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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승택Lee Seung-Taek

1932-12-01

#조각

책임연구원 | 이인범

Lee Seung-Taek

작가소개

한국 미술계에서 작가 이승택만큼 실험적인 태도로 미술의 경계를 새롭게 확장시키며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이룩한 작가도 흔치 않다. 근대 이래 서세동점기에 먼저 서구화한 이웃나라 일본에 의해 한국이 식민화되었던 시절인 1932년에 이승택은 한반도의 동북지역인 함경남도 고원에서 태어나, 1945년 해방과 더불어 남북으로 분단된 북한 공산체제에 살며 성장기를 거쳤다. 그리고 1.4후퇴시 월남하여 1955년 서울 홍익미대에 입학하면서 서울을 거점으로 삼아 미술활동을 시작하고 있다. 그의 재능은 북한에서 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군청으로부터 김일성 흉상 조각을 의뢰받아 군청 정문에 설치한 공적으로 군 입대를 면제받았는가 하면,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국전 출품, <맥아더 장군상> 등 여러 기념 조각프로젝트들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데서 잘 확인된다.

이승택의 작가활동은 미대에 입학하여 근현대 서구 조각 전통을 학습하는 데에서 시작되고 있다. 그런데 이내 곧 자신이 몸담은 한국 고유의 삶의 세계의 일상적이고 문화인류학적인 사물관에 뿌리를 두고, 서구적 경향에서 벗어나 반 조각적이고 비 물질적인 작업으로 빠져들며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해가고 있다. 대학 재학 중에 그는 이미 고드렛돌이나 옹기 등 오브제 작업에 착수하고 있으며,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바람, 불, 물 등 물질성이 옅은 자연 매체 설치나 퍼포먼스 등을 펼치며 민속 오브제나 놀이, 일상 생활 관습과 사물 등 ‘미술’의 외부성을 거침없이 예술의 영역 안으로 끌어들여 실험하고 있다. 한편, 1970년대부터는 다큐멘터리 사진을 통해 자신의 작품활동이나 대지에서 펼쳐지는 인공적 사물의 세계를 새롭게 발견해 들어가며 재해석하는가 하면, 그에 기초한 사진 몽타쥬나 꼴라쥬, 사진에 드로잉과 페인팅을 하여 인공물들의 다양한 파노라마를 읽어내고 있다. 자연이나 대지 혹은 인공의 문제, 지구 환경, 남북분단, 종교, 섹슈얼리티 등 자연과 다양한 인간의 삶과 문제는 그의 예술의 핵심을 구성하고 있다.

그의 실험적인 작품활동은 그의 나이 30대인 1960년대 초에서 1970년대 초까지는 신상회, 원형회, 한국현대조각회, 한국 AG협회 등 한국 현대미술운동사에 획을 긋는 일련의 그룹들과의 연대 속에 전개되고 있다. 하지만 이승택의 작품활동과 세계는 여러 측면에서 매우 개별적이고 독자적이며 그만큼 전위적이고 실험적이다. 작업장소나 발표장소가 흔히 생각하듯이 스튜디오나 갤러리 뮤지엄에 갇혀있지 않다. 그는 마치 한강변의 난지도나 북한산 같은 서울 주변의 자연이 마치 자신의 스튜디오이거나 작품 발표장같이 활동무대로 삼고 있다.

1971년 나이 40이 다 되어 첫 개인전을 개최한 이래, 그는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미술회관 주최로 연 ≪실험미술50년-이승택초대전≫(1997), MIA미술관과 백남준 아트센터, 국립현대미술관의 초대전 ≪이승택 – 거꾸로, 비미술≫(2020) 등 모두 22회에 걸쳐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그룹전이나 상파울루 비엔날레를 비롯한 300여 국내외 기획전에 초대 출품하였다. 그는 공간미술상, 동아미술상, 백남준국제미술상, 김세중조각상, 보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소마미술관 등을 비롯한 국공립미술관, 일본 아오모리미술관, 홍콩 M+뮤지엄, 영국 테이트모던 뮤지엄 등 다수의 국내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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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약력

1932            함경남도 고원읍에서 출생하여 일제식민체제와 북한 공산체제에서 성장하다.

1950            고교시절 김일성 흉상을 제작하여 군청 정문에 세우고 군복무를 면제받아 미술가로 활동하다한국전쟁 중 UN군 북진 시 인민군을 상대로 빨치산활동을 하다.

1951-1954    1.4후퇴 시 월남하여 대한민국 군에 복무하다.

1955-1959    홍익대학 미술학부 조각과에서 수학하며국전을 통해 미술계에 데뷔하고 <맥아더장군상등 다수의 기념조각 제작 프로젝트에 참여하다.

1962            6회 현대작가초대전≫ 및 제1회 신상회 회원전에 출품하여 회원이 되다.

1964            2회 원형회 조각전에 출품하다.

1969            6회 파리청년작가전 출품작가전과 한국현대조각회 창립전에 출품하다.

1970            일본 오사카 EXPO 70 일본엑스포국제전에 출품하다.

1971            첫 개인전을 개최하고 한국아방가르드협회 제2회전 '72-A.G: 탈관념의 세계11회 상파울로비엔날레에 출품하다.

1977            2회 공간대상전에 출품하고 조각부문 우수상을 수상하다.

1978            1회 동아미술제에 출품하고 동아미술상을 수상하다.

1986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개관 기념전에 야외조각 <무제-마이산에서>를 설치 출품하다.

1988            일본 아오모리 국제조각심포지엄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다.
서울올림픽기념 세계 현대 미술제 세계 야외 조각 초대전에 <기와 입은 대지>를 서울올림픽공원에 설치 출품하다.

1990            베니스비엔날레 커미셔너를 맡다.

1997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아르코미술관 주최로 실험미술 50년 이승택 초대전을 개최하다.

2004            MIA미술관 초대 개인전을 개최하다.

2012            1회 백남준아트센타국제예술상을 수상하고 수상기념전을 개최하다.

2017            뉴욕 레비고비갤러리베니스 팔라초카보토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다.

2018            런던 화이트큐브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다.

2020            2020창원조각비엔날레 특별전 이승택한국의 비조각과 국립현대미술관 이승택 – 거꾸로비미술을 개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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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택의 ‘비조각’ 그림

 

이인범(아이비리인스티튜트 연구소장, 전 상명대학교 교수)

 

이 글의 의도는 매우 단순하다. 기록에 기초해 ‘조각가’ 이승택의 작품세계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변주되어 왔는지를 개관하는 데에 있다. 한국 현대 미술의 흐름에서 이승택만큼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작가도 흔치 않다. 한국의 미술현장에서 ‘실험(experiment)’ 그 자체가 역사적 가치로 고려되기 시작했던 1990년대에,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은 ‘실험미술 50년’을 조명하는 연례적인 전시기획에 착수하며 그 첫해에 ≪실험미술 50년, 이승택 초대전≫(1997.9.12-9.24,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미술회관)을 개최한 데서도 확인되듯이, 그는 늘 한국현대미술계에서 실험성과 전위성의 아이콘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이승택은 1955년에 홍익미대 조각과에 입학하여, 그 이듬해 제5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경복궁미술관 , 1956.11.10-11.30)에 <무희(환희)>(1956)[도 1]를 포함한 3점의 조각 그리고 제4회 ≪홍익대학미술전람회(졸업작품전)≫(1958.11.16-11.25, 경복궁미술관)에 <역사와 시간>(1958)[도 2]과 <생각하는 사람>(1958)을 발표하며 미술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23세의 나이에 또래들보다는 늦게 입학했어도, 입학하자마자 데뷔한 그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등장한 제1세대 모더니스트 작가군에 함께 합류하며 시작하고 있다. 알다시피 한국에 미술대학이 설립되는 것은 해방 이후부터이고 거기서 공부한 젊은이들이 미술현장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말이다. 그들은 일제 식민지시대의 재현미술을 거부하고 제2차 세계대전 후 전 지구적으로 확산된 앵포르멜 미술에 공명하며 활동을 개시하여, 훗날 이른 바 ‘한국적 모더니즘 미술’을 일으키며 화단의 새로운 주류로 자리잡았다.

