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철은 포토콜라주와 포토몽타주 기법을 통해서 한국의 근현대사와 동시대적 현실을 깊이 있게 형상화해온 화가다. 1943년 경북 김천(금릉)에서 태어나서 그곳에서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8년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했다. 이후 1970년부터 지금까지 8회의 개인전과 330여 회의 국내외 그룹전 및 단체전에 참가하며 비판적 형상성의 민중미술 작품을 펼쳐 보였다.
신학철은 1970년대 초 한국 전위미술의 대표적 단체였던
1980년부터 2021년 지금까지 40년을 관통한 신학철의 포토콜라주·포토몽타주 <한국근대사 ·한국현대사> 연작은 한국현대미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점을 차지한다. 작업 내용과 형식,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 미학과 정치의 관계성, 기타 문화운동 등에 있어서 작가와 미술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관계 맺고 실천할 수 있는지에 대한 주요한 실제적·이론적 실례가 되어서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신군부가 등장하던 시기와 궤를 맞추며 등장한 신학철의 작업은 민중미술의 핵심적 가치로, 90년대 이후 지금까지도 현실주의/비판적 형상성의 주요한 미학적 모범으로 기능하고 있다.
대표작인 1979년 콜라주 <변신-5>, 1983년 <한국근대사-종합>, 1996년 <한국근대사-금강>, 2002년에 완성된 20m의 <한국현대사-갑순이와 갑돌이>, 2006년 <한국현대사-초혼곡>, 2011년 <한국현대사-망령>, 2015년 <한국현대사-광장>, 2017년 콜라주 <한국현대사-촛불혁명>, 2018년 <한국현대사-6.25(망령들)>, 그리고 2021년대 한국 사회를 새롭게 해석하며 작업하고 있는 40m의 <한국현대사-갑순이와 갑돌이>를 비롯한 여타 콜라주 및 포토몽타주 회화는 신학철의 자전적 체험과 역사적 주제 의식을 미적인 메시지로 전환해준 기념비적인 결과물들이다.
이 작업은 작가의 예민한 촉수로 역사적·현실적 비극을 감지-인식하고, 거기에서 희생된 뭇 생명을 호명하고 위무하는 행위다. 그를 통해 그들의 한과 분절·해체된 신체를 재조립하여 한국 근·현대사의 에너지로 승화하는 작업이기도 하고. 따라서 그 화면은 죽음을 극복하려는 일종의 굿이자 제의, 곧 생명성이 발현하는 현장이 된다. 역사적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마주 보고 드러낼 때 비로소 역전의 에너지가 발현하는 공간 말이다. 신학철의 용트림하는 형상성이 기괴한 그로데스크로 전락하지 않고 생산적인 조망으로 연결되는 이유는, 이처럼 역사적 팩트와 자기 내면을 긴밀하게 콜라주한 그의 조형적 능력 때문이라 하겠다.
신학철의 역사적 포토콜라주·포토몽타주 회화는 이제 그 자체가 한국현대미술에서는 ‘신학철’이라는 장르가 되었다. 그것은 한국현대미술에 있어서 일대 사건이지만, 동시에 한국현대사에서 변혁기 문화운동을 추증하는 시각적 에너지이자 원기소이기도 했다. 미술이 어떻게 당대 시민들과 호흡할 수 있는지를 증명해낸 뛰어난 조형적 표지이기도 하고. 인간적 양심-역사를 통한 정치·사회적 실천-작업의 조형적 독자성을 성공적으로 통일시킨 작가로서 말이다.
신학철
1943 경상북도 김천 출생
1968 홍익대학교 회화과 학사 졸업
현재 천안 거주 및 작업 중
주요 개인전
2021 신학철 포토콜라주: 한국현대사, 나무아트, 서울
2019 한국현대사-625, 인디프레스갤러리, 서울
2014 한국현대미술 화제의 작가: 신학철, 김해문화의전당, 김해
2008 신학철 개인전, 갤러리 눈, 서울
2003 우리가 만든 거대한 상(像), 아르코미술관, 서울
1991 신학철 개인전, 학고재갤러리, 서울
1987 신학철 초대전, 온다라미술관, 전주
1982 신학철 초대전, 서울미술관, 서울
주요 단체전
2021 바람보다 먼저, 수원시립미술관, 수원
민중예술가 백기완 노나메기 그림마당, 아트스페이스민, 울산
2020 흰 밤 검은 낮, 경기도미술관, 안성
1980년대 목판화 : 항쟁의 증언, 운동의 기억, 무각사 로터스갤러리, 광주
아름다운 삶을 권유하다, 인디프레스갤러리, 서울
시대를 보는 눈: 한국근현대미술,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19 인물, 초상 그리고 사람: 한국 근현대인물화, 갤러리현대, 서울
이 시대의 리얼리즘을 위하여: 김윤수선생 1주기 추모전, 가나아트센터, 서울
광장: 미술과 사회 1900-2019,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세상에 눈뜨다: 아시아 미술과 사회 1960‘s-1990’s,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18 시대유감: 가나아트 컬렉션 상설전, 가나아트, 서울
유유산수: 서울을 노닐다, 세종문화회관, 서울
베트남에서 베를린까지: 민주·평화·인권,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광주
2017 코리아투모로우 2017: 해석된 풍경, 성곡미술관, 서울
제24회 4.3미술제: 회향, 제주도립미술관, 제주
2016 앉는 법, 인디프레스, 서울
이소선 5주기전: 어머니의 대지, 아라아트센터, 서울
신학철·팡리쥔: 기념비적 몸의 풍경, 학고재갤러리, 서울
아주 공적인 아주 사적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사회 속 미술: 행복의 나라,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2015 광복 70주년 한국근현대미술 특별전, 대전시립미술관, 대전
1980년대와 한국미술, 전북도립미술관, 완주
2014 신학철·박불똥의 현대사 몽타주, 금나래아트홀, 서울
한국현대미술의 흐름 Ⅶ –리얼리즘, 김해문화의전당, 김해
인디프레스 서울 개관기념전, 인디프레스갤러리, 서울
2013 장면의 재구성#1,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개관기념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사람아 사람아: 신학철·안창홍의 그림 서민사(庶民史), 경기도미술관, 안산
2012 두개의 문: 신학철·김기라 2인전, 갤러리175, 서울
2011 코리안 랩소디: 역사와 기억의 몽타주, 삼성미술관 리움, 서울
2010 춘추, 학고재갤러리, 서울
분단미술: 눈 위에 핀 꽃, 대전시립미술관, 대전
한국현대미술의 흐름 III: 팝아트, 김해문화의전당, 김해
아시아 리얼리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09 미술시네마: 감각의 몽타주,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2008 서울미술대전: 한국 현대구상회화의 흐름,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어제의 붓, 오늘의 눈, 부산민주공원, 부산
2007 한국통일미술, 부산민주공원, 부산
2006 한국미술 100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05 부마민주항쟁 26주년: 폭력의 기억, 부산민주공원, 부산
광복 60년: 시련과 전진, 국회의사당, 서울
미술과 수학의 교감, 사비나미술관, 서울
실재를 우회하는 그리기, 부산시립미술관, 부산
2004 당신은 나의 태양, 토탈미술관, 서울
얼굴의 문학사: 모노크롬에서 마스크까지, 영인문학관, 서울
평화선언 2004: 세계 100인 미술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인물로 보는 6월 항쟁,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서울
2003 희망의 노래 우리의 노래, 전주역사박물관, 전주
삶: 1980년대 리얼리즘 미술,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2002 21세기와아시아 민중, 광화문갤러리, 서울
완당과 완당바람: 추사 김정희와 그의 친구들, 학고재갤러리; 동산방화랑, 서울
제4회 광주비엔날레: 제3프로젝트, 광주비엔날레전시관, 광주
민족미술 20년, 청주예술의전당, 청주
2001 노컷, 사비나미술관, 서울
전환과 역동의 시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한원미술관, 서울
기초/전망, 서울미술관, 서울
기금마련전, 대안공간풀, 서울
바람 바람 바람, 광화문갤러리, 서울
2000 시대의 표현: 눈과 손, 예술의전당, 서울
제3회 광주비엔날레: 예술과 인권, 광주비엔날레 전시관, 광주
오월: 생명〮나눔〮공존, 인재미술관, 광주
안티조선, 대안공간풀, 서울
1999 뷰파인더캔버스, 서남미술관, 서울
동북아와 제3세계 미술,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조국의 산하: 우리 삶의 이야기 주고받기, 모로갤러리, 서울
스크린쿼터 폐지 반대, 대안공간풀, 서울
1998 분단, 이십일세기화랑, 서울
인권선언 50주년, 예술의전당, 서울
1996 한국대표시인주제미술전, 학고재갤러리, 서울
1995 한국현대미술, 중국미술관, 베이징
4월 혁명 35주년: 껍데기는 가라, 이십일세기화랑, 서울
제1회 광주비엔날레: 광주 5월정신, 광주시립미술관, 광주
광주: 15년 후의 일상, 이십일세기화랑, 서울
한국미술’95: 질량감,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해방 50년 역사, 예술의전당, 서울
1994 동학농민혁명100주년: 새야 새야 파랑새야, 예술의전당, 서울
민중미술15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현대미술 40년의 얼굴, 호암갤러리, 용인
1993 비무장지대,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코리아통일미술, 도쿄센트럴아트미술관, 도쿄
1989 황토현에서 곰나루까지, 예술마당금강, 서울
삶의 터전을 되살리기 위한 서화·도예, 그림마당민, 서울
5.5공화국, 그림마당민, 서울
자연과 인간, 그림마당민, 서울
통일, 그림마당민, 서울
광주여! 오월이여!, 그림마당민, 서울
예술의전당 개관기념전, 예술의전당, 서울
1988 민중미술 예쁜 그림, 그림마당민, 서울
통일, 그림마당민, 서울
통일회관 건립 기금마련전, 그림마당민, 서울
1987 우리 시대 작가 22인전, 그림마당민, 서울
그림마당민 개관1주년 기념전, 그림마당민
대동잔치, 그림마당민, 서울
반(反)고문, 그림마당민, 서울
통일, 그림마당 민, 서울
1986 40년대 22인전, 그림마당민, 서울
32인전, 그림마당 민, 서울
1985 한국서양화 70년, 호암갤러리, 용인
80년대 미술 대표 작품, 하나로미술관, 서울
1984 해방40년 역사, 서울〮마산〮부산〮광주〮대구 순회
현대미술초대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삶의 미술, 아랍문화회관, 서울
거대한 뿌리, 한강미술관, 서울
시대정신, 부산·마산 순회
오늘의 작가 23인, 동방플라자미술관, 서울
80년대 미학의 진로, 한강미술관, 서울
1983 현대미술초대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한불미술협회전, 동덕미술관, 서울
1982 80년대 조망, 문예진흥원미술회관, 서울
1981-84 문제작가전, 서울미술관, 서울
1981 상파울루비엔날레, 상파울루, 브라질
1978 한국현대미술 20년의 동향,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1977-81 방법, 문예진흥원 미술회관, 서울
1976 목요화랑 개관기념전, 목요화랑, 서울
1975 오늘의 방법, 백록화랑, 서울
1974 서울비엔날레,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대구현대미술제, 대구문화공보관, 대구
1972 앙데팡당,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1970-75 A.G.(아방가르드협회),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1969 한국 청년작가 6인전, 도끼와화랑, 도쿄
1967 WHAT, 조흥은행 본점, 서울
수상
1999 제16회 금호미술상
1991 제1회 민족미술상
1982 제1회 미술기자상
신학철 비평글
신학철의 1980년대 <한국근대사>와 1990년대 <한국현대사> 연작은 한국현대미술에서 매우 중요한 지점을 차지한다. 작가는 작업 내용과 형식, 비민주적인 군부독재권력에 대한 저항, 예술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문제 제기뿐 아니라 문화운동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사회와 예술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를 실제적 이론적으로 증명했다. 신군부가 등장하던 시기와 궤를 맞추어 등장한 신학철의 <한국근대사> 연작과 이후 등장한 <한국현대사> 연작은 민중미술의 주요한 전형 중 하나이며, 지금까지도 현실주의 형상미학의 주요한 전범(典範)으로 평가된다.
신학철은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한국의 역사적 모더니티(근대성/현대성)를 작품으로 규명한다. 많은 역사화가 기록화 내지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특정한 장면을 제시함으로 그 사건의 정치성을 드라마틱하게 확보할 수 있는 방식(예: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 들라크르와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택함에 비해, 신학철은 자신이 해석한 한국 근ㆍ현대사의 핵심적 형상을 객관적인 자료의 집적을 통해서 귀납적 상징성으로 형상화하고 전유한다.
