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화는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이자 대표적인 단색화가로 국내외 미술계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한 후 《한국현대작가초대미술전(조선일보사 주최)》, 《한국현대미술가협회전》, 《악뛰엘전》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전위적 활동을 전개했다. 《파리비엔날레》(1965), 《상파울루비엔날레》(1967)에 참가하면서 국제미술계를 경험한 후 도불하여 프랑스, 일본, 한국을 오가며 활동했다. 1993년 귀국 후 경기도 여주 작업실에서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정상화의 작품세계는 1956-1967년(초기 국내 활동), 1969-1976년(일본 체류 시기), 1977-1992년(프랑스 체류 시기), 1993년-현재(귀국 이후)로 구분된다. 백색위주의 단색화 작업이 시작된 것은 일본 고베(神戸)에서 머물며 활동하던 시기인 1970년경부터이며 이후 고령토를 이용하여 바르고 떼어내고 다시 메워가는 기법으로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했다. 1970년대 전반에 정상화는 도쿄(東京)가 아닌 칸사이(関西) 지역에서 활동했고, 이후 15년 정도 프랑스에서 거주하며 활동했기 때문에 국내 화단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가 1980년 진화랑과 1983년 현대화랑에서의 개인전 이후부터 주목할 만한 작가로 부상했다.
캔버스 위에 바른 고령토가 마르며 갈라진 균열을 따라 흙을 뜯어내고 다시 그 자리를 유화나 아크릴로 메우고 다시 뜯어내고 메우기를 끝없이 반복하는 작업은 매우 단순하고 지리해 보이지만 농부가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싹이 나오면 기상을 살펴가며 키우는 농사 일처럼 노동과 긴장과 사랑이 요구되는 일이다. 그래서일까. 정상화의 부조처럼 두꺼운 화면에서는 온기가, 흙의 온도가 느껴진다.
화가는 자신의 작업을 “되풀이되는 나의 일상에 대한 기록”이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곧 태초의 혼돈을 지나 생명체가 생겨나고 사라지며 그 흔적이 집적되는 우주의 순환을 기록한다는 말로 들린다. 주변 색을 흡수하여 그 내부로 들어가는 백색의 델리케이트한 변주는 우리를 매료시킨다. 무엇보다 정상화의 화면은 아름다움에 대해 다시, 깊게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오래된 깨달음’의 차원이다.
1932 경상북도 영덕 출생
1957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1959~1960 《한국현대미술가협회전》, 서울
1962, 1964 《악뛰엘(Actuel)》, 서울
1965 제4회 《파리 비엔날레》, 파리, 프랑스
1967 제9회 《상파울로 비엔날레》, 상파울로, 브라질
1968 개인전, 쟝 까미옹화랑(Jean Camion) , 파리, 프랑스
1971 개인전, 모토마치(元町)화랑, 고베, 일본
1973 제12회 《상파울로 비엔날레》, 상파울로, 브라질
1977 개인전, 모토마치(元町)화랑, 고베, 일본
1980 개인전, 모토마치(元町)화랑, 고베, 일본
1983 개인전, 우에다(上田)화랑, 도쿄, 일본
개인전, 현대화랑, 서울, 한국
1984 개인전, 모토마치(元町)화랑, 고베, 일본
1986 개인전, 우에다(上田)화랑, 도쿄, 일본
개인전, 현대화랑, 서울, 한국
1988 개인전, 모토마치(元町)화랑, 고베, 일본
1989 개인전, 현대화랑, 서울, 한국
1991 개인전, 우에다(上田)화랑, 도쿄, 일본
2007 개인전, 현대화랑, 서울, 한국
2008 개인전, 쟝 푸르니에 갤러리(Galerie Jean Fournier), 파리, 프랑스
2011 개인전, 생테티엔 현대미술관(Musee d'Art Moderne de Saint-Etienne Metropole), 생테티엔, 프랑스
2014 개인전, 현대화랑, 서울, 한국
2016 개인전, 도미니크 레비 갤러리(Dominique Lévy Gallery), 뉴욕, 미국
2017 개인전, 레비 고비 갤러리(Levy Gorvy Gallery), 런던, 영국
정상화(鄭相和)의 백색 단색화 출현기(1968~1976) 고찰
김현숙 (KISO 연구소장)
Ⅰ. 논점
정상화는 한국의 단색화를 대표하는 작가로 국내외 미술계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2010년대에 들어와 해외 미술계와 미술시장에서 크게 주목을 받은 한국의 단색화는 주지하다시피 1975년 일본 도쿄(東京)화랑에서의 《한국·5인의 작가 다섯 가지 흰색白》전을 출발점으로 하여 논의되지만 한국 화가들의 흰색이 일본의 화상과 평론가들에게 처음 발견된 것은 1972년 앙데팡당전에서 이기 때문에 1970년대 초반에 단색화가 출현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한편 정상화의 경우는 1960년대 말부터 이미 백색화로의 이행이 시작되었고 1973년(혹은 그 이전)에 격자형 단색화가 등장한다. 1967년에 프랑스 파리(Paris, France)로 가서 약 1년 후에 귀국, 다시 1년 후인 1969년에 일본 고베(神戸)로 가서 9년간 활동하다가 1977년에 파리로 가서 1992년에 귀국하였으니 백색화, 격자형 단색화가 출현하고 전개된 곳은 한국이 아니라 일본 고베와 프랑스 파리이다. 정상화의 이 시기 작품이 국내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80년대 초부터이다. 1979년 제5회 《에꼴드서울》(Ecole de Séoul, 1979. 7. 5~7. 14)전과 같은 해 진화랑 기획 《Work on Paper》 (1979. 7. 6-7.17)에 초대된 이후부터 국내 화단에 소개되기 시작했으니 10여년의 공백이 있는 셈이다.
