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살아 있는 현대미술’이라 칭해지는 박서보는 말 그대로 한국 현대미술이 걸어 온 60년의 세월을 그의 작업 속에 오롯이 담고 있다. 1931년 경상북도 예천에서 출생한 박서보는 1955년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로 대변되는 관전 아카데미즘이 화단의 주류를 점하던 시절, 전쟁을 겪은 인간의 고뇌를 반영한 앵포르멜 운동의 기치를 내세우며 <원형질(原形質)>시리즈를 선보임으로써 화단의 이단아로 등장한다. 이후, 60년대 중반에는 도시화와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한국의 오방색과 기하추상을 결합한 <유전질(遺伝質)> 시리즈를 시도하는가 하면, 텅빈 인간의 모습을 통해 현대인의 삶을 고발한 <허상(虛像)> 시리즈를 발표하고, 1970년대에 이르면 동양적 자연관과 예술관을 반영한 <묘법(描法)> 시리즈를 선보인다. <묘법> 시리즈는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자기를 비워내는 동양의 무위자연 이념을 작업에 담은 것으로 초기의 그것이 연필이나 철필로 선과 획을 반복적으로 긋는 행위에 기초하였다면, 한지를 적극적으로 작업에 끌어들인 1980년대 이후의 작업에서는 종이 스스로 드러날 수 있도록 무한히 반복되는 행위를 통해 바탕과 그리기가 하나로 통합된 세계를 보여준다.
이처럼 <묘법> 시리즈를 통해 한국적 모더니즘을 구현한 박서보는 한국미술의 발전을 위해 《앙데팡당》, 《현대미술제》, 《에꼴 드 서울》 등을 통해 신인 발굴, 현대미술의 중앙집권화 탈피, 현대미술의 선양을 위한 미술계 시스템을 마련함으로써 단색화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러한 측면에서 살필 때, 박서보는 우리나라 미술계 시스템이 정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교육자이자, 기획자이며, 작가로 활발하게 활동하며 우리나라 현대미술의 세계화와 동시대화를 위해 노력한 대표적 작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931. 11. 15 경상북도 예천 출생
학력
1954 미술학부 회화과 학사, 홍익대학교, 서울
2000 명예미술학 박사, 홍익대학교, 서울
경력
1962-97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교수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장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장
1970-80 사단법인 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
사단법인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부회장
1994 재단법인 서보미술문화재단 설립
현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명예교수
전시력
개인전
1962 박서보 원형질전, 국립중앙도서관화랑, 서울
1970 박서보 유전질전, 서울화랑, 서울
1973 개인전, 무라마츠화랑, 도쿄, 일본
1978 개인전, 도쿄화랑, 도쿄, 일본
1981 개인전, 현대화랑, 서울
1983 박서보 종이와 묘법전, 공간화랑, 서울
1991 박서보 회화 40년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1996 개인전, 조현화랑, 부산
2006 Cabinet des Dessins Park, Seo-Bo, 메트로폴 생테띠엔느 근대미술관, 생테띠엔느, 프랑스
2007 박서보의 오늘, 색을 쓰다, 경기도미술관, 안산
2010 박서보, 한국아방가르드의 선구자: 화업 60년, 부산시립미술관, 부산
개인전, 국제갤러리, 서울
2014 박서보: 묘법, 갤러리페로탕, 파리, 프랑스
2016 박서보: 묘법(描法) 1967-1981, 화이트큐브갤러리, 런던, 영국
2019 박서보 회고전: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개인전, 랑엔 재단, 노이스, 독일
2021 박서보: 묘법, 샤토라코스테, 르퓌생트레파라드, 프랑스
단체전
1970 엑스포 70 한국관, 오사카, 일본
1975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 흰색, 도쿄화랑, 도쿄, 일본
1977 한국 현대미술의 단면, 센트럴 미술관, 도쿄, 일본
1992 자연과 함께: 한국 현대미술 속에 깃든 전통정신, 테이트갤러리 리버풀, 리버풀, 영국
2012 한국의 단색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15 제56회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전 DANSAEKHWA, 팔라조 콘타리니 폴리냑, 베니스, 이태리
외 개인전 및 단체전 다수
소장처
리움삼성미술관, 서울 (1976, 1981, 1993, 2011)
후쿠오카 아시아미술관, 후쿠오카, 일본 (1977)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1979, 1983)
도쿄도현대미술관, 도쿄, 일본 (1984)
오하라미술관, 구라시키, 일본 (1986)
부산시립미술관, 부산 (1998)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2001)
FNAC(프랑스 국립현대미술기금 콜렉션), 파리, 프랑스 (2007)
구겐하임 미술관, 뉴욕, 미국 (2014)
엠플러스 미술관, 홍콩, 중국 (2014)
MOMA, 뉴욕, 미국 (2015)
시카코 아트 인스티튜트, 시카고, 미국 (2015)
K-20, 뒤셀도르프, 독일 (2020) 외 국내외 다수
수상력
2015 40주년 기념시각미술상, 허쉬혼 뮤지움, 워싱턴 D.C., 미국
2018 아시아 아츠 게임즈 체인저상 수훈
2021 금관문화훈장 수훈
박서보와 한국현대미술: 색채로 드러나는 시대성
기혜경(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Ⅰ. 들어가는 말
박서보가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갖는 위치는 독특하다. 작가이자, 교수, 미술협회 이사진으로 활동하였다는 것 외에도 큐레이터 제도가 정착되기 이전 그는 미술계에서 문화기획자로 탁월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일인 다역의 이와 같은 전방위적 활동으로 인해 그를 제외하면 한국현대미술사의 중요부분 기술이 불가능할 정도로 박서보는 우리나라 현대미술을 견인하는 역할을 수행하여 왔다. 관전인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를 주도한 아카데미즘과 재야 모더니즘으로 기존의 화단이 양분되어 있던 시절, 화단에 새롭게 등장한 그가 행했던 일은 기성화단의 벽을 허무는 것이었다. 그것은 전위의식을 바탕으로 시대정신을 드러내는 작업세계를 모색하는 것이거나, 해외전을 통해 대안을 모색함으로써 미술계에 새로운 활동의 장을 제공하는 것이었으며, 현대미술의 확산과 정착, 발전을 위해 후학양성, 전시회 조직 등과 같은 교육이나 문화행정까지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것이었다. 《앙데팡당》, 《현대미술제》, 《에꼴 드 서울》 등은 이러한 활동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작가이자 교육자이며 기획자이자 문화행정가이며, 화단의 리더로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박서보에 대한 평가는 총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며 작가로서의 박서보에 한정되고 있다. 더 나아가, 그 또한 주로 <묘법 Ecriture> 시리즈를 중심으로 논의됨으로써, 그의 전방위적인 활동을 아우르는 총체적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저간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본고는 작가의 디지털 아카이브와 연동되어 집필되는 것으로, 한국 현대미술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작가로서의 박서보에 주목하고,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연구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한국의 ‘살아 있는 현대미술’이라 칭해지는 박서보는 말 그대로 한국 현대미술이 걸어온 60년의 세월을 작업 속에 반영하고 있는 작가이다. 박서보는 2차 세계대전 후, 세계 화단을 주도한 표현적 추상의 영향 속에서 민족 상잔의 비극을 겪은 인간의 고뇌를 앵포르멜 작업을 통해 드러내는가 하면, 전쟁의 기억이 희미해지는 60년대 중반 도시화와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기하추상을 시도하기도 한다. 또 한, 무엇을 그릴 것인가의 문제에서 벗어나 어떻게 그릴 것인가라는 회화 본연의 문제로 천착해 들어감으로써 자신만의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현한 <묘법>시리즈를 완성한다. 박서보의 화업을 대변하는 <묘법>은 시기에 따라 재료와 작업방식에 변화를 보이며 박서보 작업의 근간을 이룬다. 동양적 자연관과 예술관을 작업을 통해 구현함으로써 한국적 모더니즘의 전형을 만든 것으로 평가되는 박서보의 화풍 변화를 총체적으로 다룬 본격적인 글이 부재한 가운데, 본 논문은 한정된 시기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하기보다는 그의 작업 전체를 조망할 수 있도록 작업시기 전반을 대상으로 한다. 더 나아가, 그의 작업을 색채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봄으로써, 기존 연구와는 차별화된 각도에서 살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박서보의 작업에서 색채가 함의하는 동시대적 의미를 살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Ⅱ. 조형 실험과 포름의 변형
