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충섭은 지역성(locality)이 갖는 심오한 한국적 정서와 글로벌리즘이 요구하는 다양성을 확보한 작가이다.
어떤 범주와 소속에 속하지 않고 자유로운 사유세계를 추구해온 작가는 1970년대 초기 뉴욕으로 이주하여 오랜 세월 자연과 문명의 문제에 천착한다.
이러한 사유의 바탕에는 고국과 고향,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진하게 깔려있다. 이는 곧 인간중심의 이기심으로 축적한 문명사회가 상실한 상생의 마음, 자연친화적 삶 등 인간의 근원에 대한 성찰이다.
임충섭은 자연과 인간의 문명을 이분화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세계는 자연과 문명의 조화와 연결을 시도한 철학의 구현이다.
물에 비친 달이 모두 달이라는 해석에 기반을 둔 <월인천강>은 자연과 문명이 어우러진 한마당이다. 임충섭에게 자연과 문명은 동양과 서구의 문명차이를 지시한다. 그의 마음에 남아있는 고향은 아직 순수한 자연의 상태이다. 반면 이국땅 뉴욕은 문명과 이기에 부딪혀야 하는 인위의 장소이다. 이 두 개의 장소에서 오는 정체성의 혼란은 임충섭이 자연과 문명을 구분하고 또 연결하려는 정신적 모티브로 작용한다. 임충섭이 처마와 무명실과 같은 한국의 전통적인 소재를 가지고 자연과 문명을 잇고자 하는 이유는 개발과 파괴로 점철한 서양문명에 대한 의구심과 오래된 고향의 기억이 소환한 동양문명에 대한 그리움이 교차한 융합의 산물이다.
임충섭은 시기적으로나 내용적으로 한국 설치미술의 역사이다. 특히 한국 건축의 비움과 사이, 물매, 마당 등의 공간 개념과 처마, 자락, 무명실과 같은 공간과 공간을 잇는 전통적인 사물을 적용하여 자연과 문명,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자 한 창조성과 소재의 독특성은 글로벌 시대, 한국 설치미술의 개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바, 한국성에 기반한 설치미술이 나아갈 수 있는 글로컬한 방향을 제시한다.
1941 충청북도 진천 출생
1964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졸업
1969 성정여자 중고등학교 미술 교사
앙가주망 그룹 가입(~1975)
1973 뉴욕 퀸즈 이주
1980 《연례공모 ’80》, 퀸즈미술관, 뉴욕, 미국
1981 《개념드로잉》, 오케이 헤리스 갤러리, 뉴욕, 미국
뉴욕 맨하튼으로 스튜디오 이전
1985 《O. I. A》, 시티갤러리, 뉴욕, 미국
1991 《LIM CHOONG SUP》, 국제갤러리, 서울
1993 뉴욕대학원 대학원 석사
《다른시각들》, 뉴버거미술관, 뉴욕주립대학교, 퍼체이스, 뉴욕, 미국
《개미굴》, 도로시골딘갤러리, 로스엔젤레스, 미국
1997 《화석 풍경》, 산드라게링 갤러리, 뉴욕, 미국
《요하네스버그 비엔날레》, 요하네스버그, 남아프리카공화국
2000 《빛의 건축》, 로댕갤러리(현 플라토 갤러리), 서울
2006 《되돌린 버릇》, 국제갤러리, 서울, 한국
2008 《신발 혹은 신발이 아닌 미술관》, 크뤼샤우템, 벨기에
《나침판의 끝》, 하바나, 쿠바
2009 《TRACES》, 창아트, 베이징, 중국
2010 《LUNA》, 학고재갤러리, 서울
2011 《스코프 바젤》, 더브너모던아트갤러리, 바젤, 스위스
2012 《임충섭:달 그리고 월인천지》, 국립 현대미술관, 과천
2015 《VOID》, 코리아 소사이어트 , 뉴욕, 미국
2017 한국예술경영지원센터 2017 원로작가 디지털아카이빙 선정작가
《단색적 사고》, 갤러리현대, 서울
2019 《Dreamin'》, Art Mora, 뉴욕, 미국
2020 《사랑의 기술》, Wess, 서울
2021 《드로잉, 사잇》, 갤러리현대, 서울
2022 《2020-2021 신소장품전: 사유의 방법》, 청주시립미술관, 청주, 한국
《Richard Tuttle & Choongsup Lim: How Objects Grasp Their Magic》, 페이스갤러리, 서울
자연과 문명의 ‘사잇’ 존재 임충섭의 마음파내기
이필·심현섭
예술은 인간의 정신적 <떨림=Oscillation=진동>이다.【주석1】
-임충섭
어떤 외적 제약에도 예술적 자유를 포기하지 않고 본인만의 사유세계를 온전히 표현해온 임충섭은 사색가이자 시인이며 이야기꾼이다. 다양한 매체를 자유자재로 조형하는 그의 작업은 재료를 다룸에 있어 장인의 경지에 이른 이만이 보여줄 수 있는 미적 성취에 도달한다. 절제되었으나 세련된 미감이 두드러진 그의 조형 작업에서 문학과 미술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본인의 사유를 간결한 언어로 기록하는 그의 오랜 글쓰기는 ‘자락’, ‘타래’, ‘녘’, ‘굼치’ 등 한국말로 지은 작품제목에서 기지를 발휘하여 작품이 품고 있는 내러티브를 완성한다. 임충섭이 문명의 거리에서 발견한 일상 오브제들은 시적 정화를 거친 끝에 삶의 리얼리티를 담아낸다. 놀라운 솜씨로 사물을 붙이고 다듬고 쌓아 서로를 연결하는 그의 작업의 오브제들은 임충섭 개인과 인간 삶을 둘러싼 자연과 문명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준다. 그 이야기는 고향에 대한 기억의 재구성이자 뉴욕이라는 문명의 상징적 장소에 살면서도 자연과 분리되지 않은 작가의 마음을 탐구한 자화상이며, 자신을 자연과 문명을 잇는 존재로 인식한 예술철학의 표현이다.
‘사잇’ 존재
1941년 충북 진천에서 태어난 임충섭의 예술철학과 개념은 어릴 적 고향의 경험과 기억에서 나온다. 임충섭에게 고향 진천은 어머니를 여읜 아픈 기억의 장소이다. 어릴 적 어머니로부터 받은 사랑에 대한 그리움은 평생 그의 작업의 모티프로 작용했다. 임충섭에게 고향은 부재와 결핍의 공간이지만 사랑에 대한 갈망, 자연에 대한 회귀본능을 불러일으키는 곳이기도 하다. 고향의 기억은 임충섭에게 예술가로서 존재론적 의미, 정체성의 원천을 제공했다. 임충섭이 자신을 자연과 문명을 잇는 다리, 즉 ‘사잇’의 존재로 인식하는 마음의 근원에는 어릴 적 고향의 기억이 자리한다. 임충섭은 한국 전쟁 직후 서울에서 피난 온 학교 선생님의 인솔로 백사천에 놀러간다. 맑은 물 한쪽에 버려진 낡은 탱크에서는 녹이 흐르고 그 아래쪽에는 송사리 떼가 노닌다. 학생들은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고운 모래를 한 움큼 집어 누런 이를 닦는다.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이 장면에서 임충섭은 자연과 문명의 이질적 만남이 자아내는 생경한 대비를 경험한다. 세월이 흐른 뒤 임충섭의 기억은 이 장면을 재구성한다. 전쟁을 피해 온 선생님은 이데올로기의 표상이다. 탱크는 인간문명의 폭력성을, 아무렇지 않게 물속을 노니는 송사리는 대자연의 포용력을, 양치질을 하는 아이들은 강인한 인간의 생명력과 공존의지를 지시한다. 자연과 문명의 경계를 인지하면서도 그 사이에서 자연과 문명을 공존하게 하는 다리 역할을 하겠다는 작가의 뚜렷한 의지는 이렇게 형성된 백사천의 기억은 평생 임충섭의 작업을 관통한다.
농촌출신으로 자연과 밀착한 성장과정을 통해 감성적이고 예술적인 소년으로 자란 임충섭은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도심으로 나오면서 조금씩 문명의 영역으로 이동한다. 그는 1957년 서울예고를 들어가며 한국 문명의 중심지 서울로 이동하고 서울대학을 졸업 한 후 1973년 세계문명의 용광로인 뉴욕으로 이주한다. 임충섭의 눈에 비친 맨해튼의 마천루는 강렬한 수직의 경험으로 다가온다. 인간의 물질주의와 기능주의가 만든 거대한 수직의 빌딩 앞에 선 임충섭은 기억의 우물에서 고향의 수평선을 떠올린다. 문명의 수직과 자연의 수평이 개념화하는 순간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본 고향 언덕의 수평선, 그 파란 수평의 경계선을 따라 넘어가던 상여꾼들의 모습과 요령잡이의 “이제 가면 언제 오나…”하는 소리의 운율, 펄럭이는 남색 휘장 등의 기억에 취해 손을 저으며 설명하는 임충섭의 수평 개념은 그렇게 형성되었다.【주석2】 이후 임충섭은 문명과 자연의 만남을 시각화하기 위해 한국의 처마, 물매 등을 소재삼아 수직의 문명을 완화하는 수평의 작업을 제시한다.
