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문학적 감수성이 탁월하여 한때 문학도를 꿈꾸던 최종태는 1953년 <문학세계>에 게재된 김종영의 <무명정치수를 위한 기념비> 국제조각 콩쿠르 입상 작품 <나상(裸像)>을 접하고 그 충격과 감동으로 조각을 전공하기로 결심했다. 1954년에 미술대학에 입학했으니 조각가로 활동한 것이 어느덧 67년이 되었다.
한국미술계는 최근까지도 서구 동시대 미술에 뒤처지지 않고 발맞춰 나가는 것을 최대과제로 꼽았다. 이런 세태 속에서도 ‘한국적’인 것에 대한 모색은 중요한 과제였다. 하지만 추상화(抽象化)가 서구 미술의 대세를 이루자, 한국미술계는 이에 편승하고자 했다. 최종태는 이런 시류에도 불구하고 특이하게 동서고금을 통해 조각의 주된 소재인 사람만 조각했다. 여인상을 주로 제작하였다.
“삶의 고통에 울어보지 않은 사람은 세상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다.” <레미제라블>의 저자 빅토르 위고의 말이다.
평생 인체 조각에 전념한 최종태는 그 원인을 8·15 해방, 6·25, 4·19, 5·16, 5·18, 6·29와 같은 요동치는 역사 속에서 버티는 동시대인의 삶과, 중학생 때 <레미제라블>을 읽으며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여러 인간상으로 인해 받은 충격을 꼽았다. 한마디로 최종태는 평생을 혼돈 속에서도 삶을 영위해야만 하는 인간의 숙명을 통해 인간 존재를 성찰했다. 그리고 동·서양 미술사를 살펴, ‘20세기 그림에는 자연도 없어지고, 인간이 사라졌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 결과 최종태의 인물상들은 조형의 소재라기보다는 삶 속에서 맞닥뜨린 희로애락을 덤덤히 감내하는 인간에 대한 연민을 작품으로 승화시키고자 한 각고의 산물이다. 따라서 선생의 인물조각과 종교 조각은 별개가 아니며, 그 바탕에는 ‘연민’과 ‘자비심’이 깊이 배어 있다.
최종태는 더불어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깊이 살폈다. 최종태는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회향(懷鄕)>(1970)을 꼽는다. 제목 그대로 고향을 품고자 한 바람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듬해 최종태는 이 작품으로 세계미술계를 여행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100일간의 여행을 통해 최종태는 지금까지 고뇌했던 ‘한국적인 것’에 대한 실마리를 반가사유상과 경주 석굴암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 불교 미술이 세계적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최종태의 작업은 이러한 한국 불교 조각의 아름다움을 서양 조각과 함께해서 인류 보편적인 미감을 얻어낸 것이다. 최종태의 종교 조각이 뜻하는 바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런 연유로 한국교회미술의 토착화를 위해서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최종태의 작업 여정에서 인간에 대한 애정이 예술의 근본임을 깨닫게 된다.
1932 대전 출생
1946 대전사범학교 입학
1952 대전사범학교 졸업
1953 대전에서 초등학교 교사
1954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입학
1958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졸업
공주고. 천안여고. 숙명여고, 천안고, 대전 대성고 등에서 교편생활
1966 공주교육대학 교수
1967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1968 현대공간회 창립
1970 서울대학교 교수
1995 한국 가톨릭미술가협회 회장
2002 김종영미술관 관장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현재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김종영미술관 명예관장
이동훈 미술상 운영위원장
개인전
2021 구순을 사는 이야기, 김종영미술관, 서울
2018 영원의 갈망, 가나아트센터, 서울
2015 한국현대미술작가: 최종태 개인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14 최종태 파스텔 그림전: 빛·사랑·기쁨, 가나아트센터, 서울
2011 구원의 모상 가나아트센터, 서울: 대백프라자갤러리, 수성 아트피아, 대구
2007 구도의 여정, 가나아트센터. 서울
먹빛의 자코메티: 최종태가 그린 가녀린 영혼의 초상, 갤러리 로터스, 파주
최종태전, 갤러리 선, 서울
2005 영원과 본질의 탐구, 대전시립미술관, 대전
최종태전, 갤러리 현대 두가현, 서울
최종태 1970년대 소묘전, 갤러리 로터스, 파주
2001 일흔의 시간 가나아트센터, 서울
1998 『나의 미술. 아름다움을 향한 사색』, 출품기념전, 가나화랑, 서울
1996 가나보부르, 파리
1993 아테네미술관, 제네바
1992 가나화랑, 서울
1991 헤란드 웨터링 갤러리, 스톡홀롬
1990 가나화랑, 서울
1988 호암갤러리, 서울
1986 가나화랑, 서울
1982 파스텔 그림전, 가람화랑, 서울
1981 신세계미술관, 서울
1977 목판화, 조각전, 신세계미술관, 서울
1976 조각. 파스텔 그림전, 문헌화랑, 서울
1975 미국문화센터, 서울
1964 대전문화원, 대전
주요 단체전
2011 한국가톨릭미술가 100인, 대구경북디자인센터, 내구
2009 조각 읽는 즐거움, 서울시립 미술관 남서울 분관, 서울
한국현대조각의 흐름과 양상 II, 경남도립미술관, 창원
2008 조각의 바다, 거제문화예술회관, 거제
한국현대미술: 세월에 담은 형상, 신세계갤러리 본점, 서울
The Bridge: 가나아트 개관 25주년 기념전, 가나아트센터, 서울
2007 최종태·최병상 조각, 선화랑, 서울
2006 서울 가톨릭미술가회전, 가톨릭화랑, 서울
한·일현대미술전, 세종문화회관, 서울
2005 가톨릭미술가회전, 가톨릭화랑, 서울
예림을 걷다, 소마미술관, 서울
숙란 25주년 기념전. 서울갤러리. 서울
2004 예술원 개원 50주년 기념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불교와 가톨릭 미술인의 만남전, 법륜사 불일미술관, 서울
한·일현대미술전, 다케시마야 화랑, 니혼바시, 일본
전북도립미술관 개관기념전, 전북도립미술관, 완주
2003 서울특별시 원로 중진작가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예술원 회원전, 예술원미술관, 서울
한·일현대미술전, 인사아트센터, 서울
불교와 가톨릭 미술인의 만남전, 가톨릭화랑, 서울
2002 서울미술대전, 서올시립미술관, 서울
2000 새 날, 새 삶. 대희년 미술전, 예술의 전당, 서울
1997 한국의 서정, 모란갤러리, 남양주
1995 몬테카를로 야외조각 비엔날레, 몬테카를로, 모나코
1994 서울국제현대미술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1993 우정의 만남: 이종수·최중태, 대전문화원, 대전
1990 한국현대미술 오늘의 상황, 예술의 전당, 서울
1988 조선일보미술관 개관전, 조선일보미술관, 서울
1987 한국현대미술. 어제와 오늘,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1986 아시아 현대미술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한국현대미술. 어제와 오늘,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1985 현대미술 40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1968 현대공간회 창립전, 삼보화랑, 서울
1967 5인 작가전: 이남규, 이민회, 이지휘, 조영동, 최종태, 신문회관, 서울
저서
『최종태, 그리며 살았다』, 김영사, 2019
『장욱진, 나는 심플하다』, 김영사, 2017
『산다는 것 그런다는 것: 조각가 최종태의 신앙 이야기』, 바오로딸, 2011
『한 예술가의 회상』, 열화당, 2009
『나의 미술. 아름다움을 향한 사색』, 열화당, 2007
『최종태 조각 1991-2007: 구도의 길에 세운 선의 모뉴망』, 열화당, 2007
『이순의 사색』, 미술사랑, 2001
『고향가는 길』, 햇빛 출판사, 2001
『회상: 나의 스승 김종영』, 가나아트, 1999
『최종태 교회조각』, 열화당, 1998
『나의 미술, 아름다움을 향한 사색』, 열화당, 1998
『십자가의 길』 출간, 분도출판사, 1994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만들고 싶다』, 민음사, 1992
『형태를 찾아서』, 열화당, 1990
『예술가와 역사의식』, 지식산업사, 1986
화집
『최종태 얼굴그림 2009-2010: 무심의 세계에 자유를 얻다』 열화당, 2010
『최종태 화집』, 미술사랑, 2008
『먹빛의 쟈코메티』, 열화당, 2007
『최종태 조각』, 열화당, 2007
『최종태 파스텔그림: 생명의 형태를 향한 미의 희원』, 열화당, 2006
『최종태 소묘 – 1970년대』, 열화당, 2005
『최종태 교회조각』, 열화당, 1998
『최종태』, 가나아트, 1992
『최종태』, 열화당, 1988
『최종태 한국현대작가 100인 선집』, 금성출판사, 1979
수상
2008 문화훈장 은관 수훈
가톨릭 미술상 특별상 수상
2006 대한민국예술원상 수상
가톨릭출판 120주년 공로상
1998 국민훈장 동백장
1996 한국문인협회 수여, 가장 문학적인 상 수상
1989 서울시 문화상 수상
1970 <회향>으로 「국전」 추천작가상 수상
1964 충청남도 문화상 수상
1962 <앉아있는 여인>으로 「국전」 특선, 국전 추천작가
1961 <어머니와 아들>로 「국전」 특선
1960 <서 있는 여인>으로「국전」 문교부 장관상 수상
최종태의 삶과 예술
