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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윤광조Yoon Kwang-Cho

1946-01-30

#공예

책임연구원 | 최광진

Yoon Kwang-Cho

작가소개

  도예가 윤광조는 자유분방하고 질박한 조선 시대 분청사기의 정신을 계승하고 이를 독자적인 양식으로 현대화함으로써 가장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보편성을 획득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1973년 홍익대학교 공예과를 졸업하는 해에 동아공예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일찍이 두각을 드러낸 그는 최순우 선생의 애제자로 젊은 나이에 장욱진 선생과 도화전을 열어 미술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2000년대에는 국제무대에 진출하여 세계적인 도예 전문 갤러리인 영국의 베쏭갤러리와 미국의 필라델피아미술관시애틀미술관에서 초대전을 열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그의 작품은 현재 필라델피아미술관과 메트로폴리탄미술관샌프란시스코미술관시애틀미술관시카고미술관에 상설되어 있을 정도로 세계 도예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국내에서는 2004년에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어 전시회를 열었고, 2008년에는 경암학술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1994년부터 그는 경주 안강의 깊은 산속에 집과 작업실을 짓고 조수도 없이 홀로 작업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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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약력

1946  함경남도 함흥 출생

1973  홍익대학교 미대 공예학부 졸업

         제7회 동아공예대전 대상 수상

1974  한국문화공보부 추천 일본 당진 유학

1979  4회 공간도예대전 우수상 수상

2004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선정

2008  경암학술상-예술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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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조 도예의 정체성과 미학적 의의

 

최광진(미술학 박사)

 서문 

윤광조(尹光照, 1946- )는 한국에서 15~16세기에 꽃피운 분청사기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도예가다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걸쳐 중국과 더불어 세계적인 도예 강국이었던 한국은 자생적인 현대화에 실패하고도조 스타일로 변한 현대 도예의 흐름에 밀려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이처럼 침체된 도예계의 분위기에서 그는 해외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통해 돌파구를 찾고 잇따라 호평을 받으면서 국제적인 도예가로 자리매김했다세계적인 도예 전문 갤러리인 영국의 베쏭갤러리와 미국의 필라델피아미술관시애틀미술관 등에서 초대전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미술관들이 그의 작품을 소장되어 있다그의 작품은 현재 필라델피아미술관과 메트로폴리탄미술관샌프란시스코미술관시애틀미술관시카고미술관 등에서 상설 전시되고 있을 정도로 국제적인 위상이 굳건하다.

현대 도예가로서 그의 예술세계는 뿌리 깊은 한국 도예의 전통을 자생적으로 현대화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한국의 근현대미술은 주로 20세기 초에는 일본을 통해서그리고 20세기 중반에는 유럽을 통해서 현대화가 이루어지면서 정체성을 버리고 현대화로 나아간 경향이 있었다그러나 윤광조의 경우는 정체성이 뚜렷한 분청사기의 양식과 정신을 계승하고이를 성공적으로 현대화함으로써 한국적인 정체성과 세계적인 보편성의 조화를 획득한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그가 분청사기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65년 홍익대학교 공예과에 입학한 후 우연히 일본 서적 『미시마(三島)(분청사기의 일본 명칭)를 보고 난 후부터이다이때 분청사기의 파격적이고 현대적인 미감에 매료된 그는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지지와 격려 속에 줄곧 분청사기의 미학과 기법을 연구해왔다.

그가 데뷔하는 1970년 후반에서 1980년대까지의 초기작품은 물레를 사용하여 전통 도자기의 둥근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분청사기의 자유분방한 기법들을 익히고 실험하였다그러한 과정을 거친 후 윤광조 양식이라고 불린 만한 그의 현대적이고 독창적인 작업은 1990년대 전후에 시작된다이 시기 그의 작품은 도예의 뿌리 깊은 전통인 물레의 사용을 포기하고대신에 흙을 손으로 주물러서 만든 넓은 점토판 2~3개를 붙여 타원형이나 삼각형의 형태를 만들었다그리고 기형 표면에 화장토를 입히고 손가락이나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지푸라기대나무 칼못 등으로 자연에 받은 인상과 이미지들을 회화적으로 드로잉을 하였다이러한 그의 특유의 작품은 물레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표면이 매끄럽지는 않지만거친 손자국이 그대로 남아 생긴 걸쭉한 여운으로 자유분방한 분청사기의 전통을 더욱 극대화해 주었다.

그는 1979년부터 전업 작가를 결심하고 경기도 광주에 집과 작업실을 짓고 생활해 오다가 1994년부터 경주 안강의 도덕산 중턱으로 옮겨 지금까지 그곳에서 홀로 작업해 오고 있다그곳은 산세가 깊고 바람이 유난히 세서 바람골이라 불리는 곳으로 이후 작업은 그러한 자연 풍광과 사계절의 오묘한 변화를 온몸으로 교감하고 무심히 빚은 것들이다이러한 환경에서 <바람골>과 <산중일기시리즈 등이 나오게 된다이처럼 깊은 산속에서 생활하며 자연환경의 영향이 깊게 반영되면서 그의 작품은 자연 속에서 생겨나 언제부터인가 그 모습 그대로 있었던 것 같은” 그래서 어머니의 품속 같은 편안한 작품을 만들고자 했다.

이후 2004년경부터는 <혼돈(Chaos)> 시리즈를 통해 당시 느꼈던 혼란한 시대 상황을 반영하고자 했는데이 시리즈는 기존의 형식을 유지하면서 잭슨 폴록의 액션페인팅이 연상되는 거친 몸짓의 붓질과 흘리고 뿌리는 기법으로 격정적인 에너지를 표출했다. 2016년경부터는 새로이 시작한 <산동(山動)> 시리즈는 어느 날 산이 움직이는 듯한 체험을 반영한 것이다움직이는 산의 모습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그는 다각형의 형태를 가마에서 넘어지지 않을 정도로 기울게 만드는 비균제의 균형과 비대칭의 미학으로 기운 생동하는 자연의 생명력을 역동적으로 포착했다.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윤광조 도예의 뿌리와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1절에서 조선 초에 성행한 분청사기의 역사적 배경과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그리고 2절에서는 그러한 분청사기에 나타난 현대적 의미를 살피기 위해서 분청사기의 미학과 현대미술과의 관계를 탐구하고자 한다. 3절에서는 윤광조가 이러한 전통을 어떻게 자신의 방식으로 계승하여 전통과 현대를 조화시켰는지그러한 그의 작품의 특징과 미학이 현대미술의 맥락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할 수 있는지를 살핀다마지막 4절에서는 그의 예술세계가 해외에서 어떻게 평가되고 있는지를 외국 평론가들의 평을 통해 그의 작품이 갖는 국제적인 보편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상의 연구를 통해서 전통 분청사기에 담긴 한국 특유의 미의식을 밝혀내고그것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성공적인 사례를 윤광조의 작품세계를 통해서 살펴보았다이러한 사례는 전통을 토대로 하면서도 현대성을 성취해야 하는 법고창신의 좋은 모범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이를 위해서는 전통을 단순히 양식의 답습에 그치지 않고정신과 미학의 계승이 될 때 윤광조의 경우처럼 자유로운 양식의 현대적 변용이 가능할 것이다.

  

1. 분청사기의 역사적 배경과 특징

 

분청사기는 갈색의 태토(胎土위에 백토로 분장하고벗겨지지 않도록 유기질의 유약을 입혀 만든 도자기다이러한 분장기법은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과 페르시아인도멕시코과테말라코스타리카 등 세계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특히 한국의 분청사기는 중국 북송대의 자주요(磁州窯)에서 민간용기로 생산된 도자기와 관련이 있어 보이지만그 영향 관계는 분명하지 않다분명한 것은 한국의 분청사기는 그 표현의 다양성과 현대적 감각에 있어서 세계 도자사에 자랑할만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분청사기가 등장하게 된 것은 사회적으로 15세기 전후 여말선초즉 고려에서 조선으로 시대가 바뀌는 정치적 격동기이다이러한 혼란기는 사회를 지배해 온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무너지고억압받아온 서민문화가 꽃피우게 된다한 나라의 왕조를 이끄는 정치이념은 대개 전통문화와 순수한 서민들의 감성을 억누르는 경향이 있기에이처럼 지배층의 권력이 약해질 때 오히려 서민문화가 활성화되는 경향이 있다. 15세기 왕조 교체기에 나타나는 분청사기나 18세기 서민들의 지위가 상승하는 분위기에서 탈춤판소리풍속화민화사설시조 등의 민중예술이 나타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고려의 정치이념은 중국에서 들어온 불교였고조선은 유교를 통해 구세력을 몰아내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불교는 탈속적이고 명상적인 성격이 강하고유교는 예절과 위계질서를 중시했기 때문에 자유분방하고 풍류를 좋아하는 한국인의 기질을 억압하는 경향이 있었다여말선초의 혼란기는 그러한 이념이 약해지면서 역설적으로 소박하고 자유분방한 서민들의 민성이 드러날 기회가 제공되었다.

