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안창홍은 한국 미술계에서 아주 각별한 존재다. 그는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영혼과 치열한 정신세계를 소유한 작가다. 지난 50여 년간 그가 보여준 행보가 이를 증명한다. 안창홍은 지금까지 어떠한 제도나 틀에 얽매이지 않았다. 오직 화가로서의 자존심을 당당하게 지켜오며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축해왔다. 그것은 마치 묵묵히 수행해온 구도자의 자세와 다르지 않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안창홍은 여느 작가들처럼 제도화된 정규 미술교육을 스스로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자신의 고유한 회화세계를 구축해 왔다. 학벌과 인맥을 중시하는 한국 미술계에서 이런 성장 배경은 작가에게 분명 단점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대 예술계의 지형변화를 감안해 볼 때, 이런 약점은 반대로 어떤 작가보다도 큰 장점이 될 수 있다. 제도화된 예술교육은 예술가의 무한한 상상력과 가능성을 제한하는 역기능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창홍은 철저히 혼자만의 힘으로 한국 미술계에 뿌리내리고 열매 맺은 자생적 존재다. 이런 맥락에서 안창홍이 이룬 예술적 성과는 누구보다도 독창적이고 한국적이라는 점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다”라는 빛바랜 명제가 아니더라도, 그의 작품은 세계미술계 어디에 내 놓아도 차별되는 독창적인 조형어법을 보여준다. 페인팅이라는 가장 전통적이고 직접적인 표현을 바탕으로 일관되게 등장하는 작품 속 다양한 ‘인물’의 모습이 이러한 특징을 대변한다.
또한 그는 예술의 사회적 소명에 충실해온 깨어있는 의식의 작가다. 예술가가 창조한 결과물인 작품은 그 자체가 ‘의미를 지닌 소우주’인 동시에 인간 사회가 낳은 ‘사회적 자산’이다. 이런 의미에서 화가 안창홍은 누구보다도 예술가로서 사회적 임무에 충실해왔다. 예컨대 1980년대 민중미술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 활동하며 한국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지속적으로 표출해 왔다. 시대와 역사를 꿰뚫는 안목과 깨어있는 의식, 그리고 이에 대한 고민과 사유를 담고 있는 그의 그림은 여전히 사회문화서적으로 유의미한 존재다.
1953년 태어난 안창홍은 2020년 현재, 60 중반을 넘어서 어느덧 칠순을 내다보는 나이가 됐다. 70년이라는 세월은 보편적으로 한 인간의 인생을 차분히 되돌아보고 정리하기 시작하는 시기로 인식된다. 하지만 안창홍은 그렇지 않다. 그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최근까지도 안창홍은 왕성하게 신작을 쏟아내고 있다. 화가로서 뿜어내는 창작열은 오히려 이제부터 더욱 활활 타오르는 듯하다. 그를 가리켜 이른바 ‘현재진행형 원로작가’라 칭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53 경상남도 밀양군 밀양읍 내일동에서 안종수(부)와 차옥희(모)의 2남2녀 중 셋째로 태어나 그곳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1958-1959 부모의 이혼과 사라호 태풍으로 물에 잠긴 고향을 떠나 대구로 이사한 후, 약 2년간 외할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아버지의 두 번에 걸친 재혼으로 외할머니와 이별했다.
1959 사라호 태풍이 난 해에, 물에 잠긴 고향을 떠나 대구로 이사했다.
1960 대구 남산국민학교에 입학했다.
1966 대구 남산국민학교를 졸업했다.
1966-1967 경찰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부산으로 이주. 그 후 청·장년기의 일부를 부산에서 보냈다.
1966 대구 영남중학교에 입학했다가, 1학년 1학기 때 부산 대신중학교로 전학했다.
1968 외할머니 사망 소식을 전해 들었다. 작가에게 외할머니는 어릴 때 헤어진 친모를 대신한 각별한 모성적 존재로 각인됐다. 따라서 뒤늦게 알게 된 외할머니의 죽음은 작가의 유년기 감수성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됐다.
이런 경험은 작가의 뇌리에 오래 남아 1976년에 제작된 작품 <병실>과 <화장막에서>의 모티브로 등장한다.
1969 부산 대신중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 졸업과 동시에 가출, 독립생활을 시작하며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1970 등록금 미납으로 고등학교 2학년 1학기 이후 제적당했고, 생계를 위해 공사판 노동일과 국제시장 핸드백 가게 도안사로 일했다.
1971 미술 선생님의 배려로 고등학교에 복학했고, 서양화가 송혜수(宋惠秀,1913~2005)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1년간 그림을 배웠다.
1973 부산 동아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부산 대신동 사거리 목조건물 2층에 작업실 마련, 동료 몇 명과 공동생활을 했다. 생계를 위해 초등학교 교실 환경미화 일을 했다.
1975 체중 미달로 군 입대를 위한 신체검사에서 2종 판결을 받아 현역으로 입영하지 못하고, 1년간 부산 거제동 예비군 중대본부에서 방위병으로 근무했다.
1976 방위병 생활을 마치고 작업실을 수정동 도로변 목조건물 2층으로 옮긴 후 생계를 위하여 미술대학 지망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첫 전시로 《안창홍·정복수 2인전》(현대화랑, 부산)을 열었다. 뒤늦게 들은 외할머니의 죽음 소식을 모티프로 한 <병실>, <화장막에서>를 비롯해 <문명의 기슭>을 출품했다.
1977 당시 유행했던 모노크롬 형식의 추상미술에 대한 반발로 미술 그룹 '기류'를 결성하고, 《제1회 기류전》(현대화랑, 부산)을 열었다.
몇몇 동료와 ‘POINT 현대미술회’를 창립하고, 창립전 《POINT.77전》(부산 현대화랑)을 열었다.
화실을 미국문화원 뒷골목 목조건물 2층으로 옮겼다.
1978 전묘순과 결혼했다. 부산시 서구 토성동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고, 중학교 졸업 이후 헤어졌던 남매들과 재회했다.
《국제화랑 개관기념초대전》(국제화랑, 부산), 《제2회 부산현대미술전》(시민회관, 부산), 《제4회 대구현대미술제》(시민회관, 대구), 《POINT.78전》(원화랑. 부산)에 참여했다.
1979 첫째 아들(안지산)이 태어났다.
화실을 부산 토성동으로 옮겼고, '한국미술 청년작가회'에 가입했다. <가족사진> 시리즈를 시작했다.
《제2회 기류 칠십구전》(공간화랑, 부산), 《한국미술 청년작가회전》(서울, 춘천, 대구, 제주), 《36인의 방법전》(미술회관, 서울), 《POINT.79전》(로타리화랑, 부산)에 참여했다.
도쿄, 교토, 나라 등 일본 여행을 했다.
1980 첫 번째 《안창홍 개인전》(한국미술청년작가회관, 서울)을 개최했다. 평론가 강선학이 비평을 썼다.
《국제화랑초대 현대미술12인전》(국제화랑, 부산), 《동방미술회관 개관기념전》(동방미술회관, 부산), 《18인의 회화전》(청년작가회관, 서울), 《전시화랑기획 15인 초대전》(전시화랑, 제주), 《회화 15인전》(어린이회관, 춘천)에 참여했다.
1981 개인전 《안창홍 작품전》(공간화랑, 부산)을 개최했다.
《POINT 초대전》(현대화랑, 부산·아리화랑, 울산), 《그룹‘농’81전》(미술회관), 《방법전》(미술회관, 우에노공원(東京上野公園)·도쿄도미술관(東京都美術館)에 참여했다.
인식의 차이로 ‘POINT 현대미술회’와 ‘한국미술 청년작가회’를 탈퇴했고, 이어서 그룹 ‘농’을 결성하고 ‘구조 그룹’에 가입했으나 곧 두 그룹에서도 모두 탈퇴했다.
김응기, 박은주와 함께 ‘부산청년비엔날레’를 창립했다. 여러 화랑의 도움으로 전국 규모의 첫 행사를 치른 후 성격과 방향 문제를 둘러싼 견해 차이로 ‘부산청년비엔날레’ 조직에서 물러났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회의를 느끼고 입시화실 운영을 중단하고, 대신동에 개인 작업실을 새로 마련했다. 이때부터 <가족사진> 시리즈를 발표하고, 군부독재정치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저항미술운동을 시작했다.
생계 문제로 대청동 미국문화원 뒷골목 목조건물 2층에 다시 대입화실을 개업했다.
1982 《한국현대미술 80년대 조망전》(미술회관, 서울), 《상황과 의식 회화전》(현대화랑, 부산), 《ART KOREA》(인터콘호텔, 아부다비, 아랍에미리트), 《韓國構造グループの東京展》(고마이(駒井)화랑, 도쿄, 일본), 《김응기·안창홍》(맥화랑, 부산),
《82, 인간 11인전》(관훈미술관, 서울)에 참여했다.
1983 ‘현실과 발언’ 동인에 합류했다. 여기서 평론가 성완경을 만나 화가와 평론가로서 각별한 동지적 유대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색연필 작업 <위험한 놀이> 시리즈를 시작해 《현실과 발언 동인전》 때 처음 발표했다. 이후 전시를 통해
발표된 몇몇 작품으로 인해 불온작가로 지목받고 안기부 조사를 받은 후 지속적인 감시를 받았다. <위험한 놀이> 시리즈에 등장하는 로봇 가면을 쓰고 망토를 두르고 칼을 들고 있는 인물은 실제로 그런 모습을 하고 놀던 첫째 아들의 모습을
모델로 삼았다.
《서울미술관의 작가전: 서울의 봄》(서울미술관, 서울), 《제3회 ‘젊은의식’전》(관훈미술관,서울), 《시대정신전》(제3미술관), 《제4회 현실과 발언 동인전》(관훈미술관, 서울), 《현실과 발언 판화전》(한마당화랑, 서울)에 참여했다.
1984 둘째 아들(안지하)이 태어났다.
성완경이 조직한 벽화연구팀에 합류해 모자이크벽화의 직접 시공에 대한 다양한 현장 경험을 쌓았다. 이 무렵에 <새> 시리즈를 시작했다.
개인전 《안창홍전》(고려미술관, 부산)을 개최했다.
《삶의미술전》(아랍미술관, 서울), 《해방 40주년 역사전》(부산, 서울, 광주), 《인간전》(미술회관, 서울), 《제2회 시대정신전》(부산, 마산, 서울), 《1983년 문제작가 작품전》(서울미술관, 서울),
《부산미술 '70년대 다시 보고 싶은 작품(회화)》(사인화랑, 부산), 《제5회 현실과 발언 동인전: 6.25》(아랍미술관, 서울) 등에 참여했다.
1985 《한강미술관개관1주년기념 어떤정신들전》(한강미술관, 서울), 《서울미술관 개관 4주년 기념전》(서울미술관, 서울), 《80년대 미술대표작품전》(인사동갤러리, 이화갤러리, 서울) 등에 참여했다.
1986 개인전 《제3회 안창홍 작품전》(한강미술관, 서울)을 개최했다.
《한강미술관개관2주년기념: 우리시대의 초상》(한강미술관, 서울), 《록화랑개관기념 30대전》(록화랑, 서울), 《'86 인간전》(동덕미술관, 서울), 《제6회 현실과 발언 동인전》(그림마당민, 서울)에 참여했다.
연출가 이윤택이 연출을 맡은 극단 가마골의 연극 《히바규샤》 무대미술에 참여했다.
1987 개인전 《안창홍 작품전: 새와 사람 이야기》(갤러리누보, 부산)를 개최했다.
《반고문》(그림마당민, 서울), 《1987 현존시각》(사인화랑, 부산)에 참여했다.
1988 가족을 부산에 두고 혼자 상경해 서울 화곡동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88현존시각전》(갤러리누보·사인화랑, 부산), 《80년대 한국미술의 위상전》(한강미술관, 서울)에 참여했다.
가수 정태춘과 박은옥의 노래모음집 <戊辰 새노래>의 디스크 자켓 디자인을 의뢰받고 콜라주 작품을 제작했다.
1989 개인전 《안창홍 초대전》(온다라미술관, 전주)을 개최했다.
《80년대의 형상미술전》(금호미술관, 서울), 《부산, 80년대의 형상미술전》(사인화랑, 부산)에 참여했다.
부산매일신문에 김성종의 연재소설 『어느 암살자의 고백』에 1년간 삽화를 제작했다.
미술평론가 정진국과 프랑스, 이탈리아, 헝가리, 영국, 스페인, 오스트리아를 여행했다.
프랑스 카뉴국제회화제에서 1982년 제작한 <가족사진> 시리즈 중 두 점을 출품했고, 그 중 한 점이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다. 일제강점기 때 징병가게 된 남편과 부인이 함께 찍은 사진을 모티프로 그린 <가족사진> 작품이다.
1990 《현실과 발언 10년전》(그림마당민, 서울), 《화랑미술제》(호암미술관, 서울)에 참여했다. 소비와 성, 마약 등 인간의 욕망과 죽음에 대한 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표현을 하기 시작한 시기로, <보리밭 문둥이>, <우리들의 일상> 등을 발표하고,
이 즈음부터 <우리도 모델처럼> 시리즈도 제작했다.
1991 개인전 《안창홍 초대전》(맥화랑, 부산)을 개최했다.
《제1회 청담미술제》(샘터화랑, 서울), 《한국현대미술의 한국성 모색3: 갈등과 대결의 시대》(한원갤러리, 서울), 《인간. 7인의 시선》(갤러리아미, 서울)에 참여했다.
1992 《90년대 우리미술의 단면전》(가람화랑, 갤러리상문당, 학고재, 현화랑, 서울), 《오늘의 삶, 오늘의 미술-무의식과 욕망》(금호미술관, 서울), 《민중대통령 후원을 위한 기금마련전》(그림마당민, 서울),
《구상미술의 오늘-꿈과 현실의 대결》(현대미술관, 서울), 《구상미술의 재조명-풍자화, 그 해석의 소리》(현대미술관, 서울)에 참여했다.
1993 《1993 삶과 오늘의 풍경전》(갤러리마담포라, 서울), 《신작초대전: 한국현대미술의 꽃》(그림마당민, 서울)에 참여했다.
개인전 《제8회 안창홍 작품전》(금호미술관, 서울·맥화랑, 부산)을 개최했다. 개인전과 함께 안창홍 그림모음 2집 『푸른 빛 어둠 속에서 들꽃 위에 눕다』(눈빛출판사)를 출간했다.
‘현실과 발언' 동인이 해체됐다.
1994 개인전 《제9회 안창홍 작품전》(갤러리아아트홀, 서울)을 개최했다. <여장남자>, <건달> 시리즈를 발표했다.
개인전 《제10회 안창홍 작품전》(갤러리누보, 부산)을 개최했다. 소비문화와 성, 자본과 권력, 화가와 수집가의 관계를 풍자한 그림을 발표했다.
《1994~느티나무 아래의 열정》(갤러리마담포라, 서울), 《한눈에 열손가락》(스페이스월드, 부산), 《제2회 내일에의 제안-차세대의 시각전》(한가람미술관, 서울), 《자존의 길》(금호갤러리, 서울),
《민중미술15년: 1980-1994》(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 참여했다.
동료작가 박건, 이상수와 함께 첫 인도 여행을 다녀왔다.
1995 두 번의 개인전 《안창홍 개인전》(이목화랑, 서울), 《안창홍 개인전》(나무화랑, 서울)을 개최했다.
《해방 50년의 역사》(한가람미술관, 서울), 《1995 화상 10년의 눈, 화랑미술제 특별전》(한가람미술관, 서울), 《부산사람》(청화랑, 서울), 《자화상》(스페이스월드, 부산), 《남산화랑개관1주년기념전》(남산화랑, 부산),
《프리미티비즘전》(모란미술관, 남양주)에 참여했다.
동양극장 개관 50주년 기념공연 신파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포스터와 무대미술을 연출가 이윤택에게 의뢰받고 제작했다. 이윤택 연출로 북청 창우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우리에게 또 다른 정부(政府)가 있다》의 무대미술도 제작했다.
1996 김광문, 김상수와 함께 두 번째 인도 여행을 갔다. 인도 콜카타를 출발하여 델리, 아잔타, 바라나시, 뭄바이, 아우랑가바드, 푸나, 조드푸르, 자이살메르, 타르사막, 아마다바드 등지를 여행했다.
실크로드 스케치 여행(몽고, 중앙아시아, 러시아)을 갔다. 동아그룹 후원으로 고고학자, 촬영팀, 작가들과 함께했다. 몽골(울란 바토르, 효쇼차이담, 에르베니죠우), 카자흐스탄(알마타, 타쉬켄트),
우즈베키스탄(우르겐치, 히바, 부하라, 사마르칸트, 호젠트, 코간트), 모스크바, 자고르스크, 페테르부르크 등지를 답사했다.
«잃어버린 제국을 찾아서-실크로드 미술기행전»(동아갤러리, 서울), 《성즉리(性卽理), 성즉음(性卽淫)》(동산방, 서울), 《밤의 풍경》(갤러리사비나, 서울), 《동아시아 모더니즘과 오늘의 한국미술》(원서갤러리, 서울)에 참여했다.
1997 《안창홍 개인전》(전경숙갤러리, 부산)을 개최했다.
《갤러리 사비나 신년 특별기획 '소'전》(갤러리사비나, 서울), 《미술관에 넘치는 유머》(성곡미술관, 서울), 《현대미술 ‘97》(국립현대미술관, 과천), 《광주비엔날레 특별전》(광주시립미술관, 광주)에 참여했다.
평론가 최태만이 안창홍의 미술세계를 조명한 책 『어둠 속에서 빛나는 청춘』(눈빛출판사)을 출간했다.
시사주간지 『뉴스플러스』(동아일보 발행)에 삽화를 그렸다.
1998 《98 부산국제아트페스티벌 새 천년의 빛-동방의 바람》(부산시립미술관, 부산), 《Body in Painting》(한림미술관, 대전), 《현대 illusart》(갤러리우덕, 서울), 《입맞춤》(갤러리사비나, 서울),
《부산미술재조명》(부산시립미술관, 부산), 《풍자와 해학》(동아갤러리, 서울), 《창-안과 밖》(광주시립미술관, 광주)에 참여했다.
사비나갤러리를 통해서 뉴욕 아트페어 Jacod K. Javits.에 참여했다.
1999 서울 노화랑과 사비나갤러리에서 동시에 《안창홍 개인전》(노화랑·사비나갤러리, 서울)을 개최했다. 이 전시에서 <파리> 연작과 <화가의 똥> 등 부패한 권력과 물질만능의 사회를 조롱하는 세태풍자 작품을 집중적으로 발표했다.
《안창홍 개인전》(공간화랑, 부산)을 개최했다.
《Figurescape: 6 Artists from Korea》(Space Unlimited, 뉴욕, 미국), 《창, 안과 밖》(광주시립미술관, 광주), 《1999년의 자화상展》(갤러리퓨전, 서울), 《호부호형》(아트선재센터, 서울)에 참여했다.
2000 부산 봉생문화재단에서 주최하는 제10회 봉생문화상(전시 부분)을 수상했다. *부산을 빛낸 인사에게 수여하는 상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고비사막까지 여행했다.
《안창홍 개인전》(갤러리그림시, 수원)을 개최했다.
《광주비엔날레 특별전-인간과 성》(광주시립미술관, 광주), 《우리 모두 잘난 우리들의 상》(세종문화회관 특별전시실, 서울), 《한국의 화가 33인전》(갤러리맥)에 참여했다.
2001 부산일보사에서 주최하는 제1회 부일미술대상을 수상했다.
《안창홍 개인전》(남산화랑, 서울), 《모래바람-고비사막 가는 길》(이목화랑, 서울)을 개최했다.
《1980년대 리얼리즘과 그 시대》(가나아트센터, 서울), 《여인의 향기》(갤러리우덕, 서울), 《한국미술 2001: 현대 회화의 복권》(국립현대미술관, 서울), 《가족》(서울시립미술관, 서울), 《노컷》(갤러리 사비나, 서울)에 참여했다..
프랑스 파리에 체류하며 여러 미술관을 둘러보고, 앙굴램과 노르망디, 오베르 지역을 여행했다.
2002 개인전 《안창홍: 죽음의 콜렉션》(갤러리사비나, 서울)을 개최했다. 이 전시를 통해 <사이보그의 눈물>, <기념사진>, <자연사 박물관> 등 연작들로 묵시록적인 미래와 어두운 우리의 현대사를 주제로 다루었다. 평론가 성완경이 서문을 썼다.
《광주비엔날레 프로젝트3-집행유예》(5.18자유공원, 광주), 《한·중 2002 새로운 표정》(예술의전당, 서울), 《THE DOG》(사비나미술관, 서울), 《부산국제아트페어》(부산컨벤션센터, 부산)에 참여했다.
중국의 중경, 가릉강, 곤명, 석림, 계림, 요산 등지를 여행했다.
2003 개인전 《제1회 부일미술대상 수상기념전 안창홍: 죽음의 콜렉션》(코리아아트갤러리, 부산)을 개최했다.
《싸이코 드라마》(성곡미술관, 서울), 《그리는 회화-혼성회화의 제시》(영은미술관, 경기도광주), 《한국 현대미술에 나타난 성 표현》(경주세계문화엑스포, 경주),
《제1회 2003 베이징국제미술비엔날레 한국미술특별전》(중국미술관, 베이징, 중국), 《링크 다섯 작가와 학생들의 워크숍》(국민대학교 예술관 아트갤러리)에 참여했다.
개인전 《안창홍의 인도여행기》(공간화랑, 부산)를 개최했다. 인도여행 시 가져갔던 책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이옥순, 2002)의 매 페이지마다 현지에서 스케치한 드로잉과 메모를 전시했다.
《energy》(프로젝트스페이스집, 서울), 《예술가의 술 이야기》(사비나 미술관, 서울)에 참여했다.
인도 중서부를 여행했다.
2004 《부산비엔날레》(부산시립미술관, 부산), 《그리스 기행전》(사비나미술관, 서울), 《조국의 산하-중심의 동요》(공평아트센터, 서울), 《금호미술관 개관기념전》(금호미술관, 서울), 《남도 맛 기행》(광주, 순천, 목포, 인천, 서울)에 참여했다.
그리스 여러 도시와 중국 북경에서 서안까지 여행을 했다.
2005 《한국 현대미술 APEC기념 특별전》(부산시립미술관, 부산), 《사람, 집, 가족전》(제비울미술관, 과천), 《당신은 나의 태양, 한국미술 1960~2004》(토탈미술관, 서울), 《번역에 저항한다》(토탈미술관, 서울)에 참여했다.
인도를 여행했다. 델리에서 다람살라, 라다크, 레, 알찌, 머랄리를 거쳐 귀국했다. 겨울에는 터키를 여행하며 고대 유적지와 석굴사원 등을 둘러봤다.
2006 《2006 네팔에서 안창홍 스케치전》(공간화랑, 부산)을 개최했다.
개인전 《안창홍: 얼굴》(사비나미술관, 서울)을 개최했다. 평론가 박영택과 심광현이 평문을 썼다.
《Pre-국제인천여성미술비엔날레 조율》, 《한국현대미술100년》(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06 견공시대》(EBS미술관, 서울), 《想像의 힘: 고려대학교 개교101주년 기념 제47회특별전》(고려대학교박물관, 서울),
《갤러리 눈 개관기념전》(갤러리눈, 서울), 《사진의 껍질, 회화의 피부》(갤러리나우, 서울), 《서울국제사진페스티벌》(관훈갤러리, 서울), 《우리시대의 얼굴전》(김해문화의전당 윤슬갤러리, 김해)에 참여했다.
양평 작업실을 잠시 정리하고, 중국 베이징에 작업실을 마련하다.
중국 작업실에서 작업하며, 난징과 내몽골 지역을 여행했다. 인도에서 네팔 카투만두를 거쳐 포카라, 코르카, 탄젠 지역을 여행했다.
2007 베이징에서 양평 작업실로 잠시 돌아왔을 때 폐암 진단을 받았다. 수술 후 베이징 작업실을 철수했다.
《도큐멘타부산3-일상의 역사》(부산시립미술관, 부산), 《한국현대미술100인》(코리아아트갤러리, 부산), 《그림 보는 법》(사비나미술관, 서울), 《감염된 인물》(대원갤러리, 서울),
《한국미술의 리얼리즘-민중의 고동》(반다지아, 후쿠오카, 미야코죠노시립미술관 등 5개 미술관 순회, 일본)에 참여했다.
《안창홍·정복수: 똥과 창자 그리고 자존과 해방》(갤러리아트사이드, 서울) 2인전에 참여했다. 평론가 성완경이 서문을 썼다.
2008 《봄날은 간다》(광주시립미술관, 광주), 《Art in Busan》(부산시립미술관, 부산)에 참여했다.
남인도의 뭄바이를 시작으로 함피, 폰티첼리 지역을 여행했다.
2009 대구시와 대구미술관에서 주최하는 제10회 이인성미술상을 수상했다.
개인전 《안창홍 : 시대의 초상》(부산시립미술관, 부산)을 개최했다. 이 전시에서 <베드 카우치> 연작, <49인의 명상> 연작, <부서진 얼굴들> 연작, <사이보그> 연작, <헤어스타일 컬렉션> 연작, <자연사 박물관> 연작 등을 발표했다.
개인전 《안창홍: 흑백거울 마치, 유령이나 허깨비들처럼》(사비나미술관, 서울)을 개최했다. 평론가 최태만이 평문을 썼다.
《9인의 발견》(구삼뮤지엄 외), 《괴물시대》(서울시립미술관, 서울), 《인간의 거울-The Head》(킴스아트 필드 미술관, 부산), 《안창홍, 김정욱 2인전》(갤러리 스케이프, 서울), 《현대미술로 해석된 리얼리즘》(경남도립미술관, 창원)에 참여했다.
양평 작업실을 개보수했다.
라오스, 루앙푸라방에서 풍살리까지, 그리고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고비사막까지 여행했다.
2010 《안창홍 개인전》(리안갤러리, 대구)과 《안창홍: 제10회 이인성미술상 수상작가초대전》(대구문화예술회관, 대구)을 개최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예술가와 가족전》(대전시립미술관, 대전)에 참여했다.
인도, 라자스탄, 자이쌀메르, 타르사막을 여행했다.
2011 여행을 다녀 온 후 «인도 여행스케치전»(공간화랑, 부산)을 개최했다.
개인전 《안창홍: 불편한 진실》(가나아트센터, 서울)을 개최했다.
《시대의 거울, 초상》(북촌미술관, 서울), 《재개관전》(갤러리 스케이프, 서울), 《코리안 랩소디-역사와 기억의 몽타주》(삼성미술관 리움, 서울), 《한국현대형상회화 2011》(관훈갤러리, 서울), 《보이는, 보이지 않는》(갤러리로얄, 서울)에 참여했다.
개인전 《쿠리에서 고비까지》(갤러리룩스, 서울)을 개최했다. 여행에서 찍은 사진작품을 출품하고, 사진에 대한 소고를 담은 전시 서문을 직접 썼다.
2012 개인전 《아리랑 안창홍》(더페이지갤러리, 서울)을 개최했다. <기념사진> 시리즈만을 묶어 연작으로 선보인 전시로, 70년대 후반 <가족사진> 연작을 시작으로 <봄날은 간다> 연작, <사이보그> 연작, <부서진 얼굴> 연작,
<49인의 명상> 연작 등의 제목으로 지속적으로 발표해오던 것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들을 발표했다.
2013 조선일보사 주최 제25회 이중섭미술상을 수상했다.
개인전 《발:견/發:見 안창홍》(대안공간루프, 서울)을 개최했다.
《사람아 사람아-신학철·안창홍의 그림 서민사(庶民史)》(경기도미술관) 2인전에 참여했다.
《텔레-비전》(갤러리 현대, 서울), 《장면의 재구성 #1》(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서울)에 참여했다.
2014 개인전 《기억공작소-關係 안창홍전》(봉산문화센터, 대구)을 개최했다.
개인전 《안창홍의 뜰》(더페이지갤러리, 서울)을 개최했다. 양평 작업실 앞마당 2년 여간 가꾸면서 꽃들의 영고성쇠를 관찰하고 기록한 <맨드라미> 시리즈를 발표했다. 직접 쓴 전시 서문에서 2014년의 세계사적 정치적 재난과 ‘세월호’의 아픔이
이 전시에 오버랩시킴을 토로했다.
《저런생각, 이런표현》(킴스아트필드미술관, 부산)에 참여했다.
