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화가’, ‘화가들의 화가’로 잘 알려진 김홍주는 작품활동을 시작한 197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현대미술의 큰 흐름 속에서 어떠한 시류에도 속하지 않고 자신만의 고유한 회화 세계를 구축해 온 화가이다. 1945년 충청북도 보은에서 출생하여 1969년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981년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81년부터 2010년까지 목원대학교 미술교육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여러 차례의 개인전과 다수의 기획전에 출품했다. 1978년 한국일보사 주최 한국미술대상전에서 최우수 프론티어상을 수상했고, 1980년 프랑스 카뉴 국제회화제에서 특별상을 받았다. 1988년에는 서울미술관이 주관하는 ‘1987년의 문제작가’로 선정되었으며, 1991년에는 토탈미술대상전에서 토탈미술관장상을 수상했다. 이후 2005년 이인성미술상 (대구광역시), 2006년 파라다이스상 (파라다이스재단), 2010년 이중섭미술상(조선일보사)등을 수상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대구미술관, 경기도미술관, 삼성미술관, 후쿠오카 시립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김홍주는 1973년 ST 그룹에 가입하면서부터 작품활동을 시작했는데, 초기에는 당대 전위적 경향을 따라가는 개념적 오브제 작업을 시도했으나 1975년 즈음부터 실물 오브제와 그려진 이미지를 결합한 회화 작품을 발표하면서 이른바 극사실주의 경향의 작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78년에 첫 개인전을 개최했고 1980년대 중반부터 오브제와 이미지의 결합 형식에서 벗어나 인물이나 풍경 등을 주요 소재로 하여 밀도감 높은 독특한 이미지를 창출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후반 사이에는 흙덩이나 지형, 건축물, 글자, 배설물 등의 이미지가 하나의 단위 요소가 되고 이들 단위 요소들이 모여 전체적인 화면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중층적 이미지를 형성하면서 여러 가지 조형적 실험이 시도되었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는 커다란 화폭에 클로즈업된 꽃 한 송이 등의 형상을 세밀한 붓 터치의 집적으로 채워 도상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촉각적 감각을 극대화한 회화를 제작했다. 2000년대 이후로는 특유의 세필 기법을 심화시켜 나갔고, 2010년대부터는 털 몇 개로 이루어진 동양화용 세필이 캔버스 천 표면의 올 하나하나에 부딪힐 때 느껴지는 감각에 집중하면서 그림을 그릴 때 몸으로 느껴지는 접촉 감각을 표현하고자 하는 촉지적 회화 작업으로 나아가고 있다.
1945 / 충청북도 보은 출생
1969 / 홍익대학교 서양화과 졸업
1981 / 홍익대학교 대학원 서양화 전공 졸업
1981-2010 / 목원대학교 미술교육과 교수
주요 개인전
1978 / 서울화랑
1983 / 그로리치화랑, 청탑화랑
1987 / 윤갤러리
1989, 1991, 1993, 1996 / 수화랑
1997 / 금호미술관
1999, 2002 / 국제갤러리
2005 / 로댕갤러리
2006 / 대구문화예술회관
2009 / 아르코미술관
2010 / 국제갤러리, 조선일보미술관
2015 / 국제갤러리
2016 / 갤러리 2 중선농원
2019 / 도쿄화랑
주요 단체전
1973-1977 / S.T. 그룹전
1978 / 한국미술대상전 (한국일보사 주최, 국립현대미술관)
1980 / 카뉴 국제회화제 (프랑스 카뉴 슈메르 미술관)
1983 / 한국현대미술전: 70년대 후반, 하나의 양상 (동경도미술관 등 일본 순회 전시)
1984 / 한국현대미술 70년대의 조류 (대만 타이페이 시립미술관)
1985 / 아시아미술전 (일본 후쿠오카 시립미술관)
1987 / 문제작가 작품전 (서울미술관)
1991 / 한국현대미술전 (유고슬라비아 자그레브 국립중앙박물관)
1993 / 태평양을 건너서 (뉴욕 퀸즈미술관, 한국 금호미술관)
1994 / 윤형재, 김홍주 2인전 (독일 만하임 갤러리 밤베르거)
1995 / 한국미술 ’95 질·량·감 (국립현대미술관)
1996 / 90년대의 한국미술로부터-등신대의 이야기 (일본 도쿄국립근대미술관, 오사카국립미술관)
1996 / 아시아 태평양 트리엔날레 (호주 퀸즈랜드 아트 갤러리)
1997 / 한국현대미술 해외전: 전통으로부터 새로운 형태로 (미국 하트포드 대학 조셀로프 갤러리)
2001 / 전환과 역동의 시대 (국립현대미술관)
2001 / 사실과 환영: 극사실 회화의 세계 (호암미술관)
2003 / 사계의 노래: 8인의 한국 작가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미술관)
2003 / 플라워 파워 (프랑스 릴 현대미술관)
2004 / 오피시나 아시아 (이탈리아 볼로냐 근대미술관 외)
2007 / 한국미술-여백의 발견 (삼성미술관 리움)
2008 / Natura: 김홍주 정광호 2인전 (가나아트센터)
2008 / 한국미술에서의 모더니티와 그 너머 (싱가포르 미술관)
2009 /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대전시립미술관)
2010 / 달은 가장 오래된 시계다 (불가리아 소피아 국립국제미술관)
2011 / 텔미텔미: 한국-호주 현대미술 1976-2011 (국립현대미술관, 시드니 현대미술관)
2012 / 여기 사람이 있다 (대전시립미술관)
2013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개관 특별전: 자이트가이스트 (국립현대미술관)
2016 / 자연, 그 안에 있다 (뮤지엄 산)
2018 / 제5회 신몽롱주의 (중국 베이징 칭화대학 미술학원 학원미술관)
2019 / 광장: 미술과 사회 1900-2019 (국립현대미술관)
2020 / 토끼 방향 오브젝트 (아트 플랜트 아시아)
수상
1978 / 한국미술대상전 최우수 프론티어 상 (한국일보사)
1980 / 카뉴국제회화제 특별상 (프랑스 카뉴 슈메르 미술관)
2005 / 이인성 미술상 (대구광역시)
2006 / 파라다이스 상 (파라다이스 재단)
2010 / 이중섭 미술상 (조선일보사)
주요소장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대구미술관, 경기도미술관, 삼성미술관, 후쿠오카 시립미술관 등.
김홍주의 회화 그리고 반회화(anti-painting)
: 다층적 시선, 이미지의 배반
김홍주의 작업 세계는 시기별로 한국화단의 궤적과 함께 발전하기도 하지만, 1990년대 이후부터는 한국미술의 주류와 그 결을 달리하면서 독자적인 변화를 이루어 왔다. 이는 1990년대 이후의 미술계의 변화가 탈장르화, 포스트모더니즘 등으로 다양화된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보자면 김홍주의 회화는 회화 내부에서 한국 모더니즘 회화의 흐름과 전통적 시각을 비평하는 회화적 시선에 집중하고 있다. 그는 초기에는 한국의 실험미술에 동참함으로써 ST 운동에 참여하였고, 개념미술의 흐름과 탈오브제화에 대한 실험을 시도하였으나 점차 ST를 비롯해 1970년대 탈회화적 미술운동과는 거리를 두게 되었다.【주석1】 김홍주의 실험미술 시기는 이건용처럼 일관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개념미술의 시각에서 모더니즘 회화 자체에 대한 공격과 비판을 중점적으로 다루던 ST 운동을 통해 김홍주는 스스로 구축하고자 하는 회화론을 이 시기에 비평적으로 고민하게 되었고, 이 시선은 그의 회화적 세계에 일관성 있게 나타나고 있다. 그는 한국적 모더니즘으로 불리는 단색화의 흐름과도 거리를 두고 회화의 내부에서 회화를 새롭게 바라보려는 시각에 몰두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작가로서 집단적 대서사에 참여하기보다는 자신만의 뚜렷한 회화적 세계관을 구축해 나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김홍주의 작업은 시기별로 보면 한국현대미술의 궤적과 결을 같이 하는 유사성을 띠기도 하는데 본 글은 김홍주의 작업을 한국미술의 대서사와 작가의 작업적 특징을 서로 횡단하면서 주요 시기를 살펴보고 특정 시기의 작품들을 분석하는데 그 목적을 둔다.