분청사기의 등장을 청자기술의 후퇴라고 보는 이도 있지만그보다는 새로운 시대정신에 부합한 양식이며고려청자에 대한 아방가르드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견고한 강도의 자기(瓷器기술로 만들어진 고려청자는 10세기경 중국 월주요(越州窯)의 영향으로 시작되었다유럽이 18세기에서야 자기를 만들기 시작한 것에 비해 중국과 한국은 당시 세계 도자사에서 도자기의 최강국이었다특히 맑고 투명한 비취색이 감도는 고려청자는 당시 중국에서도 고려비색은 천하제일이라고 극찬할 정도로 높게 평가되었다이러한 청자의 미학은 탈속적인 피안의 세계를 동경하는 불교와 깊은 관련이 있다청자의 수요층이었던 왕실과 귀족들은 불교를 통해 나라를 지키고개인의 안녕과 행복을 얻고자 했는데청자는 이러한 지배층의 취향을 반영했다그러나 고려가 망하면서 불교는 비현실적인 공허한 이념이라고 비판받았고인간과 세계에 관한 그릇되게 인식하게 하고의리와 인륜을 파괴한다는 이유로 배척했다그리고 현실에 기반을 둔 유교를 통해 새로운 질서를 건설하고자 했다.

고려의 멸망하자 국가가 주도한 관요의 기능은 마비되고관요의 기술자들은 전국으로 흩어져 생활에 필요한 실용적인 그릇을 만들게 되었다그럼으로써 도예는 불교를 숭상했던 귀족들의 요구가 아니라 소박한 서민들의 필요와 취향을 반영하게 되었다이것이 청자의 정형화된 형태에서 벗어나 꾸밈없이 소박한 분청사기가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의 분청사기는 고려 말의 상감청자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꽃무늬 도장을 눌러 찍는 인화문 분청사기가 등장하여 왕실과 관청의 그릇으로 사용하게 된다그러다가 15세기 후반에는 명나라에서 질 좋은 백자가 들어오자 왕실에서는 다소 칙칙해 보이는 분청사기보다 맑고 깨끗한 백자를 선호하게 된다그래서 경기도 광주에 백자의 관영 사기공장을 세우고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자기를 생산하게 되었다리고 분청사기는 주로 지방의 민요가 담당하게 됨으로써 더욱 서민적인 요구를 반영하게 된다.

귀족을 위한 그릇에서 서민을 위한 그릇으로 용도가 변하자 분청사기는 더욱 소박하고 자유분방해졌고격식에서 벗어난 즉흥적이고 대범한 표현이 등장하게 된다못과 같이 날카로운 도구로 선을 긋는 음각 기법이나 무늬를 그려 넣은 후 무늬 이외의 백토를 긁어내는 박지(剝地)기법산화철 같은 철분이 많은 안료로 그림을 그려 넣는 철화기법이 등장하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15세기 후반에는 백자와 흡사한 귀얄 분청사기가 만들어지는데귀얄기법은 백토를 풀비(귀얄)로 적셔서 그릇 표면에 일필로 그어 빠른 운동감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표현주의의 붓질이 연상된다또 덤벙 기법은 그릇을 백토물에 담갔다가 꺼내 거의 백자와 같이 하얗게 만드는 방법이다. 15세기 중엽 세종 때 절정을 이룬 분청사기는 16세기 말 임진왜란이 일어나 수백 명의 도공이 일본으로 붙잡혀 간 이후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 관요에서 만든 것과 민요에서 만든 것의 수준 차이가 크지만조선의 경우에는 차이가 거의 없다야나기 무네요시는 이것이 소재와 유약가마의 구조나 굽는 방법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며실용성 중시하여 불필요한 과잉장식을 지양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그는 조선에서 관요의 병폐를 피할 수 있게 된 점을 세계 도예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흥미로운 예라고 보았다.【주석1】

분청사기는 처음에 태토에 잡물과 철분의 함유가 많아 흑회색을 띠었으나 차츰 정선된 회청색을 띠게 된다분청사기의 태토는 청자보다 까다롭지 않고 다양한 흙이 사용되지만고려청자보다 강도가 약하고철분 성분으로 인해 까무잡잡하고 누런색을 띤다유약은 철분 성분이 적은 투명유를 사용하는데주로 감나무·소나무·볏짚 등의 재와 장석 외에 석회석과 점토를 조합하여 사용했다불의 온도는 청자보다 100도에서 150도 정도 낮은 1,100도에서 1,150도 정도로 하여 청자보다 부드럽고 온화한 느낌을 주었다.

가마의 소성 방법은 비교적 자유롭지만산화염을 주로 사용하는 일본 도자기나 중국의 도자기와 달리 주로 환원염이 많은 점이 특징이다완전 연소된 맑고 강한 불꽃으로 굽는 산화염과 달리 환원염은 불완전 연소의 화력을 사용하기에 차분하게 가라앉은 푸른 빛을 낸다중국 명나라 도자기들은 대개 산화염으로 높은 온도에서 굽기 때문에 맑고 단단해 보이고 날카로운 느낌이 난다이에 비해 분청사기는 환원염이나 환원염과 산화염의 중간 단계인 중성염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중성염은 불에 구애받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다.

이렇게 만들어진 분청사기는 일본 도자기나 중국 도자기처럼 사람을 놀라게 하는 인위적 기교나 현란한 색채가 없어서 소박하고 온화한 느낌이 들게 되었다또 청자나 백자보다 흙의 선택이나 굽는 과정에서 제약이 적고작품의 성격에 불을 유동적으로 맞출 수 있어서 도식화되지 않고 자유분방한 표현이 가능하다청자는 흙을 감추면서 비취색의 고고함을 드러내지만분청사기는 흙의 물성을 드러내고 문양도 자유롭기에 표현적인 현대적 감성이 드러날 수 있었다화려하고 세련된 청자와 절제되고 고고한 백자 사이에서 분청사기는 무기교의 자연스러움과 소박한 표현으로 현대적 미감을 성취한 것이다.

분청사기의 명칭은 백토로 마치 화장하듯이 분장을 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조선 시대에는 이를 부르는 명칭이 없었다일본인들은 도자기의 표면에 귀얄로 흰색 화장토를 거칠게 바른 도자기를 미시마(三島)’ 혹은 미시마데(三島手)라고 불렀다미시마라는 명칭이 어떻게 불려졌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19세기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다완은 고려 가마의 것이 상품인데 삼도수(三島手미시마데)라고 불리는 것은 견고하고세밀한 회문(繪文)이 삼도 달력을 닮아 그런 이름이 붙었다.라고 나와 있다야나기 무네요시는 상감의 무늬가 미시마레키라는 달력의 문자와 유사하기에 레키데(曆手)라고도 부른다고 했다.【주석2】 또 남해에 있는 거제도와 그 주위의 섬들을 일본인들은 미시마라 불렀고그 섬들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갔기 때문에 미시마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다.

미시마라는 명칭은 그릇의 특징에 따른 명칭이 아니고일본식 이름이기에 우리말의 적절한 명칭이 필요했다그래서 1941년 미술사학자 우현 고유섭이 <조광(朝光)>에 발표한 논고 「고려청자와 이조백자」에서 미시마 대신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라고 부를 것을 제안했고,【주석3】 이를 줄여서 분청사기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그럼으로써 분청사기는 청자와 백자 사이의 과도기 양식이 아니라 독립된 장르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고유섭의 제자로서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최순우는 분청사기는 대담한 과장대담한 생략대담한 왜곡이 그 특징으로 이것은 근대미술의 세계와도 상통한다.라고 보았다그는 또 분청사기는 무한한 해석이 가능한 추상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어서 현대적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보였다.【주석4】 그러나 지금까지 분청사기에 관한 연구는 주로 양식과 기법적인 것에 치우쳐 있었다따라서 미학적인 관점에서 분청사기와 불교의 선종과의 관계를 고찰하고현대 표현주의 미학과의 관련성을 차례로 살펴볼 것이다.