백색 단색화의 출현에서 그 어떤 작가보다 한 발 앞서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정상화가 도쿄화랑의 ‘다섯가지 흰색 전’에 초대되지 못하고 한국 단색화의 출현 장면에서 누락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근 25년간 해외에서 활동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1960년대 말 1970년대 까지만 해도 해외 여행이나 체류 허가를 얻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인연이 닿은 고베로 가서 작업과 활동을 전개했고 이 시기에는 국내 미술계와 거의 단절된 상태로 제작에만 몰두했다. 일본에서의 거점이 고베가 아니라 도쿄였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확률이 높지만, 그러한 고립 상황이 새로운 작품의 탄생에 몰입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이 글은 정상화 작품의 백색화 이행과 격자형 단색화 출현에 초점을 맞추어 작품의 변화 과정을 보다 정밀하게 살피는 데에 의미를 두었다. 결과적으로 단색화의 출현 장면에 정상화의 위상을 재정립하는 작업이 될 것이며 나아가서는 한국미술사의 잃어버린 한 페이지를 복원하는 일이 될 것이다.
Ⅱ. 백색화 및 단색화의 출현과 특징
정상화는 1960년대 초부터 앵포르멜 미술의 기수로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1967년에 도불전을 개최하고는 국내 화단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미국 공보원 도서관에서 잡지물을 통해 접할 수밖에 없었던 서구의 걸작들을 직접 보고 싶어 파리로 갔다는 작가의 언술을 통해서 ‘진짜’와의 부딪힘에 대한 갈망이 짐작되는데, 루브르 박물관(Musée du Louvre)에서 세계적인 걸작들을 실견하고 그랑 팔레(Grand Palais), 파리시립근대미술관(Musé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세느강변의 갤러리 등을 찾아다니며 현대미술의 현장을 호흡했다. 비자 문제도 있었겠지만 부인의 와병 소식에 1년의 짧은 프랑스 체류를 끝내고 귀국을 하게 되었지만 파리의 자유로운 문화 환경에 대한 갈증은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정상화는 1년여만에 다시 일본 고베로 떠났다. 파리도 아니고 도쿄도 아닌 고베로 향한 것은 해외 비자 발급이 거의 불가능했던 상황에서 고베에 거주하는 재일교포 및 일본인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어렵게 비자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에게 고베는 파리에 가기 위한 중간지 정도여서 그의 시선은 고베를 넘어 파리, 뉴욕, 베를린 등지를 향해 있었다. 실재로 한국에서 투병 중이던 부인이 사망하자 고베를 떠나 파리로 이주하게 된다. 1969년에 고베에 도착해서 1977년에 프랑스로 떠났으니 고베에서의 체류 기간은 거의 9년으로 길어져서 작업에서도 혁혁한 변화가 이루어졌다. 새벽 시장터에 나가 노동을 하는 등 재료비와 생활비를 벌면서 매년 오사카와 고베의 주요 화랑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는데, 당시 그의 작업실을 방문했던 화상과 평론가들의 글 속에는 정상화의 작업열과 초인적인 엄청난 작업량에 대한 감탄이 예외 없이 담겨있다.
주목할 부분은 일본 고베 체재기에 단색화가 출현했다는 점이다. 1967년에 처음 프랑스 파리에 갔을 때의 작업에서부터 백색의 사용이 현저하게 늘어나고 화면에 백색 범위가 넓어지기 시작했고 1969년 고베로 이주하면서 백색화로의 이행이 두드러졌다. 나아가 1972년경부터 올오버 페인팅으로서 백색화가 출현했으며 1973년에 격자형 단색화가 등장했다. 이후 1970년대 중반부터는 본격적인 실험이 거듭되면서 Grid의 다양한 변화가 시도되었다. 1967년경부터 백색화로의 이행이 시작되어 1972년에 백색 전면화가 등장했고 1973년에 격자형 단색화가 등장했다고 요약할 수 있는데, 여기서 제시된 연도는 현재까지 작품을 조사하며 확인된 사례이므로 차후에 선행작이 발견된다면 백색화의 시작 연도는 더 앞당겨질 것이다.