사실, 1970년대 이후 한국의 모더니즘 비평은, 한 축에서는 단색화를 축으로 한 모더니즘 회화론과 다른 축에서는 (특히 1980년대) 민중미술을 주축으로 한 회화 비평으로 나눠져 있다. 이러한 비평은 서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회화적 균열인데, 우리가 민중미술의 흐름을 한국적 리얼리즘으로 규정해본다면 모더니즘 회화론과 리얼리즘 회화론을 대척점으로 본다는 것은 사실상 서구적 비평론에서는 성립이 되지 않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김홍주는 한국의 모더니즘 비평과 민중미술 비평의 경계에 있는 것 같으면서도, 모더니즘과 민중미술의 리얼리즘에서 볼 수 있는 주변부적인 성격을 동시에 반영하고 있는, 한마디로 특이성을 지니는 작가이다. 서구의 모더니즘이 리얼리즘에서 출발하여 추상미술의 환원성이라는 특징으로 그 궤적을 보여주었다면, 한국의 모더니즘 회화와 민중미술을 하나의 영역 안에 묶여지기 보다는 서로 공존했던 (그리고 상충했던) 회화적 맥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홍주의 회화는 모더니즘 내부의 균열과 다층성을 화면 위에서 밝혀냄으로써, 한국미술의 흐름에서 반모더니즘적 시각을 구현했다.
1970년대의 실험미술을 거쳐 김홍주는 1970년대 중반이 되면 형상 회화를 그리게 되는데, 국내에서 하이퍼리얼리즘, 신형상으로 불리는 미술운동이 젊은 미술가들 사이에 나오게 된 시점과 비슷하다. 사실, 이 시기 김홍주의 그림은 외형적으로는 사실적으로 보이기는 하나, 카메라로 포착한 하이퍼리얼한 세계에 탐닉한 미국 미술가들의 시선과는 상이하다. 1970년대 초반 그가 제작한 사선의 패턴을 반복적으로 보여주었던 추상회화와는 달리,【주석2】1970년대 중반이 되면 문, 거울 등 일상적 오브제를 이용하면서 자화상과 초상 등의 형상이 구체적 기물 안으로 들어오는 변화를 보여준다. 이러한 1970년대 초기 작업이 지니는 중요성은 그가 전후 한국 회화에 대한 비평적 질문을 던지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김홍주의 작업은 1980년대 이후 등장하는 풍경화, 문자 그림, 꽃 그림, 비정형적 회화 등 다양한 양상으로 변화하지만, 그의 작업 속에는 ‘회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이 내재하고 있으며, 가장 중요한 점은 언어 이전의, 형상이 구체적 이미지로 보이기 이전의 상징언어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흡사 자크 라캉이 말했던 상상계 안에서 작동하는 기호, 문자 이전의 작동으로 김홍주의 작업에서 일관적으로 보이는 작업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인해서 김홍주의 회화적 시선은 언어로 고착화되거나, 주제로 묶여 버리거나, 정형화된 이미지로 반복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그가 최근에 보여준 비정형 회화는 이미지의 균열을 일으키는 방법론으로, 화면을 두껍게 채워나가는 회화의 세계가 아니라 세필화로 최대한 투명하고 얇게 표면을 수양을 하듯 일구어 나간 것이다.
이 글은 김홍주의 작업 전체를 연대기적으로 짚어보고 각 시기별로 어떤 회화적 특징을 구성하고 있는지, 각 시기별로 작가의 회회적, 비평적 관심사가 어떻게 새로운 전환을 제안하는지 살펴볼 것이다. 또한 각 시기별로 비평적 맥락과 비평가들의 논평도 살펴볼 것인데, 이는 선행 연구와 전시 도록, 아카이브 자료, 작가 및 비평가들, 주변 작가들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 분석할 것이다. 동시대 미술에서는 작가들이 스튜디오 운영을 통해 어시스턴트의 도움을 많이 받는 추세이나, 김홍주의 세필화는 작가 스스로 그려내는 마이크로픽한 흔적이다. 이러한 세필화의 특징 이외에 김홍주의 작업들을 단계별로 보면 상당히 상이한 변화와 흐름 등이 공존하는 것처럼 보이나, 이 글은 각기 다른 변화의 양상들을 회화를 바라보는 작가의 분열된, 다양한 시선의 교차점으로 파악하며, 김홍주의 회화적 세계에 있는 한국의 모더니즘 회화에 대한 작가의 비평(판)적 시선을 찾아내려고 한다.
I. 1970년대 초반 실험미술과 ST 운동
김홍주는 1969년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하였다.【주석3】 당시 학교에서 그는 지금의 교과과정이나 수업과는 달리, 3학년과 4학년이 한 방에 모여서 자유롭게 모델링을 하거나 작품을 제작했다고 한다. 정해진 수업을 학생들이 수강하는 오늘날의 교과과정과 달리, 학생들이 가르칠 선생을 선택하면서 추상화를 하기도 했다. 1967년 12월 《한국청년작가연립전》이 개최되었을 때 김홍주는 대학생으로서 선배들의 실험미술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으며, 반국전파 출신으로 활동하는 선생님들이 많았기 때문에, ‘연립전’의 전시 내용이나 경향에 대해서는 익히 들은 바가 많았다고 한다. 홍익대 미대에서는 당시 이론가로서는 프랑스에서 갓 귀국했던 이일이 현대미술의 해외 동향을 많이 가르쳤기 때문에, 이 시기 김홍주는 다른 청년 작가들처럼 무동인과 신전동인 등이 지향했던 탈회화, 네오다다적인 경향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1970년대 초반 김홍주의 회화는 추상화로 사선이 반복적으로 지층을 이루는 모노크롬적 회화를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동료들이 ST 그룹을 결성하고 스터디를 함께 한다는 소식에, 서울로 오면서부터는 ST 멤버들을 중심으로 읽어내려간 조셉 코수스(Joseph Kosuth)의 ‘철학 이후의 예술(Art after Philosophy)’을 읽거나 이우환의 만남의 현상학 서설, 해롤드 로젠버그(Harold Rosenberg) 등을 읽고 토론에 임하기도 했다.【주석4】 ST(Space and Time) 자체가 결성된 것은 1969년 12월 이대 입구에 위치했던 동양미술학원을 중심으로, 이론가로는 김복영, 작가로는 이건용이 중심이 되었던 그룹이었다. 김홍주가 ST 그룹에 공식적으로 참여한 것은 1973년으로 이 시기부터 2-3년 동안 김홍주는 국내에서 태동했던 다양한 매체적 실험과 반오브제, 반회화적 경향, 개념미술 경향에 눈뜨기 시작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1969년 한국아방가르드협회가 결성되면서 이미 네 번의 AG 저널을 출간하였고, 세 번에 걸쳐 AG 기획의 실험전시가 개최되었기 때문에, 김홍주도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특히, AG는 비평가 이일이 ‘확장과 환원의 역학’이라는 글을 선언문으로 채택하며 이일, 김인환, 오광수와 함께 새로운 미술을 태동시키고 있었고, 작가로는 김구림, 하종현, 최명영, 심문섭 등이 참여하였다.