화면엔 수없이 많은 보도사진이나 기록 사진들이 몽타주 되어서 하나의 거대하고 기괴한 유기체의 동적인 형상으로 드러난다. 그 유기체가 바로 우리의 근·현대사의 형체다. 흑백 모노톤의 괴물 같은 이 역동적 형상은, 종으로는 지난 100여 년에 이르는 역사적 사건들을 나열하고 중첩시킨 것이다. 식민성ㆍ해방ㆍ분단ㆍ미국ㆍ군부독재정치 등의 역사적 사실들이 화면 아랫부분에 배치되고, 민주화와 통일에의 염원 등의 작가가 의도하는 주제가 화면 상단에 위치한다. 동시에 횡으로는 이런 소재들이 뒤틀리고 꼬이며 상승한다. 거기에서 동적인 이미지가 주체할 수 없는 거대한 혼돈의 에너지로 확장하는 듯한 형상으로 구축된다.
이 거대서사는 콜라주 된 사진의 세밀한 그리기를 통한 주지적 정보의 제시와 함께, 신학철이 구축한 유기적 형상으로 감성적으로 축조된다. 안료의 물질감을 배제한 중성적인 화면은 감성이 아닌 지각적인 소격효과의 방식으로 화면을 감상의 대상이 아닌 인식적인 파악의 기제로 유도하고, 소재들의 크고 작음ㆍ배치ㆍ동세ㆍ최종적 형태를 통한 그로데스크한 화면 분위기는 전래적인 회화적 층위에서의 감각적 교감을 자연스레 견인해낸다. 힘의 분출과 같은 에너지가 정교하게 축조된 정보들과의 교집합으로 이루어낸 조형과 주제의 소통은 즉각적이고 충격적이면서도 깊은 여운으로 그 내용을 되새김질하게 만든다. 거기에선 관객과 작품과의 적당한 거리두기로 읽기ㆍ느끼기/보기ㆍ상상하기/아는 것ㆍ모르는 것 사이에서 역사적 사실들이 상호작용하며 긴장감을 소환한다. 등장한 각 부분의 소재들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들이지만, 미적 무브먼트와 그로데스크가 빚어내는 형상의 맥락은 우리의 근ㆍ현대사를 전혀 새로운 지점에서 감지하고 깨닫게 하는 이미지의 상징적 작동, 즉 형상성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그 자체로 한국 근ㆍ현대사의 장엄한 미학적 표지다.
지나간 역사의 궤적을 통해서 바로 지금의 현실에 대한 자각과 비판을 불러일으키는 이 거대한 정치적 환유는, 그러나 결코 교훈적이라거나 설명적이지 않고 미적 그로데스크를 통한 정치적 에너지의 증폭 이미지란 점에서 상징의 통로를 확대한다. 역사와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정교한 인식과 해석이, 작가의 주제의식으로 인해 정교하게 직조되면서 불러일으키는 소통의 맥락이 촘촘하기에 그렇다. 이처럼 진지하고 섬세한 내면으로부터의 필연적 열량의 표출, 그러면서도 거대한 서사성과 정치적 역사성에의 신념적 접근이 바로 신학철 작업의 뿌리다.
사물과 행위가 결합한 리얼리티의 경험-70년대 오브제 작업
1943년생인 신학철은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할 시기인 1967년 12월에 동기들로 구성된
이 모더니스트 시기 신학철은 1971년 회화 <메이퀸 추락사건>과 <버스 추락사고>를, 1972년엔 설치작품인 <관>을, 이후 실제 오브제에 노끈이나 실을 정교하게 감고 캔버스에 부착하는 방식의 입체작품 <계시> <무無>, <지성至誠> 연작을 AG전에 발표했다. 서울 방법전에는 <부활>(1979년) 연작 등을 발표했다. 이 오브제 작품들에서 신학철은, 사물을 대할 때 그 사물에 반응하는 자신의 마음을 덧붙이는 인위적 행위를 통해, 실제 사물의 리얼리티와 이미지(혹은 관념) 사이의 간극을 통일시키고자 했다. 그것은 미술적 실험이나 형식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사물의 기운을 포착하고자 자신의 진심을 담은 윤리적 태도에 가깝다. 세계를 마주한 사람이 대상을 마음으로 모시는 일련의 의식儀式처럼. <무無> 연작은 이미지를 제거하며 오브제 자체가 작가의 마음을 표상하는 결과물로서의 사물적 현실성을, <지성至誠> 연작은 오브제와 감응하는 작가의 지극정성과도 같은 반복적 행위로 구성된다. 최대한 꼼꼼하고 정성스럽게 사물을 마음속으로 모시는 행위가 온전한 결과물로 전이되는 작업이었다. 마치 수운이나 해월의 ‘모심’과 같이, 대상인 오브제에 대한 작가의 윤리적 ‘태도’가, 끝없이 반복되는 장인적 행위를 통해 ‘마음’과 일치한 결과물로서의 기운을 드러내는 것이라고나 할까.
신학철의 이런 태도는 곧 현실에 대해 반응하고 개입하는 방식으로 전환한 80년대 리얼리스트로의 작가적 태도에도 마찬가지로 지속된다. 작업형식과 거기에 담기는 내용이 바뀌었더라도, 작가 신학철의 작업에 임하는 마음가짐은 늘 한결같은 일관성을 지녔다는 뜻이다. 다만, 미학적인 준거를 미리 세워놓고, 형식의 무한 반복과 변주를 통해서 자기 심도를 만드는 과정으로서의 70년대의 관념적 형식성(주1)과, 그로부터 일탈한 80년대의 존재론적 실재實在로서의 형상 언어는 분명 다른 지점에 있지만 말이다.
오브제에서 메시지로 - 포토 콜라주와 포토몽타주 회화
1979년 신학철의 작업에 획기적인 변화가 생겼다. 입체인 사물 오브제 대신 잡지 사진을 작업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미지의 유기적 분리와 새로운 결합으로 문명 비판적인 내용의 <변신>과 <순환> 연작이 그것이다. 각종 잡지 사진을 채집-분해-연결(조립)해서 다른 이미지를 생산하고, 거기에서 주제를 확정해내는 신학철식 포토콜라주의 등장이었다.
그러나 신학철 포토콜라주는 1967년에 이미 시작되었다. 소머리를 그린 <정물>(1965), <추상>(1966), <가설-1>(1967) 등과 같은 회화작업을 하다가, 1967년에 먹 드로잉으로 인간의 상황성을 드러낸 혼성공간, 그리고 공간과 대상의 겹침 등을 조합하는 드로잉과 콜라주 <콤포지션> 연작을 통해서였다.
그 중에서 1973년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두 점의 에스키스 <습작>은, 1979년 이후 신학철의 주 장르인 포토콜라주의 모태이자 기원이 되는 작품으로 중요하다. 앞에서 거론한 콜라주 <콤포지션> 연작에서의 사진 이미지의 충돌과 조립을 실험하던 것에서 벗어나, 현실적인 소재와 내용을 추출해서 특정한 주제에 이르기 위한 단서로서의 사진 콜라주 작업이라서 그렇다.
그 중의 한 점, 베트남전의 유명한 보도사진인 ‘네이팜탄 소녀(1972)’와 ‘My Lai 학살(1968)’, 그리고 일본 외무대신을 역임하고 총리까지 지낸 오히라 마사요시(주2)를 화면 오른쪽 아래에 배치한, 콜라주와 드로잉을 구조적으로 결합한 에스키스다. 월남전과 오히라가 어떤 필연적인 연관관계를 갖는지는 애매하나, 타의에 의해 폭력과 죽음을 경험한 약소국인 베트남과 조선(한국), 가해자인 제국주의 미국과 일본을 등치시키며 비판하는 시각이라는 해석은 가능하다. 물론 이때까지 신학철의 포토콜라주 문법이 성숙한 것은 아니었으되, 콜라주란 방식을 통해 사진 이미지가 어떻게 현실을 구체적으로 반영하고 또 비판할 수 있을지에 접근한 최초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이 서사적 조형성은 1979년 본격적으로 시도하는 문명 비판적 콜라주 작업에 연동이 된다. 다만 이 작품을 제작한 1973년은 신학철이 모더니스트로
신학철의 본격적인 포토 콜라주는 1979년부터 시작된다. <순환>과 <변신> 연작이 그것이다. 1970년 AG 그룹에 가입하고 오브제 작업에 빠지면서 10여 년 중단했던 포토 콜라주 작업을 이때 다시 시도한 것이다. 작업을 통해서 세상에 무슨 말인가를 하기엔 좀 더 분명한 언어와 메시지를 담아낼 형식이 필요해서였을 것이다. 또는 1970년대 후반 제3공화국의 답답한 현실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불편함을 느끼던 청년 작가가, “현재 속에 나를 던져야겠다”(신학철, 작가노트, 1979, 공간)는 자각에 의한 조형적 전환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테다. 그런 과정에서 현실을 이미 반영한 오브제(사진)를 작업의 질료로 선택해서 자신이 의도한 주제를 드러내려 시도한 것은 당연한 과정으로 보인다.
잡지나 신문에 이미 나와 있는 광고사진이나 보도사진은 모두 피사체를 통해 이미 특정한 정보를 담고 있다. 신학철은 콜라주 작업에서 각 사진의 이런 정보적 기호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새롭게 구축한 전체 이미지의 한 단위로 작동하도록 만들었다. 작가에 의해 선택되어져서 화면에 구성된 사진들은 자신의 이미지 속성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작가의 의도대로 전치된 것인데, 이는 브라크나 피카소의 입체주의, 초현실주의자들의 떼뻬이즈망 몽타주 기법과는 다르다. 이미지를 조립하되, 사진 자체에 담긴 피사체의 속성이 그대로 유지되면서도 작가의 의도대로 전체 이미지에 복무하게끔 이중의 기능을 부여했기 때문에 그렇다. 이는 러시아 구성주의의 알렉산더 로드첸코나 엘 리시츠키, 그리고 1930년대 히틀러와 나찌를 비판한 독일의 존 하트필드에 가까운 콜라주 방식이다. 그러나 각 사진에 담긴 정보와 팩트의 속성을 유지시키되, 그것들이 모여서 또다른 형상으로 진화하며 (전체 내용이)역전의 힘을 발생시키는 이미지는 신학철의 독자적 어법이다.
이 포토콜라주 1979년의 <순환>과 <변신> 연작은 1970년대 내내 지속되던 신학철의 오브제 작업뿐 아니라, 그의 인생 전체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일으켰다. 작업에 대한 관점에 일대 전환이 온 것이었다. 모더니스트가 모더니스트들이 쓰던 기법으로 작업을 했지만, 당시 한국 화단의 풍토에서는 그 비판적인 주제로 인해 모더니즘 진영으로부터 튕겨 나가버린 현상도 있었다. 다음 해인 1980년에도 이어진 <변신>, <상황>, <여인>, <묵시> 연작 콜라주를 통해 현실과 만나는 작업이 지속되었다. 그리고 그때 포토 콜라주에 연속한 회화인 포토 몽타주 <한국근대사> 연작의 등장은 놀라운 사건이었다. 초현실적으로 기괴하면서도 그로테스크한, 그러나 리얼하게 우리 역사와 현실을 반영한 이 작품들에서 작가의 메시지는 선명하게 드러났다. 시각적 재미, 미적 쾌감, 주제의 중후한 결합이 주는 미감은 묘하게도 낯설고, 충격적이고,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이런 작업 궤적은 1983년 <한국근대사-종합>에서 일찍이 한국미술에서 볼 수 없었던 ‘역사성’을 장엄하고도 숭고한 비극미로 형상화시켰다. 대상이나 소재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의 구상성이 아니라, 작가로서 자신이 지향하는 세계를 말하기 위해, 소재들을 선택해서 변주하며 주제를 발생시키는 행위와 거기서 드러난 비판적 맥락의 메시지이고, 작품을 통한 관객과의 소통의 행간에서 정치적 깨우침이 발생하는 효과를 일으키기 충분한 형상성(주3)을 띄었다. 신학철의 이 작업은 그때까지 우리 미술이 간과했던 모더니티의 정치성을 자신의 내용 안으로 수렴하고 표지화한 형식이기도 했다. 이 획기적인 작품에 담긴 내용을 보자.
<한국근대사-종합>은 세로로 크게 3등분된 시간 구조를 갖는다. 맨 아래 1/4 부분은 구한말-개항기-일제강점기-해방공간-한국전쟁까지의 기간의 역사성을 함축한 형상이다. 많은 사람의 군집으로부터 결과적으로 육화한 건장한 두 신체가, 같은 뿌리임에도 서로를 칼로 죽이는 형상으로 마무리된다. 이 지점은 신학철이 기록으로만 접 역사적 시공간에 해당한다. 이어 가운데 부분 2/4정도 공간은 1950년 한국전쟁 이후 1983년까지 현대 한국의 사회상과 현실을 반영했다. 신학철 본인이 직접 체험한 동시대 현실 공간이다. 그리고 따로 다른 캔버스에 그려진 최상단은 미래에 대한 작가의 기대와 염원을 드러낸 부분이라 하겠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신학철은 이 작품을 제작하던 1983년 당시 ‘역사(근대)-현실(당대)-희망(미래’)이란 시간적 3중주를, 이 세로로 긴 캔버스 공간에 종합해서 형상화한 것이다.