6.25전쟁 이전 홍익대학교 동양학과에 입학하였던 박서보는 동양화과 교수들이 부산 피난학교로 내려오지 못하자 서양화과로 전과한다. 이후, 박서보는 《홍대 미술학부 전람회》, 《6.25 4주년 미협전》 및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에 박재홍(본명)으로 작품을 발표하면서 화단활동을 시작한다. 이 시기 그의 화풍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의 <양지>(1955)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칼칼한 질감이 두드러지는 화면에는 점차 형태가 단순화되어가는 두 인물이 앉아있는데, 이들은 표현적인 굵고 거친 선을 통해 윤곽지워져 있다. 50년대 재야화단의 구심점을 형성한 “신사실파”풍을 따르는 이 작품은 같은 해에 제작된 <여인좌상>(1955)과 비교할 때, 대상이 단순화되어가는 모더니즘 경향을 보인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많은 차이를 드러낸다. 한복을 입은 여인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여인좌상> 은 날카로운 선과 분할된 화면 등에서 당시 화단에 수용된 입체주의의 영향을 보여준다. 특히, 치마 하단과 얼굴 및 입술에는 진하고 선명한 색채가 가해져 화면에 생기를 주고 있는데, 이처럼 화면에 균형감을 주며 화면 전체를 활성화시키는 색채사용은 이후에도 지속되는 색채에 대한 그의 예민한 조형감각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1) 한편, 표현적 경향을 드러내는 <양지>와 이지적인 화면 분할을 축으로 하는 <여인좌상>이 같은 해에 제작되었다는 점은 당시 우리 화단의 처한 특수한 상황을 반영한다. 해방 이전까지 우리나라에 유입된 서양미술사조는 식민지 본국이었던 일본을 통해 번안되어 제한적으로 유입되었다. 그러나 해방과 더불어 그 통로가 직접적이며 전면적으로 확대됨으로써, 1950년대 우리 화단에는 서구의 거의 모든 사조가 한꺼번에 유입되며 모색기를 거치게 된다. 서구미술사의 조형 논리로는 양립할 수 없는 표현적 경향과 이지적 경향이 동시에 구현되는 것은 조형원리에 대한 이해를 바탕한 것이라기보다는 형식적인 조형실험 차원에서 서구미술사조가 수용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박서보뿐 아니라 당시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바, 이러한 의미에서 1950년대는 박서보는 물론 우리 화단이 새로운 모색의 시기에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Ⅲ. 전쟁의 폐허와 검은 추상
미술사에서 1950년대 후반은 재야와 젊은 세대가 중심이 되어 시대에 부합하는 새로운 화풍을 모색해 나가던 변혁의 시기였다. 당시 미술계의 유일한 등용문이자 주류 화단의 중심을 차지하던 《국전》은 아카데미즘화한 리얼리즘 경향이 주도하고 있었으며, 미술계의 고질적인 반목 구조가 투영됨으로써 분열의 양상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때였다.2) 《국전》이 보여준 난맥상은 그것과 거리를 두고 있던 모더니즘 경향의 재야세력과 새롭게 부상하기 시작하던 젊은 작가들로 하여금 《국전》에 대항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이 시기, 박서보는 문우식, 김충선, 김영환과 더불어 《4인전》을 결성하고, 반국전 선 언을 주도한다. 그는 반국전선언을 통해 “우상같은 기성”, “기성에 대한 학살”과 “처형을 각오하고 냉소”하는 “일체의 관념청산”과 “파괴정신”을 피력하고 있는데,3) 이는 그가 기존 화단에 대항하는 아방가르드 의식에 기초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 한편, 반국전 선언이 드러낸 시대정신과 아방가르드 의식에도 불구하고 박서보가 실제 전시를 통해 보여준 작업은 앞서 살펴본 경향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년대 후반 이제 막 활동하기 시작한 신진 작가들이 《국전》의 권위에 도전하며 반국전 선언을 주도하였다는 사실은 이전과는 다른 미술계의 흐름이 시작되고 있음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4)
한편, 박서보의 화풍이 실질적으로 큰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58년 개최된 제3회 《현대미술가협회전 (이하 “현대미협전”)》5)부터라고 할 수 있는데, 당시 이 전시는 “스스로 첨단을 걸으며 전위를 부르짖고 비형상주의를 자처하는 젊은 세대의 전위적 활동” 이 드러난 것으로 평가되었다.6) 이 전시회에 박서보는 <회화 No. 1 Painting No.1>, <회화 No. 2 Painting No.2>, <회화 No. 3 Painting No.3>을 출품한다. 이중 <회화 No. 1>은 외견상의 유사성으로 인해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의 드리핑 작업과 자주 비교된다. 박서보 스스로도 미군 군화발에 묻어 들어온 앵포르멜의 영향을 이야기하고 있기는 하지만,7) 박서보의 작업은 안료의 드리핑보다는 형체의 제거에 주안점을 둠으로써 문지르고 닦고 지운 물감의 흔적이 캔버스를 채우고 있다는 점에서 잭슨 폴록의 그것과는 변별력을 보인다. 한편, 검은색이 주조를 이루는 <회화 No. 1>은 부분적으로 선명한 노랑, 파랑, 주황 등 이 사용되어 화면에 리듬감을 주고 있다. 이처럼 화려한 색채의 사용을 통해 화면에 생동감을 주는 방식은 이전 시기부터 이어지는 박서보의 조형감각을 반영한다. 이처럼 <회화 No. 1>에 서 살필 수 있는 것과 같은 비형상주의는 앵포르멜이라 명명되며,8)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급속하게 퍼져나가기 시작한다.9)
박서보가 1950년대 후반 보여준 이와 같은 작업경향은 ‘세계 청년작가 파리대회’ 참석을 위해 1년간 파리에 체재하는 동안 변화하게 된다. <회화 No. 1>로 대변되는 작품군이 드리핑 기법을 주로 사용한 잭슨 폴록의 미국식 추상표현주의와의 친연성을 보여주고 있다면,10) 파리체재 시기 박서보의 화면은 진득한 점액질과 비미술적인 일상의 재료를 화면에 도입하여 마티에르를 강조하는 유럽식의 앵포르멜 경향으로 이행된다. <원형질> 연작으로 칭해지는 이 시기의 작업은 일상에서 나온 오브제를 화면에 태워 붙이거나 안료를 나이프로 거칠 게 펴 바르는 등의 방법을 통해 이루어진다. 부조처럼 두껍게 쌓아 올려진 윤곽선을 특징으로 하는 이 시기의 작업은 화면 위에 형태를 쌓아 올린 후 다시 팔레트 나이프로 깎아 내리거나 쓸어내는 과정을 거치거나, 표면에 마대를 붙인 후 분출구 같은 구멍을 부분적으로 만들어 마 티에르를 줌으로써 완성된다.11)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제작된 검은 형태는 마치 상처입은 인체를 연상시키며 캔버스의 검은 화면을 배경으로 서서히 떠오른다. 진득한 점액질, 변형된 인체에 가해진 찢기고 태워진 흔적, 두껍고 거칠게 칠해진 물감층, 검은색이 주도하는 화면은 말 그대로 폭력 이후의 풍광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이 시기의 작가의 화면을 주도하는 검은색은 박서보의 작품뿐 아니라 4월 혁명을 주제로 삼은 김영주의 <검은 태양>이나, 정창섭의 <흑의 생태>및 윤명로의 작품 등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12) 기존 화단에 대항하며 전후의 상황에 대한 시대인식을 가지고 등단한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발견되는 이러한 현상은 검은색이 단순히 작품의 조형적 요소를 너머 사회․문화적 의미를 함의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실제로 오광수는 <원형질> 시리즈의 화면을 주도하는 검은색에 대해 “검은 피부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처절한 극한 상황을 가장 적절하게 표출해 준 것으로, 침묵의 외침이자 한 시대의 각혈”13)이라고 규정한다. 더 나아가, 박서보 스스로도 “대량학살, 집단 폭력으로부터의 희생, 정신적 핍박, 부조리, 불안과 고독 그리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암담함 속에서 자폭하듯 그렇게 결행한 산물”14)이 이 시기의 작업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당시 해외평론 역시 박서보의 <원형질>시 리즈에 대해 ‘절규하는 인간의 영상’, ‘죽어가는 사람의 외마디’, ‘검은 숨결이 헐떡거리는 인간상의 표현’ 등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여 분석하고 있다.15) 이는 <원형질> 시리즈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을 겪으며 목도했던 인간 존엄성에 대한 질문과 실존주의적 인식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16)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당시 박서보의 <원형질> 시리즈를 주도하는 검은색은 통상적으로 검은색이 함의하는 슬픔, 고독, 애수를 넘어 실존주의를 바탕으로 한 저항적이며 허무적인 상황을 드러내는 기재이자, 인간성에 대한 질문을 드러내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즉, 그것은 전쟁을 직접 경험한 세대의 절규이자, 세상과 기성세대에 대한 항변의 메 타포이며, 동족상잔의 비극이 남긴 상처 속에서 느낀 절망과 방황, 그리고 그 속에서도 살아나가야 하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Ⅳ. 오방색과 만난 기하추상과 팝
60년대 중반을 넘어서며 한국사회는 1차 경제개발(1962~1966)계획의 성공에 힘입어 산업화와 근대화의 가능성을 낙관하게 되었으며, 이제 막 도래하기 시작한 도시화와 산업화를 뒷받침하는 희망적이고 미래주의적인 도시 및 사회담론이 확산되고 있었다.17) 점차 전쟁의 처절한 기억이 희미해지기 시작하였으며, 새롭게 도래할 시대에 대한 기대감이 그 자리를 대체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시기 미술계에서는 앵포르멜로 대변되는 뜨거운 추상 또는 서정적 추상이 그 시효를 다함으로써 새롭게 도래하는 시대에 부합하는 조형 어휘를 개발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1963년과 1965년의 《파리 비엔날레》의 자극을 받아 가시화되기 시작한다. 당시 《파리 비엔날레》에는 알렌 존스(Allen Jones, 1937~ )와 같은 영국의 팝아트, 프랑스의 누보 레알리즘, 그리고 브리짓 라일리(Bridget Riley, 1931~ )로 대변되는 옵아트가 두드러지게 부각되었으며, 다양한 실험미술과 개념미술이 등장하고 있었다.18) 이처럼 확연히 달라진 서구미술의 흐름과 국내의 사회·문화적 환경의 변화는 새로운 조형어휘에 대한 필요성 대두로 이어진다.