【주석5】 청년 작가들은 여러 그룹에 동시에 가담하여 탈평면 실험을 거쳤기 때문에, 이 시기 작가로서 김홍주의 궤적은 한국현대미술의 흐름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하지만 ST 자체가 가지고 있는 개념미술의 성향, 오브제의 탈피에 대한 집착 등은 김홍주의 작가적 신념과 상이해 보인다. ST는 전시를 통해 이건용의 이벤트, 신체를 바탕으로 한 드로잉, 언어와 신체의 관계에 집중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 등에 깊숙이 관여하였지만, 김홍주는 이러한 탈오브제를 통해 궁극적으로 개념미술이 도달하는 반미술적 활동에 한계를 느낀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김홍주는 1973년 명동화랑에서 개최된 제2회 ST 그룹전에서는 <돌과 파랑>을 출품했고, 1974년 제3회 ST 그룹전에는 <확장>이라는 조각적 설치작업을 제작했는데, 전시장의 전면에서 보면, 회화적 평면성을 보여주지만, 관객이 옆으로 이동해서 이 작품을 보면 부조로 보인다. <확장>은 단 1회로 끝나버렸던 제1회 서울비엔날레전에도 설치된 바 있다. 1970년 다니엘 뷔렝이 실험했던 <회화/조각> 시튜 작업처럼, 김홍주의 <확장>은 전시 공간에서 특정적으로 전시되다가 이후 없애 버린 것으로 보이지만, 이 작업은 관람자의 몸과 오브제의 관계를 고정시키지 않고 유동적인 관계를 설정했다는 점에서, 사실 오브제 자체보다는 현대미술의 개념적 전환, 한국미술의 개념적 전환 면에서는 중요한 오브제로 여겨진다. 모더니즘의 회화가 타블로의 독립된 존재로서 어디든 이동이 가능한 비장소성을 보여준다면, 이 시기 김홍주의 개념 작업들은 오브제에 대한 유희적 사유에 가깝다. 천에 먹물을 들인 <확장>은 현재는 소실되었지만, 각기 크기가 다른 오브제가 반복적으로 설치되었으며, 회화도 조각도 아닌 모호한 매체로 실험 제작된 작품이었다. 확장이라는 이름 자체는 첫 AG 전시회 도록에 기술되었던 이일의 “확장”에서 가져온 제목이다. 이 작업은 제1회 서울현대미술제에서 전시되기도 했다.【주석6】
ST 그룹에서 신체와 퍼포먼스는 개념미술과 함께 중요한 매체로 여겨졌다. 신체는 주변의 환경과 미술 오브제를 매개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여기에 행위성을 더한 퍼포먼스는 이건용이나 성능경 등의 작업에서처럼 우연적이고 선언적이며, 주체로서의 미술가와 객체로서의 관람객의 고정적 관계에 이의를 제기하는 듯하다. 이 시기 김홍주는 이벤트적 퍼포먼스를 위해 <제1회 김홍주 개인전>이라는 퍼포먼스를 시도했다. 실제로 김홍주의 개인전은 1978년에 시작한 것으로 기록되기 때문에, 1975년 전시 포스터는 정확한 장소를 기록하지 않은 채 ‘북위 37도 35분, 동경 126도 55분’으로 기록함으로써, 허구에 기반한 전시를 퍼포먼스의 형식으로 시도한 것이다. 유사허구적 세계를 다룬 오늘날의 작품으로 보일 정도로, 김홍주의 픽션으로서의 전시는 하나의 이벤트로 남겨진 것이지만, 개념미술과 퍼포먼스의 교차점에서 김홍주의 유희적 퍼포먼스는 개념미술적 퍼포먼스였고, 또 한편으로는 개념미술의 허구적 선언처럼 진짜를 가장한 이벤트였다. 여기에 그는 실제로 개인전을 하듯이 양복을 말쑥하게 입고 있다.
윤진섭의 회고에 의하면, 1977년 《앙데팡당》 전에서 김홍주는 ST 멤버들과 함께 토론을 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김홍주는 개념미술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현하였다고 한다. 김홍주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아트 오브제를 부정하면서 소위 말하는 언어 게임 같은 개념미술에 대해서 굉장히 안 좋다고 생각했고. 물론 서양미술에서는 중요했겠죠. 한국, 그 당시 70년대 상황을 보면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 굉장히 힘들었고. 또, 한국 상황에서도 별로 그게 의미가 없어 보였고... 그 당시 내가 알기론 현대미술에 굉장히 부정적인 시각을 많이 들었거든요. 현대미술은 끝났다. 회화는 물론이고. 그런데 반대로 회화는 끝났지만, 내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은 그림 그리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쪽으로 시작한 거예요.【주석7】
김홍주의 이러한 설명은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해 보인다. 첫째 ST가 주장했던 오브제의 전복과 개념미술, 이벤트, 신체성을 바탕으로 한 퍼포먼스에 대한 실험이 한국의 현대미술의 맥락 안에서 제대로 발현할 수 없다는 비판의식이 깔려있다. 둘째, 위의 설명은 개념미술을 옹호함으로써 오브제를 탈피하려는 ST의 반미학적 태도로 인해서 미술의 오브제 자체가 부정된다는 점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전후 회화 자체가 제대로 실험되지 않은 한국의 화단에서. 회화 자체를 포기하기보다는 모더니즘 회화를 내부에서 비판하는, 반모더니즘적 경향을 시도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회화를 공부한 그가 1970년대 대두되었던 앙데팡당과 에꼴 드 서울을 위주로 활동한 단색화 작가들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김홍주 식의 회화를 전개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홍주의 성향상 무엇인가를 강하게 비판하기 보다는, 회화 내부에서 조용히 회화를 겨누는 반회화적 실험 운동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또 한 가지의 흥미로운 사실은, 김홍주는 스스로 개념미술 자체에 저항하고 자신의 미술이 개념미술과 연관되는 부분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지만, 그의 회화적 시각과 화론은 개념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통적 타블로의 시선을 부정하고 이를 해체하고 분열시키는 작가적 태도 자체가 개념미술에 바탕을 둔, 반모더니즘의 이탈적 시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II. 1970년대 중반 형상회화: 파레르곤으로서의 회화
1975년 허구적 개인전 퍼포먼스 이후, 김홍주는 개념주의와 회화의 관계를 다시 고민하게 된다. 그는 다시 추상미술로 복귀할 수도,【주석8】 그렇다고 해서 아카데믹 풍의 보수적인 국전 화풍으로도 돌아갈 수 없었고, ST의 실험미술에 동참하면서 느꼈던 미학적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다시 회화적 스크린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는 “회화적 프레임, 스크린”은 회화 자체의 존재론적 구축물로, 서구의 회화는 회화적 프레임 안에서, 회화적 스크린의 표면에 갇혀있는 부분을 넘어섬으로써, 모더니즘적 회화를 해체하려는 시각이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이론적 이의 제기 부분은 그가 개념미술에 노출되지 않았다면 사실 이러한 문제의식이 만들어질 수 없었다는 점에서, 초기 실험운동은 그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많은 개념미술 작품을 제작하지는 않았으나, 회화에 대한 비판적 시각의 토대가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김홍주는 이러한 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서양미술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프레임과 스크린, 화면이다, 회화라고 하면, 나는 그것 비켜 가고 싶은 거죠. 그래서 이미지하고 실제 사물하고 결합해서 그림 밖으로 같이 연결하는 생각을 [가졌었죠].”