근대기: 바닥에서 화면 1/4 지점까지의 아랫부분. 이 부분은 1923년 일제의 관동대지진 조선인 참살로부터 1953년 한국전쟁까지 30년 기간 역사를 식민지(죽음)-해방(희망)-한국전쟁(절망)의 과정으로 인식하고 압축적으로 제시했다. 먼저 멀리 뒷부분 관동대지진에서의 조선인 집단 학살 장면으로부터 내용이 시작된다. 숱한 시신들이 바닥과 배경에 펼쳐져 있다. 앞쪽 바닥 전면엔 해방의 기쁨과 미·소 점령군의 등장이 제시된다. 그 위로 상승하는 형태의 좌측은 이승만·하지 점령군 사령관·김규식·조병옥·이범석·메논 유엔대사·안두희 등으로, 남한 단독정부 수립 우익 세력이 포진하고, 미제 무기로 상승하며 군사독재자인 박정희에 이른다. 가운데 부분은 백범 김구를 위시한 임시정부 요인·송진우·여운형 등의 남북 합작 통일 세력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박헌영·조만식·김삼룡·이주하·소련군 군사고문단 등 좌익 세력이 위치해있다. 여기에서 좌측인 우익(남한-미국)의 대량살상 무기로 결집한 신체와, 우측인 좌익(북한-소련)의 무기들이 하나로 진화한 신체가 서로를 칼로 찌르는 결과가 연출 된다. 1950년 한국전쟁이다. 미·소 이익을 대변하는 일종의 대리전쟁. 이 부분은 구한말 부터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을 거쳐 동족상잔에 이르기까지 절망과 희망이 대립과 갈등으로 버무려진 역사적 시공간이라 하겠다.
현대, 작가와 동시대: 미증유의 4.3항쟁과 동족 전쟁의 살육 이후부터 4.19혁명을 거쳐, 박정희 정권에 저항하는 70년대 민주화운동을 YWCA 위장결혼식과 윤보선 전 대통령으로 압축하고, 그 위엔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이후락과 북한측 인사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 시공간의 또다른 핵심은 왼쪽 괴물같은 야수의 이빨을 드러낸 일제 YAMAHA오토바이와 거기에 연료로 주입되는 미제 COCA COLA에 능욕당하는 여성 하반신이다. 그리고 그 상단 근육질 인체와 살상 무기가 결합한 거대한 미국과 한국군부를 상징하는 군사력 아래에서, 왼쪽은 5공 정권하의 장영자·이철희 어음 사기 사건이, 오른쪽에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의 1980년대가 그려진다. 그 사이사이로 향락적 자본주의 소비문화와 갈빗살을 파먹고 있는 부정부패 쥐새끼들의 군사독재정권, 그에 대한 저항, 남북 간 군비경쟁 등의 아수라 시대를 작가는 요지경 속 세상처럼 그려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자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의 온갖 모순의 형상화로, 어떤 전망도 할 수 없도록 머리에 거대하고도 두터운 기계를 둘러쓴 암울한 시대로 말이다. 확실히 이 작품을 그린 5공 정권하 1983년은 그랬다. 시인 이성복의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던 이상한 시대 말이다.
미래, 그리고 희망: 마지막 상단 독립된 캔버스 이미지는 민주화된 세상과 통일에 대한 신학철의 염원을 담아낸 부분이다. 남과 북이 온갖 부조리들을 녹여버리며 하나로 결합하려는 본능을, 섹스라는 원천적 욕망에 비유하며 표상해낸 부분이기도 하다. 남남북녀가 키스하는 백두산 천지 아래에서 노동자·농민·샐러리맨·학생 가릴 것 없이 모두가 평등하고 평화롭고도 이상적인 세상을 상정했다. 통일에 대한 판타지와 작가의 현실적 통일 염원이 기호화된 도상이다. 반드시 이뤄야 할, 통일이라는 이 "오래된 미래"가 작품의 주제로 상정되면서, 1923~1983년 60년의 역사가 대단원의 매듭을 맺는다. 죽음과 고통의 긴 터널이 그 기간의 역사와 현실이었지만, 그래도 이 땅의 민중들은 그것들과 투쟁하면서 질기게 살아남았고 또 미래를 꿈꾸는 모습으로 형상화되었다.
이 작품은 그런 실제 역사와 현실 그리고 작가의 판타지가 교직하면서, 한국 근현대사라는 거대서사를 담지 한 부분들의 리얼리티가 모여 구성되었다. 다큐 사진 자료를 통해서 귀납하고 신학철의 독자적인 해석과 조형으로 연역해낸 역사와 현실을 작가의 희망과 함께 포토몽타주로 버무려서 창출해낸 형상 미학의 결정판이다. 좌절과 욕망과 희망이 서로 얽히고 꿈틀거리면서 상승하는 이 동적인 에너지 형상은, 1983년 당시 동시대성과 작가의 내면이 통일되어 총체적으로 형상화되었다. 이 좌절과 욕망과 희망의 콜라주를 “섹슈얼리티가 전면화”된 것으로 해석한 한재섭은, 이를 “분단체제의 극복 의지”라는 결론에 대입한다.
“ ‘한국근대사-종합’은 남한의 근대사가 집약적으로 펼쳐지는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일제 강점기 민중의 수난과 해방정국에서 좌우 진영의 대립은 결국 남과 북이라는 두 갈래 덩어리로 갈라지고 그들의 전쟁을 일으키며 서로의 몸에 칼을 겨눈다. …중략… 한편 하단우측에 자그맣게 그려진 장면은 근대화에 밀려난 농촌의 모습이다. 작품에서 유일하게 온전한 형태로 그려진 소녀와 농부, 농촌 마을은 외국의 식민지와 강제적 근대화를 지나며 잃어버린 생명력이 있는 공간이다. …중략… ‘한국근대사-종합’에는 한국 근대사를 바라보는 신학철의 섹슈얼리티가 전면화된 작품이다. 신학철은 분단된 한국 근대사의 에너지를 수직상승하는 남근의 이미지로 해석하고 있다. …중략… 반면 화면 상단의 키스하는 남녀와 사출하는 남근은 백두산 천지와 어우러지면서 분단체제의 극복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주4)
누군가 그랬다. “정치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고 “역사는 괴물”이라고. 기하학적 질서가 불가능한 유기적 운동이자, 힘과 힘의 갈등과 부딪힘, 균열과 투쟁, 그리고 타협과 조정 등을 통해 여기서 불쑥 꺼지고 저기서 불뚝 솟는 불규칙한 에너지와 같은 것이니까. 그것은 수학적으로 계산하거나 예측할 수 없기에, 두려움이나 공포와 같은 혼돈의 그로테스크한 형상일 수밖에 없다. 신학철의 <한국 근대사> 연작은 그런 역사적 속성을, 정치·사회·문화와 더불어, 기괴한 이미지로 해석해낸 탁월한 형상성이었다. 그런 총체적 역사성의 단위원소는 바로 한 장 한 장 각자의 정보와 이미지 그 자체인 평면의 오브제, 즉 사진이었다. 그 한 장 한 장의 사진이 이 땅의 역사를 구성하는 계층인 민중이고, 또 권력을 허물어뜨릴 수 있는 정치적 주체 곧 시민이었다.
신학철은 그런 민중의 힘이 민주주의의 원리이자 세상을 바르게 할 순리라 믿었다. 형식주의 미술의 모더니스트가 그 형식의 바탕인 내용을 중시하는 민중미술로 자신을 이끌어간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문명 비판적 시선에서 역사를 바라보던 초기 콜라주에서 역사와 동시대 모순된 현실에 대한 자각과 정치적 의지의 실천으로 작업 태도를 전환한 것도 마찬가지다. 80년대 정치적 내용의 작업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은, 미술의 사회운동에 대한 신학철의 미적 깨우침 때문이었다. 일종의 자기 미학의 혁신과 같은 것 말이다. 1982년 서울미술관에서의 신학철 개인전 서문에서 평론가 고(故) 김윤수는 위의 현상을 이렇게 기술한다.
“여기서 그는 캔버스에 돌아가 꼴라주 대신 포토 몽타쥬, 포토 리얼리즘의 기법을 통해 우리의 근대사를 생생한 리얼리티와 놀라운 상상력으로 그리기 시작한다. 외적의 침략과 박해, 저항과 해방, 전쟁, 민족의 분단 그리고 거듭된 민중의 수난 이렇게 우리의 근대사가 몸부림치는 거대한 덩어리로서, 마성을 띤 존재로서 보는 이에게 달려들고 우리의 잠든 의식을 때린다. 그의 작품은 역사의 서술이나 역사적 지식의 도해가 아니다. 그 점에서 보면 미흡하고 불만일 수도 있지만 거기서는 맛볼 수 없는 감동을 안겨준다. 이 같은 그림은 어느 나라의 어느 화가도 일찍이 그리지 않았고 그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 하나만으로도 그는 높이 평가되어야 하리라고 본다.”(주5)
김윤수의 이 서술 다음 해에 나온 걸작 <한국근대사-종합>은 그런 작은 역사적 단위들로 축조한 거대한 역사 건축물 같은 미적 형상성을 두드러지게 만든 작품이었다. 1979년부터 본격적 민중미술이 조직적으로 등장한 1985년의 ‘민미협’ 사이 공간에서 신학철의 이 비판적 형상성은, 그야말로 당대성을 온전하게 반영한 기념비였다. 그 결과 미술기자들이 선정한 <제1회 미술기자상>을 수상하게 된다.
현실에 대한 스트레이트 시선과 포토몽타주의 병행
<한국근대사-종합> 이후 신학철은 실제 우리 이웃의 현실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본다. 80년대 당시 도시 중산층의 소비적 본능과 자본에 경도된 속물성을 파헤친 <중산층> 연작, 이농과 도시화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농민·노동자·도시 빈민을 그린 <신기루, 1984>, <낙골의 환상, 1986>, <가투, 1989>, <갑순이와 갑돌이> 연작 등이 그것이었다. 미술 바깥의 삶과 이웃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의 온도가 반영된 결과였다. 신학철이란 화가가 미술 행위를 통해서 그 무엇인가를 바라는 절실한 열망이기도 하고.
“그가 말하는 절실한 문제란 무엇인가? 다른 곳에서 ‘나는 누구를 위해서 일하는 노동자이고 싶다. 즐김, 그 자체를 위해 그리기보다는 내가 섬기는 것에 대해 제사를 지내는 것’(작가노트) 이라고 적고 있다. 이 말은 왜 그림을 그리며, 오늘날 예술가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그로서의 대답이고 확신이다.”(주6)
그 절실한 열망은 어떤 경우 뜻하지 않은 돌을 맞기도 했다. 아니 피할 수 없는 힘과의 부딪힘이라는 게 차라리 맞다. 군부독재정권의 탄압은 실제 공권력의 보복으로 일어났다. 1987년 그림마당 민에서 열린 통일전에 출품되었던 <모내기>가 1989년에 문제가 되었다. 이 작품으로 신학철은 살얼음판 같았던 공안정국에서 국가보안법으로 기소가 된다. 공권력에 의해 표현의 자유란 헌법 가치가 정면으로 부정된 사건이었다. 그것은 또한 미술운동 단체인 민미협과 당시 정권과의 대치 시기에 피할 수 없었던 대결이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여전히 신학철은 예의 포토몽타주 기법에 의한 박종철 열사를 그린 <부활, 1987>, <한국근대사-누가 하늘을 보았다하는가, 1989>, <유월 항쟁과 7,8월 노동자(대)투쟁도, 1991>와 같은 성공적인 대작을 남겼다. 그리고 이런 결과물들은 1991년 학고재에서의 <제1회 민족미술상 수상 기념전>에 오롯이 모두어졌다. 1980년대에 이어 90년대에도 신학철의 역사화는 우리 미술에서 여전히 강력한 미학적 기제로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 시기 신학철의 작업에 대한 다음의 글을 참조해보자.