이승택 역시 남들같이 서세동점의 세계사적 전환기에 일제 식민지 그늘에서 태어나 만주사변,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고 남북분단으로 인한 한국전쟁을 겪었다. 그렇지만 함경남도 고원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전래의 사물제작과 그리기에 타고난 능력을 발휘하며 북한 공산체제에서 살다가 전쟁 중 필사적으로 월남하는 등 여러 체제를 가로지르며 그가 겪은 사물의 질서의 붕괴와 혼돈을 배경으로 펼쳐진 그의 작품세계는 동세대의 그 어떤 다른 작가들과도 다르다. 서구 ‘조각’을 향한 판타지에서 출발했지만 그는 데뷔 이래 60여 년 동안 내내 ‘반(反)-조각적’ 태도로 살았다. 그에게 예술은 다만 자기 부정이나 기성의 권위에 대한 저항적 삶의 한 형식이었다. 전통적인 사물관이나 자연관, 산업사회의 일상적 사물의 세계와의 경계를 오가며, 그는 ‘비(非)조각’이라는 이름으로 드로잉, 회화, 오브제, 퍼포먼스, 설치, 사진 등 다양한 형식으로 서구 근대의 산물인 ‘미술’을 극복하려는 시도를 거듭했다.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에서 그의 활동이 어디에 위치했었는지는 ‘자기 혁신의 논리’(오광수), 기질과 끼에 의한 ‘내면적 개방성’을 지닌 ‘조각 아닌 조각행위’(윤우학), ‘조각의 새로운 영역, 그 표현의 새로운 가능성에 도전’(이일) 같은 그와 동반했던 평론가들의 언급들에서 잘 묻어난다.

 그렇지만 기성의 권위와 아방가르드적 전복, 문화인류학적이고 역사적인 사물의 체계와 서구 ‘미술’, 오브제와 행위, 인위성과 자연성, 주체와 탈 주체, 근대-전근대-탈근대가 서로 충돌하는 가운데 이승택이 ‘비조각’이라는 이름으로 추구해 온 매력들은 단지 실험성이나 전위성으로 환원시키기엔 너무 복합적이고 중층적이다. 최근 그의 ‘비조각’ 세계는 여러 연구자나 큐레이터들에 의해 ‘비 물질화’(오상길), 서구 모더니즘이나 형식주의 미술로부터의 ‘탈주’(김찬동), ‘원기론적 세계’(김융희), ‘사용의 휴지’(조앤기), ‘위반의 미학’(정연심) 등 여러 가지 풍요롭게 평가되고 있다. 그런데,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미학적 판단이나 해석 이전에 그 전제가 되어야 할 왜, 언제, 어떠한 맥락에서 시도되었는지 등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일차적인 궁금증은 여전히 충분히 풀리지 않은 채 과제로 남아있다.

 그것이 역사적 범주 밖에서 전개된 일이 아닐진대, 이승택의 작품 활동이라고 역사적 사실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지루한 일이긴 하지만, 그래서 일차적인 자료들을 조사하고 기록하는 일에서 출발하고, 각각의 사실들 사이의 전후 인과관계 등을 따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에 따라 이 글은 일차적인 자료의 조사를 바탕으로 향후 아카이빙 방향을 모색하고, 보다 진전된 연구를 위하여 거칠게나마 이승택의 작품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연대기적인 지도 한 장을 손에 거머쥐는 데에 목표를 둔다. 물론 그의 작품세계의 전개가 인과의 사슬에 매어있지 않고 딱 떨어지도록 시기별로 나눌 수 있는 그 무엇은 아니다. 다만 “모든 양식이 모든 시대에 가능한 것이 아니다”라는 하인리히 뵐플린의 말에 기대어 특히 몇몇 개인전들에 주목하여 다음과 같이 네시기로 분절하여 개관하고자 한다.

 

1) ‘조각’과 반-조각적 실험 : 1955-1971    

적극적으로 서구 ‘조각’을 수용하면서도 그에 맞서 고드랫돌, 옹기 같은 토속적이고 문화인류학적인 오브제나 혹은 각목, 유리, 비닐, 양철 등 산업화 시대의 재료들 그리고 연기, 불, 바람 등 보이지 않는 기체에 의한 ‘형체 없는 조각’ 등 반-조각적 오브제, 설치, 퍼포먼스 작업을 펼치고 있다.

2) 줄(끈) 작업, 존재 질문과 그 방법 : 1972-1983

    누드 조각, 백자, 고서, 책, 지폐 같은 문화적 기억을 지닌 인공물들, 바위나 나뭇가지 같은 자연 사물들을 줄로 묶어 그 존재를 드러내고, 더 나아가 공간을 ‘사유(私有)’하며 대지에 개입해 들어가고 있다.

3) ‘비조각’적 세계상 : 1984-1990년대 초   

  무속적 삶, 불(火)의 문화인류학적 축제성이나 분신(焚身), 환경문제, 남북분단현실, 종교적 우상성, 섹슈얼리티 등 삶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며, 1970년대의 오브제 중심에서 벗어나 설치미술, 대지예술, 행위예술, 사진 등 다양한 형식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4) ‘포토 픽쳐’ : 1990년대 이후

    사진 매체에 토대를 두고 콜라쥬, 몽타쥬, 드로잉이나 페인팅, 세트 촬영 등을 통해 이미지 작업에 초점을 맞추어 다양한 삶의 세계를 ‘포토 픽쳐’로 구현하고 있다.

  

‘조각’과 반-조각적 실험

 

청년기에 이승택을 사로잡은 것은 서구 ‘미술’, 그 가운데서도 ‘조각’이었다. 이는 나무 부조 <모자상>(1955), 3명의 춤추는 무희들을 모델링한 <환희>를 비롯한 <잔몽>, <용사>(1956) 등 제5회 ≪국전≫ 출품작, 그리고 홍익미대 졸업전 출품작인 <역사와 시간>과 자소상 <생각하는 사람> 등에서 확인된다.【주석1】 또한 학창시절에 남긴 몇 권의 드로잉 북들도 그가 얼마나 서구 현대 조각에 민감하게 반응했는지 보여준다. 동세대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서구 미술은 그에게도 환타지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런 점에서 <환희>가 미국 조각가 레오 아미노(Leo Amino, 1911-1989)의 작품 <무제(Untitled)>(1938-1946)[도 3] 그리고 ≪반공미술전≫(1958.3.26-4.15, 반공회관) 출품작 <궐기>(1958)가 자코메티(A. Giacometti, 1901-1966)의 직접적인 영향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그다지 특별한 풍경은 아니다.

  그런데 그를 동세대 작가들과 구별지어주는 중요한 차이점은 그가 서구 ‘미술’만을 일방적으로 전범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는 점이 이다. 그는 이미 <설화>에서 서구 조각의 문법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토속적인 장승 양식을 차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고드랫 돌>(1960)[도 4], <매어진 돌맹이>(1958)[도 5], <소불알>(1957)[도 6] 같은 작품들에선 일상생활 기물들을 그대로 끌어들여 ‘조각’에 도발적인 시도를 하다시피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홍익미대 졸업전 출품작이자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인 <역사와 시간>은 눈여겨 볼만하다. 길쭉한 초승달 모양의 석고 덩어리를 청홍색 페인트로 거칠게 칠하고 가시철조망으로 칭칭 감아 천정에 매단 형태에서 우리는 당시 서구로부터 불어왔던 앵포르멜 미술의 자취가 읽힌다. 그런데 동시에 <고드랫돌>이나 <쇠불알> 작품들 어디에서나 감고 잡아매기 위해 사용된 재료인 ‘줄’의 문화적 기억도 불러낸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전쟁, 남북 분단 현실, 북에 홀로 남은 어머니와의 생이별 등 피할 수 없었던 시대적 고통이 저절로 묻어나는 듯하다.

