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상주에서 출생한 작가 김구림(본명 김종배)은 1958년 첫 번째 개인전을 통해 미술계에 등단하였다. 1950년대 말에는 주로 페인팅 작업을 시도했지만, 1960년부터는 오늘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음과 양 >시리즈를 발표하였다. 이 시기에는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는 행위 외에 불에 그을리고, 오브제를 덧붙이는 등 탈 평면의 새로운 시도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초기 캔버스 작업에서는 평면과 오브제, 오브제와 조각의 경계를 넘나드는 창작을 시도했다.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행위예술, 대지예술, 라이트아트, 실험영화 등을 통해 본격적인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을 시작한다. 특히나 1969년에는 한국 아방가르드 협회를 결성하여 실험 작업을 지속하였고, 1970년에는 미술뿐 아니라 음악, 연극, 패션분야의 실험 작가들과 함께 기존체제의 예술 관념과 제도에 반하는 전 방위적 전위예술 단체인 <제 4집단>을 결성을 이끌기도 하였다. 그의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행보로 인해 한국에서 가장 전위적인 작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되어 왔다. 그는 회화, 조각, 사진, 판화, 영화, 연극, 무용, 설치, 음악, 해프닝, 대지예술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축해왔고 현재까지도 한국 실험미술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파리비엔날레(1971)>, <상파울루비엔날레(1973)>, <깐느국제회화제(1976)>, <인도 트리엔날레(1978)>, <아시아현대미술전, 후쿠오카시립미술관(1980)>, <영국 국제판화비엔날레(1984)>, <뉴욕 루이스아브론스 아트센터(1985)>, <침묵의 대화 서구와 일본의 정물화전, 일본 시즈오카현립미술관(1990), <김구림‧백남준 2인전, 찰리위쳐치갤러리(1992)>, 미국 VLACK갤러리(1995), <한국의 행위미술 1967-2007, 국립현대미술관(2007)>, <1970~80년대 한국의 역사적 개념미술: 팔방미인, 경기도미술관(2010), 영국 테이트모던(2012)>등 국내외에서 활발한 활동을 아직까지 이어가고 있다.
그의 수상으로는 2017년 은관문화훈장 수훈, 2014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수상. 2006 이인성 미술상 수상, 1983 대한민국 무용제 무대미술상의 실적이 있고, 저서로는 『판화 콜렉숀』 (서문당), 『서양판화가 100인과 판화감상』 (미진사) , 동화집『 별 하나 나 하나』 (동화출판사)가 있다.
주요 소장처로는 국립현대미술관, 테이트 모던 (영국), 테이트 라이브러리 스페셜 콜렉션. 구겐하임미술관 (미국), 리움미술관, 홋카이도근대미술관 (일본), 오사카예술센터 (일본), 후쿠오카 아시아미술관 (일본), 라이트콘 (프랑스), 이스라엘미술관 (예루살렘), 뉴욕시티은행 (미국), 한국 영상자료원, 서울대미술관, 대구 문화예술회관, 서울시립미술관, 토탈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아라리오미술관, 경기도미술관, 한국문예진흥원, 수원대학교미술관, 경주아사달조각공원, 일현미술관 외 다수가 있다.
1936 경북 상주 생
1958 첫 개인전, 공보관화랑, 대구
1964 <태양의 죽음> 시리즈 발표
1968 <회화 68그룹전> 참여
1969 <산하억만년> 무대미술 참여. 국립극장, 서울
한국최초 메일아트 우편예술 MASS MEDIA의 유물 발표, 서울전역
<바디페인팅> 발표 (T.B.C TV,방영.) 서울
<주간여성 기사 발췌> 현대인은 원시인을 동경하는 나머지 보다 적극적으로 육체를 노출시켜간다. (중약)
여체를 하나의 오브제로 노출된 부분에 페인팅과 플라스틱. 금속. 보석등을 부착시켜 전체적으로 조화미를
이루고 움직이는 작품으로 꾸며 모델 아닌 새로운 오브제로 시도해 본 작품이다.
1969 한국최초 일렉트릭 아트 <공간구조> 발표
이 작품은 당시 한국미술계에 등장했던 기하학적 ‘옵아트’중 가장 성공한 작품으로 평가받음.
1969 실험영화 8mm<문명, 여자, 돈> 연출
실험영화 16mm<1/24초의 의미> 제작
1970 제 1회 서울국제현대음악제 백남준 작품 <피아노 위의 정사> 연출, 국립극장, 서울
제 4집단 결성식, 서울 을지로 소림다방
예술단체 제4집단 대표취임, 서울
제 4집단 정찬승, 고호와 <가두퍼포먼스> 총괄연출, 서울
퍼포먼스 육교 위에서 풍선으로 길을 가로막는 퍼포먼스, 신세계백화점앞 육교. 서울
퍼포먼스 <콘돔과 카바마인> 서울대 문리대 정문 앞, 서울
제 4집단과 <기성문화예술과 기존체제의 장례식 및 전국 결성대회> 사직공원, 서울
<제1회 AG전: 환원과 확장의 역학> , 국립중앙공보관, 얼음작품 <현상에서 흔적으로> 발표
대지예술 <현상에서 흔적으로> 발표, 살곶이 다리 뚝방, 서울
김구림 인터뷰 중, <그 불가해의 예술> 공간지 지면
1971 제 7회 파리비엔날레, 파리 시립미술관, 파리, 프랑스
1974 <제 9회 일본국제 판화비엔날레>, 현대미술관, 도쿄, 일본
제 2회 임팩트 아트.비디오 아트 '74.스위스 로잔
1975 제4회 International Open Encounter on Video, 아르헨티나 브에노스 아이레스
1976 제7회 까뉴 국제회화제, 초대 출품, 까뉴, 프랑스
1980 아시아 현대미술전, 후쿠오카 미술관, 후쿠오카, 일본
1981 퍼포먼스 ‘손톱과 시’ 발표, 공간사랑, 서울
1981 창작무용 <이상의 날개> 연출, 안무, 의상, 무대미술, 세종문화회관, 서울
1981 구림 판화공방 개설, 신영동, 서울
1982 이어령의 수필집 『말』 삽화제공, 문학사상
1982 연극 <통막살> 무세중과공연, 문예진흥원 문예회관 극장, 서울
1982 최은희의 춤, 연출 및 무대미술, 문예회관 대극장, 서울
1988 한국현대미술의 모더니즘 1970-1979,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1990 <침묵의 대화, 서양과 일본의 정물화> 시즈오카 현립미술관, 일본
1991 <김구림, 백남준, 임충섭 3인전> LACA갤러리, LA, 미국
1992 <김구림, 백남준 2인전: Discontinuities> 찰스 위처치 갤러리, 캘리포니아, 미국
2009 퍼프밍더씨티 Kunst Aktionismus im Stadt Raum 60er and 70er Jaher, 독일,뮌헨,이태리,밀라노, 프랑스,파리, 등 세계 각 도시 순회전
2010 타이완 국제실험영화제 1/24초의 의미 출품, 타이완
1970-80년대 한국의 역사적 개념미술 <팔방미인> 경기도미술관, 경기도
2011 Art Edition, ‘국제에디션아트페어’, 서울
2012 RES(V)OLUTION 1960-2013, DNA 베를린 갤러리, 베를린, 독일
2013 개인전 <잘 알지도 못하면서>,1960-1970년대 작품 서울시립미술관 초대전, 서울
2015 Embeddedness: 60년대부터 현재까지 한국의 필름과 비데오전, 테이트모던, 런던
Lille 3000 페스티발. “르네상스” 프랑스, 릴
2016 김구림의 현상에서 흔적으로. 퍼포먼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한국
실험영화 국제 네트워크 포럼 갤럭시67.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광주. 한국
2017 삼라만상: 김환기에서 양푸둥까지, ,국립현대미술관,
2017 아틀리에 스토리전 2017.4.6.-04.30, 예술의 전당 디자인 미술관
기억정원.자갈마당, 2017.10.18.-2018.3.18., 대구 자갈마당
토탈미술관 후원전 (Total Support),2017.11.1.-11.05,토탈미술관(Total Museum)
2018 저항과 도전의 이단아들 (영문) Renegades in resistance and challeng, 대구미술관
접점개화(영문) Blooming at the Junction(한문) 接點開花, 홍콩 한국문화원 /
Rehearsals from the Korean Avant-Garde Performance Archive , Korean Cultural Centre UK
Curators' Series : Institute of Asian Performance Art, David Roberts Art Foundation
2019 KIM KULIM & JESSICA HYUNJIN KIM, 2019-10-05, Cafe Oto London
광장:미술과 사회 1900-2019, 국립현대미술관.
한국비디오아트 7090,시각이미지 장치, 국립현대미술관.
2020 홍콩 아트바젤 캐비넷,,홍콩 컨벤션 센터(HKCEC)
판화.판화,판화, 국립현대미술관
Refocusing on the Medium: The Rise of East Asia Video Art, OCAT Shanghai
이인성미술상 20주년 기념 특별전 <위대한 서사> .대구미술관
2021 몸.짓.말 (영문) Corpus.Gestus.Vox, 경기도미술관
개인전 <음양>,가나아트센터
20회 KIAF 서울, COEX 등
김구림 : 음양(陰陽), 이기(理氣)의 끝없는 취산(聚散)의 세계
김찬동(전시기획자,미술평론가)
“사람들은 모두 일곱 개의 구멍을 가지고 보고 듣고 먹고 숨 쉬고 있는데, 혼돈(渾沌)만은 이것을 가지고 있지 않소. 그에게도 구멍을 뚫어 주어 보십시다.” 그리고는 혼돈의 몸에 하루에 한 구멍씩 뚫어 나갔는데, 칠 일 만에 혼돈은 죽고 말았다. ( 『장자 莊子』 내편內篇 응제왕 應帝王)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는 현재, 내가 존재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모두 음과 양의 조화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2012 작가노트)
1. 들어가며
한국현대미술사에서 1960-70년대 실험미술을 이끈 대표적 작가 중 한 사람은 김구림이다. 그는 대학에서의 제도적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다양한 실험적 작업을 통해 한국 전위예술사에서 독보적 위상을 가지고 있다. 그의 작업은 회화는 물론, 입체와 행위, 영화와 연극, 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을 전 방위적으로 넘나드는 한국 전위예술의 아이콘이다. 그의 작품들에는 ‘한국 최초’라는 수식어가 여럿 붙어 다닌다. 최초의 일렉트릭 아티스트, 대지예술가, 실험영화 감독 등등... 그의 작업은 서구 전위예술의 추종보다는 이를 변용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한국예술계에 전위작업에 대한 이해가 일천하던 50년대 말부터 전위예술의 첨병으로서 독자적인 길을 개척한 선구자이다.