“나의 형태는 전원의 그리움 속에 서 있는 한 그루 나무, 우뚝 솟은 바위덩어리처럼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 가까이서 보는 조형의 재미를 되도록 삭제하고 본래적으로 그냥 거기에 있는 것처럼 서 있기를 바란다.” - 최종태
들어가는 말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원로작가 디지털 아카이빙’ 사업으로 10개월 동안 최종태의 작품을 발굴, 조사, 비교검토, 확인한 결과 2021년 12월 31일 현재 입체 1,347점, 평면 803점, 총 2,150점의 전수조사를 마쳤다. 사업을 시작하면서 연구팀이 잠정적으로 파악한 작품은 조각 약 400여 점, 파스텔 · 드로잉을 포함한 회화는 2,800여 점이었다. 회화의 경우 전시에서 발표한 작품과 작가가 스스로 액자에 넣어 보관하고 있는 작품을 계산한 것인데 초기 조사에서 액자를 하지 않은 채 별도의 상자에 보관하고 있는 작품까지 고려하여 예측하였으나 실제 수량은 3,000여 점을 훨씬 넘을 것으로 파악되었다. 게다가 아카이빙 작업을 진행하는 기간에도 작가는 매일 그림을 그리고, 작업실에서 조각 작업을 하고 있어서 총량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개인전을 포함한 단체전에 출품한 근거인 도록과 브로슈어, 엽서, 보도기사 등에 수록된 작품은 물론 유실된 작품의 자료를 찾아 정리하고, 작가도 기억하지 못한 채 작업실 창고에 보관 중이던 작품을 발견하면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많은 작품을 발굴, 목록화한 것이 이 아카이빙 작업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교회조각에 대한 전수조사 결과 예상을 뛰어넘는 많은 작품에 대한 정보를 입수, 정리하였는데 이 아카이빙이 아니었더라면 엄두도 못 내었을 것이다. 방대한 수량으로 이번 목록화 작업에서 제외한 평면작업을 포함하면 우리 연구팀이 파악한 작품 수는 약 5천여 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토록 대단한 작업량의 원동력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물론 소품과 유사한 형태의 작품이 많지만 열정과 성실성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제한된 조사연구 기간, 연구팀의 역량, 작품의 이력을 추적, 정확하고 빈틈없이 기록하여 아카이빙의 품질을 제고해야 하는 과제 등을 고려할 때 연구책임자로서 나는 평면의 경우 전시, 작품집 등을 통해 이미 사회화한 작품만으로 한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종태의 활동 범위는 넓다. 조각가로서 그는 1959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후 ‘국전’으로 표기)에 작품을 출품을 시작으로 1964년 대전문화원의 첫 개인전 이래 2018년 가나아트센터의 개인전에 이르기까지 20여 회의 국내외 개인전과 현대공간회, 서울조각회, 한국가톨릭미술가협회, 기타 크고 작은 전시 등의 단체전에 출품했다. 또한 자신의 작품을 모아 작품집을 계속 출판해 왔다. 1959년 가톨릭에 입교한 이래 교회미술 제작에도 헌신하여 성당, 기념관 등에 설치하였으며, 연구팀이 조사한 작품은 180점에 이른다.
문필가, 저술가로서 최종태는 1986년 첫 번째 수상집인 『예술가와 역사의식』을 출간한 이래 7권의 수상집과 『회상, 나의 스승 김종영』(가나아트, 1999)을 비롯하여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쳤던 작가에 대한 회고와 평전을 출간했다. 뿐만 아니라 신문, 잡지 등의 매체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글을 기고하였으며 현재에도 그의 글쓰기는 진행 중이다. 디지털 아카이빙에는 작품뿐만 아니라 집필, 사회적 활동을 포함한다. 그만큼 조사할 양이 많고 범위도 넓은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이 비평문의 목적은 아카이빙 과정에서 확보, 확인한 모든 자료와 정보를 바탕으로 최종태의 삶과 예술을 정리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이 비평문의 순서를 조각가 최종태의 수업시대로부터 조각가로서 그가 이룩한 업적을 시작으로 한국적 종교미술의 토착화를 위한 노력, 교육자로서 교육철학과 제자들에 미친 영향, 2005년 대전시립미술관에서 가진 회고전 이래 그의 예술관이 어떤 변화를 거치며 현재에 이르는지를 가능한 객관적으로 정리할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책임연구자 최태만은 1990년부터 그와 가까운 거리에서 그의 예술관과 작업에 대해 대화하고, 그의 작품에 대한 글을 쓰고, 많은 인터뷰와 구술채록을 한 바 있다. 이런 점이 그의 삶과 예술을 정리하는데 바탕이 되었음을 밝혀둔다.
최종태의 수업시대
1932년 12월 7일 충청남도 대덕군 회덕면 오정리에서 태어난 최종태는 일본 제국주의가 파국을 치닫던 1940년 회덕공립보통학교(회덕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일본어로 교육을 받았으나, 일본인 교장선생의 인정을 받아 대덕군 습자대회에서 일등상(天賞)을 받을 정도로 서예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해방을 맞아 한글로 교육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글쓰기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였다. 당시 글짓기 시간에 신문에 게재된 논설이나 유명 문필가의 글을 읽고 그 논조로 쓴 글을 제출했지만, 선생님으로부터 “네 글을 써라”란 지적을 받고 남의 글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써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최종태가 미술에도 소질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발견한 것은 미술교사 강연환 덕분이었다. 강연환 선생은 최종태가 6학년 때 사생 숙제에서 제출한 풍경화를 교실 뒤에 걸어주었다. 최종태에게는 ‘그리기’에 자신감을 가지는 계기였으나 그것이 그가 미술을 선택하는 결정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1946년 중고등학교 과정이 통합된 대전사범학교로 진학한 그는 육명심 등의 동기와 글쓰기 모임을 만들어 서로 돌려 읽기도 했다. 방학 때마다 교사였던 작은 아버지의 집에서 많은 문학서적을 탐독하며 그는 문학가로서의 꿈을 키웠다. 그런데 2학년 때 이동훈이 미술교사로 부임하며 그에게는 문학과 함께 미술에도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기회가 왔고 충청남북도 학생미전에 풍경화를 출품해 2등상을 받으면서 이동훈과도 가까워졌다. 특히 작업에만 전념하는 이동훈은 그에게 예술가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몸소 보여 주었기 때문에 훗날 그가 예술가로서, 교육자로서의 삶에 사표(師表)가 되었다.
1952년 대전사범학교를 졸업한 최종태가 대전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할 때 여전히 문학으로 향한 열정으로 문학 관련 서적을 읽던 중 1953년에 창간된 『문화세계』에 수록된 김종영의 짧은 글과 작품사진을 보고 큰 영향을 받았다. 1952년 영국의 테이트갤러리가 국제공모한 ‘무명정치수를 위한 기념비’에서 <나상>으로 입상한 김종영의 작업노트가 그 잡지에 게재된 것이었다. 회화보다 조각을 공부하란 이동훈의 권유와 대전사범학교 일 년 선배인 이남규의 도움을 받아 1954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에 입학한 그는 『문화세계』를 통해 봤던 김종영을 만나 조각수업을 받았지만 실기뿐만 아니라 김종영의 철학과 농부처럼 꾸준하게 작업하는 그의 태도에서 큰 영향을 받아 평생의 은사로 함께 했다. 미술대학에서 김종영을 포함하여 장발과 장욱진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삶에 큰 의미를 지녔다. 그 인연으로 최종태는 훗날 김종영의 평전을 비롯하여 장욱진을 기억하는 『장욱진, 나는 심플하다』(김영사, 2017)를 출간했다. 이렇게 볼 때 최종태의 수업시대에 많은 사람으로부터 좋은 경험을 하였으나 이동훈, 장발, 김종영, 장욱진은 그에게 잊을 수 없는 스승임을 알 수 있다.
최종태의 자택에서 그의 앨범을 전수조사하고, 여러 자료를 조사, 비교한 결과 현재까지 파악한 그의 미술대학을 졸업한 1958년까지 재학시절의 습작은 2학년 때 교내 미술전에서 장려상을 받은 <두상>(1955년)(아카이빙 작품코드의 일련번호 3437, 이후 작품명 뒤의 숫자는 작품코드의 일련번호임), 3학년 때 제작한 콘트라포스토 자세를 취한 여성 전신상(1956년)(3415), 4학년 교내 미술전에서 장려상을 받은 <아침>(1957)(3417)을 포함하여 총 6점이다. 그중 <아침>은 김종영이 1953년 영국에서 개최된 ‘무명 정치수를 위한 기념비’에 출품한 <나상>의 특징인 턱을 괴고 상념에 잠겨있는 인체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습작에서는 3학년 때 제작한 인체 입상과 달리 묘사보다 덩어리에 집중하여 훗날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추상적으로 단순화된 인체조각이 이 작품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손을 올려 생각에 잠긴 형태는 1970년 국전에서 추천작가상을 <회향>(3404)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반면에 <아침>과 같은 해에 제작한 <여인입상>(3445)은 체적을 비워 덩어리보다 인체의 구조에 더 집중하고 있음을 볼 때 전통적이고 3학년 때 제작한 전형적인 인체소조와 함께 인체를 대상으로 하더라도 다양한 표현방법을 탐구하는 학습에 충실했음을 알 수 있다.
