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정기(閔晶基, Min Joung-Ki, b.1949)는 ‘현실과 발언’ 창립회원으로 1979년말 ‘현실과 발언’ 창립 초기부터 공식적 해체기(1990)까지 민중미술진영의 주요 작가로서 참여했으며, 또한 90년대 이후부터는 경기도 양평으로 거소를 옮겨 ‘산과 땅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의 삶의 회화적 기록이라 이름할 산수화, 화훼화를 그려내고 있다. 민정기의 작품세계는 초기, 소위 ‘이발소그림’으로 통칭되는 촌스럽고 세련되지 않은 그림을 다시 모방해 고급미술의 회랑에 내놓았다. ‘통속’의 사회에서 통속적으로 살고 있다는 우리 모두의 자의식을 건드린 것이다. 반미학적 다다이스트적 기획이라는 점에서 음울한 시대의 알레고리로 읽혀졌다.
이후 그는 숲으로 향해 걸어갔다. 그러나 정확히는 땅을 향해, 역사의 지층을 향해서다. 그러다가 그는 저잣거리로 나선다. 길, 도로, 강물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로 향하는 길’이다. 모든 것이 실증화(positivity)되어가는 세계의 방향, 모든 것이 깨끗해저만 가는 미술의 방향과 어긋나는 길이다. 또한 양평 시대의 ‘산수화’들은 산세와 지세 가운데 삶의 거처를 정하고, 이를 풍수(風水)의 지혜로 여겼던 옛사람들의 흔적을 좇아 시각화함으로써 동시대적 삶과의 그 거리를 통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의 소박하고 대중적인 삶의 진지한 감정에 대한 여전한 애정과 건강한 연민을 확인하게 된다.
초기, 민중적 삶의 그늘진 길모퉁이를 외면하지 못했던 연민의 시선으로부터 그 삶의 시간의 지층을 파들어가는 인류학적 통찰에로 나아간 길, 풍경의 그늘, 회화의 그늘이라 이름할 이유다.
(* 민정기 작가 대표사진 3컷은 2024년 기연구 업데이트 사업 기한에 연구팀이 사진가 홍철기에게 의뢰하여 촬영한 사진이미지다.)
1949년 10월 26일(양력). 서울 출생
1972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서양화 전공) 졸업
1984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대학원 회화과 수료
2006년 제18회 이중섭 미술상 수상
(* 민정기 작가 초기 전시자료에 경기도 안성 출생으로 기록된 정보가 남아 있으나, 부친의 연고지이고
민정기 작가는 서울 서대문구 천연동에서 출생하였다.)
개인전
2024.06 제10회 개인전 《민정기 아카이브전: 놓치지 못하는 풍경》(양평군립미술관, 양평)
2019.01 제9회 개인전 《민정기》전(국제갤러리, 서울)
2016.10 제8회 개인전 《민정기》전(금호미술관, 서울)
2007.10 제7회 《이중섭미술상수상기념》전(조선일보미술관, 서울)
2004.10 제6회 마로니에미술관대표작가초대전, 《본 것을 걸어가듯이》(문예진흥원 마로니에 미술관/현 아르코미술관, 서울)
1999.04 제5회 《민정기》전(학고재·아트스페이스서울, 서울)
1996.04 제4회 개인전 《양근에서 오대산으로》전(가람화랑/인사갤러리, 서울)
1992.04 제3회 개인전 《민정기-양근(楊根)을 그리다》(가람화랑/상문당, 서울)
1986.11 제2회 개인전 《민정기》전 (서울미술관, 서울)
1983.09 제1회 개인전 《민정기》전 (서울미술관, 서울)
단체전
《제13회 광주비엔날레: 떠오르는 마음 맞이하는 영혼》(광주비엔날레전시관, 2021.02.26.-05.09) 등을 포함 413회(1971~2024.8)
민정기, 풍경의 그늘
박응주(미술비평가)
서(序)
민정기(閔晶基, 1949-)는 ‘현실과 발언’(이후 ‘현발’로 약칭) 창립회원으로 1979년 말 ‘현발’ 창립 초기부터 공식적 해체기(1990)까지 민중미술진영의 주요 작가로서 참여했으며, 또한 90년대 이후부터는 경기도 양평으로 거소를 옮겨 ‘산과 들과 땅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의 삶의 회화적 기록이라 이름할 산수화, 화훼화들을 그려내고 있다. 민정기의 화업을 전관하는 일의 성패가 이 두 경력의 연결점을 어떻게 드러내 볼 수 있는가에 달려있음을 감지할 수밖에 없다. 이 후반부 시기로의 전환에 대해 혹자는 ‘전투력의 상실’이라 말하고, ‘관조적인 후퇴’라 말하는 등의 혹평도 존재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연구자는 이 두 경력을 상술하면서 민정기의 작업 세계에 대한 연구 틀, 시선의 앵글로 삼고자 한다.
양평으로의 이주는 확실히 그의 화력(畵歷)에서 선명한 분기점을 이루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전적으로 서울 태생의 그가 자라온 마흔 해의 세월과 이후 양평에서의 서른 해는 마치도 반분한 모양이기도 하려니와, 그 예술적 관심사와 사유의 방식 또한 비교적 선명한 차별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대립쌍을 든다면 도시와 자연이요, 개인과 공동체이며, 현실과 이상이라는 변별점이 목격된다고 말해보자. 과연 80년대, 키치(Kitsch)를 고급미술에 도입하여 뮤지움을 위반하면서 암울한 현실을 기소(起訴)했던 ‘이발소그림’으로부터 ‘산수풍경그림’이라는 무위자연으로의 전격적인 이주는 주의력 없는 시선에게는 선명한 낙차로 보이는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이분법적 파악은 “양 항목이 서로를 지탱하는 허구적 관계에 기생하는" 1) 논리를 보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는 지적을 참조해 볼 일이다. 비단 서울과 양평이라는 손쉬운 구별만으로는 80년대와 90년대라는 차이, 즉 긴박 혹은 이완의 시대적 에피스테메의 차이가 산입되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투쟁을 말하면서도 처연한 우수(憂愁)를 동시에 드러내고 있던 작가의 작업적 충동이나 양가감정과 같은 태도를 간파하는 데 실패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 민정기의 회화는 그런 ‘다중적 평면’2)이거나, 현실의 다층적 구조가 여러 겹으로 표현된 그림들이곤 했다.
일례로 ‘이발소그림’으로 통칭되는 고요한 호수와 물레방아가 있는 간지러운 풍경(<그리움>1981), 혹은 다산과 복(福)의 기원 돼지가족이 모여 있는 그림들(<돼지>1981)은 일종의 노스텔지어로서의 위로의 건넴말이기도 하지만 ‘통속’의 사회에서 통속적으로 살고 있다는 우리 모두의 자의식을 건드렸던 것, 또한 비극적 역사를 문신으로 새겨넣은 고발장(<숲을 향한 문>1986)은 간절한 열망의 귀처(歸處)로서의 자연이기도 하지만, 망각될 수 없는 또 다른 우리의 자연성, 애써 문명이라는 이름의 뚜껑으로도 매립될 수 없던 진정한 자연의 이면(裏面)이기도 했던 것이다. 앞서 ‘산수풍경그림’이라 약칭했던 산수화는 어떤가? <이포나루>2011, <백세청풍1, 2>2019와 같은 현 시기까지 이어져 오는 ‘풍경작품’들은 공간예술의 하나라는 회화의 통념에 대한 모종의 모반(謀反)으로 진화하고 있다. 원근법을 완전히 무시하지도 않으면서 변경하고 해체하며 그 무너진 자리에 시간을 꿰매 들어가는 ‘활동성으로서의 감각’3)의 복구나 복원을 기도하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 여정을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가 민중미술은 더이상 트라우마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보편적 미래상과 연결하는 것이라며, “민중미술은 ‘민중미술’이 아닐 때, ‘(민중)미술’일 때 진가를 드러낸다”5)는 그런 방향일까. 그의 (민중)미술이 더 깊어지고 더 생산적이며 더 풍부해져 가고 있는 중일까. 우리는 여기서 여기에 대한 즉답을 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작가는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민중미술 작가로 출발했던 민정기의 여정은 이제 한 눈 밝은 비평가의 예지처럼 푸코가 자신의 마지막 저서에서 복원시키고자 했던 ‘주체의 풍부한 능력(육체의 온전한 사용과 감각의 개화)을 다루기 위한 새로운 시도’4)를 수행하고 있는 듯한 길로 접어들고 있다. 그 이젤은 풍수지리설이다. 시간이 축적된 ‘장소’의 역사가 여러 겹치는 레이어로 나타나 보일 수 있게 되었던 소이이다. 나는 이런 레이어의 중첩을 ‘풍경의 그늘’이라 불러본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그러면 또 어떤 풍경이 등장할까. 그런 기대를 해보게 됩니다. 여전히 풍경은 쫒아다니면서 그려야지 뭐가 이렇게 생성되고 만들어지지 너무 그걸 비판적으로 보고 뭐 이걸 그림으로 그리는 게 아니고, 제외시키고 그런 것은 과히 자세와 태도를 앞으로 진행시켜가는 데 있어 전망에 별로 안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6)
두 여정
민정기의 연대기는 크게 5개의 시기 구간으로 구분할 수 있을 듯하다.7)
1. 1971년 미술 대학을 졸업한 시기로부터 1978년 중반경까지.
2. 1979년 삼각지 거주 시기부터 1984년까지의 현발 시기.
3. 현발의 쇠퇴기와 함께 내면세계로 선회했던 1983년 말부터 1986년까지.
4. 1987년 11월 양평군 서종면에 정착한 이후 2003년까지의 시기.
5. (6회 개인전) 2004년으로부터 현시기까지.
민정기는 모친이 전통공예품을 좋아하여 집안 장식품으로 화각(華角) 6층장과 청화 백자 매병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할 만큼 예술에 대해 낯설지 않은 청소년기를 보냈다고 한다. 대학에 입학한 이후로는 서울미대 연극반에서 명배우로 이름을 얻으며 매년 2~3편의 주요 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의 화업의 본격적인 신호탄이 된 ‘현발’ 가입에는 비평가 최민과의 만남, 선화예술학교 재직시의 오윤과의 만남이 있었다. 특히 오윤의 글 「현실 인식」(1980)과 멕시코 벽화 운동에 관한 소개글, 최민의 『서양미술사』를 통해서 자신의 현실 인식을 정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삼각지 화실(1979~1984)에서 작업하던 이 시절과 의식으로부터 나온 것이 ‘이발소그림’이었다. 남영동 일대의 상화(商畵) 이발소그림, 그리고 그 제작과 유통, 구매 형태에 대해 익숙하게 보아왔던 내력으로부터의 돈오(頓悟)였던 것이다. 이후 <세수>(1980), <지하철2>(1980), <대화1>(1980), <포옹>(1981)과 같은 민중적 삶의 모습을 소박하게 담은 그림들로 현실주의 미술 진영에서 주요한 작가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기실 투사형은 아니었다. <풍요의 거리>(1981), <줄서기>(1982), <영화를 보고 만족한 K씨>(1982), <개인택시>(1982), <벽보>(1983) 등의 작품에서 보는 민정기의 내면은 난공불락의 권력과 체계, 그 속에서 깃들어 산다는 삶의 상투형과 그 덧없음, 더불어 소진되어만 가는 자의식으로 지쳐가는 암울한 심사라는 긴 그림자를 그 안에 드리우고 있었던 것이다.
1984년부터 거주하기 시작한 동대문구 용두동 작업실에 ‘칩거’하면서 자기완성의 피안을 지향하는 선가(禪家)적 수행이나 인간과 사회를 통시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인류학적 사색으로 새로운 ‘길찾기’의 시간을 경유하게 된 귀결이기도 하다. 이제 그는 서울을, 도시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숲으로 난 길로 걸어갔던 이유다.
