이의 관계 또한 드러내는 존재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1970년대 중반 성능경만의 개념미술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신문, 사진, 그리고 작가 행위가 융합된 현상은, 그가 점차 신문 자체를 촬영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뚜렷해졌다. 예를 들어 성능경이 1977서울11인의 방법전에 출품한 특정인과 관련없음 1(1977)은 작가가 신문에서 인물 사진들만을 채집한 다음 마이크로 렌즈로 접사 촬영해 확대 인화한 작품이었다. 또 그가 같은 해 각각 6ST3회 서울 현대미술제에서 발표한 1장의 신문(1977)8면의 신문(1977), 신문을 여러 번 접어 잘라 접사 촬영한 뒤 인화한 사진을 서로 뒤섞거나 일부분을 가려 벽면에 재배치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이중 1장의 신문은 동명의 이벤트가 존재했던 작품으로, 작가는 사진 설치 1장의 신문이 걸린 6ST전시장 한쪽에서 신문을 32등분으로 나눠 자르고 다시 한 장으로 재배치한 뒤 그중 한 조각을 들어 읽는 퍼포먼스를 1장의 신문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했다. 이벤트인 동시에 사진 설치였던 이 작품을 통해 성능경 개념미술에서의 신문, 사진, 작가 행위의 연계성은 한층 강화되었다.

성능경은 이후 5회 서울 현대미술제에서의 현장 1(1979)을 시작으로 신문 보도사진을 접사 촬영한 필름에 화살표나 점선 등의 기호를 먹과 세필로 그려 넣어 다시 확대 인화하고 전시장 벽에 설치하는, 현장연작의 창조에 돌입했다. 1980년대 성능경 예술세계를 주도해 나간 현장연작의 특징은 신문, 사진, 그리고 작가의 드로잉 행위가 통합된 작품이라는 데 있었다. 그런데 드로잉의 결과로 필름에 그려진 화살표나 점선 같은 기호 또한 독자들이 사진을 보는 행위를 지시하는 것이어서, 작품은 이중적일 뿐 아니라 상호주체적인 행위성을 지니게 되었다.

이처럼 1970년대 중반에서 1980년대 말까지, 성능경의 개념미술은 신문, 사진, 행위의 요소가 다양한 방식으로 상호융합되는 가운데 전개되어 나갔으며 그 시작은 1974년 발표된 신문: 1974.6.1 이후였다. 성능경 개념미술의 첫 작품인 신문: 1974.6.1 이후는 그러므로 연이어 생산된 그의 모든 예술적 창조물의 실험적 원형, 즉 프로토타입(prototype)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비롯되어 작가가 일평생 유지했던 개념미술의 방법은 신문이나 사진 같은 비물질적 매체를 행위와 결합하는 것이었는데, 이로 인해 작품에선 필연적으로 해당 매체 성질들 사이의 겹침 혹은 뒤섞임의 상태가 발생했다. 그 결과 창출된 작품의 혼재성(混在性), 그리고 자율적이거나 순수하지 않은 성격은 성능경의 예술세계를 단일 매체 중심적인 형식주의 모더니즘으로부터 거리가 먼 존재로 만들었다.

1978년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한국 현대미술 20년의 동향전에서는, '개념미술의 태동과 예술 개념의 정리'라는 주제 아래 성능경이 속한 ST의 작업을 입체미술에 속하는 것으로 정의 내렸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해 성능경은 당대의 평면 즉 백색 위주의 모노크롬 추상회화에 대적하는, 실험=입체=개념의 등식을 지닌 전위미술 작가로 공식적으로 호명되었다. 그러나 그가 이미 1970년대 초반부터 이른바 '이우환류의' 입체미술로부터 독립하려는 의지를 드러냈다는 사실, 그리고 "젊은 시절 개념미술을 시도하면서도 서구식의 개념이 무엇인지 실은 잘 몰랐다"라는 작가의 솔직한 발언으로 우리는 성능경 개념미술의 독자성과 당대 주류 추상회화 및 실험미술과의 차별성을 짐작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당시 개념미술은 동양 철학이나 불교 등에 관한 깊이 있는 고찰이 부족한 천박한 존재로까지 여겨졌었는데, 성능경의 작업에서 동양 혹은 한국적 본질에 대한 희구가 발견되지 않는 점을 상기한다면 그가 말한 '천박한 개념미술'이란 바로 본인 예술을 지칭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성능경 개념미술의 천박성은 정신적인 것의 추구에 몰두하던 당대 주류미술과는 대조되는, 그것의 일상적인 성격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예술의 개념은 신문을 읽고, 먹고, 운동하고, 담배 피우는 등의 인간 삶의 수행에 뿌리를 두었기에, 서구식도, 일본식도 아닌 성능경만의 개념이었다. 성능경은 이처럼 1970년대 중반부터 단색화로 대표되는 형식주의 모더니즘도, 입체미술로 불리던 주류 실험미술도 아닌, 신문, 사진, 행위의 요소가 융합된 자신만의 개념미술의 창조를 시작해 지금까지 지속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이들 각 요소와 연관된 주요한 논제들을 한국의 미술계에 제공해 주고 있다.

 

공적 메시지에 대한 사적 검열의 미술

 

성능경은 3ST에서 신문: 1974.6.1 이후를 발표하게 된 계기에 대해, 당시 유행하던 입체 작품의 대안을 제시하려 했을 뿐 아니라 "유신 초기에서 중기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내가 역사 앞에서 솔직해야겠다는 마음이 있었다."라고 증언한 바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3ST의 부대행사로 열렸던 ST 공개세미나(1974.6.29., 신문회관)의 주제는 "현대미술의 역사성과 반역사주의"였으며, 행사 개최일 단체의 연구 활동을 선도한 김복영의 동명의 글이 발표되었다. 이 같은 사실로 우리는 3ST개최 즈음 ST 회원들 사이에 '미술이 역사에 참여하는 방법'에 관한 논의가 활발히 오갔으리라 예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대다수의 ST 작가들은, 미술의 역사에의 참여를 작품에 당대 사회의 시각적 현실인 현대적 환경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실제로 여운, 남상균, 최원근, 송정기를 비롯해 3ST에 참가한 여러 작가가 대중 매체의 부산물, 담배꽁초, 성냥개비, , 책상, 의자 같은 집기류 등을 전시장에 설치해 문명화된 일상의 삶을 예술화하려 했다.

그런데 이들과 달리 오직 성능경만이, 신문: 1974.6.1 이후에서 직접 한국 사회의 실상이 담긴 신문지를 마주해 기사를 선택하고 오려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작가가 사용한 동아일보에 대한 정부 당국의 기사 검열이 이뤄지던 상황 속에서, 성능경의 기사 오려내기는 권력의 검열 행위를 재연함으로써 독재 정권 치하 한국의 시대상을 예술화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론 신문기사 중 일부를 취사선택해 스크랩하는 것처럼 보이는 작가의 행동 자체를, 대중 매체를 통해 전달된 공적 메시지에 대한 개인의 사적인 해석 행위로도 볼 수 있다. 둘 중 전자보다 후자의 분석이 더 설득력 있게 여겨지는 이유는, 바로 신문: 1974.6.1 이후직후 등장한, 신문, 잡지, 지도, 카탈로그 등의 다양한 공적 인쇄 매체를 이용한 성능경의 작품들에 있다.

성능경은 신문: 1974.6.1 이후를 발표한 지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열린 1회 대구 현대미술제세계전도(世界顚倒)를 출품했다. 일반적인 세계전도(世界全圖)를 작가의 의도에 따라 '전도(顚倒)'시킨 이 작품은 대형 지도를 씨줄과 날줄대로 오려 흰색 패널 위에 무작위로 다시 배치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작가는 이렇게 세계 지리에 대한 보편적이며 객관적인 정보를 임의로 재해석해 자신만의 예술적 지리학을 수립해 냈다. 공적 메시지를 사적으로 전용한 작품은 2년 후인 1976년 열린 5ST(事物事件)에서도 등장했는데, 작가가 당대 미술계의 대표 잡지 공간을 이용해 발표한 이벤트 위치가 그것이었다.

이벤트 발표일 성능경은 정상적으로 물건을 쥐는 손 이외에 발가락 등 여러 다른 부위를 사용해 자신의 신체에 공간잡지를 '위치'시켰다. 작가에 따르면 위치는 그즈음 공간이 갖고 있던 미술 잡지로서의 위상을 제 '위치'로 환원시키고자 시도된 작품이었는데, 해당 잡지의 관계자들이 미술계를 주도하던 당시 분위기를 고려할 때 그것이 미술비평의 권위에 대한 그의 비판적 도전임은 분명해 보였다. 성능경은 이처럼 작품 속에서 대중 매체의 생산물을 비상식적으로 소비하는 모습을 제시함으로써, 공적 메시지의 발화자와 수용자 간의 일방적 관계를 역전시키고 이를 통해 관람자들이 당대 한국 사회의 권력 구도를 고찰할 수 있게끔 했다. 이런 시도는 작가가 1977년 발표한 또 다른 작품들인 1장의 신문8면의 신문에서, 32등분으로 조각난 신문 사진들을 서로 뒤섞어 벽면에 설치하는 방식으로도 구현되었다. 특히 8면의 신문의 경우 고유명사와 명사가 알루미늄 테이프로 가려지기까지 해 기사의 가독성은 더 떨어졌다. 성능경의 무작위적 재편집으로 기사 내용의 문맥을 파악할 수 없게 되면서, 대중 매체인 신문은 공적 메시지가 지닌 허구성을 드러낸 예술로 변화했다.

작가 스스로 '공적 메시지에 대한 사적 검열의 미술'이라고 칭했던, 신문을 이용해 '역사에 참여하는' 개념미술은 2년 뒤인 1979년 성능경이 현장 1의 제작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즈음 신문의 보도사진에는 편집자가 해당 사진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표시한 다양한 지시 기호들, 즉 점선이나 실선 도형 및 화살표, 엑스와 삼각형 표식 등이 존재했다. 작가는 이런 사진들만 채집, 촬영한 필름 위에 공적 기호의 지시 내용을 교란하는 같은 모양의 사적 기호를 그림으로써, 해당 사진의 메시지를 무효로 만들고 언론의 편집 권력을 해체하고자 했다. 현장연작의 발표는 현장 2(1980)에서 현장 35(1989)에 이르기까지 1980년대 내내 이어졌는데, 성능경이 작품의 원자료로 집중적으로 채집했던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중반 사이의 보도 사진들 속에는 당대 한국의 시각적 현실이 생생히 담겨있었다.

작가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선택된 그 이미지들은 사건 현장, 도시나 시골의 풍경, 인물, 동물, 사물 등이 총망라된, 나아가 신문기사의 맥락에서 분리되어 동일 크기로 확대 설치되는 순간 균일한 가치를 지니게 된, 무명(無名)의 사진들이었다. 그것은 정치적 목적 아래 의도적으로 선별되어 선전의 기술로서 존재하는 공적 사진들과는 다른, 사적 예술로서의 보도사진들이었는데, 그 가운데는 1980년대 초반 민주화 운동 시위대와 진압 경찰의 이미지들도 있었다. 이들 이미지가 담긴 성능경의 현장 29a(1987)현장 29b(1987), 1987년 캐나다 토론토 A-space와 미국 뉴욕 Minor Injury에서 열린 민중 ART(Min Joong Art-New Movement of Political Art From Korea)전시에 출품되어 루시 리파드(Lucy R. Lippard)에 의해 당대 한국 정치 상황을 반영한 작품으로 해석되었다.

이처럼 대중 매체 사진에 무명(無名)의 성격을 부여하고 그로써 유명(有名)의 권력과 아우라(Aura)에 도전하는 방식은 성능경이 서울11인의 방법전에서 발표한 특정인과 관련없음 1(1977)에서도 나타났다. 신문에서 인물사진만 110여 장 채집해 확대 인화한 다음 범죄자의 사진처럼 눈 부위만을 노란색 띠 모양으로 가려놓은 이 작품은 작가의 "신문 편집자가 행사하는 인간성의 등급 날인 행위를 무효화시키고 인간 존재가 무명일 수밖에 없음을 주장하기 위한" 의도의 결과물이었다. 성능경은 이처럼 작품 속 인간에게 무명의 성격을 부여하는 일을 "문화지대에 공정성을 살포하기 위한 밭갈이"로 정의하면서, 3회 서울 현대미술제(1977)의 브로슈어 2권을 사용해 제작한 카탈로그(1979)의 발표를 통해 이를 실행에 옮겼다. 해당 브로슈어는 작가의 회고에 의하면 "한국 현대미술에서 카탈로그가 호화판으로 변해 가는 시점의 증거물"이었다. 더불어 "당시 출품작들이 거의 백색 계열의 미술이어서 카탈로그는 온통 희뿌연 색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성능경은 이 브로슈어의 각 페이지를 발췌해 작품 사진의 네 경계면에 빗금을 긋거나, 오려낸 작품 사진의 위아래를 바꿔서 붙이거나, 작가 사진의 눈 부위를 잘라낸 작품 캡션으로 가렸다. 그는 이렇게 3회 서울 현대미술제에 총집결했던 당대의 유명 전위미술가들을 무명의 존재로 만든 후, 작품 곳곳에 본인의 도장을 찍어 예술가의 아우라를 부정하는 자신만의 미술계를 새로 조직했다. 특히 카탈로그5회 에콜 드 서울(1979) 전시에서 선을 보였는데, 해당 전시를 중심으로 이 시기 모노크롬 추상 화단의 결집이 본격화되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성능경의 '남의 작품 위에 빗금 긋기'가 지니는 비주류적 성격의 의미는 남다른 것이다. 그의 행위는 그즈음 일제히 캔버스 표면 위의 행위에 몰두했던 작가들의 작품들, 이른바 한국적 모더니즘 미술에 대한 패러디이자, 모노크롬 화가들과 자신은 다르다는 것을 천명하는 계획적인 딴짓 거리였다.

그리고 카탈로그10년 뒤인 1989, 성능경은 서울 나우갤러리에서 열린 비판으로서의 예술전시에서 Nonsense 미술(1989)을 발표했다. 당시 작가는 철 지난 신문지 위에 검은색 구두약을 칠해 전시장 벽면에 세로로 길게 걸어두었다. 성능경은 1974년부터 계속된 신문 작업을 마무리하겠다는 결심으로, Nonsense 미술을 통해 '예술에 먹칠(구두약 칠)한 미술', '쓸모없이 반짝거리기만 하고 말이 안 되는 미술'을 제시하고자 했다. 이는 작가가 그동안 탐구해 온, 예술에서의 아우라의 박탈이라는 개념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었으나, 전시장을 찾은 동료 미술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Nonsense 미술을 뒤늦은 모노크롬 양식의 추종으로 받아들였다. 성능경을 향해 던져진 "시대가 어떤 때인데 모노크롬을 하냐."라는 한 미술평론가의 발언으로 Nonsense 미술은 한순간에 '의미 없는 모노크롬 회화'가 되었고, 그와 동시에 작가는 모노크롬을 난센스로 만든 존재, 즉 한국적 모더니즘 미술을 망쳐버린 이로 치부되었다. Nonsense 미술은 이처럼 모더니즘의 끝자락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작점이 교차하던 1980년대 말의 한국 미술계에서, 모더니즘을 망치게 한 미술이자, 망쳐버린 모더니즘 미술 둘 다의 모습으로 홀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Nonsense 미술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했다.

 

미술이 된 계보 없는 사진

 

1974, 성능경은 사진 작업을 시작하기로 결심하고 일본제 중고 니콘 F2 카메라를 구입했다. 그는 그즈음 출판된 사진가 유만영의 저서 사진기술-PHOTO(진명출판사, 1973)를 참고하며 1년간 사진술을 독학한 뒤, 다음 해인 19754ST2회 대구 현대미술제에서 자신의 첫 사진 작품들인 여기(1975), 액자(1975), 거울(1975), 사진첩(1975), (1975)를 선보였다. 성능경은 당시 세계적으로 그 영향력이 커지고 있던 첨단의 미술 경향인 개념미술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사물과 사건을 비물질적인 사진 이미지와 언어를 이용해 논리적으로 분석했던 이 미술의 창작 방법은 그와 이건용, 김용민, 최원근 등의 ST 소속 작가들이 한국 최초로 개념미술로서의 사진을 발표하도록 이끌었다.