그의 작업은 대략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95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가장 왕성한 실험기인 제 1기, 1973년 일본 체류 경험을 포함하여 1984년 미국으로 활동무대를 옮기기까지의 제 2기, 그리고 2000년 귀국 후 현재까지의 제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물론 그의 활동의 시기 구분은 3기로 나누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그 스펙트럼이 넓다. 그의 실험정신의 점철은 동년배 작가들이 특정 양식을 평생 동안 유지하는 행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그의 창작과정은 자신이 이룩해 놓은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해체와 재구축의 연속이었다. 또한 그의 실험성은 단순한 형식실험이나 관념적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실과 예술의 영역이 괴리되지 않는 전위적 성격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서구의 새로운 경향들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누구보다도 빨리 체득하고 있지만, 그것에 의존하기보다는 그 경향들을 한국적 정신세계와 접맥, 변용시킨 점에서도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1983년부터 최근까지 그가 지속적으로 작품의 명제로 삼고 있는 ‘음양(陰陽)’의 개념은 한국현대미술의 정체성과 미래적 위상에 많은 시사점을 제시하고 있다. 최근 해외 미술관들[주석1]에서 보이고 있는 그에 대한 관심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는 1936년생으로 일제 식민시대에 교육을 받고 해방 후 신설된 한국의 학제 하에서 대학교육을 받게 된 첫 세대라 할 수 있지만, 동년배의 작가들과는 달리 기존의 제도교육을 거부하고 독학으로 현대미술을 개척해 왔다. 실제 그는 경주의 한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인상파풍의 그림을 주조로 한 당시 대학 커리큐럼에 만족하지 못하고 바로 자퇴하였다. 그의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과 자유분방한 창작의욕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잡지 등을 통해 서구의 다양한 예술정보를 접하며 더욱 강력하게 고취되어 갔다. 미술뿐만 아니라 영화와 연극, 음악 등 다양한 예술의 신사조들이 그의 창작의욕을 자극하였다. 경북 상주에서 태어난 그는 청년시절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초기 ‘앙그리(Angry)’라는 그룹을 결성(1964)하여 대구에서 젊은 작가들이 창작과 발표를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였다. 하지만 제도권의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당시의 대구 화단이 그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는 대대로 한약방을 운영해온 부잣집 외동아들로 자란 탓에 고집이 세고 자기주장이 강하며 마음먹은 대로 모든 일을 처리해야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어려서부터 다양한 고급문화를 습득한 탓에 젊은 시절 오토바이, 스포츠카, 승마, 스키 등 당시로선 일반인이 접할 수 없는 스포츠를 즐기며, 고급 오디오 장비를 소유한 오디오 광으로 매우 섬세하고 예민한 음악적 감수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또한 동년배 작가들과는 달리 초기 대구 시절엔 섬유회사에 다니며 창작활동을 병행하였는데, 그의 직장생활을 겸한 창작활동은 1960년대 말 상경 시기 까지 이어진다. 그는 작품 이외에 기업에서의 경영능력을 인정받아 기획실장을 지내는 등 역량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일반적인 미술계의 제도를 통한 성장과는 다른 배경을 가진 작가이기에 늘 독자적으로 미술계와 부딪치며 상황을 헤쳐 나가야 했다. 이러한 연유로 그의 창작활동은 많은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늘 실험성을 견지하며 앞서 나갔기 때문에 늘 고독한 주자였다.
2. 시기별 작품의 전개
가. 제 1기 (1958-1972): 실험과 해체.
그는 1958년 대구공보관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 전시에서 선보인 작업들은 대개 자연을 소재로 구상성과 반추상적 경향의 작품들이었다. 1950년대 말 한국의 상황은 전쟁의 극심한 후유증을 앓던 시기로 모든 것이 무너지고 파괴되었고 가치의 혼란과 무력감, 바닥없는 절망과 피해의식이 시대의 정신을 지배했다. 한편으론 미국 소비주의의 영향으로 퇴폐와 향락이 만연했고 절망과 허무를 자양분 삼아 실존주의가 유행처럼 번지던 상황이었다. 미술계 역시 인간에 대한 실존적 질문을 기저로 과거 기존제도의 모순을 극복하며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몰두하던 시기였다. 이는 일제의 잔재로 남아있던 국전의 체제를 거부하며 새로운 제도와 양식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던 시기로, 젊은 작가들은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와 유럽의 앵포르멜 경향에 경도되었던 시기이기고 하다. 김구림의 초기 작업들 역시 당시 화단의 젊은 작가들처럼 앵포르멜 경향의 작업들을 선보인다. 두터운 마티에르의 검은색 화면이 주종을 이룬다. 작품의 명제도 <묘비>,<태양의 죽음>,<핵> 등 죽음과 관련한 전후의 실존적 문제들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동시대작가들의 격정적인 붓놀림의 일반적인 앵포르멜 작업과는 달리 화면 위에 철제나 플라스틱 오브제가 부착되거나 비닐을 불에 녹여 부착하는 등 차별화된 작업들이 시도된다. 이러한 작업은 196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며 1968년부터는 좀 더 구체적인 오브제 작업들이 등장한다. 특기할만한 점은 이 시기에 발표된 <세 개의 원>(1964)은 흑백이 대비된 화면에 평면적 오브제를 부착한 작품으로 ‘음.양’에 관한 단초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김구림이 대구로부터 부산을 거쳐 상경한 1960년대 말 한국미술계의 상황은 앵포르멜 경향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지만, 더 이상 새로움의 동력을 잃고 관습적 언어로 양식화되어가고 있었다. 반면 신세대 작가들에 의해서는 탈 회화적 움직임이 제기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활동으로 1967년 12월 홍익대학교 출신의 신진 작가들로 구성된 <무(無)동인>,<신전(新展)동인>,<오리진(origin) 동인>이 연합하여 중앙공보관에서 개최된 <<청년작가 신세대연립전>>이 있었다. 이들 신세대들은 앵포르멜을 개척하였던 선배 세대들과는 달리, 산업사회의 생산품들을 화면에 도입한다거나 오브제를 통한 입체나 설치작업, 그리고 해프닝과 같은 새로운 유형의 작업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이들에 대해 미술계는 대체로 ‘반예술의 색채가 짙고 조형의 문제보다는 생활의 재발견 내지는 현실의 권리복귀라는 과제를 내세우고 있는’ 것으로 평가하였다[주석2]. 김구림은 이들보다는 선배 세대로서 그들과 함께 그룹 활동을 하진 않았지만, 김구림의 실험적 작업들은 이들 신진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김구림의 본격적인 실험 작업은 이러한 신세대 작가들의 작업과 같이 탈 회화적 성격의 다양한 매체와 형식을 통해 펼쳐졌다. 1969년 16mm 필름으로 제작한 실험영화 <1/24초의 의미>는 초기 김구림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이 작품은 당시 한국의 급변하는 사회상황을 살아가는 한 남성의 하루를 소재로 한 영화로, 바쁘게 돌아가는 산업화 과정들과 현대인들의 무기력과 권태, 무료함이 대비되는 이미지 몽타쥬 기법의 영상작업이다. 영상은 당시 건설된 3.1고가도로 위를 달리며 빠르게 변해가는 도시화, 산업화의 단편적 이미지들을 속도감 있게 처리하는가 하면, 이와는 대조적으로 주인공이 담배를 피우거나 하품을 하는 등 무료함을 드러내는 화면의 속도는 매우 느리게 처리하고 있다. 이 영화는 서로 연관성 없는 이미지들이 비선형성을 가지며 단속적으로 조합되어 있다. 이것은 기술적 측면과 내용적 측면 모두 당시의 드라마 형식을 따르는 사실주의적 상업영화와는 전혀 다른 맥락의 아방가르드 영화이다. 일반적으로 아방가르드 영화는 주류를 이루고 있던 오락영화와 여기에 쏟아지는 대중들의 반응을 거부했고 또 비판했다. 그들은 드라마와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틀에 박힌 전통, 관행, 그리고 산업논리에 따라 상품화된 영화제작을 도외시한 채, 다른 시각 즉, ‘보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격식과 형식에 순응하는 순진함과 거리가 있었던 그들은 자신들이 거부하던 기성체제와 타협을 거부하고 전혀 새로운 영상언어를 찾고자 했다. 실제로 1960년대 국제무대에서는 ‘뉴아메리칸 시네마’와 ‘언더그라운드 영화’ 등이 출현한 시기였다. 김구림이 이러한 해외 영화의 흐름을 숙지하고 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당시 한국의 시대적 정황을 영화적 어법으로 새롭게 해석하고자 했던 시도는 매우 선구적이면서도 독창적인 것이었다. 실제적으로 영화의 저작권과 관련한 시나리오 제작과 편집을 김구림이 직접 수행함으로써 자신의 창작의도를 구현하였다.[주석3] 실제로 이 작품은 상영키로 한 날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상영되지 못하였다. 광화문 아카데미 극장 옆 ‘아카데미 음악 감상실’을 빌어 상영키로 한 날이 공교롭게도 미국의 아폴로 우주선이 달에 착륙한 날(1969.7.21)이어서 모두가 TV중계를 보느라 관객은 극소수였고, 이마저도 김구림이 밤새워 수작업으로 완성한 필름이 편집 기술상의 문제로 중간에 자주 끊기는 바람에 제대로 된 상영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실제로 이날 상영된 작품은 이러한 사고를 대비해 준비했던 슬라이드 필름 프로젝션인 <무제>로, 흰 타이즈를 입은 배우들의 신체에 3대의 프로젝트를 이용하여 동시다발적으로 영상을 투사하는 플럭서스적 의미의 ‘인터미디어’ 작품으로 대체되었다. 영화의 제목인 <1/24초의 의미>는 1초에 24개의 프레임으로 구성되는 영화의 메커니즘을 연관시킨 것이다. 실제로 이 작품에는 정찬승,정강자 등 작가들이 직접 출연하기도 함으로써 신진작가들에게 미친 김구림의 영향력을 반증하기도 한다.