 

2. 분청사기의 미학과 현대미술과의 관계

 불교의 선종과의 관계

자연의 형상에서 그릇의 형태를 착안한 상형청자가 구상적이고 조각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면이에 비해서 정교하게 다듬지 않아 질박해 보이는 분청사기는 보다 추상적이고 회화적인 특징이 강하게 나타난다그것은 청자의 기술적 퇴보가 아니라 기교보다도 천진한 서민들의 심성을 반영한 새로운 미학의 소산으로 보아야 한다그런 점에서 분청사기는 인간의 인위성보다 본래 면목의 타고난 내면의 본성을 통해 해탈에 이르려는 불교의 선종과 미학적으로 깊은 관련이 있다.

선종은 교종처럼 경전의 이해를 통해 성불하는 것이 아니라 참선이나 화두를 통해 곧바로 자신의 본성에 도달하는 방식을 취한다그래서 수행법이 교종처럼 현학적으로 지식을 배워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불필요한 집착과 망상을 비워서 곧바로 자기 본성에 이르도록 하는 방식이다한국에서 선종은 신라 시대에 들어와 호족들과 대중에게 큰 인기를 얻었으며고려 시대 최씨 무신 집권기에 현학적인 지식을 배척한 무인들에게도 큰 호응을 받았다그래서 무신 정권기를 지배한 최충헌은 기존 세력을 척결하고자 교종을 끌어내고 선종 중심으로 교단을 개혁했다이후 지눌(1158-1210)에 의해 세워진 조계종은 타락한 불교계를 정화하고자 선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하였다고려 말에 등장한 분청사기는 사회적으로 확산한 선종의 전파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선종은 복잡한 수행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하고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승불교의 한 흐름이다그래서 피안의 세계를 동경한 소승불교와 달리 일상의 노동도 수행의 일종이라고 여기는 생활 중심의 종교여서 대중들에게 파고들 수 있었다엄격한 형식을 중시하는 교종은 세련된 청자에 부합한다면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본성의 자유로움을 중시하는 선종은 분청사기의 미학과 곧바로 통하는 것이다.

대승불교에 심취했던 야나기 무네요시는 미시마(분청사기)가 가난한 승려들이 생계를 위해 만든 것이어서 그런지 어딘지 모르게 정적이 감도는 선취(禪趣)가 있다【주석5】라고 본 것도 그러한 맥락일 것이다그는 인위적인 손길을 최소화하고세부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자연과 인공의 솜씨를 절묘하게 섞어 자연스러운 소박미의 극치를 보여준 한국 도자기에서 타락한 현대미술이 나아갈 길을 발견했다근대의 작품들이 보이는 놀라운 타락은 쓸데없이 기교에 집착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 야나기 무네요시는 자연을 떠난 작위는 아름다움의 말살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다.【주석6】 또 일본이나 중국의 도자기는 후대로 올수록 기교가 더해져 장식적이고 화려함으로 나아갔지만예외적으로 오직 조선의 도자기는 오히려 기교를 멀리하고 단순한 형태에 분방한 필치로 놀라운 무늬를 그렸다고 보았다그는 이것이 위대한 예술의 법칙인 자연에의 귀의이며이것이야말로 예술이 인류에게 주는 혜택이라고 주장했다.【주석7】

한국의 분청사기의 미학은 이처럼 기교를 멀리하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무심의 경지를 추구한 선종의 정신에 닿아 있다선종은 이성보다 직관이 발달한 한국인의 기질에 맞게 변형된 불교이며분청사기 역시 이데올로기에 물들지 않는 서민들의 본성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이상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이러한 분청사기의 미학은 기존의 형식과 격식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는 점에서 아방가르드적인 성격이 있지만서양의 자극적이고 파괴적인 아방가르드 미술과 달리인간 본성의 회복을 통한 인격 수양이라는 동양 미학 본래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현대 표현주의 미술과의 관계

서양에서 20세기 현대미술의 한 흐름으로 등장한 표현주의는 시각적 재현에서 벗어나 작가의 주관적 감정표현과 매체의 물성을 중시했다고전주의 미술에서 매체는 현실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수단에 불과했으나 현대미술은 점차 매체의 특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나아갔다미국의 모더니즘 미술평론가인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아방가르드 회화의 역사는 매체의 저항에 점진적으로 굴복해간 역사라고 말한 것도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이다.

분청사기는 도자기 중에서 흙이라는 매체의 특성이 잘 드러나고굽는 과정이 까다롭지 않고 작품에 따라 불을 유동적으로 조정할 수가 있어서 우연성이 개입될 여지가 많다그래서 그릇의 문양이 자유롭고 대범한 표현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 표현주의 미술과 통한다특히 판에 박힌 기법을 따르지 않는 즉흥적인 문양은 표현주의 회화의 드로잉을 보는 듯하다.

이러한 표현은 욕심 없이 어린이 같은 천진한 상태에서 그어진 것이다어린이들은 자신의 느낌과 상상에 의존하여 그리기에 기술적으로 미숙해 보이지만표현이 진솔하고 생명력이 있다이러한 상태는 관습적 전통에서 벗어나 자신의 개성을 표현해야 하는 현대 작가들이 도달하고 싶은 경지였다그래서 마티스는 예술가는 어린이의 눈으로써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라고 했고피카소는 모든 아이는 예술가다나는 어린아이처럼 그리는 데 80년이 걸렸다.라고 말했다폴 클레 역시 예술의 궁극적인 목적을 나는 갓난아이가 되어 원초적인 상태에 도달해보고 싶다라고 말했다.

표현주의 미학을 주창한 이탈리아 미학자 크로체는 예술은 직관을 통한 인식행위이며 직관은 곧 표현이어야 한다.라고 말했고영국의 철학자 콜링우드도 예술은 예술가의 개별적인 체험에서 나오는 유일무이한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이처럼 내적 감정을 직관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눈이 아니라 마음의 집중해야 하고연속으로 변하는 마음의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즉흥적인 표현이 불가피한 것이다표현주의 화가 칸딘스키는 즉흥을 무의식적인 세계에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상황의 전개라고 정의하고그것이 영혼을 깨우고 가슴을 울리게 한다고 말했다이는 눈에 의한 재현이 아니라 정신의 내적 필연성에 주목한 것이다.

이처럼 서양에서 20세기 와서야 주목하는 표현주의 미학과 양식이 15세기 분청사기에서 서슴없이 나타난다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무심히 그어진 분청사기의 무심한 선들은 비록 작은 그릇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지만미학적으로 표현주의적 감성으로 해석하기에 부족함이 없다특히 거칠고 질박한 표면에 빠른 속도의 운동감이 느껴지는 대범한 귀얄기법은 표현주의 회화의 대담한 붓질을 연상하게 하고음각 기법이나 철화기법으로 문양을 무심하게 그린 즉흥적이고 자유분방한 선묘는 현대 작가들의 낙서화를 보는 듯하다그리고 일정한 모양을 도장처럼 찍어서 수없이 반복하는 인화문 분청사기는 현대 추상회화를 보는 듯하다.

정치적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운 분청사기의 장인들은 천진한 상태에서 무심하게 제작했기에 현대 작가들의 자동기술법과 비슷하게 그리는 행위와 그려지는 행위를 넘나들며 무의식적인 문양을 만들 수 있었다이처럼 서민들의 본성을 중시한 예술은 조선 시대의 천진한 민화에서도 이러한 현대적 미감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의 현대화가 김환기의 회화는 한국 도자기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그는 단순하면서도 미묘하고고요함 속에 움직임이 느껴지는그리고 차가운 흙에서 따사로운 온도는 느껴지는 한국도자기에서 미적 이상을 발견하고 그것을 현대회화로 승화시켰다. 1970년대 뉴욕에서 그린 그의 <시리즈는 작은 네모 안에 무수히 점을 찍어나가는 방식을 통해 고향에 그리움을 표현한 것인데그 양식이 분청사기의 인화문과 유사하다이것은 양식의 유사성뿐만 인간 본성의 고요한 울림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미학적으로 통하는 바가 있다.