예술적 갈증을 채우기 위해 뉴욕으로 건너간 이후 임충섭은 자연과 문명의 연결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데 집중한다. 그의 작업은 인간중심의 이기심이 축적한 문명사회가 잃어버린 상생의 마음, 자연친화적 삶 등 인간의 근원에 대한 성찰로 철학적 깊이를 더해간다. 뉴욕의 문명은 고향 진천의 기억과 대비된다. 그의 마음에 남아있는 고향은 아직 순수한 자연의 상태이다. 반면 이국 땅 뉴욕은 문명과 이기에 부딪혀야 하는 인위의 장소이다. 이 두 개의 장소에서 겪은 문화적이고 인종적인 정체성의 충돌 혹은 혼란은 임충섭이 자연과 문명, 서양과 동양, 한국과 미국의 차이를 구분하면서도 연결 짓는 작품개념의 모티브로 작용한다.
잊힌 한국의 과거는 임충섭의 작품 속에서는 현재이지만 작가의 매우 다른 도시적 현재 속에 불안하게 존재한다. 두 개의 현실 사이의 모순은 과거와 현재, 도시와 시골, 한국과 미국 사이의 연결선이, 그것이 처음 나타났을 때보다 훨씬 더 침투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풍부한 역설들을 그에게 제공한다.【주석3】
현재의 뉴욕과 과거의 한국이 불안하게 공존하는 내면의 갈등과 모순을 임충섭은 ‘사잇’이라는 함축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헤쳐 나간다. ‘사잇’은 두 존재의 중간을 의미하는 ‘사이’와 둘을 연결하는 ‘잇다’라는 말을 합한 용어이다. 이 단어를 통해 임충섭은 뉴욕과 한국, 도시와 시골, 문명과 자연 등의 사이를 연결하는 존재로서 자신을 규정한다. 자연과 인간 문명을 이분화하지 않으며 그 공존의 필연성을 믿는 그에게, 예술가는 자연과 문명 사이에 다리를 놓는 존재이다.
나의 작업은 자연과 문명의 경계선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 둘의 ‘사잇’을 잇는 다리의 역할입니다. 나의 설치작업은 자연, 문명, 기억의 건축적 축적물입니다. 예를 들어 <월인천지>의 물, 달, 정자, 타래, 실들은 ‘사잇’을 잇는 줄임의 작업입니다. … 나는 자연계와 인간계의 연결의 고리역할을 하고 싶습니다.【주석4】
‘사잇’의 존재로서 임충섭의 특징은 문명을 자연과 분리하여 거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에게 자연과 문명을 갈라놓은 사이는 분리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연결할 수 있는 길과 방법을 가능하게 하는 공존의 공간이기도하다.
내 작업의 기조는 현대 인간 문명과 자연, 그 사이(between)에서 조형적 다리를 놓는 것이다. 그 사이는 동양에서 여백이라고 불려왔고, 서양에서는 보이드(void)라 일컬었다. 이렇듯 현대문명과 자연은 이분법(dichotomy)적으로 나뉘어 있지만 동시에 상호 이해의 가능성도 있다. 마치 동양화의 여백이 미니멀리즘과 상통하듯이 말이다.【주석5】
임충섭은 자신의 사명을 자연과 문명을 잇는 다리로 여기면서 어느 한 쪽에 기울어지지 않는 중간자 역할을 자임한다. 자연주의자나 생태주의자들이 문명을 거부하면서 둘 사이의 단절을 통해 발언한다면 임충섭은 자연과 문명 사이의 조화와 공존이라는 일원론적 해법을 선택한다. 이분법적인 단절의 사유와 실천이 한 쪽을 포기하거나 거부하여 사유와 실천의 범위를 한정하는데 비해 일원론적 통합은 양자를 다 수용함으로써 그 범위가 무한하여 혼란과 무질서의 과정을 반복적으로 감수해야한다. 이 과정은 때로 고독하고 고통스럽다. 이와 관련하여 앨리노어 허트니(Eleanor Heartney)는 탁월한 통찰을 내놓는다.
흙으로부터 인간 결속의 단절은 현대화의 본질이다. 그러나 뿌리가 없는 우리의 상황은 양면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그것은 전통의 억압으로부터 고양된 자유를 제공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외로움과 단절의 깊은 느낌을 유발시킨다. 임은 그의 작업에서 모순과 역설들을 통하여 이러한 모호함을 표현한다. 그는 우리에게 늘 불안정하고 불완전하게 보이는 현실에서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음을 상기한다.【주석6】
자연과 문명의 공존을 선택한 임충섭의 작업에는 문명이 주는 자유와 그 안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단절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인간실존이 있다. 그러나 혼돈의 상태에 절망하면서도 실존을 찾고자 하는 열망을 포기하지 않는 이중성 또한 인간의 본질이다. 자신과 타인을 도구화하는 자본과 기계문명 속에 살면서도 끊임없이 문명을 회의하고 문명의 저 너머에 있는 어떤 세상을 갈구하는 것이 인간이며, 이를 대리하여 가시화하는 이가 예술가이다. 임충섭이 매일 산책하는 뉴욕의 트라이베카 허드슨 강가는 자연과 문명에 대한 사유의 시발지이다. 인간들이 구축한 수직문명의 공간 속에서 허드슨 강의 수평으로 펼쳐진 풍경은 자연과 문명, 수평과 수직이 혼재하는 혼돈의 영역이다. 문명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측면인 이기주의, 물질주의, 자연파괴 등에 저항하면서도 문명 안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실존적 모순, 임충섭의 작품에는 이러한 모순이 동요한다.
그의 작품은 또한 여러 대조적 요소들을 한 데 담고 있기도 하다. 매체에 대한 임충섭의 초기 고민이 이제 침착한 표면이라는 결과물로 이어졌다고 할 때, 그의 최근 작품에서 목격되는 다양한 특징들 — 거대한 크기, 아치형으로 굽어지며 관람자의 공간으로 침투하는 표면, 도려내어 함몰된 면(面), 다다이즘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엉뚱한 수식(修飾)들처럼 투명한 플라스틱관, 부드럽게 칠해진 쇠장도리의 머리 등등의 다양한 부착물들 — 은 세계의 상황에 대한 불안과 권력에 대한 애매모호한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임충섭의 작업에서 감지되는 동요(動搖)는 그 순수성의와해와 끊임없이 달라지는 형태와 더불어 그의 작업을 수용과 공격이 공존하는 불확실한 영역에, 즉 역사적 사실을 불안정한 평화로 애써 가리고 있는 위기상황에 위치시킨다.【주석7】
자연과 문명의 다리 역할을 자임한 임충섭은 근본적으로 실존적 한계 앞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났는지 모른다. 그것은 어쩌면 도시개발의 수직 문화로 급변하는 시대에 한국의 농촌 진천과 도시 서울, 세계의 도시 뉴욕으로 이주하면서 자신의 조형예술의 혼을 불태웠던 예술가, 임충섭의 숙명일지 모른다. 임충섭 자신 또한 이러한 운명을 인지하고 있었다. 미국으로 건너가 3-4년 동안은 눈으로 보고 드로잉하며 섬광을 쫒아가던 그는 이후 사유하고 드로잉하는 과정을 통해 작업 안에서 “나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를 가장 큰 숙제로 삼고 씨름하였다.【주석8】 이러한 우화의 과정을 통해 임충섭은 ‘다리’ 역할을 수용한다.
나의 작업과정은 자연과 문화를 가로지르는 경계선을 비춤과 동시에 그 둘 사이에 다리를 놓고자 하는 욕망과 연관된다. 나는 도시와 자연적 환경을 오가며 얻은 나의 경험들 사이의 관계를 모색하면서 자연 그대로의 것과 인위적으로 다루어진 것 사이의 연결을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에 흥미를 느낀다. 나의 작업은 이와 같이 하나의 세계와 다른 세계 사이를 끊임없이 여행하면서 드러나는 공간을 점유한다. 그 안에서 내가 발견하는 것은 자연과 문화 사이에서 이동하며 관찰하는 나 자신이다.【주석9】
임충섭의 지난한 모색과 성찰은 그의 작업에서 한국적 해학으로 거듭난다. 그의 사유는 직설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내면에서 일어난 그의 운명적 자각은 마치 거미가 실을 짜내듯 압축적인 과정을 거쳐 그의 “작품의 내면에 현대가 갖는 도시문명과 자연, 그 사잇에 놓인 시각적 해학”으로【주석10】승화하여 자연과 문명과 자신을 은유한다. 이제 임충섭의 작업에서 한국의 기억과 문화는 45년간 살아온 뉴욕의 그것과 동일한 무게로 작용한다. 임충섭의 기억에 남아 있는 우리 문명의 수평과 미국에서 맞은 수직의 문명은 그의 작업개념에 어렸을 적 자신이 그렸던 눈뭉치를 움켜잡은 손처럼 뭉뚱그려져있다. 소년의 뭉뚱그려진 손은 훗날 임충섭이 이루어낼 자연과 문명의 연결과 융합의 전조였는지 모른다. 그 움켜쥔 융합은 자연과 문명,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 로컬과 글로벌의 구분 없이 오롯이 임충섭 자신으로 내면화하여 그의 예술이 되었다.