특히 성능경의 액자, 사진첩, 조셉 코수스(Joseph Kosuth)를 비롯한 동시대 해외미술가들의 미술에 대한 논리실증주의의 태도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에 영향받아 분석 명제의 일종인 토톨로지(tautology)’ 개념을 기반으로 창조되었다. 토톨로지는 한 단어나 문장에서 동의어나 유의어를 되풀이해서 사용하는 동어반복이자, 논리학적으로는 ‘AA처럼 주어와 술어가 같은 개념이기에 어떤 해석을 해도 참이 되는, ‘항진명제를 뜻한다. 작가에게 이 명제의 예술적 구현 과정은 동어반복적 이미지를 생산하는 행위로 이해되었으며, 그 결과 사진첩 사진을 사진첩에 부착하고 촬영한 사진첩, 줄자 사진 위에 다시 줄자를 놓고 촬영한 , 액자 유리판에 비친 본인을 촬영하고 그 사진을 도로 액자에 넣어 전시한 액자가 탄생했다. 그리하여 이 작품들은 사진첩은 사진첩이다’, ‘액자는 액자이다’, ‘()자는 ()자이다같은 토톨로지 명제를 가시화해 낸 존재가 되었다. 또 그것들은 오직 자신만 참조하는 성격으로 재현된 대상 자체에 대해 최소한으로만 해석의 여지를 제공할 뿐 아니라, 대상과 외부 현실의 관계에 대해서도 좀처럼 어떤 것을 지시하거나 상징하지 않는 사진이 되었다.

그렇기에 서구 미니멀리즘이나 개념미술 작품과 유사하게 자기 지시적이며 즉물적인 특징을 지닌 성능경의 액자같은 작품은, 일견 당신이 보는 것은 당신이 보는 것이다(What you see is what you see)”라는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의 발언이나, 작품은 미술의 문맥 내에서 미술 자체에 대해 논하는 명제이기에 기본적으로 동어반복적이라고 본 코수스의 입장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성능경은 액자의 제작 동기에 대해 당시 순수 개념적인 입장에서 사진이란 무엇인가와 같이 답이 나올 수 없는 질문으로부터 출발해보려 했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므로 액자는 현상 세계를 재현한 보편적 사진 즉 기록의 역할을 담당한 다큐멘터리 사진이나 사진 매체의 예술성을 탐구한 모더니즘 사진이 아닌, 사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한 개념미술로서의 사진이었음이 분명하다. 성능경은 이렇게 코수스를 따라 사진은 사진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사진예술을 정의하려 시도한, 한국 개념사진 역사상의 시원적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성능경은 토톨로지 사진 작업을 통해 사진은 사진이다라는 답을 얻고 난 후, 곧 이 같은 방식의 미술 실천을 중단했다. 어쩌면 그는 비트겐슈타인이 저서 논리철학논고(1922)에서 지적했듯 항진명제는 무조건 참이기에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실재에 대한 그림 역시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재빨리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성능경의 액자를 작품 세계 초기 단계에서의 일회성 실험에 그치는 것으로 보게 만드는 이 같은 해석보다, 그의 토톨로지 개념에 애초부터 서구 개념미술과 근본적으로 차별화되는 무언가가 존재했다고 전제해 보면 어떨까? 혹 성능경의 토톨로지 개념 도입은 그 목적이 해외 사례들과 아예 다른 것이 아니었을까? 이런 제안을 해 볼 수 있는 이유는, 한국 개념사진이 해외 작가들이 그것을 선보인 것과 다른 정치, 사회, 경제적 맥락 속에서 등장했기 때문이다. 또 같은 미술 실천의 방법이라도 그것이 별개의 시·공간에서 여러 차례 반복되는 과정에서 반드시 원래와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는 점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서구 작가들은 1960년대 초반부터 모더니즘 미술과 사진의 형식주의 미학, 그리고 그것과 미술 제도 및 시장의 결탁을 비판하고자 아우라가 소실된 탈숙련적인 개념사진을 선보인 바 있었다. 그러나 성능경과 ST 작가들의 사진 작업은 한국 모더니즘 미술과 사진이 자율적인 미학과 형식을 완비한 이후에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이는 한국 개념사진이 해외 작품과 외관상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그 시작부터 이질성을 갖추게 된 결정적 원인이 되며, 그렇기에 성능경의 사진은 사진이다에는 처음부터 진위를 판단하는 동어반복의 명제 이상의 무언가가 잠재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같은 주장의 증거는 성능경의 토톨로지 개념사진들과 같은 해에 발표되었을 뿐 아니라 전 생애에 걸친 그의 사진 작업의 원형이 된 첫 작품, 여기(1975)거울(1975)에서 발견된다. 여기는 작가가 사는 동네 골목에 나무로 구조물을 설치하고 거울을 낚싯줄로 매단 뒤 이를 360도 방향에서 18장 촬영한 사진이다. 이 작품의 직후에 작가가 같은 자리에서 정반대의 촬영 방식을 적용한 또 다른 사진 거울의 창작이 이어졌다. 거울은 직경 50mm 표준렌즈의 조리개를 최대한 열어 고의로 아웃포커스 효과를 창출해 낸 작품으로 카메라 초점이 거울의 틀에 맞춰지면서 거울 내부의 대상과 외부의 풍경이 모두 흐릿해진, 보통의 기준으로는 그야말로 망친 사진이었다. 작가는 이미 여기에서 카메라 렌즈 조리개를 최대치로 조여 선명한 이미지를 얻어낸 바 있는데, 거울은 이와 완전히 상반된 방법으로 제작해 카메라와 인간 시각(視覺)의 유비를 시도하는 동시에 인간의 세계 인식의 정확성과 부정확성을 가시화하려 했다.

그런데 성능경이 여기거울에서 실험하고자 한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거울의 반영 원리를 이용한 이 두 작품에는 우리가 정면을 볼 때 육안(肉眼)으로는 볼 수 없는 후면의 풍경이 거울 속에 담겨있었다. 작가는 이처럼 모순되는 두 세계를 한 화면에 공존시키는 방법으로 인간 시각의 한계를 드러냈는데, 여기서 카메라는 이 사건을 기록하는, 즉 그것의 존재를 증명해 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여기거울은 나아가 사진 속 정면과 후면, 즉 주체가 바라본 세계의 이미지와 세계가 바라본 주체의 이미지를 관람자에게 함께 제시해 인간이 세계를 일방적으로 인식한다는 관점에도 의문을 제기했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세계를 (카메라로) 관찰하는 동시에 관찰당하는 이가 바로 작가 본인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첫 사진 작품 여기의 제목을 통해 자신의 일상 거처지에 예술세계의 출발 지점이 자리함을 천명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결국 성능경 개념사진의 주제는 (카메라를 든) 작가 자신의 세계 내 위상과 실존의 문제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성능경의 사진은 사진이다‘() 사진은 (내가 찍은/나에 대한) 사진이다의 다른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사진을 이용해 나는 미술가다, 왜냐면 나는 미술가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전위미술가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에 동어 반복적으로 대답했는데, 이는 미술의 본질을 동어반복으로 본 코수스에 대한 성능경 식의 해석이었다.

그러므로 카메라를 든 본인 모습을 대상으로 삼은 여기, 액자, 거울같은 성능경의 초창기 사진 작품들은, 개념사진인 동시에 자화상 사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미술에 대한 미술이 사진에 대한 사진, 다시 나에 대해 말하는 나의 작품이 된 것인데, 그렇다면 액자에서 작품의 형식은 사진, 토톨로지 개념은 창작의 방법론, 작품의 내용은 작가 자신이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액자는 액자이다가 실은 성능경은 성능경이다가 되는 이런 특징은 형식주의 모더니즘 미술의 자기중심적 주체성에 도전한 해외 주류 개념미술과 차별화되는 것이다. 일례로 에드 루샤(Ed Ruscha, 1937~)26개의 주유소(Twenty-Six Gasoline Stations)(1962)와 같은 사진 작품에서 주변 풍경을 소재로 선택, 그것을 자의식을 최소화한 중립적인 시각의 결과물로 재현해 어떤 상징적인 의미 부여도 거부한 바 있다.

그러나 개념사진가로서의 성능경은 일제 강점기 한국 최초로 자화상 사진을 선보인 사진가 중 한 사람인 신칠현의 계보에 자리한다. 신칠현은 1926년 촬영한 자화상 사진에서 스스로 피사체가 되어 카메라를 마주함으로써 본인 예술의 관심사가 자기에게 있음을 선언했다. 20세기 전반 내내 한국의 예술가들은 유교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둔 전통적 사고방식에서 탈피해 근대적 주체로 거듭나는 과정에 있었으며, 집단에 우선하는 개인적 주체성의 추구는 이들이 가장 중요시한 과제였다. 특히 성능경이 작가 경력을 시작한 한국의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발달로 개인의 자유 추구와 물적 욕구의 실현이 함께 가속화되던 시기였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 급부상한 청년문화의 주역들은 유교적 엄숙주의와 윤리, 집단적 사고를 강하게 거부하며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를 지향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성장 과정에서 근대화의 혜택을 받았을 뿐 아니라 식민과 전쟁의 경험에서 비교적 자유로웠기에 아버지 세대와의 분리 의식을 전례 없이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과거의 한국엔 없던 그리지 않는미술을 추구하고자 시작된 성능경의 사진 작업 또한 당대 청년 세대의 정체성 발현 현상의 일환으로 볼 수 있는데, 미술계의 젊은 신예로서의 그의 자의식은 1976년부터 발표된 작가 행위의 기록으로서의 초상 사진들에서도 드러났다. 대표적인 예인 성능경의 사과검지는 기성 미술이 신봉해 온 고상하고 영웅적인 미술가 관념에 도전하는, 한국 전위의 새로운 유형의 초상 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시선을 내리꽂은 채 사과를 먹거나, 입술에 검지를 대고 침묵을 종용하며, 고개를 쳐들고 담배를 피우는 행위에는 당대 한국 미술계의 맥락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작가 자신이 천박하다표현했던 포즈의 수사(rhetoric of the pose)’가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이는 서구 개념미술가들의 사진 작업이 정신주의의 상징이 아닌 물질로서 실재하는 몸의 복권을 일상 행위의 무목적적(無目的的) 수행이나 신체의 물리적 도구화로 역설했던 것과는 분명히 차별화된다.

19세기부터 미술과 관계를 맺어왔던 사진은 20세기 후반 개념미술의 도래와 함께 모더니즘의 시한 종료를 선언하는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 사진은 당시 여러 작품에 나타난, 덧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들을 기록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는데, 로잘린드 크라우스 (Rosalind E. Krauss)는 그것들을 흔적이나 자국으로서의 인덱스(index)로 이해하며 도상(icon)에 대한 현대미술의 우위 현상의 증거로 삼은 바 있다. 크라우스의 이 견해는 사진의 역사를 모더니즘 미술사의 일부로 간주해 온 기성 관점을 교정하는데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2회 서울 현대미술제에 출품된 사과, 끽연, 검지같은 성능경의 작품들 역시 작가 행위의 흔적으로서의 사진이면서, 그 자체로 순수미술 제도에서 전시되었다는 점에서 당대 구미와 일본의 여러 반()모더니즘적 미술 실천과 연동하고 있었다. 다만 당시 해외 작품들이 형식주의 모더니즘에 반기를 드는 임무를 수행 중이었던데 반해, 성능경의 개념적 사진은 한국 미술계의 양대 전위로 모노크롬 추상회화와 경쟁하던 실험미술의 한 양상이자, 한국 특유의 지역적 모더니즘의 일부분으로서 존재했다는 점이 달랐다.

그러나 1979현장 1을 기점으로 신문, 사진, 드로잉 행위를 결합한 성능경의 현장설치 연작이 탄생하면서, 또 그것이 초창기의 벽의 한쪽 면만 차지하던 설치에서 점차 전시 공간 전체를 이용하는 대규모의 설치로 변화하면서, 성능경의 사진 작업이 지닌 반() 형식주의적 성격은 돌이킬 수 없이 선명한 것이 되었다. 1985, 성능경은 서울 관훈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인 성능경전을 개최했다. '현장'이라는 제목의 이 전시는 현장 8(1985)에서 현장 24(1985)에 이르는 현장연작으로만 꾸려졌는데, 젤라틴 실버 프린트로 인쇄된 동일 규격의 사진들이 각양각색의 형태로 전시장 곳곳에 설치되었다. 작가가 몇 년에 걸쳐 채집한 15백여 장의 보도사진 중 8백여 장이 사용된, 한국 현대사를 사진 파노라마처럼 구성한 이 전시에는 당대 사회의 현실이 생생히 담겨있었다.

관람자들은 전시장에서 벽과 기둥, 바닥에 다양한 방식으로 설치된 당대 한국의 현장사진들을 마주할 수 있었는데, 사진 속 형상들은 김장철 배추의 모습부터 범죄 발생 장소에 이르기까지, 정치, 경제, 사회, 문화계 전반에 관련된 사회 주요 이슈를 총망라해 재현하고 있었다. 일례로 현장 4의 일부인 택시 사진은 작가가 교통 요금 관련해 당시 최대 화젯거리였던 정부의 택시 미터기 교체 정책을 의식하며 고른 것이다. 사진은 기본적으로 사진가들이 사진의 대상, 초점, 구획, 조명 등을 선택하는 행위로부터 창출되며, 보도사진 역시 이와 같으나 정치적 목적 아래 언론 편집자가 그것을 의도적으로 선별, 선전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다른 사진들과 구별된다. 그런데 미술가 성능경은 현장연작에서 이미 기사화된 보도사진을 취사선택함으로써, 사진가들이 실재하는 현실의 단편을 골라 촬영하는 행위 자체를 전유했다. 그는 또한 이를 통해 보도사진에서 대중 매체의 메시지 전파라는 목적과 역할을 제거해 버린 뒤, 해당 이미지를 사실의 기록과 전달에 기반하면서도 사진가의 예술적 표현 또한 허용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예술의 영역으로 진입시켰다.

이에 따라 현장의 사진들 속에서 몰개성하게 드러난 1970년대의 주택 이미지는, 기사 내용에서 분리되는 순간 본래 지녔던 명시적인 성격을 상실함과 동시에 작가의 개인적 경험에 토대를 둔 주관적 해석의 대상이 되었다. 박정희 정부가 추진한 경제 개발 정책의 결과 고속 성장의 일로에 있던 당대 한국 사회에서, 국민의 소유 희망 대상 1순위인 집은 경제 발전의 수혜를 입은 이들과 그러지 못한 이들을 결정짓는 대표적 존재였다. 이처럼 현장사진에 나타난 양옥집은 주택 소유 양극화와 그로 인해 파생된 무허가 주택단지 개량 사업 등의, 당시 한국의 첨예한 이슈들을 대변하고 있었다. 나아가 그것은 이 시기 갓 결혼했던 작가 본인의 자가(自家) 소유 열망이 투사된 이미지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성능경의 1970년대 주택 사진은 개념미술가 댄 그레이엄(Dan Graham, 1942~)미국을 위한 집(Homes for America)(1966~1967) 사진 작업에서 뉴저지주 집들을 촬영해 교외 주택 개발 단지의 몰개성한 현대성을 드러냈던 일을 연상케 한다. 그레이엄이 이들 집의 유사한 형태에서 미니멀리즘 작품의 수열적 구조를 찾아냈다면, 성능경은 서울의 양옥집 사진에서 권력과 자본에 종속된 공적 정보 매체가 제시하는 현실이 아닌, 개인이 재구성하는 대안적 현실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현장의 사진들은 이로써 작가가 새롭게 맥락화한 한국의 현실을 구성하는 특수한 사실로서의 기록물, 사적 다큐멘터리 사진으로서의 미술작품이 되었다.