2015 《통찰》(전등사, 강화), 《시대정신 전태일》(아라아트센터, 서울), 《2015 서신갤러리 신소장품-여자사람》(서신갤러리, 전주), 《1980년대와 한국》(전북도립미술관, 전주)에 참여했다.
개인전 《나르지 못하는 새 : 안창홍 1972.2015》(아라리오갤러리, 서울)를 개최했다.
2016 《아틀리에 스토리》(한가람미술관, 서울), 《행복의 나라》(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서울)에 참여했다.
2017 개인전 《눈먼자들 : 안창홍》(부산 조현화랑)을 개최했다.
《City and the People》(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서울), 《코리아투모루우 2017: 해석된 풍경》(성곡미술관, 서울), 《청년의 초상》(대한민국역사박물관, 서울), 《키워드 한국 미술 2017-광장예술: 횃불에서 촛불로》(제주도립미술관, 제주),
《트라이앵글》(갤러리아트사이드, 서울), 《삼라만상: 김환기에서 양푸동까지》(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서울)에 참여했다.
2018 《흐린 날의 노래 ; 강경구, 김을, 안창홍》(아트비트갤러리, 서울), 《균열Ⅱ: 세상을 향한 눈, 영원을 향한 시선》(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과천), 《GMoMA 컬렉션 하이라이트》(경기도미술관, 안산), 《틈 사이에 서서》(경기문화재단 로비갤러리, 수원),
《시대유감》(서울시립미술관, 서울), 《두 번째 풍경》(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서울)에 참여했다.
2019 《정태춘 박은옥 40주년 기념전: 다시, 건너간다》(세종문화회관 미술관, 서울)에 참여했다.
개인전 《안창홍-화가의 심장》(아라리오갤러리, 서울), 《눈먼자들》(아트센터쿠, 대전), 《안창홍-이름도 없는》(경남도립미술관, 창원)을 개최했다.
안창홍의 비미학(Inaesthetics, 非美學),
한국적 정동의 실체【주석1】
Ⅰ. 들어가는 글
안창홍에 관한 기존 비평은 주로 안창홍 개인과 작품의 특수성에 집중했다. 이번 연구에서는 비평적으로 주목된 안창홍의 작가와 작품의 단독성과 독자성뿐 만 아니라, 한국 현대미술 시장과의 영향 관계라든가, 미학,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지점들도 함께 고려하였다.
1970년대부터 2019년 현재까지의 전작품을 대상으로 하여 봤을 때, 안창홍이 다뤄온 것은 일종의 비존재(非存在)적 한국인이다. 안창홍은 남한의 전후(戰後) 현대사를 쟁투(struggle)의 형태로 살아온 인간을 다룸에 있어, 그들을 절대로 나약한 존재로 다룬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회적 타자로 다루지도 않았다. 안창홍은 정치나 법치주의, 혹은 민주주의 등의 시민사회적 합의나 타당성을 촉구한 것이 아니었다. 안창홍의 정동정치(the politics of affect)는 당대적으로 인정받기 위함이라기보다는, 미학정치적인 함의를 지니는데, 그것은 비존재적 생명의 스트러글의 양상 속에서 펼쳐진다. 안창홍의 인간은 남한의 비존재적 개인들의 개인 초상이기도 하며, 동시에 예술가의 초상이기도 하다. 안창홍 전작의 미학적 특징은 한국 현대사의 예술의 특수한 존재성에서 비롯된다. 안창홍은 관념적이거나 계급적인 미술을 거부하였으며, 국제적 스탠다드에 부합하려는 동시에 가부장제적인 아카데미즘적 미술을 조롱했다. 안창홍 전작의 단독성(singularity)은 그가 다룬 인간의 형상이 그렇듯, 비존재적이지만 강한 정동(affect)적 중핵인 예술의 생동과 역동에 기인한다.
전후(戰後) 1980년대까지의 파탄적이고 폭력적인 정치사, 이에 이어 ’88올림픽을 기점으로 하여 쏘아올린 신자유주의적 금융 자본주의라는 신호탄은 1990년대 한국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자본이 가져다준 자유의 물결은 금융자본을 무한히 추종하고 선망하는 무비판적 시민 사회를 확산시키는 결과를 낫기도 하였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명확히 가시화된 경제뿐 아닌 삶의 양극화는 한국사회의 빠른 발전의 이면이기도 했다.
군사독재정권의 개발독재라는 비극 속에서 개인은 무엇인가를 영위하는 것으로서의 삶을 산 게 아니라, 죽음을 겨우 모면한 상태, 즉 산죽음(living dead)의 상태로 버텨왔다. 안창홍의 1970-1980년대 작업은 바로 이러한 산죽음의 비극성을 다룬 것이었다. 1990년대 이후 가속된 초고속 발전의 금융경제 사회의 민낯은 그의 원색의 인물 초상과 집단 초상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디지털 강국으로서의 한국 현대의 복제와 편집, 반복 출현은 한국 현대사의 트라우마를 종합적으로 다룬 2000년대의 <아리랑> 시리즈에서 정점을 이뤘다. 2000년대 중반이후 안창홍의 작업세계는 거대한 스케일을 갖게 된다. <베드 카우치>연작으로부터 <이름도 없는...>, <눈 먼 자들>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예술적 스케일 속에 내재한 한국 현대사의 잔재로서 지금껏 비존재적으로 존재해온 삶과 생명력에 대한 믿음과 힘을 다시 불러내고 있다. 지금도 안창홍은 여전히 형체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비존재들의 외침을, 하나 하나의 텃치로 그리고 있다.
한국 현대사에 있어 죽음은 사회, 정치적 비극으로 묘사되어 왔다. 일종의 희생자의 초상이었다. 그리하여 살아있음, 즉 생명(life)은 비극을 내재한 비애미와 같은 미학적 주제가 되어왔다. 전후(戰後) 한국 사회의 현대화 과정작업을 처음 시작할 때 안창홍은 삶이 우선이고 죽음은 저항해야할 것이라기보다는, 삶과 죽음의 문제가 분리 불가능한 예술적 주제였다. 그것은 동시에 본인의 생사(生死)와도 결합된 직접적인 주제이기도 했다. 안창홍이 ‘죽음’을 다룸에 있어서 특수함은, 그의 개인 삶과 결부된 생사 문제라는 직접성에도 기인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죽음을 선제적으로 예견한다는 점, 그리하여 죽음을 영원성과 미학적인 것으로 다룬다는 점에 기인한다. 안창홍에게 있어서 죽음은 삶과 인과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삶을 찬양하면서, 사회정치적 정의를 호소했던 당대 저항적 화단과는 거리가 먼 안창홍의 특수성과 당대적 이질성을 설명해준다. 죽음이란 주제는 안창홍에게 있어서 작가로서 살아남되, 어떻게 살아 남느냐라는 윤리적 문제와 맥이 닿아있으며, 나아가 그의 작품이 갖는 이질적이기에 당대적인 미학의 바탕이 된다. 그리하여 이 글에서는 안창홍을 통해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한국적 정동(affect)의 중핵 혹은 그 실체가 어떤 고군분투를 해왔는지 살펴보고자 하며, 그것을 안창홍의 비미학(比美學)이라고 칭하였다.
우선 주요 비평가를 살펴보면, 우선 안창홍 생애 전반에 걸쳐 안창홍의 인생사와 전 작업을 서술해온 최태만을 중심에 둘 수 있다. 최태만은 안창홍이라는 사람과 작업, 그리고 그의 인생을 가장 친근하게 이해해온 비평가이자 동료이다. 시대별로 ‘탄생’한 비평을 봤을 땐, 1970-1980년대 초반의 비평으로 강선학과 성완경, 1980년대에서 1990년대를 경유하면서 김해성, 성완경, 박신의, 심광현, 이섭, 고충환, 박영택의 비평을 눈여겨 볼 수 있다. 강선학은 초기 작업에서부터 안창홍의 미술사적 의의 서술을 시도했고, 성완경은 안창홍의 미학적 특징을 가장 치밀하게 분석했다. 성완경은 안창홍과 예술 정신, 예술 혼의 측면에서 가장 근친적인 공감대를 형성한 비평가라 할 수 있으며, 그의 비평개념들은 이후 안창홍의 비평세계에 있어 중핵을 차지하게 되었다. 김해성은 1980년대 안창홍 작업에서 나타나는 동시성과 분열적 측면을 간파하면서, 그의 화법을 “절규의 화법”이라 하였다. 심광현은 1990년대 한국의 신자유주의화와 생명관리정치 시대에 있어 안창홍의 중요성을 일찍이 간파한 비평가다. 이섭은 안창홍과 한국사회의 자본주의적 욕망론을 결부시켰으며, 고충환은 안창홍의 사진이미지 관련 작업들을 구체적으로 분석했다. 박영택은 안창홍의 주제들을 대중적 카테고리로 묶어낸 비평가이다.
안창홍은 1970년대 후반-1980년대 작업의 기틀을 다졌고, 1990년대 큰 변화를 이루었으며, 2000년대와 2010년대를 거쳐 한국현대미술에 있어 거목으로 탄생하였다. 통상적으로 2000년대 이전 시기를 개관하는 미술사적 연구는 대개 민중미술, 구상미술과 리얼리즘, 모더니즘과 추상 등의 어떤 특정 사조나 시대양식을 묶어내려는 아카데미즘적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안창홍의 경우 기존 휴머니즘적 잣대나, 아카데미즘적 잣대로는 설명되지 않는 독특함(singular)이 있었고, 비평가는 기존 양식에 의거하지 않고 새롭게 비평을 정초해 냈어야 했다. 주요 비평가의 글을 살펴보면 그들 스스로가 안창홍의 작업을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대중에게 설명하기 위해 미학언어와 비평언어들을 새롭게 개발하고, 발견하고, 연구해낸 흔적이 역력하다. 안창홍은 한국 현대미술 비평의 발화자였던 것이다.
한국 현대미술에 있어서 특히 현대미술 비평 1세대의 정체성을 정초하게끔 이끈 작가, 안창홍의 미학-미술사적 의의를 짚어보기 위해서는 우선 하나의 주제가 아니라 몇 가지의 핵심 사항을 고려하면서 입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10년대 들어 안창홍은 몇몇 시리즈들을 대규모 개인전으로 묶기 시작했는데, 그에 착안하여 연구팀에서는 전작을 관통하는 주제들을 뽑았다. 이를 위해 초기 작업들을 보다 세심하게 검토하였고, 주제별로 재구성했다.
Ⅱ. 본론
1. 초기 작업에 나타난 단서와 파생된 주제
(1) 초기 습작들에서 피카소, 샤갈, 루소 습작과 표현주의적 경향성
<무제>(캔버스에 유채, 1974) : 샤갈 화풍을 연구할 때 그린 그림이다. 서 있는 인물 단독상이 있다. 화면에 꽃밭을 배경으로 한다. <달을 보고 놀란 아이들>(캔버스에 유채, 1976) : 피카소 양식을 연구한 습작이 하나 있고, 작가가 달을 그려 넣고 그린 본 작품이 또 하나 있다. <문명의 기슭>(캔버스에 유채, 1976) : 정복수와의 2인전에 출품되었다. 문명과 상반된 쪽이라는 의미에서 ‘기슭’이라고 하였다. 풀을 뜯고 있는 나체의 한 인물이 보인다. 이는 기아를 상징할 수도 있고, 원시상태로 돌아가고 싶은 갈망이기도 하며, 동시에 인간의 소외, 고독의 정서가 느껴지는 그림이다.
당시 안창홍의 샤갈, 피카소, 루소 등의 화풍 연습은 그의 주제 중에서 특히 문명 비판적이면서 동시에 사회비판적인 측면으로 부각되었다. <문명의 기슭>이 예가 된다. 이 시기의 전반적인 안창홍의 주제는 인간의 고독, 소외, 비애미 등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표현양식의 경우 주로 입체파적이면서 피카소의 청색시대를 연상시키는 색조와 구도를 사용하였다. 과학적 표현주의와 주정주의적 표현주의 성격을 나눠본다면, 전자쪽의 양식으로는 인물 표현에서 인물을 파편화시킴으로써 인간의 야만성이나 괴수성을 증대시킨 점이 눈에 띈다. 또한 주정주의적 측면에서 보자면, 감정의 표출을 과감하게 표현하고 있는 측면을 주목해 볼 수 있다.
(2) ‘가족사진’에서 비롯된 ‘인간’주제, ‘존재성’에 투영된 자기파멸성과 역사성의 주제
최초의 <가족사진> 작품은 1979년이며, 이때 최초 작품은 우연히 발견한 가족사진을 보고 습작처럼 그린 것이다. 1979년의 <가족사진>은 가족사진 이미지를 그림으로 그린 것으로, 얼굴에 종이 마스크 같은 것을 씌운 것으로 표현하였고, 매우 경직되고 형식적인 도안처럼 그렸다. 이어 본인 가족사진을 소재로 하여 비슷한 기법으로 작품을 제작하였다. 1980년대 들어 눈을 검게 칠하여 마치 눈을 뚫어버린 것처럼 그렸다. <가족사진> 시리즈에 가족의 와해와 비극적 한반도의 역사(식민 역사, 분단 등) 등의 의미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인간이후> 시리즈와 이후의 2010년대 후반 입체 회화로 제작한 <가면-마스크>와 <눈먼자들> 시리즈와 <맨드라미> 시리즈, <이름도 없는...> 시리즈 등과 비교해 봤을 때 안창홍의 ‘개인 정서’, 특히 비극적 정서를 과감하게 표현한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비애미와 냉소, 조롱, 풍자 등의 대조적 양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양상은 주로 이 <가족사진> 시리즈와 <인간이후> 시리즈로부터 배태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전반적인 안창홍식 주제, 즉 인간이 갖는 자기 파멸적이면서 삶에의 애착과 비애미가 공존하는 인간존재에 대한 주제가 배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1990년대 안창홍의 인물화와 2000년대 사진 이미지를 활용한 작업들, 그리고 2007년 전후로 시작된 <베드 카우치> 시리즈 등에 반영되어 있다.
(3) 색연필화의 시작과 전개, 어린이, 자화상, 그리고 기성 미술 관행에 대한 비판적 태도
색연필로 완성한 그림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작업은 <위험한 놀이>(1983-1985), <전쟁>(숲 속에서, 보리밭에서, 들판에서, 6.25 그리고 오늘, 1984) 시리즈와 같은 표현의 <절규>(1986)와 <아버지와 아들>(1986), 그리고 <새>(1985-1986) 시리즈다. 이 시리즈는 현실과 발언 전시 참여당시, 주제기획전 일환으로 제작한 작품들이다. 사실 당시에 색연필이라는 재료는 아크릴이나 유화, 수채에 비해서 주류 재료가 아니었다. 그러나 안창홍은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이 재료로써 완성 ‘작품’을 계획하여 그렸다. 한국 주류 미술시스템이나 관행을 고려했을 때, 안창홍이 주류 혹은 아카데미적 미술에 대한 반발로 읽힌 지점이기도 하다. 이는 그림의 소재에서도 그러한데, 우화적인 측면이 그러하다. 가령 ‘아이’들을 소재로 하여 아이들이 잔혹한 놀이를 서슴치 않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안창홍은 아동화에 어울릴 듯한 ‘색연필’을 갖고 “잔혹 미술”로도 일컬어진 이 시리즈를 완성했고, 여기에는 기성 세대의 세태 뿐 아니라 기성 미술 관행에 대한 조롱과 비판이 배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발 이후에도 안창홍은 이러한 색연필화, 연필화로 대표작을 다수 생산했다. <미스터 육체미의 아르바이트>(종이에 연필, 109.5x79.5cm, 1990, 부산시립미술관 소장)를 예로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안창홍이 지인들과 함께 청량리 극장식 캬바레에서 술을 마시다가 목격한 진풍경을 소재삼아 그린 그림이다. 일종의 세태풍자화다. 여기서도 안창홍의 과감한 색연필화, 연필화의 진가를 발휘함을 볼 수 있다.
어린이, 혹은 머리만 크고 몸은 왜소한 인물(<위험한 놀이>, <용사>(1986) 등의 작품)을 등장시키는데서 나아가 안창홍은 자기 자신의 초상을 그려서 이러한 미술관행과 동시에 미술에 대한 사회 인식에 대한 풍자와 비판을 했다. <화가의 똥>(1999)은 형형색색의 똥을 누는 화가의 자화상이다. 이러한 사회 비판적 ‘화가의 초상’을 소재로 안창홍은 예술의 성찰과 비판적 역할을 스스로 다짐하면서 동시에 촉구해왔다. 2019년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안창홍은 백골이 된 화가의 손(버려진 물감통의 붓 자루)인 <화가의 손>과 세상의 고통을 가슴에 박고 살아가는 화가의 초상인 <화가의 심장> 시리즈에서도 그러하였다. 안창홍은 초기 작업에서부터 한국 사회 정치적 관행이 만행임 드러냄과 동시에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과 미학 정치 역할에 대한 성찰적 촉구를 하고 있다.
(4) <인간이후> 시리즈와 콜라주와 <얼굴>시리즈
초창기 안창홍의 콜라주 작업은 <인간이후> 시리즈가 대표적다. 주제면에서는 일종의 해체된 공동체의 문제, 즉 현대화와 개인화 과정에서의 삶의 파편화를 다뤘다. 기법은 잡지 사진 등을 오려 붙이고 그 위에 아크릴 물감으로 마무리했다. 콜라주의 특성상 그 자체가 ‘파편화’된 이미지를 구축하기 때문에 시대의 아픔에 무관심한 시대비판적, 세태풍자적 주제를 돋보이게 한다. 콜라주 기법은 1980년대 후반 <어떤 식사>(1986), <에로틱한 달밤(1986), <전쟁을 찬양하라>(1989), 새(1989) 등으로 이어졌는데, 이들 작품에서는 공동체의 파괴, 세태 풍자적이며 시대 비판적 측면을 드러낸다. 작품에서는 상호 관련성 없이 정면을 응시하는 무표정한 인물형상 표현이 특징적이다. 이후 이러한 양상은 <사이보그> 시리즈, <49인의 명상> 시리즈 등으로 이어졌다.
1986년경의 <얼굴>시리즈에서는 우화적 특징이나 풍자적 특징보다는 인간 탐구의 특징이 강해진다. <얼굴>시리즈 중에서 ‘이웃의 얼굴’이라 하여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인물들의 얼굴을 부조와 회화로 작업한 작업군의 얼굴 표정은 인상적이다. 안창홍은 이후에도 지속해서 다양한 얼굴 시리즈를 제작한다. 이 시리즈에는 실제 초상에 가까운 얼굴, 가면시리즈, 표현적이고 과장적인 얼굴 등 다양한 형태들이 포함되며, 지속해서 여러 차례 제작한다. 재료의 경우도 종이죽, 테라코타, 돌, 시멘트 등 다양하다. 이는 현재까지 이어졌다. 페인팅 <이름도 없는...>시리즈와 대형 입체회화로 일컫는 <가면-마스크> 시리즈(2016-)와 <눈 먼 자들>(2016-)시리즈 등으로 이어졌다.
2. 부산지역 형상미술과 민중미술과의 비_관계성
(1) 안창홍-표현적 구상-민중미술도 형상미술도 아닌,
안창홍은 1983년 ‘현실과 발언’에 가입했는데, 이 가입 동기가 된 전시 《82, 인간 11인전》서문에서 김윤수는 이 전시가 “작가가 직접 기획한 전시”이며, “‘인간’을 주제로 작업하는 작가들만으로 구성”된 점을 주목하고 있다. 김윤수는 “‘인간’을 정면으로 들고 나온 전시회로는 처음이 아닌가”하며, 당시 이 전시가 새로운 경향임을 강조한다. 안창홍은 이때 <가족사진>(종이에 유채, 194.5X115cm, 1982, 개인소장, 액자상태)을 출품하였다.【주석2】
당시 화단에서 ‘인간’을 주제로 한 일련의 구상경향의 회화가 주목을 받은 것은 1980년대 초부터임을 알 수 있다. 이때 안창홍의 <가족사진>은 역시 주목된다. 그렇다고 하여 본격적으로 안창홍의 <가족사진>이 ‘인간’ 주제의 ‘형상미술’로 이해되었다고 단정할 순 없다. 그보단 형상미술의 초기 경향에 있어서 안창홍의 작업태도와 주제가 형상미술의 기틀을 잡는데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편이 낫다. 그리고 그것은 1970년대 말 부산시절에서, 1980년 개인전 이후 서울화단에서까지 영향을 미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후의 미술사에서 봤을 때, 민중미술 계열인 현실과 발언에서도 안창홍의 화풍이 독특했던 바, 안창홍을 민중미술이 아닌 다른 경향으로 이해하기 위해 ‘부산-형상미술’이란 양식을 통해 안창홍의 초기 작품을 이해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2) 부산 형상미술 태동기-POINT 현대미술회【주석3】
안창홍과의 인터뷰에서는 부산 형상미술 태동기에 있어서 그의 역할을 짐작할 수 있다. 안창홍은 한 인터뷰에서 “(내가 활동하던 부산에서) 1970년대 말 기존의 모더니즘 계열과 다르게 구상회화의 경향이 대두되었다. 가령 대구 화단에서는 ‘풍경’을 중심으로 구상회화가 펼쳐졌다면, 부산에서는 ‘인간’을 중심으로 새로운 구상회화 경향이 펼쳐졌다. 그 이유는 1979년 부마항쟁을 목격한 많은 젊은 화가들이 ‘인간’을 주제로 새로운 그림을 그리려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산의 새로운 실험적 경향은 ‘포인트 현대미술회’에서 두드러졌다.”【주석4】고 인터뷰한 바 있다. 인터뷰에서 서술한 ‘포인트 현대미술회’는 1977년 창설되었는데 안창홍은 창설멤버였고 1981년까지 매년 전시에 참가했다. 이 미술회는 당시 다른 미술협회들과 차이를 두면서 젊은 작가 위주로 구성된 것으로, 새로운 표현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조직한 것이었다. 1980년의 도록을 참조해보면 작가들은 전형적인 유화나 동양화가 아니라 실험적 추상 경향 속에서 인체 혹은 인간을 해체적으로, 개념적으로, 표현적으로 접근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안창홍은 형식적 도안화 같은 느낌의 <가족사진>(1979)을 출품하는 등의 과감함을 보였다.【주석5】 이 작품에서는 기존엔 서정적으로만 다뤄졌던 가족 혹은 인물화나 구상화와 달리 기법면에서나 고의적 형식적 표현성 등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1970년대 말 안창홍에 의하면, 본인을 포함하여 ‘포인트 현대미술회’ 등 부산지역에서 활동을 전개한 젊은 작가들의 일부 경향에서 전후 구상미술과 또 다른 새로운 실험을 볼 수 있다. 또한 ‘구상성’을 리얼리즘적이거나 전후추상적인 방식이 아니라 실험적이고 개념미술적인 경향 속에서 새로운 기법과 표현으로 구사할 수 있음을 실천하기도 했다. 이는 부산 형상미술의 태동과 그 특징을 볼 수 있는 지점이다. 그러나 이후 형상미술의 주목된 바와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구상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새 구상회화에서의 형상성 문제를 주목하면서부터 ‘형상미술’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도 하였다. 이는 1980년대를 통해 그것과 민중미술과의 차이를 강조하면서 “형상미술”의 미술사적 의의와 정체성을 재규정하려는 연구의 일환으로 보인다.
(3) 새로운 구상회화-신미술, 형상성
기존 기사나 비평을 살펴보면, 1980년대 당시 주목된 새로운 흐름 중에서 30대 작가들의 ‘새구상회화’를 주목함을 볼 수 있다. 이 새로운 구상회화는 ‘인간의 존재성을 탐구하면서, 문명과 상업주의 비판, 삶의 현실과 현장성 문제’등을 주제로 삼아 여러 그룹 활동을 통해 발표된 작품 경향이었다. 이용우가 기자일 당시 기사에서 소개하듯이 이러한 새로운 구상회화는 기존의 “진부한 구상회화나 현대미술의 난해한 형식실험이 아니라, 삶의 현장 속에서 달려오는 인간의 문제, 문명과 상업주의 비판, 삶의 현실과 현장성의 문제로 조형 발상을 끌어들임으로써 평면회화의 무력감을 극복”하려 하며, “‘임술년 구만팔천구백구십이’에서와 ‘현실과 발언’, ‘실천 그룹’, ‘젊은 의식전’, ‘횡단’, ‘에스파동인’ 등의 그룹이 바로 그 주역들”이라 하였다. 또한 이 중 현실과 발언은 “임옥상, 민정기, 오윤, 김정헌, 강요배, 안창홍 등이 주역”이며, 초기의 다양한 실험성을 떠나 차분하고도 세심한 패턴으로 이미지를 변형시키고 있다.”고 하였다.【주석6】 이러한 구상성에 대한 평가는, 1980년대 후반이 되면 문명비판 중심의 새구상회화로, 그리고 거기서 ‘형상성’을 주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가령 1987년 경향신문 기사에서는, “문명의 잔혹성과 인간성 상실을 테마로 한 이른바 ‘잔혹미술’로 불리는 문명비판 미술이 화단의 새 기류를 형성하고 있다. 젊은 신진작가를 주축으로 형성된 이 같은 경향은 이미 새로운 新具象(신구상) 작업으로 발전, 인간 정신을 반영한 신미술운동으로 확산되고 있다. 더욱이 최근에는 애매한 추상적 표현방법에서 탈피, 과감한 形象性(형상성)이 부여된 상황미술까지 등장하는 등 미술계의 독자적인 표현영역으로 정착될 전망이다.”라고 하며 형상미술의 표현방법과 주제, 그리고 그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주석7】 여기서는 민중미술, 현실비판미술 모두에 있어서 ‘형상성’을 주목하고 있다.