 

서구 조각에 대한 오마쥬는 졸업 직후의 작품 <여인>(1960)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그렇지만 이승택에게는 이미 그 어떠한 다른 것보다도 전통적인 서구 ‘조각’의 경계를 실험하는 일로 관심이 옮겨지고 있다. 제6회 ≪현대작가초대전≫(1962.4.10-5.7, 경복궁미술관) 출품작인 <토르소>(1962)[도 7]에서 그 실마리가 확인된다. 여인 누드상이라는 점에서 <여인>의 연장선상에 있는 듯하지만, 금박 처리된 인체를 여러 겹의 철사로 휘감고 있는 이 조각상은 ‘조각’의 문법에 의문을 제기하는 데에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이 시기 제작된 불상들도 다르지 않다. 1960년대 초엽 청년 조각가로서 이승택이 골몰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일상생활용기인 옹기 항아리이다. 졸업하자마자 그는 서울 인근의 전래적인 옹기가마에서 항아리 제작 기법을 전수받아 각종 실험에 나서고 있다. 형태를 실험하고자 주둥이를 막거나 몸체를 잘라 붙여 항아리를 변형시킨 <새싹>(1963)[도 8], 석고를 재료로 썼지만 전통적인 조각에는 낯선 옹기 질감으로 처리한 <영감>(1963) 같은 작품들이 그 예이다. ‘조각’이 지닌 위상도 다양하게 시험하고 있다. 작품 <무제>(1962)[도 9]에선 하늘 풍경사진 위에 옹기 사진 이미지를 콜라주하여 오브제를 허공에 띄우는 실험을 하고, 실제로 <작품 Z–4>(1960)[도 10], <작품 Z-44>(1961)[도 11], <작품 Z-444>(1964)[도 12] 같은 제2회 ≪원형회 조각전≫(1964.11.22-11.27, 중앙공보관) 출품작들은 조각을 공중에 띄우거나 벽에 걸어 관행이나 중력을 무산시키거나 좌대 없이 전시장 바닥에 늘어놓아 일상 사물들과의 경계를 없애고 있다. ‘서구 콤플렉스’와 ‘새것 콤플렉스’가 지배하던 시절, ‘거꾸로’ 이승택은 인류학적 원체험과 일상의 옹기 재료 기법을 다시 불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시대착오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조각의 부정을 통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며 근대 ‘조각’을 넘어서고자 하고 있다. 

또 다른 시도도 하고 있다. 산업화로 환경이 급변하던 1960년대 중반에 <유리>(1966)[도 13]로 재료의 투명성이나 블로잉 같은 비 조각적 기법으로 새로운 색채와 형태 오브제를 시도하기도 하고, 물기를 말리려 벽에 기대어 놓은 각목들을 로프나 비닐로 감거나 가로질러 걸쳐 놓은 <무제>(1967)[도 14], 비닐 만으로 가능한 구조의 형태와 볼륨의 작품 <무제>(1967), 볼륨 없이 함석판재를 단지 굴절시킨 제6회 ≪파리청년작가비엔날레≫(1969.09.24-11.01, Musé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출품작 <구리-1969 AB>(1969)[도 15] 등 주변에 나뒹구는 사물들에서 그가 실험하는 내용들은 재료, 형태, 질감, 중량, 빛, 색채 같이 제 각각이다. 하지만 그 하나하나에서 조각의 고전적인 형식과 언어를 위반하여 새로운 경계가 모색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그다지 다를 것이 없다.

 이래저래 1960년대 30대의 나이에 이승택이 작업에서 취하는 태도는 반 조각적이다. 그런데 이에 덧붙여 더욱 첨예한 시도들을 이어가고 있다. 다름 아니라 <연기나는 조각>(1960년대)이나 드로잉 <하천에 떠내려가는 불붙은 화판>(1964)에서 구상되기 시작하는 ‘형체 없는 조각’이다. 자코메티의 가늘고 긴 인체의 볼륨이 거의 상실되어진 조각에서 받은 충격에서 더 나아가 ‘형체 없는 조각’의 가능성을 향한 그의 모험은 소리, 안개, 불, 바람 같은 비가시적이거나 유동적인 물질들로 향해가고 있다. 설치작품 <바람 울타리>(1964)에서 화두는 소리이다. <화제>(1967)에선 있음과 없음을 매개하는 형체를 특정할 수 없는 불(火)이다. 홍익대학교 교정에 설치된 <바람>(1970)[도 16]으로 비롯되어,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그는 한강변을 거점으로 삼아 <바람놀이>(1992)[도 17] 등 각종 <바람> 퍼포먼스나 설치작업 등으로 꼬리를 이으며 기체 작업이 절정에 이르고 있다. 이 <바람> 설치작업이 뭇 사람들의 기원의 장소인 서낭당이나 어민들의 풍어제에서 설치되게 마련인 금줄, 천 조각, 깃발 같은 오브제들에서 끌어낸 것임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리고 퍼포먼스 <바람>은 연 날리기 같은 민속놀이와 그다지 구분될 게 없을 정도이다. 그런 점에서 백두고원이 달려와 멈추는 곳 고향 고원에서 어린 시절의 민속놀이나 풍속 체험들로 그는 오브제로 얼어붙은 듯이 주체에 의해 대상으로 고착된 ‘조각’의 근대성을 우주의 기운생동하는 에너지로 전환시키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작품 세계는 근대적인 ‘조각’이나 ‘미술’ 개념 너머에 있다.

 한강변 모래 백사장이나 강 하구에 위치한 난지도 같은 인기척도 없는 야외 공간들에서 누구의 입회도 없이 홀로 혹은 한 두 명의 조력자들과 함께 벌인 이러한 일들은 반 조각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비 조각적이다. 국가체제나 ‘미술’ 개념은커녕 갤러리나 미술관 같은 기본적인 장치마저도 낯설었던 시절에 이러한 시도들이 지닌 실험성이나 전위성이 무엇인지는 별도로 논의해 볼의 여지가 있다. 대개는 미술계라는 제도적 울타리 밖에서 펼쳐진 이러한 이승택의 활동은 사물과 행위, 미술과 일상의 오브제, 서구 미술과 민속적 사물들 사이에 벌어진 틈과 간극에 개입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절대화되다시피 했던 서구 ‘미술’ 개념을 교란시키며 아나키스트 같은 면모를 보여준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신상회(1962-1963), 원형회(1964), 한국현대조각협회(1969-1970), 한국아방가르드협회(1969-1972) 같이 아방가르드적인 동인 그룹이나 조선일보 주최 ≪현대미술가초대전≫(1964-1969) 같은 기획전들을 통해 활동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그리고 국제화의 물결에 힘입어 제6회 ≪파리청년작가비엔날레≫, ≪EXPO 70 일본엑스포국제전≫(1970.3.15-9.13, 일본 오사카), 제11회 ≪상파울로비엔날레≫(1971.9.4-11.15, Armando Arruda Pereira Pavilion [Bienal Pavilion]) 같은 국제전들을 활동의 지지기반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이들 1960년대의 비 조각적 시도들은 1971년 말에 개최한 첫 번째 개인전(1971.11.28-12.2, 국립공보관 제3전시실 시립중앙정보센터)에 집약되고 있다. 개인전은 총 45점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중 실제 작품은 <바람>(1971)[도 18] 설치작품 1점만 설치되고, 나머지 옹기, 유리, 비닐, 각목, 아연 오브제 작품들이나 연기, 불, 바람 같은 기체 설치나 행위 작업들은 사진 기록으로 제시되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시도들은 ‘형태에서 상태에로’【주석2】 바뀐 조각으로 평가되고 있다.