김구림은 <1/24초의 의미>보다 약간 먼저 <문명, 여자, 돈>이란 8mm 실험영화를 제작하였으나 완성시키지 못했었다[주석4]. 역시 당시의 시대상황을 반영한 필름으로 무작정 상경한 처녀의 하루 일상을 다양한 의식흐름의 추적을 통해 구현하는 영화이나, 촬영도중 나체장면에 부담을 느낀 여배우가 종적을 감추게 되면서 오랫동안 미완성으로 남겨졌던 작품이다. 김구림의 전위 영화는 산업화의 과정에서 금전만능주의가 팽배하던 60년대 말의 한국적 상황 속에서 내용적으로는 말살되어가는 인간성의 문제를, 형식적 측면에서는 전위성을 구현하고 있다.
김구림의 초기 작업 중 또 하나의 기념비적 작업은 한국 최초의 오브제를 활용한 옵티칼 아트인 <공간구조 A>(1968)와 여기에 전기적 장치를 부착시켜 한국 최초의 일렉트릭 아트로 기록되는 <일렉트릭아트 A>(1969)이다. 영화제작도 그렇지만 이 <공간구조 A>의 제작 역시 그가 부산시절 섬유회사에 재직 중에 제작된 것이다. <1/24초의 의미>는 회사의 기획실장으로서 기업홍보영화의 제작, 발주 책임자로서 영화의 메커니즘과 제작기법에 대한 이해가 빨랐던 점에 기인한 것이며, <공간구조 A> 역시 회사가 보유한 기계장치의 소모품을 작품의 재료로 구하기가 용이했던 직접적인 이유가 있었다. 당시 선후배 작가들은 앵포르멜 이후 기하학적 도형을 화면에 도입하여 서구의 옵티컬 아트의 양식을 실험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김구림과 같이 적극적인 오브제를 도입하여 화면 전체를 옵티컬한 구조로 만든다거나 이를 좀 더 적극적인 옵티컬 구조인 일렉트릭 아트로 전환하는 일은 김구림 만의 독자적인 언어였다. 이후에도 김구림은 비닐 튜브에 물과 기름을 넣고 튜브 안에 전구를 장착하여 좀 더 발전된 내용의 움직이는 일렉트릭 아트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는 당시 <<국전>>이 가진 아카데미즘의 한계를 넘어서며, 새로운 실험성을 수용하기 위해 언론사들이 주최한 민간 공모전이 병행되던 시기였는데, 김구림은 이러한 전시에서도 수용이 거부된 실험적인 작업을 수행하였다. 대표적인 사례는 1970년 6월 경복궁 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되었던 <<제 1회 한국일보대상전>>에 출품된 <현상에서 흔적으로 D>을 들 수 있다. 그것들은 7개의 얼음 입방체를 보자기로 묶어 전시장에 설치한 작품과 건물 외부를 천으로 두르고 미술관 로비 마당에 천의 양끝을 땅에 묻는 내용의 대규모 야외 설치 작업이었다. 공모요강은 ‘모든 경향의 창조적 작품’을 표방하고 있었지만, 주최 측으로부터 두 작품 모두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거부되었다. 특히 천으로 건물을 묶는 작업에 대해서는 무속적 이미지를 지적하며 일방적으로 작품을 철거해버린 해프닝이 벌어진 것이다. 이는 화이트 큐브를 벗어나 외부공간으로의 발표공간을 확장시킨 일종의 환경예술, 대지예술의 일환으로 미술제도의 정점인 국립미술관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질문이기도 했는데, 그의 실험성과 새로운 미학이 수용되기엔 여전히 제도의 벽이 강고함을 느끼게 한 사건이었다. 이 시기 그의 기념비적 작업은 한국 최초의 대지예술로 기록되는 <현상에서 흔적으로>(1970)이다. 이 작품은 뚝섬 근처 살구지 다리 제방의 잔디에 불을 놓는 대규모의 야외 해프닝이었다. 제방 경사면의 잔디를 삼각형으로 구획하여 태운 뒤, 태운 곳과 남겨둔 곳이 시각적 대비를 이루며 삼각형의 연속문양처럼 조성되게 하는 ‘불과 잔디에 의한 이벤트’ 작업이었다. 이 태운 곳의 잔디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다시 원래의 자연형태로 회귀하게 되는데, 현상이 하나의 흔적임을 제시하려는 의도의 작업이다. 이는 서양의 대지예술과 달리 한국의 민속놀이 중 하나인 대보름 쥐불놀이 형식을 차용한 작업으로 현상과 흔적의 상관성을 드러내는 다분히 개념적인 행위예술인 동시에 대지예술로 평가할 수 있다. 김구림은 1969년 또 다른 작품 <현상에서 흔적으로>를 발표하였는데, 이 작품은 붉은 플라스틱 통 세 개를 나란히 바닥에 일렬로 놓고 그 속에 각각 크기가 다른 얼음 덩어리를 잘라 넣어두며, 얼음 위에는 윗면의 면적과 같은 트레이싱 페이퍼가 놓여있는 구조의 작품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얼음은 녹아 물이 되고 물은 다시 수증기로 증발하여 종국에는 트레이싱 페이퍼 만이 남겨져 얼음의 흔적을 유추해 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다. 두 작품의 형식은 서로 다르지만 있음과 없음의 상대성과 존재함과 사라짐은 서로 다르지 않음을 드러내는 공(空)의 세계,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세계에 대한 탐구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김구림의 작품에는 지속적으로 현상과 흔적, 존재와 부재, 공(空)과 색(色) 등 서로 다른 요소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융합되거나 재구축되는 ‘윤회’와 ‘환원’의 문제를 탐구하고 있는데, <현상에서 흔적으로>의 작례는 김구림의 작품 전체를 관류하는 매우 중요한 화두를 던진 초기 작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음악적 감수성이 뛰어났던 김구림은 세계적인 거장 12인의 전위적 작품을 연주한 <<제 1회 서울국제현대음악제>>(1970,9.5-6, 서울 국립극장, 서울신문사 주최)에서 작품을 발표하며 연출을 맡기도 하였다. 특히 백남준의 <피아노 위의 정사>는 김구림이 연출한 작품으로 정찬승과 차명희 두 작가가 피아노 위에서 벌이는 정사를 연주의 과정으로 연결시킨 해프닝으로 남녀의 성적 욕망과 에너지가 발끝을 통해 건반에 전달되어 피아노를 연주하는 작업이다. 김구림이 직접 공연한 해프닝은 슈토크하우젠의 군대행진 발자국 소리를 표현한 전자음악이 조명의 하모니 속에서 울려 퍼질 때, 무대 위에 김구림은 옷을 뒤집어쓰고 앉아있는 한 사나이의 머리를 빨래방망이로 때리는 내용이었다. 이외에도 최초의 바디페인팅, 김차섭과 시도한 한국 최초의 메일 아트인 <매스미디어의 유물>, 서울대 문리대 정문에서 벌어진<콘돔과 카바마인>(1970.5 .15),명동 신세계 백화점 육교에서 벌어진 <육교 위에서의 해프닝> 등 일상공간에서 관객의 참여와 소통을 위한 다양한 전위적 해프닝을 통해 일상과 예술의 접목을 시도하며 관념타파 켐페인을 펼쳐갔다. 그러나 그의 진취적이고 선구적인 예술 활동은 일반인들은 물론 예술계로부터도 몰이해를 당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김구림은 1969년 ‘아방가르드’란 명칭을 내걸고 결성된 한국 최초의 집단적 현대미술 그룹인 <한국아방가르드협회(이하 ‘AG’)>의 창립에도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제도권의 경력을 가지지 않은 전위작가로서 당시 화단의 양대 산맥을 이루던 서울대와 홍익대 출신 작가들을 규합하는데 적절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물론 그 이전 서울대 출신의 신진 작가들의 모임인 <회화 68전>의 결성에 동참하였었기 때문에 서울대와 홍익대 출신 작가들이 함께 모인
그는 확대된 실험을 위해 좀 더 전 방위적인 전위적 창작활동을 모색하게 된다. 이를 위해 미술 영역뿐만 아니라 연극, 무용, 음악, 패션 등 인접 예술분야의 실험적인 작가들을 규합하여 예술장르를 통합하는 <제 4 집단>[주석5]을 결성한다. 1970년 6월에 결성된 <제 4 집단>은 ‘무체사상(無體思想)’이란 다분히 동양적 사유개념을 기반으로 ‘한국문화의 독립성과 인간본연의 해방을 선언하며 모든 예술을 통합시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종교 등 각 분야에 참여함으로 일체를 이루고자’ 전국적 조직으로 출범하였다. 이들은 한국사회가 가진 여러 가지의 금기, 권위, 제도를 타파코자 하였는데, ‘제 4 집단’이란 명칭 역시 한국 사람들이 죽음의 숫자라 기피하는 숫자인 ‘4’자를 일부러 선택하고 그룹이란 영어대신 한국어인 ‘집단’으로 명명한다. <제 4 집단>의 실험성은 전시장 내에서의 새로운 형식실험을 넘어서 거리나 생활공간에서 전혀 이질적인 문맥의 실험 작업을 수행한다. 이들의 활동은 요즘 유행하는 융복합이나 통섭적 차원의 선구적 활동이었다. <제 4 집단>은 출범 초기부터 철저하게 비정치적 노선을 견지하였지만, 최초의 메일아트나 거리극의 개념을 도입한 다소 현실 비판적 문맥의 작업들도 시도되었다. 당시의 사회는 군사문화적 통제사회로서 장발이나 미니스커트를 경범죄로 처벌하던 상황이어서 그들의 집단적인 전위활동은 다소 불온한 세력처럼 오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대중들로부터도 기이하거나 불온한 집단처럼 이해되었고, 예술계로부터도 정제되지 않은 실험성으로 백안시되는 이중적 몰이해를 감수하며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그들의 활동은 미술잡지를 통해 보도되지 않고, 『주간 경향』, 『선데이 서울』 등과 같은 대중매체의 가십 기사로 장식될 뿐이었다. 김구림은 미술 분야뿐만 아니라 무용이나 연극 등 인접분야의 예술 활동에도 적극 참여함으로써 총체적 예술가로서의 역량을 발휘하였다. <제 4 집단> 결성 후 가장 야심찬 활동은 1970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이하여 <기존문화예술에 대한 장례식>이라는 장외 퍼포먼스를 기획 시행한 것이었다. 그들은 사직공원에 모여 선언문을 낭독한 후, 기존문화예술을 상징하는 도서류나 오브제들을 준비한 관에 집어넣은 뒤, 태극기와 백기를 앞세우고 관을 맨 채 가두 행진을 하였다. 당시는 집단 활동 자체가 범죄로 취급되던 상황이라 대원들은 가두행렬로서의 표가 나지 않을 만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움직여 갔다. 가두행진 마지막을 한강에 관을 띄워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하려했던 당초의 계획은 광화문을 지나 덕수궁 앞을 지날 때,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작가들이 구금되며 무산되었다. 이들을 요주의 인물들로 관리해오던 당국은 기이한 집단행동을 빌미로 이들의 활동을 무화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제 4 집단>의 통령 김구림은 구속되고, 집단의 단원들은 개별적인 제지를 받았다. 이러한 조직적인 방해와 탄압으로 <제 4 집단>의 활동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고, 결성 6개월 여 만에 조직은 불가피한 해체를 맞았다. 당시에는 <제 4 집단>뿐만 아니라 실험적인 작가들의 경우, 보이지 않는 제지와 탄압을 가하던 상황이었던 점을 감안할 때, 이러한 집단적 행위는 탄압의 주된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김구림은 모든 전위적 활동을 접고 설치미술을 위주로 한 전시장 중심의 전시로 전성기에 비해 다소 소극적인 활동을 펼쳐갔다. <제 4 집단>의 해체가 가져온 정신적 후유증과 화단으로부터의 몰이해 등으로 그에게는 새로운 돌파구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김구림은 이를 위해 1973년 무작정 일본행을 결정하게 된다.
