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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강소Lee Kang-So

1943-12-01

#회화

책임연구원 | 조은정

Lee Kang-So

작가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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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약력

1943            대구출생
1965            서울대 회화과 졸업
1970-1974     ≪신체제≫(1~8회)

1971            ≪A.G.≫ 참여
1972-1979    ≪앙데팡당≫(1~5회)
1973            ≪제1회 개인전≫, 서울 명동화랑
1974            ≪서울비엔날레≫
1974-1979     ≪대구현대미술제≫(1~5회)
1975            ≪제9회 파리청년비엔날레≫ 
1975-1999    ≪에꼴 드 서울≫(1~24회) 
1977            ≪상파울로비엔날레≫
1982            경상대교수
1983            ≪제4회 서울국제판화 비엔날레≫, 우수상 수상
                  ≪한국현대미술전 – 70년대 후반, 하나의 양상≫, 도쿄도 미술관, 오사카 국립국제미술관, 후쿠오카 미술관 순회전
1985            뉴욕주립대(알바니) 객원교수 및 객원 예술가
1988            ≪한국현대미술의 오늘≫. 토탈미술관
1991            뉴욕 트라이앵글 아티스트 워크숍
1992            P.S.1(뉴욕 현대미술 연구소) 국제 스튜디오 아티스트 프로그램
                  ≪자연과 함께≫, 테이트, 영국
1998            ≪침묵의 화가들≫, 몽벨리아르 시립미술관, 프랑스   
2000            ≪광주비엔날레 특별전-한일 현대미술의 단면≫, 광주비엔날레
2002            제3회 이인성 미술상 수상
                  ≪사유와 감성의 시대≫, 국립현대미술관
2003            ≪The Rivet id Moving rochl≫ 경주 아트선재 미술관
2006            ≪마음으로 보는 풍경: 이강소≫, 아시아미술관, 니스. 프랑스
2007            ≪한국현대미술전 엘리스틱 터부≫ 참가 
2008            ≪플랫폼 서울 2008≫, 아트선재센터, 서울
2011            ≪텔미 텔미: 한국-호주 현대미술 1976-2011≫, 국립현대미술관, 시드니현대미술관
2014            ≪코리안 뷰티: 두 개의 자연≫. 국립현대미술관 
2016            생테띠엔근현대미술관, 프랑스 
2018            ≪소멸≫, 갤러리 현대, 서울 
                  ≪저항과 도전의 이단아들≫, 대구현대미술관, 대구 
2019            ≪비커밍≫, 팔라조 카바토, 베니스, 이탈리아 
                  ≪세상에 눈뜨다: 아시아 미술과 사회 1960s-1990s≫, 국립현대미술관, 도쿄국립근대미술관, 국립싱가포르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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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소의 실천으로서의 노장사상에 대한 연구

조은정(미술사학자)

 

작품과 표상

개념의 현전

사유의 장소

보는 것을 아는 것

 

작품과 표상

 

이강소(李康昭, 1943- )는 회화조각설치도예사진 등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다작가 스스로 작업 형식을 규정하지 않으려는 태도하나의 작업 이후 다른 작업으로의 전환하지만 일단 시작한 작업이 궤도에 오르면 새로운 작업과 함께 지속적으로 제작하는 방식 등 공격적인 자기 세계의 확산을 일러 무엇이라 단언하기에는 걸림돌이 많다이러한 점을 간파한 이강소가 참여하였던 1975년 파리비엔날레 한국 커미셔너였던 미술평론가 이일(李逸, 1932-1997) “이강소는 흔히 말하는 ‘한 우물을 파는’ 작가는 아니다그는 기질적으로 실험의 작가요 그가 지향하는 예술은 그 어떤 정의그 어떤 기존의 방법그 어떤 반복도 거부하는 끊임없는 극복의 예술이다”라고 하였다.【주석1】특정 장르에서 활동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던 예전의 한국 미술가 중에서 이강소 만큼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활동한 작가는 그리 많지 않다.

관습에 대한 거부가 속성인 전위미술 작품이 미술시장과 만났을 때 상실될 수 있는 예술의 특수한 속성과 그의 작품은 거리가 있다미술관과 갤러리순수와 전위전통과 현대회화와 퍼포먼스평면과 입체()적 관조와 미니멀리즘 등 어느 한 곳에 경도되지도 않은 채 그의 작품은 자신의 영역을 차지하며 존재한다그의 작품은 한 작가만의 고립된 섬의 형태가 아니라 동시대 단색화실험미술전통을 계승하는 서예와 같은 영역에서 해석되고 이해된다그리하여 다양한 세계를 포괄하는 이강소 작품세계의 특성은 동시대 작가들에게는 혼란을 야기시키는 동시에 추종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본다.

등단 이후 그의 작품은 매우 빈번히 현대미술의 사건과 장소에 놓여 있었다. 1975년 파리비엔날레에서 이른바 <주막작품이 한국 전통주인 막걸리를 구하기 어려운 일을 비롯한 복합적인 요인으로 실행이 어렵게 되자 차선책으로 진행한 ‘닭의 퍼포먼스’는 이후 한국의 작가들에게 ‘새로운 미술’에 대한 단서를 제공했다필자는 《‘86행위예술제》에서 닭을 안고 들어와 전시장에 앉아 있던 젊은 작가가 요셉 보이스(Joseph Beuys, 1921-1986) 그리고 1985년 이강소 작품전에서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그렇게 이강소는 작가로서 새로움을 창안했고동시대 주변은 이를 빠르게 흡수했다그러한 자장(磁場)을 돌이켜보건대 이강소는 시시각각 변하는 예술사조에의 추종이라기보다는 동시대 미술에 대한 고민의 공유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특징이 있는 작가라고 할 것이다.

이강소의 이름을 세간에 각인시킨 작품은 <선술집>으로 지칭되는 ‘갤러리에 차린 막걸리집’이다갤러리 안에 막걸리를 파는 선술집을 열어 작가는 그저 장()을 열고 관객 스스로 작품이 되는 동시에 의미를 찾아가는 시간예술과정예술을 창안하였다이 작품이 처음 실행된 1973년에 작가가 선택한 제목은 <소멸>이었다그런데 1973년 제5회 《신체제》에 출품한 평면작품 명제 또한 <소멸>이었다갤러리 안에 설치한 탁자와 의자에 관객들이 앉았을 때 비로소 작품이 된 경우나 캔버스에 그려진 형태가 또렷이 드러난 평면작품을 똑같이 ‘소멸(消滅)’이라 칭하고 있다그는 ‘시간’과 ‘현상’ 모두에 ‘소멸’이란 개념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강소의 작품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무제>, <소멸>, <()>, <섬으로부터등 일련의 시리즈로 제작되었다그런데 ‘소멸’은 작품 제목이기도 하지만 개념어이기도 하다추상미술의 제목인 ‘무제’와도 같이 형태가 사라진 상황을 일컫기도 하고,【주석2 아무것도 남지 않은 ‘허’의 상황을 연상하게도 한다따라서 “사라져 없어짐‘이란 의미의 소멸은 아무 것도 없다는 허를 지칭하고 허는다시 무제를 또한 외따로 떨어져 시작하는 개념인 ‘섬으로부터’와 연관된다결국 소멸무제 모두 ‘빈’ 상황을 지시하고 ‘허’의 출발점인 노장사상(老莊思想)을 사유하게 한다.

 

 

개념의 현전

 

이강소가 자신의 작품을 ‘소멸’로 지칭한 것은 1973년 명동화랑 개인전에서였다팸플릿에는 “작품 주제:소멸”이라고 명시하여 작품명과는 구분하였다. 1973년 명동화랑의 전시는 당대 정점을 향한 현대미술가들의 초대전이었다명동화랑은 1972년 안국동으로 옮기자마자 당시 일본에서 평론가이자 화가로 활약하던 이우환이 전시를 했던 곳이었다윤형근(1928-2007), 박서보(朴栖甫, 1931- ) 등의 개인전이 1973년 봄에서부터 가을까지 잇달았고, 30세의 작가 이강소의 전시는 ‘회화전’으로 소개되었지만 <선술집>을 갤러리 안에 차리는 것을 받아들인 통 큰 공간이기도 했다.【주석3

그가 팸플릿에 작품 주제를 명시한 것은 당시로서는 생경한 관객참여형 설치를 하였던 탓에 이해를 돕기 위해서였을 것이다첫 개인전 이전에 발표한 작품으로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초기 작은 1967년작  ‘무제’였고 1969년 작품은 여인의 머리카락을 상기시키는 였다[이김1] 이후 1970년대는 입체와 판화페인팅과 설치퍼포먼스 등 다양한 작업을 진전시켰으며 이때 작품의 내용을 시사하는 제목을 붙였다.