강선학은 이미 ‘형상’미술을 민중미술이나 기타의 구상미술과 달리 호칭하고 있는데, 이는 1980년대 후반이면 본격적으로 논의되면서, 안창홍과 정진윤의 작품에서 우화적 양식과 현실 비판을 회화에 있어서 ‘형상’을 통해서 표현하고 있었고, 그것은 특히나 인물형상을 인형, 가면, 훼손된 신체 등을 통해 표현하는 것을 근거로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989년 5월 서울 금호미술관의 《80년대의 형상미술전》과 사인화랑에서 개최된 《부산,80년대의 형상미술전》은 이러한 경향을 망라하였다. 이 시기 안창홍을 형상미술의 관점에서 주목한 지점은 “우화적 양식”과 “비정상적 상황의 형상화”를 통해 현실적 상황의 비판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이었으며, 주로 안창홍의 <위험한 놀이> 시리즈에 대한 설명이기도 했다.【주석8】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사이에는 작가의 개성적 측면이 주목되기 시작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작품들에서 현재의 삶이 중요하게 등장하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80년대 부산미술은 지금까지 현실과 유리된 상투적인 유미주의와 추상적이고도 감각적인 형식주의의 틀을 깨고 현재의 삶에 바탕을 둔 작품들이 활발하게 선보이는 기간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80년 1월 청년작가 30 명으로 구성된 `부산청년미술전'을 위시하여 10년 동안 열린 전시회는 2천8백75회(70년대 1천6백21회)이 중 절반이상이 20-30대 청년들의 것이었고 이들의 주된 관심은 현실의식과 비판이었다. 이러한 청년작가들의 활동으로 특기할 것은 부산청년비엔날레의 태동. 김응기 남순추 이성재 김태호 정광화 허종하 안창홍 등 15명에 의해 발기돼 81년 8월 순수민간의 힘으로 열린 이 행사는 35세미만의 전국 청년작가 84명이 참가 현대미술을 정착시키는 계기와 부산미술계 활성화의 기폭제가 되었다.” 라고 하면서 부산에서도 ‘형상미술’을 중심으로 ‘민중미술’과 다른 경향을 보임이 정리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주석9】 2000년대 형상미술은 주로 일상을 주제로 한 다양한 표현들, 리얼리즘적, 사실적, 표현적 표현들을 망라하는 경향이 있으며, 형상미술의 기원과 미학적 특징 등을 학계에서 분석하는 경향도 등장했다.【주석10】
(4) 민중미술과 형상미술, 부산 현대미술의 정체성 문제
논의들을 보면 민중미술과 차별성을 지으면서 부산의 형상미술의 정체성을 규정하려는 경향도 주목된다. 우선 형상미술의 경우, 부산 중심으로 논의가 되는데, 초창기에는 강선학이 비평적 관점에서 주목하였고, 최근에는 전 반디 큐레이터이자 김해문화의 전당 문화정책 팀장인 이영준은 부산의 대안 공간의 궤적 혹은 부산의 대안적 미술운동과 부산현대미술의 정체성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언급되었다. 이영준의 경우는 사인화랑, 섬, 반디를 하나의 맥락에서 보고 있는데 이때 그가 주목한 작가는 (고)정진윤이다.【주석11】
부산 형상미술의 기원을 찾는데 있어서 부산의 리얼리즘 경향을 ‘토벽’, ‘청맥’ 등의 1950년대 소그룹의 경향에서 찾는 논문도 있지만, 【주석12】 보다 직접적으로는 엥포르멜과 아카데미즘에 반발하면서 등장한 1970년대 후반 젊은 작가들 사이에서 등장한 새로운 구상미술 경향에서 그 기원을 찾기도 한다. 이는 앞선 인터뷰에서 보듯이 당시 기존의 아카데미즘적이고 모더니즘적인 경향에서 탈피하려는 시도의 일환이었다. 이후 부산에서 형상미술의 전개에 있어서는 안창홍식 개인의 비극적 정서를 표현적으로 그린 경향이 한 축에, 일상적인 소재와 장면을 갖고 현실인식을 보다 미세하게 포착했던 구상이 또 다른 한편으로, 그리고 일상 소재의 리얼리즘적 경향 속에서 존재론적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 한 편으로 자리 잡게 됨을 알 수 있다.【주석13】 무엇보다 1950년대, 그리고 1970년대 이후 부산 형상미술에서는 리얼리즘적 경향 하에서, 일상이나 개인적 심상을 소재로 하더라도 화풍에 있어서는 엥포르멜, 아카데미즘, 민중미술과는 차이를 갖는 화풍을 추구하였음이 공통적이다. 그 중에서도 안창홍은 개성적이며 표현주의적 화풍으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5) 부산 현대미술 태동기의 안창홍
안창홍은 <가족사진>과 <위험한 놀이> 등에서 보듯이 일상적 소재라기보다는, 일상의 장면인 듯한 이미지를 소재로 하여 안창홍은 우화적이고 표현적인 그림을 그렸다. 형상미술은 태동기의 실험적 경향과 달리 대다수의 부산 형상미술은 일상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에 반해 안창홍은 ‘개인이자 인간’의 특성인 정념, 즉 지극히 주관적 정서이자 심리상태로 언급되는 공포, 섬뜩함과 같이 그 원인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이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하는 느낌을 표현하려고 했고 그것을 세태 비판적 주제로 이끌었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초창기 안창홍 초기 작품의 주제들이 해체된 가족, 소외된 개인, 문명비판 등에 초점을 맞추어 비극적 삶에서 개인의 정서인 비애, 외로움, 처절함 등을 표현하려 했다는 점을 연관시켜 볼 수 있다. 어쩌면 이러한 개인적 정념을 비애미와 같은 표현성으로, 그리고 처참해 보이는 지경으로의 대상을 과장되게 왜곡하는 특징은 안창홍만의 특징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안창홍의 특징은 작가의 자의식과 개성의 강한 표출이기도 했다. <가족사진>(1979)만 하더라도 ‘가족’이라는 소재를 형식적 도안처럼 표현함으로써 안창홍은 관객의 보는 감성을 뒤트는 작품이다. 이러한 안창홍의 불편한 관람성은 이후에도 지속되는데, 이는 관례화된 추상적 정동이 아닌 실재적 중핵에 자리한 트라우마적 정동을 불러 내는 것으로 발전된다. 1980년부터 안창홍은 더욱 표현적 경향을 보였다. 안창홍은 어떤 집단적 화풍이나 양식, 주제의식의 공유 등과 같은 측면보다는 작가 스스로 독자적 화풍의 구축해야한다는 강한 태도를 보였다. 이런 점이 당시 젊은 작가들이 기존의 모더니즘, 아카데미즘과의 단절 뿐 만 아니라 사회비판적 미술과도 다른 지형을 독자적으로 형성하고자 했을 때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3. 사진이미지 활용과 시간성의 의미
: 안창홍의 ‘사진이미지’ 활용 예와 그것의 미학적 의의. 즉 현대미술에 있어 ‘시간성’의 의미와 역사라는 장치를 드러내는 방식으로써의 예술
(1) <가족사진> : 한국사회에서의 ‘가족’이라는 정서적 중핵을 해체한 시리즈
안창홍에게 있어 ‘사진’을 그리는 작업 혹은 사진 위에 한 작업은 특수한 의미를 갖는다. 초기 <가족사진> 시리즈가 가족의 해체라는 비극적 상황을 표현적으로 제작한 작품이며, 안창홍의 개인적 정동 표현의 추이를 볼 수 있는 작품 시리즈이기도 하다. 이것은 2012년의 <아리랑 시리즈>에서 보듯이 모두 눈을 감고 있는 인물들로 등장한다.
안창홍의 사진이미지를 활용한 일련의 시리즈가 지속 반복 재생산된 것의 미학적 함의는 접혀진 채로 보관된 <가족사진>【주석14】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이 작품은 기존 도록에서는 거의 소개되지 않았고, 작가의 작업실에 보관중이었다. 연구팀이 이 작품을 실견할 당시, 그것이 ‘접혀진’ 채로 보관되었기 때문에 촬영할 때 작품이 찢어질까봐 매우 조심스러웠는데, 작가는 “찢어져도 괜찮다”라고 말하였다. 안창홍의 대표적 한국 현대사 시리즈인 ‘아리랑 시리즈’의 근원적 이미지이자 그 실체가 ‘접혀서 대수롭지 않게, 어디에 박혀 있는지도 잘 모른 채로 보관되고 있으며, 그것을 펼치면 찢어질 수도 있는’ 가족의 이미지라는 것은 한국근현대사에 있어 가족과 개인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즉 찢어질 듯 위태롭지만 펼쳐내면 두려울 정도로 확실한 존재성의 형태로서 역사 속 비존재적 존재는 현재화된다는 것이다.
사실 이 접는 그림 <가족사진>의 존재와 현 시점에서의 등장은, 그의 사진 이미지를 활용한 <가족사진> 시리즈에서 출발하여 이어진 <기념사진>, <기념사진-봄날은 간다> 등의 단체 사진들, <49인의 명상>과 <사이보그의 눈물> 등 증명사진 이미지 그리고 <부서진 얼굴>로 망라되는 과거 역사 속에서 찢겨진 삶을 증명하는 증언의 얼굴들이다. 이러한 트라우마적 증언의 현재성이라는 것은 역사가 지속 귀환하는 것으로써의 현재성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사진은 언제나 출력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인지, 사진을 찍어서 아무렇게나 보관하기도 하지만, 이사나 이주 혹은 가족의 해체 때문에 사진을 접어서 보관하거나 심지어 찢어버리기도 한다. 그런 점에 착안하여 안창홍은 ‘접는 그림’인 사진 이미지, 기억이나 기록의 장치이기도 하지만, 반복 재 생산되며, 복제되고, 편집되는 장치인 사진이라는 매체 속성에 착안하여 안창홍은 기억과 역사의 증인들을 훼손의 이미지로 제시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존재한다고 가정된, 혹은 잠재하고 있지만 돌출되지 못한 정동적 중핵은 훼손된 상태로만 현시된다. 이러한 반복 훼손은 역설적으로 사진을 찍었을 그 순간에만 출현했던 정동을 영원히 보존하며, 다른 한 편으로는 안창홍의 회화적 텃치와 변형을 통해서 당대 사회의 시각관습을 한 편으로 비판하는 한편, 역사 속 비존재의 외상적이기에 외설적인 출현을 드러낸다.
사라지고 소멸되고 해체되는 와중에도 시간만은 영원하다는 작가의 메모가 눈에 띈다. 그는 그리하여 사진이미지를 활용하여 역사를 영원 회귀의 시간 이미지화 시켰다. 또한 그 속에서 억압되거나 무관심하게 방치된 채로, 하지만 결코 없어지지 않고 고스란히 보관된 정동, 가령 가족 간의 애틋함, 사랑, 공동체의 우정, 심지어 정치적 결탁 속에서의 배신감과 그것에서 배태되는 비극성과도 같은 복합적인 정동이 단지 개인적일 뿐 아니라 역사적인 것임을 드러낸다. 외상적일지언정 영원회귀하는 한국적 정동의 실체는 안창홍에게 있어 바로 이와 같은 비존재의 확실성으로 드러나고 있다.
(2) <기념사진-봄날은 간다> : 사진의 반복 재생산이라는 매체적 특징을 개념적으로 차용
‘사진 이미지’를 활용한 작품 제작은 1979년 <가족사진>에서부터이다. 이후 안창홍은 ‘사진’을 미디엄으로 사용하기보다는 그것의 미학적 특징을 고려하여 여러 기법과 표현을 구사해왔다. 이때 키워드는 ‘시간’과 ‘시간성’이다. 안창홍은 사진 이미지를 회화화 시키거나, 사진을 출력하여 그 위에 드로잉이나 채색을 하거나, 이미지를 오려서 재구성하는 방식을 썼다.
작품 시리즈별, 시대별, 제작방식별로 보면, <가족사진> 시리즈는 1979년부터 1982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등장했는데 이 시리즈는 사진 이미지를 종이에 유화로 다시 그린 작품들이다. 1985년에 시작된 <기념사진-봄날은 간다>시리즈는 사진 이미지를 대형으로 출력하고 그 위에 아크릴이나 기타 재료로 재 터치를 가한 작품들이다. <49인의 명상>시리즈는 2004년 부산비엔날레 출품을 위해서 제작된 패널 작품으로, 우연히 발견한 증명사진을 대형으로 출력하고 그것에 또한 터치를 가한 작품군이다. 2005년의 <사이보그의 눈물> 시리즈는 사진 이미지를 보고 초상화처럼 그린 그림들로써 종이에 드로잉 방식으로 그린 그림들이다. 2006년부터 2008년경에 제작한 <부서진 얼굴> 시리즈는 사진을 대형으로 인화하여 그것을 다시 오려서 콜라주 방식으로 원본 이미지를 변형시킨 작품들인데, 몇몇 작품은 그 위에 다시 텃치를 가하기도 하였다.
<기념사진> 시리즈는 최초 시작은 1985년이며, 1995년 나무화랑 개인전에서 노랑나비가 그려진 <봄날은 간다>가 소개되었다. 이 시리즈가 본격적으로 주목받은 것은 2000년대라고 할 수 있다. 2001년 제작한 <김치>는 2002 광주비엔날레-멈춤에서 소개되었는데, 당시 5.18 자유공원 내에 전시되었다. 2002년 갤러리 사비나(현 사비나미술관)에서 <죽음의 콜렉션>으로 기념사진 시리즈로 개인전을 개최하면서 <기념사진>시리즈가 국제미술계와 국내 화랑계에 본격 소개된 바 있다.
<봄날은 간다> 시리즈는 주로 단체사진, 즉 무엇인가를 기념하기 위해서 찍은 사진들을 소재로 했다. 안창홍은 ‘기념’의 의미와 ‘사진매체 특성’을 시간성의 차원에서 활용했다. 안창홍이 이 시리즈를 시작한 것은 1985년인데, 어떤 도상은 반복해서 등장하면서 재 제작, 추가 제작되었고, 어떤 시리즈는 발견한 시점보다 훨씬 늦은 시기에 발표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국 사회에서의 ‘기념’, 즉 공식화의 의미는 낯설어진다. 사진의 복제성, 즉 반복 재생산의 측면을 활용한 시리즈다.
4. 인간탐구, 가족사진으로부터 모델화까지
: 재현의 문제에 있어 한국 현대미술사에 있어 남성중심주의 혹은 가부장제적 보기라는 한국사회의 장치가 안창홍에게 있어서는 어떤 기제인가의 문제.
(1) 개인, 소시민, 익명인
<가족사진>에서 <아리랑>까지 보았듯이, 가족에서부터 일반 보통사람, 소시민, 익명인에 이르기까지 한국 역사에서의 ‘개인’, ‘인간’을 작품으로 표현하는데 있어서 안창홍의 작품 세계가 보여준 것은 일종의 시대별로 표현된 정동의 역사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 혹은 정서 공동체의 해체와 분열의 양상을 반증하기도 했다.
초창기 그는 개인적 정념이라고 할 수 있는 슬픔, 분노, 비애미를 표현했다. 1980년대 후반이 되어 그 정념의 원인, 즉 사회-정치-역사적 반향으로서의 개인을 표현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안창홍의 작품에서도 정서의 표현은 보다 침잠되는 경향을 보여 왔다. <부서진 얼굴>은 안창홍에게 있어서 역사 속에서 해체된 공동체와 분열된 개인의 이미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작업이다. 여기서 어머니 이미지인 <기념사진 2>(사진 꼴라주에 드로잉, 148x110, 2007)과 <어머니 혹은 부서진 얼굴>(천 위에 아크릴릭, 310x210cm, 2008)은 안창홍의 분열적 이미지와 애환의 이미지를 대표한다. 안창홍에게 있어서 ‘어머니’란 존재는 자신의 개인사를 되돌이켜 볼 때 애환의 중핵을 차지하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어머니 혹은 부서진 얼굴>에서 어머니는 애틋하면서도 아름답지만, 파괴된 이미지로 등장한다. 어머니의 사랑을 대신하여 받은 “외할머니의 마른 젖무덤과 넘치는 사랑”【주석15】은 유년기 안창홍이 받은 대리-보상 가족애였다. 그래서인지 이 그림에서는 애틋함보다는 아름다움의 대상으로서의 이미지, 그리고 그에 얽힌 복합적인 정서가 표현된다.
(2) 분열적 이미지-얼굴
분열적이면서 복합적인 정서가 ‘미’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갈등적 양상은 안창홍의 <얼굴>시리즈(1986-)와 가면 시리즈, 드로잉으로 그린 여러 인물시리즈, 꼴라주와 화려한 색채로 그린 여성 인물상들 등에서도 두드러진다. 1986년 현실과 발언 탈퇴 이후, 1990년대의 인물도가 등장하기 직전 시기 안창홍은 무수히 많은 얼굴 시리즈와 인물 시리즈, 탈출 시리즈를 습작하기도 하고, 드로잉으로 제작하기도 했으며, 혼합매체로 제작하기도 했다. 어떤 얼굴은 그윽하고 처연한 눈망울의 무표정으로, 어떤 인물은 비현실적인 격자와 색채 속에서 풍자적이고 해학적으로, 어딘지 비정상적이기도 하면서 웃기면서도 슬픈 듯이 드러난다. 어떤 인물들의 표정은 울고 있는지 웃고 있는지를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그리는 등 안창홍의 인물은 정서적으로 상당히 혼란스럽고 분열적인 양상이 많다. 이는 안창홍이 한국사회의 거의 모든 인간존재와 그 형태를 상당히 다양한 양상으로 연구, 탐구하였고 표현해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때 안창홍은 한 인물 안에 존재하는 복합적인 실체들을 목도하였으며, 그 실체가 아무리 추한 것일지언정, 아니면 역겨운 것일지언정 그에 대한 작가 자신의 인간애가 항상 담겨있는 그림을 남겼다.
(3) 안창홍식 모델화
본격적인 모델화로 손꼽히는 <베드카우치> 시리즈에서 평가되었듯이 안창홍의 인물상은 한국사회에서 대상을 타자화시키는 관습적 보기 방식과 그 장치들을 비판하는 것이었다.【주석16】 이미 안창홍은 1990년대 대표적인 안창홍의 인물화 시리즈를 소개하였다. 1990년대 인물화【주석17】와 2007년 이후 <베드카우치> 모델화는 상호 여러 면에서 비교된다. 이 두 시리즈는 대조적이면서도 상통하고 있다. 안창홍은 그 대상 자체에 대한 그의 화려한 색채 혹은 흑백 톤과 구도 등을 통해서 대상을 재해석하여 보여주려고 했다기보다는, 그 대상이 가질 수 있는, 혹은 가질 수도 있었지만(잠재된) 현실에서 잘 드러나지 않거나 심지어 억압된 개체-존재성을 포착해내려 한다는 것이다.
1980년대부터 지속된 안창홍의 인간 탐색과 연구, 인간 존재론의 미학화에 이르기까지 안창홍은 날카로운 눈으로 우선 인물 대상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표현했다. 1990년대 인물상들과 2007년 이후 <베드 카우치>에서 정점을 찍었듯이, 인물이 갖는 내면의 어떤 미묘함과 감춰진 측면을 과감하게 드러냈다. 이는 해당 인물에 대한 관습적 보기, 선입견, 통념 등에 대한 비판이 안창홍 인물화의 주제가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아무리 안창홍이 화려한 색채를 쓰거나 거대한 사이즈의 그림을 그린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해당 인물을 스펙타클화 한다던가 미화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안창홍의 인물화와 모델화는 정형화된 보기의 방식, 즉 한국 사회의 재현방식과 대상의 폭력적 타자화라는 이미지 소비 방식을 정면에서 응대한다.【주석18】
안창홍은 사회에서 개인, 특히 사회적으로 타자화되는 개인이 타자적 이미지로써 유영하면서 폭력적-임의적-관습적으로 규정되는 양상을 돌파해 내는 대상의 단독성을 포착해내었다. 안창홍의 인물들은 그리하여 매우 원초적 형상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안창홍의 여성이미지, 혹은 여장남자 시리즈 등은 특수한 한국 사회의 원초적이며 동시에 도발적인 폭력성을 담지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비가시적, 혹은 배제된 존재의 등장은 관습적이거나 익숙치 않기 때문에 언제나 폭력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 폭력은 거꾸로 사회의 상징화의 장치들을 드러내는 비가시성의 장치다. 안창홍의 인물상은 당당하게 정면을 응시하며, 불편한 시선을 감추지 않는다. 그것은 유혹하는 듯 하면서 손쉬운 접근을 허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숭고하거나 성스럽지 않으며 차라리 세속적이고 노골적인 존재 자체의 매력을 내포하고 있다.
(4) 분열된 정서의 중핵
<어머니 혹은 부서진 얼굴>에서 보듯이, 원초적인 대상에의 애정이라는 개인적이며 주관적인 측면과 더불어 ‘어머니’ 혹은 ‘정념적 대상’에 대한 피상적이면서도 관습화된 정서 또한 깨뜨린다. 항상 그립고 애틋하면서도 원초적 이미지이기도 ‘어머니’라는 대상은 안창홍의 작업 세계에서는 기억 속에 보존된 이미지이며, 부서진 이미지로써만 등장하는 대상이듯이, 안창홍의 분열된 이미지는, 현실의 그 어떤 개인 혹은 존재라 할지라도 이렇듯 관념과 기억 속 이미지와 실재적 출현 사이에서의 균열로써만 등장함을 보여준다.
5. 죽음의 미학 : ‘죽음’을 키워드로 한 안창홍의 미학
(1) 개인적 죽음에서 사회, 정치적 죽음으로
안창홍에게 있어 개인의 ‘죽음’이 사회적, 정치적 죽음임은 자명했다. 그의 죽음이란 주제는 여러 비평에서 다뤄졌다. 1990년대를 통해서는 에로티시즘의 문제와 더불어서 ‘욕망’ 이론을 통해서 분석되었고, 2000년대를 통해서는 ‘존재론-자연환경과 더불어 공존하는 인간과 생명, 자연주의 관점에서의 존재론’ 뿐 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에서의 벌거벗은 생명 등의 관점을 통해서 분석되었다.【주석19】
사실 안창홍에게 있어 ‘죽음’ 이미지는 비교적 초창기부터 일관된 주제였다. 초기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이전까지의 작품에서는 친구 아버지의 죽음 <병실>(1976), 외할머니의 죽음과 비탄을 모티브로 한 <화장터>(1976) 등 개인사에서 비롯된 비극성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1979년 부마사태 전후 안창홍은 표현적 형상미술 시기를 거치면서 ‘사회, 정치적 차원에서의 죽음’의 의미로 전환되었다. 예로는 <그날의 기억>(1980)은 부마사태를 직접 목도하면서 현장에서 그린 그림을 들 수 있다. 이 시기 <가족사진>의 표현도 변화했다. 안창홍은 얼굴의 눈과 입을 검게 뚫어 놓고, 경악과 분노와 처절함을 통해 정치 폭력을 폭로했다. 1980년대 그가 표현한 것은 죽음에 대한 경악과 분노였다. 1980년대를 통해 안창홍의 그림에서의 죽음은, 사회-정치-역사적 죽음이었으며, 그것은 실제로 물리적 신체의 죽음이기도 했지만 폭력에 무기력한 존재성에 대한 분노를 폭발적으로 그린 것이었다.
(2) 산-죽음(living dead)
1980년대 말, 1990년대부터 그는 그림에서 ‘자본’과 ‘욕망’의 문제를 전면화시켰다. 그리하여 그의 죽음의 주제에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자본의 욕망과 에로티시즘의 문제가 정치 폭력 비판과 더불어 등장했다. 심광현이 평한 바, 후기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화에 있어서 생명관리 정치의 폭력을 안창홍은 일찍이 간파한 셈이다. 안창홍은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피해자로서의 죽음의 이미지를 그렸다. 그러나 1980년대 말부터 안창홍은 정치 권력과 자본에 자발적으로 기생하는 인간의 추잡한 욕망이 결과와 인간의 무기력함을 그렸다. <우리들의 일상>(1989)에서처럼 마약에 찌든 현대인에서, 파리를 그려서 글자로 제작한 <욕망>, <씹>, <똥> 시리즈(1999)까지 안창홍에게 있어 1990년대의 죽음의 이미지는 정치 권력과 자본, 그리고 욕망의 트라이앵글 구조 속에서 비극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하잘 것 없는 것이 되었다.
2000년대 자연물 소재, 여행 소재 등이 등장하면서 안창홍에게 있어 죽음의 이미지는 ‘생명’과 같은 존재론적 차원으로 확대된다. 사회, 정치적 죽음의 의미에서 나아가 ‘생명’의 차원에서의 죽음을 다룸으로써 결국 생명의 존재론적인 차원으로 나아갔다. 안창홍에게 있어 사회, 정치적 죽음에 대한 분노가 되살아 난 것은 2010년대였다. 안창홍의 ‘분노’는 이때 한없는 슬픔이자 ‘처연함’으로 등장했다. 특히 2014년 맨드라미 연작 중에서도 “개같은 여름”(맨드라미연작-개같은 여름)에서부터 안창홍의 죽음의 의미는 존재론적이면서도 동시에 정치적이며, 역사적인 것, 그리고 다시 인간 존재론적 운명과 애환, 그리고 지극한 슬픔의 문제로 합쳐진다. 안창홍은 분노의 예술과 생명의 존재론적 차원에 깃든 정동을 같이 미학화한다.
(3) 영원 회귀하는 분노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로 인해 삶을 화려하게 꽃피우기 직전의 청소년들은 무기력하게 바다에 수장되었다. 실시간으로 한국 사회 전체는 그들의 죽음의 순간들을 목격했어야 했고, 그때부터 죽고 있는 자와 죽은 자, 살아도 살아있지 못한 자들의 분노와 슬픔이 뒤섞여 사회전체는 죽음의 트라우마로 휘몰아쳐 들어갔다. 이후 안창홍에게 있어서 이전부터 다뤄왔던 ‘죽음’의 주제가 보다 복합적인 차원, 즉 정동의 복합체로 등장했다.
<맨드라미-개같은 여름>(2014)과 <이름도 없는...> 시리즈(2018-)는 한 쌍을 이룬다. 식물들은 처연한 느낌으로 존재론적 죽음을 형상화한 이 작품에서, 색의 살아있는 텃치들은 죽음을 미학적으로 현재화하는 회화적 장치다. 다른 쌍으로써의 <눈 먼 자들>과 <마스크>시리즈(2016-)은 사회비판적인 한 쌍을 이룬다. 기법적으로도 회화적 텃치와 인공적 콜라주가 병행되고 있으며, 동일한 판형에서 ‘찍어내듯’ 다수의 두상을 제작했다. 눈이 먼 자들의 눈동자는 텅 비어 있다. ‘그날의 기억’과 ‘가족사진’ 등에서의 경악과 분노, 그리고 ‘사이보그’ 시리즈라든가 ‘인간이후’ 시리즈 등에서 나타나기도 했던 무표정한 잔인함을 상기시킨다. 그들의 텅 빈 눈동자는 사회의 냉정하고 잔인한 폭력이 사실상 매우 견고한 것이며, 중층적이며, 역사적임을 함축하고 있다.
6. 한국 미술시장과 대중성의 접점에서
(1) 안창홍의 대중적 인기
안창홍이 거쳐온 화랑들을 대략적으로 살펴보면 부산 현대화랑, 서울 한강 미술관, 온다라 미술관, 부산 공간 화랑, 맥화랑, 샘터 화랑, 사비나 화랑(현, 사비나 미술관), 금호갤러리, 동산방 화랑, 이목화랑, 노화랑, 갤러리 스케이프, 페이지 갤러리, 조현화랑, 가나화랑, 아라리오 갤러리 등이 주요하게 눈에 들어온다.
한국사회에서의 ‘한국 현대미술’에 대한 대중적 이해는 ‘한국 사람의 삶’에 대한 어느 정도 상통하는 측면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국제화라든가 서구 현대미술의 영향등과 달리, 한국에서의 자생적이며 로컬 중심의 미술시장 형성과 전개와 그것의 발전과 일정정도 영향관계에 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안창홍의 주제가 ‘개인’이자 단독자로서의 인간, 한국인이었다는 점, 그리고 그의 표현이 상당히 주정주의적 표현인 점 등을 미루어볼 때 안창홍에 대한 대중의 특수하고 애잔하며 끈끈한 공감대 형성의 이유를 추측할 수 있다.
2020년 현대갤러리가 50주년을 맞이함을 보더라도 한국의 1세대 화랑의 역사는 50년이라 할 수 있다. 가깝게 거슬러 올라가면 미술시장의 활성화는 88 서울 올림픽 전후로부터다. 1980년대 말 안창홍과 가깝게 작업세계에 대해 주목했던 공간은 온다라 미술관, 맥화랑, 사인화랑, 금호갤러리 등이었고 1988년 이후의 다수의 주제 기획전에서 미술사적으로, 그리고 대중적으로 주목되었다. 그리고 지금껏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사비나 미술관이라든가 일산 K씨와 같은 개인 콜렉터의 경우도 1990년대 이후에 형성된 관계다.
특히 1987-1990년 사이 화랑 활성화의 시기에는 모더니즘 계열에 대한 비판으로 단순 추상이 쇠퇴하고, 구상이 다시 등장했던 시기다. 그가 서울-양평으로 작업실을 이전한 1980년대 말, 그리고 1990년대 상황은 안창홍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시기다. 그가 새롭게 작가 정체성을 재맥락화시켰으며, 사회-정치적으로나 화단의 변화에 있어서나 여러모로 중요한 기점이 된다.
(2) 1988년 전후의 한국사회와 미술시장
정치적으로는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1988년 올림픽, 1986년 현실과 발언 해체와 민족미술협의회 창설(1985년 10월), 이후 1986년부터 『민족미학』 발간을 주목할 수 있다. 또한 ‘다양성’, ‘다원화’, ‘국제주의’, ‘새로운 경쟁성’ 등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화단에서도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 체제로 들어섬을 볼 수 있다.【주석20】 그리고 이는 1988년 서울 올림픽으로 훨씬 기대에 부푼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1980년대 말의 상황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인식한 비평이 극소수라는 점에 안타까움을 표하기도 했다.【주석21】 신자유주의 금융 거품이 미술 뿐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비대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이 시기, 지적되는 점은 기존의 로컬리티 중심의 민중미술 계열과 비평에 있어 내부로부터의 변화가 일었다는 점이다. 그와 더불어 화단과 미술시장에서는 (다소 근거를 알기 어려운) 국제화의 경향이 부추겨졌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더불어서 ‘자본’이 미술시장에 많이 흘러들어온 때이기도 하다. 이때 당시 분위기가 어땠느냐, 서울에서의 생활에서 화단과 현대인, 현대사회에 대한 비판적 어조가 풍자적인 측면으로 강해졌다는 질문에 대해, 안창홍은 회고하기를 “화단에서나 사회적으로 돈이 많이 풀렸다.”【주석22】 그로 인한 여러 추태를 보게 되었음을 회고하였다.