“그동안 신학철은 ‘한국 근대사’ 연작이라는 야심작을 필두로 하여 우리 시대의 다양한 면모를 역시 다양한 기법으로 용해해 내놓았다. 노동자나 도시 빈민의 모습이라든가 이농현상을 비롯한 농촌의 현실, 그리고 중산층 연작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폭을 넓혀 왔다. 이러한 소재는 정통적인 사실주의 기법에서 살바도르 달리식의 초현실주의 계통 혹은 포토 리얼리즘 같은 수법까지 신축성 있게 동원하여 자신의 발언으로 개진해왔다. 작업의 밑바탕에는 역사의식을 염두에 두고, 건강한 리얼리즘의 구현으로 승화시키려 했다. 탄탄한 필력과 예리한 관찰력, 그리고 풍부한 상상력은 대동의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기여했다. 특히 신학철의 주특기는 비판 정신의 첨예함과 더불어 훈훈한 서정성의 겸비이다. ‘6월 항쟁과 7,8월 노동자 대 투쟁도’ 같은 대작의 경우에서도 이 같은 지적이 설득력 있게 다가옴을 느낀다. 기왕의 ‘한국 현대사’ 연작과 맥을 같이하는 불기둥 같은 중심축으로 화면을 압도하면서 우리 시대의 현실을 예리하게 조형화했기 때문이었다. 같은 방식으로 ‘누가 하늘을 보았다하는가’라든가,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같은 연작에서도 모순에 가득 찬 분단 조국의 갖가지 양상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다.”(주7)
이후 한동안 노동자, 농민, 작가 본인의 정서적 원형인 고향 풍경, 중산층 욕망을 비판하는 작업을 하던 신학철은 다시 광주항쟁을 정면으로 다룬다. 88년 광주청문회를 통해 전두환을 백담사까지 보내긴 했지만, 광주의 진실이 드러난 것도 또 당시 발포명령자가 규명된 것도 아닌 상태에서, 신학철의 분노는 식지 않았다. 그 결과, 신학철은 1993년부터 포토 콜라주로 제작한 수십 점의 <초혼곡> 연작으로 동학과 광주항쟁을 재조명하게 된다. 그리곤 <한국 현대사-802, 1994>, <한국 근대사-금강, 1996>과 같은 대작 회화에 자신의 많은 콜라주 이미지를 소환해낸다.
<한국근대사-금강>에서 화면은 사선으로 동세를 수용하고 비틀며 오른쪽 왼쪽으로 지그재그 상승하는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1884년 동학농민전쟁으로부터 시작해서 맨 위 1987년 6월 혁명의 승리 불꽃까지 약 100여 년이 넘는 시간을 수직으로 배치한 형상이다. 각 시대 단위별 역사성과 사건과 인물과 시민들의 굴곡진 근현대사가 이무기처럼 역동적으로 비틀며 상승하는 기괴한 형상이다.
<금강>은 <한국근대사-종합>처럼 상중하 세 덩어리 구성되었다. 먼저 맨 아래 바탕으로부터 오른쪽 사선으로 상승하는 각도는 1884년~1945년에 이르는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에 이르는 시간대다. 두 번째 가운데 부분은 왼쪽으로 크게 꺾어지며 해방공간에서 4.19 혁명까지 전개된다. 여순사건-제주4.3-한국전쟁으로 또다시 많은 죽음이 어둠에 깔린 채 오른쪽 밝은 4.19혁명에 이르는 민중들의 고통스러운 삶이 펼쳐진다. 그리고 세 번째 제일 위. 60~70년대 박정희 정권과 1980년 광주 5.18을 거쳐 박종철 이한열 열사의 희생과 시민의 저항을 펼치는 1980년대가 위로 솟구치면서 제일 위 명동성당에서의 1987년 승리가 불꽃(광주 5.18 희생자의 버려진 옷가지가 우연히 만든 형상)으로 맨 위에 배치되었다. 100년의 역사가 한 화면에 압축하면서 저항의 기록과 꿈틀대는 민중의 에너지를 결합했다. 좀 더 세말하게 살펴보자.
1. 먼저 바닥 덩어리 부분.
왼쪽 동학군 최후의 격전지 우금치 고개와 그 아래 동학농민군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해서 전봉준 · 김개남·손화중의 동학군과 의병, 일반 민중들, 독립군 채응언, 유관순, 윤봉길, 이봉창, 김구 주석과 상해 임시정부 각료들, 광복군을 거쳐 해방에 이르는 과정이 오른쪽 상단으로 상승한다. 1884년 동학농민전쟁에서 시작해서 1945년 해방에 이르는 시간이다.
2. 이런 바탕에서 왼쪽으로 비스듬히 상승하는 두번째 덩어리
여수 순천과 제주 4.3의 죽음을 어두운 입체로 묘사한 부분에서 오른쪽으로 한국전쟁과 1950년대 민중들이 휘돌아 솟구치며 4.19혁명에 이르는 과정이다. 김주열의 포함한 숱한 죽음과 이산과 피난과 허기로 도배된 참상의 고난기다. 거기서 60~70년대 박정희 정권의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장준하, 김대중, 김지하, 신동엽 등과 유신철폐를 주장하는 대학생들의 시위 장면으로 연결되다가, 전태일 어머니 이소선여사의 등장과, 버스비 삥땅으로 알몸수색 당한 버스 안내양 이야기, 광주 5.18로 체포되는 시민, 사북사태 등으로 1980년대 전두환 정권으로 연결된다.
3. 그리고 다시 그 위
형상이 뒤틀리며 광주학살과 망월동 묘지, 이철규 열사, 이애주의 바람맞이 춤으로 80년대 5공 정권과의 항쟁이 펼쳐진다. 전두환 정권의 등장과 87년 6월 혁명의 승리까지인 셈이다. 화염병과 마스크로 무장한 학생 시위대, 그 뒤로 재야인사들의 전두환 정권 반대 시위, 박종철 열사 어머니의 통곡과 이한열 열사의 죽음, 숱한 거리에서의 전투를 거쳐 왼쪽 끝부분에서는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골리앗 투쟁이 펼쳐진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당사자인 권인숙의 화촉 장면과 87년 6월 승리를 향한 명동성당까지의 시민들의 참여가 대미를 장식하며 마지막 제일 윗부분 명동성당 뒤 불꽃으로 대단원이 완성되는 내용이다. 이 불꽃 형상은 광주 5.18 피해자의 주검 옆에 버려져 있던 옷가지 형태에서 갖고 온 것이다. 신학철은 87년 6월 승리의 상징을 광주의 희생에서 찾아서 혁명의 완성인 불꽃으로 전치 시킨 셈이다.
아무튼 전체적으로 지그재그로 상승하거나, 서로 뒤틀리면서 어긋나는 이 역동적 형상은, 무채색의 단색조 화면과의 결합으로 신학철의 한국근현대사 연작의 조형적 특성이기도 하다. 언뜻 거대한 용이나 뱀의 용틀임처럼 동적이되, 단색조의 절제된 색채와 만나면서 차갑고도 첨예한 인식적 접근도 동시에 유도한다. 그것은 한국근현대 100년의 혁명사다. 역사적 인물들과 숱한 민중과 시민을 결합한 몽타주 기법의 장대한 다큐멘터리이자 뜨거운 혁명의 상징이기도 하다. 신학철은 이 많은 사람이 서로 엉키거나 결합하면서 이루어내는 형상성을 통해서 역사적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그 부조리에 거역하는 생명성을 역사적 에너지로 형상화한 것이다. 정치 이전 생존에의 욕망이자 의지이고, 동시에 그런 민중의 힘과 힘이 주체가 된 민주주의에 대한 염원과 지향성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말처럼 역사는 괴물 같다. 예측할 수도 종잡을 수도 없는 유기적 변화가 무쌍한 불확정적 메커니즘을 갖는다. 신학철의 한국근현대사 작품들을 관통하는 형상의 상징성은 작가의 그런 현실적 체험과 관찰 / 역사에 대한 탐구 / 실제에 근거한 팩트와 역사적 현상에 대해서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추상적인 에너지의 감지와 느낌으로부터 기인한다. 그로부터 좀 더 구체적으로 모순된 현실에 대한 반성과 자각이 뒤따르게 된다. 이 한국의 19~20세기 혁명의 대하서사를 선명하게 상징화한 작품 『금강』은 현실주의적 미학이 결정화된 대표적 작품 중 하나이다. 하나의 평면에 지난 100년의 시간성과 공간성, 거기에 조응하는 사람들의 역사성, 신학철만의 독특한 감수성과 독자적인 조형성이 두루 성공적으로 결합된 주요한 전범이자 전형이라 하겠다. 아울러 신학철은 이름 없는 숱한 민중들을 호명함으로, 그들의 삶의 애환과 질긴 생명력을 역사적 혁명의 토대로 인식하고 해석해냈다. 미술과 역사학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말이다.
90년대에 그의 나이 50대에 접어든 신학철의 이런 모색과 집요한 그리기는 1998년에 시작해서 2002년에 완성한 20m 대작 <한국현대사-갑돌이와 갑순이>에 모두 모여서 대미를 장식하게 된다. <한국근대사>, <한국현대사>, <중산층>, <노동자, 농민> 연작, 반미를 다룬 여타 콜라주, 거기에 신학철 본인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고향> 연작과 <갑순이와 갑돌이> 연작 등이 모두 어우러져 한편의 대하서사 파노라마를 빚어낸 것이다. 특히 20m화면 좌측에 배치한 ’갑순이와 갑돌이‘의 빨갛고 노란 원색 촌스러운 한복의 키치적 통속미감을 전체화면의 웅장한 숭고미에 자연스레 스며들게 만든 것은 또 하나 획기적인 형상 서사의 성공적 예에 해당한다. 이 작품에서 신학철은 자신의 ’촌놈‘ 정서를 대변하는 성장 서사를 화면의 한 부분으로 끌어들임으로 대하서사의 구조적 완결성을 설득력 있게 구현했다. 이는 곧 자신과 같은 촌놈이나 서민이 역사의 주인이자 그 에너지의 주체임을 화면에 녹아들게 만들며 한국 현대사에서 민중성의 전형성을 획득한 것이기도 하다. 바로 그런 당대를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힘을 간파한 신학철의 아래의 작가노트는, 그 생생한 날것의 정서를 ’삼각지‘의 ’이발소‘ 그림들이나 그가 스스로를 촌놈이라 일컬은 소위 ’쫑쫑이‘ 미감으로 증명하는 듯하다.
“나는 한국의 50년대에서 90년대까지를 엄청난 에너지라고 보고 싶어. 그것이 선한 에너지든 불순한 에너지든 엄청난 에너지라는 거지. 우리 운동권 에너지는 그것에 비하면 아주 조금밖에 안 되고 하잘것없는 것이야… 선이든 악이든 간에 난 그것을 동물성이라고 봐.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을 때의 동물성. 뭔가 모르는, 자기도 참을 수 없을 때 나가고 내질러 버리는 것. 내 그림이 바로 그랬으면 좋겠어. 선한 존재가 눌리고, 눌린 곳에서 나온 부르짖음. 그런 것이 었으면 좋겠어. 역사 속에서 말이야.”(주8)
이런 신학철의 심리를 심광현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식민지배 수탈의 전사와, 그 잔재로 성립한 반공이데올로기의 억압에 기초한 후사인 군사독재권력의 착취 기제로 파악하고, 그에 대한 작가의 내면을 ’역사적 트라우마‘란 수사로 비유했다.
“주지하듯이 60년대부터 본격화된 후자의 과정은 단 30~40여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압축성장의 신화’를 만들어내면서 엄청난 에너지를 소진했다. 시골에서 모내기하던 갑순이와 갑돌이가 이 압축성장의 과정으로 빨려들어가는 시초 과정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이 신학철의 그림에서 하나의 연속적 파도로 그려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해서 신학철의 <한국 현대사-갑순이와 갑돌이>에서 보여진 한국 자본주의의 압축성장의 역사가 바로 그 자신의 개인적 생애사의 과정과 정확히 겹쳐지는 것이다. 이 그림에서 안간힘을 쓰며 갑순이를 붙잡는 갑돌이의 얼굴이 바로 작가 자신의 모습으로 그려진 이유도 여기에 있다.”(주9)
이 작품은 한국 현대사에 대한 작가의 강열한 열망과 에너지를 표현적 방식의 표출뿐 아니라, 구조적으로 배치한 화면에서 등장한 소재들의 긴장과 이완, 충돌과 흡수를 통해 작가의 주관적 체험과 객관적인 현대사가 성공적으로 형상화된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2003년 문예진흥원 문예회관에서의 개인전은 이런 에너지와 90년대 작업을 총정리한, 그러면서도 80년대 작업에서 한 발 더 내디딘 장쾌한 역사와 평범한 이웃이 서로 스며들면서 큰 주제를 견인해낸 증거물이기도 했다.
포토콜라주와 포토몽타주 회화
신학철은 여러 매체를 다루었다. 유화, 콜라주, 목판화, 조각, 드로잉 등.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주요한 미디어는 단연 콜라주와 회화다. 작업량도 그렇지만 작가가 의도한 작업주제를 명료하게 증명해낸 형식이라서 더 그렇다. 콜라주는 독립된 작품이기도 하지만, 차후 회화로 번안할 에스키스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70년대 이후 한국 근·현대사 작품에 관계된 신학철의 거의 모든 에스키스는 드로잉이 아닌 콜라주가 담당했다고 보면 된다.