1970년 《신체제》에서 발표한 <보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기념비그리고 1971년의 <아담과 이브 이후이강소는 1971년 《AG 71 : 현실과 실현》전에 갈대를 전시장에 옮긴 <여백(Void)>을 출품하였다이 작품은 1994년 《한국의 추상미술 : 1960년대 전후의 단면전》(서남미술관)에서는 <갈대>로 표기되었다가 2018년 《이강소소멸》(갤러리현대)에서는 다시 <여백>이란 명제로 표기되었다이강소는 답답한 데서 바깥으로 나가서 자연을 느끼니 시원했고그것을 관객도 느끼라는 의미에서 갈대를 그대로 전시장으로 옮겨놓았다고 하였다.【주석4 그렇다면 ‘갈대’라는 제목이 작가의 의도에 맞는 명제일 것이다하지만 작업 의도가 그대로 해석으로 적용되는 것만은 아니다“현실을 맞부닥뜨릴 때 오는 허무감존재감세계를 보는 (작가의회색적 시각”을 의미한다고도【주석5 “박제된 자연을 통해 상실과 죽음의 이미지를 전달”하였다고도 해석되는데【주석6 ‘여백’이라는 말이 갈대에 칠한 ‘흰색’과 연관이 있음을 지나칠 수는 없다.

자주성과 전통을 중시하던 시대에 그대로 ‘갈대’를 드러내는 것보다 전통의 언어인 ‘여백’이 작품의 이해를 여는 데 훨씬 효과적인 명제였을 것은 분명하다.【주석7 그것은 또한 분주한 현대생활의 반대편을 의미하는 내용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그럼에도 당시 사회적 상황 즉 1971 12 AG가 전시를 열며 맞았던 “작품이 너무 전위적인 것은 곤란하다”는【주석8 국립현대미술관의 대관 규제에 따라 ‘순수’미술임을 드러내기 위한 당시 미술가들이 은연중에 선택한 장치 중 하나였을 가능성도 있다이강소의 이 새로운 미술은 연구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현대미술에 대한 엘리트적인 태도에 더하여 사회적인 분위기 또한 비켜갈 수 없는 위치에 있는 것이다.

이강소가 이어 참여한 AG 3회전’의 주제는 《탈관념의 세계》였다이강소는 검은 나무판에 굴비 한 두릅을 걸어놓은 작품을 <굴비>라는 명제로 출품하였다검은 나무판은 누가 보아도 관죽음을 상징하는 형상과 색채이다굴비는 바다를 헤엄치다가 잡혀 새끼줄에 줄줄이 꿰어져 그대로 말라비틀어진 형태라는 점에서 ‘미라’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다‘굴비두릅처럼 포승줄이 엮어진’ 인간들이 수시로 대중에게 보여지던 시대였다. 1972년은 동백림사건이 있었고유신헌법이 제정된 해이지만 물론 이 작품을 작가의 행동주의에 입각한 정치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는 없다다만 시대의 소산이었을 것임은 부정할 수 터인데물체로서 생명이 제시되는 굴비는 반짝이는 비늘과 검은 관짝 같은 배경과 더불어 삶과 죽음을 은유하는 작품으로 해석될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주석9 한편 반찬거리인 굴비가 근엄한 예술작품으로 제시되는 상황은 유머로도옛날 이야기 속 자린고비가 쳐다보았던 반찬처럼 전통과 일상의 옷을 입고 ‘건전하지 못한 예술’에 대한 검열을 넘어서는 위치에 이를 수도 있었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1972년 《앙데팡당》 출품작 <대나무>는 흰 페인트를 칠하여 시멘트에 고정시킨 작품이었다흰색으로 자연의 물질을 고정제시하는 것은 자연의 물질을 작품으로 가져와 캔버스화 하는 방식이다그리하여 ‘대나무’는 사군자를 그릴 때와는 역으로 빈 공간으로 존재한다그것은 달빛에 비친 그림자로서 묵죽화(墨竹畫)처럼 공간에 대나무의 존재성을 드리우는 것이다대나무는 흰색을 띠어 스스로 여백이 된다대나무의 검은 그림자인 묵죽화와는 반대로공간에 전통의 이미지로 여백을 만드는즉 수묵화의 네거티브 상황이 전개되는 것이다사진을 다루는 것이 익숙한 작가가 보여주는 상반된 색의 세계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존재를 소거함으로써 드러내는 네거티브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갈대대나무선술집과 같은 대상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존재 자체를 환기시키는 것이다은유하지 않고 상징의 세계로 들어서게 하는 방식이다대나무 24그루에서는 계절삶의 시간적 단위인 24절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보는 사람은 의식이 있고 대나무가 하얗게 박제되어 있어 생물이 움직이지 않을 때에도 그것을 보는 사람은 더욱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이지요그것은 언어적으로도 상대성을 갖고 있는 것이고....”라고【주석10 한 말에서 주목할 것은 바로 그 상대성이다네거티브와 여백은 같은 의미로흰색을 뒤집어써 박제화한 식물심지어 실제로 박제한 새에서조차 그것은 시간죽음의 거울로 작동하는 것이다물론 작가는 관객의 경험과 해석을 열어놓았다.

 

“갈대나 대나무를 보지 못하고 흰색의 명암만을 볼 수 있다든가지탱하고 있는 단순한 역학구조를 생각해 낸다거나 행위와 물질 상호간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이 작업의 설정이 단순히 인식론적 방법으로서의 장()의 역할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해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주석11

 

본다는 행위와 물질로 존재하는 작품 사이의 관계는 주체의 인식을 통해 형성된다‘본다는 것’은 대상을 인지하는 행위이며대상은 이름으로서 존재성을 드러낸다역으로 이름을 통해 대상을 사유한다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모든 낱말은 해석을 전제로 한다.【주석12 어떤 낱말은 표상에 의해 해석되고 그것은 개인의 경험에 전제된다그러므로 이강소의 선술집굴비대나무갈대는 사물을 지칭하는 이름이자 경험의 표상이다낱말이름은 기호이며 연상기제(聯想機制)를 지닌다따라서 해석은 무한할 수 없는데 이렇게 경험에 갇힌 해석을 넘어서는 것은 상상하기를 통해 가능하다바닥에 늘어놓인 뼈들의 조합을 ‘사슴’으로 지칭했을 때사유는 골격의 퍼즐을 맞추는 해부학적 세계로 진입할 것이며 ‘무제’로 이름지었을 때는 사유의 장소로 위치하게 할 것이다. 1974년 작의 사과를 벌여놓고 일정 액수를 놓고 관객이 가져가게 한 작품 <생김과 멸함> ‘사과’로 지칭하지 않음으로써 선악과라는 해석을 넘어서 오히려 사과 자체의 존재성에 닿게 하는 것도 같은 전략이다이강소의 이름짓기가 후에 ‘무제’로 수렴되거나 주제어로 함축되고 있는 것은 그의 의도가 해석보다는 ‘사유의 장소찾기’에 있음을 의미한다.

 

 

사유의 장소

 

“…나의 그림은 전통 문인화에 담겨 있는 ‘기운으로 보는 세계’인 기운생동의 요체이다서구의 미니멀 아트와 유사해 보이지만 화면을 관통하는 힘은 관념이 아닌 ‘기’라는 것이다. (중략맑은 기운이 작동될 때 그것을 캔버스 위에 풀어낼 뿐이다맑은 기운을 드러내는 것이 예술이기 때문이다좋은 상태에서 획을 그으면 신기한 무엇이 느껴진다무작위의 붓질이 바로 그러한 경지라고 할 수 있다생각해서 아는 것과 감성적인 것의 중간 단계를 알게 해준다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의 긴장된 사고라 할 수 있다. (중략던진 흙이 제 몸을 떠나 뭔가를 형성할 때 제가 모르는 것이 드러나게 마련이다바로 작가와 흙공간과 시간이 함께 작용한 존재이다모든 존재는 존재 관계가 아니라 작용 관계로만 존재한다.”【주석13

 

이강소는 작품에 담긴 사유 즉 정신성을 ‘기()’로 설명하고 있다기는 기운(氣運)을 의미하며 자신도 모르는 단계[무작위]로서 감성과 지식모르는 것과 아는 것 사이의 경계에서 탄생한 것이라는 개념어로 이해할 수 있다.

이강소의 전통 예술관인 ‘기운생동’론의 찬미는 어린 시절의 경험에 기초한다이강소는 할아버지아버지그리고 형제 남매가 모여서 현판(懸板)과 주련(柱聯)을 각()하는 시간이 많았다고 술회한다할아버지 지도 아래 글씨를 각하였다는 것은가학(家學)으로서 서예의 기초를 체득하였고글씨에 담긴 뜻과 상형문자인 한문의 형태를 일치시키는 과정을 몸으로 겪었다는 말이다또한 삐침과 비백이 소상히 드러나야 하는 현판주련을 나무판에 새김으로써 평면과 입체서예와 조각을 모두 경험하였다는 의미이다따라서 그가 말하는 기운생동은 현대에서 최고의 작품이라는 의미보다는 전통 화론(畫論)인 육법(六法)에서의 기운생동을 지칭할 가능성이 크다.

