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소개
화가로서의 예술적 실천이 온갖 삶의 세계를 향해 몰입되어 있다는 점에서, 서용선은 ‘삶의 화가’이다.
그는 6.25 한국전쟁 중인 1951년 7월 24일, 서울 북쪽 변두리인 성북구 돈암동에서 태어나고 자라, 단색화가 미술계의 주류 담론으로 자리 잡던 시기인 1975년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했다. 이후 대학 재학 중이던 1978년 제1회 ≪중앙미술대전≫(1978.06.03-06.22,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 회화 <작품 78-5>(1978)를 출품하여 특선하며 미술계에 데뷔했다.
24세의 나이로 서울미대 회화과에 입학하며 시작된 서용선의 그림 그리기는 어느덧 반세기에 이른다. 그동안 줄곧 예술가로서 서용선이 화두로 삼아 온 것 하나를 들라면 ‘인간과 삶의 현실과 조건을 향한 질문’이라 할 수 있다. 즉 모노크롬 담론의 지배적 영향 속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다시피 한 삶의 세계와 현실을 다시 예술적 화두로 소환하는 일에서 출발한 그의 관심은 우리 근현대 예술에서 실종되다시피 했던 자아·역사·사회·신화·정치·종교 같은 아이템들은 물론 자연환경이나 역사적 풍경에 이르기까지 종횡 무진한 삶의 세계를 향해 있다. 또한 드로잉·페인팅에서 출발하여 오브제·조각·설치·퍼포먼스·사진·영상 등 형식과 장르에서도 경계를 넘나들었다. 그런가 하면, 독일·프랑스·미국·캐나다·호주·중국·일본 등 오늘날 풍속도인 지구촌의 메트로폴리스를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다양한 예술 행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넓다.
서용선의 작업들은 수 만점에 이르는 작품 수, 국내외 뮤지엄·갤러리에서의 개인전 80여 회, 400여 회에 이르는 그룹전 등 우리나라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역동성을 보여준다. 특히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에서 교수직을 사직한 2008년 이후 그의 행보는 더욱 주목할 만하다. 2009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한국현대미술의 흐름에 기여하고 한국미술의 새로운 지향점을 제시하는 작가로 서용선을 선정하고 ≪2009 올해의 작가: 서용선≫(2009.07.03-09.20,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을 개최하였으며, 2014년에는 제26회 이중섭미술상을 수상하고 ≪제26회 이중섭미술상 수상기념전: 서용선의 ‘신화’_또 하나의 장소≫(2014.11.06-11.16, 조선일보미술관, 서울)를 통해 인간, 도시, 역사, 신화, 풍경 등 그가 탐색해 온 삶의 세계의 지질학적 깊이를 더해가는 전환을 맞이했다. 더욱이 최근 국내외 유수의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개최된 ≪서용선, 삶의 노래≫(2023.04.20-08.30, 스페이스138, 서울), ≪서용선 내 이름은 빨강≫(2023.07.15-10.22, 아트선재센터, 서울) 등 전시는 한국뿐만 아니라 글로벌 미술계의 지평 위에서 서용선의 작품 세계를 다시 읽어 내는 다층적 시선을 발굴하는 일에 주목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대구미술관 등을 비롯하여 모나쉬대학, 우관중미술관 등 국내외 미술관과 개인소장가에 의해 소장되고 있다.
화가 서용선 약력
1951.7.24 서울시 성북구 돈암동에서 1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다.
1968 경복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미술반 활동을 시작하다.
1972 대학 입시 준비 중에 입대하여 대한민국 육군 하사관으로 임관하다.
1975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에 입학하다.
1978 중앙일보·동양방송 주최 제1회 ≪중앙미술대전≫(06.03-06.22,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 회화 <작품 78-5>(1978)를 출품하여 특선에 오르다.
1978 한국일보사 주최 한국미술대상 공모전에서 <감각(感覺) 78-9>으로 입선하고, 제5회 ≪한국미술대상전≫(11.13-11.22,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수상 작품을 전시하다.
1979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하다.
1980 서울대학교 대학원 서양화과 석사과정에 입학하다.
1982 동아일보사 주최 ≪동아미술제≫(04.29-05.08,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회화 2부에 회화 <하늘 III> 을 출품하여 동아미술상을 수상하다.
1982 석사학위청구 논문으로 「서양 현대회화의 분석적 연구: 개념분석을 중심으로」를 제출하고 서울대학교 미술학석사 학위를 수여받다.
1984 중앙일보사 주최 제7회 ≪중앙미술대전≫(06.23-07.02,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 회화 <소나무(松)>(1984)를 출품하여 특선에 오르다.
1984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시간강사로 강의를 시작하다.
1985 국립현대미술관 주최 제3회 ≪‘85청년작가전≫(03.05-03.24,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 출품하다.