나. 제 2기 (1973-1984): 오브제 인식과 중층적 시간성의 탐구
김구림의 활동은 일본체류기를 기점으로 전환점을 맞이한다. 당시로선 일본으로의 진출이 곧 국제무대로의 진출이란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으므로 많은 현대미술의 정보를 현장에서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된 것은 그의 작품세계에 큰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당시 한국화단은 해방 이후 한일국교정상화의 일환으로 1968년 동경근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현대회화전>>[주석6]을 계기로 일본을 통한 현대미술 교류에 큰 관심과 의미를 두고 있던 때였다.[주석7]
김구림이 체류하던 당시의 일본 화단은 모노하(物派)의 영향력과 함께 <비고토(美共鬪)>를 필두로 한 모노하 이론을 비판하는 세력들이 구축한 ‘포스트모노하(post-monoha’)의 쟁론이 활발하던 시점이기도 하였다. 일본 체류기의 김구림의 작업은 국내에서의 작업과는 달리, 다소간 모노하나 포스트 모노하의 영향을 받아 국내에서의 작업보다 좀 더 심도있는 개념성이 강조된 오브제 작업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포스트 모노하 계열의 작가들은 모노하가 ‘모노(物)’에서 역사성과 사회성을 탈각시켜 지나치게 관념화한 부분을 비판하면서 역사와 사회적 문맥이 담긴 일상적 사물에 대한 관심을 높여 갔다. 김구림의 작업의 경우, 관념적인 사물에 대한 접근 보다는 일상적 사물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점을 감안할 때, 모노하 보다는 포스트모노하의 작업 경향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1973-5년 어간에 김구림은 빗자루, 걸레, 브러시, 옷걸이, 백열전등, 의자 등 일상 용품에 채색을 가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그는 체류 기간 동안 3회의 개인전과 1회의 초대전, 그리고 1회의 공모전에 참가한다. 물론 이 시기에 스위스 로잔에서 개최되는 <<제2회 국제 임팩트 아트 비디오-74>>전이나 1975년 백남준과 같이 출품한 파리 <
‘…….문제는 낡음 그 자체가 아니라 장치된 낡음이 우리 속에 환기시키는 새로움의 예감이었던 것입니다. 이 새로움은 이미 단순한 낡음의 반대개념은 아닙니다. 그것은 중층하는 시간의 부피를 꿰뚫고 기어이 나타나는 생의 깊은 각성으로서의 새로움이며 굳이 말하자면 시간의 눈뜸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주석9]
그가 구현한 사물의 작위적 현존은 결국 사물의 절대적 본질을 부정하며 시간성의 누적과 가변성을 통과하며 찰나적 흔적으로밖에 규정될 수 없는 그 무엇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구림의 일본 체류기간 동안의 작업들은 모노하 작가들의 진지하면서도 현학적인 작업과는 달리 일상의 예술화라는 키워드를 추구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팝아트와 같이 대중친화적 소재나 이미지만을 다루는 차원과는 구별된다.
또한 이 시기 그가 새롭게 관심 갖게 된 영역은 판화이다. 당시 국내 판화 분야는 목판화 정도를 겨우 다루는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메조틴트와 같은 까다롭고 다양한 판화기법은 그를 매료시켰다. 전문적으로 대학과정을 통해 판화를 배울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던 그는 당시 전문가 공방을 통해 체계적인 전문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 결과 일본판화가협회의 정회원의 자격을 얻고 1974년 동경국립근대미술관에서 열린 <<제9회 도쿄판화비엔날레>>에 한국대표로 출품하게 된다. 그의 작품은 테이블보에 올려놓은 걸레 주변에 물이 밴 흔적을 형상화한 <걸레>라는 작품이었는데, 기성품 꽃무늬 테이블보를 화면삼아 그 위에 걸레와 물의 흔적을 실크스크린 기법을 이용하여 제작한 것이었다. 이 작품은 그랑프리 후보에 올랐지만 영예를 얻지는 못했다. 심사위원들 사이에서 이 작품이 판화인지 여부를 놓고 격론을 벌이게 만든 일화가 있었다고 한다.[주석10] 이 일로 그는 일본 판화계로부터도 주목받게 되었다. 김구림의 작업은 상업성을 순수예술로 포섭한다거나 판화의 평면일변도의 형식을 설치미술로 확장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판화가 가져야할 기법적인 면을 충족시키면서도 전혀 새로운 맥락의 판화를 탄생시킨 셈이다. 그의 판화에 대한 열정은 1981년 국내 최초의 판화공방인 ‘구림판화공방’을 개설하게 되며, 같은 해 <<제 3회 동아판화비엔날레>>에 초대되어 도쿄판화비엔날레와 유사한 개념의 복제성을 거부한 판화를 출품하였다가 작품의 부적합성으로 출품이 거부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운영위원이던 평론가 유준상과 박서보가 참여하는 지상논쟁을 벌였다.[주석11] 그의 작업은 지속적으로 기존 관념을 해체하기 위한 도전과 실험의 연속으로 점철되어 있다.
1975년 일본생활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한국의 상황은 일본 모노하의 영향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며
1975년 귀국 이후, 김구림의 작품은 단색화와는 별개의 맥락으로 독자적인 노선을 걷는다. 귀국 후 견지화랑에서의 김구림 개인전에서 선보인 작품들은 일본에서의 일상적 사물들에 작위를 가하여 시간성과 사물의 현존의 문제를 탐구하는 맥락을 지속하고 있다. 1975년 특기할만한 점은 후일 그의 작품에 일관되게 명제로 사용하는 음양의 문제를 시도하는 첫 작품을 제작한다는 것이다. <음양(陰陽)과 선(線)>이란 제목의 작품은 캔버스 위에 연필과 스프레이를 사용한 드로잉 개념의 작품인데, 연필이나 스프레이의 대비, 선과 도형의 대비와 같은 것을 염두에 둔 가벼운 시도였다. 이러한 시도는 후일 김구림의 뉴욕생활 이후 핵심명제로 자리 잡게 된다. 1970년대 말에 오면 김구림의 일상적 오브제들은 일회성 설치작업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평면작업과 조각 작품으로 변주한다. 평면작업은 주로 바탕이 칠해지지 않은 삼베(麻)천 캔버스 위에 일상적 오브제들의 실루엣을 그리고 오브제의 사이즈나 오브제가 놓인 공간에 관한 정보를 마치 건축설계의 도면을 그리듯 도해하고, 오브제에 해당하는 화면에는 물감을 두텁게 발라 오브제가 가진 물성의 흔적을 암시하는 듯한 작법을 보이고 있다. 또한 조각의 경우는 전화기나 슬리퍼 등의 일상적 사물을 흙으로 빚어 브론즈로 떠내되 사물의 형태가 부분적으로 뭉개져 있는 미완성된 상태를 고착시키고 있다. 오브제를 브론즈로 영원히 포착하려하는 의지가 반영되어 있지만 이 역시 시간성과 가변성의 찰나를 포착코자하고 있다. 평면작업과 입체작업을 관통하는 공통관심사는 미완성, 시간이 개입된 가변성으로 변성과정에 있는 오브제의 볼 수 없는 새로운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평면작업의 경우 목탄으로 오브제의 형태를 그리고 있는 데, 그리는 도중 목탄은 자연스럽게 뭉개지거나 지워짐으로 사물의 확정성, 규정성의 문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화면과 입체에 드러나는 형상들은 창조되어지는 과정이거나 소멸되어 가는 과정인양 미완의 형태를 띤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이러한 작업들은 ’80년대 초중반까지 지속되지만 ’80년대의 작업들은 ’70년대 말의 그것들 보다 좀 더 밀도가 생기며 사물의 특정부분이 좀 더 상세히 묘사되기도 한다. 하지만 일관된 어법은 사물이나 존재에 대한 데리다의 개념인 ‘차연(差延)’ 또는 의도적 모호성 등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70년대 후반까지 화단의 일반적 경향은 단색화 담론의 심화라고 할 수 있는데, 화면에 형상을 제거하며 물질적 속성을 극대화해간 상황이었다. 행위를 개입시켜 사물과 인간을 접하게 하며 지각을 통한 사물의 본질에 접근하는 매우 현학적이며 동양적 사유를 결부시킨 심각하지만 다소간 단조로운 화면의 반복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에 비해 김구림의 화면은 매우 다양한 형상들이 존재하는 기호화 정보화된 속성을 가지는 것이었다. 이러한 차별화로 화단의 단독자로서 주류적 흐름에 편승해 나갔다.
그는 미술활동 이외에도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융복합적인 작업들을 펼쳤는데 특히 연극과 무용분야 등 공연예술분야에서의 기성작품들과는 다른 실험적인 무대미술로 대한민국무용제와 연극제에서 수상하는 등 매우 실험적인 무대를 펼쳐 보였으며, 공연계의 실험예술가들과도 공동 퍼포먼스를 펼치기도 하였다.
1980년대 중반까지 지속적으로 형상의 차연을 추구하던 김구림은 1981년 국내 최초로 개설한 판화공방의 운영이 예상과 달리 어려움을 겪게 되어 다시금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개인사적인 어려움까지 겹쳐진 상황이었다. 김구림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84년 이번엔 미국으로 활동무대를 옮기게 된다.