내내 서울내기로서 살아온 그였기에 모친이 모셔진 곳은 곧 자신의 고향으로 삼을 만하기도 했을 것이다. 1987년, 본격적으로 양평의 빈 농가(서종면 서후리)에 들어 지친 마음을 달래며 후미진 계곡, 바위틈을 타고 졸졸 감돌아 나오는 여울물이나, 여직 한 번도 사람의 손이 타지 않았을 구석진 숲속 풍경들을 실경 석판화로 제작해 보거나 ‘숲-인물’ 습작들을 그려보던 민정기는 마침내 마음이 평온해지며 자연 풍경들에 눈길을 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마을 주변과 양근(양평의 원 이름) 땅의 역사에 얽힌 내력을 듣기도 하며 산야와 야생화, 일하는 촌부의 모습들에 눈길을 빼앗기기도 하며 지나온 4년여, 그 회심의 결실이 <동녘골 아침>(80x960cm,1990)이라는 대작이다. 1990년, 지리학자이자 도시공학자인 최종현과의 ‘답사’ 동행이 시작된 것이 이때다. 이 답사, ‘스스로 감각하며 걸어보는 방식’이라는 민정기의 방법적 전환, 이것이 이 시기의 민정기의 그림을 이해할 중심어이다. 새삼 화구를 들고 직접 현장에서 그림을 그리는 ‘그림그리기’의 본래적 태도를 기억해 실행한 것도 이때다(<팔봉산3>(1995), <팔봉산4>(1995), <벽계구곡도>(1996).
그런데 2004년 민정기의 그림은 다시 한번 일변한다. <여주 신륵사>, <금사면 이포 나루터>, <양수리>, <아차산에서 보이는 풍경>, <압구정> 등의 정선 뗏목의 물길을 따라 답사하듯 주유(舟遊)한 ‘한강오회도’로서의 오경(五境)이 그것이다. 이 그림들은 “90년대 내내 그가 단련했던 산수화 원리와 고지도 형식이 몽타주되어 있는”8) 산수화 지도이다. 작가의 작업실 벽에 경구처럼 써놓았다고 알려진 “본 것을 걸어가듯이”라는 구절. 그것은 확실히 벽계구곡을 그리고 있을 때의 ‘초월의 시선’이라기 보다는 ‘저잣거리의 떠들썩함’이 들려오는 거리의 시선에 가까운 무엇임이 분명했다. 이후로부터, 저잣거리를 활보하는 구보 씨를, 도시(서울 Seoul)로 입성하는 조선조 평민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이다(<임진리 도솔원 복원도>2016, <박태원의 천변 풍경 1,2,3 연작>2019).
도시로부터 숲으로. 그러나 정확히는 땅을 향해, 역사의 지층을 향해서 걸어갔던 길. 이 두 여정의 의미는 무엇일까? 실존적 고뇌와 강박적인 의식이라는 긴 터널의 모색기를 지나 마침내 ‘사람’, 고귀하고 영원한 신앙으로서의 ‘인간’에 도달했던 여정이 분명하다면 ‘이발소그림’과 ‘산수화지도’는 하등 다를 것 없는 정확히 연장선에 위치하는 것이다. 마치 어떤 한 장소가 있다면, 그 장소 그 지층이 산세와 지세를 따라 형성된 이래로 펼쳐져왔을 고유한 역사나 내력을 어떻게 하면 위선도, 위악도, 위조도 없이 현실태(現實態)로서 재현시킬 수 있을까의 고민에 접속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 삶의 근원의 지층을 탐사해보려는 깊이와 차별없는 무한 긍정에 가까운 관용적인 화면이 이로부터 나왔을 것이다. 강퍅하고 부박한 이데올로기의 층위가 아니라 더 강력한 실존의 층위에서의 엄밀한 질문들에 더 몸이 끌렸고, 그 기질적 성품은 오랜 시간을 동락해 온 동료 화가의 다음의 구술을 단순한 에피소드 이상의 것이 되게 한다.
민 선생님을 곁에서 보면 참 특이한 점이 눈에 띕니다. 하여튼 뭔가 조금이라도 싹이 있으면 살려내려고 하는, 어쨌든 ‘뭔가 될 것이다’라는 느낌을 줍니다. 이론으로는 그럴 듯하지만 사람을 삭막하게 하는 얘기는 아예 거부하고, 새로운 발전성, 뭔가 창조적인 싹이 없는 얘기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조용히 조그만 것이라도 살려보려는 쪽으로 나아가게 되지 않았나 하는 거죠.9)
그것은 ‘그늘’로 향하는 길이다. 모든 것이 양화, 위생화, 실증화되어가는 세계의 방향, 모든 것이 깨끗해져만 가는 미술(美術)의 방향과 반대로 어긋나는 길인 것이다. 빛나고 번쩍번쩍한 사물들의 유혹에로가 아니라, 유혹의 반대켠 덧없고 소슬해져만 가는 마음의 공복에로, 편집(偏執)의 자가증식이라는 시각의 생리를 따라서가 아니라, 시간의 지층을 파 들어가는 광부의 도로(徒勞)에 가까운 길이다.
회화의 그늘
민정기의 작품세계를 위해서라면 초기, 소위 ‘이발소그림’ 이전에 대학 시절의 모색기 또한 간과할 수는 없으리라. 이를 위해 하나의 작품을 읽어본다.
<유리동물원>(1971, 캔버스에 유채, 220x100cm)은 흑백 도판만으로만 남아 있어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나마 이 시기에 대한 의미 있는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테네시 윌리엄스의 극명을 그대로 자신의 졸업전 작품 제목으로 가져왔다. 둥근 달이 떠 있는 소략한 선묘의 산수화 한 폭, 고대 분묘 수렵도에서 볼 수 있던 산세의 표현 소품, 사신도에서 빌려온 것인 듯 혹은 자개장 장식의 하나로 박혀있던 꽃, 혹은 이파리 장식 문양, 평온한 시골 마을의 정경인 듯한 스케치풍 드로잉, 그리고 왼쪽 하단에 한자를 세로로 쓴 ‘천당(天堂)’이라는 글씨 등등 총 8개의 크고 작은 소품들을 붙여 한 화면에 콜라주해 놓은 작품이다. 음울한 현실, 꿈은 잡을 수 없는 허상이라는 듯 지나가 버린 것들에 대한 애잔한 그리움의 표현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어떤 완결된 형태의 상(像)이라기보다는 마치 꿈과 현실의 괴리에서 몸부림치는 <유리동물원> 주인공 배역 톰의 심리묘사처럼 상은 유동(遊動)하고 있다. 이에 대해 작가는 당시 한국미술계 씬(scene)에서의 젊은 화학도(畫學徒)로서의 고뇌와 번민, 혹은 소위 유행 기류였던 설치나 단색화들은 자신의 길이 아니라 여겼던 어떤 모색의 좌고우면 속에서의 길 더듬이 같은 것으로 볼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졸업과 군복무를 전후한 이 시기 <6인회화전>과 <12월전>, <제3구룹전> 등 1978년까지의 일련의 단체전들에 내보인 민정기의 그림들은 대개 민화적 도상 혹은 고대적 상상력으로부터 나옴 직한 야생의 풍경, 혹은 형상을 허물어뜨린 반추상의 거친 이미지들로 등장해 있다. 확실히 이는 ‘반예술’이라는 다다적 도발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안전한 예술’에 대한 의문으로 이러저러한 촉수를 시험하고 있던 민정기를 떠올리게 한다.
그로부터 삼각지 거주 시기의 ‘현발’ 시대가 이어진다. 그 대표작은 단연 <세수>(1980), <대화1>(1980), <지하철Ⅱ>(1980) 등이다. 민중적 삶의 모습을 소박하게 담아 건강한 미술, 소통이 가능한 미술, 먹고 사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노동에서도 소외되지 않고 역사에서도 승리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선(善)을 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이 시기 민정기 회화의 진면목인 것이다. 그런데 이들 ‘소박회화’는 소박한 궁지로 내몬 그 사회, 유리천장에 갇힌 계층을 둘러친 사회의 구조적 벽을 보기 시작한 민정기의 눈에 관한 그림이기도 한 것이다. “일상적인 행복의 모습은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개인의 의식의 기능이라고 하는 얇은 주형(鑄型)으로서만 존재함으로써 얻어진다”10)고 그가 말했듯이.
그것이 <풍요의 거리>(1981), <줄서기>(1982)와 같은 후속 작품들에서 보인 도시적 삶에 대한 절망과 구조에 대한 회의 혹은 참담한 심정에 대한 고백인 것이다. 이런 참담함을 더욱 극단으로 몰고 간 것은 <영화를 보고 만족한 K씨>(1982)이다. 무료한 일상, 휴식마저도 내일의 노동을 위한 체력의 비축이어야 하는 소비재로서의 여가를 보내기 위해, 예비된 즐거움을 향유하러 영화관을 찾는 군중들. 무덤덤한 일상에 신기루처럼 밝고 희망찬 황금색 대형화면은 그야말로 스펙타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싸움을 더이상 계속해나갈 수가 없다. 그는 거대한 사회 체계의 작동 혹은 빅브라더(big brother)를 눈앞의 적으로 두고 버틸 만큼 체력과 인내력이 강한 투사도 될 수 없었거니와, 그것이 미술의 지표가 되어 줄 방향으로서도 무망한 것일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느꼈던 듯하다.
1986년, 제2회 개인전, <숲에서> 연작과 <숲을 향한 문> 연작은 그 모색의 야심적 결과물이었다. 숲의 벌거벗은 인간들은 인간의 본원적인 문제들, 인간의 생물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들,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들을 폭넓게 다뤄볼 실마리와 같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 점이 당대의 현실주의 미술 진영의 비평에 ‘관조적’이고 ‘낭만적인’ 대안은 아닌가 의심받기에 충분했음도 사실이다. 예컨대 <숲에서>의 인물들이 비록 모호한 배경 속에서 수상한 의심을 불러일으키긴 하지만 건강한 육체의 자연성, 문명에 대비된 야생과 같은 것을 유비하려 한다는 점에서 비교적 무리 없이 동의하더라도, 왜 그런 숲이라는 은유 혹은 상징을 썼어야 했는가? 과연 그런 숲으로 엄청난 삶의 현실을 대처할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들이 그것이었다.11)
이에 대한 민정기의 변론을 위해 우리는 민정기가 애초 ‘이발소그림’에 주목했던 것을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이미지가 갖고 있는 ‘시각적 호소력의 본질’이 이들 그림들 속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었다는 사실 말이다. 즉 (일류대학을 나온 엘리트 화가인) 민정기는 촌스럽고 세련되지 않은 그림을 다시 모방해 고급미술의 전시장에 내놓는 반미학적 전투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이발소 그림을 가져온 게 아니라, 실제로 “야 이거 정말 재미난데. 멋있네”라고 느낀 것도 사실이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지식인적 관심이 아닌 ‘장인적 관심’이었다는 것. 그곳에서 ‘긍정의 싹’을 본 민정기의 환호와 열정을 떠올려 볼 수도 있으리라.