1986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전임강사로 임용되다.
1986 영월에 사는 친구 집을 방문하여 강가에서 단종의 죽음에 대한 환각을 체험하다.
1988 첫 개인전 ≪서용선≫전(04.13-04.26, 갤러리P&P, 서울)을 개최하다.
1988 화가 유영국의 회화 작업을 돕다.
1994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조교수로
임용되다.
1994-1996 서울시립미술관 주최 ≪‘94 서울미술대전≫(06.28-07.17), ≪’95 서울미술대전≫(08.10-08.29), ≪‘96 서울미술대전≫(08.02-08.21)에 출품하다.
1995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에 주택과 스튜디오를 신축하여 이사하다.
1995 뉴욕에서 개인전 ≪YONG-SUN SUH, DRAWINGS≫(08.08-08.26, Gallery Swan, 뉴욕)을 개최하다.
1999 서초구립조형예술원의 미술진흥을 위한 프로그램 위탁운영자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이 선정되고, 원장으로 취임하다.
1999 대구광역시 주최 이인성미술상 제1회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수상을 거부하다.
2001 7월 독일 함부르크 국제미술아카데미에 초대교수로 방문하다.
2001 류장복, 이경희 등과 ‘할아텍’을 결성하여 공공미술 프로젝트 ‘철암그리기’를 시작하다. 태백 석탄박물관에서 제1회 ≪철암 그리기≫(12.15-2002.01.31)를 개최하다.
2003 치우금속공예관(현 유리지공예관) 설립에 조력하고 이사로 취임하다.
2004 일민미술관 주최로 17번째 개인전 ≪서용선_미래의 기억≫(06.11-07.18, 일민미술관, 서울)을 개최하다.
2006 뉴욕 Crecloo Art Gallery 주최로 개인전 ≪Yongsun Suh: New Works≫(09.01-10.09, Clecloo Art Gallery, 뉴욕)을 개최하다.
2007 일본 오사카 후쿠주미갤러리 주최로 개인전 ≪노산군일지 III≫(04.05-04.14 Gallery Fukuzumi, 오사카)를 개최하다.
2008 국립현대미술관 주최 “2009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어 ≪2009 올해의 작가-서용선≫(2009.07.03-09.20, 국립현대미술관 제1전시장 및 야외조각장, 과천)을 개최하다.
2008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교수직을 퇴임하고, 이듬해 국민 교육 발전에 대한 공훈으로 국무총리표창을 수여 받다.
2009 ≪갤러리소머리국밥 개관전≫(07.10-08.09, 갤러리소머리국밥, 양평)에 출품하다.
2009 ≪2009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만남을 찾아서≫(09.23-11.01, 청주예술의전당, 청주)에 출품하다.
2011 호주 로얄멜버른연구기술대학교(RMIT)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가하다.
2012 호주 시드니대학교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가하다.
2013 조선일보미술관 주최 제26회 이중섭미술상을 수상하고 ≪제26회 이중섭미술상 수상기념전 서용선의 ‘신화’_또 하나의 장소≫(2014.11.06-11.16, 조선일보미술관, 서울)를 개최하다.
2013 ≪한국전쟁 정전60주년 특별전: 기억·재현 서용선과 6.25≫(06.25-08.25, 고려대학교 박물관, 서울)를 개최하다.
2014 아트센터화이트블럭 주최 개인전 ≪역사적 상상_서용선의 단종실록≫(05.02-07.27, 아트센터화이트블럭)을 개최하다.
2015 ≪서용선의 도시 그리기: 유토피즘과 그 현실사이≫(04.17-07.17, 금호미술관 / 학고재갤러리, 서울)에 출품하다.
2016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추대되다.
2016 아르코미술관 주최 개인전 ≪확장하는 선, 서용선 드로잉≫(08.23-10.02, 아르코미술관, 서울)을 개최하다.
2017 프랑스 파리 La Ville a des arts Gallery 주최 개인전 《Suh Yongsun, 37 rue de Montreuil Paris / 222 main Street New Jersey》(06.19-07.16, La Ville a des arts Gallery, 파리)를 개최하다.
2023 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 주관하는 <원로작가 디지털 아카이빙> 프로젝트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한 개인전 ≪서용선, 삶의 노래≫(04.20-09.30, 스페이스138, 서울)과 아트선재센터 주최 개인전 ≪서용선: 내 이름은 빨강≫(07.15-10.22, 아트선재센터, 서울)을 개최하다.
화가 서용선의 삶 인식과 예술적 실천
화가 서용선은 지금까지 삶의 화가로 받아들여져 왔다. 때로는 민중화가인데 때로는 비민중적 혹은 반민중적 엘리트주의에 매몰된 화가로 이해되기도 한다.