 

 줄(끈) 작업, 존재 질문과 그 방법

 이승택의 생애에서 이 첫 개인전은 하나의 매듭이자 동시에 전환점이 되고 있다. 이 전시는 그간 펼쳐진 작품 활동을 한 자리에서 조망할 수 있는 자리였으며, 이를 전후로 하여 비 물질적인 기체 작업에 쏠려있던 그의 관심이 사물로 변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바람> 연작이 한 참 진행되고 있을 즈음 제작된 여인 누드 입상조각 <제2 해부학(눌림)>(1970)[도 19]이 눈길을 끈다. 왜 누드 조각일까? ‘조각’의 고전적 가치에로의 복고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먼저 우리의 시선을 낚아채는 것은 몸을 일정한 간격으로 동여매어 노끈과 신체 사이에 일어난 작용-반작용의 역학적 긴장이다. 제1, 2회 아방가르드협회전(이하 ‘A.G 전’으로 약칭) 출품작들에서도 변화들이 감지된다. 제1회 ≪70년 A.G 전: 확장과 환원의 역학≫전(1970.5.1-5.7, 중앙공보관) 출품작 <작품>(1970)[도 20]은 연통을 형태실험을 위해 설치하려 했으나 의도대로 실현되지 못하자 즉흥적으로 그 재료들을 검은 비닐로 포장하고 끈으로 묶은 채 벽에 걸고 있다. 제2회 ≪'71-A.G: 현실과 실현≫전(1971.12.6-12.20, 경복궁미술관, 현 국립현대미술관)에는 일련의 야외 <바람> 설치작품에 사용했던 소품들―긴 밧줄에 일정한 간격으로 매어 단 헝겊 조각들―을 <정풍>(1971)[도 21]이란 타이틀로 전시장 바닥에 설치하고 있다. 무덤이나 산길을 배경으로 바람 소품들로 설치한 <무제(생과 사)>(1973)[도 22]나 실내 전시공간에 양식화된 바람 소품들―나뭇가지에 매어진 비닐 끈들―을 설치한 <바람> 그 어느 쪽이든 이전의 비 물질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기체작업들 즉 <바람>이 불러일으키던 기운생동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여기에서 ‘줄’은 작품 성격을 변화시키는 핵심적인 요소가 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사각 판넬 위에 노끈을 오브제로 꼴라주한 ≪현대조각초대전≫(1972.6.3-6.10, 국립공보관 제4전시실) 출품작 <바람>이나 <바람작품>(1972)[도 23]에서 두드러진다. 바람을 시각화하고자 한 드로잉으로 시도한 작업이지만, 이 일련의 작품들은 고드랫돌, 옹기, 각목, 바람 등 오브제 설치 행위 작업들에서 묶고 감고 매다는 용도였던 노끈을 그 자체로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이 노끈 작업은 인류의 역사에 켜켜로 녹아있는 ‘줄’의 문화인류학적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선적인 언어로 옵티컬한 효과를 불러들이고 있다.

여기서 ‘줄’은 특히 그로 인해 촉발되는 방법적이고 언어적인 전환으로 눈길을 끈다. 그런 점에서 ‘줄’은 1970년대에 들어 일어나는 작픔세계에서 핵심적인 기재가 되고 있다. 예컨대 이런 것들이다. 국민국가 형성과정에서 민족주의 물결과 문화적 정체성 담론을 떠받치는 하나의 요소였던 조선 백자들을 끈으로 동여 묶는다. 문명적 두께에 다름 아닌 옛 고서(古書) 혹은 지배 담론 생산의 보루였던 책자들이나 잡지들을 줄로 묶는다. 예술을 예술로 정의하는 제도적 틀로 그동안 당연시되어 온 캔버스나 액자도 예외가 아니다. 자본주의 체제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그 핵심에서 물신이 되다시피 하여 일상생활에 군림하는 화폐에 이르기까지, 그는 정치사회경제문화적 기억을 지닌 온갖 사물들을 끈으로 묶는 일을 하고 있다. <무제(매어진 도자기)>(1975), <매어진 캔버스>(1975), <무제(지폐의 해체)>(1979), <매어진 책>(1975-1976) 연작들이 그것들이다.

  우선 여기서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것은 끈으로 묶는 행위와 묶이는 사물 사이에 일어나는 물리적 긴장감이다. 그런데 억압적이고 반민주적인 유신체제로 줄달음치며 인간의 사회활동들이 억압적 상황으로 치닫던 1970년대 시대상황과 연계되어 묶는 줄과 묶이는 인공물들 사이의 긴장 관계가 어쩔 수 없이 정치사회적 긴장의 물질적 구현이라는 유비관계로 느껴진다. 그러한 미학적 경험으로 인해 이내 묶는 행위를 통해 묶여지는 사물에 관한 질문이라는 방법적이고 개념적인 장치로 바뀌는 듯하다.

흥미롭게도 이승택은 1970년대 중엽 미술계에 새로 제정된 몇 가지 미술상을 수상하고 있다. <매어진 암석>(1975)[도 24]이 ≪현대조각 4인전 : 제2회 공간대상전≫(1977.11.3-11.16, 공간사랑)에 출품되어 공간미술상 우수상을 수상하고 있으며, <매어진 여체>(1970년대 중반)로 ≪제1회 동아미술제≫(1978.3.30-4.12,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동아미술상을 수상하였다. 공교롭게도 이 수상작들은 당시 그가 몰입했던 문화적 인공물들이 아니라 자연 암석이나 인체를 묶은 작품들이다. 그래서 늘 새로움의 경계를 넓히던 그가 돌이나 석고 같이 견고한 전통적인 조각 재료를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에 미술 제도권이 화답이라도 하는 듯이 읽혀진다. 미술상이 공교롭게도 인공적 사물을 묶어 문화적 기억을 환기시키는 작품들이 아니라 중성적인 자연 암석이나 인체를 묶은 작품에 주어지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어떤 의미에서든 1970년대 그의 활동이 보수적인 정치사회적 분위기나 미술계의 관심과 어디선가 교차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태도 전환이 A.G 그룹 활동이나 연이은 해외 전시 출품으로 경험한 미니멀리즘이나 모노하 같은 동시대 국제미술 동향과 무관하지 않음은 두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전위 예술에의 강한 의식을 전제로 비젼 빈곤의 한국 화단에 새로운 조형 질서를 모색 창조하여 한국미술 문화 발전에 기여한다”【주석3】며 결성한 A.G 그룹 동인 활동이나 세계 현대미술과의 교섭이 새로운 세계에 대한 실험심이나 모험심을 자극하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고유한 ‘끼와 기질’을 억압하고 있다는 점은 아이러니컬하다. 그런 점에서 그의 줄로 사물 묶기 작업은 서구 미니멀리즘이나 개념미술의 강력한 자장 아래 전개된 일련의 모더니스트들, 즉,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유신시대의 환경 속에서 문화 정체성 담론에 기대어 소위 ‘한국적 모더니즘’을 내세웠던 이른 바 ‘단색화’ 그룹의 집단성이나 획일성에 대칭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른 바 단색파 화가들로 불리는 이들과 구분되는 지점은 누가 뭐래도 이승택이 기성의 권위를 부정하며 또 다시 새로움을 구가하는 데서 확인된다. 의도했든 아니든, 인공물 묶기 작업으로 실내로 위축되었던 그의 공간 감각은 암석 묶기 작업들로 다시 자연 혹은 대지로 돌아가고 있다. 소극적이긴 하지만 그는 1970년대 말에 이르면 자연에 개입하는 퍼포먼스 성격의 사진 작품들을 몇 점 남기고 있는데, 예컨대, <강 설치물>(1970년대 말)이라든가, <무제(김 재배 설치구조물)>(1970년대 말), <바람소리>(1970년대 말) 같이 자연 속에 줄로 엮거나 묶인 인공물들을 매개로 망망한 자연 속의 어떤 장소를 사유(私有)하고자 하는 그의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비 조각’적 세계상