이를 지리멸렬한 패배의 퇴각이라거나 전투력의 상실로 보는 식의 외인(外因)적 평가치에 맡겨질 성질의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삶을 보존하고 실낱같아진 ‘생기’의 가느다란 뿌리를 부여잡고자 했던 안간힘이었던 쪽으로 더 보아야 하는 이유다. 실제로 민정기는 자서(自書) 한 편에서 ‘자연의 생기(生氣)’를 체험한 바 있으며 그렇듯 그림을 그리고 색을 칠하고 글씨를 쓸 때 호흡과 정신과 자세가 한데 어우러지는 자연스러운 통일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생기를 전통의 요체로 언급하기도 했다.12) 내부를 향한 시선, 자의식에 엄격했던 동양적 정신주의의 자세를 어렵지 않게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자기의 길 찾기’로서의 모색과 실험의 시기로 추정되어야 할 이 시기의 민정기는 경봉선사(鏡峰禪師)의 선시(禪詩)로 쓰여진 일기집13)과 레비 스트로스(C. Lévi-Strauss)의 『슬픈 열대』를 탐독한 영향으로부터 멀리 있지 않다. 또한 민정기의 현발 동인들, 특히 평론가 성완경, 서울미술관장 임세택 등과의 교유는 프랑스 신구상 회화(특히 발튀스(Balthus), 자크 모노리(Jacques Monory))를 자신의 어법으로 흡수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 또한 참조할만한 영향사 중 하나이다.
민정기에게서 경봉선사와 레비 스트로스, 프랑스 신구상 회화 각각의 논점과 그 수용의 정도를 묻고 따지는 일은 무용한 일일 테지만, 자기의 본래 면목, 자기 마음의 고향, 자기완성의 피안을 지향하는 선가(禪家)의 종교적 스텐스나 거시적 안목으로 인간 사회의 통시적 구조를 분석하듯 가늘고 먼 시선을 던지는 인류학이 어딘가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차원으로 이행하려던 중의 민정기에게 끌림을 주었으리라는 상상은 능히 가능한 것이다.
어쨌든 인내의 언덕 끝까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 그는 비로소 그 짐을 내려놓는다. 그것(‘서울’)은 거기까지였던 것일 터.
그런 절치부심 끝에 마주친 <동녘골 아침>. 서후리의 화실 앞산에 부서지는 아침 햇살을 받아 초록의 빛을 생생하게 발하고 있는 장대한 그 풍경은 오랜 모색의 기간 동안 민화나 전통 회화에 대한 공부를 새롭게 하며 석판화로 혹은 유화로 주변 풍경과 야생화, 인물화들을 발표하지 않고 습작해오던 끝에 맺은 결실이었다. 그것은 “80년대 격동하는 사회적 과정 속에서 제기되었으나 문화적 차원에서 이렇다 할 해결책을 찾아내지 못했던 그 질문들을 신중하게 추슬러 그것들을 오랫동안 괴리되어왔던 장구한 자연사와 사회사가 서서히 마주쳐 햇살이 부서지는 어떤 지평 위로 조심스럽게 끌어모으고 있는”14)것이었다.
일하는 사람들, 건강한 사람들이 온전히 그려져야 한다는 다짐과 함께 1991년부터 민정기의 ‘색채의 시대’가 시작된다. <이른 봄 무씨 뿌리기>, <신원리 오동나무 길>, <탑곡 느티나무>, <한여름 고추밭 매기>, <성두봉이 보이는 양현兩峴계곡>, <북한강변 금남산 부흥기도원>, <북한강변 리버사이드 호텔>, <북한강변 남양주 컨트리클럽>, <벼베기>, <매화산>, <8곡 속사천續斜川>, <9곡 일주암>, <아미산>, <분설담>, <외수입>, <음산>, <양산,1992>, <용문산이 보이는 묵안리 마을 입구>, <묵안리 마을 옛길>, <유명산이 보이는 사당> 등이 1991년에 그려진 전체다. 새삼 화구를 들고 직접 현장에서 그림을 그리는 ‘그림그리기’의 본래적 태도를 기억해 실행한 것도 이때다. 이로써 “감각들의 개화를 느낄 때의 어떤 고양감과 확장감처럼, 몸 전체가 빠르게 유동하는 공기 속으로 퍼져나가 공간과 자신이 일체가 된 듯한 느낌 속에서 촉발되는 정신의 팽창감”15)이 화면에 담기게 되어 마침내 생생함을 획득하게 되었던 것 또한 당연한 수순이었다.
한편 <벽계구곡도>1996의 그 양상은 이제까지의 실경산수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산야는 산세와 물세를 따라 고지도에서 보듯, 전체의 지형을 도해(圖解)하려는 의도의 산물인 듯 ‘배치’되었다. 이를 불러 ‘산수화’라 칭하자고 제안한 사람이 최민이다.16) 과연 그 시점(視點)은 축(軸)이나 권(卷)으로 된 산수화 구성 방법처럼 위에서 아래로, 혹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어나가는 공간 배치 형태를 띠고 있다. “처음 화면을 대하면 우리 눈은 화폭 전체의 짜임새가 들어오겠지만, 그 사실은 잠시 보류된 채로 차례차례 일정한 방향을 따라 제1곡 수입리(收入里), 제2곡, 이어 제3곡... 식으로 마치 커다란 지도를 읽듯이, 그림 안에 표기된 정자 이름, 사당 이름들을 따라 옮겨 다니게 되며 부분들을 읽다 보면 그 틀 속에 비어 있던 자리들이 하나하나 채워져 가기도 하고, 심지어는 화면 속의 정경은 화면 바깥에까지 연장되기에도 이른다”는 것이다.17) 이 정황을 일러 “이미 죽어버린 공간의 해석과 회화적 문제틀에 새로운 차원을 도입하는 획기적인 시도”의 하나라는 심광현의 진단에 동의하는 바가 그것이다. 벽계구곡 연작들은 민정기의 이후의 회화들, 즉 2004년 이후의 맥(脈)과 세(勢), 기(氣)로서의 산수경관, 혹은 ‘산수지도’18)들의 입구에 놓이는 도약대의 그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여주 신륵사>, <금사면 이포 나루터>, <양수리> 등의 한강오회도. “본 것을 걸어가듯이”, 즉 “걸어가듯이 본 것을 그렸”기에, 관람도 ‘걸어가듯이 보아야’ 하는 ‘여주 신륵사’, ‘금사면 이포 나루터’, ‘양수리’ 등은 오늘날의 지리정보시스템(GIS)이 제공해 줄 수 있는 좌표적 엄밀성과는 완전히 다른, 다양하고 이질적인 것들의 총합으로서의 축도인 셈이다. 그것은 그저 막연한 스페이스(space)가 아니라 “장소, 역사를 중첩해 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대상도 제각각 다른 시점을 택하고 있으며, 전체의 톤은 일률로 조율될 필요가 없으며 형(形)들은 균질적일 필요가 없어진 구체적 주체적인 삶의 감수성에 의해서나 포착될 수 있는 ‘장소’라는 것, 민정기의 독특한 회화적 형세가 펼쳐진 것이다.
그런데, 민정기는 다시 한번 어딘가로 떠난다. 저잣거리를 활보하는 구보 씨를, 양평을 떠나 다시금 도시(서울 Seoul)로 입성하는 조선조 평민을 우리가 보게 된다는 것! 이것은 확실히 새로운 사태가 분명하다. 2016년의 제8회 금호미술관 개인전과 그 이후의 작업들은 확실히 산이 아니라 ‘길’을 따라서, 강물과 도로를 따라서, 도시의 공간 안으로 파고든다. 그것은 최민의 말로 흡사 ‘유목민적인 시선의 자유로운 이동’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방식으로서이다.19) 그러나 ‘시선의 이동’이라 하여 곧바로 ‘공간(space)’을 상정하는 일은 오판이다. 길을 따라가는 길의 역사 즉 ‘시간’의 자유로운 이동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더 맞다. 예컨대 <임진리 도솔원 복원도>(2016)나 <임진리 나루터>(2016)는 단원의 시대를 넘어가 고려 정종 11년(1045년)의 기록을 넘어, 광종 14년(963년)의 기록에까지의 고증을 찾아가며 시간의 길을 거슬러 올라 구성되는 그림이었으며, <유 몽유도원도>(2016)는 최소한 600여 년의 시간, <박태원의 천변 풍경 1,2,3 연작>(2019)은 최소 80여 년의 시간이 중첩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비단 ‘중첩’으로서만 아니라 ‘화두’이기도 하다. 예컨대 <유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의 꿈을 도연명의 <도화원기>로 번안한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오늘날의 인왕산 기슭의 실경과 결합시킨다. 속세를 벗어난 세상, 누구나 염원하는 유토피아, 그러나 도연명의 도화원기와는 다르게 숨겨진 도원경은 이상경에 그치지 않고, 그것은 어렵사리 찾을 수 있는 곳이고 찾아져야 한다는 열망까지도 은연중 드러내고 있다면 말이다. 쉴 새 없이 현실경과 이상경, 역사경까지를 오르락내리락하며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이 그림들은 ‘그림’ 혹은 ‘회화’라는 장르에 안전하게 드는 것은 더이상 민정기의 문제가 아니게 되는 지점을 말함이다.
이 상황은 최민의 분석처럼 ‘시간적 차원이 새롭게 회복되는 상황’이고, “마치 투명하고 옅은 수채물감의 터치를 여러 겹 교차시켜 바른 것 같은 짜임새로 인해 새로운 두께와 깊이를 획득한 회화 표면에 의해 더더욱 강화시켜 주는” 결과로 합류된다.20)
어쩌면 민정기의 이 새로운 시도는 ‘회화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있는 상황일지도 모르겠다는 것이 그것이다.
결(結)
그의 출발점이 민중미술이었을 때에 그것은 이데올로기의 층위라기보다는 더 강력한 실존적인 층위의 엄밀한 질문들에 답하려는 우의(寓意)로서거나 정서(情緖)로서의, 높지 않은 목소리였다. 또한 ‘산수풍경’ 혹은 ‘화훼화’들을 그렸을 때란 눈앞의 풍경이 아니라 마음속의 산수, 경관의 정수(精粹)들을 보려는, 낮은 시선이었다. 시각(예술)이 그 미묘한 작동을 시작하자마자 태생적으로 자가발전이라는 마력에 빠질 수밖에 없고 마침내 ‘미혹’이라는 기념비성에 이르고야 마는 회화 본래의 숙명을 경계하듯이 민정기는 미혹으로부터 끝없이 탈주하는 듯하다. 예컨대 민정기의 (후반기) 대폭산수화들이 감상되는 타블로이기를 그치고, 그 안에서 놀며 거닐며 탐방하는 무엇이 되는 산수화라는 동양적 개념에 더 맞는 것이 되곤 하는 때다.
그것은 아마도 가시적 세계라는 회화의 숙명에 도전하려는, 어떤 비가시적 세계를 연계하려는 도전적인 기획으로부터 온 것일 테다. 그러나 이때 중요한 것은 그 비가시적인 것들의 내용이 발하는 가치다. 그 점에서 그 산수화들은 산세와 지세 가운데 삶의 거처를 정하고 이를 풍수(風水)의 지혜로 여겼던 옛사람들의 흔적을 좇아 시각화함으로써 동시대적 삶과의 거리를 통각하게 한다는 점을 주목하게 한다. 소박하고 대중적인 삶의 진지한 감정에 대한 여전한 애정과 건강한 연민이라 할만한 것에 바탕하고 있다는 것. 이것은 그리 값싼 감정이 아닌 것이다.
소위 ‘현대미술’이라는 강령의 도그마를 확고히 신뢰하고 있는 숱한 예술가들이 ‘평면성’에 대한 의심 없는 신뢰, 시각예술이란 ‘창조자의 본성’에 가까운 무엇이어야 하는 진리관, 엄청난 주관주의(혹은 엘리트적 예술가주의)와 그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편년체編年體적 역사관이 어른거리며 그 연장선에 역사화를 그려내야 한다는 강령이 으레히 등장하곤 하는 것을 기억할 일이다.