정상화 작업의 독창성은 기법적 측면에서 더욱 독보적이다. 이미 1960년대 중반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던 ‘들어내고 메우기’ 기법은 이후 단색화 제작으로 지속되었다. 안료를 만들어 바탕을 칠하는 밑작업과 캔버스 위의 본작업으로 나눌 수 있는데, 카오린(돌가루)에 합성수지(접착제)를 섞어 하루를 재워 용해시킨 후 특수 안료를 아교에 섞어 고르게 덧칠하는 작업이 밑작업이다. 이후 어느 정도 마르면 작품의 구상을 따라가면서 카오린을 들어내고 그 자리에 유채나 아크릴물감으로 메꾸는 본작업이 진행된다. 고령토를 한번 들어내고 아크릴물감을 채워 넣은 부분, 처음 화포에 바른 고령토를 그대로 남겨둔 작업이 반복되는, 일명 ‘들어내고 메우기’ 기법으로 다색이면서도 단색인 표면이 생성된다.
격자형 단색화 단계에서는 “접어서 펼치기” 기법이 등장한다. 카오린을 바른 화포에 네모꼴 단위의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선을 그은 후 그 선에 맞추어 화포를 접었다가 다시 피는 밑작업을 말한다. 이후 화포를 다시 틀에 끼운 후 뾰족한 쇠꼬챙이 같은 도구로 가로 세로로 갈라진 작은 네모꼴 하나하나를 뜯어냈다가 다시 메우는 “들어내고 메우기” 작업이 반복된다. 이로써 ‘단색이지만 다색’인 표면, 끊겼다가 이어지고 때로는 불규칙하게 얽힌 ‘기복이 있는 평면’이 형성된다.
Ⅲ. 대표작(첨부 PDF 참고)
표현적 질감과 다층적 공간을 추구하던 1960년대 후반의 앵포르멜 화풍이 점차 단순한 구도, 반복적 패턴, 미니멀한 색감으로 변화하면서 백색회화에 이르는 기간은 정상화 작가의 전 화업 중에서 가장 혁신적인 시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백색회화로의 진행은 all over painting의 평면성 추구로 이어져서 종국에는 치마폭 주름을 잡듯 접었다가 펴서 화폭을 틀에 고정시킨 후 ‘들어내기와 메우기’를 반복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치는 독창적 기법이 창안되었다. ‘들어내기와 메우기’ 기법은 1960년대 중반 앵포르멜 시기부터 이후 단색화 작업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지속되는 기법으로 단지 기법 차원에 그치지 않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작가의 작업관을 반영하며 창안되었다는 점에서 정상화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핵심 개념이기도 하다. 격자무늬의 출현 이후부터 고령토와 합성수지를 섞어 바탕에 바르는 안료는 계속 사용되었으나 덧칠해서 바르는 유화 물감은 건조가 빠른 아크릴 물감으로 교체되었다.
이하 백색화로의 이행 과정과 격자형 단색화의 출현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살필 수 있도록 1968년 1차 도불기, 1969년 일본 고베로 이주하여 1977년 2차 도불에 이르는 시기에 제작된 작품들 중 대표작들을 선별하고 아카이브에 해당하는 관련 내용을 상세하게 제시하도록 하겠다.
- 대표작 설정의 기준
각 시기별 대표작의 선정 기준은 시기별 양식 변화를 잘 보여주는 동시에 작품 규모가 크고 조형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을 선정하였다. 동일 기준에 준하는 작품들 중에서 선정해야 할 경우에는 공공기관의 소장품에 우선권을 두었다.