콜라주는 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을 쓰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기존 신문이나 잡지, 화보 등의 매스미디어에서 채집-복사-배치하고 조립하는 형식으로 형상에 도달한다. 그러니까 작업의 질료인 사진은 신학철에게 있어선 레디메이드 오브제인 셈이다. 신학철은 원하는 내용에 맞는 그 오브제들을 선택해서 주제에 합당한 형상으로 조립해서 컨버팅 한다. 선택된 사진 이미지는 어떤 경우는 자신의 속성을 그대로 가진 채 화면에 등장하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엔 다른 정체로 전치되면서 작가가 의도한 내용에 맞게끔 전체형상의 분자로 기능도 한다. 오브제 자체이자, 한편으론 작가의 의도에 의해 데뻬이즈망도 한다는 것.
콜라주 작업에서 선택된 사진은 기존 정보로 인한 중성적 기표 역할을 더 충실히 하게 된다. 즉, 콜라주는 내용을 담는 그릇의 역할로 주제를 명료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는 것. 그러나 이 사진 이미지는, 확대해서 캔버스에 그린 회화에선 차가운 중성적 팍토그라피를 넘어 좀 더 적극적인 분위기로 바뀌게 된다. 물감+캔버스+작가의 손의 개입을 통한 물질성으로 팍투라적 성격도 확보하는 것이라 하겠다. 물론 신학철의 회화는 최소한의 물질성으로 절제되어 있다. 그러나 사진이라는 기계적 프로세스에 의한 균질한 물성에 비하면, 작가가 의도한 감성을 최대한 반영해낸 회화에선 아무래도 표현성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리는 행위에는 작가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몸의 본능적 감수성이 반영되는 것이니 말이다. 포토 콜라주와 포토 몽타주의 차이가 재료(사진/물감)와 작업행위(오려 붙이기/그리기)와 장르(콜라주/회화)의 차이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과거 많은 이들이 신학철의 한국 근대사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충격적”이라는 공통된 반응을 보였는데, 이는 콜라주가 아닌 회화로 인해서였다. 콜라주에서는 각 단위 사진들의 정보가 집적해서 최종적 형태로 전체 내용이 드러나고, 그 결과 관객은 쉽고 정확하게 작품의 내용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 콜라주를 몸으로 그린 회화는, 안료와 캔버스와 작가의 체질이 표현과 분위기로 전환하면서 형상의 감성적 울림을 증폭시킨다. 콜라주의 정확한 정보 전달력의 바탕에, 작가의 체중이 얹어지고, 거기에 관객의 감성적 “느끼기”가 추가로 작동해서다. 신학철의 회화가 콜라주에 비해 감각적이고 정서적으로 확장된 분위기를 확보하는 건 이 때문이다. 콜라주보다 훨씬 커진 작품의 규모에 의해서도 물론 그렇지만, 작가의 휴먼터치에 의한 표현 형식이 사진적 정보+회화적 상징성을 결합함으로 콜라주보다 더 생생하게 한이나 슬픔의 강도를 강화시켜서 그렇다. 그의 그림에서 우리가 형상의 내용과 더불어 감각적이고도 심리적인 그로데스크나 공포를 맞닥뜨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명징한 콜라주 언어가 회화적 상징언어로 컨버팅하는 순간, 소통의 회로는 인식뿐 아니라 감성으로도 훨씬 강력하고도 깊게 증폭하는 것이니까. 더불어 그로데스크는 그런 증폭의 기제로 작품의 내용을 더 심도 있게 전달하는 메신저의 기능을 하는 것이고, 이 콜라주와 회화의 차이와 장점을 신학철은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그의 작업이 콜라주의 구도와 형태에 바탕두었으되, 회화를 통해 대단원의 울림을 이끄는 이유이기도 하다. 콜라주-회화, 정보-해석과 표현의 투 트랙으로 상호 보완하는 작업구조의 완결성이 소통에서 더 큰 효과를 얻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고.
신체와 형상
거대한 산일수록 빛이 강하면 골의 그늘은 짙은 법이다. 2002년 성공적 개인전 이후 한동안 신학철은 새로운 작품을 내놓지 못했다. 너무나도 많은 시간과 노동력을 요구하는 작품에 매달렸던 후유증과 부인의 지병으로 인한 가정사로 작업에 집중하기가 어려워서였다. 본격적인 역사화는 그리지 못하고 다수의 에스키스용 콜라주와 풍경화 등으로 여러 시민단체와 운동단체들 기금 마련을 위한 기증용 작품을 제작했다. <한국현대사-망령>(2011), <한국근대사-관동(간토)대지진(한국인 학살)>(2012) <한국현대사-광장>(2015) 같은 여전히 뛰어난 대작을 가끔 그렸다. 그리고 2014년부터 2017년 사이에 비로소 다음 전시주제를 준비하는 콜라주를 집중해서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2019년 인디프레스 갤러리 개인전을 앞두고 2018년은 다시 한국 현대사에 집중해서 콜라주와 대작 회화를 다량 제작하고, 그중 상당수는 <한국현대사-6.25> 연작으로 개인전에 출품한다. <한국현대사-6.25(통곡)>, <한국현대사-6.25(망령들)>, <한국현대사-고난의 대장정> 등의 대작이 이 시기 신학철의 대표 작품들이다. 여전히 신체들은 왜곡되고, 뒤틀리고, 해체되고, 또 재조립되었다. 그러나 그 신체들은 결국 또 다른 형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내용적 단서이고, 우리가 결과적으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 형상에 의한 상징의 영역이다. 여기에 대해서 김동하의 다음 글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언급할 내용은 신학철 작품의 ‘형상’에 관한 문제이다. 전시 오프닝 다음 날, 장경호 선생은 신학철의 작품에서 화면의 ‘내용’들은 인과관계를 부여할 수 없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나열일 뿐이며, 우리가 진짜로 의미 있게 주목해야 할 부분은 ‘형상’인데, 신학철 작품의 진짜 핵심은 몸, 형상으로 다가온다고 말했다. 우리가 이 형상에 주목할 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형상이 건강하고 완전한 상태가 아니라는 점이며, 하나의 병리적 증상(pathological symptom) 혹은 왜상(anamorphosis, 歪像)이라는 사실이다.
즉 어떤 전일(holistic, 全一)하고 완벽한 하나의 구조로서의 형상이 무언가에 의해 휘어지고 구겨지고 꺾이어진 왜상으로 변형된다는 것이다. 이 세계와 삶의 역사는 본래 하나의 체계로 통합될 수 없는 비전체성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근육, 남근, 무기 등으로 표상되는 전체성-세계를 하나의 체계로 통합하려는 힘-의 구조가 침투해 들어오면서 이러한 비전체성을 격멸시키고, 화면 속 전일한 형상–세계의 비전체성-을 일그러뜨리는 균열의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거대한 기계, 우람한 근육질, 발기된 남근 등의 남성성적 요소가 개입되면서 트라우마(trauma)의 양상들이 만들어내는 뒤틀어진 형상성 그 자체가 작가의 개인적 무의식의 변화의 과정이자 한국근대사의 질곡 그 자체-집단적 무의식-의 상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상 속에 등장하는 ‘내용’이 신학철 회화의 ‘의식’의 반영이라면, 내용을 담고 있는 이 ‘형상’ 자체야말로 신학철 회화의 ‘무의식’의 반영이 아닐까?”(주10)
그렇다. 화면에 단서로 제시된 인체와 그를 결합한 서사적 주제의 배후에서 조형적·심리적 힘으로 좀 더 심층적 소통을 작동시키게 만드는 건 바로 이 형상성 때문이다. 작가의 체질·무의식적 의지·기억·체험 등이 어우러지면서 풍기는, 작가와 떼려고 해도 분리되지 않는 체취 같은 것 말이다. 회화적 소통은 바로 이런 단서를 채워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신학철에게 있어서 이는 그의 시각언어를 이루는 음소이자, 엄밀하게는 그의 포토 콜라주와 포토 몽타주 회화를 가로지르는 힘줄이고 신경망이라 하겠다. 예민한 촉수로 세계의 비극을 감지하고,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을 작가가 원하는 에너지로 재생시키는 것인데, 이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이미 숱한 사건으로 분절된 이름을 다시 호명해서 그 혼들을 재생한 신체(형상)로 위무하는 일종의 제의라 하겠다. 작품은 바로 그 지점에서 완성된다.
죽음으로부터 다시 생명을 소환하는 무의식적 의지. 생명성. 그렇게 형상화된 신학철의 신체 즉 비정형적인 몸은, 역사적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마주 보고 드러내야만 비로소 역전의 에너지가 발현하는 장(Field)이자, 그런 에너지가 용트림하는 실체이기도, 욕동하는 생명성의 현장이기도 하다. 신학철의 형상이 단순히 심리적 현상인 기괴한 그로데스크로 전락하지 않은 이유는 이처럼 역사적 팩트와 내면의 무의식을 긴밀하게 콜라주 하는 그의 인식적·조형적 능력 때문이라 여겨진다.
이런 지점에서 보자면 최근 완성한 대작 <한국현대사-질곡의 종말>은, 자연발생적이었던 촛불의 생명력(개혁)을 가로막고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적 계보와 정체를 명료하게 고발하는 Anti-vitality(반생명력)적 도상이다. 화면 하단부 한국전쟁 시기의 보도연맹이라든가 여순사건 등의 학살 사진으로부터 이승만·하지 점령군사령관·안두희, 그 위로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용갑을 포함한 민정당 군사쿠데타 세력들(탱크)과 광주의 죽음, 다시 그 위로 이명박·이상득·김석기·원세훈·박근혜·최순실·김재원·김기춘·이정현·우병우·이회창·이건희·이재용 등의 재벌이, 다시 그 위로는 ”촛불은 꺼져“라는 피켓 주변으로 홍준표·전희경·김진태·조갑재·김평우·나경원·고영주·변희재·주승용·김문수·이문열·김무성·이언주·김경재·주옥순을 비롯한 태극기부대가 그려져 있다. 소위 반촛불 총연합이다. 그 사이사이로 각 시기마다 이들에게 피해 입은 사람들의 모습이 펼쳐져 있다.
그런데 이들의 현재를 파악하는 신학철의 시선이 매섭다. 1983년 <한국 근대사-종합>에서 역사 속 피해자(민중)/가해자(권력, 제국주의)라는 상대적 등식이, 2002년 <한국현대사-갑순이와 갑돌이>에서 시커먼 금속성으로 현대사를 관통해온 권력과 각 시민 개인의 동질화된 욕망이 병치한 90년대식 시선으로 바뀌었다면, 2020년 여기 <한국 현대사-질곡의 종말>에서는 소위 수구 진영 인사들을 채집-나열만 했는데도 그 인물들에 대한 정보의 객관성으로 인해 소통의 효과를 얻는다. 한국 보수의 계보인 이승만-박정희-이명박-박근혜 정권-재벌-그리고 태극기부대는 모두 자신들의 욕망과 이익에 충실하기 위해 상호 투쟁이 아닌 연대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을 드러낸 것이다. 악한 에너지는 자신들의 기득권 앞에선 어떤 갈등도 봉합하고 상호 파이를 나눌 수 있는 연대를 자연발생적으로 선택한다는 것. 간교하되 욕망에는 너무나 정직한 그들의 계보학적 영악함을 이 작품은 제시한 셈이다.
이 작품의 구조는 ‘한국 현대사-종합’과 같은 수직이되, 내용은 정반대 버전인 셈이다. 하단의 과거로부터 뒤틀리지 않고 현재로 이어진 구조의 시간성. 최후에 통일에의 희망을 담았던 남남북녀의 입맞춤이 있던 자리를, 온전하게 독버섯의 형태로 개화한 태극기부대가 점령하고 있다. 최상단 홍준표가 배현진에게 꽃을 달아주는 장면은 여전히 녹록하지 않은 반개혁의 현실태를 반영한다. 신학철이 자주 지적한바 ‘선한 에너지’가 우리 역사를 이끌어야 하는 힘인데, 반대로 ‘악한 에너지’도 마찬가지의 강력한 힘으로 여전히 존재한다는 냉정한 현실적 판단 말이다.
사실 그렇다. 신정국가가 아닌 한 정치에서 분명히 절대적인 힘은 없다. 힘과 힘은 부딪히며 유동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러니 촛불 이후에도 광장에서의 대치는 여전한 것이다. 우리가 강하면 저들도 강해진다는 불변의 법칙. 그래서 신학철의 화면에서 역사의 몸은 늘 불편하게 울퉁불퉁 비정형적으로 불규칙하게 뒤틀려 있는 것이다. 그런 외적인 이미지는 비슷하되, 여기 <한국 현대사-질곡의 종말>에서는 <한국 현대사-종합>의 키스처럼 드라마틱하거나 다이나믹한 결론은 없다. 절절한 사랑이 없는 이들은 이룰 수 있는 것이 없기에 그렇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최근 그들의 역공이 진행형으로 지속되고 있는 현실, 혹시 모를 그 구체제 복원에의 징그러운 역장逆章은 정말 악몽처럼 두려운 무대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을 보는 신학철의 시선은, 이제 자신에게 내재 되어있던 무의식적인 피해의식인 역사적 트라우마로부터 해방된 정면성을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적을 ”바로 봄“으로 스스로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난 것처럼 말이다. 그런 신학철 인식의 배후엔 촛불과 같은 ”선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에너지에 대한 믿음“(주12)이 있어서 그렇다.