민정기의 그림이 기념비성을 경계하고 있다는 미덕이란 하나의 “살아있는 현재적 관심”만이 진정한 역사를 구성하게 할지 모른다는 변증법적 역사서술태도에 가깝다는 점이다. 과거 세대의 사람을 생각해본다. 현재란 그들이 기다렸던 미래라는 점에서 현재란 실로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 그렇기에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어떤 은밀한 약속이 있는 것이다. 민정기는 이 약속에 다가가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것은 이제는 침묵해버린 목소리들의 메아리를 듣는 태도와 매우 유사한 것일테다. 과거는 그것을 구원으로 지시하는 어떤 은밀한 지침指針을 지니고 있다. 우리 스스로에게 예전 사람들을 맴돌던 바람 한 줄기가 스치고 있지 않은가? (…) 과거는 이 힘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21)
민정기 시기별 주요작품 해설
박응주(미술비평가)
민정기의 화업에 대한 시기 구분은 민정기에 관한 본격 학술 논문의 부재(不在)에서 알 수 있듯이 비평문들이나 전시 서문들에서의 부분적인 시기별 기술에 그치고 있다. 또한 이번의 디지털 아카이빙 사업을 통해 알게 되었듯이 작가와의 심층적인 대담을 통해 밝혀진 연대기적 사실들의 맥락이나 미술 대학 졸업 후로부터 소위 입신(立身)의 계기점이었던 현실과 발언(이후 ‘현발’로 약칭함)까지의 초기 작업의 면모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민정기 화업의 시기 구분은 ‘새로고침’을 요구받고 있는 상황이라 하겠다.
필자는 그 연대기를 크게 5개의 시기 구간으로 구분해 보고자 한다.
1. 1971년 미술 대학을 졸업한 시기로부터 1978년 중반경(보다 엄밀하게는 그가 활동하기 시작했던 ‘제3구룹전’의 7회와 8회 전시 사이)까지의 모색과 탐구의 시기.
'청소년기 미술반에서 석고 데생, 인체 데생을 잘했다. 모친이 전통공예품을 좋아하여 집안 장식품으로 화각(華角) 6층장과 청화 백자 매병이 있었다. 대학에 입학한 이후로는 임영방(林英芳) 선생을 평생의 스승으로 여겼다. 서울미대 연극반에서 명배우로 이름을 얻으며 매년 2~3편의 주요 배우로 활동했다.’
이상은 민정기의 작가 입문 이전의 참조할만한 이력들이다. 지금은 원작의 행방을 알 수는 없으나, 미대 졸업전에 출품했던 <유리동물원>1971이란 제명의 작품이 흑백 도판만으로 그나마 남아 있어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 시기에 대한 의미 있는 시사점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큰 기대를 갖고 준비했던 연극공연이 중간에 무산된 아쉬움때문이었을까? 그는 이 테네시 윌리엄스의 극명을 그대로 자신의 졸업전 작품 제목으로 가져왔다. 둥근 달이 떠 있는 소략한 선묘의 산수화 한 폭, 고대 분묘 수렵도에서 볼 수 있던 산세의 표현 소품, 사신도에서 빌려온 것인 듯 혹은 자개장 장식의 하나로 박혀있던 꽃, 혹은 이파리 장식 문양, 평온한 시골 마을의 정경인 듯한 스케치풍 드로잉, 그리고 왼쪽 하단에 한자를 세로로 쓴 ‘천당(天堂)’이라는 글씨 등등 총 8개의 크고 작은 소품들을 붙여 한 화면에 콜라주해 놓은 작품이다. 음울한 현실, 꿈은 잡을 수 없는 허상이라는 듯 지나가 버린 것들에 대한 애잔한 그리움의 표현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어떤 완결된 형태의 상(像)이라기보다는 마치 꿈과 현실의 괴리에서 몸부림치는 <유리동물원> 주인공 배역 톰의 심리묘사처럼 상은 유동(遊動)하고 있다. 이에 대해 작가는 당시 한국미술계 씬(scene)에서의 젊은 화학도(畫學徒)로서의 고뇌와 번민, 혹은 소위 유행 기류였던 설치나 단색화들은 자신의 길이 아니라 여겼던 어떤 모색의 좌고우면 속에서의 길 더듬이 같은 것으로 볼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이 시기 <6인회화전>과 <12월전>, <제3구룹전> 등 1978년까지의 일련의 단체전들에 내보인 민정기의 그림들은 대개 민화적 도상(<작품1>1975, <풍경>1975, <산수(습작)>1977, <화조(습작)>1978) 혹은 고대적 상상력으로부터 나옴직한 야생의 풍경(<산수>1976, <자애의 바다>1976)에 형상을 허물어뜨린 반추상의 거친 이미지들(<폭포>1976, <사면초가>1976)로 등장해 있다. 또한 ‘미도장의사’라는 상호가 선명한 ‘상가(喪家)入口’ 전단지(<작품2>1975)나 화투 8자 3짝을 각각 사진으로 찍은(<무제1,2,3>1975), 이른바 일상의 오브제들을 사진으로 촬영해 보기도 했다.
확실히 이는 ‘반예술’이라는 다다적 도발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안전한 예술’에 대한 의문으로 이러저러한 촉수를 시험하고 있던 민정기를 떠올리게 한다.
그것이 1977년 마치 형벌에 처한 인물인 듯, 다분히 자학적인 형상의 (<풍경1>1977, <상황1,2,3>연작들1978, <상황b1,2,3>연작들1978) 작품들로, <못> 연작들(<못1,2,3...16>1978)로 이어지며, 마침내 78년 (제8회) <제3구룹전> 전시 브로슈어에 도판으로만 등장한 <세면(洗面)>1978, 거기에 출품작명으로 함께 기입된 <노동>, <식사>라는 명제를 확인하게 된다. 필자가 이 <세면> 작품에 ‘환호’하는 것은 그 도상은 어느 모로 보나 1980년의 <세수>의 그것임을 확연히 알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실존적 고뇌와 강박적인 의식이라는 긴 터널을 지나가는 민정기의 모색기는 마침내 ‘사람’, 고귀하고 영원한 신앙으로서의 ‘인간’에 도달했던 여정이라 볼 수 있겠다. 오랜 연극계의 동료이기도 한 이상우(전 한예종 연극원 교수)의 “배우란 자신의 퍼스낼리티로부터 떠나 캐릭터의 그것으로 에고를 이전시키는 자”1)란 촌평이 혹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못> 연작들을 포함한 민정기의 초기작들에 대해 성완경은 “이미지의 상투형을 기호처럼 단순화하여 풍경 속에 조립하거나 또는 단순히 나열하거나 아니면 그대로 모사한 것들”2)이라 묘사한 바 있지만, 이때의 민정기는 이미지의 상투형을 인용할 만큼 자신의 퍼스낼리티가 모두 해결되어있지 않은 심적상태였다고 보는 게 아직은 더 적실하겠다는 확인을 하게 되는 대목이다.
이로부터 “막연한 자의식의 발산된 표현”3)은 1978년 중반 아들(민성환閔盛煥)의 출생과 함께, 비평가 최민(崔旻)과 함께, 동료이자 선배 민중미술가 오윤(吳潤)과 함께, 그 ‘자신만의’ 휴머니즘으로부터 ‘모두의’ 휴머니즘으로 전환되는 그야말로 대전환의 계기를 맞이한 것이라 볼 수 있다.
**1) 이상우, 「필자와의 인터뷰」, 2020.9.
**2) 성완경, 「1982문제작가 작품전-민정기론」, 서울미술관, 1983, pp.22-26.
**3) 김진송, 「민정기, 개인적 삶과 사회적 삶의 긴장관계」, 『민중미술을 향하여-현실과 발언 10년의 발자취』, 과학과 사상, p.276.
2. 1979년 삼각지 거주 시기 최민·오윤과의 만남, ‘현발’ 가담의 징후들의 시기로부터 ‘이발소그림’, 도시이미지, 소비사회의 문제들에 대해 ‘발언’했던 1984년까지의 현발 시기.
민정기의 구술에 의하면 ‘현발’ 가입 직전 비평가 최민과의 만남, 선화예술학교 재직시의 오윤과의 만남을 자신의 화업에 큰 영향을 끼친 주요한 요인으로 꼽는다. 특히 오윤의 글 「현실 인식」(1980), 멕시코 벽화 운동에 관한 소개글, 최민의 『서양 미술사』를 통해서 서양 미술에 대한 갈증을 풀 수 있었으며, 자신의 현실 인식을 정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나온 것이 ‘이발소그림’이다. 삼각지 화실(1979~1984)에서 작업하면서 남영동 일대의 이발소그림, 그리고 그 제작과 유통, 구매 형태에 대해 익숙하게 보아왔던 내력으로부터의 돈오(頓悟)였다.
최민 선생님은 현발 단체 기획전의 주제로 ‘도시와 시각’이라는 화두를 던지셨다. 시사점이 선명한 주제였으나 막상 전시 날짜가 다가오자 어떤 현실을 그려야 할지 고민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삼각지의 적산가옥 2층 작업실에서 며칠 동안 머리를 싸매다가 하도 답답해서 밤거리를 누볐다. 한 가게를 지나는데 <소문만복래>라는 돼지 그림이 눈길을 끌었다. 비로드 천에 찍은 판화로, 까만 바탕에 음영이 잘 나타나 있었다. 돼지의 눈동자, 쌍꺼풀, 자세, 털, 오밀조밀 모여있는 새끼들의 형상은 보면 볼수록 정밀했다. 단원의 호랑이 그림처럼 전통에 닿아 있고, 기법도 훌륭했다. ‘이거다!’ 번뜩 ‘키치(kitsch)’, ‘저급미술’, ‘대중의 역사’ 등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발소에 걸려 있을 법한 조악한 그림으로 채색하여 소위 고급미술, 고상한 그림에 반격한다면? 귀족 앞에 뛰노는 광대처럼, 자유로운 그림이라면 승산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 돼지 그림을 사 와서 곧장 작업에 착수했다. 50호 캔버스에 어미 돼지의 자세, 눈빛, 물욕이 있는 듯, 자유로운 듯 욕심어린 복잡미묘한 표정을 표현했다.4)
‘이발소그림’. 촌스럽고 세련되지 않은 그림을 다시 모방해 고급미술의 회랑에 내놓는 반미학적·다다이스트적 기획. 음울한 시대의 알레고리... 등 이 시기의 민정기의 그림에 대한 비평어들이다. 그러나 여기서 즉각 ‘도식적·전투적 리얼리스트’로서의 상(像)을 떠올리는 것은 무리다. 80년대에 접어든 민정기의 작품들은 ‘현발’ 그룹의 일원이었다는 외부적 시선 아래에 통념적으로 포섭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때 이미 현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지닌 몇 가지의 상이한 양상으로 전개되는 중층적인 의미구조를 지닌 자신의 특유한 회화적 어법을 심화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크게 3가지의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 첫째는 현실에 대한 막연한 분노 혹은 회의적인 생각들을 야유와 풍자, 알레고리의 형식으로 드러낸 경우이다. <소문1,2>1980, <대화2>1981와 같은 작품이다. 눈과 입, 귀가 제멋대로 신체에 붙어있는, 아니 쉬쉬하는 소문들로만 이루어진 신체들이다. 붉은 노을이거나 야심한 밤으로 난 길 위에서의 수상한 풍경. 모호한 불안과 비정상의 불쾌감을 우의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한편 <잉어>1980는 산업 사회의 공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경우다. 하수구를 통해 쏟아지는 폐수의 하천에서 몸부림치는 잉어. 이는 어느 날 우연히 발견한 우리의 옛 도자기 파편에 그려진 도약하는 잉어(약리도躍鯉圖)로부터 취택된 것이다. 입신과 성공의 표상인 잉어는 황하(黃河)를 거슬러 과연 용문(龍門)에 올라(登)갈 수 있을 것인가 되묻는 양이다.