- 시기 구분:
1기: 전위를 향하여: 추상표현주의와 앵포르멜 화풍의 시기 (1957~1967)
2기: 백색화로의 이행과 그리드의 출현 (1968~1977)
3기: 격자형 단색화의 완숙기 (1978~1991)
4기: Perspective의 확장 (1992 ~ 현재)
Ⅰ기. 전위를 향하여: 추상표현주의와 앵포르멜 화풍의 시기 (1957~1967)
서울대학교 서양화과 졸업 이후부터 전위 미술단체인 현대미술가협회와 악뛰엘의 멤버로 활동하던 시기에 해당한다. 대학교 학창 시절에는 사물을 재현하기 위한 기초 훈련을 받아 인물 크로키나 정물화 같은 구상화를 그렸지만 졸업 직후부터 추상표현주의풍의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作品 103>(1958)은 이 시기의 작품으로 당시 가장 전위적 단체였던 제 5회 현대미술가협회 출품작이다. 화포를 구겨서 생긴 주름을 활용하거나 안료를 발로 밟아 짓이기는 등 거친 마티에르 효과와 액션을 통해서 전후 1세대 청년의 사회적, 실존적 불안 의식이 표출되었다. 1960년경 제작된 고 김윤식(金允植, 1936~2018) 소장의 작품에서는 크고 넓은 브러시로 단숨에 작품을 완성함으로써 빠른 동력과 격렬한 신체적 행위성이 감지된다. 이 작품의 소장가이자 인천사범학교 동료 교사였던 고 김윤식의 다음의 회고담은 당시 작가의 제작 방식을 짐작하는 데 크게 도움을 준다. “어느 때 그는 미술반 습작실에서 자면서 작품제작에 몰두하였다. 덕수궁에서 그룹전이 열린다는 것이었다. 몇 달을 두고 그는 수척할 정도로 매달려 있었다. 장갑을 낀 손에 물감을 범벅하여 화폭을 노려보다가, 당수꾼의 기합 같은 소리를 냅다 지르며 순간적으로 달겨들어 물감을 칠하곤 하였다.” (김윤식, 「거꾸로 걸린 그림」, 『신동아』, 1986년 5월호, 103쪽)
1960년 제6회 현대미술가협회 출품작으로 제목미상인 작품에서는 종이를 구기거나 종이의 표면을 긁는 등 표면질에 대한 탐구와 실험 의욕이 확인된다. 표면에 대한 관심은 정상화의 전 작업에 걸쳐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성인데, 이 작품은 그 시작 단계에 해당한다. 추상표현주의 풍에서 앵포르멜 화풍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적 단계이며, '들어내고 메꾸기'의 직전 단계에 해당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1962년경부터는 고령토에 수지를 섞어 용해시켜서 캔버스에 바른 후 점성을 이용해 늘어트려 잘라내거나 누르고 비틀어 돌린 후 유채를 바르는 등 거친 표현질 효과에 주력했다. 고령토를 들어내고 유채를 덧바르는 방식은 이후 단색화 제작의 기본 기법인 ‘들어내기와 메우기’의 시초가 되었다. 제1회 개인전(1962, 중앙공보관)에는 <原始 1>에서 <原始 20>까지 총 20점이 출품되었는데 출품작 중 대표작으로 꼽히는 <原始 1>(1962)은 고령토를 제거하여 캔버스가 그대로 노출된 상단 부분과 드러난 화포 위에 유채를 칠하여 마티에르 효과를 낸 하단 부분이 크게 대비를 이루고 있다.
화가이자 미술평론가로 활동했던 김영주의 평문 중 다음의 대목을 통해서 1회 개인전 출품작및 1960년대 초반의 작품 경향을 짐작할 수 있다. “빛나는 외향성, 부정의 윤리에 벅찬 공간정복을 느낀다. 전통이란 관념의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현대인간의 준열한 확대와, 자신의 온갖 속성에서 벗어나 꽃핀 예술이다. 정상화의 세계에도 침울한 감성이 지배한다. 마치 동굴인의 종교와도 같이 원시적인 공간에의 공포와 대결하고 있다. 바로크적인 인과관계에서 새로운 신앙을 찾고 있다. <원시 1, 2, 3, 20, 8, 9, 14>의 세계는 심리의 심층을 뒤흔든다. 특수한 재료의 감도에서보다도 순수한 차원 형성에서 조형적인 창조의 과정을 걷잡은 데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라고 평했다.(김영주, 「정상화 개인전」, 『동아일보』, 1962. 11. 12.)
한편 미술사학자 김영나는 다음과 같이 타피에스(Antoni Tàpies) 및 알베르토 뷰리(Alberto Burri)와 정상화 작품의 영향관계를 지적한 바 있다. "초창기 멤버들보다 조금 늦게 앵포르멜에 참여했던 정상화는 문화자유초대전을 비롯, 파리의 랑베르(Lambert)화랑 기획의 《한국현대작가 4인전》과 65년의 제 4회 파리 비엔날레에 출품하는 등 활발한 활약을 하고 있었다. 66년의 문화자유초대전에 출품된 <작품 100>(도판 18)은 그가 클라인의 영향에서 벗어나 타피에스(도판 11)나 부리의 표면처리에 크게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 준다. 화면은 큼직한 면으로 분할되고 각 면의 경계는 극히 예민하게 조정되어 있다. 윗 부분의 원형 형태는 하나의 껍질의 성격을 가지면서 돌출되고 튀어나온다. 이와 같이 쭈글거리고 비틀린 껍질의 표면은 정상화 뿐 아니라 이 시기의 다른 앵포르멜 작가들에서도 발견되는 특징이다.”(김영나, 「한국 화단의 ‘앵포르멜’ 운동」, 『한국현대미술의 흐름』 (일지사, 1993), p. 218)
<作品 65-B>(1965)는 고령토를 바르고 열을 가하여 부풀게 한 후에 붓으로 쓸어 터트려서 주름진 마티에르 효과를 낸다든지, 고령토를 떼어내어 바탕천을 드러나게 한 후 그 빈 공간을 안료로 메우는 등 1960년대 전반기의 다양한 기법들이 시도된 작품이다. 다이나믹한 질감과 다층적 공간이 돋보이는 1960년대 전반기 작업의 절정으로 《정상화 도불전》(신문회관, 1967)의 리플렛 표지로도 등장했다.