전통적인 작품의 창작원리인 기운생동의 경지는 사혁(謝赫)에 의하면 사물을 관찰하고 훌륭한 작품을 모방도 해보아 구도를 잡을 줄 알고 채색도 제대로 할 줄 알며형태를 그려낼 줄 알고모필을 자유로이 사용하여 이룩한‘모든 사물의 형태가 사라진 단계’이다사물에서 시작하여 그곳에는 형태도구도도색채도그리고 그림이라는 사실마저 사라진 경지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사군자’ 회화를 머릿속에 떠올려 보세요‘대나무’ 그림이라면 그 그림이 작가가 개인적으로 실물을 보고 자신의 감정을 넣어 그린 것일까요대나무의 특성을 잘 드러낸 화본화법에 따라 작가는 많은 그리기 훈련을 합니다바로 화법은 ‘리’요훈련은 ‘기’의 수련이 아니겠습니까‘리’와 ‘기’‘기운생동’이라는 것은 바로 유기적인 사고체계의 역사로부터 기인합니다.”【주석14

 

현상계의 모든 것은 형태의 의미가 사라지고 정신이 물화한 곳으로 비정한다이 장소로서의 회화를 이강소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중간 단계로 지칭한다이 임시의 공간은 사과가 놓인 순간이기도 하다전시장의 사과는 누군가 집어들지 않으면 바닥에서 뒹굴다가 시들어 버려질 것이고누군가 집어갔을 때조차 그것은 먹어치워 형태가 없어질 터이다이 작품을 일러 생김과 멸함 즉 생멸(生滅)이라 한 것은 그러한 삶과 죽음의 공존성을 지칭하는 것이다이 공존의 공간을 물론 이강소만의 세계로 비정할 수는 없다‘생멸’을 작품개념으로 선택한 동시대 작품을 통해 우리는 당대성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1974년 사과를 소재로 한 작품명은 이미 언급한 것처럼 <생멸>이었다그런데 1975이강소도 활발히 참여하였던 《신체제전》 전시에 출품한 백수남(白秀男, 1943-1998)의 작품명도 <생성과 소멸>이었다그런데 백수남 작품의 ‘소멸’ 부분을 “관리자인 미술회관 측에서 관중들에게 지나친 자극을 줄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철거를 감행하였다.【주석15 “사람이 태어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표현”하였다는 작품의 관 속에 마네킹을 설치한 ‘소멸’ 부분을 철거하였던 것이다이 경우 작가는 ‘생성과 소멸’이란 삶과 죽음의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그런데 이강소에게 생멸즉 생성과 소멸이란 삶과 죽음움직임과 멈춤과 같은 공존의 공간을 의미한다.

그의 회화에 많이 등장하는 형태인 오리 또한 이러한 공간을 표현하는 기호이다.【주석16 오리는 80년대 중반 과천 동물원에서 본 오리들을 표현한 것이라고 작가는 밝히고 있다.【주석17】실재하는 생물에서부터 시작하여 단순화한 형태로 등장하기까지의 과정은 목적에 따른 선택의 결과이기도 했다많은 동물 중 그가 선택한 오리는 하늘을 날기도 하고 물에서도 생활하는 조류이다물에 떠 있지만 하늘을 날 수도 있고 날고 있지만 곧 물에 앉을 수도 있는 존재로서새 을(자 하나의 획으로 표현할 수 있는 대상이다대상의 외형을 단순화하여 나타낼 수 있고물과 하늘 그리고 그 사이의 존재를 나타탤 수 있는 오리는 그에게 있어 대상의 외형이자 기운을 설명하기에 좋은 소재이었음에 틀림없다필립 다장은 물에 떠 있는 오리가 물을 드러내는 장치임을 주목하였다.【주석18 이것을 위한 저것의 ‘관계’가 이강소 회화의 소재에는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배 또한 이곳에서 저곳에 이르는 ‘중간’의 존재이다배가 비끌어져 매어있는 것은 정박이기도 하지만 곧바로 출항을 위한 장치일 수도 있다푸코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향하는 그 배 안에서만 유토피아가 가능하다고 하였다‘장소 없는 장소이자 떠다니는 공간’인【주석19 때문이다어느 곳에 정박하지 않은 공간은 보이지 않는 공간흐르는 공간이다이강소 작품 속 배는 단일한 ‘섬’과 육지의 연결 역할에서 벗어나 그 자체로 흐르는 공간이다오리가 그러한 것처럼 물을 드러내는 장치인 배는 회화 속에서현실의 공간 속에서 배가 놓이는 자리에 넘쳐 흐르는 강물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그것은 항상 유동하고 나아감으로써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는 만물 창생(萬物蒼生)의 원리를 상징한다또한 장자의 배가 된다면 ‘장자의 빈 배’가 되어 배 안에 누군가 있기에 일어나는 사건이 없는 빈 배를 의미하는 것일 게다자신이 빈 배와 같다면 아무도 맞서서 시비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텅 빈 공간이 된 배를 이강소는 표현하였다고 볼 수 있다.【주석20

『장자』 「덕충부(德充符)」에는 형벌로 발꿈치가 잘린 왕태라는 사람이 서서 가르치는 것도 앉아서 토론하는 것도 아니지만(立不敎 坐不議사람들에게 충만함을 주었다는 일화가 등장한다선 것도 앉는 것도 아닌 이 중간의 단계를 사회적으로 해석하면 불구라고 하겠지만다른 사람과의 관계라는 면에서는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신체성의 대면으로 혹은 관계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선 것과 앉은 것의 중간가르치는 것도 토론도 아닌 것의 중간을 보여준 것이다그 무엇도 아닌 것이 아니라 어디에도 속하지만 새로운 것그것을 장자의 일화 속에서 발견할 수 있고 이강소의 화면을 이 ‘중간의 것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요소에서 특징을 파악해나갈 수 있다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중심 잡기를 중용(中庸)으로 파악하고 그래서 정해진 것이 없다는 미네무라 토시아키의 지적은 적절해 보인다.【주석21

이강소의 화면이 현실이면서 동시에 현실이 아닌 것보이면서 보이지 않는 것을【주석22 추구하는 성향은 이러한 부유하는 것공존하는 속성에 의해 구현된다오리배 그리고 사슴과 같은 소재가 반복되는 것은 그것이 생명이 있는 물질이기도 하지만 물질을 구성하는 원리인 리()의 현현인 때문이다끊임없이 소재를 재현함으로써 기를 수련함으로써 이와 기를 연결하는 것이다그래서 오리를 그림 작품명이나 배가 등장하는 작품 혹은 사슴이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져가기도 하는 작품을 <무제(untitled)> 혹은 <섬으로부터(From an Island)>라고 지칭하는 것은 이들을 어떤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실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그의 작품은 생성과 소멸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공존 장소로서 그 어느 것이자 어느 것도 아닌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다신체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입체적인 도자 작품들이나 조각설치에서도 그것은 반복되고보이지 않는 공간과 보이는 표면을 드러내는 물질로서 이기(利器)와 기()를 상징한다.

그리하여 이강소에게 있어 생멸이란 물질의 존재에 관여되는 삶과 죽음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근원성그 이치를 보는 그대로 나타내는 것을 의미한다그런데 ‘생성과 소멸’을 생명의 삶과 죽음이 아닌 ‘상태’로서 기()의 원리로 설명하는 것은 장자의 세계관이다도에는 시작과 끝이 없지만 만물에는 필시 삶과 죽음이 있으며(道無終始 物有死生생성소멸과 찼다가 비는 일을 반복한다(消息盈虛 終則有始)는 『장자』 「와편(外篇)」 추수(秋水) 세상의 존재에 대한 이해이다사진작품을 꿈(Dream)으로 지칭하여 장자의 나비의 꿈 비유를 환기시시키는 것도그의 작품이 2010년대 이후 ‘허()’로 수렴되는 것도 이러한 장자의 세계관이 그의 예술관에 깊이 작용하고 있음을 확증한다.

이강소의 작품이 ‘장소’의 개념을 갖는 것은 이우환의 영향력에서 비롯된 것임이 지적되어 왔다.【주석23 자가 스스로 평면회화에서 이우환의 영향을 받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해왔다고 술회하였기 때문이다수십 년이 흘러도 수묵의 색채와 모필의 정신 그리고 장자의 관계성에 대한 관심은 결과적으로 두 작가의 유사성을 도출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한다오리지널리티를 확보하기 위하여 영향관계를 부정하는 경향 속에서 이강소의 이우환에 대한 태도는 신선하기까지 하다그러나 이는 작품이 결국 영향의 선후 관계가 아니라 관계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있는 것임을 표명한 장자의 세계관이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이것이 있음에 저것이 규정될 수 있지만 세계의 크기와 시간은 규정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 규정 또한 의미 없는 일이니 유한한 인간의 시간을 소비할 일도 아니다.

 

보는 것을 아는 것

 

이강소가 추구하는 세계의 지향점은 무엇일까필자는 작가와의 인터뷰 중에서 귀에 들어온 ‘본다는 것’에 방점을 두고자 한다이강소의 <선술집>은 탁자 건너편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는 대상은 내가 볼 수 있지만나 자신은 볼 수 없다는 자각에서 출발하였다.【주석24 나는 탁자 건너편에서 잔을 들어 올린 이의 눈동자 안에 있을 뿐이다내가 볼 수 없는 나는 과연 존재하는가상대방의 눈 속에 비친 나는 건너편 선배와 옆에 앉은 친구가 본 나는 같을 수 있을까나란 존재는 대상과의 관계에 의해 규정될 것이니 완벽한 하나의 모습을 만들어낼 수 없다누구나 만나서 교류할 수 있는 공간그 공간은 관계를 형성해주는 탁자와 의자 그리고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막걸리와 떠들썩한 대화들로 구성된다내가 나를 보지 못하고상대방을 향한 나의 목소리를 듣는다‘본다’란 것은 주체 의식의 문제로서 타자와의 관계 안에서 형성된다.