성능경전은 무엇보다 일찍이 1970년대 중반부터 사진 설치를 선보인 성능경 작업의 진일보한 일면을 보여준 기회이기도 했다. 작가는 인화 전 단계에서 필름에 드로잉했던 이미지의 형태와 방향성을 고려하면서, 사진들을 전시장 환경이나 사진 속 이미지의 내용과 상호 조응할 수 있도록 구성해 벽면이나 기둥에 부착했다. 또 작품의 조형미를 위해 설치된 사진들의 모서리를 다듬어 자르거나, 사진들을 바닥에 무더기로 쌓아놓아 입체적 효과를 창출하기도 했다. 사진 설치는 그 자체로 평면적이어서 모더니즘 회화와 경쟁할 뿐 아니라, 사진과 설치의 결합으로 모더니즘 사진예술의 매체 특수성(medium-specificity)을 위반하고, 조각의 경계를 벗어난 설치로 모더니즘 조각의 전통적인 장르 개념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반() 모더니즘의 공격성을 가장 크게 지니는 작품이다. 그런데 사진 설치로서의 성능경의 현장연작은 형식주의 모더니즘의 패권에 도전하는 이상의 특징을 모두 지녔으면서도, 손으로 만드는 작품과 그것의 미학적 가치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 성격 또한 내포하고 있었다.

이로써 일찍이 '그리지 않는 미술'을 위해 사진을 도입했던 작가가 현장연작을 통해 다시 '만드는 사진(making photo)'의 영역으로 진입한 셈이 되었는데, '만드는 사진''찍는 사진(taking photo)'에 상대되는 것으로서, 동시대성을 공통의 의제로 삼았던 1990년대 내내 한국 사진계와 미술계에서 통용된 개념이다. 성능경이 1980년대 초반 이미 제작을 시작했던 사진 설치 현장연작은 현재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만드는 사진'의 정의, 즉 사진이 설치나 조각 등의 다른 매체와 결합한 혼성매체 작업, 사진의 필름이나 인화지에 드로잉의 요소를 가미한 작업, 기존의 단() 사진 중심에서 벗어난 전시 및 설치의 방식 등에 모두 부합하고 있었다. 그 결과 현장연작은 한국 시각예술의 역사에서 미술과 사진의 만남이 본격화되는 1980년대 후반 이전에, '매체 특수성''탈장르', '만드는 사진''찍는 사진',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 등의 이분법적 구분으로는 단순히 이해하기 어려운, 미술이 된 사진이 이미 존재했음을 알리는 증거가 되었다.

한편 한국 미술계에서 포스트모더니즘 관련 논의가 활발했던 1980년대 후반 무렵, 성능경은 현장연작의 발표를 마무리하며 일상과 개인사를 주제로 삼은 새로운 양상의 사진 작업에 착수했다. 사실 성능경 예술세계에서 작가 본인의 삶 자체가 소개된 작품은 이미 1970년대에 등장했었는데, 5회 앙데팡당전시에서 선보인 사진 설치 S씨의 반평생(1977)이 그것이다. 당시 작가는 본인 나이인 35세 이전까지의 이미지 기록들, 즉 학창 시절부터 군 복무를 거쳐 사회인이 된 시절까지의 사진들 15장을 확대 인화해 전시장 벽에 두 줄로 부착했다. 그리고 그중 본인 얼굴의 눈 부위만 검은색 띠 모양으로 가려 자신임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1990, 이번에는 작가의 네 자녀와의 일상을 다룬 그의 개인사적 사진 설치 작품들이 다시 나타났다. 작가 나이 35세까지의 사진들로 구성되었던 S씨의 반평생의 뒤를 이은 이들 작품 속엔, 35세 이후 가장으로서의 본인 삶이 담겨있었다.

한국 미술사에서 1990년을 전후한 시기는 이른바 탈장르 현상의 본격화로 복합매체를 이용하며 미술 각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성격을 지녔던 설치미술이 포스트모더니즘 논의와 함께 부상한 때이다. 김계원의 지적처럼, 한국 사진사에서 '만드는 사진''찍는 사진'의 입장이 팽팽히 대립하던 당시 '만드는 사진'은 주로 사진을 '미술'로서 인식하려는, 혹은 사진을 '미술'로서 확장 재정의하려는 의도로 창조되었으며 탈장르, 다원성,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이슈에 관심을 둔 미술관에 의해 수용되었다. 1990년대 이후 미술관에서 소개된 성능경의 개인사적 사진 설치 작품들은 이중 후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데, 작가는 한국 설치미술제에 출품한 어린이를 위하여(1990)에서 장흥 토탈야외미술관 갤러리에 자녀들을 촬영한 5백여 장의 사진들을 걸어두었으며, 미술평론가 박영택이 기획해 당대 미술의 탈장르 경향을 진단했던 전시 Mixed-media: 문화와 삶의 해석-혼합매체전에 출품한 네 남매의 사진첩(1990)에서는 3×5인치 크기의 자녀들의 스냅 사진 수백 장을 비닐 위생장갑, 가정용 연장, 주방 접시 등과 함께 설치했다. 사진에 등장한 성능경의 자녀들은 작가의 분신이자 개인사의 또 다른 주인공으로서 역사적 기록의 대상이 되었다.

성능경은 이상의 경험을 거치며 다음 해 개최한 세 번째 개인전 성능경에서 또 다른 개인사적 사진 설치 S씨의 자손들-망친 사진이 더 아름답다(1991)를 선보였다. 작가는 이 작품을 계기로 이후 그의 예술 세계의 핵심 주제가 된 기성 예술에 도전하는 '망친' 예술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성능경의 망친 예술 개념은 말 그대로 1991년의 개인전에서 사용한 사진 자료들, 즉 자녀들을 촬영하면서 노출 부족이나 초점 맞추기 실패 등으로 얻어진 다수의 망친 스냅 사진들로부터 비롯되었다. "10장을 촬영하면 매번 2~3장 정도 발생하는 이 망친 사진들을, 작가는 전시 10여 년 전부터 차곡차곡 모아 전통적인 예술의 심미관을 재성찰할 수 있는 작품의 재료로 삼았다." 개인 암실이 없어 대중 상대의 디피점에 인화를 맡기고, 즉석카메라를 이용해 작업했던 성능경의 사진들은 애초부터 예술 사진으로는 가치를 부여받기 어려운 저품질의 상태를 지니고 있었다. 작가는 공장에서 주문 제작하는 대량 상품과 다를 바 없는 이 망친 사진들을 공적 미술 제도로 진입시켜 사진예술의 미학에 도전했다. 나아가 모더니즘 예술의 대서사(大敍事)에 도전하는 소서사(小敍事)로서의 사적 사진을 내세워 당대 예술이 집단의 역사적 사건에서 개인의 일상적 사건으로 관심을 전환하고 있음을 입증해 보였다.

1960년대 이후 전 세계 예술계에서는 개인의 일상을 작업 대상으로 삼은 사진이 유행했으며, 한국에서도 1990년대 후반부터 이 현상이 두드러져 탈근대적 시각으로 일상·사진·예술의 관계를 탐구하는 일상으로부터(1997), 기념사진전(1999) 등의 주제전이 자주 개최되었다. 개인사적 성격을 지닌 성능경의 사진 설치 역시 당시 이런 분위기에서 조망을 받았다고 할 수 있으나, 사실 그는 이미 1970년대부터 사진을 작업의 주된 매체로 활용해 온 미술가였다. 한마디로 성능경의 예술세계는 그 시작부터 근본적으로 자전적(自傳的)일 뿐 아니라 작품의 소재, 주제, 내용이 개인적 관점과 주관적 판단에 따라 결정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작가는 자신의 사적 다큐멘터리로서의 작품이 그저 개인적인 수준에만 머물지 않고 당대 중산층 시민들의 삶의 양태와 특징을 반영하는 것이 되도록, 다시 말해 특수한 개인의 미술이 보편적인 집단의 미술이 되도록 의도했다. 그가 S씨의 반평생에서 본인의 눈을 가림으로써 해당 사진들이 성능경의 개인 사진이 아닌,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단체 사진처럼 보이게 한 것은 그 첫 사례다. 이처럼 작품이 지닌 개인성과 특수성에 일반성과 보편성을 보완해 가는 가운데, 성능경의 사진 설치에 재현된 한 개인의 삶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한국인의 일상사를 대변하는 것이 되었다.

성능경은 이후 1992년에 이르기까지 망친 사진이 더 아름답다(1991~1992)라는 작품으로 사진과 미술의 교류가 이뤄진 전시들인 11-한국 사진의 수평(1991), 혼돈의 숲에서(1991), 미술과 사진(1992)에 연이어 참여했다. 이중 김장섭이 기획한 11-한국 사진의 수평미술과 사진은 국내 사진 전공자와 미술가들의 공동 참여 및 국내 대형 미술관의 사진 수용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역사상 의미 깊은 전시이기도 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전부터 반복적으로 나타났던 성능경 예술세계의 특징인 행위와 사진 작업의 상호 교환 현상이 여기서도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즉 작가가 11-한국 사진의 수평전시에서 발표한 망친 사진이 더 아름답다는 동명의 사진 설치작품들과 달리 즉석카메라로 본인 신체와 자녀들을 촬영하는 행위, 그리고 사진을 스크린에 영사하는 행위를 예술화한 퍼포먼스였다. 그러므로 망친 사진 작업은 1990년대 초반 처음 나타나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망친 예술로서의 성능경 퍼포먼스를 발생시킨 결정적인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망친 사진이 최초로 등장한 지 10년이 지난 2001, 성능경은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기획 전시이자 자신의 네 번째 개인전인 예술은 착란의 그림자-성능경에서 사적 사진의 또 다른 양상을 제시했다. 그는 이 전시에서 자택 내부를 촬영한 안방(2001)쿠킹호일룸(2001) 등의 작품을 선보였는데, 안방은 작가가 핫셀블러드(Hasselblad) 카메라를 벌브(B) 셔터로 고정하고 스트로브 라이트(strobe light)를 피사체 앞에서 이동하며 2백 회 터트려 촬영한, 시바크롬(Cibachrome) 컬러 프린트 사진이었다. 쿠킹호일룸역시 알루미늄 포일을 붙인 주방 전경을 같은 방식으로 촬영한 결과물이었다. 노출을 무시한 촬영기법으로 대상의 색감과 명암이 불규칙하게 표현된 이 사진들은 1990년부터 시작된 그의 망친 사진들과 동일 계열에 있는, 당시 개인전 제목처럼 정신 착란적이었던 작가의 삶의 고통을 반영한 창조물이었다. 성능경의 사진은 이처럼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양상을 바꿔가면서도 개인사라는 주제를 결단코 놓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더 커진 규모와 생생한 색채를 통해 일상을 기념비적인 것으로 만들어내어, 안방이나 주방 같은 일상의 장소를 한 개인의 주관적 감각을 통해 바라본 위대한 세계로 다가오게끔 했다.

이처럼 성능경의 사진에 나타난 가장 사적인 것의 공적인 것으로의 전환의 과정은,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일례로 성능경은 지난 2020년 삼성 갤럭시 노트 4 핸드폰으로 80일 동안 본인의 배설물을 닦은 휴지를 촬영하고 해당 이미지를 포토샵으로 작업한, 사진과 드로잉, 그리고 작가의 배설 행위가 융합된 밑그림(2020)을 발표했다. 화려한 다색 추상으로 나타난 최종 결과물의 미()와 작품의 원출처 사이의 틈에서 발생한 효과야말로, 작가가 추구하는 "집에 있으면 일상이지만 미술관으로 가면 예술이 되는 그런 틈바구니의 예술", 다시 말해 망친 예술그 자체였다. 작가가 1970년대 말부터 광고 스티커들을 모아 자택 피아노에 붙이고 있는 현재 진행형 작품 피아노-모독(2017), 그와 가족들이 매일 마시는 브랜드의 생수병을 촬영한 사진 작품 백두산(2019), 집에 배달된 정육점 광고지를 활용한 콜라주 경기축산 오픈세일(2023) 또한 최근의 망친 예술을 대표하는 사례였다.

197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 50년 가까이 계속되어 온 성능경의 사진 작업은 그러나 2001년의 단 한 번의 개인전을 제외하고는 그것의 전개 과정과 역사적 의미가 온전히 연구, 전시된 바 없다. 상기한 것처럼 한국 현대사진의 역사에서 성능경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90년대 초반 무렵이다. 이 시기 성능경 사진은 한국미술의 포스트모더니즘적 전환을 이끈 주역으로 활약했으나, 작가의 이전 사진 작업은 사진계에서도, 미술계에서도 여전히 조명받지 못했다. 이후 2000년대부터 비로소 성능경의 사진에 미술사적 평가가 이뤄지기 시작해, 한국 현대 사진사를 점검하거나 사진과 미술 교섭의 역사를 주제로 삼은 대형 전시들인 한국 현대사진 601948~2008(2008), 아주 공적인 아주 사적인-1989년 이후, 한국현대미술과 사진(2016), 프레임 이후의 프레임: 한국현대사진운동 1988-1999(2018) 등에 그의 작품이 출품되었다. 하지만 단체전의 성격상 이들 전시에서는 성능경 사진의 대표적인 3가지 유형인 토톨로지 개념 사진, 행위의 기록으로서의 사진, 개인사적 사진 중 일부만 전시되었다. 나아가 1970년대 성능경 사진과 1990년대 사진의 연결 고리 역할을 하는 1980년대 현장연작의 중요성은 아직도 평가절하되어 있다. 이처럼 성능경의 '미술이 된 사진', 애초에 작가가 의도한 바대로 아직도 해독 불가능의 상태로 남아, 망각의 역사에서 발굴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망쳐서 더 아름다운 다성(多聲)의 퍼포먼스

 

1976, 성능경은 몇 차례의 ST 전시에서 처음으로 이벤트 작품을 발표했는데, 이는 작가의 예술세계에서 본격적으로 퍼포먼스가 등장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그는 먼저 동료 ST 작가들과 자신의 녹번동 화실에서 학습 차원의 이벤트를 실험하며 신체와 조약돌을 이용한 돌 던지기(1976)라는 작품을 선보였다. 작가는 이후 공식적인 ST의 이벤트 전시인 4인의 EVENT(성능경, 이건용, 김용민, 장석원 참여)에서 돈 세기(1976)신문 읽기, 연이어 열린 EVENT LOGICAL(성능경, 이건용, 김용민 참여)에서 역시 신문 읽기15초간(1976), 수축과 팽창을 발표했다. 1976년은 성능경이 사진 작업을 통해 토톨로지 개념의 탐구를 시작한 바로 다음 해로, 이 시기 발표된 그의 이벤트 역시 '행위에 대한 행위' 또는 '행위는 행위이다'처럼, 행위 그 자체의 의미를 되묻는 개념의 체현으로서의 미술작품이었다.