이처럼 분청사기에서 현대 작가로 이어지는 추상화된 표현들은 서양의 표현주의에서처럼 사회적으로 억압된 작가의 마음을 격정적으로 분출시킨 것과는 다르다이보다는 무심한 경지에서 자연과 호흡하며 율려의 리듬에 몸을 맡겨 인간과 자연의 접화와 조화를 시도하려는 한국인의 마음이 담겨 있다.

 

 3. 윤광조 도예의 특징과 미학

 

실용성과 자율성의 조화

오늘날 현대 도예는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으로 실용성에서 완전히 벗어나 도조가 됨으로써 순수미술로 변해버렸다공예로서의 쓰임을 포기하고 매체인 흙의 물성이 강조됨으로써 이제 조각과 경쟁하게 된 것이다이로써 도예는 현대성을 성취할 수 있었지만한편으로 쓰임과 실용성이라는 도예의 고유한 정체성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했다현대미술의 전체적인 흐름이 미술의 자율성으로 방향을 잡으면서 현실에서 독립하여 추상화로 나아갔지만서양의 표현주의 도예는 도예의 자율성을 단지 흙이라는 매체로만 한정함으로써 쓰임이라는 도예의 중요한 본성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윤광조는 도조로 불리게 된 이러한 현대 도예의 흐름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고무언가를 담을 수 있도록 공간을 두어 도자기의 속성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그것은 ()과 미()가 더불어 조화를 이뤄야 하고쓰임을 배제한 아름다움이라든가 아름다움을 떠난 쓰임만의 것이란 있을 수 없다.라고 생각해 온 자신의 평소 지론을 실천한 것이다.

1980년대 말 현대성을 고민할 때 윤광조 역시 동일한 딜레마에 봉착했다그는 전통 분청사기의 현대화를 고민하다가 물레를 벗어던지고 새로운 조형 실험들을 몰두하게 된다이 시기에 그는 작품 석고틀을 이용한 실험을 시도했다그러자 도조처럼 되어 현대적으로 보였지만그릇에 구멍이 없어지면서 도예 특유의 실용성도 사라졌다그리고 빈 공간이 없다 보니 어딘가 답답하게 느껴졌다이러한 한계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작품 손으로 주물러 만든 넓은 점토판 2개를 붙여서 타원형의 형태를 만들고윗면에 구멍을 두었다.

이러한 형태는 3개의 판을 붙여 삼각의 형태나 4각의 형태로 다양하게 변주함으로써 비로소 윤광조 양식이라고 부를 만한 독자성을 확보하게 된다그럼으로써 전통 도자기처럼 구체적인 실용성에서는 벗어났지만여전히 공간을 두어 적당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담을 수 있게 하였다이것은 직접 무엇을 담지 않더라도 무언가를 담을 수 있다는 심리적 기능의 역할과 잠재적 열린 공간이 됨으로써 도조와의 차별화된 공예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다.

이러한 아슬아슬한 경계에 섦으로써 그는 서구 모더니스트들이 추구한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 전통 공예의 한계인 삶을 위한 예술에도 매몰되지 않았다이것은 자율적인 예술과 생활적인 공예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 기울지 않는 중도의 길이 되었다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실용성과 예술성전통과 현대의 양극단을 어느 하나 희생시킴 없이 조화시켰다이는 전통 도예의 현대화에 있어서 하나의 길을 제시해주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대적 감각의 자연적 표현주의

1990년대 이후에 등장하는 윤광조 도예의 전형적인 특징은 물레를 쓰지 않고 직접 흙을 주물러서 판 작업이나 코일링 작업으로 만든 것이다도예에서 물레는 둥근 형태를 만들기 위한 도구인데물레를 포기한다는 것은 곧 숙련된 기술을 포기하는 것이고이는 새로운 양식을 가능하게 하였다직접 손으로 빚어 만들기 때문에 상투적인 그릇의 기형에서 벗어나 거칠고 질박한 손자국이 남아 있는 넓은 면이 만들어졌다여기에 화장토를 입히고 손이나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지푸라기나무 조각못 등으로 문양을 새겨 넣었다그가 그리는 문양들은 대부분 산이나 강바람파도 등 그가 주로 일상에서 보고 느낀 자연의 이미지들이다이러한 작품은 물레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표면이 매끄럽지는 않지만거친 손자국이 그대로 남아 생긴 걸쭉한 여운과 자유분방한 문양 표현은 분청사기의 전통을 더욱 극대화하여 주었다.

전통 분청사기에도 표현주의적인 요소가 다분히 있었으나그는 물레를 벗어던짐으로써 더욱 표현주의적인 요소가 강해졌다서양의 표현주의가 삶에서 억압된 인간의 주관적인 감정을 표출하는 데 주력했다면윤광조 작품의 자유분방한 표현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의 기운을 몸으로 느끼고 자연의 리듬과 자신의 감흥을 종합한 결과이다그래서 서양의 표현주의는 인간의 감정을 담은 인간 중심적인 표현이라면윤광조의 표현주의는 자연에 취해서 나온다는 것이다.

인간의 감정도 결국에는 에너지이고 자연의 기운도 에너지이지만그 질적인 측면에서는 전적으로 차이가 있다인간의 감정 에너지는 대부분 현실에서 타자에 의해 억압되어 무의식에 저장된 정화되지 않은 에너지이다서양 표현주의가 대부분 격정적인 감정표현으로 흐른 것은 이 때문이다이것은 프로이트가 예술의 효과에 대해 말한 것처럼 억압된 무의식을 해소하여 줌으로써 정신적인 치유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의 기운은 무의식에 갇힌 부패한 에너지가 아니라 기운 생동하는 리듬과 부드러운 율려의 파동이 넘쳐 흐르는 순수한 에너지다윤광조는 서양의 표현주의에서처럼 자신의 감정을 분출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감정을 비우고 자연의 기운에 공명하고자 한다이것은 서구의 표현주의처럼 치유의 행위라기보다도 수행에 가까운 행위이다따라서 이러한 수행적인 방식의 표현주의를 서구의 감정 분출의 표현주의와 구분하기 위해서 자연적 표현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자연적 표현주의는 윤광조 도예의 현대적 특징이며여기에는 한국인 특유의 자연 친화적인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다일찍이 서양의 고전 미술은 자연을 불완전한 것으로 간주하고 합리적 이성에 따라 황금비례와 안정적으로 계산된 구도를 추구했다이처럼 자연의 상태보다 인위적으로 정제된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전통은 중국이나 일본 같은 아시아 국가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그러나 유독 한국인들은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미적 쾌감을 느끼고 소박한 대교약졸의 자연미를 추구했다자연스러움은 도자기뿐만 아니라 한국미술 전반에 흐르는 특징이며여기에는 소박한 한국인의 미의식이 담겨 있다.

자연과 인간을 대립적으로 보지 않고 친화적으로 교류하고 공명하여 제3의 자연물과 같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한국 특유의 자연적 표현주의의 요체다과학적 유물론에 입각한 서구인들의 관념 속에 있는 자연은 눈에 보이는 결과로서 실증적인 자연이지만한국인들은 자연을 연속적으로 순환하고 변하는 생명의 근원으로 간주한다그러므로 한국미술에서 객체 중심의 자연주의와 주체 중심의 표현주의는 서구 미술에서처럼 명료하게 분리되지 않는다주객이 하나 되는 천인묘합(天人妙合)의 상태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대교약졸의 소박미

윤광조에게 예술은 매일 산속에서 접하는 자연과 직접 교류하며 자신의 집착과 욕심을 비워나가는 수행과 같다그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흘려보낼 수 있는 빈 마음깨끗한 마음이 엄격하고 자유스럽게 움직일 때 만이 창작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라고 말한다그가 말하는 텅 비고 깨끗한 마음이란 집착 없는 본래면목의 상태이다이는 지식을 채워서 가능한 세계가 아니라 비워야 도달할 수 있는 세계다마음의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맑은 마음의 상태에서 무심히 나오는 소박한 아름다움이야말로 그가 예술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경지다.

소박하다는 것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가공하기 이전의 순수한 본래의 모습이다이 상태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다도자기가 흙의 상태에서는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자유로운 상태지만특별한 용도의 그릇으로 만들어지면 그때부터 자유가 제약을 받게 된다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이 어떤 특정한 관념으로 굳어지면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이다따라서 윤광조에게 연속적으로 변하는 자연은 자신의 굳어진 고정관념을 흙 반죽하듯이 주물러 말랑말항한 상태로 만들어 주는 대상이다그래서 무엇이든지 가능한 자유로워진 상태가 바로 소박의 상태이다.