우리 미술계의 이러한 인식은 그가 위치한 예술사적 맥락을 1970년대 모더니즘의 추상성과 대칭되는 1980년대의 예술경향들, 이른 바 재현적 형상성이나 현실 참여적 민중성, 민족성 등에 주목하고자 하는 관점들과 무관하지 않으며, 그가 한때 서울미대 교수로서 지닌 직업적 위상과도 관련이 있으리라 판단된다. 이러한 인식들은 관점에 따라 설득력을 지닐 수 있다.
다만, 화가 서용선이 데뷔 이래 삶의 현실 속의 다양한 사건과 사물들을 이슈화 한 소재들에 초점을 맞추어 그것들이 내러티브 구조로서 얼마나 기여도가 있는지를 언급함으로써 우리들이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 어디인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그것은 다양한 역사사회적 사건과 사물들에 대한 인문학적 참조처 차원의 효용성 논의일지는 몰라도 그것을 뛰어 넘어 인간의 삶의 존엄성과 자유로운 상상력을 향한 미학적 성취나 예술적 성과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차단시킬 우려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가 서용선이 소재로 채택한 삶의 현실과 조건들에 대한 관심은 그의 예술의 계기이자 출발점 정도로 참조하는 정도에서 자제하는 것이 맞다. 그 대신 그가 설정한 예술적 실천의 비젼은 어떤 것인지, 그 비젼들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그가 매개로 삼은 물질적(매체적) 조건과 그를 통해 구현된 예술적 가치를 드러내는 흔적들, 즉 예술적 성과 자체의 설득력은 어떤 것들인지 하는 문제로 초점을 옮길 필요가 있다. 적어도 예술학자들의 입장에선.
따지고 보면 현 단계에서 잠정적으로 설정한 주제인 “화가 서용선의 삶 인식과 예술적 실천”은 그다지 색 다를 것도 없다. 하지만 서용선을 역사화가, 표현주의 화가, 도시사람들 등 인물화가 등 일련의 내러티브 발신자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소재주의나 역사적 삶의 서사에 갇힌 채 서용선의 회화가 드러낼지도 모르는 예술성이나 미학적 가치에 대한 논의를 괄호 치는 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으로 인도할 여지를 열어 줄 것이라 판단된다.
시기별 작품 해설
서용선이 화가의 꿈을 꾸며, 미술을 공부한 것은 1974년부터이다. 하사관으로 군 생활을 마치고 난 뒤, 석고상과 인물 목탄화, 연필 소묘, 정물 수채화 등을 연마한 끝에 그는 1975년 24세의 나이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입학했다.
그는 학창시절인 1978년 여름, ≪중앙미술대전≫(1978.06.03-06.22, 국립현대미술관)을 통하여 화단에 데뷔했다. 지금까지 그가 제작한 작품 수는 드로잉을 포함하여 10,000여 점을 훌쩍 넘기고 있다. 그 가운데 이번 아카이브 작업으로 목록화 한 작품들은 2023년 12월 현재, 1970년대 108점, 1980년대 175점, 1990년대 280점, 2000년대 683점, 2010년대 1,272점, 2020년대 131점, 연대 미상 1점 등, 총 2,650점에 이른다.
화가 서용선의 작품 세계를 그 흐름에 따라 크게 다음과 같이 네 시기로 나눌 수 있다. 학습기를 거쳐 데뷔하여 화가의 길을 모색하던 제 1기(1975-1986), 미술대학이나 스튜디오를 중심으로 역사화와 도시 사람들 그리기에 집중한 제 2기(1986-1999), 예술과 삶의 현장의 경계를 넘나들며 회화 뿐만 아니라, 조각, 설치, 퍼포먼스 같은 다양한 매체 작업이나 장소 특정적 작업을 펼친 제3기(1999-2009),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 2009: 서용선(Artist of the Year 2009: Suh Yongsun)≫(2009.07.03-09.20)전을 기점으로 삶이 세계를 향한 예술적 실천을 심화 시키며 서용선 예술의 전형을 추구한 제4기(2009-현재) 등 네 시기이다.
서용선의 작품세계의 전개를 각 시기 별로 기술하면 아래와 같다.
학습·데뷔·모색: 1975-1986
서용선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미술대학에 입학했다. 하지만, 쪼들리는 경제 사정으로 아르바이트에서 헤어날 수 없어 수업 참여도 여의치 않은 형편이었기에 한 동안 학교 생활은 뒷전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명화들을 자습하며 <자화상(Self-Portrait)>(1975), <창(Window)>(1976) 등 몇 점의 작품을 남기고 있다.