박서보에게도 이 시기는 커다란 변환의 시기였다. 앵포르멜 미술운동이 전쟁으로 인한 내적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면, 이 시기의 것은 내면보다는 밖을 향하여 변화 의 흐름에 부응하는 것이자 국제 미술계의 움직임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19) 특히, 직·간접 적으로 연관을 맺은 1963년과65년의 《파리 비엔날레》의 경향은 그의 작품에도 변화의 동인으 로 작용한다.20) 60년대 초반 검은색이 화면을 주도하였다면, 이제 <원형질 No. 18-64>, <원형질 No. 21-65> 등의 작품에서 살필 수 있는 것처럼 검은색을 대신하여 노란색과 붉은색이 화면을 주도하기 시작한다. 특히, <원형질 No. 21-65>의 경우, 형태의 윤곽선은 마치 칼로 자른 것처럼 말끔하게 처리되기 시작하고 가벼운 색채와 얇아진 물감층, 드로잉적인 요소들이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는 세계미술의 흐름이 ‘앵포르멜 이후...(중략)...공업기술과 예술형식을 절충시킨 것과 매스컴 형식의 편집예술, 그리고 감각적인 화면처리’21)에 초점을 맞춘 경향으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박서보의 인식과 괘를 같이한다.22) 이는 작가가 당시 세계 화단의 조류로 자리 잡기 시작한 키네틱이나 옵아트, 팝아트적인 경향에 대해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동시대 사회 환경의 변화와 그러한 변화에 부합하는 새로운 조형언어에 대한 필요성은 그의 작품경향을 추상에서 구상으로, 표현적인 것에서 기하학적인 것으로, 그리고 전쟁의 상흔을 다루던 것에서 대중문화에 근간한 팝적인 경향으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
한편, 이 시기 박서보의 작품은 그가 한국의 전통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작품군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60년대 후반 작가는 샤머니즘에 흥미를 갖고 “굿놀이 혹은 신풀이, 성황당 같은 것”23)에 근거하여 무속화나 민화를 현대적으로 변용하고자 한다. 《무제전(巫祭展)》24)으로 대변되는 이러한 노력은 형식적으로는 《파리비엔날레》를 주도하기 시작한 서구 미술의 새로운 경향을 받아들이면서도, 내용적으로는 한국적인 것을 담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 박서보가 보여준 전통에 대한 인식과 탐구는 박정희 정권의 문화정책과 깊은 상관성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박정희 정권은 통치권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문화정책을 펴나간다. 그것은 박제화된 관제문화를 만들거나 탈정치화된 대 중을 창출하는 것과 같은 소극적 방식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국가주의와 민족문화 담론을 지배 이데올로기화하기 위해 벌였던 애국선열에 대한 조상건립 운동이 대변하듯 박정희 정권의 문화정책은 국가가 적극적으로 문화영역에 개입하여 주도하는 것이었다.25) 이러한 개입은 당 시 화단에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쳐 단청이나 불상 이미지와 같은 민속적, 전통적 소재의 활용이 눈에 띠게 증가하는 현상을 보이는 바,26) 이전 시기 식민주의와 민족주의의 교차점에 서 다루어지던 이들 모티브는 이제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의 원본 혹은 한국 문화의 창조적 에너지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27) 이처럼 군부정권의 정통성 제고를 위해 고안되고 제기된 ‘민족문화 창달’이라는 움직임은 사회·문화적 분위기를 주도하며 서양을 극복하는 통로로서의 동양적인 것과 민족 문화의 중흥을 위한 논의로 이어진다.28) 이와 같은 사회·문화적 분위기는 박서보로 하여금 1960년대 중반 민속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탐구하게 하는 동인으로 작용하며,29) 그 결과 적, 청, 황, 백, 흑의 오방색을 주조로 한 화려한 색채가 기하학적 조형요소 혹 은 팝적으로 해석된 구상적 형체와 결합되기 시작한다.
<유전질> 시리즈는 기하추상은 물론 팝적인 요소를 보이는 구상작업, 조각 및 설치까지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것이다. 10년이 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작가가 보여준 이와 같은 다양성은 그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모색의 과정을 거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우선, <유전질> 시리즈 중, 1960년대 중후반에 제작된 <유전질 No. 1-68>이나 <유전질 No. 4-68>는 기하추상 형식에 전통적인 오방색이 결합된 작업이다. 이들 작품은 적, 청, 황 등의 원색을 통해 화려하고 장식적이면서도 매우 절제된 화면 분할을 보여준다. 앵포르멜 시대의 격정을 넘어서 새롭게 도래한 세계를 인식하고자 하는 태도를 반영하는 이들 작업은 회화적 요소보다는 도안적 요소가 색동의 현란함과 함께 드러나며,30) 화면 구성에 있어서는 기하추상을, 색채 사용에 있어서 표현적인 서정성과 전통을 따르고자 하는 노력이 반영되어 있다. 한편, 이 시 리즈는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처음으로 일본에서 개최된 《한국현대미술전Contemporary Korean Painting》(동경 국립근대미술관, 1968. 7. 19~9.1)에 출품되지만, 당시 현지의 반 응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31) 주로 소재 및 모티브적 차원에서 이루어 진 전통과의 관계 맺기 방식은 전통의 현대적 번안을 내걸었던 작가 스스로에게도 만족스러 운 것은 아니어서, 이 시기 작가는 연이어 개인전을 유보하게 된다.
