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남(1939~)은 모성에 대한 인간적이고 보편적인 접근법을 보여주며 세상을 향해 여성의 삶을 이야기하는 화가이자 설치미술가이다. 성균관대학교 영문학과와 미국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 그래픽센터,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서 수학하였다. 1980년대에 한국여성주의 미술의 효시인 시월모임과 여성미술연구회의 창립멤버로 활동했고, 1997년부터 10년간 ‘여성문화예술기획’의 이사장을 역임하며 한국 여성주의 예술문화 형성과 발전에 공헌한 바가 크다. 1993년 제2회 개인전 《어머니의 눈》에서 손때 묻은 나무와 경험적 모성의 주제를 결합한 개성적인 작품 스타일을 구축해 미술계의 주목을 받은 윤석남은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미술특별전 참여 작가로 선정되었고, 제8회 이중섭미술상(1996)과 국무총리상(1997)을 수상하였다. 주요 전시로는 《윤석남》, 한국문예진흥원 미술회관(1982), 《윤석남 1,025: 사람과 사람없이》, 아르코미술관(2008), 《핑크룸5》, 인천아트플랫폼(2013), 《윤석남♥심장》, 서울시립미술관(2015), 《미디어시티 서울 2016》, 서울시립미술관, 《공방(The Hollow)》, 학고재상하이(2016) 등이 있다.
세월의 흔적이 담긴 폐목, 문짝, 의자, 자개장, 소파, 유리구슬이나 거울, 최근의 색종이까지 윤석남이 활용하는 재료는 다양하며, 특히 정감이 배어나는 나무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윤석남은 한국 여성의 삶, 여성사, 여성신화와 전설 등에서 발굴한 소재를 토대로 가부장적 유교 문화에서 사라진 여성주체의 계보를 추적하고 소환하며 보살핌의 윤리학을 꾸준히 추구하고 있다. 윤석남의 여성주의 미학은 글로컬리즘과 신자유주의의 척박한 경쟁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간평등, 생명존중, 생명돌봄의 화두를 던지며 폭넓은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
1939. 7. 25 만주 출생
1980년대 시월모임 및 여성미술연구회의 창립멤버로 활동
1982 《윤석남》, 한국문예진흥원 미술회관, 서울
1993 《어머니의 눈》, 금호미술관, 서울
1995 베니스비엔날레 한국미술특별전 참여작가 선정
1996 제8회 이중섭미술상 수상
《윤석남》, 카마쿠라 갤러리, 카마쿠라
1997 - 2007 여성문화예술기획 이사장 역임
1997 국무총리상 수상
2003 《늘어나다》, 일민미술관, 서울
2008 《윤석남 1,025: 사람과 사람없이》, 아르코미술관, 서울
2013 《핑크룸5》, 인천아트플랫폼, 인천
2015 《윤석남♥심장》,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윤석남-우연이 아닙니다 필연입니다》, 카마쿠라 갤러리, 카마쿠라
2016 《공방(The Hollow)》, 학고재상하이, 상하이
2018 《윤석남》, 학고재갤러리, 서울
《윤석남》, 해움미술관, 춘천
《세계의 초상화들: 한국(Portrait of the World: Korea)》, 내셔널포트레이트 갤러리, 워싱턴
2019 국민훈장 모란장 수상
《윤석남: 벗들의 초상을 그리다》, OCI미술관, 서울
2021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 학고재갤러리, 서울
《그리며 기리다: 한국의 초상예술(Likeness and Legacy in Korean Portraiture)》,
아시아미술관, 샌프란시스코
2022 제23회 이인성미술상 수상
윤석남, 세상을 변화시키는 홀씨
김현주(2016원로작가디지털자료집제작지원사업
윤석남연구팀 책임연구원
추계예술대학교 교수)
1. 머리말
윤석남은 한국의 현대미술과 페미니즘 미술을 주도해 온 원로 작가다. 그녀의 이름을 호명하지 않고 한국의 현대미술과 페미니즘 미술의 역사를 논하는 것은 그 공적을 일부로 외면하려 들지 않는 한 쉬운 일이 아니다. 윤석남은 페미니스트 1세대 작가로서 한국 현대 미술의 역사를 이루는 여러 갈래 중 굵직한 줄기에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한다. 여성원로작가가 드문 한국미술계에서 지난 40년간 새로운 작품의 발표와 활동을 꾸준히 계속하고 있는 그녀는 성별을 불문하고 후배 작가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이 같은 미술계에의 공헌을 인정받아 윤석남은 2016년 전작디지털자료집제작사업의 연구 대상 작가로 선정되었다. 본 프로젝트는 2016년 7월에 시작해 2018년 2월까지 몇 차례의 수정과 보완작업을 거치며 일단락되었다. 본 연구팀은 2018년 2월까지 작가가 제작한 전체 작품, 작품관련 자료, 전시도록 및 전시관련 문서, 작품에 대한 다각적인 연구 및 잡지와 신문기사, 작가인터뷰 영상 등을 충실히 수집해 목록화했다. 그 결과 확인된 최종 작품 수는 1175점이며, 그 중 443점은 다양한 매체로 제작되었고 732점은 드로잉이다. 443점의 작품은 입체 220점, 설치 129점, 평면 90점, 판화 4점으로 분류되었다. 작품 외 자료로는 작업스케치와 습작, 전시문서, 사진, 작가의 글 등 총 199건이 수집되었고, 참고문헌 1131건과 전시이력 288건도 확인했다. 그녀의 창작활동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므로 이 숫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작품과 자료 수집 외에도 국내외 전문가 11명과의 인터뷰를 통해 얻은 다양한 견해들은 새로운 영상 제작에 반영되었다. 특히 작가의 초기 활동과 작품에 대한 자료가 파악되지 않은 채 시간이 지날수록 망실 위험이 있으므로 당시 자료 수집과 기록에 심혈을 기우렸다. 한 번도 확인된 바 없던 작가의 미국 유학생활의 흔적을 추적하기 위해 직접 관련 기관을 방문했고, 그런 과정에서 몇 가지 중요한 성과를 얻었다. 이렇게 수집된 자료들은 작가와의 수차례의 공식 인터뷰와 비공식적인 대화 및 작가의 가족과 지인들과의 비공식적인 면담 등을 통해 교차 점검했다. 그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나 기존 자료의 오류들을 바로 잡을 수 있었던 점은 본 연구의 의미 있는 성과 중 하나라 하겠다.
이 글은 본 프로젝트의 연구결과를 반영해 40년 동안의 윤석남의 작가 활동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자료를 바탕으로 쓴 것이다. 연구 과정에서 새롭게 발견한 사실들을 밝히고 윤석남의 작품에서 중요한 매체의 변화과정과 형식 언어 및 주제와 의미를 심도 있게 분석해 보고자 한다. 윤석남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 글은 이해를 돕는 좋은 지침서가 될 것이다. 그리고 후속 연구자들에게는 작가에 대한 새로운 연구와 의미 있는 논쟁을 위한 디딤돌이 되리라 생각한다.
2. 윤석남은 누구인가?
윤석남은 1939년 만주 봉천에서 윤백남(尹白南, 1888-1954)과 원정숙(元貞淑, 1915-2009)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주석1】 아버지 윤백남은 근대기 소설가이자 영화연출, 연극, 방송 분야의 선구자로서 문화계 유명 인사였다【주석2】. 48세와 19세에 만난 그녀의 부모님은 29세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일제강점기에 만주로 건너가 가정을 꾸렸다. 그녀는 만주에서 유아기를 보내고 해방 전인 1944년 가족과 함께 외가가 있던 경성으로 돌아와 성장했다. 그러나 얼마 뒤 발발한 6.25 전쟁으로 인해 1951년 피난 떠난 부산에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중학교에 진학했고 휴전 후 서울로 돌아와 1957년 동일계 부설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어린 시절 그녀의 꿈은 화가나 작가가 되는 것이었는데, 독서광이던 어머니와 평생 대중문화예술 분야의 개척자로서 서라벌예술학교(중앙대학교 예술대학에 합병됨) 초대학장을 지닌 아버지의 각별한 예술 사랑과 높은 교육열, 자유로운 가정환경 등 성장기 부모로부터 받은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초등학교 3학년 미술 시간에 친구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본 선생님의 칭찬은 화가의 꿈을 갖게 된 구체적인 계기로 기억된다.【주석3】 중, 고등학교 시절에는 미술반과 문학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실력을 연마하며 예술가의 꿈을 키워갔다[도1].
그러나 1954년 그녀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지병으로 사망하면서 삶은 전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바뀌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10년은 가난한 가모장(家母長) 가구의 딸로서 자신의 꿈을 접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된 어머니를 도와 ‘딸은 살림 밑천’이란 옛말처럼 직장에 다니며 네 동생의 학비를 보탰다.【주석4】 1967년 결혼 후 12년은 아내이자 며느리, 어머니로서 여성에게 부여된 전형적인 사회적 역할을 충실히 하며 보냈다. 꿈꾸던 삶에서 멀어져 버린 자신의 처지에 대해 윤석남은, 결혼 생활을 하는 동안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 속에서 점점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왜 사는지에 대한 존재적 물음이 커갔으며 급기야 알 수 없는 자폐 증상이 나타나 세상과 담을 쌓으며 지냈다고 회상한 바 있다.【주석5】 결혼한 30대 여성으로서 그녀의 삶은 쓰디쓴 좌절과 자존감의 상실과 소원한 인간관계로 이어졌는데, 그런 세월을 독서, 고전 음악과 미술 감상, 서예 쓰기 등 다방면의 예술에서 정신적 위안을 얻으며 견뎠다.【주석6】
아내이자 어린 딸의 어머니이며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며느리,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지 못한 서른아홉 살의 가정주부이던 윤석남은 1979년 봄, 그렇게 살다가는 미쳐버릴 것 같은 지경에 이르자 비로소 화가가 되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미술을 향한 그녀의 뒤늦은 도전은 단순한 생존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 존재로서 자신을 찾아가는 긴 항해의 시작이었다. 그러므로 윤석남의 모든 작품은 실존하는 한 인간으로서, 여성의 몸을 가지고 구체적인 경험을 하면서 살아가는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그리고 창작 활동을 통해 자유로움을 얻어가는 예술가로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인식하고 규명해 가는 과정과 진배없다.
한국 사회에서 윤석남과 같은 조건에서 출발한 작가가 미술계의 인정과 대중의 사랑을 함께 받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과연 그 비결은 무엇일까? 어떤 전문가들은 강한 자의식에서 나온 내적 동기와 지칠 줄 모르는 작업에 대한 열정과 호기심, 끈기와 노력이 단단히 한 몫을 한다고 보았다.【주석7】 그녀는 독서광, 영화광, 음악광일 정도로 다방면의 예술에 조예가 깊다. 예술에 대한 열정과 예술적 감수성이 오랫동안 축적되고 내재해 있다가 뒤늦게 작업을 통해 발화되었으리라 생각된다. 몸을 아끼지 않는 성실한 작업 태도와 우직한 추진력 및 인내와 끈기 또한 작업을 완성하기까지 오랜 시간의 과중한 예술 노동을 묵묵히 수행하는데 커다란 이점이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녀가 미술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자유롭고 기존 미술계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압력으로 작용하는 학연이나 지연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는 지적도 유의미하다.【주석8】 일면 예술가에게 불리할 수 있는 조건들이 역설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한 것이다. 오히려 그 덕에 윤석남은 남성 중심적인 미술개념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학연과 지연으로 얽힌 미술계의 복잡한 권력구조에 연연할 필요 없이 스스로 원하는 작품을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었다.