졸업에 가까워질 무렵, 서용선은 가까스로 학교 수업에 몰입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서용선은 당시 ≪대한미술미술전람회≫의 대안으로 새롭게 설립된 민간 공모전인 ≪중앙미술대전≫에 유화 <작품 78-5(Work 78-5)>(1978)을 발표하며 데뷔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982년에, 대학원을 졸업하며 그는 또 다른 공모전인 ≪제3회 동아미술제≫(1982.04.29-05.08, 국립현대미술관)에 유화 <하늘 III(Sky III)>(1982; <시선, 낮(One's Sight-Day)>으로 호명하기도 함)을 출품하여 동아미술상을 수상하며 거듭 화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 작품들은 일상적으로 오가던 학교 복도 풍경, 흔히 주변에서 접하던 소나무를 모티브로 하여 극사실적으로 그린 것들이다. 풍경을 재현한 이 데뷔작들과 더불어 서용선은 화가로서의 길을 모색하며 <도시연구> 연작(1979), <거리의 사람들(People in the Street)>(1984), <출전>(1984) 등 인간을 모티브로 삼은 재현적인 작업들에도 착수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화가 서용선은 형상이나 환영을 부정하며 1970년대 화단을 주도했던 선배 화가들 즉, 이른 바 단색화 화가들로 불리는 한국의 모더니즘 계열의 화가들의 태도와 결을 달리하며 출발하고 있다. 그가 예술의 길을 더욱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것은 1982년 경 부터이다. 이즈음 대학원을 졸업하고 대학에서 데생, 페인팅, 판화, 해부학 등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이때 제작한 드로잉들은 학생들을 가르치며 그린 것들이지만, 학창 시절의 결핍을 복구라도 하겠다는 듯이 오히려 자신의 예술관 자체를 재구성하는 듯하다.
물론 이러한 시도들은 서구의 예술 개념과 동시대성을 뿌리로 삼겠다는 의욕을 반영한다. 특히 이 시기에 제작된 일련의 <소나무(Pine Tree)> 연작들에서는 이와 같은 욕구가 두드러진다. 극사실적인 재현에 토대를 두고 있기는 하나 이들 연작은 서구 미술 수용 초기 화가들이 추구했던 환영이나 일루전 효과보다는 서구 모더니스트 페인팅의 준칙이 되다시피 했던 회화의 평면성에 예민하게 조응하고 있다. 게다가, 그림 그리기에 사진 이미지를 끌어들이는가 하면, 모노크롬 화면에 기하학적 그리드를 설정하는 데에선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 Strauss, 1908-2009)·후설(Edmund Husserl, 1859-1938)·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 Ponty, 1908-1961) 같은 서구 인문학자들의 성과인 구조주의나 현상학에 귀 기울이며 회화에서의 재현이나 지각의 가능성과 한계를 따져보려는 듯한 의도도 읽힌다.
한편, 청년 화가 서용선의 관심이 자기 정체성을 탐구하고자 하는 시도들도 여기 저기서 확인된다. 서구의 예술 개념을 탐색하고자 제작되었던 <소나무> 연작들은 동시에 동북아시아 전통에 뿌리를 둔 수묵화의 소재, 재료 기법, 필획의 가능성을 실험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채택되는 소재이자 방법적 장치가 되고 있다. <자화상(Self-Portrait)>(1983)이나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서 취재한 <세 남자(Three Men)>(1983), 옛 역사적 사건을 모티브로 한 <출전> 같은 작품들 역시 서용선에게 예술이란 인간의 삶의 세계를 향한 궁금증에서 싹트고 있으며, 문화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활동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삶이라는 화두: 1986-1999
1986년에 들어서며, 서용선의 삶과 예술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매우 가파르다. 화가 서용선은 ‘86아시안게임 개최, 민주화를 향한 정치 투쟁 등으로 격동하던 한 해를, 신장 결석으로 장 기간 병원 신세를 지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퇴원하자 마자 결혼식을 올리며 가정을 새롭게 꾸렸다. 게다가 모교인 서울미대에 교수로 취직했다. 하지만 신혼 생활은 곧 파경을 맞았으며, 일상 생활 곳곳에서도 울퉁불퉁 거칠게 굴곡이 일어났다.
따라서 작품활동도 큰 전환점을 맞았다. 그 조짐은 작품 <엄흥도, 청령포, 노산군(Um Hong Do, Chung Ryung Po, Noh San Gun)>(1986-1990), <청령포, 노산군(Chung Ryung Po, Noh San Gun)>(1987), <청령포, 엄흥도, 노산군(Cheong Ryung Po, Eom Heung Do, No San’ Gun (Dethroned King))>(1990) 등에서 나타난다. 이 그림들의 모티브는 혼돈과 좌절감 속에 친구를 찾아 간 영월 동강 가에서 권력 투쟁의 희생물로 강물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에 대한 환각 체험이다. 이는 500여년 전 조선의 한 비극적 사건에 대한 공공의 기억을 환기시킨다. 다만 단종의 죽음을 주제로 연 이어진 이 작품들의 직접적인 동인은 파국을 맞은 결혼으로 인한 트라우마이다. 억압된 감정이 곳곳에서 표출되지만 그것을 애써 절제하고 균형을 잡으려는 긴장감이 화면 곳곳에서 묻어난다.