1980년대 말 안창홍이 참여한 단체전을 보면, 《80年代 韓國美術의 位相展전》(1988, 한강미술관)과 《닫힌 시대의 저항 작가전》(1989.2.19.-2.28, 신학철, 임옥상, 안창홍 외 6인, 현대백화점 미술관), 《부산, 80년대의 형상미술전》(1989, 부산 사인화랑), 1989년 5월 서울 금호미술관의 《80년대의 형상미술전》, 《한국현대미술의 『韓國性』 모색 Ⅲ 葛藤과 對決의 時代》(1991, 한원갤러리 서울, 프랑스 카뉴 회화제 심사위원상을 탄 1982년 제작한 <가족사진> 재 소개), 《90년대 우리미술의 단면전》(1990, 가람화랑, 갤러리 상문당, 학고재, 현화랑, 윤범모 기획), 《현실과 발언 10년전》(그림마당 민, 1990), 《구상미술의 오늘, 꿈과 현실의 대결》(1991, 현대백화점 미술관, 윤진섭 기획), 《풍자화, 그 해석과 비판의 소리》(1991, 현대백화점 미술관, 윤진섭 기획) 등이다. 1980년대말 1990년대 초에 기존 미술운동 성격과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성을 점검하는 총론적인 전시들이 많이 개최되었으며, 안창홍 또한 이에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80년대 말-1990년대 초까지의 한국현대미술 전시 경향 중에서 안창홍이 참여한 전시들은 ‘형상미술’, ‘구상미술’, ‘풍자화’ 등 한국미술 정체성 관련한 전시가 다수다. 당시 1980년대 후반 단적인 예로는 ‘현실과 발언’ 해체와 비평적 모색으로의 재 탄생이라는 한국 현대미술사에서의 모멘텀이 있다. 이 시기 전반적으로 사회는 새로운 신자유주의 체제로 성급히 이행하였다.
(3) 1990년대 호황기, 산-죽은(living-dead) 모델의 보이지 않는 그림자
안창홍의 1990년대 인물도라고 칭하는 원색 전신 인물상이 집중 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1993년 금호미술관과 맥화랑에서 발표된 <우리도 모델처럼>(1991), <풀잎사랑>(1992) 등의 대표작으로 구성한 8회 개인전에서부터다. 이후 1995년 이목화랑과 나무화랑에서의 개인전에서 화려한 1990년대 안창홍이 재탄생함을 볼 수 있다. 어쩌면 1993년 금호미술관과 맥화랑 전시 이후 안창홍은 ‘작품 거래’를 통해서 자신의 입지를 다시 굳히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맥화랑에서의 개인전은 그 이전인 1991년의 개인전이 1989년 온다라미술관 개인전(성완경의 비평글인 “독립생활자의 초상”이 소개된 개인전, 부산시절을 마감하면서 한 전시)과의 큰 온도 차이를 보이는 점에 더 주목할 수 있다. 맥화랑의 1991년, 1993년 개인전과, 1993년 금호미술관 개인전에서 안창홍은 확연히 달라진 그림세계를 보였다.
안창홍 또한 국내 로컬의 이해와 공감대를 획득한 것도 바로 1990년대 화단을 통해서다. 안창홍은 이 과정에서 일종의 매니아-대중성을 획득하였다. 2000년대 초반 한국에서 국제적 수준의 화랑 성장의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대두되었고, 그러한 시도도 있었다. 그 와중에 안창홍은 가나화랑과 아라리오 등에서 주목되기도 했으며 화랑미술제 등에도 출품하게 되었다. 안창홍의 작업세계에 대해 작업과 작품만을 갖고 안창홍을 비평적, 미학적으로 이해할 수는 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생명관리 정치에 있어서 안창홍이 그린 단독 원색의 초상화들은 1990년대 한국 사회의 적나라한 초상이기도 했다. 그것은 동시대 화단에서 사랑을 받았고, 그것은 그만큼의 대중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토대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 현대 미술의 대중적 공감대 형성과정에는 한국 현대 미술시장의 특성과 로컬리티의 형성과정과 거래 현황 등의 보다 복합적인 맥락이 있고, 또한 한국 현대 미술사 서술과 아카데미적 관행이라는 난제들도 있다. 안창홍의 특수성은 또한, 이러한 한국 현대 미술의 특수한 시스템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키워드가 된다는 점에도 있다.
Ⅲ. 나가는 글 - 한국 현대미술사에 있어서 안창홍의 의의
1. 비평적 측면
안창홍은 여러 면에서 앞서나간 작가였다. 그리고 그의 앞서나감은 자신의 작품과 예술의 위상을 한국 현대미술사에 새롭게 정초시키게 한 것이었다. 그는 한국 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무시되고 억압된 인간 생명의 ‘잠재성’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것을 그림에 있어서 그는 고유성과 단독성을 주목했다. 그래서 그는 그림을 양식화시키는 것에 저항했고, 쉽게 상업주의에 물드는 것을 비판해왔다. 그는 언제나 생동할 수 있는 생명력을 그리기 위해서 끊임없이 새로운 표현과 새로운 작업 방식을 시도해 왔으며, 그 과정은 단지 ‘새롭다’ ‘개성적이다’라는 평을 넘어선다. 안창홍은 한국 현대미술에 있어서 여러 장치(apparatus)를 새롭게 탄생시킨 견인차 역할을 해왔다. 자칫 이상주의적, 관념적이 될 수도 있는 미술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미술을 위해 지금껏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는 안창홍의 한국 현대미술에 있어서의 의의는 비평가의 탄생, 그림(독자적 화업)의 탄생, 대중(관람)의 탄생, 그리고 한국 현대미술 시장과 개인(콜렉터)의 탄생을 촉발하면서 시대와 미술을 계속 탄생시키고 있는 견인차 역할이라고 하겠다.
2. 한국 미술시장과의 관계성
2000년대 이후로는 공공 기관의 역할이 비대해졌다. 그리고 개인 콜렉션과 개인 화랑들의 활약과 국제적으로 유명한 갤러리들의 경향들은 다소 뒤섞이게 되었다. 2000년대 이후로 미술에서의 공공성 문제와, 정부 지원과 육성의 문제, 국제화의 문제, 그리고 미술관등 제도의 활약이 커지면서 안창홍에 대해서도 민중미술 혹은 형상미술 등, 즉 아카데믹한 개념으로 설명하려는 경향만 강해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1990년대(특히 광주비엔날레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 현대미술의 성장에 있어서는 소위 ‘한국 화단’이란 것에는 개인 화랑들의 역할이 컸다. 안창홍은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 로컬 화랑과 비평계, 그리고 미술사적으로 모두 주목되었던 작가다. 그래서 안창홍의 한국 현대미술사적 의의는 한국 미술시장의 형성과 전개 과정에서의 역할에 대한 분석과도 연계될 필요가 있다. 그에 대한 미술사적 연구는 그의 대중성이나 콜렉터 경향성 등의 사안과 병행되어야한다. 이러한 대중성 분석이 비평의 몫이라면, 콜렉터 경향성과 한국 화랑의 형성과 전개과정 분석, 그리고 작품 거래 현황 분석은 또 다른 전문분야이기도 하며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복잡한 지형도를 형성하고 있다. 앞으로 가능하다면 안창홍의 한국 현대미술사에서의 위상을 서술함 있어 콜렉터 연구, 한국 화랑 연구, 한국의 미술시장의 태동과 형성 전개과정 등을 보완하여 보다 분석적인 연구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본다.
3. 미학, 미술사적 측면
안창홍의 예술활동은 그 독자성으로 인하여 민중미술, 형상미술 등 어떤 이즘이나 그룹운동, 사조 등으로 서술되던 기존 미술사의 아카데미적 관례 자체를 메타화시키거나 무대화시켰다. 안창홍이 추구하고 실천한 작가상은 예술에 있어서 동시대성이란 것이 ‘남과 다른’, ‘항상 끊임없이 저항하고 비판하는’, ‘그 어떤 것도 예외 없이 무대에 올린’ 작가상이다. 즉 ‘같은 주제로 묶이는 집단주의’ 혹은 ‘권위에 묻어서 유명세를 떨치는 작가’가 아닌, 항상 이례적이고, 언제나 돌출적인 작가상이다. 안창홍은 작가_단독성(artist_singularity)을 잘 보여준다.
미술사 서술에 있어서 흔히 양식과 기법, 표현성과 미학, 도상과 알레고리, 그리고 대중성 등의 문제들이 우열을 다투며 서술되곤 했다. 가령 사이버네틱스 관점에서라면 양식과 새로운 기법을 우선시한다던가, 표현주의 관점에서 작가의 퍼포먼스와 에피메랄리티(현대적 시간성)를 강조하면서 예술의 종말을 논한다든가, 도상과 알레고리의 측면을 내세워 사회 비판성적 주제의식을 강조한다든가 하는 양상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덧붙여서 안창홍은 ‘작가’의 위상과 정체성의 문제와 대중성의 문제, 즉 시장을 둘러싼 미술과 자본의 관계가 주요한 변수로 또한 등장했다.
안창홍식의 비미학, 즉 가장 개인적이고 단독적인 것으로부터 사회, 정치, 역사적인 차원까지 넘나들면서 구사하는 비미학의 현란함은 기존의 아카데미즘적 미학이나 비평적 미학의 차원을 항상 넘어서 다른 지평을 여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전 작품세계는 한국의 현대화에 있어서 자본주의-금융자본주의를 경유하면서 재편된 현대의 금융정치 제도 비판에 이르기까지 실로 생명관리정치에 대한 비판적 고찰의 일환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안창홍의 작가와 작품 해설을 위해선, 그의 비-양식, 탈-기법, 주관적 표현성과 분열적(해체적) 기법, 그리고 탈-도상과 알레고리의 문제와 더불어 안창홍이라는 개인과 개인사적 이슈들, 그리고 나아가 현대사회의 자본-금융 장치에서의 시스템까지를 모두 우열 없이, 사회적 선입견이나 주류 미학 미술사적 견해에 기대지 않고 그 자체들을 갖고 복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안창홍은 어쩌면 1970년대-2010년대를 거쳐 한국 현대 미술사 서술에 있어서 새로운 방법론과 관점의 필요성을 대두시킨 장본인지도 모르겠다.
안창홍 개인 또한 주류적인 것(그것이 권력에 관한 것이건, 자본에 관한 것이건)의 권위에 기대지 않았고, 비가시적이고 비주류적인 것의 당돌함과 주체적인 측면을 예술로써 등장시켰다. 또한 안창홍의 예술에 있어서 역사성이라는 것은, 미래적인 것의 불확실성으로써의 도래, 즉 동시대성이란 것을 순차적 시간성으로부터 돌출한 순간적 조우들이자 그것의 발생적 중첩으로써 드러내는 것이었다. 가령 현재성이란 것은 미래의 정치적으로 혹은 아카데미적 가능성으로써의 토대가 아니라, 불확실한 것의 잠재태로써의 현재성임을, 그리고 그러한 미학이 예술 형태로 등장하고 있음을 구현했다고 할 수 있다.
미학적 차원에서 봤을 때, 안창홍에게 있어서 ‘죽음의 미학적 승화’는 의미심장하다. 가령 2000년대 후반부터 그는 전작들에서 시도했던 주제, 혹은 표현했던 단편적 소재들을 다른 방식이나 기법, 혹은 재료로 다시 다루곤 하는데, 그것이 단순한 변주의 차원이 아니라, 주제의식이 존재론적 차원으로 깊어지면서 미학적 승화를 이뤄낸 것이었다. 사실 안창홍에게 있어서 이러한 주제의식의 심화와 더불어 표현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은 초기부터 일관되었다. 가령, 초기 개인사적 주제에서의 정서 표현이 주로 감정적 차원, 즉 직접적인 고통스러움과 슬픔의 표현이었고 비애미와 비극성의 차원이었다면, 사회-정치적 비판적 주제에서의 정서 표현은 알레고리적이다. 특히 ‘현실과 발언’의 시기에 보여줬던 우화적 표현을 예로 들어 볼 수 있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상황은 우스꽝스러움과 동시에 냉소적이기에 잔혹하게 느껴지며 섬뜩하다. 즉 정서의 복합체로써의 인간형과 그것의 사회상을 비판함에 있어 직접성과 숭고미와 같은 것을 쓰기보다는 알레고리적 미학을 활용한다. 그리하여 당대 예술적, 사회적 비판이란 것은 결국 그 사회 주체의 심연에 자리한 정동적 중핵이 ‘부끄러움(수치심)의 차원’에서 등장하게끔 한다는 것이다.
안창홍이 1980년대 말 여러 인간상의 관찰과 실험을 거쳐서 1990년대의 한국 사회에서의 욕망과 자본의 비판을 위해서 제작한 1990년대식 인물상과 2000년대 후반 <베드카우치>에서의 인물상은 이러한 직접성의 미학과 알레고리적 미학의 양 극단을 보여준다. 즉 안창홍은 그 특유의 직접성(개체성, 도발성, 감각성)과 알레고리적 복합성(사회, 정치, 예술 장치의 중핵에서 작동하는 복합적 정동 정치) 사이에서 자유롭게 표현을 한다는 것이다. <양귀비>와 <맨드라미>도 이러한 양 극단의 미학 정치의 일환이며, <마스크>와 <눈 먼 자들> 그리고 <이름도 없는...> 또한 그러하다. 그가 <화가의 손>을 제작할 당시, ‘색’에 중점을 두었음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금색, 원색, 그리고 흑색(검은색)을 통해서 단적으로 이러한 미학의 극단성과 그것의 함의를 대중화시킨 바 있다.
안창홍은 예술이란 것은 불확실성을 상징화, 안정화, 고착화시키지 않고 불확실함 그 자체를 확실성으로써 다룰 수 있는 장치임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안창홍은 현재에 너무도 뚜렷하게 드러난 것을 안정화, 권력화 시키는 것으로서의 예술을 하지 않았다. 그는 현재에는 암흑과도 같이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인 것이기에 현재에서는 소수적인 것 혹은 버려지거나 혹은 무시되거나 폭력의 대상으로써만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의 존재성을 드러냈다. 그러한 쟁투적 양상에는 예술 시장의 문제, 작가의 정체성과 위상의 문제, 한국 사회의 계급과 인식의 문제, 그리고 역사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복합적이었다. 안창홍에게 있어 예술이란 장은 여타의 생명이 쟁투하면서, 권력싸움과 생명싸움을 지속하는 장이다. 안창홍은 그의 예술의 여정 속에서 한국 현대라는 암흑을 뚫고 비쳐 나오는 소수적인 것의 번뜩이는 생명력이라는 섬광을 목격한 당대적 인물(the contemporary)로서의 작가라 할 수 있다.
안창홍 시대별 작품 설명
시대 구분
Ⅰ. 1970년-1980년대 : 양식 실험, 인간 주제의 심화
부산시절, 여러 소그룹 조직 및 활동기, 부마사태 등 사회 정치적 상황 악화로 인하여 ‘인간’ 주제에 있어 주정주의적 미학에서 사회 정치적 비판적 주제로 확장. 1976년 전후로 구분.
Ⅱ. 1983년-1986년 : 소그룹 미술 운동과 확장기
: ‘현실과 발언’ 활동기. 정치 비판적 우화 다수, 단독 작품들 제작.
Ⅲ. 1987년-1990년 : 새로운 탐색
: 1988년 3월 서울 화곡동(8개월), 양평으로 작업실 이전하면서 서울 활동 본격화, 다수의 ‘얼굴’로 다양한 얼굴 표정, 다양한 현대인의 초상 제작, 세태 풍자적 작품 제작
Ⅳ. 1990년대 : 인간 표현의 다변화
: 원색의 전신 인물화 다수 등장, 정물화와 여행드로잉 다수. ‘욕망’과 ‘자본’, ‘권력’의 관계를 풍자적으로 묘사한 시기
Ⅴ. 2000년-2007년 : 역사와 시간성
: 사진이미지를 활용한 다수의 시리즈 제작
Ⅵ. 2008년-2010년대 중반 : 죽음의 미학화
: <베드카우치>를 시작으로 하여 ‘죽음’을 주제로 한 존재론적 차원의 미학을 보여줌, 기존의 작업들이 하나의 시리즈로 묶이는 경향, 전작을 통과하는 주제들이 묶여 나옴.
Ⅶ. 2016년-2019년 : 예술가의 소명과 예술의 역할
: 입체회화시기
Ⅰ. 1970-1980년대 : 양식 실험, 인간 주제의 심화
1. 시대 개관
안창홍에게 있어 이 시기는 그의 개인사적 소재를 그림에서 표현적으로 심화시킨 시기다. 안창홍은 청소년기부터 그의 삶 자체가 ‘살아남기’위한 쟁투(struggle, 고군분투)의 과정이었다. 부산의 젊은 작가로서 그는 당시 한국이 처한 시대의 비극과 개인의 비애를 예술로 승화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리하여 그는 점차로 ‘인간(human)’을 주제로 하여 주제의식을 심화시켰다.
남아있는 작품 중 1970년대 최초 작품으로는 <사르비아 꽃밭>(1971, 공식적 첫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그가 다니던 고등학교 교정에 만발한 사루비아 꽃을 그린 것으로, 점으로 찍어서 그리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는 나중에 꽃 시리즈, <양귀비 언덕>(2004-)와 <맨드라미>시리즈(2014)에서 그 기법이 재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가 처음으로 유화를 연습한 것은 중3때로, 작가노트 “비밀의 숲”에서 그가 자주 가던 저수지 가의 숲에서 혼자서 그림 연습을 하던 때를 회상한 것을 볼 수 있다.【주석1】
1970년대 그가 습작하며 탐구한 작가로는 샤갈, 루소, 피카소 등이 있다. 그 밖에 돌 하르방 연습을 하기도 하였다. 안창홍은 인물형상의 다양한 형태 연습, 자세 표현 연습 등을 하였다. 상상 인물화(<싸우는 사람들>(1974), <달을 보고 놀란 아이들>(1976), <문명의 기슭>(1976) 등에서 그 화풍 연구와 실험이 엿보인다.
1970년대 그림의 양식별로 보면 인물화, 정물화, 상상 풍경화(풀밭과 하늘 배경, 실내 공간 배경)가 있다. 또한 실제 작업실이 있던 대신동과 자갈치시장 근처의 영동 풍경을 그린 실경화가 있다. 이때 부산 역 근처의 대신동은 일종의 달동네(판자촌)가 있던 곳인데, 안창홍은 그곳 목조건물 2층에 1973-1975년에 작업실을 갖고 있었다. 1973년 친구들은 고등학교 3학년을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였다. 그러면서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간 친구들도 많았고, 안창홍은 신세지고 있던 친구집에서 나와야했는데 마침 친구 한 명이 부모로부터 대학 입학 선물로 받은 작업실을 내주었다. 그렇게 부산 대신동 시절이 시작되었다. 그 무렵 그린 자화상 <우주의 심장>(1973)은 “평소 좋아했던 ‘루소’분위기가 풍기기는 하지만, 내가 처한 상황과 감정이 이입되도록 노력을 기우린 자화상 중 하나이다”라고 회고한다.【주석2】 대신동 주변 풍경은 1975년 작 <풍경>에 반영되었다.
혹자는 안창홍의 초기 그림들이 그 어두운 측면과 색채 때문에 매우 노숙(老熟)했다고도 보는데, 화가의 자의식을 엿볼 수 있다는 자화상도 당시에 여럿 그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주로 한 쪽 손에 붓을 들고 거울을 바라보는 본인의 모습니다. 거울을 응시하는 자기 자신의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그렸다.
1975-1976년 2년간 방위 생활을 하였다. 방위 생활 후 1976년에는 수정동 도로변 목조건물 2층에 작업실을 두고 미술학원을 하였다. 자갈치시장 근처에서 작업을 했을 때 보고 다닌 항구의 풍경이 1976년 작 <어부>, <난파선>, <어부의 아내> 등에 반영되었다. 1977년에 다시 미국문화원 뒷골목 목조건물 2층으로 작업실을 옮겼다.
안창홍은 부산시절 다수의 소그룹을 조직하기도 했다. 1970년대 후반, ‘기류’(1977 결성-1979 해산), ‘POINT 현대미술회’(1977 창립-1981탈퇴, 매년 전시 참가), ‘농’(1981 결성, 탈퇴), ‘구조그룹’(1981 가입, 탈퇴), ‘한국미술청년작가회’(1981 탈퇴) 등의 그룹 활동이 있었고, ‘시대정신’ 전시와 ‘현실과 발언’(1983 가입-1993 해체) 기획전에 참여한 바 있다.
1976년 안창홍은 2년간의 방위생활을 마치고 안창홍의 작업은 훨씬 역동적이 되었다. 1975년 이전에 피카소나 루소 등의 습작등이 1976년 이후로는 개인 양식화되어 한층 개성적이 되며, 표현성이 강화된 것을 볼 수 있다. 미술활동도 활발해졌다. 1976년 정복수와의 2인전으로 첫 번째 전시회를 했다. 이때 <문명의 기슭>(1976), <화장막에서>(1976), <병실>(1976)등을 발표했다.
이 작품들을 그림 배경에는 안창홍의 유년기에서 배태된 가슴아픈 상실의 감정들이 있다. 유년기 안창홍의 어린 시절을 살펴보면, 그는 부모의 이혼과 1959년 사라호 태풍 때문에 수장된 고향인 경남 밀양을 떠나 대구로 이사했다. 어머니와 헤어져서 안창홍은 1960년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때 엄마를 대신하여 어린 안창홍을 보살펴준 외할머니는 안창홍의 대체 모성의 중핵으로 기억된다. 1966년에 중학교 1학년 1학기에 아버지의 직장 이동으로 대구에서 부산으로 이사하였고, 1968, 중학교 3학년 때 비로소 안창홍은 자신을 돌봐주신 외할머니의 사망에 대해서 멀리서나마 소식으로 듣게 되었다.
안창홍은 중학교 3학년 졸업과 동시에 독립했고, 혼자서 고등학교에 진학했으며 그때부터 안창홍은 지금껏 독립자로서 생활하고 있다. 당시 그는 집에서 나온 후 친구집에서 생활하였는데, 그때 친구의 아버지가 간암으로 돌아가신 에피소드가 작품 <병실>에 반영되었다. <화장막에서>은 상상으로 그린 작품으로, 화장터 앞에 눈에 가득 눈물을 머금고 흘리는 한 젊은 사내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어 있다. 가까운 사람, 혹은 가족의 상실과 해체는 유년기 안창홍에게 황망한 슬픔의 감정과 죽음과 상실 앞에서 무기력하며 우울한 정서를 환기시켰다.
<병실>과 <화장막에서>는 비애미를 그렸다. 어린 마음 속에 순수하게 품었던 사랑과 보살핌의 대상을 상실한 쓰라린 고통과 비애감을 표현하고자 하면서 인물을 다소 표현주의적으로 그렸고, 전반적으로는 푸른색을 주조로 하고 있다. 작가는 마치 피카소의 청색시대를 연상시키지 않는가 하고 반문한다. 가까운 사람, 가족 등을 예상치 못하게 상실(질병이나 사고 등으로 인한 사망)하게 된 자의 슬픔, 비애, 남겨진 자의 고독감 등이 그가 초기에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과 죽음’을 소재로 그린 그림들의 정서적 특징이 됨을 볼 수 있다.
<문명의 기슭>(1976)이란 작품은 전시에서는 2점이 출품되었는데, 현재는 한 점만 남아있다. 들판을 배경으로 하여 풀을 뜯고 있는 한 사내가 있다. 마치 그는 기아에 허덕여 풀을 뜯고 있는 듯 하기도 하고, 벌거벗은 몸을 하고 있어서 원시시대로 돌아가고 싶은 갈망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복잡한 도시의 풍경이 아니라 망망대해 같은 초원의 풍경은 전반적으로 다소 황폐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 들판에 나체 인간이 덩그러니 고독하게 버려져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문명과는 상반된 모습을 통해서, 부유하지 않고 가난한, 가난하다 못해 기아에 허덕이는 존재의 필사적이면서도 야만스러운 모습을 다소 비애적으로 그렸다. 작품이 표출하는 정서는 다소 고독한 소외감과 처절함 같은 것으로써 이 작품에서부터 자본주의나 도시의 문제, 고독한 인간 존재의 모습이 한데 얽혀 표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문명의 기슭 에스키스를 보면, 평범한 인간의 형상이 아니라 원시인인지 아니면 유전자 변이된 신인류인지 알 수 없는 괴물처럼 보이는 나체의 한 존재가 물고기를 잡고 있는 모습이다. 즉, 여기서도 원시 혹은 디스토피아적 미래상이 혼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981년 공간화랑(부산), 1980년 청년작가회관(서울)에서 <인간이후> 시리즈로【주석3】 첫 개인전을 가졌다. 이때 <가족사진> 시리즈도 몇 점 선보였다. <가족사진> 시리즈 중 1982년 제작품이 1989년 프랑스 카뉴 국제회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였다. <가족사진> 시리즈를 발표함과 동시에, 젊은 의식전, 인간전, 삶의 미술전, 시대정신전 등을 통해 군부 독재 정치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저항미술운동을 시작하였다. 또한 그는 부산에서 김응기, 박은주와 함께 부산 청년비엔날레를 창립하였는데, 안창홍은 활동을 지속하진 않았지만, 결국 부산 청년비엔날레는 지금껏 중요한 행사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고, 안창홍의 1970년대 말 1980년대 부산의 새로운 미술 운동 혹은 양상에 끼친 영향을 볼 수 있다. 1983년 ‘현실과 발언’ 합류하여 활동을 시작하였고, 1986년까지 현실과 발언 주제전에 참여했다.
1980년대는 무엇보다 <가족사진> 시리즈 지속, <위험한 놀이> 시리즈를 포함한 색연필화가 1983년부터 등장하면서 주축을 이룬 점, 그리고 고통 받는 자의 초상이나 소재 등이 많이 그려진 점, 가령 버려진 인형, 덫, <새> 시리즈, <얼굴> 시리즈 등을 주목해 볼 수 있다. ‘현실과 발언’ 주제전에 참여하면서 그린 <전쟁> 시리즈도 주목된다. <위험한 놀이>, <전쟁>, <새> 등의 ‘현실과 발언’ 참여시기에 제작한 시리즈가 일종의 안창홍의 특유의 색연필화라는 점, 그 밖에도 <새>, 덫 등에서 콜라주 기법을 많이 활용한 작품을 지속한 점도 눈에 띈다. 이때 안창홍은 시대의 비극의 원인을 가깝게는 정치적인 것에서, 그리고 나아가 역사적인 사건들과 권력에 기대어 부패를 일삼은 권력형 폭력에서 찾게 되고, 안창홍 작업에서의 ‘분노’가 우화적으로 표출된 시기이다.
1987년 전후로 하여 콜라주 작업의 경우, 이미 <인간이후>에서 사용된 콜라주 기법을 떠올리게 한다. 잡지에서 인물 얼굴의 부분들을 따로 오려서 붙이기도 하면서 조합한 결과들을 보여주는 데 다소 괴기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이때까지는 주로 ‘가족’과 ‘얼굴’ 등 집단보다는 개인에 주목한 경우가 많다. ‘얼굴’ 시리즈를 지속하면서 안창홍은 여러 인간형상에 대해서 탐구 혹은 생각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가면과 데드마스크 등을 많이 제작하였다. <인간 이후>나 <가족사진>에 등장하는 얼굴들을 어떻게 표현할지를 연구한 것일 수도 있지만, 본래 안창홍이 인간의 얼굴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안창홍은 얼굴에 대해, “얼굴= 얼(넋)이 드나더는 굴 얼골= 얼(넋)의 모양(형태)”【주석4】라고 하였다.
개인전 별로 보면, 1980년 1회 개인전에서 안창홍은 <가족사진>(1979), <가족사진>(1980), <인간이후>를 발표하였다. 1984년 개인전에서 <위험한 놀이>와 <전쟁>시리즈, <화실풍경>이
1986년 개인전에서 <시인의 잠>(1985), <새>시리즈가 발표되었다. 1980년대 후반에 ‘얼굴’과 관련한 작업이 많은데, 드로잉작품, 종이죽 작품, 시멘트 작품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서 갖가지 형상의 ‘마스크’ 같은 얼굴들을 그려내거나 만들어 낸 것이다. 이는 1987년 개인전에서 출품되었다. 1987년 개인전에서는 <얼굴> 시리즈 외에도 <버려진 인형>, <덫>, <도시의 뒷골목>, <뽐내는 지배자>, <푸른빛 면류관> 등 고통받는 자의 초상과 같은 인물 형상들이 대거 출품되었다. 1989년 개인전에서는 <들의 비가>(1987)가 출품되었는데, 이는 당시 안창홍의 젊은 시절의 초상이라고 평하는 경우가 많다.