그런데 모든 것이 관계 안에서 존재할 수 있을 뿐이라는 장자의 가르침은 라캉의 거울과는 다른 구조이다타자를 규정하려면 나라는 존재가 규정되어야 하는데 순간순간 변화하는 자신을 명확히 할 재간이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이다이강소의 화면에 새와 사슴과 배 그리고 붓자국만 남은 것은우리가 볼 수 없는 기를 향한 무한한 리가 존재화했기 때문이다리로서 사물이 등장하지만 이마저 그 변화상을 반영하는 기호로 작동할 뿐이다결국 완전한 것도 확고한 것도 없이 모든 것은 흐를 뿐이다이것이 이강소의 ‘소멸’로 지칭되는 <선술집>의 의미이며, <강으로부터>, <섬으로부터그리고 <>의 의미이다이강소 작품의 제목은 사유를 열어놓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건도형태도 시각에 따라관계에 따라 다르게 규정될 것이기에 그 모든 순간 순간의 소멸이 있을 뿐이다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모든 것은 소멸한다는 사실뿐이다.

장자가 도그마에 갇히지 않도록 일의 옳고 그름이나 이름을 붙이는 일마저 경계함을 제사한 것처럼 이강소는 작품의 제목인 ‘무제’를 통하여 그 이념을 실현한다화면의 형태 또한 특정할 수 없는 것으로서 배는 투명하게 물에 그려진 형태로서 실재의 그림자이자 사유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사슴은 그 현란한 뿔로 인해 나무이자 사슴이 되기도 하고 어른거리는 그림자이자 질주하는 생명력이 되기도 한다입체 도자 작품은 퍼포먼스적인 힘을 통해 등장하는 형태로서공간에 존재하는 형태는 기의 훈련을 위한 리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1970년대 초반 소멸에서 시작한 이강소의 개념은 허로 이동하였다‘빈’ 것은 많은 것을 채울 수 있지만비어서 많은 사건에서 자유롭고 모든 것이 그 존재를 통과할 수 있다바탕이 드러나게 드로잉처럼 그려진 배는 바로 빈 배처럼 모든 것이 통과하게 하라는 장자의 가르침을 가시화한 것처럼 보인다물론 장자의 배일 수도 있고세모꼴의 추상적 기호일 수도 있다그러나 그 물체가 있어서 배경이 물로 인식되는 것은 사실이다관계 안에서 규정될 수 있는 물질을 그의 화면에서 만나는 것이다.

이강소가 보여준 작품의 다양성은 현대미술의 다양성이라는 점에서 서양미술의 세례를 인정할 수 있다중용혹은 빈 것이라는 의미에서는 장자를 기본으로 한 동양적 사상의 가시화를 그의 작품에서 맛본다수묵과 채색구상과 추상회화와 조각입체와 평면단일과 복수전통과 새로움 등 모든 상대적인 언어를 동원하는 그의 작품세계는 균형이라는 점을 넘어선 지점 어디를 향한다개념이 가시화한 동양의 글씨를 입체로 만들어내던 어린시절의 경험은 시공은 넘는 관계의 장을 열어젖히는 통로를 마련해주었다평면을 입체로뜻을 형태로개념을 신체로 나타내는 현판새기기전각하기와 같은 실천은 『장자』 「내편(內篇)」 소요유(逍遙遊)에서 시작하는 일반적인 사고의 영역을 넘어선 엄청난 물고기 곤()과 상상을 초월하는 새 붕()을 오리를 통해서도 구현할 수 있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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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기구분 근거

 

이강소 작가는 작품의 세계가 캔버스 평면회화 이외에 퍼포먼스설치드로잉판화사진입체 등 다양한 영역을 망라하고 있다게다가 그 작품은예를 들어 <선술집>의 경우 명동화랑에서의 최초 개인전 이후 여러 차례 전시되고 있으며 입체라고 할 수 있는 도자토를 이용한 조형작업도 세라믹이란 이름으로 오랜 시간 지속되고 있다이러한 작가의 작품 경향은 현대미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작가의 물음 속에서 생산되고 지속되는 것이어서 사실 사진이나 입체 그리고 회화가 다른 의미망을 갖는다고 볼 수 없다이에 작품 전개의 특성상실험미술이 주가 되는 60, 70년대 그리고 회화가 중심이 되는 80, 90년대다양한 매체를 선보이는 동시에 해외에서의 전시가 활발해진 2000년대를 각 연구자가 구분하여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연구자 3인이 연구대상 작가의 작품을 세 시기로 구분하여 연구를 진행하였다. 1960, 70년대 작품세계-이은주, 1980, 90년대 작품세계-신수경, 2000년대 이후-조은정이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이러한 연구영역 담당은 실험미술과 전위미술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 연구자의 경력회화에 대한 안목이 높은 연구자의 특징현대미술의 현장에서 활동하는 연구자의 경력 등을 감안하였다물론 작품은 종적인 시기구분에 근거할 수만은 없는데횡적인 작품의 전개도 중요하기 때문이다이에 이강소 작가의 작품을 시기별로 크게 특성을 서술하고몇몇 작품을 선정하였다작품의 선정은 작가의 작품에서 기법이나 표현 방식이 처음으로 시도되었거나작가 경력상 중요한 사건과 연루된 작품작가의 견해자문위원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선정하여 가는 방침에 근거한 것이다.

 

2. 1960-70년대

 

이강소는 1961년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하여 대구로 귀향하여 실내장식 업체를 개업하여 실내장식과 실크스크린 등을 전문적으로 익히게 되었다그는 대구에서 활동하다가 서울의 동기생들과 ‘신체제’라는 그룹을 결성하여 매달 서울에서 모임을 갖고현대미술에 관한 논의를 진행시켰다그는 이 시기 주로 ‘추상’미술을 진척시켰다당시 미술계는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 현상이 만연하였던 터라신체제는 새로운 추상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노력했다전시는 매해 두 번씩 개최했으며새로운 작업이 곧바로 전시형식으로 수용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하였다.

1960년대 후반에 이강소는 신체제 활동에 주력했는데 당시 <한국청년작가연립전등에서 탈평면을 주창하는 새로운 세대들의 실험이 활발히 전개될 시기이기도 했다. 1969년 신체제를 결성하여 제1회 《신체제전》이 열렸으며 이강소는 반추상작업인 를 출품하였다. 1960년대 후반 이강소는 신체제를 활동을 통해 기성세대와 다른 추상운동을 고민하고 있었다다양한 소그룹 활동을 시작하게 된 젊은 작가들은 이 시기 설치행위미술퍼포먼스 등의 새로운 미술양식으로 기성세대와는 거리를 두었고이 때문에 한국의 실험미술이 태동하게 되었던 것이다젊은 세대들의 설치행위예술의 움직임은 곧 한국아방가르드협회를 창설하는 분위기로 고조되었고이 시기 이강소는 다른 작가와 동일선상에서 출발하였지만 서구이론과는 또 다른 한국적 정서가 있는 작업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이강소는 <여백>이라는 작업을 《A.G전》에 최초로 출품함으로써 한국적 소재로 규정되는 작업의 시작을 알리게 되었다이어서 ‘선술집 프로젝트’‘닭의 퍼포먼스’ 등이 이어졌다. <여백>은 이강소가 사계절 봐왔던 낙동강변의 갈대를 전시장으로 옮겨 놓은 것으로작가의 일상적 경험에서 오는 순간흔적을 고착화 시킨 설치작업이다자연적인 요소를 그대로 전시장으로 옮겨내면서 이질적으로 다가오는 인공성을 통해 자신이 보았던 갈대와 관객이 볼 수 있는 갈대에 대한 다양한 반향을 연구한 작업이다. 1973년 첫 개인전으로 개최했던 <선술집 프로젝트>는 전시장을 선술집으로 구현시킨 작업으로 평론가 유준상은 이 작업을 두고 ‘프로세스 아트’라 칭했으며오늘날 이 작업은 관객의 참여로 인해 완성되는 인터렉티브 아트 속성을 띠고 있다관객이 계속해서 선술집에 드나들면서 작업의 완성을 이루는 퍼포머가 되며한 순간도 똑 같을 수 없게 없어져 버리는 공연적 속성을 작가는 ‘소멸’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설명하기도 했다지나간 것은 되돌아오지만 다른 순간으로 반복되는 개념을 퍼포먼스적 요소로 풀어냈다.