이후, 박서보는 <유전질> 시리즈 내에서 새로운 시도를 모색한다. 60년대 말 제작된 <유전질 No. 6-69>나 <유전질 No. 7-69-70>과 같은 작품은 이전 시기의 기하추상 형태와는 달리 인체라는 구상성을 확연히 드러내며 색채도 오방색에서 벗어나 스프레이 기 법을 활용하여 매끈한 화면의 팝적인 색채를 드러내고 있다. 1970년에 개최된 박서보 개인 전에 대해 “오프아트적인 밝고 강한 각종 원색과 기술적으로 수련된 선”, “옷만 있고 사람은 없는 허상의 이미지”, 그리고 “기하학적인 구도, 혹은 현대적인 시각으로 잡은 현실의 일각” 등으로 평문이 이루어져 있는 것과,32) 작가 스스로도 “추상과 사실이 함께 어우러진 몽타주 형식의 작품을 제작하며....(생략).... 사람 살해자, 유괴범, 인공위성 등 뉴스에서 얻은 주제” 로 작업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는데서 확인할 수 있듯이,33) 작가는 현대의 대중문화와 그러 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화려한 색채를 이용하여 신구상, 옵아트, 팝아트가 공 존하는 형태로 풀어내고 있다. 특히, 이 시기에 제작된 작품 중 실체없는 인간의 모습을 입 체로 다룬 <허상>34)시리즈에서는 <원형질>시리즈에서 보여주었던 인간 실존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 대신 차가운 메커니즘이 이를 대체하고 있다.35) 이 작업은 이후 김수근의 요 청으로 1970년 오사카 만국 박람회《EXPO '70》의 한국관에 <허의 공간/유전인자와 공 간>이란 이름으로 수십 개의 작품이 하늘을 향해 뛰는 모습으로 구현된다. 내용적으로는 달착륙(1969)과 스텐리 큐브릭(Stanley Kubrick, 1928~1999)의〈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2001: A Space Odyssey)〉(1968)에서, 그리고 형식적으로는 조지 시걸(George Segal, 1924~2000)의 작품에서 영감받은 이 작품은 스프레이 분사 방식을 통해 명확한 윤곽선, 매끈한 끝마무리를 특징으로 하는 팝적 경향을 드러내며, 산업사회의 기계미학과 달착륙으 로 대변되는 우주시대의 무중력을 표현하고 있다.36) 이처럼 작가의 작업 세계에서는 이례 적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짧은 시기 이루어진 이 작품들은 새롭게 도래하고 있는 과학발달과 산업사회, 그리고 그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인식을 작품화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가 담겨있다.
Ⅴ. 그리기에 대한 물음과 수행의 그리기: 전기묘법37)
박서보는 끊임없이 작품을 대하는 태도를 고민하는 작가이다. <유전질>시리즈의 작품이 ‘무엇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의 문제에 천착한 것이었다면, <묘법>으로 칭해지는 시 리즈를 통해 작가는 ‘무엇을’을 보다는 ‘어떻게’ 그릴 것인가라는 회화의 근본문제에 주목하 기 시작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작가가<유전질> 시리즈에서 전통과의 관계맺기 방식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깨닫게 된 작업에 대한 태도와 연결되는 것으로 그를 모더니스트적인 태 도에 천착하게 하는 한편 그의 작업이 모더니즘과는 다른 측면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어떻게 그릴 것인가를 묻는 과정에서 도달하게 된<묘법>은 글자 그 대로 글을 쓰듯 ‘그리는 방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박서보 작업의 근간을 이룬다.38)
<묘법> 시리즈 중 초기작업은 캔버스에 흰 안료를 바른 후, 그 위에 연필을 이용하여 드로잉 한 것으로 흔히 ‘연필묘법’이나 ‘전기묘법’이라 칭해진다. 안료 위에 연필을 이 용하여 선긋기를 하는 이 작업은 끊임없는 반복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연필묘법 은 안료의 상태와 선의 운용에 따라 세분화될 수 있는데, 우선 <묘법 No. 1-72~73>에서처럼 화면에 바른 안료가 마른 후, 일정한 방향성을 지닌 반복적인 선이 바탕의 선이나 격 자구조와 어우러져 나타나는 것이 가장 이른 예이다. 이후, <묘법 No. 15-76>처럼 안료가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선긋기가 진행됨으로써 점차 화면에는 자유로워진 선과 연필의 필압 에 의해 밀려나간 안료가 축적되어 간다. 이제 그의 화면은 단순한 그리기를 넘어 작가의 행위가 젖은 안료와 만나 이루어 내는 물리적 현상이 흔적으로 축적되는 행위의 장이 되기 시작하며, 그를 통해 화면은 구조화된다.39) 이러한 작업방식은 다시금 70년대 후반에 이르 면 <묘법 No. 41-78>(1978)처럼 작가의 신체호흡과 리듬감을 반영한 리드미컬하며 유연 한 선이 그리고 덧바르고 다시 그리기를 반복하는 화면위에 중첩되어 가는 가운데, 이제 선 은 여러 겹의 층위를 이루며 화면 속으로 수용된다.
이처럼 70년대 박서보의 연필 <묘법>의 중심요소는 캔버스 위의 흰 안료와 작가가 수행하는 반복적인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리기의 근본에 천착한 작가가 ‘어떻게’ 그릴 것인가의 문제를 고민하며 찾아낸 이 방법을 작가는 ‘체념’이라 칭한다. 아이의 글씨연습을 지켜보며 깨닫게 되었다는 ‘체념’의 태도는 작품을 제작함에 있어 무엇을 만들어내고자 더해가기 보다는 지우거나 비워가는 태도를 의미하는데,40) 이러한 태도는 단적으로 연필 <묘법> 초 기에 안료가 마른 뒤 드로잉하던 것에서 점차 안료가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드로잉하는 것으로 진행되는 과정에도 반영되어 있다. 즉, 마른 안료 위에 연필 드로잉을 함으로써 표면 위에 연필선이 더 얹혀지게 하기보다는 안료가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드로잉을 행함으로써 안료를 밀어 지워내는 과정으로의 이행자체가 체념의 태도를 담지한다. 이는 그려넣기보다는 덜어내고 지워가는 체념의 과정이자, 자신을 비워가는 수신과 비움, 구도의 과정으로 연 결된다. 이러한 수행적이면서도 반복적인 행위를 통한 화면의 구조화를 이우환식 용어를 빌 어 해석하자면 반복적인 행위 자체가 작업의 구조를 발현시키는 것으로, 회화의 물리적인 지지체였던 캔버스는 이제 작가의 반복적 신체 행위와 합일을 이루는 만남의 장으로 바뀌게 된다.41)
한편, 이와 같은 초기 <묘법>에 대한 작가의 인식 변화를 살피는 것은 흥미롭다. 우선, 1973년 개인전을 앞두고 자신의 작업에 대해 작가는 이조의 도공들이 아무 생각 없 이 물레를 돌리듯 자신 역시 캔버스 위에서 직선을 무수히 그려나감으로써 <묘법>을 얻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42) 이는 작가가 이조 도공들의 제작방식인 무위의 행위와 자신의 반 복적인 작업방식을 동일선상에 놓고 행위의 반복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 지만, 1977년 인터뷰에서 작가는 행위보다는 색채에 주목하여 자신의 작업을 “나는 반색채 주의자가 아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다색채를 거부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내가 색채에 대 한 관심을 표명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반색채주의적인 태도를 취한 결과라기보다는 오히려 나는 회화에의 관심을 색채 이외의 곳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왜 흰 그림을 그리는가라는 스 스로의 질문에 대해 소박한 자연관 때문”43)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작가의 인식변화는 73년의 그것과 연장선상에 있긴 하지만, 그 주안점이 반복적인 무위의 행위에서 백색이 라는 색채와 백색이 함의하는 자연관을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1975년 동경화랑에서 개최된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 흰색 전》(동경화랑, 1975. 5. 6~5. 24)으로부터 크게 영향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 전시는 당시 우리화단에서 진행되고 있던 새로운 미술 경향을 일본인의 시선으로 재구성한 전시였다. 이 전시를 주최한 동경화랑의 야마모토 다카시(山本孝, 1920-1988)사장은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한 해에도 서 너 차례 한국을 찾아 도자기, 민화, 목가구, 초상화 등 고미술품과 청전 이상범, 소정 변관식 등 한국 근대 동양화가들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구입해 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야마모토 사장은 일제 강점기 조선 총독부가 발간한 연구 보고서에서 말하는 바처럼 한국 사람들이 흰색에 대해 빼어난 감각을 가지고 있음은 물론 그러한 감각이 이조백자 에서부터 현대미술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느끼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 흰색전》을 기획한다.44)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45)의 민예미로 대변되는 소박한 자연관과 백색의 미학에 큰 영향을 받고 있는 이 전시가 드러내는 태도는 전시도록에 게재된 글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일은 전시도록의 글을 통해 우리민족에게 있어 백색은 정신이며 우주이자 자연이라고 규정한다. 그는 우리에게 있어서 백색은 단순한 하나의 빛깔 이상이며, 빛깔이기 이전에 하나의 정신이라고 파악한다. 더 나아가, 그것은 색이기 이전에 우주를 뜻하는 것인데, 이러한 이유로 우리 민족에게 있어 백색은 자연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 고 설명하고 있다.46) 백색을 색 이전에 우리의 자연관과 정신성을 담고 있는 것으로 파악한 이와 같은 논조는 또 다른 필자인 나카하라 유스케(中原佑介, 1931-2011)의 글에서도 유사하 게 드러난다.47) 이 전시를 통해 논의되기 시작한 이러한 점은 이후 한일양국에서 백색이 우리 나라의 전통과 연계되어 재조명되는 계기를 제공한다.