Ⅱ기 : 백색화로의 이행과 그리드의 출현 (1968~1977)
1968년 1차 도불(渡佛), 1969년 일본 고베(神戸)로 이주하여 1977년 2차 도불(渡佛)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이다. 표면의 질감과 다층적 공간을 추구하던 1960년대 후반의 앵포르멜 화풍에서 점차 기하학적 도형으로의 패턴화, 구도의 단순화, 미니멀한 색감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거치며 백색회화에 이르는 기간으로, 전체 화업 중에서 가장 혁신적인 변화와 발견이 이루어진 기간에 해당한다.
백색 단색화의 출현 시기는 아직 정확하게 단언하기 어렵다. 정상화는 인터뷰에서 1970년경에 백색화가 출현했다고 구술한 바 있으나 대부분의 정상화 관련 텍스트에서는 1973년에 처음 백색화가 등장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아카이브 작업을 수행하면서 현존하는 작품을 대상으로 백색화의 출현 시기를 파악한 결과, 1967년 파리로 이주하면서부터 화면에 백색의 분포도가 현저하게 넓어지기 시작했고, 올오버(all over) 구조의 백색화가 등장한 시기는 1972년이며, 1973년에 이르러 백색 그리드 단색화가 출현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이 추정은 현재까지 드러난 작품을 토대로 파악한 것이므로 향후에 이 추정을 앞당기는 작품이 발견된다면 백색 그리드 단색화의 출현은 1, 2년 정도 앞당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백색 단색화로의 이행 과정은 평면성의 추구와 함께 진행되었다. ‘들어내기와 메우기’ 기법은 1962년 앵포르멜 시기에 처음 시도된 이후 단색화 작업으로 이어졌다. 캔버스에 바른 고령토를 떼어내고 다시 유채나 아크릴로 메꾸기를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표면의 평면성을 탐색하는 독자의 기법으로 확립되어간 것이다. 캔버스를 틀에서 떼어내는 작업은 쉬포르 쉬파스(Support-Surface) 그룹의 작가들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치마폭 주름 잡듯이" 접어서 격자 구조를 만든 방식은 정상화에 의해 창안된 독창적 기법으로 주목할 만하다.
정상화는 일본 고베 시절에도 작업실에서 두문불출하며 제작에만 몰두한 결과 수많은 작품을 산출해냈다. 다작의 실험을 통해서 백색화로의 이행이 진행되었는데, 백색화를 제작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 “본질적인 아름다움에 다가서려는 욕구”에 의해 백색 추상화가 등장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미의 근본, 회화의 근본에 대해 천착할수록 색, 형, 구성 자체가 단순화 되었고 그 과정을 거치며 백색 단색화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1977년 도불 직전까지 정상화는 고베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왕성하게 작품을 발표하였다. 관서지역에서 활동했던 까닭인지 1975년 도쿄화랑 기획전 ‘한국미술의 다섯가지 흰색전’에 초대받지 못했지만 이미 그 시절에 백색과 흑색의 단색화를 제작하고 있었고, '구타이(具体)' 그룹의 리더인 요시하라 지로(吉原治良)가 1971년 모토마치화랑(元町画廊)에서 열린 정상화의 개인전 오프닝에 다녀갔으며, 일본의 관서(關西) 지역의 유명 미술평론가 이누이 요시아키(乾由明)가 정상화의 작품에 대한 평문을 썼을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고베 시기에 대한 평문들은 거의 모두 정상화 작가의 예술에 대한 집념과 초인적인 제작 열에 대해 경탄하였고 특히 백색화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이누이 요시아키 외에 미술평론가 마즈다 히로시(増田洋) 또한 "캔버스 한 면에 새하얗게 겹쳐졌다가 긁어내고 긁어냈다가 겹쳐서 흰색이라는 무채색을 사용하고 있을 뿐인데도 질감 있는 평면이 눈앞에 펼쳐진다. 검정색에 오색이 있다는 말이 있는데 정 씨를 예로 든다면 흰색의 무지개 같달까..."라며 정상화의 백색화에 관심을 표명했다.