최종태의 초기작품
1958년 미술대학을 졸업한 그는 여러 고등학교의 교사로 재직하던 중 공주고등학교에 근무하던 1959년 제8회 국전에 처음으로 출품했다. 그는 부친의 친구가 운영하던 목재소에서 나무를 구입해 깎은 <입상>(3414)으로 입선을 하였다. 당시 출품된 작품들은 품질이 나쁜 석고로 제작한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그가 출품한 이 조각은 덩어리의 양감과 나무의 질감이 두드러진 나무조각이었던 것이다. 이 작품에서도 팔을 올려 턱을 괴고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어서 ‘무명정치수를 위한 기념비’ 국제공모전에 출품한 김종영의 턱을 괴고 상념에 잠긴 여성을 표현한 <나상>의 영향이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최종태의 작품은 볼륨을 더욱 풍부하게 표현하고 있으나 형태에 있어서 김종영의 영향을 강하게 반영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그의 관심이 생각하는 여성이 불러일으키는 문학적 감성보다 형태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요소가 단순하면서도 풍부한 양감이다.
1960년의 제9회 국전에는 인체의 세부보다 덩어리가 더 두드러지며 양감이 풍부한 <서 있는 여인>(3410)으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했는데 인체의 동세가 아니라 중량감이 강조된 덩어리를 더 강조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은 훗날 그의 인체조각이 세부묘사를 절제하고 하나의 덩어리로 나타나는 출발점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1960년대 초반의 작품이 대체로 입상뿐만 아니라 좌상 등을 통해 인체가 보여주는 형태와 공간에 대해 탐구하고자 했음도 알 수 있다.
최종태의 초기작품에서 인체묘사를 버리고 변형, 왜곡된 인체를 통해 형태 자체에 집중한 것은 1964년 대전문화원에서의 첫 개인전이었다. 이 전시에 출품한 작품 중에는 그의 유일한 초상조각인 <형태>(3413)도 포함된다. 인체라기보다 유기적인 형태에 가까운 이 작품에서 가운데에 뚫린 구멍은 헨리 무어(Henri Moore, 1898~1986)>의 조각을 작품을 연상시킨다. 1964년에 제작한 <누워있는 여인>(3428)는 무어의 형태로부터 영향을 받은 작품, 특히 이 시기가 한국에 앵포르멜 선풍이 일고, 국전에서도 앵포르멜 경향이 확산된 점을 주목하면 그의 이러한 실험적인 작품이 앵포르멜을 포함하여 유기적인 추상조각에 대한 연구와 탐색의 결과로 나타난 것임을 알 수 있다. 연구팀이 작가에게 문의하였을 때 그는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까지 마리니(Marino Marini, 1901~1980), 아르프(Jean Arp), 1886~1966), 무어 등의 조형성을 실험하였다고 밝힌 바 있으며, <형태>가 특히 아르프의 조각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여러 구술에서 최종태는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 서구 현대 조각가로서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 1876~1957)와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1901~1966)라고 밝힌 바 있고 <형태> 이후 추상조각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 전체에서 예외에 속한다. 그러나 제1회 개인전에서 그는 <형태> 외에도 격렬한 형태변형을 통해 재현이 아닌 조형으로서의 인체를 모색한 작품 여러 점을 발표했다.
제1회 개인전 이후 두상에 전념했던 최종태는 1966년 공주교육대학을 거쳐 1967년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에 교수로 부임하면서 왕성한 형태실험에 집중했다. 그것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이화여대에 재직하던 1968년과 69년 사이에 현재 제작한 7점을 촬영한 사진이다. 이 시기의 작품에서 그의 조형적 변화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음도 주목된다. 모두 서 있는 사람의 형태를 모티브로 하고 있으나 장승처럼 비례를 무시한 납작한 구조에 모두 정면을 향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더러 좌우대칭이 아니라 비균제의 요철이 나타나거나 또는 평면성을 띤 것도 있어서 이 시기 그의 관심이 형태의 실험과 모색에 집중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들은 시멘트로 제작한 것이기 때문에 1970년 자리를 서울미대로 옮기면서 무게와 보관의 이유로 작가 스스로 모두 폐기하여 현재 사진으로만 남아있어 아쉽다. 그러나 1958년의 <서 있는 사람>(5304)는 이화여대 시절의 모색기에 탐구했던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므로 그 작품에서 발견한 방법을 더 발전시킨 것임을 알 수 있다.
연구팀이 확인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작품은 1967년에 제작한 <서 있는 사람>(5006)으로서 일찌감치 청동으로 주조했기 때문에 유실되지 않은 채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의 회고전에서도 전시될 수 있었다. 하늘로 향해 치켜든 두 팔 위로 나란히 병렬시킨 큰 손바닥은 비례를 무시한 크기이지만 구조적으로 얼굴 위에 또 하나의 사각 형태를 올려놓은 것 같다. 이목구비를 지각할 수 있을 정도에서 최소한으로 형태만 드러내는 대신에 덩어리를 강조하고 있으나 정면에 비해 옆면은 얇게 처리함으로써 훗날 그의 작품에 특징적인 정면성이 두드러진다. 이런 특징은 이듬해 제작한 <서 있는 사람>(3405)에서도 나타난다. 두 팔이 서로 붙어있어서 어깨로부터 연결된 팔의 형태를 마치 사각형 창처럼 표현하였으며, 가슴의 볼륨을 분명하게 표현하면서 치마 아래 두 발이 나란히 정면을 향하고 있어서 장승과 같은 토템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정면성과 함께 육중하지 않지만 기념비성도 나타난다. 같은 해의 작품(3406)에서는 수직성을 강조하기 위해 세부는 더욱 단순화하는 대신 얼굴을 거의 어깨 속에 묻어 추상화된 인체를 발견할 수 있다.
1968년 최종태는 4·19학생혁명의 열기를 아직 간직하고 있던 후배들과 의기투합하여 ‘현대공간회’를 창립했다. ‘신시대를 증언하는 사명감을 가지고 새로운 조형언어로써 참신한 공간을 창조한다’는 선언문과 함께 출발한 이 조각단체가 1968년 12월 명동 삼보화랑(三寶畫廊)에서 가진 창립전에 <남자와 여자>, <서 있는 사람>을 출품한 이래 최종태는 1984년까지 매년 출품했다. 현대공간회는 1969년 경복궁에서 야외조각전을 가졌는데 이 전시에 출품한 <가족>(3444)은 훗날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도상의 형태, 특히 성가족의 도상적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1970년대 이후, 자기세계를 찾기까지
1963년 국전 추천작가로 선정된 최종태는 1970년 국전에 <회향(懷鄕)>을 출품해 추천작가상을 받았다. 구술채록에 의하면 원래 이 작품은 서울신문사의 야외조각전에 출품하기 위해 등신대 크기의 시멘트로 제작한 것인데 야외조각전이 취소됨에 따라 국전에 출품했다고 한다. 제목 역시 고향인 회덕의 ‘품을 회’자를 붙여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의미(回鄕)이 아니라 ‘고향을 품는다’는 의미로 붙였다고 한다. 이듬해 그는 서울미대로 옮긴 지 일 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학교의 승인을 받아 이 수상에서 받은 상금에 학교의 연구비를 보태 세계일주를 떠났다. 거의 반년(한 학기) 동안 일본을 거쳐 미국, 유럽, 이집트에 이어 동남아시아를 돌아보고 귀국한 그는 즉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가서 반가사유상을 다시 보고 곧장 경주로 향해 석굴암을 보았다. 그가 세계여행을 결심한 것은 서구 현대조각을 알아야겠다는 마음도 컸겠지만 서양조각의 원류가 무엇인지 눈으로 직접 확인하겠다는 갈증과 염원이 더 크게 작용했다. 그래서 로마, 르네상스와 바로크 조각은 물론 마리노 마리니, 에밀리오 그레코(Emilio Greco, 1913-1995), 파치니(Pericle Pazzini, 1913-1987)와 같은 근·현대조각을 볼 수 있는 이탈리아에 그치지 않고 그리스를 거쳐 아직 남한과 수교관계가 없던 이집트로 갔다. 그러나 그것도 마음의 흡족함을 느낄 수 없어 돌아오는 일정은 동남아시아와 타이완까지 포함시켰다. 이 여행은 그가 자기를 새롭게 발견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즉 그가 1967년경 봤던 반가사유상이 이 여행을 계기로 새롭게 다가왔다. 그의 작품에서 바로 선 채 고개를 갸웃한 채 턱을 괴고 있는 형태는 김종영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반가사유상으로부터 착안한 것이란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도상적으로 반가사유상을 떠올리게 만드는 턱을 괴고 앉아있는 여성의 도상은 <좌상>(5469)에서 볼 수 있듯이 1980년대 후반부터 나타나고 있으며, 1990년대 그는 소조뿐만 아니라 석조로도 많은 생각하는 여성상을 만들었다.