인간문명의 축적으로서 오브제와 아상블라주
임충섭은 “모든 사물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말에서 큰 영감을 얻었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기억이 사회의 구원을 위해 의지적으로 재구성된다면, 임충섭의 기억은 의지적이라기보다 어떤 사물을 통해 무의식과 우연의 연속가운데 개인의 과거로 돌아가는 끊임없는 회상의 길을 제공한다. 임충섭은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사물을 모으고 조합하여 사물이 가져다주는 긴 회상을 이야기로 꾸민다. 그런 면에서 임충섭의 아상블라주는 오브제와 작가의 적절한 기교가 함께 이룩해 놓은 지도로서 물질의 지리학이다.【주석11】 이러한 임충섭의 독특함은 동시대 작업들 사이에서 각별한 위치를 점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유발한다.
이 같은 작업은 언어와 그것이 의미하는 사물의 결합 같은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우리는 그의 인스톨레이션에서 많은 오브제들이 그런대로 형태를 이루었다가 그 속에서 각기 점차 제 형태를 찾아 서로 조화시켜 커다란 무리의 한 작품을 완성 시켜나가는 과정에서 잘 볼 수가 있다. 그의 작품들을 하나하나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무엇인가를 포착하게 되고 暝想하고 종국에는 이들 작품들의 꿈의 세계로 이르게 된다. 이 모든 것들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즐겁게 눈에 들어오고 무엇인가를 제시하는 듯하며 우리들 마음속에 다가온다. 이 모든 변화하는 형태와 섬세한 색상들은 그의 작품 세계 속에서 다소 미묘한 사각의 위치에 있다가는 점차 그의 이상이 변형되어 나타나면서 그들의 영역을 찾아 안주해 들어감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같은 예술은 이 시대예술의 기준에 잘 어울리면서도 그 특유의 독창성을 가지고 부단히 개발시켜나감으로써 끝내 꼭 눈에 띄게 하고 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주석12】
임충섭의 독창성은 <딱정벌레II>(1999)에 잘 드러난다. 이 작품은 부자 동네에서 책상과 가구를 차에 실어 작업장으로 가져와 조합하여 하나의 커다란 버러지 모양으로 만들었다. 임충섭은 인간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물건에 그 시대 뿐 아니라, 그 이전 시대의 인간의 미의식과 문화의 잠재의식이 축적되어 있다고 본다. <딱정벌레II>는 버려진 일상 사물을 조합한 독특한 형태에다 양쪽 하단에 딱정벌레의 두 눈을 연상하게 하는 빛이 들어오고 카세트를 내장해 벌레 소리가 나는 작업이다. 임충섭은 여기에 인간의 문명을 대표하는 록그룹 비틀즈의 이름을 빌려 ‘비틀즈II’라는 제목을 붙임으로써 자연과 문명이 공존하는 ‘오래된-새로운’ 오브제를 탄생시킨다. 이 작업은 구식이 된 기술을 사용해 만든 동시대 작품에서 다양한 의미의 층위들을 생성한다는 점에서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d Krauss)의 ‘기술적 지지체(technical support)’라 할 수 있다.【주석13】
자연과 문명의 조화를 추구하는 임충섭에게 일상 오브제는 인간문명의 축적물이다. 인간 임충섭은 자연에서는 고개를 들고 문명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다닌다. 그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도시 여기저기를 다니며 인간 삶의 증거인 사소한 오브제들을 주워 모은다. 그가 쓰레기장이나 길거리 등 동네 주변에서 주워오는 사소한 물건들과 가구들은 인간의 무의식의 집약체로서 인간 역사의 궤적을 담고 있다. <뻐꾸기 둥지>(2008)의 가장자리를 아기자기하게 꾸미고 있는 것은 치간 칫솔이다. 2mm의 이 작은 도구에는 인간문명의 역사가 담겨있다. 치간 칫솔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발전해온 테크놀로지와 인간 삶의 변화된 양상을 축약하여 담고 있다. 2000년부터 줄곧 작업하고 있는 <수다쟁이 나무-도시>의 소재인 압정, 빨대, 철사 등은 땅에 버려진 채 눈길을 받지 못하는 보잘것없는 사물들이다. 그러나 임충섭에게 이들은 장시간 축적된 기술 문명의 산물이다. 이 작품의 주 소재인 나무들은 동네 개들이 오줌을 누어 고통 받기도 하고 비닐로 감기어 숨이 막히기도 하고 화가 난 사람의 발에 채이기도 하였다. 매연으로 가득 찬 도시에서 성장을 계속한 나무들을 임충섭은 성자와 같다고 하면서 각별한 관심을 갖는다.【주석14】 임충섭이 주워온 사물들을 하나씩 이고 있는 나무들은 마치 자기들이 겪은 세상사를 이야기하는 듯하다. 임충섭은 나무를 주워오고 거기에 인간의 삶의 오브제를 합치면서 인간과 동일한 공간에 살면서 수난을 받으며 공존해온 나무가 인간에게 하는 투정 같은 수다스런 이야기를 상상한다. 맨해튼 애비뉴 B라는 인간 거주 지역의 길거리를 거닐며 주워 모은 사물들을 조합하여 만든 (2015) 역시 마치 맨해튼 길거리에 옹기종기 모여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재잘거리는 “도시 새”들이다.【주석15】 이로써 사물은 인간의 타자로서 대상이 아닌 또 다른 주체로서 다정한 이웃이 된다.
아상블라주 작업에서 나타나는 소리에 대한 임충섭의 사고는 독특하다. 그가 자연과 문명을 잇는 대상으로 시간과 공간을 포함하는 것은 당연해 보이지만 소리를 그 대상에 포함시키는 것은 매우 독창적이어서 기발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그는 동물과 식물 등 자연이 내는 소리에 인간이 개입하면 개그가 되고 재즈가 된다고 말한다. 자동차들의 경적마저 공해가 아닌 재즈의 한 리프(riff)로 해석하는데 그가 얼마나 자연과 문명의 공존에 천착해있는지를 짐작케 한다. 그는 심지어 소리가 인간의 개입으로 모양을 만든다고 한다. 그 본보기가 동양화이다. 그는 동양화의 여백과 붓질과 서예를 소리가 형태로 나타난 예시로 여긴다. 지금의 소리를 모아 미래로 던져 깨뜨리고 그것을 다시 조합하는 소리의 콜라주를 기대하며 “소리를 통한 미의 열림”을 추구한 그에게 소리는 조형작업의 수원지이자 형태의 완결이다. <비틀즈 II>, <뒤집어진 텐트>(1991), <월인천강>(2009), <월인천지>(2012) 등의 작업에서 나는 소리는 자연과 문명의 사잇의 역할을 강화함으로써 관람자로 하여금 잃어버린 과거의 자연과 지금의 문명을 돌아보게 한다.【주석16】 직접 소리가 나는 작업 뿐 아니라 <수다쟁이 나무-도시>, <대화-사물>(2005) 등 오브제 작업, <화석풍경>(2000년대 초반), <자락>(2012), <굼치>(2013)와 같은 자유형 캔버스 등 거의 모든 작업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은 기억의 소환이 소리로 조합하여 미감을 열기 때문일 것이다.
임충섭이 ‘아상블라주’라는 기법과 개념을 선호하는 이유는 문명과 사건 등의 쉼 없는 축적이 가능하고, 구축의 인류학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임충섭의 오브제는 끊임없는 시간과 문명의 축적을 함의한다. 따라서 오브제를 모으고 다듬으면서 또 다른 오브제를 만들어내는 그의 작업에 ‘완결’이라는 개념은 없다. 임충섭의 작업은 탄생하되 완결되지 않는다. 임충섭이 선택한 오브제들은 인간 문명의 축적물로서 다른 오브제와 합하여 또 다른 축적을 만든다. 깊이 있는 사유와 재미가 융해한 작가의 지속적인 아이디어가 오브제의 합(合)과 감(减)을 통한 문명의 축적에 예민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임충섭은 오브제가 불러일으키는 예민한 반응을 어디서든, 언제까지나 자유롭게 표현하려는 예술가적 기질 혹은 욕망이 있다. 이러한 이유로 축적의 아우라를 표현하기 위한, 기존의 작업에 덧칠을 하거나 무언가를 살짝 덧붙이거나 하는 그의 행위는 멈추지 않을 것이며 이로써 그의 작품은 작가와 더불어 인간 문명의 축적의 증거를 남기면서 유기적인 변화를 거듭할 것이다.