다. 제 3기(1984-2016년) : 음과 양 시리즈
1984년 김구림은 현대미술의 메카라 할 수 있는 뉴욕으로 활동무대를 옮기게 되는데, 장기체류를 위해 뉴욕의 ‘디 아트 스튜던트 리그(The Art Student League: ASL)’에 진학하여 학생신분을 가지고 활동한다. 그의 작가로서의 역량은 졸업전시에서 회화와 판화 두 분야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하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특히 판화의 기량을 인정받아 교수요원이 될 기회가 있었지만 언어적 문제로 선발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다고 한다.[주석12] 그의 뉴욕 이주 역시 무작정 도일 때와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미국에 특별한 연고도 없지만 새로운 창작의 기회를 얻고자하는 일념에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낸 결정이었다. 당시 뉴욕 화단은 새롭게 등장한 포스트모던의 기류가 풍미하던 시절이었고 형식주의 모더니즘 경향을 지속적으로 해체해 왔던 김구림에게 뉴욕 화단은 새로운 에너지를 제공하기에 충분한 환경이었다.
뉴욕에서의 초기 작품들은 두 개 또는 세 개의 캔버스를 조합하는 방식의 회화작업이 주류를 이룬다. 화면을 분할하여 서로 다른 요소들을 대비시키는 방식인데 뉴욕 초기 작품들에는 빈번히 등장하는 소재인 나무의 이미지와 실제 오브제인 나뭇가지를 병치시키는 방식의 화면구성을 보이고 있다. 김구림은 맨허튼의 마천루 사이의 극단적인 물질문명 속에 살면서 자연스레 자연과 생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다. 초기 그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나무는 자연을 상징하는 요소로 이해된다. 초기의 작품 <나무>(1985)에는 한국에서의 작업처럼 청사진의 형식을 빌어 목탄으로 연필을 형상화하고 있으나, 연필의 형상 뒤에는 실제 나무의 실루엣이 자리한다. 이 실루엣을 마치 수묵화의 기법처럼 처리하고 있는데 동양적 사유나 방법론을 구사하는 노력이 숨겨져 있다. 또 다른 작품 <반사선>(1986)의 경우, 다양하게 표현된 수목으로 화면을 구성한다. 나무의 그림자와 디자인적으로 그린 나무의 외곽선, 오렌지색의 점선들을 둘러친 나무의 외곽선이 화이트와 블랙으로 적당히 안배된 화면에 공존하는 방식을 구사한다. 한 화면에 밝음과 어둠, 사실적 형상과 추상적 형상, 실제와 그림자 등 이질적인 요소들이 병치되고 있는 것이다. 이후의 작업에선 이러한 이질적인 요소들의 병치가 좀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풍경과 나무>(1988)에서는 캔버스 위에 나뭇가지가 오브제로 부착되며 부착된 오브제 위에 캔버스와 같은 차원의 풍경들이 그려지거나, 캔버스와 오브제가 공존하면서 그려진 나뭇가지 형상이 실제 나뭇가지의 연결요소가 되기도 하는 등 이미지와 오브제의 병치와 혼합이 강화되기 시작한다. 나무를 소재로 실재 나무와 그것의 그림이 한 화면 위에서 혼합되어 가는 형태의 작품을 지속적으로 제작한다. 이러한 과정은 단순히 다양한 요소들을 조합하고 병치하는 조형적 즐거움의 추구보다는 동일한 사물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측면과 요소들을 탐구하면서 세계의 구성 원리를 체득해 가는 과정이었다 할 수 있다.
실제로 1990년부터는 1975년 처음 시도하였던 ‘음양’의 개념을 통해 좀 더 적극적으로 한 화면에 차원이 다른 이질적 요소들을 병치하는 방식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나무가 있는 풍경화 위에 오브제로서의 나뭇가지의 파편과 오브제의 외형을 병치하며, 또한 전혀 이질적 맥락의 기하학적 형태를 화면에 도입함으로 한 화면이 그림으로서의 이미지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오브제, 그리고 또 다른 맥락의 기하학적 언어가 공존하는 어법을 구사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서로 다른 화면들을 두 개나 세 개를 연결하여 하나의 작업으로 완성하는 방식을 취하기도 하는데, 여러 개의 차원을 함축한 화면들이 복수로 연결되게 되면 수다한 차원과 요소들이 서로 공존과 상호침투를 통한 재맥락화가 이루어진다. 그는 뉴욕과 LA를 중심으로 작업하면서 체류하는 지역의 환경여건을 살린 다양한 <음양>시리즈 작업을 지속하게 되는데, 점진적으로 회화적 차원을 떠나 다양한 오브제와 매체를 사용하여 입체와 평면이 혼합되는 등 점차적인 자유로움을 얻어가기 시작한다. 뉴욕 체류 기간 중 백남준과의 교분은 1970년 국내에서 개최된 <<제 1회 서울국제현대음악제>>에서 그가 연출한 백남준의 <피아노 위의 정사>나 1975년 파리에서의 <
미국체류기의 이러한 작업의 변화는 당시 전 세계 미술계를 풍미하던 포스트모던의 어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결과처럼 보인다. 이미지와 오브제의 이질적인 요소들, 그리고 순수 조형적 요소와 현실 비판적 요소들이 한 화면에 병치, 혼합하면서 미학적 언어와 사회적 메시지 등 서로 다른 텍스트를 콘텍스트화 하는 방식의 작업이 그것이다. 당시 뉴욕 화단을 풍미하던 포스트모던의 양식들은 모더니즘의 논리를 총체적으로 전복하는 파괴력을 가진 것들이어서 기실은 그간 김구림이 수행해오던 제작 태도와 근원적으로 접맥이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김구림의 경우, 늘 그러하듯이 포스트모던의 심층적 논리보다는 그 나름의 직관적 감수성으로 대상과 세계를 인식하며 그 예민한 감수성을 가장 적확한 방식으로 표출하는 일에 더 큰 관심이 있었다. 뉴욕에서는 뉴욕 링컨 센터에서 열린 <<미국 우수작가선발 전>>, 갤러리 뉴욕에서의 개인전, 루이스 아브론스 아트센터에서 <<뿌리에서 현실로 전>>, 돌로네스안 갤러리에서의 개인전, 갤러리 뉴욕에서의 <
그의 작품은 단순히 조형적 차원에서 현실과 괴리된 형식실험으로 머물지 않으며, 자연과 인공, 평화와 전쟁, 종교적 의미의 성과 속, 과거와 현재, 전통과 미래 등 다양한 대립과 충돌을 수반하는 이질적 속성들이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천재지변, 생태적 재앙과 같은 정치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관심과 그 해석의 문제들도 등장한다. 이는 그가 LA 체류 시절 겪은 1992년 흑인폭동의 경험도 큰 몫을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흑인들에 대한 편견과 사회적 불평등이 애꿎은 한국인들에게 폐해를 몰고 온 이 사건은 교민사회의 큰 충격이었던 점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LA 시절의 작품들은 좀더 어두운 색조를 보이며 좀 더 깊이 있는 사회적 성찰을 보이고 있는 이유이다. LA에서 그는 그의 <음과 양>시리즈에는 서양의 합리주의와 노장사상과 같은 동양의 사유가 병존한다. 이 시기에는 캘리포니아 The Modern Museum of Art에서의 개인전, LACA 갤러리에서 <<3개의 제안들: 김구림, 백남준, 임충섭 전>>, 찰스 위처치 갤러리에서의 <<불연속: 백남준과 김구림 전>>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며 넓은 국제무대로 활동영역을 넓혔다.[주석13]
첨단과학과 합리적 사유, 물질문명이 극대화된 뉴욕에서의 삶을 통해 그는 자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서 그러한 관심은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동양적 테제인 <음과 양>을 좀 더 구체적 시각으로 탐구하게 되었다. 물론 음양론에 대한 이론적 연구라기보다는 작가의 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는 사유를 발견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서양의 사유방식과는 이질적인 자신을 발견하게 되면서 인생과 세계의 근원이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음양>은 동양인에게는 매우 익숙한 사유방식임에 틀림없다. <음양>은 주역(周易)에 근거한 사유이고 태극(太極)이나 이기론(理氣論)으로 복잡하게 이론화 되어있다. 또한 노장사상(老莊思想)과도 연관이 있다. 초기 <제4 집단> 결성 시 ‘무체사상’을 운위했던 것 역시 서양적 사유방식과 차별화된 어법과 실천행위로 한국문화의 정체성과 독립을 지향했던 것이다. 오랜 뉴욕생활 동안 동양의 그것들과는 다른 복잡한 일상의 사물들과 이미지를 접하면서 자연과 우주의 근원과 신비, 생과 사, 생성과 소멸, 시작과 끝에 대한 깊은 성찰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성찰은 속세를 떠난 도인들처럼 금욕적이거나 신비주의적 태도를 취하지 않으며 현실과 직면해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주의가 필요하다. 이방인으로서 접하게 되는 복잡하고 쉽게 적응되지 않은 문화와 사회 속에서 삶의 근원적 문제를 통찰할 수 있음은 그에겐 역설적이게도 하나의 축복이기도 했다.
2000년 그는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미술회관에서의 개인전 <<현존과 흔적 전>>(9.25-10.10)을 계기로 귀국하게 된다. 귀국전에 보여준 그의 작품들은 1980년대 말부터 근작에 이르는 대형 회화와 오브제 작업들이었다. 귀국 이후 그의 작업은 좀 더 복잡하고 난삽한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 다양한 미디어와 소재들을 통해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에 대해 발언한다.