'노산군 일기'라는 화두로 이 작업들이 지속되는 가운데, 서용선의 그림에서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변화는 흥미롭다. 청년 작가로서 그동안 회화의 방법과 형식에 대하여 가졌던 긴장은 누그러지고, 그 대신에 화면은 인간의 삶의 세계를 향한 내적 충동의 표출이 한층 강렬 해진다. 처음 시작은 개인사적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이는 점차 인간들의 삶의 세계 일반, 즉 공동체의 삶을 좌지우지해 온 정치 사회적 권력의 갈등이나 충돌, 그 정점인 전쟁, 더 나아가 인간의 삶의 세계를 구성하는 근본적인 구조들을 향한 물음으로 향한다.
물론 이러한 흐름에서 역사화 작업들은 그 가운데 중요한 한 장르를 차지한다. 단종의 비극과 관련된 <계유정난>(1988), <세조, 사육신(Sejo, Sayuksin)>(1999-2003) 연작,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임진년(The Year of Imjin)>(1985-1989), 6.25 한국전쟁을 다룬 <피난(Refuge)>(1991-1992)과 <중부전선으로(To the Central Front)>(1995) 등 전쟁과 역사의 상흔을 다룬 작품들이 그 예이다.
서용선이 삶의 세계를 향해 몰입하는 또 하나의 모티브는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삶의 현실이다. 누가 뭐라해도 그 맨 앞에는 화가 자신의 삶을 다룬 여러 점의 <자화상(Self-Portrait)>(1995)들이 있다. 그에게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미궁에 빠진 삶의 전형은 작가 자신이다. 그는 미국의 한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오로지 목탄 자화상들만을 그려 뉴욕의 한 갤러리에서 자화상전으로 개인전 ≪Suh Yongsun Drawing≫(1995.08.08-08.25, Gallery Swan, New York)을 열기도 했다. 그렇지만 누가 뭐라해도 예술가로서의 서용선을 대표하는 장르로 자리잡게 되는 도시 사람들 그리기야 말로 이 시기에 그가 몰입했던 화두이다. “폭력적 권력장치 이상으로 인간들의 삶을 익명화하는 현대 도시의 틀이나, 극심한 단절과 소외, 무관심을 겪고 사물화되어가는 인간 집단을 응시하는”[1] 듯한 <증오, 전화>(1990), <도시에서(In the City)>(1994), <뉴욕 지하철역(Subway Station in New York City)>(1997-1998) 등 ‘도대체20세기 말 오늘날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 삶의 조건인 도시란 무엇이며, 그 메커니즘은 어떤 것인가?’를 물으며 그는 도시 사람들 그리기나 도시 풍경화 그리기에 진입하고 있다.
인간이 살아온 역사를 향해 동시대 도시를 조건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서용선이 던지는 예술적 화두는 급기야 동북아시아 신화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여기서 그가 주목하는 문제는 “태초, 천지개벽, 우주의 탄생 같은 원초적 세계 형성과 관련된 신화적 상상에 관련”된 것들이다. “처음으로 하늘과 땅이 열리는 시원적 신화라 할 <반고(盤)>(2002)를 비롯해 초자연적이고 불가사의한 능력으로 하늘을 다스린다고 하는 <천제(天帝)>(2008), 모든 신의 모태이자 우리 민족의 생성 신화로도 전해지는 <마고(麻姑)>(2009)”, 그리고 강, 태양, 달, 번개를 의인화한 <하백(河伯)>(2002), <희화, 상희, 뇌신(和, 常羲, 雷神)>(2002) 등에 이르기까지 “우주와 자연, 인간의 시원적인 세계에 대한 상상력 혹은 집단 무의식들이 무궁무진하게 파노라마같이 전개된다.”[2] 그리고 그 실천은 인간에 대한 보편적이고 구조적인 물음으로 확장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인문 사회학적 탐구심이나 상상력만큼, 드로잉은 화가 서용선에게 예술을 추동 시키는 매우 근본적인 방법으로 자리잡게 된다.