즉 그가 돈 세기에서 지폐와 동전의 개수를 세고, 신문 읽기에서 신문을 소리 내 낭독하고, 15초간에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잡음을 15초 동안 듣고, 수축과 팽창에서 맨손체조 하듯 신체를 수축시켰다가 팽창시킨 것은 일상의 범속한 행위를 미술만의 논리를 지닌 사건인 이벤트로 예술화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처럼 1970년대 성능경의 이벤트는 외부 세계로부터 독립된 채로 존재하는 즉자적 성격의 행위였으나, 그럼에도 신문 읽기1장의 신문처럼 신문과 행위의 결합으로 사회 현실을 반영하고, 바닥에 서거나 누운 채 팔다리를 펼쳤다 접었다 하기를 반복한 수축과 팽창처럼 1990년대 이후 본격화될 작가의 스트레칭 퍼포먼스(stretching performance)의 요소를 이미 내포하고 있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1991, 이미 1970년대 이벤트에서 시작된 성능경 퍼포먼스 예술세계에 전환의 순간이 찾아왔다. 작가가 이 시기 정립한 '망친 사진'의 아이디어가 행위성과 결합해 퍼포먼스의 영역으로 나아간 것이다. 그 첫 사례인 퍼포먼스 망친 사진이 더 아름답다는 작가 스스로 '신체-사진'이라고 불렀던, 팔꿈치나 무릎 같은 작가 몸의 여러 부분을 써서 사진을 찍는 행위에 기초한 것이었다. 성능경은 퍼포먼스가 종료될 무렵 스크린이 아닌 울긋불긋한 이불 위에 자녀들의 사진을 비추다 끝내 그 위에 롤러로 흰색 수성페인트를 칠해 관람을 방해하는, 한 마디로 작품을 망치는 행위를 수행했다. 이처럼 '망친 사진 설치'에서 '사진 찍기를 망치는 행위'로 이전된 작가의 관심은 다시 '영화 상영을 망치는 퍼포먼스'를 탄생시켰다. 작가가 다음 해 공간연극-Pink FloydThe wall에서 공개한 퍼포먼스 The wall-망친 영화가 더 아름답다(1992)가 그것인데, 성능경은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The Wall이 상영되고 있는 스크린 앞에서 광고 전단을 읽거나 영화 내용을 미리 누설하는 등의 행위를 수행했다. 그는 이렇게 "정상적인 영화의 이어짐을 왜곡시키고 내용이 주는 즐거움을 예측할 수 없게 해 망친 영화가 더 아름답다는 명제가 타당함을 입증하고, 궁극적으로는 기성 영화 및 예술의 조건을 재음미하려" 했다.

이상의 과정을 거친 성능경은 마침내 1993, 헤쳐 모인 예술과 예술가들-同不而和+Performance에서 선보인 망친 예술이 더 아름답다(1993)를 통해 본인의 '망친 예술' 퍼포먼스의 전형을 완성했다. 이 작품은 작가의 스트레칭, 신문 읽기,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신체 촬영하기, 관객에게 소시지 나눠 주기 행위의 조합으로 구성되었으며, 그의 과거 이벤트와 동시대 신작 퍼포먼스의 요소가 한데 어우러진 형식을 지니고 있었다. 작가는 본인의 이런 퍼포먼스 형식에 대해 "피아노 건반 하나하나가 독립된 음을 내지만 조합하면 무한대의 소리가 나는 것, 혹은 여러 개의 모듈(module)이 하나의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고 설명한 바 있다. 실제로 성능경 퍼포먼스는 1990년대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이와 같은 방법, 즉 각각의 모듈로서 기능하는 수많은 일상의 행위들이 작품마다 조합과 재조합을 반복하며 다수의 완성작을 만들어 가는 방식으로 창조되고 있다.

성능경 퍼포먼스에서 모듈 역할을 하는 행위의 종류는 부채에 적은 제사축문(祭祀祝文)을 읽고 불에 태우기, 스트레칭, 양복에서 수영복으로 옷 갈아입기, 면도크림 얼굴에 바르기, 여행 가방 끌고 다니기, 과자나 음료를 먹고 관객들에게도 나눠주기, 줄넘기, 훌라후프 돌리기, 고무줄 새총으로 탁구공 발사하기, 일상영어경구광고영화 카피 낭독하기, 드로잉 하기, 신문 읽고 오리기, 즉석카메라로 신체 촬영하기, 돈 세기, 이빨 쑤시기, 몸을 긁기, 관객 앞에서 소변을 보거나 마시고 자위행위 하기 등 실로 다양하기 이를 데 없다. 작가 스스로 "일상에 내재해 있는 미처 예기치 못한 사건들"로 지칭한 이 행위들이 퍼포먼스마다 매번 다른 조합으로 섞이게 되면서, 작품은 순수하지 않은 잡종 그 자체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즉 현대와 전통,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 엘리트적인 것과 하위적인 것, 진지한 것과 유희적인 것, 자극적이고 지루한 것이 하나의 퍼포먼스 속 특징으로 동시에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 특징들은 그러면서도 그 무엇도 중심에 놓이거나 고정되어 있지 않은 채, 작가 삶의 변천 과정에 따라 끊임없이 성질을 변화시키며 자리를 바꿔나가고 있다.

이상과 같은 성능경 특유의 창작 방법의 결과, 1990년대 초반부터 현재까지 발표된 약 130편에 달하는 그의 퍼포먼스들은 모두 닮은 양상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작품마다 반복되는 동일 행위의 수행은 그 자체로 일상의 반복성을 지시하고 있었으며, 세월의 변화에 따라 추가된 새로운 행위들은 작가가 살아온 각 시대의 맥락이 만들어낸 차이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그는 내가 두 번 살면 여러 스타일의 퍼포먼스를 하겠지만, 나는 한 명이고 내 삶도 하나라서 내 퍼포먼스도 한가지라고 말했는데, 이 같은 그의 주장을 따르자면 성능경은 그의 인생인 단 하나의 퍼포먼스 속에서 지금까지 쭉 전위로 살아오고 있는 셈이다. 작가에게 퍼포먼스란 곧 예술화한 전위의 삶이기에, 인간이 매일을 살아가듯 퍼포먼스 또한 반복되어야 하며, 전위성 역시 바로 그런 수행의 과정을 통해서만 유효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1976년의 수축과 팽창에서 1998년의 우왕좌왕을 거쳐 2019년의 ~들아~ ~~에 이르기까지, 반세기 가깝게 지속된 인생이라는 퍼포먼스에서 성능경은 패기 넘치던 청년에서 삶의 신산함을 관객들에게 토로하는 중년, 다시 아이들과 놀아주는 다정한 노년의 전위가 되었다. 나아가 작가의 몸은 본인인 동시에 한국인 일반을 대표하는 이의 삶을 기록하는 매개체이자, 세계의 현실을 일상 행위의 수행으로 재현하는 존재가 되었다. 성능경이 2003년부터 2018년까지 15년 동안 매일 수행했던 드로잉 퍼포먼스의 결과물 그날 그날 영어(Everyday English)(2003~2018)는 그 대표적 사례로, 작가는 자택으로 배달된 신문지를 이용해 1년에 200여 점씩, 영어 공부와 드로잉, 콜라주 행위를 결합한 작품을 제작하며 그야말로 전위를 치열하게 살아냈다.

본인의 삶과 작품의 스타일을 일치시키려는 성능경의 이 같은 태도는 예술과 삶을 결합해 기성 예술에 도전하려 했던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신조와 일치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성능경의 퍼포먼스는 그 형식은 순수하지 않으나 반예술적 전위주의의 개념만은 순수한, 그만의 독자적인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작가는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신문이나 사진 작업보다 퍼포먼스의 창작에 집중적으로 몰두하고 있다. 그에게는 퍼포먼스야말로 "기존 예술 장르가 행사하는 유일신적 권력의 단일화로부터 복합적 신념 체계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나아가 작가의 몸이 미술에서 여전히 유효한 매체일 수 있게끔 하는 유용한 도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1970년대부터 채택해 온 전위의 전략들, 즉 공적 메시지의 개인적 재해석을 통한 기성 질서에의 도전, 추상 일변도의 주류 미술계에 대한 육체성의 저항, 대중적이고 일상적인 삶과 사물에의 주목, 반미학적이고 제도 비판적인 작품의 성격 등을 온전히 자신 신체의 행위만 이용해 여전히 추구해 나가고 있다.

성능경의 퍼포먼스에서는 무엇보다 언어적인 요소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이는 그가 자신의 반예술적 전위주의 개념을 주로 발화 행위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차후에 작가의 말이나 글, 자료 사진 등만 남게 되는 퍼포먼스 아트의 본성은, 성능경 퍼포먼스에서 작가의 공언을 필수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개념미술가로서 일찍부터 작품 의도를 기록하는 작가 노트를 작성해 왔던 그는 퍼포먼스 시나리오의 기록 역시 1992년에 시작해, 지금까지 30여 년 동안 계속해 오고 있다. 성능경 퍼포먼스에서 작가의 개념은 특히 전위의 메시지를 담은 문장 형식의 제목이나 작가의 말에 의한 선언(manifesto)으로 나타나며, 그 과정에서 잠언, 경구, 속담, 영화나 광고 속 문구 등을 이용한 언어유희가 수반된. 대표적 사례로 1993년경부터 등장하는 퍼포먼스 제목들인 망친 예술이 더 아름답다, 망친 삶이 더 아름답다(1996), 예술 연습 또는 의사 예술(2001), 어디 예술 아닌 것 없소?(2007), 나는야 비영리 작가(2012), 예술은 소통의 불통이다(2012), 예술사라!?(2018) 등이 있으며, 작가가 퍼포먼스 수행 도중 외치는 선언문들인 "예술은 비싼 싸구려다.", "예술은 쉽고 삶은 어렵다.", "예술은 무광의 아우라다.", "예술은 죽고 작가는 없다." 역시 문장 자체로 그의 반예술적 전위의 신념을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성능경이 말과 글, 그리고 자신의 몸짓으로 관객들에게 송신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반드시 전위주의의 계몽만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는 않다. 그의 상당수 퍼포먼스 작품이 여러 사회적 현상이나 작가 개인의 체험 같은, 범속한 주변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털어놓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서다. 성능경 개념미술의 핵심적 특징인 '공적 메시지에 대한 사적 검열' 행위는 퍼포먼스에서도 여전한데, 일례로 그는 1998년 발표한 두 작품인 우왕좌왕(1998)마비게월(마구령, 비아그라, 게릴라 양동이, 월드컵)(1998)에서 당대의 주요 뉴스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는 '드로잉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작가는 1998년 당시 "본인이 지프차를 얻어 타고 여행했던 마구령 비상 도로, 한국 사회에서 큰 물의를 불러일으킨 비아그라 사건, 차범근 감독과 축구 대표팀의 월드컵 대패 사건, 그해의 기록적 폭우 등"을 묘사한 자신의 드로잉 작품 앞에서 제사축문을 읽은 다음, 그 위에 면도크림을 문지르는 행위를 했다.

이처럼 퍼포먼스를 통해 관객으로 참여한 대중과 상호교감하는 일은, 성능경을 비롯한 한국 퍼포먼스 작가들이 1990년대 이후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과제 가운데 하나였다. 이들이 1980년대 후반 작품 발표의 장소를 미술 제도의 외부인 공적 장소로 확장하면서, 미술의 대중과의 소통을 중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능경 역시 군산 벚꽃 행위예술제(1993), 13회 한밭문화제-거리미술제(1995), 2002 설치예술제-한국 현대미술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조망(2002), 한국 실험예술제-한국 퍼포먼스 아트 40, 40(2007) 등 도시의 클럽, 광장, 공원이나 대자연의 강변, 들판 등지에서 열린 전국 각 지역의 퍼포먼스 행사에 빠짐없이 참여했을 뿐 아니라, 때로는 강의 퍼포먼스(1999, 2007), 김태윤+장맑은(흑표범) 혼인식(2014)처럼 '강의 퍼포먼스''결혼식 주례 퍼포먼스'의 형식까지 취하며 대중과 꾸준히 만나 왔다.

퍼포먼스 자체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 대중 앞에서 성능경은 "준비한 텍스트를 읽고, 주문을 외우고, 구호를 외치며, 관객에게 따라 하기를 강요하는 사설 과잉으로 소란스럽고 산만하며, 장황하고 수다스러운, 종종 지저분한 장터나 촌극의 현장을 연상시키는" 행위를 했다. 이 같은 성능경 퍼포먼스 특유의 성격에 대해 윤진섭은 "소위 품바 스타일의, 독자적인 퍼포먼스를 수립"했다고 설명한 바 있다. 그러나 샤워캡과 몸뻬바지를 착용하고 훌라후프를 돌리며 영화 제목이나 광고 문구를 외치는 퍼포먼스 속 성능경의 모습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맞닿아 있으면서도 그 의도가 표피적 화려함이나 오락적 유쾌함의 창출에 있지 않다는 점에서 대중문화의 산물과는 분명 차별화된다. 싸이코 드라마전우린 모두 싸이코다(2003)실험예술 월드엑스포나는 말단입니다(2008)에서처럼, 노령의 나이에 삼각팬티 수영복을 입은 작가의 모습은 오히려 반미학적이며, 기승전결 없이 이어지는 행위의 나열은 관객에게 지루함을 안겨주고, 관객을 향해 탁구공을 힘껏 발사하거나, "돈 방망이 받아라!", "금 방망이 받아라!"라고 외치며 관객을 목 베개로 후려치는 태도는 매우 공격적이다. 나아가 2003 한국실험예술제박박 긁어라!(2003)에서 관객 앞에서 배뇨하고 자신의 소변을 다시 마신 작가의 행위는 불쾌하기까지 하다.

대중적이지만 결코 대중 친화적이지는 않은 성능경 퍼포먼스의 이 같은 특징은 작품이 자본주의의 상품이 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그의 전위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국 미술 시장의 폭발적 성장이 시작된 1990년대, 공교롭게도 성능경은 가장 비물질적이어서 상품화되기 어려운 미술, 퍼포먼스만 창조하는 일에 본격적으로 돌입했다. 이후 작가는 퍼포먼스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는 내용의 작품을 꾸준히 발표해 왔는데, 나는 말단입니다에서는 "돈은 totem pole의 꼭대기에 위치하신다. 돈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 돈은 우리를 자유롭게/산만하게 하신다. 돈은 나/우리의 유일한 체계이시다. /우리는 이 체계에서 말단일 뿐이다."라고 외쳤으며, 10회 광주비엔날레에서 발표한 Sweet Dew(2014)에서는 "돈은 신이 되었고 신은 돈이 되면서 돈~신이 되는 세상"이 되었다는 의미로 물에 적신 붓으로 바닥에 MONEY, , , , 같은 각국의 돈 기호를 적은 뒤 술을 따르고 제사를 지냈다. 성능경은 이런 촌철살인의 풍자적 언어와 행위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고, 관객과의 교감을 시도하면서 현재까지도 반예술적 아방가르드의 본령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와 가장 거리가 먼 퍼포먼스로 자본주의를 공격하는, 작가의 이 같은 전위의 전략은 주류 미술 제도의 최변방에 위치하는 퍼포먼스의 공개 장소로 인해 그 위반의 효과가 더욱 강화되게 되었다.

한국 퍼포먼스 아트 역사에서 1990년대 이후의 시기는 미술 시장으로부터의 소외의 반대급부로 발생한, 퍼포먼스의 대중화와 지역화 현상으로 설명된다. 1995'미술의 해' 지정과 지방자치제도 정착을 전후로 전국의 대도시와 야외에서 퍼포먼스를 선보일 수 있는 행위미술제, 행위예술제, 퍼포먼스 페스티벌이 개최된 것이다. 이들 행사는 명칭은 조금씩 달랐으나 모두 퍼포먼스 작품의 대중 공개라는 같은 목적을 지니고 있었는데, 각 지역 대표 퍼포먼스 작가의 주도로 대전, 인천, 수원, 부천, 부산, 김천, 군산, 전주, 광주, 안동 등에서 연이어 조직되었다. 성능경은 그간 대전행위예술제, 월미도행위예술제같은 다수의 국내 행사와 서울국제행위예술제 SIPAF, 김천국제행위예술제 KIPAF, 퍼포먼스 아트 네트워크 아시아 PAN Asia등의 국제행사에 열정적으로 참여해 한국의 대표적인 원로 퍼포먼스 작가로 인정받았다.

대체로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을 받아 관광 목적의 이벤트와 유사한 형식으로 개최되는 이들 행위미술제는, 미술 시장이나 국공립 미술관, 국내 유수의 사립미술관 같은 주류 미술 제도로부터 작품의 판매, 수집, 보존, 연구 혜택을 받지 못하는 조건을 태생적으로 갖고 있었다. 30여 년에 이르는 세월 동안 꾸준히 지역 행위미술제에 참가하며 한국 미술계의 중심으로부터 멀어져 간 성능경 역시, 이 같은 현실 아래서 필연적으로 비주류의 길을 걸었. 어쩌면 이는 1970년대 후반 대구현대미술제를 비롯한 각 지역 현대미술제로 이벤트와 입체미술, 즉 행위와 설치미술 같은 실험미술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을 무렵, 특히 그것들이 강변 같은 도시의 변두리에서 발표되었을 때 이미 예견된 현상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성능경의 퍼포먼스 예술은 한국의 전위가 미술계의 중심에서 주변으로 이동하며 일어난 사건,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한 첨예한 문제들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충청남도 예산에서 출생했으나 중학교 시절 서울로 유학해 내내 수도에서 살았던 성능경은, '실험미술의 지방화 현상'에 부응하면서 바야흐로 '지방화된 전위'가 되었다. 그리고 전국 각지를 떠돌며 변화무쌍한 몸짓과 목소리로 전위주의를 설파하는 성능경에 의해, 1970년대 중반 주류 전위들의 논리적인 행위 실험에서 출발한 이벤트는 '망쳐서 더 아름다운', 다시 말해 '주변이 주변이어서 더 전위적인', 퍼포먼스가 되었다.