1970년대 후반-1980년대까지를 개관해볼 때 개인전에서는 주로 ‘가족사진’ 시리즈와 ‘인간’주제 시리즈, 그리고 ‘화가의 정체성 혹은 예술가 정체성’에 대한 자의식적 작품들이 출품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선택하여 출품한 단체전의 경우, 당시 특성상 주로 그룹 활동 전시였는데, 사회비판과 문제의식이 강한 전시들이었다.【주석5】
2. 1970-80년대 초반의 작품 예【주석6】
(1)1970년대 초: 습작시기 -> 인간에 대한 개인적 차원의 정서적 주제
<사르비아 꽃밭>(종이에 수채, 1971)
고등학교 1학년 때 그린 그림으로, 학교 교정에 만발한 사르비아를 점으로 찍어서 그린 그림이다. 이렇게 점으로 찍는 그림은 이후 꽃 시리즈 중에서도 ‘맨드라미 시리즈’로 이어진 기법이기도 하다.
<이별>(갱지에 볼펜, 1972)
이는 일종의 크로키 연습 삼아 그린 것이기도 하다. 야간 열차를 타고 부산에서 서울을 오가던 시절에 철도 역사를 보고 그린 그림이다. 그때 여자가 슬피 우는 장면을 보고 그린 것으로, (추정컨대) 군인을 보낸, 이별의 아픔을 그려본 드로잉이다. 양식은 샤갈 스타일로 그렸다.
<심연 속으로>(종이에 유채, 1972)
물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고독과 우울을 그렸다.
<토르소가 있는 정물>(종이에 크레파스, 1972)
<낙서>(캔버스에 유화, 1972)
어린이로 보이는 인물이 목발을 짚고 있는 전신상그림이다. 당시 드문 캔버스 작업이다. 분실되었으며 <절름발이>라는 제목의 이미지가 안창홍의 그림모음에 수록되어 있다.
<형수>(종이에 연필, 1972년 11월 29일)
당시 고등학교 2학년 때인데, 학교를 그만두고 이종빈에게서 데생을 배웠던 시절에 그린 그림이다. 선배 와이프의 뒷모습을 그렸다.
<우주의 심장>(캔버스에 유채, 1973)
부산 대신동 시절을 시작하면서 그린 자화상
<자화상>(캔버스에 유채, 1973)
자화상이다. 아주 이른 시기의 자화상이다. 개인소장품이다.
여러 점의 자화상이 있다. 붓을 들고 있는 모습과 거울을 보고 있는 모습이 많다.
<거울 속의 자화상>(캔버스에 유채, 1973)
고등학교 졸업때 미술전람회 밖에서 있던 그림이다. 입체파의 청색시대를 연상케 한다.
<풍경>(종이에 유채, 1973)
부산의 달동네 판자촌을 그린 그림이다.
<무제>(캔버스에 유채, 1974)
샤갈 화풍을 연구할 때 그린 그림이다. 서 있는 인물 단독상이 있다. 꽃밭을 배경으로 한다.
<싸우는 사람들>(캔버스에 유채, 1974)
이 작품은 대신동 화실에 있을 때 그린 그림이다.
<풍경>(캔버스에 유채, 1975)
부산 대신동 풍경이다. 공장지대가 펼쳐진다.
<난파선 Ⅱ>(종이에 유채, 1976)
자갈치 시장, 영도쪽에 작업실이 있을 때다. 바다에서 어부의 삶을 많이 그렸다.
(2) 1976-1980년대 초 : 세태 비판적 차원으로 인간 주제 심화【주석7】
1976년 안창홍은 방위생활을 마치고 입시학원을 열었다. 부산항 주변에 작업실을 두고 있었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말까지 안창홍은 화가로서, 가장으로서 생활이 어렵기도 했으며, 변화가 많았던 시기다. 1978년에 결혼, 1979년에 첫 아들 출생. 1984년 둘째 아들 출생. 1988년 3월 가족을 부산에 두고 서울 화곡동으로 이사. 8개월 후 양평 정착.
<문명의 기슭>(캔버스에 유채, 1976)
정복수와의 2인전에 출품되었다. 문명과 상반된 쪽이라는 의미에서 ‘기슭’이라고 하였다. 풀을 뜯고 있는 나체의 한 인물이 보인다. 이는 기아를 상징할 수도 있고, 원시상태로 돌아가고 싶은 갈망이기도 하며, 동시에 인간의 소외, 고독의 정서가 느껴지는 그림이다.
<병실>(캔버스에 유채, 1976)
안창홍은 중 3때 집을 나와서 친구집에서 생활을 했다. 그 친구의 아버지가 간암으로 돌아가셨는데 그 즈음에 안창홍은 엄마처럼 키워준 외할어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던 차였다. 생이별의 느낌, 슬픔 등 죽음에 대한 비애감을 그렸다. 전반적인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돌며 마치 피카소의 청색시대를 상기시킨다. 전반적으로 슬픔과 고통, 비애감의 정서가 주되다.
<화장막에서>(1976)
가족의 죽음 후의 상황을 상상하여 그렸다.
<아무도 없는 달 밤에>(종이에 유채, 1976)
같은 제목의 그림이 하나 더 있다.
<달을 보고 놀란 아이들>(캔버스에 유채, 1976)
안창홍이 ‘피카소풍’을 습작하였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기존 도록에서는 1974년 작으로 소개되어 있다.【주석8】 이 작품이 1976년 작품임을 알 수 있는 것은 1976년에 그린 피카소풍의 푸른색 배경의 그림이다. 이 피카소풍의 그림에는 안창홍 사인과 더불어 1976년의 년도가 앞면에 기입되어 있다. 안창홍은 1976년 피카소풍을 그리고 몇 달 후 ‘달 밤’을 배경으로 같은 도상의 작품을 제작하였다고 기억하였다. 같은 연도에 ‘달 밤의 들판’을 배경으로 한 그림으로는 <아무도 없는 달밤에>(1976)가 있다. 2019 안창홍 디지털 아카이브 연구팀에서는 작가의 기억과 싸인 원칙, 그리고 작업실에서 발견한 ‘피카소풍 작품’과 <아무도 없는 달밤에>를 바탕으로 하여 <달을 보고 놀란 아이들>의 제작년도를 1976년으로 수정하였다.
<사냥>(갱지에 펜, 1976년 7월 7일)
문명의 기슭 에스키스다. 다소 괴물같은 형태의 인물이 물고기를 잡아먹는 장면이다.
<무제>(종이에 펜, 1976)
‘인간이후’시리즈 에스키스에 해당한다. 담배꽁초 버리고 간 것을 모아뒀는데, 그걸 그렸다.
<푸른 방>(1977)
그렸다가 지웠다. 칼라 이미지가 없다. 파란색 바다 배경에 붉은 색 옷을 입은 인물을 그렸다.
<매춘>(종이 위에 오려 붙이기, 채색, 1980)
실제 모델은 없으며, 상상하여 이미지를 그렸다.
<그날의 기억>(와트만지에 아크릴과 수채, 1980)
부마사태 때 현장에 작업실이 있었다. 거리에서 벌어지는 유혈 사태를 목격하고 그 즉시 그린 그림이다.
<그날의 기억 2>(종이에 수채, 1982) 당시 있었던 실제 사건, 즉 누군가 난도질을 한 사건을 모티브로 하였다.
(3) <가족사진> 시리즈
<가족사진>(종이에 유채, 1979)
‘가족사진’ 시리즈 중에서 최초의 작품이다. 헌책방 골목이나 중고 책 서점을 뒤적이다보면 옛날 사진이 나오는데 그 중 하나를 그렸다. 한복을 입은 한 가족으로, 부모와 왼쪽으로 두 아들, 오른쪽에 양장의 여자아이가 있는 그림이다. 얼굴은 마치 종이 마스크를 쓴 것처럼 형식화시켰다. 자세히 보면 마치 도안을 하듯 선을 그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사진을 프린트해서 그 위에 일부러 형식적 도안의 느낌을 표시하기 위해 그랬다. 이러한 도안적 형식은 1979년도 작품에 등장한다.
<가족사진>(종이에 유채, 36X50.2cm, 1980)
본인 가족사진이다. 안창홍 본인의 가족사진이다. 엄마가 아기 안창홍을 안고 있다. 옆에 외숙모가 있다. 뒤에 이모, 이모부, 외삼춘이 서 있다. 마찬가지로 형식적 도안처럼 그렸다. 각자 어떻게 사망했는지를 썼다. 최초 <가족사진>과 동일 기법이나, 여타의 도록에 1980년작으로 나와 있다.
<가족사진>(종이에 유채, 130.3x162.2cm, 1980)
엄마와 이모가 있는 본인 가족 사진 도상과 같다. 사진을 먼저 프린트하고 그 위에 콜라주를 하였다. 도안의 선들이 없다. 1980년부터는 표현성이 증가하기 시작한다.
<가족사진>(캔버스에 유채, 1980)
이 또한 본인 가족 사진이다. 중앙에 안창홍 본인이 있고, 제일 뒤에 칠칠이 아저씨라고 부르던 아저씨가 있으며, 정원을 가꿔주던 아저씨가 있다. 그 앞으로 동생, 형, 누나가 있다. 여기서 누나로 보이는 인물이 셋이 그려져 있는데 사실 안창홍은 누나가 한명이지만 여기서 동일인이 어린이에서 소녀에 이르기까지 세 명으로 그려 놨다. 총 9인의 도상이 나온다. 마치 사진을 합성하듯이 그린 그림이다. 안창홍의 사진-시간 개념을 한 회화에 그려보고자 했던 시도로 보인다. 1980년대 토화랑에서 전시하였고, 그 화랑에 화재가 나면서 이 그림도 화재로 소실되었다.
<가족사진>(와트만지에 유채, 1981)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이 있다. 1979년의 본인 가족사진을 모티브로 한 작품과 같은 도상이며, 여기서는 눈을 검게 표시하였다.
<가족사진>(와트만지에 색연필, 1981)
들판을 배경으로 한 단체 가족사진. 돌아가신 외삼촌이 있다. 외가(外家)쪽 가족으로 보인다.
오른쪽 뒤에 서 있는 인물을 흐릿하게 그렸는데, 이유는 외삼촌이 돌아가셔서 흐릿한 기억을 그림으로 흐릿하게 그린 것이다.
<가족사진>(종이에 연필과 유채, 1981) 접힌 자국이 남은 채로 전시한 작품이다.
‘접는 그림’들이 있는데, 이는 운송이나 액자를 하기 어려워서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접어 보냈다는 현실적 이유도 있지만, 애초에 ‘접는 그림’으로 의도하고 제작한 작업들로써, 1980년대 초 작가가 어려운 시기에 제작한 작품들 중에서, <가족사진>이 남아 있다. 이 또한 액자를 하지 않고 접은 채로 보관중이다. 작가는 심지어 찢어져도 괜찮다고, 그러한 것이 모두 작업의 일부라고 하였다.【주석9】
<가족사진>(종이에 유채, 100x60, 1981)
양복 입은 남자와 치마저고리 여자. 결혼식 기념으로 쓰여 있다.
<가족사진>(종이에 유채, 109x65cm, 1982)
군복을 입은 남성과 흰 한복의 여성. 개인소장.
<가족사진>(종이에 유채, 115x76cm, 1982)
세 명의 가족사진이다. 오른쪽에 베래모를 쓴 남성이 있고 아들은 일본식 복장을 하였다. 동경에서 구조그룹의 초대를 받아 전시할 때 출품한 작품이다.【주석10】 당시 일본 교과서 사건이 터졌는데, 일본 징용의 문제를 가족사진으로 그린 것이다. 당시 구조그룹은 미니멀리즘 계열의 작품들이 출품되고 있었으나 이러한 형상-가족 소재의 작품을 그리면서 일본의 징용문제를 비판한 작품을 출품함으로써 작가의 비판 의식을 보여줬다. 이는 당시 미술수첩에 소개되었다. 1989년 프랑스 카뉴 회회제에서 심사위원상을 받은 작품이다. 도난당했다.【주석11】
<가족사진>(1982)
종이에 유채로 그렸으며 5명의 여인으로만 구성된 도상이다.
(4) <인간이후> 시리즈
<무제>(종이에 연필, 1978)
<인간이후> 시리즈 중에서 ‘담배꽁초’에서 비롯된 도상의 초기 드로잉 작품
<인간이후>(하드보드지에 유채와 콜라주, 1979) 세 종류
콜라주 작품이다. 무관한 느낌의 인물상들이 콜라주되어 있다. 콜라주한 인간이후 시리즈는 현재 크게 세 종류가 있다.
<인간이후>(종이에 유채와 콜라주, 1980)
눈을 오려 붙인 인물상이다. 큰 가면같은 얼굴인데, 현재의 두상 시리즈와 연결되는 이미지다. 임술련 그룹의 멤버였던 송주섭에게 준 그림이다. 송주섭은 작고하였다.
<인간이후>(종이에 유채, 1980)
앞서 담배꽁초를 그린 인간이후 에스키스를 유화로 그린 그림이다.
<인간이후-자화상)(와트만지에 색연필, 1980)
웅크린 담배꽁초.
<인간이후>(와트만지에 아크릴와 오일쵸크, 1982)
김응기와의 2인전에 출품됨
<인간> 1(하드보드지에 콜라쥬와 유채, 1980)
<인간> 2(스케치 느낌)
<인간이후>시리즈와 유사하다.
3. 1980년대 초 주요 비평 사례
1980년대는 우선, 30대 작가들의 ‘새구상회화’, ‘인간의 존재성을 탐구하면서, 문명과 상업주의 비판, 삶의 현실과 현장성 문제’등을 주제로 삼는 점, 그리고 이를 여러 그룹 활동을 통해서 발언하게 됨을 볼 수 있다. 또한 문명비판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구상과 ‘형상성’의 문제도 주목되었다. 강선학은 이미 ‘형상’미술을 민중미술이나 기타의 구상미술과 달리 호칭하고 있는데, 이는 1980년대 후반이면 본격적으로 논의되면서, 안창홍과 정진윤의 작품에서 우화적 양식과 현실 비판을 회화에 있어서 ‘형상’을 통해서 표현하고 있었고, 그것은 특히나 인물형상을 인형, 가면, 훼손된 신체 등을 통해 표현하는 것을 근거로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사이에는 이미 작가의 개성적 측면이 주목되기 시작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현재의 삶이 중요하게 등장하며, 부산에서도 ‘형상미술’을 중심으로 ‘민중미술’과 다른 경향을 보임이 정리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① 강선학
안창홍의 초기 부산 시절의 작업에 대해선 강선학 글이 주요 참고 자료다. 1980년 첫 개인전 서문에서 강선학은 “그가 다루고 있는 대부분의 소재와 그 소재가 만들어내고 있는 세계는 집단 속의 소외된 개인, 그 개인이 만나는 죽음, 가족의 와해에서의 슬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불신과 거리감 등으로 나타났다. [중략] 그의 지우기, 붙이기, 줄치기, 번호 붙이기 등은 기댈 곳 없는 현대인의 심리적 편린 그 자체”라고 하며 안창홍의 초기 인물 연작인 <인간이후>와 <가족사진>에서 보이고 있는 해방 후 해체된 가족과 불행한 유년기, 청년기를 보낸 자들이 느낄 수 있는 개인의 소외라는 이슈와 사회나 공동체에 대한 불신이라는 정서가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그 기법적인 특수한 측면까지 같이 분석하고 있다.【주석12】
이후 강선학은 1980년대 “사회 의식의 회화적 발언”을 하고 있었던 작가 중 안창홍이 참여한 “《한국 미술 청년작가회전》, 《상황과 의식전》, 《현실과 발언》, 《시대 정신전》들은 실험정신과 함께 좀은 전위적이고 현실에의 대응의식이 뚜렷이 드러나는 전시들이다.”라고 하면서 안창홍의 초기 작업에 있어서 <인간이후>, <가족사진>, <위험한 놀이>를 예로 들어, 안창홍의 사회의식의 회화적 변용을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이는 세 가지 유형은 당시(70년대 중반 이후 80년대 초반의) 시대적 상황을 작가가 어떻게, 즉 안창홍의 경우는 회화적으로 해결하며 소통하려 했는지를 보여준다고 설명하였다.【주석13】
안창홍은 강선학이 주목한 바와 같이 1970년대 후반 80년대 초반에 여러 그룹을 결성하기도 하고 창립멤버이기도 했다. 그러나 안창홍은 어떤 그룹 활동도 오랫동안 지속 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안창홍에게 있어 주로 자주 언급되는 그룹 활동은 ‘현실과 발언’인데, 작가 당사자는 전시회 참여의 차원으로 후술하곤 한다. 작가는 일단 그 어떤 부류로써 묶인다는 것을 스스로 용납지 않았던 것 같고, 나아가 안창홍은 실제 사람들의 삶을 리얼하게 드러내고 사회에서 드러나지 않는 측면을 파헤치는 개성적인 작업을 하려 했었기에 그룹 활동이 안창홍에게는 큰 매력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종종 안창홍은 한국 현대미술에 있어서 기존의 그룹 활동을 하는 다른 작가들의 특정 성향을 비판하기도 하면서 한국화단에 대해서 쓴 소리를 서슴치 않아 왔다.
② 성완경
강선학이 안창홍의 초기 작업에 있어서 그것이 어떻게 당시 ‘작가’가 ‘당대’를 예술로써 표현하고 공감케 하느냐에 대해서 예술 존재론적 측면에서 설명하고, 작가의 삶과 작품의 주제와 형식 분석을 하였다면, 안창홍의 초기 작업부터 개성적인 측면과 당대적 미학에 대해서 보다 심도 깊게 조명한 것은 성완경이다. 성완경은 작가의 개인사적인 측면과 당대의 그러한 개인사를 공감하고 공유하는 개인들의 심리적인 측면, 나아가 그러한 불안과 불신과 같은 정서와 일견 보이는 일탈적인 자세와 주류적인 것에 대한 강한 저항과 반감, 비판과 조소와 조롱 등의 태도, 그리고 강박적이지 않은 표현기법의 개성적이고 자유로운 특징 등에 대해 전체적인 미학적 평가를 하고 있으며, 그것이 작가나 개인에게는 ‘치유’의 길이 될 것이라고 까지 하였다. 성완경과의 인연은 안창홍이 1983년 ‘현실과 발언’에 참여하면서부터 비롯되었고 관계는 지속되었다.
성완경은 1987년 갤러리 누보에서의 안창홍 개인전 서문에서 <들의 비가>, <새(가시)>, <버려진 인형>, <얼굴> 등을 예로 든다. 그는 훼손되고 잔인하게 찢겨진, 그러나 가면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표현주의적 리얼리티를 획득한 인간형상이 우리 사회에서 ‘불구의 외다리’로 서있었던 우리 사회의 초상임을 평한다.
“이 초상들은 다시 채색된 목각 부조 초상과 다양한 레이메이드 재료의 꼴라쥬 입체 초상-제의의 가면 같기도 하고 거리의 살아있는 인간의 얼굴 같기도 한 일련의 초상들로 바뀌면서 표현주의적 리얼리티의 저 분방한 생기를 획득한다. [중략] 이들 작품의 주제들은 낯익은 것들이다. 공격적인 것, 힘의 지배, 죽음의 환가, 고독과 훼손 등 이 주제들은 기본적으로 안창홍의 개인사적, 자전적 표지들로서 마치 저 허허로운 벌판의 허수아미처럼 그의 예술적 공간의 여기저기에 불구의 외다리 모습으로 늘상 세워져 왔던 것들이다.”
이 형상들이 작가 개인의 불안한 심상과 고독의 표현, 황폐한 심상과 같은 개인사적 표지가 들어있음을 서술한다. 나아가 안창홍의 예술 활동에 대해서, 성완경은
“훼손된 세계에 대한 공포와 고독감, 팡타즘을 숨은 버릇처럼 늘 되풀이해 틀림없이 그려내고 했던 그의 확고한 그림솜씨의 즐김과 자부심, 그 버릴 수 없는 애착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애착과 자존은 안창홍의 예술의 매력과 덕성을 만드는 중요한 인자이면서 또한 그의 예술을 훼손된 세계 속에서의 반사적인 자기 위안으로 축소시키는 결함 인자가 아닌가 하는 의혹을 나는 갖고 있다.”【주석14】
1989년 온다라 미술관 개인전에서는 1987년의 성완경 글과 같은 맥락이나, 여기에서 한층 나아가 안창홍 작품의 어두운 측면은 개인사나 작가적 기질 뿐만 아니라 우리의 역사적 삶의 어두움과 무관하지 않음을 설명하고 있다.【주석15】 성완경은 “그가 현실을 그리는 방식은 상황적, 서사적이라기보다는 현실의 우화적 변용쪽에 가깝다. 그리고 이 우화적 변용 속에서 그는 더욱 본질적인 인간성의 비극을, 인간성 속에 깃들여 있는 영원한 불구(不具)를 화려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하여 안창홍의 작품이 당대의 사회 현실을 직, 간접적으로 반영하고 있으며, 그 방식은 “현실의 우화적 변용”에 가깝다고 하며, 본질적인 인간성이 갖는 “불구(不具)”의 비극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
초기 비평에서 성완경은 강선학과 마찬가지로 안창홍의 지독한 현실 인식과 상황의식이 회화적, 예술적으로 변용되어 표현되고 있음을 평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우화적”변용은 훗날 ‘풍자’나 ‘조롱, 조소, 해학’ 등의 측면으로 이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1970년대부터 안창홍은 작품 재료에 있어서도, 종이, 종이죽, 캔버스, 연필, 목탄, 색연필, 아크릴릭, 유화 등을 가리지 않았고, 기법에 있어서도 오리기, 콜라주, 조소(彫塑), 부조(浮彫), 조각(彫刻)등을 병행해왔는데, 이러한 기법적 화려함 또한 강선학에 의하면 당시 현대인의 심리적 편린, 즉 파편화된 삶과 정서의 표현이며, 성완경에 의하면 훼손된 세계를 표현하는 작가의 즐김과 자부심이기도 하다고 설명되고 있다. 이러한 훼손된, 사회의 어두운 측면과 소외된 혹은 비가시적 존재들을 ‘훼손되게’ 표현하면서 그 존재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측면과 여러 표현기법과 스케일을 자유롭게 활용하는 측면과 그에 대한 자부심은 현재까지 이어지는 안창홍 작가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 밖에 1970년대 후반 1980년대 초 관련 비평으로는,
옥영식, 안창홍의 상황의식(1980)【주석16】
: <병실>(1976)에서 “상실의 느낌이 무대의 극적인 한 장면처럼 보이는” 점과 <가족사진>에서 “물질적인 가시의 현실이 아닌 어떤 심령적인 본질을 떠올리려 하는 것처럼 보인다”
김해성, 허구의 현실에 대한 고발(1984)【주석17】
: 1980년대 작가들의 경향과 안창홍의 특징을 “시대표현상 자신의 의식적인 모순, 즉 “주관적이면서도 객관적이어야 하고, 감정적이면서도 이성적이어야 하며, 비판적이면서 동시에 창조적이어야 하는 일종의 동시성 있는 이중성”이 “절규의 화법”으로 드러남을 서술하였다.
원동석, 안창홍전(1986)【주석18】
: <가족사진> 시리즈와 <새> 시리즈의 알레고리 특징을 언급하였다.
Ⅱ. 1983년-1986년 : 소그룹 미술 운동과 활동 확장기
1. 시기 개관
종이에 색연필로 그린 그림이 많고, 우화적 작품이 많다. 대표적인 <위험한 놀이> 시리즈, <전쟁> 시리즈, <새> 시리즈 등이 있다. ‘현실과 발언’(1983-1986), ‘시대정신’(1983, 1984), ‘젊은 의식’(1983년) 등의 활동이 주목된다. 1980년대식의 현대미술 비판적 경향에서도 특히 예술 근원의 문제를 탐구한 성찰의 시기로 볼 수 있다.
2. 주목 작품
<무제>(1983)
위험한 놀이를 위한 에스키스에서 망토를 입은 작은 몸의 한 인물이 막대기를 들고 있는 모습스케치로, 1981년도로 기록되기도 했다. 가능한 년도다.
<위험한 놀이>(1983-1984)
이 시리즈 작품 발표는 ‘현실과 발언’ 주제기획전에서부터다.
<전쟁>(1984)【주석19】
시리즈 부제로는 숲속에서, 보리밭에서, 6.25 그리고 오늘, 들판에서. 전쟁 피해의 사회적 참사를 그렸다기보다는 개인의 애환을 표현적으로 그린 경우가 많다.
<평면>(1985)
정면에 총으로 자신을 쏘고 있는 인물이 있는 그림
<새>(1985-1987)
불사조, 화살 맞은 새, 외치고 싶은 새, 콜라주 등
<가족> (1982)
신옥진 기증품으로 부산시립에 소장되어 있다.
<가족사진>(1982)
부산시립에 소장되어 있으며, 사진이미지와 많이 다른 푸른 배경의 페인팅이다.
<전쟁>(1982)
부산시립소장품이며, 당시 부산 공간화랑에서 기획한 메일아트(mail art)로 제작된 작품이다.
<무제>(1982)
격투기의 도상이다.
<소녀>(1984)
인형을 들고 있는 한 여자를 그렸다.
<묵시>(1985)
‘묵시’는 무관심한 시각이란 뜻이다. 인형을 들고 있는 임신한 여성을 그렸다.
<화실풍경>(1984)
일종의 자전적 그림이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자는 안창홍 자신이다.
<들의 비가>2(1984)
정치 폭력속에서 희생되어간 젊은이를 종이에 과슈와 색연필로 그렸다. 서울시립미술관 소장품이다.
<어떤 휴식>(1985)
<아무도 없는>(1985) 콜라주
<기념사진-봄날은 간다>(1985)
현재 기록에는 3점의 <기념사진-봄날은 간다> 시리즈가 이때 시작되었다. 이후 같은 도상을 재 프린트하거나 프린트해서 변형 페인팅으로 제작하기도 하면서 반복 제작되었다.
Ⅲ. 1987년-1990년 : 새로운 탐색
1. 시기 개관
1988년 3월 서울 화곡동으로 작업실을 옮겼다. 여기서 8개월을 지내고 현재 작업실이 있는 양평으로 작업실 이전하면서 서울활동 본격화하였다. 다수의 ‘얼굴’로 다양한 얼굴 표정, 다양한 현대인의 초상 제작, 세태풍자적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얼굴>시리즈는 다양하게 제작되었다. 페인팅, 드로잉, 콜라주, 입체작업 등. 특히 초기 작품들에는 돌, 시멘트, 대리석 가루, 종이죽, 석고(데드마스크(death mask) 뜰 때), 나무, 점토, 각종 오브제(안경, 장난감, 인형 등), 해골, 해골에 장식용 장식들 등이 사용 된 예가 있다. 크기는 대부분 오브제들을 그대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오브제 크기 그대로이거나, 실제 얼굴 크기 그대로였다. 2010년대 입체회화로 불리는 얼굴과 두상 소재 시리즈에서 큰 입체로 만들 때는 FRP(섬유 강화 플라스틱)를 사용하였다. 안창홍에게 ‘얼굴’은 중요한 소재였다.【주석20】
1987년-1989년 사이 화단에서의 변화는 크다. 가령 1987년 ‘뮤지엄’, ‘메타복스’ 등의 신세대 소그룹 운동이 기존 민중미술계열의 소그룹 운동을 대체하였고, 민중미술계열은 비평으로 기울었다. 여전히 화단에서는 모더니즘 계열이 잔존하고 있었으나, 형상미술, 구상미술, 퍼포먼스 등을 주제로 한 기획전이 기획되었다. 한국-프랑스 교류전이 지속되고 있었다.【주석21】
이때 안창홍이 참여한 전시 중에서는 《80年代 韓國美術의 位相展전》(1988, 한강미술관. 도록에는 <거인의 잠>과 <덫>수록)과 《닫힌 시대의 저항 작가전》(1989.2.19.-2.28, 신학철, 임옥상, 안창홍 외 6인, 현대백화점 미술관), 《부산, 80년대의 형상미술전》(1989, 부산 사인화랑. 도록에는 <우리 함께 디스코를 춥시다>와 박신의 평론 수록), 1989년 5월 서울 금호미술관의 《80년대의 형상미술전》(도록에는 <거인의 잠>수록), 《한국현대미술의 『韓國性』 모색 Ⅲ 葛藤과 對決의 時代》(1991, 한원갤러리 서울, 프랑스 카뉴 회화제 심사위원상을 탄 1982년 제작한 <가족사진> 재 소개), 《90년대 우리미술의 단면전》(1990, 가람화랑, 갤러리 상문당, 학고재, 현화랑), 《현실과 발언 10년전》(그림마당 민, 1990), 《구상미술의 오늘, 꿈과 현실의 대결》(1991, 현대백화점 미술관) 등을 주목할 수 있다.