자신의 처지에서 제도권의 정규적인 미술가 양성과정을 통해 예술가가 되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그녀는 서둘지 않고 나름의 전략을 세워 예술적 능력을 연마하고 주어진 기회들을 십분 활용해 가며 미술계에 자신의 공간을 만들어갔다. 처음 일여 년 동안 전업 화가 이종무(1916-2003)와 최쌍중(1944-2005)의 화실에서 개인 교습을 받은 후 미국 단기 유학과정을 거치며 회화의 기본기를 터득하고 실력을 닦았다. 그녀의 전시 경력은 1980년 김영자, 김진숙과 함께 개최한 《소묘전》으로 시작되었고, 김영자의 도움으로 성사된 1982년의 첫 번째 개인전 《윤석남》이 기성작가들의 인정 속에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서 자신감을 얻었다. 특히 1983-1991년 사이 뉴욕에서 두 차례 장기 체류한 경험은 작가로서 도약의 발판을 다지는 기회가 되었는데, 그 성과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설명하겠다. 작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는 앞서 예술의 길을 걷던 몇몇 여성작가들의 도움과 고등학교 동창이던 남편의 경제적, 정서적 지원이 적잖은 힘이 되었다. 그녀는 가사와 양육 및 작업을 병행해 가는 중에도 틈틈이 다방면의 책을 독파하며 현대미술과 문화 전반에 관한 이해와 시야를 넓혔다. 또한 국내외의 주요 미술관과 전시장을 방문해 미술 현장을 체험하고 국제적 감각을 익혔다. 그렇게 시간을 쪼개가며 온몸으로 미술에 투신함으로써 서서히 자신의 독창적인 미술 언어를 형성했다.
1980년대 한국미술계는 순수 미술을 지향한 단색화 경향과 현실 변화를 추구하는 민중미술의 대립이 점점 첨예화되어가다 1980년대 말 포스트모더니즘과 페미니즘 담론이 서서히 유입되면서 미술의 다변화와 탈모더니즘 미술의 시대가 열렸다. 이런 상황 속에서 윤석남은 김인순, 김진숙과 “시월모임(1985-86)”을 결성해 여성이 처한 현실의 문제를 제기한 전시로 주목을 받았다. 곧 이어 민중미술 단체인 민족미술협의회에 가담해 여성미술분과의 창립멤버이자 여성미술연구회의 일원으로 활동했지만 가부장적이고 점점 당파적으로 흐르는 민중미술진영에 회의를 느껴 거리를 두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1980년대 말 한국사회의 가부장적 문화의 대안을 추구한 단체 ‘또 하나의 문화’의 여성 동인들과 교류하며 점차 페미니즘 의식과 언어를 습득하고 작품으로 발전시킴으로써 국내 페미니즘 미술의 초석을 다지는데 기여했다.【주석9】
첫 개인전 후 11년 만에 열린 두 번째 개인전 《어머니의 눈》(1993년)은 지금의 윤석남을 있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의미 있는 전시다. 이 전시는 페미니스트 작가로서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한국 현대미술을 주도하는 작가의 대열에 합류하는 계기가 되었다. 1996년에는 여성미술가로는 최초로 이중섭미술상을 수상했고, 제 2회 《아시아 퍼시픽 트리엔날레》에 초대받는 등 국제적인 작가로 도약했다. 페미니즘 미술과 여성문화운동이 활발히 펼쳐진 1990년대와 2000년대 초에 많은 여성작가들이 페미니즘에 투신했다 현실의 벽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라지거나 등을 돌리기도 했다. 그러나 윤석남은 1997년부터 십 년 간 ‘여성문화예술기획’의 이사장직과 최초의 페미니스트 여성지 『이프(if)』지의 편집장을 맡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며 페미니즘 문화 운동을 직접 실천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페미니즘에 대한 굳은 신념을 가지고 새로운 작품 창작을 향한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3. 매체와 형식
윤석남의 작품에는 모더니즘 문화를 작동시킨 남성 중심적 사고와 발전의 논리에 의해 배척되어 온 범주와 가치들이 줄줄이 엮여 나온다. 여성, 자연, 과거의 시간, 낡은 것, 장식성, 수공성, 채색이 중심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것들은 남성, 문화, 근대적 시간, 새 것, 순수성, 정신성, 수묵과 이항대립을 이루며 오랫동안 열등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녀는 지난 40년간 근대화 과정에서 억압되어온 여성과 부수적인 존재들, 쓸모없는 사물들, 또는 미학적 방법들을 전면에 드러냄으로써 기존의 문화적 가치들을 전복해 왔다. 삶과 분리된 예술을 위한 예술이나 순수미학을 거부하는 것은 당연하고, 예술을 매개로 세상을 다르게 보고 변화시키기를 원했다. 그런 점에서 윤석남은 태생적으로 사실주의자이고 반모더니스트이며, 예술의 정치적 성격에 동의한다.【주석10】 그녀가 1980년대 후반 민중미술과 손을 잡았던 것도 저항적인 태도와 취지에 동의했기 때문인데 그 방법론은 점차 받아들이기 어려웠다.【주석11】 그러므로 직설적으로 발언하는 민중미술의 사실주의적 방법과는 점점 거리를 두고 또 다른 차원의 사실주의 미학을 추구함으로써 민중미술의 외연을 넓혔고, 더 나아가 페미니즘 미학이란 새로운 지평을 개척할 수 있었다.
윤석남의 예술적 성취는 국내외 미술현장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다양한 미술장르와 매체의 섭렵을 통해 이뤄졌다. 국내에서 여전히 유화가 미술의 최고봉으로 인식되던 때 유화로 미술계에 등단한 후 다양한 변화를 거쳤다. 작가는 회화 위주의 평면작업에서 시작해 조각과 설치를 거쳐 새로운 회화작업으로 나가고 있다. 그런 변화에 대한 작가의 설명은 매우 간단명료하다. 평면 작업에서 시작했지만 갑갑해져 공간으로 뚫고 나왔고, 공간을 한껏 활용해 작업을 한참 하다 보니 현실 공간도 한계가 느껴져 평면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러자 평면에서 무한한 공간의 가능성이 새롭게 보여 다시 평면으로 되돌아가고자 한다는 것이 그 요지다.【주석12】
윤석남의 전 작업에서 매체의 변화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1979년-1987년의 초창기에는 주로 유화 작업[도2]이 대세를 이루는 가운데 1983-4년에 아크릴릭[도3], 드로잉[도4], 석판화, 에칭, 종이 콜라주 등을 활용한 다양한 평면적 실험이 병행되었다. 1988년에는 유화 작업이 전면적으로 중단되었고, 그 후 최근까지 모든 작품의 이미지는 아크릴릭 물감과 동양화 붓으로 제작되었다[도5]. 1992년부터 나무 작업이 시작되며 평면 위주의 작업방법을 벗어나 삼차원의 공간을 활용하는 조각과 설치의 시대가 열렸다. 나무 작업은 거친 나무 표면 위에 아크릴릭 물감과 동양화 붓으로 인물이나 대상을 그려 넣은 것으로서 특히 이 작업에서 윤석남의 예술적 감수성이 빛을 발했다. 단독조각으로 시작한 나무작업은 1993년부터 인물과 함께 각종 레디메이드, 사진이미지, 또는 텍스트가 있는 인쇄물이 결합된 설치형식으로 확장되었고, 대형 설치 작품을 통해 국내외 미술계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도6]. 2010년부터는 종이오리기 작업이 새롭게 도입되고 거울을 추가해 설치작업의 시공간 개념이 더욱 더 확장되었다[도7]. 2016년부터는 동양화 전통의 하나인 채색화 기법에 도전해 동, 서양화의 특정 장르 구분을 넘어서는 회화 제작에 몰두하고 있다. 그리고 동양화의 고정관념이나 방법적 틀에 매이지 않고 한지에 먹과 채색화 물감이란 전통적 재료를 가지고 자유자재로 표현 영역을 넓히고 있다[도8]. 40년 동안의 매체의 변화에는 몇 개의 중요한 변곡점이 있는데 그것은 1979년(유화)-1988년(아크릴릭화)-1992년(나무작업과 레디메이드)-2010년(종이오리기)-2016년(채색화)으로 이어진다.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윤석남에게 두 번의 뉴욕 장기체류 경험은 작가로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개인전 후 남편의 권유로 혼자 유학을 떠나 1983년 9월부터 두 학기 동안 뉴욕 맨하탄에 위치한 아트 스튜던츠 리그(The Art Students League)와 프랫 인스티튜트 그래픽센터(Graphic Center, Pratt Institute)에서 회화와 드로잉, 판화 실기 단기 과정을 이수했다. 후자는 1986년 여름에 폐원했고,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는 그녀의 등록 기록이 보관되어 있지 않아 당시 받은 수업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짧은 유학 생활을 통해 그녀는 드로잉과 판화 등 새로운 매체에 눈을 뜨고 표현력의 향상과 작품의 완성의 순간에 대한 직관적 판단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케테 콜비츠의 작품에 깊은 감명을 받고 자기만족이나 개인적 유희를 넘어서 “예술의 공공적인 역할”에 대한 신념을 굳히게 된 것이 가장 중요한 성과였다.【주석13】
1990-1991년의 2차 도미는 새로운 작업 재료와 방법을 발견한 중요한 계기였다. 작업의 방향을 잃고 방황하던 차 브롱스미술관(The Bronx Museum of the Arts)의 쿠바현대미술전에 출품된 젊은 작가 알레한드로 아귈레라(Alejandro Aguilera, 1964-)의 나무 설치 작품을 보고 큰 감명을 받게 되었다.【주석14】 그녀가 본 작품은 <미대륙의 바다 위에서(En el mar de las Américas)>[1988, 도9, 10]로서, 헌 나무 조각들을 덧대고 못이나 경첩으로 이어 붙인 6개의 큰 나무 판 위에 체 게바라, 예수 등 쿠바의 역사와 관련 있는 6명의 인물을 그려 넣은 등신대의 설치 작품이었다. 이번 연구를 통해 비록 도록 이미지나 처음으로 아귈레라의 작품을 찾아내 공개했다. 그동안 윤석남의 나무 작업의 제작 아이디어의 원천과 관련해 작가 스스로 남미작가의 영향과 허난설헌 생가 방문 에피소드를 수차례 언급해 왔고, 종종 미국의 팝 작가 마리솔 에스코바의 작품과 유사성도 지적되었다. 아귈레라의 작품 이미지의 발굴은 윤석남의 나무작업의 영감의 원천을 시각적으로 증명한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성과라 하겠다.【주석15】
한편, 윤석남은 1990년대 초 뉴욕에서 루이즈 부르주와(Louise Bourgeois, 1911-2010)의 전시를 처음 본 후 자신의 작가적 모델로 삼게 되었고, 특히 초기 거미 작품에 사용된 금속 낫 같은 재료에서 강한 충격을 받았다. 단단하고 날카로운 금속 재료는 여성의 삶을 표현하기에 부적절하다고 판단해 사용할 생각을 못 했는데, 부르주아의 거미 작품을 본 후 의도만 분명하다면 여성작가도 금속 재료를 사용할 수 있다는 깨달음은 작업에 즉각 반영되었다.【주석16】 부르주와의 영향은 1994년 <외침, 속삭임, 외침>[도11]의 책상다리와 의자 위에 박힌 작고 뾰족한 무쇠 못의 형태로 처음 나타났다. 작은 무쇠 못은 <핑크룸> 연작에서 점점 더 크고 위협적인 갈고리의 형태로 변형되어서 현실세계를 뒤틀고 심리적 불안과 공포를 자아내는 중요한 요소로 발전했다. 그리고 점점 여러 형태와 크기로 변형되면서 정서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핵심적인 요소로 자리 잡았다.