그러나 김종영은 여전히 그가 넘어야 할 큰 산이었음을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에 집중적으로 제작한 <얼굴> 연작, 특히 얼굴을 추상화시킨 형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1975년의 <얼굴Ⅵ>(3501)에서는 김종영이 아니라 살집이 비교적 풍부한 자코메티의 얼굴, 특히 그가 동생을 모델로 제작한 흉상이나 브랑쿠시의 계란형으로 환원한 두상을 떠올리게 만들지만 많은 얼굴조각에서 김종영은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1975년에 나무를 깎아 만든 <얼굴>(3401)이 김종영도, 자코메티도 브랑쿠시도 아닌, 굳이 형태적 유사성을 따진다면 오히려 모딜리아니에 가까운 것이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조각을 볼 때마다 이 얼굴이 다른 누구도 아닌 최종태 자신의 모습이란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다른 얼굴조각에서도 볼 수 있듯이 몇몇 조각은 그의 모습과 흡사한 경우도 있다. 1978년에 그린 그의 <얼굴(자화상)>(평면 5747)과 비교하면 그것을 보다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
1970년대 그는 사십 대였고, 셋방살이를 하다 창천동에 비로소 자신의 집을 차린 시기였으며 자신의 일을 찾아 탐색에 고민을 하던 때였다. 당시 그는 ‘어두운 삶에서 밝은 형태를 찾는 작가’였다. 그에게 본 사람은 없으나 분명히 있는 아름다움은 숙제였다. 그는 마치 무지개 너머의 세계로 향한 동경을 지닌 소년처럼 그 아름다움을 찾아 나선 모험가이자 탐색가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에게 조각작업은 세계로 향해 자신의 시선을 열어놓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향해 끊임없는 반성을 하는 과정인지 모른다. 그의 작품이 종교적으로 비쳐지는 이유도 비단 그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이러한 자기반성이 불러일으키는 경건함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를 아름다움의 사제라고 부르는 것이 결코 과장은 아닐 것이다. 1975년의 <얼굴>(3404, 5820)은 이제 체적을 완전히 비워버려 창처럼 뾰족하고 날카로운 형태를 보여준다. 이런 작품이 나타나게 된 배경으로 유신시대의 억압에 대한 분노를 들 수 있다. 직접적인 발언을 하지는 않으나 내면에 잠재된 저항의식을 날카로운 첨형의 형태로 표출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1981년의 개인전에 출품한 많은 얼굴이 두께를 거의 줄인 납작한 면에 가는 목을 중심으로 머리와 얼굴이 서로 아슬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어서 보기에 따라서는 도끼를 떠올리게 만드는데 이 또한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신군부 집권세력을 바라보는 작가의 착잡한 심정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1985년에 제작한 <얼굴>과 같은 작품에 대해 그와 오랫동안 교유했던 김형국은 “정면에서 바라보면 도끼날 끝이라 사람 얼굴인지 금방 드러나지 않지만, 옆에서 바라보면 눈, 코, 입이 겨우 흔적처럼 드러나는데 그의 도끼 여인은 부조리를 만나면 한방 갈기겠다는 그런 기세”라고 썼다. 이즈음 그의 첫 수상집 제목이 『예술가와 역사의식』인 점도 의미심장하다.
작품 형식의 변화과정을 주목할 때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까지 최종태의 작품 속에는 김종영의 그림자가 남아 있었고, 특히 얼굴을 모티브로 한 조각에서 그런 것이 더 많이 드러나고 있으나 그에 비례하여 스승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 의지도 강하게 작용하여 자기세계를 찾으려는 노력이 더 강하게 나타났고 특히 반가사유상을 다시 발견함으로써 그는 비로소 김종영으로부터 벗어나 자기의 형태를 가질 수 있었다. 1980년대 그의 작업에 나타난 또 다른 특징으로 많은 교회조각 제작에 헌신하는 가운데 그의 드로잉에서도 손을 소재로 한 작업 수도 부쩍 늘었으며, <손>(5425) 조각도 나타났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면서도 소재가 얼굴이든 인체든 조각의 비교적 체적이 풍만하면서 둥근 곡선으로 변화하고 있음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1988년 호암갤러리에서 1970년대 후반 조각과 1985년과 1988년에 집중적으로 제작한 조각 60여 점과 회화 · 드로잉, 목판화 100여 점을 전시한 대규모 회고전은 최종태가 자신의 작업을 정리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 전시에서 출품한 작품에 대해 정병관은 “입체주의와 원시주의 그리고 추상성과 구상성이 서로 얽혀서, 그것도 단계적인 발전과정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순환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최종태 조각의 양식적 특징”이라고 해석했다. 호암갤러리에서의 대규모 개인전 이후 작업의 변화과정에서 1990년대에는 반가사유상으로부터 발전된 <앉아 있는 여인>이 조금씩 형태의 변주를 보이며 많이 제작되었으며 얼굴도 거의 평면화된 가운데 형태의 변화도 다양하게 나타났다는 점도 주목된다.
형태를 탐구하는 조각가 최종태 작품의 형태는 어디서 온 것일까? 그의 조각은 시종일관 인간의 형태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인간의 형상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는 인체조각이 분명하지만 개념적이면서 추상적으로 인체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조각은 이집트나 중세 고딕의 종교조각, 아프리카의 전통조각, 심지어 장승에 대해 떠올리게 만든다. 정면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이집트 조각을 연상시키지만 인체를 단순화하고 평면적으로 처리한 것은 그가 ‘본질적인 형태’를 찾아가면서 발견한 ‘새로운 형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각작업이 어차피 물질을 다루고 형태를 만들어가는 과정인 만큼 어떤 재료를 선택하여 어떻게 형상화하는가가 중요하다. 그는 재료의 학대를 기피한다. 이 말은 곧 재료에 과도한 손질을 가함으로써 재료가 지닌 물질성을 박탈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형태적 맥락에서 그의 작품들은 체적을 최소화한 경우가 많다. 그것은 소조이든 조각이든 마찬가지인데 그렇게 함으로써 부피의 압박, 중량의 하중으로부터 자유로운 것도 특징이며 따라서 작품의 정면성은 강화된다. 체적을 비워나가되 왜소하지 않고, 촉각적 요소를 강화함으로써 작품의 자기완결성이 더욱 두드러진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매스와 볼륨보다 단순하면서 분명한 선(線)이 만들어내는 형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고자 한 의도가 드러나고 있는 까닭에 그의 작품은 실루엣처럼 평면적이면서 동시에 견고한 응축성을 지닌 경우가 많다.
그가 생각하는 아름다움, 회화와 드로잉을 통해 파악한다.
1970년대 창천동에서 살 때 미술 숙제를 하는 아이들 옆에서 같이 그림을 그리며 시작한 최종태의 드로잉이나 회화 작업은 그의 조각만큼이나 일상이 되었다. 1970년대 그의 드로잉 중에는 손 소묘가 많다. 그가 그린 손에 대해 그가 이화여대에 재직할 때 조각을 전공하는 학생이었고 졸업 후에는 소설가로 활동한 강석경은 “예술가의 고통을 보여주는 것이자 붉은 매직 마커로 칠해진 손은 피 흘리는 것 같고, 엄지를 세운 채 네 손가락을 수평으로 뻗고 있는 양손은 순명(順命)을 나타내는 듯하다. 너무나 진실하여 처절한 느낌이 들 정도인데, 손은 몸의 어떤 부분보다 영혼의 진실을 자 드러낸다”고 말했다. 그의 회화와 드로잉에는 풍경도 많지만 얼굴, 특히 젊은 여성을 그린 것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최종태의 드로잉과 회화, 조각에서 청순하고 순결한 소녀의 형상을 모티브로 한 작업은 인간존재의 존엄은 물론 종교적 초월과 명상을 추구하는 구도적 세계를 드러낸다.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소녀의 얼굴인가? 흥미롭게도 그는 모델을 세우지 않고 작업한다. 그런 점에서 소녀는 마리아일 수도 있고, 관음보살일 수도 있으며, 작가의 어머니일 수도 있다. 즉 그가 표현하고자 한 소녀는 그의 의식 속에 잠재해 있는 하나의 이상형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서 재현은 특별한 중요성을 지니지 않는다. 그의 작업방식은 특정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담긴 형상을 끄집어내는 것 즉, 심상(心象)의 표현이다.