뉴욕의 한국인 설치미술가 임충섭
임충섭은 한국에 있을 때부터 늘 새로운 예술을 추구했다. 특히 그가 가장 기억에 남는 그룹으로 손꼽는 1969년 앙가주망 가입은 현대 미술의 기법과 재료선택의 자유에 갈망이 깊어지는 계기였다.【주석17】 반추상을 넘어 추상성을 추구하던 그는 1973년 우물에 갇힌 조형세계에서 벗어나려는 욕심과 본인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뉴욕으로 이주한다.【주석18】 “바깥”으로 나온 그의 조형실험은 뜻한 바대로 점점 진화한다. 사각의 캔버스 프레임 끝을 조금씩 변형하던 그의 작업의 양태는 미술에서 사각형이라는 오래된 개념을 떠나 자유형캔버스(shaped canvas)【주석19】에서 입체로, 입체에서 설치작업으로 향한다. 임충섭이 뉴욕으로 이주했던 1970년대 초반은 미니멀리즘과 포스트미니멀리즘, 개념미술 등이 뉴욕미술계를 지배하던 시기이다. 1980년 퀸즈 미술관의 연례공모전에 발탁된 임충섭은 포스트미니멀리즘의 주창자인 로버트 핀커스-위튼(Robert Pincus- Witten)의 주목을 받는다. 부드러운 재료인 한지에 심플한 기하학적 형상을 구성한 임충섭의 작업은 미니멀리즘의 단순성을 유지하되 비인간성(impersonality)과 경직성을 극복하고 부드러운 재료와 표현적 느낌(expressive quality)을 추구하는 포스트미니멀리즘의 특성에 제대로 부합했다.
임충섭은 1981년 포트폴리오를 들고 찾아간 오케이 해리스(O.K. Harris) 화랑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는 성과를 이룬다. 오케이 해리스는 임충섭의 작업을 콜라주로 소개한다. 이후 샌드라 게링(Sandra Gering) 갤러리에서 1989년부터 3회의 개인전을 갖는데 샌드라 게링이 1980년대 말 진보적인 개념미술 작업을 소개하는데 주력한 갤러리스트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위의 두 전시는 임충섭이 1980년대 뉴욕미술현장에서 콜라주와 개념미술에서 상당히 앞서가는 작업을 했음을 짐작케 한다. 197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설치 미술을 실험해온 임충섭은 1990년을 기점으로 규모가 큰 공간 설치작업을 야심차게 진행한다. 이 시기 그는 발견된 오브제와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여 전시 공간 전체를 활용하는 종합설치미술의 대가로서 면모를 다진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뒤집어진 텐트>(1991)이다. 불교 사상이 동기로 작용한 이 작품은 맨해튼의 노숙자들이 쉼을 제공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만든 베풂과 명상의 공간이다. 캔버스 천으로 만든 이 작품은 4미터에 가까운 길이의 거대한 텐트에서 길거리에서 주운 오브제들과 함께 절의 종소리에 착안하여 은은한 소리가 울리는 사운드 시스템을 갖추었다. 임충섭 특유의 흙 설치 작업인 <이분법적 흙>(1991)에는 전시장 공간 전체를 활용한 설치작업으로 먼지이면서 흙이기도 한 흙의 이중성을 통해 농토의 소중함을 드러내는 미학적 아이러니가 있다. 임충섭에게 흙은 도시 공간에 모습을 드러낸 자연으로 현대인의 자연 복귀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킨다. 그에게 흙은 자연이 준 여백【주석20】으로서 자연과 문명을 잇는 작업의 소재이다. <단색적 사고>(1991)는 대나무 잎 새 모양을 동으로 뜬 작업으로 동양화 선생님에게서 배운 한자 품(品)을 쓰는 방식에서 착안하였다. 한국 전통 문화와 물의 저장, 그리고 건축 공간 개념을 입체적으로 표현한 <우물>(1993)은 조명기구를 통한 빛과 광선의 활용이 두드러진다.
임충섭 설치미술이 갖는 독특함은 동양 미학을 서구의 산물인 개념미술과 설치미술을 통해 구현한다는 점이다. 특히 한국 건축의 비움과 마당, 수평의 개념을 자신의 조형철학인 자연과 문명의 다리라는 개념에 적용한다. 임충섭은 건축을 자연을 존중하고 순응하는 건축과 대자연을 무시하고 기하형체로 깎아 부수는 건축으로 구분하면서 자신은 자연에 순응하는 방법을 사용한다고 한다.【주석21】 임충섭에게 문명은 인위적인 채움이며, 자연은 원래의 상태로서 상대적으로 빈 공간이다. 어느 한 쪽을 거부하지 않고 함께 조화를 이루는 공존의 모양새를 임충섭은 한국의 전통 건축양식에서 발견한다. 한옥의 마당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과 문명의 조화를 깨닫게 하는 사이 공간이다. 20세기에 이르러 건축가 루이스 바라간(Luise Barragan)이 발견한 빈 공간의 중요성【주석22】을 수세기 전의 한국의 마당에서 발견한 것은 한국인 임충섭으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마당이 수평의 자연과 수직의 문명을 잇는 공간이라면 한국의 처마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매개체이다. 한옥의 처마는 수직을 뻗는 문명의 치솟음을 제어한다. <처마>(1994)에서 그는 서구의 원근법적 공간개념인 소실점 대신 한국 건축에서 강조하는 처마의 수평적 만남과 완만한 곡선의 미감을 구현한다. 한국의 정자는 인간의 인위적 문명을 최소화하려는 듯 자연물에 묻힌다. 임충섭은 이러한 공간개념이 압축된 한국의 정원에 주목한다. 이로써 마당과 처마, 정자 등이 어우러져 자연과 문명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한국의 창덕궁 후원(왕실정원)은 임충섭 설치미술의 정점인 <월인천지>(2012)의 배경이 된다. 뉴욕의 한국인 설치작가, 임충섭의 작업은 물매, 마당, 우물 등의 공간 개념과 처마, 자락, 무명실과 같은 공간과 공간을 잇는 전통적인 사물을 적용하여 자연과 문명,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를 연결한다.
<월인천강>, <월인천지>의 대서사
임충섭은 1960년대 중반부터 뉴욕으로 이전한 1973년 까지 조형적 습관과 도식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이후 1973년에서 80년대까지는 자유형 캔버스, 설치 등을 시도하면서 자유로운 조형예술을 실험했다. 1990년대 이후 문명의 영역으로 조형개념을 확장시켜 자연계와 인간계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 과정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예술가를 향한 발걸음이었고 평면, 사진, 콜라주, 아상블라주, 설치, 복합설치 등 조형예술의 거의 모든 장르를 섭렵하는 과정이었다. 임충섭은 본인의 철학적 사유를 표현하기 위해 부조, 오브제, 회화, 영상, 사진, 문학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융합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가진 작가로서 기법이나 재료 면에서 전형을 벗어나 자신만의 특이성을 구축했다. 그가 공간설치, 복합매체설치에서 일상오브제 사용으로 나아가는 행보는 미니멀리즘, 포스트미니멀리즘을 자연스럽게 넘어선다.
나 자신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찾으려 하다 보니, 조형을 새롭게 해보겠다는 뜻을 가지고 작업하다보니, 조형적 번민을 풀어나가다 보니 조형적 자유의 날개를 달았다.【주석23】
이 모든 도전과 실험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월인천강>(2009)과 <월인천지>(2012)에는 임충섭이 지금까지 추구해온 예술 철학, 미학, 사상 등이 응축해있다. <월인천강>은 원래 불교의 교리로 직역하면 ‘달이 천 개의 강을 비춘다’라는 뜻이다. 달은 하나이지만 그 달빛은 천 개, 즉 모든 강에 비추듯 부처님의 은덕 또한 마음속에 부처를 담은 모든 이에게 골고루 퍼진다는 축복의 말이다. 16세기, 조선에서 철학자 퇴계 이황과 기대승은 사단칠정논쟁으로 일컬어지는 대화를 나누면서 달을 비유한다. 사단은 측은지심·수오지심·사양지심·시비지심의 네 가지 마음(감정)으로 각각 인·의·예·지의 착한 본성에서 발로하는 감정이다. 칠정은 희·노·애·구·애·오·욕의 일곱 가지 감정이다. 칠정 이외에 달리 또 사단이라는 정이 없지 않느냐는 기대승의 질문에 이황은 “하늘에 떠있는 달만이 달이 아니라 강 위에 비친 달도 모두 달이다”라는 비유를 통해 사단과 칠정이 상호발현 한다는 입장을 피력한다. 임충섭은 한국에서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조선의 철학개념인 이(理, 불변의 실재성)와 기(氣, 가변적인 현상성)가 대응하는 이 대화를 읽으며 서구 철학의 실재와 허상 논의의 유사성을 발견한다. 이황의 강에 비친 달의 비유를 실재와 허상이 분리되지 않고 근원적으로 하나라는 깨달음으로 수용한 임충섭은 <월인천강>을 구상한다.
<월인천강>에 등장하는 두 개의 달은 위의 의미를 함축한다. 하나는 불교에서 말하는 은덕의 달이다. 마음속에 부처를 담으면 모두가 은덕을 입고 스스로 부처가 된다는 ‘즉심시불’의 달이다. 불교를 예술의 출발점이자 도착점으로 여기고 예술을 자신의 신앙을 만들어가는 길로 여긴 임충섭은 자신의 불교관을 <월인천강>에 심는다.【주석24】 또 하나의 달은 실재이든 허상이든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라고 하는 일원론적 사고이다. 하늘의 달이나 강에 비친 달이나 하나이듯 하늘도, 강도, 인간도 땅도 주체와 대상이 따로 없이 하나로 이어지고 함께 어울리는 불이의 세계를 의미한다. 이는 자연과 인간, 주체와 대상을 나누어 사고하는 서양의 이분법적 사고에 대한 대안이자 대항이다. 이와 같은 의미를 담기에 달은 더없이 좋은 소재이다.