자연은 세련된 기교로 고정시켜 놓으려는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미완이고 서툴러 보여도끝없이 변하기 때문에 유한하지 않고 무한한 것이다그래서 노자는 대교약졸(大巧若拙)’, 즉 큰 기교는 서툴러 보인다라고 했다.【주석8】 세련되어 보이는 인간의 기교는 붙잡기 때문에 유한하지만서툴러 보이는 자연의 집착하고 붙잡지 않기에 영원한 것이다장자도 소박하면 천하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없다.【주석9】고 하여 소박미를 인간이 도달해야 할 최고의 아름다움으로 삼았다.

예술에서 인간의 솜씨가 너무 능숙해져 기교가 지나치면 마음이 실리지 않고 관습에 얽매여 추하게 전락하고 만다자연은 그러한 기교를 부리지 않기에 언제나 새롭고 미추의 분별에 빠지지 않는다분별이 없기에 미와 상대되는 추함도 없는 것이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이를 무기교의 기교라고 말했다이는 달리 말하면 자연을 닮으려는 기교다이것은 인위적인 기교보다 훨씬 어렵고 고차원적인 경지이다윤광조의 작품은 인위적 기교나 패턴에 의존하지 않고 자연의 생동하는 변화와 기운을 취하고 배설하듯이 나온 덕택에 소박미를 성취할 수 있었다이처럼 몸에 체화된 자연을 표현하는 방식은 동양의 오랜 전통이다문인화는 원래 사실적인 모방보다 사의(寫意)를 추구했다이것은 눈에 의한 재현이 아니라 가슴에 새겨진 자연의 흉중구학(胸中丘壑)의 표현이다윤광조의 예술적 목표는 자신의 기술이 자연을 지배하지 않고자연이 자신의 의지에 협조하게 하여 제3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한국 특유의 소박미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미완성처럼 보이는 한국의 예술품을 기술 부족으로 간주하기도 한다그러나 그것은 기교의 부족이 아니라 무기교의 기교이고무위자연의 소박미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한국인들은 집을 지을 때 건물 자체보다도 풍수지리를 통해 자연과 어우러질 수 있는 를 중요시하고음식을 만들 때도 인공적이고 자극적인 맛을 최소화하고 발효를 통해 자연을 끌어들인다특히 도예는 인간의 의지와 기교만으로는 되지 않고예민한 감각을 통해 재료와 소통하고 인내를 가지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이러한 도자예술의 속성이 소박한 한국인의 심성과 만나 독창적인 도자예술을 꽃피울 수 있었고그것이 윤광조의 현대 도예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4. 윤광조 작품의 국제적 보편성

 

이처럼 윤광조 작품에 담긴 한국 특유의 소박미가 과연 국제적인 보편성을 얻을 수 있을까아직 해외에서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지만그의 해외전 때 언론에 실린 평문을 보면 외국인들의 평가와 반응을 짐작할 수 있다.

2003년 필라델피아미술관에서 초대전을 열었을 때 평문을 쓴 본 에드워드 J. 소잔스키는 현대 도예는 과도한 장식과 복잡함이 만연하다그래서인지 한국의 도예가 윤광조의 기품 있고 차분한자연 그대로의 그릇은 관람객의 감각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라고 평했다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은 서구의 현대 도예는 기능성을 버리고 격정적 내면을 과장된 몸짓으로 충격 자체에 몰두했다스잔스키는 이러한 현란한 기교와 충격에만 익숙해 있던 서구인들에게 자연스럽고 편안한 윤광조 작품이 오히려 신선한 충격이라고 말한 것이다.

2005년 미국 시애틀뮤지엄에서 개인전을 열었을 때 패트릭 쿨리컨은 윤광조의 작업은 종교적 발견의 과정인 동시에 일찍이 사라졌던 옛 도예 기법을 되살리는 데 일조했다는 점에서 한국 예술의 재발견이다.라고 평했다그가 종교적 발견의 과정이라고 표현한 것은윤광조의 작품이 단순히 기술을 중시하는 예술의 차원을 뛰어넘어 자연을 통해 자신을 비우는 수행적 성격이 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버트 워서맨은 <아트뷰스>지에서 윤광조는 매끈한 도자기 특유의 세련미를 비껴가는 대신 심미안을 가진 관객에게 풍부하고 견고한 흙의 느낌과 심오한 정신적 반향으로 살아 숨 쉬게 한다.고 평했다그는 인위적인 세련미를 피하는 윤광조 특유의 자연스러운 표현에 주목했다그는 그것이 안목이 있는 사람에게 심오한 정신적 반향을 불러일으킨다고 했는데그가 말한 정신적 반향이라는 것은 보는 사람을 판단중지시켜 무심하게 만든다는 의미일 것이다이어서 그는 윤광조의 작품을 강렬하게 반응할 준비가 된 이들에게하늘의 별에도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선사하고그 소망의 충족이 완전히 현실적인 가능성으로 다가온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한 하늘의 별에 닿을 수 있을 거 같은 기분이란 낭만주의적 초월성이 느껴진다는 의미다이러한 기분은 일반적으로 술에 취했을 때나 환각 상태에서 느껴지는 황홀감이다이러한 정서를 멀쩡한 상태에서 작품만 보고 느껴진다는 것은 최고의 찬사다윤광조에게 초월은 현실을 버리는 게 아니라가장 평범한 일상의 순간에 온 감각으로 몰입하여 자연과 공명함으로써 에고를 잊어버리는 무아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이것은 성속일여(聖俗一如)의 경지이며일상을 통한 일상의 초월이다이처럼 수행적이고 종교적인 그의 예술세계를 감성이 다른 서구인들의 눈에 간파되고 있는 점은 윤광조의 조형 언어가 국제적인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증거다그 결과 그의 작품은 국내보다 오히려 해외에 널리 인정받고 있는 현실이다

필라델피아미술관(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미국), 샌프란시스코미술관(미국), 시애틀미술관(미국), 시카고미술관(미국), 스미스소니언 자연사박물관(미국), 대영박물관(영국), 빅토리아국립미술관(호주), NSW미술관(호주), 마리몽로얄미술관(벨기에등 해외의 주요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구매했다는 것은 이러한 윤광조의 작품세계가 국제적인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음을 입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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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조 도예의 시기별 작품해설

 

최광진(미술학 박사)

 

 

1.1970년대분청사기 전통의 계승

 

1960년대 윤광조는 도예가의 길을 선택하고 분청사기를 통해 전통을 계승하는 시기다. 1964년 서울 보성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어머니의 권유로 연세대 경제학과를 지원했으나 낙방하고 재수를 결심한다진로를 고민하던 중 그는 셋째 형의 조언으로 1965년 홍익대학교 공예학과에 입학함으로써 도예와 운명적인 인연을 맺게 된다.

당시 한국 도예계는 현대미술에 위축되고 자생적 근대화에 실패하면서 침체를 겪고 있었다한때 도자 강국으로 일본에 도자 문화를 전수해주었지만오히려 도자 강국으로 성장한 일본 도예를 맹목적으로 모방하고 있었다또 전통 도예도 고려청자나 조선백자가 주류를 이루고 있던 시절이었다이런 분위기에서 윤광조는 1966년 무렵 종로구 청진동의 외국 서적 전문점에서 우연히 일본에서 출간한 도기 전집 시리즈 미시마(三島)를 접하게 된다. ‘미시마는 일본인들이 분청사기를 부른 명칭이다이때 자유분방한 분청사기의 현대적 미감에 매료된 그는 그때부터 줄곧 분청사기 공부에 매진했다.