 끈 작업은 1980년대에 들어서도 이어지며 변주하고 있다. 두 번째 개인전 ≪이승택전≫(1981.6.5-6.11, 관훈미술관)의 키워드도 ‘줄’이다. 첫 개인전으로부터 10년째 되던 1981년에 열린 이 전시에는 1970년대의 줄 작품들 즉, 백자, 『공간』지, 화폐 등을 묶은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새로운 시도가 눈에 띈다. 자연목 나뭇가지에 노끈으로 헝겊 뭉치를 감아 곳곳을 매듭지은 <비조각>(1981-1982)[도 25]이나 긴 로프에 일정한 간격으로 헝겊과 실을 한 매듭 한 매듭 응결지어 전시장 벽면 아래위를 오가며 지그재그로 설치한 <무제>(1980)[도 26]【주석4】가 그렇다. 나뭇가지에 헝겊 감아 묶기 역시 그 존재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그렇지만 그 방법이 재현적이거나 제작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이전의 줄 묶기 작업들과는 다르다. 그는 단지 줄 묶기로 자연에 참여하는 듯하다. 반면 <무제>(1980)는 2차원적인 전시 벽면에 설치되어 있지만 줄을 매듭짓는 행위가 시공간적으로 무한을 향해 열린 듯하다. 그는 그때까지의 자신의 시도들을 ‘비(非) 조각’으로 언명하며, ‘비 조각’을 향한 작가적 아젠다가 어느덧 자신의 업(業)이 되다시피 한 감고 묶는 일에서 비롯되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물체와 이미지는 늘 자신에게 ‘배반하며 실망과 노여움’을 안겼지만, ‘줄’ 작업은 ‘존재론적인 물음’을 포함한 ‘모두를 묶는 일’, 다시 말해 ‘존재론적 물음’을 넘어 ‘존재론적 물음’마저 묶는 수행적 일이며, ‘생명’을 회복시키길 염원하는 작업임을 밝히고 있다.【주석5】

 역시 ‘줄’이 키워드라는 점에서 다를 바 없지만, 이듬해에 같은 장소에서 열린 제3회 개인전 ≪이승택전≫(1982.9.29-10.5, 관훈미술관)은 그 초점을 ‘사물’로부터 ‘공간’으로 성큼 이동하고 있다. <무제>(1982)[도 27]는 앞 전시의 평면 오브제 <무제>에서 더 나아가 매듭지어진 줄을 무 규정적이고 중성적인 3차원적 갤러리 공간에 개입시킴으로써 ‘자연의 숨겨진 호흡과 리듬까지를 공간 속에 확산’【주석6】시키고 있다.

  ‘비 조각’을 화두로 제시한 것은 두 번째 개인전이지만, 그가 ‘비 조각’적 프리즘을 통해 본격적으로 자신이 몸담아 온 삶의 세계로 들어가기 시작하는 것은 네 번째 개인전 ≪이승택 비조각전: ‘종이평면’≫(1983.10.21-10.27, 토탈미술관)을 치르고 나서다. 그는 이 전시에 종이 뭉치를 각목에 끈으로 묶은 작품을 벽에 걸어 출품하고 있지만, 일단 ‘줄’ 작업에서 한발 뒤로 물러나고 있다. 여기서 초점은 캔버스 프레임을 해체하고 종이 찰흙으로 프레임을 변형시켜 재구성하여 바닥에 설치한 <무제>(1983)같이 공간화하는 일에 맞추든가, 평면예술로서의 회화와 그 제도적이고 형식적인 요건으로서의 프레임에 집중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방법적이고 개념적으로 줄을 사용했던 오브제 작업들이나, 더 나아가 1970년대 담론을 지배하다시피 했던 모더니즘 미술을 큰 틀에서 비판적으로 재검토라도 하는 듯하다. 그리고 미련 없이 그는 다시 삶의 세계를 향해 거침없이 들어가고 있다. 무속적 세계는 ‘비 조각’이라는 이름으로 삶의 세계에서 불러내는 첫 이슈가 되고 있다. 다섯 번째 개인전 ≪이승택 비조각전≫(1986.2.18-2.24, 후화랑)이 그 출발이다. 다시 ‘비 조각’을 전시회 타이틀로 내건 이 개인전에서 그는 청과 홍의 원색적인 천, 물들인 종이, 각목 등을 끈으로 묶어 벽에 기대거나 걸기도 하고, 바닥에 뉘인 소프트 스컬프쳐 오브제, 견고한 조각과 평면적 회화 등 형식을 아랑곳 하지 않는 인스털레이션 <무제>(1986)[도 28, 29]를 행한다. 이를 통해 갤러리 공간 전체는 샤머니즘적인 세계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곧이어 그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개관에 맞춰 청계산 기슭에 5개의 돌무덤으로 구성된 <무제-마이산에서>(1986)[도 30]를 설치하고 있는데 제목에 드러나 있듯이 이 작품은 100여 년 전에 전라북도 마이산에 염원으로 쌓았다는 돌무덤 군을 차용하고 있다.

도쿄 Gallery K에서의 ≪이승택전≫(1986.3.24-3.29), P&P갤러리의 ≪비조각-이승택전≫(1987.3.18-3.24) 등 그는 1980년대 50대의 나이에 매년 1, 2회씩 개인전을 열정적으로 개최하며 왕성하게 활동을 펼치는데 이들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화두는 ‘비 조각’이다. 그런데 P&P갤러리 전시에서 그 의미를 더 구체화하여 ‘이전 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반개념’, 그리고 ‘기존의 조각 개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재료의 실험’ 등으로 정리하고 있다.【주석7】 그리고 이어진 여덟 번째 개인전 ≪이승택전≫(1부: 1988.5.18-5.24, 2부: 1988.5.24-5.31, 관훈미술관)에서 제1부는 ‘사유하는 장소전’, 제2부는 ‘추이전’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있다. ‘사유하는 장소’라는 이슈 아래 <모래 위에 파도 그림>(1987-1988)[도 31], <모래 위에 그림>(1986)[도 32] 같이 그는 그 자신의 행위가 어떻게 이 대지에 개입될 수 있는지를 실험하고 있다. 한편, 일찍이 30대에 비 물질적인 기체 작업으로 염두에 두었던 ‘불(火)’을 축제의 한 형식인 화제(火祭)라는 토픽으로 다시 시간적인 ‘추이’ 속에 불러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전통적인 게와 지붕을 그 재료와 기법, 규모 등을 그대로 땅에 내려 앉혀 88서울올림픽 기념 조각공원 야외조각프로젝트 <기와입은 대지>(1988)[도 33]로 실현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 펼쳐지는 이러한 작업들은 마치 청년기에 그가 몰입했던 문화인류학적 오브제와 행위들이 다시 부흥기를 맞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다.

아무래도 1989년에 열린 두 번의 개인전 즉, 녹색갤러리의 ≪이승택전≫(1989.3.2-3.15)과 장흥 토탈미술관과 난지도에서 열린 ≪이승택 분신행위예술전≫(1989.10.20-10.30)은 그가 ‘비조각’을 통해 펼친 세계상의 절정이다. 녹색갤러리 전시에서 그는 평면, 입체 그리고 공간 등 예술의 형식과 언어에 주목하여 그것들이 하나의 감성적 세계상을 구현하는 데에 삶의 형식과 화해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한편, 전문가 등 소수의 사람들을 초청하여 12일 동안에 걸쳐 연이어 자소상 등 작품을 제작하고 그 자리에서 불태우는 퍼포먼스를 이어 간 토탈미술관의 ≪분신행위예술전≫에서, 그는 분신이라는 문화적 행위로 존재와 부재, 물신화된 작품이나 인간 존재의 있음과 없음의 경계 밖을 모색하는 <분신행위(불타는 구름)>(1989)[도 34], <분신행위>(1989)[도 35] 등을 발표한다. 그 밖에도 그는 삶의 세계를 향해 자신의 예술적 열정과 상상력을 마치 봇물 터진 듯 발산하고 있다. 또한 한국 근대 산업화의 상징이나 다를 바 없는 옥포 대우조선소 프로젝트(1990)[도 36, 37]로 산업폐기물과 폐허화된 산업시설 같은 환경 문제에 개입하고, 종교적 우상성이나 터부시된 인간의 섹슈얼리티, 남북분단현실 등 뜨거운 삶의 세계의 현실을 ‘비조각’ 개념으로 분방하게 다가서고 있다.【주석8】

 

 픽쳐, ‘포토 픽쳐’ (1990년대 이후)

<지구행위>(1989)[도 38]라는 타이틀의 퍼포먼스와 사진작업도 1980년대 이승택의 시공간 감각이나 세계 인식이 투영된 작품들이다. 사진 매체는 전근대적 시공간관의 혼재 속에 퍼포먼스나 설치와 오브제, 더 나아가 사물과 행위, 존재와 부재 사이의 구분마저 그리 분명치 않았던 이승택에게 일찍부터 기록적 기능만으로 매우 중요한 기재였다. 하지만, 사진이라는 매체는 이제 60대의 나이에 들어서는 그에게서 더할 나위 없이 핵심적인 매체로 자리 잡고 있다.