서구 세계에서는 달보다 해가 더 큰 영향력을 지녀왔던 터라 달이 갖는 동양의 개념을 취해 그것을 현대적 언어로 풀어보고 싶었다. 달은 해보다 더 음성적(negative space/void space) 시적 구조와 이미지를 엿볼 수 있는 소재다. 내게는 달빛이 연상시키는 단색적 사고개념이 해보다 더 진한 여백의 개념으로 이끈다.【주석25】
임충섭에 의하면 서양의 문명이 해와 함께 발달했다면 동양의 문명은 달과 함께 발달했다. 해가 양(陽)이라면 달은 음(陰)이다. 음인 달은 해처럼 확연하게 빛나기보다는 은은하게 빛나고 모호하게 드러난다. 이것은 한국의 담이 갖는 특징이기도 하다. 서양의 집이 대체로 담이 없어 밖에서도 훤히 안을 볼 수 있는 반면 한국의 집들은 적당히 시야를 가리는 담 때문에 안이 잘 들여다보이지 않는다. 임충섭은 이러한 ‘은근한 감춤’이 더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해가 사실을 밝히는 논리를 낳는데 비해 달의 은근한 감춤은 이야기와 신화를 낳는다. <월인천강>의 달은 신비롭고 모호한 분위기 속에서 인간의 곁에 오랫동안 머무르며 겪었던 수많은 이야기를 속삭인다. 그 달은 어릴 적 바느질 하던 어머니 옆에서 글을 배우던 임충섭에게 창호지문으로 빛을 비춰줬던 사실을 알려준다. 또 자신을 바라보며 계절과 조수의 변화를 예측하며 벼를 짓고 배를 띄우던 사람들의 이야기, 낙엽이 쌓인 장독대 위에 물 한 사발 올려놓고 거기에 비친 자신과 하늘을 번갈아보며 정성스럽게 기도하던 어머니들의 이야기를 속삭인다. <월인천강>에서 달이 비친 그림자 연못에는 두 마리의 작은 물고기가 노닌다. 그 위로는 점점 차고 이지러지는 달 이미지를 담은 비디오가 상영되고 음악이 흘러나온다.【주석26】 이렇게 지극히 한국적인 장면은 허트니가 그랬듯 “달빛 아래 고요히 젠 스타일(zen style) 정원에 앉은 느낌”을 제공하면서 “이황과 기대승의 대화에 흘렀을 평정을 관조 내지 성찰”하게 한다.【주석27】 <월인천강>의 달빛 아래서 관객은 실재와 허상이 하나인 세계, 주체와 대상이 분리되지 않는 불이의 세계에 이르는 선문답을 경험한다.
<월인천강>이 한국의 달을 통해 불이의 세계와 달과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수많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면 <월인천지>는 다양한 오브제를 통해 이를 더욱 확장하고 가시화한다. 이로써 임충섭이 추구해왔던 자연과 문명의 ‘잇기’의 사유는 더 정교하게 구축한 정원의 분위기로 인하여 한층 더 깊은 성찰의 경지에 이른다. <월인천지>는 전시장소의 바닥, 벽 그리고 천장을 모두 작품 구현의 공간으로 삼아 달의 운동을 보여주는 영상, 키질, 베틀과 같은 전통 농기구를 닮은 구조물, 한국 전통건축 요소인 정자의 미니어처 등을 조합한 대규모 설치작품이다.【주석28】 그동안 임충섭이 자연과 문명을 ‘잇기’위해 조형적으로 사용했던 오브제와 작업이 집결한 셈이다. 그렇다고 그동안의 작업의 발전 혹은 변주라고 하기에는 <월인천지>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가치가 너무 크다. <월인천지>에는 임충섭의 고향, 어머니, 정원, 농사, 종교, 뉴욕 등의 온갖 기억이 축적되어있고 일생의 목표인 자연과 문명을 잇는 예술의 완성을 위해 천착했던 수평, 마당, 여백, 줄임 등의 개념이 압축되어있다. 그리고 그 개념을 가시화하기 위한 절묘한 재료의 선택과 거대한 스케일, 임충섭만이 가지고 있는 공간과 시간을 가르는 고도의 손 기술이 집약되어있다.
<월인천지>의 특징 중 하나는 한국의 전통음악과 건축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월인천지>에서 음악의 요소를 발견하게 하는 것은 사물들을 이어주거나 사물 하나하나를 팽팽하게 떨어뜨리고 있는 실이다. 실은 그 탄력성으로 인해 전체 작업에 미묘한 떨림을 불러일으키며 소리가 나는 듯 착각에 빠지게 한다. 특히 <월인천지>의 무명실은 한국의 전통재료인데다 향토색을 띠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가야금과 같은 한국의 전통 악기의 줄을 떠올리게 한다. 서양음악이 자연의 질서를 상징하는 수를 기반으로 하는 인간중심적 사고의 산물이라면 한국의 음악은 인간과 우주가 조화를 이루는 예를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서양 음악은 악보라는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구체화된 음정 체계를 지닌 음악으로 발전하였다. 반면에 자연에 가까운 음색, 즉흥적인 감흥의 소리, 다른 사람과 어우러지는 소리 등으로 멋과 흥을 추구한 국악은 나름대로 음률과 규칙이 내재하지만 불확정적이어서 정확하게 기보하기 어렵다. <월인천지>에는 오브제와 으브제의 연결, 의미와 의미의 연결 사이에 시간적 질서를 담은 리듬이 있다. 하지만 그 질서는 서양의 음악처럼 이성과 논리에 기초한 순차적인 체계가 아닌 감정과 찰나의 포착으로 이루어진 비정형성을 기초로 한다. <월인천지>에는 빠르게 혹은 팽팽하게 이어지던 실이 어느 순간 툭 풀어헤쳐지는 다이나믹한 장단(tempo)이 있다. 거대한 조형물과 작은 정자가 대비되면서 일어나는 크기와 색의 차이는 음악의 운율을 닮았다. 천정에서부터 내려오는 커다란 조형물과 그 옆으로 바닥에 낮게 깔린 작은 바늘, 바닥에 놓인 베틀과 그 분해물들, 아예 바닥과 밀착한 영상물 연못, 그 연못 위로 사람 키를 조금 넘는 곳에 매달린 정자, 그 옆에서 돌아가는 무릎 높이의 달 모양의 오브제들은 들쑥날쑥하다. 이와 같은 시각적인 높낮이는 청각적인 울림을 제공한다. 이처럼 <월인천지>에는 음악적 요소가 불확정적으로 구성되어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을 혼란스럽게 연결함으로써 자연과 문명이라는 가락(melody)을 은근하고 끈기 있게 들려준다. 이 은근한 운율은 관람자에게 내면의 박동(pulse)을 일으키며 소리로 들려온다.
<월인천지>의 정자, 단청, 커다란 조형물, 연못 영상, 베틀 등이 이루는 공간은 건축 공간, 정확하게는 한국의 정원 공간을 재현한 느낌이다. 여기에는 해체와 재구성이라는 건축행위가 들어있다. 정자의 단청을 바닥에 떨어뜨려놓거나 단청의 고유한 삼색을 바닥에 흩뿌려놓으면서 정자와 단청을 분리한 건축행위는 공간의 경계를 해체한다. 공간의 분리는 정자 미니어처와 이를 커다랗게 확대한 조형물의 대비에서도 나타난다. 이러한 공간의 분리는 보는 이로 하여금 시간의 해체라는 현상학적 체험을 제공한다. 지금 보는 정자가 이황과 기대승이 철학을 논하던 과거의 정자인가, 아니면 오늘날 문명이 개입해 지은 새 정자인가. 이런 식으로 <월인천지>의 시공은 개폐를 반복하면서 관람객을 환상에 젖게 한다. 이는 대개 직선의 길을 따라 꾸며지는 서양의 정원과 달리 꼬불꼬불한 길과 휘돌아가는 낮은 담을 따라 열렸다 닫혔다하는 한국 전통정원의 공간개념과 일치한다. 건축의 도면형식에 따라 <월인천지>의 측면을 그려보면 거대한 조형물, 베틀, 정자, 달 모양의 오브제들의 높이를 점으로 이어보면 일정한 규칙보다는 무정형의 선을 이룬다. 서양의 건축물이 기능적이고 기하학적인 형태를 추구하여 일정한 비례를 중요시한다면 <월인천지>는 무정형의 정형, 무비례의 비례, 닫힘과 열림과 같은 모순과 역설을 지닌 한국 전통 건축물에 가깝다. 눈에 보이는 무정형과 무비례, 닫힘은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정형과 비례, 열림을 자아내며 환상을 불러일으키는데 이것이 가능한 것은 <월인천지>를 보는 감상자의 과거의 기억과 전통적 정신 사유의 개입 때문이다. <월인천지>가 한국 사람에게는 아련한 추억과 잃어버린 전통에 대한 회고를, 외국인에게는 동양적 신비와 경이를 전달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월인천지>의 음악적 요소는 정중동의 역동성을 제공하면서 어느 순간 휘몰아치다가도 자지러지며 장단을 맞춘다. 그 장단은 감상자에게 개방된 채 느리면 느린 대로 정서적·심리적 여유를 주고 빠르면 빠른 대로 흥분시키다가 자연과 문명, 도시와 시골, 과거와 현재를 명상하는 성찰의 건축물인 한국의 정원 어딘가에 정좌하게 한다.