이강소가 직접 퍼포머로 출현한 낙동강 프로젝트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누드 퍼포먼스사진 등의 새로운 매체형식을 적극적으로 개진시켰다그는 새로운 매체형식 실험 뿐 아니라 <대구현대미술제>의 주요 기획 멤버로 한국화단에 다양하게 부각되는 예술현장을 고민하기도 했다이 행사는 대구뿐 아니라다양한 지역에서도 확산되어 실험미술이 한국에서 적극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환경 조성을 위해 힘쓰기도 했다.

연구대상 작가 이강소는 1970년대 활발히 전개시킨 입체설치퍼포먼스 작업으로 실험미술 연구대상 작가로 하나의 축을 굳건히 하고 있으며오늘날 실험미술 작가 뿐 아니라 추상(비구상)회화 작가로도 평가받고 있다이강소의 작업 전반에는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구축했던 ‘신체제’에 이미 다양한 매체활용에 대한 고민과 동시에 ‘한국적 전통을 실현하는 회화의 문제’에 대한 화두가 깊게 깔려 있다한국에서 집단적 경향을 띤 앵포르멜의 한 축도 아니며해프닝과 퍼포먼스 논의로 직결되는 ‘추상표현주의’ 계열의 추상에만 머무르지 않는다이강소가 그간 진척시켜왔던 판화설치페인팅조각에서 귀추해 볼 수 있듯이 ‘추상의 개념’은 곧 특정 매체형식을 대변하는 논의가 아니다.

이강소는 1950년대부터 1970년 사이 한국에 수용된 서구의 ‘추상미술 개념’의 양대 축이었던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 논의보다는 ‘한국적 추상’‘한국적 전통’에 관해 고민했다평론가 이일은 서구이론을 급격하게 수용하면서 ‘한국적 전통’을 확립해 갔던 작가군을 두고 소위 ‘70년대 작가들’이라 칭하기도 했다따라서 이강소의 작업 전반에는 표피적 형식의 추상의 질감적 표현보다는 추상이면에 작동하는 예술의 정신성순수성에 대해 지속적인 질문을 반복하고 있다.

이강소의 ‘신체제’ 시기의 출품작들을 살펴보면 화단에서 큰 전환점으로 여기고 있는 명동화랑의 <선술집소멸프로젝트와 《파리비엔날레》의 <무제 75031(닭의 퍼포먼스)> 개념과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이강소가 다양한 매체형식과 동시에 ‘한국의 전통성’을 연구할 시기가 1970년대였으며이 연구는 서구의 박제된 듯한 이론체계보다는 삶에서 오는 ‘실천적 탐색’을 작가의 절대적 감성 혹은 순수성을 내세운 ‘정신성’의 중요성을 인식한 시기이다이강소의 이러한 실험은 1970년대 초·중반에 급격히 일어났다.

이강소의 1970년대는 그의 작업 활동 시기 중 전례 없이 다양한 예술개념 뿐 아니라 매체실험이 왕성한 때이다. 1970년에 제작한 <(SEX)에 관한 독백(7일간의 흔적)> <여백(1971)>을 시작으로 그의 70년대 ‘전위를 위한 전위’적 실험은 계속됐다. <선술집소멸프로젝트, <무제 75031(닭의 퍼포먼스)>, <낙동강 이벤트(1977)>, 누드 퍼포먼스, 1977)>, 비디오아트, 1978)>등 설치비디오퍼포먼스이벤트 등의 다양한 장르를 탐색한 시기로추상적 ‘정신세계’로만 표류될 수 있었던 이론의 정황들을 무엇보다 작가의 ‘신체’를 매개삼아 작업을 구축해 갔다이때 ‘실제 장소와 공간’은 곧 캔버스 화면이었으며작가가 현재까지 사용하는 붓을 대체하는 것은 이강소 자신의 ‘신체’였다따라서 그의 1970년대 작업은 해프닝한국적 상황의 이벤트 논의퍼포먼스설치 등 다양한 현대미술이론과 병치시켜 연구되어야 한다.

이강소는 1973 <선술집소멸>프로젝트가 완결되고 그 다음해에 《한국실험작가》전에서 <14-생김과 멸함(사과1 50)>이라는 관객주도형 퍼포먼스 작업을 진행시켰다이 작업은 멍석(한국의 전통적 소재위에 사과를 쌓고사과 옆에 동전 그릇을 놓았다이는 오늘날 ‘무인자판기’ 판매방식과 일맥상통한 효과를 띠고 있는데작가가 쌓아 두면서 최초에 생긴 사과의 형태가 관객의 참여로 인해 계속 해서 다른 조형성을 가지게 된다이 작업은 <선술집소멸작업과 같이 관객의 참여에 따라 작업의 조형이 구체화 되는 인터랙티브 아트 성격을 띤다전시장을 찾는 관객이 ‘누가’인가에 따라 매일매일 다른 작업시나리오가 작성되었고이 작업은 끝내 ‘완성’은 없었다시작은 되었으나 ‘끝’이 정해져 있지 않은 ‘매뉴얼’ 장치 때문에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재현’‘반복’되어 설치되고 있다이 작업은 그냥 고착화된 설치의 되풀이보다는 계속해서 진화하는 생물처럼시간과 공간 그리고 이 작업의 참여자에 따라 계속 새로운 시나리오가 창출된다이강소는 이렇듯 1970년대 초기의 실험에서는 작가의 신체 밖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적 상황을 실험했다면그 이후에는 오늘날 퍼포먼스 아트에서 중요하게 논의되는 ‘신체’의 문제로 돌아오고 있다.

 

3. 1980-90년대

 퍼포먼스설치 작업 등을 통해 1970년대 한국 미술계에서 실험미술 작가로 잘 알려졌던 이강소는 1980년대 들어 입체와 드로잉판화회화 등 다양한 장르를 시도한다뿐만 아니라 1980년대 중반부터는 활동 반경을 미국영국프랑스 등 세계무대로 넓혔다.

 1982년 경상대학교 교수로 부임한 이강소는 1985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주립대학교 알바니 캠퍼스의 객원교수로 새로운 경험을 쌓았다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평면 작업이 시작된다하지만 작가는 1970년대 중반 판화 작업에서부터 평면 작업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작가의 말처럼 , 는 판화의 특징인 복제성을 바탕으로 하지만똑같이 찍어내는 작업으로 끝나지 않는다그는 <선술집소멸프로젝트, <무제 75031(닭의 퍼포먼스)>와 같은 일련의 작업에서처럼 복제한 화판 위에 물감으로 칠을 하거나캔버스의 올 하나를 빼내는 등 흔적을 추가하여 똑같아 보이지만 다른” 판화 작품을 제작하였다.

이러한 실험은 1980년대 들어서 더욱 가속화된다. 1980년대는 오광수의 지적처럼 판화 관계의 공모전과 대규모 기획전들이 열리고대학에서 판화수업이 본격화되는 등 판화인구가 급속히 증가하면서 판화의 개념과 방법에 대한 검증이 새롭게 제기되었던 시기였다이강소는 1980년 일본 고마이화랑(駒井画廊)에서 열린 한국판화전(미술회관, 1981.3.3.~3.16)을 시작으로韓國版畫드로잉 大展(국립현대미술관, 1980.8.19~9.4), 한국현대판화소묘 8인전(맥향화랑, 1980.12.5~12.13)에 잇달아 작품을 출품했다. 1981년에는 한국판화대전(미술회관, 1981.3.6.~3.16)에 참여한 후대구판화협회를 결성하고 삼보화랑에서 대구판화가협회설립전(1981.5.19~5.24)을 열었다그리고 1983년 4회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1983.7.27~8.15)에서 우수상을 수상하며 판화가로 이름을 알렸다같은 해 미국 샌프란시스코 월드프린트카운실에서 열린 한미판화드로잉교류전(1983.11.2~11.20)에도 참여하는 등 판화가로 행보를 이어간 이강소는 이러한 성과에 힘입어 1985맥향화랑과 삼청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에 다수의 판화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작품 81-1>을 비롯해, ‘Untitled’로 명명된 1981년에 제작한 판화들은 복제성이라는 판화의 본질적인 속성에 대한 재검토또는 반기를 든 작업이라 할 수 있다이들 작품에는 돌 혹은 바위처럼 보이는 형상이 재현되어 있다사진에서 가져온 바위 이미지를 실크스크린 기법을 사용해 종이 위에 전사하고다시 빠른 필치로 그 위에 연필 드로잉을 더해 보는 이로 하여금 판화인지사진인지드로잉인지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게 만든다이렇게 여러 개의 시각언어를 병치시켜 놓음으로써 판화에 대한 통상적인 인식을 전복시킨다그가 판화라는 매체의 속성에 이렇게 의문을 제기한 것은 똑같은 판으로 찍어 육안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모든 작품은 작업하는 순간환경매체에 따라 단 한 점도 똑같을 수 없다는 인식 때문이다.