분청사기와의 운명적 인연은 2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한 후에도 이어졌다그는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 근무하게 되는데연락병으로 덕수궁에 있던 국립중앙박물관에 가서 최순우 당시 미술과장을 만나게 된 것이다그는 육군사관학교 도서관에서 미시마』 책을 빌려 읽으며 궁금한 것을 최순우 선생을 뵐 때 물어보곤 하였다후에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된 최순우 선생은 젊은 학생이 전통에 관심을 두고 질문하는 것을 기특하게 여기며 여러 조언을 해주었다특히 분청사기에 관심을 보이는 윤광조에게 우리 발밑에 보물이 있는데많은 사람들이 발밑을 보지 않고 밖에만 보고 있다우리의 미를 공부해야 현대 도예가 싹 틀 수 있다.”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군에서 제대한 1970년대는 본격적으로 옛 분청사기의 기법을 익히고 계승하는 시기다이 시기 작품들은 물레 성형을 이용하여 둥근 그릇의 형태를 유지하였고문양은 주로 인화문이나 상감기법을 사용하였다인화문은 국화나 연꽃 등 각종 꽃문양이나 장식문양 등을 도장에 새겨 그릇에 꾹 눌러서 그 음각된 부분에 상감기법처럼 백토를 채워서 표현하는 방식이다또 어떤 작품에는 화장토를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게 하는 흘림 기법을 사용하기도 하고분장한 곳을 다시 굵은 선으로 긁어내는 조화문이나 백상감으로 글씨를 새기는 방식들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1973년 졸업과 동시에 출품한 제7회 <동아공예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함으로써 기량을 인정받게 된다그때 출품한 문방구 작품들은 15세기 <분청사기조화선조문편병>의 추상적인 선묘에서 영향을 받아 즉흥적인 선으로 현대적인 감각을 보여줌으로써 가능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일찍이 도예가로서 역량을 인정받은 그는 1974년 한국문화공보부 추천으로 일본 당진에 유학을 떠나게 된다그의 정신적 스승인 최순우 선생은 일본 도자기는 과거 백제와 조선 도공들이 건너가서 정착시킨 것이다거기에 잘못 물들면 1년 배운 때를 벗겨 내려면 10년이 걸리니 특별히 조심해라그러나 일본인들의 가마 운영 방법과 자세는 배울만하니 그것만 배워 오라하는 조언을 해 주었다.

1973년에 일본 정부는 큐슈 가라츠 지역에 일본 도예와 일본 문화를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외국의 젊은 도예가들을 초청하여 숙식과 연구비까지 제공해주며 자국의 예술을 홍보하고 있었다그곳에는 일본 도예가뿐만이 아니라 독일프랑스미국 등지에서 작가들이 모여 전부 일본식 도자기를 만들고 있었다심지어 일부 유학생들은 아예 일본의 옷과 신발을 신고 다니며 작업을 하기도 했다.

윤광조 역시 알게 모르게 그러한 분위기에 젖어 일본식 도예로 변하고 있었다당시 그는 국내 한 기획전이 작품을 출품하였는데그 작품을 본 최순우 선생은 편지로 너무 빨리 일본화되고 있다라는 우려의 마음을 전했다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윤광조는 불현듯 내가 자란 땅에서 내 흙으로 내 것을 만들어야겠다라는 자각으로 3년 계획으로 떠난 일본 유학 생활을 접고 1년 만에 돌아오게 된다짧은 일본 유학 생활에서 그는 분청사기야말로 일본 도예가들이 흉내 낼 수 없는 한국적인 도자기 임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귀국 후 윤광조는 우연히 알게 된 시인 김광균의 권유로 1976년에 신세계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이 전시에서 그는 분청사기의 다양한 기법들이 선보였는데수반항아리문방구제기(), 화분 등 그간의 작업을 총정리한 전시였다이 작품들은 전통 분청사기의 형태과 기법을 계승하면서도 전통에 맹종하지 않고 다양한 방법들을 시도하였다최순우 선생은 전시 서문에서 윤광조의 도예를 보면서 듬직한 양감과 아첨 없는 장식 같은 면에서 자못 한국인다운 소탈의 아름다움을 대견하다고 느꼈다.”라고 평했다.

이 무렵 윤광조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연은 장욱진 선생과 만남이다당시 원로 화가였던 장욱진 선생은 우연히 현대화랑 기획전에 출품된 윤광조의 작품을 보고 관심을 보이자 현대화랑의 박명자 사장이 최순우 선생에게 자문을 얻어 <장욱진-윤광조 도화전>(1978)이 열리게 된다당시 장르 간의 경계가 분명하고 선후배의 위계질서가 엄격했던 시기에 이러한 기획은 매우 모험적이고 신선한 시도였다윤광조의 도자기 위에 장욱진 선생이 그림을 그렸는데분청사기의 소박한 기형과 장욱진 특유의 단순하고 밀도 있는 드로잉이 훌륭한 조화를 이루었다이 작품들은 이례적으로 개막식 날 30분 만에 매진되었고한국미술계가 윤광조라는 젊은 도예가를 주목하는 계기가 되었다장욱진과 윤광조는 장르와 연배를 다르지만모두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세속을 떠나 자연에 은거하며 자연에서 작업의 모티브를 얻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이 전시회를 계기로 윤광조는 젊은 도예가로서는 이례적으로 현대화랑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열 수 있었다이때 그는 그릇의 표면이 마르기 전에 태토 덩어리를 덧붙여 화장토를 바르고 건조 시킨 후 튀어나온 부분을 긁어내는 기법을 실험했다또 기면에 스케치를 한 후 흙 띠를 바르고 마른 다음 긁어내는 기법과 형태를 만들어서 굳기 전에 손으로 기면을 무작위로 찔러 화장토를 큰 붓으로 바르는 기법태토와 화장토를 섞어 기면에 덧붙이는 기법들을 시도했다특히 그릇 전면에 귀얄로 백토를 칠해 분장한 후 끝이 뾰쪽한 도구로 선각하는 조화문의 방식에서 대범한 표현을 하게 된다.

1970년대 작품들은 대부분 물레를 사용하여 둥근 형태이지만사각의 형태가 필요할 경우 흙을 가늘고 둥글게 가래를 만들어 돌려 쌓는 타래쌓기 기법을 사용하였다. 1979년 통인화랑에서 윤광조 생활용기전을 열었는데당시 불교와의 인연을 암시하는 <()>, <백팔번뇌(百八煩惱)> 같은 제목을 붙였다또 <산중생활>, <음율(音律)>, <조화(調和)>, <지월(池月)>, <()> 등 자연의 현상을 환기하는 제목들을 붙이기 시작했다그러나 이때까지의 작업은 주로 분청사기의 정신과 기법을 탐구하고 배우는 학습기였다.

1970년대 불모지나 다름없는 한국 도예계에 혜성처럼 나타난 그의 작가로서의 출발은 성공적이었다이에 힘입어 그는 전업 작가가 되어 오직 작업에만 몰두하겠다는 일념으로 당시 신촌에 있던 작업실을 정리하고 1979년 경기도 광주로 작업실을 옮겼다평소 그리워하던 자연 속에 손수 한옥을 짓고 거쳐를 마련한 것이다경기도 광주의 지월리는 당시 차도 들어가기 힘든 산동네에 위치하고 있었다인적이 드문 그곳에 그는 작업실과 석유가마를 마련하고 전업작가로서 용기 있는 외길 인생을 시작한 것이다그의 집은 앞에 맑은 곤지암천이 굽이쳐 흐르고 뒤로는 나지막한 산이 감싼 명당자리였다.

이곳을 방문한 최순우 선생은 즉석에서 급월당(汲月堂)이란 당호를 지어주었고그 당호에 따라 그는 가마를 급월요(汲月窯)라 불렀다급월이란 달을 길어 올린다라는 의미로 최순우 선생의 스승인 우현 고유섭 선생의 별호였다미술사학자 고유섭은 분청을 가리켜 민중의 순재대담(純材大膽)한 활갯짓이라 보고이러한 도자기를 분청회청사기라고 이름 붙인 분이다이러한 인연이 그의 제자인 최순우 선생을 통해 윤광조에게 전해진 것이다그는 곤지암에서 물속에서 달을 길어 올리는 이백(李伯)처럼 자연 속에 은거하면서 1980년대 작가로서 새로운 꿈을 설계하게 된다.

 

 

2. 1980년대현대성을 위한 모색과 실험

경기도 광주로 작업실을 옮긴 1980년대는 현대성을 위한 실험과 모색의 시기다고독한 전업 작가의 길을 선택한 윤광조는 전통의 현대화라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본질에 대한 보다 심오한 성찰을 하게 된다새로운 창작에 대한 고민을 거듭하던 그는 자유분방한 분청사기가 불교의 선종(禪宗)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원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대학 시절에는 장자의 책을 끼고 다니며 애독했던 그가 이 시기에는 불교의 선종 사상에 심취하게 된 것이다.