<월인천지>에서 자연과 문명을 잇는 매개는 진동과 달과 무명실이다. <월인천지>에서 과거로 들어가는 입문의 역할은 각 오브제들의 진동이 맡는다. 어릴 적 동네 어귀에 있던 느티나무로 보이는 커다란 조형물은 실은 정자 미니어처를 확대하여 지은 것으로 기억의 확장을 이끈다. 원형의 이 조형물을 촘촘히 둘러싼 무명실의 미세한 떨림은 보는 이로 하여금 타임머신을 탄 환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로써 관람자는 <월인천지>가 전개할 자연과 문명의 여행에 나설 채비를 마친다. 이 조형물 앞에 실에 매달린 작은 바늘은 바닥에 놓인 마름모꼴 오브제의 중앙을 정조준 하고자 끊임없이 떨고 있다. 그건 마치 고향을 떠나온 나그네와 같은 사람들에게 고향을 기억하라고, 다시 돌아오라고 애원하는 어머니의 기도와 같다. 그 옆으로는 무명실에 매달린 푸른빛에 비친 작은 정자가 조금 크게 진동하고 바닥에서는 푸른빛은 받은 그림자가 일정한 궤적으로 차고 기운다. 이 모든 움직임들은 감상자의 시각과 마음에 현상학적 떨림을 일으키면서 과거의 어떤 시점에서 있었을 법한 인생에 대한 사유와 그를 잃어버린 아쉬움을 낳는다. 진동은 물리적 현상으로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 <월인천지>의 진동들이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것은 정자 아래 연못 옆 작은 단 위에서 시계바늘처럼 돌아가는 가느다란 달 모양의 오브제이다. 돌고 도는 이 가느다란 달은 인생의 모든 것은 기억의 축적이고 인간은 과거의 기억을 파내며 오늘을 사는 향수의 존재임을 지시하는 듯하다. <월인천지>의 진동 혹은 떨림은 자연과 문명의 사잇 존재로서 임충섭 자신과 감상자의 마음의 떨림을 유도하는데 이는 임충섭만이 구사할 수 있는 키네틱 아트의 신비한 효과이다.
달이 불이의 세계와 인간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추상적 관념의 매개라면 무명실은 구체적으로 자연과 문명을 잇는 오브제로 작용한다. 임충섭이 무명실을 자연과 문명을 잇는 매개로 사용한 이유는 그 색이 자연의 색이요 한국인의 마음색일 뿐 아니라 일상의 오브제로서 그 안에 자연과 문명이 한데 어우러져있어서이다. 무명실은 목화 꽃이 봉오리를 터뜨리며 드러내는 목화솜을 물레에 돌려 뽑은 실이다. 이 실로 만든 무명천이 우리 선조들이 즐겨 입던 무명옷의 재료이다. 목화라는 자연이 인간의 도구인 물레를 통해 인간의 체온을 덥히는 옷이 되고 이불이 된다. 임충섭은 무명실에서 인간이 자연에 개입하여 문명을 낳은 공존과 조화의 실례를 보고 자신의 예술철학인 자연과 문명을 잇는 다리 역할을 맡긴다. 임충섭에게 실, 특히 무명실은 인간 문명 속에서 가장 자연에 가장 근접하고 자연과 문명, 과거와 현재 등 시공간의 ‘차원’을 넘나드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오브제이다. 그의 작업에서 실은 실제로 오브제를 지탱하거나 오브제와 오브제 사이를 연결하면서 자연과 문명의 잇기라는 추상적 개념을 구체화한다. 임충섭은 또 <연못II: 거미, 이분법 그리고 실>(2011)에서처럼 ‘사잇’의 매개로 거미를 내세운다. <월인천강>, <월인천지>와 개념적으로 상통하는 이 설치작업에서 임충섭은 스스로 ‘사잇’의 도구인 실을 생산하는 거미로 육화하여 내재한다. 임충섭의 실은 미로의 탈출구를 유도하는 아리아드네(Αριάδνη)의 실처럼 자연과 문명,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 등의 이분법적 미궁을 빠져나오는 길을 인도한다.
임충섭의 작업에서 실은 추상이나 개념을 넘어선 ‘리얼’한 무언가를 만든다.【주석29】 이것이 가능한 것은 직조문화의 후예다운 임충섭의 실을 다루는 마법에 가까운 손재주 때문이다.【주석30】 리얼한 그 무엇을 만들기 위해 임충섭의 손은 실을 당기어 매듭지고,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교차시키다가 어느 순간 풀어놓음으로 시간과 공간을 조율한다. 임충섭의 작업이 관람자로 하여금 과거에 대한 아련한 추억과 함께 자연회귀의 감상으로 이끄는 이유는 바로 실을 바라보는 시각이 가닿는 소실점의 해산으로 인한 환영에 있는데, 이는 그의 미학적 착상과 이를 가시화하는 정교한 손기술이 일치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실이 아무리 자연과 문명, 동양인의 마음색이라 하여도 임충섭의 정교한 손기술이 없었다면 자연과 문명의 ‘잇기’는 한낱 수사에 그쳤을 것이다. <월인천지>에서 3천 야드에 이르는 방대한 무명실은 임충섭의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고 치밀한 손재주로 거듭난다. 실의 팽팽한 균형과 수평, 실과 실의 촘촘함이 주는 줄임의 미학, 환영을 불러일으키는 무명실 빛의 향연은 보는 이의 시선을 집중시키며 ‘잇기’의 내러티브를 주도한다. 임충섭의 ‘실’은 <월인천지>에서 <타래II>(2011)와 같은 작업과 오브제, <월인천강>의 두 개의 달 등에 얽힌 작가의 개념들을 더욱 장대하고 치밀하게 연결하면서 동서를 막론하고 미술사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자연과 문명의 ‘잇기’라는 대서사의 장정을 일단락 한다.【주석31】
마음파내기
임충섭의 작품은 치밀한 구성과 뛰어난 기교 등으로 이룬 작업의 높은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결핍과 상실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감상자가 임충섭의 작품에 담은 기억을 자신이 살면서 잃어버렸던 기억과 환치하는 자기화 과정에서 오는 감정이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이러한 상실감에서 어떤 친밀감을 느끼는데 이는 오래전에 떠나왔던 고향, 구체적으로 산업화 사회가 되기 이전의 농경사회에 대한 향수이다. <쌀>(2005), <마당>(2008), <처마>(2012), <타래>(2005), <두루미-두루마기>(2008), <물매>(1997), <느린 걸음>(2004) 등의 작품 제목은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풍화된 기억의 풍경으로 다가오는 아련함을 지닌다. 그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긴 막대나 다듬잇돌 같은 덩어리오브제는 결코 사물이 아니다. 풍화된 기억 속에 가까스로 잡히는 원형으로서 상실과 결핍을 환기하는 형태이다.”【주석32】
임충섭의 작업은 인류가 망각하거나 잃고 살아가는 것들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한다. 이것은 그만큼 임충섭의 고향에 대한 기억이 강렬하거나 애틋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원인의 깊은 곳에는 고향에서 겪은 어머니의 죽음이 있다. 9살 때 겪은 어머니의 죽음은 임충섭에게 정신적 충격이었다. 매운 것을 먹지 못하는 자신을 위해 백김치를 따로 만들어주시던 어머니의 편애가 사라졌을 때 어린 임충섭은 심한 정서적 혼란을 겪는다. 그에게 어머니는 예술의 스승이기도 했다. 임충섭의 최초의 예술행위는 반짇고리를 곁에 두고 바느질을 하던 어머니 곁에서 익히던 글쓰기였으며 초등학교에 들어간 후 어머니 앞에서 썼던 궁서체는 최초의 조형작품이었다. 임충섭이 초등학교 때 학교 미술대회에 출품한 작품 <눈싸움 하는 아이들>에서 눈을 던지는 손을 자신감 없이 두리뭉실하게 그린 원인도 모성애의 결핍이라고 술회할 정도로 그의 작품세계에서 어머니의 부재는 큰 의미를 지닌다.【주석33】 임충섭 작품의 바탕에는 어머니의 죽음에서 겪은 짙은 허무와 상실감이 자리하고 있다.
어머니의 부재는 그의 작품에 편재해 있다. 장식적인 사각형들은 그의 어머니의 반짇고리를 나타내고 그 주위에서 흔들리는 바늘들은 어머니의 자수에 대한 애정을 상기시킨다. 작가는 어머니가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룬 시각적 누적효과가 시간을 아름다움으로 변화시켜 갔던 것을 기억하고 그것이 주는 교훈을 잊지 않았다.【주석34】
어릴 적 백사천의 기억, 어머니의 죽음 등은 임충섭의 마음에 고향,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깊게 새겼다. 그리움이 큰 만큼 거기에 애착했다. 외국의 많은 비평가들이 임충섭의 작품을 보고 절이나 문양 등을 그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적인 것이 드러난다고 평가하는데 이는 바로 이러한 애착이 자연스레 작품에 우러나기 때문이다. 임충섭의 표현에 의하면 “마음파내기”의 결과이다.