2. 주목 작품
(1) <얼굴> 시리즈
<얼굴>(종이에 먹, 73x53cm, 1986)
<싸이코적인 얼굴>(종이에 크레용과 과슈, 잉크, 80.5x55cm, 1986)
<노인의 얼굴>과 <여인의 얼굴>(1986)
<얼굴>(1987) <도시의 뒷골목>, <노파>, <푸른빛 면류관>(1987)
<80년대 인물도>(1986)가족사진 이미지를 종이에 펜으로 그림. ‘위험한 놀이’ 시리즈 기법.
<얼굴들>(1988) 마스크 시리즈
<고통의 얼굴>(부조에 가시나무, 1986) 가시나무 부조
<얼굴>(혼합재료, 액자, 1984), (나무에 각, 1986), (데드마스크, 종이죽, 1986), (테라코타, 1988), (돌 위에 혼합매체, 1989), (나무 조각, 1989)
(2) 콜라주, 풍자풍의 작품, 혼합주제
<즐거운 식사>(콜라주, 1986)
<절규>(1986)
<아버지와 아들>(1986)
<뽐내는 지배자>, 종이에 색연필, 1987(1985)
<덫>, 종이에 아크릴, 1987
<거인의 잠>(1988)
<우리들의 일상>(1989)
<구름잡기>(1989)
<끝없는 탈출>1,2(1989)
<우리 함께 디스코를 춥시다>(1989)
<전쟁을 찬양하라>(콜라주, 1989)
<거인>과 <악몽>(1990)
<미스터 육체미의 아르바이트>(1990)
3. 1980년대 중후반의 주요 비평
이 시기 주요 비평으로 박신의와 정진국의 비평을 주목했다. 박신의는 우선 안창홍의 우화적 양식을 억압된 욕망의 사회화의 맥락에서 분석하고 있으며, 명백한 사회적 진실을 지닌다고 평하였다. 반면 정진국은 안창홍의 색연필화 사용을 정규 미술대학을 가지 않은 점, 기존 미술사적 도상을 쓰지 않고 독창적인 도상을 쓰는 점 등을 높게 평가했다.
① 박신의는 그의 「안창홍의 작품세계」(1989)에서 “안창홍의 가상의 놀이왕국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과 그것의 묘사는 기본적으로 우화적인 양식에 의해 엮어지고 있지만, 실제로 그것이 드러내는 내용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임을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략] 안창홍이 그려내는 불만족, 죄악감, 폭력적인 야만성, 피해의식 그리고 환각의 표정들은 개인의 욕망을 억압함으로써 무한정의 사회적 금기를 재생산해 온 문명발달사의 한 국면을 반영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풍경은 억압된 욕망의 사회화라는 맥락에서의 명백한 사회적 진실을 지닌다. 그리고 색연필로 능숙하고도 정교하게, 그리고 화려하게 구사해 가는 그의 그림솜씨 역시 이처럼 어둡고 내밀한 욕망의 기제를 보다 극명하게, 한편으로는 섬뜩하게 드러내는 형식상의 주요수단이 된다.”【주석22】라고 하여 안창홍 그림의 우화적, 초현실주의적 특성의 당대 사회 비판적 어조를 연결시켰다.
② 정진국은 「無學有能 有學無能」(1989)에서 “안창홍은 어떤 형태로의 것이든 사회적 억압이 性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드문 화가인 것 같다. 정규적인 미술대학의 수업을 거치지 않았다는 것이 얼마나 행운일 수 있고, 얼마나 창작의 힘찬 추진력일 수 있는가를 이 작가는 잘 보여주고 있다. [중략] 그의 형상들은 미술사적 맥락으로부터 전적으로 벗어나 있으며, 또 어떤 미술사적 참조와도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독창적이다. 연필과 색연필, 펜과 크레용 등으로 이어지는 그의 재료들 또한 참신하다. 자신의 비극을 환영으로 떠나보내지 않고 화폭에 불어내어 마구 족치고자 하는 이 작가의 패기는, 그렇지만 그 패기의 열렬함만큼이나 때로는 얼떨떨하고, 때로는 사무치게 진저리쳐지고 끔찍해 보이기도 한다.”【주석23】라고 하며 안창홍의 색연필화를 주류 기성 가치 혹은 관습에 대한 반발 혹은 비판으로 보고 있으며, 이 점이 독창적이라 하고 있다.
③ 박신의는 「환각과 예감에의 충동, 그 비극적 정서의 현실성」【주석24】라는 글에서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의 안창홍의 일종의 작가론적인 글을 선보였다. 이때 박신의가 주목한 것은 “80년대 현실주의 미술운동의 흐름 내에서 나름대로 고유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으며, 그가 “독특한 예감‘의 소지자임을, 그리고 <가족사진> 연작에서 보이는 독특한 시간개념을 주목했다. 박신의는 당시 “단절이 아닌 연속성의 개념으로 시간을 역사화시키는 것-물론 아직 미분화된 상태이지만-으로 확장되어진다”라고 평하는데 당시 한국의 근,현대사의 주된 역사 서술이 ‘단절’, 즉 은폐의 역사서술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연속성의 강조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역사서술의 문제보다도, 안창홍의 경우 ‘시간을 역사화’시키고 있음에 주목한 점이 눈에 띈다. 또한 1983년 이후의 색 연필화에 대해서 “우화적 어법”에 의해 현실의 실체를 드러내는데, 이 “우화적 어법이란 객관적 현실의 모순 조건을 드러내는데 특별히 뛰어난 미학적 장르”임에 주목하여 안창홍이 인간 본질의 왜곡된 양상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당시 권력 비판을 위해 동원된 욕망의 논리를 설명한다. 나아가 박신의는 1988년 서울로 작업실을 옮긴 안창홍이 주관적인 주제에서 나아가 ‘서울’의 사회상, 그리고 ‘마약과 핵의 문제’등을 다루면서 “부정성을 역설적인 방법으로 강하게 환기”시키는 작품들을 예를 든다. 그리고 안창홍이 비정상적인 것에의 탐닉과 반휴머니즘적, 비관적 세계관을 보이는 것으로부터, 인간사회에 왜곡된 양상과 자본주의 퇴폐문화의 본질을 토로하는 것에서 진보성을 찾기도 한다.
이 글은 1990년에 발표되었는데, 이 글을 통해서 읽을 수 있는 것은 1980년대 비평의 양상이 욕망론과 자본주의 비판을 통해서 한국의 정치, 역사 비판을 하는 것이었으며, 이때 작가의 ‘현실 인식’을 매우 중요하게 보았음을 엿볼 수 있다.
Ⅳ. 1990년대 : 인간 표현의 다변화
1. 시대 개관
1988년 3월 안창홍은 가족을 부산에 둔 채 서울 지인 작업실로 거처를 옮겼다.【주석25】 화곡동에서 8개월을 지낸 후 현재 작업실이 있는 경기도 양평으로 이사했다. <우리도 모델처럼>(흑백 연필화, 1990), <우리도 모델처럼>(1991), <우리도 모델처럼-오렌지빛 청춘>(1992), <풀잎사랑>(1992) 등으로 시작된 원색 인물화가 등장하였다. 이 시기 안창홍은 다양한 양상의 얼굴과 인물화를 그렸는데, 일종의 1990년대식 도시 인물 풍속도라 할 수 있다.
안창홍은 1980년대 말 ‘얼굴’ 시리즈와 현대인간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인간과 현대사회에 대한 탐색기를 거쳤다. 이어 1990년대 본격적으로 원색의 당돌한 안창홍식 인물화가 탄생하게 되었다. 1980년대까지 안창홍의 작업에서 보였던 잔혹함과 어두운 측면으로부터 다소 희화적이고 풍자적인 성격이 가미되었다. 이 시기 안창홍은 전반적인 작업세계의 변화, 전환기를 맞이하면서 작가 세계를 탄탄하게 다졌다.【주석26】
비평 경향에서도 1991년까지만 해도 안창홍이 발표한 작품에 대해 ‘잔혹미술’, ‘비통하고 참혹한 형상들’, ‘섬뜩함이 앞선다’ 등의 고발적인 측면이 강했다면, 1991년 맥화랑 개인전부터는 원색성과 풍자적인 측면이 더욱 강조됨이 보인다. ‘개인’ 그 중에서도 특히 소시민의 정제되지 않은 욕망에 주목함으로써 안창홍은 개인-소시민의 당당함과 그 특징적 인상을 각인시켰다.
그리고 이 시기 주목되는 것은 안창홍의 여행이 본격화되었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인도여행(1994년, 1995-1996년), 실크로드 답사(1996) 등의 여행이 있다. 그는 이후로 계속해서 인도여행을 가고 있다. 실크로드 답사에서는 사막 지역에서는 죽음의 실체를 보기도 하였다. 여행의 경험은 안창홍에게 ‘생명’에 대한 보다 직접적인 인식을 심어주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그는 어떻게든 시간을 내어 인도와 여러 지역을 주기적으로 가고 있다.
개인전을 통해서 1990년대【주석27】제작과 발표 현황을 보면, 줄곧 얼굴과 인물화를 그렸고, 1997년 이목화랑 개인전에서는 <물고기>, <어항> <꽃> 시리즈를 발표하면서 다른 소재를 가미함을 볼 수 있다. 1999년에는 파리떼를 그려서 글자(똥, 씹, 권력 등) 페인팅을 했다. 사용하는 색감의 원색적 측면은 1997년 이후 더욱 본격화되었다. 원색적 주제와 표현을 과감하게 확장시키면서 당대 사회 풍조에 대한 조롱과 야유를, 다른 한편으로는 화단의 매너리즘화라든가 과도한 상업화에 대한 비판을 했다.
2. 주목할 작품
<우리도 모델처럼>
1991년 작품으로는 남녀 도상의 경우가 있다. 에스키스, 흑백화(종이에 연필) 페인팅과 칼라화 페인팅이 있다. 이중 남녀도상 칼라화 페인팅을 2009년 오프셋 프린트(50 에디션)하였다.
1992년 남자 단독상의 도상은 두 작품이 있다. 하나는 <우리도 모델처럼 혹은 우리도 모델처럼-오렌지빛 청춘>(1992년 《풍자화, 그 해석과 비판의 소리》 출품)이며, 다른 하나는 1993년의 <청춘>(1995년 이목화랑 개인전 팜플랫 표지 수록)과 같은 도상이다. 전자는 상상해서 얼굴을 그렸고 후자는 실제 인물의 얼굴을 스케치해서 그렸으며 앞머리가 여러 갈래로 내려져 있다. 1993년도 작품은 스케치가 남아있다.
3. 1990년대 관련 기사와 비평
(1) 기사
당시 화단의 작품 경향의 변화에 대해 정철수(鄭哲秀)기자는 “1991년 7월 4일부터-13일까지, 샘터화랑(5141 5120), <장미빛 인생>, <꽃밭에서>, <아무도 없는 달밤에>, <어떤 봄날>, <거울앞에서>, 그리고 <얼굴>시리즈와 <人間>연작 등 18점 공간 벽면에 채워져 있다. 그림 제목만은 서정적인 평화로움이 가득 풍기는 그런 제목이다. 그러나 실제 그림은 딴판이다. 생명감 없는 人形형상의 일그러진 군상이 화면을 꽉 메우고 있다. 눈과 입이 뻥 뚫린 현대인의 초상들, 붉은 입술의 하얀 얼굴 등 비통하고 참혹한 형상들은 우선 전율과 섬뜩함이 앞선다. 문명과 자연파괴, 그리고 어떤 물리적 힘에 의해 꺾이고 부숴진 인간의 좌절을 고발한 이른바 ‘잔혹미술’이다.”하고 하며 안창홍의 “잔혹미술”을 묘사하고 있다.【주석28】
(2) 주요 비평사례
① 심광현은 1990년대 초기의 키치적 분위기를 설명하면서 안창홍의 “컬트적 분위기”가 자본주의의 ‘생체정치’에 포획되어 있는 육체와 욕망의 자유로운 활로에 틈새를 열어주기 위한 ‘손-육체-사유’사이의 긴장된 운동의 형태라고 평하였다.【주석29】
② 강선학은 「소비되는 욕망의 사회」【주석30】에서 “그가 이야기보다 시각적인 형상을 더 믿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의미를 따르는 형상에서 형상이 의미보다 우선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한다.”라하며 ‘형상성’과 안창홍의 1990년대 욕망의 도상들을 연결시키고 있다.
③ 심광현은 이어서 성완경의 “퇴폐의 미학” 인용하여, “일상을 지배하는 관습적인 도덕주의나 상투적인 휴머니즘 자체에 대한 냉소의 방향이다. 그리고 그 냉소의 덫을 내장한 그의 그림에서 점점 더 크고 강하게 발화하는 것은 퇴폐적인 화려함이자, 에로티즘을 빌어 도덕의 규율을 뛰어넘어 보려는 실험적인 격정, 또는 생활세계로부터 이탈된 고독의 화려함 같은 것들이다. 성완경 선생의 표현을 빌자면 이와 같은 이중적 냉소의 덫을 놓아둔 안창홍 자신이 정작 사로잡혀 있는 도 따른 덫 ‘욕망의 팡타즘’에 기초한 ‘아름다움의 덫’은 아카데믹한 미학과는 반대되는 것, 일종의 극한적인 퇴폐의 미학에 가깝다.”【주석31】 라고 하며, 안창홍의 기존 관습을 파열시키는 지점을 주목하였다.
④ 이섭은 1997년의 정물에 대해서 “눈에 보이는 현실 세계”를 소재로 하여 그리는데 있어서 다른 가능성, 대안성을 꿈꿀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 있다.【주석32】
⑤ 이섭은 또한 1999년의 도발적 작품들을 “‘똥’과 ‘씹’ 그리고 ‘욕망’이 전시를 받치고 있다. [중략] <화가의 똥>이 보여주는 무지개 빛 그 찬란한 ‘진짜와 가짜’의 경계에서 화가는 천연덕스럽게 미술에 대한 환상과 예술가의 자조적인 자존에 대해 이야기한다. 수만 마리의 파리가 모여 화가의 그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똥’은 권력이라고. ‘씹’은 세상살이라고. 그 언저리에 우리의 욕심과 천박한 자본주의에 물든 ‘욕망’이 끼워져 있다고. <꽃밭에서 Ⅱ>에서 보여주는 반어법적 접근 방식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의 실체를 우화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중략] 처연한 느낌의 화려함을 기저로 하는 그의 일반적인 그리기 방식은 세상을 바라보는 안창홍의 눈이 어디에서 무엇을 보는지 알려주며 그의 세계관을 이해하게 하는 열쇠 말이 된다.”와 같이 쓰고 있다.【주석33】
⑥ 박신의는 「권력의 파리떼 그리고 예술의 똥」, 개인전 서문, 노화랑, 갤러리 사비나, 1999
1990년대 말 원색의 인물 전신상에 파리를 그려 넣은 인물화 시리즈와 <화가의 똥>, <권력>, <욕망>의 작품들에 대한 비평을 하였다.
⑦ 최태만, 『어둠 속에서 빛나는 청춘-안창홍의 그림세계』(눈빛, 1997)
안창홍과 최태만의 관계는 최태만의 고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태만은 고등학생 시절 미술 대학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마침 부산에서 안창홍의 화실이 소문이 자자했다. 그래서 이미 고등학교 시절에 찾아간 적도 있지만 본격적으로 최태만이 안창홍과 어울려 지낸 것은 그가 군대를 가기 위해 부산에 내려가서 쉬고 있을 때라고 한다. 1980년대 중반 즈음, 부산 국제 시장 근처의 ‘양산박’이라는 주점에서 예술인들이 모이곤 했는데 그 당시 미술과 당시 현실에 대한 열띤 토론을 이어나갔음을 회고한다. 최태만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청춘-안창홍의 그림세계』(눈빛, 1997)에서 ‘인간 안창홍’의 지인으로써 책의 집필을 시작하였으나, 그의 작업세계를 본격적으로 평함이 쉬운 일은 아니었음을 그의 저서 서문에 쓰고 있다.
최태만의 가장 초기 비평은 최태만이 잠시 큐레이팅 활동을 했던 인사동 토화랑에서 전시할 때 썼던 비평문(원고지에 작성)이다. 그러나 토화랑에 화재가 나면서 이때 자료는 분실되었기에 결국 초기 작품에 대해서는 이 책이 주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책에서 최태만은 우선 성완경의 「독립생활자의 초상」을 서문을 대신하여 게재하고 있다. 이 글에서 성완경은 안창홍 작품에 있어서 작가의 “개인사적 표지”가 “생물적”으로 반영되어 있는 것이 특징적이며 이는 당시의 어두운 사회 현실에 대한 안창홍의 “사회 의식 내지 상황의식”이라고 적고 있다. 최태만은 이 책에서 안창홍의 일대기를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안창홍 주요 작품의 에스키스를 공개해 주고 있고, 안창홍의 지인들과 여행에서 찍은 사진, 어린 시절 사진 등을 공개해 주고 있다. 안창홍이라는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담담하게 서술해 나가며, 최태만의 안창홍에 대한 각별한 친분과 기억을 바탕으로 해서 안창홍 작품을 소개해주고 있다. 작가의 일대기와 일생에 바탕하여 1990년대 중반 작업까지를 기술하였다. 최태만은 안창홍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서양 미술사에서 흔히 보이는 표현주의 계열의 사회 비판적 작품(프란시스코 고야의 <1808년 5월 3일>과 <사투르노>), 작가주의를 드러낸 작품(알브레히트 뒤러의 <자화상>), 기존의 미술 형식과 시각성을 파괴한 작품들(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등을 예로 들고 있는데, 이들과 양식적 유사성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작가들이 현대미술사에 있어서 사회 비판적이었으면서 동시에 나아가 미술사적으로 혁신적이었던 아방가르드 역할을 했다는 것을 감안해 볼 때, 최태만 또한 안창홍을 이해함에 있어 그가 시대를 앞서나가고 있는 도발적인 작가임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90년대 이후에 제작한 그의 작품들은 가벼움과 무거움의 경계 위에 놓여 있으며, 그 형식의 가벼움 속에 의미의 무거움이 지배하고 있음을 밝혀보고자 했다. 나아가 나는 여기에서 그의 퇴폐적 정서가 분비해 놓은 작품에 깃들어 있는 심각성, 더 나아가 ‘이미지의 정치학’을 발견한다.”-최태만
“내가 믿는 것은 그의 놀라운 악마적 상상력이며, 그의 지칠 줄 모르고 탐욕적이리만치 자신만만한 장인적 솜씨와 지구력이며, 그의 비타협적이고 오만한 편견이 분비하는 예술의 그 퇴폐적 아름다움 속에 깃들어 있는 공격성과 드디어 나른하게 소진해 버린 열광의 그 허망함이다. 이 글은 그에 대한 나의 인상이고, 껍질이자 알갱이며, 그에 대한 나의 헌신적인 진술이자 고백이고 증언이다.”-최태만
Ⅴ. 2000-2007년 : 역사와 시간성
1. 시기 개관
1999년의 무지개 색 똥을 누는 <화가의 똥>과 이어 등장한 똥을 누는 개 그림이 이어졌다. 여기에 등장한 ‘파리’는 마치 2000년대의 ‘죽음’ 소재의 흑백톤을 예견한 듯하다. 이 시기 안창홍은 자본과 욕망의 문제가 정치와 어떻게 결탁해왔는지를 풍자적으로 비판적으로 그렸던 1990년대에서 나아가 훨씬 존재론적인 인간사의 측면과 역사의 문제를 건드린다. 이 시기의 중요한 점은 <가족사진>으로부터 이어온 개인의 역사 시리즈가 <아리랑>시리즈(2012)로 묶인 점이다. <가족사진>과 <기념사진>시리즈에서 일반인, 소시민의 개별성을 부각 시켰던 이미지들을 모아서 이별곡 ‘아리랑’에 빗대어 본격적으로 한국 역사의 문제를 겨냥하였다.
2001년의 자연사박물관 연작. 직전의 고비사막 여행, 2002년의 고비사막 여행 드로잉이 있다. 2002년의 전시 자화상(붓을 든 자화상)과 전시 모델화, 2002년의 <사이보그의 눈물>과 <화가의 심장>(평면 작품), 2003년의 인도여행 드로잉(여행하면서 현지에서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에 드로잉한 작품), 2003년의 고비사막 드로잉 등의 작품들이 있다.
사실상 사진 이미지를 활용한 작품들은 이미 1979년의 <가족사진>에서 시작되었다. 1985년에 시작된 <기념사진> 시리즈【주석34】는 2000년대 집중 발표되었는데, 이처럼 사진이미지 활용(차용이나 변용) 작품들을 보면, 우선 1995년 나무화랑 개인전에서의 <봄날은 간다>, 2002년 광주비엔날레-멈춤에 출품된 <김치>(2001년작), 2002년 사비나 갤러리에서의 개인전 《죽음의 콜렉션》에 출품된 <기념사진>시리즈, 2004년 부산비엔날레 출품작인 <49인의 명상> 패널화 시리즈가 있다. 2005년 종이위에 연필 드로잉 작품인 <사이보그의 눈물>, 2006년의 <부서진 얼굴> 시리즈가 있다. 이때 <기념사진-봄날은 간다> 시리즈의 경우 거의 10년의 간격을 두고 제작, 재 제작, 추가 제작된 작품 시리즈다.【주석35】 작품들에서 안창홍의 ‘눈’은 독특했다. 초기 <가족사진>에서 눈은 검게 뚫린 것처럼 표현하기도 했는데, <49인의 명상>에서는 인물들의 눈을 감겼다.【주석36】
기존의 작품들이 하나의 시리즈로 묶이면서, 대규모의 전시들이 이어졌기 때문에 안창홍의 기존 작업에 대한 미학, 미술사적 평가들이 보다 분명히 가능해졌고, 특히 사진 이미지를 활용, 차용, 변용한 작품 군에 대해서는 <49인의 명상>에서 집중 주목되었다. 인물들의 익명성과 그것의 한국사회에서 갖는 함의, 그리고 그들의 ‘눈’을 감긴 이유 등을 비평적, 미학적으로 서술하는 비평들이 다수 출현하였다.
2007년 3월 작가는 폐암 수술을 받았다. 2006년 겨울 중국 베이징으로 잠시 작업실을 옮겼으나, 결국 폐암의 발명으로 인해 철수하였다. 2007년을 기점으로 하여 작업 세계가 한층 달라지며, 비평에서도 ‘죽음’과 ‘예술가의 운명’에 대한 고찰이 증가하였다.
2. 주목 작품과 작업 노트
① 부일문화상 수상 인터뷰
2000년 봉생문화상 수상을 하고, 2001년 부일문화상을 수상하였다. 부일 문화상 수상 소감으로 2001년 한 기자와의 인터뷰가 홈페이지에 수록되어 있다. 1990년대 말 2000년대 안창홍의 작업 세계를 엿볼 수 있다.【주석37】
② <49인의 명상>은 부산비엔날레 출품 작품인데 이와 관련한 작품 설치에 대한 소고와 주제 설명, 그리고 작품 제작 배경에 대해서 작가노트로 남겼다.【주석38】
③ <기념사진- 봄날은 간다>시리즈는 1985년에 시작되어 1995년, 2001년과 2002년, 2005년, 2007년에【주석39】 발표되었다. 이 중 특히 ‘광복군 단체사진’의 경우 특수하다. 이 작품은 사진을 출력하듯 반복 재생산하면서, 변형시키기도 하고 그대로 재프린트 하기도 했다. 작가는 2006년 1월 22일 작가노트에 제작 동기와 과정을 소개하였다.
④ 안창홍의 <아리랑>시리즈는 2012년 더페이지 갤러리 전시【주석40】당시 제작되었다. 특히 평범한 사람들의 도상만 모아서 <아리랑>시리즈로 묶어서 제작한 작업이다.
3. 주요 비평
여기서는 주로 <49인의 명상>과 <봄날은 간다> 시리즈, 그리고 <부서진 얼굴> 시리즈, <사이보그의 눈물> 시리즈를 중심으로 비평을 선별하였다. 주목되는 점은 모두가 사진 도상들의 ‘익명성’이다. 그리고 또한 그것의 역사성이다. 익명적 존재의 역사적 등장, 재등장이라는 소수적인 것의 트라우마적 귀환의 차원을 잘 형상화한 작업 시리즈로 볼 수 있다.
① 최태만, 「익명의 개인에게 바치는 오마주, 우울하면서 따뜻한 절망」【주석41】에서 <49인의 명상> 작업을 설명한다. 이들은 평범한 사람들, 그리고 우연한 발견 때문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존재들인데 이들의 ‘눈을 감김’으로써 안창홍은 시대에 있어서 인물의 ‘익명성’이 갖는 함의는 사회 비판적 함의를 지닌다고 하였다.
② 심광현, 「잔인한 4월 봄날은 간다」【주석42】
(본문 중에서, 심광현은 1995년에 <봄날은 간다> 시리즈가 처음 시작되었다고 하나, 실제로는 1985년에 <봄날은 간다>를 시작한 바 있다.)
심광현은 이 글에서 <봄날은 간다>, <부서진 얼굴>, <49인의 명상>, <사이보그의 눈물>를 묶어서 평하고 있는데, 작품들의 도상과 표현에서 심광현은 한국 현대사의 변화 속에서 소시민과 일반 노동자들이 어떤 생명관리 정치의 버려지는 운명에 치닫고 있는가를 발견하였다.
③ 고충환, 「안창홍의 사진_회화: 보통 사람들에게 아리랑을, 잊힌 노래를 되돌려주다」【주석43】
고충환은 이 글에서 안창홍은 “사진과는 또 다른 사진을 그린다”고 하며, 그 함의는 “보통사람들을 사진_그림 속에 영원히 봉합함으로써 그들을 진정한 역사의 주체로서 재설정하고 싶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④ 베레나 알 베스-리히터, 「표정의 무대」【주석44】에서 알 베스-리히터는 안창홍의 <아리랑>시리즈가 갖는 익명성을 “과거의 특징없는 기억들(anonymous memeries)”이라 하며, 그것과 다른 안창홍의 ‘죽음’을 연상시키는 도상에서 환기시키는 것은 “고전적인 의미에서 죽음의 상징(a memento mori)”라 하였다.
Ⅵ. 2008-2010년대 중반 : 죽음의 미학화
2008-2010년의 <베드카우치> 시리즈
2012년 <아리랑> 시리즈
2014년 <맨드라미> 시리즈
1. 시기 개관
앞선 2000년대 초반 서술에서처럼 2000년대 안창홍은 새로운 연작을 시작하는 한 편, 기존의 연작들을 모두 묶는 전시를 하기도 한다. <아리랑>시리즈로 기존의 사진이미지 중 보통사람들의 얼굴들을 모아서 제작하였다. 2008년 발표된 <베드카우치>에서는 새로운 모델화의 양상을 보여줬다. <맨드라미>시리즈에서는 기존의 ‘양귀비’나 ‘맨드라미’로 그려낸 광활한 정원의 느낌이나 정물적 느낌으로부터 한층 나아간다. ‘꽃’과 ‘회화성’이 갖는 이미지의 환영성과 즉물적 페티시즘의 차원으로부터 한층 미학적으로 확장된 면모를 보인다. 이러한 계기는 그의 주제의식의 심화로부터 기인한다. 이 시기 작업은 대부분 ‘죽음’을 존재론적, 미학적 차원으로 승화시킨 작품군으로 분류될 수 있다.
전작을 관통하는 주요 주제들이 하나의 전시에서 시리즈별로 묶여서 소개되면서, 특히 ‘죽음’을 소재로 한 미학적 평가가 주를 이루었다. <죽음의 컬렉션>, <입맞춤>, <자연사박물관>시리즈, 그리고 <베드 카우치>시리즈와 <아리랑>시리즈, 또한 <맨드라미> 시리즈를 묶어서 안창홍의 일대기를 통해 주요한 비평가인 최태만과 성완경은 안창홍에게 있어 ‘죽음’이란 주제가 그의 전작에 관통함을 지적한 바 있다. 가령, 성완경은 초기 작업의 특성에서 ‘죽음’을 키워드로 하여 <자연사박물관>연작까지 비평 한 바 있다.【주석45】
“안창홍의 작업에서 죽음은 거의 생애적 주제라고 할만큼 지속적으로 다루어져왔다. 마치 치유될 수 없는 정신적 외상(外傷)이나 천형(天刑)처럼 혹은 로망스처럼, 그것은 초기작 이후 내내 그의 그림에 강박과 멜랑콜리의 그림자를 드리워 왔고, 다양한 형식의 탐닉과 관조의 대상이 되어왔다. [중략] 안창홍의 작품에서 이런 주제의 최초의 표현은 1976년의 <화장막에서>와 <병실>과 그 직후의 <인간이후>연작 그리고 1980년부터 83년까지의 <가족사진>연작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특히 <가족사진>연작들에서 가면 같은 얼굴들이나 검게 뚫린 눈들은 시간과 기억의 관계, 존재와 죽음, 두려움, 상실, 폭력성 등을 강력하게 환기시킨다. 그 이후 80년대 중반까지 이어지는 <위험한 놀이> <전쟁> <새> <얼굴> <가면> 연작들도 마찬가지다.”