둘째는 ‘그야말로’ 이발소그림 <돼지>1981, <그리움>1981 등의 작품. 여기서 민정기는 이발소그림이 지니는 내용과 정서를 그 자신 특유의 필치로 그대로 옮겨 그린다. 이 “자연주의적 과장으로 뒤범벅이 된, 막연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그림들”5)의 효용에 대해 김진송은 크게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닌다고 분석한다. 하나는 순수 미술에 대한 ‘통속 미술(천박, 치졸, 유치, 조야한 예술)의 반항과 공격의 수단이라는 의미와 다른 하나는 이 그림들이 갖는 대중성, 대중적 정서에 호소하는 소통 형식 안에 건강한 민중적 정서를 발굴해 낼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최민의 진단 또한 여기에 첨언하듯 조금 더 나아간다. 민정기가 ‘이발소그림’에 주목했던 것은 이미지가 갖고 있는 시각적 호소력의 본질이 이들 그림들 속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라는 것. 아울러, 민정기가 ‘이발소그림’을 다시 모방하여 그리는 행위는 대중문화의 도상들을 소위 순수 고급 예술의 맥락 속으로 끌어들인 팝 작가들의 행위와 달리, 시각적 형상의 흥미뿐만 아니라 그것이 환기하는 정서까지 같이 받아들이고자 하는 점에서 다르다고 본다.6) 그러나 이 이발소그림은 막연하게 ‘건강한 민중적 정서를 발굴해 낼 가능성’의 형태로든, “도상들의 상투적 의미와 그 상투성이 환기하는 대중적 정서에 (‘실제로’) 솔직하게 (그가) 끌리”7)든(괄호안은 필자 첨언), 그 그림들의 요체는유독 신속했던 한국적 근대화의 뒤안길을 되짚게 하는 특유의 정서적 파장을 동반했기에 그렇게 제도 미술 속에 놓여 복잡다단한 정서를 유발시킬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이 <세수>1980, <대화1>1980, <지하철Ⅱ>1980에서 보여진 바, 대중적 정서의 힘을 타고 넘는 민정기의 재능이다. 이것이 민중적 삶의 모습을 소박하게 담아 건강한 미술, 소통이 가능한 미술, 먹고 사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노동에서도 소외되지 않고 역사에서도 승리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선(善)을 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이 시기 민정기 회화의 세 번째 유형의 토대를 이룬다.
그러나 이들 ‘소박’, ‘건강’, ‘보편적인 선’ 등등의 형용어를 즉각 자연주의적 정경이 펼쳐진 서정적 전원풍경이라거나 명암과 골격 탐구를 위한 석고상 같은 사물을 그린다거나의 뜻으로 상상하는 것은 오인이다. 예컨대 ‘세수’는 어제의 노동의 씻길 수 없는 피로를 근면의 이름으로 떨쳐내며 또 하루의 전쟁을 시작하는 신산한 삶의 숙명이 세수하는 자의 둘레에 울타리를 두르고 있음을 우리는 즉각 ‘느끼기’ 때문이다. 아침에 세수한 자의 출근 후의 모습이 <지하철2>의 그 현장이자, 현장의 그 사내가 귀가할 집의 다음 날 아침 모습이 ‘세수’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쩌다 친구와 소박한 주점에서 만나 건네는 대화와 위로의 말들이 헛된 위안의 쳇바퀴를 맴돌고 있음을 그들 또한 감지하고 있었으리라는 것 또한 능히 짐작 가능하다(<대화1>1980). 말하자면 일견 ‘따뜻한 온기’로 인정을 훈훈하게, 혹은 나른한 애상에 젖어 감정이입하기에 맞춤일 듯한 민정기의 이들 ‘소박회화’는 소박한 궁지로 내몬 그 사회, 유리천장에 갇힌 계층을 둘러친 사회의 구조적 벽을 보기 시작한 민정기의 눈에 관한 그림이기도 한 것이다. “일상적인 행복의 모습은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개인의 의식의 기능이라고 하는 얇은 주형(鑄型)으로서만 존재함으로써 얻어진다”8)고 그가 말했듯이.
<풍요의 거리>1981, <줄서기>1982와 같은 후속 작품들에서의 민정기는 도시적 삶에 대한 절망과 구조에 대한 회의 혹은 참담한 심정을 보다 적극적으로 발설하기에 이른다. 대량소비사회의 현란한 광고의 현혹 속에서 영혼마저 소진되어 갈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체제의 메커니즘을 고발(<풍요의 거리>)하며, 차례를 기다리는 대기자들의 줄서기는 동일 인물의 변주일 뿐인 희화화된 한 사람의 타인들(<줄서기>)일 뿐이다. 또한 거리를 자유롭게 활보하는 듯 보이는 서로로부터의 소외는 기실 붉은 벽돌로 견고하게 구축된 벽들 속에 박제된 껍데기인 듯 둘 사이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벽보>1983, <이미지의 안팎>1983, <거리에서-사람들>1983) 것이다.
그로부터도 이런 참담함을 더욱 극단으로 몰고 간 것은 <영화를 보고 만족한 K씨>1982이다. 무료한 일상, 휴식마저도 내일의 노동을 위한 체력의 비축이어야 하는 소비재로서의 여가를 보내기 위해, 예비된 즐거움을 향유하러 영화관을 찾는 군중들. 무덤덤한 일상에 신기루처럼 밝고 희망찬 황금색 대형화면은 그야말로 스펙타클 바로 그것이다. 스펙타클(Spectacle), 그것은 기 드보르(Guy Debord)가 밝힌 바처럼 하나의 이미지가 될 정도로 축적된 자본이나 소비자 사회를 지칭하는 말로, 사회적 주체를 마비시키는 ‘아편’과 같은 존재로 기능한다. 권력이 구사하는 모든 제도적, 기술적 수단과 방법들 총체인 것이다. 화면을 반분해 이제 그 권력과 시스템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측정한다. 점점 야위어가는 영혼의 쇠락 정도를...
이미지의 안팎, 이미지의 뒤켠에 둘러쳐진 덫을 간파하려는 기획은 <개인택시>1982나 <관광지에서의 식사>1982와 같은 작품을 통해 삶의 상투형, 더욱 정확히는 사회적 삶의 상투형들이 빚어내는 이미지에 깃든 삶의 덧없음과 암울한 심사의 표현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민정기의 ‘비판적 현실주의’는 여기서 멈칫하는 듯하다. 자신이 추구해야 할 회화는 좀 더 건강한 삶의 모습을 드러내야, 보다 구체적인 인간의 모습에 다가가야 한다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의 휴지기, 모색기에 접어들었던 이유였을 것이다.
**4) 민정기, 「화가 이전에 그림이 있었다」, 『월간 아버지』, 2019. 9.
**5) 김진송, 앞의 글, p.279.
**6) 최민, 「음울한 시대의 알레고리-민정기의 전시회에 부쳐」, 『2004한국문예진흥원 마로니에 미술관 대표작가 초대전, 민정기-본 것을 걸어가듯이』, 2004. 10, p.9.
**7) 최민, 앞의 글.
**8) 민정기, 「작가노트」, 『그림과 말』[1982 현실과 발언 동인전 《행복의 모습》(덕수미술관) 참여작가 글모음집], 1982, pp.12-13.
3. 현발의 쇠퇴기와 함께 제1회 개인전 이후, 용두동의 작업실에 칩거하면서 내면세계로의 선회라는 심리적 변화를 보였던 1983년 말 혹은 1984년으로부터 1986년 제2회 개인전까지의 ‘자기의 길 찾기’로서의 두 번째 모색기.
명시적으로 이 시기를 두 번째의 휴지기 혹은 모색기로 보는 것은 그의 작업이 향하는 시선이 미묘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되는 바 강퍅한 시대 속에서 겪어내야 할 예술가의 고뇌는 그 또한 비켜 가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1982년 <행복의 모습> 전에 실은 앞서의 민정기의 글을 재차 인용해본다. 그는 “소비되기 쉽고 이해하기 쉬우며 기존의 취향들을 쉽사리 만족시켜버리는” 소위 대중 예술의 이와 같은 거짓 행복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되찾고자 하는 예술에 있어서 해결해야 할 문제로서 “이와 같은 인습에 잘 적응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어떻게 그것들로부터 가장 성공적으로 해방될 수 있느냐 하는 것”에 있다고 보았다.9)
그러나 1984년 <한씨연대기>를 그린 이후 저술한 한 에세이에서 그는 ‘삶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인간’을 이야기한다.
말하고 싶은 요지는 이렇다. 삶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인간을 어떻게 하면 표현할 수 있으며, 그러한 사람을 표현함으로써 이웃과 만나고 나와 이웃을 이해하고 삶의 역사를 이해하며, 삶에 대한 폭넓은 조명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사건의 연속이고, 사건은 바로 삶 자체이기도 하다. 한 인간이 겪는 사건을 서술해나감으로써 구체적이고 총체적인 삶의 모습을 조명해 볼 수 있으리라. (…)이러한 방법이 사실을 밝혀내고자 하는 정신의 한 수단이 될 수 있지 않을까.10)
그가 시장 한 켠 좌판을 앞에 둔 과일장수 노인을 그리고(<과일장사>1983), 어린 자녀를 앞세운 채 일감을 기다리는 일용노동자의 처연한 정경을 묘사하며(<일터를 찾아서>1983), 6.25라는 비극을 겪으면서 이쪽으로부터도 저쪽으로부터도 삶을 박탈당해야만 했던 어느 ‘한씨’를 그렸던 소이다.
여기서 우리는 80년대 전반, 최소한 1987년까지는 민주화 운동에 대한 강고한 탄압과 억압이 사회의 모든 부면에 가해지고 있었던 시대를 산입해야 한다. 또한 악에 대한 선한 저항 자체는 악을 닮아갈 수도 있던 피폐해진 영혼을 목격하기도 했었다는 기억도 소환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민정기는 거대한 사회 체계의 작동 혹은 빅브라더(big brother)를 눈앞의 적으로 두고 버틸 만큼 체력과 인내력이 강한 투사도 될 수 없었거니와, 그것이 미술의 지표가 되어 줄 방향으로서도 무망한 것일 수밖에 없었던 회의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고 능히 추론해 볼 수 있으리라는 것.
그러나 보다 확장적인 시선으로 포착할 수 있는 이 시기의 민정기를 둘러싼 상황이란 유년의 시기로부터 성장하면서 형성돼 있던 내인(內因)으로서의 보다 근원적인 기질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문명의 진보라는 수레바퀴에 희생된 야생의 실존들을 애린(愛隣)하며(<숲에서>), 형식과 실질 사이의 균형 잡힌 교양(<숲을 향한 문>)을 말하려 하며 생기(生氣)의 불씨를 살려보려던 한 온유한 소년이 거기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치적 입장에 관한 일문일답을 요구받았던 휘몰아치는 시대에서의 강박은 어쩌면 그에게는 버거운 과제였으리라는 것이다.
어찌 되었건 이 시기는 민정기의 ‘자기의 길 찾기’로서의 모색과 실험의 시기이다. 그 길은 어쩌면 이후의 방향을 예비하듯이 ‘숲’, 숲으로 난 길이다. 숲은 작가 자신이 여러 군데서 밝히고 있듯이 1984년부터 거주하기 시작한 동대문구 용두동 작업실에 ‘칩거’하면서 경봉선사(鏡峰禪師)의 선시(禪詩)로 쓰여진 일기집11)과 레비 스트로스(C. Lévi-Strauss)의 『슬픈 열대』를 탐독한 영향으로부터 멀리 있지 않다. 또한 민정기의 현발 동인들, 특히 평론가 성완경, 서울미술관장 임세택 등과의 교유는 프랑스 신구상 회화(특히 발튀스(Balthus), 자크 모노리(jacques monory))를 자신의 어법으로 흡수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 또한 참조할만한 영향사 중 하나이다.