'예술' 밖의 예술: 1999-2009
화가 서용선에게 또 한 차례의 커다란 변곡점이 다가왔다. 그동안 자신이 추구해온 예술 개념에 대한 의구심이야 말로 그 변화의 출발이다. 베를린 장벽 붕괴 1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에 초대 출품하여 여행하며, 독일 현지에서 붕괴된 베를린 장벽 현장이나 분단의 상흔을 극복하기 위한 미술인들의 시도나 페허화 된 탄광촌인 에센(Essen)을 예술로 치유하려는 프로젝트들에서 받은 감화 등은 그 변화의 실마리가 되고 있다. 그렇지만 그 직접적인 끌게는 부학장직을 수행하던 중 한 교수의 징계를 둘러싼 교수들 간의 갈등에서 비롯된 학교사회에 대한 염증이나 회의가 빌미가 되고 있다.[3]
서울미대 부학장을 사직하고 학교 밖으로 나가 서울시 서초구청이 설립한 문화원의 원장을 맡으며, 그는 학교나 스튜디오 등의 울타리를 벗어나 삶의 현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며 다양한 공동체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예컨대, 한국전쟁으로 고착화된 남북 분단의 상징인 ‘DMZ 프로젝트’나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번성했지만 이제 폐허화 된 강원도 철암 탄광촌을 매달 드나들며 수행한 ‘철암 그리기 프로젝트’와 <철암(Cheolam)>(2004), <선탄장(Coal Preparation Plant)>(2004) 등의 회화 시리즈, 화가 공동체 운동의 거점인 갤러리 소밥을 개설하여 운영하는 등이 그것들이다.
이러한 삶의 현장 활동들은 자연스럽게 서용선의 예술에 적지 않은 내용적, 형식적 변화를 야기시켰다. 역사화나 신화 그림들이 불가피하게 관념적이거나 상상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면, 삶의 현장에서 그가 그리는 것은 어떠한 측면에서든 구체적으로 지금 이 땅에 살아 숨쉬는 삶의 현실에 개입하는 성격을 띄어 가고, 도시 사람들 그리기도 자신이 몸담아 살아온 서울 뿐만 아니라 그 범위가 점차 넓어지고 있다. 해외 레지던시 프로그램 참가는 작가의 일상으로 자리잡다시피 잦아지는 가운데, 베를린, 함부르크, 뉴욕, 멜버른, 파리, 오사카, 상하이, 워싱턴 등 지구촌 각 나라의 온갖 메트로폴리스에서 살아가는 지구촌 사람들 그리기나 전기(傳記)가 확산되고 있다.
현장을 지향하면서 소재나 테마에서 만이 아니라 그것들을 추구하는 매체나 형식, 장르들에서의 변화도 적지 않게 발견된다. 드로잉, 캔버스 같은 판넬 그림은 물론 공공 장소에서의 벽화 그리기나 모자이크 하기, 조각, 설치, 퍼포먼스에 이르기까지 가리지 않으며, 장소 특정적 작업도 빈번하다. 게다가 인공의 영역만이 아니라, 자연 풍경에까지 개입하고 있다. 갤러리, 거리, 도시나 자연 공간, 탄광 등 온갖 장소가 작품이 일어나고 발표되는 장소이다.
서용선은 2008년 여름, 작업과 병행되기 어려웠던 교수직을 사퇴했다. 그리고 염원하던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작가적 전형성의 형성: 2009-
화가 서용선의 활동에 주목하여, 국립현대미술관이 ‘2009년 올해의 작가’로 선정하고, ≪올해의 작가 2009: 서용선≫전을 개최했다. 이 전시는 무위자연의 세계관이나 산수화 전통, 서구 모더니즘 미술 등의 영향으로 인해 소외되었던 인간의 삶의 세계를 진지하게 동시대 한국 화단의 화두로 주목하게 하는 신선한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전업작가로서 나선 화가 자신에겐, 더할 나위 없이 뜻깊은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서용선의 활동은 주목할 만하다. 다양한 관점에서 서용선의 초대전을 여러 공사립 뮤지엄들이 연이어 개최하고 있다. 한국전쟁 정전 60주년 기념으로 고려대학교박물관이 개최한 ≪기억·재현 서용선과 6.25(Memory·Representation Suh Yongsun / 6.25)≫(2013.06.25-08.25), 파주 아트센터 화이트블록의 ≪역사적 상상_서용선의 단종실록≫(2014.05.02-07.27), 강릉시립미술관과 한국미학예술학회가 공동 주최한 ≪아르스 악티바 2014: 예술과 삶의 공동체(Ars Activa 2014_Arts & Their Communities)≫전 제3부 ≪서용선_풍경과 문화적 기억≫(2014.05.31-07.01), 조선일보미술관이 제26회 이중섭미술상 수상기념전으로 주최한 ≪서용선의 '신화'_또 하나의 장소(Suh Yongsun's Heterotopia: the forfeiture of myth)≫(2014.11.06-11.16), 금호미술관의 ≪서용선의 도시 그리기: 유토피즘과 그 현실사이(Sug Yongsun: Utopia's Delay: the Painter and the Metropolis)≫(2015.04.17-05.17), 아르코미술관의 ≪확장하는 선, 서용선 드로잉(Expanding Lines: Suh Yongsun Drawing)≫(2016.08.23-10.02), 김종영미술관의 ≪色과 空–서용선(色 and 空-Suh Yongsun Exhibition)≫(2016.10.07-11.20) 등이 그것들이다.