2차 도미 후 귀국한 윤석남은 나무작업을 시작했다. ‘나무작업’은 나무를 주재료로 제작한 작품들을 일컫는 것으로 많은 경우 레디메이드와 결합된다. 나무작업은 재목으로 쓰는 가운데 부분을 잘라내고 남은 피목 부분을 사용했기 때문에 대개 한 쪽 면이 둥글거나 균일하지 않다. 2003년까지 줄곧 피목 부분을 사용하다가 <1025>(2003-2008)의 1400여 마리의 개 작업을 위해 다듬어진 재목 부분을 사용했고, 그 후로는 작품의 성격에 따라 나무를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다. 나무작업의 기본은 작품 구상 후 나무판들을 대상에 맞춰 대략 자르고 연결하거나 다듬은 후 그 바탕 위에 형상을 그려 넣는 것이다. 크고 작은 나무판들은 경첩이나 못으로 투박하게 연결되는데, 그 이음새나 못 자국은 가려지지 않아서 녹이 슨 채로 고스란히 드러난다. 나무작업은 여러 나무판들의 조합과 덧대기 및 그리진 형상과 레디메이드의 결합으로 인해 전통적인 조각과 다르다.
나무 작업에서 재료 자체에 대한 존중과 공간성만큼 중요한 것은 바로 나무 표면에 그려진 형상이다. 이미 숙달된 동양화용 모필과 아크릴릭 물감을 사용해 그려진 형상은 나무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일체화되어 최적의 효과를 나타냈다. 그 형상들은 수묵화의 먹선처럼 간결하면서도 추상적이고 유려하며 전통적인 건축물의 단청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이렇게 제작된 나무작업들은 한편으로는 재료의 물질성과 무대 위에 펼쳐지는 연극적 연출성이 두드러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회화적이며 전면성이 강하다. 바로 이런 특성이 윤석남의 나무 작업이 지닌 독특함이다.
윤석남은 1992년 인물 소품에서 나무 작업의 가능성을 확신한 후 곧 <어머니> 연작을 필두로 대형 설치작업을 제작해 괄목할만한 대표작들을 쏟아냈다. 어린 시절의 모습을 담은 <자화상>[1992, 도12]은 첫 번째 나무작품이며, <세 자매>[도13]에서는 레디메이드가 처음 사용되었다. 세 명의 여공의 몸에 그들의 직업을 표상하는 작은 산업용 조립 부품들이 콜라주된 <세 자매>에서 1960-70년대 박정희 정권에서 급하게 추진된 한국의 산업화, 근대화 과정에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 고향을 떠나 도시의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던 수많은 여공들에 대한 계층적 동의가 엿보인다. 동료작가 박영숙과의 공동 설치작 <자화상, 우리 이야기>[도14]는 당시로는 매우 도전적인 작품인데, 유방암으로 인해 한 쪽 가슴을 수술한 후 찍은 박영숙의 상반신 노출 사진과 윤석남이 친구의 상흔을 보듬기 위해 사라진 가슴에 반짝이는 전구를 밝혀준 아이디어, 그리고 여성들 간의 우정이란 드문 주제를 다룬 점에서 그러하다. 나무작업에서 윤석남은 나무 껍데기 부분의 검은 홈, 옹이, 벌레 먹은 구멍, 결 등을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활용했다. 이렇게 나무 자체의 자연스런 특성을 최대한 활용함으로써 그녀는 예술창작을 자연과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화해하는 과정으로 승화시켰다. 또한 부드러우면서도 쭈글쭈글한 나무의 표면에서 세상풍파와 질곡의 역사를 견뎌낸 여성들의 피부를 발견했다. 그리고 땔감으로 밖에 쓸모가 없는 나무의 흠들을 마치 고통의 상흔처럼 여성의 몸이나 얼굴의 일부로 그대로 남겨졌다. 여성상의 얼굴은 몇 번의 간결한 붓질에 의해 표정이 드러나는데 무엇인가 말하고 싶지만 방법이 없어 우울과 광기로 그득하다. 얼굴이 아닌 나머지 부분은 자연스럽게 몸이 되고, 그 몸은 장식 문양이 가득한 화려한 옷이나 자개로 치장되어 어두운 얼굴과 대조를 이룬다. 윤석남의 모든 작품에서 여성의 몸과 특히 손은 해부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형편없이 서툴고 투박하게 그려졌다. 그것은 논리적인 접근으로는 이해나 설명이 불가능하며 정서적인 접근을 요한다. 그 뿐 아니라 인물의 몸의 일부는 문짝, 부엌 찬장, 빨래판, 거울, 자개장, 마네킹, 드럼통, 또는 교실 의자, 식탁의자, 안락의자, 소파 같은 각종 의자 등 사람의 손 떼가 묻고 쓰다 버린 익숙한 레디메이드로 대체된다. 그 교묘한 조합은 현실과 비현실 간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언캐니한 심리적 감정을 강하게 불러일으킨다.
윤석남은 2016년 들어 기존에 사용한 적이 없는 전통적인 동양화 재료의 하나인 채색화 작업에 도전하고 있다. 전통적인 것에 늘 관심이 많아 오래 전부터 채색을 다뤄보고 싶었던 그녀는 2015년 《윤석남♥심장》 개인전을 끝낸 직후 삼 년 간 채색화를 사사했고 새로운 재료를 연마하기 위해 자화상을 수없이 그렸다. 2017년 초부터 먹과 채색으로 그린 자화상을 발표해 화단의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그 자화상들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렸기 때문에 전부 옆모습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다양한 배경 속의 전신상으로 발전하는 양상을 보이며 채색화에 대한 도전은 계속되고 있다.
4. 주제와 내용
윤석남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여성이다. 자신의 외할머니, 어머니, 자기 자신, 그리고 최근에는 자매들과 딸까지 가모장 가족의 4대로 이어져 온 평범한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 외에도 시장 상인들에서부터 역사 속에 묻힌 예술인들이나 설화의 주인공까지 과거와 현재, 현실과 비현실 속의 여성들, 일상의 삶과 고급문화를 일궈온 여성 주체들이 차례차례 전면으로 불려나온다. 여성 주체를 회복한다고 해서 모든 여성들에게 관심이 있지는 않다. 한국의 전통적인 어머니상하면 떠오르는 신사임당은 그녀의 관심 밖인데, 예술가로서 그녀의 삶 자체보다 현모양처의 본보기로 추앙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그녀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평범한 여성들의 삶에 깊이 공감하고 그들의 정직한 삶이 세상을 지탱하는 중요한 버팀목임이라 믿었다. 여성의 몸을 가지고 살아온 자신의 경험에 근거하므로 그녀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몸 언어를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건다. 그러므로 윤석남의 여성이미지는 수동적 대상이나 남성의 대리인으로 여성이 호출되는 남성미술가들의 작품과는 사뭇 다르다.
윤석남의 최초의 작품은 1979년 공동 작업실 내의 자신의 작업 공간을 그린 유화작품 <무제>이며 본 연구 과정에서 처음 발굴되었다. <무제>[도15]처럼 미술에의 입문 단계에서 다양한 소재를 접했을 터지만 작가의 관심은 처음부터 단연 인물이었고, 특히 자신의 어머니의 삶이 첫 번째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작가의 어머니는 39살에 남편을 잃고 혼자서 행상과 갖은 노동을 하면서 여섯 자녀를 키워냈다. 어머니를 화두로 삼아 윤석남은 여성으로서 다른 여성의 삶에 대한 존경을 표하고 기존 개념과는 다른 모성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 자신의 어머니를 모델로 그린 첫 작품 <어머니>[1979, 도16]는 머리에 수건을 쓰고 일하던 과거의 모습을 담은 작은 초상화다. 이 작품은 근대 가부장 사회에서 가족 부양의 책임을 지면서도 인정받지 못한 가난한 계층의 가모장의 존재를 드러내며 앞으로 다양하게 변주될 모성 이미지를 예고한다.
<손이 열 개라도>[도17] 역시 어머니의 삶에서 영감을 얻은 초기 대표작으로서 서울시립미술관의 소장품이다. 이것은 1986년 시월모임의 제2회전 《반에서 하나로》에 출품된 이후 한국 페미니즘 미술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그 제목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할 일이 많을 때 우리가 흔히 쓰는 표현에서 따온 것이다. 그 말처럼 이 작품에는 혼자 가사와 양육과 가족 부양을 책임져야 했던 작가의 어머니의 힘겨운 일상이 잘 표현되었다. 그동안 <손이 열 개라도>는 회화 작품만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 동일한 제목으로 회화뿐 아니라 석판화[도18]가 제작되었다는 사실과 석판화는 1984년, 회화는 1986년으로 제작년도가 상이하게 기재된 점을 발견했다. 그리고 세밀한 교차 점검을 통해 회화가 석판화와 같은 해에 판화보다 앞서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회화작품 <손이 열 개라도>의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만큼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부터 제작년도를 1984년으로 빠른 시일 안에 수정해 바로 잡을 것을 재차 강조하는 바이다.【주석17】
한편 윤석남은 가족의 밥상을 차리기 위해 늘 다니던 시장에서 만난 생선가게와 야채가게 상인들처럼 주변에서 마주치는 평범한 여성들과 계층과 젠더의 측면에서 동일시하며, 그들에게서 또 다른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들은 가부장제가 이상화해 온 추상적 개념으로서 어머니 또는 가족을 위해 무조건적으로 희생하는 어머니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매일 마주치는 ‘살아있는 어머니들’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경험에 근거해 모성의 실천이 지속적인 육체노동을 요하고 감정을 소진시킨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그런 면을 인물묘사에 반영하고자 했다. 초기 작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여성상이 해부학적으로 맞지 않는 거칠고 투박한 손과 지친 얼굴, 웅크린 몸으로 재현된 것은 그 때문이다.