나의 작업의 형태는 보이지 않는 것을 가시화한 결과물입니다. 보이는 것 즉 사물에 잠재되어 있는 것을 가시화합니다. 나의 기억, 경험 등 내 마음의 풍경을 해석하는 과정입니다. 가시화는 내 안에 있는 것을 파내는 마음파내기입니다.【주석35】
임충섭은 자기 밖의 어떤 것을 그리지 않고 자신 안에 있는 마음, 즉 기억을 재구성하고 조형한다. 자신의 마음 안에 있지 않은 것을 표현하는 행위를 자의적, 인위적이라고 한다면, 임충섭의 ‘마음파내기’는 어릴 적 고향에서 겪은 경험에 대한 원초적 기억이 자연스레 우러나온 ‘줄임’와 ‘무위’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기억의 원형을 시공간의 흐름 속에서 줄이고 줄이는 무위의 행위로 재구성하여 자신의 조형예술 개념으로 조각한다. 이 과정은 마치 오랜 세월 바람에 깎이어 기묘한 형태로 서있는 바닷가의 바위와 같은 기억의 풍화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주석36】
임충섭의 작품은 문명 속에 살면서 잊고 있었던 자연, 고향에 대한 아련한 추억 등 고향을 상실한 채 잃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살아가는 부초와 같은 인생들에게 상실감을 불러일으키고 잃었던 것을 기억하게 한다. 이러한 상실감은 임충섭의 작품에 보편성을 부여한다. 상실감은 동양의 심우도, 서양의 실낙원과 기독교나 율리시즈 이야기의 모티프로서【주석37】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가 보편적으로 안고 있는 감정이다. 임충섭의 ‘잃어버린 문명’에 대한 향수는 그의 통찰력 있는 시적 표현으로 민족성을 지닌 장소 혹은 고향의 아우라를 발산한다. 그러나 임충섭의 아우라는 향수를 즉자적으로 제시하는 민족지학적인 느낌을 서정적인 시공간으로 대체하는데 이는 임충섭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단색적 사고’ 때문이다. 엄숙한 마음의 정화 과정을 거친 그의 ‘단색적 사고’는 사물에 대한 직관적 느낌과 일치한 시각적 착상, 향토색의 결합으로 나타난다.【주석38】 직감, 단순, 비움, 회색과 갈색과 같은 자연의 색으로 나타나는 임충섭의 단색적 사고는 이성과 논리의 체계를 벗어나 영적이라고 해도 될 만큼 명상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여기에는 서양의 이성과 논리를 벗어난 원초적 사유체계 안에서 작동하는 임충섭의 종교적 묵상과 절제가 있다.
임충섭의 작업에서 빛은 그의 내면에 있는 향수와 단색적 사고의 길을 인도한다. 그 빛은 임충섭의 마음 속 기억의 조각들을 탐조하여 과거와 현재를 잇는다.
나는 겨울과 그리고 걷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일요일 오후면 대서양의 바닷자락이 미 대륙에 미친 곳에 이른다. 엄청나게 길고 느린 포물선의 검푸른 겨울바다이다. 매미 허물처럼 얇은 파도가 소실점을 향해, 고리고리 몰고 간다. 그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빛빛의 조각들이 나의 앞과 뒤를 따르고 그 빛들은 살얼음 같은 바다 추위를 잊게 하여 나를 따사로움으로 이끌고 따사로움은 우리의 창호 문으로 데려다 준다. 우리 조상들은 그 문으로 하여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直線 行爲’를 했다고 본다. 옛날 나의 이웃동네, 가랫골, 멍심이, 우렁태, 어링이, 살구머리, 덕문이 … 바로 그 공간들은 문살과 창호를 통한 빛의 미학이었다. 나는 이 먼 곳에 와 옛날 빛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지금의 그것에 고리를 만들고 있다.【주석39】
임충섭의 기억은 검푸른 바닷가의 소실점의 빛을 따라, 또 자신이 설치한 프로젝션이나 조명의 빛을 따라 과거로 진입한다. 거기에는 고향 진천의 산하와 거기에 살아있던 것들, 사랑하는 어머니의 반짇고리, 백사천에 버려진 탱크, 눈을 뭉쳐 던지던 두리뭉실한 손, 수평의 경계로 강둑을 따라가던 요령잡이의 종소리와 꽃상여의 파란 깃발이 있다. 그쯤에서 임충섭은 고향을 떠나 수직으로 치솟은 빌딩숲에서 살아가는 자신을 본다. 자유로운 예술을 좇아, 참 ‘나’를 찾아 머나먼 이방으로 온 임충섭은 과거의 고향을 그리워하면서도 지금, 문명의 숲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갈등을 겪는다. 예술가로서 임충섭의 고뇌는 동양과 서양, 자연과 문명, 과거와 현재라는 시공간의 명료한 대비와 공존의 필요성에 이르고 자신과 자신의 예술작업을 그것들의 사이를 잇는 다리, ‘사잇’으로 정치한다.
임충섭의 예술작업의 동기이자 동력인 ‘잇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는 오늘도 허드슨 강가를 걸으며 수평과 수직의 경계에서 백사천으로 가는 빛을 보고 있거나 작업실에 자리 잡고 거리에서 주워온 문명의 파편들에 아직도 생생한 고향의 기억을 새기고 있을 것이다. 거기에서만이 자연과 인간, 자연과 문명을 잇는 다리로서 자신의 예술혼을 확인하고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임충섭은 여전히 마음을 파내고 있다.
시기별 작품 성향 분류 및 분석
I. 실험기: 조형적 습관과 도식을 벗어나고자 함 (1960년대 중반–1973년)
1964년 대학을 졸업하고 1969년 앙가주망에 참여하는 등의 활동을 하면서 물성이 두드러진 캔버스, 반추상 회화, 설치 실험 등 형식과 관습을 벗어나기 위한 시도를 한다.
II. 도약기: 자유를 향한 여정(1973년 – 1980년대)
조형적 도식을 벗어나 새로운 예술형식을 찾고, 참 ‘나’를 찾고자 1973년 뉴욕으로 떠난다. 뉴욕 초기 미니멀한 드로잉을 선보이며 한지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사각의 형태를 유지하고는 있으나 자유형 캔버스를 향한 탐구를 지속하며 이 시기 ‘단색적 사고’ 시리즈의 틀이 잡힌다. 발견된 오브제의 사용과 아상블라주 기법이 드러나며, 벽과 바닥을 이용한 설치 작업의 확장을 통해 복합매체를 이용한 설치로 나아가는 과도기이다. 뉴욕의 문명에 대한 관찰과 모색의 시기이기도 하다.
III. 확장기: 문명의 축적으로서 오브제 및 자연과 문명의 다리(1990년 – 2000년대)
작가는 자연과 문명의 사이를 잇는 다리로서 역할에 천착하는데 이는 작가의 마음속에 위치한 한국성이 “마음파내기”의 과정에서 비롯한 자기정립이다. 작가는 오브제를 통해 기억과 문명을 본다. 기억은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향수이다. 문명은 뉴욕으로 구체화한 서구사회의 다른 이름이다. 작가에게 오브제는 기억, 자연과 문명이 혼재한다. 모든 사물을 기억을 가지고 있음으로 향수이며, 동시에 인간의 문명의 흔적으로서 불안의 요소이다. 그의 적극적인 오브제의 발견은 기억과 문명을 찾아가는 혼돈의 여정이다. 그 여정은 자연과 문명의 공존을 도모하는 다리의 역할(사잇)에 닻을 내린다. 문명의 흔적을 담고 있는 버려진 사물의 발견, 그 사물을 축적하는 화석화 작업, 사물을 조합하여 새로운 형태를 창안하는 해학이 담긴 아상블라주, 그리고 사진, 영상, 음향, 키네틱 등의 사용이 눈에 띄는 시기이다. 사각을 완전히 벗어난 자유로운 형태의 자유형캔버스 작업을 다채롭게 구사하지만 캔버스천의 사용을 고집하며 회화개념을 유지하려 한다. 해학이 담긴 작은 오브제 작업을 선보이는 한편, 그와 대조되는 대형 복합매체 설치작업을 대범하게 펼쳐보인다.
IV. 자연과 문명의 ‘사잇’ 존재: 줄임의 서사(2010년 이후)
작가는 점점 비본질적인 것을 제거하며 본질을 향한다. 본질적인 것은 결국 그 안에 내재한 한국적 정서이다. 한국적 정서를 반영한 소재의 선택, 불교적 명상, 고향의 기억 등이 그동안 시도해온 작업을 총합한 복합적인 형태의 설치 작품으로 나타나는데, 이들 작품은 일정한 공간을 넘어 기억과 이야기로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 자연과 문명이 만난 풍경을 낳는다. 이 풍경은 무한하면서도 유한한, 심플하면서도 맥시멈한 ‘줄임’의 미학을 나타낸다. 이로써 작가는 자연과 문명 사이를 잇는 존재로서 자기 정체성을 확고히 한다.
**시기별 대표작품 이미지는 PDF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I. 작업에 대한 전반적인 일러두기
• 임충섭 작가는 작품을 계속해서 변형한다. 따라서 일반적인 작품에 적용되는 ‘완성’이라는 개념이 없이 지속적으로 변화를 거듭한다.