숨가쁘게 각 전시들이 개최되는 동안, 서용선의 작업들 역시 한국전쟁, 단종의 비극적 삶, 신화, 도시 사람들, 붓다상(像), 문화적 풍경 등 주제별로 압축되어 진행되고 있다. 그때마다 드로잉 작업은 각각의 삶을 테마로 한 서사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상상력을 이끌어내는 새로운 형식 실험이자 과정으로서, 더 나아가 자신의 예술의 전형성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자리 매겨지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전 지구촌을 혼돈 속으로 몰아넣었던 2020년 이후에도, 화가 서용선의 활동은 삶의 세계와 하나로 포개 져 그 경계를 나누는 일이 무의미할 정도다. 재앙의 한 가운데에서도, 서용선의 작업들은 열기가 식지 않았다. 양평 스튜디오 근처 폐허화 된 농가에서 1년 여 기간 동안 진행되며,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의 다양한 커뮤니케이션을 촉진했던 <가루개 빈집 프로젝트>(2020-2021), 한국 최초의 소작쟁의 발생지 전라남도 암태도를 수없이 오가며 낡은 농협 창고에서 수행한 <서용선 프로젝트: 암태도(Suh Yongsun Project: Amtae-do (巖泰島))>(2022-2023) 등은 그동안 서용선이 실천해온 삶을 향한 예술이 다름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의 행복한 삶의 한 형식을 구현하는 데에 있었음을 보여줬다.
그런가하면, 여주미술관의 ≪만疊산중 서용선繪畫≫(2021.02.24-06.30), 스페이스138의 ≪서용선, 삶의 노래(Suh Yongsun, L'Umana Commedia)≫(2022.04.20-2023.08.30), 아트선재센터의 ≪서용선: 내 이름은 빨강(Suh Yongsun: My Name is Red)≫(2023.07.15-10.22) 등 여러 전시들은, 지금까지 화가 서용선이 수행해 온 예술이, 다름 아니라 '삶의 노래'였음을 다양한 시각으로 조명했다.
[1] 이인범, 「작가탐구: 서용선_일상의 ‘삶’으로 귀환하는 ‘예술’」, 『월간미술』 209호, (주)월간미술, 2002.06, p. 88.
[2] 이인범, 「서용선의 ‘신화’_또 하나의 장소」, 『제26회 이중섭미술상 수상기념전: 서용선의 ‘신화’_또 하나의 장소』 전시 도록, 조선일보미술관, 2014, p. 5 참조.
[3] 화가 서용선은 서울미대 부학장을 맡는 등 대학 행정에 깊이 개입하고 있던 중, 서울미대 창립 5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발표한 에세이에서 초대학장 장발(張勃, 1901-2001)의 친일 혐의를 인용하여 언급한 각주의 내용을 문제 삼아 미술대학 디자인과 김민수(金玟秀, 1961- ) 교수의 해직을 결의한 데 대하여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한 몇 교수들 중 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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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1. 일반적인 사항
- 이 기록은 예술경영지원센터가 주최하고, 아이비리인스티튜트(IBLee Institute)가 2022년 6월 1일부터 2023년 12월 10일까지 수행한 <원로작가 디지털 아카이빙 자료수집·연구지원 - 서용선 작가 연구>(책임연구원: 이인범)의 성과를 담고 있다.
- 이 기록의 내용은 ‘작품’, ‘작품 외 자료’, ‘참고문헌’, ‘전시 이력’, ‘작가 연보’, ‘인용문’ 등으로 구성되며, 그 외에 작가의 생애와 예술을 소개하는 영상물 한 편이 첨부된다.
- 이 기록은 프로젝트 마감일까지 수집·조사·연구된 1차 자료에 근거하여 작성되었다. 동일한 작품이나 사건에 관한 자료들 간에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복수의 자료가 현존하는 경우, 최초의 자료에 근거해 기재했다. 단, 상이한 기록들 모두를 병기하여 연구자들이 비교·검토할 수 있는 자료로 삼도록 하였다.
- 문헌 자료가 부재하여 보완이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 관련 인물들의 인터뷰 등을 참고하여 기재했다.
- 각 자료의 부호 및 약호는 아래와 같이 표기한다.·단행본, 도록, 정기간행물, 신문: 『』·논문명, 기사명, 챕터명: 「」·작품명: < >·전시명: ≪≫
2. 각 항목 기록의 가이드라인
1) 장르 분류
- 장르 구분은 예술경영지원센터의 가이드라인을 원칙으로 했다.