선종은 경전과 의례적 형식을 중시하는 교종과 달리 스스로 사색하여 직접 마음의 본성에 도달하려는 불교의 한 종파이다이 같은 선종의 정신을 생활화 하기 위해 그는 참선을 하고차를 달이며 작업을 하였다작업이 풀리지 않을 때는 집 앞에 있는 곤지암천 개울물에 발을 담그고 단소를 불기도 하고스님처럼 목탁을 두드리기도 하였다그러면서 작품의 형태는 더욱 명상적으로 변했으며 제목도 <()>이라는 명제로 즐겨 붙였다이 무렵 불교계의 큰 스승인 법정 스님과 친분을 맺게 된다. 1981년에 광주 남경화랑의 전시회 때 법정 스님은 화랑에 여러 날 나와 보살들에게 작품을 설명해주기도 했다.

자연에서 오직 작품을 팔아 근근이 생활해 오던 그는 1984년 예화랑 개인전을 통해 그동안의 빚을 청산할 수 있었다그러나 그의 마음은 충족함보다는 오히려 허탈감에 휩싸였다그것은 물질적 충족이 그의 진정한 목표가 아니었으며그것이 자신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삶의 번뇌와 밀려오는 고뇌를 견디지 못해 그는 중이 되기로 마음먹고 1984년 겨울에 송광사로 들어갔다.

송광사에서 그는 법정스님으로부터 내려 놓으라라는 의미의 방하착(放下着)’을 화두를 받고 참선에 열중했다무엇을 하겠다는 집착과 강박관념을 내려놓자 어느 정도 마음의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그러나 막상 중이 되기도 쉽지 않았고작업에 대한 미련을 포기할 수 없었다석 달 만에 그는 다시 작업실로 돌아왔지만여전히 작품은 실마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그 무렵 한 스님이 머리로만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절을 해보라라는 조언을 해주었다그래서 이번에는 지리산의 정각사에 들어갔다그리고 스님들이 3천 배도 힘들어하는 절을 4만 배를 올렸다. 12일간 3천 배씩 10일을 하고, 5천 배씩 이틀을 더하고 나니 모든 번뇌가 사라지고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그때 작업에 관한 생각이 떠오르며 물레를 안 돌리면 되잖아하는 영감이 번뜩 스치고 지나갔다이런 산고의 고통을 겪은 후, 80년대 후반은 희망에 찬 새로운 실험과 모색의 시기를 갖게 된다정처 없어 방황하던 그가 선종의 생활화로 자신을 깨우고 심기일전하여 새로운 창작열을 불태우게 된 것이다.

절에서 하산하여 작업실로 돌아온 그는 물레를 버리고 무심한 상태에서 흙을 빚어 그릇의 형태를 만들고 분장을 하고 무늬를 그렸다물레를 너무 능숙하게 다루다 보니 물레를 다루는 기술이 예술을 앞지를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물레를 던져버린 것이다물레를 사용하여 도자기를 만드는 건 그릇의 둥근 형태를 위해 시작된 도예의 오랜 전통이었다그런 물레를 포기한다는 것은 바로 기술적인 숙련도를 애써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고그것은 필연적인 변화를 몰고 왔다세련된 둥근 형태가 사라지고손으로 직접 주물러 만드는 도판 작업과 코일링 작업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 무렵 석고틀을 이용한 작품들도 시도하는데이러한 작품들은 작품에 구멍이 없어 실용성이 제거되고 도조의 성격이 강조되었다이러한 형태는 신선하고 현대성이 느껴졌지만구멍이 없다 보니 왠지 답답하게 느껴졌다그래서 석고틀 작업에 구멍을 뚫는 시도를 하다가 넓적한 점토판 2개의 양쪽 끝을 붙여 납작한 타원형의 형태를 만들었다그러자 빈 공간이 생기면서 숨통이 생겼다.

이러한 실험과 모색의 결과 실용적인 도예의 전통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현대적인 조형성을 성취할 수 있었다이로써 무엇을 담아도 좋을듯한 여유로운 형태와 자연의 품속 같은 편안하고 질박함회화적인 자유분방한 드로잉을 특징으로 하는 윤광조 양식의 탄생을 보게 된다.

 

 

3. 1990년대윤광조 양식의 확립

 

1990년 들어 본격화된 윤광조의 신작들은 물레의 둥근 형태 대신 적점토를 직접 손으로 주물러 판작업이 주류를 이루었다형태들은 넓은 점토판 2개를 붙여 만든 타원형이나 3개를 붙여 삼각기둥의 형태가 많았다특히 삼각기둥의 형태가 많이 나오는데삼각형이 다양한 각도에서 변화가 크고 자유롭기 때문이다그는 이렇게 만든 질박한 표면에 화장토를 입히고 손가락(지두문)이나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지푸라기죽칼못 등으로 드로잉을 하고음각으로 새기거나 흙을 덧붙여 뛰어나오게 하는 돋을무늬 기법을 사용했다둥근 그릇과 달리 평편해진 표면은 회화적인 드로잉을 하기에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이 무렵 그가 주로 그린 드로잉은 산이나 강바람 등 자연의 체취가 느껴지는 이미지들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분청사기의 특징은 흙의 물성과 자유분방함이 보다 강조되면서 현대적인 감각을 느끼게 하였다물레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표면이 매끄럽지는 않지만거친 손자국이 남아 있는 걸쭉한 여운은 정통에서 벗어나 현대적인 감각을 느끼기에 충분했다그리고 타원이나 삼각형혹은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빈 공간에는 특별한 용도를 제한하지는 않았지만무언가를 담을 수 있을 것 같은 심리적 용도를 갖게 한다그럼으로써 전통 도예의 현대성을 추구하면서도 조각적 성격으로 나아가지 않고 도예의 실용성을 조화시키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그리고 전(그릇의 주둥이 부분)의 다양한 변화가 가능하게 됨으로써 무궁무진한 변화가 가능하게 되었다상투적인 그릇의 기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표현주의적인 요소가 강화된 이러한 작품들은 이제 윤광조 양식이라고 부를 만한 독자성을 띠게 된다.

그리고 1990년대 초부터 넓어진 판 위에 반야심경(般若心經)’의 내용을 글씨로 새겨 넣는 <심경(心經)>시리즈 작업을 시작했다반야심경은 현상은 무수한 원인과 조건에 의하여 시시각각으로 변화하기에 변하지 않는 실체란 없고변화하기에 현상으로 나타난다는 불교의 사상을 담고 있다.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示空空卽示色)’으로 귀결되는 반야심경의 공(사상은 허무주의가 아니라 본성의 맑은 마음과 긍정적이고 자유로운 해탈의 상태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윤광조가 추구하는 예술의 경지와 맥을 같이한다그는 마음의 집착이 생겨 힘들 때마다 반야심경의 글자들에 담긴 이러한 내용을 음미하면서 작품을 제작했다이것은 집착과 망상으로 물든 자신의 마음을 정화 시키는 명상적인 수행의 방법이 되었다이후 그는 이렇게 매년 한두 달을 반야심경을 새기고 마음을 정화한 뒤에 비로소 본격적인 작품에 들어가곤 했다.

이즈음 그의 국제적 명성도 높아지는데, 91년 8월에 호주의 시드니 맥쿼리갤러리에서 초대 개인전을 열어 자연과 인간의 자유를 형상화한 분청의 거장이란 호평을 받았다호주의 뉴 사우스 웨일즈 국립미술관은 이때 한국 작가의 작품을 처음으로 구입했다1994년에는 당시 중견 작가로는 이례적으로 호암미술관(현 삼성미술관 리움)의 초대를 받았다. <한국의 미그 현대적 변용전>에 서양화 출신의 오수환한국화 출신의 황창배와 함께 초대된 것이다각 분야에서 한국의 미를 현대적으로 계승한 작가들로 선정된 이 전시회는 윤광조의 신작을 국내 미술계에 소개하는 자리가 되었고이때 출품된 대부분의 작품을 미술관 측에서 구입하였다.

도예가로서는 이례적으로 미술계의 유명인사가 되자 서울에서 멀지 않은 광주의 작업실에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특히 술과 사람을 좋아하는 윤광조는 그들을 거절하기가 어려웠고지인들과 밤새 술을 마시다 보면 작업의 리듬이 깨지곤 했다게다가 그 무렵 한적하던 산골에 갑자기 개발 열풍이 불어 작업실 주변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포장길이 나게 되자 숙박 시설과 음식점들이 들어섰다이러한 변화를 그는 이사의 징조로 받아들였다물이 고임 없이 흘러야 썩지 않듯이 새로운 창작열을 지피기 위해 새로운 장소를 찾아 나섰다.