Ⅲ기: 격자형 단색화의 완숙기 (1978~1991)
일본 고베에서 약 9년 간의 체류기를 끝내고 1977년에 프랑스 파리로 이주한 이후부터 1992년에 귀국하기까지, ‘파리 시기’로 총칭할 수 있는 기간이다. 이미 일본 ‘고베 시기’에 그리드 단색화로의 완착이 이루어진 상태였으므로 파리 시기에는 표면 구조와 질의 다양한 변주와 완성도에 몰두하였다. 모노크롬적 평면성을 추구하면서도 표면 내부의 다채로운 구조와 표정이 동반된 백색, 흑색, 푸른색 작품이 제작되었고 황색, 주황색, 회색의 단색화도 등장했는데, 일견 단색조로 보이기는 해도 보이지 않는 무수히 많은 색 층이 쌓이고 제거되고 다시 쌓여 드러난 색이므로 단색이라기보다는 다색이라고 해야 옳다.
국내 화단에 정상화의 작품이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1979년 한국 진화랑에서 기획한 《Work on Paper》전에 초대된 이후로 10여년만의 일이다. 1977년 도불 직후부터 1~2년간 목판화, 종이 데콜라주, 연필화, 프로타주 등 종이를 바탕으로 한 다양한 방식의 실험을 통해서 격자 구도, 표면질, 평면성을 탐구하여 걸작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에 정상화는 이후에도 다수의 종이전에 지속적으로 출품하게 된다. 정상화에게 판화, 데콜라주, 프로타주 등 종이작업은 유화 작업을 종이로 옮겨 제작한다는 단순한 차원이 아니라 종이라는 매체의 유연하고 손쉬운 특성을 이용하여 방법적 실험과 도전을 감행하고 방향을 모색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들 종이작업들에는 다색조 단색화가 생성되는 과정이 촉각적으로 현시된 느낌이 든다.
‘들어내고 메우기’의 과정은 고령토가 전부 떨어져 나갈 때까지 여섯 번에서 여덟 번까지 되풀이되는데, 다양한 색조가 채워지고 들어내고 다시 채워지는 과정을 지나 궁극적으로 단일 색조의 표면이 형성된다. 표면적으로는 동일한 단색조라고 해도 바탕 안료 두께의 요철에 따라 빛이 굴절하여 색이 변화하기 때문에 작가는 처음 고령토를 바를 때부터 작품의 구도와 변화의 리듬을 정해야 한다.
정상화의 색은 단색조로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무수히 많은 색 층이 쌓이고 제거되고 다시 쌓여 드러난 색이므로 단색이라기 보다는 다색이라고 해야 옳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색 층의 두께를 파악했던 일본인 미술평론가 이누이 요시아키는 “백색으로 덮인 정상화의 화면은 엄숙하고 정결하며 금욕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차갑게 빛나는 백은 아니다. 어느 쪽이냐 하면 빛을 흡수하는 듯 가라앉은 상태의 무광택적인 백색이며 더구나 화면의 내부로부터 빛나고 있는 것 같은 향기 짙은 정감과 확고한 존재감을 갖추고 있다.”(이누이 요시아키, 「정상화의 백의 세계」, 1983. ギャラリー上田 개인전 서문)며 정상화 작품의 빛에 주목하였다.