김홍주는 이 시기에 거울 혹은 창문의 틀에 회화 화면을 결합함으로써, 일루전을 실험하면서 동시에 일루전을 깨뜨리는 틀을 이용해 프레임을 탈피하는 반회화적 실험을 거친다. <경대>(1976, 51×48×24 cm, 천에 유채와 오브제, 국립현대미술관 소장)를 비롯해 거울 프레임 속에 있는 이미지는 실제 오브제의 프레임 안에서, 이미지의 존재와 실제 사물성을 서로 병치시킨다. 이미지는 사물성의 존재 안에서 이미지임을 감추지 않는다. 사물성을 숨기지 않는 프레임은 이미지의 환영적 일루전을 위장하지 않는다. 당시 그는 캔버스 천 등에 인물이나 사물의 형상을 주로 그려서 창문과 거울 프레임에 부착해 재현과 탈재현의 이중적 시선을 병치시키는 방식을 보여주었다. 어떤 경우에는 문짝의 패널 위에 파리와 같은 곤충이나 가오리 등을 직접 그려 넣어 이미지는 가짜와 진짜 이미지의 병치가 이뤄지기도 한다. 예를 들면, <木-I>(1975, 나무 걸상에 유채, 소재불명), 제5회 ST 그룹전에 출품한 <무제>(1975, 125.5×59 cm, 실물 나무 문짝에 유채, 작가소장)를 비롯해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무제>에는 자동차의 사이드미러 안에 파리 한 마리가 그려져 있거나 사람의 왼쪽 눈을 크고 자세하게 그려 넣은 작품들을 들 수 있다.【주석9】 이 시기부터 그의 작품들은 주로 <무제>로서 지칭되며, 소위 신형상, 하이퍼리얼리즘 경향이라 부르는 작품들이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 1978년 《한국미술대상전》에 출품한 <문>과 같은 부류의 사실적 오브제 작업들은, 1978년 그의 첫 개인전(서울화랑)에서 선보였다. 특히, 작가의 가족 초상이나, 자화상 사진도 사실적 이미지의 중요한 참조물이 되는데, 특히 1977년 둥근 사진 틀 안에 그려진 작가의 초상은 사진 이미지를 꼴라주한 이미지처럼 세 번 반복해서 표현하는데, 정체성의 분열처럼 이미지는 고정된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게 된다. 초상화가 닮음에 바탕을 둔 사실적 재현이라면, 창틀로 분절된 공간 안에 놓인 <문>(1978, 146×64 cm (2EA), 천에 유채와 오브제, 국립현대미술관 소장)과 먼 곳을 주시하는 자화상 <무제>(1979, 80×55 cm, 천에 유채와 오브제, 개인소장)는 이러한 재현을 방해하는 문틀, 프레임, 이미지의 왜곡이 등장한다. 특히, 포토꼴라주와 같이 자화상의 사진을 분절적으로 그린 <무제>(1977, 55×35×15 cm, 천에 유채와 오브제, 소재불명)는 시선의 왜곡과 분열을 강조하므로 우리가 익숙한 이미지를 전혀 새롭게 경험할 수 있는 감각성을 부여하고 있다.
김홍주는 이 시기의 작품들을 협소한 작업 공간의 결과물이라고 설명하기도 하지만,【주석11】 ST 시기에 느꼈던 오브제의 소멸이나 상실에 대항에 그가 회화 내에서, 서구가 제시하는 동시대 미술의 흐름이 아니라, 한국 현대미술계에서 그가 모색하는 회화적 질문을 던지는 과정에서 도달한 첫 해답으로 보인다. 이후 펼쳐지는 김홍주의 작업 전개 과정들은, 구체적 형상을 보여주기도 하고, 때로는 추상으로, 때로는 문자 그림으로, 비정형으로 바뀌기도 하지만, 이러한 과정들은 모두 그가 1970년대 문제시했던 모더니즘 회화의 존재론에 반하는, 작가적 여정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상이해 보이는 그의 작업들은 이러한 비평적 태도를 통해 일관적으로 수렴된다고 할 수 있다.
사실적으로 그린 이미지들은 당시 한국에서 대두되기 시작한 신형상 회화의 작품들과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유사해 보이는 특징이 있다. 이는 카메라에 의존했던 서구의 하이퍼리얼리즘과 달리, 1970년대 중후반부터 산업화, 도시화의 그늘에서 단색화를 벗어나 형상으로 돌아왔던 젊은 작가들, 예를 들면 고영훈, 김강용 등의 형상 작업에서 엿볼 수 있는 특징이다.【주석12】 리얼하게 표현되었다는 점에서 김홍주의 작업은 한국의 하이퍼리얼한 작품으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김홍주 작업 자체의 흐름에서 보면 그는 형상이나 이미지의 복권보다는, 오히려 반대로 거울과 틀, 문짝 등과 같은 오브제들을 통해 이미지의 경계를 그림의 표면, 즉 스크린의 안팎에서 형상과 일루전의 한계를 드러나게 함으로써, 회화의 한계와 경계, 확장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주석13】 자크 데리다에 의하면 “작품의 밖에 있는 부록”, 프레임 밖으로도 파악할 수 있는, 파레르곤은 이 시기 김홍주의 회화가 가지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유사하게 그림의 안과 밖이라는 경계를 서로 보게 함으로써, 모던 회화를 드러내는 반회화적 선택의 결과로 보인다. 이러한 작업들은 아나모포시스(anamorphosis)처럼 일그러지거나 이미지가 압축된 형상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이는 세필로 그려나가면서 일그러지는 형상을 감추지 않고 그것을 더욱 드러내는 결과 나타난 표현적 특징이기도 하다.【주석14】 이러한 작업의 특징을 보여주는 예로는, 김홍주의 <무제>(1970년대 후반, 패널에 유채)를 비롯해 1970년대 후반 종이에 수채로 제작한 다수의 작품 등이 있다.
III. 세필화의 다양한 실험: 1980년대-1990년대 중반
김홍주는 1981년 목원대학교 교수로 부임하면서 이전의 작업실과 달리, 넓은 공간에서 대형 작업을 제작할 수 있는 물리적 상황이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환경의 변화는 이전의 오브제 작업에서 탈피해 회화 자체가 가진 ‘화면 공간’ 내에서의 실험으로 전환하게 했다.【주석15】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무제>(1985-1987, 236×460 cm, 캔버스에 유채)는 잔디를 배경으로 해 인물들이 누워있거나 서 있는 전원적인 풍경을 담고 있다. 잔디는 구획화된 형상을 띠며 주변에는 여백이 이를 에워싸는 형상을 보여준다. 목가적이고 전원적인 풍광을 보여주는 반면, 이전의 작품에서도 보인 세필 기법은 그의 작업에서 이제 하나의 특징적 화풍으로 남게 된다. 여기서 화면의 물성은 물질성을 과감하게 드러내거나 물성을 두껍게 바른 것이 아니라, 캔버스 천 위에 가볍게 드리워져, 물감의 물질성을 강조한 하종현의 작업이나 다른 단색화 작가들의 작품과도 거리가 있다. 구도적으로는 부감법이 구사되어 동양화의 시선이 부여된 점도 특징적이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이전의 오브제 작업들 중 실질적인 틀을 사용한 작품들은 사라지게 되나, 김홍주의 작업에서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인물화는 이 시기에 다소 그로테스크해 보인다. 작가의 자화상으로 보이는 <무제>(1985, 130×97 cm, 캔버스에 유채와 오브제, 개인소장)에는 아래에서 위로 본 듯한 얼굴만 공중에서 부유하듯 표현되어 있는데, 작가의 몸을 상실한 두상은 보는 이에게 언캐니한 느낌을 부여한다. 익숙한 얼굴의 모습이지만, 이를 표현하는 관점과 시선은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아나모포시스적인 왜곡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경향의 작업은 상자 1986X’라는 단어를 담고 있는 <무제>(1986, 95×121 cm, 천에 유채와 오브제, 작가소장)에서도 반복되며 동시에 제작된 또 다른 인체의 표면에서도 엿보인다. 그는 이러한 작품에서 반창고나 모자 등의 물리적 오브제를 실제로 부착하였는데 이전과 달리 초현실주의적 경향이 심화된 작업들이라고 할 수 있다. 1993년 뉴욕의 퀸즈미술관에서 전시된 《태평양을 건너서》에서 선보인 1986년작 <무제>(230×102 cm, 캔버스에 유채와 오브제, 개인소장)도 이러한 경향의 작업으로, 다양한 인물들은 오브제와의 결합을 통해서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애브젝트한’ 형상이 되기도 한다. 이 시기를 기법적인 면에서 보면, 김홍주는 작업의 크기가 커지면서 실크 천에서 캔버스로 다시 돌아와 회화 작업에 몰입하게 된다. 특히, 실크 천에 시도했던 세필화 기법들이 그대로 유지되지만, 부드러운 천이 아닌 캔버스 천의 거친 마티에르를 실험하기 위해 다양한 이미지들이 들어오게 되며, 시기적으로 보면 1983년부터 1987년에는 세필화를 기조로 한 여러 형상 실험이 지속된다. 그로테스크한 느낌의 인물화나 형상의 유입, 실제 오브제의 배치 등도 이 시기에 다수 발견된다.