한국 현대미술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해외전으로 기록된 이 전시를 통해 백색으로 대변되는 단색화는 1970년대 한국 현대미술의 주류로 확실히 자리매김하게 된다. 더 나아 가, ‘백색’은 단순한 조형적 요소에 그치지 않고 한국적 정서와 민족성을 대변하는 색이자 우리의 자연관을 담고 있는 것으로 공식화된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박서보의 <묘 법> 역시 작업 초기와는 달리 백색의 바탕과 그것이 갖는 민족적인 의미와 상징이 강조되기 시작한 것이다.48) 이처럼 행위를 중시하던 것에서 색채를 중시하는 것으로의 변화는 비단 박서보 개인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70년대 활동한 ‘단색화’로 통칭되는 작가들 의 작업에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틀이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대부분 반복적인 작가의 수행성이 강조되며 수신과 비움을 추구한 작업들임에도 당시 미술계는 결과물로서의 단색에 주목함으로써 이들 작품을 칭하는 명칭조차 “단색화 혹은 모노크롬”으로 귀결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수신과 비움을 중시하던 작업초기의 태도로부터 민족성과 자연관을 담고 있는 백색을 강조하는 것으로의 변화 및 그에 따른 ‘단색화’로의 명명은 70년대 우리 사회의 문화지형도를 살필 수 있게 한다. 군부독재 정권인 제3공화국은 정권의 정통성확보를 위한 문화예 술부흥계획에 따라 문화예술계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식민사관 극복을 위한 국학이 진흥되고 전통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49) 이 시기 미술계에서도 전통을 어떻게 현대화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논의들이 이루어졌는 바, 이러한 논의를 통해 전통을 작업의 소재로써 이용하기 보다는 ‘어떻게’라는 방법론적인 문제로 귀결되며, 그러한 일군의 작가들이 현재 ‘단색화’로 명명되고 있는 작가들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찾 아냈던 방법은 끊임없는 반복을 통한 수신과 비워냄을 화두로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집단적 정체성은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의 미로 대변되는 식민문화사관에 익숙한 일 본 미술계에 의해 재단됨으로써 결국 행위에 대한 관심에서 색채에 대한 관심으로의 중점의 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와 같은 왜곡된 전이에는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야나기 무네요시의 문화사관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던 움직임과 궤를 같이하며, 더 나아가 해외에서의 평가를 국내의 그것보다 우위에 놓는 미술계의 상황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Ⅵ. 한지50)의 발견: 후기 묘법
박서보의 <묘법> 시리즈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 기준은 한지의 사용여부라 할 수 있다. 박서보는 매체로서의 한지의 물성을 새롭게 발견하면서 <묘법> 시리즈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다. 그가 후기 <묘법>의 시작을 알리는 한지를 발견하게 된 계기는 동양 종이의 우수성과 유구한 전통을 알리기 위해 기획된 《현대종이의 조형전: 한국과 일본》(국립현대미술관, 1982. 12. 13~12. 27)에 구로사키 아키라(黑琦彰, 1937~ )의 권고로 작품을 출품하면 서이다.51) 물론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 흰색전》에 출품한 권영우의 작업을 통해 한지의 가능성을 알고는 있었지만 자신의 작업에 직접 한지를 접목시킨 것은 이 전시를 준비하면서부터이며,52) 이에 좀더 근원적 토대를 제공한 것은 70년대부터 민족주의 담론에 의거하여 이루어진 한지의 미학화 작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970~80년대를 거치며 우리사회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순차적 성공으로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를 겪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는 스스로를 돌아보는 정체성 찾기 작업이 전개되는데, 이는 정권차원의 정통성 확보를 위한 민족 중흥 정책과 맞물리게 되며, 미술계 역시 전통 종이인 한지에 대한 미학화 작업이 이루어진 다. 특히, 한지는 서양 종이와 달리 안료를 흡수하여 일체화해 내는데 이러한 특성은 자연의 일부로 살고자 하는 한국인의 자연관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되었고, 더 나아가 한지가 갖는 빛과 소리를 투과하는 특성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태어나게 하는 어머니로서의 대지이자 자연으로 이해되며 상징화된다.53) 이처럼 당시 미술계는 전통의 중흥이라는 사회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한지를 민족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재료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이러한 문화적 분위기는 박서보로 하여금 한지에 대한 실험을 가능하게 한다.
한지로 재료를 전환한 이후의 초기 작업은 유성 안료에 연필을 이용하여 드로잉한 연필 <묘법>과 상당한 유사성을 보인다. 하지만, 연필 <묘법>과는 달리 한지를 이용한 경우, <묘법 No. 136-83>(1983)의 화면이 보여주듯 물기를 머금은 한지에 가해진 연필의 필압이 젖은 한지의 저항에 의해 자유로운 선묘를 그려내지 못하고 중단된 스트록과 밀린 질료의 응어리로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그린다는 의식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던 연필 <묘법>과는 달리 한지를 사용한 작업의 경우, 그린다는 것과 물질의 길항이 처절할 정도로 치열하게 드러나게 된다.54) 한지의 이와 같은 물성은 작가로 하여금 <묘법 No. 11-83>(1983)에서와 같은 새로운 실험을 모색하게 함으로써, 80년대 초반 무질서한 화면으로 드러나던 한지작업은 80년 대 중반을 넘어서며 화면 위에 일정한 질서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이제 <묘법 No. 352-86>(1986)처럼, 반복적인 행위의 결과물로서의 화면은 짧게 토막진 빗살무늬를 이루며 올오버(all-over)적 화면으로 전개됨으로써 방향성과 리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한지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던 80년대 전반기 작업이 연필을 이용한 선 긋기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며 그린다는 행위와 물질 사이의 긴장관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면, 이제 작가는 화면 위에서 한지를 밀어내는 반복적인 손의 행위와 그 결과물로서의 흔적을 작업화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한지는 단순한 바탕이 아니라 무한 반복되는 행위를 화면 구조로 일체화시켜 드러내는 기재로 작동함으로써 바탕과 그리기는 하나로 통합된다.
흔히 ‘지그재그 <묘법>’의 시작을 알리는 이 시기의 작품은 화면의 색채에 있어서도 변화를 보인다. 그것은 유성안료를 배제하고 한지의 특성이 그대로 드러날 수 있도록 수 성 안료를 사용하면서 나타나는 변화이다. 전기 <묘법>이 캔버스 위에 주로 유백색 계통의 유성안료를 사용하였다면, 한지를 사용하면서 작가는 쑥이나 장수연(長壽煙) 담배, 먹물 등을 섞어서 만들어낸 자연의 색을 이용함과 동시에 거기에 호분을 섞어 톤을 조절하기 시작한다.55) 한지와 더불어 화면에 도입되는 수성 안료와 호분은 한지가 갖는 침투성과 흡수성을 활용하여 표면 위에 얹혀지는 것이 아니라 한지 속으로 스며듦으로써 작가의 반복적 행위의 결과물인 화면 위 마티에르로 일체화된다.56) 이러한 결과는 한지가 그 어느 물질보다 유연하고 자율적인 재료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작가는 한지의 이와 같은 특성을 이용하여 반복적 행위를 매개로 화면을 육박해 감으로써, 작가의 행위와 종이의 물질성이 일체화되어 작품 속에 녹아들게 한다.57) 이제 한지는 그것 자체가 지지체이자 표면이며, 작가의 행위와 종이의 물질성이 일체화되는 장이 된다.
한편, 한지를 사용하면서 박서보의 화면에는 <묘법 No. 890530-3>(1989)에서 살필 수 있듯이 일정한 크기의 그리드 구조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한지를 물에 불려 젖은 동안 밀어내는 작업을 수행해야 하는 작업의 특성상 작업분량 크기로 한지를 조정함으로써 화면에 그리드가 형성된 것이다. 작업과정에서 비롯되는 이러한 특성은 작가의 행위의 궤적과 작업 과정을 살필 수 있게 하는 한편, 화면 위에 축적된 시간을 드러낸다. 이렇게 축적된 시간은 끝없이 반복되는 수신과 비움으로 대변되는 행위를 통해 예술적 창작이 정신적 수양의 경지로 승화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는 스스로의 존재를 투명한 상태로 무화시킴으로써, 자연을 완전히 받아드리는 한국의 자연관을 반영하는 것이며,58) 재료와 제작 방법, 결과물로서의 작품이 합목적적으로 어우러진 경지라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것은 작가가 어떻게 그릴것인가 라는 회화 본연의 문제에 천착하면서도 주체와 객체의 분리를 전제로 하는 서구식 모더니즘에 서 한 발 떨어져 무위의 행위를 통해 물아일체의 한국적 자연관을 투영함으로써 모더니즘을 초극함은 물론 예술창작을 내면수양의 과정으로 승화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특유의 미학을 통해 박서보는 서구의 모노크롬과는 변별력을 확보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한국적 모더니즘의 전형’59)을 정립하게 된 것이다.