2000년대 중반까지 윤석남의 작품은 모성, 자전적 삶에서 기인한 여성의 불안정한 정체성, 그리고 여성사의 소환이란 세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992-1995년 중반까지는 그 전과 마찬가지로 전근대에서 근대로 이어지는 가부장적 유교 사회의 모성신화를 거부하고 실천적 모성에 집중했다. 1993년 금호미술관에서 열린 두 번째 개인전 《어머니의 눈》에서 윤석남은 나무 작업으로 제작한 <어머니> 연작을 발표해 큰 관심을 모았다. 11년 만에 열린 두 번째 개인전의 주제 역시 어머니였으며 미학적으로 한층 성숙된 방법으로 새로운 모성 개념을 제시했다. 당시 국내에 페미니즘 문화의 확산과 더불어 모성 담론이 한창 쟁점화되던 터라 개인전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녀는 거대 담론으로서 모성이나 자기희생이란 이상화된 모성 개념을 거부하고 그 자리에 자전적인 경험에 근거해 재해석한 실천적 모성 개념을 제시했다. 한편으로는 모성적 사랑과 보살핌의 힘에 대한 존경을, 다른 한편으로는 모성의 실천에 수반되는 지루한 노동과 고통을 형상화했다. 전시장을 가득 메운 어머니들의 눈은 관객의 시선을 되받아치며 하나의 구경거리로 재생산되어 온 여성상을 거부했다. 그 자리에는 역사적 시공간에서 어머니로서 삶의 리얼리티를 버텨온 여성들의 몸으로 뱉어내는 언어가 흘러넘쳤다.
《어머니의 눈》 전의 출품작 중 <어머니1, 열아홉 살>, <어머니2, 딸과 아들>, <어머니3, 요조숙녀>[도19], <어머니4, 가족을 위하여>[도20], 그리고 <어머니5, 벤치에서>[도21] 다섯 점으로 구성된 어머니 연작과 <족보>[1993, 도]에 특히 이목이 집중되었다. 어머니 연작은 열아홉 살에서 노년에 이르는 여성의 삶의 과정을 모티브로 취해 결혼이란 제도 속에서 모성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연대기 방식으로 풀어낸 것이다. 꿈 많은 젊은 여성에서 출산과 양육, 집 안과 밖에서의 노동 등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에서 하찮게 여기는 여러 종류의 노동을 거치며 변해가는 여성의 몸이 그 중심에 있다. <어머니 1>에서 <어머니 3>은 작가의 어머니, <어머니 4>는 가정주부이던 자신, 그리고 <어머니 5>는 여자 노인이 모델이 되었다. 그러나 일상에서 끌어낸 구체적인 여성들의 이미지는 개인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여성들의 보편적인 삶의 현실에 대한 물음과 연결되면서 현실변화에 위한 실천성을 획득한다.
1995년 말부터 윤석남은 자신을 작품의 중심 주제로 내세웠다. 윤석남의 전작에서 자화상은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수많은 자화상들은 근대의 시공간을 관통해 온 보편적인 한국 여성들의 자화상과 다름없다. 그녀는 결혼 제도 속에서 여성이 겪는 불안한 심리와 불안정한 위치를 여성이 있어야 할 공간으로 간주되어 온 집안의 방이란 상징적 공간과 연결시켰다. 그리고 여성의 심리상태를 이입시킬 대상으로 의자에 주목했다. 그것은 당시 국내 중산층 가정에서 한창 유행하던 바로크풍의 화려하면서도 조악한 서양식 의자 또는 소파들이었다. ‘자기만의 방’이 없어 부엌을 자신의 공간으로 활용했던 작가는 자신이 앉던 식탁의자를 작품에 사용하기도 했다. 누군가 편히 앉아 쉴 수 있는 안락한 의자는 가족의 편안한 삶을 위해 내어주어야 했던 자신의 몸이자 여성들의 몸의 확장으로서 은유되었다. 뾰족한 쇠갈고리가 달린 채 불안하게 놓여있는 의자, 쿠션이 빠진 빈 의자, 쿠션 위로 날카로운 여러 개의 쇠갈고리들이 튀어나온 의자, 그리고 핑크색 소파까지, 작품에 등장하는 각종 의자들은 고통, 불안, 허무, 그리고 때로는 억압된 욕망으로 가득한 여성의 몸과 진배없다. 그렇게 의자와 한 몸이 된 여자들[도22]이 출현했고 그들의 표정은 미치기 직전의 우울과 그늘로 가득하다.
그런 대표작의 하나인 <낮과 밤>[1995, 도23]에서는 집안에서 안락하게 거처할 시간과 공간조차 없는 여성의 현실이 곳곳에 놓인 의자와 더불어 불안하게 제시되었다. 테이트 미술관의 소장품인 <금지구역 I>[1995, 도24]에서는 쇠갈고리가 솟아있는 의자와 굵은 밧줄로 두른 경계선의 안팎에 한 발씩 딛고 어쩌지 못하고 까치발로 서있는 여성의 몸으로 인해 불안과 위기감이 증폭되었다. 이런 작품들은 1990년대 한국의 지역적 쟁점을 국제적 관객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페미니즘 언어로 풀어냈고, 레디메이드와의 결합을 통해 조각의 전통을 벗어나 초현실적이면서도 독특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주석18】
윤석남의 작품 중 <핑크룸> 연작[도25]은 수작 중의 수작으로 꼽힌다. 이 연작은 그녀의 작품들 중 가장 그로테스크하며 도전적인 작품으로서 국제적으로도 상당한 이목을 끌었다. 본 프로젝트를 마감할 때 까지 총 4점의 <핑크룸>이 발표되었고, 2018년 가을에 한 점이 추가되어 총 5점의 <핑크룸>이 존재한다. 핑크룸은 현란한 꽃무늬의 형광 핑크색 양단 천으로 씌워진 소파, 그 한 귀퉁이에 자개와 화려한 양단 치마로 치장한 몸에 어두운 표정으로 앉아 있는 자화상, 뽀족한 무쇠 다리와 의자 위로 솟아 오른 무쇠 갈고리, 그리고 바닥에 흩어져 반짝이는 수많은 플라스틱 구슬들, 그리고 채색된 벽, 이렇게 5가지 요소들의 더하고 빼기의 조합으로 이뤄진다[도26]. 이런 요소들의 다양한 조합과 전시에 따라 제목도 각양각색이고 2010년 이후에는 종이오리기 작업이 추가되어 분류가 가장 힘든 작품이었는데, 사용된 의자를 기준으로 최종적으로 다섯 점으로 정리되었다.【주석19】
<핑크룸> 연작에는 여성의 삶의 외연과 내연이 끊임없이 갈등하고 욕망을 억제해야 하는 현실과 복잡한 심리가 투영되었다. 특히 아름다운 것과 섬뜩한 것의 극적인 대비가 현저하다. 현란한 핑크색은 아름답지만 박제된 여성의 삶의 공간을 불길한 악몽의 공간으로 바꿔 놓는다. 의자 위로 솟구친 무시무시한 쇠갈고리들은 가부장적 규범에 의해 억압되어온 여성의 욕망의 분출이고 히스테리적 발작이기에 공포와 전율을 가증시킨다. 핑크색의 일인용 소파가 삼인용 소파로 커질 때 불길함과 매혹은 더욱 더 커진다. 이 연작에서 예기치 못한 레디메이드들의 조합에 의해 야기되는 초현실적이며 기괴한 분위기는 우리를 논리 밖의 언어로 이끈다. 논리와 아버지의 언어로는 보이지 않고, 이해되지 않고, 들리지 않던 것들. 미치지 않기 위해 끙끙거리며 내지르는 여성의 고통스러운 몸말이 고요 속에 섬뜩하게 흘러나온다. 근대기를 건너오며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 한국 여성들이 느껴온 정신적, 심리적 공허함이 <핑크룸>처럼 아름답고 충격적으로 전달된 작품은 한국미술사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1996년 이후의 윤석남의 작품에는 여성사를 발굴하고 세대를 넘어선 여성들 간의 연결을 추구하는 페미니즘의 실천적 양상이 더욱 분명해진다. 이름 없는 여성들에서부터 역사 속 인물들까지 다양한 층위의 여성들이 현재로 소환되었다. 이중섭미술상 수상 기념전인 《빛의 파종》에 발표한 <999>[도27]는 약 30cm 높이의 작은 나무에 이름을 알 수 없는 999명의 수수한 한복차림의 여성들의 모습을 그린 설치작품이다. 이 작품은 페미니즘 의식에 기반해 과거의 이름 없는 여성들을 현재로 불러내는 초혼 의식과 같다. <999>는 마치 홀씨처럼 곳곳으로 흩어져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빛이 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그렇게 <999>의 작은 목상들은 전시가 끝난 후 선물로 주거나 낱개로 판매되거나 여러 기관에 기증되어 흩어지고 현재 일부가 남아있다.
윤석남이 소환한 역사적 인물은 최승희(1911-1969), 나혜석(1896-1948), 허난설헌(1563-1589)과 이매창(1573-1610), 황진이(1506?-1567?) 등 불운한 삶을 살다간 여성예술인들이 대부분이며, 제주 거상 김만덕이나 식민지배와 민족주의에 의해 오랫동안 침묵을 강요당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도 되살려 냈다.【주석20】 과거와 현재의 여성들은 늘어난 팔을 통해 서로 연결된다. 그 중 <종소리>[2002, 도28]는 늘어난 팔과 손끝에 매달린 종을 매개로 작가와 이매창과의 정신적 교감을 연극적으로 연출한 대표작이다. 길게 늘어난 한쪽 팔은 과거와 현재, 일상과 일탈이 겹치고, 다른 시공간에 있는 여성들이 서로 닿으려는 간절한 바람을 이어주는 모티프이다. 이렇게 가부장 사회의 공식적인 역사 속에 묻혀있던 여성들의 이야기는 스멀스멀 벽을 뚫고 나와 현재의 여성들과 닿는다. 과거와 현재의 여성들 간의 정신적 교감의 한 방법으로 2002년에 시작된 늘어난 팔의 모티브는 2003년 개인전의 제목이 《늘어나다》일 정도로 다양한 형태와 개념으로 발전하였고,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다. 유독 길게 늘어난 한 쪽 팔은 가로로, 또는 세로로 뻗어나가고 때론 비상하는 날갯짓이 되기도 한다. 2003년에 발표한 <감>, <늘어나다, 연>[도29], <어시장 I, II> <붉은 밥 I, II>, <날개>[도30]에서 늘어난 팔과 날개는 시공을 초월한 여성들과의 영적 교감이나 꿈과 자유를 향한 열망, 또는 보살핌과 치유를 의미한다. <어시장Ⅰ>[도31]에서 고래를 머리에 있는 생선장사의 몸은 경계 없이 자유롭게 열리고 스며들고 미끄러진다. 그녀는 물고기들을 몰거나 자유롭게 유영하며 나와 타자의 경계 짖기를 거부하며 가부장적 언어에 균열을 내는 존재다.
윤석남은 “무당기가 있는 여자들, 맨 정신으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존재들, 몸으로 뭔가 하고 싶은데 천지사방이 막혀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존재들”에 항상 관심이 있다고 했다.【주석21】 그녀는 과거의 여성예술인들에게서 그런 힘을 발견했다. 특히 작가는 “광기와 떠도는 넋의 이미지”는 눈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고 생각했기에 자화상을 포함해 대상의 눈을 날카롭고 무섭게 그리기를 좋아한다.【주석22】 초월적인 눈이 아니라 현실에서 포착할 수 있는 살아있는 눈을 통해 우리에게 말 걸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나무 인물들에서 자주 느껴지는 무속적 분위기나 섬직한 광기는 바로 그 눈에서 나온다. 자화상 <푸른 얼굴>[2003, 도32]에서 우리는 우울한 가운데 번뜩이는 광기와 순간적으로 마주치게 된다.