성능경은 이상에서처럼 한국 모더니즘 화단에서 출발했으면서도 그곳에서 탈주하는 길을 홀로 개척하며 걸어왔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는 이와 동시에 본인의 반모더니즘적 성격의 퍼포먼스에서 껍데기는 남고, 내용은 가라고 외친다. 이는 작품의 내용을 특정 이데올로기의 표방 수단으로 삼는 모든 종류의 미술을 거부하겠다는 선언이며, 자신의 퍼포먼스가 결국 삶 자체를 형식화한 미술임을 알리는 고백이. 성능경 예술의 표어가 망친 예술이 더 아름답다임을 상기해 본다면, 그가 본인 삶을 분석 대상으로 삼는 개념미술가이면서도 작품에서 형식을 내용보다 더 우선시하며 미적인 것의 가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더니스트의 태도 역시 지니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성능경은 모더니즘 내부의 파괴자이며, 그의 작품은 모더니즘을 망친 존재이면서 동시에 망친 모더니즘 미술인 것이다. 기성 예술의 내부에서 그것을 망치는 존재, 그런 전위로 살아가는 일을 오십 년 동안 지속한다는 건 그야말로 미치지 않고서는 힘들다. 그래서 성능경의 예술은 착란의 그림자인 것이다. 개인전 예술은 착란의 그림자-성능경에서 선보인 초상 사진 쿠킹호일맨(2001)에서, 우스꽝스러운 수영복 차림에 쓸모없게 반짝이는 알루미늄 포일을 몸에 두른 채 어딘지 모를 곳을 가리키고 있는 성능경은, 지금도 내내 어지러운 그 전위의 삶을 견뎌내는 중이다. 그래도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그는 계속 전위가 되어 갈 것이기에, 예술은 짧고 전위의 삶은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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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능경 예술세계의 시기별 구분과 주요 작품 해설

 

 

본 연구는 성능경 작가의 예술세계를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이후의 다섯 시기로 나누고 해당 시대에 속하는 작품들을 조사, 연구했다. 성능경의 작품 세계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10년 단위로 변모하는 모습을 보여왔는데, 본 연구는 작가가 추상회화를 소개하는 첫 전시회를 개최했던 1960년대를 화단 진입기로, 'ST'의 주요 작가로 활약했던 1970년대를 신문, 사진, 행위를 이용한 '개념미술'을 추구한 시기로, 한시적 작업 중단과 재개의 과정을 거쳐 작품의 성격이 크게 변화한 1980년대를 통합적 미술 형식의 모색기로, 1990년대를 삶과 예술이 호환되는 '망친 예술'이라는 특유의 작품 세계를 정립해 나간 시기로, 마지막으로 국내외 개인전과 단체전에서 초기 작품의 전시와 새로운 퍼포먼스의 발표에 주력했던 2000년대 이후를 성능경 예술세계의 완성기로 파악했다. 본 연구는 이 같은 구분을 통해 성능경 예술세계의 시기별 특징과 시대 변천에 따른 작품 성격의 변화를 선명히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1. 1960년대: 추상회화 전시로 화단에 진입

2. 1970년대: 신문, 사진, 행위를 이용한 '개념미술'의 추구

3. 1980년대: 〈현장〉 시리즈를 통한 통합적 미술 형식의 모색

4. 1990년대: '망친 예술'로서의 사진 설치와 퍼포먼스의 정립

5. 2000년대 이후: 국내외 개인전, 단체전에서의 활발한 활동

 

 

성능경의 각 시기 대표 작품들과 그에 대한 해설은 아래와 같다.

 

1. 1960년대: 추상회화 전시로 화단에 진입

 

Image 641~646(6), Image 651~654(4), Image 681~682(2)

 

성능경은 홍익대학교 서양화과 재학 시절인 1964년과 1965년 학과 동기들인 김휘부, 이경석과 함께 첫 단체전 《ㄱ ㅇ ㅅ 3인전》을 2회 개최했는데, 이때 훈데르트 바서(Friedensreich Hundertwasser)의 영향을 받은 여러 점의 추상 회화를 발표했다. 특히 그가 1965년 《제2회 ㄱ ㅇ ㅅ 3인전》에서 전시한 작품들은, 100호 캔버스 2개를 코발트블루 계열로 채색한 뒤 다시 구멍을 4~6개 뚫어 회화 공간을 탐구한 추상 회화였다. 이후 작가로서의 그의 공식적인 경력은 1968년 조선일보 주최 《제12회 현대작가초대전》에 〈Image 681〉과 〈Image 682〉가 소개되면서 시작되었다. 이 작품들도 역시 추상표현주의 경향의 회화였으나, 현재는 작가에 의해 파기되어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지금은 어느 작품인지 식별 불가능한 작품 앞에서 촬영했던 작가의 사진만이 1점 남아 있다.

 

2. 1970년대: 신문, 사진, 행위를 이용한 '개념미술'의 추구

 

〈상태성〉

 

1971년 미술 단체 'Space and Time 조형미술학회'(이후 ST라는 약자로 호명됨)가 첫 단체전을 개최했는데, 작가는 군대 제대 후인 1973617일 명동화랑에서 열린 《제2ST전》에 입체 작품 〈상태성〉을 출품하며 이 그룹의 활동에 동참했다. 〈상태성〉은 4x8(inch)짜리 스테인리스판을 흰색 돌덩이 두 개를 맞물려 휘게 하고 벽에 세워 놓은 작품으로, 작가의 회고에 따르면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 숨고 싶은 당시 크게 유행하던 '입체미술' 류의 대 실패작"이었다. 성능경은 당시의 심경에 대해 "흉내 냈다는 그런 느낌도 있고 아주 결정적인 건 뭐냐면 내가 입체미술을 해봤자 나는 후발 메이커다, 공장 제품으로 말하자면. 그 당시에 이제 그런 걸 이미 했던 사람들은 선발 메이커다. 후발 메이커가 선발 메이커를 따라잡기는 재주를 한 100번 넘으면 모를까, 99번 넘는 거 가지고는 부족하다 이거죠. 그래서 그런 식의 입체 작품, 말하자면 일본풍의 입체 작품 경향은 아예 포기한 거죠. 이거는 내가 갈 길이 아니로구나, 내가 가봤자 이류작가 삼류작가 밖엔 더 되겠냐, 그런 생각을 한 거죠."라고 밝힌 바 있다. 이 작품 역시 작가에 의해 파기되었다.

 

〈신문: 1974. 6. 1 이후〉

 

성능경은 1974621일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 소전시실에서 열린 《제3ST전》에서 〈신문: 1974. 6. 1 이후〉를 발표했다. 이 작품의 전시 기간인 일주일 동안 작가는 전시장 벽면에 준비된 4장의 하얀 패널에 신문을 제시하고 기사를 단위별로 면도날을 사용해 오려내는 작업을 매일 계속했다. 작가는 오려낸 기사의 부스러기를 벽면 패널 앞에 설치된 반투명 청색 아크릴 통 속에 버렸으며, 따라서 사진과 광고와 앙상한 행간만 남아 있는 신문이 당일 하루 벽면의 패널에 게시되었다. 다시 또 하루가 지나 새 신문이 나오면 같은 작업이 반복되고, 마침내 전날의 행간만 남은 신문은 청색 통 옆에 놓인 투명 아크릴 통 속에 쌓아 올려졌다. 성능경은 이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 "입체작업으로는 당시의 선발주자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유신 초기에서 중기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내가 역사 앞에서 솔직해야겠다는 마음이 있었다"라고 증언했다. 또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아침이면 신문을 소리내 통독하시던 부친의 모습을 보면서 신문에 관심이 있었으며, 〈신문: 1974. 6. 1 이후〉 전시 2개월 전부터 집에서 신문을 오려내 두 개의 통에 나눠 담는 일을 이미 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나아가 당시 평론가 방근택 선생이 작품을 보고 왜 광고를 오려내지 않았냐면서 작가에게 의문을 표시했었다고 밝히고, 그 시절 유일하게 관심을 보였던 방근택 평론가에게 지금까지도 감사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신문: 1974. 6. 1 이후〉는 당시 작가가 속해 있던 ST 그룹에서 '이벤트'라는 이름으로 퍼포먼스를 공식적으로 소개한 1975년 이전에 발표된 작품이다. 당시 성능경은 본인의 행위를 퍼포먼스라는 미술 형식으로서 인지하지 못했으나, 〈신문: 1974. 6. 1 이후〉는 신문지를 오리는 퍼포먼스의 결과로 신문지 설치가 이뤄진, 사실상 ST 그룹의 첫 이벤트 작품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세계전도(世界顚倒)

 

성능경은 19741013일에서 19일까지 대구 계명대학교 미술관에서 열린 《제1회 대구 현대미술제》에 〈세계전도〉를 출품했다. 이 작품은 작가의 노트에 따르면 "世界全圖를 世界顚倒 시킨 것이다." 작가는 작품에 대해 "세계전도의 씨줄과 날줄대로 오려 옆에 있는 흰색 패널 위에 무작위로 배치했다. 이는 같은 해 발표했던 〈신문: 1974. 6. 1 이후〉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이후의 〈8면의 신문〉 창작의 방법론이 되기도 했다."라고 밝혔다. 성능경은 또 그해 1212일부터 19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덕수궁)에서 열린 《제1회 서울 비엔날레》에서 〈신문〉을 발표했다. 이 작품 역시 〈신문: 1974. 6. 1 이후〉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흰 패널 위에 신문 제호만을 핀으로 부착한 작업이었다. 신문 제호는 한국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의 것을 사용했다.

 

〈액자〉, 〈사진첩〉, 〈여기〉, 〈자〉, 〈거울〉, 〈사과〉, 〈검지〉, 〈팔 흔들기〉

 

1975년은 성능경의 예술세계에서 사진 작업이 등장한 중요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작가는 이 해에 열린 《제4ST전》과 《제2회 대구 현대미술제》에 〈액자〉, 〈사진첩〉, 〈여기〉, 〈자〉, 〈거울〉 이상 다섯 점의 작품을 출품했는데, 모두 1974년에 구매한 니콘 F2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 작품이었다. 이상의 작업은 당시 작가가 ST 활동에 참여하며 토톨로지(tautology)적인 순수 개념미술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또 신문 기사를 잘라내고 남은 사진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비롯되었다. 성능경은 1976년에는 1975년의 사진 작업에서 더 나아가, 국립현대미술관(덕수궁)에서 열린 《제2회 서울 현대미술제》에서 〈사과〉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이 사과 먹는 과정을 아홉 번 촬영해 17장 인화한 것으로, 당시 같은 장면이 두 장씩 되도록 전시장에 설치했다. 그는 또 〈사과〉 앞에서 촬영한 본인의 사진을 훗날 〈S씨의 반평생〉 작품의 마지막 장으로 사용했으며, 그때 작가의 나이 33세였다. 그 해에 성능경의 사진 작업은 계속 이어졌는데, 19761122일 서울 출판협회에서 열렸던 《제5ST전》에서 발표된 작가 행위의 기록물로서의 사진 작품인 〈위치〉, 〈끽연〉, 〈손〉, 〈검지〉, 〈팔 흔들기〉 등이 그것이었다. 이 중 〈검지〉는 작가가 "팔을 쭉 뻗어 검지에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고 점차 입으로 가져가면서 초점을 수정하며 촬영한 작품으로, 아홉 장면을 촬영해 17장 인화해 전시했다." 또 〈끽연〉은 "담배를 피우면서 재를 털지 않은 채 담뱃재에 카메라 초점을 맞추고 담뱃재 기둥이 쓰러지지 않도록 고개를 뒤로 젖히며 촬영했다." 〈손〉은 "손을 펴 그 바닥에 숫자를 14~21번까지 써놓고 따로따로 8장을 촬영한 후 주먹 쥔 손 1장을 추가해 펼친 손 사이사이에 가위! 바위! ! 하듯이 주먹 쥔 손 사진을 배치해 전시했다." 성능경은 이와 같은 작품들에 대해 "그 당시에 76년에 〈신문 오리기〉, 〈수축과 팽창〉 이런 거를 하기 전에는 행위를 실현은 안 했지만 그런 사진 작업 자체가 이미 행위인 거죠. 말하자면 이벤트만 안 했지, 사진에서는 이미 행위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되겠죠."라고 밝힌 바 있다.

 

〈끽연〉

 

〈끽연〉(1976)은 성능경이 《제5ST전》에서 발표한 사진 작품으로, 작가가 담배를 피우면서 담뱃재에 카메라 초점을 맞추고 재의 기둥이 쓰러지지 않도록 고개를 뒤로 젖히며 촬영한 결과물이다. 작가는 해당 행위를 아홉 번 촬영해 17장 인화했으며, 가운데 1장을 제외하고 같은 장면이 2장씩 되도록 전시장에 설치했다. 〈신문: 1974.6.1 이후〉(1974)를 계기로 사진에 주목하게 된 성능경은, 개념미술가들이 현상 세계의 재현을 거부하면서 천착했던 미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논제를 사진에도 적용해 보려 했다. 그에 따르면 이는 순수 개념적인 입장에서 사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미술작품으로 던져보는 일, 현상 세계를 재현하는 대신 사진은 사진이다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하는 미술로서의 사진을 창조하는 일이다. 이로써 〈끽연〉과 같은 작품들은 기록의 역할을 담당한 다큐멘터리 사진도, 사진 매체 자체의 예술성을 탐구한 모더니즘 사진도 아닌, 한국 미술사에 처음으로 등장한 개념미술로서의 사진이 되었다.

 

〈손〉

 

성능경이 《제5ST전》에서 발표한 〈손〉(1976)은 촬영을 위해 연출된 작가 행위의 물리적 흔적으로서의 사진을 단독 미술작품으로 제시한, 한국 미술사상 가장 이른 사례에 해당한다. 작가는 손바닥에 14에서 21번까지의 숫자를 적어 총 8장의 사진을 제작한 후 주먹 쥔 손의 사진 한 장을 단독 촬영해 손바닥 사진 사이사이에 배치했는데, 이로써 모두 17장의 사진이 출판문화회관 전시장에 일렬로 설치되었다. 어린아이들의 가위, 바위, 보 놀이를 연상시키는 손의 모양과 의미 관계가 일치하지 않는 숫자들로 인해, 작품의 개념이 불명확해진 대신 그것의 유희적 성격은 더 선명히 드러났다. 이 작품은 1970년대에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개념미술의 주된 사례들, 도상(icon) 기호의 우위 현상에 도전하는 인덱스(index) 기호로서의 현대미술, 즉 흔적이나 자국으로서의 사진 작품들과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당대 구미와 일본의 개념미술이 형식주의 모더니즘에 반기를 드는 임무를 수행 중이었던데 반해, 성능경의 개념적 사진은 한국 미술계의 양대 전위로서 모노크롬 추상회화와 경쟁하던 실험미술의 한 양상이자, 한국 특유의 지역적 모더니즘의 일부분으로 존재했다는 점에서 해외의 사례와는 분명히 차별화된다.