90년을 전후하여 박서보의 화면은 지그재그의 복잡한 패턴에서 벗어나 <묘법 No. 950325>(1995)처럼 선의 구성이 단순화되는 경지로 나아간다. 흔히 ‘직선 <묘법>’으로 불리는 이 시기의 작업은 이전시기 지그재그 <묘법>에서 사용하던 제작 방식을 변용한 것으로 안료를 한지에 적신 후 막대기로 긁어 직선모양의 선들이 표면보다 튀어나와 보이게 하는 테크닉을 통해 길고 두툼한 선들을 화면 위에 요철지게 만드는 방법이다. 반복적인 밀어 내기의 행위를 통해 화면 위에는 한지가 밀려나 만들어진 골과 그 골에서 밀려난 부산물이 만들어낸 돌출된 선이 형성되며, 이러한 선들은 수직의 띠를 이루며 화면 전체에 구축된다. 더 나아가, 이 시기의 작업은 화면의 형태나 색채사용면에서도 한층 절제되고 금욕적으로 드러난다. 텍스쳐의 응축과 교직이 줄어든 반면, 수직적 패턴의 전면성과 반복성은 엄격성을 더하고 있다. 반복적인 행위의 순수성만이 화면에 남겨지게 되며, 그것은 그리면서 동시에 그려지지 않은 상태, 또는 그려지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려진 상태를 드러낸다.60) 이러한 상태는 작가가 수직의 띠 작업을 시작하면서 작품제작을 위해 드로잉작업을 병행하여 시작하는 것에도 반영되어 있다.61) 이전 시기의 작업이 즉흥적인 연필 드로잉에 의한 것이거나 주변과의 관계를 생 각하며 한지를 밀어냄으로써 화면을 지그재그로 구조화하는 것이었다면, 이제 화면은 철저하게 계획된 드로잉에 따라 만들어지고 축적된다. 90년대 이후의 선긋기 한지 작업이 보여주는 이러한 특징은 무심한 듯 보이지만 철저하게 사전 구상에 의해 구도를 잡은 후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조화로움과 정제됨을 드러냄과 동시에 철저하게 계획되었지만 화면 위에서는 결국 반 복적인 행위의 순수성만이 남게된다. 한편, 이 시기의 작업에 이르면 화면의 색조는 다시 한번 중성화된다. 몇몇 작업에서 색조를 사용하는 시도가 이루어지긴 하지만 이 시기 제작된 작 품은 <묘법 No. 96315>, <묘법 No. 961117>, <묘법 No. 990901> 등에서처럼 거의 흑색의 모노톤으로 이루어진다. 화면을 주도하는 흑색은 세월과 함께 쌓여가면서 만들어진 깊이감을 갖는 자연으로부터 도출된 색으로,62) 우주의 오채를 담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먹색처럼 그의 흑색은 단순히 검은 것이 아닌 주변의 빛과 공기를 흡수하는 심연과도 같은 작용을 한다. 이처럼 이 시기의 작업은 화면을 주도하는 깊이 있는 흑색과 엄격한 수직의 선으로 이루어지며, 이는 그의 화면을 수사적인 경건함과 엄숙함이 주도하는 공간으로 변화시킨다.
2000년을 넘어서며 박서보의 화면은 이전의 가라앉고 중성적인 화면에서 벗어나 훨씬 밝고 다채로운 색채의 스펙트럼으로 변화해 간다. 흔히 ‘색채 <묘법>’으로 칭해지는 이 시 기의 작업은 <묘법 No. 040603>, <묘법 No. 060320>이 보여주는 것처럼 서로 대비되는 색채를 바탕화면과 화면 위 볼록한 수직선 위에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화면 구성은 보는 이의 시점에 따라 다른 효과를 드러낸다. 그의 화면은 마치 옵아트를 보는 것 같이 시점에 따라 다 른 효과를 드러내지만 옵아트가 철저하게 계산된 착시효과에 근거하는 것과는 달리 박서보의 화면은 자연에 가까운 부드러움과 자연스러움을 간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스러움과 부드러움이 배어나오는 아름답고 예민한 화면 앞에 멈추어 서게 하는 이러한 효과는 화면위의 요철과2중의 색채 사용에 의한 것인데, 이 시기의 색채와 관련하여 작가는 자 연으로부터 가져온 ‘치유의 색’이라고 설명한다.63) 즉, 이전시기 박서보가 사용하는 색채가 그것이 담지하는 사회․문화적 맥락과 연계된 것이었다고 한다면, 이제 작가는 그 어느 시기보다 화면 자체가 드러내는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추고 색채를 조율한다. 이는 디지털화된 세상 속에서 상처 입은 현대인들을 위해 위로와 안식처를 제공하고자 하는 소박한 노장의 바람을 드러낸다.
Ⅶ. 글을 마치며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되는 박서보의 회고전을 준비하는 중 개최된 전시에서 미네무라 도시아키는 "구미의 근대회화와는 근본정신부터가 차이가 나는 아시아 민족의 추상회화를 박서보가 만들어내고 있다"며 그의 작업을 평가하고 있다.64) 이는 1950년대 물밀듯이 밀려온 서구 사조를 수용하는 데서 출발한 우리 모더니즘회화가 서구의 그것과는 다른 방식의 모더니즘을 창안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모더니스트적인 태도로 어떻게 그릴 것인가의 문 제와 전통의 계승이라는 문제에 천착한 박서보의 노력이 모더니즘을 초극하여 나름의 정체성을 확보한 것으로 평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주체와 객체를 철저히 분리함으로써 ‘Art for art’s sake’를 지향한 서구의 모더니즘에서 출발한 박서보는 어떻게 그릴 것인가의 방법을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자신이 처한 사회와 시대에 촉수를 대고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동시대성을 담지하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홉스 바움(Eric Hobsbawm, 1917~2012)의 지적처럼 전통은 논의되는 순간 그것을 언급하는 주체에 의해 새롭게 창출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누구에 의해 어떤 의도로 호명된 전통인지는 중요한 관건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살필 때, 60년대 <유전질> 시리즈를 통해 박서보가 호명한 전통이 민속적인 측면이 강조된 오방색이었 다면, 70년대의 <묘법> 시리즈에 이르면 반복적 행위를 통해 자신을 덜어내고 비워나가는 도가적인 태도였다. 하지만, 작가가 강조하였던 이러한 수행성은 야나기 무네요시식으로 해석된 백색의 미학과 연동되며 이해되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전통의 맥락화가 갖는 문제를 재고하게 한다. 한편, 80년대 들어 작가는 전통한지로 재료를 변화시키고 좀더 작가의 수행성에 주목하는 한편 자연으로부터 가져온 수성안료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화면위에서 행하는 행위자체를 화면의 구조와 일체화시키는 물아일체의 경지를 구현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박서보는 시대와의 관계 속에서 때론 전후의 상처받은 영혼을 호명하는 색을 사용하는가 하면, 또 어떤 경우는 민족·민중문화를 매개하는 색을 사용하기도 하며, 또 다른 경우는 색을 염두에 두지 않기 위하여 색을 쓰기도 하고, 자연에 가까이 다가가는 방법의 일환으로 색을 활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박서보에게 있어서 색은 시대상을 반영하게 하는 매개체이자 전통의 현대화를 위한 테제이거나, 민족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상징임을 살필 수 있었다. 그 결과, 박서보는 서양과는 다른 한국적 모더니즘의 한 형태를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이며, 이는 작가가 모더니즘의 기본적인 틀을 공유하지만 끊임없이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시대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화풍을 재규정해 나감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제1부 1954~1956 : 포름의 변형
1950년대 초 화단에 입문한 박서보는 다양한 화풍의 모색기를 거친다. 이 시기는 작가 개인에게 있어서나 우리 미술계 차원에서나 새로운 화풍의 모색기였다. 서양화가 유입된 이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우리 미술계는 일본식으로 변형된 미술양식을 수용하였다. 하지만 해방과 더불어 미술정보가 유입되는 통로가 다변화됨으로써 1950년대 우리미술계는 대대적인 사조의 유입이 이루어지는 한편 다양한 조형적 실험기를 거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 화단에 막 입문한 박서보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이 시기 박서보의 화풍을 살필 수 있게하는 작품으로는 <양지>(1955)와 <여인좌상>(1955)을 들 수 있다. 이 작품들은 같은 해에 제작된 작품으로 서로 상반되는 표현주의적 성향과 입체주의 특성을 드러낸다. 이처럼 한 작가가 상반된 조형감각을 같은 시기에 실험하고 있는 것은 50년대의 많은 작가들의 작품에서 살필 수 있는 것으로, 이 시기의 박서보가 보여주는 이러한 경향은 당시 우리 화단의 시대적 특성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다양성은 그가 이 시기 조형적 모색기를 거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제2부 1957~1964 : 전쟁의 폐허와 검은 추상
박서보는 50년대 후반 전위를 부르짖으며 비형상주의를 주장하는데, 이 시기 작업은 화단에서 ‘앵포르멜’이라고 칭해진다. 이 시기의 대표작 <회화 No. 1>은 형체의 제거에 주안점을 두고 문지르고 닦고 지운 물감의 흔적으로 캔버스를 채운 작업이며, 흔히 폴록의 작업에 비견된다. 하지만 60년대 초반 파리 체재 이후, 작가의 작업은 좀더 유럽식 앵포르멜의 형식에 가까워진다. 비미술적이고 생경한 재료를 화면에 도입하여 표면의 마티에르를 강조하는 이 시기의 작업은 인체를 변형한 형태에 일상에서 나온 오브제를 이용하여 화면을 태우거나 붙이고, 물감을 이용하여 나이프로 거칠게 펴 바르는 등의 방법을 통해 <원형질> 시리즈로 나아간다. 검은색의 형태가 검은 배경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원형질> 시리즈에는 진득한 점액질, 변형된 인체에 가해진 찢기고 태워진 흔적, 두껍고 거칠게 칠해진 물감층, 검은색이 주도하는 화면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데, 말 그대로 폭력이후의 풍광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한국전쟁의 정신적 외상으로 인한 절규와 허무를 드러내는 것이자, 현실에 대한 부정, 전통적 인간 존재 인식에 대한 거부, 더 나아가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과 절망적인 시대 상황을 드러낸다. 이 작품에서 검은색은 단순한 조형적 요소를 넘어 전후 세대의 시대인식과 실존의식을 드러내는 기재로 사용되고 있다.