안창홍의 죽음에 대한 관심이 초기작품에서부터 드러나고 있음을 지적하고, 나아가
안창홍의 “죽음에 대한 관심과 생명에 대한 관심은 동전의 양면처럼 동일한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관심이 작동하는 방식이 동일하지는 않다. 하나는 생존과 죽음의 순환이라는 관점에서의 관심이고, 다른 하나는 억압이나 금기로서의 관심이다. 즉 권력, 폭력, 성, 금기, 기억 등에 작용하는 힘으로서의 죽음에 대한 관심이다.”이며, 그의 작업 세계의 미학을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즉 1988년 부산을 떠나 작업한 작품들을 경유하면서, 죽음의 표현과 미학의 변주가 이뤄지고 있으며, 이를 통해 안창홍은 일종의 미학의 변용과 운동성을 획득하게 되면서 다음의 세 측면 혹은 세 단계를 변주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첫째. 소비사회의 욕망과 카니발리즘과 그 퇴폐성의 도발적이고 화려한 표현. 둘째. 죽음에 대한, 그리고 자연, 존재, 우주 등에 대한 철학적, 인문적 통찰. 셋째. 농밀하고 자유로운 회화적 표현 미학과 장인성.”
“폼나고, 당당한 것들보다, 가벼운 것, 하찮은 것, 유치한 것, 천박한 것, 통속적이고 별볼일 없는 것, 은폐되고 금기시된 것들이 오히려 제각기 짙은 향기를 풍기며 나의 감각을 유혹한다. 할 수만 있다면 나비처럼 가볍게 어디든지 날아가 이 모든 것들 위에 내려앉을 수 있는 의식의 자유를 가져야한다. 보이는 것의 뒷면, 감추고 싶은 것의 안쪽, 바른 것 속의 뒤틀림, 하찮음 속의 고귀함, 천한 것 속의 당당함 등등... 격조 있고 세련된 문화에 길들여진 눈으론 볼 수 없는 정말 살아있는 소중한 것들이 도처에 얼마나 많이 방치되고 버려져 있는지. 설령 악취 풍기고 추악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외면할 수 없는 우리 삶의 한 부분 아닌가! 1994년 4월 작업노트 중에서”【주석46】
라고 하여 작가가 단지 사회의 훼손된 측면을 훼손으로써 표현하기보다는 훼손과 어두운 면의 양면성과 모순됨, 그리고 그것의 생명성(삶의 측면)에 주목하게 됨을 볼 수 있고, 성완경은 이러한 지점에 착안하여 달라진 표현기법과 풍부해진 미학을 설명함을 볼 수 있다.
2. 주요 비평과 작업 노트
작품들은 회색조로 일관되었으며, <베드 카우치>연작을 설명함에 있어 앞서 제작한 <맨드라미 시리즈>를 연관시킴을 볼 수 있다. 죽음의 미학을 서술하고 있다.
① 최태만은 “익명의 개인에게 바치는 오마주, 우울하면서 따뜻한 절망”【주석47】에서 안창홍이 2006년 겨울 베이징으로 작업실을 옮겼다가, 2007년 봄에 귀국하여 폐암수술을 받고 난 후인 2007년 8월 초 안창홍으로부터 들려온 폐암 수술 소식과 개인전 소식을 접하고, 안창홍의 작업노트【주석48】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는 안창홍의 “절망의 회색, 혹은 최악의 그림”【주석49】인 <베드 카우치> 연작에서 보이는 도전적인 자세와 존재의 당당한 육체를 보면서, ‘사회적 육체’를 떠올렸다.
② 안창홍은 맨드라미 연작을 전시한 더페이지 갤러리 개인전의 서문을 직접 썼다. 여기서 그는 작업실 앞 마당을 가꾸면서 관찰한 식물들과 꽃들의 영고성쇠를 관찰, 목격하면서 어떻게 이 시리즈가 탄생되었고, 2014년 맨드라미의 선택과, 그 표현방식의 선택, 나아가 이 시리즈에서 “눈 먼 자들의 도시”라는 부제를 왜 붙이게 되었는지를 설명하였다.【주석50】
③ 최태만은 「고통으로 기록한 처절한 아름다움」【주석51】에서 “대지에 낭자하게 뿌려진 선홍빛 피가 그대로 굳어버린 듯한 그의 그림은 처절한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것이다. 그의 그림이 불러일으키는 정서적 긴장, 즉 처절한 아름다움은 그가 단지 자연을 재현한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식물을 동물로, 붉디붉은 빛깔의 꽃을 살코기로 표현한 것은 모두 죽음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그의 그림은 죽음의 비유이자 환유라고 할 수 있다.”라고 하여 안창홍의 뜰에 핀 맨드라미, 그 생화들이 안창홍의 그림에서는 어떻게 ‘죽음’과 연결되는지, 그리고 그것이 ‘메멘토 모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설명하면서, 안창홍의 꽃의 죽음 미학적 의의를 설명하였다.
④ 안창홍, 작업세계 정리
이 시기까지의 작품은 아라리오 갤러리 천안에서, <나르지 못하는 새>로 묶여서 전시 된 바 있다. 이 전시를 계기로 안창홍은 작업세계를 한 차례 정리한다.【주석52】 (아래 전문)
나의 개인전 <나르지 못하는 새>의 출품작은 1972년 초기작부터 2015년 작품까지 시기별로 엮여 있다. 초기작에서는 한 작가가 사적 독백으로부터 사회적 관심사로 시선을 확장시켜 가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실험했던 단계를 보여준다.
이 시기의 작업은 <위험한 놀이> 연작, <가족사진> 연작, <새> 연작, <사이보그의 눈물> 연작, <49인의 명상> 연작 등으로 발전해 나간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달동네 풍경>(1973)이나 <매춘>(1976), 회색빛 도시의 삶을 그린 <인간 이후> 연작(1979), 엄혹했던 군사 독재 시절 핍박의 고통을 그린 <절규>(1989), 광주 민중 항쟁을 소재로 만든 테라코타 두상들, 소비문화가 움트던 시절 성 상품화를 빗대어 그린 <우리도 모델처럼>(1991), <건달>(1996) 등등, 지금까지 생애에 걸쳐 지속적 관심으로 조형화하고 있는 부당함과 부조리의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이 초기작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대부분의 작품이 권력과 지배계급의 반대 항에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암울한 사회상을 녹여낸다.
지배계급의 반대 항에 서서
연작 중심으로 발표하는 나의 작업을 큰 덩어리로 구분하자면 한 줄기에서 뻗친 두 갈래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둘 다 주변부 사람들 이야기인데, 그 중 하나는 착취와 희생의 역사 속에 잊힌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아가는 이웃이 처한 현실의 상황을 통해서 바라보는 세상 이야기들이다. 오래 전에 노트에 적어 놓았던 작업에 대한 단상을 간추려 내어 이곳에 옮겨 본다.
나는 역사의 뒤안길, 잊힌 민중들의 삶으로 역사를 바라본다. 그리고 이들의 삶을 기록물이나 사진 자료들을 수집하고 들추어내어 차용하거나 변용하는 방식으로 재해석해 낸다. 역사의 장막, 망각의 늪에서 이들을 끄집어내어 일종의 제의를 치르는 것이다. 제작 과정 중 이들의 초상들 속에, 폭력과 야만의 역사와 삐뚤어진 권력에 대한 비판과 분노를 슬며시 집어넣는다. 그것은 암울한 회색빛 미래에 대한 경종이자 살아남은 자들의 또 다른 희망을 위한 의식적 행위이다.
또 하나의 시선은, 앞서 이야기한 현재를 숨 가쁘게 살아가는 주변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백화점 점원, 부랑아, 문신가게 사장, 농부, 오토바이족, 동성애자, 간호사, 친구들, 주막집 여인, 걸인 등등, 생활 속에서 늘 스치고 마주치는 사람들, 이들의 육체와 눈빛을 통해서 자본과 성(性), 권력과 탐욕, 욕망과 허구에 대한 것을 이야기한다.
야만의 문명과 야만의 정치, 청산되지 못한 과거사와 파열음, 비열한 수단으로 움켜 쥔 권력과 부, 착취, 불합리하고 모순된 시스템과 사회 현상들, 무지와 집단 최면. 초상화 속에 이런 모순과 불합리를 정교하게 반영한다. 이 부분을 나 스스로 ‘안창홍식(式) 정치적 발언’이라고 이야기 한다.
이렇듯 내 작업의 대부분은 과거와 현재를 오르내리며 망각의 그늘에 묻힌 진실과 현재 삶의 부조리에 주목한다. 특정 사건의 큰 덩어리에 가려진 작은 조각들, 희생되거나 말거나 관심 밖으로 멀찌감치 밀려나 있는 소시민들의 개인사에 집착한다. 197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생애를 걸고 천착해 오고 있는 <아리랑> 연작이 바로 그런 류의 작업 중 하나이다.
<아리랑> 연작 중 <기념사진>(1979~) 시리즈를 그리기 시작한 지 얼마 후에 친구 집에서 들춰본 낡은 사진첩 속에서 빛바랜 사진 몇 장을 발견했다. 일제의 강제 징용에 끌려가는 학도병인 남편과 하얀 한복(흑백사진 속의 흰 빛이 현실 속에서도 흰색이었으리라 느껴졌다)을 차려 입은 어머니의 기념사진 한 장! 이 비통한 한 장의 사진은 쇠망치처럼 내 가슴을 내리쳤다. (…)
이 젊은 부부의 우울하고 빛바랜 사진 위에, 사진의 일차원적인 특성을 뛰어 넘어 역사의 폭력에 강탈당한 청춘과 생이별의 아픔을 조형 언어로 아로 새기기 위해 고민과 노력을 기울였다. 이번 전시에도 포토콜라주로 제작한 <아리랑> 연작을 여러 점 출품했다.
고발의 메시지
또 다른 갈래인 인물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작업을 위해 모델을 구할 땐 직접 거리로 나선다. 간혹 지인에게 소개받기도 하고, 즉석 프러포즈로 이루어지기도 하는데, 직접 프러포즈할 때가 더 많다. 사실 직업 모델이 아닌 바쁘게 살아가는 생활인들을 시골 작업실로 불러들이고 남녀노소 관계없이 옷을 입히거나 벗기거나 하는 행위 자체가 우리 문화 속에서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필요 이상의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빼앗긴다.
사람들도 직업 모델이 아닌 사람들의 옷을 어떻게 벗겼는지에 대한 관심이 더 많다. 어쨌든 그런 과정의 노력을 통해 의도된 포즈로 앉거나 서있는 모델들의 몸을 통해 모멸과 불화의 이 시대를 증언하고 발언한다. 그렇게 2008년부터 제작한 인물화 <베드 카우치> 연작을 통해 몸의 진실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관음증적 시선을 위한 관능적 몸과 포즈가 아닌 냉혹한 현실을 견뎌내는 삶의 몸을 그리고 싶었던 것이다. 삶의 또 다른 시선인 <사이보그의 눈물> 연작, <49인의 명상> 연작들로 전체 전시가 구성됐다. 위의 작품들과 동일선상에 있는 또 다른 작품으로 가장 최근에 제작한 <야만의 시대>에 대한 작업의 단상도 옮겨 놓는다.
2015년 9월초 터키 남서쪽 휴양도시 보드룸(Bodrum)의 해변 모래밭에서 파도에 떠밀려 온 시리아 난민 아이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충격적인 사진과 함께 전해졌다. 이 끔찍하고 가슴 아픈 사건에 대해 매스컴과 사람들은 한동안 난리법석을 떨어댔다. 그리곤 잊혀졌다. 물론, 사람들 저마다의 가슴 속에는 각인되어 남아 있으리라.
어른들의 더러운 욕망에 의해 유린당하는 어린아이들의 생명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 죄악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당장 이스라엘의 무차별 폭격으로 수도 없이 죽어 나가는 파키스탄 어린이들을 보라. 가깝게는, 이 넘쳐나는 풍요(?)의 대한민국에서 부모들의 생활고로 인한 동반 자살에 희생되는 아이들까지! 나는 오래전부터 이런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고발적 메시지를 담은 상징적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사실 작품 구상을 시작하고 입체로 작품을 제작한 해가 2009년이니까 몇 년이 지난 지금 평면 전시를 위한 사진 작품을 만들었으니, 각각 독립적이면서도 하나로 연결된 두 개의 작품이 완성되기까지는 꽤 오랜 기간이 걸린 셈이다. 의료용 아기 인형을 구입해서 해체하고, 내가 의도한 형태로 재조립하고 시각적 효과를 위한 액션을 가하면서 실제 가해자처럼 마음은 힘이 들었다.
나는 작업을 시작하면서 해체된 아기 인형의 형상을 통해 강압된 희생의 끔찍함과 메시아의 숭고함이 동일선상에 올려놓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작업했다. 그런 뜻으로 만들어진 작품을 눈에 잘 띄는 작업실 벽에 걸어놓고 오며 가며 몇 년 동안을 바라만 보았다. 6년째 되던 어느 날, 작품의 성격이 가장 잘 드러나는 빛을 모색하기 위해, 자연광 속에서 각각 다른 시간대에 여러 컷의 사진을 찍어 보관해 두었다. 여러 날 동안의 인내심이 필요한 무척 길고 지루한 작업의 과정이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 터키 해변의 충격적 사건에 대한 소식을 접하면서 발표하기에 적절한 때라 생각하고 완성을 위해 매진한 것이다.
저장해 놓은 여러 장의 사진들 중 내 의도에 가장 잘 부합된 원판을 한 장 골라냈다. 여러 번의 실험을 거쳐 대형 캔버스에 피그먼트 프린트로 옮긴 후, 적절한 부위에 레진을 부어, 짓이겨진 어린 생명의 가녀린 육체 위를 번들대는 폭력의 광기가 뒤덮여 흘러내리는 듯한 효과를 주는 방법으로 작품을 완성한 것이다.
나는 늘 그림 속엔 시대정신이 녹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먼 훗날 한 작가의 그림을 통해서 그 시대의 통증을 거울처럼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모든 그림이 시대의 반영물이라면 보다 적극적인 참여가 바람직한 화가의 자세라는 생각이다. 이 세상의 미술 중 정치성을 띠지 않은 미술이 어디 있던가! 나는 화가의 시선에 의해 기록된 저항과, 타협하지 않은 자유정신이 깃든 삶의 미술이야말로 이 시대의 화가가 남겨야 할 유산이기도 하고 화가로서의 자존을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전 세계를 수렁으로 빠트린 금융자본주의의 폭력 앞에 몰락해 버린 모든 정신적 가치들. 소중한 모든 가치들을 돈의 똥꼬 아래로 깔아 뭉개 버린 물신주의의 힘과 더욱 피폐해진 우리들의 삶. 이 시대의 미술이 진정(!)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데 일조할 수 있기나 한 것일까?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이 의구심에 대해 흔쾌한 대답을 찾을 수 있기나 한 것일까? 전시는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은 불안한 시대를 살아 내고 있는 한 작가의 우울하고 자조적인 독백이고 근심 어린 세상을 향한 내뱉음이다.
Ⅶ. 2016- 2019 : 예술가의 소명과 예술의 역할
2016-7년 <마스크>와 <눈 먼 자들> 시리즈
2018년-지속 <이름도 없는...> 시리즈
2019년 《화가의 심장》(<화가의 손> 시리즈, <화가의 심장>, <이름도 없는...>)
2019년 《이름도 없는》(<마스크>와 <눈 먼 자들>, <이름도 없는...>)
1. 시기 개관
이 시기 거대 입체 회화가 등장했다. 기존의 얼굴, 마스크 시리즈가 <마스크> 시리즈, <눈 먼 자들> 시리즈의 거대 입체 회화로 부활하였고, <얼굴> 시리즈 중에서도 표현주의적 경향의 작업이 <이름도 없는...>시리즈로 부활하였다. <화가의 심장>과 <화가의 손> 시리즈는 기존의 페인팅 <화가의 심장>과 <화가의 똥>에서 직접적인 전거를 찾을 수 있다. 이들은 이전의 <인간 이후> 시리즈와 <새> 시리즈, 돌 위에 혼합재료를 쓴 <얼굴> 조각 시리즈 등, 콜라주와 혼합재료, 파운드 오브제 사용의 전례에서 재료 선택과 사용의 자유로움에서 이미 예견된 형식이었다. <마스크>와 <눈 먼자들>등의 얼굴과 두상 시리즈의 이미지 표현면에서는 <부서진 얼굴>에서 그 이미지의 유사성을 볼 수 있다. 또한 표현 방식면에서는 <양귀비 언덕>과 <맨드라미> 시리즈 등에서 보여줬던, 물감을 찍어서 표현하는 방식도 연결된다.
주제면에서는 안창홍이 지속해온 예술의 역할에 대한 비판적 시선과 존재론적, 미학적으로 탐구된 죽음의 주제가 합쳐진 것으로 볼 수 있다. 2019년 아라리오에서의 개인전 <화가의 심장>은 현대미술의 실재적 죽음을 목도함과 동시에 예술가의 재 탄생을 소리 없이 외친 전시로 기억된다.
안창홍은 한국 현대사에서 인간 존재의 시간성을 초월한 존엄성을 보다 확실하게 부각시키며 2019년 《이름도 없는》(경남도립미술관, 2019)의 대규모 개인전시를 하였다. 경남 도립에서의 전시는 사실 안창홍에게는 자신의 고향인 밀양으로 돌아간 느낌이었고, 삶과의 화해였다.【주석53】 2019년 더운 여름 내내 안창홍은 수많은 회화적 조각들 위에 직접 한 점 한 점 그림을 그렸다. 경남도립미술관 전시는 그 공간 구성에서부터 주제가 읽혀졌다. <이름도 없는...>시리즈와 2014년의 <맨드라미 -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을 생각하며>, <맨드라미-가을과 겨울 사이>, <맨드라미-개 같은 여름>시리즈를 한 쪽 공간에, 그리고 <마스크> 시리즈(49개)와 <눈 먼 자들>(두상) 시리즈를 다른 쪽 공간에 대조적으로 구성을 하였다. 작은 사이즈의 페인팅으로 희생당한 자들에 대한 애도를, 다른 공간에서는 원색으로 뒤덮인 거대 입체들의 행진 속에서 현대 사회, 정치, 자본의 양극화 속에서의 오늘날 현대인의 초상을 나열하였다. 작품 사이즈의 대조적인 면만 보더라도 오늘날의 양극화가 단지 부의 편중을 넘어서 ‘삶과 죽음’의 좁힐 수 없는 양극화임을 나타냈다. 한 쪽에서는 실제 생명의 ‘죽음’이, 한 쪽에서는 그 욕망과 금융 자본의 크기와 규모와 양상이 마치 분열하듯 증식해가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전시장 곳곳에 <화가의 손>을 배치함으로써 2017년-2019년의 시리즈들을 종합하는 성격을 보였으며, 여전히 ‘화가’의 역할은 이름도 없이 죽음을 맞이하거나, 존재하고 있는 생명들을 그려내는 것임을 분명하게 명시하였고, 작가노트에서도 밝혔다. 평론가 안소연과 심상용은 ‘죽음’과 예술, ‘제의’와 예술을 주제로 글을 썼다. 안창홍의 이러한 한국의 역사에 대한 성찰과 예술의 미학 정치적 역할에 대한 강한 발언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1)이 작가노트는 나중에 후술된 것인데, 안창홍의 학창시절 어떻게 그림 그리는 것에 몰두 했는지를 볼 수 있으며, 당시 감수성을 볼 수 있다. 이 작가노트는 안창홍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으며, 『민족미 학』 4(2005년 12월)에 수록되었다. http://ahnchanghong.com/index.php(앞으로 안창홍 홈페이지 링크 생략)
**2)안창홍 페이스북 페이지. https://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13887316146
**3)<인간이후>의 초기 버전으로는 <무제>(종이에 드로잉, 1978)에서처럼 버려진 담배꽁초들을 보면서 그 린 드로잉이 있으며, 1979년부터 본격적으로 콜라주 <인간이후> 시리즈와 담배꽁초에서 발전된 도상 으로 그린 페인팅 <인간이후>시리즈 두 종류로 나뉜다.
**4)안창홍 홈페이지, 2006년 4월 17일
**5)다음은 대략의 1980년대 참여 단체전 목록 : 《국제화랑초대 현대미술12인전》, 《80 POINT 소품전》, 《현대회화15인초대전》, 《회화15인전》, 《현대미술 21인의 초대전》, 《POINT.80전》, 《18인의 회화전》, 《POINT 초대전》, 《그룹 "농" 81전》, 《부산청년비엔나레》, 《POINT.81전》, 《Way: 1981 서울방법전》, 《Way: 1981 동경전》, 《상황과 의식 회화전》, 《ART KOREA》, 《韓國構造グループの東京展》, 《김응 기, 안창홍》, 《82, 인간 11인전》, 《서울.국제 MAIL-ART전'82》, 《한국현대미술 80년대 조망전》, 《서 울미술관의 작가전: 서울의 봄》, 《시대정신전》, 《제4회 현실과 발언 동인전》, 《서울미술관 개관2주년 기념전》, 《현실과 발언 판화전》, 《제3회 '젊은 의식'전》, 《83 인간전》, 《1983년 문제작가 작품전》, 《제5회 현실과 발언 동인전: 6.25》, 《부산미술 '70년대 다시 보고 싶은 작품(회화)》, 《해방 40년 역사 전》, 《제2회 시대정신전》, 《84 인간전》, 《한강미술관개관1주년기념 어떤 정신들전》, 《서울미술관 개 관4주년기념전》, 《85 인간전》, 《80년대 미술대표작품전》, 《86 인간전》, 《우리 시대의 肖像》, 《록화랑 개관기념 30대전》, 《'86 인간전》, 《제6회 현실과 발언 동인전》, 《반고문전》, 《'88현존시각전》, 《80年 代 韓國美術의 位相展전》, 《한반도는 미국을 본다 (Ⅰ)》, 《80年代의 刑象美術展》, 《21e FESTIVAL INTERNATIONAL DE LA PEINTURE 1989》
**6)작가 인터뷰, 양평 작업실, 2019년 11월 24일.
**7)작가 인터뷰, 11월 24일.
**8)캔버스 뒷면에 “74.”라는 숫자가 쓰여있는데, 작가의 싸인이 없다. 하여 작가는 그 숫자가 잘못되었을 확률이 높다고 하였다. 안창홍 인터뷰, 안창홍 작업실에서 작품 촬영시, 2019년 11월 24일.
**9)안창홍 인터뷰, 2019년 10월 9일, 양평작업실.
**10)《韓國構造グループの東京展》, 일본 도쿄 고마이(駒井)화랑, 1982.7.26.-8.8. <가족사진>(종이에 유 채, 109x65cm, 1982. 군복을 입은 남성과 흰 한복의 여성), <가족사진>(종이에 유채, 115x76cm, 1982. 베래모를 쓴 남성이 있는 세 명의 가족사진) 출품.
**11)안창홍 인터뷰, 2019년 10월 9일, 양평작업실.
**12)강선학, 「안창홍의 세계-그의 작품이 생각하게 하는 것-」, 『안창홍 1회 개인전』 서문, 한국미술청년 작가회관, 서울, 1980년 10월 13일부터 19일.
**13)강선학, 「사회의식의 회화적 변용」, 『형상과 사유』, 도서출판 지평, 1985. ; 『안창홍 그림모음집 1』, 신동배 인쇄, 1986. ; 『안창홍 그림모읍집 2』, 눈빛, 1993.에 재수록
**14)성완경, 「안창홍, 또는 아름다움의 덫」, 『안창홍 작품전』, 갤러리 누보 개인전 전시 서문, 1987 ; 『안창홍 그림모음 2』(위의 책)에 재수록.
**15)성완경, 「독립생활자의 초상」, 『안창홍전』, 온다라미술관 개인전 서문, 1989. ; 『안창홍 그림모음 2』 (위의 책)에서는 1987년 글로 나와 있다.
**16)『안창홍 그림모음 2』에 재수록
**17)『83문제작가 작품집』, 1984년 1월.
**18)『안창홍 그림모음 2』에 재수록.
**19)안창홍 당시 ‘현실과 발언’ 전시 참여시 모티브, “부산 텍사스” 사지 잘린 애비
골방에 두고
양 놈
털북숭이 가슴팍에
눈물 쏟는다
오늘은
얼굴 모르는 오라비
제삿날. *1984, 현실과 발언, 6,25 주제전 카달록에 실린글 옮김, 2006.02.28, 안창홍 홈페이지
**20)안창홍, “얼굴(Face)", 안창홍 홈페이지, 2006년 4월 17일.
얼굴= 얼(넋)이 드나더는 굴
얼골= 얼(넋)의 모양(형태)
**21)김달진 미술연구소, 『한국미술전시자료집 Ⅲ(1980-1989)』, 예술경영지원센터와 문화체육관광부 지 원, 2017. ; 『문예연감』, 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86-1990. 참조.
**22)박신의, 「안창홍의 그림세계」, 『80년대 형상미술전』, 사인화랑, 1989년 12월 4일-12워 17일; 『안창 홍의 그림세계 2』, 위의 책에 재수록
**23)정진국, 「무학유능 유학무능」, 『월간미술』, 1989년 7월호.; 『안창홍의 그림모음 2』 재수록
**24)박신의, 「환각과 예감에의 충동-안창홍 작가론」, 『가나아트』, 1990년 5,6월호 : 『안창홍의 그림모음 2』 재수록.
**25)안창홍이 1989년에 부산에서 떠나 서울에 왔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1988년 3월에 상 경하였다. 채충석기자, 「인간의 본질회복을 꿈꾸는 도화술사 안창홍-한국의 청년작가 정예 10선」, 『월간객석』, 1988년 8월 1일, 통권 54호. pp.144-147
**26)《풍자화, 그 해석과 비판의 소리》(1992, 현대백화점 미술관, 윤진섭 기획)출품작품의 경우, <위험한 놀이>(1983), <우리들의 일상>(1989), <장미빛 인생> 두 점(1991), <우리도 모델처럼>(1992)가 도록 에 수록되어 있는데, 안창홍의 정치 풍자와 세태 풍자를 한꺼번에 묶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의 <우리도 모델처럼>(1992)는 알려진 남녀 2인상이 아니라 남자 단독상이다.
**27)) 1991 『맥화랑기획 안창홍 초대전』 브로슈어: <봄 나들이>(1990), <구름잡기>(1989), <즐거운 식사>( 1986),
**28)정철수(鄭哲秀)기자, 「잔혹미술’로 現實(현실) 고발」, 『경향신문』, 1991.7.9.
**29)심광현, 「박제된 욕망의 공간과 화려한 고독의 세계」, 『안창홍 그림모음 2』, 앞의 책. ; 심광현, 「유 혹의 그림, 그리기의 유혹」, 『월간미술』, 1997년 6월호, pp.67-73. “천박하고 싸구려 장식적인 이미 지들을 강하고 당당하며 도발적인 형상으로 변환”[중략] “감각적인 도상들이 주는 이미지는 달콤하면 서도 공격적이며, 중성적이라기보다는 동물적이다. 싸구려 키치의 냄새를 풍기면서도 타협적이기보다 는 선병질적이며 도발적” [중략] “최근작에서 부각되는 아이러니를 내장한 가벼움과 유희적인 분위기는 80년대 그의 그림들에서 주조를 이루던 비극적 공포와 창백한 외로움 같은 무겁고 어두운 공격적 이미지들과는 대조적” [중략]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뒤틀린 환상은 언제나 일종의 컬트적인 분 위기를 유지”[중략] “80년대의 어둡고 무거운 그림과 90년대의 가볍고 밝은 그림들 사이에는 단절보 다는 연속성이 더 강하게 남아 있는 것”[중략] “삶의 에너지 전체가 문화적 정치경제적 위계질서의 틀에 의해 고착되어 가는 데 대한 강력한 항의이기도” [중략] “퇴폐와 건강함, 억압과 해방, 예술과 비예술의 대립을 고착시키는 관습적인 표상들의 지형을 가로지르면서 대립적인 카드들을 뒤섞어 놓 고, 그 뒤섞인 카드들 사이에서 일종의 ‘숨은 그림 찾기’같은 유혹적인 놀이를 전개” [중략]“‘유혹의 그림 그리기’는 자본주의의 ‘생체정치’에 포획되어 있는 육체와 욕망의 자유로운 활로에 틈새를 열어 주기 위한 ‘손-육체-사유’사이의 긴장된 운동의 형태로 작동할 수”있다고 하였다.