 

〈위치〉, 〈신문 읽기〉, 〈돈 세기〉

 

성능경은 1976년 동료 ST 작가들과 함께 여러 편의 이벤트 작품을 발표했는데, 이는 작가의 예술세계에서 본격적으로 퍼포먼스가 등장하는 기념비적인 순간이 된다. 먼저 사진 작업과 함께 전개된 이벤트 〈위치〉는 《제5ST전》에서 공개된 것으로, "작가 신체 각 부위에 당시의 '공간' 잡지를 '위치'시킨 행위였다. 그즈음 '공간'지가 갖고 있던 미술 잡지로서의 위상을 제 '위치'로 환원시키고자" 시도된 작품이었다. 나아가 성능경이 국립현대미술관(덕수궁)에서 열린 《제4회 앙데빵당》 전시에서 발표한 〈신문 읽기〉는, 〈신문: 1974. 6. 1 이후〉의 후속 작업으로 창조된 신문을 읽고 오리는 이벤트였다. 작가는 이 작품을 발표하던 순간에 대해 "그 당시 (신문을) 읽고 오릴 때 그렇게 목소리와 손이 떨릴 수가 없었다. '유신체제'는 그렇게 겁이 났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성능경은 그 밖에도 이 해 신문회관 강당에서 열린 《EVENT LOGICAL》 전시에서 〈신문 읽기〉, 15초간〉, 〈수축과 팽창〉을, 서울화랑에서 열린 《4인의 EVENT》 전시에서 〈돈 세기〉, 〈신문 읽기〉를 발표했다. 또 본인의 화실에 동료들을 초대해 〈돌 던지기〉를 선보였다. 이들 작품 중 〈수축과 팽창〉은 수축하고 팽창하는 작가의 신체 행위를 소개한 것으로 "당시에는 너무 재미없다는 세평을 들었으나" 이후 작가의 stretching performance의 기원이 된 중요한 작품이 되었다. 특히 작가의 특정 자세가 바로 작품의 내용이나 주제가 된 이벤트들에서, 그 행위의 기록물로서 사진이 지닌 중요성은 여타의 다른 이벤트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성능경은 이에 대해 󰡒나는 미술에 대한 개념적 관점에서 본다는 행위의 자기 동일성을 사진으로써 실현하고자 했다󰡓라고 밝힌 바 있다.

 

〈수축과 팽창〉

 

성능경은 몇 차례의 ST 전시에서 처음으로 이벤트를 발표했는데, 〈수축과 팽창〉(1976)은 그가 《EVENT LOGICAL(성능경, 이건용, 김용민 참여) 전시에서 선보인 것으로, 바닥에 서거나 누운 채 팔다리를 펼쳤다 접었다 하기를 반복하는 행위로 이뤄져 있었다. 1976년은 성능경이 사진 작업을 통해 토톨로지 개념의 탐구를 시작한 바로 다음 해로, 이 시기 발표된 그의 이벤트 역시 행위에 대한 행위 또는 행위는 행위이다처럼, 행위 그 자체의 의미를 되묻는 개념의 체현으로서의 미술작품이었다. 〈수축과 팽창〉은 이처럼 외부 세계로부터 독립된 채로 존재하는 즉자적 성격의 행위였으나, 동시에 1990년대 이후 본격화될 작가의 스트레칭 퍼포먼스(stretching performance)의 요소를 이미 내포하고 있기도 했다. 나아가 〈수축과 팽창〉은 같은 해 발표된 그의 수행적 사진 작품들인 〈사과〉, 〈손〉, 〈끽연〉 등과 작가 행위의 결과물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이벤트 〈수축과 팽창〉의 기록물은 사전 촬영되어 전시 홍보를 위한 브로슈어에 실렸다. 그러므로 성능경의 1970년대 이벤트와 사진 작품들은 퍼포먼스에서의 사진적인 것(the photographic in performance)사진에서의 수행적인 것(the performative in photography)을 각각 대표하면서, 서로 분리 불가능한 둘 사이의 관계 또한 드러내는 존재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S씨의 반평생〉, 〈특정인과 관련없음 1

 

성능경은 1977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제5회 앙데빵당》 전시에서 처음으로 〈S씨의 반평생〉을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작가가 본인 나이인 35세 이전까지의 이미지 기록들, 즉 학창 시절부터 군 복무를 거쳐 사회인이 된 시절까지의 사진들 15장을 확대 인화해 전시장 벽에 두 줄로 부착한 것이었다. 그는 그중 본인 얼굴의 눈 부위만 검은색 띠 모양으로 가려 자신임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성능경은 2016년 실시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퍼포먼스 아트' 구술채록 사업을 위한 인터뷰에서, "1977년 당시 작가 자신의 개인사를 주제로 삼았던 이 작품이 주변에서 찾기 어려운 독창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나아가 1980~90년대에 작가가 자녀들 사진을 이용해 제작했던 〈S씨의 자손들〉의 모태가 되었기에 남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라고 밝혔다. 또 그는 같은 해에 미술회관에서 열린 《서울•11인의 방법전》에서 〈특정인과 관련없음 1〉을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작가에 따르면 "신문에서 인물 사진을 채집한 후, 마이크로 렌즈로 접사 촬영해 20.32×25.4cm로 확대 인화한 다음, 인물 사진의 눈 부위만을(마치 범죄자 사진처럼) 노란색 실크 스크린 기법으로 가려놓은 사진"이었다. 이 작업은 "신문 편집자가 행사하는 인간성의 등급 날인 행위를 무효화시키고 인간 존재가 무명일 수밖에 없음을 주장하기 위한 작가의 재편집행위이자 문화지대에 공정성을 살포하기 위한 밭갈이"로서 기획되었다.  

 

1장의 신문〉, 8면의 신문〉

 

성능경은 1977년에도 1974년부터 시작한 신문 작업을 계속해 나갔다. 그는 1025일 서울 견지화랑에서 열린 《제6ST전》에서 사진 작업이 포함된 이벤트 〈1장의 신문〉을 발표했는데, "신문 한 장을 32등분을 하며 접사한 다음, 전지로 인화하고 뒤섞어 벽면에 전시한" 작품이었다. 그런데 작가는 당시 자신의 "불찰로 신문 형태가 나오지 않아서" 불만을 지니고 있다가, 이를 해소하기 위해 같은 해 작품 〈8면의 신문〉을 다시 발표했다. 1장의 신문〉 이벤트는 벽면에 설치된 사진 작품 〈1장의 신문〉 앞에서 벌인 이벤트로서, 전시장 바닥에 신문지 한 장을 펼쳐놓고 면도칼로 32등분 한 뒤 그 조각들을 뒤섞어 재배치하고, 마침내 여러 조각 중 한 장을 들어 읽다가 찢어버리는 행위였다. 기사의 문맥을 끊고 뒤섞어 버림으로써 허구일 수밖에 없는 신문의 내용과 편집형태를 해체하고 작가가 무작위적 의도로 재편집한 신문, 문맥이 통하지 않는 신문, 무의미한 의미의 신문을 보여주고자 한 작품이었다.

 

〈카탈로그〉, 〈현장 1

 

성능경은 결혼한 해인 1979년 새롭고도 중요한 두 점의 설치 작품을 발표했다. 그것은 그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제5회 에꼴드서울전》에 소개된 〈카탈로그〉와, 역시 같은 곳에서 열린 《제5회 서울 현대미술제》에 등장한 〈현장 1〉이었다. 〈카탈로그〉는 1977년 개최된 《서울 현대미술제》 카탈로그 2권을 사용한 작품으로, 사진 네 변에 청색 사인펜으로 빗금을 긋고 경계면을 오려낸 다음 인쇄된 캡션의 세 변을 오려내 작품 사진을 거꾸로 붙인 것이었다. 또 각 작품의 작가 사진의 눈 부위에 성명란을 오려 붙여 그를 익명화시켰으며, 마지막으로 오려낸 자리 몇 군데에 도장을 찍어 사실과 다름없음을 증명했다. 작가의 무명성을 주장하고 당시의 백색 미술에 대해 비웃기 위해 시도된 작업이었다. 한편 〈현장 1〉은 작가가 1974년 시작한 '신문' 작업과 1975년 이후 시도한 미술 작업의 매체로서의 '사진'의 사용이 통합된 중요한 작품으로서, "신문에서 임의로 채집한 보도사진을 접사 촬영한 뒤 그 필름에 화살표나 점선 등을 먹으로 그려 넣어 다시 확대 인화하고 전시장 벽에 설치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이는 "신문 편집자들이 독자들에게 전달하려 했던 사진의 내용을 무효로 만들고, 이를 재해석해 언론의 권력을 해체하려는" 작가의 시도였다.

 

3. 1980년대: 〈현장〉 시리즈를 통한 통합적 미술 형식의 모색

 

〈현장 2~현장 24

 

1979년 시작된 〈현장〉 시리즈는 1980년의 〈현장 2, 〈현장 4, 1981년의 〈현장 5〉와 〈현장 6〉으로 계속 이어졌다. 〈신문: 1974. 6. 1 이후〉, 〈현장〉 등의 작업은 모두 '신문이라는 매스미디어를 이용한 시대와 역사의 예술적 재해석'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었는데, 이는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성능경 예술세계의 핵심적 특징이다. 1985, 서울 관훈미술관에서 성능경의 첫 개인전인 《성능경전》이 열렸다. '현장'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이 전시에 〈현장 8〉에서 〈현장 24〉까지의 작품이 소개되었다. 당시 젤라틴 실버 프린트로 인쇄된 사진들이 다양한 형태로 전시장 벽면에 설치되었다. 작가의 회고에 따르면 이 작품들은 "개인전을 위해 수종의 신문에서 몇 년에 걸쳐 모든 종류의 보도사진을 채집하고 그중 15백 여장을 선별해 마이크로 렌즈로 접사 촬영한 후 필름(35mm)에 먹과 세필로 기호들을 그려 넣은 다음, 20×25cm 크기로 확대 인화한 사진을 전시장 조건을 고려해 설치한 사진 설치였다." 이런 행위의 의도는 "해독할 수 없는 사진을 통해 사진의 의미와 절차를 되묻기 위함이었다. 또 망각의 역사 속에서 사라진 기억을 발굴하고 상기해 한국의 현대사를 사진 파노라마 형식으로 재편성함으로써 고고학적 재해석을 시도하려는 것이었다." 작가는 같은 사진들을 이용해 다양한 형태로 다수의 설치 작품을 창출해 내는 〈현장〉 시리즈가 본인의 퍼포먼스 작업과 유사하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마치 피아노 건반 하나하나가 독립된 음을 내지만 조합하면 무한대의 소리가 나는 것처럼, 또 여러 개의 모듈이 하나의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본인의 설치와 퍼포먼스 작품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현장 3

 

성능경은 ST 소속 작가로서의 활동이 마무리되어 가던 1979, 〈현장〉 연작의 창작을 시작하며 예술세계의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현장〉 연작은 작가가 신문 보도사진을 접사 촬영한 필름에 화살표나 점선, 도형 등을 먹과 세필로 그려 넣은 뒤 확대 인화해 전시장 벽에 설치한 작품이다. 신문, 사진, 작가 행위의 융합이라는 특징을 지닌 성능경의 〈현장〉 연작은 1980년대 내내 등장했는데, 《제6회 서울 현대미술제》에서 발표된 〈현장 3(1980)은 당시 신문에 게재된 서울 근교의 산성 보도사진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해당 사진에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표시된 화살표, 즉 공적 기호는 장맛 비에 무너진 산성의 위치를 지시하고 있다. 그러나 신문의 화살표를 집요하게 모방하며 따라 그려진 사적 기호로서의 작가의 화살표는 편집자의 본래 의도를 무력화시켜 버린다. 작가는 이 같은 방법으로 해당 사진의 메시지를 무효로 만들고 언론의 편집 권력을 해체하고자 했다. 이는 〈신문: 1974.6.1 이후〉(1974) 이래로 계속되어 온, 역사에 참여하는 성능경 개념미술의 대표적 방법이었다. 나아가 성능경은 그즈음 특정 주제를 변형시켜 한 곡을 완성해 나가는 변주형식의 음악에 관심을 지니고 있었는데, 모두 10장의 사진으로 구성된 〈현장 3〉에서 다양하게 변주된 화살표의 형태는 음악의 형식을 미술작품에 전유하려는 그의 시도의 결과물이었다.

 

〈현장 26

 

1986년은 한국 퍼포먼스 아트의 역사에서 중요한 한 해였다. 이 해 퍼포먼스가 1968~1970년의 해프닝 이후 다시 본격적으로 서울의 공공장소에서 대중들에게 공개되었을 뿐 아니라, 여러 미술 공간에서 크고 작은 퍼포먼스 전시가 활발히 소개된 것이다. 서울 용산구 남영동 아르꼬스모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서울 1986 행위‧설치미술제》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19861011일부터 29일까지 열린 이 전시에 성능경은 설치 작품 〈현장 26〉을 출품하는 동시에 이벤트 〈신문 읽기〉 역시 발표했다. 1986년을 기점으로 감상을 위주로 한 기존의 미술 형태를 과감하게 거부하고, 미술 현장에서의 예술적 체험의 획득을 목표로 하는 전위미술인 퍼포먼스 아트가 전국 각지에서 본격적으로 소개되었다. 성능경 또한 이의 영향을 받아, 1980년대 말부터 다시 본격적으로 퍼포먼스 작품을 창조하기 시작했다.

 

〈현장 27, 〈현장 28, 〈현장 29a, 〈현장 29b

 

성능경은 1987년에도 '사진 설치' 작업인 〈현장〉의 발표를 계속해 나갔을 뿐 아니라, 〈현장〉과 퍼포먼스가 통합된 작품도 새로이 소개했다. 그는 이 해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미술회관에서 열린 《제13회 서울 현대미술제》에서 〈현장 27〉을, 유년 시절부터 자신의 예술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성찬경 시인과 함께 한 《美術과 時를 위한 2인의 작업》(미술: 성능경, : 성찬경)에서는 〈현장 28〉을 발표했다. 서울 바탕골예술관 소극장에서 '바탕골 문학의 시간·87회 공간 시낭독회'라는 제목으로 열린 《美術과 時를 위한 2인의 작업》에서는, 성찬경 시인의 시 낭송과 성능경의 사진 설치 행위가 함께 이루어졌다. 바로 이 두 작품을 통해 성능경의 사진 설치와 퍼포먼스가 〈현장〉이라는 하나의 작품으로 통합되는 장면이 탄생했다. 한편 1987년은 성능경의 작품이 처음으로 해외에 소개된 기념비적인 순간이 되기도 했는데, 그해 110일부터 412일까지 캐나다 토론토의 A-space와 미국 뉴욕의 Minor Injury에서 열렸던 전시《민중 ART(Min Joong Art-New Movement of Political Art From Korea)》에 〈현장 29a〉와 〈현장 29b〉가 소개된 것이다. 신문에 실린 반정부 시위대와 진압 경찰의 사진을 다시 촬영한 뒤 작가가 그 필름에 하얀색 점과 실선으로 흔적을 남겼던 이 작품들을, 전시 관계자는 당대 한국의 사회 현실을 비판한 작품으로 해석했다.

 

Nonsense 미술〉, 〈작가모독〉, 〈종이컵〉

 

성능경은 1989년 서울 나우갤러리에서 열린 《비판으로서의 예술》 전시에서 〈Nonsense 미술〉을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작가의 회고에 따르면 1974년부터 계속되어 온 신문 작업을 탈피해 보겠다는 당시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결과 탄생한 작품이 바로 1980년대와 그 이후를 연결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 〈Nonsense 미술〉로서, 작가가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미술 흐름 속에서 '한국적 모더니즘', '민중미술' 그리고 '후기 모더니즘' 사이에서 고민하고 미술의 기능을 의심하면서 '미술의 죽었음'을 증명하려고 시도했던" 작업이었다. 그는 이를 위해 "때 지난 6장의 신문지(당시에는 12면 발행), 전지 포장지 6장을 접합한 평면, 상품 포장용 소형 골판지 상자에 검은색 구두약을 구둣솔로 칠하며 전시할 때도 신문지를 세로로 길게 부착하는 등 무의미한 비 미술적 행위로 일관하려 했다." 또 작가는 역시 나우갤러리에서 열린 대규모 퍼포먼스 전시 《예술과 행위 그리고 인간, 그리고 삶, 그리고 사고, 그리고 소통》에서, 동료 작가들의 작품 〈관객모독〉을 패러디한 〈작가모독〉을 발표했다. 성능경 자신도 참여한 이 작품에서 작가들은 몸에 쓰레기 봉지가 씌워진 채 기둥에 묶여 방치되었다. 당시 성능경을 비롯한 퍼포먼스 아트 작가들은 이 같은 폭력적이거나 음울한 분위기의 작업으로 1980년대 후반의 사회 현실을 은유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작가는 이 밖에도 이후 자신의 퍼포먼스 작업의 근원이 되는 또 다른 작품인 〈종이컵〉을 《1989 대전 행위예술제》에서 발표했다. 1회용 종이컵을 저수지에서 한 컵씩 퍼내 양동이에 담는 이 작품은 1990년대 이후 작가가 관객들에게 콜라를 따라주면서 사회적 주요 문제어를 외친 여러 퍼포먼스 작품의 원천이 되었다.