그로테스크는 그 어원을 따져보면, 이탈리아어 grottesca에서 나온 것으로 미술사에서는 15세기 말에 로마의 유적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식물과 인간이 특이한 장식을 구성하고 있는 하이브리드한 기이한 형상에서 나온 용어였다. 기이하고 특이한 감정을 유발하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는 이성 중심의 합리성에서 벗어나 우리를 감각의 세계로 이끌어 나가며, 이성 속에 가두어 두었던 풍자와 무의식의 감각을 해방시키는 역할을 한다. 볼프강 카이저(Wolfgang Kayser)의 말대로, 예술에서의 그로테스크는 삶과 존재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주석16】 억압되었던 욕망들을 분출시키는 역할을 한다. 김홍주가 제작한 이미지들은 정확한 인체상을 이루는 것도 아니며, 완벽한 초상화의 역할을 담당하지도 않는다. 그는 사진을 참조한다 하더라도 정확한 닮음과 사실성을 기반으로 하다가도 한 부분에서 이를 비틀어버림으로써, 초상의 역할에 충실하지도 않다. 초상 연구가인 리차드 브릴리언트(Richard Brilliant)의 말대로, 초상은 재현의 기능 중에서도 닮음에 기댐으로써, 초상화의 모델이 된 누군가의 이름표 역할을 하며 여기에는 실제 모델과 재현된 이미지 상호간의 교감이 존재한다.【주석17】 그러나 김홍주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은, 특히 1980년대 다수 제작된 이미지들은 부조리하며, 통합성을 결여한 이미지들로 이미지의 왜곡을 통해 존재 자체에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아름답게 존재하지 않는 신체, 아름다운 비율이 사라진 형상들은 재현의 역사에서 사라진 눈의 감각과 상상의 감각을 부활시킴으로써 그는 그로테스크의 미학을 실천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작품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질서와 규율, 미적 표현과 기준, 재현의 법칙에서 이탈함으로써 그는 우리가 자연에서 파악한 ‘본질적인 이미지(essential image)’에서 이탈하게 한다. 이러한 특징들로 인해, 김홍주의 작업은 단색화의 수행적이고 반복적인 붓터치나 물질성과는 다른 궤적을 보여주었듯이, 1980년대 작업들도 민중미술의 흐름과도 거리가 둔, 작가적 개별성과 독창성을 확인할 수 있다.
1985년경, 김홍주의 작업에서 독특하게 등장하는 꽃 그림이나 잔디를 그리드 형식으로 분할한 화면 구성을 보여주는 풍경화 등은 수채화나 유화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였다. 세필로 그려진 꽃과 잔디의 형상은 그 자체로 생동감과 꿈틀거리는 촉지적 감각을 전달하기도 한다. 특히, 1987년 대전 시내를 형상화한 풍경 그림(무제, 130×160 cm,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에서는, 동양화에서 사용된 부감법적 구도가 사용되었으며, 건물과 거리는 해체적 요소처럼 분절된 상태로 존재한다. 이러한 해체적 구도는 캔버스에 밑칠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회화적으로는 투명한 화면의 효과를 더욱 증가시킨다. 이러한 풍경 작업은, 이후 글씨 이미지와 흙덩이 이미지로 이어져 김홍주 특유의 화풍을 정립시켰다. 1989년에 제작된 <무제>(천에 유채, 140×140 cm, 개인소장)에서 알 수 있듯이, 세필화로 그려진 풍경화는 선의 드로잉을 형상화 하면서, 굽이치는 길, 논과 밭, 그 안에 간간히 보이는 집의 형상이나 풀더미들은 여백과의 함께 시각적 리듬을 이루는 선적 회화 작업이다. 각각의 이미지는 유기적 관계성을 이루며 음악적 운율을 만들어 내면서도 서양이나 한국미술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풍경화를 구축한다. 그의 작업은 강박적으로 여백을 채워나가는 서양화의 회화적 기법에서 이탈하면서, 이미지의 재현이 아닌, 이미지의 배치와 해체라는 회화적 방법론을 만들어간다. 밭 이미지와 흙덩이 이미지, 글씨 이미지 등이 모두 회화적으로 시각화되기 시작한 시기도 1980년대 중후반이다.
이러한 작품들이 발전해 ‘중층적 풍경화’(1987년-1996년)로 불리는 작품군들은 글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화를 비롯해, 배설물, 지형이나 흙덩이, 산업화 시기 한국의 대표적 도시 풍경화를 구성했던 집들이 층들을 이루면서 다층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예들이다. 198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의 전통 가옥들은 도시화와 산업화라는 명목으로 다수 사라지게 되는 시점이었고, 아파트와 같은 새로운 주거시설이 도시를 중심으로 건설되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하다. 김홍주는 집, 글, 흙덩이 등을 가장 기본적인 시각적 요소로 이용하면서도 이를 서로 중첩시키고 해체하는 새로운 시지각의 구축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던 풍경화와 텍스트 기반의 작업에 일종의 충돌을 유발시킨다. 예를 들면, 그가 구사한 특정 텍스트들은 부적의 기호 같기도 하며, 상형 문자로서 우리가 알 수 없는, 독해불가능한 요소들로 화면을 채운다. 이것들은 특정 문화와 종교 내에서는 텍스트로 기능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에 대한 배경이 없는 관객들은, 텍스트가 아닌 형상, 이미지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독해가 불가능한 형상들은 화면 위에 부유하는 불확정적 기호로 작용하며, 이러한 형상들은 우리가 언어를 배우기 이전의 상태, 사회적 자아와 규범, 규칙과 문법을 배우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밖에 없는 ‘상상계(The Imaginary)’에 속하는 유닛들로 이루어져 있다.【주석18】 이러한 풍경화들은 언어가 형성되기 이전, 이미지가 배태되기 전, 무의 상태에서 부유하는, 형상이 되기 위한 상상적 단계로 보인다. 1994년과 1996년에 다수 제작된 이러한 풍경들은, 거리를 두고 보았을 때는 막연하게 풍경화로 보이지만, 가까이 가서 세밀하게 볼 경우에 글자 하나 하나는 배설물이나 한국 고유의 서체나 텍스트로 보인다. 마이크로하게 보이는 것과 멀리서 매크로 하게 보이는 형상들은 서로의 간극과 경계를 보여주기 때문에 김홍주의 이러한 중층적 풍경화들은 관람자가 몸을 움직이면서 그의 대형 화면과 상호작용하는 개입적 관계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면, 1990년대 중반 아크릴로 제작된 대형 <무제>(252×478 cm, 캔버스에 아크릴릭, 작가소장)는 멀리서 보면 뒤집어진 얼굴의 모습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읽을 수 있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배설물이나 흙덩어리처럼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주석19】 이 작품 안에 있는 뒤집어진 얼굴 모습은 이미지의 여백(음각)과 여백이 서로 연결되어 양각을 이루면서 재현적 일루전으로 얼굴 이라는 형상을 만들어 낸다. 미셀 푸코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닙니다’에서 직시한 캘리그램(Calligram)처럼, 텍스트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작용과도 유사하다.【주석20】
이러한 작업들 중에는 1997년 김홍주가 텍스트와 풍경화를 이용해 상호텍스트성을 강조한 작품도 있다. (무제, 242×430 cm, 캔버스에 아크릴릭, 작가소장) 그러나 여기에도 김홍주는 이미지와 텍스트를 상호의존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순간 불가능한 글로 치환해 버린다. 사실, 그가 쓴 글자는 독자가 보고 바로 독해하기 어려운 ‘거울 이미지’로 세필화 방식으로 쓰여있다. 그러나 천천히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다보면 이 글은 강은교의 <자전1>이라는 점을 파악하게 된다.