민정기에게서 경봉선사와 레비 스트로스란 자기의 본래 면목, 자기 마음의 고향, 자기완성의 피안을 지향하는 선가(禪家)의 종교적 스텐스로서, 거시적 안목으로 인간 사회의 통시적 구조를 분석하듯 가늘고 먼 시선을 던지는 인류학으로서, 어딘가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차원으로 이행하려던 중의 민정기에게 끌림을 주었으리라는 상상은 능히 가능하다.
여기에 전통적인 구상화의 단순한 재생산까지는 아니더라도 미학적 답보를 면치 못했던, 민정기도 포함된 당대의 한국 현실주의 화단에 프랑스 신구상 미술의 현현(顯現)은 창조적 구상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환호되었을 것임을 상상해보는 것도 그러하다.
1986년, 제2회 개인전, <숲에서>연작(인물들6점, 숲풍경4점(이상 석판화), 유화3점),1986과 <숲을 향한 문>연작(10점),1986은 그 모색의 야심적 결과물이었다. 우선 작품을 읽어본다. <숲에서>에서는 밀림(혹은 숲)으로부터 걸어나오고 있거나 빠져나오고 있거나 대화를 하고 있는 벌거벗은 채의 남녀 인물들이 방위(方位)로서의 어떤 표지도 없는 그저 ‘숲’에서 수상한 배회를 하고 있다. <숲을 향한 문>에서는 밝은 밖으로부터 어두운 실내로 마악 들어오고 있는 듯 열린 문 입구에 서 있는 나체의 여인이 있고, 그 여인의 몸과 벽면 위로 니카라과 내전 사진집으로부터 가져온 총이나 칼, 탱크와 병사들의 폭력과 희생의 이미지들이 투사되어 있다.
작가의 말로, 숲의 벌거벗은 인간들은 말하자면 인간의 본원적인 문제들, 인간의 생물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들,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들을 폭넓게 다뤄볼 실마리와 같은 역할로서 도입되었다. “옷을 벗은 사람과 옷을 입은 사람이 만나는 장면, 혹은 옷을 벗은 사람이 숲이라는 상징으로서의 화분을 들고 옷을 입은 사람들이 서 있는 문안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상황”을 생각해 보았노라는 것.12)
그러나 이 점이 당대의 현실주의 미술 진영의 비평에 ‘관조적’이고 ‘낭만적인’ 대안은 아닌가 의심받기에 충분했음도 사실이다. 예컨대 <숲에서>의 인물들이 비록 모호한 배경 속에서 수상한 의심을 불러일으키긴 하지만 건강한 육체의 자연성, 문명에 대비된 야생과 같은 것을 유비하려 한다는 점에서 비교적 무리 없이 동의하더라도, 왜 그런 숲이라는 은유 혹은 상징을 썼어야 했는가? 과연 그런 숲으로 엄청난 삶의 현실을 대처할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들이 그것이었다.13)
그 질문을 여기서 다시 묻고자 함이 아니다. 다만 이들 그림이 그려지기 두 해 전(1984년), “삶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인간을 어떻게 하면 표현할 수 있으며, 그러한 사람을 표현함으로써 이웃과 만나고 나와 이웃을 이해하고 삶의 역사를 이해하며, 삶에 대한 폭넓은 조명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라며 자신의 화두를 말했던 것을 다시 떠올려 본다. 그로부터 2년 후, 1986년의 이 ‘현대적인 구상성 실험’ 그림들은 어떤 방식으로 앞의 말들(“구체적인 인간”의 구체성)에 조응하는지, 혹은 어떤 경로의 길로 빗겨나는지, 아니면 확신을 가진 제 3의 경로14)를 개척해 나가는 중인지 판단해 볼 만한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는 그 2년 후(1988)에도, 혹은 지금도 여전히, 건강한 미술, 대중을 소외시키지 않는 미술을 심중에 품고 있으며 이를 의심할 필요는 전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하는 사람들(…).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보고자 한다. 그러나 그들은 온전히 그려져야 한다. 밝고 건강하게 그려져야 한다. 몽타주 기법이나 입체파의 화풍에서 보이는 것같이 잘려져 그려져서도 안 되고 회색빛의 음울한 개인주의적 분위기로 묘사되어도 안 되고 마구 그어대는 표현주의적 기법에 의해서 그려져서도 안 된다. 말하자면 그것은 내가 그려보고자 하는 건강하고 온전하며 명랑한, 먹고 사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노동에서도 소외되지 않고 역사에서도 승리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선(善)을 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인 것이다.15)
**9) 민정기, 「작가노트」, 『그림과 말』, 앞의 글.
**10) 민정기, 「韓氏年代記를 그리면서」, 『현실과 발언-1980년대의 새로운 미술을 위하여』, 열화당, 1985, pp.120~131.
**11) 경봉선사, 석명정 역, 『삼소굴일지』, 해뜸, 1985.
**12) 민정기, 강요배, 심광현, 안규철, 「작가와의 대담」, 『민정기 제2회개인전 도록』, 1986.
**13) 민정기, 강요배, 심광현, 안규철, 앞의 대담글.
**14)
**15) 민정기, 「대중성 획득의 건강한 미술에 대한 가능성」, 『가나아트』, 1988년 9/10월호, pp. 9~10.
4. 1987년 11월 양평군 서종면에 정착해 “마음속의 산수”로서의 ‘산수화’(최민, 1999 제5회 개인전 서문)로부터 자신만의 독자적인 실경산수를 제출할 수 있었던 2003년까지의 시기.
경기도 양평은 민정기 모친의 묘가 모셔져 있는 곳이다. 내내 서울내기로서 살아온 그였기에 모친이 모셔진 곳은 곧 자신의 고향으로 삼을 만하기도 했을 것이다. 1986년 무렵 사진가 정동석과 함께 남양주시 조안면 삼봉리 마을에 한 달 가량 시범 삼아 머물러보는 탐색 이후, 본격적으로 양평의 빈 농가(서종면 서후리)에 들어 지친 마음을 달래며 후미진 계곡, 바위틈을 타고 졸졸 감돌아 나오는 여울물이나, 여직 한 번도 사람의 손이 타지 않았을 구석진 숲속 풍경들을 실경 석판화로 제작해 보거나(<풍경>1986, <습작13>1986, <습작A>1987, <습작C19,20,21>1987), <숲에서>의 연장선으로서의 종이에 과슈로 그린 ‘숲-인물’ 습작들(<습작>1987, <습작C22,C23>1987, <습작C1~ C18>,1988)을 그려보던 민정기는 마침내 마음이 평온해지며 자연 풍경들에 눈길을 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때 마을 주변과 양근(양평의 원 이름) 땅의 역사에 얽힌 내력을 듣기도 하며 산야와 야생화, 일하는 촌부의 모습들에 눈길을 빼앗기기도 했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검은산 흰나무>1987, <산1, 2>1987, <이른 봄 저녁>1988, <평정리 여름>1988, <서후리에서>다색동판화1989, <서후리에서>동판화1989-90, <논>1990, <개울1>1990, <개울2>1990, <개울3>1990, <눈덮인 거북 바위>1990, <보리밭>1990, <동녘골 잣나무>1990).
그렇게 지나온 4년여, 그 회심의 결실이 <동녘골 아침>80x960cm,1990이라는 대작이다. 서후리의 화실 앞산에 부서지는 아침 햇살을 받아 초록의 빛을 생생하게 발하고 있는 장대한 풍경이다. 모색의 기간 동안 민화나 전통 회화에 대한 공부를 새롭게 하며 석판화로 혹은 유화로 주변 풍경과 야생화, 인물화들을 발표하지 않고 습작해오던 끝에 맺은 결실이었다. 그것은 “80년대 격동하는 사회적 과정 속에서 제기되었으나 문화적 차원에서 이렇다 할 해결책을 찾아내지 못했던 그 질문들을 신중하게 추슬러 그것들을 오랫동안 괴리되어왔던 장구한 자연사와 사회사가 서서히 마주쳐 햇살이 부서지는 어떤 지평 위로 조심스럽게 끌어모으고 있는” 16)것이었다.
1990년. 지리학자이자 도시공학자인 최종현과의 ‘답사’ 동행이 시작된 것이 이때다. 양평 주변 즉 양근 지역과 벽계구곡, 경주 백령구곡, 강화도 등등 방방곡곡의 답사를 위해 마련한 4륜구동 짚차 한 대가 폐차가 되었을 정도였다는 후일담을 전하고 있기도 하다. 이 ‘답사를 통한, 스스로 감각하며 걸어보는 방식’이라는, 일견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민정기의 방법적 전환, 이것이 이 시기의 민정기의 그림을 이해할 중심어이다. 그것은 마치 80년대의 사회적인 문제에 유념하던 때로부터 벗어나 자연적인 삶 자체를 깊숙이 파고드는 듯이, 음양오행의 원리를 골간으로 하는 풍수지리적 공간으로서의 공간감각을 묘사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이는 서구의 ‘일점원근법’이라는 불충분했던 공간표현의 난제를 우리의 전통화에서의 3원법과 같은 원리를 재전유해서 현대화로써 되살려보려는 획기적인 시도로 추인해 볼 만한 것이었다.
일하는 사람들, 건강한 사람들이 온전히 그려져야 한다는 다짐과 함께 1991년부터 민정기의 ‘색채의 시대’가 시작된다. <이른 봄 무씨 뿌리기>, <신원리 오동나무 길>, <탑곡 느티나무>, <한여름 고추밭 매기>, <성두봉이 보이는 양현兩峴계곡>, <북한강변 금남산 부흥기도원>, <북한강변 리버사이드 호텔>, <북한강변 남양주 컨트리클럽>, <벼베기>, <매화산>, <8곡 속사천續斜川>, <9곡 일주암>, <아미산>, <분설담>, <외수입>, <음산>, <양산,1992>, <용문산이 보이는 묵안리 마을 입구>, <묵안리 마을 옛길>, <유명산이 보이는 사당> 등이 1991년에 그려진 전체다. 새삼 화구를 들고 직접 현장에서 그림을 그리는 ‘그림그리기’의 본래적 태도를 기억해 실행한 것도 이때다. 이로써 “감각들의 개화를 느낄 때의 어떤 고양감과 확장감처럼, 몸 전체가 빠르게 유동하는 공기 속으로 퍼져나가 공간과 자신이 일체가 된 듯한 느낌 속에서 촉발되는 정신의 팽창감”17)이 화면에 담기게 되어 마침내 생생함을 획득하게 되었던 것 또한 당연한 수순이었다. 여기서 특기할 것은 봄과 여름을 지나 가을과 겨울이 화면에 담기기 시작한 때문이기도 했을 테지만, 예컨대 ‘음산’, ‘용문산’, ‘유명산’, ‘묵안리’, ‘양산’과 같은 그림에서는 어딘가 봄과 여름 풍경의 ‘살(肉)’이 ‘뼈(骨)’로 바뀌어 가는 듯한 미세한 차이점을 감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이후의 민정기 그림의 행로에서 발견하듯, 비단 계절 때문에 빚어진 양상만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필자의 견해가 어느 정도의 정합성을 가질 수도 있으리라 여겨진다.18)
1995년 들어 하나의 변곡점은 팔봉산 그림들에서 기(氣)와 맥(脈)을 간취하는 시도들(특히 <팔봉산3>1995, <팔봉산4>1995) 19)이 이루어지는 양상과 함께 <벽계구곡도>가 처음 보인다는 점이다.