윤석남은 2003-2008년 5년에 걸쳐 <1025>의 제작에 매달렸다. 2008년의 개인전 《1025: 사람과 사람없이》에서 처음 소개된 <1025>[도33]는 제목 그대로 1025마리의 개 조각으로 이뤄진 하나의 설치작품이며, 일명 ‘개 작업’이라고도 불린다. 이 작업의 아이디어는 2003년 1025마리의 유기견을 돌보는 이애신 할머니에 관한 신문 기사를 읽고 방문한 경험에서 끌어냈다. 버려진 생명체들을 돌보는 한 평범한 할머니의 모습에서 되돌려 받을 것을 바라지 않고 베푸는 사랑의 실천을 발견하고는 곧 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2003년 말부터 1년 동안 개 도감을 참고해 각양각색의 개들을 스케치[도34]하며 개의 모습을 익힌 후 나무작업으로 완성하기까지 5년이 결렸고, 파손을 대비해 1400여 마리가 제작되었다. 개의 형상에 따라 나무를 자르고 표면을 갈고 밑칠한 뒤 개의 모습을 그리고 마지막 손질을 하는 등 열 두 번의 공정을 거친 고된 작업이었다[도35]. 전체 개 가운데 건강한 개는 삼백여 마리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아픈 개와 인간에게 입은 상처로 인해 몸통에 구멍이 뚫린 개, 죽어 영혼을 남긴 개들의 무리다. 비록 몸은 성치 않지만 눈을 부릅뜬 채 정면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개의 눈초리는 인간을 원망하고 질책하는 듯해서 불편하고 섬직하다. 불교에서는 천일이란 시간을 자기중심적인 시각을 버리고 타자의 위치에서 나를 보게 되는 시간이라고 본다. 종교적 믿음은 없지만 작가는 개 작업을 위해 천일보다 긴 시간을 인간들이 버린 존재를 쓰다듬으며 생명의 소중함과 상생의 가치를 되새기기며 보냈다. 2009년 할머니의 형상로 <1025: 사람과 사람없이>[도36]는 완성되었다.
<1025>는 미술계뿐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일단 개의 숫자와 스케일에 놀라고 60세 중반에 전문적인 조수의 도움 없이 그 작업에 매달린 작가의 의지에 탄복한다. 일차적 충격을 넘어서 이 작품은 소비자본주의와 인간의 이기주의에 대한 깊은 반성과 미약한 생명체와 공생하는 보다 근본적이고 대안적 삶의 가치와 방식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작가는 어떤 보답도 바라지 않고 버려진 생명을 거두어 돌보는 여성의 자애로움과 무한한 사랑의 힘이야말로 그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작품 속 할머니의 모습을 통해 널리 전하기 원했다. 그리고 개인전 오픈식 때 만신 김금화가 이끄는 진혼굿을 열어 인간이 함부로 다룬 개들의 넋을 달래고 위로했다.[도37]
<1025: 사람과 사람없이>의 완성 후 작가는 또 다른 개 작업 연작 <108>[도38]을 제작했다. <108> 시리즈는 56점이 확인된바 개 조각의 숫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작품 제목인 108은 인간이 이생에서 지닌 백팔가지의 번뇌를 뜻하며 불교의 윤회사상과 관련이 있다. <108> 시리즈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불교사상뿐 아니라 근대화 과정에서 사라진 무속에 대한 관심을 다시 만나게 된다. <1025>가 버림받고 상처받은 개들이라면, <108>[도]은 들풀, 연꽃, 흰 구름, 파란 하늘[도39] 등과 한 몸이 된 승천한 개들이다. <108>에는 인간에게 상처받은 개들의 영혼을 달래고 사후 세계로 인도하는 전통적인 무속제의인 위령제의 성격이 강하게 반영되었다.
윤석남은 근대화 과정에서 억압되고 사라진 우리 전통을 안타깝게 생각했고 작업을 통해 전통을 되살릴 방법을 늘 고민해 왔다. 특히 미신으로 배척되었던 무속적인 전통의 회복에 관심이 컸는데, 앞에서도 종종 언급했듯이 그녀의 작품에서 그 영향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주석23】 우선 작가의 크고 작은 나무 작업들은 과거 마을 입구를 지키던 장승[도40]이나 죽은 사람을 넣어 운반하던 상여를 장식하던 꼭두[도41]와 유사하다. 그녀는 실제로 여러 점의 꼭두를 소장하고 있으며, 앞서 설명한 <999>에서 한복을 입은 여성들의 작은 목상은 크기와 형상에서 꼭두를 연상시킨다. 2013년-2016년에 제작된 75점의 <너와>[도42] 시리즈는 전통 한옥의 지붕에 사용된 30년 묵은 소나무를 이용한 나무작업의 일종이며, 종이오리기 작업은 전통 굿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최근의 채색화[도43] 역시 전통적인 것에 대한 작가의 오랜 관심의 연장선으로서 전통적 기법과 대안적 상상력이 결합되어 독특한 미학적 결실을 기대하게 한다. 이렇게 그녀의 작품에서 무속과 전통은 답습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적극적인 재해석에 의해 새로운 창작의 영감이자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2010년 이후 윤석남의 작업은 크게 세 가지로 묶여진다. ‘종이오리기 작업’ 방식을 도입한 새로운 개념의 룸시리즈와 2013-2016년의 너와 시리즈, 그리고 2016년 이후 진행 중인 채색화로 그린 자화상 시리즈가 그것이다. ‘룸(room)'의 개념은 1995년 처음 등장해 1996년 <핑크룸 I>에서 본격적인 룸시리즈로 발전하며 자전적 이야기를 분출하는 통로가 되어 왔다. 1990년대 룸의 개념은 여성에게 억압적인 공간으로서 집 안과 직접 관련되었고, 핑크에서 블루의 단색으로 칠한 벽은 심리적 불안이 투사되는 자전적인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2010년 바리데기 설화의 모티프에서 출발한 <블루룸>[도44]에서부터 룸시리즈는 형식과 내용면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종이오리기 작업이 새롭게 도입되고 현실 세계를 넘어 사후세계로 확장된 것인데, 이는 2009년 사랑하던 어머니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다. 작가가 바리데기 설화에 끌린 이유는 딸로 태어나 부모에게 버림받았지만 온갖 역경을 이겨내며 부모의 생명을 살린 바리공주의 사랑의 실천과 그 대가로 얻을 수 있었던 아버지의 왕국을 거부하고 인간의 죽은 영혼을 위로하고 저승으로 인도하는 무당의 원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블루룸> 연작은 바리공주가 저승으로 가기위해 건넜다는 바다를 상징하는 푸른색을 기본으로 화려한 천을 두르고 의자에 앉은 바리공주상과 저승세계를 표상하는 12가지 문양을 오린 종이작업으로 제시되었다.
’종이작업‘ 또는 ’종이오리기 작업‘은 전통 굿에서 사용되던 종이꽃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문양을 오린 후 펼친 한 장의 종이와 바탕의 종이가 겹쳐지며 문양이 도드라지고 같은 문양이 일정한 패턴으로 반복 배열된다. 종이작업의 수공적인 작업 방식의 동원과 강력한 장식효과는 예술 장르 간에 존재해 온 위계를 뒤흔들어 놓는다. 종이작업의 또 다른 장점은 전시 장소에 따른 규모의 조정과 벽면 안 쪽 구석에 설치된 거울과 더불어 현실 너머로까지 공간을 확장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윤석남의 전작에서 룸시리즈는 2018년 말까지 <핑크룸> 5점, <블루룸> 3점, <화이트룸> 4점, <블랙룸> 1점, <그린룸> 3점 등 총 17점이 발표되었다. 다섯 가지 룸시리즈의 주제는 각각 색의 상징성과 종이작업에 의존하며 경우에 따라 인물이나 연꽃이 수반되기도 한다. 2011에 발표한 <화이트룸>[도45]과 <블랙룸>[46]은 사후 세계를 빛과 어둠이란 두 가지 색으로 상징화했다. 2013년에 시작한 <그린룸>[도47] 시리즈는 자연 환경의 파괴에 대한 문제의식을 전하기 위해 여러 색조의 녹색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룸시리즈에서 룸은 집 속의 방에서부터 점차 사후 세계, 자연, 우주와 같이 보다 넓은 공간으로 확장되었다.
윤석남의 관심사는 후기로 갈수록 생명 있는 모든 존재에 대한 사랑과 환경 문제로 확장되며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 공생의 가능성을 묻고 있다. 그런 관심은 자연스럽게 생태여성주의와 평화주의, 그리고 지역과 전지구를 연결하는 페미니즘으로 향한다. 그러므로 여성과 유기견처럼 소외되어 온 존재들을 보듬고 무속이나 설화처럼 근대화와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로 인해 억압되고 사라져가는 지역의 문화적 전통을 호출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리데기에 이어 조선시대 노예 신분을 벗고 제주의 여성거상이 된 김만덕(1739-1812)의 발견은 이런 맥락에서 의미 있다. 김만덕은 가뭄에 전 재산을 풀어 굶주린 제주도민에게 쌀을 제공하여 그들을 살려낸 역사 속 실존 인물이다. 논리적인 언어로 담아내기에는 너무나 위대한 김만덕의 실천적 사랑은 생명을 살린 소박한 공기밥이나 <김만덕의 심장은 눈물이고 사랑이다>[2015, 도48]에서처럼 생명을 긍휼하게 여기는 공감의 근원으로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커다란 붉은 심장을 통해 전해진다.
5. 맺음말
세상을 보는 눈을 되찾은 어머니들, 의자가 된 여자들, 소파가 된 자신, 빛이 되어 곳곳으로 흩어진 여자들, 몸이 늘어난 여자들, 물고기가 된 여자들, 개가 되어 버린 할머니. 이렇듯 윤석남의 작품에는 박제된 삶을 깨고 나와 점차 자유로워지는 여성 주체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여성의 사고와 행동을 규제해 온 유교적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에 파열음을 내고 봉합된 역사에 무수한 틈새와 주름을 만들어 낸다. 이 글에서 설명하지 못한 732점의 드로잉에서도 어머니, 자화상, 여성들의 이야기가 태반을 차지하며, 그 외에 여행이나 자연을 보고 느낀 감정들, 반전사상 및 평화에 대한 열망이 담겨있다. 재료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표현과 문학성은 드로잉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윤석남의 전작에서 드로잉 작품은 양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가치가 있으므로 앞으로 별도의 연구가 필요하다.