촛불의 등장으로 우리가 꿈꿨던 그 많은 해원의 에너지가, 지금은 악한 에너지의 기승으로 지체된 개혁의 시간이다, 40여 년 전 신학철이 이미 완성했던 작품형식과 대칭으로 평형을 이루는 이 작품에서도 물론 여전한 질곡의 현실은 존재한다. 그래서 적폐 DNA의 종말을 바라는 작가의 작업은 여전히 진행하고 있는 것이고. 질곡은 반드시 종말을 맞을 것이다. 이런 신학철의 기대와 힘은 지금 진행하고 있는 2021년 버전의 콜라주 <한국 현대사-갑순이와 갑돌이>로 헤쳐모이고, 종국에는 가로 40m가 넘는 초대형 포토 몽타주 회화로 다시 등장할 것이다.
작가
2023년 회고전이 예정된 신학철은 그때 나이 여든이 된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현역 화가일 것이다. 혼자 숱한 이미지를 오리거나 변형하면서 아주 긴 시간 콜라주로 에스키스를 하고 더 큰 캔버스에 정교하게 옮기면서, 오로지 몸으로 그 작업 과정과 노동을 견딜 것이다. 그런 작가가 신학철이다. 1980년대 민중미술 시기를 관통하며 현재에 이르는 40년간, ‘한국근대사’와 ‘한국현대사’ 작업에 화가 자신을 온통 투여한 궤적처럼.
어째서 그런 이해하기 어려운 작업에너지가 그에게선 가능할까. 그것은 그가 작업을 머리로만 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한국현대사와 자신의 자전적 일대기가 결합하고, 또 미술과 역사와 정치가 두루 얽히는 혁명에의 열망이 여전히 그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기 때문이라 그럴 것이고. 그런 자전적 체험과 역사적 의식을 미적인 메시지로 전환해준 주요한 어법이자 기법인 포토 콜라주 형식이 그에게 여전히 재미를 주어서 그렇기도 하고.
수많은 사진을 채집해서 의도한 맥락과 주제에 맞게 선별하고, 그것을 상호 연결하거나 축소-확대 복사를 통해서 특정한 형상으로 조합한 신학철의 포토 콜라주와 포토 몽타주 회화는 이제 그 자체가 한국현대미술에서는 ‘신학철’이라는 이름의 ‘장르’가 되었다. 그것은 한국현대미술에 있어서 일대 사건이지만, 동시에 한국 현대사에서 변혁기 문예운동을 추증하는 에너지이자 원기소이기도 하다. 지난 40여 년간 각종 사회 운동단체들의 기금 마련을 위해 기증한 그의 작품만 해도 엄청난 수량이다. 이처럼 자신의 양심과, 정치·사회적 실천과, 조형적 특성을 통일시킨 작가는 드물다. 신학철이란 사람이 곧 그의 작품과 일치된 작가라고 느끼는 이유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힘이 “쎈” 작가로 여겨지는 것이리라. 바로 진짜 주체적 사람인 ‘작가’ 말이다.
신학철-시기별 작품해설
본 연구팀은 신학철의 작품활동을 시기와 내용, 형식을 기준으로 크게 다섯 단계로 나누었다. 연구자에 따라 다소 다른 시각이 있겠고 또 칼로 무 자르듯이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성질은 물론 아니다. 다만 작품을 구성하는 조형 양식의 흐름과 작가 활동의 내외적 조건이 큰 흐름에서 상호 교집합 되는 지점을 분절해서 보면, 이 구분은 비교적 합리적으로 보인다. 이 구분을 먼저 일별해 보자.
1. 모색기-습작기(1964~1970):
대표작: 검은 정물(1966), 추상(1967), 침묵(1968), 내가 사는 도시(콜라주, 1968)
2. 모더니스트 활동기(1970~1979): 태도가 형식이 되는 모더니스트
대표작: 메이퀸 추락사건(1971), 반투명 그림(1972), 습작(콜라주, 1973), 계시-1(1974), 지성-10(1975), 소주병(1977), 부활 No.1(1979),
3. 비판적 형상성 시기(1979~1983): 한국근대사, 역사적 리얼리즘
대표작: 순환(콜라주, 1979), 변신3(콜라주, 1980), 한국 근대사 3(1981), 한국 근대사-6(1982), 한국 근대사-종합(1983)
4. 저항적 민중미술 시기(1984~2002): 갑순이와 갑돌이-중산층 욕망의 현실과 에너지
대표작: 토지(1984), 모내기(1987), 한국 현대사-유월항쟁도(목판화, 1988), 한국 근대사-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1989), 유월항쟁과 7,8월 노동자(대)투쟁도(1991), 한국 근대사(1994), 한국 근대사-금강(1996), 한국 현대사-4.19(1998), 한국 현대사-갑순이와 갑돌이(2002)
5. 개별적 활동 시기(2003~2021): 시민 갑순이와 갑돌이의 희망
대표작: 한국 현대사-초혼곡(2005), 한국 현대사-망령(2011), 한국 근대사-관동대지진(2012), 한국 현대사-광장(2015), 한국 현대사-촛불혁명(콜라주, 2017), 한국 현대사-6.25(망령들), 한국 현대사-질곡의 종말(2021), 한국 현대사-갑순이와 갑돌이(콜라주, 2021)
1. 모색기-습작기(1964~1970)
먼저 이 시기의 작업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1964년(대학 1학년)엔 크로키북에 볼펜으로 마음속 정경을 초현실적인 분위기로 형상화한 드로잉이 있다. 시골 출신답게 전원 풍경이 배경이나, 그 앞으로는 이상한 동식물과 해골, 여타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그 분위기가 몽환적이고 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어서 1965년(2학년)엔 실기실에 있던 정물 중 소머리뼈를 중심으로 어둡고 묵직한 이미지에 접근한다. 여러 장의 넘어진 소의 스케치와 종이에 채색한 습작을 통해서 완성도 높은 작품에 다다랐다. 즉흥적으로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체계적으로 준비를 해서 원하는 결과에 다다르는 방식으로 여겨진다. 이는 한국 근대사 연작에서 치밀하게 작업 프로세스를 조절하는 스타일과 비슷하다. 1966년(3학년)에는 여전히 실기실에서 습작기 특유의 회화, 드로잉, 목판화 등을 제작하고, 이때 시도한 먹 드로잉에서 여러 대상을 몽타주로 배치하는 화면구성을 시도한다. 이는 신학철 포토콜라주의 초기 단계다. 마치 영화홍보 포스터 구성과 유사한 속성이다. 그리고 대학 4학년 때인 1967년엔 본격적인 포토콜라주-몽타주드로잉-추상회화-기타 형상성의 회화 등 다채로운 실험을 한다.
1968년 졸업과 더불어 좀 더 구체적인 내용에 접근하려는 포토콜라주를 시도한다. 포토 콜라주라는 장르에 대한 소통 기능적 깨우침이나 깊이 있게 접근한 주제도 없었으나, 생득적 감각으로 대상을 분해·재조립하면서 모호하나마 내용을 담아내는 방식이 드러난다. 1966-67년의 몽타주-콜라주 습작에 비하자면 내용에 대한 고민이 좀 더 구체적으로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잡지나 신문을 통해 입수한 사진과 사건 정보를 결합하며, 기사에 담긴 상황을 시각적으로 정보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탐구이자 실험의 결과로 여겨진다.
이 시기 드로잉·목판화·드로잉+포토콜라주·회화(유화)·설치 등 다양한 재료와 형식을 시도하는데, 이는 신예작가 특유의 도전적 자세다. 페인팅+1967~8년의 드로잉을 통해서 신학철 특유의 상황 설정과 컴포지션은, 10년쯤 뒤인 1979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신학철 특유의 포토몽타주 양식과 유사하게 연결된다.
2. 전위적 실험미술 시기-태도가 형식이 되는 모더니스트(1971~1979)
1970년대는 신학철이 한국현대미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1971년
1970년대 후반기에 다다르자 신학철은 다시 구상적 그리기를 동반한다. 1977년 <전쟁(월남전)>이나 1978년의 <피난길> 같은 작품이 그것이다. 미군의 베트남 시민 사살 사진을 보고 그린 회화인데, 80년대 현실을 작업 소재로 취하는 작가적 태도와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서서히 작품의 현실적 내용을 지향하는 신학철의 입장은 1979년 <변신><순환> 연작에서 분명한 메시지를 보여준다. 이런 프로세스는 신학철이 70년대 내내 전위적 활동을 했으나 70년대 후반부로 가면서 사변적·관념적 실험미술이 자신이 지향하는 미술이 아님을 깨닫게 된 결과다.(주5)그리고 그런 자기 미술에 대한 태도 변화를 다음의 작가 노트로 기술한다.
“순수한 미란 진정한 예술의 기준이라기보다는 미적 기준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순수한 미만을 추구한다는 것은 비인간적인 특징일 수도 있다. 이젠 외진 곳에서 내면의 심연 속에서 그리고 높은 산정에서 내려와 현재 속에 나 자신을 던져야 하겠다. 그 속에 나 자신을 객관화시키고 현실을 내 쪽으로 끌어들여야 하겠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면의 고립화에서 탈피하려는 것이고 보다 뚜렷한 일체감을 찾으려는 것이다.”(주6)
그런데 1970년대 후반기 이런 포토몽타주를 통한 현실 비판적인 작업의 맹아가 이미 1973년(추정) 드로잉과 콜라주를 겸한 에스키스 <습작>에서 이미 드러났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68년의 콜라주에서도 현실에 대한 접근은 있었지만, 1973년 전위적 실험미술로 활동하던
“그중 하나. 베트남전의 유명한 보도사진인 ‘네이팜탄 소녀(1972)’와 ‘My Lai 학살(1968)’, 그리고 일본 외무대신을 역임하고 총리까지 지낸 오히라 (주7) 화면 오른쪽 아래에 배치한, 콜라주와 드로잉을 결합한 에스키스다. 월남전과 오히라의 이미지가 어떤 필연적인 연관관계를 갖는지는 애매하나, 타의에 의해 폭력과 죽음을 경험한 약소국인 베트남과 조선, 가해자인 제국주의 미국과 일본을 등치하며 비판하는 시각이라는 해석은 가능하다. 물론 이때까지 신학철의 포토 콜라주 문법이 성숙한 것은 아니었으되, 콜라주란 방식을 통해 사진 이미지가 어떻게 현실을 반영하고 또 비판할 수 있을지에 접근한 최초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이 서사적 조형성은 1979년 본격적으로 시도하는 문명비판을 주제로 한 콜라주 작업과 연동이 된다.”(주8)
메시지는 소통을 동경한다. 아니, 소통을 목적으로 한다. 실험적 현대미술의 고립된 지점에서 좀 더 선명한 ‘말’과 ‘메시지’를 통해서 타자와의 공감, 즉 소통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그 결과 1979년 현실적 주제를 견인하기 위한 포토 콜라주 방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그 당시 그의 문제의식에 포착된 소비 문명에 대한 비판적 작품들을 시각적 매력과 함께 도출하게 된다. 1968-9년의 초기 포토 콜라주 작업에 비하면 훨씬 진일보한 작가적 기량·시각성·내용이고, 1970년대 실험미술 작품에 비하면 ‘코페르니쿠스 전회’ 같은 대담한 변화다. 고민했던 미술의 현실성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 결과가 1980년대 포토 몽타주 회화 <한국 근대사> 연작 형식으로 나타난다. 1980년부터 신학철 작업이 성공적인 탄력을 받는 바탕은, 바로 ‘현실’에 대해서 ‘말’을 하려는 그의 소통 지향의 태도가 주제와 형식으로 진화하는, 작가적 변신 때문이라 하겠다. 또한 그것은 역사와 정치가 소재로 제시되는 게 아니라, 그 작품을 보는 관객과의 소통을 통해서 역사와 정치적 힘으로 동시에 존재한다는 현실을 깨닫게 만드는 기제가 된다, 이전까지와 전혀 다른 역사畵이자, 소통 과정에서 관객이 주체적으로 정치적 각성을 생성할 수 있는 정치畵가 된 것이다.