이 무렵 이강소는 판화와 함께 드로잉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한다보통 드로잉은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이 아니라대상을 관찰하고 구상하는 준비 과정에서 행해지는 밑그림이나 습작’ 등의 부차적인 장르로 여겨져 왔다그러나 1980년대 초반 손작업이 강조되면서 그린다는 행위가 수반되는 드로잉의 기본적인 속성 중 하나인 프로세스적 성격에 많은 작가들이 주목했다드로잉의 이러한 속성은 작품의 제작과정에 의미를 부여하고작품의 구상을 낳게 한 흔적과 기록을 중시하는 이강소의 작업 방식과 잘 맞아떨어졌다이강소는 이미지의 재현을 위한 드로잉보다는 심상을 드러내거나 매체의 속성을 보여주는 데 관심이 있었다이러한 그의 관심은 작업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드로잉으로 이어졌다.

1981년 한국의 현대드로잉 전시를 위해 브루클린 미술관 큐레이터 진바로(Gene Baro)가 내한하여 선정한 작가 속에 이강소가 포함되었던 것도 드로잉의 이러한 속성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진바로가 기획한 KOREA DRAWING NOW(뉴욕브루클린미술관, 1981.6.27~9.7)에 이강소는 을 출품했다화면 가운데를 가는 선으로 분할하고상단에는 사선으로 여러 개의 선을 겹쳐 진하게 그리고그 옆에는 좀더 짧은 선으로아래쪽에는 낙서처럼 흐릿한 몇 개의 선을 그려놓은 에는 연필의 흔적만 있을 뿐어떠한 형상도 재현되어 있지 않다색칠하듯 그은 진하고 흐린 선이 전부다진바로가 전시 서문에서 현대 한국의 드로잉은 그들의 주된 표현형식의 수단으로 명도(明度)의 미묘한 섬세함을 파헤치는 전통미술로부터 중요한 영향을 받고 있다짙은 검정에서 투명한 회색에 이르기까지 먹물의 다양한 농도는 한국 전통미술의 핵심이라고 진단한 것은 아마도 이강소와 같은 작가들의 드로잉에서 받은 인상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이강소는 이 전시가 열리기 전에도 韓國版畫드로잉大展드로잉 81(국립현대미술관, 1981.4.2.~4.15)에서 종전의 관념에서 벗어나 미술에 내재하는 본질적인 문제의 탐색과 고민을 드로잉을 통해서 보여준 바 있다. 은 수묵화를 연상시키는 먹선의 농담 변화와 길고 짧은 몇 개의 선과 점으로 이루어져 재현을 위한 밑그림 정도로 생각해온 드로잉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이러한 작업방식은 1970년대 시도했던 퍼포먼스나 설치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다뿐만 아니라 1980년대 들어 개최된 판화나 드로잉 전시를 통해 제기된 회화에 대한 또 하나의 검증의 방법과도 연계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초반 이강소는 이러한 평면 작업 외에도 점토를 반죽하여 메주처럼 빚은 후 떡처럼 썰거나 쌓아서 일정한 형태를 만드는 입체 조형물도 시도했다. 1983년 6월 10일부터 15일까지 수화랑에 전시되었던 조소들은 손에 의한’ 작업이라는 점에서 앞서 본 판화나 드로잉을 연상시킨다이강소는 자신이 입체 작업을 하게 된 동기를 조각이란 걸 어떤 형태를 만든다는 개념으로만 이해하는 걸 보고 답답함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김수현작가와의 대담-오랜만에 만난 '사기꾼'월간미술, 1989. 7.).” 그래서 전통적인 조각의 방법으로 다른 개념의 작업을 해보자는 데 착안해서 흙을 주물러 보기도 하고 던져보기도 하면서굳이 형태를 만들지 않는 조각 작업도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찰흙을 무심히 던져서 형상을 만드는 행위는 무심히 그어 내린 듯한 붓질로 이루어진 회화와 함께 이강소 작품 세계의 또 다른 한 축을 형성하며 지금까지도 지속해 오고 있다다만 1980년대 초반 작품들이 블록을 쌓듯 일정한 형태를 이루었던 것과 달리반복적으로 점토를 던지거나 쌓으면서 후반으로 갈수록 불규칙적으로 주저앉는 우연의 효과를 이용하여 더 세련되고유기적인 형태로 만들고 있다는 점이 차이일 뿐이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로잘리 김(Rosalie Kim, Victoria&Albert Museum 한국관 큐레이터)이 지적한대로세라믹 작업이지만 퍼포먼스의 형태를 구사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퍼포먼스 기록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즉 퍼포먼스를 하기 위해서 사전에 꼼꼼하게 준비하듯이이강소는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흙을 준비하고그것을 잘 섞은 후 메주처럼 빚어서 쌓거나 던지는 한 순간의 과정을 작품으로 남긴다퍼포먼스가 보통 사진으로 과정을 남기는 데 비해세라믹은 입체 형태의 결과물로 남는다는 점에서 이 강소의 조소 작품들은 퍼포먼스의 또 다른 기록 방식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형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점토를 던져서 거기서 만들어진’ 형태를 작품화 하듯이, 1980년대 중반 이강소는 캔버스에도 비슷한 작업 방식을 시도했다. 1985년 7월 5일부터 7월 11일까지 두손갤러리에서 열린 이강소 개인전에는 격렬한 붓터치와 초록파랑붉은색으로 이루어진 작품들이 새롭게 선을 보였다. 부터 까지 일련번호로 이어지는 작품들은 사물의 재현보다는 손의 감각제스처에 의한 촉각적인 요소가 강하게 드러난다이러한 제스처는 판화나 드로잉조소에서도 볼 수 있었던 요소이다그러나 색채가 추가되고일정한 방향으로 가한 거친 터치들이 모여 이 시기 작품들은 근대적인 풍경화를 연상시킨다이강소는 이때의 작품에 대해 내가 마음대로 칠하면 어떻게 될까색깔도 칠하고 마음대로 해보자어릴 때부터 풍경화를 많이 그려서인지 결과적으로 수평선지평선 같은 풍경화가 되더라고요내가 그런 광경을 염두에 두고 그린 것이 아니라 그냥 찍고칠하고 했더니 결과적으로 이런 식으로 된 거예요.”라고 설명하고 있다.

작가의 의도와 달리 초록색이나 붉은 색이 자연을 재현한 것처럼 보이자 색채가 보는 사람의 사고를 제한한다고 판단해 색채를 줄이게 되었다는 것이다색채를 배제하면 자유로운 연상 작용과 상상할 여지가 많아지기 마련이다색채의 소거(消去)는 수묵화와 같은 전통회화와 현대미술이 만나는 지점을 인식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이렇게 해서 198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원색이 난무하던 화면은 무채색으로 바뀌고오리와 사슴배와 같은 형상이 기호처럼 등장한다사실 1986년까지만 하더라도 특별한 형상 없이 넓은 붓으로 칠한 무채색 화면에 날카로운 도구로 새기듯 그린 가늘고 구불구불한 선으로만 이루어졌다.

1988년 11월 7일부터 19일까지 인공갤러리에서 열린 이강소 개인전에는 청회색조의 화면에 배와 사슴오리와 같은 구체적인 형상이 출현하기 시작한다고대미술사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소재들과 추상표현주의를 연상시키는 역동적인 붓질은 이강소 회화의 특징으로 자리 잡으며그를 인기작가 반열에 올려놓았다특히 단순하지만 율동감 넘치는 오리는 일명 오리 작가로 불릴 정도로 이강소의 트레이드마크가 된다. 1989년 이강소는 김수현과의 인터뷰에서 오리를 그리게 된 계기를 이렇게 밝혔다.

그 그림을 어떻게 그리게 됐냐 하면언젠가 과천 동물원에 갔는데 연못이 있었어요얼음이 얼었다 풀린 연못에 오리들이 거위들하고 같이 놀고 있었어요어린애들이 모이를 주면 오리들이 모여들기도 하고따사로운 햇볕에서 옹기종기 놀고 있는 그 모양들이 굉장히 신선하게 느껴졌어요뇌리에는 오리들이 옹기종기 모여 놀고 있는 느낌그것뿐이었어요그런 것을 리듬으로 느끼면서 그린 것입니다.”

대형 캔버스 두 개를 연결한 에는 그의 말처럼 모이를 먹기 위해 모여든 오리 떼가 무리지어 있다수면 위를 유영(遊泳)하는 오리들의 모습은 각양각색이다굵고 가늘고진하고 흐린 여러 선들이 모여 화면에는 리듬감이 넘친다.

1990년대 제작한 이강소 작품을 분석해 본 결과작품이미지를 확보한 총 602점 중에서 오리를 그린 작품이 381점이나 될 정도로 그의 회화에서 오리는 큰 비중을 차지한다이강소 작품의 단골소재인 이 오리는 잔잔한 호수에 유유자적하게 노는 모습이 있는가 하면. 과 같은 작품에서는 오리 떼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내기도 한다오리를 암시하는 긴 목을 거칠고 빠른 선으로 묘사하고오리 사이의 수면은 넓은 붓으로 터치를 구사해 물살을 가르며 오리 떼가 어디론가 꽥꽥거리며 가고 있는 것 같은 환청까지 불러온다이와 달리 에서는 짧은 몇 개의 선으로 대충 윤곽만 묘사해 오리의 형상이 어렴풋하게 보인다대체로 화면을 가득 채우던 오리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처럼 단독으로 등장하기도 하고오리인지 배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일필휘지로 그려 추상화된 형태도 있다안개로 가득한 수면 위에 작은 오리 한 마리를 그려 적막감을 고조시키는가 하면물감을 흩뿌리거나 흘러내리게 해 격정적인 화면을 연출하기도 한다오리를 묘사한 선 또한 서체를 시험하듯 두터운 모필부터 펜으로 그린 것처럼 날렵하고 재빠른 선까지 다양하다.