**30)강선학, 「소비되는 욕망의 사회; 안창홍전 6.3~13, NC 갤러리 / 23. 전경숙 갤러리」, 『미술세계』, 1997.6, pp.145-164
**31)심광현, 제목없음, 『안창홍』, 전경숙 갤러리, 1997. 6.3-6.23/ 갤러리 NC 6.3-6.13
**32)이섭, 「어항에 담아 논 세계- 진정한 자유」, 『안창홍-14th solo Exhibition By Changhong Ahn』, 이목화랑, 1997. 10.10-10.19
**33)이섭, 「세상살이 파편의 무도덕성」, 『월간미술』, 1999년 12월호
**34)<기념사진-봄날은 간다>시리즈는 작업의 시작시점, 구상시점은 19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작의 경우 거의 10년의 간격을 두고 제작, 재 제작, 재 프린트, 추가 제작된 작품 시리즈다. 현재 전시 도 록이나 작품집 등에 기재된 기록에 의거하면 1985년 시작한 3점이 있다. 도상으로는 ‘두 여인’ 도상 2 점과 ‘졸업사진’ 도상이다. 이 도상들은 2000년대에 다시 등장하며, 전시되었다. 1995년의 ‘광복군 -파리채’ 도상이 등장한 기록이 남아있다. 2001년 3점의 전시된 작품이 있는데, 1985년에 시작한 도 상인 ‘여자 2인’, ‘학교 졸업식’도상과 <김치> (광복군 총사령부 기념사진 중앙에 아이 등장-변형 광 복군, 일산 K씨 소장, 4조각으로 보관 중)등이 기록에 남아 있다. 또한 2002년 ‘1인의 광복군-내 콧 잔등에 파리가 앉았고나’, ‘노랑나비 팔랑팔랑’, ‘청춘시절’, ‘다리 배경 가족사진’, ‘두 여인-한 여자는 그네를 타는 장면’, ‘쌍파리채와 파리채들, 광복군 동일 도상’등이 제작되었다. 2005년도 작품은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이며 도상은 ‘무덤 앞의 아이들 단체사진’이다. 2007년 제작으로는 3점이 있으 며, ‘잊지 말자 이 날을’, ‘두 아이가 있는 가족사진’, ‘아이들이 많은 가족사진에 노랑나비’가 있다.
**35)“<봄날은 간다 3>를 끝내며”, 안창홍 작업노트, 안창홍 홈페이지, 2006년 1월 22일.
**36)안창홍, “눈감기기”, 안창홍 홈페이지, 2001년 2월.
눈감기기 = 일탈, 환각, 은밀한 상상, 잠, 망막의 저편, 어둠, 죽음, 우주, 초월, 부유하는 영혼.
**37)봉생문화상 수상 소감, 안창홍 홈페이지.
**38)<49인의 명상> 설치 설명과 “49인의 명상을 위한 작업 단상”, 안창홍 홈페이지
**39)<봄날은 간다 3> 작업일지, 2006년 1월 22일. 안창홍 홈페이지
**40)안창홍은 “이번에 열작한 작품들은 사진 자체를 작품으로 활용하거나 사진의 모티브를 회화적 방식 으로 변용해서 그린 것들이다. 이 작품들은 70년대 후반 <가족사진>연작을 시작으로 <봄날은 간다> 연작, <사이보그> 연작, <부서진 얼굴> 연작, <49인의 명상>등의 제목으로 지속적으로 발표해오던 것 의 연장선상에 있다. 나에겐 생애를 투자해서 완결로 가고 있는 각별하고 애정 어린 주제들인데, <기 념사진>만을 묶어 연작으로 선보이는 개인전은 이번이 처음이다.”라며 “역사의 주제이면서도 정작 역 사의 장 속에서는 부재한 평범한 사람들, 이들의 이미 수 십 년이 지난 빛바랜 기념사진들을 우리의 험난했던 근, 현대사 속의 사건들과 겹쳐보는 행위”로 작업을 시작했음을 서술하였다. <아리랑 2012>, Ahn Chang Hong, The Page Gallery, 2012.11.7- 12.9
**41)『안창홍: 시대의 초상 AHN Chang-hong, PORTRAITS of the TIMES』, 부산시립미술관, 2009.
**42)심광현, 「잔인한 4월 봄날은 간다」, 『얼굴』, 사비나미술관, 2006.
**43)「안창홍의 사진_회화: 보통 사람들에게 아리랑을, 잊힌 노래를 되돌려주다 Ahn Chang-hong's Photo-pictures: Taking Back the Arirang, the Forgotten Song for the Ordinary People」, 『Ahn Chang Hong』, The Page Gallery, 2012.
**44)Verena ALVES-LICHTER, 「Stage of Appearances」, 『안창홍 AHN, CHANG HONG 제 25회 이 중섭미술상 수상기념전』 자료집(원 글은 2012년 더 페이지 갤러리 개인전: 아리랑 전시 서문)
**45)성완경, 「죽음의 콜렉션」, 『안창홍』, 갤러리 사비나, 2002
**46)본문에 인용된 안창홍의 작가노트는 1994년 4월 작성한 것으로, 원문 출처는 안창홍 홈페이지를 참 조할 수 있다. http://ahnchanghong.com/index.php
**47)최태만 서문, 『안창홍: 시대의 초상 AHN Chang-hong, PORTRAITS of the TIMES』, 부산시립미 술관, 2009.02.28.-05.05. 이 글에서 최태만은 <아리랑> 시리즈(위에서 언급)와 2007년부터 시작한 <베드카우치> 시리즈에 대한 비평문으로 이어진다.
**48)초록빛 눈물과 초록빛 아픔,
초록빛 절망과 초록빛 희망,
초록빛 사랑과 초록빛 이별,
초록빛 연민과 초록빛 회환,
초록빛 증오와 초록빛 용서,
모나고 찢긴 모든 갈등들이 한데 녹아드는 안식의 빛깔, 초록.
(2007년 5월 26일 작업노트)
**49)(2008년 12월 20일 작업노트)
**50)안창홍, 「스물 아홉 번 째 개인전에 부쳐」, 『A.T.T.H.E.G.A.R.D.E.N.』, The Page Gallery, 2014.
**51)최태만, 「고통으로 기록한 처절한 아름다움」, 『월간미술』, 2015년 1월호.
**52)“개인전 《나르지 못하는 새》(2015)에 부쳐”, 안창홍 홈페이지
**53)안창홍, 《이름도 없는》展에 부쳐, 『이름도 없는』, 경남도립미술관, 2019
“안창홍 작가 디지털 아카이빙 연구”는 안창홍 작가의 전작 조사를 중심으로, 전시이력과 소장 및 경매이력, 작품과 관련(수록·인용)된 자료, 작가연보에 연구의 중점을 두고 이루어졌다.
일찍이 정규 미술교육을 거부하고 독립적으로 자신의 화업을 구축한 안창홍 작가(AHN Changhong, 安昌鴻, 1953~ )는 경남 밀양 출신으로, 초기 부산 시절을 거쳐 1988년 겨울에 경기도 양평 선바위마을에 작업실을 마련한 이후 현재까지 줄곧 그곳에서 작업하며 쉼 없는 창작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현재진행형 원로작가’라는 수식어가 과장이 아니듯 작업량 또한 상당하다.
[연구범위] 연구 기한(2019.3-2019.12) 동안 연구팀의 목표는 산발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안창홍 작가의 전작 목록과 소장처를 파악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것으로, “1971년(18세) 제작한 초기작부터 2019년 12월 4일 막을 내린 경남도립미술관 개인전 《안창홍-이름도 없는》의 출품작”까지를 연구 범위로 정하였다.
[연구과정] 연구팀은 1차 연구(상반기)에서 ‘전시 출품’ 및 ‘출판물 기록’을 기준으로, 안창홍 작가가 생산해낸 작품목록과 전시이력을 포함한 각종 자료를 수합하여 전작의 목록을 파악한 후, 작가와의 인터뷰를 통해 작품의 최초 소장처를 확인하였다.
[연구과정 1] 1차 리서치는 안창홍의 전시이력과 참여한 전시의 출판물을 중심으로 진행하였다. 본 연구팀이 초기 연구 과정에서 초기 기준으로 삼은 자료는 1986년과 발간된 『안창홍 그림모음 1』이고, 1993년 발간된 『안창홍 그림모음 2』(눈빛), 2010년 스케이프갤러리에서 발간한 『안창홍 인간에 대하여』 작품집이다. 이들 작품집은 각각 안창홍의 80년대 작품, 90년대 작품, 2000년대 시대별 작품을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안창홍 그림모음 1, 2』는 작가의 초기작에 대한 근거자료로 활용됐고, 『안창홍 인간에 대하여』는 카달로그 레조네에 버금가는 역할을 하는 주요 자료로 삼았다. 2010년 이후 작품들은 가나아트센터(2011), 더페이지갤러리(2012, 2014), 아라리오갤러리(2015, 2019), 경남도립미술관(2019) 등 국내 메이저급 화랑과 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전시인쇄물을 토대로 근작에 대한 정확하고 체계적인 목록화 작업이 가능했다. 그럼에도 해당 전시인쇄물들에는 작품명, 제작연도, 재료, 크기 등의 항목에서 상당한 오류를 발견하였다. 특히 2000년대 이후 출판된 전시인쇄물에서는 초기 기록의 오류를 바로잡지 않은 상태에서 재인용한 사례들이 다수 있었다. 연구팀은 안창홍 작가가 참여한 전시 중 출판된 약 600여 건에 해당하는 전시인쇄물을 교차 검토하고, 필요한 경우 작품 실사를 통해 발견된 오류들을 바로잡는 데 주력하였다.
[연구과정 2] 2차 리서치에서는 –전시와 출판물로 파악되지 않은- ‘경매 기록’을 기준으로, 누락된 작품 목록과 소장이력(소장처 이동)과 경매이력을 확인하였다. 경매 자료는 경매 기록을 수집하는 대표적인 두 기관 한국미술시장정보시스템(K-ARTMARKET)과 케이아트프라이스(K-Artprice)의 기록을 기준으로 정리하였으며, 상세 정보가 필요한 경우 해당 경매회사(서울옥션, 케이옥션, 에이옥션, 아트데이옥션, 아이옥션, 옥션온)의 웹사이트 기록을 통해 보완·취합하였다. 경매 기록을 통해 전시에 출품되거나 공식적으로 발표한 작품은 아니지만 화랑이나 개인 간 거래로 유통된 작품의 목록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연구과정 3] 3차 연구에서는 ‘작품 실사’(작품 실측 및 촬영, 재료 및 제작기법 확인, 작품 상태 조사, 서명 및 작품뒷면 기록 및 액자 유무 확인)를 진행하였다. 작가의 작업실에 보관중인 작품들과 일부 개인 소장가들이 공개해준 작품에 대한 실사 과정에서 미공개·미발표된 작가의 초기작들을 일부 발견하였다. 또한 작가 인터뷰와 실제 작품을 직접 대조하는 과정을 거치며 기존 기록의 오류들을 다수 정정하였다. 전반적으로 개인 소장가 탐방과 주요 국공립미술관 소장품 파악, 경매 이력 추적 등의 연구 작업을 통해 안창홍 작가의 작품세계를 입체적으로 분석·조망·정리할 수 있었다.
[심층연구과정] 각각의 연구 단계에서는 작품에 대한 심층 연구를 위해 작품 외 자료-문헌조사(참고문헌, 작가노트, 온라인 기록물 등)를 체계적으로 정리해나갔다. 그 중 ‘전시 이력’과 관련된 자료(도록, 단행본, 기사, 작가의 공식 웹사이트)는 최대한 ‘전수조사’하여 연구에 반영하였고, 작가와 소장가 및 관련 전문가(평론가, 학예사, 교류작가 등) 인터뷰를 통해 텍스트 기록으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였다. 그 결과물은 ‘작가연보’와 ‘인용문’, ‘연구자노트’에 반영하였다.
[동영상·비평문] 더불어 작가의 초기작부터 시대별 대표작과 주요 비평문, 작업실, 작가 및 핵심 관련자 인터뷰를 수록한 동영상(20분)과 안창홍의 주요 작품 및 미학을 연구한 집필원고(「안창홍의 비미학(Inaesthetics, 非美學), 한국적 정동 실체의 연대기」)를 생산하였다. 비평문에서는 기존 비평, 전시 경향, 시대별 한국 미술사의 특성, 안창홍 개인사 등을 복합적으로 고려하였다. 안창홍의 초기 작품에서부터 줄곧 나타난 관람을 불편하게 하는 측면을 한국적 정동의 중핵을 드러내는 것으로 분석하였다. 특히 초기 작업세계를 통해서 배태된 안창홍의 전 작업에 걸친 핵심들을 파악해보려고 하였으며, 대표 시리즈들과 대표적인 주제를 통해서 이들을 구체적으로 논하였다. 이 과정에서 초기 작품들을 기법면, 소재면, 도상면, 주제면 등에 걸쳐 상세하게 고찰하였고, 전작에 걸친 핵심 주제들의 배아적 양상을 서술하였다. 또한 미술사적 연구 토대를 위해 안창홍과 민중미술, 형상미술의 관계성을 추적하였다. 미학적 연구에서는 안창홍 죽음의 미학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양식적 특수성 속에서 안창홍이 특히 사진의 미학적 특성과 매체적 특성을 고려한 지점에 주목했다. 안창홍의 평생에 걸친 인간 탐구의 결과를 보여주는 모델화에서는 가부장제적 관습화된 보기의 문제와 그 장치의 문제 등을 다뤘다. 또한 안창홍이 본격적으로 한국 현대미술 시장 활동을 한 1980년대 말부터의 전개과정과 의미를 대략적으로 다뤘다.
[디지털화] 서비스 제공되는 작품 이미지 선별을 위해서 1차적으로 전시인쇄물에 수록된 전 작품 이미지를 디지털화(jpg, PDF)하였다. 중복 수록된 작품들은 원작에 가장 가까운 작품 이미지를 대표 작품화하여 디지털화하였으며, 컬러패치를 부착하고 촬영한 이미지와 액자와 함께 촬영한 이미지, 전시 설치 전경(installation view)이 포함된 이미지를 기타이미지로 디지털화하였다. 이 외 기존 발표된 작품 외에 작가 작업실에 소장되어 있는 미발표 작품들은 직접 촬영하고 정보를 기입하였다. 일부 이미지 저작권을 확보하지 못해 이미지 서비스가 불가한 경우(경매 출품작, 개인 소장가 요청에 의한 비공개작 등)라도 작품의 목록과 상세 정보는 노출할 수 있도록 협의하여 최종 결과물에 반영하였다.
[서비스이용동의] 연구 결과물의 원활한 서비스를 위해, 연구 과정에서 안창홍 작품의 정보 및 자료 수집, 저작권 사용 협의, 관계 단체 및 기관의 협조를 요청하고 동의를 받았으며, 필요한 경우 이를 공문서화하였다. (예: 2019년 경남도립미술관과의 영상 제작 저작권 협의, 안창홍의 작품을 촬영한 사진가(권오현·김동근·박홍순)과 이미지 활용 협의, 안창홍과 공동작업한 작가(김창겸)와의 작품 공개 서비스 협의, 안창홍의 개인전을 진행한 주요 갤러리와의 정보 서비스 협의, 안창홍의 작품을 소장한 국공립미술관과의 협의)
[연구결과] 연구결과, 작품 총 1389점(평면 1221점, 입체 167점, 미디어 1점, 전시이력(1976-2019년) 총 329건(개인전 43건, 단체전 286건), 작품 외 자료(전시인쇄물, 참고문헌, 작가노트, 사진, 영상, 온라인기록물 등) 총 1751건, 작가연보 246건에 대한 목록화를 마쳤으며, 경매 기록 약 150건을 별도 취합하였다. 목록화된 자료를 바탕으로 작품제목, 제작연도 및 재료, 연보 등을 연구팀의 기준을 갖고 체계적으로 정리해나가는 과정에서 약 100건의 작품 정보 오류를 정정 기재하였다.
목록화 결과물은 서비스를 염두에 두고 항목별 관련 작품 및 자료간의 연동이 가능하도록 설계하여 레퍼런스코드를 부여(“일러두기”에 반영)하였다. 목록화 입력 내용을 5개 항목(작품/자료/전시이력/참고문헌/연보)으로 대분류하였고, 각 항목의 하위분류는 “별첨”하였다. 향후 추가되거나 수정되는 자료는 첨부된 분류 기준에 따라 입력, 기술할 수 있도록 준거를 마련하였다. 더불어 주요작품의 시리즈별로 키워드를 생성하였다. (모든 기록은 예술경영지원센터의 「미술자료 기록관리 지침」에 따라 작성하였으며, 예외의 항목들은 “연구자노트”에 추가 기록하였음을 밝힌다.)
일러두기
1. 이 일러두기는 온라인 공개하는 안창홍의 작품에 관한 것이다. (기존 기록에 대한 오류가 지속적으로 발견되고 있는 상황, 소장 이력이 계속 변동되고 있는 상황, 작가가 작업을 현재진행중인 상황을 고려하여) 공개되는 정보 및 이미지는 현재 연구 진행중인 내용으로 최종적으로 확정된 내용이 아님을 밝힌다.
2. 안창홍 원로작가 디지털 아카이브 연구팀의 연구조사에서 중점을 두었던 부분은 전수조사와 기존 기록의 오류 정정이다.
4. 이번 공개에서는 안창홍의 작품 가운데 총 1,389점의 작품 정보(평면 1221점 + 입체 167점 + 미디어 1점)를 제공한다.
5. 각 작품의 번호(레퍼런스코드)는 연대기 순서를 따르고, 하위분류를 작품의 유형으로 하였으며, 각 아이템은 작품 시리즈(연작)·주제별 키워드로 분류하였다.
· 현재 생성된 안창홍 작품의 대표 시리즈(연작)는 키워드는 다음과 같으며, ‘키워드’ 항목과 ‘연구자 노트’를 통해 검색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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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 정물 / 가족 / 가족사진 / 자화상 / 인물 / 인간 / 인간 이후 / 죽음 / 달 / 달밤 / 위험한 놀이 / 용사 / 전쟁 / 아버지와 아들 / 기념사진 / 봄날은 간다 / 얼굴(들) / 우리도 모델처럼 / 자연사 박물관 / 헤어컬렉션 / 49인의 명상 / 사이보그 / 사이보그의 눈물 / 여장남자 / 소녀 / 여인 / 여자 / 남자 / 남녀 / 누드 / 여행 (인도, 몽골, 중국, 실크로드, 그리스) / 꽃 / 맨드라미 / 양귀비 / 아리랑 / 이름도 없는 / 눈먼 자들 / 마스크(가면) / 욕망(탐욕) / 똥 / 개 / 예술가(아티스트) / 고양이 / 새 / 노랑나비 / 병실 / 김치 / 에스키스 / 무제 / 미상 / 기타 |
6. [작품유형] ‘평면’(시리즈 I), ‘입체’(시리즈 II), ‘미디어’(시리즈 III)로 분류하였다.
7. [작품구분] 전시에 출품되었거나 전시인쇄물에 등재된 (출처 있는) 작품은 ‘대표작’으로 그 외의 작품은 ‘일반’으로 분류하였다.
8. [작품제목] 제목은 다음과 같은 세 기준에 의해 정리하였다.
(1) 작가가 작품 자체에 직접 표기한 제목과 전시인쇄물에 기록된 제목을 그대로 표기하였다. (단, 출처에 오타가 있는 경우 수정하여 표기, 수정한 내용은 ‘연구자노트’에 기술하였다.)
(2) 출처마다 사용된 제목이 여럿일 경우, 작가 인터뷰를 통해 작가가 우선하는 제목으로 ‘확정’, 그 외의 제목은 모두 ‘병기’하여 다른 제목의 이력을 제시하였다.
(3) 출처가 없는 작품의 경우 ‘무제’(작가 제공) 혹은 ‘미상’(작가의 확인을 받지 못한 경우)로 기록하였으며, 이는 추후 연구 과정을 통해 변동 가능성이 있음을 밝힌다.
9. [제작연도] 제작연도는 다음과 같은 기준에 의해 정리하였다.
(1) 작가가 작품 자체에 제작시기가 표기된 경우 자필 서명을 최대한 따랐고, 그 후 전시인쇄물 등 기록에 나온 연대로 보충하였다.
(2) 출처별로 기록이 상이한 경우: 작품의 제작 시작 연도를 기준으로 작성한 기록과 제작 끝 연도를 기준으로 작성한 기록이 있다. 이 경우, 작가 인터뷰를 통해 ‘제작 시작연도’와 ‘제작 끝연도’를 기술하고, 기존 기록 또한 출처와 함께 병기하여 제작연도의 이력을 제시하였다.
(3) 출처가 없는 경우, 제작기법과 작품주제의 유사성을 고려하여 대표시기를 추정하여 ‘추정시기’에 기술하였다. 추정이 불확실한 경우 ‘연도미상’으로 별도 분류하였다.
(4) 작가가 자필 서명한 기록을 제작연도의 완전한 근거로 삼을 수는 없으며, 일부 작품의 경우 정확한 제작연도에 대한 연구가 필요함을 밝힌다.
10. [규격] 평면 작품은 세로(cm) x 가로 (cm) 순으로 표기, 입체 작품은 세로(cm) x 가로 x 높이(cm) 순으로, 미디어 작품은 동영상 재생시간(time)으로 표기하였다.
(1) 출처 기록을 따르고, (실측 환경에 따라 규격의 오차가 존재하기에) 출처마다 규격이 상이한 경우 모두 기술하였다.
(2) 실측이 가능한 작품의 경우 연구팀이 실측한 크기를 병기하였다. 액자가 있는 경우, 액자 포함 크기를 병기하였다. 단, 제대로된 실측 환경이 갖춰지지 않은 곳에서 실측하였기에 실측의 오차가 존재함을 밝힌다.
11. [재료 및 기법]
(1) 출처에 기록된 재료 및 기법을 예술경영지원센터의 「미술자료 기록관리 지침」에 따라 용어를 통일하여 기술하였다. 단, 재료 및 기법의 용어를 통일하여 기술하는 과정에서 상세 재료명이 소실될 우려가 있는 경우 ‘연구자 노트’에 상세 재료(종이의 재료, 사용된 콜라주의 재료 등)를 추가 표기하였다. 판화 등 에디션이 있고 에디션 번호를 확인할 수 있는 경우 ‘에디션’을 추가 표기하였다.
(2) 출처마다 사용된 재료 및 기법이 여럿일 경우, 모두 ‘병기’하여 다른 재료 및 기법의 이력을 제시하였다.
(3) 재료 및 기법의 기록이 명백히 상이하거나 출처가 없는 작품의 경우, 작가와의 인터뷰를 통해 정정하여 기술하고, 오류를 수정한 경우 ‘연구자 노트’에 추가 기술하였다.
12. [작품 상태 구분] 소장, 경매, 파손, 분실, 소실, 미상으로 구분하였다.
(1) 개인(작가 포함) 및 기관이 소장하고 있는 경우 ‘소장’, 소장처가 불분명하나 경매 기록은 파악 가능한 경우 ‘경매’로 구분하였다. 그 외 정확한 작품의 상태를 파악가능한 경우 ‘파손’(작품이 파손된 경우), ‘분실’, ‘소실’(작가가 의도적으로 작품을 없앤 경우) 항목을 기술하였으며, 작품의 소장처를 작가도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 ‘미상’으로 기술하였다.
(2) ‘소장’의 경우, 개인 소장은 ‘개인’으로, 기관 소장은 ‘기관명’, 작가 소장은 ‘작가 소장’으로 표기하였다. 보관 장소를 알 수 있는 경우 지역명까지 기술하였다. 소장처의 요청에 따라 비공개로 표기해야 하는 경우 ‘연구자노트’에 별도 기술하였다.
(3) ‘소장 성격’(작가 소장/구입/기증/기타)의 경우, 관련 문헌 및 작가 인터뷰를 통해 최초의 소장 이력을 우선으로 기술하였고, 경매 기록 등을 통해 마지막 소장 이력을 확인할 수 있는 경우에는 최근 소장 이력을 기술하였다. 단, 경매 이력의 경우, 경매 기록을 조회한 시점에서 따라 이력이 변동되고, 거래가 완료된 기록은 해당 경매 사이트에서 소실되는 경우가 많아 정확한 조사가 불가함을 밝힌다. 그러나 기록이 남아 있는 경우 최대한 수용하여 기술하였다.
13. [전시 이력] 문헌 근거를 바탕으로 작품이 전시된 이력을 정리하였다. 모든 전시에서 전시인쇄물을 생산하지는 않기에, 전시인쇄물이 없는 전시들의 기록은 신문 등 언론기사 통해 별도 취합하였다.
14. [인용문] 작품에 관한 기술이 되어 있는 문헌을 조사하여 정리했습니다. 말미에 인용문이 기입된 전거를 표기하였다.
15. [연구자 노트]
(1) 기존 출처의 작품 상세 정보에 오류가 있어 정정한 사항
(2)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작품 이해에 설명이 필요한 경우
(3) 기존 항목에서 수용이 불가한 요소 (재료 및 기법의 상세명 등)
(4) 현 시점에서 서비스 불가한 작품과 그에 대한 사유 (소장가 요청 등)
(5) 작품 검색과 자료가 연동이 가능하게 하기 위해 작품 주제별 주요 키워드
등을 연구자 노트에 기입하였다.
16. [작품 외 자료]
(1) 참고 문헌 : 작품이 수록되거나 작품에 관한 언급이 있는 문헌을 정리하였다. 특히, 안창홍 작가에 대해 언급된 언론 기사의 경우에는 전수조사(1974-2019)하여 기술하였다.
(2) 전시인쇄물: 안창홍 작가가 참여한 전시 정보를 기술하였다. 더불어 기존 전시 인쇄물 중에서 개인전 자료들은 모두 PDF로 전환하여 검색 가능하게 하였고, 단체전의 경우 작가와 작품 정보가 노출된 페이지를 PDF로 전환하여 제공하였다.
(3) 작가노트: 안창홍 작가는 자신의 공식 홈페이지에 작품 제작에 관한 작가노트를 기록해왔다. 홈페이지 생선 이전 수기로 적은 작가노트의 경우에도 공식 홈페이지에 새로 타이핑하여 업로드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연구팀은 1차적으로 안창홍의 공식 홈페이지에 있는 작가노트의 자료들을 목록화하였다. 다만, 웹 기반의 정보는 영구 서비스가 불안정하기에 해당 기록들을 PDF로 전화하여 문서화하였다.
(4) 사진: 작가 및 작품과 관련된 사진을 디지털 이미지와 함께 기술하였다. 작가의 프로필 사진과 전시 전경 사진 등이 포함되어 있다.
17. [인용문] 국공립기관의 안창홍 작품 소개글, 전시인쇄물에 게재된 비평글과 인터뷰, 정기간행물에 게재된 전시 리뷰와 작가론, 인터뷰 등 자주 언급되는 인용문들을 소개하였다. 특히 1970-1980년대 초기 작가 관련 비평의 경우는 일간지 기사 또한 주요하게 참조하였다.
18. [연보] : 출생 / 학력 / 수상 / 경력(사회활동) / 작업활동(작품이력/전시이력) / 기타(가족 및 인간관계 등 포함) 항목으로 구분하여 관련 이미지와 함께 기술하였다. 1차적으로 최태만의 작가론 『어둠속에서 빛나는 청춘 - 안창홍의 그림세계』를 기초 자료로 하였고, 전시 활동과 여행, 수상 등의 내용은 갤러리 스케이프에서 발행한 『안창홍 인간에 대하여』와, 최근 개인전 자료에서 목록을 확인하고, 주요 개인전과 단체전은 직접 전시 인쇄물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연보를 교차 확인하였다. 특히 출생부터 1989년 이전 부산 시절의 경우 작가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다시 정확하게 해당연도와 장소 등을 확인하였으며, 작가의 기억이 불완전한 경우는 출처 기록을 통해서 객관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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