3. 비판적 형상성 시기-한국 근대사, 역사적 리얼리즘(1980~1983)
1980년에는 국보위를 통한 전두환 군부 세력과 컬러TV가 동시에 등장했다. 1979년과 80년의 <변신> 연작은 당시 한국의 정치·사회적 현실과 현대 소비 문명에 대한 비판적 주제를 형상화하면서 포토 콜라주의 강점을 여지없이 발휘했다. 신학철은 당시 소비사회에 대한 뚜렷한 몽타주 미학을 드러냈다. 자신의 작업 주제-형식적 스타일-비판적 형상성 등의 작가적 언어를 확고하게 구축한 시간이었던 셈이다. <상황>, <변신>, <묵시>, <여인> 연작의 포토 콜라주와, 포토 몽타주로 형상화한 <한국 근대사> 연작은 독자적인 주제-양식, 형식-내용이 튼실하게 결합한 신학철의 비판적 형상성의 출발점이 된다. 물론 이는 그의 민중미술의 단초도 된다.
1982년 미술회관에서의 <방법전>에서 우연히 <한국근대사-3>을 본 미술평론가 김윤수(당시 서울미술관 관장)(주9)의 초대로, 신학철은 서울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갖게 된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호평 일색. 그 평가로 인해 신학철은 제1회 미술기자상을 수상하게 된다. 역사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와 함께. 이후 1983년에 발표한 흑백모노톤 대작 <한국 근대사-종합>은 신학철을 비판적 형상미술의 가장 주요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만든다.
“신학철의 <한국 근대사-종합>은 우리 근현대사를 웅장한 이미지의 파노라마로 펼쳐 보인 대작이다. 80~83년 그의 <한국 근대사> 연작이 잇달아 쏟아져 나왔을 때 화단은 그야말로 전율에 휩싸였다. 포토몽타주 형식을 근간으로 한 걸출한 조형 성과도 성과려니와, 우리 현대사를 어떤 이데올로기로부터도 벗어나 피와 살이 만져지는 생생한 감동의 구현체로 형상화해내기는 해방 이래 그가 처음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화단의 충격이 엄청난 탓이었다.”(주10)
본 연구팀이 1979~1983에 이르는 초반 <한국 근대사> 시기를 민중미술에 편입시키지 않고 <비판적 형상성>이란 독립된 장으로 엮은 것은, 실제적으로 이때까지는 신학철의 작업에서 민중적 계급의식에 기반한 운동적 측면은 아직 드러나지 않아서다. 지식인 작가의 자기 작업을 통한 사회적 발언이 비판적 형상성으로 높은 미적 완성도를 보여서이고, 또 민족미술협의회 창립의 단초가 된 ‘힘전’ 이전에는 민중성에 기반한 집단적 움직임이나 저항성이 아직은 나타나지 않아서 그렇기도 하다. 1979~1983년 이 시기 신학철의 <한국 근대사> 연작은 이후 전개되는 민중미술 운동의 한 축에서 중요한 리얼리즘의 전범이 되지만, 신학철의 작품궤적에서 보자면 농민·도시빈민·노동자의 현실과 중산층의 욕망을 공격적으로 다루는 1984년 이후의 작품들이 오히려 민중미술 운동의 측면에 더 부합한다. <신기루>, <토지>, <한국근대사-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낙골의 환상>, <모내기>, <가투>, <중산층 연작>, <저 평등의 땅에> 등과 같은 컬러풀한 포토 콜라주와 회화작업을 통해서 소외된 이웃의 전형, 그 계급적 ‘현재’를 반영하고, 투쟁하려는 의지를 구체적으로 드러낸 작품들이 본격적 민중미술로 여겨지기도 해서다. 물론 이는 칼로 무 자르듯이 구획할 수 있는 성질은 아니다. 다만 어느 정도 집체적 미적 지향성을 가진 민족미술협의회의 창립과 더불어 전개된 반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투쟁이 민중미술의 핵심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기에 신학철의 작업도 그 기준에 부응해서 분류해야 옳을 것이다. 그런 기준에서 1985년 민족미술협의회 창립 이전, 즉 집체적 미술운동 이전인 1979~1983년의 개별적 작업을 비판적 형상성의 시기로 나눈 것이다.
4. 민족·민중미술 시기-갑순이와 갑돌이 / 중산층 욕망과 혼돈의 에너지(1985~2002)
앞서 언급했듯이, 신학철의 걸작인 <한국 근대사-종합>은 비판적 형상성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포토몽타주 회화의 한 절정을 이룬다. 물론, 이후 제작된 한국 근대사나 한국 현대사 연작에서 이런 비판적 형상성은 유지되고 있으나, 적어도 1985년 민족미술협회라는 미술인 단체조직이 결성되고 이어 1986년 그림마당 민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부터 신학철의 그림은 변화를 맞게 된다. 민미협의 출범과 동시에, 한국 당대 현실과 이웃(노동자, 농민)에 대한 애틋한 시선과 동시에, 권력층과 중산층의 허구에 대한 비판과 풍자를 동반한 공격성을 띄기 시작했다.
이 시기 작품의 내용을 일별해 보면, 한국 근현대사 연작과 함께 도시화로 인해 고갈된 농촌 현실-농민의 상경과 노동자로의 진입-소외된 도시화의 주변부와 그 그늘을 <갑순이와 갑돌이>와 같은 자전적 서사에 대입한 작업으로 자연스럽게 동시대 서민 정서를 수용하는 경향을 띈다. 농촌을 지키는 농민이나 도시 노동자들의 강인한 생명력과 가투, 노동운동 현장을 반영한 작품도 있다. 대략 1985~1992년경의 작업양상이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이 90년대 초반 제1회 민족미술상 수상기념전인 학고재 개인전의 주축을 이룬다.
그런 와중에 1987의 <모내기>는 검찰에 압수되고 작가가 구속까지 된 당시 한국 사회에서 미술과 권력의 관계성을 사회적 의제로 등장시킨 반헌법적 사건이었다. 작가가 그린 애초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검찰의 일방적인 해석으로 국가보안법 반국가단체 찬양고무죄를 적용한 황당무계한 사건이기도 했다. 이 사건의 발단과 진행 과정을 보자.
“1987년 제2회 통일미술전에 출품된 ‘모내기’는 남북통일에 대한 희망을 농사꾼의 모내기에 비유해 그린 소박한 풍경화였다. ‘이발소 그림’의 형식을 부각한 독특한 화풍의 이 작품은 아무 문제 없이 전시됐다. 2년 뒤인 1989년, 이 그림으로 부채를 만들어 나눠 줬던 인천 지역 한 재야 청년단체를 수사하던 서울시경 대공과는 엉뚱한 색안경을 끼고 놀라운 상상력을 발휘해 갑자기 북을 찬양하는 그림으로 바꿔 버렸다. 그림 위쪽은 풍요롭고 평화롭게 보이고, 아래쪽은 힘겨운 노동 장면과 미국 쓰레기가 가득하니 이를 한반도 지형으로 보면 북에 동조하는 암시 아니냐는 얘기였다. ‘공안비평’이란 신조어가 나올 법했다.
30년 전 대법원은 ‘모내기’를 이적표현물로 판단해 몰수 명령을 내렸고, 압수된 작품은 서울 경찰청 압수물 보관창고에 들어갔다. 1989년 8월, 기소된 신학철씨가 구속되고 치열한 법정 공방이 벌어졌는데 당시 재판을 참관한 이들 증언을 들어 보면 판사와 화가 간에 오간 대화가 코미디 버금가는 내용이었다. ‘모를 찌는 모습’이라는 설명을 알아듣지 못하는 판사, 소 뒤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우리 6촌 형님입니다”라는 화가 대답에 방청석에선 떠나가라 웃음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주11)
이 작품으로 야기된 1989년의 민중미술에 대한 군사정권의 탄압은 그 자체로 신학철의 작업이 지닌 문화적 힘과 그와는 반대급부적 관계에 있는 공권력의 부딪힘이자 마찰이라고 하겠다. 현재 이 작품이 국립현대미술관 창고에 위탁보관 되어 있는 현실은 여전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리고 1993년부터는 광주항쟁을 소재로 한 <한국 현대사-초혼곡> 연작, 동학농민혁명을 형상화한 <한국 현대사-금강>의 콜라주와 대형회화, 그리고 동시대 자본주의화에 의해 급격히 탈역사화와 반문화로 진입하는 한국 사회를 풍유하는 콜라주를 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1998-2002년의 기간 동안 1984년 이후 1990년대의 단위작업 모두를 아우르는 이 작품은, 1983년의 <한국 현대사-종합>과는 달리 신학철 본인의 고향과 자전적 내러티브를 한국 현대사와 결합하는 서정적 개별서사+대하서사성으로 좀 더 객관적인 동시대적 전형성을 확보한 역사화였다. 20미터가 넘는 초대형 화면은 1979년부터 작업했던 소재 모두를 집대성해서 응축한 형상성으로, 신학철의 민족민중미술운동 시기의 득의작으로 꼽힌다. 이 작품은 2003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예회관 <우리가 만든 거대한 像> 전을 통해서 발표되었다. 신학철이 앞서 수직적 구조의 <한국 근·현대사> 연작과는 또 다른 시점과 방식으로 시도한 대하적 역사화다. 이 작품의 형식뿐만 아니라, 2002년 당시 한국 현실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신학철의 변화 또한 감지할 수 있다.
”검은 심연 속으로 격발된 근육 덩어리처럼 한국 현대사를 이끈 것은 갑돌이와 갑순이가 가진 무의식의 욕망이었다. 그 욕망이 무엇이었는지 작가는 구체적인 전망을 내놓지 않는다. 신학철 역시 제 3인칭의 전지적 작가가 아닌 한명의 갑돌이-실재 작품상에서도-이기 때문이었다.
갑돌이와 갑순이를 짓누르고 있는 검은 기계 덩어리는 군사정권과 독점자본 즉, 해방이후 지속되어온 한국의 지배체제이다. 신학철은 작품에서 그들의 욕망이나 갑돌이와 갑순이의 욕망을 등가로 취급하였다. 그럼으로써 신학철은 한국 근현대사를 서술하는 국가 중심 또는 민중 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고 있다.“(주12)
이 작품으로 한반도에서의 1990년대를 지나면서 두 번째 <한국현대사>를 새로운 관점으로 집대성한 신학철은 새로운 세기를 맞게 된다. 1980년대적 민중사로부터, 자신의 삶을 모델로 한 1990년대적 중산층의 욕망을 전형화하는, 좀 더 당대의 현실적 리얼리티를 포착하는 시선으로 예각화하면서 말이다. 그것은 군부독재정권이라는 저항의 대상이 뚜렷했던 1980년대와 달리, 1990년대식 후기자본주의로 이행한 우리 사회를 예의 주시한 결과다. 독재와 올림픽, 그리고 중산층 계급에 바탕한 1990년대식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우리들의 정신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정확하게 포착한 시선이었다.
그러니까 1983년의 <한국 근대사-종합>이 동학에서 분단에 이르는 근대사 자체 구조를 드러낸 ‘비판적 형상성’의 최종결과물이라 한다면, 이 2002년의 <한국 현대사-갑순이와 갑돌이>는 박정희로부터 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 정권에 이르는 기간 한국 현대사의 주체이자 객체인, 욕망하는 중산층의 현실과 정체를 바로 그런 권력과의 함수관계에서 반영한 정치적 ‘민중미술’의 결과물이라 하겠다. 이처럼 1980년대 초반 <한국 근대사>를 그릴 때의 신학철과 1998~2002년 <한국 현대사-갑순이와 갑돌이>를 그린 신학철의 현실을 바라보는 눈과, 현실을 체감하는 감각과, 그 현실을 분석하는 인식은 다르다. 1983년과 2002년의 입장, 그것은 우열의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현재와 현실을 어떻게 마주하고 반영할 것인가에 대해 늘 긴장하고 있는 신학철의 작가적 태도가 결정한 결론으로서의 작품의 차이이다.
5. 개별적 활동 시기-2000년대‘시민’갑순이와 갑돌이, 그리고 촛불광장(2004~2021)
물론 2,000년대에도 신학철은 여전히 민미협과 연계를 가지면서도, 독자적인 활동으로 작업반경을 넓혔다. 1980-90년대식 활동은 화단의 바뀐 문화적 환경으로 인해 그 토대를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많은 국·공·사립 미술관의 설립, 옥션, 대안공간 등으로 작가 활동의 양식이 달라져서이기도 했다.
그러나 2000년대 상당 기간 신학철은 작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부인의 장기적 투병을 직접 관리하면서 작업에 집중할 수가 없어서였다. 호사다마랄까, 문예회관에서의 성공적인 개인전이 끝나고 부터 였다. 2004년엔 아예 작업을 못 했고, 그것은 2016년까지 계속되었다. 물론 간간이 작업을 했으되 그 작업량은 이전에 비해 극히 적었다. 그 대신 비교적 소품인 다량의 에스키스용 콜라주로 풍유적인 작업계획을 세우면서 긴장도를 유지했고, 그 와중에 <갑순이와 갑돌이>를 위한 소위 이발소 풍의 고향 풍경과 인물화를 탐구했다. 그런 와중에도 2011년 <한국현대사-망령>, 2013년 <한국 현대사-10.26>과 같은 완성도 높은 대작을 제작했다.