• 작품 제목 또한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대다수의 작품이 변형을 거듭하여 이전의 형태가 물리적으로 남아있지 않기에 그 과정을 추적하기는 불가능하다.
• 작품에 대해 작가는 대부분 명료한 기억을 가지고 있으나 기억과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본 연구팀이 기록한 것은 한 작품이 발표된 시점의 기록에 의거하되 기록이 다양한 경우 책임연구원의 조사연구와 작가와의 대화를 통해 결정을 내렸다.
• 기록자의 입장에서는 아카이빙 작업에 많은 어려움이 따랐으나, 이 모두는 임충섭 작가의 작업과 예술철학이 갖는 특이성이라고 볼 수 있다.
1. 동일 작품을 여러 번 설치할 경우, 설치 환경에 따라 설치 방식이 달라질 뿐 아니라, 주요 구성요소 이외에 부가적인 부분이 제거, 추가된다.
1. 설치작업의 경우 설치공간에 따라 배치를 달리하기도 하고 기존 작업의 한 부분을 새로운 구성으로 배치하는 경우도 있다. 아래의 전시들은 <월인천강>, <월인천지>의 작업개념과 구성이 비슷하지만 공간에 따라 변화한 대표적인 예이다.
· 학고재: <월인천강> (2010)
· 신세계 센텀시티: <연못II, 거미, 이분법 그리고 실> (2011)
· 국현: <월인천지> (2012)
· 우민아트센터: <타래, 월인천강 II> (2014)
1. 쉽게 발견할 수 없는 미세한 추가 작업이나 변형이 많다. 이런 변화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아 숨은 그림 찾기의 재미와 노고를 동시에 준다.
1. 생산시기 및 제목 기록이 다른 경우가 많다. 미세한 변형이 있거나 설치형태가 다른 것으로 추측되지만 이를 도록 등 기록물이나 작가의 기억으로 정확히 파악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자료를 모두 기록했다. <걸음마>는 생산시기 기록이 전시 때마다 다르고 같은 작품이라도 제목이 다르게 발표된 한 예이다.
<걸음마>는 1991년 버려진 보행기 샘플을 주워 세 개의 주형을 뜬 것임. 물리적 생산 시기는 1991년이나 그 위에 한지를 바르거나 다른 물질들과 설치하거나 조합을 바꾸는 등 이 작품은 변모를 거듭하여 발표된다. 2점은 현재 작가 홈페이지에 각각
1. 변형 캔버스 부조의 경우 전시할 때마다 덧칠을 하여 색채가 변하기도 하고, 부분적으로 작은 오브제의 위치를 바꾸는 등 자세히 뜯어봐야 찾을 수 있는 미세한 변화가 발견되기도 함.
1. 기록이 불일치하는 경우, 최종적으로 책임연구원의 판단에 기초하여 결정함.
예1)
국립현대미술관 2012 도록 <처마 Eaves>(2012)로 기록되어 있음.
갤러리 현대 2017 도록 <하나 One>(2011)로 기록되어 있음.
이 경우, 2015년 《Void》전시에서도 으로 기록되어 있는 점 등을 감안하여 <하나 One>으로 기록함.
예2)
<화석풍경>의 경우, 서울시립미술관 소장품으로 서울시립미술관 공식홈페이지에 제작년도가 1985년으로, 매체는 조각으로 기록되어있다. 2018년 서울대미술관 <진동>전에서 대여한 이 작품은 1985년 작으로 동일정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임충섭 작가의 미국 홈페이지에는 1995년으로 기록되어있다. 연구결과 작가는 화석시리즈를 1990년대 들어 제작하기 시작한 것으로 판단, 작가 홈페이지의 기록에 따라 제작년도를 1995년 작으로 기록하였다.
II. 작품 목록화 작업 표기에 관한 일러두기
1. 작품 제목
- 한글, 한문, 영문, 국/영문 병기 네 부류.
- 동일한 작품이라도 발표 시 마다 제목을 다르게 발표하거나, 작은 변형을 가하거나 설치를 다르게 하여 제목의 일관성을 찾기가 어려움.
- 국립현대미술관 도록 등 오기나 오역 발표 건에 대해 제목 수정. 이 경우 노트작성.
- 작가가 제목 변경을 원하는 경우 그에 따르고 노트작성.
- 작가는 모든 작품제목에 Untitled를 붙이기를 희망함. 기존 발표된 작품 혹은 소장된 작품을 제외하고 작가 소장 작품에 대해서는 “Untitled:...” 형식으로 표기.
- 작가는 후기로 갈수록 순수한 한국말 제목을 붙이기 시작. 영문 번역을 원치 않음.
- 한국말의 영문 알파벳 표기가 발표기관마다 다름.
- 제목 끝에 II를 붙인 경우, 반드시 I이 있는 것은 아님. 예:
2. 규격
- 부조, 비정형, 설치의 경우가 많음.
- 단위 ft, inch, cm. 하나로 통일하지 않고 발표되거나 기록된 단위를 따르거나 병기.
- 일반적인 형태의 개별 작품 규격은 일반적인 기입방법에 따름.
- 종합설치의 경우, 기록된 작품 설치공간의 규모 기록, 혹은 가변크기로 기록.
3. 유형, 재료 및 기법
- 부조, 오브제, 평면, 입체, 설치, 영상으로 구별하고 각각의 세부유형 명시.
- 재료: 대부분은 다수의 혼합매체 사용. 재료를 특정할 수 있는 것은 구체적으로 기재. 특정할 수 없는 것은 혼합매체로 기재.
- 기법: 기존 용어로 특정할 수 없는 경우 ‘만들기’ ‘구축’ ‘오브제 변형’ 등 서술적으로 기재.
표1) 임충섭 팀 작품 분류 유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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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식별자 |
세부유형 |
형식 |
재료 |
기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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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 |
저부조 |
부조 자유형캔버스 (Shaped Canvas) |
혼합매체 acrylic oil rice paper wood soil wax U.V.L.S. gel found objects 영상 사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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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로잉 페인팅 만들기 콜라주 아상블라주 오브제변형 종이작업 모델링 구축 부조 에칭 B&W photo 복합기법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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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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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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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브제 |
발견된 오브제 |
오브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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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듬은 오브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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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상블라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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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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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 |
서양화 드로잉 사진 아상블라주 자유형캔버스 평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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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형캔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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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로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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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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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작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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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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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체 |
입체 |
입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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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치 |
벽 설치 |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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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 설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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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바닥 설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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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설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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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➅ |
싱글채널 |
영상 |
영상 |
싱글채널 |
➀ 저부조: 5cm, 중부조: 6~20cm, 고부조: 30cm 이상
➁ 발견된 오브제를 그냥 쓴 경우, 변형한 경우와 작가가 만든 경우, 다수의 오브제를 사용 한 경우.
➂ 5cm 이하의 평면. 캔버스 틀을 사용하되 모서리에 부분적 변형을 가한 경우도 자유형 캔 버스로 분류함.
➃ 바닥에 놓이는 형태, 혹은 벽에 붙이는 형태로 제작된 단일 형태의 작품. 설치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스케일이 작음.
➄ 벽, 바닥, 벽/바닥, 벽/바닥/천정 등을 이용한 설치. 대부분 가변크기.
➅ 단일 영상작품인 경우. 종합설치의 일부로 영상이 쓰인 경우 재료로 분류.
➆ 작가의 대다수의 작품이 Shaped Canvas임. Shaped Canvas는 통상 한글로 ‘변형캔버스’로 명하나, 임충섭 작업의 특징을 나타내는 형태가 있는 혹은 자유로운 형태의 캔버스라는 의미를 전달하고자 연구팀은 작가와의 협의 하에 ‘자유형캔버스’라는 용어를 사용함.
4. 제작시기
임충섭 작가에게 일반적으로 통용하는 ‘작품완성’이라는 개념은 없이 물리적 형태가 변화를 거듭함. 예를 들어 이미 발표한 작품을 몇 년 후 다시 손보아 전시하는 일이 많으며 이는 작가의 의도적인 예술행위임. 그러한 경우
1. 최초 완성시기를 기준으로 정렬.
2. 작가가 제작기간을 특정한 경우 시작과 종료기입.
3. 개별 작품이 모인 한 시리즈가 수년간 진행되는 경우, 진행 중으로 표기함.
5. 기타
1) 종합설치 작품의 경우 주요 구성 요소가 동일한 설치작품을 다른 장소에서 설치할 경우 한 작품으로 간주하고, 주요 구성요소를 각각 분리해 기입함.
2) 동일한 구성요소를 가지고 다양한 설치방식으로 전시를 거듭한 경우, 한 작품으로 간주하 고 1, 1-1, 1-2... 순으로 기입함.
3) 작가는 물리적으로 동일한 작품을 전시할 때마다 조금씩 작업하여 다른 형태와 이미지 로 변형하여 발표하는 경우가 많음. 이 경우 한 작품으로 간주하고 1, 1-1, 1-2...순으로 기 입함.
4) 작가는 작품을 소멸시키기도 하고, 다른 작품의 일부로 흡수하기도 함. 이 경우 최종 작품 의 기록을 따름. 소멸된 작품은 기록이 남아있는 경우 기입함.
**일러두기 이미지는 PDF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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