벽계구곡도는 이때로부터 최종 2007년까지 스케치를 포함 총 13작품 20)이 그려졌는데, 조선조 말엽 유림의 학자 화서(華西) 이항노(李恒老) 선생이 이름 짓고 운영했다는 기록을 되짚어 그 정신을 되살려보는 기획으로 착안되었다. 95년의 습작 스케치 3점을 거쳐 1996년 81x312cm의 구곡도가 그려졌다(<벽계구곡도>1996). 그 양상은 이제까지의 실경산수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산야는 산세와 물세를 따라 고지도에서 보듯, 전체의 지형을 도해(圖解)하려는 의도의 산물인 듯 ‘배치’되었다. 이를 불러 ‘산수화’라 칭하자고 제안한 사람이 최민이다. 21) 과연 그 시점(視點)은 축(軸)이나 권(卷)으로 된 산수화 구성 방법처럼 위에서 아래로, 혹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어나가는 공간 배치 형태를 띠고 있다. “처음 화면을 대하면 우리 눈은 화폭 전체의 짜임새가 들어오겠지만, 그 사실은 잠시 보류된 채로 차례차례 일정한 방향을 따라 제1곡 수입리(收入里), 제2곡, 이어 제3곡.. 식으로 마치 커다란 지도를 읽듯이, 그림 안에 표기된 정자 이름, 사당 이름들을 따라 옮겨 다니게 되며 부분들을 읽다 보면 그 틀 속에 비어 있던 자리들이 하나하나 채워져 가기도 하고, 심지어는 화면 속의 정경은 화면 바깥에까지 연장되기에도 이른다”는 것이다.22)
이는 팔봉산 그림들이 그러하듯이, 모뉴먼트화하거나 인문화되었거나 재배열된 풍경, 어떤 ‘공간적 무의식’23)을 환기하는 힘이 있는 듯 보인다. 예컨대 “이미 죽어버린 공간의 해석과 회화적 문제틀에 새로운 차원을 도입하는 획기적인 시도”의 하나라는 심광현의 진단에 동의하는 바가 그것이다. 벽계구곡 연작들은 민정기의 이후의 회화들, 즉 2004년 이후의 맥(脈)과 세(勢), 기(氣)로서의 산수경관, 혹은 ‘산수지도’들의 입구에 놓이는 도약대의 그것이라 할 수 있겠다는 것이다.
**16) 심광현, 「동녁골 아침-제3회 민정기 개인전 서문」, 1992.
**17) 심광현, 앞의 글.
**18) 이 글의 후술 절 부분에서의 기술 참조. 민정기의 2004년으로부터 2015년까지의 맥(脈)과 세(勢), 기(氣)로서의 산수경관에 대한 탐구의 시기와 현재에 이어진 시기에서의 인문지리적 회화의 경향을 전관해보면 그러하다.
**19) 이후에는 <팔봉산 당굿도>1996, <팔봉산>1996, <팔봉산1,2,3>1999, <홍천 팔봉산>2003 등으로 계속 심화시켜나가는 양상을 발견할 수 있다.
**20) <벽계구곡도>한지위에 먹,1995, <벽계구곡도3>1995, 28x26.5cm,한지에 다색수인목판, <습작 벽계구곡도>1995, 종이에 연필 크레용, <습작 벽계구곡도>1995, 종이에 크레용, <벽계구곡도>1996, 81x31cm, <벽계구곡도>1996, <벽계구곡도>1997, <구곡의 여름>1997, <벽계구곡도1>1999, 199x80cm, <벽계구곡도2>1999, 74.8x180cm, <벽계구곡도3>1999, 종이에 아크릴릭, <벽계구곡 정자터>1999, <벽계구곡>2007, 81x312.5cm.
**21)
**22) 최민, 앞의 글.
**23) 심광현, 「동녘골 아침-제3회 민정기 개인전 서문」, 1992, p.5.
**24) 백지숙, 「본 것을 걸어가듯이-2004문예진흥원 마로니에미술관 초대전 서문」, 2004.
5. (6회 개인전) “본 것을 걸어가듯이”라는 표제어로 상징되듯 지도와 산수화를, 가시적 세계와 비가시적인 것을 중첩시켜 현대에 소환된 ‘풍수지리’의 유효성을 입증했던 2004년으로부터 현시기까지의 맥(脈)과 세(勢), 기(氣)로서의 산수경관에 대한 탐구의 시기.
맥(脈)과 세(勢)로서의 풍경을 포착하는 기미는 사실 1993년 <실크로드 미술기행전>에서 보인 분할 화면 구성기법25)이나 94년의 <동학혁명군 위령탑 전도>26), <꽃과 화병>, <홍천강 배바위2>, <인왕산> 등의 산세의 맥이나 세를 포착하는 화면들에서 일찍이 산견되는 바 있었다. 나아가 95년의 <파심기>, <작약꽃>, <팔봉산 4>, <벽계구곡도 2, 3>, <팔봉산 당굿도>에는 물론 96년의 <인왕산 호랑이>에 이르기까지 소위 현실이되 현실계를 완전히 떠나 작약의 영, 팔봉산의 영, 파, 호랑이의 영(靈)의 세계인 듯 ‘구상이자 추상의 도안’들로 차츰 변모하는 양상을 목격할 수 있다.27)
그러나 2004년부터의 기와 세, 맥으로서의 산수경관으로 분류하고자 하는 바는 이와는 또 다른, 그리고 양평으로 이전한 초기의 풍수지리적 공간 묘사 시도와도 또 다른 인문적 사회경제사적 층위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여주 신륵사>, <금사면 이포 나루터>, <양수리>, <아차산에서 보이는 풍경>, <압구정> 등의 정선 뗏목의 물길을 따라 답사하듯 주유(舟遊)한 ‘한강오회도’로서의 오경(五境)이 그것이다.
우선 이 그림들은 “90년대 내내 그가 단련했던 산수화 원리와 고지도 형식이 몽타주되어 있는”28) 산수화 지도이다. 작가의 작업실 벽에 경구처럼 써놓았다고 알려진 “본 것을 걸어가듯이”라는 구절은 이들 그림들로 들어가는 데 있어 매우 유효한 열쇠 말이 될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위의 말의 뜻풀이를 위해 문법에 맞게 재배열해 보자. “걸어가듯이 본 것을 그렸다”쯤이 맞으리라. 그렇다는 것은 그리는 자도 한곳에 앉아 그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보는 자도 이제 더이상 한 시점에서 웅크리고 앉아 보게 될 수는 없게 되었음을 즉각 의미하리라. 그렇다! ‘신륵사’와 ‘이포나루터’ ‘양수리’ 등등은 ‘도저히’ 한 지점에서 (나는) 움직이지 않고서는 관람할 수가 없음을 알아차리게 되곤 한다. 그와 함께 강물길을 따라 뗏목을 타고 가며 ‘아 여기 나루터가 있군’ ‘조금 더 가니, 어랏 노래방이 있군’, ‘옳지 강기슭 오솔길이 어렴풋이 보이는 이곳이 예부터의 나루터로 올라갔을 길이었겠군’... 그러니 모든 것, 모든 사물이 동일한 중요성으로 다가오는, 따라서 부차적인 것과 선차적인 것이 시야에서 구별이 안 되는 어린아이의 천진한 눈에서처럼 나침반은 각 사물들마다 방위각을 재조정하느라 바빠지게 되어버리는 양상이라고나 할까... 즉 관람도 ‘걸어가듯이 보아야’ 한다는 것.
오늘날의 지리정보시스템(GIS)이 제공해 줄 수 있는 좌표적 엄밀성과는 완전히 다른, 다양하고 이질적인 것들의 총합으로서의 축도인 것이다. 그 어떤 대상도 제각각 다른 시점을 택하고 있으며, 전체의 톤은 일률로 조율될 필요가 없으며 형(形)들은 균질적일 필요가 없어진 구체적 주체적인 삶의 감수성에 의해서나 포착될 수 있는 민정기의 독특한 회화적 형세가 펼쳐진 것이다.
문제는 왜 그는 이토록 여러 층위의 ‘어울릴 수 없는’ 담론들과 텍스트를 한 폭의 그림 안으로 밀어 넣어 직조해냈을까를 우리가 생각해보는 것이다.
백지숙은 “철골과 시멘트, 조악한 위락시설, 모텔, 양풍의 건물, 고층 건물, 아파트, 거대한 다리, 송전탑들이 나무나 흙, 북한산, 한강, 자연적 절경, 절집, 전통 건축물, 거대한 고목들과 아무런 사심 없이 혼재, 병치, 포개져 있는” 이 사태는 “1970년대 이후 남한의 사회 공간을 형성했던 사회사적 경제사적 변화를 총괄하는 미적 상관물”일 수 있겠다고 말한 바 있다.29) 또는 심광현은 “우리에게 민정기가 질문하고 있다”고 말했던 바, 그것은 그저 관람될 ‘그림’이기만을 넘어서 민정기의 철학적 테제가 제출된, ‘정치적 올바름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분명한 건 공간을 그저 막연한 스페이스(space)가 아니라 “장소, 역사를 중첩해 둔 ‘장소’를 그리고 있는 민정기”30)라는 점만은 집단지성처럼 합의에 이르른 듯하다.
그것은 확실히 벽계구곡을 그리고 있을 때의 ‘초월의 시선’이라기 보다는 ‘저자거리의 떠들썩함’이 들려오는 거리의 시선에 가까운 무엇인 듯하다는 것.
이후로부터, 저자거리를 활보하는 구보씨를, 도시(서울 Seoul)로 입성하는 조선조 평민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은 즉각 장소성, 그리는 곳의 장소성에 집중하게 되었고, 그 장소의 고유성과 개별성을 중요한 요소로 부각하려 한다는 민정기의 의도를 포착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겠다.
2016년의 제8회 금호미술관 개인전과 그 이후의 작업들은 확실히 산이 아니라 ‘길’을 따라서, 강물과 도로를 따라서, 도시의 공간 안으로 파고든다. 그것은 최민의 말로 흡사 ‘유목민적인 시선의 자유로운 이동’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방식으로서이다.31) 그러나 ‘시선의 이동’이라 하여 곧바로 ‘공간’을 상정하는 일은 오판이다. 길을 따라가는 길의 역사 즉 ‘시간’의 자유로운 이동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더 맞다. 예컨대 <임진리 도솔원 복원도>2016나 <임진리 나루터>2016는 단원의 시대를 넘어가 고려 정종 11년(1045년)의 기록을 넘어, 광종 14년(963년)의 기록에까지의 고증을 찾아가며 시간의 길을 거슬러 올라 구성되는 그림이었으며, <유 몽유도원도>2016는 최소한 600여 년의 시간, <박태원의 천변 풍경 1,2,3 연작>2019은 최소 80여 년의 시간이 중첩되어 있는 것이다. 이 상황은 최민의 분석처럼 ‘시간적 차원이 새롭게 회복되는 상황’이고, “마치 투명하고 옅은 수채물감의 터치를 여러 겹 교차시켜 바른 것 같은 짜임새로 인해 새로운 두께와 깊이를 획득한 회화 표면에 의해 더더욱 강화시켜 주는” 결과로 합류된다.32)
그러나 이것이 다는 아닐 것이다. 최민이 예리하게 감지했듯이 중국화의 두루말이 그림(권축)이나 중세의 그림들, 이후 인상주의 미술들에서까지도 왕왕 보이듯이 한 화폭 속에 여럿의 시점이 공존하거나 여러 건축적 요소들 사이에 간극이나 원근법상의 불일치, 상위점들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신화로 남아있는 영역이 있으며, 여전히 그것이 그림이기도 하다는 사실 또한 신화의 하나이기도 하다는 것. 어쩌면 민정기의 새로운 시도는 회화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있는 상황일지도 모르겠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은 너무 큰 화두인가? 앞으로도 20년은 너끈히 새로움을 보여줄 화가이기에 보다 더 세밀히 연구되어야 할 향후의 과제로 둘 수도 있으리라. 단지 우리는 민정기의 이 새로운 시도로부터 화면은 도시와 도시의 역사적 지층을 얘기하고, 한 공간의 시간적 변화를 담아내는 데 보다 능란해질 수 있게 된 결과를 낳았다는 성취를 겨우 확인 중에 있는 것이다.