오랜 미국생활 후 돌아온 한국사회에서 맞닥뜨린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충격적인 점은, 경제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사회전반에 팽배해 있는 허구적 가치들과 이에 의해 상실되어 가는 인간성의 문제였다고 한다. 사회의 가치가 외양적인 면에 치우쳐 있고, 외모 중시 풍조가 만연되어 있는 점이 의아했다고 한다.[주석14] 강남엔 성형외과가 성업 중이며 외모에 투자하는 비용이 상상 이상인 점은 매우 흥미로운 점이었다. 2000년 이후의 작업에는 여성들의 나체와 눈동자, 입술 등이 자주 등장한다. 서양의 잡지에서 오려낸 이미지들의 콜라주와 이질적인 요소의 오브제가 한 화면에 병존하며, 거친 붓 터치가 이에 가세한다. 장난감 인형이나 동물 미니어처, 전자 기기의 회로 등이 등장하며, 석가모니 오브제나 형상, 장미나 여성들이 사용하는 립스틱, 춘화도 등 성적 상징물들이 집중적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해골과 검은 날개를 가진 천사 등 각양의 오브제와 이미지가 한 화면에 무질서하게 격정적으로 제시된다. 미국 체류시절 서로 이분화된 화면 구성을 통해 보여주던 서로 다른 요소들이 최근의 작업들에선 이미 그 화면의 이분법적 경계가 허물어지며 하나의 화면에 복잡한 이미지와 오브제의 꼴라쥬나 아상블라쥬 기법이 어지러이 공존한다. 작가는 이러한 작품의 제작 의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죽음과 탄생, 생성과 소멸, 희노애락, 선 과 악, 자연과 문명, 종교 그리고 인간의 삶의 흔적,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덧없는 짧은 인생의 여로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우주가 존재하는 날까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암흑 속에서 한줄기 빛으로 서서히 나타나는 반가사유상의 얼굴에는 자연과 현대, 인류문명의 숨가뿐 삶의 흔적들이 많은 영상들과 겁쳐 파노라마처럼 빠르게 스쳐간다. 이 세상에 인간들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탐욕에 눈이 어두워 고통 속에서 방황하다가 사라지는 우리 인생, 삶의 한 단면을 이 작품 속에서 드러내 보이고자 했다.” [주석15]
최근의 작품 속에서는 시리아 난민들의 문제, 존속살해나 사체유기 등 사회적 이슈가 되는 삶과 죽음의 문제들을 심도 있게 다루며 실제 공간에 주제와 관련된 설치 작업을 펼치고 있다.
3.작품세계
가. 실험성, 관습적 언어의 해체
이상에서 살펴본 작가 김구림의 긴 여정 속에서 그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요소가 있다면 무엇일까? 많은 작품들을 한마디 용어로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관된 그의 관심사 중 하나는 끊임없는 실험성과 부단한 관습의 해체이다. 세간엔 이러한 성향의 그의 작품에 대해 정체성이 부재함을 말하기도 하지만, 이는 작품의 심층적 이해 부족의 소치이다. 그는 기존의 관습은 물론, 자신이 영위해온 관행화된 제작태도나 방식, 어법 자체마저도 지속적으로 해체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의 많은 작품들에 붙는 ‘한국 최초’란 수식어는 이러한 그의 해체적 사유를 기반으로 한다. 한국 최초의 실험영화, 일렉트릭 아트, 해프닝, 대지예술 등등,.. 그의 작업은 전인미답의 영역을 개척하며 상식화된 관행을 깨기 위한 실험정신과 전위적 사유로 점철되어 있다. 그는 한국 전위미술의 첨병이며 그의 작업노정은 한국 전위미술의 역사이기도 하다. 전위 예술가들이 늘 그렇지만 숱한 실험적 작업을 개척하는 과정은 외로운 투쟁 자체였다. 늘 새로운 것을 찾아 노매드의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그의 전위성과 실험성은 제도적 교육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점이 가장 큰 요인일 것이다. 새로운 미술 운동을 펼쳤던 동년배 작가들은 일찌감치 대학의 교수가 되고, 권위의 정점에서 제도를 장악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미술사를 다시쓰기도 하는 등 제도를 견고히 하는 수성(守城)의 길을 걸었다면, 늘 그는 아웃사이더로서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태도를 견지하였다. 새로운 것을 위해서는 과감히 현실을 떨쳐버리거나 새로운 길을 떠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사실 그의 존재는 국내에서보다 해외에서 더 큰 관심을 가진다. 테이트 모던의 컬렉션[주석16]이나 전후 미술사를 조망하는 해외 대형기획전[주석17]에서는 그를 한국의 대표적 작가로 조명한다. 늘 앞서가고자 했던 그의 행보는 국제적 동향과 동시대적 흐름을 유지할 수 있었고, 한국적 상황 속에서의 작업이었지만 전후 세대 작가들이 경험했던 실존적 차원의 정신적 소산들은 글로벌 문맥 속에서 차별화된 언어로 자리매김하기 때문이다. 그는 늘 많은 호기심과 실험정신을 가지고 남이 하지 않았던 작업, 자신이 경험하지 못했던 세계를 지향한다. 나이를 먹어감에도 정주하지 않는다. 새로운 창작에 대한 내면적인 욕구가 끊임없이 그를 지배한다.
나. 존재의 불확정성, 중층적 시간성과 차연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또 다른 특성은 사물의 불확정성과 중층적 시간성의 문제이다. 초기 작업부터 ‘탈 회화’를 지향하며 오브제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던 그이기에 사물에 대한 인식에 있어 차별화된 그의 세계관이 반영된다. 사물에 개입되어 있는 이 불확정성과 중층적 시간성에는 지연과 앞서감이 공존한다. 시간이 지연되었을 때 나타날 존재의 상태, 또는 미래에 나타날 존재의 예견 등이 그것이다. 초기작품에 나타나는 죽음에 대한 문제나 시간이 개입된 사물의 가변성, 실험영화나 영상작업에서 보이는 비선형적 구조가 또한 그것이다. 얼음이나 불을 소재로 한 <현상에서 흔적으로> 시리즈 역시 시간성에 의해 사라지거나 회복되는 사물의 상태를 다루고 있다. 또한 중기에 나타나는 일상적 사물의 흔적을 다루는 드로잉 기법이 강조된 회화 작업 역시 사물이 시간성 속에서 거치는 변화과정을 순간적으로 포착하거나 관념화된 판단을 유보하거나 지연시키고 있다. 데리다 식의 ‘차연(差延 differance)’의 어법인 셈이다. 또한 말기의 다중적 화면을 연계시키거나 한 화면에 이질적인 요소들을 병치시킴으로 시간의 중층성은 물론, 다중적 요소들이 가지는 텍스트는 개별적인 텍스트들을 하나의 다른 콘텍스트로 바뀌게 하는 방식의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 그는 “나의 사물은 어떤 공간 속에 영원히 뚜렷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물거품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보이는 것 같으면서 보이지 않고 없는 것 같으면서 있는 것 같은 어렴풋한 무엇이다.”[주석18]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의 사물은 불확정하며 모호하고 가변적인 존재이다. 김구림의 작업 중 오브제에 채색을 가해 인위적으로 낡은 사물처럼 변화시키는 작업의 경우, 그가 인식하는 사물에 대한 지연과 존재불확정성의 개념이 가장 잘 구현되고 있다. 이 ‘장치된 낡음’은 도래할 시간을 예견하는 것이기도 하며,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고 또 존재할 수도 없는 부재물의 상태이기도 하다. 작위적 현존은 사물의 절대적 본질의 부정이며 찰나적 흔적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탐구이다.
다. 현실 직시와 실천적 발언
그의 작업은 전위성의 본연에 충실하다. 형식주의적 실험만을 일삼는 전위가 아닌 현실직시라는 실천성을 가진다. 아방가르드는 속성상 ‘예술을 통한 현실의 개혁과 전복’을 꿈꾸지만 개혁과 전복의 형식이 제도가 될 때, 양식으로 전락하고 만다. 역사적 아방가르드가 실패한 원인을 많은 학자들은 이곳에서 찾는다. 진정한 전위란 형식과 현실의 그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으며 양자의 경계지점에서 상호간의 긴장을 유지할 때 지속될 수 있다. 그의 작품세계는 초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현실을 외면하거나 현실과 괴리되어 있지 않다. 초기작품 <태양의 죽음>이나 <묘비>는 실존적 자기성찰의 반영이다. 군복무 중 부상을 당해 육군병원에 후송되어 있을 때, 동료 병사의 죽음을 경험하며 그것이 제기한 실존적 질문에 대한 추상적 표현이다. 그의 <1/24초의 의미>는 60년대 경제개발과 산업화의 사회적 문제를 양면적 차원에서 비판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정신 차릴 수 없이 빠르게 진행되는 경제개발 논리에 파괴되는 자연,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전락한 인간들, 사회적 파편들을 통해 시대의 상황을 다양한 시각으로 담아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것들을 바라보는 현대인의 무력감과 권태로움을 실험영화의 형식을 빌어 드러내었다. 특히 <제4 집단>은 문화예술 영역의 변혁을 위한 가히 혁명적 태도의 실현이었다. 그것은 경제개발과 민족증흥을 외처대지만 군사문화와 통제사회 속에서 정신적으로 척박한 상황, 그리고 기득권의 문화계가 이를 제도로 공고히 하며 안주하려는 상황 속에서 겪는 신진작가의 고뇌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 결행이었다 . 그러나 정치적 의미에서 혁명을 부르짖는 것이 아닌 문화와 예술적 차원에서 바라본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극복하기 위한 몸짓이었다. 물론 표현의 자유라는 논의 자체가 사치스러운 것이었던 엄혹한 통제사회 속에서 이러한 주장들이 온전히 이해되고 수용될 수는 없었지만, 그는 장르와 예술과 삶의 경계를 넘나들며 실험적 행보를 포기하지 않았다. 물론, <제4 집단>의 해체를 위한 정치적 압력과 통제는 한동안 그에게 실의와 좌절을 안겨주었지만 정치적 압력보다도 예술계 내에서의 의도적인 백안시의 문화계 풍토가 그를 더 절망시켰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새로움을 찾는 욕구는 현실적 여건에 굴복하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찾아 일본으로 미국으로 옮겨가며 현실의 문제들과 맞부딪쳤다. 특히 최근 <음과 양>시리즈에 등장하는 이미지나 오브제들의 복잡한 혼재는 오늘 우리시대가 겪고 있는 혼돈 그 자체이며, 혼돈 속에서 자연과 인간에 대한 가치상실의 문제에 대한 고발이라 할 수 있다.