윤석남의 작품이 전문가뿐 아니라 대중에게 사랑받고 국내외적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꾸준히 자신이 누구인지 성찰하고 약자를 위해 손을 내미는 겸허한 자들의 삶에 깊게 공감하는 자세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자신 안에 존재하는 여러 모습의 타자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외면하고 미술에서 대상화되어 온 타자들을 회복시키고, 그들의 삶을 존중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우리는 겸허한 마음을 배울 수 있다. 지난 40년간 윤석남은 소외되어 온 존재들과 공생할 수 있는 삶과 보다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한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예술가로서 그 답을 찾고자 했다. 현재까지 지지치 않고 계속되는 그녀의 작업의 원동력은 페미니즘 의식에 기반한 명철한 자기 성찰과 창작을 향한 사라지지 않는 열정의 불꽃이다. 근대적 인본주의와 자본주의에 의해 왜곡되어 온 인간들 간의, 그리고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과의 소통을 회복하는 것, 그래서 다종다양한 자연의 세계를 존중하며 모든 생명체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배우고 실천에 옮길 수 있도록 감성의 통로를 열어놓는 것이야말로 윤석남의 미술의 정수다. 비록 미약하더라도 자신의 메시지가 민들레 홀씨처럼 사방으로 멀리 멀리 퍼져나가 사람들의 마음에 닿고 서서히 의식을 변화시키기를 소망한다. 그런 바람이 있기에 윤석남은 여전히 할 일이 많고 새로운 작업에 대한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늘도 윤석남의 붉은 심장이 펄펄 뛰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1기: 1979~1991년
오랜 머뭇거림 끝에 1979년 봄 40세의 나이에 전문적인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후 최초의 작품 <무제>를 제작한 1979년부터 1990-1991년 2차 도미해 뉴욕의 미술현장에서 접한 설치미술에서 가능성을 발견하고 돌아와 나무작업을 하기 전까지가 이 시기에 해당하며, 회화 작품이 주를 이룬다. 1982년 미술회관(현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 제1회 개인전 《윤석남》에어머니를 모델로 그린 사실적인 회화작품을 여러 점 발표하며 작가로 인정받았다. 1983-1984년 약 10개월 동안 뉴욕의 프랫 인스티튜트 그래픽 센터와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판화와 유화 교육을 받고, 미술현장의 체험과 견문을 넓히고 귀국했다. 1985-86년에 여성들이 처한 현실에 공감한 김인순, 김진숙 작가와 함께 활동한 “시월모임“ 의 제 2회전 《반에서 하나로》(1986)에 초기 대표작 <손이 열 개라도>(1984)를 발표하였고, 미술 분야에서 여성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한 전시로 주목을 끌었다. 민족미술협의회 내의 ‘여성미술분과’ 창립멤버이자 ‘여성미술연구회’의 일원으로 민중미술활동에 가담하고 《여성과 현실》 연례전에 출품했다. 한편, ‘또 하나의 문화’ 동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성숙된 여성주의 의식과 작품을 발전시키며 국내 여성주의 미술의 초석을 다졌다. 여성 시인들의 시를 미술로 재해석한 <고정희 시, “우리 깊고 아득한 강을 이루자”>, <김승희 시, “나혜석 콤플렉스”> 등이 이런 과정에서 나온 대표작품들이다. 이 시기의 작품 활동은 후에 국내 여성주의 미술의 선구자라는 평가의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윤석남의 전작을 관통하는 소재는 여성이다. 작가의 어머니, 할머니, 상인, 작가자신, 예술인, 설화의 주인공 등 과거와 현재, 현실과 비현실의 시공간 속의 여성들을 차례차례로 전면에 불러내었다. 이 기간에는 어머니와 여성상인을 그린 작품이 다수 제작되었다. 중얼중얼, 두런두런, 속닥속닥, 웅성웅성 등등 여성들의 비논리적 언어는 남성의 논리적인 언어의 세계를 교란시켜왔다. 그것은 혼잣말, 수다, 푸념, 투정, 잔소리, 쓸데없는 말 등으로 불리며 외면당하고 공식 언어에서 배제되어 왔다. 그런 여성의 언어에 익숙한 현실의 경험에서 출발했기에 윤석남의 접근법은 남성미술가들이 여성을 호출하던 방법과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아무도 듣고자 하지 않는 평범한 여성의 언어를 경청하고 그 언어로 터져 나오는 삶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하였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 속에 세상을 지탱해 온 또 다른 힘이 있음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어머니>(1979)에서 보듯 39세에 남편을 여위고 6명의 자식을 혼자 힘으로 먹여 살리고 성장시킨 자신의 어머니의 이야기가 작가로서 세상을 향해 던진 최초의 화두인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그리고 가족의 밥상을 차리기 위해 늘 다니던 시장에서 만난 생선가게와 야채가게의 상인들에게서 또 다른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일상 속에서 매일매일 마주치는 ‘살아있는 어머니들’이기에 가부장제가 이상화해 온 희생자로서 어머니라는 추상적 개념으로 포섭될 수 없었다. 모성의 실천은 지속적인 육체노동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아는 작가는 거칠고 투박한 손과 지친 얼굴, 웅크린 자세 등을 통해 삶의 무게를 버티고 있는 여성들의 현실을 드러내고자 했다. 반면 배경은 함축적이며 단순화되었고 인물과 배경은 유사한 색과 붓질로 통합되었다.
작업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작가는 회화는 곧 유화라는 오랜 전통을 비판없이 받아들여 1982년까지 유화의 표현력의 향상에 몰두했다. 그러나 1983년 도미 후 아크릴릭 물감 또는 드로잉에서 보다 직접적이고 자발적인 표현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유화물감의 장점으로 간주되는 두터운 질감 표현, 덧그리기, 고유의 저항적 성질 등이 오히려 여성의 위태롭고 불안정하고 유동적인 현실을 그려내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해 1987년 이후 유화를 그만두었다. 유화 대신 1988년부터는 종이나 캔버스에 아크릴릭 안료와 4년간 서예쓰기를 하며 익숙해 진 동양화 붓을 함께 사용하기 시작했다. 1985년부터는 드로잉을 습작의 단계를 넘어 독립적인 작품의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4B 연필, 또는 수채색연필을 함께 사용해 크고 작은 드로잉들을 다수 제작했지만 보관의 어려움으로 인해 훼손되거나 망실된 것이 많다. 미국에서 익힌 판화기법을 활용해 1980년대 말까지 여러 점의 판화를 제작했으나 그만두고 현재 확인 가능한 작품은 일부 정도다. 그 중 회화작품 <손이 열 개라도>의 석판화 버전이 의미있는 작품이다.
2기 : 1992~2002년
2기는 평면을 탈피해 폐목과 각종 오브제를 활용한 입체와 설치작업으로 전격적인 매체 변화를 시도한 1992년부터 10년의 기간이다. 작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설치 작품들이 대부분 이 기간에 제작되었다. 그러나 한 작품의 일부가 다른 작품에 재사용되거나 기존의 설치에 새로운 요소가 첨가되기도 하고, 일부는 해체되거나 망실되어 전모의 파악이 쉽지 않은 실정이다. 1999-2002년 사이에는 드로잉 작품 총 730점 중 540여점이 집중적으로 제작되었다. 1993년 제2회 개인전 《어머니의 눈》에서 대규모의 나무 작업을 다수 발표해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를 계기로 베니스비엔날레 한국특별전 《호랑이의 꼬리》(1995)에 초대받고 여성작가로는 최초로 ‘이중섭미술상’을 수상했다(1996). 《아시아 퍼시픽 트리엔날레》(1996)와 《타이페이 비엔날레》(1998) 등 다수의 해외 전시에 초대받아 출품하였고, 전시 후 작품이 소장되기도 했다. 한편 (사)여성문화예술기획의 이사장으로서 여성문화 활동을 적극 주도했다. 이 기간 동안 한국 여성주의 미술을 선도해온 대표적인 작가이자 설치작가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고 국제적인 작가로 발 돋음 하였다.
초기에는 재목으로 쓸 부분을 잘라내고 남은 피목 부분을 사용했기에 대개 한 쪽 면이 둥글거나 균일하지 않은 윤곽이 그대로 남아있다. 나무판이나 나무 조각들을 못 또는 경첩으로 이어 붙여 대략적으로 인물의 윤곽을 만든 후 얼굴이나 몸통을 그리고 채색했고, 종종 그 위에 다른 오브제들을 덧붙이기도 했다. 이런 작업들을 통칭해 편의상 ‘나무 작업’이라고 부른다. 채색을 위해서는 이미 숙달된 모필과 아크릴릭 물감을 사용했는데, 나무에 물감이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효과로 인해 나무 작업에 최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편, 폐목 자체의 고유의 흠, 옹이, 결을 제거하지 않고 일부러 남겨두었다. 그런 의도는 모든 나무작업에 적용되어 따뜻한 나무의 성질에 자연스럽고 소박하고 거친 느낌이 덧붙여졌다. 나무의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표면은 마치 오랜 풍파를 견뎌온 여성의 피부와 닮았고, 남겨진 흔적들은 여성의 몸이나 얼굴의 일부가 되어 치유될 수 없는 깊은 내적, 외적 상흔처럼 보인다. 검은 선으로 간결하게 그려진 얼굴은 화려한 문양이나 반복적 패턴의 옷이나 장식물과 대조를 이루며 더욱 불안하고 우울해 보인다. 나무에 그린 얼굴들은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작가는 특정 인물을 염두에 두었는데 대상과의 닮음보다는 응축된 내적 감정이나 정신의 드러냄을 중요하게 여겼다. 특히 눈은 그려진 존재의 요체로서 보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애원하듯 대부분 정면을 직시하고 있다.
이 기간에 폐목과 함께 문짝, 부엌 찬장, 빨래판, 거울, 자개장이나 마네킹의 일부, 또는 교실 의자, 식탁의자, 안락의자, 소파 같은 각종 의자 등 사람의 손 떼가 묻거나 쓰다 버린 레디메이드를 수집해 작업에 적극 활용했다. 의자를 이용한 여러 작품과 <핑크룸> 연작 등에서 무쇠로 만든 못이나 플라스틱 구슬은 불안과 아름다움이란 이중성을 유발하는 중요한 장치로 등장했다. 나무 그림과 레디메이드의 예기치 못한 조합은 초현실적이며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면서 우리를 다른 시공간의 차원으로 이끈다. 논리와 질서의 언어로는 보이지 않고, 이해되지 않고, 들리지 않던 여성들의 웅얼거림이나 고통스런 외마디들이 고요한 가운데 섬뜩하게 다가온다.
이 시기 작품의 주제는 모성, 자전적 삶에서 기인한 여성의 불안정한 정체성의 탐색, 여성사의 소환이란 세 단계로 확장되는데 그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 1992-1995년 중반에 폐목과 레디메이드를 결합한 단독 입체에서 점차 사진 배경 등을 활용한 설치작업으로 확장되었다. 1기의 회화와 마찬가지로 전근대에서 근대로 이어지는 유교적 가부장제 사회의 모성신화를 거부하고 실천적 모성을 강조하였다. 나무에 그린 자화상과 주변 인물상 및 <어머니>(1992-1993), <족보>1993, <어머니의 이야기>(1995) 같은 대규모 작품이 제작되었다. (2). 1995년 말-1996년에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결혼 제도 속에서 여성이 겪는 불안한 심리와 불안정한 위치를 방이란 공간적 설치에 투영했다. <금지구역>(1995), <낮과 밤>(1995), <핑크룸> 연작 등이 이런 심리를 반영한 작품이며, 그 중 <핑크룸> 연작은 백미로 꼽힌다. (3). 1996-2002년에는 여성사의 발굴이 두드러지는데 <999>는 역사 속의 여성 무명씨들을 작은 목각에 그려 넣은 것이다. 또한 나혜석, 최승희, 허난설헌, 이매창, 황진이 같은 여성예술인들을 소환하여 시공을 초월한 현재의 여성과 여성 선조의 정신적 만남을 추구했다. <종소리>(2002)는 청각적 요소를 동원해 이매창과의 정신적 교감을 연극적으로 가시화한 수작으로 꼽힌다.