평생 소녀의 모습을 표현해온 최종태의 작품에는 가냘프고 순진한 소녀의 외양을 통해 발견하고 느끼는 시각적 즐거움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것은 작가가 직관을 통해 추상해낸 아름다움으로서 인간성의 보편성에 바치는 존경을 예술의 형태를 빌어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특징은 조각에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된다. 특히 편안하게 앉아있는 소녀의 다소곳한 모습에서 순수한 아름다움과 함께 이집트 조각에서 볼 수 있는 영원성으로 향한 그의 동경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소녀의 표정에서 볼 수 있는 편안하고 넉넉한 분위기를 왠지 그의 부인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모델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서 형태의 변화가 지극히 완만하고 또 어떤 전형성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지만 진부하고 상투적인 형태로 고착하지 않고 있음도 중요한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인물들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정서로서 담졸(淡拙)과 정일(靜逸)을 들 수 있다. 차분하면서도 정신의 깊이를 생각하게 만드는 인물상들은 인간의 파토스 너머에 있는 존재의 고귀함을 떠올리게 만든다.
최종태의 작품을 보면 공자가 말한 사무사(思無邪)를 떠올리게 만든다. 공자는 시삼백을 말했지만 최종태는 조각과 드로잉을 통해 마음속에 일어나는 번뇌와 욕망을 다스리고 궁극적으로 그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에 도달하고자 한다.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사람은 아름다움의 껍질이 아니라 그 속내를 간파할 줄 안다. 이런 점은 그의 파스텔화나 유성펜, 연필 등으로 그린 드로잉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 평면작업은 그의 작업이 과정에의 순응이란 특징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다. 파스텔 그림 또한 주로 여성의 형상을 그린 것이긴 하지만 구체적인 대상의 재현보다 작가의 내면에 떠오른 형상을 끄집어낸 것인 까닭에 정신성이 더 강조되고 있는 바 형태의 생명을 찾아가는 과정과 함께 무한으로 향한 작가의 동경이 만들어낸 단순미를 느낄 수 있다. 맑고 투명하며 또 어떤 부분에서 강렬한 호소력을 지닌 그의 파스텔 그림을 보면서 나는 문득 아름다운 여성에게서 맡을 수 있는 향기와 맑은 날 정오의 햇살, 어린아이의 때 묻지 않은 웃음에서 발견할 수 있는 원색의 경쾌함을 느낀다. 더 나아가 그의 그림과 조각에는 평범한 한국여성의 얼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꾸미지 않은 순수, 그 수수함과도 같은 것도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한편 얼굴을 그린 그의 작품을 보면서 불상을 떠올리게 된다는 점도 밝혀두어야겠다. 원만하면서 평화로운 미소를 지닌 불상이 그의 작품에 있어서 인간적인 풍모 너머에 있는 평화와 안정을 생각하도록 만든다면 이집트 조각에 대한 관심은 플라톤의 그것과 닮은 구석이 있다.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원리의 추구, 그는 그것을 찾아 동서고금을 넘나들며 자신만의 형태를 만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조각 작업을 하는 그의 작업태도는 어딘지 세속으로부터 초탈한 거사(居士)의 모습과 닮은 구석이 있다. 특히 어느 한 곳에 기울지 않는 중용의 미덕은 그의 작품에서도 마치 장식이 배제된 백자에서 느낄 수 있는 고고한 아름다움, 분청사기에서 볼 수 있는 질박한 고결함과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
종교조각, 한국 교회미술의 토착화를 위한 노력
1958년에 오기선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가톨릭에 입교한 최종태는 60여 년간 다수의 교회 조각을 제작했다. 그가 처음으로 교회조각을 제작한 것은 1963년이었다. 마침 대흥동성당 오기선 주임신부는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폭격으로 파괴된 성당을 다시 건축하던 중이었다. 고딕 양식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대흥동성당은 철근콘크리트로 수직의 직선을 강조한 좌우대칭 구조의 단순하면서 웅장한 현대건축인데 오 신부는 성당 정면(facade) 외벽에 12사도상을 조성할 계획으로 한창 젊은 최종태와 이남규에게 각각 6사도상을 제작하도록 주문했다. 완공할 당시 대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던 대흥동성당의 정면에 <12사도 부조상>(3486)이 설치된 것은 1963년이었다. 이때 왼쪽의 6사도상을 제작하면서 최종태는 한복을 입은 <성모상>(3414)도 함께 제작했다. 한복을 입은 성모상은 당시 매우 이례적으로 여겨졌을 뿐만 아니라 높이도 2미터가 넘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최초의 성모상인 이 교회조각은 석고로 주형되지 않은 채 작가 스스로 폐기하여 현재 사진으로만 구조와 형태, 의복 표현을 파악할 수 있을 따름이다.
대흥동성당에 이어 1960년 마산 양덕성당의 <성가족상>(1177)과 1968년 대방동성당의 부조 성상(3443), 1970년 1973년 절두산성지의 <성모상>(1178)과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1060), 1980년 한강성당의 <김대건신부상>(1102)과 <십자가의 길: 14처>를 비롯한 많은 성상을 제작하면서 그의 교회조각도 전통적인 도상에 얽매이지 않는 독자적인 조형과 자기양식을 갖추어갔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1987년 명동성당 초입 설치한 <예수성심상>(1137)을 들 수 있다. 성당 내부의 14처와 함께 제작한 이 조각은 같은 해 11월 22일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봉헌함으로써 성상으로서 명동성당을 찾는 사람을 향해 두 팔을 뻗어 포용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작품은 중병을 앓다가 기적적으로 건강을 되찾은 김수태(아우구스티노)와 장순화 부부가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봉헌한 감사헌금으로 만들어졌는데 고뇌를 머금은 듯하면서도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는 예수의 얼굴로부터 옷주름에 이르기까지 세부묘사를 생략, 절제했기 때문에 화강석의 질감을 살렸으나 양괴가 두드러지면서 동시에 정면성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이 성상을 조성하면서 작가는 “제작 시기였던 80년대의 시대적 아픔을 위로할 수 있고 악한 세력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한 암묵적인 무언의 표현”이라고 밝힌 바 있다. 민주화운동의 성지였던 명동성당 입구에서 모든 사람을 향해 열린 자세로 용서와 화해, 포용의 자세로 두 팔을 뻗고 있던 <예수성심상>은 명동성당 재정비사업으로 원래 위치에서 뒤로 밀려나 본당 곁으로 이동해 재설치되었다.
한국 교회조각의 토착화는 그가 종교미술을 제작하면서 꾸준하게 추구했던 목표였다. 비단 소재와 형식으로서가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는 찾을 수 없는 한국 교회미술의 독자성을 갖추는 것이 그에게는 과제이자 소명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유럽 교회미술의 도상적 전통과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우면서 단순하되 시대정신을 반영한 교회미술의 정립을 위해 헌신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그의 이러한 신념을 실천, 즉 한국 종교미술의 토착화를 위한 그의 노력에 용기를 부여하고 평생 신앙의 동반자로서 자극과 격려를 아끼지 않은 존재였다. 최종태의 이러한 노력으로 그의 성상은 바티칸에서도 소장하고 있으며,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이 바티칸을 방문했을 때 그가 제작한 <성모상>과 <가시면류관의 예수>를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선물했다.