- 세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드로잉, 회화, 콜라주는 ‘평면’ 항목으로 분류하되, 그 중 콜라주 작품은 중분류 항목 ‘기타’ 에 포함시켰다.
·조각, 설치, 부조, 도자 등은 ‘입체’ 항목으로 분류했다.
·필름/비디오는 ‘미디어’ 항목으로 분류했다.
·사진은 ‘사진’ 항목으로 분류했다.
·퍼포먼스는 ‘퍼포먼스’ 항목으로 분류했다.
2) 작품 관리번호
- 모든 ‘작품’에는 고유한 ‘작품 관리번호’를 부여했다.
- 작품 관리번호는 ‘작가명-제작 연도-작품 장르 구분-연도별 일련번호’로 구성된다. 예) <작품 78-5>, 1978년 작, ‘회화’ 작품의 경우: 서용선-1978-평면-070
- 작품의 원본 필름으로 인화한 동일한 크기의 사진들은 최초 인화물에 일련번호를 부여하고, 나머지는 에디션으로 처리했다.
- 문헌 기록에는 남아있으나, 실제 작품이나 그 사진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 작품의 경우에도 작품 관리번호를 부여했다. 단 ‘이미지 미상’으로 기록했다.
3) 작품 명제
- 작품 명제는 작가가 정한 최초의 명칭에 따랐다. 단, 최초의 기록과 다르게 표기된 경우 병기하였다.
- 동일한 작품이 달리 기록된 경우, 가장 대표적인 명제를 기록하고 그 외의 것들은 병기했다.
- 작품 명제가 부여되지 않았거나 ‘무제’인 경우, 작가의 동의 아래 명제를 부여했다.
4) 제작 연도
- 제작 연도는 서명과 함께 작품에 표기된 내용에 따랐다.
- 단, 여러 해에 걸쳐 작품 제작이 지속된 경우, 최초 제작 연도에 덧붙여 최종 작업 수행 연도를 병기했다.
- 제작 연도 기록이 부재하는 경우, 작품 제작의 전후 맥락, 신문, 잡지 기사, 기록 사진 등 참고 자료들에 근거하여 연도를 ‘추정시기’ 항목에 기재했다.
5) 전시회 개최 및 출품 기록
- 주최 기관, 개최 장소는 전시회 개최 당시의 명칭을 따랐다. 따라서 경우에 따라 현재의 명칭과 다를 수 있다.
- 전시 유형은 개인전, 단체전, 아트페어 등으로 분류하여 기재했다.
- 출품 작품 기록은 카탈로그, 리플릿 등 문헌 기록을 근거로 기재했다. 단, 카탈로그나 리플릿 기록이 흔히 출품 작품과 일치되지 않았던 점을 고려하여, 별도로 신문기사나 기록 사진, 전시기획자의 기록 등이 현존할 경우 우선적인 근거로 삼았다.
6) 재료 및 기법
- 드로잉, 회화, 콜라주 등 평면 작품은 바탕 재료와 안료를 기재했다. 예) 캔버스에 유채(Oil on canvas), 종이에 수채화(Watercolor on paper) 등
- 흑백 사진은 ‘Gelatin silver print’, 컬러 사진은 ‘C-print’로 기재했다.
- 조각, 오브제 등 입체 작품은 바탕 재료를 기재하되 안료가 사용된 경우 병기했다. 예) 철판, 유리(Steel plate, glass) / 육송 판재에 아크릴릭(Acrylic on wooden board)
- 설치는 재료, 안료 등과 더불어 설치되었던 장소, 일시, 규모 등을 기재했다.
- 퍼포먼스는 수행 일시, 지속 시간, 장소, 행위 수행자, 사진 촬영자 등을 기재했다.
- 기타
: 재료의 기재는 사물을 지시하는 보통 명사로 했다. 단, 그 구체적인 속성이 확인되거나 요구될 경우 더 상세히 했다. 예) 나무(Wood) → 삼나무(Cedar), 은행나무(Ginko wood) 도자기(Pottery) → 백토, 1250℃ 산화(White clay, oxidation 1250℃) 안료 → 유채(Oil), 수채화(Watercolor), 포스터컬러(Poster color)
7) 크기
- 크기는 센티미터(cm) 표기를 기본으로 했다.
- 평면 작품의 크기는 ‘세로x가로’로 기재했다. 단, 프레임(액자) 포함 크기가 확인된 경우 병기했다.
- 입체 작품의 크기는 ‘세로x가로x깊이’로 기재했다. 단, 좌대 포함 크기가 확인된 경우 병기했다.
- 설치 작품의 크기가 설치 방식에 따라 가변적인 경우 ‘가변크기(dimension variable)’로 기재했다.
- 퍼포먼스의 경우는 공란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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