3기 : 2003~2009년
3기는 늘어난 팔과 유기견이란 두 가지 모티프를 중점적으로 추구한 2003-2009년에 해당한다. 2003년과 2008년의 개인전에서 각각의 모티프가 펼쳐졌다. 이 기간의 작업방식은 2기와 크게 달라진 바가 없으나 장소 특정적 설치 개념이 더욱 중요하게 고려되었다. 과거와 현재의 여성들 간의 정신적 교감의 한 방법으로 2002년에 시작된 늘어난 팔의 모티브는 2003년 개인전의 제목이 《늘어나다》일 정도로 다양한 형태와 개념으로 발전하며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다. 유독 길게 늘어난 한 쪽 팔은 가로로, 또는 세로로 뻗어나가고 때론 비상하는 날갯짓이 되기도 한다. 2003년에 발표한 <감>, <늘어나다, 연>, <어시장 I, II> <붉은 밥 I, II>, <날개>에서 늘어난 팔과 날개는 시공을 초월한 여성들과의 영적 교감에서부터 꿈과 자유를 향한 열망, 보살핌과 치유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몸에 새겨진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2008년의 개인전 《1025: 사람과 사람없이》에서 처음 소개된 유기견 모티프는 제목 그대로 1025마리의 개 조각으로 이뤄진 하나의 설치작품이며, 일명 ‘개 작업’이라고도 불린다. 이 작업의 아이디어는 1025마리의 유기견을 돌보는 이애신 할머니에 관한 신문 기사를 읽고 방문한 현장에서 얻었다. 2003년 말부터 1년의 준비 스케치 기간을 포함해 완성에만 5년이 결렸고, 파손을 대비해 1400여 마리가 제작되었다. 개의 형상에 따라 나무를 자르고 표면을 갈고 밑칠한 뒤 개의 모습을 그리고 마지막 손질을 하는 등 열 두 번의 공정을 거친 고된 작업이었다. 그 동안 사용해온 피목으로는 다양한 종류의 개의 모습을 제대로 형상화할 수 없어 마티카 나무의 재목으로 쓰는 부분을 사용했다. 전체 중 건강한 개는 삼백여 마리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아픈 개와 인간에게 입은 상처로 몸통에 구멍이 뚫린 개, 죽어 영혼을 남긴 개들의 무리이다. 비록 몸은 성치 않지만 큰 눈을 부릅뜬 채 정면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개의 모습은 인간을 원망하고 질책하는 듯해서 불편하고 섬직하다. 2009년에는 개를 돌보는 할머니의 형상이 추가되었다. 이 작품은 미술계 뿐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일단 개의 숫자와 스케일에 놀라고 5년간 전문적인 조수의 도움없이 그 작업에 매달린 작가의 의지에 탄복하였다. 일차적 충격을 넘어서 이 작품은 소비자본주의와 인간의 이기주의에 대한 깊은 반성과 미약한 생명체와 공생하는 보다 근본적이고 대안적 삶의 가치와 방식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작가는 어떤 보답도 바라지 않고 버려진 생명을 거두어 돌보는 여성의 자애로움과 무한한 사랑의 힘이야말로 그 대안이 될 수 있음을 <1025: 사람과 사람없이>를 통해 직접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또 다른 개 작업 <108>의 제목은 개의 숫자가 아니라, 인간이 이생에서 ‘백팔번뇌’를 겪는다는 불교의 윤회사상과 관련이 있다. <108> 시리즈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불교사상뿐 아니라 근대화 과정에서 사라진 무속에 대한 관심도 반영되었다. <1025>가 상처받은 어두운 개들이라면, <108>은 들풀, 연꽃, 흰 구름, 파란 하늘 등과 한 몸이 된 승천한 개들이다. 인간에게 상처받은 개들의 영혼을 달래고 사후 세계로 인도하는 전통적인 무속제의인 위령제의 성격이 강하게 반영된 것이다. 이 작품은 단독 조각으로 구성된 시리즈로서 현재 확인된 작품 수는 총 56점이다.
3기에 생명과 환경에 대한 고조된 관심은 생태여성주의와 맞닿고, 이라크 방문 후 제작한 <바그다드> 드로잉 연작에서는 평화주의자로서 면모도 드러난다. 이 시기에 작가는 점차 지역과 연결된 지구적 차원으로 여성주의 의식을 확장하고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난 대안적 삶의 가능성을 묻고 있다. 그런 물음은 여성과 유기견처럼 소외되어 온 존재의 이야기들, 무속이나 설화처럼 근대화와 자본주의화로 인해 억압되고 사라져가는 지역의 문화적 전통을 호출하는 방법을 취했다. 윤석남의 작품이 전문가뿐 아니라 대중에게 사랑받고 국내외적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바로 겸허한 자세로 약자를 위해 손을 내밀기 때문일 것이다.
4기: 2010~2018년
4기는 2010년 이후부터 현재 진행 중인 작품을 총망라하며, 크게 세 부류로 구성된다. 우선 ‘종이작업’ 방식을 도입한 새로운 개념의 룸시리즈가 지난 8년을 관통해 온 주요 작품이다. 2013-2016년에 제작한 너와 시리즈가 있으며, 2016년부터 새롭게 시도하고 있는 동양화 재료를 이용해 그린 자화상 시리즈가 포함된다. 2015년에는 서울시립미술관이 중요한 원로작가를 초대하는 기획전 SeMA Green에 선정되어 회고전 《윤석남♥심장》을 개최함으로써 명실공히 한국을 대표하는 원로작가가 되었다.
‘룸(room)'의 개념은 2기의 1995년 처음 등장해 1996년 <핑크룸 I>에서 룸시리즈로 발전하며 자전적 이야기를 분출하는 통로가 되어 왔다. 이전의 룸의 개념은 여성에게 억압적인 공간으로서 집 안과 직접 관련되었고, 핑크에서 블루의 단색으로 칠한 벽은 심리적 불안이 투사되는 장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2010년 바리데기 설화의 모티프에서 출발한 <블루룸>에서부터 룸시리즈는 형식과 내용면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종이작업이 새롭게 도입되었고 삶을 넘어 사후세계의 이야기로 확장된 것인데, 이는 2009년 사랑하던 어머니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다. 작가가 바리데기 설화에 끌린 이유는 딸로 태어나 부모에게 버림받았지만 온갖 역경을 이겨내며 부모의 생명을 살린 바리공주의 사랑의 실천과 그 대가로 얻을 수 있었던 아버지의 왕국을 거부하고 인간의 죽은 영혼을 위로하고 저승으로 인도하는 무조신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랑의 힘과 무속에 대한 작가의 오랜 관심의 연장선에서 무조신이 된 바리데기를 기리기 위해 전통적 굿에서 사용했던 종이꽃에서 종이작업을 착안해 냈다. 그리고 저승으로 가는 길목을 바다의 푸른색 종이작업으로 상징화했다. 이것을 편의상 ’종이작업‘이라 하는데, 주제와 관련이 있는 삼라만상의 도형을 오려 펼친 한지와 바탕의 한지를 겹쳐 오린 도형이 드러나게 하는 방법을 고려하면 ‘종이오리기 작업’이라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룸시리즈의 제작을 위해 작가는 주제에 적합한 도형과 패턴을 고안하고 종이오리기는 딸이 맡아 협력하고 있다. 종이작업은 항상 거울과 플라스틱 구술을 동반하며, 특히 한쪽 벽면 구석에 설치된 거울은 현실과 그 너머를 잇듯 서로를 비추며 공간을 확장한다. 또한 룸시리즈의 주제에 따라 인물이나 연꽃 등이 함께 설치된다. 2011에는 <화이트룸>과 <블랙룸>에서 사후 세계를 빛과 어둠으로 표상했고, 2013년에 시작한 <그린룸> 시리즈에서는 자연과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2010년 이후 이런 방법에 따라 핑크룸 5점, 블루룸 3점, 화이트룸 5점, 블랙 1점, 그린룸 3점 등 총 16점의 룸 설치작품이 제작되었다. 4기의 룸시리즈는 사후 세계, 자연, 우주와 같이 보다 넓은 공간 개념으로 확장되고 있다. 룸 시리즈를 관통하는 주제는 특정한 대상을 초월한 무한한 사랑이라 할 수 있으며, 바리데기에 이어 조선시대 제주의 여성거상 김만덕의 발견은 이런 맥락에서 놀라운 것이 아니다. 가뭄에 전 재산을 풀어 제주도민을 구한 김만덕의 자발적인 큰 사랑의 실천은 인간의 논리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작가는 인간의 생명의 원천이자 여성의 몸에 새겨진 정서적 언어의 근원으로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커다란 붉은 심장을 통해 그 힘을 전달하고자 했다.
2013-2016년의 <너와> 시리즈는 지인이 보관하고 있던 30년이 넘는 너와를 얻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전통 한옥의 지붕으로 사용되었던 소나무로 된 너와를 씻고 말리고 나무작업처럼 오랜 풍파로 인해 생긴 자연스런 형태와 표면을 살리며 다듬었다. 종이 위에 너와를 접착한 후 각각의 너와의 모양새를 보며 떠오르는 형상을 드로잉 하듯 간결하게 그려 넣고 제목을 달았다. 너와 자체의 모양과 그려진 여성의 형상과 제목, 이 세 요소가 서로를 채워가며 한편의 서정시를 자아낸다. 너와 여러 점이 모이면 마치 각자의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너와> 시리즈 중 2013년에 제작한 작품들에는 색이 사용되고 액자도 채색되었으나 나머지 작품들은 흑백으로 제작되었다. 일부 너와는 파손되기도 해서 현재까지 확인된 작품의 수는 총 75점이다.
1기부터 평면, 입체, 설치로 수많은 자화상을 제작해 왔지만 2016년에 시작한 자화상 시리즈는 전통적인 동양화 재료인 한지에 먹, 분채, 석채, 호분 등을 사용해 그린 것이다. 2015년 《윤석남♥심장》 개인전을 끝내고 그해 말부터 줄곧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채색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창작한 자화상들을 2017년 초부터 조심스럽게 발표하고 있다. 평면이 갑갑하다며 공간으로 확장을 시도하며 설치 작가로 인정받은 작가가 몇 년 전부터 다시 평면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최근의 자화상들은 작가가 오래도록 관심을 가져온 채색화 전통과 평면을 향한 또 다른 실행의 결실이며, 앞으로 펼쳐질 작업의 방향을 예고하고 있다.