한국적 교회미술의 토착화란 과제를 실천하기 위해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은 것은 한국의 불교조각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것이었다. 그는 가톨릭 신자가 되기 전인 대학 4학년 여름방학 때 버스를 타고 가다 우연히 건물에 붙어있는 ‘한국불교사상대강좌’ 포스터를 보고 창덕궁 비원 앞에 있는 대각사(大覺寺)에서 불교 교리와 함께 『반야심경』, 『금강경』과 같은 경전을 배운 적이 있다. 그 이후 그는 반가사유상을 보고 자신이 추구할 조각의 방향이 거기에 있음을 깨달았다. 1971년 서양조각의 뿌리인 그리스와 이탈리아는 물론 이집트를 돌아보면서 자신이 알고 있던 조각사의 거장의 작품 앞에서도 큰 감흥을 받지 못했던 그가 귀국하자마자 박물관과 경주 석굴암을 찾은 이유도 그의 마음을 울렸던 불상을 통해 자신의 작업 방향을 다시금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일찌감치 불교교리와 경전을 공부한 바 있는 최종태는 가톨릭 신자로서 많은 교회조각을 제작, 봉헌하였으면서도 관음상을 만들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 어느 날 김수환 추기경을 만났을 때도 “언젠가 관음상을 만들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천주교회로부터 파문당하는 것은 아닐까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김수환 추기경은 “일본에서 천주교 박해시절 신자들이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십자가를 표시해놓은 관음상을 놓고 기도했다”는 말을 했다. 추기경의 말에 용기를 얻은 그는 동화작가 정채봉을 만났을 때도 관음상을 만들고 싶다는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의 뜻이 마침내 법정에게도 전해졌다. 불일암에서 ‘무소유’를 실천하던 법정 스님에게 성북동 대원각을 운영하던 길상화 김영한이 기부 의사를 밝히자 몇 차례 거절했던 법정 스님은 기부자의 간곡한 청을 받아들여 1997년 그곳에 길상사를 열었다. 길상사 회주(會主) 법정은 도심에 있는 이 도량에 모실 관음보살상 제작을 최종태에게 의뢰했다. 1999년 여름의 일이었다. 작업실을 찾아온 법정에게 그는 관음상의 도상에 나타난 머리에 쓴 관과 손에 든 병, 오른손을 든 이유를 묻자 법정은 짧게 화관(花冠), 정병(淨甁), 구고(救苦)라고 대답했다. 최종태는 이 짧은 대화를 통해 관음상의 형태를 찾았다고 회고했다. 2002년 길상사 설법전 앞에 모신 성모마리아를 닮은 <관음상>은 이렇게 태어났다. 2000년 관음재일인 4월 24일 법정 스님의 점안식으로 불상의 지위를 얻은 이 관음상은 등신대보다 조금 큰 180cm 크기의 화강석으로 만든 것으로서 법정 스님의 짧은 세 마디 대답처럼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의 삼산관을 떠올리게 만드는 화관을 쓰고 왼손에 든 정병을 가슴에 품고 오른손으로는 시무외인(施無畏印)을 결하고 있으나 그 외의 불교도상적 특징, 예컨대 보관 속의 화불(化佛)이나 가슴 장식인 영락(瓔珞), 연화좌 등을 생략한 것이 특징이다. 또한 보살의 의상인 천의(天衣) 대신 성모상에 어울리는 긴 옷을 입고 있으며 최종태의 양식이 잘 드러나는 정면성과 단순한 형상, 단아한 자세를 취한 점도 특징이다. 점안식에서 최종태는 “땅에는 나라도, 종교도 따로따로 있지만, 하늘로 가면 경계가 없다”는 말로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는(上求菩提 下化衆生) 관음보살의 대자대비와 성모마리아의 사랑이 같음을 밝혔다. 이 불상을 조성하면서 최종태와 십여년을 교류해온 법정은 2010년 3월 11일 입적했지만 그들의 좋은 인연은 관음보살상을 통해 여전히 전해지고 있다.
그 후에도 최종태에게 보살상 조성의뢰가 들어왔다. 고려 광종의 왕사였던 법인국사 탄문이 969년 운악사로 창건하였던 조계종 제25교구 본사 남양주 봉선사 주지 일관 스님의 부탁으로 1년간 석조관음보살상을 제작하여 2017년 5월 26일 ‘부처님오신 날’ 점안식을 봉행했다.
최종태의 예술관, 그의 생각
1988년의 호암갤러리 회고전 이후에도 많은 개인전을 가졌던 그의 작품량은 1998년 서울대학교를 정년퇴임할 즈음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특히 1997년은 조각만 64점을 제작하였으며, 1998년은 51점에 이른다. 이런 부지런한 작업은 2000년대에도 지속되었으며 파스텔화와 드로잉의 수도 늘어났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도 크고 작은 개인전을 가지는 가운데 고희를 넘긴 2005년 그는 고향인 대전시립미술관에서 다시 대규모 회고전을 가졌다. 초대전 개막식에서 그는 인사말을 통해 마침 같은 시기에 창원의 경남도립미술관에서 열리던 스승 김종영의 탄생 백주년 기념 전시를 먼저 소개했다. 이어서 고향의 초대를 받아 대규모 전시를 하게 된 감회와 아울러 평생 한 길을 걸어온 자신의 인생관과 예술관이 압축된 다음과 같은 자기고백적 발언을 남겼다.
“예술이 이렇게 어려운 것임을 일찍이 알았더라면 이 길을 선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후회하지는 않는다. 예술에 있어서 완성이란 것은 없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아름다움이란 알 수 없다는 것을 지금에야 알게 되었다. 모순된 부분도 있겠지만 세상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예술의 길이 끝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제는 조바심하지 않는다. 나름대로 어려운 삶을 살아왔다. 백 리 길에 절반은 와있는 것 같다. 평생 아름다움을 찾아왔지만 나는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 길을 걸어온 것을 잘 했다고 생각한다.”
사십 대를 다 보내놓고 나서 오십이 되던 1982년 어느 날, 그는 한 찰나에 ‘모른다’ 하는 것을 확실하게 아는 참으로 감격적인 순간을 맞이했다. 그 깨달음에 대해 그는 조각에 대해 모른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게 되면서 예술, 인생, 종교, 진리 등 모든 것을 모르는 것이다 하는 답을 얻었다고 했다. 참으로 통쾌한 통찰이다. 모르기 때문에 찾는 것이다. 대전시립미술관에서의 회고전 이전에 쓴 어떤 글에서 그는 자신의 작업 태도를 다음과 같이 밝힌 적도 있는데 대전시립미술관의 인사말과 비교해 보면 그가 누군가가 규정해 놓은 예술의 목표를 추구하기보다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찾아 나선 구도자와 같은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예술가에게 있어서는 자기 자신이 자신에 대한 제일의 평가자입니다. 매일같이 일하고 매일같이 반성합니다. 답을 만들어놓고 일할 수도 없습니다. 답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내일이면 생각이 변하는 것이 인생의 일입니다.”
2006년 6월 1일 국민대학교의 목요특강의 초청을 받은 최종태는 ‘조형예술, 그 있음과 없음에 관하여’란 강연을 했다. 그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예술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생각을 밝힌 후 결론으로 “의미가 예술을 지배할 때 예술은 쇠퇴하고, 예술이 의미를 배제할 때 예술은 공허해진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면서 마감했다. 그는 나와 대화할 때마다 마지막에는 꼭 이 말을 던지곤 했는데, 그 기원은 임마누엘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말했던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Gedanken ohne Inhalt sind leer, Anschauungen ohne Begriffe sind blind)”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험과 이론 사이의 균형있는 상보관계에 대한 칸트의 지적이 예술에 대한 금언으로 해석된 것인데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예술가로서 최종태가 지키고자 한 태도가 무엇이었는지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그가 80세를 맞이한 즈음, 정확한 시간은 작가 자신에 잘 알겠지만, 어느 날 그는 나에게 “이제는 머리가 맑아졌어. 그동안 한국미술사, 서양미술사, 자코메티와 브랑쿠시, 김종영과 장욱진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고 나를 지배했는데(괴롭혔는데) 이제는 깨끗해진 거야. 다 떠난 거지. 추사(秋史)가 말했던 ‘아용아법(我用我法)’이 이런 상태를 말하는 것이구나, 깨달았어”라고 말했다. 2017년 구술채록을 할 때 그는 펜으로 종이에 하나하나 적어가며 자신이 느끼고 도달한 상태를 설명하기도 했다.
이즈음 그의 작품에도 작은 변화가 나타났다. 대체로 성상조각에 색채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주로 나무에 채색을 했는데 밝고 화사한 원색이나 파스텔 색조가 주조색을 이루고 있다. 이 색채는 색동, 단청, 꼭두의 화려한 원색을 떠올리게 만들지만 <기도하는 사람>(5062)이나 <성모자상>(5055)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불투명하기보다 그의 파스텔 그림이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투명한 것이 특징이다. 언젠가 그는 나와 색채에 대해 대화하던 중 교회미술과 색채를 주제로 한 외국 서적을 꺼내면서 신성한 색채에 대해 들려준 바 있다. 말하자면 색채에도 신비로운 신성이 깃들 수 있다는 것인데 그가 나무에 채색하는 것이 그 신성으로 향한 기원을 담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재료의 재질감을 강화하고 형태를 드러내기 위해 지금까지 색채 사용을 절제했던 그가 파스텔화를 그리듯이 조각에도 거리낌 없이 밝고 화사한 채색을 하는 것을 보면 이제 그 어떤 원칙이나 규범에도 얽매이지 않고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하겠다는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을 따름이다.
그에게 있어서 순리(順理)는 작업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동력 중의 하나이다. 평생 인간의 얼굴이나 인체만을 천착해 왔으므로 변화는 더디지만 작업의 결과는 언제나 자연스럽고 막힘이 없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런 까닭에 그의 작품과 최종태가 풍기는 분위기를 통해 늘 새로운 것을 강박적으로 추구해야 안심이 되는 현대미술의 일반적 흐름으로부터 초월해버린 한 예술가의 달관에 이른 경지와 그 넉넉함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작업은 그에게 삶의 연속이자 그 자체이며, 마치 물 흐르듯 자연의 순리에 따르고자 한 과정이자 그 결과인 것이다. 나아가 그의 작품이 대체로 인간적 규모를 벗어나지 않으며 예각보다 부드러운 곡선을 선호하고 있다는 점도 발견된다. 부드러운 형태도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거칠고 일정한 율동을 지닌 표피를 지니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피부의 조직과도 같은 섬세하면서 거친 그 표면은 더듬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킬 지경이다. 그러나 표면의 질감이 불러일으키는 촉각의 충동보다 형태가 선행한다. 그가 찾고 있는 형태는 아름다움을 채우는 그릇, 언제나 채워질 수 있지만 또 언제든지 비울 수 있는 그런 수용적 가능성을 지닌 세계이다.