<자전>
날이 저문다.
먼 곳에서 빈 뜰이 넘어진다.
무한천공 바람 겹겹이 사람은 혼자 펄럭이고
조금씩 파도치는 거리의 집들
끝까지 남아 있는 햇빛 하나가
어딜까 어딜까 도시를 끌고 간다.
날이 저문다.
날마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여자들은 떨어져 쌓인다.
잠 속에서도
빨리빨리 걸으며 침상 밖으로 흩어지는 모래는 끝없고
한 겹씩 벗겨지는 생사의 저 캄캄한 수세기를 향하여
아무도 자기의 살을 감출 수는 없다.
집이 흐느낀다.
날이 저문다.
바람에 갇혀
김홍주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중층적인 집, 도시, 논밭 풍경화는 “한 겹씩 벗겨지는 생사의 저 캄캄한 수세기”를 견뎌온 시간성을 시각화한 것으로 보인다. 세필화 기법은 작가의 작업 과정에서 조수를 통해 구현될 수 없는, 작가의 수행성과 노동력이 집중되어 독특한 방식을 체화하고 있다. 글자 하나 하나, 이미지 하나 하나, 기나긴 시간을 쌓아 나가는 수행적 과정의 그림들로, 이것들은 보고, 듣고, 손으로 느끼는, 공감각적 세계가 서로 조응하는 ‘이미지의 풍경화’이다. 김홍주의 이러한 작품들은 전통적 랜드스케이프가 아닌 이미지스케이프로, 형상과 이미지를 또 다른 차원으로 해석하는 작품들이다.【주석21】 특히 1993년에 제작된 이러한 풍경화는 다층적 시선이 존재할 뿐 아니라, 표현된 집과 길, 논과 밭이 서로 질서 정연한 듯이 보이지만 실은 각기 다른 유닛들이 존재하는 다중적 시선이 공존하는 특이한 공간이다. 일견 풍경화로 보이지만, 위에서, 아래에서, 옆에서 본 것 같은 다중적 시선이 공존하고 흙덩이나 독해할 수 없는 특이한 텍스트 등으로 구성된 대형 풍경화는 우리의 시선을 분열시키는 동시에, 익숙한 이미지들과 모노톤의 컬러는 우리를 다시 심리적으로 개입시킨다. 관람자들은 시선의 분열과 해체, 심리적 개입과 이탈의 이중적인 거리두기를 통해, 새로운 감각을 소환시킨다. 비평가 김원방은 이러한 심리적 이탈과 개입을, 이미지의 출현과 망각으로 설명하며, ‘기억상실증’으로 설명하기도 한다.【주석22】
IV. 촉각적인 꽃 그림에서 파편화된, 비정형적 꽃 그림까지: 1996년-현재
김홍주의 꽃 그림은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범주의 작업들로, 그가 1996년 수화랑 개인전에서 네 점의 분홍색 꽃 그림 연작을 발표한 이후 우리에게 소개된 작업들이다. 그러나 세필화 기법으로 그려진 꽃 작품들은 비록 연작의 형태는 아니나 1980년대 중후반에도 등장했던 작품들로(주로 수채화로 제작된 작품들이 많다), 섬세한 선, 무수한 선으로 구성된 꽃이나 꽃 잎의 형상 등은 그 자체로 시각적일 뿐 아니라, 미세한 선들은 마치 바람 속에서 움직이는 것 같은 촉각적 일루전을 유발하기도 한다. 어떤 꽃 작품들에는 회화적 붓터치로 물감 자국이 흘러내리는 기법들도 등장하고 있는데, 이러한 작업들은 회화적 이미지의 형상에 일종의 균열과 틈을 만들어 내는 회화적 배반이기도 하다.
이러한 꽃 작업들은 시기적으로 보면 세 번에 걸쳐 변화의 모멘텀을 거친다. 첫째 1996년부터 2002년까지 그의 꽃 작품들은 화면 정면에 꽃 작품들이 배치되면서 화사한 색감과 미세한 붓터치로 인해서 초기의 그로테스크한 느낌들이 전면적으로 사라진다. 1996년에 발표된 네 점의 꽃 그림은 연꽃 이미지로, 정면, 측면에서 본 연꽃 이미지를 비롯해, 봉오리가 닫히거나 뒤집혀진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다. (무제, 각 184.3×184.3 cm, 캔버스에 아크릴릭,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앞서 살펴본 풍경화 작업들에서 이러한 네 이미지들이 한 화면에 중층적으로 표현되었거나 대형의 한 화면에서 ‘함께’ 배치되었었다면, 1996년 연꽃 연작에서는 개별 화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홍주는 실제의 연꽃을 보고 관찰해서 그린 것이 아니라, 석가탄신일에 장식되는 연꽃 이미지를 참조해서 그린 것이지만, 세필로 자세히 그려졌다는 점 때문에, 실제 연꽃 이미지를 재현한 것과 같은 착시효과와 일루전을 전달한다. 실제 사물과 그려진 이미지의 간극과 틈은 결국 초기부터 작가가 관심을 가져온 회화적이고, 반회화적인 감각의 이탈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러한 연꽃 연작들은 걸리는 순서나 배치에 상관없이 독자적 위치를 지닌 ‘연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 하나 하나 미세하게 그려진 탓에 시각적 선으로 존재하는 꽃은 촉각적이고, 촉지적인 감각을 유발한다. 시각과 촉각의 감각은 김홍주의 회화에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요소이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사람들은 소통을 언어적인 것에서만 찾는다.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감각적으로 오는 그런 소통이다.”【주석23】
둘째, 김홍주의 꽃 작업은 2002년부터 2010년까지 큰 변화를 거치게 된다. 작가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기존의 세필화를 유지하면서도 이전에 비해 응집력이나 밀도가 조금은 느슨해지는 작업들이 등장하면서 꽃 작업들은 파편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러한 작품들은 주로 2005년 로댕갤러리에서 열린 김홍주의 개인전에서 선보이게 되었다. 1996년 꽃 그림들이 주로 중심과 주변의 경계가 있었다면, 이 시기 그의 작업에는 중심과 주변이 파편화되면서 점차 꽃의 형상도 이전에 비해서 와해되어 간다. 이러한 작업들은 2010년부터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이미지들로 이전의 구체적 자연의 형상 대신에, 다소 비정형적으로 보이는 이미지로 변화되었다. 이 시기에 한가지 눈에 띄는 기법적인 변화는 캔버스의 씨실과 날실 부분을 모노톤으로 투명하게 같은 깊이로 채워나가는 감각으로의 변화이다. 여백이 한층 더 강조되었으며, 캔버스는 시각적 이미지의 재현이 아니라 동양화용 세필로 캔버스의 화면을 촉각적으로 구현하는데 작가의 몸과 붓, 화면은 하나의 접촉지대를 만들면서 그 특유의 촉각적 회화를 구성하고 있다.