그는 새로운 작업실을 찾아 전국을 돌며 인적이 없고 개발될 가능성도 없는 곳을 찾아다녔다이렇게 찾은 곳이 신라 천년의 역사가 숨 쉬는 경주였다그는 경주 시내에서 자동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곳을 찾아다니다 안강읍 옥산서원 근처 뒤에 있는 자옥산과 도덕산 자락에 터를 잡게 된다그곳은 당시 인터넷과 핸드폰도 터지지 않는 깊은 산속이었다도저히 사람이 살기 힘들 것 같은 곳에 그는 손수 집을 짓고 지금까지 조수도 없이 홀로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안강으로 옮긴 이후 작품들은 더욱 거칠고 표현적인 특징이 강화되는데이것은 그곳의 주변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광주의 작업실은 산세가 고요하고 편안한 지형이었다면안강의 작업실은 산세가 깊고 바람이 유난히 세서 바람골이라 불리는 곳이다적막한 새벽에는 습기를 머금은 웅장한 산세가 어두운 윤곽을 드러내고 머지않아 강렬한 태양이 자연의 향연을 연다밤이 되면 인공적인 도시의 불빛 대신 달빛과 별빛만이 칠흑 같은 어둠을 비춰주는 낭만적인 그곳에서 그는 하루를 보낸다또 만물이 태동하는 봄의 생기와 여름의 무성함그리고 가을의 화려함과 소박한 겨울의 평온함까지 자연의 생성 소멸의 현장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곳에서 그는 한 해를 보낸다.

그는 해와 달과 바람이 연출하는 풍광과 사계절의 오묘한 변화를 온몸으로 교감하고 대자연의 기운이 오감을 통해 흡수되고 텅 빈 마음에 가득 채워지면 무심히 손을 움직여 흙을 주무르고 문양을 새긴다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에는 그의 무심하고 깨끗한 본성과 자연의 대기와 바람그리고 도덕산의 산세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이러한 작품들은 자연의 기운과 마음의 리듬이 접화되어 탄생시킨 자식 같은 작품이다.

그는 1990년대 후반 안강에 와서 만든 작품들에 <바람골>이라는 제목을 붙였다그만큼 바람골의 새로운 자연환경이 깊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작품의 형태는 더욱 다양해져서 4개의 점토판을 붙여 만든 사각기둥의 형태가 등장하게 된다문양은 더욱 간소화되고 화장토를 귀얄기법으로 대범하게 칠하면서 흘러내리게 하는 흘림 기법을 사용하여 추상표현주의적인 특징이 부각된다.

 

 

4. 2000년대 이후자유로운 변형과 득의의 시기

 

그는 사람을 피해 더욱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지만역설적으로 그의 명성은 더욱 커져 해외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2003년에 세계적인 도예 전문 갤러리인 영국의 베쏭갤러리의 초대전을 연 것을 시작으로 같은 해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에서 동양 작가로서 최초로 초대전을 가졌다그리고 그 전시회는 미국 버밍험미술관(2004)과 시애틀아시아미술관(2005)의 순회전으로 이어지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이 무렵부터 해외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구입하기 시작했다한국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이 2004년 올해의 작가로 윤광조를 선정하고 전시회를 개최하여 현대 도예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한국에서도 탄탄한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

이 무렵 그는 새로운 작업 구상을 위해 태국에 자주 여행을 갔다불교의 나라인 태국에서 사찰을 돌며 새로운 작업을 구상할 때 불현듯 작품의 주제가 떠올랐다그는 전통이 무너지고 중구난방으로 외래문화가 들어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함몰된 오늘날의 시대 상황을 혼돈의 시대로 파악하고 혼돈을 작품의 주제로 삼게 된다.

이후 그는 2004년경부터 <혼돈(Chaos)>시리즈를 시작했다이 작품들은 혼돈의 시대 상황을 담아내기 위한 변화가 불가피해졌다그릇의 형태도 기존의 삼각형의 형태의 전 부분에 뿔을 만들어 기형적이고 파격적인 형태의 변화를 주는가 하면잭슨 폴록의 액션페인팅이 연상되는 거친 몸짓의 붓질과 흘리고 뿌리는 기법으로 격정적인 에너지를 표출하였다전에도 우연적인 흘리기 기법을 사용하였지만, <혼돈시리즈는 인위적인 계산 없이 즉흥적인 방식으로 표현하여 더욱 거칠게 느껴졌다.

이렇게 혼돈을 주제로 몇 년을 하다 보니 혼돈의 의미가 비관적인 것만이 아니라 생명을 잉태하기 전의 충만한 에너지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사실 생명은 최근의 카오스 이론에서처럼 혼돈의 가장자리에 존재하는 것이다자연은 혼돈의 끝에서 새로운 창발과 자기조직화를 일구어내는 것이다윤광조의 혼돈 시리즈는 유럽에서 2차세계대전 직후의 앵포르멜과 개념적인 연관성이 있다그러나 서구의 앵포르멜이 현실을 비관적으로 담아내고자 했다면윤광조는 파괴가 아니라 카오스의 가장자리에서 새로운 질서로 나아가는 자연의 섭리와 분출하는 생명력을 담아낸 것이다.

2011년에는 과거의 장욱진과 했던 도화전의 추억이 연상되는 흥미 있는 전시회가 열렸다생명력 넘치는 화려한 야생화로 인기가 높은 원로화가 김종학과의 도화전이 열린 것이다화풍과 분야가 다르지만이들 두 작가는 우연히도 모두 1979년에 서울을 떠나 산으로 칩거하여 작업해 오고 있는 풍류인들이다작업은 설악산에 사는 김종학 화백이 스케치한 걸 가지고 경주의 도덕산에 와서 윤광조가 만든 그릇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진행하였다설악산의 꽃과 도덕산의 바람이 만난 합작품들은 갤러리현대에서 전시되어 호평을 받았다.

2011년에는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인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서 <분청사기 명품전>이 열렸다전통 분청사기에서 현대 작가의 작품까지 그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회에서 그의 작품은 도록 표지 뒷면에 실리며 큰 주목을 받았다.

<혼돈시리즈가 10년 정도 이어지자 그는 혼돈이 익숙해져 가는 자신을 발견하고 변화를 위한 새로운 동력이 필요함을 느꼈다고민을 거듭하던 어느 날그는 새벽에 작업실에 들어가는 순간 창문을 통해 도덕산이 자신에게 밀려 들어오는 거 같은 느낌을 받았다언제나 보아오던 창밖 풍경이었지만그날만큼은 산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은 감흥을 느낀 것이다그것은 세잔이 말년에 생 빅토와르 산에서 느낀 것과 유사한 물아일체의 체험이었다세잔은 그 순간을 풍경은 나의 마음속에서 인간적인 것이 되고생각하며 살아 있는 존재가 된다… 우리는 무지갯빛의 혼돈 속에서 하나가 된다.”라고 말했다윤광조는 그 순간을 어느 날 도덕산 영감님이 나한테 걸어왔다그때 산이 다가오는 전율을 느꼈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체험이 경험한 후부터 그는 그 전율을 표현하기 위해 2016년부터 산이 움직인다는 의미의 <산동(山動)>시리즈를 시작한다사실 산은 고정된 것처럼 보이지만그것은 고정관념이고 인간 감각기능의 한계일 뿐이다자연은 항상 변하기 때문에 영원하고인간은 지식으로 고정하고 마음으로 집착하기 때문에 유한하다그래서 예로부터 동양인들은 변하는 산을 보면서 고착된 마음을 닦아내며 수양을 했다.

윤광조의 <산동시리즈는 움직이는 산의 형상을 보다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그는 다각형의 형태를 세워 삐뚜름하게 만들었다그러나 기울기가 너무 심한 작품들은 가마에서 구울 때 쓰러져 깨지게 되었다실패를 거듭한 끝에 그는 쓰러지기 직전의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루는 비균제의 균형에 도달할 수 있었다이로써 구상인 듯 추상인 듯 모호하고규칙이 있으나 자유로운 비대칭의 미학에 이르게 된다이것은 우현 고유섭이 한국미술의 특징을 비균제성으로 보았듯이자연스러움을 통해 구수한 큰 맛과 기운생동하는 자연의 생명력을 양식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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