성과와 과제
‘2021 원로작가 디지털 아카이빙: 최종태’ 사업을 종료할 시점에 최종태에게는 중요한 과업이 생겼다. 종로구 평창동에 종로구립최종태미술관을 건립하는 것이다. 종로구가 부지를 제공하고 작가가 건축비용을 부담하여 개관할 이 미술관에 기증할 작품을 작가가 골라놓으면 아카이빙 연구팀이 그것을 목록화하는 작업도 병행했다. 이와 함께 그는 구순을 맞아 김종영미술관에서 ‘최종태, 구순을 사는 이야기’를 열었다. 이처럼 최종태의 작업은 현재 진행형이므로 아카이빙 작업 또한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일 년간 진행한 이 아카이빙의 성과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지금은 유실돼 사진 등의 자료에만 남아 있는 최종태의 초기작업 대부분을 찾아내 목록화한 점이다. 이 초기작업들은 최종태의 양식이 성립하는 과정과 그가 찾고자 한 토착적 형태의 기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아울러 실물과 기록의 대조를 통해 제목으로부터 제작연도, 재료기법, 규격 등 작품에 대한 기본정보를 수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시이력과 출처(provenance)를 객관적인 자료와 사실에 근거하여 보완함으로써 전작도록에 필적하는 기초정보를 정리했다.
둘째, 개인전을 포함한 전시 도록, 수상집과 함께 여러 매체에 발표한 작가의 글로부터 비평문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과 예술에 대한 대부분의 문헌자료를 발굴, 정리함으로써 작가의 생애와 작품연구에 필요한 기초자료를 체계화한 점도 성과로 꼽을 수 있다.
셋째, 전시를 통해 발표된 작품은 물론 수적으로는 많지 않으나 그가 제작한 기념조각, 공공조각을 포함한 대부분 작품을 정리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넷째, 교회조각에 대한 전수조사이다. 이 조사를 통해 1963년 대전 대흥동 성당의 12사도의 일부를 제작한 것으로부터 2021년 위례성당에 이르기까지 전국에 산재한 교회조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과제도 남아 있다. 판매 등으로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에 대한 정보를 정리하는 데 필요한 기초자료를 입수하지 못하여 소장자(처)를 완전하게 밝히지 못한 것은 숙제로 남아 있다. 이 부분은 향후 과제로 남겨둔다. 아울러 이 아카이빙에서 누락된 부분은 곧 개관할 최종태미술관이 이어받아 완전한 형태로 정리하기를 기대한다. 이를 위해 우리 연구팀의 성과가 최종태미술관에도 고스란히 이관돼 아카이빙 사업이 지속되기를 기대한다.
아카이빙을 위해 일 년 동안 자택의 이 층을 연구원의 공간으로 제공하며 온갖 편의를 제공해주신 작가와 사모님 김길자 여사, 가족께 감사드린다. 팬데믹 상황에서 노부부만 조용하게 거주하는 공간에 우리 연구팀이 주기적으로 드나들며 이것저것 물어보고 성가시고 귀찮은 요구를 할 때마다 자상하게 대해주신 배려가 없었더라면 이 목록화 사업의 성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마치 돋보기를 들고 깨알 같은 글을 찾아 정리하거나 지워지거나 겹쳐진 문자를 찾아내는 문헌학자처럼 최선을 다해 자료의 발굴과 정리에 헌신하고 작품의 실물을 확인하기 위해 무더위와 추운 날씨에도 출장을 마다하지 않은 연구원들에게도 감사드린다.
아카이빙의 목적과 가치는 자료의 축적과 정리, 목록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활용에 있다. 우리의 연구가 제대로 활용될 때 연구팀의 노고가 보람으로 자리하게 될 것이다.
대표집필/최태만(책임연구원)
1. 1954-1958년 서울대학교 재학 시기
대전에서 미술 교사를 퇴직하고,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한 최종태는 4학년 재학시절 석조 <아침>으로 교내 미술전에서 장려상을 받았다. 작가는 <아침>이 스승 김종영이 1953년 영국에서 개최한 ‘무명 정치수를 위한 기념비’에 출품한 <나상>의 특징을 물려받았던 것으로 기억하였다. 이후의 국전 수상작품 <회향> 특유의 포즈가 이때부터 등장하였다.
1956년 서울대학교 조소과 3학년 재학시절 제작한 소조 작품. 팔을 머리 뒤로 들어 올린 상반신 표현은 1960년대 말 최종태의 조각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으나, 과장된 콘트라포스토 등, 전체적인 동세와 풍부한 볼륨은 이후의 작품들과 사뭇 다른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재학시절에는 인체 소조 수업에 충실했던 면을 볼 수 있다.
2. 1960년대: 1964년 개인전(대전 시기)
1964년 대전문화원에서의 첫 개인전에 출품한 추상 조각 <형태>. 최종태는 <형태>가 자신의 모든 작품 중 유일한 추상 조각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가운데 구멍은 무어의 조각을 연상시키는 ‘개방적 형태’에 관한 실험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에 관하여 최종태는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까지 마리니, 아르프, 무어 등의 조형성을 실험했었다고 밝혔다. 이 작품은 특히 아르프의 조각에 영향을 받았다고 설명한 바 있다. <형태>의 예처럼, 최종태는 1970년까지 아르프, 브랑쿠시, 자코메티, 마이욜 등의 서양 현대조각과 김종영, 장욱진과 같은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연구하면서 자신만의 조형성을 모색하였다.
3. 1968-1969년 이화여대 재직 시절
1968-69년 사이에 제작된 작품들로, 총7점의 사진이 남아 있다. 작가 스스로 ‘이화여대 시기’로 설명하였다. 서울대학교 졸업 이후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 아르프, 브랑쿠시, 마이욜 등의 형식을 자신의 작품에 적용하며 조형적 실험을 거쳤으나, 이화여대 재직시절에는 이전의 실험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조형적 특성을 보였다. 대부분 납작하고 평면적이며 직립하는 형태를 띤, 추상에 가까운 인체 조각으로서 시멘트로 캐스팅한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는 이후에 다시 반복하지는 않았다. 당시 제작한 7점 중 5점은 작가 스스로 폐기하였고, 나머지 작품도 현재 소실된 상태이다. 이 시기는 최종태가 한국적 정서로 간주하였던 수줍음, 그리움과 같은 감정의 표현과 이와 관련된 조형적 실험의 시기로 볼 수 있다.
1958년에 영세를 받고 가톨릭에 입교한 최종태는 60여 년간 다수의 교회 조각과 성물을 제작했다. 1969년경 제작된 이 조각은 최종태의 첫 성모상으로, 한복을 입은 것이 독특하다. 한복을 입은 성모상은 ‘종교미술의 토착화’에 관한 최종태의 관심을 보여주었지만, 당시로는 매우 이례적인 성모상 형식이었기에 의뢰받았던 성당에 설치되지는 못했다. 작가 역시 석고 캐스팅하지 않은 채, 스스로 폐기하였고 현재 작품 사진만 남아 있다.
4. 1970년대- 서울대학교 재직 이후
1970년 19회 국전에서 추천작가상을 수상한 <회향>은 1970년대 최종태 작품 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여인의 수줍음이나 그리움과 같은 한국적인 정서를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현재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대학교 미술관, 작가가 각각 1점씩 소장하고 있다. 이 시기에는 또한 '기도하는 사람' 연작이 처음 시도되기도 하였으며 동시에 기도자의 '손' 연작도 나타났다. <회향>이 국전 추천작가상을 수상했을 당시, 최종태는 부상으로 받은 지원금으로 유럽과 미국, 이집트와 동남아시아를 돌아보는 세계여행을 하였다. 그는 이 때의 여행이 서양미술에서 고대와 현대조각의 특징을 파악하는 기회였을 뿐 아니라, 석굴암이나 백제 반가사유상과 같은 한국의 전통 조각의 아름다움을 체감하게 된 계기로 설명한다. 이에 따라 이 시기에는 현대적 조형으로 재해석한 '사유상' 연작도 시작되었다. 또한 최종태는 <회향>의 수상 외에도 국전 8회 입선, 9회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였고, 10회 특선(무감사), 11회 특선(무감사), 12회 추천작가, 13회 추천작가로 전시에 참여하였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김종영 조각에서 영향을 받은 <얼굴> 시리즈가 등장하였다. 이 시기에는 나무를 주된 재료로 사용하였고, 삼각형 형태의 뾰족하고 단순화된 얼굴 형태에는 김종영의 추상 조각에 대한 최종태의 재해석을 엿볼 수 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주요 형식이 반복되었기보다, 뾰족한 삼각형의 두상, 사각 형태 얼굴의 브론즈 전신상, 기도하듯 손을 모은 대리석 2인상 등 다양한 소재와 재료를 통한 조형적 실험이 두드러졌다. 1970년대의 다양한 조형적 실험은 1980년대의 단순화된 형식의 반복에 비춰볼 때 대조적인 방향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5. 1981-1986년 – 추상적 형상의 시기
1981년 4월에 열린 개인전부터 최종태 특유의 독특한 조형성이 나타난다. ㄱ자 또는 도끼와 유사한 형태의 두상 시리즈가 1980년부터 시작되었다. 작가는 이러한 변화가 당시 한국의 정치적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밝혔다. 위와 같은 작품들이 최종태의 1980년대 조각을 대표하는 주류 형식으로 자리 잡은 이후, 이 형태에서 양감이 증감하는 정도의 변화가 반복되었다. 반면 전신상의 경우는 불교의 반가사유상을 연상시키는 손을 턱에 괴고 생각에 잠긴 ‘사유 자세’의 형식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자세는 좌상뿐 아니라, 직립 전신상 등에서도 발견된다. 1980년대 이후 최종태의 조각은 두상, 전신상, 2인상으로 간략하게 삼원화되는 경향을 보이며, 1970년대 종종 만들었던 반신상이나 흉상은 이 시기에 거의 만들지 않았다. 목조각이 주로 제작되었던 1970년대와 달리, 1980년대 작품은 대부분 브론즈 캐스팅으로 제작되었고, 철 등의 일부 금속 조각과 대리석, 오석, 나무 등이 일부 작품에 사용되었다.