  6.10 민주항쟁으로 유신체제 이전의 대통령 직선제로 복귀하는 등 민주화 과정을 거치고, 86아시안게임을 거쳐 88서울올림픽 개최와 더불어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 전면적으로 노출되는 가운데 이승택은 작가로서 또 한 번 혁명적 변화를 경험했다. 게다가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동구권 몰락과 더불어 한반도를 옥죄던 동서냉전제체가 느슨해지고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전지구로 확산되고 있을 때, ≪Photographs, Paints & Objects≫라는 타이틀로 연 한선갤러리에서의 열한 번째 개인전(1991.8.23-9.3)은 새로운 변화를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 우선 출품작들은 당시 인화기술로는 최대 규모인 116x83cm 사이즈의 칼라 흑백 사진들로 구성되고 있다. 출품작들 가운데 하나인 <무제(불타는 성기)>(1991)[도 39] 같이 남성성의 상징인 남근을 제작한 오브제를 불태우는 것이든, <모래 위에 그림>(1987-1988/1991), <분신행위>(1989/1990년대) 등 행위 기록사진이든 사진 매체가 그에게 어떻게 채택되는지 잘 보여준다. 뭔가를 향해 구상력을 펼치거나 그것을 실현하는 과정을 거쳐 결과에 이르기까지 행위의 기록 사진들은 자신이 구상하는 세계가 구현되었다고 판단되는 지점까지 거듭 다양한 조작적 접근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는 인화된 사진을 그라운드로 삼아 그 위에 드로잉이나 페인팅을 하기도 하고, 사진 위에 다시 사진을 콜라쥬하거나, 고도한 기술로 몽타쥬 하는 등 다양한 기법으로 오브제, 설치 행위에 기초하고 때로는 세트 촬영까지 동원하여 자신의 작품세계에 회화적 전환(pictorial turn)의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그의 사진작업은 다른 어떠한 매체의 작업들 못지않게 강력한 픽쳐의 특성을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이승택의 60대 이후 펼쳐진 노년의 작품세계를 ‘포토픽쳐’로 특별히 일컬을 만하다. 이러한 입장 변화가 가깝게는 인화기술의 디지털화에 의한 대형 실사출력 등 사진기술의 혁신에 힘입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새로움의 한 형식으로서의 ‘포토픽쳐’는 ≪실험미술 50년 이승택 초대전≫이나 뮤지엄급 초대전들과 부산국제비엔날레나 광주국제비엔날레 같은 국제비엔날레 환경에서 그리고 내러티브나 이미지 수요가 급증하는 포스트모던한 조건들에서 늘 새로움을 구가해 왔던 이승택에게 당연히 요청되는 과제였는지도 모른다.

  <녹화운동>(1996)이든 <녹의 샛물>(1996)[도 40]이든 산업화로 인해 열악해진 환경문제나 종교적 우상성을 향한 적극적인 행위로 읽히지만, 실제적인 실행이 아니라 다만 사진 이미지 위에서의 시위이다. 작품 <녹화>(1996)는 작가가 직접 녹색 페인트를 칠하고 있는 퍼포먼스에 대한 다큐멘터리처럼 리포트의 성격을 띠고 있다. 하지만 실은 작은 모형 세트를 구성하여 자신의 인물 모형 사진을 배치시켜 촬영한 한 장의 사진작업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그는 일본 사이타마현립근대미술관 기획의 ≪불의 기원과 신화-한중일 국제현대미술전≫(1996.10.12-12.08, 사이타마미술관, 일본)에 결코 작지 않은 크기의 평면 페인팅 설치작품 <녹의 수난>(1996)[도 41]을 출품하고 있다.

  실은 ‘포토 픽쳐’는 이미 1960년대 초부터 시도되어 왔다. 앞서 언급했듯이 하늘을 배경으로 옹기를 공중에 띄워 꼴라주한 사진 <무제> 같은 작품이 그 예이다. 이후에도 설치작품이나 행위 기록사진 위에 그는 드로잉 페인팅을 하거나 편집적으로 재구성하여 자신의 기대나 염원을 투영하고 있는 경우는 흔히 발견된다. 다만 행위나 설치 기록 차원이 아니라 사진작품 <지구행위>의 경우 같이 사진을 자신의 픽쳐를 물질적으로 실천하는 핵심 매체로 삼는 시도는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격화되고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늘 즐겼던 퍼포먼스나 인스털레이션 작업들에서도 그는 행위, 오브제 그 자체보다도 사진 이미지가 지닌 효과에 더욱 빈번히 기대고 있다. 퍼포먼스에서도 사진을 주요 소품으로 삼는다든가, 아예 사진을 키워드로 삼는 퍼포먼스도 있다. 그런 점에서 <뉴밀레니엄 축배 행위>(2000)[도 42]나 한국실험예술제의 비보이예술극장에서 행한 <비보이 페스티발 퍼포먼스>(2011)[도 43] 같은 퍼포먼스들은 자연 속에서 혹은 대지에 개입해 들어가고자 했던 일련의 퍼포먼스들과는 성격이 다르다. 부산비엔날레 출품작 오브제 사진 이미지의 <무제(사진 설치)>(2008)[도 44]에서와 같이 시각적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눈속임, 때로는 엔터테인먼트 효과를 위해서도 사진은 전시장 바닥, 벽 가릴 것 없이 어디에서든 어떠한 형식으로든 거침없이 이용되고 있다. 그러한 그의 이미지 몰입은 때로는 시각적 스펙터클 자체나 픽쳐레스크한 효과와 구분되지 않아서 아무리 ‘비조각’을 내걸었다고는 하지만 조각에서 출발한 작가로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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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택은 대한민국 서울을 거점으로 활동해 온 조각가이다. 1932년 4월 7일 한반도 동북지역인 함경남도 고원에서 태어나 그는 유소년기를 일제 식민치하에서 보냈다. 1945년 해방 후엔 분단된 한반도의 북쪽 김일성 공산체제에서 중학교를 다녔다그는 일찍부터 그리기와 제작에 재능을 발휘했는데, 18세의 나이인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엔 군청 정문에 설치할 김일성과 스탈린 초상조각을 주문받아 제작하기도 했다.