제3부 1964~1970 : 기하추상과 팝– 오방색과 만나다
박서보에게 이 시기는 커다란 변환의 시기였다. 산업화와 도시화로 변화된 환경에 따라 작가는 작품의 소재 및 주제를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로부터 가져오고자 한다. 이와 더불어 새로운 조형언어를 개발함에 있어 작가에게 영향을 미쳤던 것은 산업화와 도시화, 대중화와 더불어 급변하는 사회에서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전통의 샤머니즘, 전통의 무속화 등이다. 이 시기 작가의 작업은 조형적으로는 서구미술의 새로운 경향을 받아들이면서도 내용적으로는 한국적인 것을 담고자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그의 작업은 추상에서 구상으로, 표현적인 것에서 기하학적인 것으로, 그리고 전쟁이후의 실존적인 작업방식에서 대중문화를 근간으로 하는 작업으로 변화해 간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적, 청, 황, 백, 흑의 오방색을 주조로 한 화려한 색채가 기하학적 조형 요소 혹은 팝적으로 해석된 구상적인 형체와 결합된 <유전질> 시리즈로 드러난다. <유전질> 시리즈는 기하추상은 물론 구상적인 팝, 그리고 조각 설치까지를 아우르는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이들 작품은 산업사회의 기계하학적 측면과 달 착륙으로 대변되는 우주시대의 무중력을 표현하는 한편 급속하게 변화되어 가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불안의식이 드러나고 있다.
묘법 (전체)
‘묘법’은 그 이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무엇을 그리는가를 문제 삼기보다는 그리는 것 자체의 방법적 모색을 반영한 말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박서보는 그린다고 하는 행위와 방법의 문제를 자신이 살아온 시대에 부합하도록 변용시켜 왔다. 70년대 민족담론이 우세한 가운데 동양적인 수신의 방법인 자기 비움의 미학과 더불어 한국적인 색으로 칭해지는 백색을 결합함으로써 한국적인 감수성과 비움을 통한 수신의 경지를 표현하고 있다. 한편, 80년대에 이르러 한지를 작업에 끌어들이면서 민족적 특성을 더욱 강화시킨다. 특히 한지가 갖는 특성에 주목하는데, 그것은 한지가 다른 물성을 흡인하여 포용하고 일체화해 낸다고 판단한 때문이다. 한국인의 자연관을 반영하는 한지의 유연성, 침투성, 흡수성을 이용하여 반복적 행위를 매개로 화면에 육박해 감으로써, 작가의 행위와 종이의 물질성이 일체가되어 화면 위 마띠에르로 드러나며, 화면은 검은 색을 위주로 하는 수도승적인 명상의 공간을 창출하거나 밝은 치유의 색채로 드러나기도 한다.
제4부 1967~1983 : 반복적 행위와 수행의 그리기
박서보는 어떻게 그리는가의 문제에 집중하며 새로운 모색을 시도한다. 이러한 노력은 결국 <묘법>이라 명명된 작업으로 결실을 보게 된다. <묘법> 시리즈 중 70년대에 이루어진 초기 작업은 캔버스에 흰 안료를 바른 후, 그 위에 연필을 이용하여 드로잉 하는 작업으로 흔히 연필묘법이라 칭해진다. <묘법> 시리즈를 구성하는 중심요소는 캔버스 위의 물감이 작가의 수행적이며 반복적인 행위와 만나 이루어 낸 흔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흰색의 안료와 연필의 반복적인 선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이 시기 작업을 작가는 “흰그림”이라 명명하는데, 이 시기의 흰색은 단순한 조형요소로서의 색을 넘어 한국의 소박한 자연관과 연결되며 한민족의 집단 미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작업은 예술창작 행위를 내면수양의 과정으로 승화시키는 특유의 미학을 통해 서구의 모노크롬과는 변별력을 확보하였을 뿐 아니라 ‘한국적 모더니즘’의 전형으로 평가된다.
제5부 1982~90년대 초반 : 한지의 발견
80년대에 들어서며 박서보는 한지에 경도되기 시작하는데, 이후의 작업은 초기의 ‘연필묘법’과 구분하여 ‘후기묘법’이라 부른다. 이 시기의 작업은 한지의 특성을 이용하면서도 현대적인 조형언어를 개발한 시기라 할 수 있다. 반복적인 행위와 그 결과로 빚어진 한지 덩어리들이 화면위에 짧게 토막진 빗살무늬를 이루고 그러한 무늬는 다시 전 화면에 걸쳐 지그재그의 형태로 전개됨으로써 올오버(all-over)적 화면은 방향성과 리듬감으로 역동적이 된다. 이러한 지그재그 방식의 묘법에 이르면 이전 시기 어두운 화면을 대신하여 수성안료를 이용하여 선도 높은 순색을 바탕에 사용하고 그 위의 지그재그 형태에 다시 색채를 가하는 2중의 색채구조를 구사한다. 이러한 2중 구조의 색채는 중성적인 무채색을 고수해왔던 작가가 색채를 통한 새로운 조형성을 실험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제6부 1990년대 초~2000년대 초 : 참선의 선긋기
90년대 초반을 넘어서며 작가는 이전 시기의 작업방식을 계승하면서도 복잡한 지그재그 패턴에서 벗어나 단순화된 선이 주도하는 화면으로 나아간다. 안료를 한지에 적신 후 막대기로 긁어 반복적으로 밀어냄으로써 화면 위에는 표면보다 튀어나온 수직의 선이 요철을 이룬다. 무수히 그어진 엄격한 선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되면서 화면 전체를 덮는 이 시기 작품은 경건함과 엄숙함이 화면을 주도하며 화면에 가해진 검은색은 화면에 통일성을 주는 동시에 조용한 명상의 공간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제7부 2000~현재 : 색을 쓰다
2000년을 넘어서며 박서보의 화면은 이전의 가라앉고 중성적인 화면에서 벗어나 훨씬 밝고 다채로운 색채의 스펙트럼으로 드러난다. 수직선의 마띠에르가 화면을 주도하는 가운데, 서로 대비되는 색조를 바탕과 요철에 적용함으로써 색채는 끝없이 이어지는 화면의 구성을 반영하며 화면위에 안착한다. 이전 시기의 작업에서 색이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선택된 경향이 강하다면, 이제 작가는 그 어느 시기보다 화면 그 자체가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도록 색채를 조율한다. 이는 자연에 순응하며 자연으로부터 도출된 색을 화면에 담음으로써, 디지털화한 세상에서 상처입은 현대인들을 위해 치유의 도구로 삼고자 한 태도의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러두기
1) 목차
- 본 디지털 도록은 시대별 대표작품 소개 및 이미지, 참고작품 이미지, 비평문, 영상, 작가 연보, 아카이브(작품 외 자료, 참고문헌) 등으로 구성된다.