라. 음양지묘(陰陽之妙), 이기취산(理氣聚散)
<음양>은 김구림의 작품에서 90년대 말 이후 현재까지 지속적인 명제로 탐구되어 오고 있는 개념으로 그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며, 앞의 세 가지 요소를 포괄하는 개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음양은 유교적 세계관의 핵심 개념이며, 불교나 사머니즘과 함께 오랫동안 한국인의 집단적인 사유로 변형되어 왔다. 선인들은 끊임없이 음양의 개념을 가지고 존재와 세계, 그리고 심성 등 인간의 삶을 설명해 왔다. 이에 대한 입장 차이는 조선시대 사색당쟁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유교는 매우 현실적인 사유체계였기 때문이다. 음양은 상태가 고착되거나 정체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변화한다. 따라서 존재는 규정되거나 단정될 수 없고 끊임없이 기존의 양태를 변모하는 본성을 가진다. 김구림은 이러한 음양의 사고를 통해 기존의 양식뿐만 아니라 자신이 구축해 놓은 체계나 가치까지도 해체시키며 새로운 것을 향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음양>에 대한 학문적 연구나 그에 대한 실천보다는 일반적이며 포괄적인 개념의 동양적 사유로서의 음양을 체득하며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음양은 태극(太極)과 이기(理氣) 개념을 근거로 설명되는데, 태극은 음과 양이 끊임없이 반복하는 우주 만물의 원리, 즉 음양의 기본원리인 셈이다. 주역과 태극의 원리를 통해 인간과 세계의 원리를 탐구한 성리학자들의 중심논의는 이기론(理氣論)이다. 우주와 삶의 근본 원리를 이(理)로 볼 것인가 기(氣) 로 볼 것인가의 문제이다. 중국 송대로부터 조선 성리학으로 이어져 집대성된 율곡의 이론에 의하면, 이와 기는 ‘서로 섞여있고(渾淪)‘하여 서로 ’사이가 없다(무간)‘고 말하였고, 형태와 위치가 없는 이가 형태와 위치가 있는 기의 주재가 된다고 하여 이와 기 사이의 기묘한 도(理氣之妙)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기지묘(理氣之妙)‘란 이와 기는 스스로 독립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러나 ‘서로 뒤섞여 본성이 변하는’ 잡(雜)됨이 없다 한다. ‘이기지묘(理氣之妙)’의 철학에서는 이념적 ,정신적 측면과 현실적.물질적 측면이 괴리하지 않고 높은 차원에서 조화됨을 볼 수 있다. 율곡은 음양과 태극에 대해서도 음양은 본래 시작이 없고 순환하며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또한 태극은 어디에나 있고 만품의 근저가 되는 것으로 결국 음양이 서로 변역(變易)하는 그 가운데 태극의 이(理)가 있다는 것이다.
김구림의 작품세계의 중심개념인 ‘음(陰)과 양(陽’은 초기의 무체사상(無體思想), 중기의 사물에 대한 이해방식인 시간성의 중층성, 그리고 미국 체류기 부터 작품의 일관된 명제로 사용하고 있는 용어에서 보듯 작품 전체의 일관된 기저를 형성하고 있다. 미국체류 초기에 보인 이분법적 화면의 분할을 통해 동서양, 정신과 물질 등 이질적인 요소들의 병치는 다소간 이기 이원론적 입장을 보이기도 하지만 근자에 나타나는 한 화면과 공간에서 서로 이질적인 것들의 복합체계는 리(理)와 기(氣),음(陰)과 양(陽) 서로 속성이 다른 것이지만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는 음양지묘(陰陽之妙)의 세계를 구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태극과 음양의 순환, 그리고 이기의 흩어지고 모임의 관계로 세계를 인식하는 태도로도 볼 수 있다. 그의 작업은 고도의 논리에 의존한다기보다는 이(理)와 기(氣)의 ‘모이고 흩어짐(聚散)’을 자연스럽게 반영하는 태도로 읽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작품을 조선의 성리학적 입장에서 본다면, 화담이나 퇴계보다는 율곡의 체계에 좀 더 근접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음과 양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고 음과 양은 상황에 따라 끝없이 변하며 음(陰) 속에 양(陽)이, 양(陽) 속에 음(陰)이 공존하는 것이다. 최근의 작업들은 과거에 비해 좀 더 음양의 상관성이 주는 오묘함 즉, ‘음양지묘(陰陽之妙)’를 현대적 맥락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
4. 나가며
김구림은 한국 전위예술의 첨병이며 하나의 역사이고 중요한 아이콘이다. 그의 모든 작품들에 관한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의 일환으로 탐구된 이번 연구는 3,000여점의 전작을 대상으로 하여야 하나 작품 전체를 수록하기엔 워낙 양이 많고, 자료나 작품의 망실, 소재불명 등의 문제가 상대적으로 많아 한계를 가지는 것이었다. 또한 작가가 소유한 과거의 작품사진들도 오랜 시간이 지난 탓에 슬라이드 상 스크래치나 변색 등이 많아 이를 재촬영하거나 디지털 복원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가능한 많은 작품과 자료를 찾아 수록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작가와의 심층 인터뷰, 국내외 전문가들과의 인터뷰나 집담회 등을 통해 다양한 활동과 경력, 작품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수용하였고. 작가 어록, 비평문 등 집필에 필요한 전문적인 텍스트 확보에도 주력하였다.
이러한 정황과 절차를 바탕으로 김구림의 작품세계를 초기, 중기, 후기의 3기로 나누어 분석하고 작품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사유를 실험성과 관습적 사유의 해체, 현실직시와 실천적 행위, 시간의 중층구조, 음양의 이기이원론적일원론 등 몇 가지 요소로 분석하였다. 그의 작품세계가 가지는 스펙트럼과 관계된 영역이 매우 넓은 관계로 혹자는 김구림의 작품세계에 정체성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일관되게 기존의 관습적 언어, 자기 자신이 구축한 언어까지를 포함하여 이를 지속적으로 해체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존재와 심성은 정태적인 것이 아니며, 시공간의 상관성 속에서 끝없이 변화한다. 그의 작품 속에 내제된 사물에 대한 비규정성, 불명확성, 모호함과 가변성 등은 그러한 사고에서 비롯된다.
또한 그의 실험성은 현실과 괴리된 양식상의 새로움보다는 현실과 삶에 기반한 것으로 직설적이지는 않지만 관습적 현실을 비판하는 언어이기도 하다. 이 점은 그가 아방가르드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아방가르드는 예술의 추상적 부정도 삶과의 낭만적 화해도 아니다. 그 목표는 삶과 예술 이 양자의 관례들에 지속적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것, 예술과 삶을 적당히 결합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양자의 긴장을 유지시키는 것이다. 진정한 아방가르드는 끊임없이 제도와 예술적 관습 사이의 긴장관계를 탐구하며 제도에 함몰되지 않으려 한다. 어제의 실험과 대안이 오늘의 제도가 되어 버리는 오늘의 상황 속에서 진정한 아방가르드로 남기는 쉽지 않다. 아방가르드는 제도나 양식이 아니며, 예술의 제도화에 대항하는 끊임없는 부정정신이다. 사회학적 환원주의에 깊숙이 매몰되어 있는 미학적 논의, 혁신을 부르짖지만 제도와 자본에 철저히 종속되어 있는 예술, 그리고 서구 포스트모던의 논의에 기반한 탈 역사주의나 그릇된 다원주의가 팽배해 있는 것이 우리 미술계의 현실이다. 김구림은 지속적으로 현실의 문제와 형식실험 양자의 긴장관계를 유지해오고 있어 그의 전위적 위상이 차별성을 가진다.
또한 그의 작업들은 서구적 어법을 변용하여 <음과 양>이란 동양적이며 한국적 사유를 기반으로 한다. 이 역시 음양에 대한 관념적 해석보다는 우리의 일상과 삶 속에 도사리고 있는 다양한 사태들을 근거로 하고 있다. 서로 이질적인 요소들을 조합하고 혼융하며 단일한 텍스트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정황들을 재맥락화함으로 끝없이 변화하는 실체를 탐색한다. 물론 이러한 분석이 그의 작품세계와 정신세계를 총체적으로 담아내기엔 분명 한계가 있다. 특히 그의 작품세계를 조선의 성리학이라는 한국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국적 언어와 성격으로 규명하려한 점은 하나의 단초이기에 좀 더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 이러한 분석이 그의 작품에 대해 혼돈칠규(渾沌七竅)[주석19]의 우를 범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이 가지는 다양한 의미와 층위를 접근해가는 하나의 방법이길 기대하고 음양지묘(陰陽之妙)와 이기취산(理氣聚散)에 관한 논의는 그의 작품이 가지는 전통적 사유와의 관계, 한국미술의 정체성의 맥락에서의 중요한 위상을 파악해 가는 하나의 서설(序說)이 되기를 기대한다.