한편 이 시기엔 포토콜라주나 회화 소품 등이 옥션에 자주 등장하고 낙찰도 자주 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2019년 인디프레스 개인전 스케줄이 잡히자, 예의 그 저돌성으로 2017년부터 콜라주를 다량 제작했다. <한국 현대사-촛불혁명>과 같은 뛰어난 콜라주가 완성되었다. 2018~19년엔 <한국 현대사-6.25> <한국 현대사-6.25 피난길> <한국 현대사-6.25 통곡> <한국 현대사-6.25 망령들> <한국 현대사-6.25 고난의 대장정> 등과 같은 콜라주와 대형 유화도 다수 제작했다. <갑순이와 갑돌이>도 마찬가지였고, 또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비판하는 내용의 회화, 광화문광장의 태극기부대를 비판하는 콜라주도 다수 제작했다. 2019년 인디프레스 개인전은 여전한 신학철의 저력을 증명한 전시였다.
2020년 작업실을 신축한 천안으로 옮기고 2021년 완성한 작품이 <한국 현대사-질곡의 종말>이다. 촛불 광장에서 신학철은 시민들의 성숙하고도 큰 에너지를 발견했는데, 이를 저지하려는 수구 세력들의 검은 에너지 또한 만만치 않음을 확인하고 제작한 작품이다. 그러니까 이제까지의 <한국 근대사>와 <한국 현대사>에서는 ‘선한 힘’과 ‘악한 힘’을 동시에 등장시키면서 그 내용을 서술했다면, 이 작품에서는 ‘선한 힘’의 상대적인 존재들인 ‘악한 힘’의 계보가 만만찮은 힘으로 주연으로 등장한다.
”이런 지점에서 보자면 최근 가로가 아닌 세로로 완성한 대작 <한국현대사-질곡의 종말>은 2021년 한국 사회에 있어서 자연발생적인 촛불의 생명력(개혁)을 가로막고 있는 힘을 보여준 예다, 신학철 특유의 구성력으로 Anti-vitality(반생명력) 극우세력을 비판하기 위해, 대체로 몸이 생략된 그들의 얼굴만을 뭉뚱그려 모은 형상이다. 화면 하단부 한국전쟁 시기 보도연맹이라든가 여순사건 등의 민간인 학살 사진으로부터 이승만·하지 점령군사령관·안두희, 그 위로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용갑을 포함한 민정당 군사쿠데타 세력들(탱크)과 광주의 죽음, 다시 그 위로 이명박·이상득·김석기·원세훈·박근혜·최순실·김재원·김기춘·이정현·우병우·이회창·이건희·이재용 등의 재벌이, 다시 그 위로는 ”촛불은 꺼져“라는 피켓 주변으로 홍준표·전희경·김진태·조갑재·김평우·나경원·고영주·변희재·주승용·김문수·이문열·김무성·이언주·김경재·주옥순을 비롯한 태극기부대가 그려져 있다. 소위 반촛불 총연합이다. 그 사이사이로 각시기마다 이들에게 피해 입은 사람들의 모습이 각인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의 현재를 파악하는 신학철의 시선이 매섭다. 1983년 <한국 근대사-종합>에서 역사속 피해자(민중)/가해자(권력, 제국주의)라는 상대적 등식이, 2002년 <한국 현대사-갑순이와 갑돌이>에서는 시커먼 금속성으로 현대사를 관통해온 권력과 각 시민 개인의 동질화된 욕망을 파악하는 시선으로 바뀌었다면, 여기 <한국 현대사-질곡의 종말>에서는 소위 보수의 계보인 이승만 정권-박정희 정권-이명박-박근혜 정권-재벌-그리고 태극기부대는 모두 자신들의 욕망과 이익에 충실하기 위해 상호 투쟁이 아닌 연대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즉 악한 에너지는 자신들의 기득권 앞에선 어떤 갈등도 봉합하고 상호 파이를 나눌 수 있는 연대를 선택한다는 것. 간교하되 욕망에는 너무나 정직한 그들의 계보학적 영악함을 제시한 셈이다.
이 작품의 구조는 ‘한국 현대사-종합’과 같은 수직이되, 내용은 정반대 버전이다. 하단의 과거로부터 뒤틀리지 않고 현재로 이어진 구조의 시간성. 최후에 통일에의 희망을 담았던 남남북녀의 키스 자리를, 온전하게 독버섯의 형태로 개화한 태극기부대가 주연으로 점령해 있다. 분명히 청산되었어야 할 적폐들인데, 최상단의 홍준표가 배현진에게 꽃을 달아주는 장면은 여전히 녹록하지 않은 반개혁의 현실태를 반영한다. 신학철이 자주 말한바 ‘선한 에너지’가 우리 역사를 이끌어야 하는 힘인데, 반대로 ‘악한 에너지’도 마찬가지의 강력한 힘으로 여전히 존재한다는 냉정한 현실적 판단 말이다. 정치적으로는 분명히 절대적인 힘이 없다. 힘과 힘은 부딪히며 유동하는 것이고 이제껏 신학철의 조형에서도 그런 힘의 작용은 뒤틀린 신체성으로 드러났다. 그러니 촛불 이후에도 광장에서의 대치는 여전한 것이다. 우리가 강하면 저들도 강해진다는 불변의 법칙. 그래서 신학철의 화면에서 역사의 몸은 늘 불편하게 울퉁불퉁 비정형적으로 불규칙하게 뒤틀려 있다는 것. 다만 여기에선 ‘한국 현대사-종합’의 키스처럼 드라마틱하거나 다이나믹한 결론은 없다. 절절한 사랑이 없는 이들이 이룰 수 있는 것이 없기에 그렇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최근 그들의 역공이 진행형으로 지속되고 있는 현실, 그 구체제 복원에 대한 작가의 역사적 트라우마가 작동된 무의식적 위기의식 때문일 수도 있고.”(주13)
촛불의 등장으로 우리가 꿈꿨던 그 많은 해원의 에너지가, 지금은 악한 에너지의 기승으로 지체된 개혁의 시간, 40여 년 전 오늘 신학철을 이미 완성했던 작품과 대칭으로 평형을 이루는 여전한 질곡의 현실 2021년. 적폐 DNA의 종말을 바라는 신학철의 붓질은 여전하다.
그리고 이 현실을 포착하며 가로 40m가 넘는 초대형의 새 <한국 현대사-갑순이와 갑돌이> 콜라주 작업과 회화가 다시 새로운 동시대성과 감각을 소환할 것이다. 그곳엔 광장과 촛불의 능동적 시민 에너지를 경험한 신학철이 한국 현대사에서 호명하고 소환하는 더 많은 사람과, 사건과, 욕망과, 권력과, 투쟁의 서사들이 새롭게 형상화되어 있다. 2002년 중산층 욕망의 <갑순이와 갑돌이>와는 다른, 2020년대식 촛불시민 <갑순이와 갑돌이>로 말이다.
신학철은 그렇게 잠시도 쉬지 않고 바로 지금 우리의 현실을 ‘무장’된 ‘곁눈’(주14)과 ‘겹눈’으로 보고 있다. 작업하는 그의 시선은 늘 그래왔고 또 지금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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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목차
본 아카이브는 신학철 작가의 전 작품 정보와 이미지, 관련 아카이브(작품 외 자료, 참고문헌), 전시이력, 작가연보, 비평문, 시기별 작품해설, 작가 소개 영상으로 구성된다.
2. 작품
➀ 작품 수록 범위
- 본 아카이브의 수록 작품은 1957년(14세)의 작품부터 2021년(최근작) 제작 작품을 포함하는 전작을 대상으로 한다.
⓶ 작품 유형
- 평면(회화, 판화, 드로잉, 콜라주), 입체(조각, 오브제), 설치, 퍼포먼스로 분류된다.
⓷ 작품 제목
- 작품에 직접 표기한 제목과 기 출판된 전시인쇄물에 기록된 제목을 기준으로 작가의 확인을 받은 제목은 ‘본제목-확정’으로 표기한다.
- 출처에 사용된 제목이 다수일 경우, 작가 인터뷰를 통해 작가가 우선하는 제목으로 ‘본제목-확정’, 그 외 제목은 모두 ‘본제목-병기’하여 다른 제목의 이력을 동시에 제시한다.
- 작품의 제목과 출처가 없고(미발표·망실 작품), 작가의 기억이 부정확한 경우 ‘미정’으로 표기한다. (※추가 연구 과정을 통해 변동 가능성 있음.)
⓸ 시기 정보 (제작 연도)
- 작가가 작품에 제작 연도·월·일을 표기했을 경우, 자필 기록을 기준으로 표기한다. (※ 작가의 자필 서명을 제작연도의 완전한 근거로 삼을 수는 없음. 일부 작품 경우 제작연도 정확한 연구 필요.)
- 출처별 제작 연도 기록이 상이할 경우, 작가 인터뷰를 통해 ‘제작 시작 연도’와 ‘제작 종료 연도’를 함께 표기, 기존 기록 또한 출처와 함께 병기한다.
- 미발표·망실 작품 등 제작 연도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경우, 작품의 제작 기법과 주제 흐름과의 유사성 고려하여 ‘추정시기’에 표기하고, 추정근거를 연구자 노트에 기술. 추정 불확실 경우 ‘미상’으로 별도 표기한다.
⓹ 규격 정보
- 작품의 규격은 세로×가로x(높이/두께)(cm) 순으로 표기하며, 실측한 규격을 우선으로 표기. 실측한 작품의 규격은 소수 첫째자리까지 명시한다.
- 실측이 불가한 작품들의 경우, 출처 기록을 따르고, 출처마다 규격 기록이 다른 경우 모두 병기한다.
⓺ 재료 및 기법 정보
- 출처에 기록된 재료 및 기법을 기준으로 표기. 단, 재료 및 기법 용어를 기술하는 과정에서 상세 재료명이 소실될 우려가 있는 경우 ‘기타’에 추가 기술한다.
- 재료 및 기법의 기록들이 명백히 다르거나 출처가 없는 작품의 경우, 작가와의 인터뷰를 통해 정정하고 표기. 오류 수정의 경우 ‘연구자 노트’에 추가 기술한다.
⓻ 소장 및 경매 정보
- 소장 및 경매 기록이 분명한 경우, ‘구입’, ‘기능’, ‘경매-낙찰’, ‘경매-유찰’, ‘위탁’, ‘작가’ 등 유형을 표기하고, 소장/경매 시기와 소정처명/경매주소 등의 정보를 기술하고 출처를 밝힌다.
- 소장처 파악이 불가능한 경우, ‘미상’으로 표기한다.
- 소장처 요청에 따라 소장 정보를 밝힐 수 없을 경우 ‘비공개’ 표기한다.
3. 작품 외 자료 / 참고문헌
➀ 작품 외 자료 수록 범위
- 작품 외 자료는 연구팀이 수집한 신학철 작가가 참여한 전시의 리플릿, 브로슈어, 포스터, 초대장, 엽서, 삽화, 사진, 상장, 보고서, 방명록, 삽화, 전시 관련 문서, 작가의 작품 이미지가 실린 달력(기타) 등을 포함한다.
② 참고문헌 수록 범위
- 참고문헌은 신학철 작가의 작품 이미지나 작품에 대한 언급이 수록된 도록, 단행본, 정기간행물, 학술지, 논문, 영상 등을 포함한다.
4. 전시 이력
➀ 전시 이력 수록 범위
- 출처 기록(전시인쇄물)을 바탕으로 신학철 작가의 개인전을 비롯하여 참여한 모든 전시(아트페어, 국제전 포함)의 이력을 표기하고, 관련 정보(출품작, 전시개요, 전시서문 등)를 기술한다.
- 전시인쇄물이 없는 전시 기록은 신문 등 언론 기사를 통해 별도 취합한다.
5. 작가 연보
➀ 작가 연보 수록 범위
- 출처 기록과 작가 인터뷰를 바탕으로 출생, 학력, 수상, 경력(사회활동), 작업활동(작품이력·전시이력), 기타(가족 및 인간관계 등 포함) 항목으로 구분하여 표기하고, 관련 이미지와 함께 연보를 기술한다.
6. 인용문
➀ 인용문 수록 범위
- 작품 외 자료·참고문헌의 기록을 바탕으로, 작품 설명이 기술된 인용문을 출처와 함께 전체 혹은 부분 기술하고, 작품, 작가생애, 전시, 작가의 글, 기타 항목으로 구문하여 표기한다.
- 레퍼런스가 없는 작품은 작가 인터뷰를 통해 연구팀 자체 녹취록을 생성하여, 그 결과물을 ‘인용문’과 연구자 노트에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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