 

4. 1990년대: '망친 예술'로서의 사진 설치와 퍼포먼스의 정립

 

〈어린이를 위하여〉, 〈네 남매의 사진첩〉

 

1990년 역시 성능경 예술세계에서 중요한 작품들이 등장한 시기였는데, 《한국 설치미술제》에서 발표된 〈어린이를 위하여〉와, Mixed media 문화와 삶의 해석-혼합 매체전》에서 소개된 〈네 남매의 사진첩〉이다. 먼저 〈어린이를 위하여〉는 야외 미술관의 커피숍 입구 위에 작가 자녀들의 사진첩 중 한 장을 매달아 놓은 작품이었다. 또 〈네 남매의 사진첩〉은 작가 본인인 S씨가 자녀들을 촬영한 개인사적 사진 여러 장을 공공장소에 전시함으로써 그로 인해 발생하는 서먹서먹한 느낌과 거리감을 보여주고자 한 작품이었다. 개인사적 사진을 이용한 설치 작업인 〈어린이를 위하여〉와 〈네 남매의 사진첩〉 모두 〈S씨의 반평생〉의 후속 작업이면서 동시에 다음 해인 1991년에 발표되는 〈S씨의 자손들-망친 사진이 더 아름답다〉의 출발 선상에 있는 작품이었다.

 

S씨의 자손들-망친 사진이 더 아름답다〉

 

성능경은 1991년 대구의 삼덕갤러리에서 열렸던 개인전 《성능경》에서 사진 설치 작품 〈S씨의 자손들-망친 사진이 더 아름답다〉를 최초로 선보였다. 작가의 회고에 따르면 "S씨의 자손들이 성장하는 과정을 순간 촬영해 노출 부족, 초점 실패 등으로 발생한 망친 사진들만 모아 설치했다. 또 사진들 사이에 아이들이 먹어 치운 사탕과 과자의 현란한 색깔의 포장지를 끼워 부착해 대비시켰다. 제목을 '망친 사진'이라고 정한 것은 전통적 예술 심미관에 대한 재성찰의 요구에서 비롯되었다. 이 작품은 이후 '망친 예술' 연속 작업의 출발점이 되었다." 성능경은 또 같은 해 경기도 장흥 토탈야외미술관에서 열린 《11월 한국 사진의 수평》 전시에서 〈S씨의 자손들-망친 사진이 더 아름답다〉를 퍼포먼스로 변환한 작품 〈망친 사진이 더 아름답다〉를 선보였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자신의 신체 촬영을 한 뒤 자녀들을 촬영했으며 울긋불긋한 이불 천 위에 슬라이드로 평소 촬영했던 자녀들의 스냅 사진을 영사한 뒤 해가 질 무렵 그 스크린 위에 흰색 수성페인트를 롤러로 칠해 나갔다." 성능경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애들 사진을 찍다 보니까 망친 사진이 나오는 거에요. 요새처럼 이런 디지털 사진이 아니고 아날로그 사진이기 때문에 순간 포착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그러다 보면 노출도 안 맞고 슈팅도 잘 안되고 여러 가지로, 10장 찍으면 2~3장은 망친 사진이 나오는 거에요. 그걸 버릴 수도 없고 그래서 차근차근히 모았어요. 10여 년 동안 그런 사진만 모아서 삼덕갤러리에서 91년에 개인전할 때 〈망친 사진이 더 아름답다〉라는 약간 반 시스템적인 그런 작업을 한 거죠. 반 계통적인 것, 반 체계적인 것, 사진의 계통이 있고 예술의 계통이 있잖아요. 예술의 문법, 이런 것에 대해서 딴지를 거는 거죠." 이 작품 이후 작가는 '망친 영화', '망친 예술' 등 예술과 삶의 조건에 대해 질문하는 행위를 현재까지 계속해 오고 있다. 작가 역시 1991년의 〈S씨의 자손들-망친 사진이 더 아름답다〉에서부터 최근까지 이어지는 퍼포먼스 스타일이 시작되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The wall-망친 영화가 더 아름답다〉

 

성능경은 '망친 예술' 시리즈를 1992년 들어 본격화시키기 시작했다. 작가는 19921월 서울 충돌극장에서 열린 《공간연극-Pink FloydThe wall》 전시에서 〈The wall-망친 영화가 더 아름답다〉라는 작품을 소개했는데,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의 〈The Wall〉이 상영되고 있는 스크린(영사막) 앞에서 영화 비틀어보기, 뒤집어 보기, 김 빼기, spoiler 행위(내용을 미리 누설하기) 등을 수행하며 그의 작품 세계에서 최초로 영화와 퍼포먼스의 만남을 선보였다. 이는 "정상적인 영화의 이어짐을 왜곡시키고 내용의 줄거리가 주는 즐거움을 예측할 수 없도록 함으로써 그 긴장감을 최대한 증폭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작가는 그리하여 망친 영화가 더 아름답다라는 명제가 타당하다는 것을 입증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영화 및 예술의 조건을 재음미하려 했다.

 

〈망친 예술이 더 아름답다〉

 

1993년에도 "행위, 설치, 페인팅 등이 복합된 작업인 '망친 사진', '망친 영화', '망친 예술' 시리즈를 통해 예술과 삶의 조건과 체계에 대해 질문하려는" 성능경의 시도는 계속 이어졌다. 19933, 작가가 서울 돌 갤러리에서 열린 《헤쳐 모인 예술과 예술가들-同不而和+Performance》 전시에서 발표한 〈망친 예술이 더 아름답다〉는, '망친 예술'로서의 퍼포먼스의 전형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그는 이 작품에서 행위 중에 관객에게 소시지를 나눠 주기도 하면서 스트레칭, 신문 읽기,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신체 촬영을 했다. 이 같은 〈망친 예술이 더 아름답다〉는 일상에 내재해 있는 미처 예기치 못한 사건들을 예술화하는 성능경 퍼포먼스의 특징이 본격화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작가는 이 시기부터 시작된 자신의 퍼포먼스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내 퍼포먼스에서 보여주는 부채질 하기, 시축문 읽기, 부채 태우기, 옷 갈아입기, 온몸에 베이비 오일 바르기, 드로잉, 스트레칭, 사탕·콜라·초콜렛··과자·케익 등 음복하기, 여행용 트렁크 끌고 다니기, 줄넘기하기, 훌라후프 하기, 고무줄 새총으로 탁구공 발사하기, 신체 촬영(인스터매틱 카메라), 오줌 누기, 오줌 마시기, 일상영어나 경구, 광고나 영화 카피 읽기, 면도 크림 얼굴에 바르기(관객 포함), 신문 읽고 오리기, 돈 세기, 영화 비틀기, 이빨 쑤시기, 박박 긁기 등... 그리고 최근의 자위행위를 포함한 모든 행위는 일상에 흩어져 매몰되어 지나치기 쉬운 매장품들을 고고학적으로 발굴한 발각된 망각의 파편들이다. 나는 이를 다시 꿰맞추어 잃어버린 삶의 느낌을 회색으로부터 녹색으로 도색하려는 것이다."

 

'95 망친 예술이 더 아름답다〉, 〈망친 삶이 더 아름답다〉

 

'미술의 해'였던 1995, 작가는 전국 각지에서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특히 작가가 '미술의 해'를 맞아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개최된 《미술과 음악의 만남전》에서 발표한 〈'95 망친 예술이 더 아름답다〉는, 서울 팝스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으로 이뤄진 퍼포먼스 작품이었다. 그는 624일 밤에 이뤄진 이 행위에서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 1악장에 맞춰 무대 장치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나는 자연인이다' 등의 문구가 적힌 시축문을 천천히 낭송했다. 그 후 물감 패트병 투하를 시작으로 페인팅 행위, 무릎 등을 이용한 신체 촬영 행위, 스파클러의 점화 등 다양한 행위를 수행했다. 마지막으로 음악이 끝남과 동시에 작가가 그림 그리고 있던 캔버스 천을 들어 올리자 '망친 예술'이라는 문구가 나타났다. 이 작품은 1996년 작가가 《놀이미술 워크숍》(속초 모 초등학교, 속초)에서 발표한 〈망친 삶이 더 아름답다〉로 이어졌다.

 

〈夢遊桃園〉, 〈難兄難弟〉

 

행위 도중 시축문이나 경구 등을 읽거나, 줄넘기나 체조 등을 수행하고, 관객들에게 종이컵에 담긴 콜라를 나눠주면서 "~의 맛!"이라고 외치는 성능경 퍼포먼스의 전형적인 내용이 1997년부터 더욱 본격화된다. 1997 청담 예술제》의 개막을 맞아 청담성당 앞에서 공개된 〈夢遊桃園〉, 1997 월미도 행위예술제》(월미도 야외무대, 인천)에서의 〈難兄難弟〉, 1997 군산 허수아비미술제》(군산시청사 전시실, 군산)에서의 〈우리는 모두 허수아비〉 등이 그 예이다. 성능경은 이와 같은 본인 퍼포먼스의 특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어떤 사람은 그래요. 성능경 퍼포먼스는 똑같다, 항상 하는 게. 비슷비슷하게 약간씩 변주를 하니까. 그래 나 똑같다, 나 똑같은데 내가 인생을 동시에 두 번 살면 나 다른 거 한다. 그러나 내 인생은 딱 하나다. 그러니 하나밖에 못 하는 거다 나는. 그러니까 내 예술을 10번 본 사람이 10번을 똑같이 볼지도 모르지만 그중에는 반드시 새로운 다른 아이템이 하나 꼭 섞여 있고, 지금까지는 그랬어요.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그 현장이 주는 퍼포먼스 느낌이 있어요. 문을 열고 닫는다든지, 실제로 그런 건 많이 했어요. 즉흥적으로 하는 거, 그런 게 삽입되니까 똑같을 수 없는 거고 또 하나 중요한 거는 똑같다고 하는 것이 맥락적인 입장에서 봤을 때는 사실 다 다른 거죠."

 

〈우왕좌왕〉, 〈마비게월(마구령, 비아그라, 게릴라 양동이, 월드컵)

 

성능경은 1998년 퍼포먼스 〈우왕좌왕〉과 〈마비게월(마구령, 비아그라, 게릴라 양동이, 월드컵)〉을 발표했는데, 모두 '드로잉' 행위를 포함하고 있던 것이 특징이었다. 429일 《헤쳐 모인 예술과 예술가들》(돌갤러리, 서울)에서 소개된 〈우왕좌왕〉에서 성능경은 전시장에 미리 드로잉 작업해 둔 캔버스를 걸어 놓고 그 위를 면도 크림으로 문지르며 여러 사회적 현상이나 작가 개인의 체험 등을 진술하는 '드로잉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한편 《드로잉 횡단전》(금호미술관, 서울)에서 소개된 〈마비게월(마구령, 비아그라, 게릴라 양동이, 월드컵)〉 역시 '드로잉 퍼포먼스' 작품이었다. 작가는 미리 준비한 드로잉 앞에서 시축문을 읽은 다음, 그 위에 면도 크림을 문지르는 행위를 했다. 작가에 따르면 드로잉 이미지의 내용은 "지프차를 얻어 타고 여행했던 마구령 비상 도로, 당시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비아그라 사건, 차범근 감독의 월드컵 사건, 그해의 기록적 폭우 등"이었다.

 

5. 2000년대 이후: 국내외 개인전, 단체전에서의 활발한 활동

 

e-dong[이동, 移動, movement], 〈밥/(Boab/Ddong)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의 퍼포먼스 아트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전국 각지의 행위미술제를 통해 활발하게 대중과 만나던 퍼포먼스 아트 작가들은, 2000년대에 접어들며 해외 퍼포먼스 아트 작가들과의 교류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대규모 국제 행위미술제가 해마다 한국에서 열리게 되었고, 이에 영향받은 성능경 또한 국내의 국제행위미술제에 참가하거나 직접 해외 행위미술제에 참여하는 등 창작 활동의 영역을 국외로 넓혀나가게 되었다. 작가는 2000년 열린 《SIPAF 2000: 2000 서울 국제행위예술제》(밀레니엄플라자, 서울)에서 〈e-dong[이동, 移動, movement]〉을, PICAF 2000: 부산 국제아트페스티발》(해운대 야외무대, 부산)에서는 〈波! ! !〉를 발표했다. 그 밖에도 《유목프로젝트 2000 -난장퍼포먼스 페스티벌 1999-2000(씨어터제로, 서울)에서 〈밥/(Boab/Ddong)〉과 〈선언 퍼포먼스〉 등을 선보였다.

 

〈쿠킹호일맨〉, 〈안방〉, 〈쿠킹호일룸〉, S씨의 하루〉

 

2001년은 성능경의 예술세계에서 기념비적인 한 해였다. 이 해 서울의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미술회관에서 그의 대규모 개인전 《예술은 착란의 그림자-성능경》이 열린 것이다. 작가는 이 전시에 사진가이자 중앙대학교 교수인 이강우 작가와의 협업으로 제작한 사진 작품 〈쿠킹호일맨〉을 새로이 출품했는데, 그의 회고에 따르면 이 작업은 "성능경의 몸에 쿠킹호일을 휘감아 부착하는 퍼포먼스에서 비롯되는 여러 가지 신체 동작의 차이와, 이를 바라보는 또 한 사람의 예술가이며 사진가인 이강우의 감수성이 서로 만나 전개되는 미지의 예술적 경험을 위한 퍼포먼스·사진 이중주"였다. 그는 나아가 "한 작업을 두 사람이 공유함으로써 예술의 절차에 대한 한 작가의 남용되는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소유 의식을 희석하고 그로써 예술의 건전성에 대하여 질문"하기 위해 이 작품을 제작했다고 밝혔다. 《예술은 착란의 그림자-성능경》에서는 이 밖에도 1970년대부터 생산된 작가의 대표작을 비롯해 개인전을 맞아 새롭게 제작한 사진 작품들인 〈안방〉, 〈쿠킹호일룸〉, 〈이강우전-미술() & 문화·신체풍경〉, 동영상 작품인 〈S씨의 하루〉가 전시되었다. 〈착란의 그림자〉 연작 사진들로도 불린 〈안방〉, 〈쿠킹호일룸〉, 〈이강우전-미술() & 문화·신체풍경〉은 〈망친 사진이 더 아름답다〉와 동일 계열에 속하는 컬러 사진 작업으로서, 작가가 카메라를 B셔터로 고정하고 스트로버를 피사체 앞에서 이동하며 터트린 촬영 퍼포먼스의 결과물이었다. 또 〈S씨의 하루〉는 "예술가가 아닌 자연인으로서의 성능경 작가가 보내는 지극히 단순하고 반복적인 보통의 하루를 박용석 작가가 비디오로 기록한 일종의 다큐멘터리 영상"이었다.