김홍주의 꽃 그림들은 구체적 사물로서의 꽃이기도 하지만 작가의 생각, 관념을 반영한 이미지로서의 꽃이다. 반복적 이미지로 등장하는 꽃은 재현의 기능을 상실한 꽃으로, 양식 면에서는 극사실적 형상을 띠지만 사실은 구체적 사물, 자연을 반영하지 않는다. 꽃은 키아로스큐로(명암)나 빛의 출처가 없이 작가의 신체성과 수행성을 캔버스에 반복적인 흔적, 형상으로 남기게 한다. 그것은 자연을 반영한 꽃 이미지가 아니라 작가의 추상적 관념을 꽃이라는 형상을 통해서 담아낸 이미지이다. 꽃이라는 형상 위에 비정형적인 선으로 흘러내리는 무수한 물감들은 형상의 이미지에 대한 독해를 방해하고 자연으로 남겨지는 형상을 미끌어지게 하는 것이다. 꽃은 우리에게 이미지로 다가오지만, 추상적인 선들은 형상의 미끄러짐(slippage)으로 이어지고 결국 이미지(형상)는 일종의 비정형(informe/formless) 작용을 일으킨다. 시대는 달랐지만, 김홍주의 작업은 안티모더니스트였던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가 그의 『비평사전(Critical Dictionary)』에서 보여준 비정형의 작동기제를 연상시킨다.【주석24】 바타이유는 결국 마네의 그림을 보며 그 화가가 보여준 주제(subject matter)나 양식(style), 그 어느 편에도 서지 못하고 그 두 축 사이의 미끄러짐을 그 작품의 작동기제로 파악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김홍주의 꽃 그림은 세필화로 구성된 아름다운 형상이지만, 결국 꽃을 통한 주제도, 세필화라는 양식성이 아닌, 이 두 사이이의 미끄러짐이 중요한 작동기제가 아닐까. 김홍주는 어떤 상징성을 전달하는 주제에도 매력을 못 느낀다. 그리고 세필화의 양식성 (소위 극사실적 경향이라 불리는)에도 만족하지 못한다. 김홍주의 그림에서는 결국 두 축의 지속적 미끄러짐이 중요한 회화적 기제이지 않을까.
다시 김홍주의 1970년대 초기 작업으로 돌아가 보자. 그가 개념미술과 실험미술에 눈 뜨기 전에, 그의 작업들은 단선적인 세필이 사선을 이루면서 무수히 많은 층들을 이루고 있다. 그의 회화적 작업은 김원방이 말한 대로 ‘그림의 적’으로 회화의 내부에서 회화를 해체하고 공격한, 그래서 가장 회화적이고 반회화적인 방법으로 작업했다고 말할 수 있다.【주석25】 그러나 그가 그림을 배반하고 해체하는 과정과 여정은, 날카롭고 공격적인 비평어로 남을 비판하는 방법을 취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반회화적 회화는 자신의 내면에서 치열하게 싸워왔으며, 화면 위에서 그리고 화면 안에서 ‘그림에 반하는’ 그림을 그렸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알던 그림을 파기하고, 우리가 알던 이미지를 비틀어버리며, 우리를 당혹케 하는 그림들이기도 했다. 1970년부터 지금까지 한국 미술계는 실험미술의 시기를 거쳐 단색화와 민중미술, 소그룹활동 등을 위시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기를 거쳐왔다. 한국현대미술사에서 김홍주는 특정 그룹에 오랫동안 소속되어 작업하지 않았으나, 또 달리 보면 그의 작업만큼 한국미술의 다층적 시선들이 베여있는 작가도 많지 않다. 굵직굵직한 굴곡이 많았던 한국의 압축적 근대화 시기 동안 김홍주의 풍경화는 그가 거울 이미지로 써 내려간 강은교의 시처럼, “무한천공 바람 겹겹이 사람은 혼자 펄럭이고 / 조금씩 파도치는 거리의 집들 / 끝까지 남아 있는 햇빛 하나가 / 어딜까 어딜까 도시를 끌고 간다.” 그 도시 안에, 바람 안에, 거리 안에 김홍주의 풍경화는 놓여있다.
시기별 작품해설
미술계 진입 (1972-1974) : 초기 실험미술 시기, 개념미술의 시도
1969년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군복무 후 1970년대 초반에 충주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김홍주는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하기 위해 1972년 하반기에 상경하여 새롭게 교편을 잡는다. 이때 남상균, 송정기, 최원근, 박원준 작가와 친분을 갖고 교류하던 중 당시 ST그룹의 회원이었던 박원준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ST그룹에 가입하게 된다. ST그룹은 이건용이 주도한 실험미술 그룹으로, 이우환의 영향을 받은 모노하 스타일의 오브제 미술과 서구의 해프닝 경향을 참조한 이벤트 등의 형식이 주로 시도되고 있었는데, 김홍주도 이러한 그룹 경향에 발맞춰 공동 야외작업에 참여하고 개념미술 작업을 발표했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돌과 파랑>(1973)과 <확장>(1974)이 있다.
초기 회화 양식의 형성 (1974-1978) : 실물 오브제와 그린 이미지의 결합
개념미술 작업이 자신의 성향과 맞지 않음을 깨달은 김홍주는 1974년부터 서서히 회화 작업으로 전환한다. 그러나 구태의연한 국전풍 구상회화나 이미 궤도에 오른 단색 추상회화 경향에 합류하기 어려웠던 김홍주는 자신만의 회화 양식을 모색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실물 오브제와 그린 이미지를 결합한 오브제 회화 방식을 고안하게 된다. 이는 회화를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나 혹은 세상을 비추는 거울로 규정하는 서양화의 전통 관념을 염두에 두고 이것을 즉물화(卽物化)하는 방식으로 회화에 대한 통념을 비틀어보려는 시도였다. 이 시기에는 주로 탁상 거울이나 벽 거울 프레임, 자동차 미러 프레임, 창문 틀, 미닫이 문 틀 등 주로 사물의 외곽을 형성하는 오브제 안쪽에 마치 물건이나 인물이 비춰진 듯이 그린 이미지를 결합시켜 실제와 가상을 통합시키려는 듯이 보이는 작품이 제작되었다. 이때 보통 일상 사물의 프레임 안쪽에 들어가는 작은 이미지를 그렸기 때문에 작가는 작은 붓으로 섬세하게 그릴 수 밖에 없었는데 이러한 방식은 작가의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특징인 세필 기법으로 계속 남게 된다. 이들 작품은 당시 유행하던 하이퍼리얼리즘 혹은 극사실주의 경향으로 인식되었다. 1978년에 개최된 첫 개인전에서 초창기 회화 양식의 작품들이 총 망라되어 전시되었다.
초기 회화 양식의 확장 (1978-1983) : 극사실과 초현실의 겹침
실물 오브제와 그린 이미지를 결합한 김홍주의 오브제 회화는 초기에는 광학적 극사실주의에 가까운 형태였으나, 1970년대 후반부터는 점점 초현실적인 분위기로 흘러간다. 거울에 비치거나 창문 너머 보이는 것처럼 그려진 인물들은 점점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유령처럼 보이게 되는데 이것은 작가가 의도한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다. 작가의 진술에 의하면 이 시기 작품이 초현실적으로 보이게 된 이유는 작품 제작 중의 기법상의 이유에 있었다고 한다. 그림의 표면을 거울이나 유리처럼 만들기 위해 화면에 얼룩을 덧그렸는데 얼룩을 잘 보이게 하기 위해 배경을 어둡게 연출했고 그 결과 어두운 배경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인물이 유령처럼 보이게 됐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결과를 역으로 이용하여 괘종시계 안에 있는 사람을 그리는 등 아예 처음부터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의도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김홍주의 회화는 극사실주의와의 연관성이 흐려지게 된다.