**25) 1993년 민정기는 <실크로드미술기행전-타클라마칸과 히말라야>라는 이름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전시회에 <알치사원의 볕>, <중앙아시아의 만년설>, <알치의 만다라>, <간다라의 발>, <우루무치의 기구>, <신강지구 소수민족의 평안한 휴식을 위하여>, <신강의 연인>, <파키스탄의 예언자>와 같은 작품을 출품했다. 화면을 분할, 혹은 조립하여 현실의 토대가 된 종교적 영성같은 것을 효과적으로 종합하려는 의지를 드러낸 바 있다.
**26) <홍천군 서석면 동학혁명군 위령탑 전도>1994, 102x81cm, 판지에 아크릴릭.
**27) 이들 계열을 따로 떼어 내 일종의 ‘점이 지대’로서 다루어봄직도 할 것이다.
**28) 백지숙, 「본 것을 걸어가듯이-2004문예진흥원 마로니에미술관 초대전 서문」, 2004.
**29) 백지숙, 앞의 글.
**30) 최종현, 「필자와의 인터뷰」, 2020. 10.
**31) 최민, 「빛, 공간, 길, 민정기의 새로운 풍경화-2016 제8회 개인전 서문」, 2016.
**32) 최민, 앞의 글.
2024년 민정기아카이빙연구팀 일러두기 업데이트
연구범위
민정기(閔晶基, Min Joung Ki, 1949.10.26.)는 1971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졸업전시회에 <유리동물원>을 출품, 1971년 대학동기들과 함께 한 그룹전 《6인회화전》에 발표한 뒤, 작가생활을 시작하였다. 한국 최초의 사립미술관 서울미술관에서 1983년 제1회 개인전《민정기展》(1983.09.09.-09.30, 서울미술관)을 치렀다. 이후, 2024년 제10회 개인전 《민정기 아카이브전 : 놓치지 못하는 풍경》(양평군립미술관, 양평)까지 총10회의 개인전, 단체전은 1971년부터 《제13회 광주비엔날레: 떠오르는 마음 맞이하는 영혼》(광주비엔날레전시관, 2021.02.26.-05.09) 등을 포함하여 2024년 8월 기준으로 413회에 참여했다.
기연구 연구사업 수행기한은 2020-2021년도 수행한 연구범위를 포함하여 2020년 7월부터 2024년 8월까지 전시자료, 작품활동 등을 업데이트하였다.
‘2024 기연구 민정기연구팀 업데이트 연구’는 작품과 전시이력 전수조사를 바탕으로 전작 목록화, 전시이력 상세복원, 작품외자료 및 참고문헌 목록화, 기초자료를 토대로 상세 인터뷰와 후속 자료검증를 통한 작가연보 작성, 작가 협의를 거친 작품제목 최종 확정 등 철저한 조사, 수집, 검증 후 목록화하였다. 2024년 기연구 업데이트 연구에서는 역사적 장소, 인물을 기반으로 제작한 작품이 많은 작가의 특성을 고려하여 전체 작품 영문제명 총검수와 통일화에 주력하였다. 다만 2020년 구축된 아카이브 사이트가 2024년 신규 아카이브 사이트로 이관되어 작품 영문 제명이 대표제명 순서로 등록되지 않고, 기존 다수의 작품 영문제명이 한꺼번에 노출되어 있다.
2020년 수행기간에는 민정기와 관련된 인물들의 심층인터뷰, 작가인터뷰, 작품 등을 편집하는 영상제작을 영상작가 임흥순 감독과 반달 프러덕션에 의뢰하여 민정기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풍성한 참조점을 제공하는 영상 2편을 완성하였다.
2024년에는 수직수평스튜디오에 의뢰하여 민정기작가 작품세계에 대한 심층적인 인터뷰를 담은 영상 1편을 완성하였다.
민정기연구팀은 민정기 작품이미지를 최상의 고화질로 최대한 목록화하기 위해 작품사진 이미지 저작권자에게 이미지 사용허락을 받는 절차에 주력하였다. 작품사진 촬영 사진가 정보는 연구자노트에 기입하였다.
일러두기
1. 작품
1) 목록화 작품 선정기준
1971년부터 2024년 8월까지 민정기 작가가 제작한 작품을 목록화하였다. 전시에 출품된 작품과 작가 소장 미공개 작품 등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전시회 개막 전에 사진 촬영을 한 완성 전 단계 작품을 전시 리플릿, 브로슈어 수록한 초기 작품이미지 일부는 ‘작품’섹션에 목록화하되, 작품제목에 #를 붙여서 최종 완성작과 구분하였다.
연구사업 종료 기한내 시스템 조건에서는‘작품외자료’섹션에 카테고리가 세분화되지 않은 여건을 감안하여, 민정기의 습작, 미완성작은 민정기 작품연구에 참조가 되도록‘작품’섹션에 등록하였다.
2) 작품 분류와 순서
작품 분류는 평면(유화, 아크릴화, 석판화, 드라이포인트, 실크스크린, 드로잉), 입체(종이부조, 도자그림)로 입력하였다.
작품 제작연도 순서대로 ‘원로작가 디지털 아카이빙’사이트 시스템에 등록하였다.
3) 작품 제목 기준
① 기본적으로 전시자료, 문헌자료에 근거하여 작품제목을 정하였다. 상이한 작품제목, 또는 작품제목 미상 작품은 작가와 협의하여 최종 작품제목을 확정하여 본제목으로 기입하였다. 전시자료, 문헌, 소장기관에 따라 작품 제목이 다른 경우, 대등제목으로 병기하고 출처를 기입하였다.
② 영문 작품제목은 전시자료, 문헌에 수록되어 있는 경우, 작가에게 확인을 거쳐 본제목을 확정하였다. 작품제목 영문 번역이 없는 경우, 연구팀에서 번역가에게 의뢰하여 번역한 뒤 작가에게 확인을 거쳐 본제목으로 확정하고, ‘연구팀 번역 및 작가 확인’으로 출처를 기입하였다.
③ 동일한 제작연도에 동일한 제목의 작품이 있는 경우, 작품 구분을 위하여 작가와 협의하여 연구팀에서 작품제목 뒤에 번호나 알파벳을 붙였으며, 번호 표기는 아라비아 숫자로 통일하였다.
④ 작품 섹션 중에서 습작, 에스키스, 스케치 등은 완성작품과의 구분을 위하여 제목 앞에 ‘#’을 붙였다.
⑤ 소설가 황석영의 소설 작품과 관련된 삽화 및 유화의 경우, 창비출판사 편집부 확인을 거쳐서 창비출판사 영문 표기를 따랐다.
⑥ 신문연재 삽화의 작품제목은 작가와 협의하여 신문지면 게재 일자로 통일하였다.
4) 작품 규격 기준
① 전시자료에 근거하여 작가가 최종 확인한 것을 맨 위에 기입하였고, 문헌에 따라 다른 규격이 표기된 경우는 병기하고 출처를 기입하였다.
② 규격을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 작가 확인을 거쳐서 대략 규격을 기입하였고 규격 뒤어 ‘추정’ 표시를 기입하였다.
③ 신문 삽화의 경우 이미지 크기가 대부분 9x14 cm 가량이므로 작가에게 확인한 후 9 x 14 cm (추정)으로 기입하였다.
5) 소장처
① 연구사업 기한내 연락이 가능한 소장처, 작가가 제공하는 개인소장자 정보는 최대한 정보를 확인하여 기입하였다.
② 소장기관, 개인소장자 중 소장품 관련 정보를 비공개를 희망하는 경우 비공개로 하였다.
2. 참고문헌, 작품 외 자료
1) 민정기가 단독으로 다뤄지는 전시자료와 문헌자료
‘원로작가 디지털 아카이빙’ 사이트 시스템에 모두 업로드하기에 분량이 많은 경우, 표지와 목차, 작품 목록, 서지정보를 중심으로 등록하였다.
2) 민정기가 포함된 전시자료와 문헌자료
민정기와 관련된 부분만 선별하여 사이트 시스템에 등록하였다.
3) 추정 자료 이미지
‘참고문헌과 작품외자료’섹션 시스템 상에서 표지 이미지가 누락된 관리번호는 연구사업기한내 실물 자료나 온라인 자료를 구하지 못한 경우에 해당한다. 이 경우는 자료가 생산된 추정 연도나 파악 가능한 최소한의 내용을 연구자 노트에 기록한다.
4) 작품외자료 특이점
민정기연구팀의‘작품외자료’는 현장답사, 역사적인 사료조사를 기초로 작품 연구를 하는 작가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 참조가 되도록 현장답사 사진, 자료 스크랩북 등을 다양하게 등록하였고, 작가의 또다른 예술활동인 연극/영화/드라마 출연 사진을 선별하여 등록하였다.
3. 전시이력
1) 전시정보 확인방법
기본적으로 전시명, 전시날짜, 출품작, 기획자 등 전시에 관한 정보는 전시자료(리플릿, 브로슈어, 도록)에 근거하여 정보를 취합 후 작성하였다.
2) 전시날짜, 출품작 정보 검증
전시 날짜와 출품작의 경우 전시자료에 기재된 내용과 전시 일자, 출품작 정보가 다른 경우 작가에게 확인된 정보를 토대로 작성하였다. 특히 전시자료에 수록된 출품작과 실제 출품작이 다른 경우 작가에게 확인한 정보를 ‘연구자 노트’에 기재하였다.
3) 전시 서문
인사말이나 서문으로 명시된 글을 기준으로 작성하였으며, 전시자료에 수록되어 있는 비평문은 인용문 섹션에 등록하였다.
4. 인용문
2020년 아카이브 사이트에서는 인용문이 별도 섹션으로 구분되었으나, 2024년 신규 아카이브 사이트로 이관되면서 참고문헌 하위로 인용문이 병합되어 옮겨졌다.
전시자료, 참고문헌에 게재된 비평문, 발표된 작가의 글, 정기간행물이나 출판물, 신문잡지에 소개된 전시리뷰 중 작가의 작품세계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부분 인용하였다.
작가의 글의 경우 분량이 길지 않는 한 전문을 등록하였다.
작가가 참여한 대담이나 인터뷰의 경우, 전후사정이 이해되도록 관련 인물들의 대화를 같이 인용하여 등록하였다.
작가가 직접 언급이 되지 않은 전시회 기획글이나 비평문이라도 작가가 참여한 전시회의 주제가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경우, 기획글이나 비평문을 인용하여 등록하였다.
신문이나 잡지 등에 수록된 작가 전시리뷰나 비평문의 경우, 그 내용이 전시홍보 자료를 단순하게 편집한 내용이거나 작가 작품 활동을 잘못 이해하여 작성된 경우, 인용 대상에 넣지 않았다.
5. 작가연보
작가의 출생, 성장과정, 학업 과정, 사회활동, 작업 활동, 가족관계나 교유관계 전반에 걸쳐서 기초자료를 토대로 방문 인터뷰를 진행하고 인터뷰 내용을 녹취하여 그 내용을 다시 구체적인 자료조사로 검증하여 재정리한 뒤 작가에게 재확인하는 방법으로 작가 연대기를 재구성하였다.
작가연보 담당 연구원이 연구사업기한 중 총 17회 작업실 방문하여 기초조사 자료를 토대로 장시간 인터뷰 녹취, 검증 자료조사, 작가에게 정보 재확인 절차로 기존에 노출되지 않았던 민정기의 작업활동, 개인사, 사회활동을 복원하였고, ‘연구자노트’에 작가면담 일자, 정보 확인 출처를 기입하였다.
작가의 전시이력 중 특정 시기 작가활동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경우, 연보에 포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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