 

〈멈춤, Pause, 止〉

 

2002년은 한·일 월드컵 대회와 광주비엔날레 전시가 열렸던 해로서, 다양한 국내외 행위미술제와 전시가 전국에서 개최되었다. 이 해 《광주비엔날레 2002-멈춤, Pause, 止》(비엔날레관 제3 gallery, 광주)에 작가의 영상 퍼포먼스 작품인 〈S씨의 하루〉가 출품되었다. 그는 당시 광주비엔날레 전시장에서 직접 퍼포먼스 〈멈춤, Pause, 止〉(3회 공연)을 발표했다. 또 월드컵 경기에 맞추어 수원 월드컵 경기장 남쪽 공원에서 열린 《2002 설치예술제-한국현대미술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조망》(수원 월드컵경기장 남쪽 공원, 수원)에서 퍼포먼스 〈즐거운 육체, 사뿐한 정신〉을 선보이기도 했다.

 

〈우린 모두 싸이코다〉, 〈박박 긁어라!

 

성능경이 2003년 국내에서 발표한 주요 퍼포먼스 작품으로는 《싸이코 드라마전》(성곡미술관, 서울)에서 발표한 〈우린 모두 싸이코다〉와, 2003 한국실험예술제》(갤러리 라메르, 서울)에서 발표한 〈박박 긁어라!〉가 있다. 작품의 전반적인 내용과 형식은 1990년대 중반부터 발표한 다른 퍼포먼스들과 별다르지 않으나, 〈박박 긁어라!〉에서 처음으로 작가의 관람자 앞에서의 배뇨, 그리고 자신의 소변을 다시 마시는 행위가 등장했다. 그는 이와 같은 행위를 벌인 것에 대해 "신체와 예술의 빈사 상태를 치유하기 위함이었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날 그날 영어(Everyday English), Peace! 입닥쳐! 조용히 해!

 

2004년은 성능경의 후기 작품 세계를 형성하는 중요 작품 중 하나인 〈그날 그날 영어(Everyday English)〉가 등장한 해였다. 작가는 2003년 퍼포먼스 발표를 위해 대만 및 베니스에 다녀온 후 외국 작가와의 소통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다음 해인 2004년부터 신문지를 이용한 영어 공부와 드로잉을 결합한 이 작업을 시작했다. 그 이후 2020년인 현재까지 1년에 200여 점 분량의 작품이 계속 생산되고 있다. 작가는 주말, 공휴일을 제외한 평일에 자택으로 배달되는 신문을 택해 매일 영어를 공부하는 동시에 신문에 드로잉 하거나 콜라주를 하는 방식으로 〈그날 그날 영어(Everyday English)〉를 작업하고 있다. 또 그가 《평화선언 2004-세계 100인 예술가》(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전시에 참여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중앙홀에서 발표한 퍼포먼스 〈Peace! 입닥쳐! 조용히 해!〉는, "peace라는 영어 단어 속에 이미 keep silence라는 뜻이 내재해 있음을, 그러므로 평화라는 단어 속에는 이미 폭력성이 포함되어 있음을" 관람자들에게 설파한 작품이었다.

 

〈어디 예술 아닌 것 없소?

 

2007년 당시 활발히 퍼포먼스 아트 관련 활동을 펼치고 있던 작가 단체 '한국실험예술정신(KoPAS)', 1967년 대한민국 최초의 해프닝이 등장한 이후 40년이 지났음을 기념해 《2007 한국 실험예술제-한국 퍼포먼스 아트 40, 40인》(벨벳 바나나, 서울)을 개최했다. 성능경은 이 행위미술제에서 〈어디 예술 아닌 것 없소?〉를 발표했는데, 당시 작성한 선언문에서 "모든 것은 이미 예술이 되었다. 예술의 홍수고 예술의 범람이다. 역설적으로 예술은 실종되었다. 사라진 예술은 복원할 수는 없다. 예술이 아닌 것을 탐색하면서 그로부터 예술의 가능성을 모험하고자 한다. 그러면서 예술의 교두보를 확보하려 한다. 예술은 이미 우리의 삶에서 넘쳐나고 있다. 발끝에서부터 머리카락 끝까지. 눈속, 콧속, 입속, 귓속, 살 속까지 마구 스며든다. 역설적으로 예술은 사라졌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예술이 아닌 것을 찾아 나섬으로써 예술을 확인하려 한다. 어디 예술 아닌 것 없소? Do you have something that is no art"이라고 밝혔다. 이 작품에서는 시축문이 적힌 부채 태우기, 수영복만 입고 스트레칭 하기, 배뇨하고 소변 마시기, 자위행위 하기, 관람자들에게 사탕 나눠주기, 훌라후프를 돌리며 새총으로 탁구공 쏘기 등의 행위가 등장했다.

 

〈나는 말단입니다〉

 

2008년에 발표한 성능경의 중요한 퍼포먼스 작품으로 《실험예술 월드엑스포》(씨어터제로, 서울)에서의 〈나는 말단입니다〉가 있다. 그는 이 작품에서 극장 중앙에 놓인 기둥의 나선형 철 구조물에 물구나무서기를 한 뒤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는 다음과 같은 선언문을 낭독했다. "돈은 totempole의 꼭대기에 위치하신다. 돈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 돈은 우리를 자유롭게 / 산만하게 하신다. 돈은 나 / 우리의 유일한 체계이시다. / 우리는 이 체계에서 말단일 뿐이다." 그리고 나서 작가는 "돈 방망이 받아라!", "금 방망이 받아라!", "불방망이 받아라!", "토템폴 방망이 받아라!"하고 외치며 트위스트 목 베개로 관객을 힘껏 후려쳤다. 그는 작가 노트에서 이 행위를 한 후에 "행복감이 찾아왔다.", "속이 시원했다."라고 회고했다.

 

〈난 궁지에 몰렸어!, 〈불! ! !

 

성능경은 2009년부터 퍼포먼스 작가 문재선이 조직한 국제적 규모의 행위미술제인 '퍼포먼스 아트 네트워크 아시아(PAN ASIA)'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기 시작했다. 그는 《2009 2회 퍼포먼스 아트 네트워크 아시아》(제로원 디자인센터 씨어터, 서울)에서 〈난 궁지에 몰렸어!〉를 발표했다. 또 작가는 《2009 5회 경기도 세계도자비엔날레 국제도자퍼포먼스-세라믹 패션》(경기도 도자비엔날레 행사장, 이천)에서 〈불! ! !〉을 선보였는데, 작품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오랫동안 알면서도 짐짓 잊어버렸던 물, , 흙의 중요성이 도자예술의 기본 요소라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인간 삶의 보편적 조건이자 우리 상상력의 원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세 요소를 나의 퍼포먼스에서 퍼포먼스 불, 퍼포먼스 물, 퍼포먼스 흙으로 차용해 관객과의 예술적이고 문화적인 교감을 유희하면서 어떻게 그 소통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겠다. ! 공기가 빠졌네! 퍼포먼스 공기…"

 

〈너 도가 지나쳤어!, t.b.a. (to be announced)〉 시리즈

 

2010년은 1970년대 ST 그룹의 일원으로서 개념적인 설치, 퍼포먼스 작업을 선보였던 성능경의 예술세계를 더 많은 관람자에게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된 해였다. 20101224일부터 2011320일까지, 경기도미술관에서 《1970-80년대 한국의 역사적 개념미술 : 팔방미인》(경기도미술관, 안산)  전시가 열렸기 때문이다. 경기도미술관이 소장품 작가 8명을 초대해 설치와 비디오 미술로부터 퍼포먼스, 대지미술, 프로세스 아트에 이르는 1970~80년대의 폭넓은 미술 실험을 보여주기 위해 기획한 이 전시에 성능경이 초대되었다. 이뿐 아니라 성능경은 2010년 이후 현재까지, 일본, 대만, 마카오 등지에서 개최되는 국제행위미술제에 여러 차례 참가하며 활발한 창작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2011년 이후 해외에서 발표된 성능경의 대표 작품들로는 2011년 대만 타이베이에서 발표한 〈너 도가 지나쳤어!2013년부터 국내 및 아시아와 유럽 국가에서 발표를 시작한 〈t.b.a.(to be announced)〉 시리즈 등이 있다.

 

Sweet Dew

 

2014년 제10회 광주비엔날레가 '터전을 불태우라'라는 부제로 열렸다. 성능경은 《광주비엔날레 퍼포먼스 특별전: Sweet Dew - Look Together(1: 금남로, 2: 전남대 후문)에서 퍼포먼스 작품 〈Sweet Dew〉를 발표했다. 201488, 810, 810일 세 차례에 걸쳐 발표된 이 작품 중 1차에 대해 성능경은 그 근원이 1970년대의 본인 작품 〈수축과 팽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회고했다. 또 전남대에서 발표된 2차 작업의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 행위에 앞서 나는 물을 담은 양동이를 들고나와 마룻바닥에 먼저 MONEY, 다음에 $, , , ₩ 등 각국의 돈 기호를 큰 평붓을 양동이 속의 물에 적셔 크게 쓴 후 술을 따르고 제사를 지냈었다. 음복은 가정집에서 지내는 제사에서 하는 절차로서 매우 자연스럽게 조상의 음덕을 함께 나누는 행위이다. 다만 내 행위에서는 음덕의 대상이 조상이 아니라 돈일 뿐이다. 왜냐하면 돈은 신이 되었고 신은 돈이 되면서 돈~신이 되는 세상일뿐만 아니라 돈이 돈 되는 예술만을 돌게 하기 때문이다. 돈과 예술을 위하여 음복! Stop putting me on!"

 

〈사색당파(四色黨派)-특정인과 관련없음〉

 

2015년 성능경이 가장 관심을 쏟았던 전시는 《한국미술의 거장 3인의 동거동락전》(남산골 한옥마을 오위장 김춘영 가옥, 서울)이었다. 그는 이 전시에 〈사색당파(四色黨派)-특정인과 관련없음〉(사진: 8x10 inch-448)을 출품했는데, 이 작업은 작가가 1977년 발표한 〈특정인과 관련없음〉을 토대로 제작한 것으로, 동시대 한국인과 한국 사회가 분열을 극복하고 '행복한 다성'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비롯되었다. 작가는 작품의 제작 방법과 그 예술적 의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한 바 있다. "이번에도 (1977년의 작품과) 같은 방식으로 신문에서 약 440명의 인물 사진을 채집, 촬영, 인화한 다음 빨강, 파랑(), 보라, 푸른()색을 눈 부위에만 컴퓨터 작업으로 처리하여 덮어 놓은 것이다. 이렇게 4가지의 색을 사용하여 사색(四色)을 드러낸 것이며(오늘날 각 정당의 상징색을 참고하라) 사색당파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경계에 대하여 사색(思索)하도록 관람객들을 유인하고자 한다." "나는 한옥에 거주한 당대에 정치적으로 한 가닥 했을 그들의 위상과 그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소속된 사색당파로서의 동아리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동고동통(同苦同痛)을 무릅쓰고 동거동통(同居同通)을 도모하면서 동분서주(東奔西走)하다 동과 서에서 남과 북으로, 늙은이와 젊은이로 분열하면서 일성(一聲)을 도모하려다 다성(多聲)으로 분열한 모양새다. 행복한 다성은 불가능하기만 하였을까? 불행하게도 이와 같은 형국은 우리의 현대사에서도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는 듯하다. 동거다성(同居多聲)을 위한 기쁜 우리의 동거동락(同居同樂)은 아마도 아득하기만 하겠지요?"

 

〈석도철전〉, 〈증거인멸〉, 〈잡동사니〉, 〈백두산〉, I`m the low man on the totempole

 

2018년에도 성능경은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는데,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사례는 서울 자하미술관에서 작가 주재환과 성능경이 함께 2인 전시 《도르래미타불》를 열었던 일이다. 이 전시에 성능경의 기존의 설치작업 외에 〈석도철전〉, 〈증거인멸〉, 〈잡동사니〉, 〈백두산〉 등 일상 사물을 이용한 새로운 설치 작품들이 여러 점 소개되었을 뿐 아니라, 지난 2004년부터 작가의 자택에서 제작되고 있던 작품 〈그날 그날 영어(Everyday English)〉가 최초로 외부에 공개되었다. 〈석도철전〉은 작가가 길거리에서 수집한 돌덩어리, 젓갈 항아리, 녹슨 철제 H-beam, 그리고 자택에 있던 헌 컴퓨터 회로판을 나란히 한 곳에 모아 설치한 작업이며, 〈백두산〉은 사용하고 난 2L 용량의 '백두산' 생수 페트병을 약 900개 정도 전시장에 쌓아둔 작품이었다. 또 〈증거인멸〉은 수십 년 동안 쌓인 작가의 개인 정보기록물을 파쇄기로 분쇄한 후 그 결과물을 8장의 큰 투명 비닐봉지에 담아 전시한 작품이었으며, 〈잡동사니〉는 작가의 집에 있던 버리자니 아깝고 쓸모는 없는, 일상생활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물품들을 이용한 작품이었다. 한편 같은 해 1월 대구미술관에서 한국의 1960~80년대 전위미술과 퍼포먼스를 조명하는 대규모 전시 《저항과 도전의 이단아들 1-한국 아방가르드 미술 50: 1960-80년대의 정황》, 《저항과 도전의 이단아들 2-한국 행위미술 501967-2017》이 열려 세간의 주목을 받았는데, 작가는 이 전시에 여러 점의 작품을 출품하고 현장에서 퍼포먼스 작품 〈I`m the low man on the totempole〉을 발표했다.

 

 

〈또 하나의 단색화〉

 

2020, 성능경은 918일부터 1011일까지 자하미술관에서 열린 《뜨악!》 전시에 〈또 하나의 단색화〉를 출품했다. 이 작품은 한 해 전인 2019년 작가와 주재환의 공동 전시 《도르래미타불》에서 처음 선보인 것으로, 1972년 작가의 사촌 형님인 성찬경 시인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구매한 와트만지 9장이 재료이다. 성찬경 시인은 귀국 후 이들 종이를 자택에 보관했으나 비를 맞아 종이에 얼룩이 졌을 뿐 아니라 색도 누렇게 변색 되었다. 이에 시인은 성능경 에게 그 위에 그림을 그리라며 해당 종이들을 선물했고, 작가는 이를 보관하다가 얼룩진 모노톤의 와트만지들이 한국적 모더니즘 미술을 비평하는 자신의 망친 예술의 또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다고 보고 〈또 하나의 단색화〉라는 제목을 붙여 전시장에 설치했다. 이 작품은 2024823일부터 925일까지 갤러리 신라 대구에서 개최된 전시 《어제, 이제, 하제》에도 출품되었다.

 

〈밑그림〉, 〈피아노-모독〉, 〈경기축산 오픈세일〉

 

성능경은 2020년 열린 전시 《똥이 꽃이 되는 세상》(10.16~11.22, 자하미술관)에서 디지털 사진 작품 〈밑그림〉을 처음 선보였다. 이는 작가가 삼성 갤럭시 노트 4 핸드폰으로 80일 동안 본인의 배설물을 닦은 휴지를 촬영하고 해당 이미지를 포토샵으로 작업한, 사진과 드로잉, 그리고 배설 행위가 융합된 작품이었다. 화려한 다색 추상으로 나타난 최종 결과물의 미()와 작품의 원출처 사이의 틈에서 발생한 효과야말로, 작가가 추구하는 집에 있으면 일상이지만 미술관으로 가면 예술이 되는 그런 틈바구니의 예술, 다시 말해 망친 예술의 특징 그 자체였다. 작가가 1970년대 말부터 광고 스티커들을 모아 자택 피아노에 붙이고 있는 현재 진행형 작품 〈피아노-모독〉(2017), 그와 가족들이 매일 마시는 브랜드의 생수병을 촬영한 사진 작품 〈백두산〉(2019), 집에 배달된 정육점 광고지를 활용한 콜라주 〈경기축산 오픈세일〉(2023) 또한 최근의 망친 예술을 대표하는 사례들이다. 〈밑그림〉은 2021년의 《몸짓말 CORPUS GESTUS VOX(3.11~6.27, 경기도미술관), 2022년의 《꿈적꿈적》(6.4~9.9, 헬로우뮤지엄, 서울), 2024년의 《어제, 이제, 하제》(8.23~9.25, 갤러리 신라 대구) 등의 전시에서 꾸준히 관람자들에게 소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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