1990년대까지 이강소 회화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는 오리 외에도 사슴과 배가 있다연구팀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1980년대 작품 중 배를 소재로 한 그림은 12오리는 11사슴이 4점 있었다. 1990년대 들어서서는 회화가 중심을 이루면서 작품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602점 중 평면 작업이 567점인데그중 오리가 등장하는 작품이 381배를 소재로 한 그림 50사슴을 그린 작품이 60점이다.

흥미로운 것은 소재에 따라 화면 구성과 묘사 방법도 달라진다는 점이다보통 오리는 한 화면에 여러 마리를 가득 그린 데 비해배는 풍랑을 만난 듯 거친 파도 위에 수평혹은 사선으로 놓인 한 척만 등장한다. 1980년대 그린 배가 난파선처럼 비스듬히 놓여있어 불안감을 조성한다면, 1990년대 들어서면 와 같은 작품에서는 중천에 하얀 구름이 떠있고그 아래에 빈 배 한 척이 떠있어 고즈넉한 느낌을 준다사슴은 보통 한 화면에 암수 한 쌍으로 등장하는데뒷모습과 측면으로 배치하거나 두 마리를 겹쳐서 그렸다그러다 1990년대 중반으로 가면 한 화면에 서너 마리씩 그리기도 한다그런데 사슴을 묘사할 때는 물감이 채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날렵한 선으로 드로잉 하듯이 그렸다붓보다는 목탄이나 연필 같은 도구를 이용해 스케치하듯 윤곽선으로만 사슴을 묘사해 즉흥적인 느낌이 강하다이렇게 이강소는 대상에 따라 묘사 방법과 화면구성을 달리하며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임영방은 이강소 작품을 일러 애써 그리거나 꾸미려 하지 않는 그 자유로운 작업방식이 동양적 미덕을 떠올리게 한다.”고 했듯이 무작위적이면서 동양적 시정이 느껴지는 세계는 이강소 회화의 또 다른 매력이다특히 수묵화를 연상시키는 색감과 분위기는 88올림픽이 한몫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88올림픽을 계기로 작가들은 세계미술 속에서 한국현대미술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고한국작가로서 정체성을 모색하면서 가장 먼저 맞닥뜨린 문제가 바로 전통의 현대화였기 때문이다이강소가 이러한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미국에서의 경험은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1990년 5월 12일부터 24일까지 서울 샘화랑에서 이강소·호리 코사이전이 열렸다그리고 같은 날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미국의 뉴욕 헤나켄트 갤러리에서는 이강소 개인전이 열렸다. 1990년 10월 22일본의 도쿄화랑(東京畵廊)에서 개인전을 개최한 후 이강소는 뉴욕으로 건너가 1991년 트라이앵글 아티스트 워크숍에 참여한다이어 1991년부터 1992까지 문예진흥원의 지원을 받아 뉴욕 현대미술연구소(P.S 1)의 국제 스튜디오 아티스트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다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국제 레지던시프로그램에 참여한 이강소는 낮에는 퀸즈(Queens)에 있는 P.S1 미술관 작업실에서저녁에는 소호(Soho)에 마련한 작업실에서 밤늦도록 작업에만 매달렸다쉬지 않고 작품을 제작한 결과그의 작업실에는 상당히 많은 작품들이 쌓였다이강소는 1992년 P.S.1 미술관에서 열린 ’92 국제스튜디오 아티스트 전-다양성과의 만남전에 이 작품들의 일부를 출품했다.

또 1992년 4월 8일부터 6월 21일까지 영국 리버풀 테이트 갤러리에서 열린 자연과의 작업(Working with Nature)-한국현대미술의 전통적 사고》 전에 윤형근ㆍ정창섭ㆍ김창렬ㆍ박서보ㆍ이우환과 함께 참여했다참가자 중 이강소는 가장 젊은 작가였지만동양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요소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화면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그의 작품은 한국적 모노크롬을 추구하는 선배 작가들과 달리 표현주의적인 요소가 강했다그러나 서양의 추상표현주의와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동양적인 필획에 형상이 들어있고정적인 선배 작가들과 달리 에너지 넘치는 화면으로 눈길을 끌었다.

1992년 리버풀에서 전시가 열리고 있던 5뉴욕의 헤나-켄트 갤러리에서는 이강소 개인전이 열렸다그리고 자연과의 작업(Working with Nature)》 전시가 끝난 바로 그 다음날인 6월 22런던의 바비칸 센터 콘커즈 갤러리(BARBICAN CENTRE CONCOURSE GALLERY)에서 극동으로부터의 흐름한국 현대미술의 양상(Flow from the far East: Aspects of Modern Korean Art)전이 열렸다이어서 같은 해 11월 14일부터는 런던의 사라마 카로 갤러리(Salama-Caro Gallery)에서 개인전(Lee Kang-So)을 개최했다.

1990년대 초반 이강소는 일본미국그리고 영국에서 잇달아 전시를 하면서 한국 미술의 전통적 요소와 현대미술을 접목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이런 노력의 결과테이터 갤러리의 큐레이터 루이스 빅스(Lewis Biggs)는 이강소의 회화들은 유화로 되어 있지만 그것들은 마치 전통적인 수묵화인 양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다또 그가 의식적으로 현대적’ 형식과 전통적’ 형식 사이에서 작업하려고 했다.”고 설명했다미국의 비평가 윌리엄 짐머(William Zimmer)는 작가의 화폭에 담겨진 오리들은 빠르고 원초적인 붓놀림으로 다져지는 서예의 전통과 직결된다.”고 했으며데이빗 비어든(David Bourdon)는 이강소는 한국의 전통과 서양의 전통을 종합하려고 시도한다그는 추상과 구상을 뒤섞고 미니멀리즘과 표현주의를 혼용시키는 데서시적이고 자연에 근거한 아시아 미술의 특성을 언제나 함유하고 있다고 평했다.

1993년 이강소는 작업에 전념하기 위해 경상대학교 교수직을 사임하고 전업작가로 나섰다미국에서 활동을 이어가면서 동양의 서체와 같은 굵은 터치흑백 대조가 강한 석판화를 시도했다또 인물 사진 위에 거친 붓질을 더한 작업 등 평면 작업 안에서도 다양한 변주를 보였다. 1990년대 중반 이강소는 주로 박여숙 화랑조현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고국제 아트페어의 전속작가로도 참여했다. 1990년대 중반 전시에는 회화뿐만 아니라 석판화그리고 석고(plaster)를 이용한 입체 작업도 선을 보였다. 1980년대 작품보다 규모가 커진 석고 조각들은 다시 브론즈로 만들어 설치 작품처럼 전시장에 놓이곤 했다.

한편 석판화에서 보이기 시작한 변화는 1996년 들어서 회화에서도 조짐을 보였다그 변화의 양상은 서체적(書體的()’, 즉 어떤 대상을 묘사하기 위한 필촉이 아니라 필선 그 자체의 강조로 나타났다또한 바탕을 칠한 붓질이 다 드러날 정도로 거칠었던 이전의 화면과 달리터치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 차분한 화면으로 바뀐다정제된 바탕 위에 산맥 같기도 하고폭우가 쏟아지는 것 같기도 한 몇 개의 필획과 집 한 채오리 한두 마리로 화면이 한층 간결해진다이러한 변화를 공식적으로 보여준 전시가 1997년 9월 25일부터 10월 10일까지 노화랑에서 열린 이강소 개인전섬에서 From an Isand이다. ‘Untitled’ 뒤에 제작년도와 함께 시리즈 순번을 붙였던 1996년까지의 작품 제목들과 달리 이 전시에는 ‘From an Island’라는 명제를 붙인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섬에서라는 낭만적인 제목이 붙은 이 시리즈는 구성이 매우 단촐하다.

를 보면 바탕칠의 미묘한 음영과 화면 한쪽 귀퉁이에 그린 작은 집산세를 표현한 것 같은 이어질 듯 말 듯 한 몇 개의 선묘가 전부다멀리서 보면 전통 산수화처럼 산과 강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지만가까이에서 화면을 응시하다 보면 극도로 절제된 화면과 뿌연 안개에 휩싸인 수면이 무한한 사유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섬에서(From an Island)’ 시리즈에는 제목처럼 소라와 수초 같은 소재가 새롭게 등장한다또 <섬에서-97117>와  같은 작품은 동양화의 부벽준 같이 거칠고 진한 터치로 파도가 바위에 부서지는 풍경을 묘사한 서정적인 작품도 있다.