미술사학자 강태희 역시 ‘빛’에 주목하여 “격자를 기본으로 한 제한된 팔렛트의 화면이기에 그의 작업들은 모두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실은 어느 작품도 유사하지 않으며 모노크롬이라는 말 역시 정확한 지칭이 아니다 …. 백색, 청색, 청회색, 흑색, 적색 등 다양한 색채로 이루어진 정상화의 작품에서 궁극적으로 주목할 것은 화면에서 발하는 빛의 성격이다. 이들은 예를 들어 마크 로스코의 그것처럼 선명하거나 화려한 공명의 빛과는 달리 절제되고 은근하며 침잠된 파장들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자명하지는 않지만 필연코 현시(顯示)되는 종류의 것으로 어떤 것은 가볍고 또 어떤 것은 장중하며, 어느 부분은 광채로 빛나고 또 다른 부분은 짙은 어둠을 닮는다.”고 하였다.(강태희, 사건 지평선에서, 「정상화의 빛과 어둠」, 『정상화 개인전』 서문, 2014, 갤러리 현대)
미술평론가 오광수는 “폰타나는 예리한 칼날로 화면을 그어 이쪽과 저쪽을 뚫음으로서 하나의 과도적 공간개념을 형성하고 있지만, 정상화씨의 경우, 화면 고유의 표면성을 일층 확인함으로써 안으로 열리는 과도적 공간개념에 도달하고 있다.”고 보아 서구의 모노크롬 작가들과 정상화 작업의 차별성을 지적한 바 있다.(오광수, 「정상화, 또는 하나의 투명한 구조」, 『정상화 개인전』, 1983, 현대화랑, pp.7-8) 정상화에게 격자와 평면성은 현대성과 같은 이름이었으며 들어내고 메우기는 다분히 과정적 작업이었다. 정상화가 본인 작품의 표면을 프로타주 하는 이유도 "전체적인 선의 흐름, 면의 높낮이, 공간의 흐름을 확인하기 위한 것"인 동시에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그림”, 즉 프로세스 아트로서의 측면에 스스로 매료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프랑스 생테티엔느 시립현대미술관(the Musée d’art moderne et contemporain de Saint-- Étienne Métropole)관장 로랑 헤기(Lóránd Hegyi), 미술평론가 필핍 피게(Philippe Piguet)와 같은 서구의 학자들은 정상화 작업의 지난한 과정과 노동의 측면에 주목했다. 물감을 발라 말리고 들어내고 메우는 과정이 수개월에서 1년까지 반복되는 사이에 화면에는 선과 면, 색감이 탄생하며, 그 속에 작가의 땀과 혼, 시간, 나아가 역사가 축적되기 때문인 것이다. 칠하고 벗겨내는 행위를 반복하는 단순함은 엄격한 규칙성에 의해 뒷받침되어 있고 화면이 섬세하게 분할되어 무한한 집적을 이룬다. 언뜻 보기에 단색화는 단조롭고 변화 없는 동일한 화면이 반복 재생산되는 것처럼 보이기 쉽다. 그러나 정상화의 단색화는 숱한 실험을 거치고 마치 수행자처럼 고도의 집중력을 쏟은 노동의 결과물이며, 조밀한 구조와 견고하고 강인한 표면질은 그러한 노동의 과정에서 배태되어 구축된 것이다. 이에 필핍 피게는 “단색화는 찬찬히 살펴볼수록 그 어떤 장르보다 화면 위의 변화가 무쌍하다. 수많은 이야기가 녹아들어 작품과의 숱한 대화, 교감이 가능한 것” 이라고 하였다.(필립 피게, 「정상화, 완고한 엄격성(ostinato rigore)」, 『PROCESS』, Hakgojae Gallery, 2007.)
Ⅳ기: Perspective의 확장 (1992 ~ 현재)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완전히 귀국한 1992년, 그리고 1996년 경기도 여주의 산 속에 작업실을 신축하고 정착한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에 해당한다. 2010년대에 접어들어 단색화에 대한 국내외 미술계에서의 평가가 높아지면서 개인전 및 단체전 활동이 활발해졌고 이에 따라 로랑 헤기(Lóránd Hegyi, 전 생테티엔느 미술관Musée d'art moderne Saint-Etienne Métropole 관장, 미술평론가), 필립 피게(Philippe Piguet, 프랑스, 미술평론가, 전시기획자) 등 서구의 평론가와 학자들의 밀도 높은 에세이들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주로 한국과 일본의 평자들에 의해 논의되던 차원에서 서구 미술이론가들의 연구가 보태져 국제적인 동시에 보편적인 관점으로의 분석과 평가가 이루어진 것이다.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귀국한 이후 주거 지역과 작업의 환경이 달라지고, 작업에 사용하는 아크릴릭 물감을 비롯한 재료들이 달라진 때문인지 이전에 비해서 작품의 표면에 광택이 난다든지 Black, White 외에도 Blue, Brown 색조의 작품들이 다수 제작되는 등 변화가 일어났다. 유난히 Blue 작품이 많이 제작된 것은 작가가 Blue를 선호했기 때문이기 보다 작품 구매자들의 취향이 반영된 결과인데, 그만큼 작품 매매가 활발해졌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현재까지도 정상화 작가는 작업 준비와 제작을 조수의 도움 없이 스스로 처리한다. 정신과 육체의 몰입을 요하는 작업방식은 강인한 체력이 요구되기 마련인데, 2007년 대장암 수술 후 닥친 체력적 한계는 작품의 변화를 일으킨 요인이 되었다. ‘들어내고 메우기’ 반복 작업의 회수가 단축됨으로써 표면의 밀도가 다소 성글어진 것에서 두드러진 변화의 표징을 발견하게 된다. 가로, 세로, 사선이 그물망처럼 밀도 높은 패턴을 형성하던 이전의 양식에 비해서 2000년대에 접어들어 수직 수평의 굴곡과 높낮이가 비교적 느슨해진 것이다. 카올린(Kaolin, 고령토)을 다 들어내지 않고 남기는 1970년대 양식이 재등장하는가 하면 Grid와 Grid 사이의 Canvas 공간이 촘촘하게 메워지지 않고 바탕이 드러나기도 한다. 2011년 생떼띠엔느 미술관 개인전 이후 백색 작품의 비중이 커지기 시작해서 2013년 이후에는 거의 백색 단색화 작업만을 하게 되었는데, 일체의 모든 인간과 사회와의 관계를 단절한 채 제작에 매진하고 작업의 본질에 천착하면서 자연스럽게 귀결된 장면일 것이다.