본 자료집은 원로작가 윤석남(1939, 만주출생)의 전작목록과 작품연구를 수록하였다. 한국현대미술에서 이제껏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던 모성의 문제, 생태의 윤리학, 평범하고 소외된 개인의 이야기를 밀도 있게 그려왔던 작가의 화업은 작품에 대한 전수자료를 토대로 전방위적으로 분석, 조망되었고 이는 향후 연구의 기초자료로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 윤석남에 대한 의미 있는 선행연구는 2015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작가의 회고전이 개최되면서 함께 발간되었던 『윤석남 ♥ 심장』(2015) 도록이다. 이 도록에서 윤난지는 윤석남에 대한 한국현대미술사에서의 위치와 의미를 “윤석남의 또 다른 미학”이라는 주제로서 조망하였고, 아시아 여성미술의 관점에서 일본의 전시를 사례로 들었던 고카츠 레이코는 “윤석남: 핑크룸, 여성들이 설 자리를 세계에 드넓히다”는 주목할 만한 논평을 시도하였다. 아울러 고카츠는 윤석남의 작업을 아시아 여성주의 흐름의 맥락에서 조망했던 글 「사이에 있는 아시아의 여성들: 여성들의 다성성(Women In-Between in Asia: Polyphony by Women)」(2012)을 통해 일본에 윤석남의 작업을 꾸준히 소개해 왔다.
한편 윤석남 작가의 초기 작품에서 수행적 특성에 주목하고 이를 문화행동이 배태된 것으로 논의했던 「1980년대 한국의 ‘여성주의’ 미술:《우리 봇물을 트자》전을 중심으로」(김현주, 『현대미술사연구』, 2008)는 1980년대 문화다양성의 맥락에서 향후 전시자료와 작가증언 등을 통해 보다 체계적인 관점을 제기한 의미 있는 연구였다. 다루는 주제와 평면, 입체, 설치에 이르는 스펙트럼이 넓은 작가의 매체작업은 2008년「윤석남의 미술과 여성이야기」(김현주, 『핑크룸 푸른얼굴』, 현실문화)에서 작가의 예술관과 미학, 작품발전을 시기별로 조망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표된 연구로는 「억압에서 자유로 흘러나온 서사: 해체와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한국 여성/주의 미술」(이필, 『현대미술사연구』, 2016)로서 한국 여성미술의 역사와 현재성의 측면에서 윤석남 작가의 주요 작업이 연구된 바 있다.
앞서 언급된 선행연구에서 언급되었듯이 윤석남의 작업은 1980년대 주류 미술계에서 상대적으로 간과되었던 주체들에 주목하고 이를 되살리려는 일련의 시도들, 즉, 여성주의와 생태주의 관점에서 현실과 역사를 해석하고 작가만의 독특한 조형성을 통해 한국현대미술의 지평을 확장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본 자료집은 작가 윤석남이 추구한 화업을 작가 자신의 삶과 예술작품으로 통합시키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작품 전수조사와 다각적인 인터뷰 작업을 수행하였다.
이를 통해 작가의 전작 목록에 기반한 연구 결과를 도출하고 한국현대미술의 다양성과 현대문화를 관통하는 연구 토대를 형성하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또한 작가 및 전시기획자, 미술사학자 등 전문가 인터뷰를 통해 한국현대미술의 지형을 보여주는 작가의 아카이브와 생생한 영상자료를 생성하여 원로작가의 해외소개를 위한 발편을 마련하였다.
본 자료집에 수록된 다각적인 연구 성과는 몇 가지 연구방향성을 통해 도출되었다.
1) 작가/ 동료 작가/ 국내외 연구자 및 소장기관을 포괄하는 인터뷰
윤석남의 작업은 회화, 조각, 설치에 이르는 다양한 매체, 한국의 역사와 근대화 현실을 관통하는 삶의 이야기로 깊은 공감대를 형성한다. 작가의 이러한 작업 경향은 작품을 둘러싼 작가 스스로의 경험과 사색, 역사적 성찰, 동시대 작가들의 공유된 관점을 통해 좀 더 폭넓게 조망될 수 있다. 특히 작가의 작업은 동시대 아시아의 현실과 삶의 문제로서 다뤄지고 있기에 해외연구자 및 작품 소장기관을 포괄하는 대담 및 인터뷰를 통해 좀 더 입체적이고 국제적인 관점에서 작가의 화업을 조망하는 연구토대를 제시하였다.
2) 소개되지 않은 자료의 발굴 및 소개, 목록화 작업
‘기록되지 않는 것은 역사가 아니다.’ 라는 말처럼 원로작가 윤석남의 작업은 한국현대미술에서 지금 기록되어야할 중요한 시대적, 문화사적 지점을 포함한다. 그 중요도에 비해 불과 1980년대에 행해졌던 초기 선구적 전시자료 및 작품들이 일부 산실되거나 시급하게 정리를 요하는 상황에서 본 자료집이 실시한 전수조사는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특히 작가 윤석남의 작업은 동시대 여성주의 미술의 역사를 논할 때 언급되는 역사적 작업이기에, 산실되기 직전의 자료들을 모으고 총체적인 목록화 작업을 시도하는 것은 향후 관련 연구 및 전시의 기반조성에도 충분한 의의가 있을 것이다.
3) 작가의 미국체류기 자료/ 해외소장 자료 및 작품의 확인
작가의 초기 작업에서 전통적인 미술시스템을 통한 수학기가 아니라, 2차례에 걸친 미국에서의 체류기가 작가 역량을 키울 수 있었던 중요한 시기였다. 그와 관련한 작가 인터뷰를 토대로 당대 미국 미술계의 관련 자료를 보강하고자 현지 조사가 진행되었고 그간 단편적으로 언급되었던 미국 체류기에서의 행적이 구체화될 수 있었다. 이는 작가의 화업을 전 지구적 미술 상황과 연관 짓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윤석남 작가의 작업에 영향을 주었던 당시 미국 미술계의 관련 자료를 실증적으로 조망, 소개하고 해외에 소장되어 있는 작품 및 관련 작가자료를 확인, 실견함으로써 자료집의 주요 목록화 작업은 학술적 가치와 공신력을 높이는 연구서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적용된 연구방법은 크게 3단계의 절차를 통해 진행되었다.
1) 양적 방법론: 국내외에 산재해 있는 작품 및 전시의 전수조사를 실시하였다.
-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관련 사진, 드로잉, 메모, 서신 등을 포괄
- 해외에서 이루어진 주요 전시는 관련자 면담을 통해 당시 전시관련 해외자료를 포괄
- 특히, 설치작품의 경우에는 다양한 버전이 있을 수 있기에 이에 대한 세밀한 자료 및 작가증언 포함
2) 질적 방법론: 작가 인터뷰 및 주요 해외기관의 필드리서치를 실시하였다.
- 해외전시 양상 및 소장품은 작품의 접근성 때문에 본 연구를 통해 관련 자료의 소개
- 작가 및 전시기획자, 미술사학자, 비평가 등의 전문가 인터뷰를 통해 작가의 화업을 당대의 문화상황, 미술상황의 맥락에서 한층 심도 있게 연구
3) 이론화 작업: 작가의 작품을 국내외적 맥락에서 조망하는 연구를 실시하였다.
- 작가의 전 작품을 시기별, 주제별로 해설하고 관련한 주요 참고문헌 및 관련 전시사항을 함께 소개함으로써 작품을 둘러싼 포괄적 기초이론 제시
- 연구진의 비평 집필을 통해 지구, 지역적 미술흐름 안에서 작가의 화업을 조망하고 원로작가의 공신력 있는 이론적 토대 제공
본 연구의 결과는 향후 한국현대미술이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되고 심층 연구될 수 있도록 중요한 기초자료로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현재에도 젊은 작가 못지않은 왕성한 창작력을 보여주고 있는 작가 윤석남은 현역 작가로서 새로운 영역으로의 창작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는 현재까지 조사, 연구된 본 자료집이 향후 특정 지점에서 새롭게 축적된 작품 및 전시 사항을 보강하고, 현재 지점에서 미처 발굴되지 못했던 자료들을 추가 보완해야 하는 부분을 남겨놓고 있음을 밝힌다. 또한 작가가 기증한 작품에 대한 추가조사 사항도 향후 보완되어야할 부분이기도 하다.
2. 일러두기
1) 목차설명
본 자료집은 비평문, 시기별 작품해설, 연보, 그리고 참고문헌으로 구성되었다.
비평문은 작품에 대한 전수조사, 전문가 인터뷰, 작가면담, 미국체류기 현장방문 및 관련자 면담 등을 기초하여 전반적인 화업을 조망하는 총론을 포함하여 새롭게 발굴된 사항을 충실히 수록하였다.
시기별 작품해설은 작가의 전 작품 가운데 의미 있는 작품에 대한 전수조사, 관련자 인터뷰, 작가면담을 통해 확인된 사항을 충실히 수록하였다.
연보는 작가의 생애를 중심에 두고 주요 수학기, 국내외 주요 전시이력을 바탕으로 아카이브 자료가 보강되었으며 2차에 걸친 미국 체류기는 관련기관 자료조사, 자료에 대한 작가의 교차확인을 통한 분석이 반영되었고 기존 연보의 오류를 바로잡았다.
2) 작품의 분류체계
작품은 크게 평면, 입체, 설치, 드로잉으로 분류되었다.
작가의 작품목록은 인쇄 발표된 자료에 대한 전수 조사를 바탕으로 작가와 연구팀의 확인 작업의 결과, 확정작품을 선정하여 게재하였다.
작품에 대한 전수조사와 작가 확인 과정에서 미확인, 소재붚명에 대한 자료는 소장처 및 연구노트에 별도 표시하였다.
3) 도판 수록작품의 선정기준
도판 수록된 작품은 작가의 화업을 조망할 수 있는 주요 작품과 작가 평가에 필요한 관련 작품을 선정하였다.
수록작품은 연도별 배열과 연작별 배열을 기준으로 배치되었다.
주요 시리즈 작업의 경우에는 변형 설치된 전시사항을 함께 밝혔다.
한 시리즈가 대규모 입체작품으로 구성된 <1,025>는 개별 작품을 모두 기재하지 않고 일괄 1점으로 처리하였다.
4) 수록작품의 정보표시
작품정보는 제목, 연도, 재료, 크기, 소장처로 구성되었고 기본 포맷은 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 배포한 양식과 기술형식을 따랐다.
제목은 작가가 붙인 제목을 우선하고 일부 작품은 소장처, 갤러리 등에서 소장 당시 작가와 협의하여 붙였던 사항을 우선해서 따랐으며 연구노트에 특이사항을 밝혔다.
작품의 크기는 평면의 경우 세로×가로를 기준으로 했고 입체의 경우에는 높이×폭(너비)×깊이를 기준으로 소수 첫째자리까지 명시하고 단위는 센티미터이다.
소장처가 기관일 경우 기관의 공식명칭을 표기하였고 개인 소장인 경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개인소장’으로 통일하였다.
전시이력은 도록, 기사, 전시관련 문서 등을 토대로 공식적으로 기재된 전수 조사 작업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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