다양한 이미지 실험 (1983-1987) : 그로테스크한 이미지
1981년 목원대학교 미술교육과 교수로 부임한 김홍주는 대학이 넓은 공간의 작업실을 제공하자 본격적으로 크기가 큰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한다. 이전의 거울이나 창문 프레임을 사용했던 오브제 회화 작업의 크기 제한에서 벗어나게 되자 작품에서 점점 오브제의 비중은 줄어들고 회화 본연의 평면성이 부각된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초기 양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다양한 시도들을 보여준다. 형상을 왜곡하기도 하고 이미지를 겹쳐 그리기도 하며, 반창고나 모자 등 여러가지 종류의 실물 오브제가 화면에 부착되기도 하고, 바느질 기법이 동원되거나 캔버스의 앞 뒷면이 동시에 사용되기도 하는 등 작품마다 소재, 내용, 형식 등이 제각각이다. 그러나 작은 붓으로 꼼꼼하게 그리는 기법적 특성은 계속 이어졌고 80년대 초반의 초현실적 분위기도 유지되어 전반적으로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의 회화 작품들이 많이 제작되었다. 이 시기의 대표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무제>(1985-87)인데, 대학 캠퍼스 내부의 잔디밭을 모티프로 주변의 다양한 인물 군상을 괴괴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중층적 풍경 (1987-1996) : 포스트모던한 이미지
1987년경부터 김홍주의 작품은 화면을 구성하는 조형 요소들이 디자인적으로 배치되고 정돈되면서 이전의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비교적 밝고 가벼워진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대개 하나의 흙덩이나 지형, 건축물, 글자, 배설물 등의 이미지가 하나의 단위 요소가 되고 이들 단위 요소들이 모여 전체적인 화면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또 이렇게 구성된 전체 화면이 뒤집어보면 얼굴 등의 전혀 다른 형상으로도 보이는 등 중층적 이미지를 형성하면서 여러 가지 조형적 실험이 시도되었다. 이러한 작품들은 ‘언어적 형상성’이나 혹은 ‘기호학적 이미지’로 읽혀지면서 당시 화두였던 ‘포스트모더니즘’적 맥락에서 해석되었다. 1994년부터 1996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제작된 글자 그림은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서예 형식과 닮았으나 자세히 보면 글자 하나하나가 배설물 혹은 흙덩이 이미지의 단위로 이루어진 그림이다. 일상에서 치워지고 가려지는 배설물이라는 사물을 유심히 관찰해야 할 중요한 대상처럼 세밀하고 꼼꼼히 그리는 행위를 통해 재현 행위와 재현 대상의 아이러니한 관계를 유희적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꽃 그림 (1996-2002) : 촉각적 이미지
1996년 발표한 핑크색 연꽃 연작이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김홍주는 2000년대 초·중반까지 화면 하나에 꽃의 정면 이미지를 가득 채운 꽃 그림을 집중적으로 제작하게 된다. 1996년에 발표한 핑크색 연꽃 연작은 총 4점의 연꽃 이미지인데 정면 이미지와 측면 이미지, 봉오리가 닫혀진 이미지, 봉오리가 뒤집혀진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다. 이 연꽃 연작은 실제 연꽃을 관찰하여 사실적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석가탄신일에 장식되는 싸구려 플라스틱 연꽃 장식을 참조한 도상화된 연꽃 이미지를 그린 것이다. 실제의 꽃이 아니라 통념화된 연꽃의 도상을 마치 과학도감에 실리는 세밀화 그리듯이 세필로 꼼꼼하게 그렸기 때문에 재현 대상과 그려진 이미지 사이의 아이러니한 관계가 암시되고 있다. 이후 제작된 꽃 그림들도 모두 실제 꽃이 아니라 꽃의 도상적 이미지를 마치 실물을 관찰하여 그리는 것처럼 세필 기법으로 꼼꼼하게 그리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그래서 도상화된 꽃 이미지가 마치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생생한 감각이 화면에서 느껴졌고 이는 촉각적인 이미지로 해석되었다.
파편화된 꽃 그림 (2002-2010) : 세필 감각의 강조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중반까지 꽃 그림 제작에 집중했던 김홍주는 어느덧 작품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이후 꽃 그림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던 중 건강이 안 좋아진 작가는 예전처럼 노동집약적 작업을 통해 촉각적인 생생한 감각을 창출하는 방식의 작업은 하기 힘들어지게 된다. 그러나 작품활동 초창기부터 유지해 온 세필 기법은 계속 유지하면서 변화를 모색하게 되는데 전체적인 형상을 이루는 붓 터치의 응집력은 약해졌지만 세필 감각은 그대로 살아있게끔 그림을 그리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제작된 작품은 2005년도에 로댕갤러리에서 개최된 개인전과 2008년도에 가나아트센터에서 개최된 2인전에서 주로 선보였다. 이들 작품에서는 꽃의 형상은 희미해졌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여파가 남아있었는데 나뭇잎이나 식물, 과일, 얼굴, 풍경, 추상 등의 형상에 세필의 붓터치 감각이 강조된 작품이었다.
촉지적 형상 (2010-2020) : 접촉 감각의 이미지
2010년경부터 김홍주는 세필 감각에 좀 더 극단적으로 몰입하면서 털 몇 개로 이루어진 동양화용 세필이 캔버스 천 표면의 올 하나하나에 부딪힐 때 느껴지는 촉지적 감각을 전달하는데 집중한다. 그러다 보니 화면에서 보이는 형상의 중요성이 약해지면서 구상적인 요소는 점점 희미해지고 추상에 가까워지게 된다. 이것은 작가가 추상을 목적으로서 추구한 것이 아니라 그림을 통해 촉지적 감각을 추구하는 것을 우선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얻어진 결과이다. 이렇게 촉지적 형상이 강조된 작품은 2015년에 국제갤러리에서 개최된 개인전과 2019년에 도쿄화랑에서 개최된 개인전에서 전시되었다. 그림을 그릴 때 몸으로 느껴지는 접촉 감각을 전달하고자 하는 김홍주의 촉지적 회화 작업은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
일러두기
1. 본 아카이브는 작가소개, 작품정보, 작품 외 자료, 참고문헌, 전시이력, 작가연보, 인용문, 영상, 비평문 등의 항목으로 구성된다.
2. 작가소개는 작가 프로필 사진, 소개 글, 작가약력, 시기별 작품해설 등으로 구성되었다.
3. 작품의 대부분은 회화이며, 소수의 습작도 회화로 분류했다. 초창기에 제작된 설치 작업이나 오브제를 활용한 작업도 회화적인 요소가 중요하게 포함되어 있다고 판단하여 포괄적인 관점에서 회화로 분류했다.
4. 작품 외 자료 항목에서는 전시와 관련된 브로슈어, 리플릿, 엽서 등과 작품 이미지가 게재된 달력, 카탈로그 등의 소규모 인쇄물, 그리고 메모, 서신 등의 문건 자료 등을 목록화하였다.
5. 참고문헌에서는 작가와 작품에 대한 내용이 게재된 전시도록, 단행본, 정기간행물, 웹사이트 등의 정보를 목록화하였다.
6. 전시이력에서는 전시 관련 도록, 브로슈어, 리플릿 등의 자료를 바탕으로 전시이력을 목록화하였다.
7. 작가연보는 작가로부터 직접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구성하였다.
8. 인용문에서는 전시서문, 평론, 기사, 작가노트 등의 텍스트 자료 중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발췌하여 목록화하였다.
9. 영상은 2020년에 수행한 작가와 관련 인물들과의 인터뷰를 토대로 구성되었다.
10. 비평글은 본 연구팀의 책임연구원이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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