섬에서’ 시리즈가 간결한 구성으로 명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면, 1999년 시작된 강에서(From A River)‘ 시리즈는 특유의 대담하고 힘찬 붓놀림시원스런 화면구성에서 폭발할 것 같은 에너지가 느껴진다중국 장강(長江揚子江)을 여행하면서 느낀 감정을 화폭에 옮겼다고 하는 강에서‘ 시리즈는 유화임에도 마치 먹색의 다양함을 표현한 것 같은검은 색의 다양한 빛깔과 두꺼운 붓으로 거침없이 그어 내린 선들로 박진감이 넘친다.

이강소는 오랫동안 해왔던 ‘Untitled’ 시리즈 외에도 섬에서’, ‘강에서’ 시리즈를 제작하며 1990년대 후반에도 국내외의 숱한 전시회에 참여했다. 1999년 12월 8일부터 2000년 2월 27일까지는 프랑스 니스의 갤러리 포쉐트(Galerie des Ponchettes)에서 개인전을 열어 한 세기의 마감과 새로운 세기를 프랑스에서 맞이했다이렇게 쉼 없이 변화를 시도하며 제작한 작품들을 이강소는 수많은 단체전과 개인전을 통해 발표했다. 1980년대 그가 참여한 전시가 단체전과 개인전을 합해서 80여 회(개인전 10), 1990년대는 170여 회(개인전 30)에 이른다. 1990년대만 놓고 보았을 때 1년에 평균 17적어도 한 달에 한번 이상의 전시를 했다는 통계가 나온다또 개인전은 1년에 평균 3회를 개최했으니 그가 얼마나 많은 작품을 제작하고활발하게 활동 했는지 알 수 있다.

정리해보면, 1980-90년대는 이강소 작품이 다변화되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퍼포먼스설치미술에서 보이던 실험정신을 판화드로잉회화조각 등 다양한 영역으로 이어갔을 뿐만 아니라세계미술사 속에 한국미술가의 존재감을 알리기 위해 전통과 현대미술을 접목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다또 한편으로는 이일이 프로세스의 생생한 자취”, 오광수가 그리지 않은 듯 그리고그리고 다시 지우는 작업’, 미네무라 토시아키가 중간성의 지각중용으로 지칭한 작가가 생애 전반에 걸쳐서 추구해온 그린 듯 그리지 않은 것 같은 제스처가 평면과 입체로 이어지는 일관된 흐름을 엿볼 수 있다.


 

4. 2000년 이후

 

이강소의 2000년대는 명실공히 한국의 중견작가로서 그간의 작품에 대한 재평가와 해외로의 진출이 다변화하고 있다아트페어해외 갤러리의 초대 그리고 미술관에서의 초대전 등 한국의 중견작가 중 괄목할만한 국제적인 전시를 진행하고 있다.

무엇보다 국내외적으로 한국미술시장의 판도 변화 속에서 단색화에 대한 관심부상과 함께 이강소도 단색화 작가로 분류되고전시되기 시작한 점은 두드러진 특성이다즉 아방가르드 그 중에서도 실험미술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거나 오리를 주로 그리는 화가로 인지되던 그는 한국 현대미술의 한 사조인 단색화 화가로 분류되었던 것이다한편 2010년대 이후 한국의 퍼포먼스와 같은 신체미술에 대한 관심이 고조됨에 따라 그의 퍼포먼스 작업이 재조명되며 국제적인 전시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도 특징 중 하나이다.

2000년 광주비엔날레의 일환으로 《한일현대미술의 단면》전에 그는 단색화가로 분류되어 참여하였다이후 국립현대미술관의 《단색화》전에 이르기까지 그의 흑백과 반복적인 붓질은 단색화의 특성으로 인지되었다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전시 이후 스스로 단색화가가 아님을 선언하였는데 그 본격적인 이유는 “작가의 작품을 어떤 카테고리로 분류하지 말라”는 의미라고 작가 스스로 설명하였다실지로 한국적 모노크롬의 다른 이름으로 지시되는 ‘단색화’가 그의 회화를 설명하는 데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그것은 끊임없는 육체적 행위의 결과로서 강조되는 수행성이 아니라 정신의 수행에 의한 일획성으로 파악한다면 그의 회화는 추상표현주의라는 맥락에 놓일 것이기 때문이다.

2000년대 들어 그는 일본미국과 프랑스영국에서의 활발한 전시를 통해 국제적인 작가로 부상하여 갔다그것은 아마도 파리와 뉴욕에서의 경험과 노력이 결실을 맺는 과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미국에서의 전시는 뉴욕을 중심으로 헤나켄트갤러리와 WhiteBox, Bergen과학예술박물관코리아갤러리 등에서 이루어졌다특히 사진세라믹평면판화 등 다양한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는, 90년대 이후 지속적인 개인전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2001 11한원미술관에서 열린 《한국현대미술 다시읽기Ⅱ : 6,70년대 미술운동의 비평적 재조명》은 그의 작업이 미술사적인 평가를 받은 전시였다그의 작품제작의 특징은 새로운 재료와 방식의 탐닉이 일찍이 이루어진 탓에 간헐적이면서도 지속적으로 재료와 개념의 작업을 한다는 것이다이를테면 사진세라믹퍼포먼스설치 등이 그러한 범주에 들 것이다. 2006년 니스 아시아미술관에서의 《마음으로 보는 풍경》은 사진 전시로서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여러 지역을 작가만의 시선에서 보여준 작품으로 새롭게 조명되었다그의 사진은 대상을 묘사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다르게 볼 수 있는 자원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도조흙을 던지거나 눌러서 작가의 에너지가 형태를 규정하는 이른바 세라믹은 이화익갤러리 전시를 통해서는 ‘도자’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이 시기 그의 회화는 오리그림 작가라는 타이틀을 넘어서 회화 저편의 회화 즉 동양적 이상향이 서구적 평면구조에서 구현되는 것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이는 추상화의 서구적 이해가 동양 중심의 사고로 전향된 점도 있겠지만 그의 회화가 이해되는 지표를 찾은 것이기도 했다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선 지점에 사유의 공간이 펼쳐진 것이다.

현대갤러리와 갤러리 퍼플에서 진행된 《이강소 1989-2009》에 이르러 화력 40년 동안 20년간의 주요시기별 작품들을 소개하였다회화설치도조사진영상을 아우르는 대규모 회고전은 92 Tate Gallery, 93 Bergen Museum of Art and Science에 출품됐던 주요 작품들“을 국내에 소개함으로써 국제적 성과를 과시하는 전시이기도 했다‘분황사’를 주제로 설치를 선보여 끊임없이 확산집중하는 작가적 특성을 지속하였음은 물론이다.

중견을 넘어선 2010년대 활동 중 가장 성과는 2015년 우손갤러리에서의 전시가 2016년에 (Musée dArt moderne et Contemporain de Saint-Etienne Métropole, Saint-Etienne, France)에서 다시 이루어지며 도록이 발간된 것이다이 전시는 작가의 화업을 스스로 정리하였을뿐만 아니라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작품과 변화 양상을 보여주는 작품이 도록으로 대거 소개되며제스처로 가득한 대형 회화 20여 점을 집중 소개되었다.

그는 ”그것은 오리로도 보이고 힘 있게 표현한 그림으로 보이지만 나는 무책임하게 그런 것들()을 집어넣고 작품을 보는 분이 나름대로 환상을 하게 되는 것"이라며 자신의 회화에 대해 소견을 밝히며 과감히 단색화가 아님을 천명하였다미술의 양식을 규정짓지 말라는 그의 요구는 외부자극에도 미세하게 반응하는 우리 몸이 바로 우주라는 생각처럼 의도하지 않은 세계그러나 실존하는되어가는 지연의 세계에 대한 설명이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2018년 작가는 갤러리현대에서 개인전을 가졌는데 이때의 작품은 이전에 AG 등에서 보였던 작품을 재현한 것들과 그것을 기록한 사진작품들이 주를 이루었고 <선술집>과 같은 프로젝트형 퍼포먼스가 지속되었다이어 2019년 베니스에서 보인 작품들은 각 시기별 대표성을 띠는 것들이지만 아시아 퍼포먼스와 설치에 대한 관심에 대한 반응으로 인상적인 퍼포먼스의 결과들이 소개되었다. 《허》《날마다 깨달음을 얻다》《소멸》과 같은 전시명은 그의 작품이 갖는 특성을 드러낸다그것은 작품을 무언가에 규정하려고 하지 않는 태도이다또한 이는 서구에서 한국을 이해하는 데에 아주 유용한 정신이라는 틀이자 형식을 가늠할 수 있는 점이기도 하다. 2000년대 이후 그의 작품을 연구함에 있어 주안을 두는 것은 먼저 개인전의 작품에서 신작회고재현을 구분하여 기록하는 점이다 70년대 작품이 대거 다시 소개되면서 재현에서의 변화에 대한 파악서술과 비교가 요구되었다또한 퍼포먼스의 재현을 지속이라는 프로젝트로 볼 것인가 현재화함으로써 새로운 작품으로 위치시킬 것인가의 논의 속에서 작품의 시대를 귀속시켜야 했다하지만 변화하지 않는 것은 그가 이러한 일련의 재현이라 일컬어질 수 있는 작품들을 늘 같은 것은 없다라는 사고 아래 진행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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