6. 1987-2004년 – 다시 형상으로
1980년대 초중반에 기하학적 추상처럼 보이는 두상 시리즈와 단순화된 전신상이 주류를 이루었다면, 1987년 이후에는 마치 1950년대의 형상 작품을 보는 듯, 이전의 두상과 전신상 형식이 다시 나타났다. 1987년부터 머리카락과 이목구비가 구체적으로 묘사된 두상이 시도되었고, 1988년에는 <함성>과 같이 하늘을 향해 팔을 들어 올리는 등, 포즈의 동적인 변화도 두드러졌다. 이러한 경향은 1987-88년의 짧은 시기에 가장 절정을 보이다 1990년부터 다소 단순화하며 완화되었다. 1987년은 최종태가 연구년을 보냈던 해로, 당시까지 지속하였던 추상적인 형태에 변화를 시도하기에 적절한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뿐 아니라 1987-88년은 정치, 사회적인 큰 변혁, 구체적으로 87 민주화 운동과 88 서울 올림픽 개최 등의 역사적 변곡점과 일치하였던 시기로 이와 같은 내·외부적인 조건이 작가에게 중요한 변화 기점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은퇴를 2년 앞둔, 1996년에는 일시적으로 1980년대에 보였던 단순화된 ㄱ자 두상이 상당히 큰 규모로 만들어졌다. 이 ㄱ자 두상은 이듬해인 1997년부터 정확한 직각에서 벗어나, 보다 율동적 기울기 로 변화하였고, 여기에 다양한 헤어스타일을 표현하거나, 구멍이 뚫린 동그란 눈처럼 구체적인 이목구비 형태가 나타나는 등의 부분적인 변화가 함께 보였다. 이러한 다양한 형태는 2004년까지 지속되었으며, 이 시기에는 두상 작품이 전신상이나 2인상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이 제작되었다. 부분적인 변화는 있었으나 두상 작품 대부분은 비교적 양감이 적은 단순한 형태가 나타나고, 이에 반해 전신상은 양감과 보다 구체적인 인체 묘사가 강조된 형상 작품이 많았다.
7. 2005년 이후 – 채색 조각의 등장
2005년은 고향 대전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던 해였다. 대전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최종태- 영원과 본질의 탐구>전 이후부터 최종태의 조각에서 처음으로 채색 조각이 등장하였다. 최종태의 조각의 주제 또한 <기도하는 사람>, <성모자상>, <관음상> 등 종교적인 주제가 중심이 된 것도 또 다른 변화 중 하나이다. 후기의 채색 경향은 더욱 화려하고 다양하게 변화했다. 2005년을 기점으로 최종태 작품에서 두상보다는 전신상, 2인상 또한 수가 압도적으로 증가하였다. 이 시기에 제작된 전신상, 2인상은 마치 한국의 장승이나 고대 이집트 인체 조각을 연상케 하는, 사지가 몸통에 붙어 있으며 투박하고 직선적인 형태의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전신상과 2인상의 수가 늘어 1980년대부터 최종태 작품에서 주요 맥락을 형성하였던 <얼굴> 시리즈는 상대적으로 적은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한편 <얼굴>의 두상 형태는 ㄱ자 형태를 기본으로 하는 추상화된 1980년대의 형태보다, 1950-60년대 초기 구상 작품처럼 머리카락과 이목구비가 구체적으로 묘사된 두상 또는 헤어 스타일을 강조한 1990년대의 두상 형태들이 교차로 나타났다.
대표집필/ 이상윤(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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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구개요
1) 연구 목적: 최종태 조각의 전수조사와 목록화가 본 연구의 가장 우선된 목적이다. 조각 외에 파스텔화, 드로잉과 같은 평면 작품은 최대한 많은 작품을 디지털 목록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최종태의 작품을 시기별로 구분하고, 시대별 작품 특성을 분석하며 총체적인 시각에서 정리하는 작품 분석 역시 본 연구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이다.
2) 연구 기간: 2021년 2월 – 2021년 12월
3) 연구범위: 2021년 11월 30일까지 제작된 최종태 조각 및 회화
2. 항목별 특이사항
1) 작품
- 1958년부터 2020년까지 만들어진 최종태의 조각, 파스텔화, 드로잉, 부조, 공공조각 등의 작품들을 조사하고 목록화하였다.
- 원작과 다른 재료로 재제작되었거나, 변형(채색, 크기조절 등)이 더해진 작품은 모두 다른 작품으로 간주하여, 각각의 정보로 작성하였다. 이 경우 ‘작성 노트’에 원작 정보를 기록하였다.
- 석고 원본의 경우, 독립적인 작품으로 간주하였거나, 따로 전시되는 경우가 없었으므로 독립적인 개체의 작품으로 포함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석고 원형은 '작품 외 자료'에 등록되어 있다.
- 작품 구분은 예술경영지원센터 아카이빙 시스템 분류 기준에 따라, 크게 입체/조각과 평면 작품으로 양분되고, 부조의 경우 입체/조각의 하위 항목 아래에 포함된다.
- 본 연구팀은 약 600여 점의 조각과 50여 점의 평면 작품을 신규 촬영, 실측하여 목록화하였다.
- 제목은 도록에 발표된 제목을 우선으로 하되, 제목의 없는 경우 연구팀 분석 후, 작가의 확인 거친 뒤 이를 기록하였다.
- 제작 시기는 도록에 기재된 시기를 기록하되, 서로 일치하지 않은 경우, 작가 확인과 연구팀 논의를 거쳐 기록하였다.
- 규격은 도록에 기재된 규격을 전부 기록하였으며, 규격 기록이 없는 경우 연구팀이 실측하였다.
2) 작품 외 자료
- 작품 외 항목은 예술경영지원센터 아카이빙 시스템 분류 기준을 따라, 전시 리플렛, 사진, 작가노트, 원고, 기타로 구성하였다.
- 최종태의 자필 원고, 낙서, 메모 등의 자료 또한 작품 외 자료에 포함된다.
- 정욱장, 오창근 등 최종태의 제자들이 과거 도록에 수록된 작품 이미지를 스캔하여 목록화하였는데, 이 목록들은 기타 항목에 포함시키고, 그 사실을 ‘연구자 노트’에 기입하였다.
3) 참고문헌
- 참고문헌 자료는 예술경영지원센터 아카이빙 시스템의 분류 기준을 따라, 전시 도록, 신문기사, 단행본, 정기간행물, 학위논문, 학술지로 구분하여 목록화하였다.
- 전시 도록의 경우 16면 이하의 단체전 도록은 리플렛으로 분류하여 ‘작품 외’ 항목에 포함하였고, 10-16면 분량의 초기 개인전 도록의 경우는 자료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참고문헌으로 분류하였다.
- 신문기사는 아카이빙에 유의미한 자료들을 선별하여 목록화하였다. 최종태의 이름만 거론된 기사나 단순 전시 안내 기사, 보도자료를 재수록한 기사들은 제외하였다.
4) 전시 이력
- 최종태의 전시 이력에서 모든 개인전과 주요 단체전에는 최대한 많은 출품작 정보가 목록화되었다. 그러나 2000년대 이전 전시의 경우, 전시 기관으로부터 출품작 목록을 확보하지 못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 경우 연구팀은 전시 풍경을 촬영한 작가 소장의 사진을 참고하는 등, 최대한 많은 전시 출품작을 선별하여 목록화하였다.
5) 연보
- 연보는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최종태>의 도록에 수록된 연보를 기본으로 하되, 작가와의 세미나, 기타 참고자료에서 보완할 내용들을 추가하여 작성하였다.
6) 인용문
- 인용문은 작가가 직접 발언한 인용문뿐 아니라, 최종태 작품 세계를 조망하는 비평가, 미술사가, 큐레이터 등의 중요 발언도 함께 발췌하여 목록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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