2) 작품의 분류
-작품의 대다수는 회화, 드로잉으로 구성된다.
3) 수록작품 정보의 선정기준
- 연구팀이 표기한 작품명, 제작연도 등의 작품정보가 현재 통용되는 정보 또는 당시 생산된 기록의 정보와 다를 경우, 해당 작품의 캡션에 별도의 색을 표기하고 필요에 따라 현재 통용되는 값을 괄호 안에 병기 표기한다. 또한 해당 캡션에 별도로 상세 출처를 명기하여 연구팀의 결과 값에 대한 근거 자료들을 이용자들이 확인 가능하도록 한다.
① 작품제목
- 연구팀은 작품제목을 기입함에 있어 가능한 현재 작가가 사용하는 표기 방식의 기준이 된 『박서보』(서보미술문화재단, 1994) 도록의 표기방식을 따른다. 이에 따라 <원형질>, <유전질>, <묘법> 작품명 뒤에 No.(연번)를 표기한다.
- 연구팀은 다양한 경로로 수집된 작품 이미지 총 2,232점을 목록화하면서 제작연도-날짜순 일련번호가 등장하는 작품이 <묘법(描法) No.870907>부터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연구팀은 이 작품을 기준으로 그 이전의 작품명은 가급적 작품번호-제작연도순, 그 이후의 작품명은 제작연도-날짜순으로 표기한다.
[예시] 원형질(原形質) No.3-63
유전질(遺傳質) No.1-68
묘법(描法) No.20-70
묘법(描法) No.88813
② 제작연도
- 작품 제작연도의 시작연도와 종료연도가 상이할 경우 함께 표기한다.
[예시] 1969-1970
: 작품의 시작연도가 1969년이고 종료연도가 1970년인 <유전질(流轉質) No.9-69-70>의 경우 제작연도를 1969-1970로 표기한다.
- 작품 뒷면 등의 기록을 통해 재제작을 한 것으로 확인된 작품의 경우, 최초 제작연도를 기술하고 괄호 안에 재제작연도를 표기한다.
[예시] 1979 (1981 재제작)
- 제작연도가 불분명한 경우 미상으로 표기한다. 단, 객관적 자료를 통해 추정이 가능한 경우, 추정연도를 ‘년경’등을 사용하여 표기하고 추정의 근거를 제시한다.
[예시] 1969년경
추정근거: <허상>은-1969년 7월 6일자『주간조선』기사(김영주, 이경성, 최순우, 「〔전류(電流)가 흐르는 오브제〕 현대전위미술(現代前衛美術): 13회초대전(回招待展)에 붙이는 정담(鼎談)」)에 근거하여 1969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됨에 따라 제작연도를 1969년경으로 표기한다.
③ 재료 및 기법
- 한지를 이용한 <묘법> 시리즈(본 책에서‘한지의 발견’, ‘참선의 선긋기’,‘색을 쓰다’시리즈 시기의 작품)는 재료 및 기법이 각 문헌자료마다 상이한 방식으로 기재되어 있기에 본 디지털도록에서는 작가의 의견을 반영하여 작가가 현재 통용하고 있는 방식인‘Mixed media with Korean hanji paper on canvas’로 통일한다. 이에 대한 국문 표기 또한‘캔버스, 한지에 혼합매체’로 통일하여 기재한다.
④ 규격
- 작품의 규격은 세로×가로(cm)로 표기하며 실측한 작품의 규격은 소수 첫째자리까지 명시한다. 액자가 있는 경우는 괄호 안에 세로×가로×두께(cm)를 포함하여 기술한다.
[예시] 161.8×129.4cm (액자포함 규격: 163.1×130.9×4.0cm)
- 작품의 크기는 실측한 규격을 우선으로 하여 표기한다.
- 실측하지 못한 작품 중에서 규격의 표기가 각 출처마다 상이할 경우, 본 디지털 도록에서는 작가의 의견을 반영하여『박서보』(서보미술문화재단, 1994) 도록의 규격을 우선적으로 따른다. 단, 도록에 실려 있지 않은 작품의 경우 연구자가 임의로 규격을 확정하지 않는다.
⑤ 소장처
- 현재의 소장처를 명시한다. 소장처가 기관일 경우 기관의 공식명칭을 표기한다.
- 개인소장일 경우 소장자를 명확히 알 수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개인소장’으로 명시한다.
⑥ 전시이력
- 관련 작품이 출품된 주요 개인전 및 단체전을 표기한다.
⑦ 관련 문헌기록
- 관련 작품이 언급된 주요 개인전 및 단체전 전시인쇄물, 간행물 등의 출처를 명시한다.
4) 작가 연보
- 본 디지털 도록 연보의 근거자료는 주요 문헌, 작가와 연구자들의 인터뷰 등을 포함한다.
- 1931년부터 현재까지 박서보의 작업활동, 학력, 경력, 수상력 등을 중심으로 주요 행적을 서술식으로 기술하였다. 특히 1931년부터 1990년대 말까지의 활동을 중점적으로 기술하였다.
- 박서보 작가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항목 이외에 동시대 미술사적으로 주요한 흐름에 대해 서술하였다.
[예시] 《60년미술가협회전》, 《벽전》
- 연보 내용과 관련된 작가 사진, 전시인쇄물, 간행물 등의 이미지 자료를 참고도판으로 수록한다.
5) 아카이브
아카이브편은 크게 작품 외 자료와 참고문헌으로 분류된다.
① 작품 외 자료
- 작품 외 자료는 사진, 증빙자료집, 1960-1970년대《파리비엔날레》진출 한국작가 관련 자료, 기타자료 등을 포함한다.
사진은 작가가 직접 스크랩한 사진모음집을 포함하여, 연구팀이 수집한 1936년부터 2016년까지의 사진(전시전경 사진, 박서보를 비롯한 가족 및 지인 사진, 프로필 사진 등)으로 구성된다.
증빙자료집은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지침에 따라 도록을 제외한 전시인쇄물(리플릿, 브로슈어, 초대장 등), 사문서, 행정문서 등은‘작품 외 자료’로, 도서, 개인전 및 단체전 도록, 신문기사, 잡지기사는 참고문헌으로 분류하였다.
- 1960-1970년대《파리비엔날레》진출 한국작가 관련 자료는 박서보를 포함하여《제2회 파리비엔날레》(1961)부터《제11회 파리비엔날레》(1980)까지 파리비엔날레에 참여한 한국작가들의 전시 행정문서, 서신 등으로 구성된다.
기타자료는 사진이나 증빙자료집으로 분류되지 않는 상패류, 작가 평문 등의 자료들을 포함한다.
사진,《파리비엔날레》관련 자료, 기타자료는 생산연도순으로, 박서보 소장 증빙자료집은 작가가 스크랩한 원 질서를 중시하여 증빙자료집 본연의 순서대로 목록화하였다.
② 참고문헌
- 작가가 직접 작성한 글을 포함하여 작가 개인 및 그의 작품이 언급된 주요 문헌을 되도록 모두 표기한다.
- 참고문헌의 배열은 도서, 개인전 도록, 단체전 도록, 학위논문, 학술지, 신문기사, 잡지기사, 인터뷰 영상순으로 하며, 각 매체 내에서의 배열은 생산연도-날짜순으로 한다.
- 한국 및 동양문헌의 경우 저서명은 『 』 안에, 논문은 「 」 안에 기재한다. 영문저서명과 논문집명은 이탤릭체, 논문명은 “ ”로 구분하여 기재한다.
- 본문의 부호 및 약호
∙ 단행본, 도록, 간행물명, 전집류 등 → 『 』
∙ 논문명, 기사명 → 「 」
∙ 작품명 → 〈 〉
∙ 전시명 →《 》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