이승택이 본격적으로 근대적인 미술 수업을 받게 된 것은 1951년 1.4 후퇴 시 월남하여 군복무를 마치고 난 뒤인 1955년 봄 서울에 위치한 홍익미대 조각과에 입학하면서이다그리고 그 해 말 홍익미전에 조각 작품 그 이듬해 제5회 국전에 <Hwanhui,Delight> 등의 작품 작품을 출품하며 데뷔했다입학이 또래에 비해 4, 5년 늦었음에도 불구하고이른 미술계 데뷔로 그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등장한 제1세대 모더니스트 작가 군에 합류하고 있다.【주석1】 도처에서 관례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문화적 정체성과 낯선 것민족국가주의와 국제주의봉건주의와 민주주의 같은 이질적인 가치들이 충돌하며 격돌하던 시절이승택이 취한 작가적 태도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매우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이승택의 작가활동에 더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서는 국내외의 현대미술의 흐름과 그 전후사정은 물론 그 밖의 정치사회적 배경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나라가 일제에 강점되고 해방과 더불어 남북이 분단되어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르며 동서냉전 체제 편입된 가운데그의 예술활동은 전쟁의 폐허 속에 시작되어 1960년의 4.19 민주혁명, 1961년의 5.16 군사쿠데타, 1972년 유신체제, 1980년 5.18 광주민주항쟁, 1987년의 6.10 민주항쟁 등으로 이어진 격동을 거치는 가운데 산업화와 민주화의 진통을 겪던 시대였다이러한 시대 상황뿐 아니라 그의 작품세계는 86서울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동구권의 몰락과 세계화 등과도 긴밀한 연관 속에 적지 않은 변화를 드러내며 전개되고 있다그 흐름은 서구 조각의 성과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동시에 다양하게 반-조각적 실험을 전개한 1955-1971, 국제주의의 영향 속에 줄을 이용한 개념적이고 방법적인 오브제 작업에 몰입한 1972-1983, 설치 퍼포먼스 작업을 중심으로 대지환경섹슈얼리티종교문화적 기억 등 삶의 세계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1984-1990년대 초사진을 토대로 포토픽쳐’【주석2】 작업에 몰입한 1990년대 초부터 현재까지 등 대략 다음과 같이 네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서구 조각의 수용과 반-조각적 실험 : 1955-1971

 

학창시절이승택의 예술의욕을 사로잡은 것은 서구 미술’ 즉 파인아트’, 그 가운데서도 조각이다미국의 주도로 UN군 참전으로 휴전상태에 들어갔지만 전쟁의 폐허 속에 미술대학에 입학한 그에게 서구 미술은 하나의 판타지나 다를 바 없었다조각의 전통이래 봐야 불상이나 문인석과 무인석장승 같은 것이 전부이다시피 했던 한반도에서 그가 새롭고 낯선 서구 현대 조각에 얼마나 예민하게 반응했는지는 릴리프 (1955), (1956), (1956), (1956), (1958) 등 여러 작품들에서 잘 드러난다이 시기에 남긴 드로잉 북들에서도 그러한 열정을 확인할 수 있다지도 교수들이 수주한 것이긴 하지만 <이승만대통령상>(1956), <맥아더장군상>(1957) 같은 기념조각 프로젝트【주석3】 참여도 빼놓을 수 없는 조각 체험이었다서구에서 기인하는 재현적인 조각 제작은 이후에도 평생동안 그의 작품 활동의 경제적 토대가 되었다.

이승택에게 서구 미술만이 유일한 관심 대상은 아니었다그러한 사실은 데뷔작품인 <설화>(1955)가 민속적인 장승 양식을 차용한 데에서부터 확인된다그에 이어 그는 생활 용구를 파운드 오브제같이 끌어들인 (1957)이나 사물을 끈으로 묶거나 매다는 인간의 일상적인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제작한 (1958) 같은 작품들에서는 훨씬 더 의도적으로 조각 개념과는 무관한 일상생활의 기물과 관행에 주목하게 한다서구 앵프로멜의 흔적이 묻어나는 졸업전 출품작 (1958)도 문화인류학적 유소년 체험과 구관하지 않다이러한 시도들은 졸업 후에 훨씬 더 적극적이 되고 있다일상의 옹기 항아리 재료 기법으로 기법과 형태를 실험한 (1962), (1963) 같은 작품들이 그 예이다그런데 비해 (1967), (1967-1968), 파리청년작가비엔날레 출품작인 (1969) 등에서는 각목유리비닐양철판 등 급격하게 산업화 하며 변화된 생활주변의 물질들로 새로운 형태 실험에 나서고 있다.

조각에서 출발한 이승택이 1960년대즉 30대의 나이에 펼친 작업들 가운데 훨씬 더 파격적인 것은 (1960), (1964), (1967), (1969) 같은 설치 행위 작업들이다이 작업들에서 그의 관심은 나무··청동 같은 견고한 재료에 기초한 인체 조각이나 사물의 형상에서 벗어나 비물질적이고 원초적인 질료들을 매개로 하여 자연의 기운생동하는 에너지를 불러내는 데로 옮겨지고 있다.

4.19, 5.16 등 정치적 격동과 산업화 속에 국민국가가 형성되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 작업들은 주로 신상회원형회한국현대조각협회한국아방가르드협회 등 동인그룹전이나파리청년작가전상파울로비엔날레 오사카만국박람회 등 국제전을 통해 발표되었다국민국가주의와 국제주의가 서로 밀고 당기던 시기에 그의 활동에서도 상반되는 듯이 보이는 두 가지 욕망이 읽힌다하나는 서구 조각에 대한 염원과 그 근원적 가치에 대한 관심이다다른 하나는 그러한 조각 이념에 의해 소외된 자신의 사물 체험이나 일상생활에 활력을 불러일으킬 반조각적’ 실험이다.


줄 작업사물의 존재 물음과 그 방법적 시도 : 1972-1983

 

1971년에 열린 첫 개인전은 1960년대에 삶 체험에 기초한 여러 작업들이 사진 기록으로 종합되어 발표되었다는 점만으로도 의미를 지닌다그 즈음 한국 미술계에는 미니멀리즘 이후의 국제적인 경향의 미술들에 관한 정보가 접수되기 시작하여 어느 때보다도 그 동향에 민감했다한편유신체제 성립으로 박정희 대통령에 의한 독재체제가 굳어지는 가운데 문화 정체성에 대한 국수주의적 열풍이 일었다.

새롭게 이승택의 작품 세계에 일어난 변화의 핵심적인 요소는 줄로 묶는 작업이다그 첫 시도는 일련의 설치퍼포먼스가 한창 진행되던 중에 끈으로 누드를 묶어 가학적으로 보이는 (1970)을 제작한 데서 확인된다그런데 을 옵티컬하게 평면 위에 부착한 (1972) 연작에서 본격화된다묶고 감고 매다는 등의 문화인류학적 경험을 불러내는 이 작업들을 기점으로 (1972), (1972), (1976), (1975) 등의 작업들로 이어지고 있다줄로 묶는 작업은 당시 민족주의적 문화 정체성의 심볼이나 다를 바 없던 도자기나 책·화폐 같은 문화적 기억을 담은 인위적 사물들에서 출발한다그리고 (1973), (1974), (1975), (1976)에서 같이 크고 작은 돌이나 나무 등 자연 사물들을 묶고 척도하는 작업으로 확산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끈으로 묶는 행위와 묶이는 사물 사이에 일어나는 물리적 긴장감이나 착시현상이다그런데 묶는 행위는 곧 방법적·개념적인 측면이나 존재론적 차원에서 묶이는 사물의 존재에 관한 질문으로 바뀐다그리고 피치 못하게 대다수의 민중들을 억압적 상황으로 내몰았던 비민주적 유신체제의 시대상황에 대한 유비관계로 전이 된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줄로 묶는 작업이 집단주의적이고 획일적으로 펼쳐진 단색화’【주석4】 열풍과 같은 시기에 펼쳐지고 있다하지만 그들과 달리 이승택은 자신이 모색한 방법을 스스로 부정하며 또 다시 새로움을 찾아 나서고 있다그리고 돌·나무 등 자연 사물 묶기 작업을 거치며 그의 시선이 실내로부터 다시 드넓은 대지로 향하게 된다.