깊숙한 곳에서부터 형성된 단색의 표면, 그 표면이 형성되는 과정으로서의 시간의 장소에는 서정적 감성조차 비워져 버린 듯하다. 오로지 한 길만을 달려온 자의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빛을 발산하는 견고하고 강인한 ‘빈’ 표면이 되어가는 것이다. 작가가 평생 화두로 삼고 추구했던 ‘단순화’와 ‘평면화’에 도달한 궁극의 경지로 "단순화해야 본질을 정확히 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초심으로의 귀속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상화는 여전히 "단색화는 폭발하는 것" 이라는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꿰뚫어서 실도 나오고 뭐도 나오고 할 때까지, 끝까지 파는 정신. 그것이 바로 단색화”라고 단언하는 그에게 예술이란 결코 중도에서 포기하지 않는, 그치지 않는 열정이자 탐구의 다른 이름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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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서문>
정상화 디지털 아카이빙 연구는 전수조사를 바탕으로 전작을 목록화하여 정상화 작가 연구의 토대를 갖추고자 하였다. 현재 정상화는 한국 단색화의 대표 작가로 국내외 화단의 주목을 받고 있지만, 작가 연구는 오랜 해외 활동으로 인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그에 따라 해외에서의 활동을 포함한 국내외 전시 자료 수합과 정리를 통해 정상화의 전시 기록과 작품 목록을 시기별로 정리하여 작가 연구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기존에 간행물로 정상화의 작품을 집대성한 도록은 1989년 갤러리 현대 정상화 개인전 도록이다. 이 도록에는 당시 잘 알려지지 않았던 5~60년대의 초기 앵포르멜 시절 작품과 70년대 일본 고베 절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어 정상화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집 역학을 하고 있다. 이후 2009년에 작품 250여 점을 수록한 『 CHUNG SANG_HWA PAINTING ARCHEOLOGY 』가 연미술에서 발간되어 정상화의 작품세계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2011년 프랑스 생떼띠엔 미술관(Musée SAINT-ETIENNE METROPOLE)의 정상화 개인전 도록은 2009년 이후 제작된 작품과 기관소장품을 수록하여 최신 자료를 파악할 수 있는 주요 자료가 되었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1989년 갤러리 현대 개인전 도록에는 작품 이미지의 좌우/상하 위치가 잘못 들어가 있고, 유사 작품 이미지를 혼동하여 작품 명제가 서로 바뀌어 표기되는 등 적지 않은 오류가 발견되었다. 연미술에서 출간한 『CHUNG SANG HWA PAINTING ARCHEOLOGY』(2009)와 2011년 생떼띠엔 미술관(Musée SAINT-ETIENNE METROPOLE) 개인전 도록의 경우는 수록된 모든 작품의 명제를
정상화 디지털 아카이빙 연구팀에서는 작품과 자료의 크로스 체킹을 통해서 정상화 작가의 작품을 집대성한 도록에 수많은 오류가 있고, 여러 도록이나 기록들이 위의 도록들을 참조하게 되면서 상당한 혼란을 야기시킨다는 점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에 작품 하나하나의 명제, 제작연도, 제작 기법에 관한 기록을 일일이 대조 확인하고 작가가 기술한 정확한 명제와 도판을 찾아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정상화 작가의 경우 대체로 작품 뒷면에 작품명과 제작연도를 기록하는 습관을 갖고 있으므로 작품의 실견을 통해서 일일이 확인한다면 앞에서 기술한 문제점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천여 점에 달하는 작품을 일일이 확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개인 소장가의 작품일 경우 소장자 파악 자체가 어려웠다.
이러한 현실적 제약 하에서, 그리고 주어진 짧은 시간 동안 본 연구팀은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부정확한 기록의 오류들을 찾아 수정하고 새로운 자료들을 다수 발굴, 수집하여 보완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찾아내지 못한 해외 개인전 도록을 비롯하여 발견하지 못한 자료들이 남아있어 지속적인 자료 발굴이 요구되며, 그에 따라 오류가 수정되어야 할 것임을 밝힌다.
1) 작품 분류와 순서
1. 작품은 시대 순으로 배열한다.
2. 장르 분류: 캔버스 작업과 프로타쥬, 데콜라주, 콜라주, 드로잉, 목판화, 목판으로 구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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