1. 초기 앙포르멜 경향(1958-1967)
ㅇ <태양의 죽음> 시리즈
1950년대 말 화단을 풍미하던 서구의 앙포르멜의 양식을 띄고 있으며, 판넬 위에 검은색 유화물감과 비닐을 이용하여 죽음을 주제로 한 작품. 전후의 사회적 상황과 폐허화된 정신세계, 가치관의 실종 등의 상황 속에서 실존의 문제를 질문하는 일련의 작업. 작품에 나타난 이러한 죽음의 문제에 직접적인 동인은 작가의 군생활에서 겪은 동료들의 죽음에서 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말하고 있으나 전후 카오스 적인 사회적 상황에 접한 실존적 의미의 작업으로 이해됨
<태양의 죽음 1>, 나무 패널 위에 유화물감 및 비닐,107x91,1964(테이트모던 소장)
2. 실험과 전위운동기(1968-1972)
ㅇ<1/24“의 의미>,실험영화,1969
1960년대 한국의 시대상과 산업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의 하루의 일과를 그리되 대사나 일관된 스토리텔링 없이 시대의
편린들을 이미지 꼴라지 방식의 비선형적 형식으로 편집한 한국최초의 실험영화. 작가는 이미지들을 의식적으로 독립시켜 구성하
며 산업사회적 이미지들은 빠른 속도로, 인물의 의식은 느린 속도로 편집상의 변화를 주고 있으며, 화면의 구성방식을 우연성과
탈맥락적 방식으로 제시하고 있다
<1/24“의 의미>,실험영화,1969
ㅇ<현상에서 흔적으로>, 대지예술,1970,
한국 최초의 대지예술이라 평가되는 작품으로 살구지 다리 한강변 뚝방에 기하학적 형태를 유지하도록 불을 질러 그 흔적을 남기는 과정예술임. 불의 흔적은 일정 기간 남았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은 원래의 형태로 돌아가게 됨을 개념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서구의 대지예술이나 개념예술과 유사한 형식을 띄고 있지만, 정월 대보름 쥐불놀이와 같은 민속적 요소를 현대적으로 구현한 실험미술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현상에서 흔적으로>, 대지예술,1970,
ㅇ<기성 문화에 대한 장례식>,1970, 거리 퍼포먼스(제 4 집단)
작가는 1969년 말 신진작가들에 의해 결성된 협회의 발족에 핵심적 역할을 하지만,그룹이 가지고 있는 실험적 성향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미술 뿐만 아니라 무용,연극,음악,패션 등 다양한 예술영역의 신진작가들과 제4집단이란 단체를 결성하며,기성 문화와는 전혀 다른 예술 조직을 결성하며 가두 퍼포먼스, 메일 아트 등 실험적인 작업들을 펼친다. <기성문화에 대한 장례식>은 제 4 집단의 성격을 가장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작업으로 사직공원에서 제 4 집단의 선언문을 낭독하고 준비한 관 속에 기성문화를 상징하는 사물들을 집어넣어 장례식을 행하는 상징적인 제의를 행한 후 태극기와 제 4 집단의 기를 앞세워 작가들이 관을 들고 사직공원을 출발하여 광화문을 거쳐 제 2 한강교에서 강물에 관을 떠내려 보내는 거리 퍼포먼스를 행하였다. 제 4 집단의 실험적 행위들은 정부로부터 감시를 당하던 때여서 이 행위예술은 시청 앞에서 경범죄로 제지를 당한 뒤 제 4 집단이 해체되는 계기가 되었던 작품으로 예술로 사회적 발언을 꾀한 초기의 작품임
<기성문화에 대한 장례식>,1970, 거리 퍼포먼스(제 4 집단)
3. 도일 이후(1973-1983)
ㅇ <삽>,<도끼> 등 오브제 위에 유화물감,1975
삽이나 도끼와 같은 실제 사물에 유화 물감으로 날과 같은 일정 부분을 그림으로써 사물의 실제감을 더하고자 하는 의도를 개입시키 고 있다. 이 시기에는 의자나 양동이 등에 낡거나 녹슨 이미지를 그려 넣어 실제적인 효과를 강화시키는 작업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 오브제와 이미지의 상관 관계에 대한 각성을 불러일으키는 개념적 작업을 시도 하고 있다. 사물 위에 실제와 같은 이미지를 더 한다 하더라도 그 이미지가 허구임을 여실히 드러내는 역설적인 어법을 구사한다. 실제와 이미지 사이의 상관성을 질문하는 작업으로 기간 동안 사물의 실제와 관념, 이미지와 오브제의 상관성에 관한 개념적 질문을 꾀하던 작품으로 이 시기의 대표적 작품임
<삽>,<도끼>, 오브제 위에 유화물감,1975
아사천 캔버스 위에 마치 건축물의 청사진 도면의 일부처럼 사물의 실루엣을 그리고 대상의 길이와 사물의 상태, 사물의 이름 등을 드러내는 방식의 드로잉적 성격의 작품들. 아크릴과 목탄을 사용한 드로잉으로 목탄을 사용한 이유는 사물이 인간의 인식에 의해 파악되는 것이라 할 때 인간의 인식이 시간의 변화에 따라 고정될 수 없음으로 규정된 형태 역시 주어진 시간 내에서 규정될 수밖에 없는 한시적인 흔적임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이 작업 역시 도일 이후 이미지와 오브제의 관계, 오브제와 인식의 관계를 질문하는 개념적 작업으로 시기의 대표작임
<빗자루>,종이 위에 아크릴과 목탄,60x80,1978
4. 도미 시기 (1985-2000)
ㅇ<음.양>시리즈
미국 체류 시기 이후 모든 작품의 제목은 <음양>시리즈로 제작된다. 입체 작품보다는 평면 작업이 대세를 이루고 있으며 단순 회 화 작업과는 달리 화면의 일부에 오브제가 부착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임, 화면은 주로 서로 다른 이미지의 두 개 내지 세 개 또는 그 이상의 화면의 조합으로 구성되며, 개별적인 화면들은 서로 다른 형식과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 내용에 있어서는 동양적 요소와 서양적 요소, 입체와 오브제, 그려진 이미지와 잡지에 수록된 사진이미지 등이 혼합되어 있다. 또한 자아와 타자 ,남과 여, 밝음과 어둠, 양화와 음화 같은 상반된 개념의 이미지들이 양분되거나 통합된 화면 안에 때로는 직설적으로 때로는 은유적으로 자리한다. 이 시기는 서로 상이한 이미지와 오브제가 작품 안에 꼴라주 방식으로, 또는 앗상블라주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특성을 보인다.
<음양88>,캔버스 위에 아크릴,149x145,1988
5. 귀국 후 현재(2000-2021)
ㅇ<음과 양> 시리즈
<음양>시리즈의 연장선 상에 작업이지만 좀 더 차원을 달리하는 다양한 이미지와 오브제가 등장하며 평면 작품보다는 설치나 영상작업과 같이 공간을 점유하는 방식의 작업으로 변모한다.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나 속성의 경우도 좀 더 많은 오브제들이 화면에 부착되며 성적인 이미지들이나 컴퓨터 칩이나 전자회로 등과 같은 정보사회의 이미지들도 빈번하게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해골, 날개 등과 같은 죽음과 부활의 이미지들도 자주 등장한다. 또한 종교적 상징인 부처상이나 기독교의 성상, 노장과 같은 동양의 고전 등 서로 이질적인 이미지와 오브제가 복잡하게 혼합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전기의 <음양>시리즈에 비해 카오스적인 현대적 삶의 현실적 문제들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으며 좀 더 문명비판적 세계관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음과 양 7-S133>,나무 패널 위에 혼합 매체 및 오브제, 30.5X23, 2007,
김구림은 한국 전위예술의 첨병이며 하나의 역사이다. 그의 모든 작품들에 관한 디지털 아카이브구축의 일환으로 탐구된 이번 연구는 전작을 대상으로 하여야하나 3000여점에 달하는 작품 전체를 수록하기엔 워낙 작품의 양이 방대하며, 회화뿐만 아니라 입체와 영상, 그리고 인접 공연예술, 퍼포먼스, 도시계획 구상등 광범위한 활동영역을 가진 작가로 국내는 물론, 일본과 미국장기 체류 등의 여건으로 자료나 작품의 망실, 소재불명 등의 문제가 상대적으로 많아 한계를 가지는 것이었다. 또한 작가가 소유한 과거의 작품사진들도 오랜 시간이 지난 탓에 슬라이드 상 스크래치나 변색 등이 많아 이를 재촬영하거나 디지털 복원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가능한 많은 작품과 자료를 찾아 수록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작가와의 심층인터뷰, 국내외 전문가들과의 인터뷰나 집담회 등을 통해 다양한 활동과 경력, 작품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수용하였고. 작가 어록, 비평문 등 집필에 필요한 전문적인 텍스트 확보에도 주력하였다.
이러한 정황과 절차를 바탕으로 1958년부터 2022년까지 창작된 김구림의 작품 1,873점, 카다로그 116건 등 작품 외 자료 296 점을 대상으로 디지털 자료화 하였다. 연구를 위해 기초 연구를 바탕으로 기본적인 자료 조사와 작가 인터뷰, 전문가들의 자문을 위한 집담회, 국내외 평론가 및 큐레이터를 대상으로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그의 작품 세계를 조사 연구하였다. 그의 작품세계는 초기, 중기, 후기의 3기로 나누어 분석하고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사유를 실험성과 관습적 사유의 해체, 현실 직시와 실천적 행위, 시간의 중층 구조, 음양의 이기이원론적일원론 등 몇 가지 요소로 분석하였다. 물론 이러한 분석이 그의 작품세계와 정신세계를 총체적으로 담아내기엔 한계가 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이 가지는 다양한 의미와 층위를 접근해가는 하나의 방법이길 기대하고 음양지묘(陰陽之妙)에 관한 심층적 연구는 그의 작품이 가지는 전통적 사유와의 관계, 한국 미술의 정체성의 맥락에서의 중요한 위상을 파악해 가는 하나의 새로운 관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일러두기
ㅇ작품의 분류는 장르별-제작년도-일련번호의 방식으로 분류됨
ㅇ작품외 자료의 경우는 매체종류-발행(제작)년도-일련번호의 방식으로 분류됨
ㅇ원고에 수록된 논문,작품,전시명 등은 일반적인 표기방식을 따라
ㅇ단행본의 경우『 』, 논문의 경우「 」, 작품명의 경우〈 〉, 전시명의 경우《 》로 표기하였음
ㅇ 작품표기의 경우 작품명,재료,규격,제작년도순으로 하되 작품의 규격은 높이×폭(너비)×깊이로 표기하며 cm단위로 한다
ㅇ 수록작품의 우선 순위는 도판 수집이 가능한 작품을 기준으로 작가와 협의하여 선정함
ㅇ 기타 디지털 정보의 표기에 관한 사항은 공통기준에 따른다.
ㅇ 세부적인 자료의 분류기호는 아래와 같다
김구림 연구 - 일련번호 표 작성
1. 작품
장르-제작 년도-번호 0001~
예시) Painting 1956년 제작 PA56-0001
|
장르(영문) |
장르(국문) |
약자 |
|
Painting |
평면회화 |
PA |
|
Object painting |
오브제 회화 |
OP |
|
Object |
오브제 |
OB |
|
Performance |
퍼포먼스 |
PF |
|
Photography |
사진 |
PHOTO |
|
Media |
미디어 |
M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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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allation |
설치 |
IN |
|
Collage |
콜라주 |
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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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collage |
포토콜라주 |
P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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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화 |
P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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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용 예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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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일련번호의 표기 방법은 장르-제작 년도-작품 번호 순이며, 위와 같은 작품<자화상>의 일련 번호는 아래와 같다. PA (Painting) 56(1956) -0001(0001) PA-> (Painting의 약자) 평면 회화 56-> 1956년 제작 0001 -> 자료집에 등록된 번호
따라서 <자화상>작품은 1956년에 제작된 자료집 번호 1번의 평면 회화 작품이다. |
2. 작품 외 자료
종류-작년도-번호 0001~
예시) Catalogue 1956년 제작 CA56-0001
|
자료 종류(영문) |
자료 종류(국문) |
약자 |
|
Catalogue |
카탈로그 |
C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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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chure |
브로슈어 |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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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card |
엽서 |
POS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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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vitation |
초대장 |
INVI |
|
Leaflet |
리플렛 |
LE |
|
Certificate |
상장 (증서) |
CE |
|
Photography |
사진 |
PHOTO |
|
PASSPORT |
여권 |
PASSPORT |
|
Newspaper |
신문 |
N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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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용 예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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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외 자료 일련번호의 표기 방법은 종류-제작 년도-자료 번호 순이며, 위와 같은 자료<현대작가 미전. 공모전>의 일련 번호 은 아래와 같다. BR (Brochure) 61(1961) -0001(0001) BR-> (Brochure의 약자) 브로슈어 61-> 1961년 생산 및 제작 0001 -> 자료집에 등록된 번호
따라서 <현대작가 미전.공모전>자료는 1961년에 제작된 자료집 번호 1번의 브로슈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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