-조각’ : 삶의 세계를 향하여 : 1984-1990년대 초

 

이승택은 1980년에 잡지 SPACE에 기고한 한 에세이에서 당시까지 자신이 시도했던 작업들을 (조각으로 말하고 그것이 감고 묶는 줄 작업에서 비롯되어 평생의 업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그리고 1981년 관훈미술관의 두 번째 개인전에서 그 줄 작업의 가능성과 한계를 방법적으로 가늠하는 평면오브제 (1980), (1980) 같은 작품들을 발표하고이어 1982년 세 번째 개인전에서는 새롭게 공간을 척도하는 (1982) 같은 공간 설치 작품으로 발전시키고 있다그리고 1983년에는 캔버스 프레임을 해체 재구조화하여 바닥과 벽에 설치하는 등 회화의 형식과 제도적인 조건들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는 작품들을 토탈미술관의 네 번째 개인전을 통해 발표하고 있다.

비 조각이라는 이름으로 마치 1970년대 모더니즘 미술을 큰 틀에서 개념적이고 방법적으로 검토하는 1980년대 초의 연이은 개인전들을 거치며 그는 시선을 다시 삶의 세계로 옮기고 있다그가 우선 이슈로 삼는 것은 무속적 세계이다후화랑에서 1986년에 개최된 다섯 번째 개인전은 청과 홍의 원색적인 천물들인 종이각목 등을 끈으로 묶어 벽에 기대거나 걸기도 하고소프트 스컬프쳐 오브제들조각과 회화 등 형식을 가리지 않고 (1986), (1986), (1986) 같은 작품들을 하나의 갤러리 공간 안에 설치하는 작업을 발표한다국립현대미술관 개관 기념전에는 샤머니즘적인 작품 (1986), 88 서울올림픽 기념 조각심포지움엔 전통적인 한옥 기와지붕을 차용한 작품 (1988)를 각각 야외 조각공원에 설치하고 있다한편>(1980), (1981)에 이어 그는 계곡과 강변 같은 자연으로 나아가 (1987) 같은 퍼포먼스를 실행하는가 하면, 1960년대에 시도했던 비 형태적이고 비 물질적인 ()’ 작업을 다시 끄집어내어 시간적인 추이’ 속에 화제(火祭)라는 형식으로 시도하고일련의 (1989) 퍼포먼스로 발전시키고 있다그리고 관심을 환경문제섹슈얼리티종교적 우상성 등 다양한 삶의 세계를 향해 펼쳐지는 가운데 그는 그 밖에도 (1988), (1989), (1989) 같은 작업들도 발표하고 있다.

1980년대를 거치며 이승택은 여러 번의 개인전과 그룹전들을 통해 삶의 세계를 향해 자신의 예술적 열정과 상상력을 마치 봇물 터진 듯이 발산하고 있다이러한 왕성한 작품 활동은 다양화된 대한민국 사회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으로 국제사회에 전면적으로 개방되는가 하면, 1987년 6.10 항쟁을 통해 민주화 과정을 거쳤다동구권 몰락으로 동서냉전체제가 무너지는 대 전환 속에 진행된 세계화에서 대한민국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포토 픽쳐의 전면화 : 1990년대 이후


1990년대에 접어들 무렵 이승택의 작품세계에서 또 한 번의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Photographs, Paints & Objects라는 타이틀로 연 Hanseon Gallery 열한 번째 개인전(1991.8.23.-9.3)은 그 신호이다. 

이승택에게는 이미 1980년대의 사진작품 (1980)이나 (1989)에서부터 사진은 단순한 행위나 사건의 기록이 아니었다. 1990년대에 들어 그의 작품 활동에서 사진은 훨씬 더 핵심적인 위치를 점유해 가고 있다그는 인화된 사진을 그라운드로 삼아 자신이 구상하는 세계상이 구현되었다고 판단될 때까지 그 위에 드로잉 페인팅을 하기도 하고다른 사진을 콜라쥬하거나 숙련된 공예적 솜씨로 정교하게 몽타쥬하기도 한다그동안의 오브제설치행위를 사진작업으로 재구성하는가 하면때로는 세트 촬영 등을 비롯한 온갖 기법으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회화적으로 전환시키는 데에 몰입하고 있다.

그래서 1990년대 초 작업들예컨대 (1990년대), (1990년대 초), (1991) 은 사진작업들은 다른 어떠한 매체의 작업들 못지않게 강력한 그림(picture)로서의 특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그런 점에서 이러한 그의 작업들은 포토픽쳐라 이름으로 성격지울 만하다삶의 세계 이미지들은 눈속임이나 엔터테인먼트 효과를 위해 전시장 바닥벽 어디에든 어떠한 형식으로든 거침없이 채택되고 있다사진 이미지에 기초한 그의 몰입은 때로는 시각적 스펙터클 자체나 픽쳐레스크한 효과에 맞춰지기도 한다그래서 3차원적인 조각이나 사물에서 출발한 작가라는 기억은 흔적도 확인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이승택이 노년에 들어 펼치는 이러한 포토픽쳐는 각종 매체 환경의 변화나 포스트모던적 조건의 속에 변화된 사물관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뮤지엄 초대전국제비엔날레의 대두 등으로 국내의 미술제도나 전시 환경이 크게 바뀌기 시작했다현대미술전(1992.6.13-9.1, 카셀Kassel, 독일), 한국현대미술전(1995.4.7-4.26, 북경 중국미술관), The Origin and Myths of Fire: Korea-China-Japan Contemporary Art Exhibition(1996.10.12-12.8, the Saitama Museum of Modern Art in Japan. ), 호랑이의 눈으로 – 한국시각예술(1997.5.28-7.5, Exit Art / The First world, 뉴욕미국등 국내외 기획전도 급증했다이러한 상황 변화와 더불어 삶의 내러티브나 이미지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상황에서 이승택이 택한 대응 방법이 포토픽쳐였다


**1)한국에서 미술대학은 1945년 해방 후에 설립되기 시작했다. 여기서 수학한 사람들이 미술현장에 모습 을 드러내는 것은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서이다. 그들은 일제강점기 이래의 재현미술을 거부하고, 제2 차 세계대전 후 국제적으로 확산되던 유럽 앵포르멜 미술을 대안으로 삼아 출발하여 ‘한국적 모더니 즘 미술’의 주역으로 자리 잡았다.


**2)포토픽쳐(Photo-Picture): 이승택의 작품 세계에서 독특하게 표현되는 ‘사진’ 작품을 일컫는 용어로  사진 위에 드로잉, 페인팅, 콜라쥬, 몽타쥬 등의 기법으로 작업을 추가한 작품을 특정하여 가리키기  위해 조어된 용어이다. 


**3)박정희 대통령 정부 시기(1961-1979)에는 5·16군사정변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한 기념물과 동상, 그 리고 유엔과 관련한 기념탑이 다수 제작되었다. 또한 6·25전쟁 희생자 위령탑과 반공의식을 고취하는  동상의 제작과 더불어 반일의식의 고양과 민족주체성의 강조하는 항일인사들의 기념동상을 건립하고  유적을 복원함으로써 반일의식을 표면화하였으며,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는 1968년부터 1972년까지  15기의 동상을 건립하는 등 민족주의와 반공정신 고취를 위한 문화정책 사업을 펼쳤다. 


**4)단색화(Dansaekhwa): 1970년대 초반에 태동한 한국식 모노크롬 회화를 일컫는 용어로 일본 동경화 랑에서 1975년에 열린 ≪the Five Korean Artists: Five Kinds of White exhibition≫전이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으로 일반에게 공개됐다. 비평가 이일에 의해 “물질성을 떠난 내재적 모노크롬”을 가 리키는 데 사용된 단색화는 서울, 도쿄, 파리에서 개최된 단색화전을 통해 현대 한국 미술의 국제적 얼굴이자 현대 아시아 미술의 초석으로 성장했다. 대표적인 작가로 Kwon Young-Woo(1926-2013),  Chung Chang-sup(1927-2011), Yun Hyong-keun(1928-2007), Park Seo-Bo(1931- ), Chung  Sang-Hwa(1932- ), Ha Chong Hyun(1935- ), Lee Ufan(1936- )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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